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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idasa 드래곤의 소원

2020.01.01 01:0001.01

드래곤의 소원

karidasa

마을을 벗어나 숲길로 접어드는 떠돌이 노인의 뒤를 한 무리의 아이들이 따랐다. 학교 수업을 땡땡이치고 나온 터라 무척 신이 나 있었다. 아이들은 서로 장난치고 낄낄거리면서 끈질기게 노인을 졸랐다.

“할아버지~, 드래곤 이야기 좀 해주세요!”

“아이, 제발요, 산수 공부 빼먹고 왔단 말이에요. 들키기 전에 집에 돌아가야 한다고요.”

“히잉, 어른들한테만 재밌는 얘기 해주고. 우리한테도 들려주세요~!”

노인은 귀찮은 듯이 손을 휘저으며 뒤도 안 돌아보고 걸었다. 하지만 늙은 몸으로는 아이들의 잰걸음을 당해낼 수 없었다. 얼마 뒤 노인은 나무가 듬성듬성한 공터의 바위 위에 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이때다 싶어 아이들이 포위하듯이 노인을 둘러쌌다. 

노인은 아무 말 없이 모여든 아이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반짝이는 여러 쌍의 눈빛을 본 노인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정말 듣고 싶으냐?”

아이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이 웃음인지 아닌지 알기 어려운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어차피 좀 쉬었다 가야 하니까…. 너희들 고대 문명에 대해 알지? 그 뭐시기냐, 아주 옛날에 마법으로 만든 멋진 문명이 있었다는 거. 건물은 하늘 꼭대기에 닿으려고 했고, 사람들이 마법의 수레를 타고 그 사이를 날아다니곤 했다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 얼굴 보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마법도….”

“그건 너희도 알아요. 학교에서 배웠다고요. 거긴 넘어가고 빨리 싸웠던 얘기를 해주세요.”

노인이 기분 나쁜 표정을 짓자 아이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노인은 헛기침을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드래곤이란 게 말이다, 사실은 이 고대 문명이 만든 무기야. 마법 대전이라고 들어봤겠지? 고대 문명이 두 편으로 나뉘어서 벌인 대전쟁이지. 그때 마법사들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드래곤이라는 괴물을 만들었단다. 머리는 뿔이 잔뜩 난 도마뱀 같고, 날개는 박쥐 같은데 펼치면….”

“그것도 배웠….”

한 아이가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가 다른 아이들의 눈총을 받고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이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는 드래곤이 그냥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괴물이었단다. 어렸을 적에야 겁먹었지만, 한 열두 살만 먹으면 그런 게 어디 있냐고 비웃고 그랬지.”

“아니에요. 진짜 있어요!”

결국, 참지 못한 아까 그 아이가 또 끼어들었다. 

“그래, 그래.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얘야. 내가 열세 살 때였어. 드래곤이 나타나 사람을 해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지. 여러 용사가 드래곤을 물리치러 떠났지만,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어. 그중에는 우리 아버지도 있었단다. 

그래서 나는 크면 드래곤을 찾아 죽여서 복수해야겠다고 생각했단다. 열여덟 살이 되자 나는 집을 떠나 군대에 들어갔고, 거기서 여러 가지 무술을 배웠어. 특히 활을 열심히 연마했지.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활로 눈을 맞추면 꼼짝 못 할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마침내 이백 보 밖에서 콩알 하나를 맞출 수 있는 수준이 되자 나는 드래곤을 찾아 떠났단다.

산맥 여러 개를 넘으며 몇 달 동안 드래곤을 찾아 헤맸지.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드래곤이 나타났어.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지기에 구름이 꼈나 해서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 봤는데 드래곤의 거대한 날개가 햇빛을 가리고 있지 뭐냐. 나는 활에 화살을 메기려고 했지만, 손이 떨려서 화살을 제대로 잡을 수도 없었어. 

그리고 그 눈빛이란. 화살로 맞춰도 눈알 하나 꿰뚫지 못하리라는 느낌이 번뜩 들었지. 드래곤이 날개를 한 번 휘두르자 나는 그대로 날아갔어. 활과 칼도 어디 갔는지 없어졌더라고. 간신히 고개를 들었는데, 코앞에 드래곤의 얼굴이 있었어. 난 그대로 오줌을 지렸단다.”

아이들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근데 아빠한테 들은 얘긴 다른데요. 할아버지가 드래곤하고 몇 날 몇 밤을 싸웠다면서요.”

노인은 엄숙한 눈으로 아이들을 노려보았다. 

“잘 들어라, 얘들아. 드래곤은 말이지, 인간이 범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고대의 마법 생물이라고. 그리고 사실 그 드래곤은 죽기를 바라고 있었어.”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해가 안 되지? 나도 그랬단다. 드래곤은 죽으려고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었던 거야. 너무 강해서 죽지 못했을 뿐이지. 드래곤은 내게 당장 이 자리에서 죽든지 아니면 돌아가서 자기를 죽일 수 있을 만큼 강한 무기를 가져오라고 말했어.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겠니. 난 고통 없이 한입에 삼켜지기만을 바라고 있었어. 

그때 문득 군대에서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지. 드래곤의 목구멍 속에 불길이 차오를 때 나는 매우 강력한 고대의 마법 무기가 있다고 했어. 그러자 드래곤이 흥미를 보이더구나. 

난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어. 얼마 전에 마라카 산맥 깊은 곳에서 발견됐다는 고대의 도시 이야기였지. 하지만 멀리서만 간신히 입구를 볼 수 있을 뿐 누구도 가까이 갈 수 없었다고 했어. 조금만 가까이 가도 어디선가 마법 화살이 날아와 사람을 흔적도 없이 날려버렸으니까. 

드래곤은 그곳의 위치를 물었어. 난들 아나. 그런데 잘 모른다고 하면 죽을 것 같아서 최대한 기억을 되새겨서 알려줬어. 그랬더니 드래곤은 나를 발로 집어 들더니 날아올랐어. 그리고 내가 말한 방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지. 너희들은 상상도 못 할 거다. 드래곤이 솟아오르거나 곤두박질칠 때마다 그 짓눌리거나 속이 뒤집히는 느낌을 말이야. 하늘에서 몇 번이나 토했는지 몰라.

날아가는 동안 드래곤은 내게 자기 이야기를 해주었어. 자기가 원래는 사람이었다는 거야. 군인이었다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괴물 무기를 만드는 실험에 자원해 드래곤이 되었다고 했어. 생체병기라고 했던가…. 어쨌든, 내가 ‘아직 마법이 풀리지 않은 건가요?’라고 물으니까 원래는 전쟁이 끝나면 사람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었대. 그런데 임무 중에 적에게 공격을 받아 산속으로 추락했다고 했어. 

드래곤은 생명력이 매우 강해서 죽지 않는다더군. 대지의 기운을 받아 상처를 회복하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해. 그렇게 잠들어 있다가 우연히 깨어났더니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거야. 자기가 살던 고대의 찬란한 문명이 사라지고 미개한 세상이 되었다는 거지. 어쨌든 그 꼴로는 살 수 없으니 다시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말도 새로 배우고 했대. 

하지만 전설 속의 드래곤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타났다더군. 드래곤은 어쩔 수 없이 공격하는 사람들을 물리쳐야 했고, 그러다 보니 지겨워서 차라리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단다. 문제는 이 미개한 세상의 무기로는 도무지 죽을 수 없다는 거였어. 공기가 없는 곳까지 올라갔다가 땅에 곤두박질쳐도 죽지 않고 살아났다니 뭐.

얘들아, 드래곤은 정말 빠르더구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마라카 산맥에 도착한 거야. 여기서부터는 다시 겁이 났지. 그 고대 도시 유적이 어디 있는지 모르니까. 거짓말이 들통날까 봐 가슴이 두근거렸어. 난 드래곤이 나를 먹어 버릴지 태워 죽일지 떨어뜨려 죽일지 걱정하기 시작했단다. 

그런데 쓸데없는 걱정이었어. 드래곤은 눈도 좋았어. 사람이 개미만큼 보일 정도로 높이 올라간 다음에 지상을 노려보더니 금세 찾아내고 말았어. 주변에 사람들도 있었던 터라 찾기가 쉬웠지. 왕이 고대의 마법을 찾아내려고 군대를 붙여서 학자들을 파견했던 거였어. 하지만 들어갈 방법은 없으니 거기서 시간이나 때우고 있었겠지. 왕에게는 나중에 적당히 핑계를 댈 생각이었을 거야. 하지만 드래곤을 보자마자 왕명이고 뭐고 전부 도망쳐 버렸어. 

이제 드래곤의 차례였지. 이제 목적을 달성했으니 나를 풀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라고. 그대로 나까지 든 채로 고대 도시를 향해 날았어. 나는 겁에 질려서 잔뜩 움츠렸어.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주변이 번쩍 빛나며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나더구나. 나는 죽었구나 생각했지.  하지만 드래곤이 나를 발로 붙잡고 공격을 모두 피하며 날았어.

솔직히 말하면, 나는 정신을 잃었어. 얼마나 지났으려나. 다시 깨어나 보니 드래곤과 함께 땅에 내려와 있더군. 드래곤이 이렇게 말했어. ‘됐어. 이제는 자동방어 플라스마 포가 우리를 공격하지 않을 거다. 생체인식시스템이 아직 유효하군.’ 무슨 소린지 알 수 있겠니? 나도 아직 잘 모른단다. 

하지만 드래곤의 기분이 바뀐 건 알 수 있었어. 내가 ‘여기에 죽으러 온 게 아니었나요?’라고 물었어. 그러자 드래곤이 대답했지. ‘처음에는 그랬다. 하지만 잘하면 여기 있는 장비를 이용해 원래 내 몸을 다시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지! 그나저나 그렇게 하려면 과학자가 있어야 할 텐데….’

과학자가 뭔지는 몰랐지만, 드래곤이 나를 쳐다보기에 내가 얼른 말했어. ‘저, 저요? 저는 마법을 부릴 줄 모릅니다. 고대 언어에 대한 지식도 전혀 없는걸요.’

드래곤이 물었어. ‘그래? 그러면 그런 건 누가 알지?’

내가 대답했어. ‘하, 학자들이요. 아까 드래곤님이 쫓아 보낸 사람들 속에 있었어요. 무기를 들지 않고, 몸이 허약해 보이는 사람들 말입니다.’

드래곤은 대뜸 하늘로 날아올랐어. 순식간에 드래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나는 도망가야 한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발걸음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단다. 사실 그렇게 깊은 산속에서 도망쳐봤자 곰의 밥이 되고 말았을 거야. 게다가 내가 마음을 정하기도 전에 드래곤이 학자로 보이는 사람 대여섯 명을 잡아 왔지 뭐냐. 다들 나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어.

학자들이 깨어나기를 기다렸다가 드래곤이 지금까지의 사연을 모두 설명했어. 그리고 이곳에 있는 고대의 문헌을 연구해서 자기를 되돌려 달라고 부탁하더군. 그냥 불태워버리겠다고 위협해도 됐을 텐데 부탁을 했어. 그나저나 학자들도 참 신기해. 오히려 드래곤에게 고마워하는 눈치인 거야. 옛날 책을 연구할 수 있어서 신이 난 것 같았어.

그렇게 해서 우리는 그곳에 머물며 마법을 연구했단다. 정확히는 학자들이 연구를 했고, 나는 뭐, 잡일을 했어. 드래곤이 사슴이나 멧돼지를 잡아 오면 가죽을 벗기고 요리하는 게 내 일이었지. 어차피 학자들은 그런 쪽으로 쓸모가 없으니까. 

그런데 한참 지나자 학자들이 드래곤에게 말했어. 이곳에 있는 책이 워낙 많아서 자기들만으로는 어려울 것 같다는 거야. 그때 학자들은 황홀한 표정이었어. 세상의 근원을 밝힐 수 있다나 뭐라나. 다만 시간도 오래 걸려서 언제 연구가 끝날지 모르겠대. 

그래서 드래곤이 도시로 날아가 비슷하게 생긴 학자들은 더 잡아다 주었어. 어휴, 난리가 났지. 학자를 찾는답시고 왕성을 완전히 헤집어 놓았던 거야. 너희들은 태어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그 뒤로 토벌대가 몇 번 왔는데, 전부 근처에도 못 오고 쫓겨났지. 

어쨌든 난 이목을 끌어서 좋을 게 없으니 은밀하게 데려와야 한다고 말했어. 그다음부터는 숲이나 한적한 들판을 노려서 납치해 오더군. 

억지로 잡혀 오기는 했지만, 고대 마법을 연구하기 시작한 학자들은 십중팔구 모두 여기에 빠져들었어. 여기에 세상의 비밀이 있다면서. 세상의 근본 물질부터 물체가 땅에 떨어지는 이유, 태양이 빛나는 이유, 사람이 늙고 병들어 죽는 이유 등등. 뭐, 학자들 말만 들으면 신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어.”

그때 아이들이 서로 눈치를 보더니 한 아이가 말했다. 

“저어, 근데 이야기가 좀 이상해요. 드래곤하고 싸운 얘기가 아니에요? 

노인이 팔을 휘저으며 말을 막았다.

“기다려 봐라. 이제 거의 끝이야. 문제는 시간이었단다. 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거기 있는 마법책을 해독하고 이해하는 데 수백 년이 걸릴 수도 있다는 거야. 사실 드래곤은 상관없었어. 수백 년 정도는 우습게 살 수 있으니까. 학자들이 문제였지.

드래곤이 생각에 잠기더니 한 가지 방법을 말했어. 대대로 이어서 연구하면 되겠다는 거야. 지금 연구하는 학자들이 죽으면, 젊은 학자들이 뒤를 잇고, 더 젊은 학자들이 또 뒤를 잇고…. 계속 그러다 보면 언젠가 고대의 마법을 되살릴 수 있다는 이야기란다. 다시 이 땅에 마법사를…. 마법사가 고대어로 뭐라고 했더라. 조금 전에 말했던 것 같은데, 또 잊었군. 나이를 먹으니 영….”

“과, 과학자요?”

아이들 몇 명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노인이 껄껄 웃었다. 

“그래. 맞다. 너희들 참 똑똑하구나. 여하튼, 요점은 영리한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어렸을 때부터 가르치겠다는 거란다.”

아이들은 머뭇거리며 말없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불길한 느낌이 눈빛에 어른거렸다. 

노인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역시 공부는 어렸을 때 해야 하지 않겠니?”

몇몇 눈치 빠른 아이들이 벌떡 일어나 도망치려 했다.

그 순간 거센 바람이 불며 어두운 그림자가 사방을 덮었다.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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