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pilza2 허약 드래곤

2022.12.01 00:0012.01

허약 드래곤

pilza2


허약한 드래곤은 울부짖지 않는다.

무릇 드래곤이라면 크롸롸롸 하고 세상이 들썩이도록 크게 포효하고 싶기 마련이다. 이 녀석도 갓 태어난 해츨링 때는 철없이 입을 크게 벌리고 힘껏 울었다. 그러다 낮잠에서 깨어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오소리에게 꿀밤을 한 대 맞은 후로는 좀처럼 울지 않게 되었다.

드래곤의 체면이 있지, 아무리 해츨링이라도 맞고 가만히 있을 만한 겁쟁이는 없었다. 그러니까 이 녀석은 일반적이고 평범한 드래곤과 다른 예외적인 개체라고 봐야 한다. 드래곤 하면 세상이 떠올리는 거칠고 잔인한 성격의 근원을 따져보면 혼자서 살아가는 냉혹한 각자도생 습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미 드래곤은 평생에 걸쳐 다섯 개 정도의 알을 낳는다. 그중에서 네 개는 부화에 실패하거나 부화 직후 사망하고, 한 마리만이 살아남아 희귀종의 기록을 갱신해 나간다. 어미가 새끼를 돌보는 기간은 극히 짧아, 드래곤은 평생 자기 힘으로 혼자 살아야 한다. 이토록 영유아 생존율이 낮은 대신, 일단 태어나 자라면 그 천혜의 육체와 마력 덕분에 좀처럼 죽을 일은 없다. 노화 이외의 사망원인을 찾기가 어려운 법이다. 일반적인 드래곤이라면.

그런데 본래 죽었어야 할 해츨링이 기적적으로 목숨을 부지하는 경우가 생겼다. 어미는 알이 다 깨지지 않자 부화에 실패했다고 판단하고 떠나버렸기에 이 허약한 드래곤은 알껍질 안에 남은 영양분을 먹으며 겨우 살아났다.

원래 미숙아로 태어난 데다가 어미로부터 아무 지식도 배우지 못한 드래곤은 덩치도 작고 연약했다. 그렇지만 이는 종족 특유의 덩치를 계산하지 않았을 때 할 수 있는 말이다.

마치 아무리 작고 약한 곰이라도 인간보다 훨씬 크고 강하며, 제아무리 덩치가 큰 벌레라도 인간과 싸워 이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강력한 독침을 가진 말벌이라면 몰라도.

그러니 드래곤이 아무리 약하다 한들 성장하면서 커지는 덩치 자체만 봐도 오소리가 함부로 덤빌 상대가 아니었건만, 불행히도 그는 이 사실을 모른 채 자랐다. 머리 위로 작은 박쥐 한 마리가 날아가도 기겁을 하며 웅크리고 떨 정도였으니까.

육체의 허약함에서 비롯된 정신의 심약함까지 더해져, 그는 어린시절을 깊고 어두운 산 속 동굴에서 살았다. 원래 드래곤은 햇볕을 직접 쬐기를 선호하지 않는다. 드래곤은 어두운 공간 안에서 반짝이는 물체를 구경하기 좋아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불을 꺼놓은 어두운 방 안에서 모니터 불빛을 얼굴에 가득 받으며 모니터를 바라보는 히키코모리를 떠올려보라. 그들은 모니터에서 쏟아지는 형형색색의 빛을 좋아하지만, 햇볕 아래 나가 다양한 인간을 만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드래곤도 이와 같아, 그들은 주로 다시 살아날 가망이 없는 휴화산 속에 자연적으로 생겨난 동굴에 둥지를 틀고 살면서, 아주 가끔 외부로 출타하여 긁어모은 형형색색의 반짝이는 금은보화를 쌓아놓고 바라보는 취미를 즐겼다.

비록 드래곤끼리 만날 일도 좀처럼 없지만, 그들이 타자와의 교류를 꺼리거나 거부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누가 더 보물을 더 많이 모았는지, 누가 더 아름답고 화려한 보석을 가지고 있는지 경쟁하고 싶어 했으며 자신의 보물을 자랑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만나지 않고 어떻게 보물을 비교하냐고? 사실 드래곤들은 서로 빈번하게 연락을 주고받는다. 물리적 거리가 떨어져도 그들의 마법이 이를 가능케 한다.

드래곤들은 저마다 하나씩 작고 반짝이는 석판을 가지고 있다. 얼핏 손거울처럼 보이는 얇고 평평한 물건은 드래곤의 마력이 응축된, 마력을 외부로 활용할 수 있게 해주는 통로이자 도구의 역할을 한다. 마법사의 지팡이에 가까운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태어난 직후부터 드래곤은 자기 주위의 반짝이는 돌을 본능적으로 주워 모은다. 그중에서 자기 운명을 함께 할 돌을 고른다. 깎고 다듬어 평평해진 돌에 드래곤은 땅 속 깊이에서 파낸 흐르는 금속을 바른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흐르는 금속을 많은 생물과 드래곤이 마셨다가 고통스러운 죽음을 겪곤 했다. 드래곤의 높은 영유아 사망율의 큰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인내심과 주의깊은 조심성으로 반짝이는 액체 금속을 마시지 않도록 주의하며 돌에 다 바르고 나면, 드래곤은 보름달이 뜬 날 산꼭대기에 올라 달빛을 쬐게 한다. 동시에 자신의 정신을 돌에 집중시킨다. 거울처럼 반사되는 표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처음 본 순간, 드래곤은 놀라움과 기쁨과 신비로움 같은 온갖 감정이 뒤섞이며 크게 고양된다.

이때 저도 모르게 넘쳐 흐른 눈물이 표면에 떨어지고 달빛으로 액체 금속과 함께 경화(硬化)되면 그 돌은 오직 그 드래곤만의 것이 된다. 다른 누가 만져도 그저 반짝이는 돌에 불과하지만, 주인이 만지면 마력을 발현하는 마법도구로 변하는 것이다.

이 마법의 석판은 거울처럼 반짝이는 표면에 비친 풍경을 저장할 수 있다. 선명한 그림처럼 남은 풍경을 다른 드래곤의 석판에게 전송할 수 있다. 드래곤들은 석판을 통해 연결되어 만들어진 가상의 공간에서 서로 만나 저장한 풍경을 공유하고 감상을 전할 수 있다.

드래곤들은 오늘도 서로 자기가 모은 금은보화가 더 많다고, 자신의 보석이 더 아름답게 반짝인다고 자랑하기 바쁘다.

이들의 커뮤니티를 둘러보면 마치 상대의 칭찬을 받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며 자기 가치의 증명인 것처럼 필사적이었다. 사실 드래곤들에게 그 외에 삶의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고고하고 쓸쓸하게 혼자 살아가던 그들도 컬렉션을 늘리기 위해서는 기꺼이 세상 밖으로 나간다.

세상 모든 생명들에게 드래곤의 등장은 천재지변급의 큰 위협이지만, 다행히도 드래곤들은 가급적 빨리 외출을 마치고 안락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폴리모프라는 능력이 있는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적어도 현재까지 알려진 중에서는 드래곤이 인간 따위의 하등동물로 변신하여 인간 세상에서 섞여 살고 싶어하는 개체가 없다.

어쨌든 드래곤에게 약탈당하는 재산이 적은 양이 아니기에, 가끔 드래곤을 토벌하겠다고 나서는 무모한 인간 무리가 나타났다. 그들의 목적은 주로 드래곤이 모은 보물을 탐내거나, 드래곤의 뿔이나 비늘이나 살코기가 비싸고 귀한 보물 혹은 약재가 되기 때문이거나, 드래곤에게 침략당한 나라와 희생당한 피해자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드래곤을 쓰러뜨리고 얻을 명예를 탐내는 이도 있었다.

보통은 이런 이유들이 둘 이상 섞여 있기 마련이다. 드래곤 토벌을 의뢰하는 사람은 드래곤이 가진 보물을 성공한 사냥꾼의 보수로서 가져도 좋다고 말하곤 한다. 현실적으로 정말 드래곤을 쓰러뜨린 인간이 있다면, 이미 다른 누구도 그를 이길 수는 없다. 그가 보물을 가진다고 선언해도 막을 방도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차라리 처음부터 보물을 다 가져도 좋다고 허락하면 인심을 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사냥꾼에게 줄 보수가 따로 없다 해도 불만이 생길 소지를 없앨 수 있어 겸사겸사 좋다.

예외가 있다면 국왕이 명령할 경우, 드래곤의 보물은 나라의 재산이 된다.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신하라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왕국의 재산을 탐할 수는 없다. 대신 그들은 국왕이 하사하는 포상으로 만족해야 했다. 포상이 반드시 금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국왕의 자식과 결혼하여 왕족이 되거나 차기 국왕이 될 수 있기에 반드시 손해보는 일은 아니었다.

이런 현실 속에서 허약 드래곤은 성체가 될 때까지 딱히 모은 재산이 없기에 다른 드래곤의 보물을 구경하며 조심스레 칭찬의 글만 남기며 시간을 보냈다. 언젠가 자신도 저렇게 많은 보물을 깔고 엎드려 잠들 날이 오기를 꿈꾸지만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는 헛꿈일 뿐이었다.

어느 날, 허약 드래곤이 늘 그렇듯 석판을 들여다보다가 뒷발을 들어 귀 뒤를 긁고 있을 때 경사진 동굴 내벽에 뚫린 작은 구멍 틈으로 조그만 종족 몇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체 드래곤의 손톱 정도 크기를 한 그 생물은 인간이었다. 작지만 꽤 오밀조밀한 옷차림에 손에는 횃불을 들고 있었다.

열 명 정도 되는 인원이 허약 드래곤의 보금자리 내부로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잠시 자기들끼리 앵앵대더니 일제히 공격했다. 가시처럼 작고 가느다란 화살이 날아왔다. 불화살이어서 피부 위에서 불꽃이 반짝였지만 드래곤에게는 따가운 정도에 불과했다. 허약 드래곤은 귀찮게 굴지 않는 한 지나가는 벌레도 굳이 잡지 않는 심성의 소유자였지만, 인간들이 우글대며 불화살을 쏘아대자 귀찮기도 하고 꺼림칙하기에 앞발을 쑥 내밀어 발바닥으로 벽을 한 번 쓸었다. 발바닥이 조금 간지러웠고 위에 빨간 얼룩이 조금 남았을 뿐, 금방 이전처럼 조용해졌다.

사실 허약 드래곤은 몰랐지만 인간과 드래곤이 체감하는 시간의 흐름은 달랐다. 대략 드래곤이 인간의 스무 배 정도 느리다. 인간이 20초라고 느끼는 시간 동안 드래곤은 1초라고 느낀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 드래곤이 본 인간은 인간이 본 모기와 흡사하다고 보면 된다. 빠르게 움직이고 앵앵댄다. 다만 인간은 모기처럼 자유로이 날아다니지 못하며 드래곤도 마음만 먹으면 날쌔게 움직일 수 있기에, 드래곤이 마음만 먹으면 붙잡지 못할 인간은 없다. 예외가 있다면 인간이 말과 같이 더 빠른 탈것을 타고 있을 때일 텐데, 그래봤자 날개를 펄럭이면 바람에 날아갈 것이고 콧김을 뿜으면 잘 익은 훈제가 되어버릴 것이다. 굳이 힘들게 입에서 불을 쏠 필요도 없다. 인간이 백 명 이상의 군대를 이루고 덤비지 않는 이상 입으로 불을 토할 일은 없다. 화염방사는 드래곤에게도 상당한 목의 고통과 기력의 소진을 요구하는 일이라 좀체 쓰지 않는다. 튼튼한 성을 무너뜨리고 그 안의 보물을 캐내야 할 때만 이 고역을 견뎌낸다.

허약 드래곤은 육체의 허약함으로 인해 겁이 많으므로 보물을 털러 인간 세상으로 나가본 적이 없다. 어미가 알을 두고 떠나면서 남겨둔 작은 보물에 만족해야 했다. 그런데 이 인간들은 어떻게 자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허약 드래곤은 고민했지만 혼자 힘으로는 알 수 없는 의문이었다.

드래곤에게 모성이니 혈육간의 사랑이나 정이니 하는 개념을 기대해선 안 된다. 왜냐하면 알에서 태어난 개체가 자신의 경쟁자가 될 것임을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영아살해도 종종 일어나며, 이 역시 높은 영유아 사망율의 원인이다.

어미 드래곤은 최소한의 육아를 마치고 나면 그 자리를 떠나 새로운 둥지를 마련하러 떠난다. 운이 좋으면 막대한 유산을 상속할 수 있지만, 대다수 드래곤은 산란기가 왔다고 느끼면 자기 둥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산으로 이동하여 동굴 속에 알을 낳기 마련이다. 애지중지 모은 보물을 빼앗기고 싶지 않으므로.

육아의 부담이 없는 드래곤의 삶은 좀 더 자유롭고 홀가분할 것으로 보이지만, 대신 모자간의 정(情)도 기대하기 힘들다. 그들은 금방 장성한 자식이 마법 석판을 통해 자기에게 연락해올 때 무척 당황해 한다. 자식은 도전자이자 라이벌이 되어 부모보다 더 많은 보물을 쌓음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이려 하고, 부모는 자식 앞에서 자존심을 세우고 위엄을 보이기 위해 마찬가지로 보물 확보에 열을 올린다.

이렇듯 세월이 흐르며 인간 세상의 반짝이는 물건은 점점 더 많이 드래곤에게로 빨려들어갔다.

이 드래곤의 약탈 효과는 낙수효과의 반댓말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드래곤이 부자들의 재물을 빼앗아가니 그로 인한 피해는 부자에서 빈자에게까지 확산된다. 사실 낙수효과는 허구이니까 어느 쪽이든 가난한 사람이 점점 더 힘들어진다는 점에선 비슷한 점이 있다.

아주 운이 좋은 탐험대는 자연사한 드래곤의 보물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런 보물을 주위 국가에서 서로 노리느라 전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더 운이 좋아 보물을 독차지한 탐험대가 나라를 새로 세우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 주위 국가, 도적의 침입으로 오래 가진 못했지만.

조금 운이 나쁘면 가까운 곳에 사는 드래곤이 먼저 날아와 인간 몫은 없어진다. 보통 석판을 통해 주고받던 연락이 갑자기 끊기면, 특히 그 대상이 나이 많고 건강이 좋지 않은 드래곤이라면 주위에서는 그가 갈 날을 속으로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 이로 인해 고룡(故龍)의 유품을 먼저 혹은 많이 가져가려는 드래곤들의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간혹 아주 드물게 드래곤들이 모여 사회를 만들고 국가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드래곤이 있기도 하다. 그런 드래곤은 십중팔구로 자신이 그 우두머리, 즉 드래곤의 왕이 되어야 한다는 욕구에 사로잡혀 있기 마련이다. 사람 중에서 세계기록을 갱신하는 천재 스포츠선수나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천재 예술가가 출현하는 것과 흡사한 빈도로 나타나며, 드래곤의 개체수가 인간과 비교할 바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얼마나 드물지 짐작 가능하리라. 드래곤 종족 전체의 역사에서 이런 주장을 한 개체는 현재까지 한 마리밖에 없었던 걸로 알려져 있다. 예상할 수 있듯이 놀라울 만큼 주위 드래곤의 호응을 얻지 못해 드래곤 왕국 건국 시도는 좌절되었다.

허약 드래곤은 종족의 역사에서 몇 없을 정도로 섬세한 감수성과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을 갖춘 개체였다. 그는 이내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발바닥에 묻은 피를 닦으며 눈물을 흘렸다. 비록 자신의 보물을 훔치러 오긴 했지만, 그 정도로 용감한 인간을 죽이는 일이 나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드래곤이 인간을 위해 울다니, 집 안에 돌아다니는 바퀴벌레를 살려두고 공생하겠다고 여기는 사람을 찾는 것에 맞먹을 정도로 드문 일이었다.

이후로 허약 드래곤은 침입자가 나타나면 깊이 잠든 척을 하여 보물을 훔쳐 달아나도록 내버려두었다. 생존자가 하나둘 늘어나자 사람들의 경계심도 약해져 나중에는 드래곤을 그저 석상처럼 여기고 거리낌없이 동굴로 들어가 보물을 가져가게 되었다. 그러다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동굴 벽을 뚫고 통로를 뚫어서 마차를 끌고 와서 대놓고 보물을 가져가게 되었다. 안 그래도 얼마 되지도 않는 보물의 양이 바닥을 보일 정도로 줄어들자 아무리 착한 드래곤이라도 인내력의 한계를 넘어서고 말았다. 드래곤은 보물을 싣고 가는 마차가 동굴을 나가자 뒤를 쫓아갔다.

앞발로 인간이 뚫은 구멍을 긁어 단숨에 벽을 무너뜨리고 동굴 밖으로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드래곤이 쫓아오자 말들은 비명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전력으로 달아났고 말에 탄 사람들도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드래곤은 날개를 접고 네 발로 기어가며 그들 뒤를 따라가 최근 건립된 왕국에 이르렀다. 원래 마을이었지만 허약 드래곤에게서 훔쳐온 보물을 밑천으로 성을 짓고 있는 신생 왕국이었다.

허약 드래곤은 속이 텅 빈 신축 성이 마음에 들었는지 안으로 들어가 웅크리고 누웠다. 당연하지만 누구도 드래곤을 쫓아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행히 잠을 자는 시간이 길고 다른 건물을 파괴하거나 사람을 공격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아 앞다투어 도망가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머물게 되었다.

그렇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자 국왕을 포함한 국민들이 모두 광장에 모여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지 논의했다. 목숨 걸고 싸우자, 성을 버리고 도망가자, 외국의 도움을 요청하자 등 의견이 분분하자 국왕이 직접 나섰다. 왕이 자신보다 이 마을에서 더 오래 살았던 지혜로운 노인을 불러 조언을 청하자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드래곤은 자신보다 작고 약한 생물을 업신여기고 장난으로 죽이며 보물을 약탈하는 괴물이다, 그런데 이 드래곤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우리를 지켜주기 위해 온 것이다, 따라서 드래곤을 모시고 함께 살아가자.

국왕은 이 의견에 찬동했고 나서서 반대하는 사람이 없어서 결정이 났다. 드래곤을 자기네 나라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여기며 숭배하기로 했다.

이후 세월이 흘러 노인도 국왕도 세상을 떠났지만 드래곤이 나라에 끼친 피해는 없었다. 그저 성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드래곤은 며칠에 한번씩 깨어나 근처 산으로 날아가서 주린 배를 채우고 다시 돌아와 얌전히 잠을 자거나 석판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이렇게 안전함을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세월이 흐르자 드래곤을 볼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며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궁전이 동물원으로 바뀌었다. 나라는 관광수입으로 번영했고 국왕은 드래곤의 성이 된 원래 성 옆에 더 작은 성을 지어 거처로 삼는 것에 만족하며 지냈다.

몇 세대가 지나자 새로운 전설이 만들어졌다. 초대 국왕이 현자의 인도로 만난 드래곤의 수호를 받아 나라를 세웠다는 그럴싸한 건국신화가 만들어져 퍼진 것이다. 나라의 상징물도 원래는 버드나무 가지를 입에 문 사자였는데 이제는 성 아래에 웅크린 드래곤으로 바뀌었다.

허약 드래곤은 인간들이 자신을 이용해서 돈을 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어차피 드래곤은 인간의 경제 개념, 상거래 행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고생하지 않아도 인간들이 알아서 보물을 바치니까 기분이 좋았다. 자기 몸으로 감싸안을 수 있을 정도로 소량의 보물에 만족했고 나머지는 왕국에서 소유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세월이 흘러 인간 세상에 낯설고 기이한 존재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졌다. 작고 보잘것없는 인간이 혼자서 드래곤을 죽였다는 믿기 어려운 소문이었다. 그런 사람을 드래곤 슬레이어라고 불렀다.

보통 인간이 개미가 자기를 죽일까봐 겁을 먹으며 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말라리아 뇌염 모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드래곤들이 차례로 의문사를 당하고, 단 한 명의 인간이 그 원인임을 알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드래곤들은 기겁을 하여 더 산 속 깊이, 더 깊은 동굴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작은 인간은 아무리 좁은 틈이라도 비집고 들어올 수 있음을 알았다면 부질없는 도피임을 깨달았을 텐데.

드래곤들은 석판을 통해 모여 대책을 논했다.

인간만큼 갑론을박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드래곤의 성격이나 사고는 대개 엇비슷했다. 종족의 습성이 그렇고 자라온 환경이 유사한 점도 있기에. 그들은 이내 집단으로 뭉쳐야 위기에 맞설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으나, 그들 종족의 역사와 본능이 집단체제를 꺼리고 있기에 실제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시간이 걸릴 터였다.

그러나 아직 드래곤은 마음속에 여유를 품고 있었다. 인간이야 금방 늙어죽지, 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드래곤 슬레이어는 단 하나의 인간 개체를 가리키는 게 아니었다. 최초의 드래곤 슬레이어가 늙어 죽은 뒤에도 후손이 대를 이었고 숫자도 늘어나고 있었다.

사실 초대 드래곤 슬레이어는 일찍이 허약 드래곤이 사는 성을 방문한 적이 있으나, 수백 년 전부터 아무 위협도 없이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고 말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이후로 후손들도 이 나라의 드래곤은 내버려두고 다른 드래곤 토벌을 이어갔다. 드래곤 슬레이어는 드래곤의 보물을 독차지하지 않고 가능한 많은 나라, 많은 사람에게 골고루 나눠주려 노력하여 국가를 초월한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드래곤 슬레이어는 인간 자체의 능력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무기 혹은 마법이 원인일 거라는 추측이 생겼다. 드래곤들은 여전히 각자 떨어져 살았기에 이런 원인의 파악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마침내 스무 마리가 넘는 드래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종족 역사상 없었던 일이 벌어졌다. 어두운 밤, 운석이 떨어진 구덩이로 알려진 깊이 패인 널찍한 장소에 드래곤들이 날아들었다.

모인 드래곤들은 전쟁을 준비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간을 전멸시켜서 미래의 후환을 없애자는 의견이었다. 그러면 보물은 누가 만들지? 이런 의문이 들 법도 했다. 드래곤들은 땅에서 보물을 캐서 가공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가끔 그들은 금속의 광맥을 발견했으나, 이는 사람으로 치면 민물과 바닷물의 차이 정도로만 인식할 뿐이었다. 바닷물을 정수하여 식수로 쓸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바닷물이 무가치해 보이는 것과 같다.

강력한 육체와 마법을 지닌 드래곤은 석판 이외의 도구를 만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땅에 묻힌 광물을 캐서 가공하는 섬세한 기술을 가지지 못했다. 육식동물이 요리를 하지 않고 사냥감을 곧바로 뜯어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필요가 없으니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편 드래곤 슬레이어 역시 집단으로 뭉칠 필요성을 느꼈다. 그들은 모두 다른 세계에서 온 강력한 무기를 소유하고 있었고, 이를 물려받은 사람은 누구나 드래곤 슬레이어의 자격을 부여받았다.

그들은 드래곤이 뭉치고 있음을 알자 마찬가지로 모였고, 인간의 높은 사회성이 즉시 그들을 하나의 단체로 결속시켰다.

이대로 전쟁이 벌어진다면 드래곤 슬레이어의 승리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들은 질서와 전략과 협동을 할 줄 알았는데, 이 모두 드래곤에게 심각하게 결여된 습성이기 때문이다.

이 사태를 외부인의 시각으로 담담하게 지켜보던 허약 드래곤은 다가오는 동족의 파멸을 그저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인간을 죽이고 싶진 않아도 드래곤 종족이 죽는 꼴을 놔둘 수도 없었으니.

마침내 결심을 하고 오랫동안 누웠던 성 안에서 일어났다. 석판을 통해 드래곤의 집회 장소를 알아내어 곧장 그곳으로 날아갔다.

자라다 만 듯이 작고 허약한 육체를 가진 성체가 나타나자 드래곤들은 무시하거나 비웃었다. 그러나 허약 드래곤은 모두의 앞에서 담아두었던 생각을 말했다.

반짝이는 보물은 인간이 만든 것이고 자신들은 이를 빼앗아왔다. 인간을 전멸시킨다면 보물은 더 얻을 수 없다. 드래곤들은 이 말에 모두 동의했다.

이어서 드래곤 슬레이어는 강력하며 이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모른다고 말했다. 이 역시 모두 동의했다.
따라서 인간과의 전쟁은 드래곤에게 아무 이득이 없다. 이대로 아무 전략없이 덤볐다간 드래곤 슬레이어 집단에게 패배해 죽을 것이고, 어떻게 이긴다 한들 인간 세상도 큰 피해를 입을 것이고 보물은 이전만큼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전쟁은 손해밖에 남지 않는다. 그야말로 반박할 수 없는 주장이었다. 드래곤들은 단단한 자존심에 생채기가 났지만 기본적으로 영특한 존재였기에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

이에 허약 드래곤은 전쟁 대신 공생을 제안했다. 바로 그 자신이 지금 살고 있는 행복한 일상을 소개하며 모두 이 기쁨을 나누자는 제안이었다. 각 나라에 드래곤이 한 마리씩 자리잡고 앉아, 인간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외부의 위협에서 지켜주는 대신 일정량의 보물을 얻자는 것이다.

드래곤이 인간에게 피해를 입힐 경우 드래곤 슬레이어가 나타나 죽일 것이니 드래곤은 함부로 인간을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밖에 없다. 반대로 인간이 드래곤을 함부로 죽이거나 해치면 다른 나라의 드래곤들이 모여서 복수를 해줄 것이다. 물론 그때는 인간도 다른 드래곤 슬레이어들을 불러 다시 복수를 하겠지만, 이런 복수의 연쇄는 양 종족의 공멸로 이어질 것임이 분명했다.

이를 분명히 양쪽에게 인식시킬 수만 있으면 평화를 이룰 수 있다.

이런 허약 드래곤의 연설에 드래곤들은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감정적으로는 거부했다. 훨씬 작고 약한 미물이라 여긴 인간을 대등하게 대한다면 마치 그들에게 굴복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래곤 슬레이어에게 죽은 동족들은 엄연히 존재했다. 이제 인간을 미물로 여기던 시선은 거두어야 마땅했다.

현실을 인정한 드래곤들이 하나둘씩 허약 드래곤의 편에 섰다. 석판을 통해 전 세계에 있는 다른 드래곤들에게도 이 제안을 전했다.

현재 생존한 약 300마리의 드래곤 중 끝까지 반대하고 대신 깊숙이 숨기를 택한 드래곤이 스무 마리 정도밖에 남지 않자, 허약 드래곤은 자신의 나라로 돌아와 인간과 드래곤 대표의 회담을 제안했다.

다만 드래곤과 인간은 서로의 언어와 문자를 전혀 모르기에 소통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먼저 그들은 상대의 글자부터 배워야 했다.

학자들이 대를 이어 드래곤의 문자를 배웠다. 드래곤의 음성은 인간의 성대로 흉내 낼 수 없기에 대화는 불가능했다. 3대에 걸친 노력 끝에 허약 드래곤과 인간은 짧고 간단한 문장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서로 싸우지 말자.

허약 드래곤이 처음 인간에게 전달한 완전한 의사는 이와 같았다.

여기서부터 세상에서 가장 느린 대화가 시작되었고, 마침내 200년에 걸친 회담 끝에 인간과 드래곤 종족 사이의 평화협정이 이루어졌다. 이후 수백, 수천 년에 걸쳐 시로, 그림으로, 노래로, 연극으로, 문학으로, 조소로, 영화로, 게임으로, 그 외에 또 다른 새로운 예술로 수없이 거듭 창작되며 기리게 될 역사적인 순간이 탄생한 것이다.

다른 수많은 종족들에게도 기쁜 일이었다. 두려움의 대상인 드래곤이 평화를 선택했고, 인간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나서자 많은 종족들이 앞다투어 인간과의 평화를 제안했다.

숲의 종족, 늪지 종족, 바위 종족이 차례로 인간과 조약을 맺고 무역과 교류를 시작했다.

이제 어느 나라를 가든 인간 외의 다양한 종족들을 볼 수 있다. 차별과 배제가 점점 줄어들었고, 앞이 탁 트인 거대한 궁전에는 웅크리고 있는 드래곤이 감시자처럼 때론 수호자처럼 모두를 지켜보고 있다. 그 앞에는 대대로 이어진 전설의 무기를 든 드래곤 슬레이어가 약속의 징표처럼 버티고 있다. 그 누구도 감히 인간과 드래곤 연합세력에게 덤빌 수 없었다.

끝까지 인간과 교류하지 않은 채 대립을 고수하는 일부 종족은 드래곤이 버리고 간 동굴 속을 거처로 삼았다. 비록 인간과의 전쟁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인간과 단절되어 독자적으로 생존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지만.

반면 평화와 교류를 선택한 이종족들은 모두 인간의 풍부한 물자와 발달한 문명의 혜택을 받았고 자신들의 문화와 마법과 예술을 전파하여 갚았다.

드래곤이 수명을 다해 사망하면 나라 전체가 슬퍼하며 애도해주었다. 알이 부화하면 모두 축제를 열고 환영해주었다.

야생의 강한 본능을 갖고 태어난 해츨링도 인간에게 둘러싸여 교육을 받으며 자라자 점차 인간문명에 적응하여 얌전한 드래곤이 되었다. 그렇다고 늑대가 개가 되는 정도는 아니었고 삵이 고양이가 되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평화로워진 세상의 문명은 더 빨리 발전했고 식량 생산량도 늘어나면서 인구가 증가했다. 그제야 비로소 사람들은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준 존재, 최초로 인간 사회에 정착한 드래곤을 찾아내어 기념하기 시작했다.

그 드래곤이 처음 인간의 나라에 왔을 때를 기리는 날. 비록 긴 시간이 흘러서 누구도 그때가 정확하게 언제인지 알지는 못했으나, 당시의 기록을 참고해서 나라에서 특정한 날을 기념일로 정했다.

그 기념일은 드래곤이 처음으로 인간의 나라에 들어와 살던 때와, 인간과 드래곤이 처음으로 평화협정을 수립했던 때를 동시에 기념하고 있어 평화의 날이라고 불린다.

평화의 날에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종족이 일을 하지 않고 하루종일 침대든 바닥이든 둥지든 보물더미든 각자의 잠자리 위에 누워서 잠을 자는 문화가 정착되었다. 가게는 문을 닫고 일터는 텅 비었으며 물론 학교도 쉬었다. 심지어 야외에서 활동하는 사냥꾼과 행상과 모험가까지도 그 날만은 걸음을 멈추고 안락한 곳을 찾아 누웠다. 성과 국경을 불철주야 지키는 소수의 병사만이 깨어 있을 뿐, 나머지 모든 문명사회의 구성원이 마음껏 뒹굴며 게으름을 피워도 좋은 날이다. 이는 평화가 정착되었음을 과시하는 행위이기도 하며 동시에 드래곤이 늘 하는 습성을 흉내 내는 의식이기도 하다.

그리고 전설로 전해지는 허약 드래곤은 오늘날까지 다종족 사회가 번영을 누리게 해준 평화의 수호신이자 단 하나뿐인 드래곤의 왕이라고 불리고 있다.


(2022.10.23.)

댓글 2
  • No Profile
    scholasty 23.06.30 21:11 댓글

    진짜 너무 재밌어서 후루룩 읽었습니다!!!!!!

    건필하시기 바랍니다!!!!

  • No Profile
    scholasty 23.06.30 21:13 댓글

    아이고, 사이트에 들어가서 뵈니 이미 여러 작품을 쓰신 작가님이시군요. 감사히 찾아 읽겠습니다. ^^ 판타지 역사책의 한 장을 본 느낌이에요.

분류 제목 날짜
박도은 돌고래 앨리 2022.10.01
서계수 인생서점 2022.10.01
곽재식 우주선 유지 장치 특별 프로그램2 2022.10.31
박도은 입맞춤 퍼레이드 2022.11.01
서계수 그렇게 전사는 뻐꾸기를 구하고 2022.11.01
박희종 마이클 잭슨이 돌아왔다 2022.11.01
갈원경 하루의 선택 2022.11.01
아이 머리끈 2022.11.30
서계수 종막의 사사 2022.12.01
박희종 동자신과의 대결 2022.12.01
아밀 그리고 노래하기 시작했다 2022.12.01
빗물 근처의 꿈 2022.12.01
pilza2 허약 드래곤2 2022.12.01
해도연 병범 씨의 인생 계획 2022.12.01
해도연 랄로랑이안 모뉴먼트 2022.12.01
해도연 우주항로표지관리원의 어느날 30분 2022.12.01
곽재식 백투 유령여기 X2 - 자주 묻는 질문(FAQ) 2022.12.01
박희종 선택 2023.01.01
곽재식 한산북책 2023.01.01
박희종 The animal government 2023.02.01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