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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물 근처의 꿈

2022.12.01 00:0012.01

근처의 꿈

빗물

 

“꿈은 함부로 사는 게 아니야, 이것아!”

 

숟가락을 유리병에 갖다 꽂던 엄마가 소리를 꽥 질렀다. 말랑하게 출렁이는 딸기잼 방울이 테이블 위로 뚝뚝 흐른다.

 

“아, 왜. 좋은 꿈이라잖아.”

 

“팔 때는 다 좋은 꿈이라 그러지!”

 

“그럼 뭐, 안 좋은 꿈을 속여서 판다고? 당근마켓에?”

 

나는 양 손바닥을 마주치며 깔깔 웃었다.

 

“당근이고 나발이고, 나도 어릴 때부터 니 할머니한테 맨날 들은 소리가 그거여. 꿈이니 운이니 팔자니, 하여간 남의 거 함부로 줏어오면 탈 난다고.”

 

“팔자를 어떻게 사?”

 

“꿈도 파는데 팔자를 못 팔리?”

 

“아무튼, 주워온 거 아니고 돈 주고 산 건데? 점 볼 때도 복채 내면 후환 없잖아.”

 

“으이구, 미련퉁아. 얼른 가서 물러. 길몽이래도, 남의 꿈 사려다가 그놈 액운이랑 사연까지 딸려온대니께?”

 

“하이고, 그렇게 무서운 사연 있는 사람이면 따순 방에 앉아서 스마트폰으로 화살 꿈이나 팔고 있겠어?”

 

“화살 꿈?”

 

“응. 그 사람이 꿈에서 화살을 떼로 맞고 죽었대. 원래 자기가 죽는 꿈은 길몽이라며? 근데 화살이 그렇게 많이 쏟아지는 건 더, 더 좋은 꿈이래.”

 

“어메, 뭔 꿈이 그려! 찝찝혀!”

 

“찝찝할수록 좋은 꿈 아냐?”

 

“좋으나 마나, 그 꿈 판 놈은 그래 좋은 꿈이 필요가 없대?”

 

“그게 있잖아, 이 사람이 삼 년 전에도 똑같은 꿈을 꾼 적이 있대.”

 

“근디.”

 

“근데 그 사람도 그때 취준생 신분이었다는 거야. 다음날 가고 싶은 회사 최종 면접이 있어서 일찍 자리에 누웠는데, 밤새 꿈을 꿨대. 아주 높고 커다란 건물 옥상에 혼자 서 있는데, 어디서 까만 화살촉들이 빗발같이 쏟아지더래. 그런데 그때마다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는 거야. 화살이 휙, 휙 하고 머리 위로도 지나가고 어깨 옆으로도 스쳐가고 다리 사이로도 그러는데 너무너무 무서웠대. 화살 끝이 빛을 받아서 번쩍거리는 게 꼭, 독을 바른 것 같았다나.”

 

“무서라. 그런 꿈이 어찌 길몽이다냐.”

 

“들어봐. 나중에는 이 사람이 너무 겁이 나서, 눈을 질끈 감고 바닥에 엎드려서 벌벌 떤 거야. 차라리 나를 쏴라, 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사방이 고요하길래 고개를 딱, 들어보니 온 사방이 피투성이인데 화살은 멈췄고 아무리 더듬어봐도 몸에는 상처 하나 없이 결국 살아남았대.”

 

“그래서 그게 길몽이라고?”

 

“아이, 그다음이 중요하지. 그 순간 이 사람이 딱, 눈을 떴는데 자기 방 침대 위인 거지. 면접을 보러 준비하는 중에도 꿈이 이상하게 계속 생생하더래. 그렇게 여운이 남아가지고 긴장을 바짝 한 채로 면접을 보는데, 와, 압박 질문이 막 들어오는데 희한하게 그때마다 정신을 딱 붙들고 따박따박 야무지게 대답을 했다는 거 아냐.”

 

“...그러고, 붙었대?”

 

“응. 결국 최종합격 했대. 근데 며칠 전에 똑같은 꿈을 또 꿨다는 거야. 자기는 이제 그런 행운이 필요 없어서, 다른 취준생들한테 넘겨주고 싶대.”

 

“그거... 비싸게 샀냐...?”

 

“으하하, 뭐 한 동네에서 비싸게 팔았겠어? 엄마 말대로 부정 탈까 봐 복채 개념으로 좀 낸 거지. 아무튼, 그거 샀으니까 나 상반기 공채 다 씹어먹을 거야.”

 

“...그려, 다 씹어먹어라.”

 

“뭐야, 엄마 되게 웃긴다. 얘기 듣고 나더니 안 말리네?”

 

“아, 몰라.”

 

“뭘 몰라, 뭘 몰라!”

 

까르르, 웃으며 엄마의 팔뚝에 기댄 내 어깨가 딸기잼처럼 오래 출렁였다.

 

 

 

붙었다. 드디어 붙었다. 이제 나는 면접이 아닌 출근을 위해 일어나 씻고 옷을 입는다. 그래도 이름을 대면 어지간한 사람은 알만한 식품 회사였다.

 

“어메 세상에, 잘 샀구먼, 잘 샀어!”

 

최종합격 연락이 온 날, 나와 끌어안고 붕붕 뛰던 엄마가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뭘?”

 

“아, 그 뭐시당가 꿈 말여!”

 

“꿈?”

 

“겨란인가 후라인가, 거기서 샀다 안 혔냐.”

 

“계란...? ...엄마, 설마 당근에서 산 꿈 말하는 거야?”

 

“아, 그냐. 당근. 당근 상회.”

 

“아우, 엄마는 붙었다는데 무슨 꿈 얘기부터 해. 엄마 딸이 실력 있어서 붙은 거지.”

 

막상 엄마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니 어쩐지 섭섭했다. 3.5가 겨우 넘는 평점에, 다른 스펙도 어정쩡하고 그런 것 따위 아무렇지 않은 대학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다 마음 좀 편하자고 부적 사는 기분으로 재미 삼아 산 거지, 애초에 오지도 않을 복이 왔겠나. 회사에 나간 지 한 달이 되어갈 무렵, 더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그딴 꿈이 뭐 대단한 행운을 줬을 리가 없다는 걸. 일을 해보기 전에는, 마케팅 부서가 그렇게 돈 관련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렬인지 몰랐다. 주에 한 번은 회식을 하는데, 꼭 막내인 내가 부장 옆에 앉아야 했다. 선배들의 맥주잔에 소주를 졸졸 따를 때면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속에서 솟구쳤다.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선배들을 하나하나 택시에 태워 배웅하고 나자, 언제나처럼 사수와 단둘이 아스팔트 위에 덩그러니 남았다.

 

“지영씨.”

 

“네.”

 

“힘들지?”

 

“...괜찮습니다.”

 

“식품 쪽이 원래 다 좀 그래. 다들 구닥다리야. 솔직한 말로, 신입사원 연수 때부터 티 나지 않았어?”

 

선배는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티 났지? 그때 도망갔어야지. 마지막 기회인데.”

 

나도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도망 못 갔으면, 그냥 버티는 거야. ...그래도 요즘은 좀 나아진 거야. 몇 년 전만 해도 수당 다 떼어먹고 갑질 심해서 생산직 사람들 몇 개월씩 파업하고 난리였잖아. 나도 그때는 뉴스에서만 봤었는데, 입사하고 술자리에서 선배들이 그러데? 그때 윗선에서 파업한 직원들 한 명 한 명 주소지로 찾아가서 협박하고 성희롱하고 난리 치다가, 그중에 하나 자살하고 나서 그나마 싹 바뀐 거래.”

 

멍하니 선배를 올려봤다. 무서운 이야기를, 점심 메뉴 고르듯 하고 있었다.

 

“...힘내자.”

 

내 어깨를 툭툭, 치는 선배의 귀밑으로 긴 머리칼이 가벼운 바람에 흔들렸다. 택시는 아파트 입구에 섰다. 이 시간에 집 앞까지 좀 가줄 만도 하건만, 택시 기사는 이 시간에 그만큼 걷는 것도 싫어서 여자가 술 먹고 집 앞까지 데려다 달라고 하냐며 화를 냈다. 하도 호통을 쳐서 조금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 속 현금을 찾아 내밀고는 내렸다. 비틀대는 걸음을 옮겼다. 다리가, 죽을 만큼 아프고 무거웠다. 앉아서 하는 일인데도 퇴근길엔 늘 그랬다. 비척거리며 무서울 만큼 적막한 아파트 단지를 걷는데, 무언가가 날카롭게 귀를 긁었다.

 

‘사사삭.’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양, 크게 울리는 소리였다.

 

‘사사삭, 사사삭.’

 

계속되는 소리에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자, 소리가 멈췄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가슴이 쿵, 쿵 뛰었다.

 

‘그러고 보니, 고양이들 다닐 시간이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웃음은 나지 않았지만, 다시 걷기 시작했다.

 

‘사사삭. 사삭. 사삭.’

 

소리는, 더 빠르고 크게 들려왔다. 나도 몰래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다리가 떨려서 멈칫, 걸음을 그쳤다. 소리가 멎었다. 뒤를 돌아볼까,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소리가 너무 가까운 곳에 있었다. 집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울 듯한 얼굴로 걸음을 재촉했다.

 

‘사삭. 삭. 삭.’

 

소리는, 아주 급하게 나를 뒤따라 왔다. 겁에 질린 채 아파트 현관까지 달리기 시작했다.

 

‘사사삭! 삭! 삭!’

 

미친 듯이 크고 급해진 소리에, 무거운 다리를 끌고 벌벌 떨며 뛰어 순식간에 공동현관 앞에 이르렀다. 카드키를 찍고, 다급히 건물로 들어섰다. 탁, 복도 천장 위 불빛이 켜졌다. 엘리베이터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다 말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사사삭...’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등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승강기는 13층에 서 있었다.

 

‘탁.’

 

버튼을 누르러 다가가자, 현관 쪽 등이 꺼졌다. 문득 서늘한 기운이 몸을 감쌌다. 탁. 꺼졌던 현관 등이, 다시 빛을 내뿜었다.

 

 

 

그날 이후, 알 수 없는 소리는 퇴근길마다 나를 뒤쫓아왔다. 대체 누구지. 누가 쫓아오는 게 아니면 그냥 신경끄라는 친구도 있었고, 그런 촉은 틀리는 법이 없으니 조심하라는 친구도 있었다. 어떤 말도 도움은 되지 않았다. 어느 밤엔 꿈을 꿨다. 춥고 휑한 곳에 서 있었다. 바람이 거셌다.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내 그곳이 어딘지 알아차렸다. 회사 옥상이었다. 그 순간, 반들거리는 녹색 바닥 위로 무언가 날아와 꽂혔다. 화살, 화살이었다. 까맣고 긴 살 하나가 옥상 바닥에 꽂힌 채 휘청였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떨리는 고개를 하늘을 향해 들었다. 셀 수 없이 많은 화살이, 하늘 가득 까맣게 날아오고 있었다. 그것들은 아주 천천히 저 먼 하늘에서 이곳으로 내려오는 중이었다. 꿀꺽, 침을 삼켰다. 그때 누군가 내 귀에 속삭였다.

 

“같이 있자, 나랑.”

 

고개를 돌리자마자 흠칫 놀랐다. 까만 화살이 온몸에 잔뜩 박힌 사람이 피를 뚝뚝 흘리며 서 있었다.

 

“나랑 같이 있자고.”

 

피에 젖은 손이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허억, 비명을 지르며 뿌리쳤다.

 

“내가 화살도 다 맞아줬잖아, 여기 같이 있어.”

 

문득 다시 하늘을 쳐다봤다. 슬로우모션처럼 느리게 떨어지던 화살은 어느새 옥상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희뿌연 머릿속에 비상계단의 존재가 떠올랐다. 문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퍽, 나를 막아선 아까 그 사람의 어깨가 내 어깨와 부딪쳤다.

 

“아아악!”

 

뒤에서 비명이 들리거나 말거나, 출입문에 다가가 문고리를 돌리고 다급히 열어젖혔다. 계단에 첫발을 내딛음과 동시에 문을 닫는 순간, 문틈으로 길고 가느다란 옥상 풍경이 보였다. 화살이 빗발치듯 쏟아져 사람들의 몸에 박히고 있었다. 옥상 안은 어느새 사람들로, 화살에 맞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허어억!”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 나는 이불을 꼭 쥐고 숨을 골랐다. 지독한 꿈이었다. 월요일이다. 회의실 테이블 위에 과자 바구니를 세팅하며, 이 과자를 먹을 사람들을 생각했다. 문득 사수의 붉게 취한 얼굴이 떠올랐다.

 

‘한 명 한 명 주소지로 찾아가서...’

 

그때 파업한 생산직 직원들의 집에 찾아갔다는 사람 중, 이 방에 들어올 사람이 있을까. 종이컵에 든 커피를 마시며 회의를 하고, 결재를 하고, 술자리에서 막내 여직원을 옆에 앉혀 술을 따르게 시킬까. 표정 없이 그런 생각을 하고, 일을 하고, 퇴근길 버스에서 내려 집 대신 정형외과로 향했다. 역시나 다리가 묵직했다. 스타킹을 내린 다리에 젤을 바르며, 물리치료사가 말을 건넸다.

 

“오래 서서 일하시나 봐요?”

 

“...아뇨. 그냥 사무직이에요.”

 

“에고, 그런데 다리가 왜 그렇게 아프실까.”

 

“...”

 

그렇게 말하며 그는 연신 코를 킁, 킁 거렸다.

 

“저, 환자분, 그런데요...”

 

내 다리에 전기치료 장치를 붙이면서 그는 무언가를 머뭇거렸다.

 

“혹시, 장례식장 다녀오셨어요?”

 

“네?”

 

짜증스레 미간을 찌푸렸다. 뜬급없이 무슨 소리람.

 

“향냄새가 나서요...”

 

향냄새? 대답할 말이 없었다. 황당하기도, 기분이 나쁘기도 했다. 드륵, 물리치료사가 커튼을 닫고 나가자마자 베개 옆에 놓아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퇴근 후에 늘상 접속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들어갔다. 화면을 죽 내리며 자유게시판 새 글들을 확인하는데, 눈에 띄는 제목이 있었다.

 

‘얼마 전에 꿈을 팔았는데, 너무 찝찝해요...’

 

잠시 망설이다가, 글을 열어보았다.

 

‘좋은 소리 못 들을 거 알고 써봐요. 제가 몇 년 전 신입 시절에, 회사에 큰일이 있었거든요. 같이 일하던 사람들은 거의 파업에 참여했는데, 저는 안 했어요. 파업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회사는 어떻게든 일선에 사람 남겨놓으려 하고, 노조는 빠짐없이 총파업하자고 난리고... 저는 당장 엄마 병원비도 제가 대던 때였어요. 그래서, 그럴 수가 없었어요. 그때 되게 친하던 동생이 있었어요... 그런데 파업을 한다고 회사에서 걔를 엄청 괴롭혔나 봐요. 도와달라고 자꾸 저한테 연락을 하는데, 직원들이 누구랑 연락하는지 위에서도 다 아니까... 나중에는 그냥, 안 받았어요. 그러다가요, 그 동생이...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요. 유서에 회사에서 당한 일이 가득했대요. 저는, 장례식도 못 갔어요. 못 가겠더라고요. 저 나쁜 거 알아요. 욕하셔도 돼요.

 

그런데요, 이상하게... 발인 이후로 매일 똑같은 꿈을 꾸는 거예요. 나쁜 꿈은 아닌데, 맨날 같은 꿈이에요. 지긋지긋할 만큼. 찾아보니까, 길몽이래요. 그런데 저한테는 길몽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몇 달 전에 그 꿈을 친구한테 팔았어요... 6천 원에요. 분명히, 좋은 꿈은 좋은 꿈이니까요. 그런데... 아주 만약에요. 그 친구한테도 좋은 꿈이 아니면... 어쩌죠? 이제는 그게 마음에 걸려서, 잠이 안 와요...’

 

 

 

몇 번이고 반복해서 글을 읽었다. 숨이 막혀왔다. 뻣뻣히 굳은 엄지로 댓글 창을 눌렀다.

 

‘무슨 얘기를 듣고 싶어서 이런 글을 써요? 평소에 이기적이란 말 많이 듣죠? 그 동생 불쌍하다. 죽고 나서까지 인터넷에 이런 글이나 쓰는 인간을 선배라고 따랐을 텐데...’

 

‘님, 저는 별 말 안 할게요. 장례식 안 가셨다고요? 그럼 이제 동생귀신은 평생 님 뒤만 따라 다닐 거예요. 절대 안 떨어지고요. 꿈을 팔았으면, 님 친구한테도요. 님 친구인 게 죄죠, 뭐.’

 

‘그걸 또 6천원에 팔았네... 에휴. 최저시급도 안 되는 거 벌어서 어디다 쓰려고 친구한테 찝찝한 꿈을 파냐. 그만큼 죄지은 게 있으니 꿈까지 찝찝하게 느껴진 거겠지. 헐값에 팔아버릴 만큼. 자기한테 유리하게 적어도 이런데, 현실은 어땠을까?’

 

홈버튼을 꾹 눌렀다. 까맣게 변한 액정 위로, 내 얼굴이 비쳤다. 표정을 알 수 없었다. 치료를 마치고 병원 밖을 나서는데, 봄인데도 한기가 들었다. 팔짱을 끼고 덜덜 떨며 거리를 걸었다. 다리가 아주 무겁고 아팠다.

 

‘사사삭.’

 

소리를 무시하며 계속 걸었다. 아니, 무시하는 척하면서. 가게가 가득한 대로를 지나 골목에 접어들었다. 가로등만이 빛나는 어둡고 조용한 밤이었다. 무릎을 짚고 잠시 멈춰 섰다. 다리가 끊어질 듯했다. 그때, 귓가에 작은 소리가 들렸다.

 

“사사삭.”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사사삭.”

 

여태까지 듣던 소리와 달랐다.

 

“사사삭.”

 

내가 돌아볼 때까지 계속하겠다는 듯, 소리는 점점 커졌다. 벌벌 떨며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돌리려다가, 문득 멈췄다. 무언가 시커먼 것이 시야 아래에 들어왔다. 천천히, 눈알을 밑으로 내렸다. 피에 젖어 너덜너덜한 소매 두 개가 내 다리를 꽉 잡고 있었다. 그 팔의 주인도, 부들부들 떨리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 나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붉게 물든 얼굴로 씩 웃으며 말했다.

 

“사사삭.”

 

속삭임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다리가 너무 아프고 무거워서, 빨리 달릴 수가 없었다.

 

“흐흑, 흑.”

 

흐느끼는 내 뒤로, 그것이 따라왔다. 아스팔트 위에 그 몸뚱이가 끌릴 때마다 사사삭, 사사삭 소리가 났다. 거기에 목소리 하나가 끈질기게 얹어졌다.

 

“어디 가? 나 좀 봐. 나 여기 있잖아!”

 

숨이 차도록 달리다가 나는 문득, 내가 어느 골목에 서 있는지 잊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사삭, 사사삭. 땅에서 나는지 사람의 입에서 나는지 모를 작은 마찰음만이 가득한, 낯설고 텅 빈 길에 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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