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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선 유지 장치 특별 프로그램


여자 친구와 헤어지기 전날 밤, 정확히는 그날 새벽에 있었던 일이다.

우리는 우리를 정신 없게 만드는 각자의 직장일에 너무 심하게 시달리고 있다는 데 동의했다. 그래서 주말만은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이외의 일 말고는 모든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푹 쉬면서 지내기로 했다.

전망이 좋을 것을 기대하며 예약한 호텔은 기대 만큼 창밖으로 보이는 경치가 아름다웠다. 어디로 가는 지, 멀리 뻗은 도로가 강변을 따라 세상 어디인가 사라지는 곳까지 내다 보였다. 저녁 시간이 되자 그 도로에 자동차 불빛들이 가득찼다. 그 풍경은 세상이 풍요롭고 발달해 있으며 좋은 곳이라는 생각을 들게 할 만했다. 그렇게 이어진 밤이라, 계획대로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잊고 그냥 놀 수 있었다.

그런데 새벽에 이상한 느낌이 들어 잠에서 깨어 났다.

무엇인가가 나타난 기척을 느꼈다기 보다는 없어진 것을 느꼈다고 할 수 있었다. 눈을 떠 보니 옆 자리는 비어 있었다. 나는 침대 위에 앉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자 친구는 창가에 있는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빈 잔에 찬물을 담아 마시고 있는 것 같았다.

“왜 안 자고, 깨어 있어?”

나는 고개를 돌려 같이 창 바깥을 보았다. 1년 중에 한 두 번 깨어 있을까 싶은 깊은 새벽 시간이었다. 그렇게 늦은 시각인데도 가끔 도로를 달려 지나가는 차들이 보였다. 저 차들은 무슨 일 때문에, 왜 이 시간에 어디로 가는 걸까. 그러고 보니, 그런 새벽, 평소에는 볼 기회가 없을 그 이상한 감각의 풍경도 볼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잘 때 코골더라?”
“미안해. 너무 피곤해서 그랬나봐. 내가 코 골아서 깬 거야?”
“내가 꿈을 꾸었거든.”

대화를 하면서 나는 서서히 잠이 깨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물었다.

“어떤 꿈인데?”
“내가 의대에 들어 가기도 했지만, 사실 딱히 우주에 관심이 많지는 않잖아? 그리고 다른 SF나 영화 이런 건 하나도 안 좋아하고. 그런데 우주선, 우주 탐험, 이런 거에는 관심이 있는 편이잖아. 그런 모습을 보면 괜히 좋아 하기도 하고. 나도 왜 그런 지는 몰라. 별로 별이나 천문학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우주에 비하면 너무 너무 작은 우주선이 우주를 혼자 날아가고 있는 모습. 그게 정말 좋거든. 아니야, 별로 좋은 것도 아니야. 그렇지만 그런 걸 보면 계속 보고 싶거든.”
“그래서 우주선 꿈을 꾸었다는거야? 그런 꿈 종종 꾼 적이 있잖아.”
“맞아. 비슷한 꿈이야. 미래 세상이야. 내가 우주선을 타고 있어. 나는 우주의 아주 먼 곳을 탐험하러 가는 사람이야. 나 혼자 타고 있는 우주선이 그래서 아주 먼 곳까지 날아 갔어. 그런데 어떤 일에 휘말려. 그래서 우주선이 고장 나게 돼.”
“뭐랑 충돌했나? 아니면 우주 해적이 습격했나? 우주 전쟁?”
“몰라. 꿈이라서 그건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 그렇지만 우주선이 고장난 건 사실이야. 그렇게 되니까 우주선 컴퓨터가 성능이 좋아서 여러 가지로 해결할 방법을 자동으로 찾아서 시도를 해 보거든. 이대로는 목적지에 갈 수도 없고, 다시 되돌아갈 수도 없어. 그렇지만 달리 고장을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결론이 나.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야. 구조 신호를 보내고 빙빙 돌면서 누군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거야. 그것 뿐이야.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아. 그렇지만 그렇다고 우주선들이 자주 오가는 지역에 내가 머물고 있는 건 아니야.”
“그래서 그렇게 헤매는 꿈을 꾸다가 깨어 났다는 거야?”
“모든 방법이 실패하고 나서 내가 절망해 있으니까, 컴퓨터가 나한테 뭘 안내를 해 주더라고. 어차피 이제 할 수 있는 게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으니까, 차라리 그 동안 나를 수면 상태로 만들어서 쉬게 해 주면 어떻겠냐고.”
“마취하는 것처럼?”
“그렇게 수면 상태에 들어 가면 내가 숨도 아주 천천히 쉬게 되고 음식도 거의 먹을 필요가 없게 되거든. 그래서 그 상태로 몇 개월, 몇 년을 버틸 수도 있다는 거야. 그 이상의 시간까지도. 그런데 그렇게까지 오래 수면 상태에 그냥 뇌를 넣어 두면 뇌가 너무 활동을 안해서 망가질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게 수면만 하게 해 둘 수는 없대.”
“그러면?”
“그래서 컴퓨터가 그러는 거야. 무슨 나노 코팅 약을 먹으래. 그리고 그 약을 먹으면 수면 상태에 들어 가게 하면서 동시에 아주 생생한 환상과 같은 꿈을 꾸게 된대. 뇌를 계속해서 활동하게 만들어 주려고 그러는 거지. 그 꿈의 내용은 내가 21세기의 지구, 한국에서 보통의 일생을 산다는 내용이야.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그냥 평범하고 보통의 일생. 너무 좋은 일도 없지만, 너무 나쁜 일도 없고, 그렇지만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는, 그냥 그런 인생 말이야. 꿈 속의 나는 21세기 초를 좋아하는 취향인가봐. 그런 삶을 사는 아주 긴긴 꿈을 꾸고 있으며, 그 꿈은 정말 현실 같기 때문에 이게 우주선에 갇혀 있으면서 컴퓨터가 뇌에 넣어 주는 꿈이라고 의심을 하기는 힘들대. 약 성분 자체에 이 꿈을 현실과 구분하지 못하게 만드는 기능이 있는 성분도 포함이 되어 있고.”
“그래서 그 약을 먹었어?”
“별 수 없잖아. 그리고 약을 먹고 나니까. 잠이 깨는 기분이 들었어. 잠이 깬 거야. 그리고 21세기, 지구, 한국의 침대에 내가 누워 있더라고.”

나는 잠이 완전히 깼다.

“이상한 꿈도 다 있네.”
“그런데, 그러고 나니까 알 것 같은 거야. 왜 이렇게 삶이 답답하고 막막한 지. 내가 꿈꾸던 일은 왜 이렇게 꺾이는 건지. 그럴 수 밖에 없어. 그런 게 진짜 같고 현실적이잖아. 이건 내가 상상하는 가장 진짜 같은 꿈이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그리고 또 알겠더라고. 내가 왜 우주선을 좋아하는 지. 왜 아무 이유도 없이 우주를 날아가는 우주선의 모습을 한참 상상할 때가 있는 지. 그리고 그것 말고도 가끔 삶을 살면서 별 것도 아닌 걸 오래 쳐다 볼 때가 있는데, 예를 들어서 무슨 비행기인지 무슨 장치인지 모르는 불빛이 하늘에서 계속 깜빡이는 모습을 한참 쳐다 본다거나, 아니면 무슨 글귀가 적힌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거리는 모습 속에 무슨 비밀이 있는 것처럼 오래 지켜 본다거나. 그런 거. 그런 것 속에 내가 이런 이상한 꿈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단서 같은 게 숨어 있는 것 같은 거야.”
“그런데 그건 시간 순서가 안 맞잖아. 그 꿈이 진짜라면, 너는 진짜로는 얼마 전까지 우주선 속에 있었을 거라고. 그리고 그 후에 오늘 새벽부터, 21세기 한국에서 사는 꿈을 꾸기 시작한 거잖아. 그렇다면 오늘 새벽보다 과거에 겪은 그런 옛날 경험이 무슨 증거가 될 수는 없지.”

여자 친구는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보았다. 그러더니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엄청나게 매력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 건 상관 없어. 어차피 꿈이 시작되면서 이전에 있었던 그 모든 걸 경험했다는 기억도 같이 생기게 해 주는 프로그램이었거든. 알겠니? 아니, 너 한테는 뭐든 알게 할 필요도 없어. 결국 내 삶이 언제인가는 끝나면 그때 진실을 볼 수 있겠지. 다른 우주선이 마침내 나타난 거야. 그래서 몇 십 년 동안 꿈을 꾸면서 우주선 수면 장치 속에 들어 있던 나를 깨워 줄 수도 있겠지. 아니면 모든 연료가 바닥 나서 근처의 별로 추락하는 우주선의 마지막 불빛을 보게 될 지도 몰라. 그 모든 게 아닐 수도 있을 것이고. 다른 전혀 다른 모습을 보며 또 모든 것을 기억해내게 될 지도 모르고.”

나는 다시 자리에 누워 잠을 자려고 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상한 꿈과 함께 아침까지 잘 수 있었다.

아침 식사를 할 때까지만 해도, 별 다른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날 오후에 여자 친구는 나에게 전화를 해서 헤어지자고 말했다.

문득 도대체 나는 간 밤에 무슨 꿈을 꾸었는지 기억해 보려고 했는데, 아무것도 생각 나지는 않았다.


- 2022년, 서초에서

댓글 2
  • No Profile
    윤새턴 22.11.23 01:11 댓글

    여자친구가 가장 매력적일 때 차이는 것이 안타깝네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 윤새턴님께
    No Profile
    글쓴이 곽재식 22.12.01 18:30 댓글

    언제나처럼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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