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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xk160 밤 너머에 1/2

2004.08.28 01:02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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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뭔데?”
  “새로 얻은 거야. 난 곧 학위 논문을 써야 하니까, 바깥 책들도 제법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다구.” 셴이 머리를 흔들면서 답했다. 굽슬굽슬한 갈색 머리가 목덜미에 달라붙었다. “더워. 널 보니까 덥다구. 짧은 소매 좀 입을 수 없어?”
  셴은 겨울 햇살같은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소년에서 청년기를 가로지르는, 아직 덜 다듬어진 어깨가 조그맣게 떨리면서 그에게서 벗어났다. 샤뮌 페라틴 - 이 아름다운 소년은 나이는 셴보다 네 살이 어리지만 학년은 하나 위다.
  “아세빈의 책은 아닌데?”
  “아니지. 바깥에서 들여온 거야. 아세빈에 설마 경전이 있겠어?”
  “그럼 그 새 같은 게 신이야?”
  “웃기게 생겼지? 이건 카잔키키르야. 첼만국의 전통적인 신이고, 이 쪽은 나단인들이 믿는 나쿠드지. 이건 예쁘지 않아?” 셴이 다른 책을 들이밀었다. 손에 잡기에도 어려울 판형에 종이는 검게 변해 있다. 샤뮌이 책을 탈탈 털어 책장을 서로 뗀 다음 펼쳐보았다. 셴은 몰래 나쿠드의 그림과 샤뮌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나쿠드와 샤뮌은 닮았다. 새하얗고 예쁜 것 외에도 분명히 드러나는 고결함이.
  “선택받은 자를 나단인들은 아그노스라고 부르지. <뜻이 드러난다>는 의미야...” 셴이 속삭이다시피 하는 걸 샤뮌이 잘라버렸다. “이 신들을 뭐에 쓰게?”
  “나 문헌학과인 거 몰라? 신화는 쓸모가 많다구.”
  “아세빈에서도?”
  “문헌학적으로나 인류문화학 쪽으로 쓸모가 많다는 거지. 뭐 하긴 아세빈 내에서도, 이런 거 공부하다가 아예 가버리는 사람들도 있어. 위원들 중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들은 말인데, 가끔 나쿠드를 믿게 해달라, 사당을 짓게 해 달라 하는 건의도 들어온대. 종교란 게 공부하다보면 유혹적이긴 한가봐. 아, 걱정하지 말고. 내가 그러겠어?”
  “그 사람들은 그러려고 해서 빠졌겠어?”
  “내가 빠져버리면, 네가 온갖 과학적인 잡소리로 극복시켜 줘.”
  “과학적인 잡소리로 극복되는 게 신이야?” 샤뮌이 제법 엄숙하게 말했다. 셴이 웃음을 터뜨리기 직전에 샤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잠깐만.”
  셰일 교수가 저 편에 서 있었다. 셴도 미소를 띄고 목례했다. 셰일도 웃으며 답했으나, 곧 샤뮌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언짢은 얼굴로 소리쳤다. “샤뮌!”
  “네.”
  샤뮌이 얼른 뛰어갔다. 둘이 다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아흐레나 학교를 빠지면 어떻게 해?” “따로 하고싶은 공부가 좀 있어서...” “진도는 어떻게 따라잡으려고?” 샤뮌이 대답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셴은 왠지 자기가 부루퉁해졌다. 진도를 걱정한다고! 샤뮌 페라틴에게 할 말은 아니다.
  셴은 자기 무릎 위의 책장으로 눈을 돌렸다. 빨리 해 두지 않으면 저 열일곱 살짜리가 먼저 학위를 딸 지도 모르겠다.




1

  축제날이었다. 단색, 흰색 혹은 연회색, 무채색의 엷은 옷밖에 배급되지 않는 아세빈에서도 그 날은- 2월 2일, 늦여름의 하루, 짙은 옷을 입을 수 있었고 어깨가 드러나는 옷도 입을 수 있다.
  샤뮌은 그런 걸 즐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날만은 푸른 옷이건 검은 옷이건 멋대로 입어 보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시빌르가 특히 권했을 것이다. 셴 자신도, 그런 날 샤뮌은 즐기거나 혹은 실제로는 즐기지 않더라도 즐기는 듯한 흉내는 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인생에 그런 날은 흔치 않고, 뭐라도 평소에 하지 않는 일을 하나는 해 보고 지나가야 그런 흔치 않은 날을 확실히 기억에 남겨둘 수 있기 때문이다. 어색함이었건 서투름이었건 간에, 그런 풋풋한 기분들은 나중에 얼마나 생소하고도 소중한 것으로 남을 것인가.
  샤뮌은, 축제날은 아예 편한 공휴일로 삼고 집에서 한가하게 놀기 마련이었지만 과연 이번 축제엔 나오기는 했다. 그 조소 비슷한 것을 늘 띄워놓은 얼굴- 입술로 미소짓고 있진 않아도 눈을 마주보면 벌써 그 뉘앙스에 가슴이 덜컥할 정도의 - 에, 반쯤 호기심을 띄워놓고 있었다. 이십대 중반을 갓 넘긴 청년은 평소와 똑같은 연회색 평상복을 입고 있었고, 물론 아세빈은 늘 서늘하거나 따스할 뿐이긴 하지만, 아무튼 늦여름인데도 불구하고 긴 옷을 입고 있었다. 셴은 자기가 입은 반소매 옷이 어째 어색해졌다.
  “위원 시험을 통과한 걸 축하합니다.” “고맙습니다.” 샤뮌이 받아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셴은 슬쩍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샤뮌은 좀 있다가 인사 받는 게 지겨워 미칠 지경이 되면 셴을 찾아서 도망 올지도 모른다.
  과연 샤뮌이 곧 셴을 찾는 듯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시빌르가 곧 나타나 주었다. 이, 위원직 따위 애초에 포기했던, 성적이 나름대로 좋았으나 눈에 띌 만한 수준은 아니었던 친구는 지금 연구소에서 팀을 이루어 꽤 재미있는 연구를 하고 있는 듯 했고, 집에서 쉴 시간도 어느 정도는 남는 것 같았다. 그 남는 시간을 이용해서 이 친구도 어쩌면 교직 시험을 치를지도 모르겠다.
  셴은 부드럽게 과일주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알콜이 허락되지 않는 아세빈이지만, 이날 하루만은 가벼운 비행이 허용되고, 알콜 농도라고는 일할 이하를 밑돌 이 정도 음료는 맛배기로 돌려주기도 한다. 어쨌거나 좋다, 시빌르는 서른 넷이다.
  샤뮌은 스물 여섯이다. 셴 자신은 서른이다. 위원직 시험, 시험을 치르고 나면 물론 오 년이 더 주어진다. 그 동안 경력을 쌓거나 연구 업적을 쌓고 나서 한번 더 간단한 시험을 치르고, 위원 후보 신청을 하면 이제 일은 원로들 손으로 넘어간다. 원로들은 서류를 살피고 면접을 치른 다음, 현 위원들의 최근 경력보다 뛰어난 자가 있으면 새로운 위원 선출을 고려해 볼 것이다.
  셴은 자신이 학위를 따고 대학에서 경력을 쌓고 있을 무렵, 위원 시험을 얼마나 쉽게 생각했던가 떠올렸다. 나이 스물 일곱에 셴은 벌써 학위를 따 놓은 상태였고 두려울 게 없었다. 자신은 충분히 뛰어났다, 셴은 지금도 그 점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뒤떨어졌을 뿐이다.
  그런 충분히 뛰어난 사람들은 많다. 그리고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들도 그 와중엔 많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셴은 짧게 신음하면서 아무 자리에나 기대어 앉았다. 예를 들어, 악기의 잠재성을 최고로 이끌어내는, 연주자 자신이라기보다는 악기를 살리고 부활시키고 영생을 구가하게 하기 위한, 자아가 꽉 차고 견고한 물질이 아니라, 천상과 지상 사이를 잇는 텅 빈 구멍으로서만 태어난 것 같은, 열린 문으로서만 존재하는 영혼이 있다. 그런 자들은 그저 선택받았을 따름이다. 아세빈은 선천적인 천재를 믿지 않게 가르치지만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자들을 보면 무릎에 힘이 빠진다. 물론 그들은 선천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는가? 그들이 선천적인지 아닌지, 그들의 존재가 피안에서부터 온 것인지 이 세계에서 갈고 다듬어진 것인지, 그런 점을 알아볼 눈이 바라보는 자들에게는 없다. 그들은 어쨌거나 이미 너무 높은 곳에 있으므로. 번개가 전기 현상인 것을 몰랐던 시절 사람들이 그것을 신의 분노로 생각했던 것처럼, 모르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수동적일 뿐이다.
  그러므로 질투라기보다는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셴은 알고 있다. 자신이 지금 샤뮌을 바라보듯이, 대학 시절 많은 동료들이 자신을 바라보았음을. 셴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여기 있었구만.” 놀라서 펄쩍 뛰듯이 일어나자 눈앞에 샤뮌이 서 있었다. 샤뮌은 한 손에 접시 한 개를 들고, 접시에는 빙 둘러서 음식을 쌓아놓고 있었다.
  “뭐야?”
  “골고루 담아봤지.” 샤뮌이 기분 좋게 접시를 한바퀴 돌려 보였다. “회랑을 다 돌았어?” 셴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첼만식, 레텐식, 공국에 나단, 맙소사. 이걸 한 접시에 다 담느라고 애쓴 걸 알겠군.”
  “애 썼지. 난 아까워서 못 하겠으니까, 네가 좀 망가뜨려 봐.” 하고 샤뮌이 포크를 넘겨주면서 자연스럽게 옆에 걸터앉았다.
  샤뮌이 앉은 후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셴이 포크만 만지작거리고 있다가 말했다. “축하해.”
  “고마워.” 샤뮌이 답했다. 셴이 비실 웃어버리고는 오리고기 한 점을 집었다.
  “그나저나 의외였어. 네가 위원에 뜻이 있는지는...”
  “뜻이 있어서 하는 거야?” 샤뮌이 눈을 깜박이며 이 쪽을 보았다.
  “그럼 그냥 한단 말이야? 그 어려운 시험도 봐야 하는데 말이야.” 셴은 혹시라도 빈정거리는 것처럼 들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말했다.
  “그냥 올라가 있으려고 하는 거 아니었어? 같은 능력이 있다면 올라가 있는 게 그대로 있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니까 말이야. 일단 자리잡아놓고 보자는 거지.”
  “너는 말을 해도 참...” 셴이 씁쓸하게 웃었다.
  “무능력해질 때까지 승진한다는 말이 있지 않아? 딱 맞다고 생각하는데. 시간을 타고난다고 생각해 봐. 하루에 스물 다섯시간을 타고 난 사람은 스물 네시간 타고난 사람과 어울리면, 매일매일 완전히 남는 한 시간은 완전히 스스로만을 위해 쓸 수 있을 텐데. 거기 머무르면서 그 한시간을 자기가 사는 게 아니라 팔다리 자르듯이 잘라내버려. 스물 네시간에 맞춰서 딱 잘라내어 버리는 거야. 그리고 잘라내어진 죽은 것들을 쌓아서 스물 다섯시간을 타고난 사람들의 세계로 올라가기 위해서 사용해. 최대로 지긋지긋해질 때까지, 최대로 자기 자신을 주위 사람들이 완전히 앗아가 버릴 때까지, 거기까지 올라가고 싶어해. 자신을- 오직 자신만을 위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으면 불안한가 보지.”
  “그럴 수도 있겠군.”
  “바보 같은 노릇이야.” 샤뮌이 포크 끝을 쿡 찔러서 셴이 주워먹고 있던 빵조각 하나를 도로 떨어뜨리면서 말했다. “정말로 올라간다는 건 그런 게 아냐. 그렇잖아?”
  셴은 조금 부아가 나 있었지만, 샤뮌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샤뮌,” 셴이 샤뮌의 이마를 밀어내며 말했다. “너 저기 있던 거 마셨어?”
  “주던데?”
  “알콜음료야.”
  “뭐?” 샤뮌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요즘 축제는 타락했군.”
  “무슨 소리야? 몇 년 전부터 돌렸다고. 너 얼굴이 뜨거워, 세수 좀 하고 와.”
  “그래야겠군.”
  샤뮌이 간 사이에 셴은 말없이 접시에 담긴 것만 다 먹어치우고 있었다. 먹고 나자 딱히 할 일도 없어져서, 셴은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나가보니 시빌르가 꼬마 하나를 데리고 씨름하고 있었다.
  “램지, 이건 살아있는 거라니까...” 시빌르의 후계자다. 오랜만에 보는데, 이제 네다섯살 쯤 되었으려나? “어떻게 알아요? 그냥 공같이 생겼는데.” “움직이잖니?” “움직이기는 가랑잎도 바람 불면 움직이죠.” 시빌르가 말이 막혀서 입을 벌리고 있는 걸 셴이 속으로 킥킥대면서 지나갔다. 후계자를 키우는 건 이래서 골치 아프다. 어떨 때는 자기 책임자보다도, 혹은 어떤 성인들보다도 똑똑하기도 하다- 질문을 던지는 것에 한해서는.
  “셴!” 그냥 지나가려고 했더니 시빌르가 불러 세웠다. “이놈한테 생명의 소중함을 좀 가르쳐 줘.”
  “왜, 자네 힘으론 꼬마에게 그런 것도 못 가르쳐 준단 말인가?”
  “꼬마니까 그렇지! 만약 자네한테 가르쳐야 한다면 여러 가지 방법이 있네만...”
  “음... 학교에 어서 보내. 내가 맡게 되면 가르쳐주지.”
  셴이 말하고 돌아서려는데 시빌르가 얼른 말했다. “기운 내.”
  “무슨 뜻인가?” “보통은 서너 번씩 떨어지는 게 당연하네.”
  “시빌르,” 셴이 말을 잘랐다. “나 위원직은 포기하기로 했네.”
  시빌르가 입을 약간 벌렸다. “셴.”
  “포기하지는 말게. 자넨 인물은 인물이야. 저 친구가 좀 맛이 간 거지.”
  “그 맛이 간 친구가 내게 무슨 말을 해 줬네.”
  “경쟁자를 물리치려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저 친구가 위원이 되어서 좋은 실적을 이루지 못하면, 자네가 치고 들어올 수도 있어.”
  “저 친구가 그런 친구라고 생각하나?” “아니.” 시빌르가 금방 이를 드러내고 웃어버렸다.
  “어쨌거나 자넨 포기 못할 걸세, 셴. 자넨 그런 욕심이 있어.”
  “바로 그 쓸데없는 욕심을 버리도록 노력해 보겠네.”
  “버릴 필요 없는 욕심도 있는 법일세.” 시빌르가 제법 엄숙하게 말했다. 결국 램지는 공벌레를 발로 뭉개버렸다.



  과연 떨쳐버릴 수 없는 욕심도 있는 법이다. 때가 되자 셴은 또 시험을 보았고, 어이없게 덜컥 붙어버렸다.
  나이 서른 여섯에 셴은 후계자를 들였다. 이제 후계자는 여섯 살이 되었고, 자신은 서른일곱 살이 되었다. 익숙한 문소리가 들렸고, 문을 열자 역시 샤뮌이 찡그릴 듯 말듯 한 얼굴로 서 있었다. “네 후계자가 아뉴르랑 더 놀다 가고 싶다는데.”
  “지금이 몇 신데?”
  “자고 가고 싶다는 거야.”
  셴은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부터 외박이군.” 이 후계자는 자기 책임자랑 도무지 놀아주려고 하질 않는다.
  샤뮌도 후계자가 있다. 이 친구는 스물 여덟 살 때 벌써 후계자를 들여놓았다. 샤뮌이 위원 시험을 통과하고 나서 다음 다음해에 셴은 위원 시험에 통과했고, 여름 축제 때 조금 색다른 옷을 입고 축제장에 발을 들여놓아보았다. 여러 축하 인사를 받았고 얼굴은 알지만 가까이 지내지는 않았던 사람들도 한발 안쪽으로 들어와서 인사를 해 주었다.
  셴은 샤뮌을 찾았다. 샤뮌은 벌써 유명해져 있었고, 축제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면 다들 섭섭해하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어쨌거나 샤뮌은 여전히 축제를 지나치게 즐기려 들지는 않는다. 잘 세탁한 평상복을 입고서 물만 계속 마시고 있는 사람을 찾으면 된다. 샤뮌은 축하해주러 오지 않았고, 셴은 자기 쪽에서 찾아야 한다는 게 좀 어색했다. 순간 저 쪽에서 샤뮌이 다가왔다. 샤뮌은 목 아래까지가 드러나는 푸른 옷을 입고 있었다.
  “그거,” 셴이 순간 거의 모든 일을 잊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굉장히 잘 어울리는데.”
  “고맙군.” 샤뮌이 고맙다고 말하는 건 별로 같은 뜻으로 들리지가 않는다. “누가 만들어 준 거야?” “아그나시스 알아?” “알지. 나이는 젊지만 특출난...”
  셴은 다시금 웃음 지었다. “그 사람이?” “후계자를 얻기로 했었지.” 샤뮌이 가탄없이 웃어 보였다. “아그나시스가 임신했어. 협상을 했는데, 이번 아이는 내 후계자가 되기로 했어.”
  “기쁜가보군.” 샤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셴은 샤뮌이 정말로 기뻐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셴은 이 능력 좋은 친구가 왜 후계자를 가지고 싶어하는 지 알 수 없었다. 후계자를 가지는 건 자기 능력에 한계를 느낄 때, 그래서 물려주고 다른 가능성을 보고 싶어할 때다. 샤뮌이라면 후계자에게 쏟아 부을 시간을 자신에게 쏟아 붓는 게 낫다.
  아무튼 그때 샤뮌이 얻은 후계자가 아뉴르다. 셴은 우연히 다섯 살짜리 아이를 데려와서 후계자로 삼게 되었는데, 그게 게덴이다.
  게덴은 아세빈 사람이 아니고, 아세빈 밖으로 나갔다가 주워 온 아이다. 비쩍 말라서 눈만 번득거리던 애였는데 살이 제법 붙었다.
  게덴은 아주 빨리 배웠고, 배우는 걸 좋아했다. 셴은 이 애가 지식이나 간단한 기술을 습득하는 속도가 지나치게 빠른 걸 볼 때 가끔 가슴 깊은 곳이 선득선득하다. 아주 간단한 것에 한해서도 - 예컨대, 신발 끈을 매는 법이라든가 - 그 조그만 손과 눈이 명민해지는 한 순간에 셴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사랑스러움과 불안함이 동시에 마음을 흔든다.
  그런 순간에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열어주었더니 샤뮌이 서 있다면 더욱 그렇다. 셴은 간혹 샤뮌에게 집을 허락한 걸 후회하곤 한다.
  두 책임자가 서로의 집을 별로 거리낄 것 없이 들락거리는 사이다 보니 두 후계자도 곧 만나게 되었다. 아뉴르는 예의는 지킬 줄 알지만 굉장히 활발한 꼬마고, 게덴보다 덩치도 크다. 게덴은 다소곳하다시피 조그맣고 예쁘지만 벌써부터 칼같이 꼬장꼬장한 구석이 있다. 아뉴르는 아무나 콕콕 쥐어박아 주는 걸로 애정을 표시하는 습관이 있고, 게덴은 남의 손이 많이 닿는 걸 싫어한다. 덕분에 처음에는 무던히도 투닥거려서 책임자들을 걱정시킬 지경이더니 이제 잘 지내는 모양이다 - 애들은 이제 여섯 살이고, 학교에 입학한 지 일년이 지났다.
  게덴은 다섯 살 때 이미 모국어를 완벽하게 읽어 내려갔고 또 다른 언어로도 반 자유롭게 소통이 가능했다. 아세빈에서도 드문 일이고, 셴도 그 재능에 반해서 데려온 거긴 하다. 그러나 요즘 책을 펼쳐놓고 자기한테는 아예 등만 보이고 있는 걸 보면 섭섭하다.
  게다가 아뉴르와 친해진 후로는 낮이며 밤마다 그 집에 놀러 다니느라 그 등판마저 안 보여주고 있는 꼴이다. 셴이 투덜거렸다. “뭐야, 둘이 노느라 너무 공부 안 하는 거 아닌가? 전에는 책만 읽는 애였는데.”
  “활발한 게 좋지. 실은 둘이 같이 공부하는 거 같아.”
  “그런가.” 셴이 입맛을 다셨다. 아뉴르가 게덴과 같은 수준으로 공부할 수 있겠냐는 말을 꺼내려다가 속에 접어두기로 했다.
  “하긴 자기들이 좋다고 노는데 어쩌겠나. 방은 있어?”
  “늘 그렇듯이 침대는 하나 더 있지.”
  “너무 늦게 재우지는 마. 몸이 약한 애니까...”
  “알아.” 샤뮌이 손사래를 쳐 보였다.
  샤뮌은 삼 년의 기간이 지나고 충분한 경력을 쌓자 위원직에 응시했으며, 당연하다는 듯이 한 명을 밀어내고 선출되었다. 당시 스물 아홉 살의 위원은 어쨌거나 정치적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순진하게 겸손한 척 할 줄 알았으므로 잘 받아들여진 듯 했다. 그리고 이상한 논문을 써서 가끔씩 무슨 상을 받는다. 예컨대, 게덴이 노느라 밤을 샜는지 그냥 자는 장소가 바뀌어서 잘 못 잤는지, 눈이 퀭해져서 돌아온 오늘처럼,
  “p 궤도를 밝혀낸 셰링 교수, 전하량의 불연속적 유출을 발견한 프락시 위원, 그들의 업적에 힘입어 올해 우리는 샤뮌 페라틴 위원이 예순 세 번째 논문에서 증명해 낸 새롭고도 완벽한 상수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는 데리칸트 교수의 광전 실험 결과를 만족시킴으로서 두 번째로 증명되었으며, 이 성과를 우리 위원회는 높이 평가하여...” 물리학 협회의 수여식에 샤뮌은 이 닷새에 하루 있는 휴일을 바쳐 참석해야 했던 것이다. 박수가 광적으로 시작되었다가, 아세빈 사람들답게 곧 딱 적당할 만큼만 울리고 잦아들었다. 샤뮌은 단상에 올라가서 자기 이론을 요약해서 발표하고, 온갖 질문에 정성껏 대답하고 재차 갈채를 받고 나서야 풀려났다. 이제 다시 몇 가지 토론회나 강연회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셴이 찾아갔을 때 샤뮌은 좀 힘이 빠져서 앉아있었다.
  “왜 그래? 상도 받고 와서는.”
  “위원회에서도 준다는군.”
  셴이 웃어버렸다. “시벨리안 상? 그거 오 년에 한번씩 받는 거 아닌가. 이봐, 아세빈 천 이백 학자들 중에 한 명이라고!”
  “이걸,” 샤뮌이 종이 뭉치를 가리켜보였다. “이걸 쉬운 말로 해야 돼. 오늘은 물리학자들 앞이었어. 일주일 후엔 온갖 사람들 앞에서 온갖 사람들이 다 알아듣게 떠들어대야 해. 너 전자 궤도를 이런 형태로 결정짓는 요인이 뭐라고 생각해?”
  “알 게 뭐야?”
  “그래. 그런 너 같은 사람들.” 샤뮌이 이마를 짚었다. 셴이 빙그레 웃음을 띈 채 바라보았다.
  샤뮌이 시벨리안 상을 받는 날에는 셴도 참석했다. 샤뮌이 뭐라고 말을 하기 시작하자 셴은 온 정신을 다 집중해서 들어야 했다. 시벨리안 상 수상식에는 학생들을 포함하여 아세빈의 거진 모든 계층이 다 참가 자격이 있고, 학자들은 무조건 참여해서 수상자가 뭔 소리를 지껄이는지 알아들어야 한다. 수상자의 이론은 보통 아세빈의 여러 영역에 반영되게 되고, 세계를 증명하는 일이 되며, 학자라는 사람들이 각자의 특이한 전공이 어쨌거나 자기 몸과 아세빈 자체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한 거주지의 주요 사항을 모르고 있다면 수치가 될 것이다.
  셴은 전에 시벨리안 상을 받았던 다른 물리학자들이나 화학자들의 헛소리를 기억해보려고 애썼다. 그런데 저런 거 몰라도 제법 잘 살지 않나? 셴은 집에 가서 아삼의 연대기나 읽고 싶어졌다. 아무튼 샤뮌이 가볍게 목례하고 단상을 내려가는 동안 셴은 계속 박수를 쳐 주었다.
  샤뮌과 셴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갈림길에서 헤어지고, 집에 와 보니 게덴이 거실에서 특유의 뚱한 표정으로 아뉴르와 함께 앉아있었다. 샤뮌이 웃음 지었다. “아뉴르가 문 열어줬니?”
  게덴이 끄덕거렸다. 샤뮌이 가볍게 두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밤이 늦을 때까지, 아뉴르가 잠든 걸 샤뮌이 방에 데려다놓고 왔을 때까지 게덴은 거실 탁자에 기대어서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게덴이 아무래도 또 자고 가고 싶어하는 것 같길래 샤뮌이 셴에게 알리려고 문을 열었다. 셴이 바로 문 옆에 다리를 구부리고 앉아 있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창으로 들여다보고 있었지. 지금은 피곤해서 앉아버렸지만...”
  “이상한 취미군.”
  “불쾌한 취미라고 생각하고 있나?”
  샤뮌이 가만히 쳐다보았다. “남의 집은 들여다보지 마.” 아세빈에서는 사생활을 철저하게 보호한다. 주인으로부터 집을 허락 받지 못한 한 전방 몇 센 내로 접근할 수조차 없다. 집을 허락 받는다는 것은 문을 두드릴 수 있도록 허가받는다는 뜻이지, 아무 때나 문을 열어제치거나, 창으로 들여다보는 걸 허락 받은 건 아니다.
  셴은 샤뮌이 사생활 문제에 특히 예민한 것을 안다. 그러나 셴은 훨씬 더 불쾌해져 있었거나 서글퍼져 있었기 때문에 다른 감정은 뒤로 미루어놓기로 했다. “게덴은 아뉴르를 만나러 여기 오는 게 아니더군.”
  샤뮌이 고개를 약간 기울여 보였다. “내 집에 맘에 드는 책이 많대.”
  “책과, 선생이겠지.” 셴이 노려보자 샤뮌이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이어졌다. 샤뮌은 표정이나 가벼운 몸짓으로, 침묵을 그리 무겁지 않게 만들 수는 있었지만, 다른 방도는 없었다. 셴이 속삭이듯 말했다. ”네게 맞는 아이야.“
  뒷말이 나오기 전에 샤뮌이 얼른 말했다. “그게 누구의 진심도 아니라는 걸 알 텐데.”
  “그게 더 나아 보여. 애초에 나한테는 벅찬 애였네.”
  “저 애는 너를 훨씬 좋아해. 네게 가르쳐달라고 하는 게 부끄러워서 내게 오는 거야.”
  샤뮌이 문간에 계속 서 있자 게덴이 이 쪽으로 다가왔다가 셴을 보았다. 셴과 눈길이 마주치자 게덴이 얼른 피했다. 샤뮌이 게덴과 눈높이를 맞춰 앉아서 속삭였다. “돌아가서 자라. 네 책임자가 심심하대.”
  게덴이 문 밖으로 나오자, 셴이 아무 말 없이 앞장섰다.



  전형적인 여름날이다.
  바깥 세계에서라면, 전형적인 여름날일 것이다. 아세빈은 언제나 따스하거나 서늘하다. 오늘은 저 인공 태양이 고장난 것이다.
  공학자들이 애를 쓰고 있을 것이다. 석조물이라 여전히 어느 정도는 시원한 회의장 안에서도 위원들은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샤뮌이 셴 쪽을 한번 흘깃 넘겨다보았지만 셴은 묵묵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대체 언제 고쳐진다는 거야?” 샤뮌 옆에 앉아있던 다른 위원이 속삭였다. 샤뮌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세빈의 인공 태양은 - 적당한 적외선과, 힘찬 가시광선과, 아주 희미한 자외선만 보내주지만, 그것이 어떻게 운용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정확히 말해 아무도 모른다.
  아세빈은 늘 따스하고, 늘 서늘하며, 바깥 세계와 완벽하게 격리되어 있고 - 이곳을 천정에서부터 땅바닥까지 딱 다물고 있는, 안쪽에서 보면 투명할 듯 말듯 해 보이는 반구형의 돔은, 바깥에서 보면 거대한 산 모양으로 위장되어 있다고 알고 있다 - 정기적으로 비가 내리고, 바람은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아주 간혹 여름날에 풀잎을 살랑이고, 머리칼을 귓바퀴에 스치게 하면서, 왜 바람이 부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끔씩 학자들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깨우친다.
  잘난 체 해도 똑같은 것이다, 샤뮌은 생각한다. 바깥 세상의 사람들과. 그들이 산사태가 나면 죽고, 병에 걸리면 기도하고, 홍수가 나면 신의 벌로 알고, 벼락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아세빈 사람들은 아무것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지만 - 면역 체계가 거의 완벽하므로, 병조차도 - 여전히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다만 이 천국이 신이 아닌 우리와 닮았을 인간의 손에 창조되었다는 것 밖에.
  그러므로 아세빈의 매일은 돌아가기 위한 매일이다. 세살 때 시험을 치러 지능이 모자라는 자들은 생산지로 보내진다. 본토에 남은 사람들 중 또 몇 번의 시험을 치러 잡일꾼이나 치안대로 떨어지고 나면, 남은 사람들은 모두 학자가 된다. 어떤 본토민도 손에 땅을 경작할 도구를 잡아서는 안 되며, 어린애들은 노동 아닌 운동을 배울 것이며, 오직 이 세계에 대해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공부할 것이요, 주어진 낙원을 손에 넣으리라.
  <잃는 것에 대한 불안>. 샤뮌은 되뇌었다. 마침내 공학자들이 무슨 성과를 얻었는지, 그냥 알아서 고쳐진 건지, 회의장도 조금씩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부채질을 멈추고 회의를 좀 더 빠르게 진행했다. 샤뮌은 자기 옆에 있던 동료의 손이 특수한 종류의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보았다.
  “그 조금 덥다고 그래? 몸 조심하라고.” “뭐가?” 샤뮌이 턱짓했다. “손이 떨리던데.”
  “그래?” 동료가 으쓱해 보였다. 샤뮌은 이 사람의 이름을 기억했다. 파시파르던가? 마흔 다섯 살의 - 이렇다할 특색은 없는 위원이다.
  “위원직 시험이 다가와.” 파시파르가 속삭였다.
  “이미 통과했잖아?” 샤뮌은 이 사람이 무슨 향수에라도 잠겨있나 싶어서 웃음 지었다. 파시파르가 샤뮌을 가만히 노려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샤뮌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회의는 자질구레한 일에 관한 거였고, 이번 달에 건의된 법안은 별 것도 없었다. 옷 배급량을 늘려달라는 소리가 있었고 샤뮌네 부서가 주의해서 살펴야 할 것으로는 병원에 무슨 무슨 기기가 더 필요한데 공학자들이 말을 들어주지 않네 하는 불평이 대부분이었다. 다가오는 축제에 대해서는 토론회를 늘려달라는 건의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건 대학 학생회로 보내라고 해.” 위원 한 명이 얼굴을 찡그렸다. “위원들이 할 일이 없는 줄 알고 있어.”
  일이 끝나고 나자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셴이 먼저 일어나자 샤뮌이 물었다. “아직 화 안 풀렸어?”
  셴이 돌아보고 미소지었다. “화가 날 일이 뭐가 있었겠나.”
  가만히 한숨을 쉬고 나서, 또, “내 잘못이지.” 했다.
  둘은 의사당 입구까지는 같이 나왔다. 셴의 표정이 영 안 좋아 보인다고 지적하자 셴이 고개를 저었다. “위원 시험 때문이야.”
  “아아.” 샤뮌이 웃음 지었다. “쓸데없는 걸 걱정하고 있어.”
  “네게는 쓸데없는 걱정이겠지.” 셴이 중얼거렸다. 샤뮌이 비실 웃음을 흘리면서 말했다.
  “넌 위원들 중에도 뛰어난 편이야. 스스로도 알고 있잖아?”
  “난 언제나 뛰어난 편이었어.”
  “그러니까 말이야.”
  “뛰어난 편이었고, 언제나 그 뿐이었어. 위원직이란 건 그런 걸로 통하지 않아.”
  “위원직 시험이 널 한번 찼다고 그렇게 오래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역시 넌 연애에 문제 있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얘기밖에 안 돼.”
  “그건 네가 할 말은 아냐.”
  “걱정 없을 거란 얘기야. 알잖아?” 샤뮌이 셴의 어깨를 건드렸다. 셴이 샤뮌을 복도 벽에 내던지다시피 밀어붙였다.
  샤뮌이 중얼거렸다. “의사당에서 폭력이라... 간도 크다.” 아세빈은 뺨만 때려도 금고형이다.
  셴이 숨을 가누고 있을 동안 샤뮌이 셴의 팔목을 잡았다. 셴보다 샤뮌이 고작 네살 젊은 탓만은 아닐 만큼 간단하게 팔이 풀려나갔다. 셴은 허탈하게 서 있었다. 샤뮌이 달리기에서조차 자신보다 훨씬 빨랐던 기억이 났다. 그런 기억을 아직도 품고 있는 자신이 우습게 느껴지기도 전에 무슨 말인가를 퍼붓고 있었다. 샤뮌이 다가와서 안아주었을 때쯤에야 정신을 차렸다.
  한참 후에 샤뮌은 팔을 풀고, 셴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머지 얘기는 앉아서 하자고. 저 쪽에 안 쓰는 방 하나 있지?”
  안 쓰는 방이 아니라 휴게실이다. 어쨌거나 자리를 잡고 앉자 샤뮌이 물을 두 잔 받아왔다.
  “게덴 말인데,” 샤뮌이 입을 열었다. “다섯살 때까지 밖에서 살았잖아.”
   셴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샤뮌이 말을 이었다. “너 운 적 있어?”
  “뭐?” “게덴 때문에 운 적 있냐고.”
  “한번.”
  “그 애 앞에서?”
  “그래.”
  샤뮌이 비실 웃었다. “뭐 내 생각이긴 하지만, 게덴은 네가 주워오기 전까진 바깥에서 살았어. 부모한테는 버림받고, 양부모는 앵벌인가? 아무튼 동정 받을 수단으로 앞세웠다고 하고. 혹독한 상황을 혼자서 버틴 거지. 혼자서 버티는 걸 실패했다면 그 애는 타인을 갈구하게 되었을 테지만 그 애는 성공했어.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았고 그런 걸 필요로 하지도 않게 된 거야. 혼자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는 것과 혼자서 살아가는 법 밖에 모른다는 얘기는 같을 수도 있어. 네가 왜 울었지?”
  “애가 책장에서 떨어졌길래...”
  “많이 다쳤어?”
  “아니. 빈혈 때문이었나 봐. 다친 데는 없었어. 하지만 정신을 못 차리길래 놀랐어.”
  “빈혈은 선천적인 경우가 많잖아. 그 애한테는 그렇게 잠시잠시 못 가누게 되는 것도 생활의 일부였을지도 몰라. 그 애는 그저 살아있었을 뿐인데, 갑자기 누군가가 상처 입었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말이야. 그 애가...”
  샤뮌이 말을 이었다. “그 애는 이제 네게 자기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되는 건 보이려 들지 않을 거야. 자기 자신 자체는 자기 혼자 지켜가야 하고, 살아가야 할 것이지. 하지만 그 애는 어쨌거나 너를 사랑해. 네게도 사랑 받길 원할 거야. 자기 자신이 아닌 것들, 그러나 자신이 가진 것들로 인하여 말이야. 그러므로 네게 무언가를 위해 진지하게 공부하는 모습 같은 건 보일 수 없지만, 또 너를 위해 머릿속에 지식은 있어야 하고 똑똑해야 하는 거지.”
  “복잡한 얘기군.”
  “쉬운 얘기야, 너, 울지 말라는 거야.” 샤뮌이 셴을 손가락질하면서 말했다.
  며칠 뒤쯤에 셴은 야뉴르를 한번 찔러보았다. “샤뮌이 너 때문에 운 적 없니?”
  아뉴르는 고개를 숙이고 있더니 <내가 뭘 잘못했나?> 하는 식으로 몸을 비비 꼬았다. 그러더니 자기가 울기 시작했다. 셴은 애를 달래주려다가, 나 같은 책임자가 달래주면 애가 더 망가질지도 모르지 하고 생각해 버리고는, 그냥 도망쳤다.



  삼 년 후 오늘, 회의장은 약간 싸늘하다.
  셴은 아홉 살이 된 게덴을 잠깐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 애는 두 학년을 월반했다. 그러는 동안 몸은 도로 빼빼 말라버렸고, 눈매는 굳어버렸으며, 미소마저 싸늘해졌다.
  아세빈에서는 열두 살 때 대략적인 전공 분야를 선택하게 한다. 게덴은 의과를 선택할 것 같다. 성적이 좋으니 선생들에게도 호감을 사는 것 같고, 호감을 사니 견학 기회도 많이 주어진다. 게덴이 견학이랍시고 아세빈의 세 군데 병원을 다 다니면서 의사들과 벌써 친분을 쌓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셴은 실소했다. 게덴은 예의를 잘 갖추고 저절로 티가 날 만큼 머리가 좋기 때문에 어른들에게는 환영을 받는다. 아이들과는 어떤지 모르겠다. 친한 친구는 램지와 아뉴르밖에 없는 것 같다.
  셴은 그 아이를 점점 알 수 없어져가고 있었다. 다행히 그 애 눈동자의 침묵만은 늘 고결했다.
  그 눈을 통해서 둘은 연결되어 있었다. 게덴이 그 침묵을 눈꺼풀을 덮어 감아버리고 머리를 기대오면 셴은 그 애의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멀리서인지 환상인지 자신의 것이 아닌 심장소리.
  그럴 때면 먼 꿈이 돌아온다. 꿈이 아니라 현실. 언젠가 셴은 풀 위에 앉아있었고, 다른 자도 풀 위에 앉아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군가와 함께 앉아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죽음과 삶이 함께 앉아있는 것은 아니듯이.
  셴은 눈을 떴다. 어제 바보 같은 시 한 쪼가리를 찾느라 도서관 사서실에서 밤을 샜다. 회의장 의자는 너무 편하다. 마흔이 넘어가자 몸이 조금씩 주저앉는 것을 느낀다.
  셴은 세 자리쯤 건너 앉아있는 친구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목구비는 딱 닫아걸고, 시선만 멀리 풀어놓고 있다.
  서른 일곱이 된 샤뮌은, 나이에 비해 몹시 젊어 보이지만 나이도 필요 없이 노련해 보인다. 그런 인상은 신성한 방식으로만 한 사람 안에서 혼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셴도 나이가 많이 들었다. 결코 저 친구보다 높이 올라가 볼 수는 없으리라.
  위원장이 들어왔다. 회의 시작 시간은 아직 십여 분쯤 남았지만 이때쯤이면 사람들이 다 들어와 있어야 한다. 위원장이 빈자리를 주목했다. “파시파르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까?”
  위원들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파시파르는 원래 시간 관념이 정확치 못한 사람이다. 위원장이 주위를 죽 둘러보더니 말했다. “뭐야, 다들 과일에서 벌레라도 나왔습니까? 얼굴 좀 펴요.”
  “오늘이 그런 날이잖습니까.” 위원 하나가 어깨를 쭉 펴며 말했다. 그는 차라리 도전적으로 위원장을 쏘아보았는데, 위원장은 추천 후 투표로 결정되긴 하지만 업적과는 관계없는지라, 당신도 예외는 아니라는 투였다. 위원장이 기분 나쁠 것도 없이 받아넘겼다. “우리 중에 걱정하지 않아도 될 사람은 하나밖에 없지요, 뭐.”
  위원들이 킥킥거렸다. 샤뮌이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깜박거렸다. 이 친구를 놀리는 건 연례 행사가 될 지경이다.
  옆에 앉아있던 위원이 샤뮌의 어깨를 툭 쳤다. 위원들은 이 친구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위원직 시험날은, 젊은이들이 쳐들고 올라올 수 있는 기회인 반면 현직 위원들이 몇 명이고 사출될 수 있는 날이기도 하다. 위원직은 원로직과 다르다. 원로들은 오십 세 이상만 들어갈 수 있고, 지적인 결정권자라기보다는 윤리적인 면을 맡고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성에 대한 거주민들의 신뢰가 그들의 권위를 결정짓는다. 위원들은 다만 연구 업적상 가장 뛰어나다고 판별되었기 때문에 거기에 있다. 이 지극히 상대적인 경쟁 속에서, 절대적인 사람이 한 명쯤 있다는 사실은 왠지는 모르겠지만 마음 뿌듯한 위안이 된다.
  “아그노스, 아그노스.” 옆의 위원이 친근하게 불렀다.
  “좀 더 힘 써봐.”
  “네?”
  “젊은애들 경력 못 쌓게 말이야. 자네가 다 휩쓸어버리는 거야.”
  “그럼 우리가 먼저 죽을텐데, 이 사람아.” 파시파르가 들어오면서 말했다. “난 그 친구랑 같은 부서라구. 악담하나? 전과시킨 다음에 그런 소리 해 봐.”
  “왜 이렇게 늦은 겁니까?” 위원장이 투덜거리려다가 파시파르의 얼굴을 보고 그만두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죠, 아세빈은 아름답고, 뭐 언제나 그렇듯... 와, 왜 이렇게 더운지 몰라요.” 파시파르가 얼굴을 훔쳤다. 찐득찐득한 땀이 묻어났다. 얼굴은 창백했고, 아주 창백해서 이 나단인의 피를 강하게 받은 사람이 거의 북쪽 피를 받은 샤뮌처럼 보일 지경이었으며, 꿈꾸는 듯한 기색이 눈동자 한가운데에서 번득이고 있었다. 위원 한 명이 중얼거렸다. “병결계를 내지 그러셨어요.”
  “위원회에 빠지면 쓰나요. 몇 명 없는 위원들이 말이야. 아이고...” 파시파르가 자리에 앉으려고 하자 샤뮌이 얼른 의자를 밀어주었다. 샤뮌과 눈이 마주치자 파시파르가 칫, 소리를 내면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나 샤뮌이 별반 표정 없이 고개를 돌리자 묘하게 씁쓸한 얼굴을 했다.
  결정 사항은 별 게 없었다. 무슨 아직 입증되지 않은 화학 제품을 실용화하고 싶다는데 물론 다들 반대했다. 임상 실험도 하지 않은 제품이다.
  건의안을 받는 것도 위원들의 일이다. 법에 교정을 요하거나 새 법을 필요로 하는 건의가 들어오면 위원들의 찬반 여부를 정리한 후 최종 결정은 원로회에 돌리고, 나머지는 위원회에서 처리한다. 이번 주 건의안은 딱 두개 있었는데 하나는 어이없었고 하나는 재미없었다. 양 문건의 사본이 위원들에게 돌아갔다.
  전자는 열다섯 살짜리가 제출한 건데, 건의안을 제출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마자 제출한 심의다. 다들 한번씩 훑어보고 넘기려는데 샤뮌 손에 걸리자 딱 멈췄다. “괜찮은데요.”
  “뭐가요?”
  “잘 썼잖습니까. 열다섯 살이라고 믿어지지 않는데요.” 하고 샤뮌이 셴에게 슬쩍 종이를 들어올려 보였다. 셴은 제출자명을 기입하는 란에서 램지 비렌발트라는 이름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샤뮌이 모르는 척 재청자 서명란도 펜 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셴이 사색이 되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위원장이 나섰다. “잘 썼긴 한데, 내용은 어떻습니까?”
  “내용도 나쁘지 않아요. 뭐 사실 시신을 소유할 수 있게 한다고 해서 크게 피해가 갈 것 같지도 않은데요. 한 명이 전담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희망하는 보호자가 다섯 명 이상일 때니까요.”
  “시체를...” 위원장이 한숨을 쉬었다. “샤뮌, 시체를 자기 집에 두고 싶습니까?”
  “둬서 나쁠 것도 없잖습니까? 썩지 않게 하고, 균이 자라나지 않게 한다면요.”
  “나쁠 건 없지만 굳이 그럴 것도 없지요... 아니, 이게 아니라, 그건 약간 정신이 이상한 짓입니다!”
  “우리의 건전한 거주민들이 그러고 싶다는데요. 정신이 이상하다 해도 공적 생활에 피해가 가는 방향으로 이상한 게 아니라면 그 미친 사람들의 의사를 존중해주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공적인 생활에 피해가 갑니다.” 위원장이 머리를 감싸쥐기 전에 셴이 단호하게 말했다.
  “시신을 돌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섯 명이 하루의 오분의 일씩 나누어서 어떻게 해 보겠다, 생각하나 본데, 그것만으로도 큰 손실이지만 실은 오분의 일씩으로 어떻게 되지 않을 겁니다. 다섯 명이 온종일 같이 신경을 써 주어야 해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세빈에서는 이런 일이 없지만...” 셴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아세빈은 바깥에서부터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나가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다. 사실 인구가 사천 명에 불과한 만큼 아세빈 땅은 좁고, 과학 기술이나 이론에 비해 이론을 실용화시킬 소재가 부족하다. 수입에 기댈 수밖에 없는데 아세빈을 바깥 세계 사람들이 드나들게 할 수도 없고, 결국 이곳 사람이 필요할 때마다 직접 나가서 소량씩 공수해 올 수밖에 없다.
  위원들 중 몇몇이 그런 임무를 맡는다. 누가 그런 임무를 맡는지는 비밀에 부친다. 호기심 강한 사람들이 무슨 부탁을 해올 지 모르기 때문이다. 셴은 몇 년 전부터 그 일을 해 온 경우로, 게덴도 그 때 주워왔다.
  위원들 중 바깥으로 나가는 임무를 반기는 사람은 없다. 바깥 세계는 지독하게 야만적이다. 거리는 정기적으로 소독을 하기는커녕 이태 전 핏자국이 계속 남아있다. 사람을 쳐도 죄를 받지 않으며, 죄를 지었다고 해서 국가가 신민을 목매단다. 셴이 방금 떠올린 것도 바깥 세계의 그런 야만성의 일부다. 셴은 얘기를 슬쩍 바꿔서 이어갔다.
  “제가 문헌들을 읽다 보면, 바깥에서는 시신들을 보관하도록 허락해주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것들을 보관하는 데에 사람들이 얼마나 어려움을 겪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를 들면요?”
  “주로 젊은이들이 자기 형제나 아버지의 시신에 집착하는 이야기들입니다만, 아시다시피 바깥에서는 혈연이라는 게 있고, 가족이라는 필연적인 공동체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살아남은 사람들의 삶이 너무 고통스럽게 망가지고, 따라서 생산력의 낭비가 심해서 결국 첼만같은 나라에서는 이십여 년 전부터 시신의 빠른 유기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권장하게 되었습니다.”
  셴은 목청을 가다듬었다.
  “아무튼 거론할 것이 별로 못 됩니다. 정신병적인 행위이고, 그 정신병은 분명히 공적인 생활에 영향을 미칩니다.”
  “알겠습니다.” 샤뮌이 답하고 물러섰다. 셴은 샤뮌의 얼굴을 흘끔 살폈다. 그 얼굴에는 묘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셴은 혀를 찼다. 그건 방향은 달랐지만 뿌리는 같은 감정이었다. 위원장이 빙 둘러보며 물었다.
  “다른 분들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저는 반대입니다.”
  “저도요.”
  “마찬가지입니다.”
  위원장은 서류 표지에 모두의 서명을 받고 나서 자신의 인장을 찍었다.
  처음 것이 부결되고 나자 위원장이 재미없는 쪽의 안건도 살펴보자고 했다. 표지를 보자 마자 위원장이 미소지었다. “또 이거야.”
  “전에 나왔던 겁니까?”
  “가끔씩 나오곤 하는 그겁니다.”
  위원들이 미소지었다.
  “한번 거절된 걸 일년 내에 또 제출하는 건 위법 아닙니까?”
  “미묘하게 다르긴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낸 거라서...”
  “뭐가 다릅니까?”
  “나쿠드의 집에 들어앉는 것과 카잔키키르께 절하는 것과의 차이랄까요.”
  셴이 감추듯이 킥킥 웃었다. 파시파르만 좀 불만스럽게 뭐라 중얼거렸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하고 숨는 걸 옆 사람이 슬쩍 고개를 내밀어 이 쪽을 쳐다보자 용기를 얻었는지 다시 말문을 텄다. “그 건의 말인데, 다르게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셴이 자못 부드럽게 응시했다.
  위원들은 이거 재미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셴은 문헌학을 하고 있고, 한때 여러 나라의 경전만 수집한 적도 있는 데다가, 몇몇 같은 임무를 맡은 위원들은 셴이 바깥에 실제로 나다니기도 하고 있다는 걸 물론 알고 있었다. 셴은 그 숱한 경험에 기대어 분명히 종교를 싫어했다. 허나 파시파르도 의기충천한 성격이라, 기죽지 않고 말했다.
  “우리 위원들만 해도 왜, 아시잖습니까. 오늘같이 위원직 시험 때마다 완전히 벌레죽 먹은 얼굴 되는 거. 오래 살아남는 위원일수록 간도 제일 빨리 나빠지고, 머리털도 제일 빨리 빠지고, 눈도 누래져요. 말씀드리기 뭣한 일입니다만, 심지어는 약을 하는 위원들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다 그런 건 아니지요.”
  “에이, 이 친구야 저기 저 세상으로 넘겨둡시다.” 하고 파시파르가 샤뮌의 머리를 검지로 쿡 찔러서 밀어버렸다. 위원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종교를 믿어서 나쁠 건 없지 않습니까. 뭐 싸움이라도 벌일라치면 그거야 제도로 막으면 되지요. 종교를 믿어서 분명히 마음에 버팀목은 생긴다 들었습니다. 약을 하는 대신에 신이라도 믿게 되면 좋지 않습니까?”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세 가지 약점이 있습니다.” 셴이 답했다.
  “첫째로, 맘 뚫린 데를 채운다고 하신 데서 알 수 있다시피 자신을 텅 빈 자로 인식한다는 겁니다. 신은 무한히 주는 자니 자신은 받는 자입니다. 받는 자일뿐이니 게을러 질 수 밖예요.”
  “여유가 생기는 것도 좋지요.”
  “학업을 게을리 할거라는 얘깁니다. 게으르면서도 자신의 존재 의의를 여전히 주창할 수 있는 자들이 늘어난다는 겁니다. 둘째로, 아예 게으르기만 하면 좋은데 쓸데없는 데에 힘을 씁니다. 사람들이 아예 할 일이 없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들은 성사를 믿습니다. 나쿠드 교도는 기도를 하고 카잔키키르에게는 절을 합니다. 나쿠드 신의 집을 짓고 카잔키키르의 성을 쌓습니다. 여기에 들어가는 세월과 노동과 시간은 헤아릴 수 없을 지경입니다.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한데 경배하는 데에 모든 것을 쏟아 붓습니다. 즉 그 자리에 머무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쏟아 붓습니다. 말인 즉슨 일단 절대자를 믿어서 자리를 확보해 놓은 다음, 자리를 지키는 데에 주력합니다. 그러나 자리를 그대로 지키는 데에 무슨 힘을 쓸 필요가 있을까요? 말씀하셨던 대로 약을 하는 거지요. 아편을 깊이 들이마시고 다시 뿜어놓는 겁니다. 약을 하는 걸로 실제로 사는 것을 대신하시겠습니까?”
  파시파르는 이 마지막 말에 이상할 정도로 당황해서 고개를 저었다. 셴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셋째로, 그들은 자신의 주는 자에 집착합니다. 나쿠드와 카잔키키르는 아직 바다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지만, 2예니 전 나쿠드 교도와 첸 셰인의 싸움을 예로 들어도 좋습니다. 자신을 부여해 준 자와 연을 끊을 수는 없는 건 당연합니다. 그들은 같은 신을 믿기에 같은 자들입니다. 다른 신을 믿는 것은 다른 자들입니다. 그들은 성사와 더불어 거룩한 역사를 믿습니다. 이는 궁극적으로는 제도로 파할 수 없는 종교의 필연입니다. 윤리는 다양한 타자에게 자신을 의탁하는 것이되 종교는 하나의 진리를 지키는 겁니다. 내가 살육이라 부르고 싶어하는 것도 그 한 예입니다. 아세빈에 종교를 허락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살육이라 부르는 것도 하나의 이야기를 믿기 때문입니다.”
  익숙하고도 늘 생소한 - 추수해 놓은 빛다발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샤뮌이 이런 문제에 자기 의견을 말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위원들의 이목이 쏠렸다. 셴도 좀 당황해서 샤뮌을 쳐다보았다. 샤뮌이 나긋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에게도 거룩한 역사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함께 살고 있을 수도 없을 겁니다. 같은 신을 믿는 자가 같은 자들로 간주되듯, 우리도 같은 자들이라 서로를 간주합니다. 타자에게 자신을 의탁한다는 것부터가 타자 안의 무언가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윤리는 그 자체의 변화 가능성을 포용하고 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종교도 그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의 윤리도 현실적으로 그렇지 못합니다.”
  “허나 우리는...”
  “우리는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자들이 다른 자를 포괄할 수는 없습니다. 하여금 서로를 같은 자로 간주케 하는 윤리가 관용적일 수는 없습니다...” 샤뮌이 예의 그, 비웃는 듯한, 그러나 체념에 대해서만 조소하는 듯한 미소를 떠올렸다. “나쿠드 교의 사제들이 연애를 할 수 없는 것 아시지요?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연인...”
  “샤뮌, 샤뮌.”
  파시파르가 팔 언저리를 쿡쿡 찔렀다.
  “자네 안건이 뭔지나 알아?”
  “응?”
  “내가 아직 문건을 안 넘겨줬는데.”
  하고 파시파르가 사본을 넘겨주고 팔짱을 꼈다.
  위원들이 입을 벌리고 폭소를 터뜨렸다. 그게 아마 샤뮌이 일생에서, 최소한 사람들 앞에 내보이는 그의 일생에서 처음으로 실수를 해 본 때였을 것이다. 셴이 제일 신나게 웃어 제쳤다. 샤뮌이 멍하니 문건을 내려다보고 있더니 곧 읽어 내려갔다. 위원장이 웃음을 거두고 물었다. “그래, 의견은 어떠십니까?”
  “기자재 공급이...”
  “그게 아니잖아. 연인이 뭐?” 파시파르가 한번 더 퉁겼다. 샤뮌이 이마께를 긁적이고는 말을 이었다. “기자재 공급 예산은 마이너스 상태고, 이번 분기 무역 수지도 삼할 이상 적잡니다.”
  “그럼 반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떠십니까?”
  남은 위원들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부결이었다.
  더 별볼일 없는 안건 몇 개를 마치고 나자 회의가 끝났다. 의사당 입구 근처에 와서야 셴이 샤뮌의 어깨를 툭 쳤다. “저 말이야, 게덴이 무릎이 좀 아프다는데.”
  “연골 상해?”
  “그럴지도 몰라. 좀 봐 주겠어?”
  “나 물리학잔데?”
  “의학 박사 학위도 있잖아?”
  “그게 아직도 유효할지는 모르겠군. 시빌르가 낫지 않나?”
  “그 친구 병원으로 일 바꿨대?” “응.” “그런데, 위원들 중에서 임무를 맡는 사람들 있잖나. 왜 그...” 셴이 손짓을 하자 셴이 끄덕거렸다. “알겠어. 그 위원들은 꼭 의사를 데려가야 하지. 바깥 세상 공기는 좀 더럽거든.”
  “그...” 셴이 말을 덧붙이려다가 슬그머니 웃어버렸다. 샤뮌이 푸른 눈으로 셴을 응시하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가늘지만 뚜렷한 미소를 떠올렸다. “너 그렇게 네 정체를 공개해버려도 돼?”
  “어차피 알고 있었을 거 아냐.” 답하자 샤뮌이 더 짙게 조소했다. 셴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너는 언제 맡았는데?” “네 바로 전이었어.” “너도 그 시신들을 봤어?” “무슨 시신?”
  “모른 척 하기는.” 셴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샤뮌이 갸웃하며 말했다. “내 말은, 그게 시신이 아니라는 거야.”
  셴이 홱 돌아보았다. 샤뮌이 말을 이었다. “상대가 살아있기 때문에 상대를 존중하는 건 아니잖나.”
  “오, 샤뮌!” 셴이 웃어버렸다. “됐네, 그만 말하라고! 더 이상 머리가 이상해지고 싶지 않아. 내 꼬마가 벌써부터 웬 얼토당토않은 건의안에 재청자 서명을 했다는 걸로 오늘은 충분해. 애 무릎이나 좀 봐 주게.”
  “저녁에 들르지. 지금은 선약이 있어서.”
  “어딜 가나?”
  “비밀을 원하나, 거짓말을 원하나?”
  “됐네.” 셴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저녁쯤에 샤뮌이 들렀다. 샤뮌은 게덴의 무릎을 좀 살피더니 멀쩡한 거 같다, 그러나 시빌르에게 다시 물어보라고 말했다. “시빌르는 세젠 병원에 있어.”
  “자네보다 나을 게 뭔가?”
  “뼈를 찍을 수 있는 기기가 있지.”
  “아아, 물론...” 게덴이 눈을 깜박거렸다. “무서운 거 아니야.” 셴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쁜 거 같은데요.” 게덴이 종알거렸다.
  셴은 곰씹어보았지만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었다. 샤뮌이 몸을 조금 구부리고 있었다. “아직도 뭐 볼 게 남았어?” 하는데 샤뮌이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게덴이 의자에서 내려서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잠시 후에 샤뮌이 고개를 들었다. 땀투성이였다. 게덴이 물을 가지러 갔다.
  “어떻게 된 거야?” 셴이 중얼거렸다.
  “뭐냐니까?”
  “그러게 말이야.” 샤뮌이 일어나서 물 잔을 받아들었다. “병원에 가 봐.” 셴이 중얼거렸다. “그럴 거야.” 샤뮌이 답했다. 셴이 샤뮌의 팔을 잡아 일으켜 주었다. 그 팔은 생각보다 훨씬 강팔랐다. 셴은 섬득한 기분이 들었다.
  “병원에 꼭 가 보게.”
  “물론이야.” 샤뮌이 머리 구석을 콕콕 두드리며 말을 받았다.
  며칠 뒤 샤뮌이 멀쩡한 얼굴로 찾아와서 게덴에겐 책 한 권을, 자신에겐 두툼한 약봉지를 넘겨주었다. 셴은 어리석으리 만치 반가운 마음을 감추느라 혼났다.
  “이건 뭐야?”
  “기초 전자기학서야. 넌 간이 안 좋다는군.”
  “위원들 검진 결과가 나왔나보지?”
  “그래.”
  “너는 어떻대?”
  “집에 가서 잘 거야.” 샤뮌이 돌아서며 손사래를 쳐 보였다. 그러나 곧 바지자락이 잡힌 것 같은 표정으로 걸음을 멈췄다. 게덴이 골똘한 얼굴로 샤뮌을 쳐다보고 있었다. 셴이 한숨을 쉬었다. “게덴, 샤뮌 피곤하다잖니.”
  “별로 안 피곤해. 뭐가 알고싶어?”
  “램지가 낸 건의안이 통과되지 않았어요.”
  “네가 재청자 서명한 거?”
  셴이 웃음 지었다. “내가 그랬잖니, 위원회에서부터 부결되었다고.”
  “하지만 원로원에도 들어갔을 텐데...”
  “들어갔어. 하지만 너무 당연한 문제니까 원로원도 하루만에 결정을 내린 거 아니니.”
  “샤뮌도 반대했어요?”
  “응.” 샤뮌이 끄덕거렸다. 게덴이 적잖게 실망을 드러냈다.
  게덴은 셴에게는 저런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셴이 게덴에게 거의 달래듯이 시신을 소유하고 싶다고 하는 게 얼마나 미친 짓인지에 대해 말해주었을 때는, 게덴은 그래 당신이라면 그렇게 말할 거야 하는 식으로 고개만 끄덕거렸던 것이다. 셴은 얌전히 둘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하지만 이상하잖아요, 램지가 그랬는데, 공벌레가 살아있는 줄 어떻게 아냐고요. 움직인다고는 하지만 가랑잎도 바람 불면 움직인다고요. 그러니까 반대로 죽은 건 어떻게 함부로 죽었다고 단정하냐고요. 살아있는 건지도 모르는데.”
  “공벌레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알아서 뭐에 쓰겠어?” 샤뮌이 뚱하니 말했다. 게덴이 말문이 막혀서 가만히 있었다.
  “네 건의안은 사람의 시신에 관한 거였지? 그건 쓸모가 있지. 쓸모 있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거야. 사람도 쓸모가 없어지면 죽은 거야. 네가 바깥에서 살다 와서 헷갈리는 면도 있을 거야. 아세빈은 혈연이 없고, 가족도 없어. 보통 한 집에 한 명씩 살고 사생활 보호가 철저하지. 남의 생활에 간섭해서는 안 되고 간섭받아서도 수치야. 육체 노동은 아예 없고 지성만으로 존재 가치와 말하자면 계급이 결정돼. 신을 믿지도 않으니 물질적 형태에 내포된 신성함을 믿지도 않지. 정신과 육체의 이중성을 믿지도 않지. 육체는 주체가 사용하는 것이며 동시에 주체이지 않니. 주체로서가 아닌 육체는 망가진 것이고, 망가진 육체는 단백질 덩어리에 불과해. 더 길게 말하자면 그러니까 장례식도 필요할 리가 없지. 아세빈은 이런 곳이고 이런 곳에서 저런 것은 쓸모가 없는 거야. 넌 이제 이런 곳에 몸담고 있어. 그러니까 저런 사람들은 죽은 거야.”
  “바깥에서도, 예를 들면 나쿠드의 이단자들은 쓸모 없는 인간들이고 죽어 마땅한 인간들이었지만 죽은 걸로 치지는 않았어요.”
  “계속 이단 행위가 이루어질 수 있는데 죽은 걸로 치면 되겠니? 그건 쓸모 없는 게 아니라 병균이지. 그러니까 아예 교수대에 걸어서 죽은 걸로 만들어버리잖아. 정말로 쓸모 없다는 건 그 사람의 사회적인 쓸모 없음과 그 사람의 사회에 대한 자기 주장 능력이 완전히 결합되었을 때일 거야. 또 바깥 세상에서 예를 들자면 빈민은 어떠니? 사회적으로 쓸모도 없지만 자기가 쓸모가 있다고 주장할 능력도 없잖아? 여기서 주장할 능력이라는 건 물론 불쌍한 모습을 보여주고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능력도 포함해. 이 능력도 모자라거나 타자들이 이런 쓸모에 별로 투자하고 싶어하지 않을 때 이 빈민은 방치되겠고, 방치된다는 건 존재하지 않는 걸로 간주된다는 것이니 죽은 거겠고, 결국 심장이 정지할 테니 우리 식으로 말해도 죽은 것이 되겠지.”
  “하지만 난 여전히 공벌레에 대해 말하고 싶은데...” 게덴이 눈치를 보았다.
  “잘못된 건가요?”
  “잘못된 건 아냐. 램지는 절대적인 걸 찾고 있었던 거 같구나.” 샤뮌이 계속 눈높이를 맞추고 있으려니까 힘이 들었는지 아예 마룻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런 곳이건 저런 곳이건 상관없는 걸 원하는 것 같구나. 그런 건 사회에는 없단다. 사회는 필연적으로 이런 곳이거나 저런 곳이야.”
  “그 위에는 아무것도 없나요?”
  “물론 있겠지.” 하고 샤뮌이 미간을 찌푸렸다. 셴이 손을 들어올렸다. “그만 해 두게, 샤뮌. 네가 이렇게 윤리적인 문제에도 취미가 있는 줄 몰랐어. 듣는 것도 재미있긴 한데, 난 네가 집에 가서 좀 쉬었으면 좋겠어.”
  “게덴과 얘기가 아직 안 끝났는데.”
  “아뇨, 괜찮아요.” 게덴이 허둥거리면서 일어났다.
  “죄송해요.”
  “언제든지.”
  샤뮌이 눈을 밝게 떴다가 게덴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셴은 샤뮌의 등을 떠다밀다시피 해서 보냈다.
  “게덴, 샤뮌이 뭐라고 한 건지 이해했니?”
  “네.”
  “샤뮌은 확실히 나보다 말을 잘 하는 것 같구나.”
  “아니요, 샤뮌은 이과 쪽이니까 말을 쉽게 하는 거예요. 셴은 어려운 용어를 자꾸 쓰잖아요.” 하고 게덴이 가만히 셴의 손을 잡았다.
  이럭저럭 보름이 흘렀다. 게덴은 샤뮌의 전자기학 책을 거의 하루종일 파고 있었는데, 좀처럼 진도가 나가는 것 같지가 않았다. 한참동안 들여다보는 듯 하다가도 인상을 쓰면서 다른 곳을 멍하니 응시하곤 했다. 셴은 게덴이 벌써 눈이 나빠진 건가 걱정이 되었다.
  아뉴르는 가끔 게덴네 집에 놀러왔는데, 게덴은 아뉴르와 잘 놀아주지 않았다. 아뉴르는 퉁이 나서 집에 돌아갔다.
  이번 회의 날에는 파시파르가 일찍 나왔다. 셴도 일찍 오는 편인데, 파시파르가 이미 자리에 앉아서 사람이 들어올 때마다 의자를 빙글 돌려 살피고 있었다. 셴과 눈이 마주쳐서도 어물쩍케 인사를 했다. 여전히 눈 밑이 검었지만 깨끗하게 면도도 했고 눈도 맑았다. 샤뮌이 들어오자 파시파르가 덤비다시피 말을 붙였다. “괜찮은가?”
  “뭐가?”
  “이거 말이야.”
  파시파르가 자기 머리 한쪽에 손을 뻗어 보였다가 힘없이 내렸다. 샤뮌이 반 비웃듯이, 반 장난스럽게 웃었다. “기억은 하나보지?” 파시파르가 고개를 떨구었다.
  “자네 힘은 그렇게 세지도 않아. 안심해.”
  셴이 벌떡 일어섰다. 주변에 앉아있던 위원들이 쳐다보았다.
  셴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위원장이 회의를 시작했다.
  별 것 없이 회의가 끝났다. 샤뮌은 여전히 파시파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파시파르가 몇 번이고 사과하는 듯 했고, 샤뮌이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티를 내며 받아넘기고 있었다. 셴은 샤뮌을 불러보려다가 그냥 밖으로 나왔다.
  셴은 자기 얼굴이 뜨거워져 있는 걸 깨달았다. 눈을 끔쩍끔쩍하면서 계속 걸어가다가 분한 생각이 들었다. 셴은 다시 의사당으로 되돌아갔다. 파시파르는 그때까지 앉아 있다가, 이제 겨우 의자에서 엉덩이를 들고 있었다. 셴이 그 뺨을 한대 치려는 듯 손을 쳐들었다가 직전에 멈췄다.
  파시파르가 눈을 크게 뜨고 올려다보았다. 셴은 무시하고 샤뮌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가자구.”
  “방금 아주 재미없는 농담을 봤어.”
  “신고하지 않을 텐가?”
  “농담이었을 텐데 뭘.”
  “농담이 아니야. 감방에 가건 말건 정말로 쳐 버리고 싶었어. 왜 저 자를 고소하지 않는 건가?”
  “왜 고소를 해?”
  “사람 머리를 상해 놓고 사과하면 다라는 건가? 파시파르, 이 친구가 내 앞에서 갑자기 쓰러졌었네. 병원에 다녀온 건 알고 있나?”
  “병원에 가지 않았어.”
  “뭐야?”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었어. 나도 말하자면 의사잖나. 저번에는 피곤해서 그런 거야.” 그러나 센은 샤뮌이 파시파르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피가 확 끓어올랐다. 샤뮌을 한대 치려다가 파시파르한테 소리쳤다. “나가.”
  “샤뮌, 미안하네...”
  “나가라니까.”
  “셴.” 하고 샤뮌이 미간을 약간 좁힌 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장난기가 스며있었지만, 분위기를 가볍게 하기 위한 장난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의지는 완강한 것이다. 셴은 돌아서서 방을 나와버렸다.
  어쨌거나 샤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밖으로 나왔고, 셴이 의사당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고개를 내밀었다. 둘은 말없이 걸어갔다.
  샤뮌은 결코 고맙다고 말하지 않는다. 미안하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하긴 미안할 법한 짓을 당해 본 기억은 나지 않는다. 고맙다고 말하지 않는 건 사람이 어떤 일을 해 줄 때는 그 자신의 욕구에 의해서만 해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샤뮌은 선의를 믿지 않는다.
  이 경우에는 어떤 말이 적합할까? 셴은 고민하다가 그저 샤뮌의 어깨에 팔을 둘러 걸쳤다. 샤뮌이 가볍게 돌아보았다.
  셴은 언젠가의 꿈을 떠올렸다. 스물 두어 살의 젊음과, 맞닿지 않은 신체와, 목 아래 단추를 하나 열어둔 채, 곧고 긴 손가락들로 풀밭을 짚고, 턱을 약간 뒤로 젖힌 채로, 목의 울대가 갸름직한 곡선을 그리며 녹색의 배경위에 떠올라 있었다. 아마빛의 끝이 사라질 듯 말듯 한 밝고 엷은 머리칼.
  셴이 샤뮌의 목을 끌어안았다. 샤뮌이 끌어안은 손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대로 있은 후 셴은 샤뮌에게 사과했다. 샤뮌은 여느 때처럼 받아주었다. 셴은 어쩐지 기분이 좋아져서 뭐라도 할 듯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지만, 결국 매일처럼 책이나 읽으면서 소일했다.
  다른 점이라면 게덴이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았다는 거다. 열시가 넘어서도 애가 나타나지 않자 셴도 손에 책이 잡히질 않았다. 책장을 노려보았다가 시계를 노려보았다가 하고 있으려니 애가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해서는 들어왔다. “왜 그래?”
  “도서관에 책이 없었어요.”
  셴은 눈살을 찌푸렸다가 곧 이해했다. 게덴에게는 중요한 일일 것이다.
  “내일 빌려다주마.”
  “아니, 됐어요. 제가 내일 일찍 빌려다 볼래요.”하고 툴툴대더니 게덴은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셴은 자기가 화낼 때를 놓친 걸 깨닫고 한숨을 쉬었다. 저 후계자는 도무지 책임자 손에 들어오질 않는다.
  나흘쯤 후에 시빌르가 집으로 찾아왔다. 셴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 가운은 언제나 입고 다녀야 하나?”
  “어떤 소식을 전할 때는 쓸모가 있네.” 하고 시빌르가 미묘한 표정을 했다.




2

  샤뮌은 여러 가지 찻잔을 - 배급받는 거야 늘상 똑같지만, 직접 그린건지 새겨넣은 건지 아무튼 푸른 무늬가 생겨있는 찻잔을 - 갖고 있었고, 셴이 마음에 들어하는 게 어떤 건지도 알고 있어서 꼭 그걸 내어주곤 했다. 셴은 이 친구 배려심보다는 기억력에 더 혀를 내둘렀다.
  샤뮌이 기름을 뺀 유자차를 따라주었다. 그는 얌전히 받아먹으면서 말했다. “넌 차 끓이는 법은 왜 배운 거야?”
  “맛없나?”
  “사람들은 여기 위대한 물리학자를 만나러 오는 거라고. 대접까지 해 줄게 뭐 있어?”
  “넌 아니잖아.”
  물리학 협회상 연속 수상자, 시벨리안 상 수상자, 서른 일곱 나이에 이백 여건의 논문, 그 중 사분지 일은 아세빈이 창립된 후 가장 중요한 증명들로 꼽히지만, 그 논문들 중 단 한 건도 제대로 읽어본 적 없는 이 문헌학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그렇지만 나도 널 만나러 오는 거라고.”
  “헛소리하지 말고, 또 뭐가 문제야?” 샤뮌이 예의 기분 나쁘지 않은 조소를 떠올렸다. 셴이 샤뮌과 얼굴을 닿을 듯 말듯 바싹 맞대고 입을 열었다.
  “너와 상담할 수 없는 문제야.”
  “뭔데?”
  “너와 상담할 수 없다니까 궁금해?”
  샤뮌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셴은 찻잔이 텅 비어 있는 걸 알아차렸다.
  잠에서 깨어났다. 게덴이 간단한 아침 식사를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셴이 먹지 않으면 게덴도 먹지 않는다. 셴은 몸을 일으켜서 할 수 있는 한 재빨리 음식을 입에 우겨 넣었다. 게덴이 이도 닦으라고 했다. 셴은 물로 입만 헹구고 나와서 침대로 되돌아갔다.
  어둠 속에는 무엇이든 있다. 죽은 자도 있고, 산 자도 있고, 산 자의 다른 모습도 있고, 죽은 자의 다른 모습도 있다. 죽은 자도 거기에서는 미래가 있는 것이다.
  “오늘은 또 왜?” 하고 샤뮌이 짜증스럽게 들릴 법한 말을 전혀 그렇지 않은 투로 흘렸다. 셴이 대답하지 않자 샤뮌이 자기 찻잔을 내려놓고 뭐라고 투덜거렸다.
  어느 저녁 셴은 후회하며 그 집에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마침내 샤뮌이 귀찮다는 듯이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게덴이 깨우고 나서도 셴은 그 기억 속에서 헤매었다. 꿈과 기억은 더 이상 구분이 되지 않았다. 샤뮌이 알 수 없는 기호로 새겨진 논문을 교정보고 있었다. 셴이 몸을 구부려 뺨을 맞대자 샤뮌이 눈을 감았다.
  침대였다. 볕이 잘 드는 곳이었다. 샤뮌의 머리가 빛에 네모낳게 감싸여 있었다. 반듯한 코가 얼굴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셴이 그 옆에 앉아있었다. 샤뮌은 한번 눈을 떠서 셴의 옆얼굴을 보고 모든 것에 대해 안심하고는 다시 잠들었다.
  셴은 잠에서 깨어났다. 게덴이 시트를 걷어버리고 셴의 몸을 정신 없이 때려대고 있었던 탓이다. 깡마른 주제에 학교에서 요즘 운동이라도 배우는지 게덴의 손매는 제법 매서웠다. 셴은 중얼거리면서 떼밀려 밖으로 나갔다. 밖은 굉장히 더웠고 빛이 땀구멍마다 따가웠다. 며칠을 방에만 처박혀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노란 부분이 있었다. 곧 검은 점들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셴은 고개를 떨구었다.
  돌아오자 게덴이 해바라기가 말라죽어 간다고 알려주었다. 셴은 한참동안 해바라기에 대해 생각했다. 꽃이라는 말과 노란 형태를 곧 떠올릴 수 있었지만 그 두 가지와 해바라기라는 말 자체에 대해서도 셴은 무력했다. 집에 들어가려고 했더니 게덴이 양동이를 안겨주었다. 셴은 그 안에 있는 물을 마셨다. 게덴이 이상한 표정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 얼굴에서 생소함을 느꼈다. 그게 얼굴이라고 깨닫고 있는 자신에 대한 생소함.
  그리고 곧 몇몇 얼굴들을 알아볼 수 없어졌다. 언젠가 보았던 그 얼굴이 지금 보고있는 그 얼굴과 닮았다는 점이, 그렇게 관련지어져야 한다는 것이, 불가해한 일이 되고 말았다. 위원 회의는 나가지 않았다. 게덴이 그에 대해 말해주었을 때 그 숫자가 적힌 종이에서 숫자 외에는 어떤 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날짜도, 약속도, 읽어내야 한다고 약속된 것들은 머리 뒤편에서 소음처럼 엉망으로 속삭일 뿐 분리되어 들리지 않았다. 종이에서는 점차 숫자말고도 인쇄상의 검은 점들과 섬유지 특유의 질감이 두드러져보였다. 금방 숫자와 검은 점들을 구분하는 일이 쉽지 않아졌다. 셴은 벼랑 끝으로 밀려 떨어질 듯한 기분을 느꼈다. 두통이 찾아왔다.
  게덴도 결국 셴에게 밥을 먹이려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어쨌거나 셴은 간혹 오만상을 써 가며 저기 움직이는 것이 자기 후계자라는 것을 깨닫고, 그 애가 괜찮은지 물어보았다. 게덴은 늘 자기는 괜찮다고, 괜찮지 않은 건 셴이라고 대답했다.
  결국 게덴이 의사를 불렀다. 셴은 놀랍게도 그 흰 가운만은 알아보았다. 의사는 마지막 순간에야 자기 이름을 밝혔다. “나 시빌르야.
  셴이 말없이 끄덕거렸다. 시빌르가 셴의 어깨를 두드렸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그냥 푹 쉬어. 계속 자는 것도 좋아.” 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더 이상 잘 수 없다고 생각했다. 침상의 풍경 이후로 다른 꿈은 나타나지 않았다.
  “셴, 저기 말이야.”
  시빌르가 기침을 했다. “샤뮌의 머리 상처 말인데.”
  게덴은 셴이 문득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을 보았다. 시빌르가 더 말 할 필요도 없이 셴이 입을 열었다. “파시파르 데랄.”
  “뭐?”
  “그 자였어.”
  “역시 남한테 맞은 거지?”
  “맞아.”
  “왜 그 자를 고소하지 않았던 건가? 그 친구가 이후로 병원에도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친구 자신의 불찰로 되기가 쉬워. 하지만 뇌출혈은 이 상처 때문에...”
  “사람 좋은 친구니까.” 셴이 중얼거렸다.
  “나 그 사람을 내가 대신 고소하려고 하네. 그런데, 자네 증거는 있나?”
  “내가 증인이 될 수는 있네. 짚이는 것도 있고 말이야.”
  시빌르가 간 후에도 셴은 한참동안 그 이름을 되뇌었다. 파시파르 데랄. 애가 방으로 들어오자 셴이 고개를 올려 쳐다보았다. “게덴이구나.”
  “네.” 게덴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셴은 달력을 보았다. 천천히 눈앞에 상이 맺혔다. 위원회의가 나흘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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