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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바로 걷는다. 새로 산 옷가지와 부츠, 그리고 액세서리로 치장한체, 좋아하는 거리를 걷는다. 소중한 헨드폰 액세서리가 자신도 몰는 사이 끊어져 사라지는 날, 이렇게 꾸미고 걷기로 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 예감하면서, 속옷까지 뺴놓지 않고 한 벌 예쁘게 사놓았다. 비굴하지도, 사치스럽지도 않은 가격대에서 세일 기간을 피해 고르고 골라서 하나 하나 사모아 옷장에 걸어두었다. 그 소중한 준비물을 오늘 꺼내 입었다. 그렇게 정했으니까.
  날짜를 세어보진 않았지만, 자매 같은 친구를 떠나보낸지 한참이다. 친구는 인터넷은 고사하고 전화조차 부족한 나라로 긴 유학을 떠났다. 우리가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떠나가 버렸다. 편지는 삶이 가로막아 반년이 가도록 두 통을 주고 받았고, 전화는 좀 더 받았다. 그런데도, 그를 한탄할 여유도 없이 시간은 좁고 가늘게 그리고 가쁘게만 흘렀다. 친구가 떠나며 선물한 핸드폰 액세서리만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둘이서 이대거리를 쏘다니다 산 악세서리였다. 아침 일찍부터 만나서 영화도 보고, 로즈베리 소스를 잔뜩 토핑한 요구르트 아이스를 먹고, 오리지날에 들러 떡볶이와 오징어 튀김을 먹고, 희귀하지만 가치를 판단하기 힘든 옷가지와 악세서리를 구경하며 돌아다녔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친구가 악세서리 하나를 집어 들었다. 한참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그녀의 핸드폰에 어울릴거라 말했다. 그녀의 핸드폰은 검은 대리석 빛깔을 띄었고, 친구가 집어든 악세서리는 백금으로 만든 작은 날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색도 모양도 어울렸지만, 그녀는 불안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전에도 핸드백이며, 주머니에 험하게 넣고 다니느라 참 많은 악세서리를 잃어버린 추억이 떠오른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친구는 재빨리 돈을 치르고, 그녀의 핸드폰에 악세서리를 달아주었다. 환하게 웃으며 선물이라 말하는 친구의 마음을 그녀는 거절하지 못했다. 그리고 조심해서 가지고 다니자. 그렇게 다짐했다.
  그리고 친구는 떠났다. 연락은 시간만큼이나 점차 가늘어지더니, 끊기고야 말았다. 찾아갈까 생각도 해봤지만, 직장일이며 돈이 여의치가 않았다. 외로움은 곧 절망감으로 변했고, 자신도 모르게 옷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마치 옜어른이 수의를 장만하듯이. 그렇게 곱게 고르고 골라 예쁘게 한 벌을 맞췄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핸드폰 악세서리는 이제 곧 떨어질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 날을 고대하면서, 두근두근 하루하루를 살았다.
  하지만, 장식줄은 끈질기게도 헨드폰 곁을 떠나지 않았다. 마치 지독한 감기처럼 혹은 오랜 지병 마냥 핸드폰을 떠나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주머니 속에 구겨 넣고 다녀도, 어지러운 핸드백 속에 깊숙히 찔러넣어도, 악세서리는 꿈쩍도 하지 않고 그녀를 따라 다녔다. 결국 그 날을 체념하고, 또 포기하고 지내려는데, 어제 저녁 퇴근 길에 악세서리가 사라지고 없음을 깨달았다. 거짓말처럼, 악세서리는 주머니 속에도, 핸드백 속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느날 아침 스스로 더 이상 어린애처럼 굴수 없음을 깨달았던 순간처럼, 경악에 가까운 전율이 온몸을 휘감았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울면서 샤워를 했다. 그리고 준비해 놓았던 옷을 꺼내어 아침 출근길에 입을 수 있도록 문고리에 걸어두었다. 잠자리에 누워 악세서리를 떠올렸다. 백금 날개는 언제 어느 순간에 어디로 그녀를 떠나 날아갔을까. 그런 동화 같은 상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오랜만에 화려한 외출을 했다. 그녀는 몸을 바로 세우고 걸었다. 상쾌하면서 선뜻한 새 옷의 감촉이, 그리고 내음이 그녀를 감싸 돌았다. 아끼는 향수를 아낌 없이 뿌리고, 큰 마음 먹고 산 화장품도 큰 마음 먹고 넉넉히 찍어 바르고 문댔다.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만난듯한 그녀를 보고 사람들은 놀랐다. 무슨 일이라도 있냐고 물으면, 그녀는 그냥 웃었다. 별일 없어요.라고 웃고는 오늘은 일찍 퇴근하리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시간에 맞추어 직장을 나섰다. 내러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거울을 들여다보며, 그녀는 생각했다. 오늘 나는 너무나 아름답구나.
  약속은 없었지만, 예정은 있었다. 친구를 직장 근처까지 불러내는게 부담스러워, 같이 가보자고 마음만 먹고 있던 까페에 들릴 생각이었다. ‘피곤하면, 이리와요.’ 그런 은근한 이름의 까페였다. 오래전에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까페는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녀는 간판을 멀리서 확인하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꼭 둘이서 가고 싶었는데, 하고 아쉬움 마음을 품자마자 더럭 겁이 난다. 그리고 의문이 든다. 나는 왜 굳이 저 까페에 가려 하는가. 또 거기에 무슨 의미를 두려하는가.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바로 선다. 몇 사람이 그녀의 어깨를 스친다.
  작정한 걸음이었는데도 그렇게 걸음이 멎는다. 친구를 버리러, 묻으러, 잊으려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는 자신에게 놀란다. 그저 연락을 주고 받는게 힘들고, 오래 걸릴 뿐인데 내가 이래도 괜찮은지 의심스럽다. 내일 당장 편지함에 친구의 편지가 꽂혀 있으면 어쩌나 싶은 괜한 두려움도 든다. 그래, 좀 더 이해하고 참으면 그만인데, 무슨 멋을 부리려 드는건지 죄스러운 느낌이다. 소중한 친구를 핸드폰 악세서리처럼 잃어버리려 들다니.
  그녀는 한참을 우두커니 서있다 마침내 다시 똑바로 서서 걷는다. 그래도 까페에 들러야 할 것 같다. 오래전부터 가고 싶었다. 그래서 가는 것뿐이라고 다짐한다. 마침 오랜만에 편지라도 쓰려면 재미있는 이야기거리라도 있어야 할 테니 꼭 들르고 싶다. 오늘 너랑 가려고 했떤 까페에 혼자서 들러봤어. 그래, 편지글의 시작은 이렇게 해두자.
급한 걱정의 격정을 넘어선 탓인지 한 것도 없이 피곤하다. 그녀는 갑작스레 지친 발걸음으로 2층 까페로 올라서는 계단을 밟고 선다. 멀리서 보고 지나치기만 했는데, 이렇게 계단에 발을 디뎌보기는 처음이다. 검은 계단과 난간, 베이지색 벽과 천정에는 램프를 흉내낸 하얀 램프가 서넛 붙어 어둠을 필요한 만큼만 걷어낸다. 그리고 저 위에 붉은 꽃문양을 커다랗게 새긴 검은 문이 하나 보인다. 어쩐지 까페답지 않은 몽롱한 관경이다. 그것도 눈이 삐딱한 사람에게는 싸구려 유흥 주점으로 오해받을 수 있을만큼이나. 그녀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힘을 내어 계단을 오른다. 나즈막한 커피향이 살짝 코끝을 스친다. 그래, 이곳은 까페지. 그녀는 문을 열고 들어선다.

  나영에게.

  안녕, 오랜만이야. 나 혜경이야. 오늘 너랑 꼭 같이 가고 싶었던 까페에 혼자서 들러봤어. 몇 년이나 지난 일인데, 그 까페 용케도 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더라. 아마 네가 돌아올때까지도 망하지 않을 것 같아. 그때는 꼭 같이 와보자.
분위기도 딱 우리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야. 조금 몽롱하다고나 할까. 가게는 약간 넓은 편이야. 그리고 제대로 꾸민 바가 있다. 제대로 꾸민 바가 있는 까페는 이대 앞 비미남경 정도였는데, 여긴 더 크고 높아. 바 빼고는 4인용 테이블이랑 소파가 벽쪽에 붙어서 죽 들어서 있고, 까페 가운데에는 6인용 테이블랑 소파가 딱 4조 모여있어. 가만 있어보자, 테이블 마다 공기 청정기가 있어. 색조는 검은색이랑 갈색이 대부분이네. 인테리어는 고풍스럽다기 보다는 아늑해. 몇 시간이고 떠들 수 있을 것 같아. 우리 같은 손님이 대부분이면 본전도 못뽑겠다, 그지?
방금 메뉴를 받았는데, 아, 나 바에 앉았어. 의자 높이도 적당하고 쿠션도 괜찮다. 나중에 우리 둘이 꼭 붙어 앉아봐도 좋을 것 같아. 메뉴 이야기 마저 해야지. 메뉴는 2권이야. 하나는 보통 까페 메뉴판이랑 똑같고, 하나는 좀 복잡하다. 복잡한거는 커피 매니아 용이래. 무슨 커피가 이렇게 비싸니. 일단 그냥 간단히 아메리칸을 주문했어. 오늘은 그냥 정찰온거니까. 그래, 너랑 올만한 곳인지 정찰 온거니까. 그것만 주문할거야. 그거 말고 특별히 눈에 띄는건, 바 안쪽 전시장에 손바닥만한 불상이야. 순금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굉장히 깨끗하고 섬세한 불상이야. 유리 상자 안에 들어있는데, 중국집도 아니고 까페 진열장 한가운데 불상이 있으니까 좀 우습네. 주인이 불교도인가봐.
쿠키가 나왔어. 서비스래. 건포토가 박힌 호밀 쿠키가 두 개야. 데워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한 개만 먹을게. 나중에 둘이서 한 개씩 먹자. 수제는 아니라 빵집에 부탁해서 사오는거라는데, 아, 맛있네. 그래도 한 개만 먹을게. 커피도 나왔다. 아메리칸이야 다 그게 그거지. 맛이 특별한지는 잘 모르겠어. 호밀 쿠키 서비스로 버티고 있는가봐.
처음 오신거면 마일리지 카드 만들래. 열 잔 마시면 한 잔 서비스고, 서른 잔째에 커플 컵 세트를 주고, 오십 오잔째에도 뭔가 줄 예정이라네. 오십 잔까지 참고 버틴 사람이 아직 없다나봐. 내가 커플 컵 세트 받을만큼 준비해놓을까? 딱 두 잔 남겨놓고 널 기다리고 있어볼까? 모르겠다. 일단은 만들어둘게. 너랑 다시 올거니까. 어쩌면 좋을는지, 답장에 적어줘. 메모지가 거의 끝나간다. 집에 가서 마저 적어봐야겠어.

p.s 참 여기 까페 이름이 뭔지 알아? ‘피곤하면, 이리와요.’야. 웃기지?
mirror
댓글 2
  • No Profile
    하늬 05.09.22 11:24 댓글 수정 삭제
    판타스틱한 글들을 즐겁게 맛보고 있습니다. ^^*
    응, 나도 알아 이런거- 하면서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글들이 참 맛깔스럽네요. 특히 권총이라든가 용서라든가-
    근데 두번째 읽는 글이어서 그런지 한가지, 건포도의 오타를 발견해버리고 말았군요. 이런;;
    왠지 제가 민망하지만 살짜쿵 올려두고 가겠습니다.
  • No Profile
    정대영 05.09.27 02:09 댓글 수정 삭제
    변변찮은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 _)
    오타는 나중에 애진님께 꼭 드려서 수정토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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