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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영 판타스틱 권총

2005.01.28 20:0901.28

작은 잔 속에서 검은 음료가 김을 내뿜는다. 적당한 광택을 지닌 검은 겉에 정갈한 금테를 두르고, 음료가 담긴 안쪽은 새하얀 모습이 마음에 든다. 다만 1.5리터 음료수 뚜껑마냥 조그마하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에스프레소, 갓지아라 부르는 압착기에서 뽑아낸 커피 원액이 반잔 정도 들어있다. 그걸 조막만한 예쁜 컵에 담아서 7천원을 받는다. 한 모금으로 잔을 비우기 딱 좋지만, 그 산뜻한 뒷향을 냉큼 즐기기에는 너무나 비싼 가격이다. 게다가 약속 시간은 아직 20분이나 남아 있었다. 차라리 샐쭉하니 긴 유리잔에 스트로와 함께 나오는 아이스 티 같은 걸 시켜서 혓바닥만 축이며 기다렸어야 했다. 매일 출근길에 들리는 테이크 아웃 샌드위치 가게에서 세트 음료 중 하나였던 에스프레소를 마실까말까 망설인 탓일런지도 모른다.

  “어서 오세요.”

손님이 들어올 때마다 종업원이 바쁘게 움직이며 딱 듣기 좋은 목소리 크기와 억양으로 맞이한다. 빈 자리로 안내하는 팔 동작도 걸음걸이로 꽤나 수려해서 바라만 보아도 어쩐지 흐뭇하다.

  “금연석이신가요?”

약속 시간 19분전에 들어온 손님은 기다리는 여자가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고 매력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여고 시절, 다 똑 같은 교복을 입어도 어딘가 반짝반짝 빛이 나는 그 여자를 기다리는 중이다. 다섯 혹은 여섯이 둥글게 모여 앉아 참 예쁘다고 남자와 사귀지 말고 계속 그렇게 반짝반짝 빛나달라고 부탁한 그 여자를 기다린다. 혹시 늙어서 빛을 잃으면, 우리의 이상과 추억을 위해 그냥 죽어달라고 부탁했던 그 여자를 오늘 만난다. 스물 여섯의 여름 이후로 꼭 사 년 만이다. 어제 밤 느닷없이 만나자 약속했다. 벌써 서른 다섯 살이라고, 서른 다섯 살인데도 결혼 못한 동창이 둘이라고, 거기다 유난히 추운 겨울이라고 헨드폰을 붙잡은 채 깔깔거리며 웃었다.

  “어서 오세요.”

들이키는 대신 진한 커피 냄새에 코를 묻고 있다가, 종업원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든다. 한 눈에 시선이 끌린다. 눈이 부실만큼 하얀 피부가. 고고하고 솟은 콧날이, 적당히 도는 도톰한 붉은 입술이 보인다. 베이스와 소프트 파우더만으로 정리한 깔끔한 얼굴, 라벤다 색 립 라이너와 핑크 색 립스틱으로 돋보이는 입매, 그리고 엷은 카푸치노 빛깔의 아이 메이크 업을 바탕으로 도드라진 검은 아이 라이너와 마스카라가 가슴을 저민다.

  “여기야.”

그 아름다운 얼굴과 마주 볼 때를 기다려, 살짝 손을 들어 보인다. 기다렸던 얼굴이 엷은 눈웃음과 살짝 주름지는 미소를 지으며 이쪽으로 걸어온다. 검은색 니트로 짠 헌팅 캡, 핑크 색 머플러와 어두운 체크무늬의 트위드 코트, 그 안쪽으로 하얀 색 폴라 폴리오 티와 곤색 A라인 플리츠 스커트를 입고, 헤나 문신 문양을 넣은 검은 스타킹과 짙은 갈색 롱 부츠를 신고 자신만만하게 걷는다.

  “오늘 정말 춥다.”

광고 모델처럼 걸어와 라디오 심야 방송의 아나운서에 어울리는 낮고 짙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메고 있던 핸드백을 테이블 한쪽에 올려놓고는 사뿐히 앉는다. 아름답다. 단지 핸드백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무광 재질의 검은 가죽 핸드백은 무늬 하나 없이 단정하고 예쁘지만, 오늘 차림에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크다.

  “언제 왔어?”
  “한 30분 전에.”
  “뭘 그렇게 빨리 왔어.”
  “회사가 가까운 김에 일찍 퇴근하다 보니까.”

종업원이 주고 간 메뉴를 펼치면서 입술을 깨문다. 살짝 주름지는 미간이 마음에 든다. 그럴 때면, 영롱한 눈동자에 수심과 같은 깊은 그림자가 드리우는 모습도 아름답다. 발을 동동 구르고 싶은,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태가 마음을 헤집어놓는다.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

  ‘나올 수 있어?’

모두가 고통에 젖으면 저 아름다운 자태를 보려 했다. 일년 혹은 이년 만에 무슨 핑계라도 만들어 동창회를 열었다. 지친 하루 끝 바보상자 안쪽의 먼 미남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는데 만족하지 못하고, 눈앞에서 보고 곁에서 느끼고 싶은 탓이었다. 거대하고 몰염치한 욕심에 불과하더라도,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내일은 어느 때보다 더 아름다울 거야.’

수화기 너머에서 그윽하게 깔리는 그 자신만만한 대답부터 온몸을 저리게끔 만들곤 했다. 그리고 만나는 날에는 숨결마저 얼어붙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래서 늘 결혼을 말렸다. 늘 멋진 곳에 있기를, 눈부시게 살아주기를 원했다. 한 사람 한 사람씩 결혼하고 모임에서 떠나가면서도 마지막까지 그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근데, 무슨 일 있어?”
  “뭐가?”
  “먼저 만나자고 한 거, 처음이야.”

먼저 만남을 약속하는 건 항상 욕심 쪽이었다. 마치 제사를 올리고 간청하듯이 조심스레 전화를 걸고 그 모습을 보여 달라 빌었다. 하지만 어제는 먼저 전화가 왔다. 무슨 계시처럼, 거부 할 수 없는 명령처럼, 그렇게.

  “작년 생각나서.”

아이스 카페 모카, 초콜릿 시럽은 3분의 1만 넣고, 휘핑크림은 아주 빼달라는 주문과 함께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인다. 작년에는 동창회가 없었다. 스물아홉 살의 해, 하나를 뺀 모든 욕심이 결혼과 함께 멀리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저기 횡단보도.”

담배 연기를 훅 내뿜으며, 고갯짓으로 창 밖을 가리킨다. 7층 높이에 있는 까페라 거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높이도 넓이도 넉넉한 창으로 내려다보이는 거리에는, 다행스럽게도 횡단보도가 하나 보일 뿐이다. 작년 생각이 놓인 곳은 바로 저곳이다.

  “작년에 저길 건넜어. 파란 불 기다리는데, 여자 하나가 옆에 섰어.”

수수한 화장과 단정한 옷차림이 어쩐지 묘하게 눈길을 끌었다.

  “어깨까지 닿는 생머리가 예뻐서 계속 쳐다봤지.
  가능한 여러 각도에서 보고 싶어서 주춤주춤 따라 갔는데,
  갑자기 걸음을 멈추는 거야, 횡단 보고 한 가운데인데,
  파란 불을 깜빡이는데.”

놀라서 바라 본 얼굴은 금방이라도 폭소를 터트릴 만큼 웃음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더니 크게 외치는 거야. 이 거지 같은 세상아… 하고.
   대낮에 이 사람 많은 거리에서 소리 치더라구.”

이리저리 살펴보느라 곁에 서있는 호기심마저 부끄러워질 만큼 커다란 소리였고, 돌아보니 모두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버려두고 얼른 건너려는데, 핸드백 속에서 뭘 꺼냈는지 알아?
   권총을 꺼내더라고.”

꽉 쥔 주먹에서 손가락 두개를 펴 들어 권총을 그린다. 그 아름다운 손목과 손매, 그리고 손가락 끝을 관자놀이에 붙이더니, 어쩐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속에 담았던 연기를 몰아서 뱉는다.

  “놀랐어.”

사람이 죽으며 쏟아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본듯했다. 피, 살, 뇌 조각, 뇌수, 뼈 조각이 횡단보도 위에 너저분하게 흘렀다. 비명 소리가 귀를 찔렀다.

  “그 난리가 났었는데,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뉴스나 신문에는 나오지 않더라구.”

처음에는 모든 것이 궁금했다. 어떤 여자인지, 무슨 까닭인지, 무엇이 있는 건지. 거리를 걸으면서도, 일을 하면서도, 하루종일 궁금했다. 물론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고, 알아낼 수 없었다. 인터넷을 미친 듯이 헤집어도 그런 이야기 한 줄 찾을 수가 없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던 걸까, 바로 옆에서 피를 뒤집어 쓸 뻔했던 스스로가 의심스러워질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아, 정말 미치겠더라. 근데 그렇게 몇 달 지나고 나니까
   딱 한 가지만 궁금하더라구.”

권총은 어디서 구했을까.

  “그게 작년이야. 아마 다음주 목요일이 딱 그 날 일거야.
   잊을 수가 없어.”

정말 잊을 수가 없다고 담배를 재떨이에 구겨 넣는다. 담배 꽁초마냥 이야기가 끊긴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래도 한 편의 광고를 본 것만 같아 만족스럽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뜨악한 장면 하나로 인상을 심어놓고 끝나는, 그런 잘 만든 괴팍한 광고 한 편을 본 것 같다. 저 아름다운 얼굴과 수려한 자태와 그윽한 목소리를 빌어서 말이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오늘도, 그래, 오늘도 여느 때보다 멋지다.

  “다 폈네.”

테이블 위에 놓인 샐쭉한 유리잔, 아이스 카페 모카를 빨대로 물고 한 모금 쭉 들이마시더니 빈 담배곽을 재떨이 옆에 내려놓는다.

  “얼른 사 갖고 올께.”
  “응.”

고민하듯 미간을 다시 아름답게 잠시간 구기고는 사뿐하게 일어서서 또각또각 분명한 존재감을 남기며 걸음을 옮긴다. 헌팅캡 아래로 어깨 근처까지 내려온 생머리가 걸음에 따라 찰랑 인다. 트위드 코트 자락 아래와 롱부츠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검은 스타킹도 시선을 끈다. 콧등이 시큰해진다.

  “저기요, 리필이요.”

안쪽 어디에선가 누군가 외치듯 종업원을 부른다. 콧소리가 조금 섞인 높은 음역의 목소리가 단번에 귀를 찌른다. 시큰한 콧등이 단번에 가라 앉아 버릴 만큼, 경박하고 천한 목소리다. 그렇게 태어나서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해심을 품을 수가 없다. 상한 기분을 창 밖으로 옮긴다. 혹시 담배를 사러 나간 모습을 멀리 서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 모습을 보고 기분이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대감 가득히 창 밖을 내다보는데 문득 테이블에 얹은 팔꿈치가 떨린다. 완벽한 아름다움에 유일한 흠이었던 커다란 무광 흑색 핸드백이 테이블 위에서 몸을 떤다. 모르는 전화를 받을 수는 없지만, 심하게 떨리는 진동이 마음에 걸려 핸드백으로 손을 뻗는다. 의자 쿠션 위에 올려놓아 소리를 숨겨 보려는데, 손잡이를 쥐는 손에 섬뜩한 무게가 실린다. 핸드백이 커서 화장품이니 하는 일용품을 구겨넣은 무게가 아니다. 무언가 생소한 느낌이다. 차갑고, 단단한 알 수 없는 물건이 들어있는 느낌이 든다. 핸드백을 들어 옮기려다 말고, 손을 뻗어 핸드백을 매만져본다. 가죽 너머 무엇이 들어있는지, 소름이 돋을 만큼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저기요, 여기 메뉴 좀 갖다 주세요.”

그저 손을 가져 다 대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으니, 힘을 주어 눌러본다. 처음에는 희미하게 떨리는 핸드폰이 와 닿는다. 핸드폰은 몸을 떨면 떨수록 무언가를 타고 핸드백 아래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 주변에는 화장품이 빼곡하게 들어차 진동과 함께 공명한다. 사이사이 끼어있는 얇은 느낌은 필시 영수증이나 길에서 받은 광고지 같다. 그렇게 짚어나가다 조금 더 깊은 곳에서 단단한 것을 찾아낸다. 화장품 병을 타고 한 겹 걸러 매만질 수 있는 단단한 물건은 차갑다. 그리고 커다란 핸드백 속에 묵직하게 자리할 만큼 크다. 이리저리 생김새를 더듬어본다. 단단하고 차가운 물건은 길쭉하게 뻗어나가다 끝머리에서 직각으로 꺾여 잠시 길쭉하게 뻗다가 끝난다. 그 모양새를 대강 짐작으로 떠올리고 나니, 소름이 돋는다. 더 이상 손을 댈 수가 없어 화들짝 떨어져 앉아 핸드백을 더듬던 손을 포개 쥔다. 몸이 떨린다. 심장이 울린다. 세상에, 정말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럴 수가.

  “어서 오세요.”

물건을 훔치기라도 한 것처럼,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숨이 덜컥 내려앉는다. 얼굴이 달아올라 누가 들어오는지 확인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다. 눈 앞에 작은 잔이, 잔 속에 담긴 검은 액체가 커다랗게 다가온다. 급한 김에 도움이 될까 싶어 에스프레소를 단 번에 입안에 털어넣는다. 경련이 일어날 만큼 쓴 액체가 혀를 적시고 입안 가득히 지독한 여운을 남기며 목을 지나 뱃속으로 들어간다. 어쩐지 위가 쓰리다.

  “뭐 하는 짓이야? 에스프레소 처음 마셔봐?”

엄청난 쓴 맛에 멍해진 정신을 차리는 사이, 맞은 편으로 돌아와 담배를 입에 문 체 웃음을 섞어 묻는다. 차갑게 식은 쓴맛이 기분 나쁘게 입안 가득 들러붙었지만, 핸드백을 더듬었다는 사실을, 무서운 감촉을 발견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아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든다. 다행이다, 정말로.

  “전화 왔었어.”
  “전화?”

입안 가득 남은 쓴 맛을 혀로 긁어내며, 일단 말을 돌린다. 시선이 닿는 곳에서 불쑥 열리는 핸드백을 바라볼 수가 없어 창 밖을 내다본다. 간신히 달래놓은 얼굴이 또 달아오르려 든다.

  “집이네, 오늘 늦게 들어간다고 했는데 까먹었나 봐.”
  “서른 다섯 살 먹어도 똑같네.”
  “그러게.”

웃으면서 핸드폰을 내려놓는다. 마치 다시 연락할 생각이 없어보이는 그 모습에 두려운 마음이 든다. 묻고 싶다. 핸드백 안에 든 그 커다란 물건은 뭔지 물어보고 싶다.

  “왜 결혼 안 해? 애인 없어?”

가슴 언저리가 아프다. 아무렇지도 않게 담배 연기와 함께 질문을 던지는 모습이 가슴 아프다. 그 모습마저 욕심만큼 아름답다는 사실에 울컥 심장이 조여 든다.

  “그냥 살다 보니까.”

얼버무리듯 대답하고 입을 다문다. 실은 할 이야기가 없다. 어제 전화 하면서 다 이야기 했으니까. 지금 무얼 하고 사는지. 어디에 사는지. 요즘 마음에 드는 건 무엇이고, 정말 정 떨어지는 건 무언지. 근래 가보고 마음에 들었던 곳, 정말 두 번 다시 가기 싫었던 곳. 그리고 할 이야기가 떨어진 다음에야 얼굴 보자고 약속했다. 마치 덤을 얹어주듯이 오늘 밤 이 빌딩 7층의 비싼 커피숍에서 만나자고 했다.

  “오랜만에 보니까 좋다.”

뜬금없는 말을 던지고는 웃는다.

  “응.”

따라서 웃어 보이며, 말을 찾는다. 놀라서 욕심이 죽고 나니, 할 말이 없다. 그 동안 무슨 말로 오랫동안 잡아두고 웃고 떠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마지막 한 대를 피우고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듯한 저 아름다움을 어떻게 곁에 잡아두고 있었을까. 이제 아름답게 떨어질 순간을 준비하는 꽃잎을 무슨 수로 동여매고 있었을까.

  “이거 마시고 일어서자.”

담배 연기가 멎는다. 핑크 빛 입술이 검은색 스트로를 감싸 물고, 숨을 들이마신다. 속이 차오르는 스트로의 검은 빛깔이 한층 진해진다. 숨이 멎을 것만 같다.

  “저기.”

딱 하나 수가 있다. 스트로를 감싸 무느라 동그랗게 만 입술처럼 동그랗게 뜬 눈이 부름에 답한다. 무관심한 눈빛이 의식용 칼처럼 가슴을 찌른다.

  “다음주에도 만나자.”

커피를 들이키며 고개를 끄덕인다. 눈빛만큼이나 무심한 고갯짓이다. 돌아서고 나면 잊어버리겠다는 신호 같다.

  “다음주 금요일이나 주말에.”

또 고개를 끄덕인다. 무슨 말을 했더라도 끄덕였으리라는 듯이 선선히 그리고 가볍게 신호한다. 당장이라도 낭랑한 웃음을 터뜨릴 것처럼 잔뜩 미소를 머금은 채로. 짙게 물든 스트로가 꼬리부터 천천히 진한 빛깔을 잃더니, 마침내 연한 색으로 돌아온다.

  “내가 계산 할께.”

물고 있던 스트로를 놓아주고는 바로 몸을 일으켜 세운다. 들기 무거운 핸드백을 가볍게 들고서 자신에 찬 걸음걸이로 카운터를 향해 걸어가버린다. 얼른 짐을 챙겨 그 뒤를 쫓는다. 무어라 말을 하려해도 딱히 내뱉을 말이 없다. 그냥 곁에 주춤거리며 서서 지켜볼 수 밖에 없다.

  “만 오천원입니다.”
  “여기요.”
  “네, 이만원 받았습니다. 여기 거스름 돈 오천원이구요.
   영수증 필요하세요?”
  “아뇨,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네, 수고 하세요.”

앞장 서 나가는 뒷모습을 쫓아나가는데, 근처 종업원들이 입을 모아 인사한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돌아서서 다음주에 또 올게요. 하고 말하고 싶은 바보 같은 충동을 느꼈지만, 문 앞에 바로 서있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가자.”

결국 아무 말도 못하고 엘리베이터 오른다. 겨우 7층이고, 엘리베이터는 금세 1층에 닿아 입을 벌린다. 자신만만한 걸음을 따라 주춤거리며 걷는 사이, 어느 사이 찬 바람이 부는 거리다.

  “전철 타고가니?”
  “건너가서 버스타고 갈 거야.”

말이라도 한 마디 더 붙여보다 생각지도 못한 답을 듣는다. 쓴 맛에 쓰린 속에서 불길이 솟는다. 순식간에 손이 검은 무광 핸드백을 뺏어 든다. 무거운 백을 격하게 뺏어 드느라 손목이, 어깨가 시큰하다.

  “다음주에 꼭 만나.”
  “왜 그래?”
  “다음주 금요일에 만나.”
  “알았다니까.”

거짓말을 하는 얼굴이 곱고 예쁘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놀란척하는 그 얼굴이 너무나 아름답다.

  “일부러 결혼 안한 거야.”

새빨간 거짓말을 같이 한다. 툭 뱉어버린다.

  “뭐?”
  “계속 보고 싶어서 결혼 안한 거야.”

사실은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없었다. 욕심만큼 채워주는 남자가 없었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잡고 싶은 남자가 없었다. 그래서 결혼을 할 수 없었다.

  “거짓말 하지 마.”
  “조금 있으면 서른여섯이야. 거짓말 아냐.”

엉터리 이유를 들이밀고 거짓말이 아닌 척 한다. 같이 거짓말 하는 아름다운 얼굴이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그 표정도 예쁘다.

  “다음 주에 만나서 또 뭘 해. 뭐가 다른데?”
  “영화 보고, 그 다음에 수다 떨고, 노래방 가자.
   중간에 한 잔 해도 좋고, 그러니까 주말이 좋아.”

난처한 얼굴이 잠시 망설이더니, 웃는다. 체념 같은 미소지만, 마음에 든다. 눈빛도 지친 기색이 돌지만, 역시 마음에 든다. 얼굴에 서른여섯 살의 주름이 티가 나더라도 마음에 든다. 다 마음에 든다. 모두가, 전부 다.

  “알았어.”

살짝 내미는 손에 핸드백을 도로 쥐어준다. 무거운 탓에 내민 손이 잠깐 아래로 처진다.

  “피곤하다.”
  “택시 타고 가.”
  “응.”
  “전화할게.”
  “응, 전화해.”

약속을 하고 돌아서서 걸어간다. 횡단보도 곁에 줄지어선 택시를 하나 잡고, 타기 전에 손을 짧게 흔들어 보인다. 그리고 택시에 올라 저편으로 가버린다. 수많은 차 속으로 녹아 들어가는 택시 꽁무니를 눈으로 쫓고 또 쫓다가, 완벽하게 놓친 다음에야 전철로 걸음을 옮긴다. 바람이 춥다. 어쩐지 한숨이 나오고, 쓴 웃음이 뒤를 잇는다. 한 번 불태운 탓에 뱃속이 허전하다. 아. 하고 탄식이 나온다. 정말 어디서 구해가지고 사람을 놀래키는 걸까. 그런 걸 어디서 구해 가지고서, 정말이지, 어디서 용케도 구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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