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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복 고양이의 언어

2005.02.26 12:1302.26


사랑스런 고양이 지지를 기억하며…….



  “네가 봤어야 했는데. 진짜 고양이였다니깐.” 그녀가 주장했다. “날 한참을 쳐다보더니 야옹하고 울었다구!” 나는 냉장고 문을 열고 마실 것을 찾고 있었다. 목이 무척 탔다.
  “옆집 고양이 아냐?” 내가 물었다. “전자회로가 타버렸는지 며칠 전부터 새벽 내내 울어댔잖아. 내가 자명종을 던져서 거의 맞출 뻔 했다니깐.”
  “아니, 전자고양이 따위가 아니라구!” 그녀는 답답한 듯 나를 내려다보았다. 냉장고 안에는 도무지 마실 만한 것이 없었다. 빈 우유병 몇 개와 텅 빈 플라스틱 병이 아무렇게나 쑤셔 넣어져 있었다.
  “옆집 녀석은 새까만 색이잖아. 내가 본건 희고 검은 줄무늬 고양이였어.”
  나는 고양이처럼 몸을 잔뜩 움츠려 냉장고 속을 살폈다. 깊숙한 곳에서도 마실만한 것은 없었다.
  “뭔가 마실 것 없어?” 나는 빈 우유병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래, 우유!”
  그녀가 소리치더니 우유병을 낚아챘다.
  “그 녀석이 말이야 접시에 우유를 따라줬더니 전부 먹어 버렸다구. 우유 먹는 전자고양이는 있을 턱이 없잖아!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서 앙증맞은 혀로 모조리 핥아 먹었다니깐.”
  먹지도 못할 흰 액체를 집어 삼킨 전자고양이를 생각해봤다. 분명히 회로가 타버려서 길거리에 쓰러졌을 테지. 그냥 뒀으면 아침 내내 아슬아슬한 지붕위에서 끊어졌을지도 모를 전선 뭉치를 확인하느라 낑낑댄 내가 목을 조금 축일 수 있었을 텐데. 그 녀석이 내 우유를 먹었다 이 말이지. 밖으로 뛰쳐나가서 눈이라도 한 웅큼 집어 먹고 싶었다.
  아침 내내 그녀의 이야기는 온통 고양이에 관한 것뿐이었다. 만약 전자고양이라고 계속 우겼으면 바닥에 접시라도 내려놓고 우유를 핥아 먹는 시늉이라도 할 기세였다.
  “강아지를 잘못 본 것 아닐까? 강아지는 흔하게 복제되잖아. 우유도 먹고 말이야.”
  “아니야. 진짜 고양이였어. 사진이라도 찍어 둘걸 그랬나봐.”
  그녀는 창밖을 내다보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그 고양이 얼어 죽으면 어떡해? 너무 춥잖아.”
  밖이 춥냐고? 그녀가 새벽부터 지붕위에서 몇 시간이나 매달려 있었다면 아마 그런 말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에게 당장 급한 것은 고양이 따위가 아니었다. 그래 그 망할 고양이, 벌써 100년 전에 멸종한 동물을 봤다고 호들갑 떠는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게 전자고양이든 유령고양이든 말이다. 이 엉뚱하고 이상한 일의 발단은 이렇다.


  새벽에 그녀가 우리 집으로 쳐들어와서는 현관문이 부서져라 두들겨 됐다. 그때가 아마 새벽 4시쯤 되었을 것이다. 문밖의 그녀는 놀라서 상기된 얼굴로 서 있었다. 마치 유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보였다. 거기에 옷장 안에 입을 수 있는 옷들이란 옷은 몽땅 다 껴입은 것 같았다. 평소보다 두 배는 뚱뚱해보였다. 검고 긴 머리가 제멋대로 헝클어져 있었는데 누군가 어둠속에 봤다면 영락없이 뚱뚱한 처녀 귀신으로 보였을 것이다. 나를 보자마자 그녀는 흥분해서 소리쳤다.
  “고양이를 봤어!”
  물론 고양이를 봤다는 건-그것이 전자고양이가 아닌 이상-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녀가 새벽 4시에 흥분해서 이웃집까지 쳐들어 와서는 현관문을 마구 두들길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지구인들이-이렇게 얘기하니 내가 마치 외계인 같지만- 지나치게 고양이에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대개의 멸종된 동식물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중에 고양이에게 가장 심했다. 고양이가 멸종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때 수많은 복제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사람들은 고양이도 사람과 같이 영혼이 있기 때문에 복제가 안 된다고 믿게 되었다. 과학자들은 좀 더 복잡한 납득할 만한 원인을 제시 했지만 속사정이 어떻든 간에 사람들은 인간복제가 실패한 것과 고양이의 경우를 동일시했었다.
  한참을 나는 할 말을 잃고 서 있었다. 그녀를 안으로 들여보내고 코트를 벗겨주고 따뜻한 코코아나 커피라도 줬어야만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한참 멍하고 서 있는데 그녀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나를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우리 집 말이야, 전기가 몽땅 나가버렸어.”


  그녀는 마치 고양이가 잃어버린 친동생이라도 되는 것처럼 온종일 집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서성거렸다. 샐러드 그릇을 인형처럼 꼭 끌어안고 말이다. 쯧쯧. 불쌍한 미주, 샐러드 그릇으로 고양이를 덮쳐서 잡겠다는 속셈이군. 전자고양이라면 모를까 정말로 그녀의 말대로 진짜 고양이라면 어림도 없어보였다. 그녀는 옷을 잔뜩 껴입어서 걸음걸이마저 뒤뚱댔다. 저 상태로는 뭘 잡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데도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 나는 여전히 지붕위에 있었다. 끊어진 전선 뭉치라도 찾아볼 요량이었다. 아침 내내 도시 건설과 직원과 한바탕했는데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폭설 때문에 지금 당장은 수리공을 보낼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 할뿐이었다. 적어도 오후 늦게나 수리공을 보낼 수 있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이 얼마나 많이 내렸는지 도대체 차도가 어딘지 인도가 어딘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끊어진 전선 따윈 잊어버리고 지붕에서 내려왔다. 미주는 여전히 뒤뜰을 서성이고 있었다. 수리공이 올 때까지 우리 집에서 기다리자고 몇 번을 말했건만 그녀는 절대 집을 떠날 수가 없다고 했다. 문제의 그 고양이가 분명히 집주변을 배회하고 있다고 믿는 게 틀림없었다. 불쌍하게도 그녀는 코가 빨개져 있었다. 콧물도 나는 듯 했는데. 감기에 안 걸렸다면 기적일 것이다.
  “수리공이 오려면 아직 멀었어. 그 동안 내 방에 가서 눈 좀 부치는 게 어떨까?”
  내말에 그녀는 힐끔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고양이는 어쩌고?”
  그 망할 털 뭉치 고양이는 이런 추위쯤은 끄떡도 없을 거야. 왜냐면 전자회로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추위 따위는 느끼지 못할 테니깐! 나는 이렇게 쏘아붙이곤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좀 쉰 다음 마지막으로 지붕위에 올라갈 작정이었다.

  우리는 수리공이 끔찍하게 쌓인 눈에 반쯤 파묻혀서 다가오는 걸 지켜봤다. 미주는 여전히 샐러드 그릇을 안고 있었는데. 고양이가 나타난 줄 알고 쳐다보더니 약간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샐러드 그릇을 모자처럼 머리 위에 덮어 썼다. 나는 뭘 했냐면. 멍하게 그 사람이 차도인지 혹은 저게 화단인지 혹은 보도블록인지 알 길이 없는 눈 위에서 버둥거리면서 힘겹게 다가오는 걸 지켜봤다. 언뜻 보기엔 좀 우스꽝스러웠지만 그는 구세주가 틀림없었다. 희망이고 빛이고 따뜻한 봄날이었다.
  그는 반쯤 파묻힌 눈에서 힘겹게 발길질 하며 나왔는데도 키는 그다지 커 보이지 않았다. 작은 키에 창백한 흰 낯빛, 파란 눈동자, 이 행성의 원주민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딱딱한 성단 공용어로 인사말을 건넸다. 인적사항을 확인하더니 바로 지붕위로 올라갔다.
  나는 수리가 끝날 때까지 밑에서 그를 지켜봤다. 수리공은 능숙하게 지붕 위를 왔다 갔다 하더니 샐러드 그릇을 머리에 뒤집어 쓴 미주를 발견했다.
  “근데 저 아가씨는 보올을 왜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죠?”
  “뭘 뒤집어써요?”
  내가 묻자 그는 한손으로 자기 머리를 몇 번 가볍게 두들겼다.
  “아, 추워서 제정신이 아닌가 봐요.”
  그는 고양이를 알지 못했다. 이 행성엔 고양잇과 동물이 없었다. 내가 얼버무리자 그는 미주를 한 번 더 쳐다보더니 나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최대한 빨리 고쳐야겠군요.”

  이렇게 해서 이 모든 해괴하고 요상한 일들이 전부 끝이 났다. 땅딸막한 전기기사는 깔끔하게 수리를 끝내고 다시 눈 속에 반쯤 파묻혀서 돌아가 버렸고 미주는 샐러드 그릇을 들고 서성거리는 짓을 그만뒀다. 어두워졌고 몹시 추워졌기 때문이다. 나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눈 속에 헤치면서 가야했지만 이제야 따뜻한 방에서 못다 잔 잠을 잘 수 있다는 게 마냥 행복했다.
  잠자기 전에 미주가 고양이를 잡겠다고 마당을 서성이는 짓을 그만 두려면 며칠이나 걸릴까 생각해봤다. 아님 그 전에 지구에 다녀오게 한다던가.  아직 지구에는 고양이과 동물들이 남아 있다. 적어도 고양이는 아니지만 표범이나 호랑이 같은 동물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아니면 고양이 화보집을 사거나 박물관 따위를 구경하면 좀 나아지겠지. 적어도 지금보다는……. 최근 들어 지독하게 고양이에 집착하는 미주가 좀 이상했다. 내가 기억하기엔 지구에서의 그녀는 지금처럼 감상적인 면이 풍부해 보이진 않았다. 지구에서도 고양이를 별다르게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게 벌써 5년 전인가? 우리가 낯선 행성으로 이주를 하기 위해 셔틀에 올라탔을 때가. 이 낯선 행성은 겨울이 지독히 긴 것 빼고는 그럭저럭 괜찮은 곳이었다. 물론 지구와 생활환경은 차이가 났지만 이주한 지구인도 많았고 이주 해택도 많았다.
  몸이 너무 피곤했기에 금방 잠에 빠져 들었다. 내가 깨어난 것은 어제 새벽과 비슷했다. 누군가 현관문을 부서져라 두들겼다. 그래서 이게 데쟈뷰 현상인줄 알았다. 혹은 꿈이거나. 문밖엔 어제와 비슷한 복장으로 미주가 서 있었다. 하마터면 현관문을 닫을 뻔 했다. ‘악몽에서 깨는 거야. 빌어먹을 고양이는 잊어버리라구!’ 내가 중얼거리자. 그녀는 차가운 손으로 내 손을 덥석 잡더니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잡았다구! 내가 고양이를 잡았다니깐!”
  우린 눈이 한가득 쌓인 거리를 손을 잡고 뛰어갔다.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끌려가는 내내 ‘제발, 전기는 끊어져 있음 안 되는데.’ 이 생각뿐이었다.

  다행히도 전기는 끊어지진 않았다. 거실은 따뜻한 정도가 아니라 지나치게 더웠다. 고양이 때문에 어제 내내 샐러드 그릇을 부둥켜 않고 밖에서 덜덜 떨고 있어서 온도 감각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나를 잡아끌더니 거실을 가로질러 고양이 앞으로 데려갔다.
  미주가 가리킨 쪽은 부엌 입구 쪽 이였는데 거기엔 흰 벽과 큼직한 종이상자뿐이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봐도 벽과 상자 뿐이었다. 상자는 텔레비전을 포장한 평범한 상자 같았다. 내가 한참을 박스를 노려보며 서 있자 그녀는 내 등을 살짝 떠밀더니 ‘뭐해? 안 만져 볼 거야?’라고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상자가 고양이라니? 틀림없이 중증이 틀림없다. 극도의 향수병의 결과였을까? 상자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상자는 네모난 모양이지 절대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모양은 아니었다. 고양이라던가 그 비슷한 낱말조차 쓰여 있지 않았다. 물론 고양이 그림이나 사진 따위도 없었다. 대출이라도 받아서 왕복 지구행 우주선표라도 사야 하는 걸까? 그녀를 지구로 돌려보내야 한다. 너무 오랫동안 떠나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내가 이렇게 고심하자. 그녀는 답답하다는 듯이 상자로 다가가더니 무릎을 꿇고 상자를 살짝 들어 올리더니 양손을 깊숙이 집어넣었다.
  “이리 와서 만져 보라니깐?”
  머뭇거리다가 그녀가 했던 것처럼 상자 속에 손을 넣어서 더듬거렸다. 부드러운 털이 만져졌다.
  “세상에 진짜 고양이잖아! 근데 왜 상자로 덮어 놨어.”
  “사라질까봐!”
  그녀는 상자를 완전히 들어올렸다. 고양이는 우아하게 몸을 둥그렇게 말고 있었다. 전자고양이의 어설픈 흉내가 아니었다. 앙증맞은 발바닥, 촉촉한 코, 희고 기품 있어 보이는 수염, 온몸을 덮은 부드러운 흰색과 검은색에 간간히 섞여 있는 노란색 털들, 가늘고 기다란 얼룩무늬 꼬리, 쫑긋 서 있는 삼각형 귀, 그리고 갸르릉 거리는 특유의 고양이 소리, 그것은 하나하나 고양이의 고유 언어였다.
  “너도 봤어야 했는데.”
  그녀는 그렇게 운을 떼더니 밤새 있었던 일들을 떠들어 됐다. 달빛을 받아 반짝였던 고양이의 두 눈이며 뒷마당 흰 눈 위에 앙증맞게 찍어놓은 고양이의 발자국하며 아기 울음 같은 울음소리 때문에 밤새 집 주변을 서성거렸던 이야기들이었다. 물론 샐러드 그릇을 들고 말이다. 그녀는 결국 밤이 다 끝나갈 쯤에 녀석을 찾았다. 의외로 손쉽게 잡혔다고 말했다.
  우리는 말없이 오랫동안 고양이를 지켜봤다. 촉촉한 코를, 앙증맞은 발을 만져보았지만 혹시나 잠에서 깰까봐 조심스러웠다. 한동안 우린 경외감에 빠졌다. 고양이를 실물로 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한참 뒤 미주는 고양이 옆에 마치 자신이 고양이라도 된 것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 눕더니 이내 잠에 빠졌다. 그녀는 밤새 녀석을 잡으려고 집주변을 서성거렸던 것이다. 그 춥고 긴 겨울밤 내내 말이다. 나는 가만히 그 묘하고 평온한 풍경을 쳐다봤다.

  고양이가 깬 것은 한참 뒤였다. 녀석은 슬그머니 일어나더니 앞발을 모으고 앞으로 내밀더니 몸을 기다랗게 뒤로 쭉 빼며 기지개를 폈다. 야옹거리는 울음소리, 전자 고양이의 반복된 가짜울음 소리와는 차이가 있었다. 저마다 울음소리가 조금씩 특색 있고 다르게 들렸다. 고양이는 나를 한번 올려다보더니 안아달라는 뜻으로 그러는지 내 다리에 몸을 바짝 붙여서 몸을 동그랗게 말아서는 비벼댔다. 고양이를 번쩍 손으로 안았다. 촉감이 너무 좋았다. 따뜻한 몸의 열기, 작게 두근거리며 뛰는 심장, 부드러운 털, 고양이는 손을 대자마자 특유의 갸르릉 거리는 소리를 냈다. 고양이를 아기처럼 꼭 끌어안았다. 그러다 작은 플라스틱 조각이 손에 닿았다. 그렇겠지. 왜 생각을 못했을까? 이 녀석은 셔틀을 타고 지구에서 날아 왔을 것이다. 아니면 다른 행성에서 온 고양이일까? 아니면 복제에 성공했을까? 그것도 아니면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고양이가 있었을까? 일이 어찌되었던 간에 녀석은 누군가에 의해서 길러지고 누군가와 함께 이 낯선 행성으로 온 거겠지. 플라스틱 인식표엔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너무 놀라서 인식표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고양이를 무릎에 올려놓고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신호가 가더니 이내 상대 쪽 수화기가 딸깍 하고 들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이른 아침에 죄송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을 꺼냈다. 수화기 저편에서 젊은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찍 일어났는지 목소리는 꽤나 쾌활하고 명랑했다.
  “고양이를 한 마리 데리고 있습니다만…….”
  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는 잔뜩 목소리를 죽이더니 조그맣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렇군요. 녀석이 거기까지 같군요.”
  “그런데, 죄송하지만 어떻게 고양이를 구하신거죠?”
  내 질문에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금 전보다 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속삭여서 죄송합니다. 우리 딸애는 진짜 고양이로 믿고 있거든요. 믿기 어렵겠지만 그 고양이는 전자고양이랍니다.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최신 모델이죠.”
  나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에 집중했다.
  “녀석은 지금 가출 프로그램이라더군요. 애완고양이 모델이 아니라 토종 집고양이 모델이라서 말이죠. 고양이 집회를 위해 집을 나가는 프로그램이 입력 돼 있는 거죠. 지나치게 정교하게 만들어져서 처음엔 저도 진짜 고양이로 속을 정도 였다니깐요. 딸애는 고양이가 돌아올 때만을 기다린답니다. 하루나 이틀 뒤에 돌아온다고 제품 설명서에 쓰여 있더군요.”

  수화기를 내려놓고 무릎에서 고양이를 내려놓았다. 그는 고양이를 풀어달라고 부탁했고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고양이는 특유의 몸짓으로 여유롭게 거실을 횡단했다. 그것을 지켜보았다. 현관에 다다라서는 잠시 멈춰 서서 내 쪽을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현관문을 발로 달그닥 소리를 내며 긁기 시작했다. 미주는 완전히 잠에 빠져 있었다. 잠시 잠깐 그녀를 깨워야 할까 말아야할까 고민 했었다. 그런 후 뭐라고 얘기 하지? 저 녀석은 진짜 고양이가 아냐! 내가 뭐랬어? 진짜 고양이는 이미 멸종했다니깐! 저 녀석도 흔한 전자 고양이일 뿐이라니깐, 그런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깐 가슴이 뛰고 온몸에 힘이 풀려서 털썩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녀는 내말을 믿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그렇겠지. 그렇다면 다시 고양이 주인에게 전화를 해서 그 사람과 통화를 시켜 주면 알아듣겠지. 그건 얼마나 모진 행동일까? 아니면 오히려 그녀에게 꼭 알려줘야 할 사실 이었을까? 그것은 딸아이에게 진짜 고양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아버지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거짓말일까? 그의 말에 의하면 녀석은 완전한 고양이인 것이다. 다만 죽지 않을 뿐 고양이의 습관, 몸짓, 행동, 언어를 완벽하게 해내고 있었다. 고양이보다 더 고양이답게! 녀석의 제작 모토처럼 말이다.

  내가 머뭇거릴 동안 고양이의 가출 프로그램은 종반부로 치닫고 있었다. 녀석은 돌아가야 했다. 현관문을 열었다. 녀석은 종종 걸음으로 기어나갔지만 서두르진 않았다. 흰 눈길 위를 사뿐하게 걸어갔다. 그 동작은 민첩하고 우아해보였다. 작은 발자국을 남기고 뒤 돌아보는 일 없이 그렇게 사라졌다. 녀석이 사라졌는데도 빠끔히 열어놓은 문사이로 한참을 쳐다봤다. 모든 일들이 그렇게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그녀를 깨우는 대신 내가 한 일은 담요를 한 장 가져와 그녀를 덮어준 것이 전부였다. 그녀가 깨어나면 뭐라고 해야 하지? 그냥 내가 놔줬다고 할까? 아님 열려진 창문으로 도망가 버렸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언젠가는 그녀도 알겠지. 고양이는 완전히 멸종 되어 버렸다는 걸. 그렇다면 추운데 애써 샐러드 그릇을 부둥켜안고 집밖을 서성거리는 일은 그만두겠지.
  나는 커피포트에 물을 부었다. 그녀가 언제 깨어날지 알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 이 큰 집에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mirror
댓글 5
  • No Profile
    은림 05.02.26 15:10 댓글 수정 삭제
    우우웃, 달콤하고 포근하고.. 그리고 안타깝네.
  • No Profile
    yunn 05.02.26 18:48 댓글 수정 삭제
    긴 침묵을 깨고 두 달 연속 새 글이군요! 즐겁게 읽었습니다 ^^
  • No Profile
    아르하 05.02.26 22:01 댓글 수정 삭제
    글 읽어주신분들 감사합니다. 제 개인 계정에 지지 사진들과 이야기들을 올릴려구 합니다. 3월 내내요. 그냥 추모한다고 보면 되겠죠. 글 읽으신분들 짬내서 들려주세요. http://sosophoto.net 입니다.
  • No Profile
    딥씨 05.04.12 02:43 댓글 수정 삭제
    굉장히 재미있네요. 감수성이 상당하십니다. 섬세하고 예민한 글쓰기가 어울리실 것 같은데.
  • No Profile
    Kain 12.10.11 22:29 댓글 수정 삭제
    아르하님의 글과 은림양의 감상.

    달콤, 포근, 안타까움....

    그 자체인 거 같습니다. 고양이.....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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