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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azyjam Midway

2003.12.26 19:2612.26

  오른손이 벽 틈을 확실히 쥔 것을 확인하고, 왼팔을 홈통에 휘감았다. 오른발을 끌어올려 튀어나온 벽돌 모서리를 디디고, 다음은 왼발. 좋아. 이제 두 번만 더 해내면 닿을 수 있어. 시드는 다시 오른팔을 뻗어 새로이 붙잡을 곳을 찾았다. 가냘프게 들려오던 기타 소리가 흐려졌다. 바람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귀 옆으로 스쳐갔다. 시드는 뻗었던 오른팔을 급히 끌어내리고는 벽에 몸을 바싹 붙였다. 침착해야 해. 절대 아래를 내려다보아서는 안돼. 생각과는 달리 자꾸만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시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기다리는 동안 차츰 바람이 약해져 갔다. 시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위쪽을 보았다. 기타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는 위층 창은 팔을 뻗기만 하면 닿을 것처럼 가까워 보였다. 그리고 그가 벽을 타고 오르는 만큼 기타 소리는 착실히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유리창은 안쪽으로부터의 조명을 받아 노란 기운이 섞인 따뜻한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새어 나오는 음악은 기타 소리를 쫓아 벽을 기어오르고 있는 소년을 부르는 것처럼 여겨졌다. 자, 지금이야. 한 번만, 한 번만 더 팔을 뻗는 거야.
  다시 내밀어진 손가락 끝은 약간 떨리고 있었지만 확실하게 벽 틈새를 찾아내었다. 그리고 왼손도 오른손이 간 만큼의 거리를 뒤따라 올라 홈통을 붙잡았다. 양 손이 지지할 곳을 단단히 쥔 것을 확인하고 발을 끌어 올렸다. 좋아. 이제 조금만 더 하면 팔이 닿는다.
  바람이 다시금 강해지기 시작했다. 순간 조급한 마음이 생겼다. 기타 소리가 멎었다. 아니, 바람 탓에 들리지 않는 건가? 시드는 한껏 팔을 길게 뻗었다. 오른손 중지와 약지가 빛이 새어 나오는 창틀 끝에 걸렸다. 그때, 오른발을 디디고 있던 벽돌 모서리가 부서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지어진 지 오래 된 이 아파트는 좁은 방들과는 어울리지 않게 모든 창이 컸다. 원래 한 가구였던 곳을 두 가구가 입주할 수 있도록 개조한 것입니다만, 살기에는 딱 좋은 정도지요. 오래되긴 했지만 오히려 품격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아는 분들이 살던 아파트니까 말이지요. 이곳으로 이사할 때 안내한 부동산 직원은 엄마에게 그런 이야기를 열심히 떠들어 대었었다.
  좁은 식당에 있는 창 역시 커다란 것이었다. 그 창 가득히 들어오는 햇빛이 우묵한 시리얼 접시 가운데에 고여 있었다. 선명한 햇빛은 시리얼 접시 가장자리에 흐릿하게 찍힌 지문까지 드러내고 있었다. 엄마가 접시를 꺼낼 때 찍힌 자국이다. 시리얼 접시를 중심으로 한쪽에는 시리얼 박스가, 다른 한쪽에는 물방울들이 흘러내려 생긴 작은 웅덩이가 있고 그 가운데 우유팩이 진땀을 흘리며 서 있었다.
  시드는 식탁을 사이에 둔 채 창을 마주하고 앉아 햇빛에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거실 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시드는 황급히 시리얼 박스를 집어 들었다. 박스 안의 비닐 포장을 벌리기도 전에 엄마는 식당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자 시드는 어깨를 움츠리고 시리얼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그는 주저하며 엄마 쪽을 돌아보았다.
   “엄마. 오늘 학교를 쉬면 안될까요?”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가련하고 힘없는 목소리가 나와주었다. 그러나 엄마의 엄한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식사도 하지 않고 무얼 하고 있었지? 식탁에 앉은 지 20분이나 지났잖니.”
   “...머리가 아파요.”
   “시간이 늦었다. 스쿨버스가 가버리겠어. 식사를 하기 싫다면 그냥 가거라.”
  엄마는 여전히 엄한 어조였다. 시드는 꾸물거리며 의자에서 내려서서는 힘없는 저항을 한번 더 시도해 보았다.
   “하지만 정말 머리가...”
   “내가 또 체온계를 가져와서 법석을 떨어야겠니? 시드. 엄마를 힘들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시드는 한숨을 길게 쉬고 느릿한 걸음으로 식당을 나섰다. 팔짱을 낀 채 식당 벽에 기대어 선 엄마의 엄한 시선이 계속 뒤통수에 걸렸다.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엄마는 이 도시로 온 이후 매일 지쳐있었고 늘 날카로웠다. 그런 엄마를 힘들게 하지 않기로 약속한 것은 시드였다. 약속은 지켜야 했다. 그러나 오늘만 해도 이미 스스로 일어나지 못한데다, 욕실에서 꾸물거렸고, 멍하니 생각을 하다가 식사를 하지 못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시드는 가방을 집어 들고 도망치듯 아파트를 나섰다.
  발소리에 맞춰 삐걱거리는 낡아빠진 나무 계단을 달려 내려가자 햇빛이 가득한 아파트 마당이 나타났다. 예전에는 이 마당도 훨씬 넓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제법 고급스럽게 지어졌던 티가 남아있는 건물과는 어울리지 않는 녹슨 철망이 좁다랗게 둘러싸고 있을 뿐이다.
  햇빛이 눈부셔 시드는 고개를 떨구었다. 무심히 양 손바닥을 펼쳐 보았을 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양손 손가락 끝에는 수없이 긁힌 상처가 나 있었다. 시드는 자기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지난 밤의 일이 떠오른 것이다.
  두근거렸던 기억을 되새기기도 전에 그를 붙잡아 끄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렸다. 스쿨버스가 저만치 떨어진 모퉁이에서 호통치듯 경적을 울리고 있었다. 시드는 아파트를 올려다보고는 스쿨버스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위태롭게 걸려있던 두 손가락은 오른발을 지탱하고 있던 벽돌 모서리가 부서져 나가자 힘없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떨어진다! 그 생각이 스치는 것과 동시에 손목에 묵직한 힘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올려다보자 창 밖으로 몸을 내밀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담배를 비스듬히 입에 문 긴 은발의 남자가 한 팔을 뻗어 시드의 오른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은발의 남자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시드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살았다. 그 생각이 들고 난 후에야 추락의 공포가 온 몸을 훑고 지나갔다. 몸이 떨리고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긴 은발의 남자는 울상이 된 시드를 보고 피식 웃더니 팔에 힘을 주었다. 소매를 찢어낸 검은 티셔츠 밖으로 드러난 팔에 근육이 불끈 솟아올랐다. 또래보다 작고 마른 체격이긴 하지만 이미 열 살이나 된 소년을, 은발 남자는 한쪽 팔의 힘만을 이용하여 간단히 창 안으로 끌어들였다.
  얇은 옷을 통해 다리와 허리에 싸늘한 바닥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러나 아직 마음은 진정되지 않은 채였다. 손목을 쥐었던 남자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지자 시드는 그 팔에 매달렸다. 따뜻하고 단단한 팔. 그 따뜻한 감촉이 살았다는 느낌을 더해주어 시드는 그만 훌쩍거리며 울고 말았다.
  남자는 주저앉은 채인 시드 옆에 앉아 그가 울음을 멈출 때까지 기다려주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시드는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어 오래 울 수가 없었다. 눈물 흘린 자국이 그대로 남은 얼굴로 고개를 들어 처음 본 것은 남자가 붙잡히지 않은 팔을 움직여 창 밖으로 불이 남아있는 담배꽁초를 던지는 모습이었다. 그 간단한 동작을 따라 팔의 근육이 우아한 곡선을 그렸다. 단단하고 힘센 팔. 아버지가 살아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정말 아버지였다면 조금 운다고 해서 부끄러울 것은 없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자 더욱 미안하고 창피해졌다. 시드는 슬그머니 남자의 팔을 놓았다.



  교사(校舍) 정면에 있는 다섯 단의 계단은 아무나 앉을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운동장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그 곳은 선택된 아이들만이 모여 떠들고 장난을 칠 수 있는 특별한 장소였다. 저학년 중에서는 그 곳에 앉을 수 있는 아이가 극히 드물었다. 학년 전체에서 돋보여 선생들의 주목을 끌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면 고학년 선배들에 의해 걷어채이기 일쑤였다. 시드는 물론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교사 앞 계단에 앉는 일 따위는 아예 꿈꾸어본 적이 없었다.
  기름진 급식을 반이나 남기고 일어선 시드는 언제나처럼 책 한 권을 옆구리에 낀 채 운동장 한 귀퉁이의 벤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햇빛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여자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는 교실보다는 나았다. 교사를 나오자 햇빛이 전신을 휘감았다. 본격적으로 여름이 되려면 아직 한달 가까이 기다려야 할 터인데도 정오 무렵의 공기는 뜨거웠다. 이 도시의 계절 변화는 시드에게 아직 낯설었다.
  햇빛이 눈부셔 조금 비틀거리던 시드는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를 듣고 급히 발을 멈추었다. 같은 학년에서 가장 예쁜 여자아이인 코린이었다. 그녀는 얼굴을 찌푸린채 시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코린의 손가락을 따라 발 밑으로 눈을 돌리자 비명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계단에 펼쳐진 스커트 자락 끝을 시드의 운동화가 밟고 있었다.
  사과, 실수, 노려보는 코린의 눈, 옆구리에서 흘러 떨어질 듯한 책.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가고 난 후에야 시드는 사과를 하기 위해 입을 벌렸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코린의 옆에 앉아있던 알렉스가 일어서고 있었다. 한 학년 위인 알렉스는 그 나이보다는 제법 덩치가 좋은 남자아이였다. 야구부에서 유격수로 뛰고 있는 알렉스의 주먹이 시드의 가슴을 가볍게 쳤다.
   “왜 비키지 않는 거야! 네가 코린의 스커트를 더럽히고 있잖아!”
  아프다고 할 만한 정도도 아니었는데 시드는 균형을 잃고 말았다. 다리가 꼬이고, 이내 볼썽사납게 계단에서 구르고 말았다. 흙바닥에 넘어진 채 시드는 계단 위를 올려보았다. 알렉스는 어떠냐는 듯 턱을 치켜들어 보이고는 야단스럽게 코린의 스커트 자락을 털어주었다. 코린은 내내 새침한 표정으로 시드를 외면하고 있었다. 몇몇 아이들이 알렉스의 공훈을 치하하고, 코린의 스커트를 걱정하는 모습이 보였다. 누구도 시드에게 다가오거나 걱정하거나 일으켜주지 않았다. 시드는 그들에게 있어 야유를 받을 가치조차 없는 아이였다.



  비스듬한 각도에서 남자의 얼굴은 긴 은발에 가리워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흥얼거리고 있는 콧노래는 분명히 들려왔다. 며칠간 밤마다 위층에서 들려오던 그 기타의 멜로디였다. 시드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 남자가 움직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윽고 은발 남자는 시드의 앞에는 컵을 내려놓고 몇 발짝 물러나 바닥에 앉았다. 재떨이를 끌어당기고 담배에 불을 붙이는 남자를 보며 시드는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했다. 아주 작은 소리였는데도 알아들었는지 남자는 시드를 향해 씨익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드는 남자가 데워준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아래층에 있는 시드네 집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저 넓고 넓은 방일 뿐이었다. 의자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으며, 바닥은 카펫이 깔려있지 않아 플로어링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작은 냉장고와 작은 식기장, 그리고 칠이 벗겨지기 시작한 낡은 전자렌지가 바닥에 그냥 놓여 있었고, 반대편 벽가에는 앰프가 세워져 있었다. 앰프 근처에는 몇 대의 기타가 바닥에 놓여있거나 혹은 케이스에 담겨 있었다.
  창문이 있는 쪽과 마주보는 벽에 문이 하나 있는 것을 제외하면 흔한 사진 액자 하나 걸려있지 않은 살풍경한 방이었다. 그러나 시드는 많은 물건으로 가득 찬 자신의 작은 방보다 훨씬 이 곳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마음에 든 것은 조금 전에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며칠 동안 밤마다 기타 연주를 했던 사람일 터인 눈 앞의 은발 남자였다. 이전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도.
  엄마는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한 살 연상인 아버지를 만나 시드를 가졌고, 약혼을 했다. 결혼식까지의 얼마 되지 않는 기간조차 채우지 못하고 아버지는 사고로 죽었다. 그렇게 엄마는 결혼도 하지 못한 채, 시드를 낳았다고 했다. 은발 남자는 그런 엄마와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그는 시드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한번 웃었다. 턱에는 머리카락 색과 비슷한 은빛 수염이 조금 자라 있었다. 그 수염과 웃음은 너무나 잘 어울렸고, 시드는 더욱 남자가 마음에 들었다. 은발 남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오다니 대단한데. 용기가 있구나, 너.”



  스쿨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시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곳에서 내리는 아이들은 서로서로 인사를 하고 집을 향해, 혹은 놀이터를 향해 달려갔다. 그들 중 누구도 시드에게 인사를 하는 아이는 없었다. 그리고 시드 역시 그들 중 누구를 향해서도 인사하지 않았다. 시드는 그런 존재였다.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있어 그는 길가에 버려진 빈 캔과 다를 바 없었다. 아니, 걷어차면 요란한 소리를 내는 빈 캔보다도 흥미가 끌리지 않는 존재인 쪽일까.
  시드는 조용히 아파트로 돌아왔다. 점심시간에 알렉스가 밀치는 바람에 시드와 함께 흙바닥에 구른 책은 조금 더럽혀져 있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었고, 이틀 안에 반납해야 할 책이었다. 시드는 책의 흙먼지를 털어내고 거실 쇼파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불행을 잔뜩 짊어진 평범한 소년인 척 하지만 사실은 무척 특별한 아이이며, 너무나도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소년 마법사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는 이미 글자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져 있었다. 엄마가 돌아올 시간이었다. 시드는 거실의 불을 켜고 욕실로 가 손과 얼굴을 씻었다. 물기를 닦은 수건을 수건걸이로 돌려놓았을 때 현관 문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엄마의 목소리도.
  욕실 문을 열고 나와 인사를 하려는데, 엄마는 시드 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거실에서 기다려요, 존. 금방 준비하고 나올테니까.”
  엄마는 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을 향해 들어오라는 손짓을 하고 나서야 시드를 알아보았다.
   “엄마가 없는 동안 착하게 잘 지냈니? 이 아이가 시드에요. 시드, 이쪽은 존 비어스씨야. 인사하렴.”
  비어스씨는 통통한 체격에 불그레한 혈색을 가진 남자였다. 엄마와 별로 키 차이가 나지 않는 그는 벙긋벙긋 미소를 지으며 시드를 향해 허리를 굽혀 악수를 청했다. 허리를 굽히자 벗겨지기 시작한 머리가 두드러져 보였다.
  엄마는 시드의 볼에 스치듯 키스하고 말했다.
   “엄마는 비어스씨와 함께 저녁을 먹고 올거야. 딱하지만 혼자 식사해야겠구나. 차려먹을 수 있지?”
  시드는 비어스씨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옷을 갈아입겠다며 방으로 들어간 후에도 시드는 욕실 문을 등지고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덕택에 거실로 들어가기 곤란해진 비어스씨는 난처한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이윽고 그는 주머니를 뒤지더니 작은 초코바를 시드 앞에 내밀었다.
   “초코바 먹겠니, 꼬마야?”
  시드는 대답하지도, 손을 내밀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온몸으로 거부의 뜻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었다. 비어스씨는 굵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턱을 쓰다듬더니 시드를 향해 허리를 굽히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에게는 두 자식이 있단다. 딸은 헤어진 아내에게로 갔지만, 아들은 나와 함께 살고 있지. 네 엄마와 내가 함께 살게 된다면 너에게는 형이 생기게 되는 거란다. 내 아들은 함께 놀 동생이 생긴다면 아주 기뻐할거야. 그 아이는 네 엄마를 아주 좋아하고 있단다.”
  비어스씨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시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두툼한 손을 털어내듯 시드는 자신의 방으로 달려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놀라서 거실로 달려나온 엄마의 목소리가 문 너머로부터 들려왔다.
   “무슨 일이에요, 존?”
   “모르겠어. 아무래도 내가 별로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인데?”
   “설마. ...시드는 고집이 세고 사람들과 친해지질 못해요. 아버지 없이 자라서 까다로운 아이가 되어버렸어요. 그저, 집에 남자가 찾아와서 놀란 것 뿐일 거예요.”
  들리지는 않았지만, 시드는 엄마가 자신의 방문 쪽을 향해 긴 한숨을 쉬는 것을 또렷히 눈 앞에 떠올리고 소리를 상상할 수 있었다. 고집이 세고 까다로운 아이. 엄마를 달래는 듯 비어스씨는 다정한 목소리로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시드는 더 이상 듣지 않기 위해 침대로 달려가 이불을 뒤집어 썼다.
  잠시 후, 노크소리가 들리고 식사를 반드시 하라는 엄마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시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엄마는 몇 번 더 노크를 하고는 포기한 모양이었다. 시드는 천천히 이불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현관문이 닫히고 문을 잠그는 금속음이 멀리서 들려왔다.



  시드는 우유가 담긴 컵 안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옅은 김이 조금씩 피어오르고 있었다. 시드는 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용기같은 건 없어요, 나는.”
  은발 남자는 소리내어 웃고는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껐다. 담배갑을 열어 새 담배를 꺼내는 동안 그의 눈은 계속 웃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란다. 더구나 건물 밖에 매달려서 올라오는 건 말이야. 그런데 너, 이름이 뭐지?”
  시드는 기타 소리가 가장 분명히 들리는 자신의 방에서 위층 창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멜로디만을 쫓아 무모한 행동을 하고 말았음을 설명하려던 생각을 지웠다. 그리고 우선은 남자의 질문에 대답하기로 했다.
   “시드니 엘리엇. 엄마는 시드라고 불러요.”
   “시드... 인가. 용기있는 소년으로 기억해두지. 순수하기도 하고.”
  은발 남자는 담배를 입에 문 채 가장 가까운 곳에 놓여진 기타를 끌어당겨 안았다. 남자의 손가락이 장난치듯 현을 하나씩 튕겼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시드는 급히 물었다.
   “기타 소리를 들었어요. 며칠 동안이나 계속 같은 곡을 쳤잖아요? 아저씨는 뮤지션인가요?”
   “아저씨라니...”
  은발 남자는 시드를 돌아보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시드는 순간 움츠러들었지만 용기를 내어 다시 물었다. 낯을 가리는 자신이, 모르는 사람과 이렇게나 쉽게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말은 쉽게 흘러나왔다.
   “아저씨, 아니 미안해요. 이름이 뭐예요? 뭐라고 부르면 되죠?”
   “...로이.”
   “로이?”
  은발 남자의 눈동자가 즐거운 듯 빛나고 있었다.
   “로이. 오비슨과 뷰캐넌을 무척 좋아했거든.”
  시드에게 있어 은발 남자 로이가 말한 두 사람은 누군지 짐작도 가지 않는 이름이었다. 분명히 알 수 있는 건 그가 댄 이름이 본명은 아닌 듯 하다는 것. 본명을 딱히 알려줄 생각은 없어 보인다는 것. 그리고 시드가 옆에 앉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조금도 귀찮아하지 않는다는 것.
  로이는 기타를 고쳐안더니 몇 번이고 들어 귀에 익은 그 멜로디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시드는 우유를 홀짝거리며 가만히 그 곡을 들었다. 조용히 흘러나오는 따뜻하고 기분좋은 곡, 편한 방과 좋은 사람.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가 이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만이라도 쉽게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그 생각이 과분한 것이라면 그저 친구만이라도 되었으면. 이따금씩은 이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하고, 기타 연주를 듣고, 함께 미소지을 수 있도록.



  어렴풋이 노크 소리가 들렸다.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시드는 꼼지락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가 완전히 침대를 빠져나오기도 전에 노크 소리가 멎었고, 거실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엄마의 발 소리가 들렸다. 아들이 이미 잠들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엄마에게 사과를 해야 해. 엄마는 분명 비어스씨와 결혼하려는 거야. 비어스씨는 오래 전에 엄마와 나만 두고 죽어버린 아버지 같은 사람은 아닐테니까. 그러니까, 내가 잘못한거야. 그리고, 엄마를 걱정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난 또 어겨버렸으니까.
  시드는 달려가 방문을 열었다. 엄마는 거실 쇼파에 앉아 이마를 짚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시드는 숨을 들이쉬고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엄마...”
   “아직 안잤니? 늦었잖아. 그러다가 내일 또 늦장부리게 된다.”
  엄마는 시계를 확인하듯 보고는 시드에게 들어가 자라는 턱짓을 했다. 지친 표정이었다. 시드는 죄책감으로 숨이 자꾸만 막혀왔다.
   “엄마. 미안해요. 비어스씨는 좋은 사람이었어요. 내가 잘못한 거예요.”
  엄마는 한참동안 시드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밝은 색의 외출복을 입었음에도 엄마의 눈은 너무나 어두워보였다. 엄마는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구두를 벗기 시작했다. 발에서 풀려난 구두가 카펫이 깔린 바닥으로 둔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존과 결혼하기로 결정한 게 아니야. 네가 벌써 걱정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시드는 눈가가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고 급히 눈을 깜빡였다. 엄마의 대답에 안심한 탓인지, 아니면 돌아보는 엄마의 얼굴이 너무 지쳐보여 미안했기 때문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엄마는 다시 시드를 한참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비어스씨와 이야기하고 있을 때는 웃고 있었는데.
   “나는 존의 일 보다는 네가 걱정이다. 시드. 너는... 정말 까다로운 아이야.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용기도 없고. 이대로라면 내가 결혼을 하던 하지 않던...”
  엄마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그 걱정과 짜증이 섞인 표정을 보고 있는 것이 점점 더 괴로워졌다. 시드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나는 엄마가 행복하길 바래요. 그러니까, 그 사람을 좋아한다면 결혼해도 좋아요. 비어스씨의 아들과도 잘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할께요. 좋은 아이가 될 수 있다구요!”
  점점 목소리가 커져갔다. 평소 큰 소리를 내지 않는 아들의 이런 반응에 엄마는 놀란 표정이었다. 하지만 아직 목 안에 남아있는 말이 많았다. 시드는 더 이상 말들을 눌러담지 않기로 했다. 망설이지도 않기로 했다.
   “나는 엄마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요! 나도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용기를 낼 수 있어요! 위층에 사는 로이도 내가 용기있는 아이라고 했어요! 나는 그와 이야기도 하고 음악도 함께 들었어요! 그는 나에게 순수하다고도...”
  시드는 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엄마는 어떻게 손을 대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묘한 생물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시드를 보고 있었다. 엄마는 천천히 쇼파에서 일어나 시드를 향해 한 손을 펼쳐보였다. 흥분한 환자들을 달래는 동작이다. 진정하세요, 라는 의미가 담긴. 엄마는 시드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잠이... 덜 깬 거니, 시드? 꿈을 꾸었던 거지?”
  시드는 고개를 저었다. 엄마의 미간에 주름이 한층 더 깊게 패였다.
   “시드. 넌 꿈을 꾼 거야. 침대로 돌아가 다시 한번 푹 자고 나면 괜찮을거야. ...우리 위층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아. 우리집이 꼭대기 층이니까. 그렇지 않니? 기억하지?”
  시드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다가오는 엄마의 발걸음에 맞추어 뒷걸음질을 하기 시작했다.
   “...거짓말.”
  아니야. 분명히 이곳은 꼭대기층이었어. 하지만 나는 어젯밤에 건물 벽을 기어올라 로이를 만났어. 여기는 꼭대기층이야. 하지만 로이는!
  시드는 등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귀를 기울였다. 지난 밤까지도 희미하게 울리던 기타 소리가 오늘은 들리지 않았다. 시드는 침대로 뛰어 올라 창을 열어젖혔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시드는 위태로울 만큼 창 밖으로 몸을 내밀고 위를 보았다. 지난밤에 위태롭게 기어올랐던 벽은 없었다.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옥상 주위를 둘러싼 철망이 보일 뿐이었다.
  달려온 엄마가 시드의 허리를 붙잡고 끌어내렸다. 엄마는 시드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한팔로 누른 채, 허둥지둥 창문을 닫았다. 시드는 저항할 생각도 없이 멍하니 창 너머로 보이는 밤하늘을 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미안해요... 로이... 미안...”



  로이는 연주에도 질렸는지 기타를 밀어놓고 까칠하게 자라난 은빛 수염을 손가락 끝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는 느긋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옆에서 시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을 뿐이었지만 행복했다. 언제든 그가 입을 열기만 하면 상대는 주의깊게 들어주고 대답해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로이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무릎을 쳤다.
   “꽤 시간이 흘렀는데. 돌아가야지, 시드?”
  시드는 그 말에 반사적으로 시계를 찾았다. 그러나 이 방에는 시계가 하나도 없었다. 잠옷 차림으로 벽을 오른 시드의 손목에는 물론이고, 로이의 팔목에도 시계는 없었다. 하지만 감각으로도 꽤 밤이 깊어졌음은 느낄 수 있었다. 로이는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어떻게 돌아갈 생각이지? 또 벽을 타고 내려가며 용기를 뽐내볼 생각?”
  그의 말에 빈정거리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친한 친구끼리 하는 농담같은 말투였다. 시드는 어깨를 움츠리고 난처하게 웃었다.
   “...전혀 생각도 못했어요. 현관문은 잠겨있을텐데...”
  로이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드도 그의 시선을 따라 창을 보았다. 창 밖으로 달이 커다랗게 떠 있었다. 이 도시로 이사온 이후 저렇게 뚜렷하고 큰 달은 본 적이 없었다. 시드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의 소리를 내었다. 로이는 픽 웃더니 시드의 어깨를 툭 쳤다.
   “가서 문을 열어보렴. 가끔은 문 잠그는 걸 잊는 날도 있잖아.”
  그는 믿어보라는 듯 눈을 찡긋 해보였다. 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이는 시드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문으로 안내해주었다.
  복도로 나간 시드는 문이 닫히기 전에 급히 물었다.
   “또 찾아와도 되요?”
   “물론이지. 단...”
  로이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는 순간 떠오른 감정을 털어버리듯 크게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비밀이야, 시드. 내가 여기 살고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돼.”
   “왜죠?”
   “난 여기에 살면 안되는 사람이거든. 쫓겨날 지도 모른다고.”
  흘러내린 긴 은발 사이에서 두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반짝였다. 시드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걸음 걷다가 뒤를 돌아보자 아직 열려있는 문 사이로 로이의 미소짓는 얼굴이 보였다. 시드는 손을 흔들고 아래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향해 달렸다.
  로이의 말 그대로 현관문은 열려있었다. 시드는 잠귀가 밝은 엄마가 깨어나지 않도록 조용히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리고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천천히 걸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좁은 침실은 불을 꺼둔 채였고,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 몹시 어두웠다. 시드는 침대로 기어들어가 눈을 꼭 감았다.
  문득, 무척이나 밝았던 로이의 방에서 조명기구를 하나도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다음에 찾아갈 때 확인해봐야지. 시드는 침대 안에서 웅크린 채 긴 하품을 했다. 밀려오는 잠을 느끼며 또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아까 창을 통해 위층으로 올라갈 때 커튼과 창을 열어두지 않았던가? 아닌가...
  더 이상은 생각이 진행되지 않았다. 두꺼운 커튼 너머에는 아주 커다랗고 밝은 달이 떠 있고, 위층에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좋은 사람이 있으며, 그는 놀랍도록 밝은 달빛에 은발을 물들인 채 담배를 피우고 기타를 치며 이 밤을 새울 것임을 믿으며, 소년은 잠이 들었다.


                                                          -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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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 No Profile
    windrise 03.12.29 16:21 댓글 수정 삭제
    좋네요. :)
    마지막 세줄은 더욱.
  • No Profile
    재언 03.12.30 22:29 댓글 수정 삭제
    아, 로이는 달, 혹은 달에 사는 항아같은 존재 인것같네요. 예전에 어렴풋이 들은 달빛카페란 만화가 생각나는 군요. 동화에 나오는 비밀스런 친구들이 생각나는 군요. 나이가 들어도 그런 친구를 바라게 되는 것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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