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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xk160 빼앗긴 땅

2004.06.25 22:1406.25

  “그렇게 생각지는 않습니다.” 젤른디 학파의, 자이데른 교수가 끼여들었다.
  “우리 도시의 요즘 성향을 아실 겁니다. 헤카테 클럽이 몇 년 전에 큰 인기를 얻었고, 비슷한 클럽들이 거리마다 불을 밝힙니다. 수많은 저명한 학자들조차- 제가 감히 드리는 말씀이지만, 이 자리에 계신 의사 여러분이나 교수 여러분들 중에도 그런 클럽들의 회원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런 자리에서 옷을 벗고, 단체로 성교를 하고, 독한 술을 퍼마시고, 향내에 취하며, 심지어는 피부에 마약을 주사합니다. 왜냐? 사람들은 이제 현세를 즐기고 싶어합니다. 사람들은 초월하는 데에 염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자이데른이 급히 숨을 들이쉰 다음, 말이 끊길세라 몰아붙였다.
  “자신의 의지로 그들은 현세를 즐기는 길을 택했습니다. 정신분석은 사람들 스스로가 자신을 고치고 싶은 의지가 있을 때에나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시민들을 진정 바른 길로 이끌고 싶다면...”
  “좌우지간 약물은 안 됩니다.” 이비르 교수가 말했다. 자이데른이 슬그머니 웃었다. “좌우지간이라니, 참으로 독선적인 말씀이십니다...”
  “그렇지요. 전통적인 권위에 기대어서 하는 말입니다. 당신들은 말은 많지만 한번도 그 권위에 도전해 보지조차 못했으니 말입니다.” 이비르 교수가 늙은 이마를 찡그리며 말했다. “재차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초월의 의지가 없다면 의지를 갖도록 계도해야 할 일이지, 또 다른 마약인 약물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왜 입니까?”
  “당신들이 말하는 것은, 우리들이 죽음을 얻어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죽음에 먹힘으로서 자유로워진다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이 계획하고 깨달아 그 경지에 오를 때만이 사람은 주체로서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현 생애를 두고 이렇게 생각해 보지요. 누군가 사랑에 빠집니다. 이름은-” 이비르 교수가 나를 흘끗 돌아보았다. “힐레인이라고 해 볼까요. 힐레인이...”
  “힐레인은 쿠마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맙소사, 교수, 난 그 여자가 정말 싫어요. 그 농담 좀 그만 해요. “일년동안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었지요. 그런데 쿠마가 죽어버렸습니다. 내가 실험실에서 같이 실험을 하다가 그만 실수로 독을 부어 죽여버린 거지요.” 잘 했어요, 교수. “쿠마는 패혈증으로 인해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힐레인은 나를 증오합니다. 뭐라 말할 수 없이 증오합니다. 나는 미안해 죽겠어요. 되돌릴 수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나는 대화를 시도하지만 먹히지 않습니다. 힐레인도 나를 오랫동안 알아왔고, 용서하고 싶지만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용서하기는커녕 죽여버리고 싶지요. 우리 사이에 감정이 점점 고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법이 말하길, 쿠마는 이미 죽었다, 이비르는 벌금형에 사형, 힐레인은 이비르에게서 일억 원쯤 보상받고 다른 여자랑 행복하게 살아라. 쾅!” 이비르 교수가 왼손바닥을 오른손 주먹으로 살짝 쳤다.
  “해결났지요? 당신들이 하려는 게 이런 짓입니다.”
  “말도 안 됩니다. 누구의 감정도 해결되지 않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는 일은 문제가 되는 사건을 원상태로 되돌림으로서, 예컨대 쿠마를 살려냄으로서 이비르와 힐레인을 문제없이 화해시키는 겁니다. 예컨대 괴세포를 죽여서 혈전 기능을 회복시키고, 산소 운반 기능을...”
  “내가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당신은 괴세포를 죽여버립니다!”
  “또 그 소리.” 젤른디 학파의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우리 이비르 교수는 못 들은 것 같았지만, 내 귀에는 어렴풋이 들려왔다. 이비르 교수가 못 들어서 다행이다. 젊은이의 패배주의를 못 참아주는 사람이니까- 이비르 교수가 말을 계속 이었다.
  “내가 아까 현세의 예를 들었습니다. 현재 힐레인과 나와 <쿠마의 죽음>과의 관계 말입니다. 힐레인과 나에게 의지가 있다면, 우리 둘은 쿠마의 죽음을 극복하여 새로운 관계를 맺어 새로운 우리가 될 겁니다. 그러나 법은 나를 죽여버립니다. 법은 그저 같은 법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의 존속에만 관심이 있지요, 어떤 법도 자신을 넘어서는 진화를 법 자체 내에 포괄할 수 없습니다. 법은 끊임없이 사회를 똑같은 사회에게로 돌려줍니다. 쿠마를 살려낸다고? 좋습니다, 당신들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칩시다. 그렇다 해도 쿠마가 한번 죽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건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그 지워질 수 없는 과거는 극복해야만 사라지지, 쿠마를 다시 살려냈다고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필시 부작용이 곧 생길 겁니다. 실제로, 당신들이 아무리 약물 요법을 써 봤자 이 병을 고치면 저 병에 다시 걸리고, 이 상처를 낫게 하면 다시 이 합병증이 도지는 게 그런 이유란 말입니다. 아무튼, 요약하자면, 중요한 건...” 이비르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당신들이 <쿠마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악으로 보고 무시한다는 겁니다. 약물 요법은 병을 극복하게 하지 못합니다. 약물 요법은 괴세포를 죽여버립니다. 약물 요법의 목적은 괴세포를 죽이고 원래의 신체를 유지하게 하는 겁니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괴세포를 수용하고, 그 괴세포와 원래의 신체가 어떻게 공생할 수 있는가 그 점에 골몰합니다. 우리의 목적은 진화입니다.”
  자이데른은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의 이비르 교수가, 승리를 확신하며 입을 열었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몇 십 번씩 논의를 해 왔고, 그 때마다 당신들은 아무 답도 내놓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 아까 투덜거렸던 젤른디 학파의 젊은이 같은데, 이번에는 똑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그 진화에 대해 할 말이 있습니다.”
  우리 교수가 눈을 들어 젊은이를 쳐다보고 미소지었다. 젊은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좀 수줍은 얼굴이 되어버렸다. 우리 교수는 처음 보는 젊은이에게는 무조건 친절한 사람이다.
  젊은이가 자기 이름을 레실레라고 밝히고, 헛기침을 두어번 하더니 본론을 꺼내놓았다. “우리의 육체는 우리의 전생이지만, 이 몸을 통해 살아가는 우리의 현생은 아직 정신의 영역에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현생도 매 순간 몸으로 돌아갑니다만... 일단은 뇌 속의 신호로 즉 기억의 형식으로 돌아가지요. 그 다음에야 호르몬이나 엔돌핀 등의 작용을 통해 신체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의 전생과 상호작용합니다. 우리가 현생을 어떻게 살 것이냐, 할 때, 심지어 이빌르 교수님이 계신 크라이트 학파께서 정신분석을 시도하실 때도, 전생의 기억은 끌어올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다만 단단하게 물질화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그러나 우리의 육체도 살아가야 합니다. 다 아시는 우리 세계의 전제를, 분명히 하는 차원에서 제가 다시 한번 말해보자면, 현생은, 전생애들의 통합체로서의 육체와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하여, 서로 동시에 완전히 만족시키는 겁니다. 그 때에야 육체는 존속을 극복하고 존속은 육체를 극복합니다. 맞습니까?“
  “맞습니다.” 이빌르 교수가 끄덕거렸다. “우리 잘 생긴 레실레 씨가 말하는 바는, 그런 상호작용을 하는 데에 우리가 상대편인 육체에 대해서는 모르고, 다를 수 있는 것은 현생의 기억들밖에 없으니 불편하지 않느냐는 것인데...”
  레실레가 입을 꼭 다물고 끄덕거렸다. 이빌르 교수가 빙긋 웃으며 말을 마쳤다. “그러니 우리의 몸에서, 예를 들면 핵 속의 염색체 가닥들에서, 전생애들의 정보를 끌어내어 기억화 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보면 참 좋지 않겠느냐- 이런 것이지요?”
  “알고 계시는군요.” 자이데른 교수가 나서서 끄덕거렸다. “그렇습니다. 우리 학파도 이러한 조처 없는 약물 조치는 임시 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생애들의 기억 정보를 끌어오는 일에는 우리 학파가...”
  “나는 당신들이 그 일을 실패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빌르 교수가 말을 잘랐다.
  다른 젤른디 학파의 교수들이 주춤하는데, 자이데른이 답지 않게 허 소리를 냈다. “만약 어떤 것을 알고 계시다면, 우리가 성공했다는 것을 알고 계시는 거겠지요!”
  “나는 당신네 학파의 의사 하나가 강직증 비슷한 것에 걸려 죽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교수가 쏘아붙였다.
  자이데른이 눈을 부릅떴다. 이빌르 교수 뒤에서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에하마라는 의사로, 이빌르 교수 팀원이였는데, 크라이트 학파 답지않게 약물 조치 연구에도 흥미를 보여서 최근까지 교수의 미움을 사 왔다. 게다가 더 이상 젊지도 않으니 정말로 미움을 사기 딱 좋다- 그런데 이빌르 교수는 이번에는 그를 째려보지 않았다. 오히려 발언하게 놓아두었다. “내가 그 의사가 죽어가는 걸 한번 진찰했습니다. 죽기 며칠 전에 보았습니다만...” 그가 고개를 저었다. “엉망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공하셨습니다. 물론 그렇지요.” 이빌르 교수가 나서서 말했다. “문제는 당신들이 성공했다는 겁니다. 전생애들을 기억화하는 데에 완벽한 성공을 거두셨다는 거지요. 축하드립니다, 인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만, 이건 진심입니다. 야심찬 시도였고 꾸준한 노력이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어째서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는가는 당신들 책임입니다.”
  어찌 이런 멍청한 사람들이 있나, 하는 표정으로 우리 교수는 자이데른을 흘겨보았으리라 생각한다. 자이데른의 표정이 묘하게 공격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무슨 뜻입니까?”
  “자신을 알 필요가 없게 만들어놓고.” 이빌르 교수가 빈정댔다. “무의식을 말살시켜놓고, 그 사람이 살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까? 순식간에 무기물로 전락해버린 인간을 당신은 신으로 상정하셨나 봅니다. 강직증에 걸린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진짜 돌이나 차가운 쇳덩어리로 변해버리지 않은 게 다행이거나, 혹은 불행이겠지요.”
  나는 이빌르 교수의, 역시 답지않게 공격적인 말들을 듣고 있었다. 이 두 학파간의 싸움은 오래되었고, 근 십년간 자이데른 교수의 젤른디 학파의 득세가 두드러졌다. 클럽 헤카테가 먼저였을까 젤른디 학파의 득세가 먼저였을까... 파악하기도 어렵고, 기억하는 사람도 없다. 아무튼 셰빌 교수의 수제자였던 이빌르 교수로서는 역시 수제자였던 젤른디가 나가서 세운 이 독립적인 학파에 대해 배신감과 질투심을 동시에 느끼고 있을 것이다. 가끔 나같은 학생들 앞에서조차 비교육적으로 공격적 성향을 띄는 때가 있으니.
  그런데- 이 날의 학회는 결국 이 정도로 끝이 났지만- 내가 이날 충격 받은 건 다른 것이었다. 젤른디 학파는 전생애들을 기억화시키는 데에 완벽하게 성공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완벽하게 투명한 사람은 강직증을 일으키고 죽어버렸다- 이빌르 교수는 이로서 정신분석에서, 통찰의 중요성을 완전히 부정해버린 꼴이 되었다. 통찰은 무의미한 것이다. 무의식을 의식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고 말이다.
  나는 크라이트 학파 중에서도 매우 젊은 층으로, 이와 같은 통찰 개념에 매료되어 있었기 때문에 충격 받았다. 가장 완벽한 통찰은 주체를 살해했다.
  이빌르 교수도 통찰을 중시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말을 저렇게 해 놓았으면 이제는 분석가가 할 일이라고는 좋은 환경을 재개해주는 것 밖에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이빌르 교수는 자기 자신의 학설을 배신하는 말을 해 버렸다.
  그건 그렇고- 돌이 되건 철이 되건, 무기물이 되어버렸다면 어쨌거나 <영원한 죽음>은 얻은 것 아니겠어.
  어, 그렇네?
  나는 학회가 끝난 후 식당에서, 물만 홀짝이는 것도 질려서 버터기름에 볶은 홍합과 삶은 아스파라거스 몇 줄기를 접시에 놓고 발코니 쪽으로 나갔다. 사람들 몇 명이 두런거리고 있었다. 나는 될 수 있으면 사람들이 없으면서도 바람이 많이 들어 시원한 곳을 찾았다. 고전 음악같은 기둥들이 우뚝우뚝 서 있다가, 어느 순간 사라지면서 아치 모양으로 열린 곳이 있었다. 나는 그 쪽으로 나가서 벤치에 걸터앉으려고 했다.
  벤치는 물결무늬가 아주 자잘한 새빨간, 사과처럼 새빨간 나무로 되어 있었고-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그는 젊은이는 아니었는데, 젊은 듯이 수줍게 앉아있었다.  
  삼십대 중후반의 남자로, 입가에 잘 웃는 사람 특유의 주름이 희미하게 드러나 있었다. 체구가 제법 있는데 헐렁한 남방을 걸치고 있어서 사람이 유해 보였다. 콧수염은 그를 신사처럼 보이게 했다. 내가 어색하게 쳐다보다가 비켜가려니 그가 자리를 비켜주겠다, 앉으시라고 했다. 그 때 그의 미소는, 맙소사, 요즘 세상에는 정말이지 보기 드문 것이었다. 나는 대번에 그에게 호감이 들었다.
  내가 내 느낌을 밝히자 그도 응해왔다. 우리는 서로 정식으로 인사하고, 이름을 나누었다. 그는 한 손에 포도주 잔과 포도 한 송이를 받쳐들고 있었다. 이상한 식성이다 생각했다.
  아무튼 그는 잘 먹었다. 포도도 손끝이 퍼렇게 되도록 급히 따서 먹어버리고 포도주도 금방 마셔버리고 내 홍합까지 넘보았다. 나는 웃음 짓다가 그냥 다 드시라고 했다. 그는 품위 있게, 그러나 아무튼 허겁지겁 먹었다.
  내가 아까 들은, 무기물적 <영원한 죽음>이야기를 하자 그가 미소지었다. “아, 그것은 그러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내가 그 단호한 말투에 놀라서 되물었다.
  “그렇고 말고요. <죽음>이라고 말하니까 헷갈리는 겁니다. <영원한>만 생각해 보세요. 영원하긴 뭐가 영원합니까? 말살되어 버렸는데요. 우리가 원한 것은 만족하는 겁니다. 사라지는 게 아니라, 초월하는 겁니다. 존속이라는 예속에서 벗어나서 다만 우리 자신이 되는 겁니다. 전생애를 죽여버리는 게 아니라 최고로 존중해주는 거라구요.”
  그는 투덜거리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그가 이상하게 열의를 띄고 말했기 때문에 나는 궁금해졌다. “어느 쪽에 일하십니까?”
  “저는 유기화학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연구소 팀에서 매우 낮은 직급을 차지하고 있는 데다가, 낸 논문 수도 얼마 없지요.” 농담처럼 말했지만 정말인 것 같았다. 나는 얼른 말을 돌렸다. “연인은 있으십니까?”
  그가 나를 보고 슬며시 미소지었다. 관심 있냐는 듯한 미소라서, 나는 끄덕거렸다. 어수룩한 또래보다는 나는 아직 젊은 듯한 중년이 좋다. “연인은 없습니다.” 그가 말하길래, 나도 웃어 보였다. 그러나,
  “실은 일년 전까지만 해도 있었지요.” 하고 그가 도시의 화장터 쪽을 내려다보았을 때 나는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회장에서는 화장터가 내려다보인다- 거대한 담으로 둘러싸인 동공이 내려다보인다. 불꽃은 지금 타오르지 않고 있다. 아직 오늘 치 시신이 떨구어지지 않았나 보다.
  시신 더미가 나려지면, 폭발하듯 불이 타오르고, 그 싸늘한 전생애들과 그 전생애들이 매 순간 살아왔으며 결국 매 순간 전생애들을 죽여온 현생이 불 속에서 하나의 육신으로 융합되리라.
  불이 꺼져있다는 건, 어린애들이 나와있다는 뜻일까 그저 아직 시체가 떨구어지지 않았다는 걸까? 담장 너머로 하얀 것들이 몽실거리는 듯도 했다. 어차피 밤이라서 잘 보이지 않는다.
  나는 한참동안 화장터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았고, 화제를 돌리기도 어색했다. 그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나는 얼굴을 붉히며 돌아보았다. “이 학회에서,” 그가 말했다.
  “삼 년 전에 바로 이 학회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그는 당시 젤른디 학파의 의사였지요, 힐레인 씨. 하지만 원래는 당신과 같은 크라이트 학파에 있었습니다.”
  “그렇습니까?” 나는 끄덕거렸다. 이빌르 교수는 그런 학자들을 미워했지만 한편 동정했다.
  “그도 당신같은 회색 프록 코트를 입고 있었고, 당신처럼 술을 싫어했습니다. 당신처럼 금발이었지요.” 그가- 페라틴이라는 사람이 계속 말했다, 나는 기분이 점점 나빠져서, 나는 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취하지 않게 주의하고 있는 것 뿐이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말했다. “어쨌거나 당신은 참 아름답군요.”
  “고맙습니다.” 나는 얼굴을 붉혔다.


*



  등뒤에서, 차가운 흰 빛이 느껴지고, 두런거리는 소리들이 귀에 닿았다.
  화장터에서는 그 시간 즈음에 시신을 태운다. 불은 보이지만 연기는 나지 않는다. 허공으로 소실되는 어느 것도 없다- 모든 것은 완벽하게 되돌아온다.
  페라틴은 화장터를 내려다보았다. 불이 타고 있을 때는 눈이 끌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페라틴이 돌아보았을 때, 놀랍게도 레즈바인은 화장터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어깨를 꼿꼿이 펴고, 이죽대는 듯한 얼굴로 먼 데를 보았다.
  먼 데를 보아봤자 소용없다. 하늘과 땅은 도시의 가장자리에서 지평선을 꽉 다물고 있다.
  “저 닫힌 하늘과, 땅 밖에는.”
  레즈바인이 먼 곳을 턱짓해 보였다. “그런 곳도 있다고는 합니다. 사람 뱃속에서 다른 사람이 나온다는 겁니다. 유전자 일부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서 아이로 전해집니다만, 아이는 어머니나 아버지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가끔 돌연변이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적자 생존이라나...”
  “진화해나가는 거군요.”
  “도태되어서, 영원히 소멸되기도 합니다.” 레즈바인이 킥킥거렸다.
  페라틴이 무심코 그의 어깨에 손을 대었다. 레즈바인이 고개만 살짝 기울여 이 쪽을 돌아보았다. 페라틴은 이 친구의 얼굴이 무척 아름다운 것에 놀랐다. 레즈바인은 서른이 넘었는데도, 눈은 빛도 없이 색채만으로도 새파랬고, 눈썹은 곧고 가늘었다. 얼굴에는 어딘가 차갑게 번득이는 인상이 있었는데, 그 체념적인 조소에서 오는 것 같았다.
  페라틴은 이 친구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워낙 오랜만이라 얼결에 서로 말을 높여 쓰고는 있지만 대학에 대학원 동기다.
  이 친구를 대학 기숙사에서 같은 층을 쓰면서 처음 보고, 그 후로 대학원 세미나실에서 한번 보고, 그 후로는 본 일이 없다. 이런 학회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이 깐깐한 친구가 젤른디 학파에 들어있을 줄이야.
  그러나 그의 기묘한 조소를 마주하자 이해가 갈 듯도 싶었다. 페라틴은 포도주를 홀짝거리고 있었는데, 뷔페에 나오는 게 그렇듯 값은 싸지만 맛은 그럭저럭 괜찮은 물건이었다. 레즈바인은 물잔 조차 들고 있지 않았다. 차라리 대학 때 레즈바인은 적당히 근육이 붙어 있는 몸매였는데, 지금은 뭘 입어도 헐렁하게 말랐다. 몸의 선은 차라리 여성스러워 보였다. 페라틴이 먼저 운을 떼어 보았다.
  “동공에 불이 붙었군요.”
  알 게 뭐랍니까, 하는 듯이 레즈바인이 눈만 살짝 찌푸리며 웃었다. 페라틴이 물었다.
  “이 도시에서 살아있는 것이, 지겹습니까?”
  “뭐,” 레즈바인이 별로 진지하지 못하게 으쓱해 보였다. “누군들 안 그렇겠습니까만...” 페라틴이 빙그레 웃었다. “그럼 어떤 파티에 한번 참여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흐응.” 레즈바인이 고개를 모로 꼬았다. “좋은 약이라도 있나 보지요?”
  “아니, 우리는 꽤나 진지한 사람들입니다.” 페라틴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저도 마음먹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일요일, 세시쯤에 한번 들러주시지요. 유명한 클럽이니, 위치도 아실 거라 믿습니다만...”
  “일요일이라.” 레즈바인이 싱글거렸다. “안 됩니다. 실레인과 맛있는 걸 먹으러 가기로 했지요.”
  “실레인 씨라면...”
  “아시는 분 아닙니까? 대학원 때 같이 자취하시던 분 아닙니까. 그 후로 제가 크라이트 학파에 있었을 시절 저희 팀원으로 들어왔습니다.”
  “학파가 갈린 다음에도 친분이 남다니, 꽤 친하게 지내셨나 봅니다.”
  “말하자면 그렇지요.”
  “아무튼, 음식을 드시는 거라면, 파티에 오셔도 비슷한 걸 하실 수 있을 텐데요.” 페라틴이 웃음 지었다. “두 분이 같이 오셔도 좋습니다만, 한번쯤 고려해 보십시오. 오셔서 원치 않으시면 당장 나가셔도 됩니다.” 말하다가 페라틴은 말꼬리를 흐렸다. 레즈바인이, 코웃음치는 듯한 미소를 띄운 채, 페라틴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레즈바인이 입술 사이에서 숨을 풀어 말했다.
  말만으로도, 그 입 속의 혀가 얼마나 보드라운지 알 것 같았다- 페라틴은 갑작스런 동요에 주춤거렸다. “실레인과는 친한 사이입니다만, 그 사람, 별로 마음에 들진 않아요.” 레즈바인이 계속 말했다.
  “그 쪽은 보다 깊이 사귀고 싶어하는 것 같지만 저는 그 사람이 영 꺼려집니다. 어떨 때는 소름끼칠 정도예요.”
  “그렇다면-”
  “네, 보통은 계속 사귀려고 하지요. 비겁해지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반대입니다. 무서운 걸 강요당하다 보면 마음이 부서져버려요. 부서진 마음으로 뭘 하겠습니까? 멀리 떨어져있는 게 오히려, 자신이 왜 그것을 무서워하는지 알아내기 쉽습니다. 무식하게 싸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하지만,” 레즈바인이 미소지었다.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릅니다. 공포는 엄습 당하는 것이지만, 사랑은 내가 그 엄습에 대해 맞서는 겁니다. 사랑할수록 자신의 주체적인 존재가 분명해집니다. 사랑에 관해서라면, 강요당하면 강요당할 수록 자신을 알기 좋겠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페라틴이 웅얼거렸다. 레즈바인이 페라틴의 얼굴을, 그 새파란 눈동자로 들여다보았다. “수줍어하지 마세요. 알고 계시잖습니까? 지금 연인이 되어달라고 말하는 겁니다.”
  레즈바인이 다시 물었다. “당신은 저에 대해 어떻게 느끼십니까?” 페라틴이 미소지으며, 반쯤은 어쩔 줄 모르며, 레즈바인의 턱 근처를 건드렸다. 둘은 입맞췄다.




   지평선 너머로, 해가 서쪽에서 졌다가 다시 동쪽에서 떠오를 때, 아주 가끔씩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보인다.
  처음 목격자들은 눈이 아파서 검은 점들이 보이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함께 목격하면서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그들이 바로 바깥 세계의 사람들, 즉 외계인들이라는 얘긴데, 그들의 그림자는 아주 작고, 엷기가 그지없다. 태양에 의해 비추어진 그림자는 아니다. 이 곳 태양에 의해 비추어진 그림자는 땅을 뚫어버릴 정도로 짙다. 그들의 그림자는 형체가 드물 정도로 엷다.
   그들의 그림자는 아주 작지만, 물고기처럼, 몸에 비해 아가미가 지나치게 크고 그리고 날렵한 물고기처럼, 쏘아대며 지나간다. 그들은 무시무시하게 빠른 속도로 스쳐지나간다, 백 여년 천 여년에 한번씩, 그리하여 올해 또 지나갔다. 페라틴은 레즈바인과 침대에서 손을 잡고 비스듬히 누워서, 서로 망원경을 나눠가며 그것을 보았다. 레즈바인은 흥미 없어 했지만 페라틴이 하도 정색을 하자 망원경을 넘겨받아 한번 보았다.
  흥미없어한 것 치고는 레즈바인은 그 바깥 세계 사람들에 대해 꽤 여러 가지를 알고 있었다. 말을 마치고 나서 레즈바인이 덧붙여 설명해주었다. “그들 식으로 설명하자면 오히려 간단해. 이 세계에서, 생애는 어머니,” 레즈바인이 말했다.
  “살아있게 한 욕망은 아버지.” 레즈바인이 페라틴의 손과 자신의 손을 맞잡아 보였다.
  “욕망이 생애에 대해 내내 원했던 것. 그러나 이루지 못한 것. 이루어지지 못했기에 버려진 생애. 이루지 못한 욕망과 이루어지지 못한 생애의, 결합코자 하는 욕망 때문에- 사람은 새로 태어난다.”
  “결국 우리의 전생은 몸이 되고.” 페라틴이 받았다.
  “그 몸이 또다시 살아간다.” 레즈바인이 웅얼거리면서 돌아누웠다.
  잠시 후 레즈바인을 깨워서 둘은 출근했다. 페라틴의 연구소는 레즈바인이 근무하는 병원을 조금 지나서 있다. 레즈바인이 졸린 눈으로 운전하는 건 보기가 위태위태하기도 해서, 페라틴이 가끔씩 레즈바인을 태워주기로 했다.
  차창으로 시선이 느껴졌다. 시선이라는 게 느껴질 리가 없고, 물론 이건 자의식인데- 페라틴은 차창 밖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의식밖에 없는 아이들이 임시 숙박소 창문에서 이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곧 적당한 성인들에게 의무 배당된다. 페라틴은 아직 자격이 없다. 그리고 계속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이들이 흥미를 잃지도 않고 계속 내려다본다. 페라틴은 앞유리로 시선을 돌린다. 완벽한 이목구비를 갖춘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탄생한다, 모두의 시체를 모아 태우는, 도시의 화장터에서. 동공의 폭발하는 듯한 불이 꺼지고 나면 마른 우물이 넘치듯 발가벗은 어린애들이 동공을 둘러싼 담장 너머로 밀려나온다.
  결백하지 못하다는 증거로서의 재탄생. 아직 해결되지 못한 생애와 생애의 중첩- 이 세계는, 몇백 년 전부터 존재했을까? 기록은 사백년 어치가 남아있다. 사람들은 사슬을 질질 끌고 다닌다. 이제 영원한 죽음 혹은 영원한 생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욕망은 누구도 품지 않는다. 언제까지나 생애는 불완전할 것이고, 욕망은 원할 것이고, 그러므로 생애는 소외될 것이다. 몇백 몇천 번이고 이 몸은 다시 모여들리라.
  레즈바인이 졸다가 고개를 들어 페라틴의 옆얼굴을 보았다. “뭐 해? 중앙선 넘었어.”
  이런 말은 좀 급하게 해 주면 좋겠다! 페라틴이 얼른 핸들을 꺾었다. 해 뜨는 쪽을 바로 보게 되어 눈이 아프다. 레즈바인이 해가리개를 내려주었다. 어디선가 아련하게 쾅 폭발하는 소리가 났다.
  화장터다. 아침부터 시신은 왜 태우는 거야?
  좌우지간, 생애와 욕망이 아무리 결합하고 싶어한대도, 결합되는 힘이 있어야 한다. 화장터에서의 탄생을 미루어보아 그것이 불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결국 불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것도 엉터리지.” 레즈바인이 킥킥거렸다.
  “여러 가지 실험이 있었는걸. 시신이 길바닥에 버려져도 썩은 후에 어린애는 화장터에 나타나. 심지어 전혀 다른 곳에서 불에 태워버려도 어린애는 화장터에만 나타나. 불이 문제가 아니야. 저 화장터야.”
  화장터는 임시 숙박소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이제 여기서는 폭발하는 듯한 소리만 아련하게 울린다.
  화장터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는 현 도시민 중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 이 세계의 하늘과 땅이 다물어지기 전에 선조들이 있었다. 그들이 거의 마법을 부리듯한 기술로 이 화장터를 지었다. 화장터가 지어지자 세계가 영원히 닫혔다. 그들 또한 죽고 나서 동공 속에 던져졌다.
  어쨌거나 불은 문제가 아니다, 레즈바인의 말뿐만이 아니라, 여러 학자들의 말을 통틀어 보아도 그 점은 정확하다. 그런데도 불을 섬기는 클럽이며, 무엇보다 그 바보같은 클럽의 멍청한 부자들이 관리하는 사당들의 목록이 늘어났다. 정부는 딱히 이 돈 낭비를 규제하려 들지 않는다. 페라틴은, 그렇잖아도 화학과에는 몰리는 자본도 없는데, 돌아오지도 못할 돈이 미신에 퍼부어지는 걸 보면 속이 쓰리다. “사당들은 왜 없애지 않는 거래?” 페라틴이 툴툴거렸다.
  “없애서 어쩔 거야? 거기서들 회포라도 풀라지.”
  “저주를 내린 건 우리 자신이야.”
  “물론이지, 페라틴. 하지만 말이야. 신이 존재한다면 용서도 존재하는 거지. 살아있게 한 욕망을 있게 하신 분 말이야. 불에 인격을 부여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라고. 네가 아무리 용서해주어 봤자, 다시 태어날 테니까 말이야.”
  “저주를 내린 건 우리 자신이야. 지울 수 없는 과거를 그저 지울 수 없는 채로 살아온...”
  “그러나 섹스할 때만은 낭만적이지.” 레즈바인이 페라틴의 목에 팔을 감으며 말했다. “네 전생애들, 늘 기대하고 있다구. 이 부분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건드리지 마, 운전 방해돼.” 페라틴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체 어떤 욕망이 아직도 이 부분을 이렇게 흥분시키는 걸까?” 레즈바인이 기묘하게 웃었다. “우리가 죽지 못하는 건, 그냥 이게 바라고 바라고 또 한없이 바라기 때문 아닐까? 어디...”
  “차 세운다!” 페라틴이 소리질렀다. “차 세울 거야! 하팀 도로까지만 기다려!” 레즈바인이 이미 지퍼를 열고 혀를 내밀고 있었다.



  아침마다 그런 짓을 당하는 데는 익숙해져 있다. 레즈바인은 페라틴의, 맑기만 한 정액을 삼키고 나서야 그를 고이 보내주었다. 퇴근 시간은 페라틴이 이른 편인데, 레즈바인은 돌아오자마자 저녁 먹을 생각도 않고 뭐라고 흥얼거리며 페라틴에게 안겼다. 이 술 한 방울 안 마시면서도 늘 술 취한 것 같은 연인에게, 페라틴은 술을 마셔도 제정신인 죄로 늘 승복하고 만다.
  “하지만 그건 말이 안 돼.” 페라틴이 벗은 몸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 몸에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지. 그래야지 우리가 지속되는 이유가 섹스가 될 수가 있지...” “흐응,” 레즈바인이 콧소리를 냈다. “좀 더 낭만적이 되어볼 수 없어? 우리가 절대로 죽지 못하는 이유는, 태어나서 뭔가를 보는 순간 보이는 대상들을 사랑하게 되기 때문이란 말이야. 연인이 제일 무시무시하지. 사랑은 내가 하는 거지만, 너 때문이지. 네가 나한테 무슨 짓인가 하고 있는 거지. 나도 네게 무슨 짓인가 하고 있을 거야. 너랑 나는 서로 막 당하고 있는 거야. 그래서 이게 화가 나서 이렇게 서는 거고...”
  “야!” 페라틴이 밀어내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레즈바인이 정성스레 입에 물고 있다가 올려다보았다. “흐응, 하긴, 이것도 네 입장에서 보면 당하는 건가?”
  “웃지 마! 맙소사.” 레즈바인이 몸을 붙여 키스했다. 페라틴이, 거의 반사적으로, 레즈바인의 허리를 안고 파고들었다. 레즈바인이 가만히 숨을 참았다. 페라틴이 레즈바인의 몸을 뉘였다.
  “하기사...” 페라틴이 헐떡거렸다. “역시 당하는 것 같기도 해... 이게 내 의지로 하는 건지... 그냥...”
  “그냥 뭐?” 레즈바인이 말하다가 소리를 냈다. “살살 좀 해!”
  “그냥...슬픈 건지...” 페라틴이 속삭였다.
  “슬퍼서 울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그냥 계속 움직여.” 레즈바인이 페라틴의 허리를 꽉 붙들었다.



  울고 싶다고 호소하고, 서로 실컷 울게 해 준 다음, 서로의 몸에서 떨어졌다. 페라틴이 빠져나와서 레즈바인 옆에 누웠다. 레즈바인은 눈을 몇 번 깜박거리더니 곧 잠들었다.
  졸릴 만도 하다. 레즈바인은 의사인데, 하필이면 젤른디 학파의 의사라, 아무 때나 응급 상황이니 하면서 호출이 온다. 어제도 한밤중에 불려 나갔다 왔으니 피곤하긴 할거다. 오늘 갑자기 굶주린 양 군 것도 어리광일 게 뻔하다. 페라틴은 레즈바인의 머리를 조금 안쓰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다음 날 아침, 페라틴이 식사를 준비해서 침대로 가져갔다. 레즈바인이 일어나면서 킥킥거렸다. “어제 난폭했어, 너.”
  “아파?”
  “조금.” 레즈바인이 우유를 홀짝거렸다.
  “아참, 어제 밤에 미안했어.” 레즈바인이 말을 꺼냈다.
  레즈바인이 미안하다고 하는 건 정말로 미안할 때가 아니라 사무적인 이유로 어쩔 수가 없었을 경우에 꺼내놓는 말이다. 예컨대 사람 죽을 일- “심장 발작을 일으킨 여자였거든.” - 그래, 이렇다니까.
  페라틴이 끄덕거렸다. “넌 냉소적인 데에 반해서 사람 한번 죽는 데 신경 쓰는 거 보면 재미있어.” 레즈바인이 금방 눈을 찡그렸다. “젤른디 학파가 뭐 하는 덴데?”
  “생각해 봐, 예를 들어 그 여자 말이야, 평생 통찰하고 노력하고 계획해서 마침내 기적을 목전에 둔 거야. 완벽한 상호작용 말이야. 완벽한 자기 통찰, 그에 따라 자기 파악은 완벽하고, 거기 바탕한 계획 또한 완벽하고, 기계의 버튼만 누르면 되는 상황이지. 버튼 한번 눌렀더니 중간 과정에서 공식상의 상수 대입 오류같은 아주 멍청한 에러가 생겨서 심장이 삐긋해버렸어. 꽥 한번 죽어버리면 다음 생에서 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해. 그게 뭐 하는 짓이야?”
  “말 그대로 하자면 슬픈 일이지만, 최소한 지난 사백 년 간 아무도 이루지 못한 기적이잖아.” 페라틴이 미소지었다. 레즈바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젤른디 학파는 생애 기간을 연장해서 그 기적의 확률을 좀 높여주려는 거지. 약물 조치가 임시방편이라는 점은 나도 동의해.”
  레즈바인이 계속 말했다. “결국 목표는 기적을 이루는 건데, 그건 사람 각자의 능력으로 할 일이지.”
  “그럼 넌 왜 젤른디 학파에 있어?”
  “난 기적을 이룰 능력이 없으니까, 남이나 도우려고.” 레즈바인이 의외로 소탈하게 털어놓았다. 페라틴이 말을 곰씹어보고는, 꽤나 체념적인 얘긴 것 같아서 레즈바인이 측은해져서는 말을 꺼냈다. “레즈바인, 나 예전에 하나 들은 말이 있어.”
  레즈바인이 흐응, 하듯이 돌아보았다.
  “직장 동료한테서 들은 말인데...” 페라틴이 슬쩍 웅얼거리듯이 말하다가, 본디 목소리로 돌아왔다. “셸린인가 하는 학자가 말한 거라더군, 죽음을 얻기 위해 사는 건 바보같다고 말이야. 다만 현생애를 즐기라고. 반복되는 현생애야말로 영원이 아니겠냔 말이지. 일상에서 동떨어진 영원성을 구하니까 구해질 리가 없는 거라고. 전생애를 해결할 필요가 있는가, 전생애를 통해서 즐겨보자, 네가 말한 것과 비슷해. 섹스할 때만은 낭만적이라고...”
  “관능!” 레즈바인이 투덜거렸다. “관능, 쾌락, 심미안, 발딱 선 성기만으로 먹고 살기...”
  “그렇진 않아. 미술 전시회나, 음악이나... 쾌락이 그런 것에만 한정된 건 아니잖아?” 페라틴이 얼굴을 붉혔다. 레즈바인이 페라틴을 똑바로 쏘아보며 말했다. “어떤 클럽에 들어 있었던 거야, 너?”
  “클럽이라니?”
  “흐응, 너 거짓말 할 때는 말꼬리 흐리잖아. 한창 뜨던 클럽 헤카테?”
  “레즈바인...” “아직도 들어있어?” 레즈바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냐, 탈퇴했어. 탈퇴한 지 오래됐어.”
  페라틴이 힘차게 끄덕거렸다. “정말이야. 너와 연인이 되었을 때는 이미 탈퇴한 후였어.”
  “거짓말. 그날 날 초대하려고 했잖아. 그 클럽이었지?”
  “하지만!” 페라틴이 얼굴이 하얗게 되어서 말했다. “너와 사귄 후 부터는, 정말로 한번도 가지 않았어.”
  “그 전에는 매번 집회에 갔단 말이지?” 페라틴이 킥킥거렸다. “약을 풀어놓고, 단체 섹스, 뭐 그런 거야? 여자도 안고 남자도 안고, 예쁘게 생기지 못한 것들은 입회도 하지 못하고, 예쁘게 입지 않은 것들은 집회장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최고급 포도주를 가득 풀어놓고 최고급 생크림을 잔뜩 발라놓고 핥고 빨고 그저 좋아 죽으려고...”
  “레즈바인...”
  “차라리 장례식을 해라!” 레즈바인이 소리질렀다. “무책임한 녀석들. 무책임한 인간들. 평생 울다가만 갈거라 이거지. 나는, 보통의 사람들은, 최소한 죽음을 얻기 위해서 살아가지. 너희들은 죽음에 대해서 통곡하는 것에 불과해!”
  “그런 진지함이 쓸모 없는 거라고- 단 한번이라도 생각해 봐. 지나치게 환상적인 거라고! 우리는 거쳐온 모든 생애를 온 몸에 가지고도 한번도 그것을 외부에 대해 사용하려 들지 않았...”
  “네 몸을 봐, 페라틴.” 레즈바인이 기묘하리 만치 요염하게 웃었다. “미술관에 가서 네가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네 눈을 봐. 너를 의식해. 그러고도 그것이 아름다울 수 있는지 봐. 눈을 들면 보이는 건 그림과 너 자신 사이의 거리밖에 없을 거야.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건 그 거리에 대해서 네가 통곡하고 있는 것에 불과해. 가장 머나먼 왕국의 공주를 꿈꾸듯이...”
  “레즈바인, 그렇다면 난 왜 너와 섹스하지?”
  “사랑하잖아.”
  “그럴까?” 페라틴이 비꼬듯이 말했다.
  페라틴은 레즈바인의 상처받은 듯한 얼굴을 보았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나가.” 레즈바인이 잘라 말했다. “옷을 입고 나서는 내가 나갈 테니까.”
  “어딜 가려고?” 페라틴이 그대로 서서 말했다. 어쨌거나 레즈바인은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너의 그 클럽보다는 진지한 곳이야.”
  “무슨- 너도 클럽에 들어있어?” 레즈바인이 대답도 않고 나갔다.




  레즈바인이 자신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걸까? 그건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페라틴은 당시 나무랄 데 없이 처신했다. 가면을 쓴 여자들과 엉덩이 토실토실한 소년들 대신에 레즈바인과의 동거를 선택했던 것이다.
  페라틴은 혼자 헛기침을 해 대며, 잠시 빈 방에 머물러 있다가, 그대로 레즈바인을 미행하기 시작했다. 레즈바인은 눈치채고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모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비가 내릴 듯 말 듯한 날씨였는데, 길이가 애매한 프록 코트를 걸치고는 그의 특유의 조심스런 걸음새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레즈바인의, 새카만 구두창이 닿는 곳마다 희미한 물기가 피어올랐고, 허공에서부터 정말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코트의 깃을 세우는 레즈바인의 창백한 손을 페라틴은 멀리서 쳐다보았다. 그 손과 손길은 희미한 와중에도 눈부셨다.
  레즈바인에게서 페라틴은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래서 못 참게 될 때 페라틴은 레즈바인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다. 그 열릴 리 없는 신비에 손을 대고, 두드려도 열릴 리 없는 문에 대해 울어버린다. 그런데 레즈바인에 대해서는 그래도 되고, 다른 수많은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안 된단 말인가? 페라틴은 레즈바인의 반응을 단순히 질투로 생각했다.
  페라틴이 레즈바인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은 아니다- 미술품을 물론 가질 수 없다. 집에 걸어놓을 수는 없지만 영원히 그 아름다움에 대해 무엇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레즈바인은, 아름다움을 느끼는 자신에 대해 연구하라는 것이다. 미술품 따위에 집착하지 말고.
  추잡할 정도로 진지한 녀석이다- 페라틴은 생각했다. 자신이 비꼬듯이 받아친 것에도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레즈바인이, 그런 조소를 띈 얼굴로, 어딘가 비웃어 넘길 수밖에 없는 깊은 체념이 깃든 얼굴로 늘 자신을 받아들이곤 했던 것은, 정말로 체념이었단 말인가? 절망에 깃든 자가, 자신에 대해서 포기한 자가 혈관에 중독성 강한 약을 흘려보내듯 그런 의미로 레즈바인은 자신에게 안겼단 말인가? 끔찍한 일이다- 페라틴은 생각하자 다시 불쾌해져서, 주머니 속에서 손을 꽉 쥐었다. 그 순간 레즈바인이 골목 한쪽으로 사라졌다.
  페라틴이 허둥지둥 쫓았다. 잘 모르겠지만 골목길에 그럴싸한 건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클럽 비슷한 현판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 현판이나 없나, 올려다보다가 문득 페라틴은 허름한 건물의 이층 좁은 창을 통해 누군가의 다리께를 보았다. 프록 코트 자락으로 미루어보아 레즈바인일 수도 있었다.
  페라틴은 얼른 쫓아 올라갔다. 이쯤 왔으면 들켜도 상관없다는 생각에, 쿵쿵 소리가 울리도록 계단을 올라가는데, 겉에 비해 속 안은 깨끗하고 나름대로 고상한 건물이었다. 취미 나쁜 중상류층정도는 살고 있을 만 하다.
  따라 올라가니 레즈바인이 바로 어느 집 문 앞에 있었다. 그렇다, 가정집이었다. 하얗게 페인트를 덧씌운, 무늬목으로 된 길쭉한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머리만 빼꼼 내밀더니, 곧 예의 바르게 걸어나오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넬리 씨. 굉장히 오랜만이군요. 여쭈는 것이 실례라면 죄송합니다만, 이제 들르지 않으실 거라고 들었는데...”
  “역시 와 버렸습니다. 갑작스러웠다면 죄송합니다.” 레즈바인이 미소지었다.
  “여전히 이 곳에서 집회를 하고 계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시간도 잘 맞춘 것 같군요.”
  “네. 그게, 슬픈 일이지만 회원 수는 많이 줄었습니다. 그래도 집회는 계속되고 있지요. 넬리 씨가 와 주셔서 기쁩니다. 들어오시겠습니까?”
  “들어가도 될까요, 베일레 씨?”
  “물론입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시작할 겁니다.” 베일레라고 불리운, 풍채 좋고 코가 유난히 큰 남자가 미소지었다. 레즈바인이 공손하게 미소지어 보이고는 문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더 눈치를 보다가는 낄 틈이 없을 것 같아서, 페라틴이 얼른 가서 붙었다. “레즈바인!”
  “날 놔두고 가면 어떻게 해.” 페라틴이 레즈바인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레즈바인도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베일레의 표정이 훨씬 더 이상해지자 재빨리 얼버무렸다. “이거 실례합니다.”
  “미리 말씀드려야 했던 건데 일정에 변경이 좀 있어서 말입니다. 이 친구가 파티에 갔다가 누구에게 소개를 받았다는군요. 제게 와서 가입하고 싶다고 하덥니다. 믿을만한 친구지요. 사실 이 친구 소개하느라고 이번에 저도 온 겁니다. 원래는 일이 있어서 다음 달부터 오겠다고 하더니 갑자기 일정이 바뀌었답니다. 그렇잖아도 미리 말씀을 못 드려놓은 탓에, 예정대로 다음 달부터나 오라고 했더니, 아무래도 빨리 여러분들을 뵙고 싶었는지...”
  “괜찮습니다. 저희들로서도, 새로 회원이 들어오는 거야 반가울 뿐이지요.” 베일레가 미소를 띄운 채 페라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약서는 가져 오셨는지요?”
  “저런, 제가 데려오는 것으로 충분할 거라고 생각해서 말입니다.” 레즈바인이 오히려 불쾌해하자 베일레가 난감한 얼굴을 했다. “곤란합니다...”
  “오늘 구두로 서약을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오늘은 서약서를 준비하지 못했는데요. 물론 레즈바인 씨를 믿습니다만...”
  “서약서는 사실 어찌되든 좋지 않습니까. 중요한 건 혈액 아니겠습니까?”
  “하기사...” 베일레가 페라틴과 레즈바인을 번갈아 흘끔거렸다.
  베일레가 마침내 시선을 거두고 나자, 페라틴이 무슨 소리냐고 입모양으로 뻐끔거리며 레즈바인을 돌아보았다. 베일레가 손짓했다. “두분 다, 들어오십시오.”
  둘은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거실은 스무명정도가 돌아앉을 만한 크기로, 상류층 자택치고는 좁지도 넓지도 않았다.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다. 샹들리에는 잘 살펴보면, 한 시간에 한 바퀴나 돌아갈 속도로 조금씩 시계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찰랑거리는 빛을 거실 전면에 퍼뜨리면서, 초음파로 들리는 음악처럼 조금씩 사람들을 미치게 만드는 효과를 노리는 것 같았다. 이미 예닐곱 명이 거실 중앙을 비워놓고 드문드문 둘러앉아 있었는데, 레즈바인과 페라틴이 인사하고 그 사이에 끼여들었다. 사람들이 둘을 보고는 놀란 표정을 해 보였다가 곧 미소지었다. 앉자마자 레즈바인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무슨 짓이야?”
  “네 잘난 클럽이 어떤 모양인지 보러 왔지.” 페라틴이 자못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여긴 알려지면 안 되는 클럽이야.” 레즈바인이 주위를 흘깃댔다. “내가 쫓겨날까봐 널 감싸준 것 뿐이야. 네가 미리 서약도 하지 않고 베일레와 이곳 사람들 얼굴을 알아버린 이상...”
  서너 명이 더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회원들이 대강 다 온 것 같았다. 베일레가 사람들 중 몇몇과 속닥거리는 듯 하더니 이 쪽을 보았다. 베일레는 새하얀 접시를 하나 받쳐들고 있었는데, 접시 위에는 샬레 하나와 또 뭔가 반짝이는 조각이 놓여 있었다. “알아버린 이상, 넌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어. 꼼짝없이 입회해야 한다고.”
  “재미있겠는걸.” 페라틴이 오기를 부렸다. 베일레가 페라틴 앞에 무릎을 꿇고 샬레를 적당한 곳에 내려놓았다. “그럼, 혈액을 체취 하겠습니다.”
  페라틴이 레즈바인 쪽을 보았다. 레즈바인이 눈을 감았다. 페라틴이 떨떠름하게 끄덕거렸다. “그러시던가요.” 베일레가 반짝이는 조각을 그 두툼한 손끝으로 들어올리더니, 삼각형의 날카로운 쪽 모서리를 페라틴의 약지 끝에 댔다. 손끝이 푹 뚫리는 느낌과 함께 피가 새어나왔다.
  상처치고는 꽤 많은 양의 피가 떨어졌다. 베일레는 이런 일에 익숙해 보였다. 아픔도 만만치는 않아서, 페라틴이 얼굴을 찌푸렸다. 베일레가 피가 어느 정도 들어찬 샬레를 사람들 앞으로 돌렸다. 회원들이 면봉에 한번씩 찍어 각자 쪽 소리나게 빨아먹고는 다음 사람에게 돌렸다.
  페라틴이 진저리를 치며 레즈바인에게, 뭐 하는 짓이냐고 속삭였다.
  “이봐, 저 사람들이 내 몸의 일부를...” “그럼,” 베일레가 일어서서 말했다. “입회식은 끝났습니다. 서약을 받지요. 이름이?” “셸링 입니다.” 레즈바인이 대신 대답했다.
  “셸링 씨, 타인의 죄를 짊어질 것을 맹세합니까?”
  “네?”
  레즈바인이 등어리를 쿡 찌르자 겨우 답했다. “네, 물론이지요.”
  “우리 중 누군가는 간혹 외계인들을 부러워합니다.” 베일레가 연설조로 말했다.
  “그러나 우리가 더 낫습니다. 우리는 타인에 대한 사랑이라는, 구원에의 희망을, 바로 물질적으로 실천할 수 있으니까요. 새 회원 분도 계시니 다시 한번 명시해 두겠는데, 헤카테 클럽이 생기기 한참 전부터 젤른디 학파는 존재했습니다. 그들의 유물론적 연구 결과,”
  베일레가 페라틴에게 눈길을 한번 주었는데, 페라틴은 다른 의미로 속이 찔렸다.
  “재탄생의 과정은 불에 의해서가 아니라 화장터에 의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사당들은 헛짓을 하고 있는 거지요. 그런데 그들의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화장터가 우리 몸 속에도 존재합니다. 젤른디 학파 사람들은 그 이후 대부분 채식주의자로 전향했습니다. 동물의 생애 따위를 자기 생애로 돌리기 싫다는 거지요. 소화는 가장 완벽한 동화의 방식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참석자분들 중 미리 신청해주신...”




  페라틴이 레즈바인의 귀에 대고 계속 속살거렸다. 레즈바인이 기사가 듣겠다고 주의를 주었다.
  “들으라지.” 페라틴이 킬킬거렸다.
  페라틴은 일종의 도취 상태에 잠겨있는 듯 했다. 차의 덜컹거림조차도 그의 몸에 기묘한, 거의 도덕적인 흥분을 부여했다. 그는 한동안 레즈바인의 어깨를 꽉 부여잡고 있더니 다시 소년처럼 속살대기 시작했다. “그를 먹어버렸지.”
  “배설물만 긁어내고, 털만 깎아내고- 위장부터 성기까지, 입술부터 눈꺼풀까지, 목살부터 목젖까지, 완전히 먹어버렸지. 우린 행복하게 저녁을 먹었어. 저녁을 소화시켰지. 타인이 이다지도 수용 가능했던가? 레즈바인, 나는 왜 진작 몰랐던 거지?”
  “넌 살인 행위에 대한 죄책감은 없다보군.” 레즈바인이 약간 빈정대는 투로 물었다. 페라틴이 웃어 제쳤다. “아, 농담하는 거겠지, 레즈바인.”
  “그 사람의 무엇이 사라졌나? 그 사람의 현생이? 전생이? 기억이? 고통이? 슬픔이? 자유가? 나는 벌써부터 희미하게 내 안에 전에 없던 고통들을 느껴. 너무도 절박한 고통이지.”
  페라틴이 유쾌하게 웃었다. “아, 왜 진작 몰랐던 거지? 네 말이 맞아. 미술품은 먹을 수 없어. 그것이 아름답게끔 느껴지게 하는 본질은 유화 물감의 성분이 아니라 그림의 형태에서 드러나는 어떤 추상이야. 그것은 내게 속하는 그러나 내가 모르는 신비에서 나오지, 그림 자체는 본질이 없어. 그림은 내 빛에 비추어져 형상을 드러낼 뿐, 얼마나 수동적인가! 나는 볼 수밖에 없지. 영원히 볼 수밖에 없어. 네 말이 맞아, 레즈바인. 그러나 타인은 엄습하지. 사랑은 엄습에 대항하는 방식이지. 타인은 거기 분명히 존재하고 내 빛에 비추어질 수 없는 방식으로 스스로 있어. 스스로 형상을 주장하고 존재해. 레즈바인, 너 자체가 아름다워. 걱정 마, 널 먹어버릴 생각은 아직 없어. 베일레가 말했듯 이 세계는 결코 저주받지 않았어.”
  레즈바인이 희미하게 미소지어 보였다. 둘은 차에서 내렸다. 검은 차는 풍뎅이같이 빛나며 도로 한 쪽으로 굽어 사라졌다.
  방에 들어가서도 페라틴은 종일 그 얘기뿐이었다. 일요일 밤을 클럽 얘기만 하면서 보낼 거냐면서, 레즈바인이 슬쩍 귓가에 숨결을 불어넣곤 했지만 페라틴은 웃기만 할 뿐 반응이 없었다. 레즈바인이 마침내 진절머리가 나서 고개를 저었다. “페라틴, 나는 그 클럽에 찬동하지 않는다고!”
  페라틴이 어이가 없어서 너털웃음을 지었다.
  “회원이었던 건 너잖아?” 레즈바인이 얼굴을 찡그리자 페라틴은 그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라틴은 레즈바인을 자기 곁에 앉히고 가볍게 키스했다.
  “난 신참에 불과하다고, 레즈바인.”
  “정말이야.”
  “찬동하지도 않는 녀석이 먹힐 위험을 감수해왔다고?”
  “감수해오지 않았어. 먹는 쪽이 언제나 더 많이 남아있어야 하니까. 게다가 근 사년간 나는 그 클럽에 발디디지 않았어. 날 알아본 베일레가 이상한 거지. 아무튼 페라틴,” 레즈바인이 페라틴의 얼굴에 바짝 다가오며 말했다.
  “다신 그 클럽에 가지 마. 알았어?”
  “싫어.”
  “흐응.” 레즈바인이 기묘하게 웃었다.
  “난 네 그 웃음이 싫은데...” 페라틴이 중얼거렸다. 레즈바인이 페라틴의 허벅지께에 머리를 대고 누워 올려다보았다. “네가 다른 사람을 먹으면, 넌 내가 아는 네가 아닌 거잖아. 그럼 난 너를 사랑하지 않게 될 지도 몰라, 페라틴...”
  페라틴은 한참동안 침묵했다.
  “넌 나쁜 녀석이야, 레즈바인.”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레즈바인이 흐응, 하고 콧소리를 내면서 페라틴의 날개뼈 뒤를 더듬었다. 페라틴은 차가운 손가락들이 이상하게 몸을 달게 하는 것을 느꼈다. “가만히만 있어주면 무지막지하게 사랑해주지...” 레즈바인이 속삭였다.
  밤이 늦은 다음에야, 둘은 환상에서 깨어났다.
  정신이 이상해 질 정도의 섹스였다. 레즈바인을 돌아보자 그는 페라틴의 어깨 바로 옆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숨소리는 쌔근거렸고, 눈은 부드럽게 감겨 있었다. 페라틴이 머리 밑에 베개를 괴어주었다.
  방금 전의 일을 생각하면서 페라틴이 혼자 수줍게 웃었다. 이렇게 보고 있어도, 레즈바인을 먹어버리고 싶지는 않다. 먹어버리면 더 이상 섹스를 할 수 없지 않은가, 레즈바인은 아마 이런 점을 노리고 그렇게까지- 페라틴의 입매가 굳어졌다. 레즈바인은 어디서 그런 것들을 배운 걸까?
  희미한 애증이 가슴속에서 피어올랐다. 다시 보니 먹어버리고 싶기도 하다.
  페라틴은 레즈바인의 이마에 손을 댔다. 금발이 역시 가느다란 금빛의 눈썹 끝으로 흘러내려 있다. 미간을 찌푸리고 자는 버릇은 여전하다. 레즈바인은 아름답다.
  이 아름다움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끌어당겼을까? 아니, 이 아름다운 육신 자체가, 대체 얼마나 치명적인 죄인가?
  레즈바인이 슬쩍 눈을 떴다. 페라틴이 깜짝 놀라서 손을 뗐다.
  “뭐 해?”
  “잠이 안 와서...”
  “체력도 좋지.” 레즈바인이 투덜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페라틴이 손목을 잡았다. “어딜 가?”
  “물 마시러 가.”
  “목 말라? 내가 갖다줄게. 쉬고 있으라고.” 페라틴이 일어났다.
  물 한잔을 따라오니 레즈바인은 아까 페라틴이 그랬던 것처럼, 눈만 멀거니 뜨고 천장을 쳐다보고 있다. 아무렇게나 팔다리를 던져놓고, 이불도 제대로 덮지 않은 게 답잖게 천진한 꼴이다. 페라틴이 슬며시 웃으며 다가갔다. “레즈바인.”
  침묵이 길게 흐르자 페라틴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레즈바인?” 페라틴이 다시 불렀다. 레즈바인이 대답했다. “응?”
  “정신 좀 차려.”
  페라틴이 물 컵을 내밀었다.
  레즈바인이 혀를 적시듯이 마셨다. 페라틴이 슬쩍 물었다. “그럼 오늘 넌 그 클럽에 왜 갔던 거야?”
  “너 때문이잖아.” 레즈바인이 투덜거렸다.
  “내가 화 나게 해서 갔다고?”
  “아니, 네가 헤카테 클럽 얘기를 해서 생각났어. 내가 내 클럽을 잊고 있었구나 하고 말이야.”
  “그것 참...”
  “내가 적을 두고 있는, 살인 클럽 말이야.” 레즈바인이 투덜거렸다. “진작에 신고해버려야 했던 건데. 신고하기 전에 아직도 거기서들 모이는지, 아직도 그 짓들을 하고 있는지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허위 신고자로 몰리기는 싫으니까.”
  페라틴이 입을 약간 벌리고 쳐다보았다. 레즈바인이 뚱하니 마주보았다.
  “뭐야? 나도 회원이야. 그 작자들은 내가 공범자라서 믿고 있는 거야.”
  “그래, 그런 점도 있네.” 페라틴이 중얼거렸다. “너 무슨 생각이야?”
  “늦었어. 이미 네가 물 가지러 간 사이에 신고해 버렸다고.” 레즈바인이 슬며시 웃음 지었다.
  “클럽은 잊으라구, 페라틴. 네 몸이나 걱정해. 타인을 먹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아?”



  과연 쉬운 일이 아니었다. 레즈바인이 킥킥대면서 약물 처방을 해 줄 까마 했지만 페라틴이 거절했다. 레즈바인이 좀 걱정이 되는지 페라틴의 이마를 짚었다.
  “심하지는 않은데? 엄살이야.”
  “너무 하는군.” 페라틴이 신음을 토해냈다. 레즈바인이 이마에 찬 수건을 대 주었다. “이 정도는 약물 처방이라고 볼 수 없겠지.”
  “정말로 쉬운 일이 아니군.”
  “강심제 정도는 먹어두지 그래? 한동안 이 상태일 텐데.”
  “한동안?”
  “뭐, 내 경우엔 열흘쯤 갔지. 난 좀 많이 먹긴 했지만...”
  “됐어.” 페라틴이 손을 내저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아파야 해? 아니, 아프다기도 뭐하고, 그냥...”
  “생각해 봐, 넌 화학 반응 한가운데 있는 거라고.” 레즈바인이 끄덕거렸다. “네 잘못이야. 대체 그날 왜 따라온 거야? 생애들이 융합되는 건 일종의 진화야. 넌 대규모 화학 변화 한 가운데 있어. 물론 존속시키려는 욕망은 그와 너에 대해 동일하니까 넌 죽지는 않을 거야. 동종이었으니 기본적인 형태도 유지하겠지. 그러나 얼굴이 변할 수도 있고 몸매가 바뀔 수도 있어. 눈이 멀 수도 있어. 다리가 잘 움직이지 않을 수도 있으며 성기가 작아질 수도 있지. 성기가 콩알만해져 버리면 나 너랑 안 놀 거야.”
  “겁주는 거야?”
  “사실을 말하는 거야.” 레즈바인이 킥킥거렸다.
  “어지간히 쌤통인가 보군.”
  “말이라고 해?”
  “넌 어땠는데?” 페라틴이 레즈바인의 얼굴에 손을 댔다. “이렇게 예쁜 건, 굉장히 예쁜 애를 먹어버렸기 때문이야?”
  “예쁜 걸 먹는다고 예뻐지냐? 난 원래 이래.” 레즈바인이 툴툴거렸다. “덜 예뻐졌으면 예뻐졌지.”
  페라틴은 그 순간 이상한 걸 보았다. “맙소사,”
  “너 한쪽 눈이...”
  “아, 그래. 빨리도 눈치챈다. 그때 멀었어.”
  “의안이야?”
  “아냐! 빛에 반응하지 않을 뿐이야. 동공 크기가 다르지?” 레즈바인이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가늘게 떠 보였다. 왼쪽 눈은 반응하지 않았다.
  페라틴이 숨을 몰아쉬었다. 레즈바인이 땀을 닦아주었다. 페라틴이 레즈바인의 손을 두드렸다. “네 탓이 아냐. 내가 내 멋대로 간 거지.”
  레즈바인은 딱히 답하지 않았다. 페라틴은 이 바보같은 침묵이 싫었다. “그래, 넌 누굴 먹었는데?”
  “말하고 싶지 않아.”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페라틴이 손을 들어올렸다. “좋아, 넌 왜 클럽에 든 거야?”
  “페라틴, 좀...”
  “난 헤카테 클럽 얘기까지 했는데! 네가 숨기고 있었던 게 나쁘지.”
  레즈바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네가 클럽에 가게 된 날 말했던, 심장 발작을 일으킨 여자 기억해?”
  “기억하지.”
  “그 여자 아마 죽게 될 거야. 약을 투여하겠다니까 싫다고 했거든. 크라이트 학파 사람을 불러달라고 어머니한테 속삭이더군. 우리 학파를 경멸하나봐. 나중에 그 어머니는 내게 돈을 찔러 줘 가면서 약물 투여를 부탁했는데, 그 여자가 또 거의 울면서 애원했어. 치료 당하게 하지 말라고 말이야.”
  “그래서 어떻게 했어?” “부탁대로, 내버려뒀어.” “너 의사 맞냐?” 페라틴이 투덜거렸다.
  “사년 전에,” 레즈바인이 말을 이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있어. 뭘 쳐다봐? 이 나이에 네가 첫사랑이겠어? 안심해. 연인은 아니었으니까. 짝사랑이었냐고? 맞아. 그 사람은 죄가 있었어. 자신이 늘 죄인이라고 생각했고, 이미 미쳐버린 게 아닌지 두려워했어. 그 사람은 끊임없이 자해를 했지. 내가 보는 앞에서는 하지 않았지만, 팔부터 배까지 온통 상처투성이인 걸 알고 있었어.
  그런데 그 사람은 너무도 강하고 아름다웠어. 세속적인 의미로도 아주 잘 살았지. 그 사람은 자기 인생 - 자해 행위를 포함한 인생 - 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어. 상처들은 생명을 위협할 수준이 아니었고, 외모를 아름답게 꾸미고 싶을 때 방해가 되지도 않았지. 그런데 내가 뭐라 할 수 있었겠어? 보이는 것을 통해서라면 나는 그 사람에게 관여할 길이 없었어. 난 그 사람의 죄가 무엇인지는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그 사람 자체가 그 죄 때문에 알아볼 수 없이 깊어져 있었어. 깊이란 곧 어둠이야. 깊이를 가진 사물은 항상 어둠을 가지고 있지. 깊으면서도 투명한 것은 세상에 없어. 빛이 있는 이상 없지.
  내가 그녀에 대해서 무얼 할 수 있었겠어? 혹은 무얼 하고 싶어할 수 있었겠어? 홀로 견디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려 해도 견뎌내야 할 것조차 과연 있었던가? 그래서 나는...” “내버려두었나?” 페라틴이 측은한 듯 물었다.
  레즈바인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 클럽을 알게 된 건 그 사람을 통해서야. 어느 주말에 결국 그 사람이 신청서를 냈어. 우리는 그녀를 먹었지. 그 때는 회원이 서른 명은 되었기 때문에 사람 하나 먹어치우는 건 일도 아니었어. 난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먹히는 게 싫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퍼먹었어. 내가 거의 반은 먹었을 거야.”
  레즈바인이 중얼거렸다. “내버려두었냐고? 내버려 두었어야 했어. 난 먹어치웠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말이야.”
  “그게 죄야? 레즈바인.” 페라틴이 인상을 찌푸렸다. “넌 그 여자의 죄를 대신 받아 준거야. 그건 희생이지.”
  “그건 죄야, 페라틴.” 레즈바인도 얼굴을 찡그렸다.
  “너는 그 전에도 사람을 조금은 먹었을 거 아냐? 입회식 때는 어땠어?”
  “사랑하는 사람이었어.”
  “사랑했기 때문이잖아!”
  “그림을 먹어치우는 것과 똑같은 짓이야.” 레즈바인이 고개를 숙였다. “유화 물감을 소화시키는 것과 똑같은 짓이야. 페라틴, 너도 알아줘야 해. 나는 사랑하던 사람을 먹고 나서야 알았어. 그건 구원과는 거리가 먼 짓이야.”
  페라틴은 말을 들으면서 레즈바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한가운데 전에 없이 떠오르기 시작한 기색- 어둡고 깊은 침묵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처음 보는 깊이였다.
  질투였을까, 분노였을까, 안타까움 혹은 슬픔이었을까. 레즈바인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자신이 그녀를 바라보면서 느꼈던 것을 페라틴이 똑같이 느끼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리라.
  페라틴은 나흘쯤 후에 원래의 몸 상태를 되찾았다. 변한 것은 거의 없었는데, 머리색이 약간 엷어져서 나이 들어 보였고, 수염이 전보다 빠른 속도로 자라났다. 레즈바인이 아예 수염을 길러보라고 충고했다. 그때쯤 해서 경찰이 찾아왔다.
  경관이, 경관답지 않게 공손하게 모자를 벗고 인사했다. 그는 레즈바인을 만나러 왔다고 했다. 레즈바인이 증인으로 출두해 주길 바라냐고 물었지만, 경관은 고개를 저었다. “자기들이 모두 고백했습니다. 살인 행위로는 생각지 않고 있다고 하더군요. 고발은 해 뒀지만 재판이 복잡해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경관이 품에서 서류철을 꺼내 보이면서 말을 이었다. “몇년 째 참여하지 않고 있는 회원들도 많은데, 목록에는 이름이 있기 때문에 일단은 모두 수배해 두었습니다.”
  “가명들일 텐데요.”
  “연락처는 진짜인 것 같으니까요. 레즈바인 씨는 여기서 빼야 겠지요. 어떤 이름을 쓰셨습니까?”
  “넬리 입니다.”
  “아, 알겠습니다.” 경관이 줄을 죽 그어 당 기록을 지웠다. “참여하는 회원 수가 점점 줄어가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사람을 먹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니까요. 눈이 멀어버린 회원도 있었다는군요.” 페라틴이 레즈바인을 흘끔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경관님.”
  경관이 페라틴을 쳐다보았다. “이 사람은 자수한 거니까, 그리고 한번밖에 먹은 적이 없다니까 형이 무겁지는 않겠지요?”
  “형은 아직 정해지지도 않았습니다. 최악의 수로, 일급 살인으로 판명 난다고 해도 일단 자수하고 나면 사형이나 무기 징역은 내려지지 않습니다. 레즈바인 씨 경우에는 구류도 안 될 겁니다. 기껏해야 벌금형이겠지요.”
  “잘 되었군요.” 페라틴이 어리둥절해서 말했다. “잘 되었지만, 이상하게 잘 되었군요. 신기한데요.”
  “어쩔 수 없잖습니까. 레즈바인 씨의 건강 상태를 고려해서...”
  페라틴의 얼굴이 이상해지자 경관이 입을 다물었다. “얘기가 안 되어 있나 보군요. 죄송합니다.”
  경찰이 다시 모자를 쓰고, 가볍게 목례한 후 떠났다. 레즈바인이 모른 척 돌아서는 걸 끌고가서 침대에 앉히고 물었다. “무슨 소리야?”
  “네 건강이 어떤데?” 레즈바인이 손을 올려서 페라틴의 뺨을 쓰다듬었다. 페라틴은 자신이 사랑 받고 있다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 소름이 끼쳤다.




  “당신들은 알고 있잖습니까? 재판 문제로 계속 연락을 취하셨을 텐데요. 그 연락처만 가르쳐 주시면 됩니다.”
  “가르쳐드릴 수 없습니다.”
  페라틴은 경관의 사무적인 태도에 질려가고 있었다.
  “연락처 가르쳐 주시는 게 그렇게 힘듭니까? 안면도 있는데...”
  “당신은 그의 보호자도 아니고 정식으로 동거하고 있는 사이도 아닙니다.”
  “정식으로 동거하고 있는 사이에요.”
  “아닙니다.” 경관이 기록을 보여주었다.
  페라틴은 비참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어젯밤, 경찰이 떠난 후에도 레즈바인은 입을 다물고 있다가 페라틴이 벌컥 화를 내자 겨우 조금씩 말을 꺼냈다. “알게 된 건 닷새 전이야.”
  “무슨 병이야?”
  “강직증 비슷한 거라고 쳐 두지.”
  “어쩌다가?”
  “사정이 있어.” 레즈바인이 좀 특유의 조소를 떠올렸다.
  “어쩌려는 생각이었어? 내게 끝까지 말 안 하려고 했던 거야?”
  레즈바인이 자리를 피하려고 하자, 페라틴이 다시 잡아 앉혔다.
  “앉아. 날 봐. 너도 그 심장병 환자랑 같은 생각을 했던 거냐? 아니, 난 내버려두지 않아. 알게 된 이상 내버려두지 않아.” “무슨 권리로.” 레즈바인이 뚱하니 쏘아붙였다.
  “몸을 가진 자의 권리지. 이건 전생애로서의 몸을 뜻하는 게 아니야. 물리력이지. 너를 젤른디 학파의 병원에 처넣고 약을 먹일 거야.”
  “아아, 우리 사랑스럽고 무의미한 힘의 소유자여.” 레즈바인이 기만하듯 웃었다. “안 됐군.”
  “무슨 뜻...” 페라틴이 되뇌었다.
  침묵이 흘렀다. 다시 레즈바인이 자리를 뜨려 하자 페라틴이 중얼거렸다. “나 때문인가?”
  “뭐가?”
  “내가 널 불행하게 해서 네가 병에...” “헛소리야?” 레즈바인이 이번에는 짜증을 냈다.
  “누가 감히 누굴 불행하게 해? 저주는 언제나 자기가 걸고 자기가 받는 게 우리 세계의 법칙이야. 이건 내가 또 다른 법칙 하나를 잊었기 때문이야.”
  “무슨?” “깊고도 투명한 것은 빛을 벗어나 있어.”
  레즈바인이 중얼거렸다. “나는 스스로 있을 수 있는 자가 아니야. 이건 젤른디 학파가 할 일이 아니었어.”
  “실험에...?”
  “입 다물어. 아직 아무도 모르는 실험이야.” 레즈바인이 실제로 덤벼들어 페라틴의 입술에 손가락을 물리며 속삭였다.
  “레즈바인, 하지 마.”
  “왜?” 레즈바인이 갸웃거렸다. “곧 난 딱딱하게 굳어. 그 전에 실컷 하자구.”
  그러나 페라틴은 그날 밤 레즈바인을 안지 않았다. 레즈바인은 불평에 찬 얼굴로 페라틴의 가슴에 뺨을 대고 잠들었다.
  페라틴은 잘 수가 없었다. 조금씩 울었는데, 나중에는 레즈바인이 깨어나서 눈물을 닦아주었다.
  페라틴은 꿈을 꾸었다. 텅 빈 침실에 혼자 누워있는 꿈이었다. 베게는 차가웠고 커튼은 창에서 들어온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신선한 공기가 들어와서 시트 밑을 헤집었다. 시계 소리가 말밥굽 소리처럼 울렸다.
  페라틴은 문득 심장 소리를 들었다. 자기 안의 금빛 피가 소리도 없이 으르렁대고 있었다.
  페라틴은 잠에서 깨어나서 레즈바인의 금발을 쓰다듬었다. 다시 잠들었다 깨어나 보니, 꿈에서처럼, 레즈바인은 없었다.
  레즈바인의 옷장에는 옷이 없었다. 레즈바인은 아무리 연인이라 할 지라도 사생활을 간섭받으면 즉시 화를 냈다. 덕분에 페라틴은 거의 한번도 레즈바인의 옷장 속을 살펴본 적이 없다. 이 옷장은 언제부터 비어있었다는 건가? 페라틴은 침실로 돌아와서 잠시 주저앉아 있다가 경찰서에 전화를 했다. 전화로 호락호락하게 되지 않자 직접 만났는데, 그날 집으로 찾아왔던 경관이 있었다. 경관은 연락처를 가르쳐주는 대신 레즈바인이 페라틴과의 동거기간 내내 홀튼 가 15번지에 적을 두고 있었다는 것만 알려주고 페라틴을 쫓아보냈다.
  페라틴은 그 곳에 한번 찾아가 보았다. 레즈바인은 깨끗한 곳에 살고 있었고, 주변에는 가로수가 드문드문 있었다. 햇볕이 잘 드는 곳이었고 사랑스럽도록 맑은 하늘이 내다보이는 층이었다. 문은 물론 열리지 않았다. 페라틴은 문 안쪽을 상상했다. 거실 구석에서 구석까지를 자로 잰 길이, 길이를 제곱한 평수, 마룻바닥이 조각조각 뻗어나가는 모양, 방들이 열린 문과 닫힌 문들로 연결되고 단절된 형태, 벽과 천장이 맞물리는 부분이 암시하는 바를 떠올렸다. 머릿속에서 집을 한 채 지어내고 나자 페라틴은 온 힘을 다해 그것을 부수고 싶어졌다. 그러나 한 걸음 옮기자 레즈바인의 얼굴이 떠올랐고, 집의 환상은 깨어져버렸다. 페라틴은 눈을 감았다.
  페라틴은 매일 밤 같은 꿈을 꾸었다. 상황은 언제나 똑같다. 자신은 자고 있는데 레즈바인은 깨어있다. 레즈바인이 나긋나긋한 손가락들로 프록 코트를 주워들고 페라틴의 침실 밖으로 나간다.
  페라틴은 레즈바인의 머리를 꽉 붙잡고, 침대에 도로 앉힌 다음, 아작아작 먹어버린다. 그러면 심장에서 새 울음같은 소리가 나고, 페라틴의 피는 금빛으로 변하고, 몸은 황금 동상처럼 된다. 시계 소리가 교향곡처럼 울린다.
  가슴속에서부터 웃음소리가 들이친다. 페라틴은 또 퍼뜩 깨어난다.
  “아프다고.” 페라틴은 중얼거렸다.
  금욕적인 생활은 수면증을 유발한다. 불안은 뼈마디의 내출혈을 야기한다. 불가능한 소망은 장기 기능을 약화시킨다. 등등의 우울한 정설들- 모두 크라이트 학파에서 나온 얘기다. 이 빌어먹을 연인을 다시 이 방으로 불러 들여오지 못 하는 한, 이 세 가지로 앞으로 한동안은 고통받게 될 거다. 확 젤른디 학파로 적을 옮겨서 호르몬 분비 촉진제나 얻어먹을까?
  페라틴은 자신이 전화벨 소리를 듣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수화기를 집어들자 어딘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입니다, 페라틴 씨.”
  “정식 보호자가 아니신 건 압니다만 본인이 페라틴 씨를 찾고 있어서 말입니다. 지금 서로 찾아와주시면...”
  그의 금발은 조금 바래고 흐트러져 있었고, 옷매무새는 엉망이었다.



  페라틴은 의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페라틴은 발이 넓은 편은 아니었으나, 오랫동안  교류가 없던 대학 동기 한 명에게 저녁을 산 후 집으로 불러들일 수 있었다.
  에하마는 크라이트 학파로, 레즈바인의 이야기를 듣자 뭐라고 툴툴거리더니 그래도 장비를 가지고 왔다.
  “맞아, 불가능해.” 에하마가 끄덕거렸다.
  “망가지고 있는걸. 이렇게 <망가지고 있다>는 표현에 어울릴 만한 육체도 없어. 지능이 떨어진 건 당연해. 신경 세포라는 구조로 불러줄 만한 게 남아있지 않아. 망가졌다는 의미를 모르겠나? 이런 호흡기는 쓸모 없어. 이 친구 몸은 산소를 잘 흡수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산소와 거의 상관없는 것이 되어버렸어. 그런데 처음 보는 증상이군. 이게 재탄생될 수나 있을지 의문인데.”
  에하마가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되나?”
  “무슨 실험을 했다고 했어.”
  “무슨 실험?”
  페라틴이 대강 들은 대로 말해 주었다. 에하마가 눈살을 찌푸렸다. “바보같은 친구가...”
  에하마가 레즈바인의 몸에 손을 댈 듯 하더니 쯧 하고 돌아섰다. “마약을 주고 가지. 주사하는 법도 가르쳐 줘야 하나?”
  페라틴이 올려다보았다. “아직은 죽일 수 있을 지도 몰라. 시도해 봐.”
  “자네 말은-” “곧 그 친구는 사라져버려.”
  “화장터가 있네. 이 세계에서 사라지는 것은 없어.”
  “그러나 그는 스스로 있어야 했으니, 가는 곳은 <없음>이지.” 에하마가 중얼거렸다.
  에하마가 가 버렸다.
  페라틴이 레즈바인을 내려다보고,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면서 되뇌어 보았다. “바보같은 녀석이.”
  레즈바인이 눈을 힘겹게 깜박거렸다. 이제 그 얼굴에는 페라틴이 알아볼 수 있는 표정이 없었다. 페라틴은 종일 술만 마시다가 결단을 내렸다.
  레즈바인의 얼굴이 망가져가는 건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페라틴은 빨리 움직이기로 했다. 호흡기를 빌려오긴 했는데, 여기 일산화탄소를 붓는다고 뇌사 상태에 빠져줄 지 모르겠다. 산소도 필요 없다는데 일산화탄소를 거부하기나 하겠어? 빠져주지 않는대도 그냥 그대로 행하자.
  아직도 저 육체가 그의 전생애들일까? 망가진 전생애들인가? 벌써 고리를 잃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페라틴은 자기 위장을 믿기로 했다. 이 타인의 육체가 화장터보다 더 강한 융합력을 지니고 있길 바란다.
  외계에서는 어린애가 뱃속에서 탄생한다고 한다. 열 달의 고통을 거쳐, 그렇지, 내가 나흘을 앓았고 레즈바인은 눈을 잃었던 것처럼. 우리의 육체가 이 정도를 못하겠는가?
  그러나 타인을 생산하는 것과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이 같은가? 위하여 사는 것과 으로서 사는 것이 같은가? 무슨 상관인가? 무엇을 위하기 위해서는 내가 그에 대해 먼저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 미술품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내가 고상해야 하는 것처럼.
  그럼에도 그 둘이 다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인가? 페라틴은 구체적인 안에 대해 생각하기로 했다. 냉동고는 비워 두었던가? 어차피 생선 몇 마리나 들어있었지. 썩어버렸길래 어제 버렸다.
  커다란 냄비가 있던가? 그래봤자 국수 삼사인분이나 끓일 냄비지만. 톱은 있던가? 아주 잘게 잘라야겠다. 머리를 오래 끓여 살을 발라내야겠다. 뼈가 남아있다면, 뼈는 따로 고아야겠다.
  에하마는 망가짐의 진행 속도를 가늠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도 대강 사흘이라는 일정을 남겨주었다. 준비를 마치고, 페라틴은 마지막으로 레즈바인의 침상 곁에 앉아 내려다보았다.
  레즈바인의 몸에 손을 대는 순간, 페라틴은 문득 자신이 사랑 받고 있다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
  페라틴은 레즈바인의 육체가 급속히 망가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얽히고 설키면서 방들의 구조 자체를 변경시키더니 곧 단절과 연결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엄청난 소용돌이 속으로 잦아들어, 레즈바인의 육체는 사라졌다.
  침상 위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페라틴은 숨을 멈추었다.
  말문이 막혀서 움직일 수 없었다. 시트 위를 더듬어보았지만 차가웠다. 페라틴은 울기 시작했다.
  

*



  나는 나즈막이 숨을 내쉬었다.
  “먹을 수가 없게 되었군요.”
  “다행이었습니다.” 페라틴이 고개를 저었다.
  “꿈은 언제나 우호적입니다. 나를 편안하게 재워주려 하지요. 그 금빛의 꿈은 나를 안심시켜주려 한 겁니다. 레즈바인을 동화시키고 싶어하는 내 욕구로부터- 공격성으로부터 나를 안심시켜 준 거지요. 그는 결코 네가 될 수 없다, 그를 먹어치우더라도 그는 결코 네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말입니다.”
  “그러나 레즈바인 씨는 사라졌습니다.” 힐레인이 되물었다. “당신이 그를 먹을 수 있었더라면...”
  “그의 생애는 내 생애가 될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애초에 그 자신이 결코 그의 생애가 아니었으니까요.”
  페라틴이 한숨을 쉬었다. “누구도 특정한 누군가가 아닙니다. 어느 타인도 어떤 사람이거나, 생애이거나, 자유가 아닙니다. 그런 것은 내 빛에 비추어진 것뿐이지요. 그런 것은 내게 속하는 특성이지 그 자신이 아닙니다. 아, 사람은 미술품이 아니에요. 나는 그가 죽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가 떠나버리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말해지듯, 내가 그를 소유할 수 없어서 두려웠을까요? 아닙니다- 내가 그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 두렵기 그지없었던 겁니다. 그가 나의 기억으로만 존재하게 되는 게 두려웠습니다. 그가 내 멋대로 다룰 수 있는 관념과 이미지들로 존재하게 되는 게 두려웠습니다. 그는 타인이었습니다. 고통스러워하고, 떠나버리고, 내 눈앞에서도 혼자서 철저하게 죽어버리는, 나를 너무나도 무력하게 만드는 실체였습니다. 그래요, 그는 사랑이 엄습하는 것에 맞닥뜨리는 방식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사랑은 무력함을 슬퍼하는 방식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사랑은 혼자만 하는 게 아닙니다. 연애도 한다구요.” 내가 쏘아붙였다. “샤벗도 사먹고, 등산도 가고, 자전거도 타고, 섹스도 한다구요. 그래요, 섹스는 흐느끼는 거라고 쳐요. 등산도 그렇다고 칠 건가요?”
  “그건 망각하는 방식이지요.” 페라틴이 미소지었다. “파티에 가서 한탕 잘 놀고 돌아오는 겁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생각하지요. 아, 파티 따위 정말 지루하다고 말입니다.”
  “흐응,” 나는 그- 레즈바인의 방법을 쓰기로 했다. 할 수 있는 한 새침하게 미소지으면서, “당신의 연인이 되는 건 포기해야 겠네요.”
  “아니, 그럴 리가요!” 페라틴이 눈을 반짝하며 이 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내심 웃어버렸다.
  “내 말을 끝까지 들으세요. 사랑은 무력함을 기뻐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결국은 자신의 무력함을 이 예속된 생애 속에 온전히 받아들이는 방식입니다. 그런 고로, 나는 몇백 번이고 사랑하고 싶다구요. 그러할 때 우리는 되찾을 겁니다.”
  “뭘 되찾아요?” 페라틴이 또 한바탕 늘어놓으려는 참에 내가 붙잡았다. “관 두고, 포도나 한 송이 더 가져올 테니까 기다려요. 음침한 얘기는 그만하면 됐어요.”
  그러나 그가 집요하게 손을 들어 학회장 아래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미래를.” 내려다보았지만 나는 화장터밖에 볼 수 없었다.
  내가 돌아보았을 때 그는 없었다. 나는 그의 이름을 불러볼 생각도 하지 않고는,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곧 식당으로 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식당으로 돌아가는 길에 쿠마와 마주쳤다. 쿠마가 입을 삐죽거리면서 뭐라고 빈정거렸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럴 때가 아니야. 이빌르 교수님 어디 계셔?”
  “왜?”
  “저기 계시네. 교수님!” 내가 급히 부르자 우리 교수가 돌아보았다. “이빌르 교수님!”
  “힐레인?”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교수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곳이었습니다. 제가 워낙 사람 없는 곳을 좋아하잖아요. 그 사람과 저 둘만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대식가였어요. 내 접시의 홍합까지 집어먹었지요. 그런데 보세요, 홍합이 전혀 줄지 않았어요.”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쿠마가 킥킥대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사라져 있었어요. 이삼초 지나지 않은 짧은 순간이었는데 말입니다. 아아, 이런 게 아니에요. 그냥 알 수 있었단 말입니다. 저는 유령을 보았습니다.”
  “유령이라...” 이빌르 교수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 죽었다는 질데른 학파의 의사는 레즈바인이라는 사람 아닙니까, 교수님? 에하마에게 페라틴을 아냐고 물어주세요.”
  “됐네.” 이빌르 교수가 손을 저어 보였다. “레즈바인이란 이름은 어디서 들었나?”
  “에마하에게 물어주세요. 내가 본 자가 유령이 맞나요?”
  “글쎄, 레즈바인이란 이름은 맞네. 그리고 페라틴은 나도 알아. 에하마에게서 들었지.”
  “유령입니다, 교수님- 유령이 나왔다고요.”
  “이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다들 재탄생 하니까요. 그렇지요? 교수님,” 내가 헐떡거렸다. “화장터의 동공은 아직도 작동하고 있습니까? 왜 이렇게 조용하지요? 저는 그 불빛을 못 본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 폭발하는 소리도요.”
  “뭔가 착각이-” 쿠마가 끼여들었다. “네가 환각을 본 거야.”
  “나는 술도 안 마셨어. 그게 문제가 아니야. 알 수 있었다니까, 그건 유령이었어. 네가 봐도 알았을 거야. 맙소사!”
  나는 내 어깨를 꽉 쥐었다. “맙소사!” “괜찮은가?” 이빌르 교수가 내 팔을 잡았다 놓았다. “기다리게. 어차피 오늘은 늦었어. 내일 한번 알아보겠네.”



  다음 날 이빌르 교수는 탐탁찮은 표정으로 전화를 받고 있었다. 어느 순간 교수의 얼굴색이 꺼멓게 변했다. “가서 확인해 봐야겠어.”
  “뭐라고들 합니까?” 교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같이 가도 될까요?”
  교수가 끄덕거렸다. 나는 웃옷을 챙겨 입었다.
  다른 학생들은 따라가지 않았다. 내가 처음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라 특별히 대우해주는 듯 했다. 가까이서 본 동공은 고요했고, 깊었으며, 침묵에 잠겨 있었다.
  나는 관리인과 교수가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았다. 관리인이 먼저 운을 떼었다. “작동하지 않은 지는 보름쯤 되었습니다.”
  “시민들이 혼란을 일으킬까봐, 고관 나리들이 입 다물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적당한 때에 밝히시겠다고...”
  “우리는 아이를 낳을 수 없습니다.” 이빌르 교수가 말했다.
  “물론입니다만...”
  “재탄생이 불가하게 되면 이 도시는 멸망합니다. 지금 살아있는 자들이 죽고 나면 끝입니다. 죄에 찌든 육체만 썩지도 않고 굴러다니겠지요. 당신이 이 곳을 몇 십 년간 돌보아 온 것을 압니다. 고칠 수 없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교수는 관리인의 표정을 보고 이미 체념한 듯 했다. 관리인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노력하고는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그러고 싶습니다만... 그럴 수가 없습니다. 노력할 수조차 없습니다. 제가 그 몇십 년 동안 한 일이라고는 시신을 밀어 넣는 게 답니다. 저 동공이라면, 어떻게 만든 건지 짐작도 안 갑니다.”
  이빌르 교수가 침통한 얼굴로 끄덕거렸다.
  우울한 기분이 내게도 전염된 것 같았다. 나는 희미하게 욕설을 몇 마디 중얼거리면서 동공 벽을 손가락으로 탁 퉁겼다. 담장에 금이 갔다.
  동공을 둘러싼 담장이 종이컵처럼 우그러들기 시작했다. 나는 이빌르 교수의 팔을 잡고 한발 뒤로 물러섰다. 담장은 뼈처럼 울부짖었다. 파편들이 하늘로 한번 솟아올랐다가 동공 속으로 빠져들었다. 담장의 뿌리가 무너지면서 흙더미를 끌고 들어갔다. 이번에는 교수가 내 팔을 잡아끌고 달리기 시작했다. 곧 발을 옮길 수 없을 정도로 땅이 흔들렸다. 정신을 차려보자 동공은 잔잔하게 메워져 있었다. 검은 흙안개가 우리 머리 위로 소금처럼 퍼부어댔다.
  교수가 기침을 했다. 교수의 눈은 붉어져 있었다. 나도 모래 섞인 침을 토해냈다.
  나는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니오, 당신 말은 틀렸어요.”
  “당신은 그를 소유하게 될까봐 두려웠던 게 아니에요. 누구도 타인을 기억하지 못해요. 타인을 향해 기억하지요. 당신은 미래를 잃는 것이 두려웠던 거예요.”
  희끄무레한 것이 미소처럼 피어올랐다. 교수가 또 한차례 기침을 뱉아냈다. “누구한테 말하고 있는건가, 힐레인?”
  “혹시 또 그 유령이면, 혹시 누가 화약이라도 설치한 게 아닌지 물어봐 주게. 이렇게 무너진 게 자연스럽다고 보기는 어려워. 필시 헤카테 클럽 같은 과격 단체...”
  “자연스러운 겁니다.” 나는 건방지게도 교수의 발언을 잘라들었다. “우린 참 오랫동안 사랑을 해 왔는걸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교수가 분통을 터뜨렸다.
  “우리는 참 오랫동안 미래를 가리켜왔단 말입니다. 우리의 몸은 고립된 현재이되 지시로서 존재할 줄을 알았습니다. 자랑스럽게 여겨도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교수님. 화장터는 무시하시고, 보세요. 세계가 열리고 있습니다.”
  “찾아오는 것은 죽음뿐이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껴안기 위해 기꺼이 죽을 겁니다.” 나는 불길하고 아름다운 색채로 둘러싸인, 지평선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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