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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비트코

2021.05.31 08:14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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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본격적인 우주 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양 과장이 진정으로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양 과장 스스로도 자기 자신에 대해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평범한 공공기관의 평범한 직원이었던 양 과장은 평범한 경로를 따라 공공기관의 업무와 그 일처리 방식에 평범한 속도로 적응해 가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평범에서 어긋날 정도로 특이한 점을 하나 정도 골라 보라면, 양 과장이 갖고 있던 채식주의에 대한 강한 혐오와 그와 연결되어 있는 각종 동물 보호 제도에 대한 반발심 정도 아니었나 싶다.

양 과장은 동물을 보호하는 새로운 제도가 나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항상 인터넷에서 그에 반발하는 글을 찾아 읽는 것을 좋아했다. 예를 들어, 그는

“동물을 보호하고 싶으면 동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기 돈을 들여서 보호하면 됩니다. 지금 돈이 없어서 고생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사람들 도울 수 있는 세금으로 한낱 동물을 보호한다고요? 그게 말이 됩니까? 나한테서 걷어간 세금을 왜 그렇게 쓰나요? 가난해서 이웃이 굶어 죽든 말든 가난한 사람은 더럽다고 보기 싫어 하고 자기 강아지는 귀여우니까 비싼 돈 들여서 치장하는, 그런 옛날 로마시대 귀족들하고 뭐가 다른가요?”

쯤으로 누군가 써 놓은 글을 무척 즐겨 읽었다. 하지만 그의 그런 특성조차도 이후, 그가 사회의 변화와 역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놀라운 역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평가 받고 있기는 하다. 물론, 양 과장은 그런 글을 읽으면서 “뜬금 없이 로마시대를 들먹이는 비유가 과연 정확한가”하는 세세한 부분을 의심할 줄 알았으며, 또한 다만 그런 글을 즐겨 읽을 뿐 자기 스스로는 어떠한 의견도 공개적으로 개진하지 않는 노련함도 일찌감치 갖추고 있었다.

이후 우주 시대가 시작되었고, 양 과장은 그 변화에 따라 점차 다른 자리, 다른 일로 배치 되었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일하게 되었다.

우주 산업에 더 이상 뒤쳐질 수만은 없다고 한번 떠들썩했던 그 시절을 기억해 보자. 국회의원, 장관, 각급 공공기관,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들, 인터넷에서 이름 알려진 사람들, 전부 저마다 우주 산업에 대해서 다들 한 마디 씩 하던 그 유행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리고 그 때문에, 우주 산업에 관해서 새로 만든 법령과 규정들이 우수수 쏟아졌고, 우주 산업에 관해 우리 기관이 통제하고 관리하겠다고 나서는 정부 기관들도 여기저기에서 계속 튀어 나왔다.

“우주 개발 지원법, 우주 산업 진흥법, 로켓 관리 기준법, 우주 궤도 항행 기준법, 우주 궤도 활용 지원법, 로켓 실험 지원법, 우주 연구 기본법, 우주 재돌입체 관리법, 우주 재돌입체 지원법, 우주 특별법, 우주 산업 통합 관리법, 우주 산업 통합 관리의 적용 및 운용에 관한 법률, 등등등. 우주선 하나 띄우려면 따져야 하는 법만 20개가 훨씬 넘습니다. 거기다가 각 법마다 서로 관리하는 기관이 달라서 너무나 힘듭니다.”
“우주 산업을 지원하는 법과 제도를 지난 3년 동안 10개를 넘게 만들었는데, 왜 아직도 그렇게 힘들지요?”

어느 우주비행사가 우주 산업에 관한 큰 행사에서 유명한 정치인 한 명과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그 대화는 인터넷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우주비행사가 앉아 있는 자세가 어땠다더라, 혹은 대답하는 정치인이 말할 때 손동작이 어땠다더라, 하는 내용을 두고 하루에 몇 시간 씩을 투자하여 인터넷에서 싸우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우주 법령 통합에 관한 우주허가국의 창설과 그에 따른 지원, 신고, 허가, 관리, 감독 등에 관한 원스톱 특별법”이라는 법이 하나 다시 생겼다.

이 법은 하여튼 모든 것은 우주허가국 이라고 하는 하나의 기관에서 우주 산업과 관련된 사항을 허가해 주고, 그곳에서 허가가 나면 그걸로 끝이라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골자가 아닌 부분은 역시 어지럽고 복잡하게 엉켜 있었지만, 어쨌든 골자는 그렇게 단순했다. 그리고 우주허가국이라는 곳이 생겼고, 정말로 우주 산업의 발전은 빨라졌다.

그리고 양 과장은 어느 무심한 높으신 분의 별 생각 없는 업무 조정에 의해 우주허가국의 일선 업무 담당자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양 과장은 엄청난 사람으로 성장했다. 양 과장은 우주 산업계 바깥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우주 산업계의 실무자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정신적으로, 기술적으로 가장 강력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무렵, 우주 관련 사업을 하는 사람들을 아무나 붙잡고,

“우주의 지배자가 누구입니까?”

라고 물어 봤을 때, 누구인가,

“무슨 세상이 SF 소설이에요? 우주의 지배자 같은 게 어디 있어요? 지구에도 민주주의 국가들이 많으니까 지구의 지배자도 없다고 할 수 있을텐데. 우주의 지배자라뇨?”

와 비슷하게 대답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 우주 사업에서 별 경험이 없는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우주 사업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경륜을 쌓은 사람과 이야기한다면,

“우주의 지배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양 과장입니다.”

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양 과장은 우주허가국의 기초 허가서를 심사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일만 계속 맡았다.

그것은 기본적으로는 행정 심사였기 때문에, 누가 우주 사업을 하겠다고 서류를 제출하면 양 과장은 내용을 읽어 보고 누락 사항이나 의심 사항이 없는 지 보고 도장을 찍어 준다는 작업이 그 업무의 핵심이었다. 실제로 그것이 양 과장이 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했다. 그냥 내용을 적당히 살펴 보고, 큰 문제가 없으면 도장을 찍어 주는 역할이 전부였다. 전자결재 시스템을 이용했기 때문에, 실제로 도장에 빨간 인주를 잘 발라서 눈에 잘 뜨이게 찍는 그 재주조차도 필요 없었다. 그냥 마우스로 두 번 클릭을 하면, 컴퓨터 속에서 0과 1의 신호들이 빠르게 바뀌며 도장을 찍은 그림으로 전자 신호를 바꿔주는 처리가 일어 나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냥 이 역할은 인공지능 프로그램에게 맡기자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런데 그 논의에 참여한 어떤 잘 생긴 사람이 (이 사람이 잘 생긴 사람이었다는 점은 전혀 중요하지 않지만, 하여튼 굉장히 잘생긴 사람이기는 했다.) 그래도 허가 사항이 한 군데로 전부 통합 되었는데, 사람이 첫 단계에서 눈으로 대충 훑어 보면서 의심 나는 부분을 따질 기회가 하나 쯤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라 자동 컴퓨터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람이 신청서를 훑어 보고 도장 찍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양 과장은 바로 그 일을 맡은 첫 번째 인물이었다.

우주허가국은 상당히 효율적으로 운영되는 기관이었고, “우주 법령 통합에 관한 우주허가국의 창설과 그에 따른 지원, 신고, 허가, 관리, 감독 등에 관한 원스톱 특별법”은 그 긴 이름 만큼이나 좋은 법률이었다. 아니, 정직하게 말하자면 그 정도로 좋은 법률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법과 규정을 이해하고 준수하면 그럭저럭 안전하고 저렴하게 우주선을 보내는 사업을 할 기회를 주도록 되어 있는 법률이라고 할 만 했다.

그러므로, 사실 많은 회사들이 그 법에 따라 사업을 하면서 우주를 개척해 나갔다. 법은 비교적 명확한 편이었고 회사들도 이 법에서 요구하는 사항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회사들은 법을 잘 지켜가며 우주선을 열심히 띄웠다.

딱 한 가지. 양 과장이 서류에 도장만 찍어 준다면.

양 과장이 서류에 도장만 찍어 주면, 그 뒤의 사항들에 대해서는 법과 규정에 대한 시비거리가 없었다. 규정을 준수하는 것으로 이름 긴 법에 따라 명확히 확인되며, 그러므로 우주허가국에서 그 사업은 그대로 쭉쭉 통과 될 수 밖에 없었다. 우주선이 개발 되고 우주로 나가서 미지의 세계를 탐사할 수 있다. 양 과장은 과거에 특별히 우주 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도 아니고, 그 분야에 대해 딱히 경험이나 관심이 많던 사람도 아니었다. 양 과장의 과장이라는 자리가 우주허가국에서 별로 높은 지위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양 과장은 서류에 도장을 찍어 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대신 “검토 지원 사업 대상”이라고 써서 검토 대상으로 서류를 보낼 수가 있었다. 원래 양 과장은 역할은 그냥 평범한 사람의 눈으로 서류를 한 번 훑어 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훑어 보다 의심나는 것이 생기면 검토 지원 대상으로 돌려서 전문가들에게 보낼 수 있게 되어 있었다는 것이 제도의 취지였다.

“이번 금성 탐사 우주선 발사 사업이 검토 지원 사업 대상이라는데요. 지원 사업이라면 그거 좋은 거 아니에요?”
“무슨 소리야? 우리 끝장난 거야.”
“검토 지원 대상이라는데 왜 끝장이 나요?”
“지원이 핵심이 아니고, 검토가 핵심이야. 금성 탐사 우주선은 이제 사업 착수하기 전에 검토만 끝도 없이 받게 되는 거라고.”

우주 산업에 참가한 회사들이 회사 신입 사원들에게 항상 교육하는 이런 장면.

이 장면의 원인이 된 장본인이 바로 양 과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양 과장이 우주 사업에 관한 서류를 검토 대상으로 돌려 버리면, 우주허가국에서는 그 서류를 우주허가국이 아니라 다른 기관으로 돌려서 검토하도록 한다. 그게 검토 대상이라는 말의 의미다. 그 분류에 별다른 기준은 없다. 인공지능 대신, 사람을 그 자리에 앉혀 놓은 이유, 그러니까 그냥 종합적인 그 사람만의 느낌으로 판단하기에 검토 대상이 될만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 유일한 기준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검토 대상으로 결정 한다면, 더 이상 그 이름 긴 법률에 따라 우주허가국에서 사업을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관련 법에 따라 온갖 다른 모든 기관들이 같이 사업을 심사하게 된다.

최근 관련된 제도의 개수는 33개 법령과 그에 딸린 2천5백3십2개 조항으로 늘어 나 있었다. 그 2천5백3십2개라는 조항의 개수도 그냥 추정일 뿐이었다. 그 많은 조항들을 다 따지다 보면 무조건 조항 하나 정도는 잘못 걸릴 수도 있었다. 그 복잡한 규정들의 어지러운 늪 속에서 갖가지 예외가 가득한 특수한 하나의 우주 사업을 따져 보면서 전체적으로 무슨 규정이 어디에 어떻게 걸리는 지 다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었다. 알파고 프로그램을 개조해서 바둑 수를 읽듯이 분석해야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 조항들 중에는 담당자에 따라 어쩔 때는 이렇게 보고, 다른 때에는 다르게 보는 조항들도 종종 있었다. 100개 조항 중 하나만 그런 조항이라고 해도 그런 조항이 25개는 있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검토 사업 지원 대상이 되면 아무도 검토를 통과할 수 없었다. 정말 단 한 곳도 없었다. 지원은 누구나 받을 수 있었지만, 검토 대상이 되었는데 검토를 모두 통과하는 데 성공한 사업은 우주허가국의 전체 역사상 단 한 건도 없었다.

특히 양 과장은 서류를 검토 대상으로 분류하면서 “통합 추진 위원회 검토 사항”으로 지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었다. 거기에 걸려 들면 그대로 파멸이었다. 통합 추진 위원회라는 곳은 효과적인 업무 처리를 위해 여러 기관의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곳이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 많은 기관의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하는 회의만 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결론 없이 이어지는 회의는 무한정 길어질 수 밖에 없었다.

“잠깐만요. 금성 탐사 우주선은 검토 대상으로 가는 바람에 어차피 통과 못할 거 아니까 포기하고 그냥 사업 중단하기로 했잖아요. 그러면 끝 아니에요? 금성 탐사 우주선 사업을 통합 추진 위원회에서 검토한다고 문제될 게 있나요? 우리가 포기하면 끝이잖아요. 우리가 안 한다는데 어쩔거야?”
“통합 추진 위원회에서 검토 중인 사항이 있을 때에는 그 검토가 끝날 때까지 그 사업과 겹치는 다른 사업을 추진을 못한다는 규정이 있다고. 6개월 붙잡고 있으면 6개월. 1년 붙잡고 있으면 1년, 그냥 아무것도 못하고 기다려야 한다고.”

때문에 수많은 우주 회사는 양 과장이 도장을 찍어 주느냐 마느냐를 정말 중요하게 생각했다.

어떤 회사 사람들은 양 과장을 돈으로 매수할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얼토당토 않은 생각이었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을 돈 주고 매수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하물며, 양 과장은 우주의 지배자였다. 그는 시시한 뇌물을 받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 무엇도 양 과장을 통제할 수는 없어 보였다. 우주 사업을 하는 회사 사장들 중에 운세를 보는 것을 좋아하고, 굿이나 부적에 매달리는 사람이 유독 많았던 것도 따지고 보면 다 양 과장 때문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 우주씨앤이 재단, 그러니까 우주C&E라는 재단이 하나 생겼다. C와 E가 무엇을 나타내는 글자인지는 우주씨앤이 재단이 해체된 지금까지도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작은 재단이었다. 재단 이사장도 특별히 대단한 인물은 아니었다. 이사장은 우주에 관한 재미 있는 책을 써서 젊은 시절 대중적인 인기가 좀 있었던 은퇴한 대학 교수였다. 그냥 은퇴하면 이름 없는 재단의 이사장으로 이름을 올리면 적합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우주씨앤이도 딱 그 정도의 재단처럼 보였다. 금액으로 보아도 처음에는 규모가 무척 작은 재단이었고, 그 재단에 돈을 댄 사람이 누구인지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우주씨앤이 재단의 업무총괄 전무라는 직함으로 강 전무라는 사람이 들어 왔다. 듣자 하니, 강 전무가 우주허가국 출신이라고 했다. 그리고 강 전무는 양 과장의 직속 후배이며 매우 끈끈한 관계라는 소문이 돌았다.

누가 그 소문을 퍼뜨렸는지 알아내는 데는 실력이 뛰어나기로 이름 높은 화성 광역 수사대에서도 실패했다. 어쩌면 누가 일부러 퍼뜨리지 않았더라도 양 과장의 일거수일투족에 회사의 모든 것을 걸고 집중하고 있던 우주 회사 사람들쪽에서 알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혹시, 그 무렵 우주 회사 사장들이 만나고 다니던 그 많은 무속인, 역술인 중에 어느 한 사람이 정말 초능력을 갖고 있어서 어디에도 명확히 표시 되어 있지 않은 우주씨앤이 재단과 양 과장의 관계를 초능력으로 느낀 것은 아닐까?

사람들 사이에는 우주씨앤이 재단에 돈을 넣으면 양 과장에게 잘 보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곧이어 우주씨앤이 재단에 돈을 넣어야 양 과장이 도장을 찍어 준다는 이야기도 돌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자 그 이야기는 사실 같아 보였다. 앞다투어 우주 회사들은 우주씨앤이 재단에 돈을 보냈다. 우주씨앤이 재단의 강 전무는 재단으로부터 엄청난 월급을 받았다. 양 과장이나 우주허가국 사람에게 대놓고 뇌물을 주는 관계는 전혀 없었다. 그냥 회사들이 우주씨앤이 재단이라는 알 수 없은 재단에 돈을 넣었고, 양 과장의 후배라는 강 전무가 우주씨앤이 재단에서 큰 돈을 월급으로 받았다. 그게 끝이었다. 정작 권한을 갖고 있는 양 과장에게 돌아 가는 돈은 한 푼도 없었다.

강 전무가 더 이상 평생 일을 하지 않고도 풍족하게 살 수 있고, 그 자식과 그 자식의 자식 역시 그 만큼 풍족하게 살 수 있을 만한 돈을 모았을 때, 강 전무는 우주씨앤이 재단에서 물러 났다. 그리고 강 전무의 후임으로 최 전무라는 사람이 들어 왔다. 최 전무 역시 우주허가국 소속으로 양 과장이 아끼는 후배였다고 했다. 최 전무가 재단에 들어 온 후로는 그가 우주씨앤이 재단에서 거액의 월급을 받기 시작했다. 여전히 우주씨앤이 재단에 부지런히 돈을 넣고 있는 회사의 사업에는 양 과장이 도장을 잘 찍어 주는 것 같았다.

최 전무가 큰 돈을 벌고 은퇴한 다음에는 서 전무가 나타났고, 서 전무 다음에는 임 전무가 나타났다. 다들 우주허가국 출신이었고 양 과장이 아끼는 후배였다고 했다. 기관원 출신이 관련 회사에 취업하지 못하게 하는 다양한 규제 법령들이 복잡하게 있기는 했지만, 정작 우주씨앤이 라는 회사는 우주허가국과는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이는 재단이었다. 심지어 우주 산업과 그다지 큰 관련이 있는 재단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허가국 사람이 우주씨앤이로 자리를 옮기는 아무 제한이 없었다. 사실 우주씨앤이는 서류상으로는 이 세상 어떤 곳과도 관련이 없는 곳이었다. 우주씨앤이 재단이 뭘 하는 회사인지도 알 수 없었다. 본질적으로, 우주씨앤이 재단은 그냥 여러 우주 회사들로부터 돈을 받고, 그 직원들에게 월급을 풍족히 잘 주는 것이 하는 일인 회사였다.

마침내 양 과장도 우주허가국에서 은퇴를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이 아끼는 후배였던 조 과장을 우주허가국에 남겨 두고 자기 스스로 직접 우주씨앤이의 전무가 되었다.

드디어 양 과장이 우주를 지배하며 넓혔던 영토의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날이 찾아 왔다. 양 과장은 최 전무, 서 전무, 임 전무 등이 받았던 월급을 다 합친 금액보다도 훨씬 더 많은 금액을 월급으로 받았다. 그리고 양 과장의 후배, 조 과장은 우주씨앤이 재단에 돈을 내고 있는 회사들의 서류는 바로 도장을 찍어 주었다. 결코 검토 대상으로 보내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양 과장은 그가 그동안 인류 문명이 우주로 진출하는 과정에 끼친 그 막대한 영향에 어울리는 막대한 돈을 벌었다.

모든 것이 잘 물려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야, 잠깐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이렇게 자기 차례라고 다 털어 먹어 버리면, 나중에 내가 우주씨앤이로 갔을 때 내가 먹을 거는 뭐가 남는데.”

그러나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조 과장의 의심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조 과장의 불만을 달래는 사람들은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최 전무와 서 전무는 조 과장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조 과장, 그런 생각하지마.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게 다 누구덕인데. 다 양 과장님 때문 아니야. 양 과장님께서 그때 우주 산업을 일으키는 그 시스템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에 우주 산업이 이렇게 커졌고, 그것 때문에 우리도 이렇게 한 자리 하면서 살고 있는 거 아니야. 너무 욕심 내지마. 너는 양 과장님 같은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잖아.”

조 과장은 양 과장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지적은 정확했다. 하지만, 조 과장은 그런 말을 들으면 아니꼬워 하는 성격이었다.

게다가, 다른 방향에서 분노하는 인물도 나타났다. 재단의 전무로 있었던 사람들 중에 강 전무는 자기가 받았던 돈 보다 지금 양 과장이 훨씬 많은 돈을 우주씨앤이에서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강하게 질투했다. 그때 강 전무는 쓸데 없이 무슨 영화 사업에 돈을 투자했다가 거액을 날리고 다시 가난해졌기에 돈이 더 필요했다. “잠깐만, 내가 지금 양 과장이 받고 있는 돈의 절반만 받았어도 아직도 남아 있는 돈이 많을 텐데.” 그 따위 생각에 빠져 강 전무는 양 과장을 싫어하게 된 것이다.

결국 양 과장 파벌과 조 과장-강 전무 파벌이 서로 나뉘어 다투기 시작했다. 그러다 조 과장은 양 과장을 찾아 가서 이렇게 따지기에 이르렀다.

“양 선배, 너무 이런 식으로 하시면, 더 이상 여기에 돈 대는 회사들에게 저는 도장 안 찍어 줄 겁니다.”

누구도 입 밖으로 내어서는 안 되었던 그 관계. 결코 입 밖으로 내어서는 안 되는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는 비밀. 아무도 알 수 없었던 우주의 마지막 숨은 법칙. 조 과장은 그것을 감히 불경하게 말하면서 양 과장을 협박했다.

그러나 양 과장은 협박에 넘어 가 자신의 제국을 빼앗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차라리 자신이 건설한 우주 제국을 자기 손으로 멸망시키는 길을 택할 사람이었다.

“다 터뜨려 버립니까? 전부 다?”

양 과장의 그런 무시무시한 선택에 양 과장 편이었던 사람들도 돌아설 정도였다. 그렇지만, 양 과장은 조 과장의 도전에 물러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모두가 파멸하더라도 배신을 내버려 두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결국 양 과장은 이 모든 일을 국회의원들에게 공개해서 정치적인 쟁점으로 만들 작전을 벌였다. 돈을 좀 풀어서 여기저기 떠들썩하게 분위기를 잡자 그 정도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 소식을 듣고 조 과장은 이렇게 말했다.

“양 과장, 지가 나를 어떻게 공격해? 내가 법을 어긴 게 없는데.”

그렇지만, 그 말은 자신의 공포를 쫓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외친 말이었다. 조 과장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양 과장이 나서서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을 공격하고 있는 것은 자명했다. 우주의 지배자가 자신을 파멸시키기로 작심했다는 그 무서움을 조 과장은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사건이 스캔들이 되고, 스캔들이 정치 싸움이 되자, 현재 공공기관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조 과장이 가장 먼저 수사 대상이 되었다. 조 과장은 뇌물죄에는 절대 걸릴 리가 없는 상황이라며 큰 소리를 쳤다. 그렇지만 수사는 뇌물죄를 따지는 방식으로 흘러 가지 않았다. 우주 사업과 관련이 있는 33개 법령을 역으로 추적해서 뭐든 조 과장의 업무와 연결 되어 문제가 될 만한 것을 하나하나 찾아 들어 가는 방식이었다. 곧 우주씨앤이도 수사 대상이 되었고, 우주씨앤이의 직원들과 우주허가국의 직원들도 무더기로 구속되어 감옥에 갇히기 시작했다. 조 과장도 감옥에 들어 갔다.

그 만큼은 아니지만 우주씨앤이에 돈을 넣은 회사의 사람들도 하나 둘 감옥에 갇혔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수사대상이 되고,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흔히 우주 업계 사람들은 이 사건을 세컨드 빅뱅, “두번째 대폭발”이라고 부르곤 했다. 우주허가국에서 허가 서류에 도장 찍는 담당자 과장과 우주씨앤이라는 정체 불명의 재단이 어떻게 돈을 버는가 하는 사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그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많은 욕을 했고, 다시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한 다섯 개의 법률과 43개의 규정이 더 생겨 났다.

그러면 양 과장은 어떻게 되었을까?

양 과장은 수사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오스트리아 알프스의 어느 깊은 산속 별장으로 몸을 피한 상태였다. 꾸준한 작업으로 재산의 많은 부분을 오스트리아로 옮겨 놓기도 했다. 그렇지만 양 과장은 그것만으로 안심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양 과장은 자신이 처한 상황의 최악을 냉정하게 볼 수 있는 인물이었다.

양 과장과 마지막까지 함께 한 가까운 인물은 양 과장의 생각을 알고 같이 걱정했다.

“과장님, 곧 여기까지도 수사 기관 사람들이 올 것 같아요. 인터폴에서 곧 수배도 떨어질거라고 하고.”

곧 양 과장은 자신이 검거될 수 밖에 없다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 나섰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양 과장은 오스트리아 법령 속에서 한 가지 탈출구를 찾아 냈다. 잠시 시간을 보내며 오스트리아에서 당시 방영되던 별 인기도 많지 않은 TV연속극을 보던 중이었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회사가 망해서 빚을 변제하셔야 하는데 실패하셨으니까, 압류에 들어 갑니다.”
“저희 집 재산을 다 가져 가시나요?”
“처분할 수 있는 것들은요. TV, 가구, 냉장고, 에어컨, 다 빚 받는 대신 뜯어 갈 겁니다.”
“오, 어쩌면 좋아.”
“이것도 가져 갑니다.”
“잠깐만요. 걔는 우리집 강아지 아마데우스예요.”
“강아지도 돈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 압류해 갑니다.”
“오, 그럴 수는 없어요. 아마데우스는 물건이 아니라 우리 가족이예요.”
“돈 받고 팔 수 있으면, 빚 대신 가져 가는 겁니다.”

주인공이 사업 실패로 집안이 다 망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장면이었다. 빚쟁이들은 주인공의 강아지까지 가져 가서 팔아 버리려고 한다. 그러자, 주인공은 따진다.

“새로 생긴 유럽연합 공통 법에는 주인과 함께 사는 동물은 가족과 비슷하다고 보는 법 규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족처럼 같이 지내는 동물은 압류해 가지 못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동물의 지위를 확립하기 위한 규정인 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많은 빚을 갚지 못한다고 해도, 제 가족과도 다름 없는 제 강아지 아마데우스만은 법적으로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주인공이 말한 이야기는 이미 유럽 몇몇 국가에서는 옛날부터 내려오던 규정이었다. 그래서 강아지는 빚쟁이들이 빼앗아 가지 못한다. TV 연속극의 주인공은 텅빈 집에 자신의 강아지와 단 둘이서 남게 된다.

그 장면까지 TV 연속극을 본 양 과장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오스트리아 공무원들의 사례를 조사했다. 과연 양 과장 짐작 대로였다. 양 과장과 함께 있었던 그 사람은 같이 조사하던 중 발견한 한 가지 사례를 알려 주기도 했다.

“마이어라는 사람은 돈 8억원을 빌린 다음에 안 갚았대요. 대신에 그 돈으로 한 마리에 8천 만원씩 하는 희귀 강아지 10마리를 사서, 그 강아지 10마리가 자기에게는 가족 같은 동물이라고 주장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아무도 그 강아지는 못 데려 가거든요. 그러면 누가 압류해 가려고 해도 가져갈 수가 없어요. 그리고 나서 법적인 의무가 없어질 시한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그 강아지들을 팔아서 8억을 합법적으로 차지 하는 거예요.”

동물의 생명은 소중한 것이니까, 함부로 할 수 없다는 법령. 그러니까 그 법령을 이용해서 돈을 생명에 묻어 버리면 아무도 그 돈은 가져갈 수가 없게된다는 발상이었다.

양 과장은 즉시, 자신의 재산을 묻어 둘 동물을 찾아내기 위한 조사 작업에 돌입했다. 몇 가지 중요한 조건이 있었다.

1. 동물이어야 한다. 커다란 나무나 희귀한 꽃은 어지간한 동물보다 훨씬 희귀하고 값비싼 경우도 있지만, 이 법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어쨌든 식물은 법의 보호 대상이 되지 않고 있다.

2. 값이 비싼 동물을 사야 한다. 그래야 쉽게 많은 돈을 묻어 둘 수 있다.

3. 산 동물의 수명이 길고, 기르기 쉬워야 한다. 기껏 돈 몇 억원을 들여 강아지 10마리를 사서 돈을 묻어 두었는데 강아지가 죽어 버리면 다시 팔아서 현금을 만들 수가 없다.

4. 거래가 가능한 동물을 구해야 한다. 거래가 불가능한 천연기념물이나 국제 조약으로 보호 받는 희귀동물이면 팔고 사서 돈을 숨길 수가 없다. 게다가 국제 조약으로 거래가 금지되어 있는 보호 받는 동물이라면, 나중에 사건이 모두 끝나고 숨긴 돈을 다시 되찾으려고 할 때 그 동물을 팔아 넘길 곳을 찾을 수 없다.

5. 앞으로 미래에도 거래 불가능의 희귀동물로 지정될 가능성이 낮아야 한다.

양 과장은 이상의 조건을 검토한 끝에 자신의 결단을 실행에 옮겼다.

며칠 후, 한국에서 보낸 수사관이 양 과장의 별장에 찾아 왔을 때, 양 과장은 자신의 새로운 가족이라고 하면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동물 세 마리를 소개했다. 그것은 커다란 히말라야 육지 거북 세 마리였다. 뭐든 사람이 먹는 것은 다 먹으면서 살 수 있는 순한 동물이면서 수명은 120년에 이른다는 희귀 거북이었다. 한 마리의 가격이 30억원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80억원이라는 이야기도 있다든가.

양 과장의 사건은 세계 각지로 알려졌고, 그의 명성에 걸맞게 마침내 지구 바깥 우주 곳곳으로도 알려졌다. 관심 있는 사람들이 살펴 보니, 히말라야 육지 거북은 비슷한 의도로 동물에 돈을 묻어 놓고 숨겨 놓으려고 하는 세계의 갑부들이 가끔 애용했다는 풍문도 있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우주는 넓고 훌륭한 두뇌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많은 지라,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식으로 동물을 이용하는 수법은 지구의 동물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은 선각자들이 나타났다. 많은 행성들의 법에 따르면, 가족과 같은 동물에 돈을 묻어 두는 수법을 외계 행성에서 붙잡은 외계 생명체에 적용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그리고 그런 문제와 관련한 이런저런 산업과 일자리도 조금씩 생겨 났다. 그런 문제와 관련하여 무슨 잡다한 일을 대신 해 달라고 하면 그 의뢰를 받아 돈을 버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중에는 우주선을 타고 우주 곳곳을 날아 다니며 이런저런 일을 하며 살아 가는 미영과 양식, 두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비트코라고 하는 외계생명체가 있는데, 지구 사람들이 그게 귀여운 생물이라고 엄청 비싼 돈을 주고 사 와서 가족처럼 키운다는 거예요?”

우주선 안에서 양식이 미영에게 물었다.

“지구는 아니고, 보통 화성이나 목성계 사람들. 정확하게 다시 이야기한다면, 비트코라는 외계 생명체를 데려 와서 정말 가족처럼 키운다기 보다는, 돈을 묻어 두기 위해 비싼 값에 사들여서 가족처럼 키우는 척 하는 거 아닐까?”
“그게 그렇게 가격이 비싸다는 거예요?”
“엄청 비싸. 검은눈 은하계의 비트코 행성에서 발견된 생물이라고 하거든. 너무 멀리 있는 곳에 있는 생물이기 때문에 태양계까지 데려 오는 것만해도 돈이 꽤 들잖아. 비트코 행성에는 아직 비트코가 많이 살고 있으니까 그렇게 멸종 위기 동물은 아니라서 과학적으로 보호 대상은 아닌데, 태양계까지 우주선에 태워서 데려 오면 돈이 엄청 들어. 그러니까 값이 굉장히 비싸지지.”

미영과 양식은 비트코라는 외계 생명체가 살고 있다는 행성에 착륙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 행성은 검은눈 은하계의 비트코 행성은 아니었다.

“이게 비트코예요?”

양식이 물었다. 가까이서 보니, 비트코는 조개나 굴 비슷해 보이는 형태로 바위 위에 가만히 붙어 있는 생물이었다. 그런데 복슬복슬한 갈색 털이 나 있었다. 크기는 사람의 발 정도 되는 크기였다.

“맞아. 이게 비트코야.”
“그냥 가만히 있는 것 같은데요.”
“그렇지. 얘네들 습성이 이래.”
“습성이 어떤데요?”
“이렇다니까.”
“이렇다고요?”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보통 때 습성이야. 이런 식으로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면 별 일 안 하고 그냥 가만히 있으면서 1천년에서 2천년 정도 살 수 있데. 이런 동물을 찾아 다닌다고 온 우주를 다 뒤지면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별별 곳을 다 돌아다니며 고생을 했다더라고. 그렇게 해서 찾아낸 이 외계생명체의 가장 큰 특징이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살아 있기만 하는 것을 아주아주 오래 하는 거래. 당연히 엄청 기르기도 쉽고. 그냥 가만히 있는 동물이니까 내버려 두면 계속 가만히 있을 뿐이니까. 그러니까 돈 묻어 두기에 딱 아니겠어?”

양식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자기 발 앞에 있는 비트코를 한참 쳐다 보았다.

“딱히, 가치 있거나 귀엽거나 사랑스럽거나 가족으로 삼고 싶다거나 그렇지는 않은데요.”
“그렇게 볼 수도 있고.”
“그런데 이런 동물이 판사, 검사들에게 가족으로 받아들여지는 동물로 인정 받을 수가 있어요?”
“이렇게 생긴 비트코는 그렇게까지 비싸지 않은데, 정말 털이 복슬복슬하게 잘 자라난 희귀 비트코는 정말 비싸데. 그런 비트코는 딱 봐도 정말 귀여운 무슨 토끼나 너구리 같은 느낌을 준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런 비트코는 판사, 검사, 변호사들이 얼핏 봐도 가족과 같은 동물로 인정해 주고 싶은 그런 정도로 귀여운 느낌을 줄 수 있데. 다들 비트코를 산다고 하면 그런 희귀종 귀염둥이 비트코를 사는 거지.”
“그래서 비트코 중에서도 특히 비싼 게 있을 수 있는거라고요?”
“뭐, 그런 거지. 정말 귀엽게 생긴 최상급 비트코는 한 마리만 있어도 그걸 팔면 한 사람이 평생 먹고 살 걱정 없다던데.”

미영과 양식은 우주선을 원격 조종해서 다시 비트코가 사는 이 행성을 조사하도록 했다. 두 사람은 하늘 위로 떠 올라 움직이는 우주선을 같이 쳐다 보았다.

양식이 미영에게 물었다.

“이 행성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뭔데요?”
“이 행성에 비트코가 얼마나 살고 있는 지 조사해서 보고하는 거야.”
“그걸 우리에게 돈을 주면서 조사하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있었지.”

미영은 잠시 주변을 둘러 보면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원래 비트코는 머나먼 곳 검은눈 은하계의 비트코 행성에서 사는 희귀동물이라고 해서 값이 그렇게 높았던 거거든. 그런데 지금 가까운 우리 은하계인 우리가 서 있는 여기, 이 행성에서도 살고 있다는 게 발견된 거야. 그러면 비트코를 구하기 쉽게 되니까 비트코의 값이 떨어지겠지. 그러면 비트코에 돈을 묻어둔 사람들은 망하는 거야. 너무 값이 많이 떨어지면 앞으로는 더 이상 비트코에 돈을 묻어두는 방법을 쓸 수 없게 될 수도 있거든. 그래서 조사해 보는 거지. 이 가까운 행성에 비트코가 많이 사는 지, 적게 사는 지, 한번 살펴 보려고.”

그 말을 듣고 양식은 행성의 지평선 쪽을 다시 한 번 둘러 보았다. 잠시후 양식은 다시 미영에게 물었다.

“그래서 비트코가 이 행성에 많이 살고 있으면, 그러면 어쩌게요?”
“그건 몰라. 나한테 그것까지는 말 안해 줬으니까. 아마 수소폭탄 같은 걸 보내서 이 행성 전체를 다 폭파해 버리지 않을까? 이 행성은 아직 생물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곳은 아니니까.”
“그러니까, 귀여운 비트코 시세를 높게 유지 하기 위해서, 가까운 행성에서 비트코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 발견되면 그 행성을 날려버린다고요?”

양식은 자기 발 앞에 있는 비트코 한 마리를 보았다. 여전히 별로 정이 가지 않는 투박한 모습의 털난 조개 모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미영의 말을 듣고 보니 좀 다른 감정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양식이 미영에게 또 물었다.

“사장님, 그런데 아무래도 이건 우리가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생각했던 그 목적에 맞는 사업은 아닌 것 같은데요.”

미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단말기의 컴퓨터 화면을 확인하더니 이렇게 이야기했다.

“다행이네. 이 행성에는 비트코가 별로 많이 살고 있지 않은 것 같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어. 폭파될 일은 없겠다.”

바닥의 비트코들을 향해 말해주는 것인가 싶었다.

떠나가는 미영과 양식의 우주선에 비트코 한 마리가 따라 들어 오려고 했다. 평범한 비트코였지만 자세히 보니까 조금은 더 귀엽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양식이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저는 이해 못 하겠어요. 무슨 대합 조개처럼 생긴 저게 그렇게까지 비싸다는 게.”
“그런가 보다 하지 뭐. 그림이나 조각 중에도 도저히 저게 뭔지 이해할 수 없는 현대미술 작품 같은 거 많잖아. 그런 게 그렇게 값이 비싸게 나간다는 건 이해 가?”
“그래도요. 어떻게 이런 짐승이 그렇게 가치 있다고 그렇게 비쌀 수가 있다는 거지?”
“비싸니까 가치가 있는 거지요.”

미영은 다시 우주선의 조종 컴퓨터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우주선을 행성 바깥으로 빠르게 이동시킬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좋은 소식은 빨리 전해 주러 가야지.”
“누구에게 좋은 소식이요? 비트코 주인들에게?”

미영은 우주선을 우주 공간으로 발진시켰다.

“이 행성의 비트코들에게.”


- 2021년, 논현동에서

댓글 6
  • 심너울 21.05.31 20:45 댓글

    이번 미영양식 이야기도 처음부터 끝까지 극단적으로 재미있었습니다. 매일매일 미영양식이 보고 싶을 정도네요.

  • 심너울님께
    No Profile
    글쓴이 곽재식 21.06.03 21:14 댓글

    감사합니다. 이번 편은 그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힘이 되는 말씀 감사합니다!

  • No Profile
    한때는나도 21.05.31 22:01 댓글

    허가 업무에 얽혀본 경험을 떠올리며 깔깔대며 읽다가, 뒷부분에서는 '우와...'하는 감탄사만 연신 내뱉었습니다.

  • 한때는나도님께
    No Profile
    글쓴이 곽재식 21.06.03 21:14 댓글

    사실 깔깔대신 부분이 핵심입니다. 잘 보셨습니다.

  • No Profile
    윤새턴 21.06.01 00:22 댓글

    '채굴'하는 것에서 연상되어 '굴'과 비슷하게 생긴 것일까요? 재능이 있고 욕심이 과하지 않은 사람이 좋은 운을 만나면 크게 잘 될 수 있다는 것이, 요즘의 한탕주의와도 닿아있는 듯 합니다. 재밌게 읽었습니다.

  • 윤새턴님께
    No Profile
    글쓴이 곽재식 21.06.03 21:15 댓글

    굴은 채굴을 생각하면서 쓴 것은 아닌데 저도 다시 훑어 보다 보니 제가 봐도 그런 어감이 들기는 들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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