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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괴이한 거울

조 팀장이 불fire보살인 이유

amrita

“언제부터 이 일을 하셨죠?”

“공식적으로는 칠 년, 비공식적으로는 십일 년째 되네요. 다음달로요.”

미선 씨는 고개를 갸웃 했다.

“왜 공식, 비공식으로 나눠서 세시나요? 무슨 이유라도 있는지 궁금해서요.”

“처음에 이 일을 시작했던 게 아직 미성년 때였거든요. 가출 청소년 시절이라 그때는 뭐 이렇다 할 기록도 없고, 그래서 비공식적이에요. 정식으로 취직한 다음부터 센 게 공식적인 기록이고요.”

“그렇군요.”

미선 씨는 최대한 프로페셔널하게 홀로그램 스크린을 넘겼다. 쉽지 않은 일이긴 했다. 그는 애시당초 귀신 이야기 같은 건 믿지도 재미로라도 듣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월척] 낚시터에서 일을 시작한 것도, 자동현실 낚시터의 프로그램 관리 업무가 항상 규칙적이고 별달리 이변이나 비상 사태 같은 게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는 종류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게임이 오작동을 시작한 것은 한 달 전의 일이다. 공교롭게도 미선 씨가 [월척] 낚시터 자동현실 게임 관리자로 취직한 때와 맞아 떨어졌다. 오류도 이상한 오류였다. 무작위로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일정한 조건이 만족되어야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일단 게임 캐릭터가 혼자 낚시터의 한 특정한 곳에서 밤낚시를 즐기다 월척을 열 마리 이상 낚아야 했다. 그러면 갑자기 게이머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게임 속 낚시꾼 캐릭터가 혼자 벌떡 일어나 저수지로 걸어 들어간다.

게이머가 아무리 정지나 리셋을 눌러도 통하지 않는다. 게임을 강제 종료한 뒤 재접속해서 보면 캐릭터는 휴면 상태고, 재활성을 시켜서 배낭을 열어보면 골드나 경험치, 아이템은 모두 0이다.

컨트롤 모드의 유저라면 그나마 임팩트가 덜하지만, 자동현실과의 싱크로율을 최대치까지 높여놓는 현실 모드 플레이어들은 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말이 저수지 워킹 에러지, 뭐에 홀려서 자살하는 기분이라고, 이게 호러 게임이지 무슨 낚시터 게임이냐고 환불해내라는 요구도 받았다. 아이러니한 것은 호러 게임 유저들이 소문을 듣고 (여기가 요새 물이 그리 좋다며? 원랜 낚시터 게임이라는데 완전 심령스팟이야 진짜 리얼해 소름이 쫙 돋는데 어후) 새로 가입하는 경우였는데, 숫자가 많진 않아서 큰 의미는 없었다.

하여튼 프로그램을 정비하고, 다시 확인하고 또 뜯어보고 시뮬레이션을 돌려봐도 딱히 에러 사항을 찾을 수 없는 게 또 기가 막힐 일이었다. 온갖 테스트 끝에 문제 없음이라고 나와서, 최종 실험 목적으로 새로 캐릭터를 생성해서 똑같이 밤낚시를 보내면 월척을 열 마리 낚고 나서 또 물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러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사장님은 해외를 유랑 중이라 낚시터 게임에 이런 문제가 났다고 보고해도 남의 일마냥 ‘그래~ 잘 해결해 봐요~ 난 이만!’ 하고 잠수 탈 뿐이었고 미선 씨는 진지하게 퇴사를 고려했지만 얼마 전 할부로 지른 자동 자전거도 있고… 눈도장 찍어 둔 소파도 있고… 혼자 집에서 개발 중인 셀프 인테리어 게임은 이제야 시작 단계인데… 그런 고로 그렇게 그의 영적 전문가 탐색 인터뷰는 시작되었다.

  1. 밀짚모자를 쓰고 인터뷰를 온 자칭 퇴마사 아저씨는 이게 다 고사를 안 지내서 그런 거라고 했다. 사무실 기운이 흐트러졌다나. 고사 지내는데 삼백이라고….
  2. 천년도화선녀보살 이라던 무당은 아예 통화 단계에서 자기는 그런 일 안 한다며 퇴짜를 놓았다. 오프라인 온리라고….
  3. 신부님은 허허허 웃으며 나타나서 사무실 여기저기에 성수를 뿌린 후 돈도 안 받고 단팥빵 하나만 들고 떠났다.
  4. 비구니 스님은 요새 자기는 다른 게임을 담당 중이라며 여유가 안 난다고 했다. 이런 문제를 겪는 게임이 세상에 또 있느냐고 놀라서 물으니, 의외로 많다고 아주 블루 오션이라고, 일 거리가 아주 넘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 예약하면 대기 시간이 한 9개월은 되니까요, 다른 곳에 의뢰해 보세요. (스님, 어디 잘 아는 곳이라도….) 곧 좋은 곳과 인연이 닿을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5. 목사님은 미선 씨에게 요새 우리 교회에 참한 총각이 많은데 소개시켜 줄 테니 와보지 않겠냐고 했다. 게임은 사탄의 도구이니 주님의 품으로 오시오, 그런 후 그는 팜플렛과 포켓 성경과 호텔 레스토랑 50% 할인 쿠폰을 남기고 사라졌다.

여하간 게임에서의 자살 에러 문제는 계속되었다. 호텔 레스토랑 할인 쿠폰은 요긴하게 쓰긴 했다.

그러던 어느 선선한 일요일 아침, 운동하려고 공원에 나갔다가 도저히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아 멍하니 벤치에 앉아 진지하게 퇴사를 고민하던 미선 씨 발치에 팔랑 팔랑 떨어져 앉은 것은, 누군가 잃어버린 사원증이었다.

‘이게 뭐야…. 심 풍? 이름 한 번 시원하네. 친정보살 앤 코?’

미선 씨는 공원의 우체봇에게 사원증을 넘기려다 호기심이 들어서 친정보살 앤 컴퍼니를 검색해 보았다. 회사 공식 사이트를 열자마자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동현실 천도제!!! 이제는 바가지 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특별 이벤트 가격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였다.

‘이게 뭐야…. 미친 회사인가?’

그러면서도 미선 씨는 특별 이벤트 가격이 궁금했다. 광고를 열어 보니 후불제 10만원에 완벽 해결, A/S까지 포함이라는 것이다. 단팥빵보다는 비싸지만 삼백만원 보다는 훨씬 나은 가격이었다. 애프터 서비스까지 포함이라니 왠지 먹튀는 안 할 것 같기도 했고. 그래서 연락했더니 오늘 이렇게 사무실로 사람이 나온 것이다. 안녕하세요, 친정보살 앤 컴퍼니에서 나왔습니다. 자동현실 천도제 서비스가 필요하시다고요? 깔끔한 블랙 투피스 정장 차림의 여자가 내미는 명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친정보살 앤 컴퍼니

자동현실 담당팀

팀장 조 왕

풍수 외 기타 패러노말 이펙트 전문

응?

미선 씨는 눈을 깜박였다. 잠, 잠깐. 풍수? 웬 풍수?

“아, 네, 그런데 착오가 있었던 거 같네요. 전 천도 서비스라고 생각했는데 풍수라고 여기에는….”

“네, 아무래도 그렇죠? 저희가 출동 전에 미리 프리스크리닝을 했거든요. [월척] 낚시터 게임의 에러 현상은 천도 문제가 아니라 풍수 문제예요.”

“그, 그런 건가요?” 그런 건 어떻게 알죠? 누가 알려주기라도 하는 건가? 아 모르겠어….

미선 씨는 아직도 이게 진짜인지, 조금 미친 회사의 사기 행각인지 뭔지 확신이 안 갔다. 그래서 일단 조 팀장을 앉혀놓고 커피와 빵을 내온 후 이것 저것 질문을 해 본 것이다. 조 팀장은 해맑게 야무지게 대답도 잘 했다. 커피도 훌훌 잘 마셨고, 빵도 아주 맛있게 잘 먹었다. 곰보빵이 블랙 커피하고 잘 어울린다면서.

“전 고등학생 때 집에서 탈출했었거든요. 양육 환경이 그다지 건강하지가 않아서, 그대로 그 집에 있었다가는 미치거나 단명했을 거예요. 당장 집을 나오고 나서 갈 데가 없어서, 그때는 임시 보호처니 그런 것도 잘 몰랐고, 동네에 흉가로 이름난 단독주택으로 기어들어갔죠.”

“아, 그랬군요.”

“그런데 귀신이 나온다고 그렇게 유명하던 집이었는데, 아무 일도 없는 거예요. 다음날에 그 집주인 언니와 마주쳤는데, 지난 오 년간? 얼마라더라 아무튼 그 집에서 일주일? 한 달? 이상을 버틴 사람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확인도 할 겸 그 집에서 같이 캠핑을 했는데, 또 아무 일도 없는 거예요. 집 분위기도 전에는 어두침침 싸늘했는데 이제는 뭐 무탈하니… 괜찮아 졌다는 거죠.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흉가 리햅 알바를 시작했어요.”

“흉가 리햅 알바라면….”

“흉가로 소문나서 팔리지도 않고 세도 안 나가는 집에 제가 들어가서 며칠 사는 거죠. 그러고 나면 집이 멀쩡해지고, 저는 돈 버니 좋고 집주인은 집 문제가 해결되니 좋고, 윈윈으로다가요. 경험이 쌓이다 보니 일 잘하는 리모델링 업체하고도 줄이 닿게 되고, 그러면 겸사 겸사 그쪽도 소개하고, 뭐 그런….”

“아아, 그런 거군요.”

“그걸 몇 년을 했는데, 여러 가지 경우가 있었지만 꼭 항상 원혼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었어요. 원혼 말고도 터주 문제나, 물건이나 지리 자체가 이유인 경우도 있었고요. 이 낚시터도 근본적인 문제는 위치적인 거예요. 그게 어찌 보면 귀신보다 더 골치 아파요. 귀신은 보내면 그만이지만 집 위치는 옮길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집을 살 때에는 항상 터부터 보라고 옛말에도 있듯이, 아무튼 옛말에 틀린 말 없어요, 틀린 말 빼고요….아 이건 당연한 소린가.”

“그러면, 무슨 물귀신 같은 게 게임에 붙어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게 아니라는 말씀이신가요?”

미선 씨는 그동안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가능성을 이제야 입에 담을 수 있었다. 사실 그동안 낚시터 괴담이니 저수지 물귀신 얘기 같은 걸 몇 번이나 찾아봤는지 모른다. 그럴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렇다고 어디 가서 이런 걸 진지하게 물어본단 말인가? 이미 물어보긴 했지만, 죄다 미심쩍던데.

“물귀신이라기보다는 위치상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그런 건데요. 직접 보여드릴게요. 게임에서 만나요.”

“아, 지금 바로요? 잠시만요….”

미선 씨는 네트워크를 통해 게임에 접속했다. [월척] 낚시터 관리 오피스의 벽 한 면은 전부 디스플레이 용으로 사용되었는데, 보통 때에는 홍보용 영상을 띄워 두지만 게임 테스트할 때 쓰기도 했다. 조 팀장은 주머니에서 자동현실용 선글래스를 꺼내 쓰고는 소파에 편하게 기대 앉은 후, 호피무늬 군복과 페이턴트 가죽 워커 차림의 캐릭터로 디스플레이 벽면에 나타났다. 게임 캐릭터의 빨간색 쇼트컷 헤어스타일 위로 어른거리는 것은 [조 왕*파이어] 라는 캐릭터 명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솔직히 못 알아봤을 것이다.

‘현실에서는 완전 모범 직원 같이 하고 다니면서… 게임에서는 순 날라리 삘이야….’

그런데 우리 게임에 저런 헤어 스타일이나 패션 옵션이 있던가? 디스플레이 속에서 조 팀장은 벽 바깥의 미선 씨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뭐라고 말했는데, 캐릭터 보이스는 무음 상태라서 조 팀장은 본체로 다시 말했다. (미선 씨는 신속히 옵션을 고쳤다.)

“마이크 테스트, 아, 아아.”

“이제 될 거예요. 다시 게임에서 말씀해 보세요.”

– 마이크 테스트, 아 아 아. 아 된다! 이제 나와요!

조 팀장은 곧바로 게임 속에서 걷기 시작했다. 화면이 흔들리며 풀 밟히는 소리, 벌레 우는 소리가 간간히 솟았다. 때로 바람이 세게 불었다.

– 그럼 이제 문제의 그 자리로 가 보도록 하죠. 지금 여긴 저녁인가요? 그런 거 같네요.

조 팀장은 게이밍 선글라스를 약간 고쳐 썼다. 미선 씨는 고개만 끄덕였다가, 그런 자신을 조 팀장이 볼 수 없다는 것을 약간 늦게 깨닫고 소리내어 말했다. 네 저녁 맞아요. 그, 현상이, 밤에만 일어나거든요. 늦은 밤에만, 굳이….

– 그래요. 제가 먼저 갈 테니까 바로 따라오세요.

화면에서 가끔 조 팀장의 캐릭터가 풀을 헤치거나, 자갈 같은 것을 밟아 치우거나 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 아마 여기 쯤이었던 거 같은데, 버드나무가 쭉 있었고….

조 팀장은 갈대숲 속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그의 말대로 버드나무가 화면에 잡혔다. 노을의 끝물이 멀리 저수지 저편으로 가라앉아갔고, 구름 몇 조각이 달 근처를 배회했다. 게임 속의 시간이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면서, 시계가 어둑해졌다. 디스플레이가 어두워지자 오피스도 같이 깜깜해졌다.

조 팀장은 버드나무가 쭈욱 심긴 좁은 길을 따라 한참을 말없이 걷기만 했다. 하필이면 나무가 양옆으로 한없이 이어져가서 세상이 점차 닫혀져가는 느낌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버들가지 흔들리는 소리가 울렸는데, 그때마다 축축하고 무거운 기운이 등을 타고 올라오는 것이 약간 기분 나빴다. 미선 씨는 어깨를 한 번 으쓱 했다. 왠지 추워서 뭐라도 한 겹 더 걸치고 싶었다. 그런데 잠시 자리를 뜨는 것은 또 싫었다.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은 마음 반, 계속 앉아서 검은 강가를 따라 흘러가고픈 마음 반, 그렇게 미선 씨는 자신도 알 수 없는 마음으로 멍하니 끝없이 이어지는 것만 같은 버드나무 길을 응시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 이 자리군요.

그때 바람이 크게 일었고, 버들가지가 무리지어 요란하게 쏴아아 하고 울었다. 조 팀장은 물가에 서서 저수지 쪽으로 시야를 널리 잡았다. 두 걸음 정도면 발이 물에 젖을 것이다. 낚시 의자를 셋업하려면 좀 뒤로 물러나는 편이 낫겠다.

미선 씨는 조 팀장의 시야로 잡히는 게임 화면 너머로 이상하게 미동도 없는 검은 수면을 언뜻 언뜻 보았다. 얼어붙은 듯한 물 너머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응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조 팀장은 컨트롤을 이리저리 돌려 보다가, 낚시 장비 셋업 모드로 들어갔다. 낚시 의자, 민낚싯대 세 대와 받침대, 뜰채와 어망이 포함된 기본적인 구성이었다. 밑밥도 자동 셋업 모드로 설정한 것인지, 알아서 준비된 떡밥이 저수지 쪽으로 휙휙 날아갔다.

– 자 그럼 기다려 볼까요?

“네….”

그렇게 둘은 입질이 오기를 기다렸다. 가끔 바람이 부는 것 말고는 사방이 다 조용했다. 곤충 소리, 새소리, 물소리 이펙트는 다 어디서 뭘 하는지 전혀 들리지도 않았다. 스산히 흔들리는 버들가지 너머로 보이는 수면은 무슨 먹이를 기다리는 야생 짐승마냥 불길하게 웅크려 있었다.

“왠지….”

– 네.

미선 씨는 잠시 망설였지만, 말을 이었다. “왠지 이해가 가요. 자리가 안 좋다던 말씀이요.”

– 그죠? 꽉 막힌 자리에요.

“그러게요….”

얼마 지나지 않아 입질이 톡톡 오더니 곧 찌가 쑤욱 내려갔다. 조 팀장은 무심히 대를 올려 낚인 붕어를 뜰채로 받았다. 팔뚝만한 월척이었다.

– 이러니 자리가 이 모양인데도 플레이어가 꾸준히 여기 와서 앉는 모양이네요.

“네, 살벌하지만 손맛이 왓다래나, 뭐 그렇다더라고요.”

– 이제 아홉 마리 남았네요.

“저, 그런데요.”

– 네.

“낚시 경험이 있으신가봐요. 익숙해 보이셔서….”

– 한때 선택의 여지가 없었거든요. 옛날 얘기지만. 뭐 저야 구경만 했지만요.

“선택의 여지요?”

– 그런 적이 있었거든요. 아 또 왔다.

또 한 마리가 낚였다. 그리고 또 한 마리, 두 마리.

– 미선 씨는요? 낚시 좋아해요? 명색이 낚시터 게임 관리잔데.

“아, 전 물을 별로 안 좋아해서요. 어렸을 때 물에 빠졌다던데 그래선가봐요.”

– 그러시구나.

낚시 자체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붕어는 계속해서 잡혔다. 넷, 다섯 마리. 중간에 한 마리를 망에 넣다가 놓친 것 빼고는 다른 일도 없었다.

다시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조 팀장은 열 번째 붕어를 망에 넣고는 턱을 괴고 앉았다.

–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데요? 뭐 별 기척도 없고… 어?

그때였다. 미선 씨가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난 것은.

조 팀장은 화면 속에서 화면 밖의 미선 씨를 향해 외쳤다.

– 미선 씨? 왜…어? 미선 씨!

미선 씨는 소파에서 일어나 잠시 그냥 서 있다가, 디스플레이 쪽으로 한 걸음, 두 걸음 걷기 시작했다.

– 아 젠장! 아니 왜 또 로그아웃이 안 돼?

조 팀장은 게임 속에서 옵션 창을 열고 열나게 접속 종료를 시도했지만, 아무리 선택을 반복해도 화면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냥 몸을 움직이려 해 봐도, 움직여지는 것은 게임 속에서의 가상 캐릭터 뿐이었고 진짜 육신은 미동조차 않았다.

아니 방금 전만 해도 몸으로 말도 따로 할 수 있었는데, 왜 이제는 갑자기 감각이 아예 끊어진 것처럼 이러지? 그 와중에 미선 씨는 계속 걸음을 내딛는 중이었다. 이제 다섯 걸음인가? 아니면 여섯? 저게 열 걸음이 되는 순간 어떻게 되는 거지? 조 팀장은 게임 속에서라도 주먹을 세게 쥐었다. 대략 짐작이 가긴 한다.

사실, 조 팀장은 미선 씨에게 상황을 완전하게 설명한 것은 아니었다. 고객의 안전을 위해서 일부러 밝히지 않은 점이 약간 있었다.

조 팀장은 검고 고요한 저수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날카로운 것으로 금속의 표면을 긁는 것 같은 소리가 끼이익 하고 울렸다. 공간감이 느껴지지 않는, 바로 귓가이거나 아니면 아예 아주 먼 곳에서 번져가는 듯한 소리였다.

미선 씨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이제 여덟 걸음인가? 아니면 아홉? 또 한 걸음.

조 팀장은 한숨을 푹 쉬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그는 저수지 쪽을 향해 중얼거렸다.

– 네놈들이 정 그리 나온다면.

조 팀장은 낚싯대를 발로 밀어 찬 후 저수지 속으로 첨벙 첨벙 걸어 들어갔다. 게임 속인데도 한기가 울컥 울컥 올라왔다.

– 나한테도 생각이 있지.

검은 물은 유리 깨지는 소리를 내며 이리 출렁, 저리 출렁거렸다. 조 팀장은 물이 깊어지든 말든, 물의 흐름이 발목을 잡아 당기든 말든, 거리낌 없이 내쳐 전진하다가 곧 완전히 가라앉았다.


가출을 언제 했던 건지는 이제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대로 집에 붙어 있었다가는 앱한테 죽었든가 아님 내가 자살을 했든지 둘 중 하나의 결말을 맞았을 거라는 점이다. 그리고 앱은 타겟을 동생한테로 옮겨갔겠지. 그 새끼가 원했던 건 만만한 타겟이니까.

항상 일정한 패턴이 있었다. 방바닥이 덜 깨끗하다든가, 싱크대에 컵이 있다든가, 꼬투리 잡을 게 정 없으면 남의 집 애들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데 왜 넌 그 모양이냐면서 욕설과 고함으로 일단 시작한다. 그리고 한 두 시간 정도 소리를 지른다. 흥에 겨우면 의자를 던지는 시늉이나 손을 들어 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김이 다 빠지면 갑자기 슬퍼하면서 자기가 요새 힘들다느니 일 다니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느니, 자기가 어렸을 때 막걸리 심부름 갔던 얘기 같은 걸 늘어놓는다. 그리고 한 일이주일은 조용하다가, 다시 슬슬 김이 올라오다가, 한 달을 채 버티지 못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무한반복인 것이다. 그래놓고 동생이나 엄마한테는 부드러운 모습을 (주로) 보인다.

그러니까 나는 쓰레기 담당이고, 이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 앱이 어딘가 병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일은 그닥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튼 나는 (아마도) 그 당시 중학생이었고 부모의 사랑을 여전히 원했던 애였으니까.

그렇지만 감정이 어디로 어떤 식으로 흐르든 사실은 사실이다. 내가 사랑을 원한다고 해서, 사랑을 주기는커녕 이미 망가져 삐그덕대던 앱이 갑자기 어느날 멀쩡해져서 제대로 사람 노릇을 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앱이 그 지경이 된 것은 백프로 그놈 잘못이랄 것도 없었다. 앱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도 나름 서러운 면이 없잖아 있었으니까. 나이가 그렇게 되도록 자아가 성숙해지기는커녕 더 미숙해져버린 것이야 자기 책임이지만.

아무튼 어린 시절은 그냥 지옥이었다. 부모는 바쁘거나 아무 생각이 없었고, 자기들부터가 애정 결핍이었으며, 만만한 두 자식한테 되는대로 멋대로 굴었다. 두 자식 중에서도 맏이이자 딸인 내게 대부분의 쓰레기가 쏟아졌고, 나는 언제나 항상 도망치고 싶었다. 아주 멀리. 더욱 멀리.

부모는 아들에게는 좀 더 사랑과 여유를 주었다. 왜냐하면 아들이니까.

딸인 나는 별반 불필요한 존재였다. 동생한테 모범을 보이거나, 돌보거나, 어른 말을 잘 듣거나, 공부를 잘 하거나, 여튼 어떻게든 쓸모를 증명하지 않으면 안되는 위태로운 위치에 있었다.

공부한다는 핑계는 어느 정도의 방패가 되어 주었다. 학원을 다니는 동안에는 일단 거리가 생기니까 그럭저럭 견뎠다. 문제는 집이 망하면서 앱이 항상 집에 틀어박히면서 심화되었다. 학원도 끊겼다. 나와 동생은 학교가 끝나면 집에 가는 것이 끔찍하게 싫었다. 집에는 쓰레기같은 표정과 말과 생각으로 꽉 찬 앱이 도사리고 있었으니까.

서론이 쓸데없이 길었다. 아무튼 내가 고1 때 가출한 것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다. 그 시절의 내게는 미래나 희망, 대학,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일단 살아야 했다.

물론 무작정 집을 나온다고 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당장 갈 데도 없고 밤에 어디서 자야 할 지 막막한 일이다. 사실 많은 가출 청소년들이 그래서 더욱 괴로운 길로 몰려가 버린다는 것을 나중에 어디 신문에서 읽었다. 마치 사냥터에서 짐승이 몰려가는 것처럼. 나는 어디 잡혀가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으니까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 그 정도가 운이 좋은 편이라는 것 자체가 좀 끔찍한 일이긴 하지만.

가출하고서 처음 몇 시간 정도는 너무나도 기뻤다. 더는 앱의 저주섞인 고함 소리를 몇 시간씩 들으며 멍하니 서 있지 않아도 되고, 언제 또 미친 발작을 시작할 지 몰라서 항상 조마조마한 상태로 있지 않아도 된다니 세상 천지 어디든 다 천국 같았다. 하지만 저녁이 다가왔고 하늘은 서서히 붉어지다 푸르게, 또다시 검어져 갔는데, 당장 어디로 가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친구네 집에 가면 아마 추적당해 잡혀갈 것이고 학교는- 학교도 다시 안 갈 거니까 그거야 상관 없지만. 아무튼 이제 어디로 가지?

잘 생각해야 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 좋아하는 곳이면 안 돼. 눈에 뜨이면 잡혀갈지도 몰라. 당장 뭘 먹지? 뭐라도 먹게 되겠지. 굶어 죽으면? 그럼 죽는 거야. 죽더라도 그 집구석으로는 돌아가지 않아. 그럼 어디로- 어디로?

그때 문득 생각이 났다. 우리 동네 구석에는 빈 공터가 하나 있었는데, 모래사장과 폐차 몇 대, 다 찢어져 흐늘거리는 비닐에 대충 덮인 공사 장비 같은 것이 아무렇게나 늘어진 곳이었다. 그 공터의 끄트머리에는 조그만 단독주택이 있었는데, 흉가라고 소문이 나서 아무도 가까이 가려고도 않는 장소였다.

나는 곧장 그리로 향했다. 내게 이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다. 흉가라니까 누가 올 일도 없을 테고, 당장 잠잘 곳이 필요했는데 잘 됐다. 귀신이 나오든 말든, 사람보다 더 하겠어?

용감하게 공터를 가로질러 가니 말라 비틀어진 나무 몇 그루와 돌담이 눈에 들어왔다.

주택의 은색 대문은 심이 대충 빠져서 덜렁거렸다. 슬쩍 밀어보니 싱겁게 열렸다. 앞마당을 꾸미려던 것인지, 벽돌로 경계를 쌓아가다가 무너진 흔적이라든지 아무렇게나 피어난 해바라기나 폐타이어 등이 중구난방 널려 있었다.

그닥 별다를 건 없어 보이는데?

그게 첫 감상이었다. 그리고 그 감상은 앞문을 열고 (유리가 깨져서 열 수 있었다) 부엌과 거실, 방들을 둘러보고 나서도 그대로였다. 오래 사람이 살지 않아 휑뎅그레하니 먼지 날리는 걸 빼면 그다지 으스스할 것도 없었다.

해가 지고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둠이 깔리고! 바람이 스산히 불고!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고! 사방이 죄 어두침침하고! 기분이 이상해서 뒤를 돌아보니 검은 머리카락이 천장에서부터 후두둑! 같은 일은 영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고 허리 무릎이야….”

이불이고 뭐고 없이 박스 깔아놓고 자고 났더니 온몸이 쑤시긴 했다. 화장실 물은 안 나왔지만 앞마당 수도에서는 물이 나와서, 일단 찬물이나마 세수를 하고 입을 헹구고서 현관 앞 계단에 앉으니 아침 햇살이 따사로웠다. 그리고 평화로웠다.

‘이래도 되는 건가.’

말 그대로, 이렇게 평온해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잔잔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인생 살아도 되나? 집에서도 나왔고, 이제 학교에도 안 갈 거고, 이제 어떻게 살지? 아무리 구석진 데라도 아무튼 같은 동인데, 마주치면 잡혀 가는 거 아냐? 그러자 곧바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집에 다시 들어가느니 죽는 게 낫다고.

‘여튼지간에 배는 고파.’

나는 책가방에 넣어 온 치토스를 뜯었다. 비상 식량이었다. 치토스, 맛동산, 계란과자, 오오 나의 과자 최애 삼인방이여 오오. 그중에서도 계란과자가 제일 좋으니 맨 마지막에 먹어야지.

그게 나의 첫 흉가 체험이라면 체험이었다. 더불어 내게 흉가 액땜 서비스 아이디어를 준 체험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날 아침, 웬 뽀글머리 아주머니가 [청정해소금] 한 가마를 끙끙대며 이고 들어오다가 나를 보고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비명을 지르며 풀썩 주저앉았기 때문이다. 나는 다급히 양손을 흔들었다.

“아줌마! 괜찮아요! 저 사람이에요!”

“아- 뭐- 용서해 주세요! 사 살려줘요! 이 이이이이 백에는 부적이 들었다! 어흥! 썩 물럿지 못할까!”

“아니 난 사람이라니까! 이것 봐요! 해바라기! 해바라기!”

나라고 눈앞에서 웬 사람이 놀라 심장마비로 죽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았기에, 급히 마당의 해바라기 하나를 꺾어 미친 듯이 흔들었다. 그게 내가 귀신이 아니고 사람이라는 증거가 되는지 마는지, 그냥 이것 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흉가라는 집에 들어서니 수돗가에 머리를 길게 드리운 채 쪼그려 앉은 교복 차림의 여중/고생……. 그래, 뭐…….

해바라기를 미친듯이 흔든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아주머니는 일단 기절은 안 했다. 애꿎은 소금 가마니만 터졌을 뿐이다.

많은 양의 소금이 터진 가마니 밖으로 흘러나가는 소리는 어떤 소리인가? 말 그대로, 소소소소소 소 소소소소 소소소 하는 소리가 난다. 그래서 이름이 소금인가? 아니 뭐 그냥, 그렇다고.... 진정하려고 숨을 몰아쉬는 아주머니와 해바라기를 번쩍 치켜 든 나 (젖은 머리카락은 덤) 사이로 한동안 소소소소소 하는 소금 소리만 싱겁게, 아니, 짜게, 휘몰아쳤다.

긴 침묵이 흘렀다.

“아니 그래서,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소금이 다 새어나갈 대로 새어나간 후에야 아주머니는 내게 질문을 던졌고,

“머리… 감고 있었는데요.” 나는 멍하니 대답했다.

“아니 그러니까, 머리 감는 거 좋지, 좋은데, 왜 여기서 머리를 감고 있냐고?”

“아, 그거는요, 머리 안 감으면 찝찝하니까….”

내가 사실은 집을 나온 가출 청소년이며, 다시는 죽어도 집에 돌아갈 생각은 전혀 없으니 허튼 생각은 꿈도 꾸지 마시라는 말을 하게 되기까지는 대략 십 분 가량의 핑퐁 질답 시간과 짜장면과 탕수육과 칠성 사이다가 필요했다.

당연한 거 아닌가. 나는 세상에 아무 것도 없는 부랑자 가출 청소년이므로, 이제는 똑똑하게 굴어서 먹을 걸 최대한 챙겨야 한다고.

“그럼 여지껏 그 집에서 버틴 거야? 그 참 신기해. 일주일을 넘기는 사람이 없더만.”

아주머니는 그 집의 가격이 좋아서 흉가라는 소문에도 사긴 샀는데, 세입자라는 세입자는 다 얼마 버티지 못하고 도망나가서 이젠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며, 고량주를 따라 마시며 얘기해 주셨다. 나는 미성년이니까 안 된다며 안 주셨다. 이상한 데서 적법한 걸 찾는 분이었음.

“그래요? 별 일 없던데요.”

“정말 별 일 없었어?”

“네. 보세요, 멀쩡하잖아요.”

“뭐 꿈 같은 것도 안 꾸고?”

“네. 그냥 꿀잠 잤어요.”

“신기해….”

“진짜예요. 확인해 보실래요?”

“확인?”

그냥 해본 말에, 아주머니는 의외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잖아요, 얼마에 그 집을 사신 건지는 몰라도, 정말 아무 일 없는 거면 땡잡으신 거잖아요.”

“그야 그렇지.”

아주머니는 결단이 빠른 성격이었다. 그분은 일단 나를 찜질방에 내려다 주고서 (씻으라고) 근처 어디서 침낭과 손전등을 사 왔다. 겸사겸사 갈아 입으라며 새옷까지 사다 주셨다. 처음에 물어봤던 것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둥 부모님께서 걱정하실 거라는 둥, 그런 얘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른들은 맨날 했던 말 또 하기를 하루 종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하긴 남 괴롭히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고서야 굳이 했던 말 무한반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그렇게 우리는 흉가(라고 소문난 집)에서 캠핑 비슷한 걸 하게 되었다.

아주머니는 손이 빠르고 또 부지런해서, 기왕 이렇게 된 거 집을 좀 깨끗하게 치운다며 또 어딘가에서 청소 도구를 한가득 가지고 나타났다. 집주인이 바쁘게 쓰레기를 모아다 버리고, 쓸고 닦는데 나라고 가만 있을 수도 없어서, 나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청소를 했다.

치우면서 새삼 느낀 것이, 집 자체는 참 잘 지은 듯했다. 아래 층에는 벽난로와 거실, 부엌이 있었고 윗층에는 방 세 개가 있었는데, 나무 문은 빛깔이 불그스럼한 것이 잘 모르는 내 눈에도 비싼 목재처럼 보였고, 방바닥은 무슨 돌 종류였다. 아주머니의 말로는 이게 대리석이라고 했다. 먼지를 쓸어내고 걸레질까지 하고 나자 과연 은은한 광택이 예사롭지 않았다. 화장실의 싱크대 장식이며 손잡이는 브래스라고 했고, 전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장식적인 문양이 새겨진 벽이나 부엌 찬장까지 둘러보고 나니 집주인 아줌마가 왜 지금껏 (집을 산 지 오 년은 됐다고 했나?) 미련을 놓지 못했는지 이해가 갔다.

우리는 청소 후 한결 말끔해진 부엌에 침낭을 펼쳐 두었다. 캠핑을 온 거니까 컵라면을 먹어야 제맛이라며, 아주머니는 보온병과 컵라면을 가방에서 꺼내 왔다. 아니 다 언제 준비한 거야. 이러시면 나야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집은 어떻게 사신 거예요?”

“급매로 나왔었어. 보러 왔는데 집도 멀끔하고 집주인도 멀쩡해 뵈서, 가격도 싸겠다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올까보냐 해서 얼른 샀지. 지금 생각해 보면 뭐에 홀린 거 같어.”

“그럼 그때는 집이 멀쩡했어요?”

“그래 보였지. 전 주인이 자기가 급히 해외로 나가야 한댔나 그래서 빨리 팔려고 그렇게 내놨다고 했는데, 아무튼 그냥 싼 물건은 없는 거야. 다 무슨 이유가 있다니까? 아유 바깥양반이 얼마나 바가지를 긁는지, 스트레스로 죽을 거 같아서 하다하다 부적까지 받아오고. 집구석에서 하는 일도 없는 놈이 얼마나 유세는 떨고 티비 앞에 처 누워서 애들한테 소리나 질러대는지, 이래서 여자는 친정 빽이 있어야 한대니까. 남자새끼들을 믿으면 안 돼, 알았지? 다 개새끼들이여.”

“네…. 근데 전 주인은 멀쩡했고요? 왜 무서운 이야기에서는 집에서 뭔 일을 저지르고서 자기가 캥기니까 얼른 팔아치우고 뜨고 그러잖아요, 그러면 다음 집주인이 애꿎게 고생하고요 막.”

“그러게. 나도 별 별 생각을 다 해봤는데 말이야.”

아주머니는 집에서 가지고 왔다는 열무김치 통을 달칵 열었다. 그냥 집어 먹어도 되는 거예요? 그래 많이 먹어.

“세입자들이 다들 나가면서 아무 말도 안 해. 아니 무슨 말이라도 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전 집주인하고는 연락도 안 되고, 사람들은 처음에는 다들 아이고 집이 참 좋다면서 이사하고서는 일주일? 뭐 길어야 한 달? 그 정도도 안 되서 다들 파리해져가지고는 일찍 방 뺀다고…. 어휴. 그래서 이번에는 하도 답답해서 무당도 찾아가고, 소금도 아주 가마니로 사고 그랬지.”

“무당요? 뭐라고 해요?”

“몰라, 무슨 부정이 끼었대나, 굿을 해야 한다고 천만원 타령하길래 됐다니까 부적을 써주겠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일단 한 장 써주면 실험해보고 효과가 있는 것 같으면 또 오겠다고 그랬지.”

“아, 그런데 아까 가방에는 부적이 한가득 이던데….”

“다 복사한거야. 기왕 츄라이 해보는 거, 달랑 한 장 보다는 여러 장인 게 좋잖아?”

“그런 거예요? 아….”

말이 되는 것 같긴 한데 안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컵라면을 다 먹은 후 우리는 소화도 시킬 겸 마당도 둘러 보기로 했다. 아직 해가 완전히 지기 전이라 둘 다 자신감도 좀 있었다. 앞마당이야 이미 익숙한 곳이라 대충 벽돌을 길게 자란 풀 위로 던져 가면서 길을 만들어 뒷마당으로 돌아가니,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이야, 숲이다?”

뒤에서 아줌마가 헛웃음 소리를 냈다. “그러네. 아주 그냥 울창해?’

나는 그때까지 풀이 그렇게 크게 자랄 수 있다는 걸 몰랐다. 어지간한 사람 키만큼 자란 풀들이 뒷마당에 한가득이라, 바람이 불 때마다 물결치는 모습이 거의 장관이었다. 우리는 굳이 풀을 헤치고 더 나아갈 생각은 없어서, 그쯤에서 뒤로 돌아 나왔다.

날은 천천히 저물어갔고, 아주머니는 혹시 모르니 만반의 준비를 해야 된다면서 우리 침낭 주변으로 둥그렇게 소금을 뿌려 선을 그렸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이미 알고는 있다. 이날 밤, 놀랍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때 만난 아주머니하고는 몇 년 동안 같이 흉가 리모델링을 같이 하면서 솔찮게 수익을 보았고, 성인이 되고 나서는 1인 가구 등록을 하면서 예전 집하고의 인연도 완전히 끝냈다. 조금 늦었지만 대학도 갔고, 특기를 한껏 살려 취직도 했다.)

나는 밤늦게 침낭에서 몸을 빼내어 뒷마당 쪽으로 향했다. 여전히 키 큰 풀들이 와르르 이리저리 바람에 엎어지며 시야를 어지럽혔다.

일테면 예전에 다 깬 게임을 다시 플레이 해보는 것과도 같달까. 걸어나가자 풀들은 미리 이리 저리 누우며 길을 터 주었다. 풀이 열리는 끝이자 뒷마당의 한가운데에는 이끼 낀 돌로 둘려진 오래된 우물이 하나 있었다.

이건 이를테면 방금 업데이트된 장소 옵젝으로서…. 나는 우물 속을 깊이 들여다 보았다. 물은 없이 말랐는데 저 아래로 누군가 웅크려 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익숙한 어깨선이었다.

“미선 씨?”

두어 번은 더 부른 뒤에야 그는 움찔 하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

“저예요, 조 팀장. 기억나세요?”

“조 팀장님…?”

“왜 그 월척 낚시터 문제로 연락 주셨었잖아요.”

“아, 제가요? 음… 아, 네, 맞아요, 그랬었...나요?”

“네, 플레이어가 저수지로 걸어들어가는 오류 때문에요.”

“아, 맞아요. 그래서 같이 게임에 접속했던 거 같은데….”

미선 씨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그런데 여긴 어디에요?”

나는 방긋 웃었다.

“다른 게임 속이에요.”

“아…. 그런 거예요? 어떻게….”

“게임 오류가 영 안 풀리면 다른 게임 속으로 업어오는 거죠. 매일- 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주 있는 일이에요.”

미선 씨는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거기서 좀 나와 주실래요? 답답하잖아요.”

“아, 그래요. 어 저기, 그런데 어떻게 나가는지….”

“점프하세요, 팔짝 팔짝 뛰는 생각을 하시면.”

미선 씨는 우물 벽을 짚고 일어나 약간 뛰는 시늉을 해 보였다. 메뚜기도 그것보단 잘 뛰겠다. 아니 메뚜기는 원래 잘 뛰지. 그럼 뭐라 해야 되지? 달팽이? 새끼 곰? 아무튼.

“잠깐만요.”

나는 우물 속으로 가볍게 뛰어내려가서, 끝까지 내려가진 않고 중간 즈음에서 멈춰서 손을 내밀었다.

“손 잡고 올라오세요.”

미선 씨는 힘들어 보였다.

“이상해요. 손이 왜 이렇게 무거운지… 온몸이 다 무거워요. 그런데 여긴 어디에요? 웬 땅 속 같은데.”

미선 씨는 여러 번 손을 들어 올리려다 실패했다. 본인도 답답한지 눈을 찡그린다.

“우물 안이에요.”

“우물요? 아. 그나마 물은 없네요.”

“그래도 다행이죠? 요즘 같은 날씨에 물에 빠지기까지 하면 얼마나 춥겠어요?”

나는 어깨를 조금 과장되게 으쓱해 보였다. 이윽고 그냥 쑥 내려가서 미선 씨 옆에 쪼그려 앉았다.

“몸이 많이 안 좋아요?”

“잘 모르겠어요. 꼭 몸살 난 것처럼 으슬하고, 계속 가라앉는 것만 같고 그래요.”

“너무 걱정은 말아요, 자주 있는 일이니까.”

“아, 그런가요…. 다행이에요….”

미선 씨의 목소리는 점점 잦아들어가서, 이제는 거의 속삭이는 듯 했다. 동시에 그는 고개를 숙이고 양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대로 콩벌레마냥 스스로를 아주 작게 굴리고 굴려서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겠다는 양.

“미선 씨. 미선 씨? 잠들면 안 돼요. 잠깐만요?”

나는 박수를 몇 번 짝짝 쳤다. 미선 씨의 고개를 양손으로 들어올려도 보았지만, 본인조차 스스로 눈을 뜨는 것도 버거워 보였다.

“아까 아홉 걸음이나 떼었잖아요. 여유 리소스가 얼마 안 돼요. 지금 자면 안 돼요. 네?”

“네….”

“대답은 잘 하네. 아이고.”

나는 혀를 끌끌 찼다.

“잘 버텨 봐요. 이제 곧….”

“뭔가 많이 이상해요, 팀장님.”

“네.”

“여긴 무슨 게임이에요? 그냥 이렇게, 건너 뛸 수도 있는 건가….”

거의 다 감겼던 미선 씨의 눈이 곧 크게 뜨였다. 우물 바닥이 왈칵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아- 아으아아아아아아아!”

“괜찮아요, 진정해요.”

“아아아아아- 어- 티티티 팀장님?”

“네.”

“여긴 하늘인가요?”

“네.”

“우린 지금-.”

“네. 추락하는 중이지요.”

미선 씨는 평온하기 그지없는 나의 면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그래, 나라도 그럴 거야. 그렇다. 우리는 지금 하늘 높은 곳에서부터 푸른 바다 속으로, 대책 없이 떨어져 내리는 중이다. 바람 소리가 바쁘게 강렬하게 귓가를 스치다 못해 아예 청각을 바이패스하는 느낌이다.

“이건, 이건!”

나는 미선 씨가 끝내지 못한 말을 이어 답했다. “다른 게임이에요!”

“무슨, 무슨!”

“지난 세상이 멸망하던 순간이라는 게임인데요!”

미선 씨의 복잡한 눈빛이 허공을 바쁘게 훑었다. 아니, 백 번을 둘러본들 붙잡을 만한 게 있을 리가. 이게 무슨 햇님 달님 동앗줄 얘기도 아니고.

“옛날 사람들이 세상을 말아먹었던 적이 있었거던요!”

이쯤이면 정신이 좀 들었으려나? 나는 미선 씨의 어깨를 꼭 잡았다.

“저길 봐요!”

미선 씨는 내 시선을 따라 눈길을 돌렸고, 무너져 내리는 크나큰 흰 탑과 회색 구름, 거세게 일어나는 바닷물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아, 머리카락 때문에 정신이 없어. 묶자.

“아- 아아?”

“아틀란티스 얘기 들은 적 있어요? 레무리아 라든지?”

“아- 마도- 요?” 미선 씨는 문득 생각했다. 무슨 식당 얘긴가? 왠지 익숙한 어감인데?

“고대 문명 말이에요! 그게 알려진 게 정확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그런 비슷한 일이 전에 있긴 했단 말이죠. 세상이 세계화- 라고 하면 좀 그런가, 아무튼 대략적으로 통일적이었던 때가 있었어요. 문명도 상당히 발전했었고, 뭐 암튼 그랬었는데, 어느 날 이렇게 망했어요. 왜 망했는지 알아요?”

“그, 그걸 내가 어떻게 알-! 우리 추락 좀 그만하면 안 돼요?”

“이게 다 땅값 조작 세력 때문이에요! 망할 놈들 같으니!”

“네에?”

나는 공간을 교체하기로 했고, 그렇게 했다. 우리는 곧이어 하늘과 구름과 한없는 추락감 대신, 광택이 뻔지르 한 와인색 가죽 소파 위로 팍삭 떨어져 내렸다.

긴 침묵이 흘렀다. 한동안 나나 미선 씨나,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미선 씨는 놀란 숨을 고르느라 말이 안 나오는 것 같았고, 나는 실로 오랜만에 재방문해 보는 천사 복덕방 뒷방 비밀 사무실의 풍경에 잠시 향수에 젖느라 조용했다.

이 소파는 언제 봐도 마음에 든다. 브라질에서 공수해왔다던 소가죽 러그나 이태리에서 주문 제작해왔다던 크리스탈 샹들리에도 그렇고, 마호가니 책상을 무심히 굴러다니는 백금 만년필도 그렇다. 어디 거라더라.

– 여긴 어디….

나는 손가락으로 쉿 하는 시늉을 해 보였고, 미선 씨는 이제 어느 정도 적응을 한 것인지 입을 꼭 닫고서 숨만 쉬었다. 이윽고 사무실 문이 누가 밖에서 세게 걷어찬 것처럼 쾅 하고 밀려 열렸다. 구두 굽 소리가 따각 따각 울려퍼졌다. 어떤 두 여자가 사무실로 빠르게 걸어들어오더니, 한 명은 책상 앞에 앉았고, 다른 한 명은 책상을 퍽 하고 주먹으로 내리쳤다. 어우 아프겠다. 그때는 아픈 것도 몰랐지.

– 솔직하게 말해 봐요!

– 아니 아까부터 뭘 계속 말해 보라는 거야, 나더러 어쩌라고?

– 흉가니 뭐니, 일부러 그렇게 조작해온 거였어요? 그래놓고 나더러는 무슨 좋은 일이라도 하는 양 사기치면서 계속 그렇게 시세 차익을 챙겨왔냐고요?

– 살다보면 우연이 겹칠 수도 있는 거야, 뭐 이제 와서 새삼 그래? 너도 지금껏 일 잘 해 왔잖아.

미선 씨는 책상 앞에서 말다툼하는 두 여자를 보고는 나를 한 번 보았고, 다시 그쪽을 보았고,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켜 보였고, 다시 그 쪽을…. 아 네 그래요 저게 접니다, 과거의 저요. 저 분은 옛날에 흉가에서 처음 만났던 그 집주인 아줌마가 맞고요. 파마머리가 깔끔한 보브컷으로 변해서 못 알아볼 법도 한데 눈썰미가 좋네요, 미선 씨는. 저기 정신머리없는 샤기컷에 펜슬 스커트가 저고요. 저때만 해도 성질이 많이 급했죠, 네.

– 이미 흉가인 집을 사서 리모델링해서 파는 건 그렇다 쳐도, 멀쩡한 집에 잡귀를 심어서 억지로 흉가로 만드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요!

천사 복덕방의 사장은 피식 웃었다.

– 누가 억지로 흉가를 만들어? 솔직해지자고, 우리. 그냥 좀 상태 멀쩡한 가구라든지 자전거, 옷 같은 게 집 앞에 있다고 얼씨구나 좋구나 하고 주워가는 사람도 책임이 있는 거라고? 누가 그런 거 주워가랬나? 남의 물건일 거 아냐?

과거의 나는 자켓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서 책상에 쾅 하고 내려 놓았다.

– 그럼 이건 뭔데요?

– 그게 뭔데? 나 참, 그게 뭔지 자기가 알지 내가 알아?

나는 빠르게 상자를 열어젖히고, 안에 든 다이아몬드 반지가 반짝 하고 별처럼 빛난다.

– 전에 그 청담동 골목집.

사장의 얼굴로 매우 빠르게 그림자가 지나간다. 그 당시의 나는 눈치채지도 못했을 정도이다.

– 그 집에도 장난치려다 아무리 해도 안 되니까 아예 그 집주인 아줌마 반지를 훔쳐다 공사했잖아요?

– 아유 자기도 참,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누가 들으면 정말 우리가 무슨 능력자라도 되는 줄 알겠어?

– 그럼 아니에요? 그것도 아주 악독한 쪽으로!

잠시 적막이 흐른다. 여우같이 잘만 대꾸하던 사장은 무표정하게 다이아 반지를 바라볼 뿐이었다.

– 이제 그 집에 더는 잡귀가 낄 일 없어요. 내 손에 반지가 닿았으니까.

– 그래, 당연히 그렇겠지. 너는 뭐든 깨끗하게 씻어내니까. 아아주 쉽게.

– 귀신 장난은 그만 쳐요. 카르마 몰라요? 업을 얼마나 질 셈인데요?

– 난 그런 거 안 믿어.

– 안 믿는다고 안 지는 빚인가? 지금 뭐하자는 거예요, 알 거 다 아는 사람이.

– 다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일이야. 너야말로 갑자기 왜 이래? 세상천지에 믿을 곳 하나 없는 어린애 거둬다가 키워주니까 이제 와서 반항하는 거야?

– 지금껏 나한테 거짓말을 해서 이용해 먹었잖아요.

– 서로 윈윈인 거지, 너도 잘 되고 나도 잘 되고.

– 나는….

그리고 그때 과거의 나는, 순진하게도, 약간 울고 싶기도 했다.

– 귀신은 지금껏 다 어디서 끌어온 건데요?

– 뭐 세상에 널린 게 잡귀인데.

– 멀쩡한 집을 폭삭 망하게 만들 정도의 원귀를 어떻게 그렇게 매번 시기적절하게 끌어다 썼냐고요? 귀신이 무슨 공장제 제품도 아니고.

– 난 모르는 일이라니까?

– 이 반지를 금고에서 꺼내는데, 어떤 양갈래로 머리 땋은 애가 눈가로 지나갔어요. 걔는 누군데요?

사장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나는 반지 케이스를 닫아 주머니에 넣는다. 그때 나는 비로소 약간 이해했던 것 같다. 눈앞의 사람 좋아 보이는 사장님은 내 어설픈 추궁 따위에 양심이 흔들릴 만한 지점 따위, 아주 오래 전에 지나버렸다는 걸.

언제부터였을까.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일이 커진다면서, 이런저런 미팅에 사무실에 양복 차림의 수상한 사람들이 드나들던 때부터?

–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스케일이 큰 사업이었어요? 정말 그랬네? 어디까지 가는 거예요? 아줌마를 실장이라고 불렀던 그 새끼는 누구였는데?

– 글쎄.

권력이 있는 놈이 직접 그렇게 혼자 나다닐 리가 없으니 아마도 졸개겠지만, 전에 사무실에 찾아왔던 염소 눈깔 비리한 놈을 아줌마는 무슨 검사님이라고 불렀었다.

정확한 시기는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말은 무관심한 듯이 해도, 사장의 눈에는 어떤 자부심마저 드러나 보인다. 악으로 어떤 일가를, 경지를 이루었다는? 돈이 아주 잘 벌리는 어떤 시스템을 구축했다는?

(옛날에는 염매라는 게 있었다. 어린 아이를 유괴해다가 밥을 아주 조금만 주면서 최대한 굶기다가, 대나무 통 안으로 유인한 뒤 죽여서 혼을 돈벌이로 이용해 먹는 사악한 술수이다. 점 치는 데 사용하든지, 원혼을 보내서 사람을 아프게 한 뒤 돈을 받고서 떼낸다든지, 그런 방법이다.

아무튼 재앙을 조작해내는 방식도, 세상의 변화에 잘맞추어 달라져 온 것이다, 일테면 슈퍼 박테리아처럼.)

– 그때 나한테 그런 능력이 없었다면, 그때, 그 집에서 마주쳤을 때, 나도 무사하지는 못했겠네?

– 아이고 무슨 소리야, 넌 너무 커서 안 돼.

– 하… 기가 막혀서.

– 어린애가 아니면 소용 없거든. 고딩은커녕 중딩도 좀 늦어?

– 지금까지 대체 몇 명이나….

– 게다가 난 전혀 모르는 일이라니까? 너 혼자서 지금 열심히 추측하는 거야, 왜 나한테 그런 말도 안 되는 억측을 갖다 붙이는지 모르겠어 정말.

눈물도 흘리지 않고 우는 아이 모습이 머릿속에 어른거려서 따라가 봤더니 사무실 금고 안에 다이아몬드 반지가 있었다. 그걸 집어드는 순간 녹회색 봉고차와 흰 장갑을 낀 손, 어둔 산 속의 목재 창고가 차례대로 보였다. 귓가로 환청처럼 가냘픈 목소리가 들렸다. ‘더 많아. 다 따로 가둬. 다른 애 소리가 들리면 덜 무서울 테니까.’ 어딘데, 구하러 갈게. 뭐 보이는 거라도…. 사방이 다 까매. 언니, 나 무서워.

– 일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 그래서 그렇게 아는 사람이 많은 거라고? 다 이런 일 하는 인맥이라?

사장은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토도독 두드렸다. 그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 기왕 이렇게 된 거, 정식으로 제안할게. 우리하고 제대로 같이 일해 볼래?

– 뭐?

하도 어이가 없으니까 차라리 웃음이 나왔다.

– 장난해? 지금? 이런, 이런 짓거리를 하면서, 뭐?

– 너한테 능력이 있는 건 사실이야. 그리고 세상에는 어떤 하찮은 효험이라도 볼 수 있다면 돈을 싸들고 와서 갖다 바칠 인간들이 수두룩하다고. 사이비가 헛소리 하다가 우연찮게 뭐 하나라도 억지로 맞춰도 우르르 몰려가니까. 절박한 사정이 있는 사람일수록 돈을 크게 써. 굿 하나에 억 쯤이야 쉽지. 그게 내가 나빠서라고 생각하니? 글쎄, 돈이 얼마가 들더라도, 돈으로 발라서라도, 남의 목숨을 연료로 써가면서 자기 이기심을 충족시키려는 인간들은 또 어떻고? 그게 세상이야. 다들 서로를 잡아먹고 살아. 난 그런 세상에서 장사를 하는 거고. 너도 지금껏 내가 벌게 해준 돈으로 편안히 살았잖아?

– 아니. 개소리 하지 마.

사장은 조용히 고개를 젓는다. 그는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나를 안쓰러워하는 눈으로 바라본다.

– 여기 일을 그만두면 어디 가서 뭘 하고 먹고 살래? 하루 시간을 줄 테니 잘 생각해 봐. 너야말로 세상이 장난인 줄 아니? 게다가 너 같은 능력으로는 어정쩡하게 굴다간 더 독한 것들한테 걸려서 뼛골까지 빨리고 버려지기 딱이다? 아니, 거기까지 갈 것도 없이, 그냥 일반 사람들한테도 이래저래 시달리다 보면 인생 망가지는 거 시간 문제야. 넌 사람들이 다들 선하고 좋은 생각만 하고 산다고 생각해? 그래 뭐, 아직 어리니까.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다들 어떻게 남을 등쳐먹고 사는지 모를 수도 있겠지. 힘이 있어야 사람 대접 받고 사는 거야, 너야말로 고생을 안 해 본 것도 아니면서 왜 이리 화초같은 소리를 하니?

– 뭐가 어떻든 지금 아줌마가 하는 일은 용납할 수도 없고, 방관할 수도 없어.

– 아이고야, 참. 어쩔 건데 그래서?

사장은 의자에 편안히 기대어 앉았다. 미소 지으며 과거의 나를 바라보았다.

–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 난….

– 그래, 네가 믿을 게 뭐가 있어?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든든한 빽이 있길 해, 세상 천지에 맹한 어린 여자애 혼자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피식 웃는 사장의 얼굴 위로 흐린 하늘색 막대기가 한 칸 두 칸 지나쳐 갔다. 이 게임도 이제 전환시킬 때가 되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진한 청회색이 마치 페인트가 거세게 흰 벽에 끼얹어지듯 시야를 쓸어내며 퍼져 나갔다. 또다른 지옥으로 넘어가는 순간이다.


예전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 앞날을 미리 내다본 사람들도 있긴 있었다. 그들은 일찌기 만반의 준비를 완료해 두었고, (대륙이 붕괴해서 침몰하는 순간 피라미드를 통해 전세계로 공급되는 에너지 역시 끊기리라는 것을 알았기에, 비행 함선이 아니라 구식 방주에 식량과 종자를 저장했다.) 전쟁과 재앙이 정점을 찍기 전에 먼저 바닷가에서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땅이 무너지고 바다가 넘쳐흐르던 날, 방주는 인류의 부서지는 기억 속으로 미끄러지듯 입수해서 한없는 폭풍의 파도 한가운데로 둥실 떠올랐다.

제한된 공간에 갇힌 채 파멸의 과정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일은 어느 정도 지옥 같았고 어떻게 보면 물질계에서의 인간생 그 자체였다.

방주는 예전 세상의 생존자와 혼령과 식량과 풀과 소수의 동물을 실은 채 날뛰는 물결에 밀려 맥없이 흘러다녔고, 미친 요동이 가라앉고 장막 같은 구름이 걷히기까지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걸렸다.

나는 아주 오래 전에 그 방주 속 화로에 담겨 구출되었다. 물론 구출될 필요는 나로서는 없었지만, 인간들은 왠지 신을 그렇게라도 담아가야 한다고 믿는 듯했다.

세상이 부서져 내리던 와중에도 신전의 몇몇 신관은 내 성물과 불씨를 조심스레 화로에 옮겨 담았고, 제단을 장식했던 꽃과 보석도 함께 옮겨 와서 방주 속에 작은 임시 신전을 꾸몄다. 쓸데없는 일이긴 했다. 신은 어차피 생사에 얽매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배가 흔들리는 동안 내 발치에 엎드려 숨죽여 울거나 절을 했다. 한탄을 늘어놓거나 아예 넋이 나가 멍하니 앉아만 있거나, 무섭다며 떨다가 기절을 하거나 했다. 무슨 신이 있다면 왜 우리를 저버렸냐며 분노하던 자도 있었고 아무 말 없이 와서 그저 막막히 있다 가던 사람도 있었다.

내가 보이는 것도 아니면서, 제단이 조성되어 있다는 이유 하나로 그렇게들 찾아 들었다.

나는 본디 시간에 무심하지만 사람은 그럴 수가 없음을 안다. 육신에 갇힌 사람은 그 자체로 물지옥에 갇힌 귀신이나 별 다를 것이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파국을 싫어하며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꿈의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또다른 누구를 사랑한다고, 미워한다고, 자유롭고 싶다고, 아프다고, 외롭고 힘들다고, 어째서 인생이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고, 왜 파멸은 혹은 죽음은 어쩌면 우리의 본능인 것 같다며, 그렇다면 왜 이 따위 멸망의 짐승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에게 또한 빛으로 아득히 뒤덮이는 순간이라든지 별빛으로 아로새겨진 신전의 돌바닥에서 세계의 미래를 보는 일 같은 걸 허용하는 건지, 어째서 자기들은 이처럼 하찮으면서도 이토록 혼란스러운 존재냐면서.

오직 인간들만이 스스로를 하찮은 존재라고 여긴다. 자기들 뿐만이 아니라 세상도 동물도 식물도 바람도 다 하찮다 여긴다. 하찮은 눈으로는 모든 것이 하찮게 보일 수밖에 없으므로 아름다움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슨 일을 한들 결국은 실패해서 망하고 항상 인생을 죽음으로 끝낸다.

그리고 스스로를 슬퍼하며 신을 원망하거나 혹은 뭘 좀 바쳐서 특혜를 구하거나 죽어서 혼령 상태로도 계속 살던 삶을 이어가려 한다.

우리는, 신과 인간은 함께 방주에 담긴 채 날뛰는 바다를 떠돌았다. 떠돌고 떠돌았다. 이것은 오래 전 내가 겪은 물지옥의 기억이다. 사람들로서는 왜 자기들이 항상 파멸을 선택하는지 알 수 없어 했고, 나는 왜, 어째서, 이번의 파멸을 방지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물질계에 얽매인 존재가 아니다. 내게는 태초도 파국도 적용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건너뛸 수 있으며 시공간이 무의미하고 생사에 걸리지 않는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낼 수도 있고 산과 강을 움직일 수 있으며 운명을 조율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세상은 멸망했는가? 왜 멸망으로 치닫는 세상을 이번에는 막지 않았는가? 왜 사람들로 하여금 전쟁을 그만두게끔, 마음을 돌리게 하지 않았는가? 어째서 굳이 이렇게 일이 박살나게 해서, 번거롭게 자리를 옮겨 앉아 좁아터진 방주 속에 갇힌 채 매일같이 여러가지 우는 소리나 듣고 있어야 하는가? 방주든 세상이든 아예 떠나면 그만인 것을, 이제 와서 무슨 꼴을 더 보겠다고?

답이 없는 질문은 신의 지옥이며, 나는 바다를 통째로 지옥 삼아 한없이 쓸려다녔다. 세월은 그대로 잘만 흘러서, 방주 내에서 사람들은 어느 정도 죽거나 새로 태어나거나 했다. 비가 내리지 않는 날이면 몇몇은 방주 위로 올라가 낚시로 물고기를 잡았다. 쟁여둔 식량에는 한계가 있었다.

나의 석상 앞에서 절하거나 울거나 화내는 사람들 말고도, 매일같이 제단을 쓸어내고 닦고 향로를 청소하는 자들 역시 있었다.

누군가는 갓난 아기를 데려와서 절했다. 내 석상 앞에서 결혼을 하거나, 약속을 하거나, 장례를 치뤘다. 익숙한 일이었고 무의미한 일이었다. 어차피 이 한줌의 인간들 역시 곧 죽을 것이다. 저들끼리 싸울 것이고, 어리석은 결정을 내릴 것이고, 또다시 멸망의 길을 걸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구덩이에서 꺼내준들, 전쟁을 멈춰 준들, 거짓말하고 사기치는 행동을 고통과 흉운으로 벌준들, 계속해서 같은 죄를 지을 것이고 죽음으로 삶을 마감할 것이다. 애당초 그게 인간이므로.

그러면 신은 무엇인가? 영원? 사랑? 권력? 진리? 인간의 반대? 이상?

(물론 이것 역시 게임에 불과하다. 과거에 겪었던 수많은 지옥 중의 하나일 뿐이고, 여기에 굳이 다시 과하게 몰입할 필요는없겠지만.)

나는 미선 씨가 방주가 신기하다면서 돌아다니는 것을 한동안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는 맨 윗층부터 아랫층까지 실컷 구경한 다음에야 제단 곁으로 돌아왔다.

– 정말 신기해요, 이런 배가 다 있다니.

– 그렇죠? 이게 가다 가다 한국까지 간답니다.

– 아 정말요?

– 왜 그, 남해안 어딘가였나 그래요. 그래서 칠가야 근처였나….

– 칠가야요? 금관가야 할 때 그거라면 육가야잖아요. 아닌가?

– 원래는 칠가야예요. 칠성을 본따 세운 나라거든요. 한없이 바다를 떠돌다 마침내 땅을 발견한 사람들이 너무 감격한 나머지 모래에 입맞추며 가이아의 이름을 불렀어요. 하긴 이런 건 교과서에 안 나오겠죠.

– 그럼 그래서 가야인 거군요, 가이아라서…. 그런데 답은 찾으신 거예요?

– 답요?

– 신이란 뭔가 하는 질문의 답이요.

– 아아.

나는 방긋 웃었다. 이제 다시 다른 지옥의 게임으로 건너갈 때이다.


검푸르게 날뛰던 파도 위로 적갈색 비늘이 켠켠이 쌓여 가다가, 줄기 줄기로 갈라져 나가며 솔잎과 솔방울을 그려낸다. 정신 사납게 출렁이던 방주의 맨바닥은 곧 안정된 황토색 흙으로 변화했고, 간혹 바위며 나뭇가지 등이 나타났다.

이곳의 공기는 한결 가라앉은 느낌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영 정신이 없었는데, 이제는 좀 낫네.

나는 미선 씨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그는 이전 게임에서 꼭 붙들었던 라피스 재질의 쟁반에 아직까지 얼굴을 푹 파묻은 채였다.

– 미선 씨. 미선 씨?

– 네…?

나는 미선 씨의 손에서 살살, 그러나 단호히 쟁반을 빼내어 뒤로 멀리 던졌다. 라피스는 솔잎 사이로 파랗게 녹아 사라졌다.

– 괜찮아요?

– 잘 모르겠어요….

– 그럼 괜찮은 거예요.

– 그게, 전….

미선 씨는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여긴 어디죠? 난, 아, 그냥 내 할 일만 마무리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세상의 멸망이니 땅값 조작 세력이니 이게 다 뭐예요. 하나도 모르겠어요. 이게 왜 이렇게까지 되어야 하는 건지.

– 어쩔 수 없어요, 부동산 작전세력은 세상과 함께 그 수단이 진화해 왔으니까요.

– 진화요…?

나는 웅크려 앉은 미선 씨 곁에 같이 쪼그려 앉았다. 풀 냄새가 일어났다 가라앉았다.

– 옛날에는 신전을 더럽히고, 전쟁을 일으켜서 땅값을 떨어뜨리려다 그게 지나쳐서 멸망까지 갔었거든요. 대륙이 통째로 침몰하고 대홍수까지 겪고 나서는 그쪽도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방법을 바꿔서 힘없는 어린애들을 유괴해서 저주술의 재료로 사용해서 왕궁을 뒤흔들고 땅을 입맛대로 주고 받았고요. 그리고 요새는 게임 산업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어요.

– 게임...에까지요? 왜 그런….

– 지금은 게임도 디지털 부동산이나 다름없으니까요. 그들이 타겟으로 삼은 건 [월척] 낚시터뿐만이 아니에요. 더 많고, 수법도 다양해요. 그래서 우리도, 우리는, 음.

나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 마이너스 곱하기 마이너스는 더하기가 되잖아요?

– 그렇...죠?

– 그래서 우리는 그, 재앙을 조작하는 부동산 작전세력을 작전해야겠다고 결정내린 거예요.

– 그…아아?

– 왜냐면 빛은 빛이고 그림자 역시 빛이니까요.

– 아…네….

– 저기를 봐요.

미선 씨는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무 뿌리가 계단처럼 층층이 엮인 산길이 솔숲 사이로 천천히 뻗어 나갔다.

– 저게 뭔데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선 씨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나와 산길을 번갈아 보았다.

– 조 팀장님? 저게, 저게 뭔데요?

여전히 아무 대답도 없자, 미선 씨는 떨리는 손으로 내 무릎을 살짝 때렸다. 아까 방주 속에서의 모습과는 또 딴판이다. 어쩌면 스스로도 본능적으로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서 그런 걸 수도 있다.

– 전, 아니에요. 전, 이런 곳은 처음이에요. 뭐라고 좀 해봐요. 팀장님?

나는 아무 말 없이 미선 씨의 반 곱슬머리를 살살 손으로 빗어 내렸다. 귓볼까지 닿던 짧은 머리카락은 내 손가락을 따라 슬슬 길어지고 길어져서, 어깨를 조금 지나칠 정도가 되었다. 작은 빗을 생각해내서 미선 씨의 밝은 갈색 머리칼을 양갈래로 나누어 땋아내리면서도, 나는 미선 씨에게 아무 답도 해주지 않았다.

멀리서 두런 두런 하는 사람 말소리가 들렸다. 미선 씨와 나는 미동도 없이 그저 나란히 쪼그려 앉은 채, 발자국 소리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들었고, 곧이어 청바지 멜빵 차림에 흰 장갑을 낀 두 건장한 남자가 푸대 자루 같은 것을 하나씩 어깨에 이고서 나타나는 것을 그저 바라보았다. 둘은 일 끝내고 어디 가서 술을 마실 지 의논하는 것 같았다. 나는 미선 씨가 멍하니 진녹색 푸댓자루를 응시하는 것을 보았고, 두 남자가 굽어지는 산길 너머로 사라진 이후로도 그쪽에서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것을 또한 보았고, 그만 몸을 펴고 일어나 섰다.

그리고 방금 지나간 사람들처럼 산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 팀, 팀장님?

뒤에서 미선 씨가 주저하며 불렀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 팀장님!

미선 씨의 목소리는 더욱 다급해졌다. 잠시 후 풀이 어지럽게 밟히는 소리가 나더니, 뒤에서 미선 씨가 뛰어와 내 팔꿈치를 잡았다.

– 어디, 어디 가세요? 안 돼요! 저긴 가면 안 되는 곳이에요!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 걸었다. 미선 씨는 거의 질질 끌리다시피 하며 따라왔다. 이제는 거의 울음이 나서, 말이 계속 뚝뚝 끊겼다.

– 안된다니까요! 저긴, 저긴!

산길은 가파르게 올라가다가, 굽어지다가, 갑자기 급격히 경사지며 떨어져 내려갔다. 급경사라서 금속 손잡이와 계단까지 이미 설치되어 있다. 아까 봤던 두 남자는 이미 계단을 다 내려가서 공터 구석진 곳의 창고 속으로 막 들어서는 중이었다. 이제 미선 씨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내 팔만 붙잡고 바들바들 떨었다.

나는 미선 씨를 부축해가며 계단을 하나, 둘 내려갔다. 계단이 끝나고, 공터를 가로지르는데 운동화 밑에서 자갈 부딪기는 소리가 끅끅하니 지저분하게 날카로웠다. 우리 앞에서 낡아빠진 목재 창고의 문은 지우개로 지워지듯 투박히 투명해졌다.

창고는 겉에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컸다. 목재는 창고 입구 쪽에 눈속임 용으로 한 칸 쌓인 게 전부였고, 그 뒤로는 낡은 냉장고가 줄지어 있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냉장고들은 세워진 게 아니라, 전부 눕혀져 있었다.

멀리서 쿵, 쿵 하는 육중한 소리가 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까의 두 남자가 손을 탁탁 털며 창고 뒷편에서 나와 나와 미선 씨의 몸을 공기처럼 통과해 지나쳐 갔다.

나는 창고 바닥 쪽을 내려다 보았다. 먼지 쌓인 위로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혔는데, 대강 무엇이 예전 것이고 새것인지 분간할 수 있었다. 미선 씨를 팔꿈치에 매달고서, 나는 가장 최신 발자국으로 보이는 흔적을 따라서 창고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다.

창고에는 별다른 조명도 창문도 없었다. 어둠은 점차 물질처럼 무겁게 공간을 메꾸어 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과 발자국, 먼지, 벽과 냉장고의 경계까지 흐릿해져서 세상이 통째로 하나의 어둠이 되었다.

뒤에서 미선 씨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팀장님, 전…. 이건 아니에요…정말….

밝든 어둡든 별 문제는 아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이미 안다. 나는 영원히 이어지는 것만 같은 어둠 속 어딘가에서 문득 멈추어 섰고, 손을 뻗어 냉장고 손잡이를 잡았으며, 당겨서 한 번에 활짝 열었다. 그리고 푸대자루의 매듭을 풀어헤쳐서 안에 웅크려 있던 아이를 끌어냈다.

– 팀장님….

– 미선 씨.

나는 머리칼이 유난히 밝은 갈색인, 이제 일곱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양갈래 땋은 머리의 여자아이를 끌어 안았다. 품으로 숨소리와 심장 고동이 전달되어 왔다.

– 오래 걸려서 미안해요. 하지만 이제라도 찾아 왔어요. 꼭 구하러 오겠다고 했던 말, 기억해요?

– 전….

나는 어른인 미선 씨가 창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것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 이건…. 여긴….

아이인 미선 씨의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앞머리가 젖은 것을 조심스레 떼어내니 눈꼬리를 움찔 떨며 옆으로 돌아 안긴다. 정수리 근처에서 콩가루 같이 달고 고소한 향기가 흠뻑 올라왔다. 그럴 만도 하다, 이 나이면 아직 아기니까.

오랜 침묵 후 뒤에서 잔뜩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전 미선 씨가 아니었던 거죠?

– 글쎄요.

– 아주 오래 전에, 전, 그 애였던 건가요?

– 기억이 나요?

미선 씨가 아닌 미선 씨는 먼지 쌓인 바닥에 이마를 쿵 박았다.

– 전, 죽은 지 오래인 거잖아요. 안 그래요? 그 조작인지 뭔지 하는 놈들이 절 옛날에 유괴해다가 염매? 그런 걸 저한테 한 거잖아요? 그래서 그 낚시터 게임에 절 심어둔 거 맞죠? 그래야 해결 불가능한 버그로 가격이 떨어진 게임을 그들이 싼값에 사들일 수 있을 테니까. 그, 무슨 재앙 세력인가 하는 자들이. 아니에요?

– 미선 씨.

– 아, 그렇다고 정말 아니라고 해주지는 말아 주세요. 우린, 아니, 저는. 저는요.

미선 씨는 느릿느릿 일어나 앉아, 흰 손을 내밀어 잠든 어린 자신의 뺨을 쓰다듬었다.

–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어요. 전 지금까지 제가 무난한 집에서 자라나 학과 과정을 끝내고 취직했다고 생각했는데, 아.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선 씨는 허탈하게 웃었다.

– 그런데요, 지금 막상 제가 어느 학교를 다녔었는지, 어릴 적 집이 어디인지 생각해보려 하니까. 음. 그냥 텅 빈 듯 기억이 나지 않아요. 하다못해 매일 퇴근 후 돌아갔던, 그랬다고 생각해온 제 아파트가 어딘지도 모르겠어요. 제 이름은 뭔가요? 미선이 제 이름이 맞긴 해요? 전 대체 얼마나 오래 이렇게, 저놈들한테 이용당해 온 걸까요? 제일 끔찍한 건, 전, 제가 이런 상태라는 걸 알지도 못한 채….

– 그래요. 그게 그들이 일하는 방식이니까. 재앙이 알아서 일어나도록 섬세하게 여러 조건들을 맞춰두는 거죠. 미선 씨 잘못이 아니에요.

– 전, 이제야 이 게임이 어떤 건지 약간이나마 알 것 같아요.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고요, 이제서야 뭐랄까, 꿈이 꿈인지도 몰랐다가 이제서야 이 꿈에서 깨어난다는 게 어떤 건지,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아요. 그래서. 아. 이걸 뭐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지만….

나는 미선 씨가 어떻게 흘려야 할 지 모르는 눈물을 내 눈으로 대신 받아 턱끝으로 떨구어 내렸다.

– 이게 그 천도제라는 건가요? 아마 그런 거겠지만. 그래도….

미선 씨의 반투명한 손끝이 내 뺨을 적신 스스로의 눈물을 닦아 냈다.

– 팀장님은, 이렇게나 수많은 게임을, 플레이할 필요도 없는 지옥들을 절 업고 다 통과해 오신 거잖아요. 왜 굳이 이런 수고를 하시나요? 어떻게 하면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는, 해내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 건데요? 난. 전 정말 무서웠고…. 아무리 소리치고 몸부림쳐도 아무도….

나는 과거의 어린 미선 씨의 등을 덮은 현재의 미선 씨의 손 위로 내 손을 얹었다. 잠시 후 그는 숨을 길게 몰아쉬며 가까스로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 이렇게나 많은 아이들이 납치되었다니, 믿을 수가 없어요.

– 안타깝지만 현실이에요.

– 애들을 이런 데다 가둬놓고…. 나쁜 놈들.

– 그런 일이지요.

– 다 무너뜨릴 수는 없나요? 한번에 몽땅 일망타진 해버리는 거예요.

나는 모처럼 싱긋 웃었다. 옛날의 나도 딱 그런 소리를 했었다.

– 그러기에는 암세포처럼 여기저기 죄다 엮여 있어요. 그래서 우리도 계획을 복잡하게 세워놓고 있고요. 심정은 이해하지만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미선 씨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저도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할게요. 귀신이니까 월급도 안 주고 막 부려먹어 주세요.

– 우리는 그렇게 양심없는 회사는 아니랍니다. 그리고 미선 씨.

– 네…. 네.

– 미선 씨는 귀신이니까 일단 저승부터 가야지요.

– 아…. 그런 건가요.

– 네. 우리 일을 돕고 싶다면 저승에서 정식으로 허가를 받고 다시 와야 돼요. 자격증 따서.

미선 씨는 약간 울상이 되었다.

– 죽어서도 자격증 공부를 해야 하다니.

– 그렇죠?

품속의 어린 미선 씨가 끄응 하더니 옆으로 돌아 누웠다. 나는 그의 등을 토닥였다.

– 이제 우리 그만 가요.

– 네…. 저도 이젠 더는 여기에 묶여있고 싶지 않아요.

– 그럼 절 따라하세요. 아홉, 여덟.

– 아홉, 여덟.

– 일곱, 여섯, 다섯, 넷.

– 일곱, 여섯 다섯 넷.

– 셋, 둘, 하나.

– 셋… 저, 팀장님?

– 네, 하고 싶은 말 다 하세요.

– 고마워요.

– 저도요.

– 제가 뭘 했는데요?

– 기다려 줬잖아요, 지금까지.

– 아. 아니 뭐 그 정도야 별 일도 아닌데요 뭐. 그런데 또 궁금한 게 있는데요.

– 네.

– 카운트다운을 다 하면 어떻게 되는 건지 궁금해서요…. 무슨 일이라도 나나요?

나는 나도 모르게 웃었다. 이런 질문은 또 처음이야.

– 이를테면 게임에서 로그아웃을 하게 되지요.

– 아, 그렇구나. 아, 그런데 우리 몇까지 셌었죠?

– 준비되셨으면 따라 하세요. 또 물어볼 거는 없고요?

– 네….

– 자 그럼.

– 아, 저기, 막 생각났어요! 아까 궁금하던 거요. 그래서 신이란 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그때 찾으셨어요? 저도 궁금해져서요….

– 아, 그거요. 보여줄게요. 따라하세요, 둘, 하나, 땡!

– 둘, 하나, 땡!

푸른 물결이 삽시간에 사방의 어둠을 덮어 씌우며 솟구쳤다.


세상은 이미 완전히 또 바뀌었으므로, 무릎까지 차오른 바닷물은 더위로 인해 적당히 따뜻했고, 바람은 더웠으며 햇빛은 시야를 하얗게 지워나갈 정도로 강렬히 꽂혀 내렸다.

바다에서 뻗어오르는 하늘은 천만 필의 제각기 푸른 비단이 함께 휘날리듯 출렁였다. 미선 씨는 하늘과 바다를 한데 엮어 일렁이는 모든 종류의 푸름과 금빛 반사광의 장관을 하염없이 멍하게만 바라보다가, 문득 게임 오피스의 한 면을 가득 채웠던 디스플레이 화면을 떠올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어쩌면 그런 거구나, 세상이란.

나는 해안선의 한 켠을 가리켜 보였다. 미선 씨는 그리로 눈을 돌렸다. 그것이 무슨 신호라도 된다는 양, 겹겹이 쌓인 푸른 하늘의 비늘들이 수평선을 기준으로 일제히 검은 뱃살을 드러내며 뒤집어져 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상의 저 멀리로 깊은 밤이 번져갔고, 그만큼의 바다는검게 파여 들어갔다.

나는 미선 씨의 손을 잡고 공중으로 날아 올랐다. 햇빛은 우리의 어깨를 희게 스쳐지나가다가 밤의 경계에서 종잇장처럼 잘려나가 끊겼고, 과거의 공기는 부담스럽게 잠잠하고도 치밀했다.

어디까지 봤더라, 아, 대륙 붕괴에 홍수에 방주에 담겨 기약 없이 도피하던 때였지. 나는 기억의 시간선을 앞으로 빨리 잡아 당겼다.

방주는 오랜 여정 끝에 결국 견디지 못하고 부서졌다. 언제 일어난 일인지는 잘 모른다.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히 나더니만 잠깐의 소란과 맥빠진 비명 소리 몇 줄기가 그 뒤를 이었다. 천장이 서서히 기울었고 물이 융단 풀리듯 바닥을 쓸어나갔다.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은 포기한 상태였던 것 같다. 그런 종류의 묵묵한 고요함이 있다.

사람들은 윗층으로, 나중에는 뚜껑을 열어젖히고 방주의 지붕으로 점점이 올라가 앉았다. 처음에 조금 놀랐던 것과는 달리, 이제는 참참히 가라앉은 분위기와 숙연한 표정들이었다. 다들 손을 잡거나 아이를 끌어안거나 하고서 어둔 바다나 하늘이나 발밑을 볼 뿐이었다.

나는 제단에 앉은 채 차오르는 물과 떠다니는 향로며 온갖 잡동사니를 멀거니 구경했다.

이제 곧 모든 것은 가라앉을 것이다. 옛날 세상과 그 흔적들, 유민과 기억과 방주는 깊은 물 속으로 무너져 내릴 것이고 그러면 더는 그 누구도 내 발치에 몸을 던지며 울거나 소원을 빌거나 꽃을 바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더는, 인간들은 느끼지도 알지도 못하는 손을 뻗어 어린 아이의 열을 식히거나 보관된 식량의 양을 늘리거나 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죽어 없어질 인간들의 심장이 두려움을 못이겨 터지든, 서로 붙잡고 싸우다 누가 누굴 죽이든, 죽임 당하든, 판결을 내릴 일도 없을 것이다.

세상은 왜 멸망해야 했을까.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식으로 넘어가는 것은 너무 쉽고, 어딘가 수상하게 미온하다. 엄연히 있는 이유를 애써 보지 않고 넘어가려는 건 아닐까? 어쩌면 세상이 실패한 이유는 내가, 그리고 인간들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각자의 물지옥의 경계를 넘어서기는커녕 거꾸로 수몰당했기에 이러한 결과를 자초한 게 아닐까.

이 멸망이 지당한 것이라면. 그렇다면 더 무엇을 생각한들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더 떠돌아 무엇하고, 다른 세상을 기다려 무엇한단 말인가?

제단을 장식했던 마른 꽃잎이 물결에 휘말려 떠다니다 천천히 가라앉았다. 달빛이 편편이 내리는 지점마다 검은 물은 줄기 줄기 푸르게 물들었고, 어떻게 보면 물의 비늘 몇몇이 약간 떠오르는 것처럼도 보였다. 물도 날 수가 있다니. 아, 맞아. 밤에는 달이 뜨지. 별도 나고. 빛에 젖으면 물도 떠오르는구나.

나는 천장 뚜껑이 열린 틈새를 통해 융단처럼 굴러 내리는 빛을 잠시 바라보다가, 날아서 방주를 통과해 올라갔다.

밤 날씨가 맑은 것은 좋은 일이었다. 모든 게 끝나가는 와중에 날씨마저 궂었다면 얼마나 정신 사나웠겠는가. 바다는 잘 무두질된 가죽처럼 순하게 웅크린 채 잔잔했고, 바람 고요했으며 초승달에서 느리게 흘러내리는 금색 광채의 질감은 꿀처럼 무거웠다. 시간은 거의 멈춘 것처럼도 같았다. 신과 인간은 한없이 이어지는 밤하늘의 디스플레이를 따로 말없이 올려다 보았고, 그 어둠과 달과 별빛으로 범벅된 풍경 앞에서 이제 더는 구원이든 뭐든 바라는 일이나 알 수 없는 질문의 답을 탐구하는 일, 세상이 망하기 전에 휘황하던 황금빛 도시나 높은 탑, 둥글고 흰 비행선, 재생술을 통해 몇 백년이고 육신을 매끄럽게 젊게 유지하던 기술이나 도시를 굽어보던 신전에서 매일 아침 쏟아져 내리던 광채의 물결 등은 마치 아침 햇살을 맞아 눈 뜨면 이미 한움큼 증발해 오르는 한여름밤의 꿈만 같아서, 어쩌면 이 지옥은 애당초 지옥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게끔 했다.

하늘이 어두워지면 별이 뜬다. 나는 지구의 구체까지 닿아 와서 빛나는 수많은 별들을 새삼스레 바라보았다. 어둠은 어쩌면 어두운 것만은 아니다. 지구가 돌아 돌아 스스로의 그림자로 들어가서 밤을 겪어야만 저 하늘에는 별의 강이 가로지르고 별의 탑이 일어서며 별의 나라와 칼과 향로와 꽃이 피어 오른다.

인간들은 지구가 홀로 둥글게 돈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그런 것만은 아니다. 지구는 지구에서 보이는 모든 별들과 함께 돌아가며, 함께 날아가고, 같이 세계의 한 축을 담당한다. 빛은 우주의 핏줄처럼 지구를 다른 세상들과 연결한다. 시공간은 꿈의 뜰채이며, 뜰채 그물의 가로줄 세로줄 안에 들어 갖힌 인간들은 자신이 타인과 남이라는 착시 현상에 평생을 시달리며 산다, 세상에 자기 아닌 남이 있을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그래서 힘과 자신은 따로니까, 힘을 구하려면 물질을 불태워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스스로의 다른 몸을 불태우고, 그래서 당연한 결과로 자신도 멸망을 맞으며, 왜인지 모르고 죽어서도 자기가 여전히 자기뿐이라고 믿는 채로 스스로 지어 둔 지옥에 가고 저승에 가고 다시 육신을 받아 태어난다.

별은 어둠 속에서 빛난다.

나는 옹기종기 모여 앉은 인간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는 꿈이구나. 물론 그들이 내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리는 없었지만, 어차피 상관 없는 일이었다. 너희는 꿈을 꾸는 나로구나. 그런 것이 인간이라면, 신은 꿈이 아닌 것이겠지. 너희가 그림자라면 나는 빛이겠고, 우리는 제대로 스스로를 이루어 내지 못했기 때문에 한 세상을 어설프게 끝장냈구나. 그래서 이 꿈도 이렇게 몰아치면서 끝나겠구나.

별은 스스로 빛나지만 지구는 그럴 수 없다. 그러나 매일 밤, 지구의 어둔 껍질에도 셀 수 없는 별빛이 터질 듯 들어차는 연유는 또 무엇인가.

나는 천천히 방주의 지붕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 바다 위로 내려섰다. 그래서 이 뜰채에 걸린 돌멩이의 하늘은 다이아몬드처럼 매일 밤 눈부시게 빛나는구나. 그렇게 빛도 빛이고 그림자도 빛이구나.

무언가 비로소 끝났다는 것을 느낀 것은 그때였는지도 모른다. 어떤 질문이, 어떤 걸림이, 어떤 지옥의 매듭이 발밑에서부터 층층이 낚시 그물이 뜯어져 나가듯 떨리며 끊겨 흩어져갔다.

그건 묵묵히 버티지 않고서는 신이라도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영원만으로는 완전하지 않다.

눈부신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바다의 표면에 일렁이며 명멸하는 달빛이나 별빛 위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육지는 인간의 기준으로도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다.

손짓할 필요도 없이, 방주는 내 걸음걸이에 속도를 맞추어 은근히 물에서 떠올랐다. 부서진 방주 밑바닥에서 물이 한가득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고, 방주의 천장에서는 놀란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방주는 뱃속에 들어찼던 물을 다 쏟아내고도 아주 느리게 평형을 이루어냈고, 그리고 역시 아주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것이 저들이 비행선을 타 보는 마지막 밤이다. 맨땅에서 처음부터 다시 문명을 시작해 나가야 할 사람들에게 내리는 선물이랄까.

어차피 매우 느리게 일어난 움직임이라 누구든 저 위에서 균형을 잡을 여유는 충분했다. 그래도 혹시 둔한 놈 몇몇이 어떻게든 바다로 떨어지지 않을까 싶어서 배를 공중에 띄운 후로도 잠시 두고 보았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웬일로 인간들이 내 일을 간단히 만들어 주지. 철 들었나? 아이고, 어느 천년에.

나는 바다 위를 총총히 밤새 걸어서 근방의 마른 땅까지 쉼없이 갔고, 방주는 내 뒤를 따라 맑은 밤하늘을 꾸준히 날아서 가로질렀다. 우리가 해변가에 다다른 것은 새벽도 아침도 다 지나서 대낮 때였다. 나는 돌아서서 방주를 모랫가에 (역시 매우 천천히) 착륙시켰다.

무릎까지 차오른 바닷물은 더위로 인해 적당히 따뜻했고, 바람은 더웠으며 햇빛은 시야가 하얗게 지워질 정도로 강렬히 꽂혀 내렸다.

사람들은 한참은 지난 후에야 조심스레 방주에서 미끄러져 내려왔다. 처음에는 망설이듯,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믿기가 힘들어서인지, 어정쩡하게 해변으로 걸어나왔다. 자기 손으로 모래를 만지면서도, 파도에 젖은 옷을 보면서도 멍한 표정들인 것이, 영 실감이 안 나는 모양이었다.

그들의 감정은 아주 천천히 일어났다. 기쁨과 슬픔은 번갈아 일렁이며 투명한 파도처럼 사람들 사이로 번져 나갔고, 누군가는 땅을 어루만졌고, 흙을 쥐었고, 모래에 입맞추었다. 멍하니 해변에 앉아만 있는 사람도 있었고, 말없이 눈물만 줄줄 흘리는 이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어린 아이들은 오가는 파도를 쫓고 쫓기며 바쁘게 뛰놀았고, 갈매기를 놀래키거나 모래로 탑을 쌓았다.

사람들은 일단 당분간 거처는 방주로 삼기로 했다. 땅은 천천히 탐사해 나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기운이 그래도 아직 남은 이들이 힘을 합쳐서 먼저 땅을 파서 화덕 자리를 마련했고, 다 죽고 하나 남은 신관은 품의 황금 단검과 옥구슬 꾸러미를 불자리 곁에 깊이 파서 묻었다. 그는 방주 어딘가에서 용케 찾아낸 녹슨 화로를 머리카락으로 문질러 닦은 후 화덕 자리에 앉혔다. 처음으로 지핀 불 앞에서 사람들은 신의 이름을 부르며 엎드러졌다.

어머니, 영원의 어머니여. 땅과 하늘과 생사와 멸망과 구원의 어머니여. 우리는 이제부터 이 땅에 태어나서 광채를 심으며 살아가다가 다시 땅으로 돌아가리다. 생사에서 도망치지 아니하리다. 나의 죽음을 면하려고 남을 대신 죽이지 않으리이다. 스스로를 가라앉히지 아니하리다.

사람들의 붉고 거친 뺨은 눈물과 모래 투성이였다.

바람 부드러워 불길 잔잔했다.

나는 화로의 불 속에 들어가 앉아 보았다. 이 또한 광채였으며 빛이었다.

지구는 스스로 빛나지 않지만, 불을 지필 수 있다. 불도 사람도 결의도 영원하지는 않다. 저들은 지금이야 저렇게 비장하게 약속하지만, 울컥이는 감정도 눈물도 그 어떠한 거창한 경이감도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다. 다짐을 일생 지키는 사람은 이미 드물고, 다짐이 대를 이어 지켜지는 일은 더더욱 드물다. 본디 그런 것이 인간이므로.

그러니 내가 직접 불이 되어야겠다.

아마도 그때 그렇게 결정했던 것 같다. 나는 신과 인간, 영원과 찰나, 별과 지구, 빛과 그림자의 경계를 지워낼 것이라고. 다음 세상에서는 인간의 자궁을 빌어 육신을 입고 태어나, 사람들처럼 윤회를 거듭하며 생사를 온몸으로 겪어내리라고. 고통과 노화와 호흡과 무거움에 짓눌리는 일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며, 그러다 지나친 괴로움을 견딜 수 없어 부서지거나 스스로를 배신하게 되더라도, 구차함이든 비겁함이든 있는 그대로 통과해 나가서 영원도 순간도 포기하지 않은 채 빛도 그림자로도 닿을 수 없는 곳까지, 또한 그 너머로, 다시금 끝없이 세계를 통째로 이끌어 나가리라고.

(나는 미선 씨를 돌아 보았다.

– 이제 준비가 되었어요?

– 네, 아마도요….

– 또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요.

– 아, 이제는 그다지...궁금한 게 없어요.

– 잘 생각해 봐요. 나중에 생각나면 아쉬우니까.

– 아녜요, 정말요. 이젠 막연하지만 아예 궁금하다는 느낌 자체가, 음, 사라져버린 것 같아요.

미선 씨는 허공을 올려다 보다가 고개를 살살 저었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잠깐 흘러내린 눈물은 별빛처럼 반짝였다.

– 저는요, 더는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아요…. 그 무엇도, 알 필요가 없는 것만 같아서…. 그런 기분이에요.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잡은 손에서부터 팔과 어깨로, 머리카락으로 다른 쪽 어깨로 손가락으로, 나의 광채는 미선 씨의 꿈의 몸을 밝히며 눈부시게 물들여 갔다.

– 그러면 이제 다 된 거예요.

– 아, 알려드릴 게 있긴 해요.

– 뭔데요?

미선 씨는 화사하게 웃었다. 그는 더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므로.

미선 씨가 눈을 감을 때 나의 눈도 함께 감겼다.

눈을 감아도 눈부심은 여전했으며, 자타의 경계는 한 번 거세게 몰려왔다 돌아가는 파도가 남긴 흔적과도 같아서, 신이 인간을 저버리지 못하는 것은 곧 스스로를 저버리지 못하는 일이나 다름없는 까닭이었다. 우주의 별들이 지구를 광채의 그물로 떠내어 띄워가는 것 역시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어쩌면 신은 신이 아니고 인간은 인간이 아니며 밤은 밤이 아니고 지축이 어설프게 기운 푸른 물지옥은 기실 애시당초 물지옥이었던 적 없으므로.)


조 팀장은 홀로 저수지 낚시 의자 근처로 돌아왔다. 그는 일단 버드나무를 싹 들어내고 하나만 남기기로 했다. 문제의 버그 발생 지점의 수심을 두 뼘 정도로 팍 올렸고, 금색 갈대를 강변에 한가득 깔았다. 그러니 시야가 환하게 탁 트이는 것이, 전보다 훨씬 나았다. 마지막으로 그는 게임의 하늘 배경에 실시간 천체 구조를 덧씌웠고, 게임 옵션에서 유저가 북반구/남반구 천체를 선택할 수 있게 했다.

헤아릴 수 없는 별빛이 저수지의 수면에 반사되는 광경은 게임 속에서도 속 시원하게 아름다웠다.

그는 마지막으로 게임 장비를 다 걷어넣고 옵션으로 들어가 로그아웃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윽고 게임의 종료음과 함께 흰 쇼룸 한가운데서 눈을 떴다.

게임 디스플레이 쇼룸은 사방으로 온통 흰 벽과 천장 덕분에 마치 커다란 냉장고 내부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렇게 모든 게 다 백색이라서인지, 바닥에 깔린 현란한 꽃무늬 유아용 놀이매트가 유난히 더 튀어 보였다.

(이 게임의 사장이 어느날 선물이라고 배달 온 매트를 공짜라고 덥석 받아서 쇼룸에 깔은 것이다. 누가 보냈는지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하긴, 설령 확인했어도 발신인의 이름은 게임엑스포 협찬 이라든지 뭐 그런 애매한 것이었겠지만.

낚시터 게임은 주로 어른들이 관심을 보이는 종목인지라, 쇼룸에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이 심심할까봐 놀이 매트와 애들용 책상, 인형 등 장난감을 준비해둔 건 좋은 아이디어이긴 했다.)

조 팀장은 천천히 일어나서 벽에 붙은 흰 책상으로 걸어가 맨 아랫 서랍을 열었다. 책상도 아동용이라서인지 크기가 은근히 작아서, 맨아래 서랍을 열려면 몸을 많이 굽혀야 했다. 아무튼 서랍은 열렸고, 그는 심 풍 대리의 잃어버린 사원증을 꺼내서 앞뒤를 확인한 뒤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젖혀 역시 흰 천장의 어느 지점을 올려다 보았다. 그 너머로는 하늘이 있었고, 푸른 하늘 흰 구름 대기권 너머로는 별들이 쟁쟁히 빛나는 모습이 층층이 순서대로 열리듯 넘겨 보였다.

세상은 진실로 끝이 없는데 이런 진리 속에서 할 일도 없어 디지털 땅값이나 조작해 보겠다고 애쓰는 잔머리라니.

절로 웃음이 나오는 이런 기분, 얼마나 좋은가. 그래 이맛으로 이 일 하지.

“뭘 할 수 있냐고?”

그런 질문이 나오는 것도 이해는 간다. 정말로 알 길이 없을 테니. 불이 하는 일을 그림자가 어찌 알랴. 옛말에도 그런 비슷한 표현이 있던 거 같은데, 뭐였지? 뭐 굳이 알아서 뭐하겠냐만.

조 팀장은 쇼룸의 문 앞으로 가 섰고, 자동문은 개폐 버튼이 눌리지 않았음에도 자동으로 열렸다. 그가 문 밖으로 나서서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서 보행로에 막 다다랐을 때쯤 자동문은 역시 스스로 알아서 느리게 닫혔고, 그날 이후로 무인관리 자동현실 낚시게임 [월척]의 원인모를 버그 문제는, 다시는 반복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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