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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lza2 환상소설

2018.04.01 00:0004.01

환상소설

pilza2

이제 깊은 밤이 되었다. 지친 육신에게 안식을 주는 시간, 모든 삶의 고통과 아쉬움을 사그라지는 태양과 함께 지평선 너머로 배웅하고 내일에 대한 일말의 기대와 불안을 품은 채 어둠에 삼켜지는 숙명과도 같은 삶의 또 한 단면.

밤은 육(肉)이 아닌 영(靈)을 위한 공간이다. 영원할 것처럼 들떠서 서커스의 광대들 마냥 흥청망청 떠들어대며 돌아다니던 거리의 사람들도 죽음의 여신 품에 잠든 시체처럼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누워 있고, 대신 빛을 피해 숨어있던 모든 은밀하고 음침한 존재들이 하나둘 조심스레 움직이기 시작하는 때다.

깊은 동굴 속에 또는 잎사귀 아래에 숨어있던 숲의 정령들이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 이슬방울을 뿌리며 날아다니고, 벌레들은 그런 정령의 춤에 맞추어 흥을 돋워 주려는 건지 자신들의 노래를 위해 적막이 존재하기라도 하듯 힘차게 울어댄다. 화산 속에서 끓어오르는 용암의 불꽃보다도 밝은 빛을 두 눈에서 뿜어내며 야행성 짐승들은 사냥을 시작한다. 인간의 손길로는 만들 수도 없고 닿을 수도 없는 땅속 깊이 지령(地靈)이 잠든 동굴 속에 사는 난쟁이들은 자신들의 어머니 신을 찬양하며 동굴의 곳곳을 등불로 밝히고 자기들만의 축제를 시작한다.

그들은 역사가 환한 태양 아래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안다. 진정한 세상의 이치는 어둠 속에서 이끌어왔음을 이해한다.

밤은 사색하는 사람, 꿈을 꾸는 자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모든 철학자, 시인, 마법사, 현자, 수도사들을 위한 시간이다. 비록 사악한 음모를 꾸미는 야심가들과 타인의 금붙이나 집어갈 요량으로 남의 집 담장 밖을 기웃거리는 도둑들도 밤을 사랑하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신성한 밤의 거룩함이 폄하될 이유는 조금도 없다. 전쟁이 일어나는 때는 낮이지만 그 전쟁의 승패가 갈리는 때는 밤이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그러니 이토록 짙은 밤의 장막과 무거운 고요를 비호 삼아서 나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고해성사도 촛불 하나 없는 어두운 방에서 해야 마음속에서 진실함이 우러나온다고 하지 않던가. 수도사들이 실낱같은 빛줄기 하나 없는 방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진실한 빛이 내면에서 뿜어져 나와 방안을 밝게 비추고 더 나아가 우주를 향해 뻗어나가기를 기원하듯이 말이다.

빛이 사라지고 거짓과 위선, 유희와 향락의 두꺼운 화장이 남김없이 지워지자 나는 지나온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어둠의 사제가 내 앞에 소리 없이 서서 그 검고 긴 망토자락을 바닥에 스치며 나를 굽어보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니 몸이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나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 신성한 어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 나는 참으로 어리석게 살아왔구나!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가 한 일은 무엇이고 내가 이루어놓은 것은 무엇이었던가! 나는 참으로 들판에 뛰어다니는 입이 쭉 찢어진 벌거숭이 고블린처럼 살아왔구나!

사람들은 내 이름을 기억해주었다. 그리고 칭송했다. 그들은 나를 ‘소설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무슨 대단한 마법사나 현자라도 되는 양 고개를 깍듯이 숙이며 나를 떠받들어 주었다. 나는 그러한 그들의 대접을 당연한 듯이 때로는 분에 안 찬다는 표정으로 거들먹거리며 받아들였다. 아무것도 없는 초라한 늙은이 주제에 넓은 토지와 많은 기사와 노예를 거느린 영주처럼 뒷짐을 지고 고개를 뒤로 젖혀 헛기침을 하며 드넓은 거리를 휘젓고 다녔던 셈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나의 삶은 협잡꾼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 동안 나는 ‘소설가’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속이고 내 배를 살찌우며 삶의 대부분을 보내왔다. 그러한 내가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써왔던가? 자문하면 할수록 정말로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일이라서, 나는 지금 이 방 안에 나 혼자밖에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다행스럽고도 고맙게 여겨졌다.

아니, 나 혼자가 아니다. 어둠과 죽음의 신이 이미 자신들의 시종인 박쥐 날개를 단 어둠의 정령들을 이끌고 내 주위에 몰려와 이 한심하고 초라한 늙은이의 고해성사를 엿듣고는 킬킬거리며 비웃고 있으리라…….

그렇다. 내가 썼다는 소설이라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종이쪼가리였다. 가난한 평민 출신이었던 내가 제법 잘 살 수 있는 것도, 부자와 귀족들의 사교모임에 얼굴을 들이밀고 예술가 행세를 하며 살 수 있었던 것도 다 이 짧고 가느다란 펜 덕분이었다.

나의 소설은 그저 손님에게 과시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귀족들의 서재에 있는, 금박 두른 두꺼운 가죽표지로 된 호화로운 책들로 채워진 귀품 있는 장식장에 한 권을 더해주었을 뿐이며, 그로 인해 그들이 유식하고 품위 있으며 책을 사랑하는 교양인이라는 허세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알리는 역할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고작 심심한 귀족과 귀부인의 낮잠을 도우는 무의미하고 시시한 글로 사람들을 속이고 명성을 얻었으니 이 아니 부끄러운 일이랴. 내가 썼다는 소설이란 화려한 생일 케이크의 크림 장식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겉만 번지르르한 치장에 불과했던 것이니! 그럼에도 자만에 빠진 폭군처럼 권력에 취해 짧은 펜을 휘둘러 검은 잉크로 종이를 더럽혔을 뿐…….

사실 이 참회의 시작은 우연히 읽었던 짧은 글 때문이다. 그 글을 읽지 않았다면 이런 내 과거에 조금의 후회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유명한 소설가라는 이름을 자랑스럽게 내걸고 귀족들의 연회와 무도회에 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뒤뚱거리며 나타나, 그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서로 술잔을 부딪치며 시시덕거렸을 테지.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글은 출간하기도 전에 금서로 지정되는 바람에 누구도 읽어본 사람이 없을 것이다. 사실 내가 그 소설을 손에 넣게 된 것도 순전히 행운이었다. 내가 평소에 잘 알고 지내는 윌링턴 남작이 운영하는 출판사가 있었다. 나도 그 출판사를 통해서 여러 소설들을 출간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남작은 출판사에서 나오는 책이 있으면 나에게 꼭 보내주곤 했다. 으레 신간이 나오면 유명한 작가나 학자의 서문이 책의 선전을 위해서건 출판사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건 필요하기 마련이어서, 남작은 출판하기 전의 소설을 직접 나에게 전해주며 서문을 부탁했었다. 물론 섭섭하지 않을 정도의 답례금도 약속하면서.

그러나 내가 서문을 쓰기도 전에 이미 그 책은 금서로 낙인찍혀 출판은 금지 당하고 필사본을 포함한 모든 서간이 압수되었다. 그런데 남작은 나에게 보내준 사본이 있다는 사실을 잊은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나에게 꼭 보여주고 싶어서 그랬던 것인지 내가 가진 이 책만은 수거되지 않았다. 따라서 아마도 지금 남아있는 소설은 이것이 유일하지 않은가 추측된다. 원본을 포함한 모든 책들이 불태워졌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원래 쓰려했던 서문을 대신해서 여기에 기록을 남겨두고자 한다.

이 소설은 한 마디로 말해서 지금의 우리들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내용을 담고 있다. 이름도 생소한 저자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책을 처음 받고 겉면에 손으로 적힌 제목과 지은이 이름을 얼핏 본 나는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군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남작은 ‘그럴 수밖에요. 이 소설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썼으니까요.’라고 대답해서 나는 처음에 약간 놀랐다.

책을 보면 제목부터 눈길을 끈다. 『철조(鐵鳥)를 타고 온 사람』. 강철로 만든 새가 존재할 리도 없고 있다 한들 그것을 타고 다니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생경함으로 인해 그 내용을 짐작키 어렵게 만드는 다소 엉뚱한 제목과는 달리 첫 장을 넘긴 순간부터 나는 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빠져들었고, 무서울 정도로 치밀하게 정면으로 신과 인간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내용에 감탄해마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제야 이 소설이 금서로 지정된 이유를 알았다.

신의 부정(否定). 창조주와 신의 섭리, 교리들을 싸잡아 비난하고 모순을 드러내어 결국은 읽은 이로 하여금 신에 대한 회의와 불신을 갖게 하는 이 엄청난 소설을 국가와 교단에서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한 차원 다른 생각을 가진 이 글은 마땅히 ‘환상소설’이라고 불려야 할 것이다. 실은 다르게 부를 이름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알고 있는 한 세상의 어느 누구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인물, 새로운 생각을 담고 있었다.

내용은 작가 자신의 체험담 형식을 띠고 있다. 무역상인인 부모를 따라 어릴 때부터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하던 주인공은 대륙 남단의 작은 시골 마을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마을 뒤에 있는 산에서 나는 커다란 소리를 들은 주인공은 호기심이 생겨서 가보기로 결심한다. 마을 사람들은 산 속에 잠든 용이 깨어났다며 위험하다고 극구 말렸지만 그의 호기심을 막을 수는 없었다. 산을 올라간 주인공은 꼭대기 근처에서 생물도 아니고 무생물도 아닌 거대한 존재를 목격하게 된다. 그게 바로 ‘철조’였던 것이다.

산비탈에 쓰러져 있던 은빛이 감도는 시커멓고 거대한 새. 그 겉은 강철처럼 단단하지만 외양은 깃털이 없는 새처럼 두 날개를 좌우로 펼친 모습이었다. 새의 입이 열리고 안에서 키 큰 사람이 나오자 주인공은 놀라면서 겁이 나 허리춤에 찬 검을 꺼내들었다. 그러자 상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해치지 말라고 말한다. 상대의 신비로운 모습과 정중한 태도에 주인공은 두려움과 적개심을 누그러뜨린다. 그러면서 둘의 대화가 시작된다.

주인공은 상대에게 어디에서 온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놀랍게도 이곳이 아닌 다른 세상, 다른 별에서 왔다고 대답을 한다. 다른 세상이 존재하며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단 말인가? 별에서 왔다면, 저 밤하늘에 박혀있는 수많은 별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단 말인가?

놀라움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이곳과 다른 힘과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왔다는 것이다. 그는 숲에서 흔히 나타나는 작은 마물인 고블린이나 기어 다니는 육식식물들, 인간 크기의 벌레들을 보자 기겁을 하며 두려워했다. 그런 것들을 정말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짧은 지팡이를 꺼내어 괴물들을 간단히 쓰러뜨렸다. 어떤 마법 주문도 외우지 않았고 힘을 쓰지 않았는데도 가리키기만 하면 불꽃이 번쩍이더니 괴물들은 힘없이 거꾸러졌다.

눈앞에서 엄청난 미지의 힘을 본 주인공은 크게 놀라며 상대에게 그가 사는 세상에 대해 가르쳐달라고 부탁한다. 그러자 그는 주인공을 철조의 뱃속으로 안내하여 함께 자기들의 별로 떠나게 된다. 그 철조 안에서 나눈 대화가 이 소설 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신비로운 인물의 말에 의하면 그들의 세계는 오직 인간만이 살고 있다고 한다. 인간에 견줄 지능을 가진 존재는 없고 인간만이 문명을 이루고 있으니, 오로지 인간이 인간만을 위해서 살면 되는 세계라는 얘기다.

저 땅속 밑에는 난쟁이와 땅의 정령들이 굴을 파고 들어가 모닥불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지도 않고, 숲 속에는 요정들이 풀피리를 불며 나뭇가지 사이를 뛰어다니지도 않으며, 동굴이나 화산 속에 거대한 용이 잠들어 있지도 않는, 벌판을 홀로 다닐 수 없게 만드는 고블린 같은 마물들이 활개치지도 않는 그런 세계라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세계에는 신도 악마도 천사도 없다. 더불어 마법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인간만이 이 세상의 유일한 주인이며 힘의 원천이라는 의미다.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초월적인 존재를 두려워하고 숭배할 필요도, 위급하거나 괴로울 때 기도를 할 필요조차도 없는 그런 세계를 감히 상상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인간들이 평화로이 밭이나 일구고 숲에서 나무열매나 따먹으며 소박하게 살지는 않았다. 그들은 신이 부여하거나 자연 속에 존재하는 마법과 같은 힘이 없는 대신 스스로의 힘과 지혜로 문명을, 문화를, 사회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참으로 무릎을 치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분명 인간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다. 끊임없는 호기심과 탐구하고자 하는 정신이 있으며, 더 발전하고 높이 상승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대학자 알로모두마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는가. ‘호기심이 있음은 인간의 문명이 계속 발전할 거라는 증거이다.’

회오리와 메뚜기 떼의 습격에도 안전한 튼튼한 집, 항상 대낮처럼 집과 거리를 밝혀주는 빛을 다스리는 기술, 수많은 사람을 싣고 땅과 바다와 하늘을 달리는 금속 수레와 배, 오랜 수련과 신비로운 주술 없이 누구나 멀리 떨어진 상대와 의사소통할 수 있는 대화도구. 한 사람의 열망으로 만들어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엄청난 상상과 꿈으로 빚어낸 경이로운 이상향이었다. 나는 그 부분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으면서 그 세계의 모습을 상상했다. 철조를 타고 온 사람이 살고 있는 세계를…….

그 결과 그는 철조를 만들어 다른 별, 다른 세상을 방문할 수 있었다. 인간이 해와 달로 향하는 이야기는 한낱 신화와 전설이 아니라는 얘기다. 언젠가는 우리도 밤하늘에 여신의 젖처럼 흩뿌려진 별들을 따올 수 있을 것이다. ‘별을 따주리라’, ‘별에서 살고 싶다’라고 노래했던 이름 없는 음유시인들의 소원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순간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그들은 별을 사고파는 일이 일상화되어 지금의 우리가 특이하게 생긴 돌이나 드래곤의 비늘, 사슴의 뿔, 트롤의 이빨 등을 고가에 수집하여 저택을 장식하듯이 별을 장식할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일이다.

그렇게 나는 소설 속으로 빠져들었고 그 세계에 대한 동경은 내 영혼 속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 자리할 만큼 커졌다. 내가 눈을 뜨고 있는 동안은 현실세계에서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눈을 감고 있는 순간에 나는 그 세계를 상상했고 꿈꾸었으며 또한 갈망해마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나는 이 소설의 전부를 읽지 못했다. 아니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본 사람은 어쩌면 이 소설을 쓴 저자 한 사람만일지도 모른다. 처음 이 책을 접한 날, 잠을 잊은 채 소설에 몰두하던 나는 둘의 대화가 신과 인간에 대한 내용으로 접어들며 열띤 토론을 펼치던 중 갑자기 소설이 끝나자 당혹과 허탈감에 빠졌다. 마지막 쪽과 두꺼운 뒤표지 사이에는 몇 쪽이 더 들어갈 만한 빈 공간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나는 혹시 뒷부분을 어디에 빠뜨린 것이 아닌가 싶어서 서재를 비롯한 집안 곳곳을 뒤지며 곤히 잠든 하인들을 깨우는 등 소란을 피웠고, 결국 야심한 밤에 마차를 타고 나에게 책을 준 윌링턴 남작의 저택으로 달려갔다.

밤늦게 선약도 없이 방문한 무례에도 불구하고, 절절한 부탁에 감명을 받았는지 남작은 저자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는 소설 속 주인공처럼 평생 세상을 떠돌아다녔다고 한다. 마지막이 된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 원고를 자신이 운영하는 출판사에 맡겼고 이후 실종되었다.

놀랍게도 그는 원고를 실제 체험담을 기록한 수기라고 주장했고 출판사에서는 황당무계하고 이단적인 내용 때문에 출판을 망설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남작은 이 원고를 소설이라 여기고 읽으면 매우 흥미롭고 독창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우선 나와 같은 소설가나 학자, 종교인 등에게 보여준 다음에 그들의 반응에 따라 출간 여부를 결정하려고 계획했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읽어본 고위사제가 이단으로 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출판도 하기 전에 원본을 비롯한 모든 원고가 수거되어 불에 탔고, 내가 소장한 사본만이 남았다는 얘기다. 남작의 말을 듣자 나는 실망감과 무력감에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원본까지 벌써 불에 타서 세상에서 사라졌고 저자도 행방불명이라 뒷이야기를 들을 수조차 없다니.

남작님은, 출판사 직원은 끝까지 읽었습니까? 뒷내용을 아시나요?

다그치는 듯한 내 질문에 남작은 아쉽다는 투로 대답했다.

유감스럽지만 뒷내용은 아무도 모릅니다. 저자는 두 권 분량의 책 중에서 앞권만 우리에게 맡겼죠.

남작의 설명에 따르면 앞부분의 내용은 철조를 타고 온 사람의 세계에 도착하면서 끝난다고 한다. 내게 보낸 사본은 전달 과정에서 마지막 몇 쪽이 떨어진 모양인데 크게 중요한 내용은 없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던 중 철조가 도착하여 끝난다. 다음 권에서 다른 세계의 모습이 펼쳐질 예정이라는 짐작만 가능했다.

소설을 재미있게 읽으신 모양이군요.

남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다음 권을 찾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남작의 말에 나는 또 한 번 주억거렸다. 물론 그럴 것이다. 학식 있고 덕망 높다고 칭송 받는 머리가 굳은 어르신들이 이런 위대한 소설을 알아볼 리가 없다. 그 글은 오직 불타오르는 열정을 눈동자 속에서 다 감추지 못하는 예술가, 신에 대한 의문으로 가득한 진정한 현자, 그리고 또 다른 세상을 꿈꾸는 몽상가만이 알아볼 것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책의 앞부분을 아직 갖고 있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그저 갑자기 뒷내용이 궁금해져서 찾았노라고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다. 남작의 태도를 보니 내 책이 회수되지 않은 이유는 출판사의 실수로 명단에서 빠졌음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자칫 남작에게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가 남은 사본마저 빼앗겨 사라지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책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다시 서재로 돌아온 나는 허탈함에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의자에 쓰러지듯 몸을 기대었다. 램프를 들고 따라온 집사는 내 건강을 걱정하는 말을 몇 마디 건네고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고, 다시 서재에는 나 혼자만이 있었다. 이리저리 살랑거리며 나를 놀리는 작은 촛불의 움직임을 멀거니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 잠이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퀴퀴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가는 변색된 책과 양피지 두루마리들이 쌓여 있는 책상 한 구석에 나는 고개를 묻고 그렇게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닌 어중간한 시점에서 수마(睡魔)에게 붙잡혀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후에 그 목소리가 들려온 것일까.

…이르…아시…

귓가에서 희미하게 맴도는 그 목소리는 작고 흐릿하여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이 세상에서 나는 소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잡으려고 다가가면 사라지는 아지랑이처럼 촉각을 곤두세울수록 그 목소리는 더욱 알아듣기 어려웠다.

…세오…시느…니다…

어쩌면 내가 알지 못하는 전혀 다른 언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형언할 수 없이 내 가슴을 울리는 그윽한 목소리가 귀에 익숙해질수록 이 좁고 어두침침하며 곰팡내로 가득한 서재에 나 말고 또 누군가가 있다는 확신이 강해지자 나는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수습하려 했다.

일어나세요.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이제 그 목소리가 뚜렷하게 들린다. 아, 그랬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앞에는 그가 있었다. 내가 현실에서든 꿈속에서든 애타게 찾고 상상했던 바로 그였다.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인지 꿈인지 환각인지 단지 내 상상의 발로인지 그런 것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바로 여기, 내 앞에 있다는 사실이지.

그는 내가 상상도 못한 모습이었다. 외모로는 인종이나 성별을 판별할 수 없었다. 그저 주름 없는 피부와 아름다운 이목구비로 젊다는 인상만을 줄 뿐. 그가 바로 철조를 타고 온 사람이었다. 내가 그토록 원하는 사람과의 만남이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지금 나는 환상소설의 주인공 그 자체였다.

다, 당신이었군요.

나는 벅차오르는 감격과 경외감에 그만 목이 메어 말을 제대로 건네지도 못했다. 이 먼 길, 아니 저 넓고 광활한 우주를 건너서 찾아온 손님에 대한 첫인사치고는 너무 보잘 것이 없어서 송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래도 그는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이내 오른손을 들어 올려다보고 있는 내 얼굴 가까이로 내밀며 말을 건넸다.

저와 함께 갑시다.

……가다니요? 어디로?

당신이 가고 싶어 하는 곳으로.

내가 가고 싶은 곳……. 당신이 살고 있는 세계, 환상의 세계 말인가요?

너무나 기뻐서 몸이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떨렸다. 신을 만나는 사제의 몸이 이처럼 떨리지 않을까. 이 세상에 태어난 누구라도 자신이 나고 자란 세상 이외의 곳에 가보고 싶지 않은 이가 있을까! 그 영광된 경험이 지금 나에게 허락된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순간이 되면 자신이 숭배해 마지않는 신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고대 노르드 신족의 왕에게 무릎을 꿇지도 않았고, 빛과 태양의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지도 않았다. 나는 어느 신, 어느 종교, 어느 가르침도 내 영혼을 지배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너무나도 명약관화한 증거가 있다. 신이 없는 세상, 인간이 오직 인간을 위해 살아가는 세계에서 온 사람이 내 앞에 있다. 그가 있는 한 나는 언젠가 신의 도움 없이 홀로 일어설 수 있는 때가 오리라고 믿는다. 그것이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리라.

그가 내민 손짓을 따라 서재에서 몸을 일으키자 갑작스럽게 세찬 바람이 휘몰아쳐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의 길고 가느다란 팔이 나를 붙잡아주자 회오리바람 속에서도 가까스로 실눈을 뜨고 주위상황을 살필 수 있었다.

서재가 날아가고 있었다. 내가 평생을 바쳐 쓰고, 모으고, 정리했던 그 많은 책들이 모두 낱낱이 찢어지고 흩어져 둥글게 휘몰아치는 폭풍에 뒤섞여 어두컴컴한 우주 저 멀리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래, 가라. 모두 사라져! 더 이상 너희들이 나를 사로잡고 있지는 못하리라! 언제까지 주검과도 같은 지식과 기예의 부패된 찌꺼기들에게 둘러싸여 내 인생을 좀먹게 놔두지는 않으리! 이제 나는 우주를 건너서 나를 반길 미지의 세상, 신의 전능과 마법의 가르침이 아닌 인간이 만든 새로운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새로운 세계에 내 몸을 맡기리라!

서재가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바람이 그치자 드디어 거대한 철조가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내가 알고 있고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미사여구를 다 동원하여 표현해도 모자랄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비록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매끄러우며 투명하다고까지 느껴지는 표면과 좌우로 미려하고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펼쳐진 날개가 내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기에는 충분했다.

정말이지 모든 것은 내가 소설을 읽고 상상한 그 이상이었다. 이렇게 철조와 철조를 타고 온 사람을 만나게 되니 이 기쁨은 뭐라 헤아리기 어려웠다. 나는 생일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펄쩍 뛰며 환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철조의 입이 열리자 내부에서 대낮보다 더 환하고 투명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철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나는 심장이 두근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려 걸음을 제대로 옮기기 어려웠다.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떤 신의 신전, 어느 왕의 궁전으로 들어갈 때보다도 더 거룩하고 두려우면서도 기대가 되는 순간이었으니까. 나는 머나먼 고행의 길을 넘어 성지에 도달한 늙은 순례자처럼 묵묵히, 그러나 신중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철조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둥근 원통처럼 생겼고 텅 비어있었다. 천장에는 빛의 정령을 가두어 놓은 것처럼 환한 빛을 내뿜고 있는 등 세 개가 붙어있었다. 너무 밝아서 새벽녘의 별을 따서 넣은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그 빛은 나의 어수룩한 문장력으로는 제대로 표현하기가 힘들었지만 태양의 빛과는 다른, 좀 더 건조하고 투명한 느낌이었다. 이것이 인간의 힘으로 다스린 광채인가…….

그 외에는 장식이랄 것이 거의 없었다. 벽에 알 수 없는 무늬들이 불규칙적으로 퍼져있고, 유리로 만든 것처럼 보이는 탁자 하나와 의자 두 개가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의 눈에는 이렇게 두리번거리는 나의 모습이 필시 난생 처음으로 왕궁구경을 하는 촌로처럼 보였을 테지. 그는 미소 띤 얼굴로 나에게 의자를 내밀며 앉으라고 권했다. 내가 의자에 앉자 뒤에서 커다란 바람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철조의 커다란 입이 닫혀 있었다.

하지만 철조는 날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듯 했다. 은근히 힘차게 날갯짓을 하며 날아오르는 철조의 모습을 기대했건만 이렇게 철조의 배 안에 갇혀서 이리저리 흔들리고만 있어야 하나. 조금 지나자 그가 일어나 벽 쪽으로 가더니 나에게 손짓을 하며 불렀다.

보세요. 당신이 사는 별의 모습입니다.

나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무엇을, 어디서 보라는 뜻인지. 그런데 놀랍게도 벽에서 네모난 창문이 뻥 뚫리듯 생겨났고 창 너머로는 광활한 우주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철조는 이미 소리도 없고 아무런 흔들림도 없이 높이 솟아올라 하늘을 날고 있던 것이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그만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창을 향해 다가갔다.

거기에는…… 아, 거대한 구체가 있었다. 이것이 내가 사는 세상의 진정한 모습이었다. 너무나도 완벽한 구(球). 어느 누가 부정할 수 있으리. 수많은 세월 동안 전설과 신화는 네모나고 평평한 세계임을 주장해왔다. 그러나 내가 아는 수많은 천문학자와 수학자들은 별의 움직임과 그림자의 길이를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둥글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을 주장한 사람은 모두 이단으로 배척당했었고 지금은 아무도 감히 나서서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진실은 이토록 확고부동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점점 작아지는 구체를 보며 내가 사는 세상과의 작별을 고했다.

안녕히, 신이 지배하는 세계여. 나는 지금 신들이 산다는 천상의 궁전에서 하계를 내려다보고 있는 셈이었다. 진정으로 신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나에게는 아직 하고 싶고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내가 소설의 뒷부분을 읽지 못했기 때문에, 직접 소설의 주인공이 되어 그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그와 나는 다시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그가 먼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신을 접했습니까?

신을 접한다? 나는 그 질문의 의미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신의 모습을 직접 본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신의 권능은 느낄 수 있습니다. 당신이 사는 세상에는 신이 없겠지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적잖게 놀랐다. 물론 내가 사는 세계에도 신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폄하하는 이들이 있다. 그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는 말인가.

그들은 신을 접했거나 신의 존재를 증명할 증거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위를 가리기에 앞서 믿음의 문제이지요.

믿음. 믿음이라. 믿음만으로 존재를 증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마법은 그 효과가 나타남으로써 증명되고, 천사는 축복을, 악마는 저주를 내림으로써 그들의 존재가 입증된다. 그런데 신이 없는 세상의 인간들은 믿음만으로도 존재함을 증명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하지만 나는 당신의 이야기를 소설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당신들은 인간 이외에 영혼과 지능을 지닌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며, 오직 물질에 의해 발휘되는 힘을 통해 문명을 발달시켰다고 했습니다.

나의 열띤 발언에 그는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모든 세상의 존재들은 자신에게 모자란 것, 결여된 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찾으려고 합니다. 제가 당신을 택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나를 찾은 이유? 그게 뭐죠? 나에게 가르쳐줄 순 없겠습니까?

우리가 잃은 것, 우리에게 없는 것을 당신이 찾아 주리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그게 대체 무엇입니까? 당신들의 세상에 없는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당신과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너무나도 다릅니다. 서로의 세계를 부를 수 있는 말은 아마도 ‘환상’이라는 단어밖에는 없을 텐데요.

내가 말을 마치자 그의 투명한 눈동자가 내게로 향했다. 인형처럼 깨끗한 얼굴을 가진 그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그는 이 진땀을 흘리고 있는 초라한 늙은이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신입니다. 사실 신 자체의 존재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어쩌면 신에 대한 믿음일 테지요, 인간이 신에 대한 믿음을 잃은 순간 이미 신은 죽고 말았지요.

신이…… 죽는다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신의 죽음. 그것이 우리의 세계가 물질에 의해 문명을 발전시키게 된 이유이자 원동력이 됩니다. 신과 그것을 믿는 종교라는 존재는 인류의 독립과 진보를 막는 장애물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제자가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권위로 그의 발언을 막으려는 스승의 심정과 같다고 할 수 있지요.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몸이 떨렸다. 과연 교단에서 금기시할 만한 말이구나. 신이 인간의 발전을 막는 존재다? 신이 있기에 우리가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 세계의 인간들은 그럼 무엇이란 말인가? 그의 말은 이어졌다.

제자는 언젠가 스승을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스승보다 더 우수한 능력, 뛰어난 지혜, 고귀한 영혼을 지녀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인류의 발전은 영원히 제자리걸음을 할 수밖에 없겠죠. 더 나아가 인간은 언젠가 신을 초월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잃어버린 신을 다시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당신의 도움에 의해서 말이지요.

내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단 말입니까?

당신은 꿈을 꿉니다. 환상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이 당신의 힘입니다. 그것이 곧 신을 향한 도약의 발판입니다.

신을…… 향한다고 하셨습니까?

우리는 완벽한 현실 때문에 환상을 잃었습니다. 새로운 세계, 더 높은 이상, 신이라 불리는 궁극의 존재를 꿈꿀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지요. 인간의 힘이 점차 인간을 구속했고 거대한 유기체의 세포와도 같은 수준으로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탈출이 필요해졌죠.

당신은 마치…… 나와 같군요. 내가 상상했던 그대로요. 당신도 다른 세계를 꿈꾸고 있었군요. 그렇다면 당신이 지닌 환상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꿈꾸고 열망했던 세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신이 존재하는 세계. 바로 당신의 세계입니다. 아니, 더 궁극적으로는 신 자체지요.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당신의 환상이 구현된 글입니다. 당신이 소설을 통해 저의 세계를 상상했듯이 말이지요. 저라는 존재는 소설 속에서만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환상이 저를 당신의 세계로 불러낸 것이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저는 소설을 통해 당신을 알았고, 제 환상을 통해 당신을 이렇게 만날 수 있는 겁니다. 정말로 이런 일이 가능하다면 당신과 저, 우리는 신과 같은 존재나 다름없습니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존재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제야 나는 노쇠한 머리로나마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나의 세계에서 그는 글 속에서만 있었던 존재였다. 그런데 이렇게 실제로 존재하게 된 이유는 내가 그를 상상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내가 존재하는 이유 역시 그가 나를 상상했기 때문이다. 즉 나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그의 세상에서는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나의 입은 저절로 열렸고 이런 말이 나왔다.

그렇다면 내가 가야 할 세계는……

미처 나의 말이 다 나오기 전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바로 당신의 소설 속, 그리고 저의 환상 속이죠.

나는 흐린 미소를 지었다. 긴 궁금증이 비로소 풀리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제야 이 철조의 종착역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갑작스레 몸을 움찔하며 나는 깨어났다. 얼마나 오래 잠들었는지 모르겠다. 커튼을 친 창문 틈으로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꿈이요 환상이었을까. 주위를 둘러보고 찾아봤지만 책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책이 존재했다는 사실부터 꿈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런 동요나 아쉬움도 없이 나는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평생 해왔던 일이건만 지금은 태어나서 처음 하는 것처럼 떨리면서도 설렌다. 바로 새로운 소설을 쓰는 일이다.

그것은 어느 소설가에 대한 이야기. 소설 속에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 존재하고, 그가 쓰는 소설은 바로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다. 누군가 이 세상이든 다른 세상이든 어딘가에 존재하는 사람이 이 소설을 읽는 순간 그는 나를 상상할 것이고 나는 그의 환상을 통해 존재할 수 있게 되리라. 철조를 타고 왔던 그 사람처럼.

너무나도 즐겁고 신나게 정신없이 썼다. 얼마만에 느끼는 감정인지. 머릿속에 차오르는 생각을 손으로 따라잡기가 벅찰 정도다. 손가락이 아프거나 펜을 잉크에 담그느라 집필을 멈추는 순간이 답답했다. 한시라도 빨리 한 글자라도 더 많이 쓰고 싶다는 열망으로 몰입했다. 그럼에도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했다.

모든 작가의 궁극적인 소망이자 염원인, 작품과의 합일이 이루어지는 실로 감격적인 순간인 것이다. 글이라는 질료를 통한 자아와 세계의 합일. 그것이야말로 영원불멸을 이룰 수 있는, 신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완성이 아니겠는가. 이를 이루게 되었으니 기쁘지 않을 리가 있나!

쓰인 글은 이미 나에게서 떠났던 것, 흩어진 영혼의 절편(切片)이요 기억의 주검에 불과하다. 여기에 나 자신의 존재가 스며들어 있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나는 영원히 글자의 획과 간격 사이에서 살아 숨 쉬고 있을 것이다. 나는 신이 되어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영원한 환상에 잠겨있는 것이다.

(2001.04.17. / 2018.02.15. 개작)

댓글 1
  • 글쓴이 pilza2 18.04.02 21:34 댓글

    17년 전에 쓴 소설을 이번에 올리면서 고친 부분을 밝혀둡니다.

    - 책 제목 ‘사나이’를 ‘사람’으로 수정. 철조를 타고 온 인물을 성별이 모호한 인물로 표현.

    - 마찬가지로 주인공 소설가도 백인 남자로 추정된 묘사를 성별과 인종을 알 수 없도록 수정(아내를 집사로 변경 등).

    - 사라진 책 뒷부분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충(남작이 읽었으면 내용을 알려줄 수 있기 때문에 못 읽었다고 확실하게 언급).

    - 지나치게 모호했던 결말 부분에 설명을 약간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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