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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a 누메논

2003.11.01 01:1611.01

1


  스타인버그 마을의 아이들은 여느 동네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다. 아침에 부시시한 눈을 비비면서 일어나 어머니의 성화를 귓전으로 흘려들으며 세수를 한다.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아침을 깨작대거나 갖고 놀아서 다시 한 번 야단을 맞는다. 허겁지겁 한다고 했는데 벌써 시간은 지각이냐 아니냐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흘러 있다. 교문을 간신히 통과해 학교에 들어가면 어제 본 얼굴들이 서로를 맞는다. 어제도 본 선생이 교실에 들어오고, 어제도 같이 놀았던 아이들끼리 모여서 어제 했던 얘기랑은 다르지만 그저 그렇게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어제랑 비슷한 시간에 밥을 먹고, 어제랑 다를지도 모르지만 해가 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별로 큰 차이가 없는 시
간에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역시 어제처럼 텔레비젼 앞에 퍼질러 앉아있다가 아침부터 세서 대략 세번째의 잔소리를 듣고 나서야 방으로 들어가든지 학원에 가든지 한다. 학원에서 돌아와서든, 퍼질러 앉아있었든 좀 재미있어질만 하면 자라는 잔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조금 툴툴대다가 결국 어제랑 다를 바없는 시간에 잠자리에 든다. 교회에 가는 일요일은 이것과 다른 사이클로 움직이겠지만, 그 일요일도 결국 지난 주 일요일과 다를 바가 없다. 오늘은 어제와 똑같고 이번 주는 저번 주와 똑같은 나날의 연속일 뿐.

  그런 하루하루 속에서 '야행'을 누가 먼저 생각해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어쨌든 학교에서 한 아이가 '야행' 이야기를 꺼냈다. 모두들 잠이 들어있는 시각에 집을 빠져나와 어디로든 걸어보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짝꿍끼리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뒷자리에 앉은 아이가 끼어들었고, 앞자리에 앉은 아이가 뒤로 돌아앉았고, 그 아이와 이야기하고 있던 다른 분단 아이가 끼어들고 하는 식으로 아이들이 점점 불어나더니, 엠마뉴엘이 지나가다가 끼어들었을 때에는 반 아이들 중 반은 그 무리에 붙어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엠마뉴엘이 흥미롭게 그 계획을 듣고 있는 새에 반 아이들 중 나머지 반과 다른 반 아이들 서넛이 더 달라붙었다. 그 중에는 엠마뉴엘네 옆집에 살면서 엠마뉴엘과는 사사건건 반대의 성향을 가진 그란도 있었다. 엠마뉴엘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란만은 이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엠마뉴엘과 반대되는 생각만 하는 아이니까.

  첫 '야행'은 매우 조심스럽게 실행에 옮겨졌다. 늦게 자는 사람도 웬만하면 잠자리에 들었을 시각, 일찍 일어나는 사람도 새벽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시각에 아이들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늦은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힘겨웠건만, 이런 이상한 시각에는 벌떡벌떡 잘도 일어났다. 옷도 언제나 마지 못해 챙겨입었지만 지금은 아무거나 성큼성큼 집어입고 후다닥 밖으로 나왔다. 엠마뉴엘도 서투르나마 방에서 가까운 나무를 타고 집을 빠져나왔다. 웬일인지, 꽤 큰소리가 난 것 같은데도 집안 식구들은 깨어나지 않았다. 엠마뉴엘은 내려앉았던 간을 수습하며 아이들에게로 달려갔다.

  조심스러웠다고는 하나 아이들은 처음으로 느끼는 짜릿한 해방감에 어쩔 수 없이 웅성거렸다. 가끔 가다가 자신들의 소란스러움을 알아챈 몇 명이 주위 아이들을 조용히 시켰지만 1분 이상 가는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어른들이 깨어나서 쫓아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아이들도 없었다. 아이들은 그저 들떠있었다.

  '야행'은 점점 더 범위를 넓혀갔다. 오늘은 한 골목에서만 돌았다면 그 다음에는 뒷골목을 돌았고, 그 다음날에는 갑자기 훌쩍 뛰어 동네 끝까지 가보기도 했다. 밤에 보는 동네란 생각 외로 색다른 것이어서, 그 다음날 바로 똑같은 길을 햇살 속에서 걸어가도 밤에 걸었던 그곳이 맞는지 돌아봐야 할 정도였다. 그런 과정들을 거치면서 아이들은 낮과 밤의 차이에 익숙해졌다. 낮에는 전혀 그런 낌새조차 없는 골목이 밤에는 무언가 불길한 기운이 넘쳐흘러 작은 소리만 나도 아이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드는 일이 허다하다 보니, 그런 곳은 낮에도 찾는 사람이 줄었다. '야행'을 시작하면서 아이들은 동네를 어른들보다 자기들이 더 잘 안다는 자부심을 슬쩍 내비치게 되었다. 정말로 말했다간 어른들이 밤에 지킬지도 모르니까 여전히 조심했지만.

  그렇게 다니던 어느 날, 엠마뉴엘은 아이들과 어울려 동네 경계까지 갔다가 난생 처음으로 커다란 저택을 보았다. 그렇게 커다란 저택이라면 2층인 자기 방에서는 조금 보일만도 하건만, 이제까지 전혀 볼 수 없었던 것이 이상했다. 동네 경계를 다 돌도록 그 저택의 담이 따라왔고, 경계선이 꺾일 때도 그러했다. 마치 동네 경계선이 모두 그 저택의 담으로 포위된 것 같았다. 만약 그러하다면 동네 바깥의 세계는 모조리 그 저택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말로, 어떻게 저렇게 거대한 것을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것일까.

  엠마뉴엘은 자기도 모르게 천천히 걷다가 아이들을 놓쳤다. 그러나 그것도 모르고 정신없이 저택을 바라보았다. 저 담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넓으니까 뭔가 재미있는 게 있겠지, 저 저택은 하늘 끝까지 뻗은 건 아닐까, 저 넓은 담 안에 있는 저택은 얼마나 웅장할까. 갖가지 생각을 하다 보니 그나마 꽁무니라도 보이던 아이들의 무리는 흔적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제 야행을 시작한지 꽤 되었으므로 동네 지리쯤이야 훤히 꿰고 있어서 걱정은 다른 방향으로 나갔다. 이 담에서 이대로 떠나지 못하는 건 아닐까? 그러다 아침이 오고, 돌아오지 않은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님 때문에 어른들이 발칵 뒤집히고, 그래서 야행이 끝장나는 건 아닐까? 그 때, 길고 긴 담 저쪽에서부터 누군가가 걸어왔다.

  "여어-"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아직 희끄무레하게 정확한 형체를 알 수 없는 그는 그란이었다. 엠마뉴엘은 순식간에 담의 마력으로부터 빠져나와 흥이 깨진 기분으로 그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싸늘하게 돌아서 집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란이 이상하게도 당황한 얼굴로 뛰어서 쫓아왔다.

  "이봐! 왜 가는 거야!!"
  "별로 좋은 사이가 못 되니까. 애들이나 찾아봐야지."
  "같이 가!!"

  엠마뉴엘은 놀란 눈으로 그란을 돌아보았다. 그란은 엠마뉴엘과 반대되는 성향을 가진 아이였다. 그 말은 다시 말하면 남이 무어라고 하든 그리 상관하지 않는 아이라는 이야기다. 누가 간다고 하면 말리지 않고 온다고 하면 받아주는 아이라는 이야기다. 웬만한 일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 아이라는 이야기다. 그런 그란이 같이 가자니? 게다가 그 목소리에는 분명히 공포가 서려있었다.

  엠마뉴엘이 계속해서 아무 말도 않고 그렇게 보고 있자, 그란은 쭈뼛쭈뼛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아이들이 이상해. 이 담이 안 보인다는 거야. 그러면서 그냥 가던 길을 가버렸는데, 쫓아갈 수가 없었어."
  "어, 나도... "

  그렇게 말하면서 엠마뉴엘은 이상한 느낌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그 광경이 너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했다.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동네는 아무리 낮과 밤의 차이가 난다고 하지만 언제나 그 형체만은 같았다. 꽤 오래된 가옥들이 있어 음침하긴 했지만 이토록 폐허같지는 않았다. 엠마뉴엘과 그란은 순식간에 나무 뼈대만 남은 유령마을을 보면서 망연하게 서 있었다. 대화재가 휩쓸고 지나간 듯, 검게 그슬린 뼈대는 보기에도 위태로웠다. 천년 전의 스타인버그, 혹은 천년 후의 스타인버그가 이렇게 변할까 싶다.

  "...어떻게 된 거지?"

  그란은 어깨를 으쓱거릴 뿐 말이 없었다. 이미 아까부터 이렇게 된 마을을 봐왔다는 것처럼 약간은 태연한 태도였다.

  "그래서 네가 반가웠어. 다 사라지고 그나마 보였던 건 너뿐이었거든."
  "그래, 그렇구나. 하지만 이제 어쩌면 좋지?"

  다시 그란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엠마뉴엘은 그란이 이미 그런 녀석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한 대 때려주고 싶어지는 건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단 하나 남은, 자신이 아는 아이를 때릴 수가 없어서 주먹을 꼭 쥐고 돌아섰다.

  "방법은 하나지. 보이는 곳으로 가보자고."

  그란이 등 뒤에서 말했다. 엠마뉴엘은 못 이기는 척 돌아섰다. 담은 길고 저택은 넓고 시간은 밤인지 낮인지 구분할 수도 없었다.


2


  스타인버그 마을을 둘러싼 모든 세계에 걸친 그 담은 모양도 한결같았다. 엠마뉴엘은 그 담을 보면서도 질렸지만, 걸으면서 그 길이에 이를 갈았다. 보통 저택의 문이 정면과 후면에 있다면, 쪽문이라도 있지 않은 한 문과 문 사이의 거리는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너무한 거 아냐, 이거. 문이 있기는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숙인 순간, 발 밑에 그림자가 지는 것이 보였다. 그림자는 앞으로 길게 졌다가 스르륵 움직여 발과 일체가 되더니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엠마뉴엘은 그란이 팔꿈치로 옆구리를 가볍게 찔러 고개를 들었다. 환히 빛나는 공터가 나타나고, 그 위에 거대한 펜이 스치고 지나가듯 한글자 한글자가 나타났다.

제 집에 와주셔서 영광입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테라스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습니까?
기다리겠습니다.

주의: 너무 이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게 오시기 바랍니다.

-누메논-



  이 괴상한 편지는 완전히 다 씌여진 후에 뻐기듯이 한 번 빛나더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갑작스런 빛 때문에 잠시 눈을 가렸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치웠더니 문이 있었다. 눈이 좀 더 좋은 그란이 먼저 엠마뉴엘을 잡아끌었다.

  문은 멀리서 보는 것보다 컸다. 상상했던 것보다 컸다. 얇고 촘촘한 창살이 복잡하고 화려한 무늬를 이루며 서로 얽히고 있었고, 그 모든 무늬가 얽혀서 반원을 그렸다. 그 문이 천천히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리고, 그 한가운데로 들어가면서 보니 아이들 백명이 넉넉히 한 줄로 나란히 서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 아이들이 이곳을 보지 못한다고 겁에 질렸던 엠마뉴엘과 그란은, 그 둘만이 이 넓은 문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는 것에 약간 우쭐해하며 걸어들어갔다.

  몇 분 동안 길은 넓고 깨끗하고 보기 좋았다. 잘 다듬어진 잔디와 돌길이, 산책하기엔 그만인 코스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길이 좁아졌었던 모양이다. 처음에 엠마뉴엘이 알아차렸을 때, 그 길은 이제 50명 정도밖에는 못 지나갈 정도로 줄어있었다. 엠마뉴엘이 그렇게 말하자 그란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어쨌든 우리는 두 명이잖아? 지나갈 수만 있으면 돼."

  엠마뉴엘은 다시 한 번 그란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했다. 벌써 반으로 줄었다는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줄어든다는 얘기다. 점점 더 좁아지다가 한 사람밖에 못 지나갈 정도로 좁아지면 어떻게 하지? 아니, 그 때는 한 줄로 서면 된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좁아지면? 남의 집 정원인데 잔디를 망치면 안 될 텐데 하고, 무척 예의바르지만 상황에는 안 맞는 듯한 고민을 하는 엠마뉴엘이었다.

  다행히 길은 한 5명이 나란히 설 수 있을 정도로까지 좁아졌다가, 갑자기 앞이 확 틔였다. 확 트인 그곳에 미로가 들어서 있다는 것이 또 다른 문제였다면 문제였다. 그란은 난처한 듯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우, 이런 거 난 자신없는데! 이거, 오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주인 취미 한 번 괴상하네."
  "하지만 멋있는걸! 미로 푸는 방법은 들은 적이 있어. 조금만 머리를 짜내면 뭔가 나오겠지."

  미로는 덩굴이 뻗어 있는 반투명한 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이들의 머리 위로 또 아이들의 키만큼 뻗어 있는 키 큰 벽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미로가 시작하는 점은 조금 낮은 지대여서, 미로가 어떤 모양으로 굽이치고 막히는지 한눈에 보였다. 엠마뉴엘은 잠시 손가락을 가지고 그 모양대로 따라가면서 하
나의 길을 만들어보았다.

  "그러니까... 첫번째에서 오른쪽, 두번째에서 오른쪽... 세번째에서 가운데, 그리고......"

  한 일곱번째 모퉁이까지 그리고 나니 그 이후로는 너무 멀어서, 벽들이 모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엠마뉴엘은 겁이 덜컥 났다. 보이는 곳까지는 맞는 길이지만, 그 뒤에는 막다른 길로 향하는 건 아닐까? 아니라고 그 누가 보장할 수 있을까. 보아하니 누메논이라는 사람은 초대장만 턱 날려놓고 이 넓은 집에 안내인조차 안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집주인 본인은 어떻게 다니는 걸까? 텔레비젼에 나오는, 집 안을 왕복하는 차라도 없으면 정말 다리가 아플 것 같은데. 그렇다고 저렇게 꼬불꼬불한 길을 차로 다니기도 힘들 텐데. 엠마뉴엘은 뚱뚱하고 턱수염을 기른 아저씨가 차에 타고 뒤뚱뒤뚱 곡예운전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킥킥댔다.

  "어쨌든 가보자. 아무리 이상한 아저씨가 기다리고 있어도, 약속은 지켜야지!"
  "그런 이상한 약속시간을 어떻게 지켜?"
  "이러고 있으면 너무 이르게 가긴 글렀고, 너무 늦지나 않게 가야 할 거 아냐."

  퉁명스러운 그란의 답변에도 엠마뉴엘은 유쾌하게 대답했다. 누메논이란 사람에 대한 상상이 마음 속에 생각 외로 발랄한 반향을 일으켰던 모양이다.

  그 때 갑자기 위쪽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 그렇지. 좋은 자세야. 칭찬해주겠어, 학생!"

  엠마뉴엘과 그란은 두리번두리번거리며 위를 올려다보았지만, 맑은 하늘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시간은 밤이 아니었던가? 이 문에 들어올때에도, 어떻게도 규정할 수 없는 시간대로 들어가버린 느낌을 받긴 했지만 지금은 어느 모로 봐도 낮이었다. 그것도 구름 한 점 없는 투명한 하늘이 일품인 멋진 날씨였다. 그렇게 하늘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으니 조금 아래쪽에서 쨍알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하늘 꼭대기 본다고 뭐가 나와? 여기를 보라고! 자꾸들 그러면 안 도와줄 거야!"

  '도와준다'는 말에 둘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내렸다. 과연 미로의 벽 위에 머리만 기형적으로 크고 몸은 갸냘픈 난장이 하나가 걸터앉아 있었다. 갸냘픈 몸에는 어울리되 그 중후한 머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쨍쨍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도대체가 말야! 소리가 나는 방향도 모르냐? 좋은 자세라고 칭찬해줄랬더니 말이야, 안 되겠어. 이미 떡잎이 글러먹었다고! 물을 줘도 커질 나무에나 줘야지, 헛수고 하긴 싫단 말이다!......"

  쫑알쫑알쫑알쫑알쫑알.

  "피곤한 사람이다."
  "그러게 말야. 도와주려고 나온 것 같은데, 언제 도와주려는 걸까."

  엠마뉴엘과 그란은 속닥거렸다. 난장이는 자신만의 훈계에 푹 빠져들어서는 그 둘이 얼굴을 가까이하고 입을 오물거리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소리는 물론 그 쨍쨍한 목소리에 훌륭히 가려버렸다.

  "흠흠, 어쨌든 이렇게 부족한 너희들이지만, 그래서 내가 길을 이끄는 보람이 있는 것이겠지. 부족하면 할수록 보람있는 게 이 직업이란 말이야! 성공하고 나면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도 생기고. 이거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닌가!"
  "......"
  "아, 그러고 보니 무슨 얘기를 하던 중이었지? 그래, 너희들 나한테 소개도 안 했구나! 예의부터 갖추지 못한 아이들이라니, 이제까지 본 중에서 최악이야. 내 이름은 기드다. 자, 자세를 바로 하고 자기 소개 좀 해봐. 쯧쯧, 어째 태도까지 불량하냐."

  저돌적으로 쏟아져나오는 말들에 엠마뉴엘과 그란은 단지 한 마디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엠마뉴엘."
  "그란."
  "... 그것밖에 할 말이 없어? 정말 요즘 애들은. 어휘력까지 부족한 건가. 정말 세상이 어찌 돌아가려고 이러는 건지 알 수 없어. 물론 세상은 점점 나쁜 방향으로만 흘러가지만, 어딘가 새로운 희망이 될 아이들은 분명 있을 텐데 말야. 왜 나한테 오는 애들은 다 이런 걸까? 에휴..."

  그 순간에 엠마뉴엘과 그란이 욕을 하거나 달아나버리지 않고 참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학교에서 단련된 무관심과 도움에 대한 희망 때문이었다.

  "에또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우리를 도와준다고 했죠."

  이번엔 엠마뉴엘이 선수를 쳐보았다.

  "그래~ 그렇군! 기억력 하나는 요즘 애들도 괜찮은 편이구나. 어쨌든 난 길잡이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지. 좀전에 너희들 얘기하는 걸 본의아니게 들었는데 말이지, 늦지 않게 가려는 의도는 아주 좋은 거야! 길을 미리 정해 놓는 것도 좋고 말이지! 계속 그 길대로 가면 어쨌든 괜찮을 테니 한 번 가보라구! 자!"

  담 위에서 발을 대롱대롱 흔들던 기드는 갸냘픈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은 미로가 시작되는 첫 점이자 길이 세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만한 넓이로 좁아지는 지점이었다. 엠마뉴엘과 그란은 더 일러줄 말이 있는가싶어 다시 뒤를 돌아봤지만, 기드가 있던 자리에는 커다랗고 멋들어진 글씨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먹여주기보다 먹는 방법을 가르치라.'

  "먹는 방법은 가르쳤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둘은 동시에 외쳤다. 결국 기드가 가르쳐준 것은 무작정 부딪쳐보라!는 충고 뿐이다. 엠마뉴엘과 그란은 씩씩거리면서 미로에 들어섰다.

  예상했던 대로 일곱 번째 모퉁이까지는 상당히 순조롭게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뒤부터는 높이 치솟은 벽들 때문에 건너편을 볼 수가 없었다. 첩첩이 겹쳐진 부분이 보이지만, 다들 비슷한 색깔이라 어디서 끊어지고 어디서 이어지는지 알아보는 것도 불가능했다. 엠마뉴엘은 그란에게 뭔가 벽에 표시를 할 만한 물건이 없는지 물었다. 그란은 주머니를 뒤적뒤적하더니 매직을 하나 꺼내놓았다. '유성' 매직이었다. 엠마뉴엘은 순간 화장실의 많은 낙서들을 떠올렸지만, 눈을 한 번 치떴을 뿐 아무 말 하지 않고 받았다. 그리고 검을 빼듯이 매직을 뽑아들었다. 기념비적인 첫번째 화살표는 왼쪽 벽에 새겨졌다.

  그 뒤로는 계속해서 왼쪽 벽이 그 영광을 안았다. 세 갈래 이상의 길이 나왔을 때에는 가장 왼쪽 벽이 간택받았다. 그란은 잠시 생각해보지도 않고 재빨리 왼쪽으로 나아가는 엠마뉴엘을 보며, 반 놀라움 반 두려움의 목소리로 물었다.

  "길을 아는 거야?"
  "아니. 하지만 미로를 푸는 방법이 이런 거라고 들은 적이 있어. 한쪽으로만 계속 표시를 하면서 나가다가, 똑같은 곳이 나오면 표시를 안한 쪽으로 가는 거지."
  "그것도 규칙 같은 건가?"
  "규칙? 방법이겠지."
  "그러면 그렇지."

  그란의 목소리가 갑자기 영하로 내려갔다. 엠마뉴엘은 잠시 그 냉기에 흠칫했지만, 꿋꿋이 앞서 걸었다. 방법을 알고 있고, 그것에 따른다는 게 잘못되었다는 건가? 어차피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보단 한쪽을 깊이 파 본 후 이쪽이 아니라는 증거라도 얻어야 할 것이 아닌가. 방법이라는 게 있다는 건, 이런 길을 가본 사람이 나보다 앞서 많았다는 것이고, 그 사람들이 실패를 거듭하다가 성공한 것을 남긴 것이다. 왜 이리저리 휘둘려가면서 길을 찾느라 조바심쳐야 하는가?

  왼쪽으로 왼쪽으로 돌다가 드디어 첫번째 바퀴를 돈 모양이었다. 잘 찾아보기는 힘들었지만, 엠마뉴엘이 이쁘게 그었던 화살표가 오른쪽벽에 있었다. 둘은 반대편으로 돌아나온 것이다. 엠마뉴엘은 가보지 않았던 길, 오른쪽 길로 홱 방향을 틀었다. 그란은 아까부터 묵묵히 뒤따르고 있었다.

  오른쪽길로 가서, 오른쪽 벽에 표시를 하고 오른쪽으로 돌았다. 두 모퉁이를 돌고 나니 다시 엠마뉴엘이 했던 표시가 나타났다. 이번엔 왼쪽에 있었다. 엠마뉴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오른쪽 벽에 표시를 하고, 오른쪽 길로 나아갔다. 그 다음 모퉁이에서는 오른쪽 벽에 표시가 있었다. 그러나 화살표 방향은 왼쪽으로 가고 있었다. 엠마뉴엘은 다시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까 그란이 한 의미불명의 말도 있고 해서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왼쪽 길로 갔다. 그다음 모퉁이는 세 갈래였다. 엠마뉴엘은 가운데길을 택했다. 그 다음 모퉁이는 다시 두갈래였다. 표시는 없었다. 엠마뉴엘은 오른쪽으로 갔다. 그 다음 모퉁이에도, 그 다다음 모퉁이에도 표시는 없었다. 엠마뉴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계속해서 오른쪽 길로 나아갔다. 세 갈래나 네 갈래가 나오면 가운데길, 혹은 왼쪽에서 두번째 길을 택했다. 다섯번째인가에서 드디어 표시를 다시 만났다. 세 갈래길의 왼쪽과 가운데에 표시가 있었다. 엠마뉴엘은 그란의 눈치를 살폈다. 그란은 여전히 '그러면 그렇지' 분위기였다.

  "이제 남은 길은 하나네!"

  엠마뉴엘은 짐짓 쾌활하게 말했다. 사실 그렇다. 두 번이나 돌아서 이 길로 왔다면, 이 미로를 지나 누메논씨에게 갈 수 있는 게 확실하다면 이제 길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선택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역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미로'란 게 풀고 지나가기 위한 것이었던가? 미로는 원래 그 속에서 갇히게 만들려는 목적이 아니었던가? 들어갔다가, 들어왔던 길을 짚어 나올 수는 있지만 정말로 통과해서 다른쪽으로 나갈 수 있다는 보장은 없는 게 미로아니던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이상하게도 모퉁이가 나타나질 않았다. 꽤 많은 걸음을 걸었는데도 여전히 하나로 쭉 곧은 길이었다. 길이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엠마뉴엘은 이 길이 정말로 직행(?)인가 보다 하고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그 때, 앞이 확 트였다.

  열 갈래 갈림길이었다. 그리고 그 열 개의 길에는 모두 화살표가 있었다.

  엠마뉴엘은 현기증이 나서 주저앉았다. 열 갈래나 되는 길은 오면서 본 적이 없다. 하물며 화살표까지 있다니? 누군가 자신들의 뒤를 쫓아다니면서, 아니면 앞질러 다니면서 화살표를 조작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까지 피해왔던 표시들도 모두 그런 건가?

  그 때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물이 흐르는 것 같기도 하고, 바람이 살랑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요정이 숨죽이고 웃는 소리 같기도 했다. 엠마뉴엘은 고개를 들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 벽이 스르륵 흘러내려 화살표 모양으로 바뀌고 있었다! 벽 위에 걸쳐 있던 덩굴들은 잠시 꼿꼿이 서더니 바람에 흔들렸다. 그 품이 꼭 웃는 것 같았다. 아니, 웃는 게 틀림없었다! 저놈의 덩굴들이 둘을 비웃고 있었다!

  엠마뉴엘이 화를 내면서 일어선 순간 그란이 몸을 날렸다. 그란은 엠마뉴엘을 옆으로 밀쳐냈다. 그리고 자신도 무사히 옆으로 비켜섰다. 엠마뉴엘이 있던 곳으로 화살표가 허물어져내렸다. 그리고 엠마뉴엘이 있던 자리를 할퀴고 갔다. 철썩.

  "물이었어?!"

  엠마뉴엘은 그란에게 밀려서 꼴사납게 주저앉은 자세 그대로 외쳤다. 단단한 척하고 속이고 있었지만, 사실은 미로 벽이 물이었다니. 그릇만 바뀌면 모양이 바뀌어버리는 저 간사한 물이었다니. 덩굴은 살아있었고, 화살표는 조작되어 있었고, 벽은 물이었고. 도대체 무엇을 믿어야하는 것일까? 엠마뉴엘은 풀이 죽었다.

  "이봐."

  그란이 엠마뉴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제 믿을 건 나 자신 뿐이야."

  엠마뉴엘은 여전히 풀이 죽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란은 어깨에 얹었던 손을 거둬가기 전에 잠시 엠마뉴엘을 토닥여주었다.

  문득 올려다보니 하늘이 빨개져 있었다. 꽤 걸었다고는 하나, 그새 또 해질 시간이 된 것이었다. 엠마뉴엘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하늘을 의심의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아무 것도 고정되어 있는 것은 없다지만, 너무 빨리 움직였다. 엠마뉴엘은 중얼거렸다.

  "집에서 난리났겠네..."


3


  이젠 그란이 앞에 섰다. 방법에 따라 재깍재깍 표시를 하고 다녔던 엠마뉴엘과는 반대로 그란은 표시는 했지만, 갈림길마다 고민했다. 코를 킁킁대기도 했고, 잠시 눈을 감고 서 있기도 했다. 더럽게 손가락에 침을 묻혀서 들고 있기도 했다.

  "뭐하는 거야?"
  "방향을 잡는 거야. 이런 벽 같은 거에 구애될 필요 없잖아? 어쨌든 이 미로는 위로 올라가는 모양이니까, 바람의 방향 반대로 가면 될 거야."
  "바람이 위로 올라가는 방향인지, 아래로 내려가는 방향인지 어떻게 알아?"
  "거기서 자신을 믿어야 하는 거지!"

  그란은 자신있게 말하고, 다시 엠마뉴엘을 외면했다. 그러나 엠마뉴엘은 고민했다. 그렇다면 자신은 그란의 느낌만을 믿고 따라가야 하는 건가? 적어도 자신은 확실한 방법을 가지고 갔던 것이었다. 미로가 워낙 이상한 것이라서 그렇지. 그런데 그란은 뭔가? 무조건 자신을 믿으면 된다고 하는데, 그란이 어디 믿을 만한 애인가? 결론은 아니다였다. 엠마뉴엘이 마음을 결정하고 그렇게 말하려는데, 갑자기 앞에 가던 그란이 사라졌다.

  "우아아아아아!!!"

  그리고 남은 것은 그란의 비명소리 뿐. 엠마뉴엘은 황급히 그란을 따라갔다. 그러나 그란을 찾기도 전에, 그란이 있던 자리에 도달하자마자 미끌어지기 시작했다. 엠마뉴엘은 비명을 지르며 허우적댔다. 하늘이 일그러졌다. 사방의 벽이 뒤로 물러났다. 머리칼이 휘날리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엠마뉴엘은 몸이 위아래로 주욱 늘어나는 느낌을 받았다.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와아아악!!"

  몸이 조금씩 조금씩 궤도에서 벗어나더니 완전히 옆으로 누운 꼴이 되었을 때, 바닥이 사라졌다. 미끄럼틀 같은 경사로에서 미끄러져내려오다가 절벽에 봉착한 것이었다. 밑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위를 올려다볼 담대함도 없었다. 다만 허전함. 공허함. 아무 것도 붙잡아주지 않고, 아무 것도 떠받쳐주지 않는 공포. 엠마뉴엘은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아버렸다. 자신을 믿은 대가란 이런 것이다. 이젠 끝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러나 끝도없이 계속될 것 같았던 그 순간은 의외로 빨리 끝났다. 엠마뉴엘은 뭔가 푹신한 곳에 떨어졌다. 혹은 그 푹신한 것이 다가와서 엠마뉴엘을 감쌌다. 엠마뉴엘은 눈을 뜨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것은 커다란 천이었다. 그런데 그냥 하나의 천 같지는 않았고 바느질 자국이 나 있는 것이 옷의 한 부분인 것 같았다.

  "으하하~ 이 놈들아! 뭔가 있어야 자신을 믿든지 말든지 하지! 웬만하면 도와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놈들 그냥 두고볼 수가 없구나! 머리나쁜 건 알았지만 말이다. 역시 이 기드님이 나서줘야지?!"

  기드! 엠마뉴엘은 눈이 번쩍 뜨였다. 고개를 틀어 위쪽을 보니 기드의 갸냘픈 몸을 덮었던 옷이 늘어나 한쪽으로는 엠마뉴엘을, 한쪽으로는 그란을 잡고 있었다. 그 옷은 주욱 다시 줄어들더니 기드 옆에 엠마뉴엘과 그란을 내려놓았다. 엠마뉴엘과 그란은 쭈삣쭈삣 서 있기만 했다.

  "이놈들, 여전히 과묵하군! 그래, 내가 잘못했다. 너희의 능력을 감안해봤을 때 그렇게 내버려두고 가면 안 되는 거였는데 말이야. 이제부턴 내가 안내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나만 믿어라!"

  엠마뉴엘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란을 믿어서 이런 꼴이 났는데, 기드는 안내인이라고는 하지만 괜찮을까.

  그래도 그란과 기드는 차원이 달랐다. 기드는 이상한 짓을 하지도 않았고,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언제나 걸음이 거침이 없었다. 다만 가끔 가다 벽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잠시 멈출 뿐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라면 기드가 워낙 작아서 주의를 조금만 하지 않으면 놓칠 것 같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걸음은 무지하게 빨라서 잠시만 놓쳐도 꼬불꼬불한 미로 안에서는 이미 상당한 거리가 벌어져 있는 일도 허다했다. 그런 때에는 기드가 좀 있다 다시 돌아와서 투덜투덜 쫑알쫑알거리면서 다시 엠마뉴엘과 그란을 데리고 갔다.

  어느 지점에서 기드는 걸음을 멈췄다. 어느 새 미로는 끝나 있었고, 그저 세 갈래로 나뉜 길이 있을 뿐이었다. 하나의 길은 동굴처럼 산 속으로 뻗어 있었고, 하나의 길은 나무들이 우거져서 아주 좁지만 향기로운 길이었으며, 나머지 하나의 길은 거친 황야와 바람이 어우러진 길이었다.

  "자, 여기에서부터는 어느 길을 택해도 가능성은 똑같아. 다만 취향차가 있을 뿐인 거지. 어디로 가겠어?"
  "흐음..."
  "나라면 숲길을 택하겠어."

  기드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엠마뉴엘과 그란은 그 말투에 배인 번득임에 놀라서 기드를 쳐다보았다. 맑고 커다란 눈을 하고 있었던 기드가 이상하게도 형형한 눈빛을 하고 그들을 보고 있었다. 눈썹이 더욱 짙어보였고, 미간에 있는 주름이 한층 깊게 졌다. 엠마뉴엘과 그란은 가까이 붙었다.

  "넌?"
  "난 황야."
  "나도. 하지만 기드가 가만둘까...?"

  아닌 게 아니라 지금 속삭이고 있을 때에도 기드의 험악한 기운은 더해만 갔다. 숲길로 가지 않으려고 한다면 이제까지 끌고 온 걸 모두 무효화시켜버리고 아까의 절벽으로 되돌릴 듯한 기세였다. 엠마뉴엘과 그란은 손을 잡았다.

  "기드."
  "그래, 어딜 택할 거야?"
  "우린, 저기로 가겠어요!"

  엠마뉴엘이 크게 팔을 휘둘러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란은 반대쪽을 가리켰다. 기드가 둘을 번갈아보면서 당황하고 있을 때, 엠마뉴엘과 그란은 손을 잡고 황야로 달려갔다. 그제서야 기드가 둘의 계획을 알아채고 쫓아오려 했으나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튕겨져나가고 말았다. 엠마뉴엘과 그란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뛰었다. 띄엄띄엄 기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회할... 거긴... 시간이...잊지 않을 테다아!!!"

  마지막 말은 특히나 크게 소리질렀는지, 한자 한자 똑똑히 들렸다. 엠마뉴엘과 그란은 소름이 끼쳤지만 여전히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역시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 길 안내를 해 준 기드의 말을 따라주지 않아서 미안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기드가 잊지 못할 만큼 기드에 대해 뭔가 해가 되는 행위였단 말인가? 혹은 그저 배신했다는 것일까? 엠마뉴엘은 천천히 걸음을 늦추면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우리가 뭘 잘못했지...?"
  "없다고 생각해."

  그란이 맞받았다. 엠마뉴엘은 고개를 들어 그란을 보았다. 그란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평소보다는 자신없는 투로 말했다.

  "기드가 우리를 위해서 그런 말을 했던 것이든, 자기가 꿍꿍이속이 있었든 우리는 여기를 택했잖아. 아무리 좋다고 말해도 거기로 가고 싶지는 않았는 걸. 그게 잘못인가?"
  "아니지."
  "그럼 됐지."

  약간 마음이 편해진 엠마뉴엘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황야를 향해 힘차게 걸었다. 그러자 이번엔 그란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기드가 한 말은 무슨 뜻일까...? 시간이...?"

  쿠르릉!

  어딘가에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땅이 조금씩 조금씩 움직였다. 엠마뉴엘과 그란은 자신들 사이로 생기는 금에서 비켜났다. 그러자 둘 사이가 아주 멀어졌고, 그 금은 끝간 줄을 모르고 황야를 갈랐다. 그 커다란 선에서부터 다시 작은 선이 갈라져나왔고, 작은 선에서 다시 작은 선이 갈라져나왔다. 그리고 쿠릉쿠릉 거리는 조금 막힌 소리가 나더니, 그 선들에서 가는 물줄기가 솟기 시작했다. 엠마뉴엘과 그란 사이에는 정말 큰 물줄기가 새어나오려고 했기 때문에, 엠마뉴엘은 늦기 전에 그곳을 건너뛰려 했다. 그러나 막 그 쪽 땅을 딛고 그란 쪽 당에는 닿지 못한, 허공에 떠 있는 그 순간에 물이 세차게 뿜어나오기 시작했다. 엠마뉴엘은 그 물줄기의 힘에 떠밀려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엠마뉴엘!! 이런!!!"

  그란 또한 그 금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젠 이미 물이 뿜어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그대로 물 속으로 침몰해버리고 말았다.

  엠마뉴엘은 그란을 볼 수 없었다. 차갑고 높은 압력의 물이 계속해서 등을 떠받치고 있었고, 이 압력이 사라진다면 자신이 저 황야로 고꾸라질 거란 건 분명했다. 그런데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기드가 다시 나타나 구해줄 리도 없었다. 엠마뉴엘은 자신을 떠받치고 있는 물에 손을 대보았다. 대단한 압력이긴 하지만 고정되어 있지는 않았다. 엠마뉴엘은 눈을 꼭 감고 뒤로 몸을 젖혔다. 물이 스륵스륵 옷으로 스며들어왔고, 엠마뉴엘의 몸은 물 속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물살은 더욱 커졌다. 갈래갈래 갈라진 물들은 이제 무언가 형태를 갖추어 가고 있었다. 자신들끼리 얽히고 얽히더니 어느덧 모서리에 각이 잡혔다. 물이 그렇게 대체로 사각형으로 변하고 나자, 물이 튀어 촉촉해진 땅에서 싹이 돋았다. 그리고는 무서운 속도로 자라나더니 물로 된 담을 덮었다. 쿠릉거리는 소리가 멎고 모든 것이 고요해지자, 방금 전까지 황야였던 곳은 미로가 되었다.


4


  꿈을 꾼 것 같았다. 엠마뉴엘은 빠져든 물 속에서 잠시 누메논 씨를 만났던 것 같았다. 누메논씨는 상상처럼 뚱뚱하거나 유쾌하게 생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정확히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하게 기억할 수도 없었다. 그저 상상과 달랐다는 것만 기억날 뿐이었다. 누메논 씨는 미로 위의 저택이 아니라 물속의 궁전에서 엠마뉴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웃으면서 말했었다.

  '늦었어요, 엠마뉴엘. 당신이 늦지 않으려고 했던 노고는 잘 알지만, 시간이 너무나 지나서 다시 미로가 생겨버렸답니다.'
  '정말이요?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다음을 기약해야죠. 잊지 마세요. 너무 이르게 오면 날 충분히 만날 수 없고 너무 늦게 오면 새로운 미로가 생겨나니, 내 옷자락밖에는 만지지 못해요. 그것도 돌아가는 옷자락.'
  '하지만!'
  '안녕.'

  그리고 눈을 떴을 때에는 자신의 방 천장이 보였다. '야행'을 나갔다가 언제 돌아온 것일까? 다른 사람들은 '야행'을 알게 된 것일까?

  엠마뉴엘은 벌떡 일어났다. 그 때 아래층에서 언제나와 같은 엄마의 잔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로 엠마뉴엘은 지금이 아침이라는 것을 알았다. 창문이 꼭꼭 닫혀 있어서 때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엠마뉴엘은 창문을 활짝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달라진 점이라고는 발견할 수가 없었다. 어제와 같은 아침, 어제와 비슷한 날씨, 어제나 다름없는 마을 모습이었다. 그런데, 어제와는 다른 것이 하나가 생겼다. 골목길 저쪽에서부터 누군가가 뛰어왔다. 이 시간에는 모두들 아침을 먹고 있게 마련이었는데 누가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뛰는 것일까.

  그 형체를 알아보자마자 엠마뉴엘은 황급히 옷을 입었다. 그리고 계단을 쿵쾅거리며 내려가, 두번째 잔소리를 퍼부을 준비를 하고 있던 엄마를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엠마뉴엘의 엄마는 그 작은 변신이 너무 놀라웠는지 아무 말도 못했다.

  "여, 여어- "

  숨을 헐떡거리며 그란이 대문 앞에 왔다. 엠마뉴엘은 그란이 숨을 좀 가라앉히기를 기다렸다가 물었다.

  "우리 어떻게 된 거야? 나 그 누메논이라는 사람 꿈에서 봤어."
  "나도 봤어. 늦었다고 하던데. 그것보다는 말이야, 주위를 봐."

  엠마뉴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어제와 같은 마을 모습인데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일까 궁금해하면서. 그런데 분명히 어제와 같은 모양새인 마을 주변에, 어제 본 그 저택이 뚜렷이 보였다. 마을 전체를 둘러싼 담, 희미하게 안개에 싸여 군데군데만 보이는 미로.

  "어떻게 된 거지? 낮에도 저게 보이다니!"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대. 우리는 어제 '야행'에서나 마찬가지 신세가 된 거라고."
  "그렇군...... 아무래도 한 번 보이기 시작한 다음에는 계속 보이는 것 같군."

  집 안에서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엄마의 잔소리가 들려왔다. 어제와 분명 같은 내용이었다. 아침 먹어라, 학교는 언제 가려고 그러니, 씻기는 했니. 그래서 엠마뉴엘과 그란은 웃었다. 세상 사람들 모두 모르는 비밀을 둘이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너도 가. 너네 엄마도 잔소리하시겠다."
  "알았어. 그럼 밤에 보자."
  "밤에?"
  "다시 도전해야지!"

  엠마뉴엘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큰 소리로 웃었다. 웃고 또 웃었다. 웃음이 하도 안 멈춰서 배를 움켜쥐고 손짓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란은 약간 난처해하면서도 미소를 실실 흘리며 갔다. 엠마뉴엘은 잠시 더 웃다가, 어제의 모험 때문이기도 하고, 지금 실컷 웃어서도 주린 배를 안고 집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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