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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지 달의 고치(月の繭)

2003.11.01 01:2611.01

―――그들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거짓을 말한다.


   달(月).
   우리는 이 곳을 달이라 부른다.
   먼 옛날, 모성(母星)을 버리고 새로운 은하계를 찾아 머나먼 여행을 떠나는 이들의 눈에 마지막으로 보였을 그 달과도 같은 또 하나의 달(月).
   한없는 그리움으로 모성을 돌면서도 다가가지 못하는 애틋함.
   달이 지니는 운율에는 열망과 그리움,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서글픔과 기다림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러스트러스 행(行) 셔틀, 일루미나 호가 발진합니다. 환송객들은 모두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안내말씀 드립니다. 러스트러스 행 셔틀, 일루미나 호가 발진합니다. 환송객들은 모두 안전선 밖으로……”

   시웬 스테이션.
   위성 트레이스에서 가장 큰 우주 정거장이자, 러스트러스가 눈에 잡힐 듯이 보이는 장소이기 때문에 여행객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즐겨 찾는 곳.
   떠나는 사람과 지켜보는 이들의 엇갈림. 오늘도 여전히 키 높이의 철책선 뒤에는 모성을 바라보는 이들로 빼곡하다.
   러스트러스(Lustrous).
   트레이스의 모성이자, 희망. 지상의 낙원. 그 곳에는 굶주림도 추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곳에 사는 주민들은 모두 영원히 늙지 않는 생명을 지니고 하루하루 풍요로운 삶을 즐긴다고 전해지는 곳. 그 별은 지금 나의, 우리의 머리 위에서 찬란한 빛을 뿌린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모성보다는 그 아래, 그 푸른 별 아래에 자리잡은 까만 공간에 머무른다. 넓은 공간에 작은 점처럼 자리잡은 하얀 동체에 노란색 띠가 그려진 일루미나 호.
   우주선은 발진 신호를 기다리면서 조용한 울부짖음을 토해내었다.
   저 네모란 상자곽 속에서 두근거리는 열망을 안고 미래를 설계하고 있을 이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리고 부러움과 시기심의 틈바구니에서 버둥거리는 이들의 모습은 그들 밖에 머물고 있겠지. 이젠 한숨도 나오질 않는다. 생기없는 눈동자들만이 우주선을 바라볼 뿐이다.
   행성간 셔틀은 곧 굉음을 남기고 하나의 점이 되어 멀어졌고 곧이어 빛이 되어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눈은 여전히 검은 공간을 떠나지 못했다. 우주선이 향했을… 저 멀리 보이는 푸른 별을 향하여.
   ―――레인? 우리 꼭 본토로 가자. 러스트러스에 커다란 식당을 차리는 거야. 그리고 그 곳에서 우리만의 요리를 대접하자. 약속이다?



   “쉐프! 3번 테이블에 ‘투르느도’ 2인분!”
   언제나처럼 주문을 알려주는 유나의 목소리는 생기, 그 자체다.
   그녀는 분명히 환한 웃음으로 손님들을 맞이할 것이며, 손님들 또한 그녀의 친절에 기뻐하며 주문을 할 것이다. 보지 않아도 충분히 상상이 가는 장면이었다. 그녀가 없었더라면 이 곳도 이렇게까지 유명해지지는 않았으리라.
   여성의 섬세한 손길이 미친 가게의 인테리어부터 친절한 서비스 정신까지. 모두가 그녀의 작품이다. 그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이 밝아진 나는 오더대로 요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갓 배달된 신선한 야채, 비록 자연품은 아닐지라도 맛을 충분히 되살려낸 공업 야채로 샐러드를 만든다. 황녹적색의 갖가기 야채들은 천연품과 그다지 달라보이지 않는다. 맛과 자연스러운 색조를 최대한 살리며 나는 소스를 뿌린다.
   이미 프라이팬 위에는 메인 디쉬가 준비중이다. 노릇하게 익어가며 풍기는 구수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지글지글거리며 튀겨오르는 기름방울들 사이로 서서히 연한 갈색을 띠기 시작한 두툼한 고기덩어리에 붉은 와인을 쏟아 붓는다. 붉은 불꽃이 거세게 타올랐다.
   요리의 생명은 시간과 열기와의 승부. 구슬땀이 흘러내렸지만 땀을 훔칠 새도 없이 재빨리 손잡이를 흔들어 불꽃을 다스린다.
   보기 좋게 익은 고기를 접시에 담고 브라운풍의 에스파그놀 소스와 가니쉬(장식)로 깔끔한 마무리를 지었다.
   구세대의 답습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아직까지 인간의 미각은 그대로다.
   할아버지의 고향 지구, 그 중에서도 프랑스라고 불리던 곳에서 맛볼 수 있는 요리. 그 요리는 새로운 행성에 와서도 그대로 유지되었고, 여러 요리들과 더불어 살아남았다. 그러나 프랑스 요리만큼 아름답고 섬세한 요리는 그리 흔치 않다.
   3년 전 개업한 ‘백색의 성(Le Chateau De Blanche)’도 여타의 식당들처럼 허름한 골목 구석에서 싸구려 기름에 구워진, 스테이크라 불릴 수 없는 음식으로부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어차피 위성 트레이스에서 레스토랑은 찾아보기 힘들다. 아니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노동자들은 하룻밤 식사에 100레더(신 화폐단위, 1레더는 1달러)에 다다라는 엄청난 레스토랑의 식사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저렴한 가격과 편안한 분위기를 추구했기에 누구나 손쉽게 찾아올 수 있는 요리점. ‘브라스리‘와 ‘레스토랑‘의 중간쯤이랄까. 바로 백색의 성이 추구하는 모토다.
   결국 손에 잡히지 않는 꿈을 잠시라도 맛보기 위하여 노동자들은 백색의 성으로 모여들고, 이제 백색의 성은 트레이스에서도 유명한 식당이 되었다.
   물론 내가 처음부터 백색의 성 같은 식당을 소유했던 것은 아니다.
   지구에서도 빈민층에 속했던 할아버지는 빚을 내어 이 곳, 트레이스에 도착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도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노동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도 빚을 다 갚지 못했고 지겨운 굴레는 아버지에게로 이어졌다. 그 후에 태어난 나.
   이민 3세대.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신분이다.
   그리고 생존. 살아남기 위하여 끊임없이 일을 해야했고 그런 하루 하루에 지쳐간 적도 있었다. 일이 없어서 뒷골목에서 새우잠을 자거나 쓰레기통을 뒤져 허기진 배를 채운 시간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그를 만나고 변화하였다. 그가 남긴 이 백색의 성에서부터… 나의 인생도 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직 멀었어요, 쉐프?”
   “아――― 미안. 다 됐어. 여기.”

   접시 위에 놓인 아스파라거스로 깔끔하게 마무리된 투르느도가 먹음직스럽게 보인다.

   “땡큐, 쉐프~ 그리고 8번 테이블에 ‘휠레 미뇽’ 1인분 부탁해요~”

   요리 하나를 마칠 새도 없이 이어지는 새로운 오더.
   저녁 시간은 눈코뜰새없이 바쁜 시간이다.
   나는 묵묵히 손을 놀렸다. 이미 모든 요리의 레시피는 머리 속에 정리되어 기계적인 손놀림만으로도 요리는 완성되어 갔다.
   몇 시간이 지나자 저녁 손님도 사라졌다.

   “수고하셨어요. 쉐프.”
   “수고했어, 유나. 아참, 그리고 내일은 가게문을 닫을 생각이니까 하루 푹 쉬어.”
   “네? 무슨 일 있나요?”
   “아니야. 그냥 피곤해서 하루쯤 쉴까 해.”
   “알았어요.”

   활발한 말투와는 달리 나를 바라보는 유나의 시선이 따갑다.
   아마도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이라도 꺼내주길 바라는 지도 모른다. 그녀의 시선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전방을 주시하였다.

   “아참, 요즘은 ‘이드의 만찬’을 주문하는 분들이 줄었네요? 웬일일까? 그래도 우리 가게의 스페셜 요리인데. 가격 때문인가? 가격을 좀 내려보는 건 어때요?”

   화제를 돌리려는 듯 메뉴 이야기로 넘어가는 그녀였지만 말투에서 섭섭해하는 기색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나는 바보가 아니다. 그러나 아무 일 없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 그녀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좋으리라.

   “가격은 내릴 생각은 없어. 어차피 재료도 고급으로 써야 하고.”
   “야채나 과일 같은 걸 자연품 대신 가공품을 사용하면 되잖아요? 굳이 비싸게 할 필요가 있어요? 너무 멋진 요리인데 사람들이 더 애용하면 좋잖아요. 우리 가게의 모토랑도 어울리고.”
   “아니.”

   짧게 끊어지는 내 말투에 그녀는 분명 상처를 입었으리라.
   그녀가 가게에서 일한 지도 벌써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주저앉았을지도 모를 백색의 성.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 곳은 그녀의 일터라기보다는 집과 마찬가지일 터.
   이 곳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신 못지 않다는 것 또한 잘 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유나가 핸드백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럼, 가볼게요. 휴일 잘 보내시고 모레 봐요.”

   “잘 가, 유나.”

   그녀가 사라진 후에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목이 칼칼했지만, 습관처럼 담배를 빼어 물었다.

   ―――담배 좀 그만 피우라고 했지? 맛을 내는 주방장이 미각을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그래!

   뿌연 담배연기가 허공을 수 놓았다. 뒤를 이어 매캐한 연기 내음이 코를 찌른다.
   실없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결국 나는 재털이에 몇 모금 피다 만 담배를 비벼 꺼버렸다.
   그러는 동안 내 시선은 줄곧 탁자의 한 부분을 응시한 채였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탁자 위에 놓여진 우편물들. 그 중에서도 생소한 직인이 찍혀있는 백색의 봉투에 고정된 상태다.
   다시 입안이 바싹 마르기 시작한다. 목이 마른 자가 우물을 찾듯 나는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담배갑으로 손이 뻗어나갔다.
   그러나 불을 붙이려던 순간,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담배갑을 다시 품안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안절부절 못하게된 게 언제적 이야기던가. 바로 이 한 장의 편지가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지만 용기가 나질 않는다. 아니 어쩌면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다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결국 나는 머뭇거리던 손을 뻗어 결국 편지, 러스트러스 행정관리국이라는 큼지막한 스탬프가 찍혀있는 백색의 봉투를 손에 쥐었다.
   어쩌면……   나는 가게의 불을 끄고 문을 걸어 잠궜다. 그리고 ‘사정상 하루 휴업합니다’라는 팻말을 걸었다.
   슬슬 겨울이 다가오는지 바람이 쌀쌀하게 느껴진다. 나는 옷깃을 세우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한발 내딛었다. 밤거리는 온갖 네온사인으로 눈부셨지만, 그러한 화려함이 어쩐지 서글퍼지는 저녁이다.

   ―――가게 이름으로 ‘르 샤또 드 블랑쉐’가 어때? 백색의 성! 맘에 들어, 레인? 하하――― 거창한가? 그렇지만 러스트러스에 어울리는 이름이잖아? 생각해 봐, 레인. 그 곳에 우리만의 꿈의 성을 세우는 거라고!



   일요일 아침의 날씨는 화창했다.
   하루 쉬겠다고는 했지만 특별히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밀린 청소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작은 아파트는 슬럼가 가장자리의 볕이 잘 들지 않는 장소에 세워진 낡은 건물이다. 왜 그런 곳에 사느냐고, 자신 정도면 적당한 아파트나 단독주택 정도는 구할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하고들 한다. 능력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가 정답이다.
   시트를 걷어 베란다에 널었다.
   그나마 햇볕이 잠시라도 비추는 이시간대가 빨래를 널기에 딱 좋은 시간이다.

   “날씨 참 좋구나…”

   묵은 빨래부터 기름때가 낀 조리도구까지 구석구석 청소를 하다보니 어느새 시간은 훌쩍 정오를 넘어가고 있었다. 슬슬 배가 출출해졌다. 혼자 해먹는 밥만큼 맛없는 음식도 없지만 어차피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먹고는 살아야 할 터.
   야채를 넣고 볶은 파스타를 만들었다.
   가게에서 파는 것처럼 화려하지 않지만 그런대로 영양은 충분한 한 접시의 요리.
   막상 다 만들고 보니 식욕이 없다. 그래도 배는 채워야 했기에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먹기 시작했다.
   설겆이까지 끝내자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그 후, 나는 한 시간쯤 빈둥거렸다. 그동안 애써 보려고 하지 않았지만 나의 시선을 잡아 끄는 한 지점. 나를 유혹하듯 그 자리에서 묵묵히 닫혀 있는 방문.

   “하아――― 이젠 어쩔 수 없는 것인가.”

   그래, 더 이상 미루는 짓은 소용없잖아.
   이제는 그에게, 그리고 나에게 알려야 할 시간이 되었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아나고픈 욕망은 변함이 없다. 이제 와서 어쩌란 걸까. 왜 이제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결국 나는 손을 뻗어 지난 3년 동안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열었다.

   ―――삐걱.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문은 귀에 거슬리는 비명소리를 토해내며 그 내부를 드러낸다.
   뽀얗게 먼지가 앉은 방은 기억 속의 모습과 동일하다. 한쪽 구석에 놓여있는 침대와 옷장. 책상 하나. 그리고 그가 즐겨듣던 디지털 씨디까지.
   모든 것은 3년 전, 방문을 닫던 그 순간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그대로다.
   나의 시선은 방을 한바퀴 둘러 결국은 벽에 걸린 조리복, 한때는 빳빳하게 풀을 먹여 새하얗을 조리복에서 멈춘다. 그러나 지나간 시간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조리복은 이미 누렇게 변색이 된 상태였다.

   ―――뭐지? 미안하지만 나는 피묻은 손과는 악수할 수 없군. 사양하겠네.

   5년 전, 나는 뒷골목에서 알아주는 칼잡이로 스콜피온의 행동대장이었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우여곡절은 말할 필요도 없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죽여야만 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한 궁여지책이기도 했지만 이런 구질구질한 삶밖에 물려주지 못한 부모에 대한 원망, 그리고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분노를 터트릴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했다.
   노동자의 주머니를 갈취하고 몸을 팔아 하루를 살아가는 거리의 여인의 몸을 빼앗고 겁에 질린 아이들에게 마약을 팔아 돈을 벌어오게 하는 일. 그런 일을 행함으로써 나는 어긋난 쾌감을 느꼈던 것이다.
   물론 나에게도 꿈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 어린 시절의 유일한 기억이라 할 수 있는 주방에서의 어머니의 모습.
   술에 쪄들은 아버지의 구타에 못 이기고 결국은 폭행으로 사지가 뒤틀린 모습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지만, 나의 기억 속에서의 그녀는 에이프런을 두른 천사였다.
   그녀의 죽음 후, 나는… 희망을 버렸었다.
   그러나.
   삶에 지쳐 허무하기만 하던 나에게 또 다시 내밀어진 손.

   ―――요리를 하고 싶다면서 왜 이러고 사는 거지? 도대체 남의 등이나 쳐먹으면서 살아가려고 넌 태어난 거냐? 당장 손 씻어!

   집요한 방해라고 할까, 아니면 끈질긴 회유 때문이었을까.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 마음속에 닫아두었던 작은 소망이 고개를 들어서인지도 몰랐다. 결국 나는 그의 밑에서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고 새 삶을 얻었다.

   ―――정식으로 인사할까? 레인이라고 했지? 나는 이델란. 이드라고 부르면 돼.

   새하얗게 고른 치아가 눈부시던 그.

   결국 나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청소를 시작하였다.
   커튼을 걷고 녹이 슬어 잘 열리지 않는 창문을 억지로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깔끔했던 성격의 주인이 머물렀던 곳답게 사물은 모두 잘 정돈되어 있었던지라 먼지와 곰팡이만 제거하고 통풍이 되게 해주는 것만으로 금새 방안은 오래묵은 때를 벗어버린다.

   ―――어때, 우리 가게야. 멋지지? 난 말이야. 이 가게의 체인점을 낼 거야. 바로 저 러스트러스에!

   결국, 그와 나는 독립하여 아담한 가게를 차렸다.
   그가 바라보던 곳은 언제나 하늘 위, 푸른빛으로 빛나는 우리의 모성. 러스트러스.
   달의 주민이 꿈꾸는 곳. 그의 꿈도 그 곳을 향했고 나의 꿈도 그를 따랐다.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던 시절이었지만 그가 있어서 행복했다.
   그러나……
   결국은 나의 과거가 발목을 잡고야 말았다.
   반쯤 구부러진 형태로 붉은 피를 쏟아내던 그의 모습 뒤로 보이던 옛 동료들의 모습. 배신한 자에게 퍼부어진 복수.

   ―――레, 레인? 약속을 못 지…킬 것 같다. 미…안……

   그리고 비명과도 같은 울음으로 퍼진 내 목소리.
   같이 가자고 해놓고, 꿈을 이루자고 해놓고…… 거짓말쟁이! 너는 거짓말쟁이야, 이드.



   나는 뻐근한 허리를 다독이며 퀴퀴한 냄새 대신 산뜻한 바람의 향이 가득히 퍼진 정갈한 모습을 되찾은 방을 바라보았다.
   주인을 잃은 방.
   단지 변한 것이라면 그의 모습이 없다는 사실. 그의 미소에 따라 웃는 내 모습이 없다는 정도.
   굵은 눈물방울이 손등에 떨어졌다.
   그제야 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나는 눈물을 닦았다.



   저녁 해가 지기 시작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집은 나서는 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이제 결심이 섰다. 그를 만나러 가야 할 시간.
   어두운 골목길을 헤매어 언젠가 한번 지나친 적이 있는 장소로 향하였다. 단 한 번 와봤던 곳인지라 기억을 더듬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지만 결국 낡은 건물 앞에 설 수 있었다.
   곧 철거될 것 같은 허름한 건물의 입구에는 ‘재생관리국’ 이라는 간단한 현판이 걸려 있었다.
   인력이 부족했던 지난 시절. 노동력의 대체 상품으로 한때 각광받았었으나 인구의 증가로 사양길에 접어들어선 재생 시스템.
   사고(思考)할 줄 모르고 단지 명령받은 대로만 움직이는, 로봇보다 못한 존재의 재생 인간은 죽은 자의 기억조차 지니지 못한 유기물의 합성체에 불과하다는 점은 잘 알고 있다.
   퇴락해가는 시스템답게 인간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간혹 추억 때문에, 나 같은 인간들 때문에 아직 명맥을 이어가는 듯 하다.
   접수하는 방법에 대해서 설명하는 기계적인 사운드에 맞추어 그의 등록번호를 입력한다.
   E29481-1938. 트레이스 노런지구 이델란.
   잠시 기다려달라는 문구와 함께 합성커피가 제공되었다.
   나는 피우다 만 담배를 그대로 종이컵에 떨군다. 거슬리는 소음을 내며 담뱃불은 꺼져들고 이내 시커먼 커피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계속되는 무료한 시간.

   ―――말도 안 돼. 재생이라니. 노동력만을 위해서 기억조차 지니지 못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고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이건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짓이야!

   “미안――― 이드.”

   무미건조한 울림은 허공을 울려 다시 나의 귓가로 울려퍼진다.
   살아 있을 그라면, 이런 나의 행동에 분노를 표했을 것이다.
   인간은 벌레가 아니다. 꿈을 지니고 있기에, 노력하는 모습이 있기에 살아갈 수 있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인간은 생명으로 태어난 것이라고 말하던 그. 예전에는 그런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빛이 흘러들었다. 그가 지는 온기를 일부 나누어 받는 것만으로도 나는 살아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에게 말하고 싶다.
   달의 주민은, 벌레인지도 모른다고.
   달은 거대한 고치. 본토에 대한 열망만이 우리의 주식.
   언젠가 찬란한 날개를 달고 날아오를 그 날을 위하여 고치 속에서 잠을 자는… 그런 벌레인지도 모른다고.

   “삐익――― 종료되었습니다. E29481-1938. 트레이스 노런지구 이델란. 재생 기간은 노스트러스력 13월 29일 오후 8시까지. 만 24시간입니다. 주의사항은 충분히 숙지하셔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의 앞에 무표정하게 서 있는 환자복 차림의 그가 나타났다.

   “이드…”

   그는 대답이 없었다. 단지 생기 없는 눈동자를 들어 나를 쳐다볼 뿐이다.
   알고는 있었지만, 머리로는 이해를 했지만… 아픔의 파동은 가슴을 후벼놓는다. 어쩌면 예상했던 결과인지도 모른다. 단지 외면하고픈 진실일 뿐.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준비해온 턱시도를 그에게 입혔다.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몸답게 턱시도를 입은 모습은 빼어난 맵시를 보여준다.

   “가자, 이드. 오늘은 내가 멋진 솜씨를 보여줄게.”

   이드는 무슨 말인지 모르면서도 나의 밝은 어조에 환한 미소로 답한다. 세포 속에 각인되어 있는, 예전과 다르지 않은 그의 미소를.
   그의 손을 잡아 이끌며 건물을 나서는 나의 눈동자에 또 다시 안개가 어린다.
   미안……



   나는 이드를 정 중앙의 테이블로 안내했다.
   테이블 위에는 1인용의 ‘데나(정찬용 식사)’를 위한 준비가 셋팅된 상태다.
   몇 번을 닦아 빛이 날만큼 광택을 내는 왼쪽의 포크와 오른쪽의 나이프, 그리고 와인잔과 물컵. 중앙에 자리잡은 새하얀 접시, 그 옆에 놓여진 갓 구운 빵. 분위기를 살리기 위한 한 송이 붉은 장미꽃과 샴페인. 모든 것이 완벽하다.

   “‘르 샤또 드 블랑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늘은 쉐프인 제가 직접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요리가 준비되는 동안 식전주로 셰리주와 베르무트를 준비하였습니다.”

   맑고 투명한 액체가 경쾌한 음향과 함께 글라스를 타고 흐른다.
   그리고 요리를 준비하기 위하여 정중하게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뒤돌아 섰지만 이내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그의 손이 나의 허리를 잡은 것이다. 의아함에 다시 뒤로 돌아선 나의 눈에 비친 그의 모습.
   갓 태어난 아이와도 같은 그.
   불안함에 가늘게 떨리는 눈동자.

   “괜찮아, 이드. 널 혼자 내버려두려는 게 아니야. 말했잖아. 오늘은 그동안 익힌 솜씨를 보여주겠다고.”

   따뜻한 손길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제야 그는 불안한 표정을 풀고 빙긋이 웃는다.

   첫 번째 코스, 오르되브르로 레몬크림소스에 버무린 관자를 사과 속에 채운 요리를 준비하였다. 레몬의 상큼한 향과 사과의 달콤한 맛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 입맛을 돋우는데는 그만이다. 뒤를 이어 맑은 콘소메 스프와 생선요리로 고소한 버터크림소스의 농어를 내었다. 모든 재료는 최상급의 신선한 자연품을 사용하였다.
   처음 보는 호화로운 식단에 어쩔 줄 몰라하던 그도 이어지는 화려한 요리의 홍수에 어린아이처럼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연실 입으로 퍼나르기에 정신이 없다. 물론 테이블 매너라고는 눈에 씻고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몸에 배인 습관만은 어쩔 수 없는 듯 바깥쪽부터 적절하게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내 가슴을 또 한번 아리게 만든다.
   왕성한 식욕을 보여주듯 그는 모든 접시를 깔끔하게 비워내었다.
   메인 디쉬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다.

   “메인 디쉬를 준비하는데 시간이 좀 걸립니다. 죄송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어디까지나 정중한 사과의 말을 건네고 나는 주방으로 향한다.
   나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오늘의 요리는 바로 여기서 승패가 결정된다.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한다.
   도마 위에 놓인 날이 선 칼을 보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죽는다는 것이 두려운 것은 아니다. 단지 나의 선택이 옳은 방법일까? 잘못된 것이라면? 그리고 만약, 만약… 그가 꾸짖기라도 하면 어쩌지? 라는 작은 불안 때문이다.
   그러나 테이블에서 나의 요리를 기다리는 그를 떠올리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가슴에 칼을 넣고 세로로 내려그었다.
   이윽고 방금 전까지 나의 가슴속에서 생생하게 고동쳤을 심장이 손을 타고 밖으로 나왔다.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심장은 리드미컬한 박자로 두근거리며 붉은 실핏줄을 타고 더운 피가 뿜어져 나왔다.
   주르륵―――
   붉은 피가 가슴을 타고, 손등을 타고 흘러 내렸다.
   붉은색일 줄 알았다. 심장이란. 하지만 그것은 연한 분홍색에 가까웠다.
   나는 일순간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렇지만 요리를 해야 했기에 애써 몸을 다잡고 칼을 들었다.
   슬라이스로 굽는 것보다는 통째로 요리하는 방법이 좋으리라. 고기 요리의 씹는 감촉도 요리를 살리는 하나의 요소라는 점을 그에게서 배웠다. 정성을 들여 핏물을 뺀 심장을 냄비에 넣고 올리브유를 끼얹고 굽는다. 고운 분홍색이 섞인 갈색으로 변할 때까지. 먹음직스러워질 때까지.
   점점 현기증이 심해졌지만 이를 악물고 애써 브루고뉴풍의 버섯소스를 곁들인 심장 요리를 시작하였다. 평소의 요리 시간보다 두 배나 되는 시간이 걸려서야 이윽고 요리는 완성되었다.
   나는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접시를 들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늘을 위해 준비한 스페셜 요리, 이델란의 만찬(Le Festin de EIdelan)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어린 송아지의 심장을 메인 디쉬로 준비하였습니다. 모쪼록 즐거운 식사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사죄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의 요리는 이것으로 끝낼까 합니다. 로스트와 디저트를 준비하지 못한 점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조용하게 울려퍼지는 나의 말에는 상관없이 그는 새로운 요리에 눈을 빛내며 나이프를 든다. 순간 나의 무릎이 한 꺼풀 꺾였지만 테이블을 잡고서야 간신히 쓰러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새하얀 접시 위에 분홍빛이 도는 연갈색 고기가 각기 세방향으로 놓여져있고 그 위에 카라멜 빛깔의 진한 갈색의 소스가 향긋한 내음을 풍기며 끼얹어져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곁들여져 있지 않았고 오로지 선명하게 금박이 박힌 새하얀 종이만이 가나쉬 대신 반듯하게 세워져있었다.
   그가 고기 한 점을 썰고 소스를 듬뿍 찍어 입으로 가져간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들여 천천히 씹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만족스러운 요리를 먹었을 때 떠오르던 그의 미소가. 언제나처럼. 그때처럼……
   더 이상 서 있을 힘이 없다.
   백색의 조리복을 타고 흐르는 피가 이미 발끝에 웅덩이를 만든 지 오래다.
   반으로 접힌 한 장의 종이쪽지. 그것은 러스트러스 관리국에서 온 편지였다.
   달의 주민이 모성으로 갈 수 있는 몇 가지 안되는 방법 중 하나. 관리국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자들만이 특별히 그 곳에 자신의 가게를 가질 수 있었다. 그의 꿈이 실현되었는지 아니면 또 다시 거절의 편지일지, 안을 보지 않았던 자신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것을 읽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이드이길 바라기에.
   행복하게 식사를 하는 모습을 눈에 담는 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의식의 끈을 놓아버렸다.

   “이드…”

   언젠가 말했지? 러스트러스에 가자고. 둘이 함께가 아니라면 꿈은 의미가 없어.
   이드, 같이 가. 우리의 모성으로. 언젠가…… 다시 눈을 뜰 그 날에. 같이 가자.

   나는 달의 고치 속에서 꿈을 꾼다. 영원히 깨지 않을 그와의 꿈을.




BGM: ∀ Gundam 2nd Ending Song ‘月の繭(달의 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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