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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인간놀이

2004.04.30 22:4404.30

   사내는 붉은색 남방만 입고 있다. 옷장을 살펴보지만 마땅히 입을 만한 옷이 없다. 단지 입을 옷이 없다는 이유로 자살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내는 내 얼굴을 힐끔 바라보지만 그것은 단지 한 쪽 벽을 바라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사내는 옷을 벗고 있는 중이었다. 붉은색 조명은 방 안 전체를 비추지 못한다. 사내는 조명 밑에서 전구를 매만지고 있다. 붉은색 조명은 사내만을 비추고 있었다. 내 하품 소리에 놀란 사내는 동작을 멈추고 조명 아래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아직은 자신의 몸동작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았다. 사내가 옷을 입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벗고 있는 것인지조차 나는 제대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나 역시 사내를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무작정 조종해보려고 하는 내 방식이 오히려 사내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었다. 사내가 갑자기 전화기를 집어들어 말을 하고 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거지. 제발 나를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해줄 수 없나.’
   사내는 순식간에 수화기를 내려놓고 다시 옷을 입고 있다. 조명은 꺼졌지만 사내의 몸은 여전히 붉은색이었다. 이마에서 흐르는 피로 온몸이 붉어져 있다. 사내는 그제야 손으로 자신의 몸에 묻어 있는 피를 닦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이미 피를 멈추게 만들었지만 사내는 여전히 피를 닦고 있는 것 같은 손동작을 반복하고 있다. 피가 닦인 부분을 조명 아래에 갖다댔다. 하지만 조명은 이미 꺼져 있다. 더 이상 움직일 필요가 없음을 깨달은 사내는 구석으로 걸어가 다시 인형이 되었다. 영상 속의 인형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인형 눈에는 나 역시 인형으로 보일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사내는 자신을 인간으로 착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지금 인형은 나를 쳐다보면서 입을 벙끗거리고 있지만 아직은 말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이 안에 설치된 확성기를 통해서 인형의 말이 들려 올 것이다. 그때 인형의 말에 대답을 해주면 된다. 인형 역시 시간이 지나면 내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인형은 자신의 공간 안에서 벽에 비치는 또 다른 영상을 바라보고 있다. 내게서 등을 돌린 채, 아직 움직이지 않는 새로운 영상을 경직된 자세로 바라보고 있다. 몸에 경련이 일어났는지 사내는 순간적으로 머리를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서서히 몸의 조각들이 녹아내리더니 어느새 인간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새롭게 돌아가는 영사기에서는 다시 사내가 옷을 벗고 있었다. 옷에는 온통 피가 묻어 있었다. 침대에 쓰러져 있는 시체에서는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사내는 아직도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내가 찌른 건 분명 인형이었어!’
   인형은 항상 바닥에 놓여 있었다. 내가 살인의 욕구를 느낄 때마다 사내는 인형을 한차례씩 찔러왔다. 붉은 조명 때문에 시체에서 흐르는 피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내가 들여온 것은 분명 인형이었다. 하지만 사내가 왜 이런 인간적인 고민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도 인형에 불과하면서 살인이라는 터무니없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사내는 오직 내 눈에만 인간으로 보이는 인형일 뿐이었다. 사내의 몸짓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었다. 이 사건 때문에 당분간 사내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내 생각이 의외로 빨리 사내에게 전달되고 말았다. 사내는 자신이 인형인지 인간인지 실험을 하기 위해 여인의 몸에 꽂혀 있던 칼을 빼내어 자신의 배를 찔러보았다. 얼굴에 눈썹이 없는 여인이 잠에서 깨어나기 전, 나는 사내의 몸에 묻어 있던 피를 말끔하게 닦아놓았다. 자살극에 성공한 여인은 일어나서 칼에 찔려 있는 인형을 침대에 눕혔다.


   1.
   눈을 뜬 상태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다르다. 뚝뚝 끊기는 듯한 소리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소리는 명료하지만 오히려 그 명료함이 생각을 방해한다. 인형들은 내가 눈을 뜬 후부터 매우 거칠게 행동을 하고 있다. 내 명령 따위는 완전히 무시해버리고 있다.
   초인종 소리가 들리고 눈썹 없는 여인이 방 안으로 들어왔을 때, 이미 나는 본래의 상태인 인형으로 변해 있었다. 여인은 자신이 날짜 계산을 잘못했음을 깨닫고는 낙심한 표정으로 내 앞에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인형으로 되돌아가는 날이 내일이라고 착각한 것이었다. 앞으로 삼일 동안 나는 이 상태로 지내게 될 것이었다. 여인 역시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침대 옆에 서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움직여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만 동작을 최소화시켜서 부자유스럽게 움직일 뿐, 시간의 대부분을 움직였던 자리에서 이내 정지한 채로 보낼 것이었다. 그리고 가끔씩 입을 벌려 말을 하는 듯하지만 소리는 여전히 들려오지 않을 것이었다. 어느 때 지금의 소리 역시 확성기를 통해 몇몇은 알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전화 벨소리가 들려왔지만 아무도 받을 수 없었다. 여인 역시 마네킹인 상태가 매우 편안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내 몸이 완전히 정지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여인은 내가 여전히 인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인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난방을 잠갔다. 여인이 온도에 민감하듯 나 역시 온도에 민감하지만 여인은 그런 나를 인정하지 않았다. 인형임에도 내 생각은 정지하지 않는다. 나는 저 여자가 마네킹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어떻게 저 여자가 갑자기 마네킹으로 변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나처럼 인형이 인간으로 변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정확히 말해서 내가 인간으로 변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여인은 나를 자신과 똑같은 인간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나는 인간이 아니라 인조 피부를 가진 인형이었다. 나는 이런 사실을 불과 몇 분전에야 알 수 있었다.

   또 한 번 나는 자신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나는 지금의 상태로 접어들었고, 마찬가지로 조금씩 변해갈 것이었다. 하지만 변화해가는 과정을 나는 미리 짐작할 수 없다. 그것은 언젠가 또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통해서 밝혀질 것이었다. 대변을 보기 위해 잠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인형임에도 나는 정지된 동작에서 가끔 피로를 느꼈다. 화장실을 나와서 방으로 들어갔을 때 여인은 아직도 나와 똑같이 닮은 인형의 발을 밟고 서 있었다. 여인의 하체와 나를 닮은 인형을 동시에 바라보았다. 억압에서 벗어나려면 나에게 새로운 병이 생겨야 한다. 매번 같은 인형만을 만들고 부수는 행위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인형은 가끔씩 자신이야말로 진짜 인간이라고 고집을 피우기도 했지만 그 덕에 우리는 조금 더 살이 쪘을 뿐, 생각은 변한 것이 없었다. 내가 이상한 소리를 낼 때마다 여인과 인형은 동시에 나를 쳐다보았다. 가까이 다가가 입으로 종소리 비슷한 음을 계속 냈다. 인형의 오른쪽 배와 가슴을 오랫동안 뚫어지게 바라보았더니 인형도 자신의 오른쪽 배와 가슴을 쳐다보았다. 한동안 그렇게 인형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여인은 내 발을 밟고 서 있었다. 여인은 마네킹으로 변한 상태에서도 조금씩 늙어갔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여인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여인은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변한 채 들어왔다. 인형은 조금 전보다 훨씬 살이 쪄 있었다. 여인은 손으로 눈을 비비면서 인형과 나를 쳐다보았다. 가방에서 안경을 꺼내어 자신의 눈에 끼워보고 나서야 또 한 번 우리가 확실히 둘임을 알아챈 것 같았다. 그리고 여인은 인형 쪽으로 걸어갔다. 인형은 나를 비추는 거울에 불과하지만 나보다 조금 살이 쪄 보였다. 여인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살찐 자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여인이 인형 앞에 서 있게 된 이상 이제부터는 조금 더 인형을 병들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인이 자신 앞에 있는 게 한낱 인형일 뿐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기 전에 내가 앓고 있는 병을 모조리 인형에게 전염시켜야 했다.
   심장을 명치 쪽으로 옮겨놓으니 호흡하기가 훨씬 쉬워졌다. 벽에 비춰지고 있던 영상이 순간 흐릿해지면서 사라지는가 싶더니 다시 방 안이 어두워졌다. 영상은 더욱 뚜렷해졌다. 정말 심장이 명치 쪽으로 옮겨졌는가에 대한 의심 때문에 어느새 심장은 제자리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다시 목이 뻣뻣해지면서 재채기를 했다. 인형은 여인에게 몇 번이고 아름답다는 말을 해주었다. 당분간 여인은 살찐 인형 곁에서 그와 똑같이 자신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었다. 여인 역시 우리가 병자이기 때문에 자신과 섹스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병자가 아니라면 우리는 이 방에 갇혀 있지 못할 것이었다. 인형과 내가 볼 수 있는 타인은 오직 이 여인 하나뿐이었다. 병자로 머무는 한 우리가 여인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인간과의 섹스를 계속 시도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여인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타인이 곁에 있으면 나와 인형은 더욱 병들고 만다. 타인과 나를 비교하면서 우리가 불완전한 인형이 될 수밖에 없는 증거를 계속 발견한다. 병자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게 될 즈음 여인은 음식을 잔뜩 들고 우리를 찾아와서는 서툰 병자 흉내를 낸다. 배가 부른 상태에서는 병자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여인은 모르고 있었다.

   인형이 거칠게 호흡을 하는 것을 보고 여인도 그 앞에서 인형만큼이나 기계적인 호흡을 하고 있었다. 방 안에는 셋의 호흡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형광등의 소음도 우리들의 호흡 소리 때문에 들을 수 없었다. 누군가가 계속 자신의 눈을 가리려고 한다는 여인의 말을 듣고, 나는 잠시 그녀도 내가 조종하는 인형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나는 여인에게서 성욕을 느꼈다. 하지만 여인에게 옷을 벗으라고 명령했는데도 그녀의 옷은 벗겨지지 않았다. 인형은 다시 명치의 통증을 호소하며 눈을 치켜 떠 방 안을 둘러보았다.

   복도에서 소년과 소년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이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소년의 어머니는 빠르게 걷고 있는 소년의 팔을 낚아채며 손에서 무언가를 빼앗는다. 둘은 벽에 몸을 기댄 채 고개만 살짝 내밀어, 의자에 앉아 있는 내 눈을 몰래 훔쳐보고 있다.

   방 안에서 풍기는 역겨운 냄새를 나 이외에는 아직 아무도 맡지 못하고 있었다. 여인이 주위를 둘러보면서 코를 킁킁거리지만 오히려 자신의 코를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집 안에서 무언가 썩어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찾아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혹시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게 되면 냄새의 정체는 내 몸 속에서 내장이 썩어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여인이 또다시 밖으로 나갔다. 이 생각을 하는 순간 여인은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노려보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인형의 배에서는 계속 고양이 울음소리와 비슷하게 공기가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인형의 목을 주물러주자 어느새 그 소리는 사라졌다. 인형의 배설물을 보고 나서야 역겨운 냄새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아직까지 인형을 죽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살인의 욕구를 느낀 뒤에 나 스스로가 그것을 억제하려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명치의 통증을 잊기 위해 인형은 잠시 자신의 상체를 몇 번 비틀더니 엉뚱하게도 오디오를 작동시켰다. 나는 어느새 통증을 잊은 채 노래의 한 부분만을 반복해서 되뇌고 있었다.

   무대에는 조명도 비춰지지 않았다. 뒤쪽에는 검정색 커튼이 쳐져 있다. 커튼 사이로 성별을 구분할 수 없는 사람이 얼굴만 내밀어 주위를 살피더니, 검정색 치마를 입은 모습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무대 가운데로 걸어나오고 있다. 바닥에 침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온다. 뒤이어 네 사람이 차례로 첫번째 사람의 동작을 흉내내면서 걸어나와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 그리고 점차 그들은 제자리에서 빠르게 달리고 있다. 커튼이 인공의 바람에 의해 물결치듯 출렁이고 있다. 무대에서는 소변 냄새가 진동하고 있다.

   인형은 가래 끊는 목소리로 계속 그들이 누구냐고 물어보지만, 그들의 얼굴이 불분명해서 누구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해주었다. 갑자기 인형은 음악을 바꾸어버렸고, 내 얘기 역시 중단되었다. 그 순간 인형이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꼈다. 단지 이야기가 흥미롭지 못하다는 것 때문만은 아닐 것이었다. 내가 인형의 다리를 노려보고 있는 상태에서도 그는 거의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미세하게 다리를 움직여 내게로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다시 여인을 불러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타인이 옆에 있으면 나와 인형의 행동은 다소 경직되게 마련이었다.
   여인은 우리들 앞에서 옷을 모두 벗은 후 인형에게로 다가갔다. 여전히 여인은 나와 인형을 반대로 착각하고 있었다. 저자가 당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며 인형에게서 내 곁을 떠날 것을 강요했다. 그러자 나와 똑같은 증상을 앓고 있는 인형이 밖으로 나갔다. 나는 여인도 이곳에서 내보내야 할지 망설였다. 인형이 사라진 뒤로 우선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인형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내가 왜 외출을 하지 않으려는가에 대한 설명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여인 역시 왜 자신이 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옷을 모두 벗었는지 우리에게 설명을 하지 못했다. 그저 누군가에 의해 명령을 받은 것처럼 행동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외출을 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했느냐고 추궁하는 인형에게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나서 습관적으로 몸을 씻고 나면, 나는 옷을 입힌 인형에게 외출해서 있었던 일에 대한 급조된 기억을 들려주었다. 몇 마디의 말밖에 꺼내지 않았는데도 인형의 뱃속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들렸고, 머리 조각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인형이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어주면 나는 역시 습관적으로 낮잠을 잘 수 있었다.

   나는 목이 따끔거리는 통증을 참아가며 2층 창가에 앉아 있었다. 창문은 마치 영상을 보여주는 화면과 같다. 다양한 풍경들이 창문을 통해서 보이고 있다. 하지만 영상이 보이는 순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창문에 무엇인가가 보일 것이라는 생각에 집중을 해야 하는데, 한 사내가 의자에 앉은 채로, 나 역시 순간적으로 사내를 보았기 때문에 그의 모습을 설명할 수 없다. 한 사내가 의자에 앉은 채로 내 얼굴을, 그리고 꽃향기와 같이 향긋하지만 전에는 맡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냄새가 풍겨온다.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 사내를 발견하고, 그 순간 나는 목이 뚫려 골이 지끈거릴 만큼 기침을 했다. 사내를 발견한 후부터 더 이상 사내가 두렵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미 모습이 희미해지고 있다. 사내 역시 이곳에 혼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우리는 동시에 서로 타인을 의식한 것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고는 그가 왜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지에 대해 생각하려 한다. 그리고 기침 때문에 잠을 깨고 말았다.

   옷 입은 인형이 내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있는 것으로 봐서 지금 내가 인형에게 꿈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꿈 얘기를 잠시 멈추는 동안 인형은 자신의 마비된 오른쪽 몸을 움직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인형의 마비된 몸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했다. 하지만 나 역시 인형과 똑같은 증상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꿈에 대한 상상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매우 순간적이기는 하지만 나는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때가 있었다.

   여인은 자신이 마네킹으로 변해버렸다고 생각하는 순간 매번 밖으로 뛰쳐나갔다. 사실 여인이 이곳에 있어야 할 시간은 지속적이지 못하다. 여인의 몸동작은 우리들에 비해 지나치게 빠르기 때문이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나와 인형은 속이 메슥거릴 정도로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우리들 때문에 자신의 행동 역시 느려지다가 결국에는 굳어지게 되고, 그러면 여인은 우리에게 심한 욕설을 퍼부으며 방을 나간다. 그러고 나면 나는 느려지던 인형의 몸짓을 몇 시간의 노력 끝에 다시 완전히 정지시켜 놓는다.

   의자에 앉기 전에 인형은 또다시 많은 양의 음식을 먹어야 했다. 음식이 식도까지 차올라와 있는 듯한 피곤함을 느끼면서도 꾸역꾸역 음식을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하지만 의자에 앉은 지 한 시간만 지나면 다시 뱃속에서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릴 것이었다. 의자에 앉아 있기 위해서는 또다시 식도까지 차오르게 음식을 꾸역꾸역 집어넣어야 했다. 하지만 의자에 앉는 것을 포기한다면 음식 따위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었다. 인형은 절대 허기를 느끼지 못할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또다시 음식을 먹고 있다. 물론 나는 인형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계속 나를 인형이라고 부를 것이었다. 실제로 내 몸짓은 눈을 치켜뜨고 있는 인형처럼 경직되어 있다.
   인형은 하루 동안 아무런 음식도 입에 대지 않았다. 허기를 느끼는 자는 자신이 아니고 나라는 생각 때문에서일 것이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이라고는 인형과 함께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그럼에도 뱃속에서 계속 꼬르륵 소리가 들리는 것은 내가 지금 의자에 앉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갑자기 의자에서 떨어졌다. 의자에 앉은 상태에서 몸이 비틀거리는 착각에 빠질 만큼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바닥으로 고꾸라질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실제로 몸이 비틀거린 것이었다, 라는 생각이 끝나자마자 다시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얼른 양손으로 의자 팔걸이를 움켜잡았다.
   인형의 오른쪽 갈비뼈는 피부 표면에 붙어 있었다. 허리를 구부릴 때마다 갈비뼈가 피부를 찔러 대기 때문에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다. 갈비뼈를 떼어낼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렇게 되면 인형의 몸무게가 지나치게 줄어들 것을 우려해 떼어내는 것은 포기했다. 인형에게 있어 몸무게의 감소는 갈비뼈가 피부를 찔러대는 불편함보다 더욱 참을 수 없는 고통일 것이었다. 왜냐하면 인형의 몸무게는 절대 늘어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2.
   나는 지금까지 침묵만 하고 있었다. 나를 닮은 인형은 내가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에 갖가지 행동을 벌였다. 심지어 나의 형태까지 변화시키면서 나를 인형 취급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실제로 나 역시 내가 인형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내 앞에 있는 인형에게 생명이 있는 인간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기지개를 켰다. 그러자 그동안 내 앞에서 인간인 것처럼 행색을 하던 인형이 갑자기 행동을 멈추었다. 인형에게로 다가가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겼다. 나는 옷을 입고 뚜벅뚜벅 방 주위를 맴돌았다. 물론 크게 변화된 것은 없다. 인형이 나 대신 행동하고 내 생각을 대변해주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기지개를 켰을 뿐이다.
   방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뒤이어 낯선 여인이 인형에게 입힐 옷을 들고 들어왔다. 여인은 계속 미소 짓고 있는 얼굴을 한 채로, 인형에게 옷을 입힌 후에 내가 서 있던 자리로 인형을 옮겼다. 인형은 내가 입고 있는 옷과 똑같은 옷을 입었다. 인형의 말대로 오른쪽 갈비뼈에 통증이 느껴져서 손으로 그 부위를 만져보았다. 반짝거리는 갈색 머리에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낯선 여인은 하이힐을 벗지도 않고 인형 옆에 서 있었다. 가는 팔과 다리는 손질이 잘된 플라스틱처럼 윤기가 났다. 머리색이며 원피스, 하이힐 그리고 피부까지 모두 여인에게 잘 어울렸다. 계속 미소만 짓고 있는 표정까지도 여인이 지을 수 있는 표정 중에서 가장 완벽한 표정 같았다. 그러한 것은 여인 옆에 세워져 있는 인형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인과 인형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갑자기 대변을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꽤 오랫동안 대변을 보지 못했다. 나는 여인 앞에서 옷을 벗어도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여인과 인형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로 서로 마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는 인형의 몫까지 내가 직접 움직여야 했다. 우선 인형이 앓아 왔던 병들이 모두 사실이었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벌써부터 변기에 앉자마자 호흡의 장애를 느꼈다. 대변을 보면서도 뱃속에서는 계속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인형은 지금 여인과 함께 있기 때문에 아무런 육체적인 통증을 느끼지 않을 것이었다. 마치 나까지 동일하게 앓고 있는 것처럼 말해 왔던 인형의 병을 실제로 물려받은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느꼈다. 이런 생각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우려 때문에 정신이 더욱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인형 역시 마치 이물감이 박혀 있는 것처럼 명치 오른쪽 부위의 불쾌감을 느끼고 있을지 몰랐다. 이것 때문에 어느 곳에도 제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앉기만 하면 실제로 뱃속에 이물감이 들어 있는 것처럼 통증은 강렬했다.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얼른 바지주머니에서 반창고를 꺼내어 일부를 잘라 인형의 배에 붙여주었다.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꿈을 꾸었다. 한 사내가 방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오더니 나를 침대에서 일으켰다. 진열대에 놓여진 마네킹을 훔쳐 달아나는 것을 보며 여기까지 쫓아왔다는 것이다. 인형 옆에 서 있는 낯선 여인을 마네킹이라고 착각하는 사내가 섬뜩할 정도로 무서웠다. 사내는 낯선 여인을 발견하더니 내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는 그곳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여인을 번쩍 들어 어깨에 메고 곧장 문 밖으로 나갔다. 여인은 사내에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여인이 끌려간 뒤에도 인형은 계속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노려보았다. 여인을 찾아오기 위해서라도 나는 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전화 벨소리 때문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인형은 고개를 돌려 다시 여인을 바라보았다. 수화기에서는 또 다른 사내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주문하신 마네킹은 잘 받으셨습니까?”
   낯선 여인 때문에 머리가 더욱 혼란스러웠다. 여인을 이 방에서 내쫓기 위해 사내처럼 저 여인을 번쩍 들어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인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몸에 손을 대려는 순간, 인형과 여인이 서로 손을 마주잡고 있음을 알았다. 우선은 둘의 손을 떼어놓아야 했다. 그 순간 또다시 누군가 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가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 사내가 마네킹을 바닥에 내려놓으면서 나에게 영수증에 서명을 해달라고 했다. 어느새 내 뒤에 서 있던 여인이 사내에게서 영수증을 가로채더니 자신이 직접 그곳에 서명을 했다. 마네킹은 생김새와 옷차림이 여인과 똑같았지만 임신한 여자처럼 배가 불룩하게 튀어나왔다. 마네킹을 내 옆에 세워놓더니 여인은 다시 인형 곁으로 걸어갔다. 둘은 손을 잡은 채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그들의 자세는 임신한 모습의 마네킹과 내가 취하고 있는 자세와 서로 일치하고 있었다. 내 앞에 서 있는 것이 마네킹이 아니라 실제 여인이라면 나는 이렇게 오랫동안 한 여인의 눈을 바라보며 서 있지 못했을 것이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아마도 이 마네킹에게 사랑을 느끼게 될지도 모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여인은 나를 닮은 인형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저 여인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몰랐다. 내 앞의 마네킹은 언제든 내가 고개만 옆으로 돌리면 여인이 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나를 닮은 인형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 역시 언제든 고개만 옆으로 돌리면 자신 앞에 있는 인형을 살아 있는 남자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생명이 없는 것을 각자 차지하고 있었다.

   여인이 내 앞에 세워져 있는 임신한 모습의 마네킹에게 다가와서 머리를 손질해주고 있었다. 나 역시 인형에게로 가서 옷매무새를 새롭게 고쳐보기도 하고 팔이며 다리의 동작을 다양하게 바꿔보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나 자신이 인형으로 착각한 채 한정된 동작만으로 지냈기 때문에 어떤 것이 조금 더 자연스러운 동작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인간답게 보이는 동작은 이 인형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인 역시 계속 마네킹 주위를 맴돌면서 치마 앞부분에 희미하게 주름까지 주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여인은 잠시 침대 쪽으로 걸어가더니 거기에 있던 자신의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꺼낸 후 다시 마네킹에게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손에 든 작은 가방 속에서 화장품들을 꺼내 마네킹의 얼굴에 새롭게 화장을 해주었다.  
  나는 가능하면 인형을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팔과 다리를 여러 동작으로 조종해보았다. 하지만 여인은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네킹에게 화장을 해주다 말고 내 옆에 와서는 인형의 팔과 다리를 원래대로 펴놓았다. 마네킹의 머리 손질까지 끝마친 여인이 내 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보며, 나 역시 화장품 냄새가 풍기는 마네킹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화장실로 가서 수건을 물에 적셨다. 화장품 냄새 때문이라기보다는 왠지 화장한 얼굴 때문에 전혀 마네킹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을 한 마네킹의 얼굴을 젖은 수건으로 문질렀다. 그러는 동안 여인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나를 닮은 인형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마네킹의 손톱과 발톱에 칠해진 매니큐어까지 닦아내고 있을 때, 여인이 갑자기 인형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인형에게서 뒤로 한 발짝 물러선 후 천천히 옷을 벗었다. 여인의 배에는 세로로 꿰매진 수술 자국이 있었다. 여인이 자신의 모습과 똑같은 마네킹을 주문했을 때에는 자신 역시 임신을 하고 있던 상태였을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여인이 마치 인형에게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그는 유리창을 통해서 줄곧 나만 쳐다보고 있었어요. 주위로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종종 그를 훔쳐보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오직 나만 쳐다보고 있었어요. 나는 언제나 그가 서 있는 길 건너편 상점 안에 서 있었어요. 내가 있던 상점은 옷을 파는 곳이었고, 그 당시 나는 분홍색 옷을 입고 그곳에 서 있었어요. 새벽이 되면 언제나 그가 나를 찾아왔어요. 이번에 입고 있는 분홍색 옷은 특히 나한테 잘 어울린다는 말도 해주었어요. 그는 내가 그곳 상점에 오기 전부터 길 건너편 유리창 안에 서 있었어요. 그리고 어느 일요일 아침이 되었을 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어요.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었어요. 그리고 배가 불러올 즈음 나는 그 상점에서 도망쳐 나온 거예요. 그 역시 지금 당신에게 입힌 옷을 입고 있었을 때가 가장 멋있었어요.”

   내가 인형의 몸에 손을 대려 하자 여인은 나를 쳐다보며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나는 취하려던 동작을 멈추고 겁에 질린 듯이 여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인형 노릇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 내 앞에서 말을 하자 몸이 갑자기 굳어져버린 것 같았다. 그러고는 자동적으로 여인의 말을 속으로 흉내냈다. 인형이었을 때에도 이와 비슷한 증상을 보였다. 아무리 말을 하려고 해도 도무지 혀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내 앞에서 중얼거리고 있는 인형의 말소리를 계속 속으로 따라하고만 있었다. 인형이 말을 멈추면 나 역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대신 ‘혹시 내가 진짜 인형이었던가’라는 생각만을 계속 되뇌고 있었다. 인형이 다시 말을 시작하면 목소리의 특징까지 그대로 흉내내면서 글자 하나 틀리지 않게 되뇌었다. 소리를 내어 말을 하지 못했던 것과 인형의 말을 똑같이 흉내낸 것의 이유를 나는 알지 못했다. 인형이 기침을 하면 나는 그 기침까지 속으로 똑같이 흉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나 자신이 점점 인형이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지금 인형의 몸에 손을 대려는 순간 또다시 이런 어처구니없는 증상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번의 경우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나 자신이 인형이 아니라는 사실을 내가 확실하게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똑같은 증상을 겪게 되더라도 ‘혹시 내가 진짜 인형이 아닐까’라는 두려움은 갖지 않았다. 나는 목소리까지 가늘게 만들면서 여인의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마치 독서를 하고 있는 것처럼 나는 여인의 말을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물론 나의 모든 동작도 역시 정지한 상태였다. 여인의 말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흉내내기 위해서는 최대한 정신을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저자를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어요. 우리 셋이서 끊임없이 아무 말이나 내뱉으면 되는 거예요. 달아나면서도 계속 큰 소리로 아무 말이나 외치기만 하면 된다구요. 그러면 저자는 우리를 붙잡을 수 없을 거예요. 소리치면서 달아나면 우리는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예요.’
   앞으로는 절대 인형의 몸에 손을 대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인형의 몸에 손만 대지 않는다면 여인도 나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여인은 옷을 입지 않았다. 분홍색 원피스가 여인에게 매우 잘 어울렸기 때문에 나는 여인이 다시 그 옷을 입고 있기를 바랐다.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임신한 모습의 마네킹 역시 분홍색 원피스가 매우 잘 어울렸다. 하지만 마네킹의 얼굴에 칠해져 있던 화장이나 매니큐어 따위에는 전혀 눈길이 가지 않았다. 여인이 마네킹에게 화장을 해준 것도 어쩌면 내가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이 아니라 마네킹의 모습 자체를 보길 바랐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 역시 옷을 걸치지 않은 마네킹에게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몸에 힘줄이 전혀 보이지 않는 여인의 나체를 감춰주고 싶었다.
   여인은 다시 침대 옆으로 가더니 가방 속에서 다른 옷을 꺼내 입었다. 그 옷은 여인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임신한 모습의 마네킹 얼굴에는 화장이 제대로 닦이지 않아서 얼룩이 져 있었다. 나는 여인과 마네킹을 모두 이 방에서 치워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나는 여인에게 다가가 강제로 옷을 벗기고 분홍색 원피스를 입히려 했다. 하지만 여인은 몇 차례나 내가 분홍색 옷을 입히면 다시 그 옷을 고스란히 벗었다. 여인은 다시 이곳에 처음 나타났을 때의 얼굴 표정을 짓더니 인형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나 역시 여인에게 옷 입히기를 포기하고 마네킹 곁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화장이 덜 지워진 마네킹의 얼굴을 보는 순간, 마네킹이 입고 있는 분홍색 원피스마저 괜히 볼품없어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방 한쪽 구석에 놓아두었던 가방 속에서 새로운 마네킹 얼굴을 꺼내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우선 임신한 모습의 마네킹 얼굴을 몸에서 떼어낸 후 들고 있던 얼굴을 끼워 넣었다. 마네킹의 얼굴에는 눈썹이 없었지만 여전히 분홍색 원피스만큼은 잘 어울렸다. 그제야 여인은 침대 곁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져 있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돌아왔다. 한동안 여인은 인형 앞에 서 있으면서도 계속 바닥에 떨어진 마네킹 얼굴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과 닮은 마네킹 얼굴을 주워들더니 다시 화장을 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주방 쪽으로 걸어가 작은칼을 가지고 와서 마네킹 얼굴을 더욱 갸름하게 보이기 위해 볼을 조금씩 긁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점차 양쪽 볼은 균형이 맞지 않아 보기에도 흉측하게 변해갔다.

   여전히 나는 동작을 바꿀 때마다 현기증이 나고 호흡이 일시적으로 끊기는 탓에, 가능하면 움직이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마네킹의 턱을 어느 정도 갸름하게 다듬는 데 성공한 여인은, 일어서서 내 앞에 세워진 마네킹의 눈썹 없는 얼굴 역시 칼로 긁어내고 있었다. 입술 끝 부분을 조금 파내어 표정 자체를 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마네킹의 얼굴을 칼로 긁어내고 있는 여인의 동작이 조금씩 느려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지루함을 없애기 위해 책상 서랍에 넣어 둔 노란색 테이프를 가져 왔다. 여인의 손동작이 느려진 탓도 있겠지만, 한쪽 얼굴이 움푹 파인 마네킹 얼굴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인의 행동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녀를 도와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옷이 입혀진 마네킹의 몸을 테이프로 둘둘 말아버리는 것이었다. 마네킹의 몸을 테이프로 감고 있는 동안 여인의 손동작은 조금 빨라졌다. 그리고 나머지 테이프로 열려진 방 문과 창문을 가로로 띠처럼 여러 줄 쳐 놓았다.
   여인의 머릿속에는 언제라도 인형과 마네킹을 데리고 이곳을 도망칠 계획이 들어 있음을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열려진 문과 창문에 저렇게 테이프가 쳐진 것을 보았을 때에는 쉽게 그것을 끊고 나갈 수 없을 것 같아 보였다. 실제로 작업을 끝내고 문과 창문을 보았을 때 쇠창살보다 더 강력한 구속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병적으로 자신들의 도피를 막으려는 나의 섬뜩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나 자신은 아무래도 저 테이프를 끊고 나갈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에 다소나마 마음이 놓였다. 혹시 이 모든 것이 서로 반대일 수도 있을 것이었다. 저들은 이곳을 나가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고, 그런 저들을 이곳에서 내보내려고 애쓰는 자는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계기였는지는 모르지만 얼마 전부터 오히려 살찌는 것을 혐오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줄곧 나를 괴롭혀오던 소화불량이 완전히 치유가 됐다. 오히려 살 빠지는 것을 지나치게 두려워했을 때, 그것에 일조를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소화불량은 더욱 고통스럽게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인형과 여인, 마네킹을 이곳에 가둬두려고 할 때, 어쩌면 저들은 매우 쉽게 이곳을 빠져나갈지도 모른다.

   문마다 테이프를 쳐 놓은 모습을 보면서 여인은 또다시 입을 열었다.
   ‘언젠가 비대한 몸집의 사내가 저를 수용소 같은 곳으로 데려간 적이 있었어요. 사내는 제게 아무런 옷도 입히지 않고 쇠창살이 쳐진 문 앞에 세워 놓았어요. 이런 곳에서 내가 무슨 쓸모가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어요. 저를 문 앞에 세워 놓고 나서 사내는 복도 쪽으로 사라졌어요. 수용소 안에는 역시 알몸의 낯선 사내가 의자에 쪼그려앉아 있었어요. 방 한쪽 구석에는 커다란 직사각형 거울이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알약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어요. 바닥에는 사내의 것으로 보이는 머리카락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어요. 의자에 쪼그려앉아 있던 사내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그저 방 안에서 나를 쳐다보기만 했어요. 날이 어두워지자 하늘색 제복을 입은 또 다른 사내가 나타나 저를 데려갔어요.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나는 어제 서 있었던 창살 문 앞에 다시 놓여졌어요. 방 안에 있던 사내는 그날도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어제처럼 의자에 앉아 나를 쳐다보기만 했어요. 다시 날이 어두워졌을 때 하늘색 제복을 입은 사내가 나를 그곳에서 데려갔어요. 나는 날이 밝기를 기다렸지요. 수용소에 갇혀 있는 사내가 여전히 의자에 앉아 창살 너머를 바라보면서 내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어요. 다음날 아침에 나는 다시 사내 앞에 서 있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비대한 몸집의 사내에게 이끌려 수용소를 떠날 수밖에 없었어요. 수용소 안에 갇혀 있던 사내는 3일 동안 의자에 앉은 채로 그저 나를 쳐다보고만 있었어요. 그가 아직도 수용소에 갇혀 있는지 궁금해요.’
   여인의 말을 속으로 되뇌고 있는 동안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인은 처음부터 몇 마디의 말밖에 하지 않았을 뿐이고, 나머지 말들은 나 자신이 스스로 기억해 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인이 수용소를 떠난 뒤에 일어났던 사내의 행적까지 말하려는 순간 나는 정신을 차린 것이었다. 여인은 분명히 그 부분까지는 알지 못할 것이었다. 여인은 어느새 테이프가 쳐진 창문 앞에 똑바로 선 채로 나를 닮은 인형을 쳐다보고 있었다. 둘의 모습은 수용소에서 창살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쳐다보던 때와 너무나 흡사한 자세였다.


   3.
   물로 씻기 위해서 바닥에 떨어진 마네킹의 얼굴을 주워 화장실로 가져갔다. 타월에 비누를 묻혀 마네킹의 얼굴을 문질렀다. 그리고 물로 비눗기를 씻어내니 화장 자국은 말끔히 씻겨졌다. 깨끗해진 마네킹 얼굴을 들고 화장실을 나오는데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여인은 그때까지도 창문 앞에 선 채 인형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마치 인형인 것처럼 동작을 멈춘 상태로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번의 초인종이 더 울린 다음 복도 쪽에서 굽 낮은 여자의 발소리가 서너 번 들려 왔다. 그리고 여인이 서 있던 창문 쪽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초인종을 누르던 여자가 복도 쪽으로 나 있는 창문 틈으로 방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창문 앞에 여인이 서 있었기 때문에 방 안을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없었을 텐데도, 복도에 있던 여자는 72초 동안이나 방 안 여기저기를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여자는 방 안으로 무언가를 떨어뜨리더니 자신이 직접 창문을 닫았다. 그제야 여인과 나는 방 안에 떨어진 검정색 바퀴벌레 살충제를 쳐다보며 동시에 한숨을 내뱉었다. 들고 있던 마네킹 얼굴을 침대 위에 내려놓은 후 다시 화장실로 갔다. 욕조에 물을 채우기 위해 수도꼭지를 틀었다. 그리고 욕조에 물이 채워지는 동안 나를 닮은 인형의 옷을 벗겨 화장실로 가지고 들어왔다. 인형을 욕조에 담가서 비누 묻힌 타월로 몸을 씻겨주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인형의 얼굴이 욕조 밑바닥까지 잠긴 채 수면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순간 화장실 문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자 실제로 여인이 화장실 문 앞에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여인은 화장실 안으로 들어와 나를 밀치더니 욕조 안에 잠긴 인형의 얼굴을 수면 밖으로 들어올렸다. 그러고는 내 손에 들려진 타월을 빼앗아 자신이 직접 인형의 얼굴과 몸을 씻겨주었다. 여인이 인형에게 목욕을 시켜주는 동안 나는 여인의 뒤에 선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핏줄 하나 보이지 않는 여인의 목에 손을 대보고 싶었다.
   인형은 노인보다도 얌전하게 목욕을 하고 있었다. 여인은 인형의 몸에 묻은 물기를 수건으로 닦아낸 후, 직접 인형을 들고 내 앞을 지나쳐 화장실을 나갔다. 내가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에는 이미 인형의 옷이 모두 입혀진 상태였다.
   여인은 침대 옆에 선 채 자신과 똑같이 생긴 마네킹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느새 마네킹의 얼굴을 집어들고는 그것을 다시 마네킹의 목에 끼웠다. 그리고 눈썹 없는 얼굴은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노란색 테이프로 눈썹 없는 얼굴을 칭칭 감았다. 얼굴 표면이 보이지 않게 테이프로 겹겹이 붙이는 동안 여인은 여러 번이나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인의 손에 들려 있는 테이프가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갑자기 몸이 한 번 격하게 출렁거림과 동시에 나는 여인의 손에서 테이프를 빼앗았다. 그리고 여인이 마네킹의 얼굴을 테이프로 두른 것처럼 나 역시 웃으면서 여인의 얼굴을 테이프로 겹겹이 감았다. 그동안 좀처럼 더위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는데, 여인의 얼굴을 테이프로 감고 있으려니 온 몸에 땀이 흘렀다. 난방을 잠그고 나서 구석에 있는 선풍기를 끌어다가 여인의 얼굴을 향해 바람의 방향을 맞추어 작동시켰다. 지나치게 겹겹이 감은 탓인지 여인의 얼굴을 모두 감기도 전에 테이프가 떨어졌다. 방 문 있는 곳으로 가서 그곳에 붙여두었던 테이프 중 일부를 뜯어냈다. 테이프에는 날벌레 한 마리 붙어 있지 않았다. 그것으로 여인의 나머지 얼굴 부위를 마저 감았다. 테이프로 여인의 얼굴을 감고 있는 동안 여인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나는 창문 밑에 떨어진 바퀴벌레 살충제를 집어 주방의 싱크대 주위에 모두 붙여놓았다. 그리고 다시 여인이 있는 쪽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여인은 아무런 움직임의 변화 없이 바닥 한곳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제야 여인 역시 죽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마네킹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임신한 모습의 마네킹과 나를 닮은 인형은 비교적 쉽게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여인만큼은 이런 사실을 뒤늦게야 알 수 있었다. 임신한 모습의 마네킹은 처음 보았을 때부터 마네킹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고, 나를 닮은 인형은 단지 나 자신이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안정을 취할 때까지 나 대신 인형이 움직이도록 나름대로 배려를 해준 것뿐이었다.
   인형을 목욕시키느라 옷이 축축하게 젖어서, 나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바닥에 놓아두고는 대신 나를 닮은 인형의 옷을 벗겨 마네킹 앞에서 갈아입었다. 마네킹 앞에서는 옷을 마음놓고 벗어도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옷을 다시 인형에게 입혀주었다. 바퀴벌레 살충제를 주었던 여자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깨끗해 보이는 옷을 입고 있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 안 청소도 해야 했다. 얼마 전, 임신한 모습의 마네킹을 배달해주었던 사내가 나에게 집 안이 너무 더럽다고 투덜거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우선 화장실 바닥부터 솔로 문질렀다. 변기 위에 설치되어 있는 진열장에서 소독약을 꺼내 바닥에 뿌렸다. 그리고 다시 솔로 문지르자 습기에 찌든 비릿한 냄새는 어느 정도 사라졌다. 또다시 옷이 젖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화장실 바닥 청소를 끝낸 다음에야 떠올랐다. 옷을 벗어서 방바닥에 던져 놓은 후 소독약을 욕조와 세면대에 뿌렸다. 잠시 허리를 펴서 거울을 보았을 때, 볼에 부쩍 살이 많아졌다는 생각을 했다.
   면도기로 수염을 다듬는 중 볼에 약간 상처가 생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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