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미로냥 조용한 세상

2005.01.28 20:1401.28

  어느 나라의 왕이 장군들에게 폭탄을 주어 다른 나라로 보냈다. 그래서 장군들은 다른 나라에 폭탄을 던져 많은 건물을 무너뜨렸다. 화가 난 다른 나라는 또 다른 나라를, 그리고 그 나라는 또 또 다른 나라를 향해 폭탄을 날려보냈다. 모든 나라가 폭탄 때문에 시끄러웠다. 오랫동안 시끄러웠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모든 나라를 서로 욕했다. 폭탄이 터지면 소리도 크고 빛도 지나치게 환해서 귀를 막고 눈을 감아야 했다. 건물들이 무너지고 산이 새카맣게 탔다. 사슴과 토끼들이 줄지어 산을 버렸다. 잉어와 붕어는 물을 버렸고 고래들도 너른 바다에서 사라져 버렸다. 아기 고양이도 큰 개도 없어진 집에서 아이들이 우는 사이에 어떤 엄마와 어떤 아빠가 총을 든 군인이 되었다. 아이의 엄마와 아빠가 불안한 표정으로 아이를 꼭 안아 주었다. 옆집 사람들이 군인이 된 날 엄마와 아빠가 말했다.

  "이게 바로 전쟁이란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더 많은 군인이 필요했다. 아이의 엄마와 아빠도 군인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날은 여기저기에서 폭탄이 터져서 무척 시끄러웠다. 그래서 아이는 엄마가 왜 우는지 몰랐다. 엄마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빠는 아이에게 뽀뽀를 해 주고 엄마와 함께 나뭇잎 색깔 옷을 입고 나갔다. 그리고 봄이 지나고 여름 가을 겨울이 차례차례 두 번 지나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는 오래오래 울다 잠들었다. 꿈속에서 아이는 폭탄을 땅에 심었다. 깊숙하게. 아주 깊은 곳에 심어도 폭탄은 터지고 또 터져서 세상을 부쉈다. 엄마와 아빠는 폭탄이 터질 적마다 울었다. 아이도 함께 울었다. 아이의 꿈속에서 모든 폭탄이 터져 버리자 동그랗게 뚫린 땅마다 자그맣고 빨간 꽃이 피었다. 아이는 잠에서 깨어나서 다시 울었다. 혼자였다. 자신의 울음소리가 아주 크게 들려서 바깥으로 나왔더니 폭탄도 사람도 없어서 온 세상이 조용했다.

  무너진 건물과 죽은 나무를 지나 아이는 조용한 세상을 계속 걸었다. 지구를 한 바퀴 돌았다. 피부가 검은 아이와 눈이 파란 아이를 만나 손을 잡고 함께 걸었다. 어떤 아이를 만났는데 아무도 발자국을 내지 않은 눈밭처럼 희고 포근한 털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다. 나무 구두를 신은 아이를 만났고 빨간 치마를 입은 아이와 노란 목걸이를 여러 개 가진 아이도 만났다. 많은 아이들이 죽은 나무와 죽은 꽃 옆에서 혼자 울고 있었다. 모두 손을 잡고 같이 걷기로 해서 아이들은 눈물을 그쳤다. 물고기가 모두 죽은 물에서 혼자 낚시하고 있는 아이를 만나서 아이들은 아흔 아홉 명이 됐다. 아흔 아홉 명의 아이들은 나란히 손을 잡고 조용한 세상을 계속 걸었다. 동쪽으로 오랫동안 걷고 서쪽으로 한참 걷고 다시 남쪽으로 끈질기게 걸었다. 비가 많은 나라를 지나고 꽃이 일찍 피는 나라를 지났다. 새파란 들판이 끝없이 펼쳐진 나라를 지나고 청동으로 뒤덮인 나라도 지났다. 돌과 유리의 산을 넘어 우유로 된 강마저 건너, 아이들은 하얀 사막에 도착했다.

  "사막에는 아무 것도 없을 거야. 그러니까 저기에는 들어가지 말자."

  한 아이가 말했다.

  "아냐. 사막에도 누군가 있을 거야. 누군가 있다면 같이 가야 해."
  "그래. 같이 가야 해."
  "누군가 있을 거야. 누군가 혼자서 울고 있을 지도 몰라."

  다른 아이들이 말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하얀 사막으로 들어갔다. 하얀 사막에는 모래 바람이 불었다. 아이들은 폭탄이 터지던 날처럼 눈을 꼭 감았다. 모래가 눈에 들어가면 눈물이 나왔다. 엄마도 아빠도 다시는 군인이 되지 않는데 눈물이 나왔다. 한 아이가 잡았던 손을 놓고 웅크리고 앉아 훌쩍훌쩍 울었다.

  "엄마가 보고 싶어."

  그러자 다른 아이도 손을 놓고 그 곁에 웅크리고 앉아 훌쩍훌쩍 울었다. 짜고 맑은 눈물이 퐁퐁 솟아 뺨 위를 흘렀다.

  "이제 외톨이가 아닌데 외톨이인 것처럼 눈물이 나와."

  아흔 아홉 명의 아이들은 모두 손을 놓고 앉아 훌쩍훌쩍 울었다. 눈물이 사막에 떨어져 강이 되었다. 서른 명의 아이들이 강물에 휩쓸려 먼 곳으로 가 버렸다. 서른 명의 아이들이 강물을 건너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밤이 되었을 때 하늘에 별이 무척 많이 떴다. 동그란 보름달이 떠서 서른 명의 아이들이 달을 향해 가 버렸다. 남은 아이는 아홉 명이었다. 모래 바람이 불어 여덟 명의 아이들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처음 길을 떠났던 한 명뿐이었다. 아이는 혼자라서 훌쩍훌쩍 울었다. 그리고 하얀 사막에서 떠나 다시 조용한 세상을 오래오래 걸었다. 다시 흩어진 아이들을 만나 다시 손을 잡고 다시 함께 걸었다. 아흔 아홉 명의 아이들은 다시 하얀 사막에 와서 다시 훌쩍훌쩍 울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손을 잡고 같이 울었다. 아이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서로서로 이야기했다.

  "난 훌쩍훌쩍 눈물이 나는 이야기를 알아. 엄마가 해 줬어."
  "나도 훌쩍훌쩍 눈물이 나는 이야기를 알아. 아빠가 해 줬어."
  "나도 알아. 예쁜 옷을 입은 남자애가 나오는 이야기야. 그 애는 무척 용감해."
  "나는 씩씩한 여자애가 나오는 이야기를 알아. 그 애는 착해서 별님이 되었거든. 저기 있는 저 커다란 별이 그 애야."
  "그 옆에 있는 작은 별은 내가 키우던 고양이랑 닮았어."

  아이들은 이야기하며 같이 걸었다. 하얀 사막에 하얀 바람이 불고 하얀 눈물이 자꾸만 뺨을 타고 흘러 강을 만드는데도 계속 걸었다. 아이들은 장미 꽃잎으로 된 치마를 입은 요정 이야기를 했다. 검고 큰 곰과 누르고 사나운 호랑이 이야기도 했다. 창가에 매일 와서 노래를 불러 주던 참새 이야기도 하고 집 앞 웅덩이에서 자라는 올챙이 이야기도 했다.

  "저기 봐. 누가 있어."
  "무언가가 있어."

  아이들이 말했다. 손을 꼭 잡고 앞으로 갔을 때 하얀 사막 하얀 모래 바람 속에 숨어 있던 도서관이 나타났다. 도서관은 커다란 문을 꼭꼭 닫은 채 아이들에게 말했다.

  "난 도서관이야. 책이 무척 많은 도서관이야."

  책이 무얼까? 책은 무얼 하는 걸까?
  아이들은 물었다. 한 아이가 큰소리로 대답했다.

  "난 책이 뭔지 알아. 책은 이야기가 들어 있는 거야. 그렇지? 그렇지?"

  도서관이 대답했다.

  "그래. 나는 이야기를 많이 가지고 있는 도서관이야."

  아이들은 기뻐서 도서관에게 말했다.

  "우리들은 이야기를 좋아해. 그러니까 안에 들어가게 해 줘."

  하지만 도서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문을 꼭꼭 닫아 버렸다. 아이들이 손을 잡고 다가가서 문을 두드렸다. 아흔 아홉 명의 아이들이 문을 두드리자 도서관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왜 울어? 우린 이야기를 좋아해."
  "나도 이야기를 좋아해. 나도 폭탄보다 이야기가 좋아. 그런데 사람들이 와서 내가 가진 이야기들을 모두 가져갔어. 이야기 대신 폭탄만 넣어 줬어. 나는 슬퍼서 계속 울었는데 다시는 이야기를 주지 않았어."

  아이들은 손을 잡은 채 서로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도서관은 훌쩍훌쩍 울고만 있었다. 아이들이 흘린 눈물 위로 도서관이 흘린 눈물이 뚝뚝 떨어져 강은 점점 깊어졌다. 아이들이 물었다.

  "그럼 네 안에는 지금 뭐가 있니?"
  "아무 것도 없어! 아무 것도 없어! 하지만 폭탄이 있는 것보다는 아무 것도 없는 게 좋아. 이게 낫다구."

  아이들은 오래오래 서로 이야기했다. 도서관이 울음을 그친 후에 처음 출발한 아이가 말했다.

  "괜찮아. 우리들은 이야기를 많이 가지고 있거든. 우리들이 책이 돼 줄게. 이야기를 줄게. 그러니까 문을 열어 줄래? 혼자 있는 건 외롭잖아."
  "정말? 이야기가 되어 줄 거야?"

  도서관은 웃으며 말했다. 아이들도 웃으며 대답했다.

  "응."

  도서관 문이 활짝 열리고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들이 반짝반짝 빛나는 이야기를 가지고 도서관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하얀 사막 위로 하얀 태양이 뜨고 파란 눈물 강이 흘렀다.

  "어서 와!"

  도서관도 아이들도 외톨이가 아니었다. 조용한 세상에 이야기꽃이 활짝 피었다. 하얀 사막은 파란 눈물 강을 가진 파란 들판이 되었다. 더 이상 폭탄이 터지지 않는 세상에 여기저기 이야기꽃이 피었다. 숨어 있는 씨앗들이 무럭무럭 자라 숲이 되고 산이 되었다. 아이들은 반짝반짝 빛나는 이야기를 만들며 무럭무럭 자랐다. 오래오래 살았다.


(end)

mirror
댓글 2
  • No Profile
    fool 05.02.06 08:57 댓글 수정 삭제
    즐겁게 읽었습니다. 에코의 폭탄과장군 보다는 이쪽이 더 감동적이네요. :)
  • No Profile
    미로냥 05.02.12 01:03 댓글 수정 삭제
    fool/ 꺅;ㅅ; 동화 쓰려다가 실패한 거여요^^ 핫핫. 그런데 쓰면서는 재미있어서 좋았답니다. 좋게 읽어 주셔서 고마워요:-)
분류 제목 날짜
pilza2 인생의 꿀맛 - 본문 삭제 -2 2009.07.31
미로냥 취업경위서 (본문 삭제)2 2009.07.31
아이 한국히어로센터 - 1. 파이어 대 고슴도치 2009.06.26
정도경 바늘 자국3 2009.06.26
배명훈 예비군 로봇25 2009.06.26
갈원경 날개의 밤 (본문 삭제)6 2009.05.29
아밀 야간산책 - 본문 삭제 -4 2009.05.29
아이 한국히어로센터 - 2. 능력자이자 인간 헐크3 2009.05.29
정도경 내 이름을 불러 줘6 2009.05.29
정도경 귀향 - 본문 삭제 -6 2009.05.29
정도경 전화 (본문 삭제)2 2009.04.24
배명훈 마리오의 침대 - 본문 삭제 -26 2009.03.27
정도경 차가운 손가락 -- 본문삭제2 2009.02.27
정도경 물고기8 2009.02.27
김이환 소년의 하루5 2009.01.31
정도경 어두운 입맞춤 - 본문 삭제 -5 2009.01.30
정도경 몸하다 -- 본문삭제11 2009.01.30
pilza2 하늘로 올라간 풍선은 2009.01.30
아이 냄새5 2009.01.30
아이 황금알 먹는 인어 2009.01.30
Prev 1 ...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 47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