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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냥 Moonshiny lamp

2005.07.30 01:1207.30

- 사이암 님께



  숲지기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등불을 켜 들려는 순간 동쪽 산 기슭 너머에서 환히 치솟는 빛을 보았다. 처음에는 벌써 동이 트려는가 싶었는데 자세히 들여다 볼 것도 없이 금세 그것이 거대한 불길임을 깨닫고 숲지기는 소스라쳤다. 바람이 거센 날인지라 불길이 산기슭을 삼켜 버리면 서쪽 기슭 너머로 들이 닥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서쪽 기슭 너머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여러 도시와 왕국이 있었으므로 숲지기는 소름이 쭉 끼치는 팔뚝을 등불 든 손으로 문질렀다. 그리고 불길이 기슭을 타 넘는 순간 서쪽 기슭 너머로 소식을 알리기 위해 등불을 높이 들고 채비를 갖추었다. 등에는 아직 불을 켜지 않은 채 숲지기는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별이 보이지 않을 만큼 동녘은 환하였으나 또 하나의 태양을 낳을 듯이 이글이글 치솟던 불길도 결국은 사그라지고 이내 불길만큼 찬란한 여명이 사위를 가림 없이 밝혔다. 그제서야 안도감에 피로가 몰려와, 숲지기는 눈을 비비며 오두막으로 돌아 갔다. 밤새 높이 들었던 등불을 내려 벽에 기대어 놓고 마른 짚을 깐 잠자리에 몸을 뉘이자 곧장 잠이 닥쳤다. 축복처럼.

  "계시나요?"

  처음 맛 본 석청만큼이나 단 꿈 속을 헤매는데, 문득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숲지기는 뻐근할 팔을 주무르며 몸을 일으키고 곧장 나무 문을 열었다. 나무 판자를 여럿 덧대어 만든 문은 허름해서 천천히 여닫는 손길에도 쉽게 앓는 소리를 내곤 했다.

  "실례합니다."

  맨발의 소녀였다. 찢어진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 새벽 이슬과 풀잎으로 만신창이가 된 소녀는 쉴새 없이 주위를 둘러 보며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숲지기는 소녀가 쫓기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았다. 말을 할 줄 알게 될 무렵부터 홀로 되어 이 숲을 돌보았기에 다른 사람과 만날 일은 많지 않았지만, 대신 오가는 짐승들에 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녀는 숲지기와 다친 짐승을 꼭 닮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잠깐 쉬어 가도 폐가 되지 않을까요?"

  소녀는 공손했으며, 새파란 빛깔의 모자를 쓰고 있었다. 깊은 숲에 은밀히 자리 잡은 호수처럼 새파란 모자였다. 숲지기는 몸을 비켜 소녀에게 자리를 내 주었다. 소녀는 공손히 허리를 굽혀 보이고 안쪽으로 들어 섰다. 아무렇게나 놓인 집기와 낡은 탁자, 마른 짚자리 따위를 둘러 보며 소녀는 애써 실망한 기색을 감추었다. 숲지기가 먼저 물었다.

  "불편할 텐데."
  "아, 괜찮아요. 제가 폐를 끼치는 거니까."

  소녀는 지나칠 정도로 공손했다.

  "모자는 벗어도 돼요."
  "아니에요. 저는 손님이고…… 아니, 실은 벗을 수가 없어요. 미안해요."

  지나치게 공손하고 지나치게 슬픈 얼굴을 한 소녀가 그렇게, 숲지기의 식구가 되었다. 어김없이 밤이 닥치고 찬 바람이 계곡에서부터 음산한 소리를 냈다. 숲지기는 추위를 타는 소녀를 위해 깊이 넣어 두었던 요를 꺼내 주고 등불을 높이 들었다. 숲지기는 등불을 매일 켜는 것으로 동과 서의 사람 모두에게 오늘 하루도 평화로웠다는 것을 알리는 일을 했다.

  "그게 바로 숲지기의 등불이군요. 처음 봤어요."

  소리를 내지 않고 상긋이 웃을 때, 소녀의 눈매는 초승달처럼 가느다랗게 변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숲지기는 헛기침을 하며 불을 켰다. 소녀가 자세히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머뭇거리며 탁자에 등불을 얹자, 그의 옷을 빌려 입은 소녀가 다가와 가만히 빛을 응시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일렁이는 울금색 빛이 사위를 한 움큼씩 밝혔다. 소녀는 흠칫 어깨를 떨더니 뒤로 물러서며 비명을 질렀다.

  "살…… 살아 있잖아!"

  살아 있는 것을 가두어 두다니!
  소녀의 비명 소리에 숲지기는 얼른 달려와 등불을 들고 제 옷자락 속에 감추었다.

  "원래 살아 있는 거야, 등불은. 모, 모, 몰랐어?"
  "나는 그런 거 몰랐어요!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거…… 아아."

  소녀는 털썩 주저 앉더니 새파랗게 질린 채 머리를 감쌌다. 푸른 모자만은 벗지 않은 채로 앉아 침울한 그림자를 벽에 어리우고 있는 소녀는 무척 작아 보였다. 그림자는 주인의 기분 따위 아랑곳 없이 빛의 반대편에서 춤을 추었고 소녀는 한참만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불이라는 게 원래 살아 있는 거예요?"
  "원래 살아 있는 거예요."
  "동쪽 나라에서도 서쪽 나라에서도 똑 같은 건가요? 숲지기의 등불만 그런 게 아니에요?"
  "아니에요. 어디서나 마찬가지야."

  아아.
  비탄에 찬 목소리였다. 숲지기는 소녀가 울음을 터뜨리지나 않을까 안절부절 못했다.

  "하지만 모두에게 보이는 건 아니야. 저, 저건 빛 정령이라고 하는 건데."

  서툰 발음으로 숲지기는 더듬더듬 말했다.
  등불을 켜는 것은 사실은 빛 정령 무리인데, 그걸 볼 줄 아는 아이는 동쪽 나라에서도 서쪽 나라에서도 흔하지 않다고. 그리고 빛 정령을 보는 아이는 충격과 고통 때문에 반드시 제대로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 당신은?"

  당신은 제대로 자라지 않았느냐고, 소녀는 묻고 싶은 모양이었다. 숲지기는 머리를 긁적였다.

  "나, 나는…… 엄마가 죽어 버려서, 그러니까…… 원래 혼자였으니까, 그래서……."

  부모가 없어 떠도는 아이 중에서 불을 보는 아이가 있으면 신관이 데려다 이따금 숲지기로 삼는다. 그가 신관의 눈에 뜨였을 때 마침 예전 숲지기가 죽어 등불을 켤 자가 없었으므로 신관이 성스러운 물로 세례를 주어 그 후임을 맡긴 것이다. 숲지기는 그런 사실을 자세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소녀에게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었다.

  "미안해. 물어서는 안 되는 거였나 봐. 아아…… 나는, 지금 내 자신에게 화가 난 거니까."

  소녀는 다시 등불을 흘끔 바라 보았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너울너울 춤을 추는 빛 정령무리를. 그들은 소녀를 향해 비명을 질렀다. 살려줘, 꺼내줘, 우리들은 사라지고 싶지 않아, 하는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 왔다. 소녀는 모자를 눌러 쓰고 고개를 무릎에 파묻었다. 숲지기는 소녀의 어깨에 이불을 걸쳐 주고 집 바깥으로 나가 밤 새 들어오지 않았다.

  "실례합니다."

  며칠이 지났을 때 서쪽 기슭에서 두 명의 어린애가 찾아 왔다. 누나와 동생이라는 두 아이는 서로 손을 꼭 붙잡고 잔뜩 겁을 먹은 표정으로 집 앞에 서 있다가 푸른 모자를 쓴 소녀를 보고 조금 안심한 듯 웃어 보였다.

  "안녕."

  소녀는 인사를 했는데 두 아이는 인사를 받기도 전에 재빠른 목소리로 말했다.

  "불을 보는 분이 언니예요? 엄마가 숲지기한테 가면 고쳐 준다고…… 그래서."
  "난 숲지기가 아니야."
  "……아."

  실망한 목소리로, 여자아이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언니도 불을 보는 병을 고치려고 온 거구나."
  "우리랑 같네."

  사내아이도 말했다.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을 보는 병?"
  "아니야? 병이 아니면 왜 여기에 있어? 숲지기는 이상한 사람이니까 가까이 가면 안 된다고 그러는데."
  "왜?"
  "왜라니? 불을 보는 사람은 전부 이상한 사람이야. 우리도 고치지 않으면…… 어서 고치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이 돼."

  여자아이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사내아이는 누나의 옷자락을 잡아 당기다가 함께 울었다. 울음 소리가 쟁쟁 울리자 나무를 하러 갔던 숲지기가 여러 마리의 토끼를 몰고 나타났다. 토끼들은 두 아이를 보더니 놀라 달아나 버렸다.

  "병을 고치러 왔어?"

  숲지기가 물었다. 두 아이는 푸른 모자를 쓴 소녀의 등 뒤에 숨어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와라."

  아이들이 머뭇거렸기 때문에 소녀는 앞장 서서 집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소녀가 들어가고 나서 한참 지난 다음에야 두 아이는 숲지기의 집으로 들어 섰다.

  "불을 보면 춤 추는 거 보여?"
  "피 흘리는 것도 보이고, 그리고…… 그리고 얘는 목소리도 들어요."

  여자아이가 남동생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푸른 모자를 쓴 소녀는 자신이 본 빛 정령들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숲지기는 첫날 이후 소녀가 잠든 다음에야 등불을 켜곤 했지만 불편한 잠자리에 깊이 잠들 수 없었던 소녀는 몇 번이나 비명 소리를 듣고 깨어나야 했다.

  "불을 켜 놓으면 빛 정령들이 이런 좁은 곳은 싫다고, 갑갑하다고, 숨이 막힌다고 비명을 질러요. 엄마는 밤에 불을 켜고 바느질을 하지 않으면 모두 굶어 죽을 거라고…… 그래서 우리는 참으려고 했는데, 너무너무 무서워서 밤 새 눈물이 흘렀어요. 가슴이 타는 듯이 아프고."
  "형아가 안 그렇게 해 주는 거야? 응? 우리 보통 사람이 돼서 엄마랑 살 수 있게 되는 거야?"

  숲지기는 두 아이를 흘끔 바라 보았다. 밀짚 빛깔 고수머리로 덮인 눈매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소녀는 보았다. 숲지기는 무언가 두려운 일을 결심하는 사람처럼 손 끝을 만지작거리다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괘, 괜찮게 될 거야. 빛 정령 안 보이게 될 거야."

  소녀는 기분이 좋아진 두 아이로부터 '치료'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불을 보는 아이가 태어나면 대개 부모들은 그 사실을 감추려고 하고, 자연히 낫지 않아 더 이상 감출 수 없게 되면 숲지기에게 보낸다고 했다. 숲지기에게 온 아이들은 꼭 이레를 숲지기 곁에 머물게 되는데, 처음 사흘이 지나면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또 사흘이 지나면 빛 정령이 보이지 않고 마지막 하루가 지나면 이제 다른 이들처럼 빛은 빛으로 보일 뿐이란다. 밝고 따뜻하고 고요한, 그런 빛으로 보이게 된다고.

  "그렇구나. 그럼 나도 치료를 하고 싶어."

  소녀는 맨발로 풀 위를 거닐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숲지기는 찾아온 아이들에게 등불을 하나씩 내 주었다. 아이들은 작은 등불에 불을 붙이는 일을 괴로워했다.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서 어쩔 줄 몰라 했고, 사내아이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오두막 구석으로 도망쳤다. 의연한 척 했단 여자아이 쪽도 부들부들 어깨를 떨더니 등불을 내던져 깨뜨렸다. 빛이 훅, 소리를 내며 피어 올라 허공으로 사라졌다. 푸른 모자를 쓴 소녀 역시 그 빛 속에서 어른거리는 얼굴 하나를 본 것 같았다. 목이 떨어져 피를 줄줄 흘리는 여자들이 그 안에 엉겨,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다. 숲지기는 아이들이 집어 던진 등을 주워 들었다. 새 등을 세 개 내어 나란히 탁자에 얹고 불을 붙이자 온 방에 빛 정령들의 비명소리가 가득 찼다.

  "머리…… 머리만 남았어! 다 타 버리고 머리만 남아서 비명 소리가…… 아아, 아아아아! 견딜 수 없어! 등불 같은 거 들고 있을 수가 없어! 나 무서워서…… 이제 싫어! 싫어!"

  여자아이는 어두운 밤 숲으로 달려 나갔다. 찬 공기가 뼈를 시리게 만드는, 나무와 나무 사이 빈 공간으로 아이는 내달렸다. 푸른 모자를 쓴 소녀는 숲지기가 등불을 들고 여자아이를 따라 가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사내아이 쪽은 누나가 달려 나간 것도 모르는 듯 아직도 오두막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가엾게도."

  소녀는 사내아이에게 다가가 어깨를 안아 주었다.

  [불쌍한 내 딸.]

  그렇구나.
  소녀는 무언가 깨달았다.

  [우리 가련한 딸을 위해서야.]

  밤마다 주위에는 비명 소리가 있었다. 피 냄새가 나고 높이 솟은 담장 바깥에서 연기가 피어 올랐다. 사람들이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처음에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아 졌다.

  [비명 소리가 들리는데, 괜찮은 거야? 유모?]
  [그럼요. 비명 소리 같은 건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거니까요.]

  부모가 시키는 대로 그렇게 대답해 주었던 거겠지.
  소녀는 비로소 생각했다. 밤마다 사람을 죽이는 게 당연한 일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아니라는 것을, 그렇게나 부모가 사람을 죽이고 또 죽인 것은 소녀가 빛 정령을 보게 될까 두려워서였다는 것을.

  [아무도 희생시키지 않고 사는 사람 따윈 없어. 적어도 그걸 눈 앞에서 보고 귀로 듣는 다는 건 아주 굉장한 거야. 알았니, 내 딸아?]
  [네. 그럼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는 훌륭한 지도자이신 거로군요?]
  [그럼 그럼. 너도 훌륭한 지도자가 될 거다.]

  상아색 담장 너머에서 욕설이, 비탄이, 울음이 터졌지만 귀를 막지 않고 들어 주는 것만이 보답인 줄 알았다. 딸에게 빛 정령의 비명 소리가 들린다는 사실을, 부모는 사람을 죽여 그 비명을 들려주는 걸로 감추고 싶어 했다. 빛 정령을 보고 빛 정령의 비명을 듣고 그리하여 밤마다 켜는 등불마저 얼마나 잔인한가 아는 자는 오래 살 수 없으므로.

  [불쌍한 내 딸.]

  "누나, 나 괜찮아 지는 거지? 응? 꼭 괜찮아 지는 거지?"
  "……."

  소녀는 푸른 모자 챙을 어루만졌다. 사내아이는 소녀의 품에 안겨 오랫동안 더 울었다. 등지고 앉은 등불 빛이 아프게 너울거려, 눈 앞에 보이는 자신의 그림자들이 격렬하게도 춤 추었다. 사내아이는 비명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누나, 누나. 나 엄마를 도와 주고 싶어. 밤에 등불을 켜고 책을 읽어서 엄마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어. 불을 켤 때마다 죽는 사람이 보여서 우는 건 이제 싫어. 이제 몰랐으면 좋겠어."
  "……그렇게 될 거야."

  네가 바란다면 꼭 그렇게 될 거야.
  소녀는 말라 비틀어진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간절한 염원의 성취를 말하는 것인데도 어째서인지 심장이 콕콕 쑤셔 왔다.

  여자아이는 한참 만에 돌아왔다. 숲지기는 그리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표정으로 아이의 손목을 쥐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온 몸이 긁힌 자국투성이여서, 푸른 모자를 쓴 소녀는 자그맣게 혀를 찼다.

  "예쁜 얼굴이 엉망이 됐네. 약을 바르는 게 좋겠어."

  푸른 모자를 쓴 소녀는 약 상자를 가지고 와서 여자아이에게 발라 주었다.

  "나도 예전에 맨발로 달린 적이 있어. 차가운 밤 이슬만 발목을 스치는 줄 알았는데 밝은 데에 와 보니 피가 나고 있었지. 그래서 무척 놀랐어. 발을 멈추면 그제서야 상처가 아파 오는 법인가 봐."
  "나, 영영 불을 봐야 하면 어떻게 하지? 나 그런 거 싫어…… 싫어, 언니. 나도 이런 곳에서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아. 평생 저 비명 소리를 들으면서 살아야 한다면…… 흑, 흐어어엉!"

  숲지기는 소녀에게 매달려 우는 여자아이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울음을 그칠 때까지 옷자락을 내 주고 부어 오른 눈 위를 찬 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여자아이는 동이 터 올 무렵에야 얌전해져서 등불에 불을 붙였다. 비명 소리가 들리는 걸 꾹 참는 양 입술을 깨물고, 사내아이와 나란히 바깥으로 나갔다.

  "너, 치료 안 해?"

  숲지기가 물었다.

  "너도 불을 볼 줄 아니까 치료, 하고 싶으면……. 치료, 할 거면, 빌려 줄…… 줄게. 빌려 줄게, 등불."
  "응."

  푸른 모자를 쓴 소녀는 헌 등불을 건네 받아 불을 붙였다. 아름다운 빛 정령 무리가 아우성을 치며 피어 올라 참혹하게 일그러져 갔다. 푸른 모자를 쓴 소녀는 그것을 지그시 들여다 볼 뿐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무섭지 않아?"
  "무섭지 않아."
  "울지 않아?"
  "울지 않아."

  소녀는 고요히 답했다. 붉은 여명이 터 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소녀의 어깨가, 유난히 찬란하게 빛났다.

  "난 사람의 죽음을 지겹도록 보았고 지겹도록 들었어. 이제 와서 비명 소리 같은 걸 들으면서 울면 난 더 비겁한 사람이 되는 거야."

  이레 째.
  아이들은 드디어 불을 보지 않는 인간이 되어 떠났다. 둘이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며 춤추고 노래 불렀다. 재재 지저귀는 파랑새처럼 팔랑팔랑 뜀박질하여 산길을 내려 갔다. 숲지기는 아이들을 배웅하고 돌아와 문을 열었다. 소녀는 가만히 앉아 불이 꺼진 등불을 보고 있었다.

  "왜 나가지 않았어?"
  "나, 오늘 불 켜지 않았어."
  "왜?"

  왜 모든 일을 망쳤냐고, 치료를 멈추었냐고 숲지기는 물었다. 소녀는 고개를 들어 숲지기의 푸른 눈을 들여다 보았다.

  "불을 보고 싶어. 동쪽 나라에 살 때의 나는 매일매일 불을 켜진 방에서 지냈으면서도 내가 불을 보는 인간이라는 걸 몰랐어. 그러니까 앞으로는 보아 주려고."

  속죄하는 기분으로.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러지 마."

  숲지기가 말했다.

  "왜? 너도…… 이름조차 없는 너도 보고 있잖아. 그러니까 나도 볼 거야."
  "고, 고, 고집쟁이."

  아이들에게 배운 말을 내뱉고, 숲지기는 소녀의 손에 등불을 들려 주었다.

  "고집쟁이. 나, 너 우는 게 싫어."
  "내가 언제 울었어? 난 '치료' 하는 엿새 동안 한 번도 울지 않았어."
  "잘 때는 울, 울잖…… 울잖아."
  "……."

  [아무도 희생시키지 않고 살아 남는 사람 같은 건 없단다, 내 딸아. 반드시 누군가는 죽게 되는 거야. 지도자를 위해 죽는 건 백성의 기쁨이란다.]
  [그렇구나. 그럼 많이 죽일수록 훌륭한 지도자가 되는 거예요, 아바마마?]
  [그럼그럼.]
  [아, 지도자는 정말 힘들구나. 난 아바마마랑 어마마마가 돌아가시면 슬퍼서 심장이 터질 지도 모르거든요. 죽는 건 그렇게 아픈 일인데 매일매일 누군가를 죽인다니, 지도자는 굉장해요.]

  그런 게 아니었는데.
  소녀는 생각했다. 아무도 진실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고. 아니, 모여서 수군거리는 목소리에 조금만 더 귀를 기울였다면 조금 달라졌을 지도 모르는데. 소녀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갔던 시녀며 시종들, 병사와 대신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불이 나던 날 밤을.

  "있지, 반드시 무언가 죽게 돼. 내가 살아 있어서. 내가 여기에 존재해서, 그래서 누군가 무언가 가엾어 지는 거야. 그러니까 눈 앞에서 누가 죽는다고 해서 눈을 돌리면 안 돼. 안 되는 거였어."

  매일 비명을 듣고 죽음 곁을 지나치며 살았는데 정작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광경 앞에서는 눈을 돌리고 말았다.

  [어서 가요, 공주님! 달려요! 내 불쌍한 분…….]

  유모의 목에서 피가 솟아, 소녀는 고개를 돌렸더랬다. 여기저기에서 함성이 터지고 분노한 사람들이 상아색 벽을 부수는 사이로 열심히 달릴 뿐 누군가의 죽음 따위 눈에 담지 못했더랬다.

  "나, 너 우는 거 싫어."

  숲지기는 소녀의, 푸른 모자를 깊이 눌러 쓴 머리를 끌어 당겨 자신의 품에 품었다. 소녀는 푸른 모자의 챙이 구겨지는 소리를 들었다. 흐르는 줄 몰랐던 눈물이 잠금쇠를 풀어 놓은 양 후둑후둑 떨어져 이내 뺨을 온통 적셨다.

  "미안해. 그래도 나는 불을 볼 거야. 치료 같은 거 안 해."

  숲지기의 허리를 안고 목을 놓아 우는 소녀의 모자 위로, 숲지기는 시선을 주었다. 격하게 흔들리는 어깨는 위에서 내려다 보아 더욱 왜소하게 보였다.

  "고집쟁이."

  다시 이레가 지났을 때 동쪽 나라에서 다시 불길이 올랐고 몇몇 사람들이 산을 넘어 서쪽 나라로 갔다. 또 이레가, 또또 이레가 지나자 더욱 많은 사람이 산을 넘었다. 소녀는 그럴 때마다 마른 짚자리에 돌아 누워 이불을 깊이 뒤집어 썼다.

  "동쪽에는 이제 쥐새끼 한 마리 남지 않게 될 거야."

  떠나는 사람들이 탄식했다.

  "가뭄이 들었어. 자라던 싹이 죄 말라 죽어 버렸으니 모두 죽을 거야."

  소녀는 사람들이 지나가 버린 후에는 꼭 오두막에서 나와 그 뒷모습을 보곤 했다. 숲지기는 그럴 때마다 소녀가 무척 힘이 없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이레가 열 번 지났을 때 동쪽에서 한 떼의 사람들이 숲지기를 찾아 온다는 소식이, 도망친 토끼와 꿩과 부엉이들 사이로 날아 들었다. 그들은 공주를 찾으러 오는 거라고 했다. 숲지기는 소녀를 깊이 숨겨 주었다.

  "나오지 마."
  "하지만."
  "나, 너 다치는 거 싫어."
  "하지만!"

  소녀가 무언가 더 말하려고 했을 때 사람들이 닥쳐 들었다.

  "공주는 여기에 없어."
  "거짓말, 여기 있지? 우리들은 모든 걸 다 알고 왔어."

  사람들은 악의에 차 있었다. 숲지기는 그들이 공주를 다치게 할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입을 열지 않기로 결심했다. 사람들은 숲지기를 차고 때리고 할퀴었다. 숲지기는 그래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한 사람이 말했다.

  "이 녀석은 불을 봐."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그렇군. 불을 보는 녀석들은 불이 여럿 있으면 괴로워하지?"

  그들은 여러 개의 등불을 숲지기에게 내 밀었다. 숲지기는 고막을 찢어 놓을 듯이 소란한 비명과 속을 뒤집어 놓는 참혹한 광경을 보면서도 이를 꼭 악물었다.
  사람들이 말했다.

  "공주는 도망쳤어."
  "공주는 무책임 해. 아름다운 황금 관을 썼으면서 아무 것도 한 게 없어."
  "왕과 왕비도 멍청이였어. 모든 것을 재상에게 맡겨 버렸지."
  "공주 때문에 내 동생이 죽었어."
  "왕과 왕비가, 공주를 위해서 내 아내를 죽였어."
  "공주를 위해 커다란 성을 세우려고 우리 형을 끌고 갔어. 나도 한쪽 팔을 잃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다시 말했다.

  "공주가 나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너를 죽일 거야."
  "공주가 나오지 않는다면 너는 빛 때문에 죽을 거야. 너는 불을 보니까."

  그때 숨어 있던 소녀가 달려 나와 등불을 모두 깨뜨렸다.

  "나도 네가 다치는 게 싫어."

  소녀는 숲지기에게 말했다. 푸른 모자가 떨어져 내렸다. 숲지기는 소녀의 눈이 젖어 있는 것을 보았다. 눈물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고 당당한 자세로 서서 피어 오르는 빛 정령 사이에 오롯이 혼자인, 이제는 푸른 모자를 쓰지 않은 소녀가 말했다.

  "내가 공주다! 내가 그 무책임하고, 바보 같고, 왕이 되지 않은 채 곧 죽게 될, 자네들의 공주다!"

  사람들은 공주를 향해 악한 말을 하고 검과 창과 도끼를 들이 댔다. 공주는 눈을 감지 않았다. 숲지기는 그 앞을 가로 막았다.

  "안 돼. 죽이면 안 돼."

  그러자 사람들이 말했다.

  "왕도 왕비도 죽었어."
  "재상은 도망쳤어. 멀고 먼 나라로 가 버려서 찾을 수 없어."
  "나라는 황폐해 졌어."
  "기름이 남지 않아서 밤에 불을 켤 수 없는 집이 많아."
  "비도 전혀 오지 않아서 이대로라면 모조리 굶어 죽게 될 거야. 원성이 높으니까 어떻게든 해야 해."
  "그러니까 공주를 죽이기로 했어. 당분간은 그걸로 모두 기뻐할 거야."

  숲지기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어! 죽이면 안 돼!"

  숲지기는 사람들을 향해 등불을 던지고 소녀의 손목을 잡았다. 손목만 잡았는데 눈물이 나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숲지기는 달렸다. 후끈후끈한 불길을 뒤로 하고 소녀와 함께 무작정 산등성이를 달려 갔다.

  "나, 네가 다치는 게 싫어."
  "나, 네가 우는 게 싫어."

  두 사람이 서로에게 말했다. 축축한 동굴에서 숨을 몰아 쉴 때, 동녘에서 새빨간 빛이 솟아 올랐다. 아침 해였다. 소녀는 숲지기의 손을 놓았다.

  "나, 가야 돼."
  "가지 마. 가면 너를 죽일 거야."
  "그래도 가야 해. 그렇지 않으면 저기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될 거야."

  비가 오지 않을 때 왕을 죽이면 비가 온다. 소녀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왕과 왕비가 없으니까 공주가 왕이 되어야 해. 나는 왕으로서 관을 쓸 일이 없겠지만 그래도 내가 죽으면 비가 올 지도 몰라."

  숲지기도 왕을 죽이면 온 나라에 내린 저주가 풀리는 법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폐허가 된 나라를 되살리려면 왕의 피로 제단을 씻어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숲지기는 고개를 가로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눈물이 멈추지 않아 곤란해 하며 말했다.

  "그럼 내가 왕이 될게. 내가 너 대신 왕이 되어서 제단을 피로 씻을게."
  "안 돼. 그건 나만 할 수 있는 일이야."

  소녀는 웃으며, 상처가 많은 손을 들어 숲지기의 뺨을 감싸 쥐었다. 따뜻한 눈물이 소녀의 손바닥을 적시며 자꾸만 흘렀다. 소녀는 발돋움 하여 숲지기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대었다. 밤 이슬과 땀에 젖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엉겨 붙은 이마는, 꼭 불에 단 것처럼 뜨거워서 녹아 내릴 것 같았다. 소녀는 말했다.

  "나 말야, 사실은…… 사실은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 머리 위가 텅 비어 있다는 게 말야. 달리다가 황금 관을 잃어 버렸어. 수정으로 만든 구두도 백은 팔찌도 홍옥 목걸이와 비단 장갑까지 전부 잃어 버렸지. 나한텐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어서 난 무척 부끄러웠어."
  "무섭지 않았어?"
  "무서웠어. 머리 위에 아무 것도 없잖아. 황금 관이 없잖아. 부끄럽고 무서워서 대모 요정을 불러 쓸 것을 달라고 했어. 내 나라가 불타고 있는데, 나를 위해 여러 사람이 죽었는데, 그런데 나는 내 머리에 쓸 것을 달라고 했어."

  그러니까 내가 가서 대모 요정의 노여움을 풀어야 해.
  숲지기는 웃으며 말하는 소녀를 보았다. 소녀의 두 손이 천천히 자신의 뺨에서 떨어지고 어느새 뒤로 한 걸음 물러 섰다. 숲지기는 미련이 남아 허공을 맴돌고 있는 손목을, 백은 팔찌가 없는 소녀의 손목을 다시 잡았다.

  "가지 마."
  "안녕."

  소녀는 말했다. 숲지기는 소녀의 손목을 놓아 주었다.
  다시 숲지기의 오두막으로 올라 갔을 때 동쪽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장미 가시과 엉겅퀴로 관을 짜 소녀의 머리에 씌워 주었다. 이제 푸른 모자를 쓰지 않은, 황금 관 대신 가시와 엉겅퀴로 된 관을 쓴 공주는 숲지기에게 마지막으로 입 맞추었다.

  "봐, 나는 달 속에서 타오르는 빛 정령이 될 테니까."

  동녘에서 노랫소리가 들린 날, 숲지기는 숲지기가 된 이래 처음으로 등불을 켜지 않았으나 보름달이 핏빛으로 찬란하게 불타 동과 서가 모두 밝고 평안하였다.
  이튿날부터 동녘에 단 비가 내렸다.




::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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