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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냥 꽃, 열매

2005.05.28 00:3805.28

  마당에서 흙장난을 하는 내게 엄마가 다가와 말했다.

  요정을 본 사람은 요정 세상으로 가는 수 밖에 없단다,
  하고.

  아침마다 해가 지고, 밤마다 해가 돋는 넓고 아득한 뜰이었다. 늙은 복숭아나무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힘겹게 한 송이의 꽃망울을 밀어 올렸고, 그러나 결코 피지 않았다. 숫자를 모르는 어린 동생이 신발을 신지 않은 채 바깥으로 아장아장 걸어 나와 하늘을 보듯 복숭아나무를 올려다 보며 새가 날아오기를 기다렸다.

  누나, 오늘은 새가 날아 올까? 응? 희고 깨끗하고 예쁜 새 말야.

  그럴 때면 나는 흙을 헤집는 데 쓰던 모종삽을 팽개치며 아득아득 소리쳤다. 뼈를 씹어 먹을 것처럼,

  안 돼! 안 와! 새 같은 건 저런 늙어 빠진 나무엔 오지 않아! 둥지를 튼단 말이니? 저 나무에, 둥지를 틀면 부서지고 말 거야. 말라 죽어 버려. 썩어. 버섯이 자라고 말 걸? 새 같은 건 안 와!

  하고 소리쳤다. 목소리는 강이 되지 못한 채 바닥에 투닥투닥 소리를 내며 떨어졌고 흙이 입을 벌려 허방 같은 제 썩은 자궁으로 그것들을 밀어 넣었다. 피가 되어 나오지 못하는 목소리들은 땅을 병들게 만들었다. 나무는 크지 못하고 새로운 풀들은 다시 돋지 않는다. 나는 모종삽으로 땅을 긁었다. 주머니에서 한 움큼의 밥알을 꺼내 묻었다. 투덕투덕, 흙이 묻은 손으로 그 위를 토닥거렸다. 보듬으며 말했다, 어서, 어서어서어서어서어서 자라라고. 자라고 또 자라 푸른 낟알을 내게 보여 달라고.

  이 집은 너무 어둡고 추워,
  이 집은 너무 늙었어, 나이가 들었어, 이제 더는,
  꽃이 피지 않는 저 늙고 병든 복숭아나무.

  나는 마당에 주저 앉아 바깥을 내다 보았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흰 칠을 한 얼굴을 들지 않고 유령처럼 세상을 떠돌았다. 바람 소리가 나는 날마다 들창이 덜컹거리고, 방 깊숙한 곳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내보내 줘!
  나를 내보내 줘!
  나는 저기로 나가야만 해!

  이제 가야 한다고 악다구니 치는 소리가, 아득아득아득한 방 안에서 흐르고 엄마가 아빠가 달려들어 크고 둥근 동굴 같은 방 안으로 사라지고 나면 금새 소리는 잠잠해 졌다.

  이제 안되겠어.
  엄마가 말했다.
  뭐가 안 된다는 말야? 잘 견뎌 왔잖아, 멀지 않았다구.
  아빠가 말했다.
  애들을 생각해 봐! 저기, 마당에 나가 앉은 계집애랑 나무 둥치에 가서 웅얼거리는 사내애 말야. 내 배에서 나온 애들, 좀, 생각해 봐!
  엄마가 소리쳤다.
  이기적이네, 당신. 그럼 어쩌자는 거야?
  아빠는 답했다. 그리고 교수형 당하는 죄수처럼 넥타이를 바싹 조이고 자박자박 걸어 발자국도 없이 대문을 열었다. 문 밖에서 검은 옷 입은 사람들이 안쪽을 기웃거렸다.

  나는 입술을 비죽였다.
  검은 옷 입은 사람들은 내게 손짓을 해 보이며, 나직이, 교묘하게, 음산하게, 수군거렸다.

  멀지 않았어. 멀지 않았어.
  ……내보내 달라고 하잖아? 응? 네가, 내보내 주렴.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무 것도 안 들려. 늙은 나무에 새가 날아오지 않고, 응, 날아오면……

  봄은 가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겨울이 부르지 않아도 들렀다 지나쳤다. 모든 것이 유령처럼 둥둥 떠다닌다. 구름이 피고 태양이 태어나고 달과 별이 열렸다 진다. 나는 꽃이 피지 않고 열리는 열매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미술 시간 커다란 흰 종이에 검은 밤과 별과 달이 떨어지는 먼 세상과 물 위에 떠 흘러 가는 커다란 무화과 열매를 그렸다.

  뭘 그렸니? 꽃은 어디에 있지?

  선생님이, 차가운 손가락과 날씬한 목소리를 가진 젊은 남자가 내 머리카락 위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붉고 아름다운 색을 골라 정성 들여 무화과 위를 그었다. 그리고 칼로 잘라, 그에게 내밀었다. 여기, 여기 가득히 피어 있어요. 여기 가득히 가득히 비명도 지르지 않는 착한 꽃들이 피어 있어요. 뱃속에, 내장도 살도 뼈도 없는 텅 빈 무화과 안에 튼튼하게 들어 있었대요. 착한 꽃들이,
  비명도 지르지
  않고.

  아, 아, 아, 아, 아, 나를, 여기에서 내보내, 줘!

  뒷산에서는 매번 호랑이가 나온다고 했다. 뒷산이 달을 낳아 놓은 자리에서 천년 전에 묻힌 호랑이 뼈가 굼실굼실 춤을 추고 벌레들이 파먹은 눈알 자리에 떨어진 별을 주워 박고는 어슬렁어슬렁 사람을 먹는
  다고.
  아니 잘못되었어, 호랑이는 말야……
  ……복숭아를 먹어.

  나는 비밀을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세상에 가득한 유령들이 작고 보잘것없는 소원들을 이마에 써 붙이고 땅 속에 나란히 묻힌 자리 위를 거닐다 돌아온다. 늙은 나무의 거친 껍질이 바람 불지 않아도 덜렁대는 날, 너덜너덜한 나무의 자궁이 찬란한 피 냄새를 풍기며 뚝, 뚝, 뚝,
  뚝,
  떨어져 낙태한 태아처럼 상냥한, 말 없는, 한 무더기의 꽃을 뱉어 놓았다.
  한 번도 피지 못한 몽글몽글 몽우리들 사이로 벌레들이 긴다. 썩어 문드러지는 꽃잎들이 피 냄새를 풍기고, 생리 혈이 되고, 아이들은 끝없이 죽어 서로도 동으로도 가지 않는다. 세상 가득히- 여기,
  유령이 떠돈다.
  문 밖에는 아직도 서성서성 낯선 손님들이 검은 옷을 차려 입고 나를 향해 손짓하는데 엄마는 흙장난 하는 내게 와서 십자가를 긋는 법을 자꾸만 연습하라 하고 죽은 나무의 이미 떨어진 자궁 자리처럼 헐고 망가져 헤벌어진 방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방 안에서는 오늘도 내일도 백만 번이나 비명이 터진다. 나를, 여기서, 내보내 줘, 비명이 터지고, 뒷산에서 내려온 호랑이의 이빨 하나 없는 목구멍에서 달걀들이 툭툭 떨어져 나왔다.

  나는 광주리 가득 달걀들을 주워 엄마에게 가져다 주었다.
  모든 달걀이 죽은 병아리를 담고 있어, 프라이팬에서 소금들이 똑딱똑딱 춤추었다. 나는 죽은 토마토가 흐물흐물 달걀 위를 흘러 다니는 것을 보고 창 바깥까지 다가왔다 너울너울 춤추며 멀어지는 호랑이 뒷구멍이 뻥 뚫린 것을 들여다 보았다. 천년 전의 사냥꾼 남자와 천년 전의 어린애가 곡 소리 하나 없이 헤실 헤실 흘러가고 뼈들이 한데 뒤엉켜 우유처럼 녹아 흘렀다. 세상을 살게 하는 건 실은 유령이고 나무들은 이미 다 죽은 거였다고 누군가 폭로
  해야 할 텐데.

  엄마는 오늘도 내게 말했다.

  요정을 본 사람은 요정들의 땅으로 가는 수 밖에 없다,
  고.

  뚫린 방에서 더는 비명이 터지지 않고, 나는 대문 바깥에서 백 년을 기다린 낯선 손님들에게 손짓을 한다. 모종삽으로 저지레질 해 놓은 흙 바닥에 빗방울이 똑똑 떨어져 묻히고 죽은 꽃잎들을 그리로 싸 안아 흘려 보낸다. 아무 것도 태어나지 못하는 땅, 이제는 누구도 낳지 않아 할머니는 오늘도 죽지 않는다. 비명조차 지르지 않는 그녀는 죽지도 않고 잡아 먹히지도 않는다.

  나를 여기서 내보내,
  줘,
  하고 소리치지만 더 이상 호랑이는 없는 걸. 누가 당신을 불러내어 모든 것 팽개치고 바깥으로 뛰쳐나오게 한단 말인가. 누가 당신을 잡아 먹어 뼈와 살을 오독오독 오롯이 제 것으로 하고 땅에서 난 것 짐승의 배와 살로, 튼실한 꼬리로 태어나게 한단 말인가. 낯선 손님들이 할머니의 손과 발을 어루만지다 눈물을 흘려 놓고 떠난 자리, 핏자국이 흥건하여 나는 비로소 그 낯설고 아득한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엄마와 아빠는 이리저리 떠돌며 죽은 복숭아나무 뿌리를 갉아 냈다. 쥐도 없는 세상에서 벌레도 새도 날아 오지 않아, 나는 흰 새의 부리에 내 손가락을 잘라 내어 가져다 주었다. 할머니는 큰 눈알 가득히 때가 끼어 벌린 입술로 곰팡내를 풍겼다. 목구멍 깊숙한 데에서 열 명의 아이를 낳은 자궁이 피 냄새를 풍겼다. 이제 그곳은 텅 비어, 나는,
  핏자국이 흥건한 할머니의 갈라진 배 안에서 자꾸만 자꾸만 태어나는 잘 익힌 꽃송이들을 보고 또 본다. 희고 붉고 검고 파란 착한 꽃들이 태어나, 할머니의 텅 빈 자궁 한 입 베어 물면 무화과 냄새가 콧잔등을 시게 만든다.

  요정을 본 사람은 요정들의 땅으로 가는 수 밖에 없다,
  고,
  엄마는 말하며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엄마의 모은 손 아래 깊은 꽃잎들, 벌어지고 만개해 내 작은 동생들이 태어난다. 엄마는 비어 버린 제 배 안에 죽은 병아리들을 채워 넣고, 할머니는 죽은 땅 속에 죽어 묻힌다.

  울지 마,
  사람이란 죽게 마련인 걸.

  냉정한 척 말하는 자들의 머리 위로는 구름이 흘렀다. 구름은 희고 붉고 검고 파란 무화과들과 함께 서녘 깊숙한 곳에는 닿지 못하고 언제나 호랑이가 죽고 없는 이 유령의 땅에 남아 찬란한 인간의 자식들을 낳아 놓았다.

  아이를 낳고 낳고 낳고 낳고 또 낳아,
  늘어진 아기집에 죽은 피가 흘러, 오늘도 인간의 땅은 맑고 아름답더라고, 그 비참한 남루 안에서 나도 동생도 아직 살아 있다고, 날아들지 않는 흰 새가 백만 년 뒤를 퍼덕이며 울었다.

  할머니가 죽고, 뒤란 죽은 복숭아나무 곁에 새파르란 풀이 돋는다.
  아, 오늘도. 지독하게.
mirror
댓글 2
  • No Profile
    빈彬 05.06.01 14:19 댓글 수정 삭제
    ...미로님 글은 분명 아름답지만 가끔 섬뜩해집니다; 유려한 문체가 부럽기도 하지만, 미로님 글을 읽다보면 오싹해질때가 있어서, 무서울 때가 종종 있어요; 건필하세요
  • No Profile
    k-2004 05.06.01 18:58 댓글 수정 삭제
    저도 이 글 좀 무서웠습니다. 미로님 글 좋아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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