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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훈 연애편지

2005.12.30 23:0112.30

주희에게.


<무대는 방과 거실이 반씩 보이는 세트다. 방은 크지 않은 공부방이다. 책상 위에는 읽다 말고 펴 놓은 책들이 몇 권이나 펼쳐져 있고, 종이들도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책장은 사람 키보다 크고 길쭉한데 책이 다 채워져 있지 않은 상태다. 침대 위에는 이불이 단정하게 덮여 있다. 거실에는 소파가 ‘ㄱ’자로 배치되어 있다. 한쪽은 싱크대와 가스레인지, 전자레인지 같은 것들이 놓여 있어서 주방 겸용 공간이라고 해야겠지만, 거실이라고 해서 방보다 큰 것은 아니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아서 무언가를 쓰고 있다. 집에서 입는 아래위 한 벌로 된 운동복은 비교적 세련된 디자인의 검은색이다. 머리는 단정하지만, 방금 칠해 놓은 면도 거품 때문에 산타클로스 같은 느낌이다. 발에는 곰발바닥 모양의 털이 숭숭 난 실내화를 끼고 있다.
조명이 밝아 오면 그는 스포트라이트를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인상을 쓰며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조명이 흩어져서 무대를 전체적으로 따스한 톤으로 비추면 자리에서 일어나 어리둥절해하며 관객 쪽으로 다가선다.>


  (무대가 끝나는 부분까지 다가와서 허공을 매만지며) 여기 벽이 있었는데. (객석을 보며) 누구세요? 언제부터 이런 데서 남의 집을 엿보고 계셨어요? 혹시 조금 전에 여기 벽이 있지 않았나요? 조금 전에 이쯤 걸려 있는 시계를 본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걸까요. 갑자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계시니까 당황스럽네요. 겨울이었으니 망정이지 여름이었으면 민망한 맨살을 보일 뻔 했잖아요. 지금도 이 꼴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에요.
  아 그러고 보니 화장실이 이쪽 벽에 붙어 있었는데 없어져버려서, 면도는 어떻게 하죠? 닦아버려야 될 텐데 일단은. 어디 보자. 수건이, 수건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던 수건을 집어 얼굴을 닦는다.)
  그 눈빛들은 뭐죠? 이거 걸레 아니에요. 어차피 청소라는 걸 몇 달에 한 번밖에 안 하거든요. 걸레라는 게 바닥에 있을 리가 없죠. 그나저나 벽이 왜 날아가 버렸을까요?
  아! 그 인간 짓이구나. 그 인간 말이에요. 원래 여기 살던 녀석인데, 그런 이상한 친구가 하나 있어요. 군대에서 만난 작가 하는 친구인데요, 이 집에 이사 들어올 때 이상한 소리를 했었어요. 좋은 조건인 대신에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빠질 수도 있다. 그 상황이 이런 상황일 줄은 몰랐죠. 어이없게. 저는 그저 술 취해서 밤늦게 자기 집 못 찾고 우리 집 문을 두드리는 옆집 여자 이야기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별 거 아니네 하고 있었는데, 이런 일이라니.
  (허공에다 대고) 야! 좀 심한 거 아니냐? 이거 언제 돌려놓을 거야? 화장실은 어쩌라고? 니 작품에 제발 나 좀 등장시키지 말라고 했잖아!
  그 자식한테 하는 소리에요. 깜짝 놀라시긴. 그 자식 심심하면 자기 글에 나오는 이상한 캐릭터한테 제 이름을 갖다 붙이는데 아주 미치겠어요. 완전 사기꾼처럼 지 소설 속에서 지 자랑은 얼마나 하는지, 아주 소설을 작업용으로 쓰는 인간이라니까요, 그 인간이.

<작가 주. 등장인물의 대사는 특정한 인물이나 사실과 직접 관련이 없는 허구입니다.>

  야, 야! 시끄러. 허구는 무슨 허구야. 저 인간 말하는 거 보셨죠? 지가 무슨 창조주라도 되는 줄 안다니까요. 쓸데없이 글 속에 개입하고 말이야. (고개를 갸웃하다가 허공을 더듬으며) 어, 근데 그 자식이 쓴 문장을 제가 어떻게 본 거죠? 소리로 들린 것도 아니고 그냥 글이었는데. 어디에 그 문장이 들어왔던 거죠? 여러분도 방금 읽으셨잖아요. 작가 주 어쩌고 하는 그거. 자막이 있나?
  (원래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가 아까부터 쓰고 있던 것을 다시 들여다보며, 묵묵히) 치, 닥치고 하던 거나 하라는군요. 별 수 없죠.

<관객들, 웃는다.>

  웃기죠? 관객들까지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모르는 척 합시다. 자꾸 관심 가져주는 게 저런 자들이 원하는 걸지도 몰라요. 무시하고 그냥 하던 대로 합시다.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앉아서 인상을 구기면서 심각한 얼굴로 이 편지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되는 거죠? 자, 그럼 처음부터 다시 갑시다. 시-작.

  이게 뭐냐구요? 편지에요. 연애편지라는 걸 쓰고 있었어요. 요즘은 이렇게 손으로 쓸 일이 없어졌지만, 가끔 이렇게 하는 것도 재미있어요. 받는 쪽도 그렇고 쓰는 쪽도 그렇고.
  제가 집구석에 앉아서 이렇게 연애편지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분노할 사람들도 꽤 있을 겁니다. 연애 비관론자거든요. 오래 됐어요.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연애는 왜 하냐, 이런 소리를 하고 다녔죠. 사실은 혼자서만 그러고 다닌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세뇌시켰다고 해야 되나. 어릴 때 이야기에요. 누가 연애 상담을 걸어오면, 저는 일단은 결론부터 딱 잘라 말해 주곤 했어요. 헤어져라. 약간은 무책임한 말이었어요. 한번은 어느 후배를 붙들고 연애의 나쁜 점을 세 시간쯤 교육시키고 나서 그만두라고 말해 준 적이 있었어요. 그 다음날에 이 놈이 대뜸 전화해서 하는 말이, “형, 저 끝냈어요. 술 사 줘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연애상담을 안 했어요. 늘 똑같은 결론만 냈으니까, 사실 도움이 될 수 없는 상담이잖아요.
  그런데 그런 제가 지금 이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생각해도 이건 참 구원받지 못할 악행이에요.
  하지만 그녀를 보면, 여러분들도 생각이 달라지실 거예요. 아마 남자 분들은 훨씬 빨리 이해가 되실 거고 여자 분들은 그보다는 더 걸리겠죠. 그녀는 정말 매력적입니다. 아, 제가 이 방 어디에 우리 사진이 든 액자를 걸어 놨었는데, 눈에 안 띄네요. 요즘 하도 정신이 없어서 뭘 잘 잃어버려요. 어디다 뒀을까요. 분명히 벽에다 걸어 둔 기억이 있는데, 이게 어디 갔을까요? 치매에요, 치매. 그 여자가 선물해 준 건데 없어져도 되나 모르겠네요. 뭐 언젠가 나오겠죠. 청소할 때.
  사진을 못 보여드려서 마치 제가 거짓말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진짜 진짜 거짓말 아니거든요. 정말 정말 매력적이에요. 그녀는.
  그러면 너는 뭐냐 하고 반문하고 싶은 분들도 있겠죠. 그렇게 매력적인 여자가 왜 너 같은 놈한테 걸려들었냐. 돈이 많냐. 그런 말을 들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질문이라면 저도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의도적으로 작업을 하고 들어가서 만난 게 아니었어요. 그랬다가는 찬바람이나 쌩쌩 날렸겠죠. 그녀와 가까워진 건 자연스러운 계기였어요. 같은 해에 같은 과에 들어갔거든요. 첫눈에 반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서로 눈에 안 띄었죠. 그런 사람이 있는지도 몰랐어요. 서로 존재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는데, 그 상태로 몇 년이 지나고 보니 눈에 띄기 시작하더라구요.
  그러고도 그냥 오래오래 친구였어요. 이성으로 대했던 건 아닙니다. 워낙 취향이 비슷하고 이야기가 잘 통해서 같이 다니기가 좋았어요. 우리보다도 먼저 주변에서들 말이 나왔던 것 같았어요. 잘 어울린다고. 그랬으니 나 같은 사람도 그녀에게 바짝 다가서 있을 수 있었지, 안 그랬으면 어디 꿈이나 꾸었겠어요?

<편지를 들여다보다가 편지봉투를 찾아낸다.>

  아까부터 한참동안 잡고 썼어요. 이건 뭐랄까, 일부러 연애편지스럽게 쓴 편지라고 해야 할까요. 닭살스러운 말들을 다 긁어다 모아서 이렇게 사춘기스러운 편지지에다 써 본 거예요. 제가 원래 문자화된 증거를 남기는 일은 좋아하지 않지만, 괜찮아요. 이 여자한테는. 벌써 내면세계라는 걸 공유한지가 오래여서 뭘 더 드러낸다고 해도 부끄러울 것도 없고.
  어, 그런데 이 봉투에 이 편지지를 어떻게 집어넣으라는 거죠? (편지지와 봉투를 양손에 든다.) 편지지는 가로 폭이 이만큼이나 되는데 봉투는 길이가 이 모양이니, 접으라는 건가요?
  그러고 보니 이걸 접는 방법이 따로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요,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어떻게 하더라. (편지지를 접어보기 시작한다. 손톱으로 깨끗하게 밀어가며 접는다. 접는 동안 한동안 말이 없다가) 너무 꼼꼼하게 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생각하시는 거죠? 절더러 예민하다는 사람도 있었어요. 군대에 있을 때는, 싸이코라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놈들도 있었어요. 그 자식, 내가 안 들은 줄 알지만 그때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 분명히 들었거든요. 보복 같은 건 하지 않았죠. 물론,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 경멸해요.
  군대에 갔다 와서 학교로 돌아와서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어요. 성격이 어떻네 인간성이 어떻네 그런 소리들. 그래도 학교라는 데는 독창적인 치밀함이나 섬세한 감수성을 필요로 하는 데였으니까 거기에서 오는 부작용들도 더 잘 받아들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정말로 미친 게 아닐까 싶은 사람들을 본 것도 한두 번이 아니고, 나도 진짜로 싸이코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순간도 오니까요. 평화주의자라면서 왜 그렇게 전쟁사에 열광하고 있냐는 질문을 받고 나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편지지를 뒤집어 가며 접다가) 이렇게 하면, 여기가 이렇게 들어가서. 아니네.
  꼼꼼한 게 나쁜 건 아니잖아요. 중요한 편지일수록 접힌 선이 이렇게 깨끗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예전에 만났던 어떤 여자는, 지갑에 들어 있던 돈을 내가 정확하게 반으로 접어서 다시 넣어 줬더니 그걸 보고는 그 뒤로 연락이 없었어요.
  이렇게 접는 게 아닌가본데요. 아, 이상하게 됐다. 이! 에이 씨.

<허탈하게 앉아서 편지지를 보다가 점점 표정이 굳는다. 잔뜩 화가 난 표정이 되었다가 이내 가라앉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폭발한다. 접고 있던 편지지를 아무렇게나 구겨서 던져 버리고 책상 위에 있던 책 몇 권을 손으로 쓸어서 떨어뜨리고는 짧게 소리를 지르며 거실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방 문을 쾅 소리가 나도록 닫고는 소파에 가서 털썩 주저앉는다.
리모컨을 관객 쪽을 향하게 들고 전원 버튼을 누르다가 아무것도 되지 않자 손으로 리모컨을 몇 번 탕탕 두드린다. 그리고는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10초쯤 뒤에 서서히 고개를 들었을 때는 다시 온화한 표정을 하고 있다.>


  (지루하게 변화 없는 목소리, 그러면서 약간 섬뜩한 느낌을 주는 목소리로) 미친 건 아니에요. 누구나 화를 낼 수 있잖아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다 좋아졌어요. 그냥 TV가 없어져서 궁금했던 것뿐이에요. (정면 쪽을 가리키며) 이쯤에 분명히 TV를 둔 것 같았는데 없어졌어요. 어디다 뒀을까요? 찾을 수가 없어요. 요즘은 워낙 뭘 잘 잃어버려서요. 미친 건 아니에요. 약만 꼬박꼬박 잘 먹으면 더 이상 입원할 필요가 없다고 그랬어요. 이건 그냥 작은 에피소드일 뿐이란 말입니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아무것도 깨지지 않았잖아요.
  생활하는 데도 큰 지장이 없죠, 당연히. 1914년에 독일이 메츠에서 곧바로 파리로 진격하지 않고 주력을 리에주 요새를 지나 파리까지 빙 둘러가게 했을 때 병력 소모가 얼마나 컸을까를 계산해 내는 데에도 아무런 이상이 없는 두뇌였단 말입니다.
  네. 그랬어요. 누나 결혼식 때 저는 못 오게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아무것도 망치지 않아요. 작은 문제들이 작년, 그리고 올해에는 좀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거든요. 그녀에 대한 것이라면 특히, 망치고 싶지 않아요.

<방으로 걸어 들어가서 조금 전에 던져버린 편지지를 주워서 편다. 그리고 새 편지지를 서랍에서 꺼내어 거기에다 옮겨 쓰기 시작한다.>

  구겨진 건 한 장뿐이니까 다시 쓰면 돼요. 아까는 종이를 접다가 끝 모서리에 안 맞게 접힌 데가 있어서요. 다시 접다가 더 지저분해지는 바람에. (말없이 옮겨 적다가) 각도를 처음에 얼마나 정교하게 잡는가가 중요해요. 처음에 정한대로 쭉 가다 보면 끝에 가서는 많이 어긋날 수도 있거든요.

<거실로 가서 소파 뒤에 있는 창문을 열면 건물들 사이로 세로로 길게 밤하늘이 보인다.>

  이걸 사람들은 밤하늘이라고 부르지만, ‘그들’은 그냥 우주라고 불렀어요. 낮에 보이는 하늘을 사람들은 맑고 푸르다고 말하는데요. 사실 맑고 투명한 건 밤하늘 쪽이잖아요. 우주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건 밤이니까요. 한낮의 빛은 진실을 못 보게 하는 거대한 먼지가 아닐까요.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위를 올려다보고서야 비로소 아, 내가 진짜 우주를 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니까요.
  하지만 빛이 없더라도 우리 눈에 보이는 우주는 그냥 평면일 뿐이잖아요. 마치 우주가 창틀 안에 끼워 놓은 액자라도 되는 것처럼. 눈으로 보지 않고는 절대로 믿지 못한다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눈은 우주의 저 무한한 거리를 절대로 잴 수가 없으니까 이 창틀 안에 들어있는 네모난 우주 어디를 봐도 그저 무한. 똑같이 무한대의 거리라고 하고 넘어가겠죠. 그래서 평면처럼 보이는 거죠.
  그런데 어느날 옥상에 드러누워서 밤하늘에 보이는 별 하나를 마음속에 점찍어 두고, 오른쪽으로 60도 틀어서 다른 별 하나를 본다고 합시다. 두 별이 다 무한대의 거리에 있는 거라면 지금 나와 그 두 별은 정삼각형을 그리고 있으니까, 두 별 사이의 거리도 1 무한대가 되겠죠. 90도를 틀어서 봤다면 두 별 사이는 1.414··· 무한대가 될까요? 1 무한대, 2 무한대 이런 말이 있다는 게 말도 안 되겠지만 사람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거니까요. 지구를 둘러싼 우주의 둘레는 2×3.14×무한대!
  1 무한대나 2 무한대나 무한하기는 매한가지니까 둘 다 무한대로 나누면 ‘1=2.’ 0으로 나눈 것도 아니고. (한참 더 들여다보다가 창문을 닫는다.)
  의사 앞에서 이 소리를 하니까 곧 진단이 나오더군요. 이상이 있다고. 아까처럼 제가 갑자기 화를 낸다고 이상 진단을 내린 게 아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화 내는 것 때문에 의사가 진단을 내렸다고 생각하더군요. 사람들 눈에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거나 내가 ‘그들’을 만났다고 하는 거나 똑같이 무한대의 거리에 있는 두 개의 별로 보였나 봅니다.

<냉동실 문을 열고 뒤적거린다. 무언가 봉지에 담긴 것들이 후두두 떨어진다. 그것들을 간신히 정리해서 다시 쏟아지기 전에 냉동실 문을 잽싸게 닫아 둔다. 한 손에는 아이스크림 통을 들고 있다. 소파에 앉아서 스푼을 들고 아이스크림을 먹기 시작한다. 리모컨을 주워서 다시 전원 버튼을 눌러 보다가 포기하고 옆에다 내려놓는다.>

  그래서 각도가 중요한 거예요. 거리를 자로 잴 수 없는 곳에서는 각도로 재야하거든요. 사실 그렇게 재면 1=2가 되어버려서 우주가 이해할 수 없는 모양으로 일그러지기는 하지만, 어쩌겠어요. 우리 머리가 거기까지밖에 안 가는데.
  아이스크림으로 머리를 좀 식히고 있어요. 다시 가서 옮겨 써야죠.

<멍한 표정으로 몇 스푼 더 떠먹는다. 아이스크림 통을 다시 냉동실에 넣으려고 냉동실 문을 연다. 열자마자 떨어지는 봉지 하나를 손으로 받아 낸다. 그러나 아이스크림 통까지 집어넣고 문을 닫기가 쉽지 않다. 아이스크림 통을 냉장고에다 집어던질 것 같은 동작을 했다가 그만 둔다. 다시 호흡을 가다듬는다. 천천히 냉동실 안에 있는 물건들을 다시 꺼냈다가 차곡차곡 쌓아서 다 집어넣는다.>

  (침착하게) 갑자기 격하게 화가 나기 시작한 건 작년 가을이 처음이었어요. 사소하게 스트레스 받을 일들이 좀 있었죠. 1시간이나 걸려서 집에 왔더니 열쇠를 두고 왔다던가, 약속해 놓은 걸 번번이 바람 맞는다던가 그런 자잘한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던 날이었어요. 아침부터 길을 나서면서 짜증이 밀려 왔어요. 누구 하나 딱 걸리기만 해 봐라 하고 길을 나섰거든요. 버스를 타고 가는데, 기사 아저씨는 험하게 차를 몰지, 버스랑 택시들이 얽혀서 군데군데 엉망이지, 라디오에서는 이상한 뽕짝이 흘러나오지, 그러고 있다가 차에서 내렸어요.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택시 한 대가 신호를 무시하고 쌩 달려오더라구요. 모른 척 하고 가던 대로 걸어갔죠. 그대로 달려 오대요. 꽝.
  그러니까 그날은 토요일이었어요. 사고가 난 날. 병실에 누워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하고 있는데 화가 치밀어 올랐어요. 그 토요일 오후에 그 사람의 결혼식에 가려고 했었거든요. 그 선배, 영미 누나.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안 가려고 했었는지도 몰라요. 미련이 남아 있었거든요. 그게 참, 저쪽에서는 아무 감정이 없는지 청첩장을 쓱 내밀더라구요. ‘고지서야’ 하고 발랄한 목소리로 그걸 던지다시피 쥐어주고 가 버렸으니까, 아마 별 생각 없었겠죠.
  아, 모르겠어요. 그 누나 때문에 화를 내기 시작한 건지 어떤 건지. 최근에는 소식도 잘 몰라요. 유럽에 가 있다던가.

<책상으로 돌아가서 베끼던 편지를 마저 잡고 앉아서 조용히 옮겨 적기 시작한다.>

  그것 때문에 싸이코가 된 건 아니랬어요. 의사 말이, 그건 그냥 내가 스스로 꾸며댄 이유고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을 거라나. 성질 급한 게 나만 그런 것도 아니고, 그런 사람이 다 병원에 오면 자기는 부자 됐을 거래요. 제 경우는 좀 심하긴 했죠. 그건 인정해요. 길에서 낯선 사람이랑 싸움도 했으니까요. 다 부끄러운 과거예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계속 옮겨 적으며) 그녀와 저 말인데요, 친구로 친하게 지내던 사람하고 이렇게 손을 잡거나 키스라도 하게 되면 어쩐지 큰 죄를 짓고 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친남매끼리 그러는 것 같달까요.
  (얼굴빛이 싹 변하며) 이런 또 잘못 썼네. 한 줄이 빠졌잖아.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관객들, 긴장된 분위기. 그는 딱딱한 얼굴로 천천히 편지지를 구겨서 등 뒤로 던지고는 온화한 표정으로 스르르 돌아온다. 표정 변화가 갑작스럽다. 새 편지지를 꺼내 놓고 깊게 숨을 들이쉰다.>

  (간격을 둔 후 구겨진 원래의 편지를 낭독조로 읽는다.) ‘당신을 못 보는 날에는 내 영혼도 퇴화하는 것 같습니다. 깜짝 놀라 내려다보니 글쎄 내 발이 곰발바닥으로 변해 있지 뭐예요.’
  뭐 이런 멘트들을 쓰고 있는 거예요. 시도 아니고, 편지도 아니고. (책상 밖으로 곰발바닥 모양 슬리퍼를 살짝 내밀었다가 집어넣으면서) 그 여자가 선물한 거거든요. 안 그래도 이런 거 진짜 좋아하는데. 이 놈의 집구석은 바닥도 무지하게 차갑거든요. 신고 있으면 따뜻해요.
  평소에는 반말로 대화하니까 이런 데서는 높임말을 써 주면 재미있어요. 이런 멘트는 어떨까요?
  (편지지를 들고 읽는다.) ‘당신의 사랑스러운 볼에 대고 속삭였어요. 귀가 아니어도 들리셨나요, 내 마음이.’ 볼에다 키스했었거든요. 하하하. (갑자기 톤을 낮추며) 미쳤죠. 미쳤어. 이런 짓을 하고 있어요. 말로 하라면 절대로 못할 소리를. 어유, 어디 입에나 담겠어요?
  (도취된 듯) 음, 그녀는요, 신비한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다들 별난 애라고 생각하는데요, 제 눈에는 오히려 이쪽이 인간의 표준이랄까. 다수결로 따져서 표준을 삼자면 저쪽이 맞겠지만, 사람이란 모름지기 이래야 해 하고 보면 이쪽이 표준이 돼야 맞을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에요. 넓게 생각하고 관용할 줄 알고 행복하게 사는 방법도 아는 것 같고, 또 성실하죠. 대화로 해서 납득하면 납득한대로 행동으로 옮길 줄 아는 사람이 흔하지는 않죠.
  아, 또 자랑을 해 버렸나요. 그래도 이 여자가 얼마나 맑고 순수한 인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안 떠들었으니까요. (간격) 엇, 눈치 채셨군요. 알았어요. 여기까지만. 그만 그만.
  (10초쯤 말없이 진지하게 베끼다가, 얼굴에 스르르 미소를 띠며) 손은 또 얼마나 예쁜지.

<관객들이 장난스럽게 야유한다. 그는 키득키득 웃음소리를 내며 두 팔에 얼굴을 묻고 엎드린다. 그러다 갑자기 일어나서 진지하게 하던 일을 계속한다.>

  ‘그들’의 정체는 잘 모르겠어요. 이상이 있다고 진단이 내려진 건 그들 때문인데, 사실 이것 때문에 문제가 된 적은 없었어요.
  멀쩡하게 생겼어요. 30대 초반쯤 돼 보이는 남자 셋이에요. 주로 길가에서 접촉을 시도하곤 했어요. 맨날 하는 이야기가 종말 이야기인데요, 사실 이 사람들 이야기는 너무 어려워서 잘 이해가 안 돼요. 자꾸 우주가 붕괴하고 있다는데, 그 이야기를 왜들 나한테 하는지 모르겠어요.
  우주가 왜 붕괴하냐구요? 아까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우주가 평면으로 보인댔잖아요. 그런데 360도 어디를 봐도 거리가 똑같이 무한대로 측정되는 거면, 나로부터 밤하늘의 모든 지점이 같은 거리에 있다는 말이니까 우주가 거대한 공이라는 말이 되겠죠. 천구라고 부르는 그거. 그 천구의 둘레 길이가 2×3.14×무한대인데요, 사실 앞에 뭐가 붙었든 이것도 무한대잖아요. 그러니까 결론은 반지름이 무한대이고 둘레도 똑같이 무한대인 공이 우주의 모양이라는 소리가 되겠죠.
  그런 게 어디 있냐구요? 없죠. 그러니까 우주가 일그러지죠.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거 저도 아는데요, 그들 말로는 이게 영 틀린 계산은 아니라고 그러잖아요. 그 소리를 의사한테 했더니 약을 좀 먹어야 되는 거 아니냐고 걱정스럽게 말하기 시작하던데요.
  그들 말로는, 밤하늘의 별처럼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들이야 사실은 거리를 무한대라고 할 필요 없이 실측이 가능하니까 그런 모순은 안 생긴대요. 그런데 별이 아니라 진짜 우주의 끝 같은 곳은 잴 수가 없으니까 이런 곳을 생각하면 이게 꼭 틀린 이야기도 아니래요.
  빅뱅으로 우주가 팽창한다잖아요. 그때 생겨서 아직도 팽창하고 있는 우주의 맨 끝 경계선 말이에요. 거기까지의 거리라는 건 우주 전체의 크기만큼 머니까, 무한대라고 하고 넘어가는 것 말고는 무슨 방법이 있겠어요. 우주 배경 복사라는 게 바로 거기에서 나오는 전파라는데, 그게 지구에서 관측해 보면 우주의 어느 방향에서나 고르게 오고 있다는 거예요. 마치 지구가 우주의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우주는 지구를 둘러싼 원인 것처럼 말이에요.
  그러면 아까 말한 것처럼 1=2가 되고 2=2×3.14가 되고 반지름과 원 둘레가 똑같아지니까 우주가 일그러지지 않겠어요.
  그래서 그자들이 자꾸 나타나서 저를 붙들고 우주가 이렇게 일그러져가고 있다면서 걱정을 늘어놓기 시작하는데요, 그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저는 이런 생각만 드는 거예요. 그걸 왜 나한테 이야기하나. 내가 무슨 예언자라도 되나. 창조주라도 되나. 내가 뭐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라고. 중요한 사람인들 어쩔 거예요. 우주가 저 가장 먼 경계선에서부터 빛의 속도보다 약간 느리게 붕괴해 들어온다는데 아무리 굉장한 예언자인들 도망갈 구석이 없잖아요. 그 상황이 되면 내가 도대체 무슨 수를 쓸 수 있을까요?
  그래서 그냥 무시했어요. 의사 말로는 최소한 이 부분에서는 제가 확실히 미친 게 맞는데, 근데 그게 일상생활에는 별 지장이 없을 거래요. 무시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굳이 치료할 필요를 못 느낀다고.

<다시 한두 줄 베껴 쓴다. 또박또박 정성들여서 쓰는 폼이 진지하다.>

  그녀가 보는 데서 돌변할 때도 있었어요. 하긴 그때 병원에 드러누워 있었을 때 벌써 뭔가를 그 여자에게 집어던졌던 기억이 있으니까 꽤 역사가 깊은 편이네요. 그래도 이 친구는 이해해 줬어요.
  늘 한결같지는 않았어요. 저쪽에서도 짜증이 날 때가 있었겠죠. 그거 아세요? 정말 가까이에 있는 사람은 한결같아보이지는 않게 된다는 거. (손가락을 눈높이로 든다.) 여기까지의 거리는 자를 안 대고도 잴 수 있어요. 사람 눈이 두 개 다 정면을 보고 있는 건 입체를 보라고 그런 거니까요. (눈을 번갈아 감았다 떴다 한다.) 이렇게 하면 각도만으로 이게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알 수 있잖아요. 그런데 저 멀리 떨어져있는 건 오른쪽 눈으로 보나 왼쪽 눈으로 보나 똑같아요. 사실상 무한대랄까. 육안으로 구분할 수 있는 유한의 거리라는 게 사실 얼마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코는 어떻게 보이세요? 코는 너무 가까이 있어서 아예 두 개로 보이죠? 연주시차하고 똑같이 말이에요. 지구가 공전 궤도 이쪽에 있을 때하고 반대쪽에 있을 때하고 어떤 별을 봤을 때, 각도 차이가 날 거 아니에요. 그 떨림이 적을수록 무한에 가깝게 멀고 그 떨림이 클수록 가까운 거예요. 말장난 같겠지만, 기분 상태가 오락가락하기 시작하면서 저한테도 사람의 거리를 잴 수 있는 연주시차가 생겼거든요.
  (침울한 목소리로, 느릿느릿) 흔들리고 있는 그녀를 본다는 건, 반가운 발견이라고 해야 할지 씁쓸한 목격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한결같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예를 들면, 그 토요일에 결혼한 선배처럼 말이에요. (웃음)
  (힘 있게, 활력 있게, 딱딱 끊어서) 그래서, 각도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집중해서 베껴 쓰기를 계속한다. 10초쯤 지난 뒤에 집 전화로 전화가 걸려온다. 받기 전에 끊어진다. 돌아와서 자리에 앉자 또 전화가 걸려온다. 다시 뛰어 나가지만 벨 소리는 딱 3번 울리고 끊어진다. 이번에도 받지 못한다. 전화선을 뽑아 버리고 의자에 앉아서 섬뜩한 표정으로 한쪽을 노려보고 있다.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세 번 네 번 울려도 일어나 나가 보지 않는다. 초인종 소리가 그치고,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린다.>

  (작은 목소리로) 어느날 그들이 저를 불러냈어요. 낯선 전화를 받았었죠. 잠깐 요 밑으로 나와 보라고 하더군요. 만나러 나갔던 것 같은데, 그들을 만나서 뭘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났어요.
  의사는 제가 화를 내는 게 그 토요일의 결혼식 때문은 아니라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다른 원인들을 찾기로 했죠. 한두 번 최면 요법도 써 봤어요. 그러다가 이상한 기억이 별견된 거예요. 그들에 대한 기억 말이에요.
  그들이 우주가 일그러져서 붕괴해 들어오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죠. 저는 그렇다고 치자고 했어요. 그리고 반문했죠. 내가 무슨 물리학자도 아니고 종교 지도자도 아닌데 왜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고. 하늘을 가리키면서 도대체 저 우주가 언제 붕괴돼서 없어지는 거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저 우주가 붕괴하는 건 140억 년 뒤라고 대답하는 거였어요. 내가 그때까지 살아있을 것 같냐고 물었죠. 썩 꺼지라고. 당신들 누구냐고.
  의사 말이, 최면 상태에서 그런 장면을 봤다고 그게 다 실제로 있었던 일을 목격했다는 증거는 아니래요.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일 수도 있다는 거죠.
  그들이 무슨 기억을 주입한 것 같다고 제가 말했대요. 최면 같은 걸 걸더라고. 고통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그렇게 말했대요. 이 기억이 서서히 발현되면서 당신 능력이 깨어날 겁니다. 그리고 이 기억 때문에 당신 성격이 영향을 받을 수도 있지만 사소할 겁니다. 그렇게 들었다고 제가 말했대요.
  그 말을 해 주는 의사한테 제가 반문했죠. (어이없다는 투로) 그 말을 믿어요? 물론 안 믿는다더군요. 결국 그냥 사고 후유증 치료만 받고 말았어요. 다른 사람들은 제가 성격 문제로 병원까지 갔다고 알고 있지만 말이에요. 사실은 아주 멀쩡하답니다. 자제력이 점점 강해지고 있는 것도 느껴져요.
  방금 전화한 사람이 그들이라는 건 아니에요. 방금 벨을 누르고 간 사람이 그들이라는 것도 아니에요. 그 소리들이 이식된 기억을 깨우는 암시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닙니다. 저런 사소한 자극들을 접할 때마다 참을 수 없이 화가 나지만, 가끔 꿈에서 보는 그 장면을 진지하게 믿는 건 아니에요. (손을 풍부하게 움직이며, 긴박한 목소리로) 분노를 참지 못하고 내 속에서 악마가 내 육신을 잠식한 뒤에 결국 내 의식을 대체하는 꿈을 꾸곤 하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그건 내가 아니에요. 그게 나라고 하기에는, 그 순간에 제가 우주를 보는 눈이 지나치게 밝거든요. 우주를 보는 눈이.
  이 꿈까지 의사한테 다 이야기했다가는 약물치료 정도로 안 끝났겠죠.

<꾸준히 옮겨 적고 있다. 틈틈이 이야기하느라 속도가 빠르지는 않다. 거의 다 적은 눈치다.>

  둘이서 춘천에 갔다 온 적이 있었어요. 거기 박물관에서 흥미 있는 특별전을 열어서 보러 갔다 와야 했거든요. 돌아오는 길에 버스 안에서 그녀가 내 어깨에 기대고 잠들었었죠. 이때까지 살면서, 이삿짐도 날라 보고 가방도 메고 다니고 어깨에 많은 걸 올려 봤지만, 그때는 진짜 아, 어깨란 이렇게 하라고 만들어진 신체 기관이구나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흔들리는 버스 때문에 그녀가 잠을 깨면 그 순간이 끝나 버릴까봐 최대한 안 흔들리려고 애를 쓰게 되더군요. 눈을 감고 있으려니까 그 애가 숨을 쉴 때 나도 거기에 호흡을 맞추게 되는 거 있잖아요.
  (간격) 먼저 마음을 말로 꺼낸 건, 글쎄요. 어느 쪽이었을까요. 아직도 말로는 우리 사이를 잘 규정 안하고 있는데.
  어느 날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가 밤늦게 헤어지려는데 그녀가 나를 안아 줬어요. 볼에다 입을 맞추고는 버스에 오르는 그녀를, 한참이나 말을 잃고 쳐다봤죠.
  (장난스러운 투로)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사실 그때 그녀는 내 수염 때문에 살이 닿는 느낌이 안 났대요. 수염이 좀 빨리 자라거든요. 그래서 요즘은 면도를 열심히 하는데, 그 애가 그러더군요. 그래도 하루에 한 번만 면도하라고. 세 번 네 번 자꾸 하면, 저를 잘 모르고 남의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또 결벽증이니 뭐니 하면서 떠들고 다닐 거라고.
  그날 돌아가다가 발목을 삐끗한 걸 생각하면, 지금도 재미있어요. 넘어질 뻔 했어요. 그녀가 남긴 흔적 때문에.
  저한테 오래 살래요. 내가 없으면 자기는, 안 되겠대요. 그것보다 더 좋은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힘없이, 회상하듯) 저도 사실은 똑같은 말을 해 주고 싶었는데.
  (어깨에 힘을 주고 허리를 푹 숙여서 인사하는 흉내를 내며) 형님! 만수무강하십시오!

<마지막 남은 몇 줄을 옮겨 쓰고는 다 베껴 쓴 편지지를 들어서 관객들을 향해 한 번 들어 보인다.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책장 쪽으로 걸어가서 괜히 책들을 빼서 뒤적거리는 시늉을 하며 이야기한다.>

  그들도 제가 오래 살기를 바라는 거잖아요. 140억 년이나. 그때까지 살아남으라는 게 아니라 지금 다른 우주로 넘어가야 된다나 뭐라나. 어디까지가 내가 들은 이야기이고 어디까지가 내가 지어낸 이야기인지 알 수도 없어요. 이 방면에 관한 한 확실히 이상이 있다니까.
  그들이 뭘 주입한 건지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변화가 분명히 있기는 했어요. 문득문득 나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겹의 우주가 눈에 보이는데요, 가끔은 그 중 몇 겹은 깰 수 있다는 생각도 들거든요. 이런 이야기 여기서 해도 되나 몰라요. 또 미친 놈 증거만 하나 더 만드는 게 아닌지.
  대단한 건 아니에요. 우주가 전부 몇 겹인지는 모르겠어요. 아무튼 한 번 들어 보세요.
  (관객 쪽으로 몇 걸음 걸어 나오며) 첫 번째 우주는 지금 이 모노드라마 속 우주예요. 저도 사실은 대부분의 시간동안은 여기에 있던 이 벽이 (세트 정면 끝 가상적으로 벽에 해당하는 곳 부근에 손을 뻗어 휘저으며) 사라져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기는 해요. 그런데 문득문득 정신이 들어요. 아, TV가 있고 그녀의 사진이 걸려 있던 이 벽이 지금은 사라져 있구나. 그 작가 친구 놈이 한 짓이라는 것도 금방 깨닫죠. 평소에 말 없던 내가 이렇게 끊임없이 혼자 한 달 치 할 말을 한 자리에서 다 쏟아내고 있는 것도, 관객 여러분들 때문이죠. 이 우주에는 우리 집 세트가 있고, 여러분이 있고, 이 공연장이 있어요. (손짓해 가며) 저기가 출입문이고, 저기로 가면 화장실도 있고, 공연장 앞에는 별 다방도 있어요.
  지금 제가 연기를 하고 여러분이 돈을 내는 여기가 우리의 두 번째 우주예요. 이 두 번째 우주에는 그녀가 없어요. 그녀는 첫 번째 우주의 모노드라마 스토리 라인 안에 살죠. TV와 액자와 벽이 있는 곳도 첫 번째 우주예요. 여기에 벽이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 저는 두 번째 우주에서 깨어난답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가 싫어요. 그녀가 없으니까요.
  두 번째 우주를 벗어나서 세 번째 우주로 가는 것도 이제는 꽤 익숙해졌어요. 세 번째 우주는 사실 평면 위에 있어요.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가 4차원 공간인데 이 공간 전체가 2차원 평면 안에 들어 있다니까 안 믿어지시죠? 그럼 보세요. 제가 우리의 두 번째 우주를 깨뜨려 볼께요.
  보세요. 자. 방금 제가 한 동작. 이 모노드라마 원작 희곡에는 방금 제가 한 동작 지문이 괄호에 안 나왔답니다. 지금 이것도 그래요. 이 동작도. 이 우스꽝스러운 것이 지문에는 전혀 없어요. 두 번째 우주에 계신 여러분들 눈에만 보인다는 말입니다.
  미쳤다고 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에 저는 두 번째 우주에 있는 관객 여러분들한테만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니랍니다. 네 번째 우주에 있는 사람들도 동시에 저를 보고 있거든요. 네 번째 우주에서 ‘독자’라는 존재가 우리의 세 번째 우주인 이 드라마를 읽고 있어요.
  안녕하세요. 독자님. 안녕. (손을 흔든다.)
  이건 관객 여러분들께 흔드는 손이 아니고 저 밖 다른 우주에 있는 존재들에게 흔드는 손이에요. 그런데 여러분들 눈에도 물론 이 손이 보이시겠죠? 그게 미칠 노릇이라니까요.
  그 네 번째 우주에 있는 독자가 밤에 밖에 나가서 하늘을 보면 거기에 다섯 번째 우주가 펼쳐져 있답니다. 네 번째 우주에 있는 독자님, 지금 밖에 나가서 한 번 위를 올려다보세요. 아무데나 한 점을 찍어 보세요. 지금 있는 곳에서 거기까지 거리가 무한대로 보인다면 우주가 평면으로 보일 거예요. 다른 곳도 똑같이 무한대로 멀다는 생각밖에 안 드세요? 그러면 우주는 독자님을 중심으로 모두 같은 거리에 있는 원이 되고 천구가 되어서 머리 위를 덮고 있겠네요. 그 아름다운 게 다섯 번째 우주래요.
  그 우주는 붕괴할 거래요. 이건 여섯 번째 우주에서 온 30대쯤 되어 보이는 세 남자가 해 준 말이니까 믿어 보세요.

<핸드폰 문자 메시지 도착음이 울린다. 핸드폰을 찾아서 방 안을 헤집고 다니다가 침대 위 이불 아래에서 찾아낸다. 메시지를 읽고는 답장을 보내고 나서 핸드폰을 책상 위에 둔다. 의자를 당겨 책상 앞에 앉는다.>

  그녀에요. 이제 집에 들어간다는군요. 10시네요. 그녀는 지금 고시생이거든요. 생활이 아주 규칙적이에요. 아침 8시면 벌써 학원에 도착해서 공부를 시작한다는데, 밤 10시까지 공부시간이라니까, 고생이죠.
  (갑자기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며) 아니에요. 이건 거짓말이에요. 그냥 광고 메시지였어요. 그녀는, 떠났거든요. (간격) 이제 그녀는 8시부터 10시까지 법을 공부하지 않아요. 그녀는 그냥 떠난다는 말만 간단하게 남기고 떠났어요.
  이 세상 누구보다 가장 가까웠던 그녀는, 연주시차가 이 세상 누구보다 큰 사람이었어요. 흔들리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저는 무슨 말을 해 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녀는 흔들리다가, 말없이 손에 잡히지 않는 세계로 들어가고 말았어요. 아니, 사실은 이미 잠적해서 살고 있던 것은 저였죠. 늘 그런 나를 세상으로 불러 주던 게 그녀였는데, 그녀는 이제 나를 부르지 않아도 되는 세상으로 갔어요.
  미친 건 나였는데, 성격이 이상한 것도 나였고, 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것도 나였는데, 자기 발로 저 먼 나라로 떠나 버린 건 그녀였어요. ‘너 때문에 가는 게 아니야.’ 하고 유서를 남기고 나보다 먼저 가 버린 건 그녀였어요.  
  (애써 밝은 표정으로 돌아가서) 10시에 그녀가 하루를 마치면 잠깐이라도 만나곤 했어요. 어떤 날은 9시쯤 끝내고 만나기도 했죠. 시간이 꼭 많이 필요한 건 아니었어요. 원래 쭉 친구였기 때문에, 만나서 꼭 뭔가 하는 것 같은 걸 해야 된다는 부담은 없었어요. 영화를 본다든지 식사를 한다든지 그런 걸 매번 무슨 코스처럼 정해서 하지는 않아도 되거든요.
  딱 한 번만이라도 다시 그때처럼 만나서 잠깐 이야기하다가 이 편지나 전해 주고, 그렇게만 해도 좋을 것 같네요.

<다시 골똘히 연구하면서 손톱으로 눌러 가며 편지지를 접는다. >

  아까는 실패했지만, 덕분에 어떻게 접는 건지 알아버렸어요. (계속 접으면서) 이렇게, 자. 이렇게.

<접은 것을 들어 보이고는 봉투에 넣어 본다.>

  천원지방이라고 아세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 하늘과 땅이 그렇게 생긴 건 천장지구 때문이에요. 하늘은 멀고 땅은 오래 됐으니까요.
  하늘은 너무 멀어서 크기가 무한하니까, 나를 중심으로 어디를 봐도 똑같이 무한대의 거리에 있는 원이죠. 땅은 오래 봐 왔기 때문에 어디서 끝나고 어디에 각이 지는지 자로 재고 측량할 수가 있어서, 폭을 알고 모난 데를 알 수 있거든요. 그래서 네모가 되죠.
  이 네모난 편지지는 0번 우주인데요, 땅 같은 우주예요. 이 속에는 -1번 우주가 들어 있어요. 그게 제 마음인데요, 이건 다시 무한히 먼 데까지 뻗어 있어서 둥근 모양을 하고 있어요. 둥근데다가 무한대의 모순 때문에 반지름과 둘레가 똑같은 거리이기도 해서, 일그러지고 삐뚤어져 있기도 하고 엉망이에요. 갑자기 화를 냈다가 뭘 집어 던졌다가 또 미안하다고도 했다가. (간격) 그리고 이 우주는 그녀가 가 있는 곳의 거리이기도 해요. 끝을 알 수 없도록 먼 데 있으니까요. 그리움이라고 해야 하나요.
  그에 비하면 땅은 측량이 가능하고 안정됐다고 해야겠죠. 정리돼 있고, 믿을만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이렇게 정성들여서 꾹꾹 눌러 접고 있는 거예요. 선 하나 각도 하나 어긋나고 싶지가 않아서요. 그녀는 멀리 가 있으니까요. 서정주의 귀촉도라는 시를 읊어 드릴까요?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 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 리.

  신이나 삼아 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이런 심정이랄까. 보내지 못하는 편지나마 이러고 붙들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싸이코지, 하고 생각하신다면 뭐 별 수 없죠.

<핸드폰 전화벨이 울린다. 받는다.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하지만 알아들을 수 없게 입만 움직이고 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벽에 가서 기댄다.>

  그들이에요. 끈질기네요. 그 사람들, 여섯 번째 우주에서 왔는데요, 일곱 번째 우주가 붕괴되고 있다고, 서둘러 달래요. 그게 깨지면 그 아래에 있는 우주들도 140억 년이 되기 전에 다 없어질 거라는데요.
  의사가 그랬는데. 이거 다 거짓말이라고. 믿지 않으려는 제 의지가 중요하대요. 무슨 이상한 이름을 가진 약물의 도움을 받으면 한결 편해질 수도 있지만, 아직은 생활하는 데 별 문제가 없으니까 굳이 약을 쓰지 말고 되도록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게 낫겠다고 그러더군요.
  그 사람들한테는, 자기들 우주는 자기들이 알아서 지키라고 말해 줬어요. 그게 다 따로 떨어진 우주가 아니라고 하기는 하는데, 믿을 수가 있어야죠. 내가 원해서 각성시킨 게 아니라 당신들 마음대로 나를 납치해서 이렇게 만든 거니까 나는 모르겠다고만 해 뒀어요.
  여섯 번째 우주로 오라니, 절대로 안 될 말이에요. 다섯 번째 우주까지도 절대로 안 간다고 말해 줬어요.
  갈 수 있다면 꼭 네 번째 우주로 갈 거라고 똑똑히 제 입장을 밝혔어요. 계속 협조하지 않으면 납치할 수도 있다고 하는데, 마음대로 하라고 했어요. 설마 진짜는 아니겠죠? 그 사람들, 의사가 다 가짜라고 그랬는데. 약물을 써 볼까요? 지금 정도면 저 꽤 심한 증상을 보이는 거죠? 약을 먹을까요? 더 심해지기 전에.
  (침울하게) 그녀가 이런 저를 보면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심하게 불안해진다. 점점 격해진다. 동시에, 겁먹은 듯) 그녀가, 제가 이러지 않았으면 그녀가 계속 내 곁에 있어 주었을까요? 아 지금 저를 보세요. 예전에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벌써 미쳐버린 건 아닐까요? 제 꼴을 보세요. 아니 보지 마세요. 아무것도 보지 마세요. 조명을 꺼 주세요. 제발. 오늘 공연은 여기에서 끝내 주세요. 제가 제 돈으로 다 환불해 드릴께요. 조금이라도 측은한 생각이 남아 있다면 이쪽을 쳐다보지 말아 주세요.
  조명 꺼 주세요! 제발! 조명 좀!

<불이 꺼진다. 침묵이 흐른 후, 그의 목소리만 들려오기 시작한다.>

  (안정감 있게) 편지를 전해줘야 돼요. 내일 이 편지를 그녀에게 주면 그녀가 좋아할 거예요. 그녀가 나를 보고 웃는 모습을 보시면 아마 제가 왜 그녀에게 이렇게 빠져 있는지 다들 아시게 될 거예요.
  (얼빠진 사람처럼) 편지를 꼭 전해 줘야 해요. 이건 그녀에게 전해 주려고 쓴 편지예요. 혼자 보고 눈물 흘리려고 쓴 편지가 아니라구요. 제가 미치면 돼요. 더 미쳐버려서 그들이 하는 말이 진실이고, 우주가 진짜로 붕괴하고 있고, 다른 우주들이 겹겹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는 게 거짓말이 아니라면 저는 그녀에게 이 편지를 전해줄 수 있어요.  
  (간격) 네 번째 우주에 갔을 때 그분을 봤어요. 지금 이 글, 세 번째 우주를 쓰고 있는 배명훈이라는 사람을 직접 보고, 공책에 적혀 있는 글자도 하나하나 봤어요. 그 사람이 이 세 번째 우주를 그 사람에게 건넸어요. 이주희. 생일 선물로 주는 거랬어요.
  저는 내일 그 네 번째 우주로 가요. 나의 그녀와 꼭 닮은 여자가 거기에 살고 있으니까요. 그녀에게 꼭 이 편지를 전해주고 싶어서요. 그냥 그걸로 만족해요. 그 사람을 더 이상 귀찮게 하거나 무섭게 할 생각은 없어요. 정말로 딱 한 번만이라도, 우주만큼 무한히 뻗은 내 그리움을 그녀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뿐이에요. 다른 우주에서 찾아간 나 때문에 그 여자 분이 혼란스러워 하기라도 한다면 나는 이 편지를 그대로 들고 말없이 돌아올 거예요. 절대로 놀라게 하지 않을 거예요.
  아니,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그냥 우주를 헤매다 140억년 뒤에 우주와 함께 붕괴되고 싶어요. 돌아올 곳이 없으니까요. 첫 번째 우주에는 이제 그녀가 없으니까.
  나의 그녀와 나의 그녀를 꼭 닮은 그 분은, 그 두 사람은 같은 사람일까요? 아닐까요?
  하지만 이 모든 게 다 거짓말이라고 의사가 말했어요. 다 가짜라고. 다른 우주에 가 볼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들’이 다른 우주에서 넘어왔다는 말도 다 거짓말이고. 지금 살고 있는 이 우주에서 행복해지지 못하면 갈 데가 없는 거잖아요. 우리 우주가 빛보다 조금 느린 속도로 붕괴해 들어오면, 우리는 아무데도 갈 데가 없는 거잖아요. (소리 없이 눈물)

<조명이 서서히 밝아 온다. 그는 바닥에 앉아 있다. 조명이 완전히 밝아오면 다시 가벼운 표정을 하고 있다.>

  잠이 모자라서 그래요. 요즘 계속 밤에 많이 못 잤거든요. 잠을 못 자면 예민해져요. 내일은 출근도 해야 하니까 이제 자야겠어요. 병원에 가면 치료를 해 달라고 해야겠어요. 생활하는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으니까요. 공연도 무사히 끝마쳐야겠어요. 환불을 해 드릴 능력이 없거든요. 그 돈으로 그녀에게 새 귀걸이를 사 주고 싶어졌어요. 아까 환불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귀걸이를 골라 본 적이 없어서 그녀에게 어울리는 걸 잘 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뚫은 지 며칠 안 돼서 지금은 선물해도 걸고 있는 모습은 못 볼 거예요.
  귀를 뚫을 때 그녀가 그 남자의 손을 꼭 잡더군요. 그런 순간에 손을 잡아줄 수 있어서 그는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는,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그들이 나에게 나타나지 않아서 내가 싸이코가 되지 않았다면 나도 그 두 사람처럼 똑같이 행복했을까요? 그랬겠죠? 하지만 이건 다 거짓말이랬죠? 의사가 그랬어요. 거짓말이라고. 굳이 치료할 필요를 못 느끼겠다고.
  (피곤한 듯) 자야겠어요. 화장실도 없어져버렸고, TV도 없고. 씻지도 못하고 자야겠어요.
  안녕히 돌아가세요. 멀리 못 나갑니다. 나갈 때 거기 불 좀 끄고 나가 주세요. 스위치는 저쪽 벽에 붙어 있어요.

<신발을 벗고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을 덮어 쓰면 조명이 약간 어두워진다. 10초쯤 사이를 두고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그는 꼼짝도 않는다. 그래도 계속해서 초인종 소리가 들리면, 이불을 얼굴까지 덮어쓰고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불안한 듯 고개를 든다.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보세요. 문 좀 여세요. 꼭 데려가야 되겠습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바닥에 발을 내려놓는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쾅쾅 울린다.
“우주가 무너지고 있다니까요. 진지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시간이 없어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문 좀 열어 보세요.안 그러면 부수고 들어가야 돼요.”
그는 슬슬 거실 쪽으로 소리 없이 나간다.
“일곱 번째 우주가 무너지면 끝장이라니까요. 여기도 사라진단 말입니다. 네 번째 우주도 마찬가지예요. 여덟 번째 우주까지 우리를 넘겨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거기에 가서는 우리가 알아서 처리할께요. 제발 같이 가 주세요.”
그는 싱크대로 가서 칼을 집어 든다. 목소리가 이어진다.
“폭파시킬까?”
“아 이거 참.”
“어쩔 수 없지.”
“그래. 어쩔 수 없잖아.”
“알았어. 물러서 있어.”>


  (소리친다.) 이봐요! 당신들 다 가짜잖아. 나를 좀 내버려 둬. 나를 도대체 어디로 데려간다는 거야! 나 못 가! 지금 여기가 제일 행복해! 다른 우주로는 절대로 안 가! 갈 수 있다면 여덟 번째 우주로는 절대 안 가. 네 번째 우주가 아니라면! 이 편지도 전해 줘야 된다고.

<소리,
“그러니까 폭파시킬 수밖에 없다니까요. 문에서 떨어지세요! 곧 터져요.”>


  문? 무슨 문? 이봐요. 여기는 화장실도 없고 시계도 없다고. 작가라는 내 친구 놈이 문도 없애 버렸어요. 열어줄 문도 없고 물러서 있을 문도 없다고! 어디를 폭파시킨다는 거야?

<소리,
“5초 뒤에 폭발해. 자 엎드려!”
그는 몸을 날리려고 하지만 어느 쪽으로 몸을 날려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다.>


  어디에서 폭발한다는 거야?

<소리,
“어디긴. 문은 당신으로부터 똑같은 거리에 있는 모든 방향에 나 있다고.”
폭음.
조명이 요란하게 번쩍거린다.
막.>
mirror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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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ol 05.12.31 06:51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멋져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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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변신'보면서 막 다 읽었습니다. 아아, 중간에 차원 얘기가 굉장히 멋있었습니다. 흠칫할 정도로 말이죠^^:;(헉! 이 양반, 대본의 등장인물 주제에 나한테 말을 걸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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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01.31 05:00 댓글 수정 삭제
    이거야말로 진실한 차원이동물^^; 3차원과 2차원을 왔다갔다 하는군요. 2차원에 빨려들어갈 때엔 종이 위에서 글자가 쑤욱 올라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그러다가 다시 흩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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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01.31 05:01 댓글 수정 삭제
    예전에 보았지만 늦게나마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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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7.03.19 14:54 댓글 수정 삭제
    흠. 이런 곳에 또 댓글이 달려 있었군요. 남몰래... 어디다 말은 안 하고 다녔지만, 이 글은 꽤 야심작이었거든요. 흐흐. 실제 인물들을 집어넣어서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우주들 중 하나는 진짜 이 우주로 만들었구요, 그래서 모든 우주들을 포함하는 그 거대한 우주도 실제 우주가 되도록 의도했습니다. 문장으로 차원의 문을 두드려서, 물리학이 아니라 문장으로 우주의 구조를 그리는 그런 SF를 쓰고자 했던 원대한 프로젝트의 결과! 그런 어마어마한 야심이 숨어있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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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04.09 13:12 댓글 수정 삭제
    문장으로 그려내는 우주... 동감합니다. 저도 이런 것이 좋아요. '글자'가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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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7.04.11 21:55 댓글 수정 삭제
    아, 역시. 맞아요. 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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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티 08.03.10 11:40 댓글 수정 삭제
    독특한 형식이 좋았습니다.^^ 정말 연극 한편을 감상하는 듯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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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8.03.14 05:22 댓글 수정 삭제
    서술자 의심 프로젝트 중 하나로 쓰여졌습니다.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서술자 의심을 동력으로 한 SF... 언젠가 희곡을 좀 제대로 공부해 보고 싶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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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하 08.11.21 11:20 댓글 수정 삭제
    그녀가 간 우주는 몇 번째 우주인가요? 네 번째 우주의 그녀가 그녀인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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