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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운 기타 소리와 드럼 소리, 차라리 절규에 가까운 노래 소리가 그녀를 깨운다. 요즘은 아예 시대의 산물로 사라져 버린 헤비 메탈은 그래도 아침에 일어나는데 가장 잘 어울렸다. 손을 뻗어 헤비 메탈을 연주하는 PMP의 전원을 끈 그녀는 피로와 게으름에 빠진 몸을 간신히 일으켜 세운다. 작은 탁자와 의자 둘, 미니 냉장고와 전자 레인지, 컴퓨터와 장식장에 빼곡히 쌓인 CDP, MP3P, PMP 더미, 그리고 발끝의 침대가 보인다. 버릇처럼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본 그녀는 담배로 가래가 쌓인 목을 가다듬으며 군살 같은 이름을 떠올린다.

“있니?”

실낱 같은 희망으로 불러본다.

- 있어.

대답이 없기를 바랬지만,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돌아온다. 그녀가 아니면 들을 수 없는 목소리다. 임 영희, 1964년에 자살한 여자 아이의 귀신은 벌써 십 몇 년이 넘도록 그녀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래.”

어려서부터 죽은 것을 보고 들었다. 미치도록 괴로웠지만, 결국 죽지 못했다. 그렇다고 두 눈과 귀를 찌르지도 못했다. 그렇게 서른 해가 넘도록 살면서 이 저주를 풀어보려는 노력은 그만 두었지만, 그래도 매일 아침 혹시 나는 더 이상 보고 듣지 못하는 몸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확인하는 버릇은 지우지 못했다. 어느 날 아침, 바라는 모습으로 잠에서 깨어난다 하더라도 벌써 서른 한 살이다. 그리고 이제 와서는 달리 기쁘지도 않을 것 같다. 지금은 나름대로 이 시답잖은 인생을 이용하며 살아가고 있으니까.

- 9시야, 늦었어.

멍하니 앉아 있으려니 영희가 시간을 알린다. 그녀는 말을 듣지 않고 아래로 흘러내리기만 하는 몸을 억지로 침대에서 끌어내린다. 약국에는 늦어도 10시까지 도착해야 한다. 요전에 받은 최신 PMP는 잠시 풀러 탁자 위에 올려두고, 장식장 오른 끝에서 방수 장치가 달린 MP3P를 집어 든다. 메모리가 적지만, 가능한 귀에서 음악을 떼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일부러 구한 물건이었다.

- 씻을 시간 없을 것 같은데.
“늦어도 돼.”

영희의 걱정을 받아 치고는 욕실에 들어선다. 두 눈을 파낼 수는 없었지만, 귀는 봉할 수 있었다. 워크맨, CDP, MDP, 시대를 따라 휴대 음악 기기를 두루 사용했다. 하루 종일 음악을 듣다 보니 귀가 조금 상했지만, 그래도 멈출 수가 없었다. 날씨가 기막히게 좋은 아침에 방심하고 들뜬 마음으로 길을 걷다가 소름이 돋는 비명 소리를 듣고서 기분이 엉망진창으로 찢겨버리는 것보다야 백배 나았다.

‘She came across the room without notice, the tears and the blood locked in the walls’

뜨끈한 물과 함께 오래 전부터 방수 기능의 MP3P에 넣어 놓았던 노래를 듣는다. Lasse Lindh라는 이상한 이름의 가수의 노래다. 축 처지는 음색, 가냘프게 흐느끼는 남자의 음성, 불행을 부르짖는 가사가 물소리와 섞여 흐른다.

‘She took one step, two steps, three steps, Soon she was dancing’

왜 그런 음악을 듣냐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이 상은 같은 가수의 노래는 너무나 암울하지 않느냐고, 왜 이렇게 처지는 음악을 듣느냐고. 그녀는 그런 핀잔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She said here is where I will find peace’

그냥 자신이 불행하다고 한탄하는 노래가 마음에 들었을 뿐이다. 내일이라도 당장 나가 죽어버릴 것처럼 자신의 불행함을 토로하는 가수가 마음에 들었다. 세상에 불행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라는 위안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불행하면서도, 죽을 용기 또한 똑같이 없구나. 그렇게 다들 사는구나.

‘But the heart is old and pain must grow, it’s one thing you can’t skip’

한동안 지각 한 번 하지 않았으니, 오늘은 지각을 좀 하더라도 괜찮다. 그녀는 따끈한 물줄기에 머리를 들이밀며 눈을 감았다. 어쩐지 구석구석 정성껏 씻고 싶었다.


약국 일은 단조롭다. 그녀는 처방전에 따라 약을 찾아 꺼내고, 가루약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알약을 반으로 자른다. 그렇게 찾고 자르고, 또 담아서 봉하는 일을 쉬지 않고 반복한다. 좀 피곤하다 싶으면, 병원이 문을 닫고 잠시 손님이 끊긴다. 그 사이에 이르거나 혹은 한참 늦은 식사를 주문한다.

“어서 오세요.”

겨우 앉아서 쉴 수 있는 식사 시간에 손님이 들어온다. 조금 구식이기는 해도 외출용 정장을 입은 할머니가 약국에 들어서서 그녀를 비롯한 약사 몇 몇을 둘러 본다. 통바지와 이상한 무늬의 티셔츠가 아닌 걸 보면, 주변 가게의 장사하는 할머니는 아니다. 약국 일동도 밥이며 면을 먹다 말고, 할머니를 가만히 바라본다.

“여기 영미란 아가씨 있나?”

노인이기에 가능한 앞뒤 없는 낮춤말에 순간 기운이 탁 풀린다. 그녀는 약국 동료들에게 눈짓을 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서 할머니를 향해 걷는다. 식사 때나마 겨우 앉아서 쉴 수 있다고 기뻐했건만, 몇 분만에 도로 일어서 걸으려니 뼈마디가 쑤신다.

“제가 박 영미인데요.”

그래도 내색하지 않고, 살짝 미소 지어본다. 할머니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올려다보다 모를 미소를 짓는다.

“잠깐 이야기 좀 하세.”

사람은 늙고 병들면서 안으로 졸아 들지만, 반대로 목소리는 누구나 들을 수 있도록 묘하게 변해 버린다. 동료들을 돌아보니, 저마다 음식을 입에 넣은 체로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그녀는 체념하듯 한숨을 내쉬고는 할머니를 내려다 보았다.

“멀리는 못 가요.”
“요 앞에서 이야기하면 돼.”

그러더니 휙 돌아서서 먼저 약국을 나가버린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할머니를 쫓아 약국을 나섰다. 나서고 보니, 할머니는 약국에서 조금 떨어진 빌딩 입구의 낮은 계단에 앉아 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그녀는 짜증을 참아 누르며, 조그맣게 앉은 할머니 앞에 섰다.

“니, 무당이라면서?”

그녀는 내려다보고, 할머니는 올려다 보는데 듣기 싫은 질문이 숨구멍을 탁 찌른다.

“누가 그래요?”
“우리 교회 다니는 총각 하나가.”

연락책을 맡겨 놓은 사람 중에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둘이다.

“할머니, 이야기 못 들으셨어요? 절 만나러 오신 거라면…”
“늙어서 밤에는 못 돌아다녀. 무당 맞지?”

늙었다는 사실은 도대체 어디까지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무당 아니에요.”
“아무튼 귀신 보는 건 맞잖아.”
“네, 맞아요.”

쌓인 감정을, 그리고 솟구치는 감정을 하나하나 일일이 잡아 내리 누른다. 흥분하지 말아야 한다. 이성을 잃거나 하면, 곤란한 일이 더 늘어날 뿐이다. 그녀는 떨리는 숨결을 천천히 내쉬며, 생각했다. 차라리 얼른 처리하자. 얼른 처리하고 잊어 버리자.

“무슨 일로 오셨어요?”
“우리 아들 때문에.”
“아드님이 어쨌는데요?”
“죽었어.”

아들이 죽어서 왔다니, 귀신이라도 불러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걸까.

“할머니, 저 무당이 아니라서 귀신 불러오는 재주는 없어요.”
- 거짓말.

어느 사이 따라와 듣고 있었는지, 영희의 목소리가 그녀를 찌른다. 거짓말은 아니다. 무당처럼 귀신을 몸에 붙이는 일 따위 할 수 없다.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수는 있지만, 그것도 귀신 자체가 말짱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나도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말이야.”

늙은 것도 무기고, 아들이 죽은 것도 무기고, 자기가 죽을 것도 무기다. 애당초 대화도 교섭도 아니라 떠넘기는 식이다. 늙으면, 누구나 이렇게 영악한 사람으로 변하고 마는 걸까. 다음부터는 할아버지나 할머니는 받아주지 말라고, 연락책에게 단단히 일러두어야지. 그녀는 담배라도 한 대 피우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으며, 할머니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제가 뭘 해드리면 되나요?”
“그 아이가 석촌 호수에서 칼 맞아 죽었거든.”
“네.”
“바람 쐬러 다녀온다고 말해 놓고는, 거기서 죽었어.”
“네.”
“정문에서 제일 가까운 자판기 앞에서 죽었어. 음료수 사려다가
못된 놈에게 찔렸대. 겨우 이만 원 훔치려고 사람을 죽이다니, 망할 것들.”
“네.”
“병원에 가니까 나도 곧 죽는대. 암이래.”
“네.”
“나는 하나님 믿으니까, 천국에 갈 거야. 헌금두 많이 했구, 전도도 열심히 했구.”
“네.”
“근데, 우리 아들은 죽을 때 하나님을 안 믿었거든.”
“네.”
“아주 착한 애였어. 그래서 천국 갔을 거라 믿었는데, 어제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아무리 착해도 하나님을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는 거야.”
“네.”
“그러니까, 아가씨가 거기 가서 우리 아들이 천국 갔나 못 갔나 좀 알아 봐 줘.”
“네.”

무성의하게 대답한 끝에 마침내 이야기가 끝난다. 할머니가 늘어놓은 사연에 신경을 쓰고 싶지는 않다. 인생 이야기, 종교 이야기, 어차피 모르는 사람은 평생 가도 모를 뿐이다. 그저 천국 가시기를, 그렇게 좋게 생각해주고 끝내면 된다. 말을 마친 할머니가 손가방을 열더니, 길쭉한 봉투를 꺼내 그녀에게 내민다.

“자, 받아.”

그녀는 조심스럽게 봉투를 받아 들었다. 조금 색이 바랜 편지 봉투다. 봉투 아래에는 볼펜으로 이름 석 자와 전화 번호가 조그맣게 쓰여 있었다. 아마도 할머니의 이름과 전화 번호다.

“거, 엠 뭐라 하던데, 난 늙어서 그런 거 잘 모르니까. 그거 가지고 가서
아가씨가 직접 사. 전화 하구.”

그리고는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인사도 없이 휑하니 돌아 걸어 가버린다. 그녀는 지하철 입구 쪽 골목으로 사라지는 할머니를 지켜 보다가, 슬쩍 편지 봉투를 열고 안쪽에 든 종이를 꺼내 들었다. 오랜 만에 보는 백화점 이름이 찍힌 종이 위로 십 만원 권이라는 수치가 보였다. 그녀는 살짝 웃었다. 어이없음을 담은 짧고 재채기 같은 웃음이었다. 십 만원이라니, 도대체 십 만원으로 뭘 사라는 말일까? 백화점에서는 철 지난 MP3P도 십 만원을 훌쩍 넘는다. 싸구려 메모리 카드라면 한 장 살 수 있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엉망이구나. 절대로, 다음부터 절대로 할머니 손님은 받지 말아야지. 그녀는 상품권을 바지 주머니에 접어 넣고, 약국 외투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뭐든지 생각 났을 때 바로 처리하는 편이 제일 좋다.

“여보세요? 도훈이야? 난데, 너 혹시 너희 교회 다니는 할머니한테
내 이야기 한 적 없어? 없어? 그래? 그럼 지영인가? 알았어.
참, 그리고 앞으로 난 나이 많은 사람하고는 거래 하지 않을 테니까,
마흔 다섯 살이 넘은 사람한테는 내 이야기 하지 마. 알았지? 끊는다.”

통화를 하나 마무리 하고는 잠시 숨을 가다듬는다. 앞으로 세 통화만 하면 끝이다. 어쩐지 담배가 피우고 싶다. 어서, 퇴근 시간이 와야 할 텐데…….


오늘은 일찍 퇴근 하는 날이다. 조금 지각 했지만, 언제나 지각하는 다른 동료가 있으니 그다지 눈치 볼 필요가 없다. 그녀는 약국 가운을 걸어놓고는 짧은 인사를 남긴 체로 약국을 나섰다. 일찍 퇴근 하는 날은 보는 눈이 있어 담배를 쉽게 피울 수가 없다. 약사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예전이라면 몰라도, 요즘 같은 때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약국의 평판이 달린 일이다. 그녀는 지끈거리며 달아오르는 관자놀이를 슬쩍 쓰다듬고는 잰 걸음으로 지하철 역에 들어선다. 혹시라도 가는 길에 문제가 없도록, 가판대에서 AA 크기의 건전지를 사서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MP3P의 볼륨을 높였다. 지하철에는 유형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귀신이 돌아 다닌다. 역 안을 떠돌아 다니는 귀신부터, 전철을 타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귀신까지 수만 가지다.

-수서, 수서행 열차가 곧 도착합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귀속에는 곧잘 도시 사운드라고 부르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부드럽지만 냉담한 느낌이 흐르고, 아름답지만 하잘것없는 느낌이 나는 음악이다. 풍부하지만, 무엇 하나 진짜 악기로 연주하지 않은 그 음악에 골몰 하면서, 도착한 전철 안에 들어선다. 퇴근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탓에 전철 안에는 앉을 자리가 없다. 어차피 두 정거장이면 내릴 터라, 내릴 문 가까운 곳에 서서 눈을 감는다. 귀신 따위 조금이라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가짜 악기의 연주 속으로 음향 효과를 입힌 목소리가 흘러 나온다. 이 곡은 7분 23초짜리 곡이다. 목소리는 3분이 조금 모자란 지점에서 나오기 시작한다. 끝날 때쯤 눈을 뜨면 되겠지.

펄럭이며 떨어져 나와, 하늘거리며 흘러 고인다
담배 한대를 피우면 끝나지. 웃음이 지나친 혼자만의 이야기
쫓기고 도망치고 쫓기고, 시간에 쫓기며 도달하는 빛나는 종점
가면을 쓴 사람에게 반하고, 무너져 내리는 자신을 동경하지
신나게 떠들 생각으로 섞여 들어도, 언제나 외면당하는 신세가 된다.
바람에 떠밀리고, 망각에 치인다. 만질 수 있는 건, 그렇게 되어간다.
이 상자의 가운데 어두운 곳, 구원해줄 사람들을 위해 태어난다.
춤추는 바보, 춤에 취한 바보, 정신을 차린 당신이야말로 진짜 바보.
닿을 수 없었던 벽의 벽, 손을 쓸 수 없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유혹해오는 그들의 목소리. 가야만 하는 곳에 가야 하는 팔자라는데.
‘조심해.’라고 말하며 날개를 넓게 펴고, 날아오른 하늘은 푸릅니까?
이해할 수 있습니까, 구름의 기분을? 내려다 보이는 풍경은 바다인가요?

노바노우- 이상한 이름의 그룹이 노래하는 영문을 모를 가사에 애써 집중한다. 가사를 읽는 음성이 끝나고, 마무리 반주가 잦아들 무렵에 눈을 뜬다. 전철이 천천히 멈추고 있는 무렵이다. 살짝 매섭게 노려본 창문 너머 역 이름은 내려야 할 곳이다. 실눈을 뜨고, 전철 문이 열리자마자 사람 사이를 헤치고 나선다. 노래가 끊긴다. 다음 노래로 넘어가는 그 짧은 순간에 듣기 싫은 목소리가 귀를 스친다. 절규, 절규, 그리고 공포와 고통에 질린 숨소리가 그녀의 뇌를 움켜 쥐려는 순간, 음악이 가로 막는다. 그녀는 떨리는 숨을 가다듬으며, MP3P의 리모컨을 쥐고 볼륨을 높인다. 더 이상 높일 수도 없지만, 그래도 볼륨을 높여주는 버튼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힘주어 누른 다음에야 겨우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마치 귀에 송곳이라도 꽂힌듯한 통증이 겨우 가라 앉는다.


굳이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는 무뚝뚝한 점원이 일하는 편의점에서 맥주 한 병과 양념 오징어를 한 봉지 사 들고서 집으로 돌아온다. 동네에서 가장 조용한 집이다. 수맥이 기묘하게 뒤틀린 덕분에 몸에 좋지는 않아도, 귀신 역시 범접하지 못하는 곳이다. 그녀는 조심스레 MP3P의 볼륨을 낮춰본다. 절정에 달아 있던 기타 반주가 멀리 사라져도, 들리는 목소리는 없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MP3P를 벗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신발을 벗는다. 혼자 살기에는 조금 큰 집인데다가, 들여놓은 가구가 얼마 없어 작은 소리도 벽에 닿아 울린다.

- 석촌 호수라는데, 안 갈 거야?

처지는 걸음으로 거실에 놓은 침대에 기대어 앉으려니, 말이 없던 영희가 그녀의 머리맡, 침대 위에 단정히 앉은 모습을 드러내며 묻는다. 이제 겨우 숨을 돌리려는데, 바로 따져 묻는 영희의 목소리에 숨이 막힌다. 그녀는 잠시 아래 입술을 깨문다. 화가 나지만, 그래도 영희는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 않을 때는 기척조차 지워주는 유일한 귀신이다.  이성을 잃을 대상이 아니다.

“안 가.”

봉지에서 맥주병을 꺼내 라이터로 뚜껑을 딴다.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쌉쌀한 내음이 살짝 피어 오른다. 그녀는 병째로 맥주를 들이킨다. 한 모금, 두 모금, 싸한 맥주의 거품 맛에 코와 목이 경련을 일으킬 것 같을 때까지 쉬지 않고 들이킨다.

- 가지도 않을 거면서, 돈은 왜 받은 거야?

병을 입에서 떼어놓자 마자, 뱃속에서 커다란 트림이 올라온다. 숨기지 않고, 요란스럽게 그 트림을 뱉는다. 얼굴이 달아오른다.

“돈 같지도 않은 돈이었어.”
- 노인네에게는 커다란 돈일 수도 있어.

그녀는 침대 허리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괜찮아.”
- 뭐가?
“심지어 전화를 하지 않아도 괜찮아.”
- 돈 받았잖아. 할머니 이야기 못 들었어?
“들었지.”

포장을 뜯고 양념으로 조미한 오징어를 잘라 씹는다.

“그 할머니, 내가 귀신을 보든 보지 못하든 상관 없었을 거야.”
- 그걸 어떻게 알아?
“그냥 자기는 천국에 갈 것 같은데, 아들은 아닌 것 같아서 불안하고,
또 미안한 것뿐이야. 그래서 아무 쓸데없는데도 날 찾아와서 이상한
소리하고 간 거야.”
- 아닐 수도 있어.

영희의 항변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남은 트림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온다.

“살아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데 까지 노력한 거야, 그 할머니는.
하나님은 하지 말라는 미신을 믿고, 돈까지 준거야. 아들을 위해서
마지막 할 일을 한 것뿐이야. 부모라는 존재는 그런 거야.
자신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자식에게는 한없는 죄책감이 드는 거지.”
- 그러니까 부탁을 들어줘야지.
“그래, 내가 실제로 가서 보고, 전화할 수도 있겠지.
할머니 아들, 원혼으로 변해서 자판기 앞에서 절규하고, 괴로워하고 있어요.
그렇게 보고할 수도 있겠지만, 싫어.”
- 잘 지내고 있을 수도 있잖아. 아니, 설사 정말 원혼으로 변했다고 하더라도,
   좋게 말해주면 되잖아.

남은 트림을 뱉고, 얼마 남지 않은 맥주를 들이킨다. 코 끝이 저리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워, 다시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그녀의 몸과 영희의 몸이 겹치지만, 닿지는 않는다.

“원래 그런 거야.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을 위해서 거짓말인걸 알면서도
가짜 민간 요법을 해보거나 가짜 약을 비싼 돈 주고 사서 먹이는 거랑 마찬가지야.
그때부터는 환자를 살리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환자를 보내기 위한 노력인 거지.
살리지 못한 죄책감을, 그래도 바보 같은 짓거리에 돈을 아낌없이 낭비할 정도로
노력했으니까, 그러니까 정말로 어쩔 수 없었던 거라고 생각하기 위해서 말이야.”
- 가짜 약 행세를 하겠다는 거야?
“응.”
- 치사해.
“괜찮아. 내가 진지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면, 오히려 그 할머니가 상처 받을 거야.
할머니는 돈을 줬으니까 할 일은 다 한 셈이야. 그럼 영미라고 하는 사기꾼 같은
나쁜 년이 떼먹고 끝나는 거지. 할머니는 무조건 착하고 불쌍한 사람이 되는 거야.
그러면 돼, 그러면 되는 거야.”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 하지만, 넌 실행에 옮기지도 않았잖아.

영희가 끈질기게 달라 붙는다. 그녀는 떨리는 술기운을 따라 키득키득 웃었다.

“받은 만큼만 일하는 거야, 난. 십 만원으로는 원래 가짜 약 한 알도 살 수 없다구.”

귀신의 작은 한숨 소리가 들린다. 이야기는 끝이다. 그녀는 베개에 고개를 묻은 체로 손을 뻗어 침대 아래 놓아두는 MP3P를 집어 들었다. 이어폰을 귀에 꼽고, 잠시 망설이다 술기운에 의지해서 입을 연다.

“잘자.”
- 잘자.

귀신은 잘 일이 없는데도, 영희는 순순히 대답해준다. 그녀는 묘한 기분을 한숨으로 내쉬고는 MP3P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음악이, 누군가의 푸근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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