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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azyjam Stand By

2003.06.26 03:1906.26

  도시는 언제나 번잡하다. 나는 그 소란스러움을 좋아한다. 그것은 돈벌이 할 구석이 많다는 의미이니까. 번잡하다는 점에서 도시 태번의 저녁시간과 경쟁을 할만한 것은 없다. 나는 그 시끄러운 시간을 너무나 좋아한다. 살아있다는 기분을 한껏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 건 그럴싸하게 끝내치우고 주머니 두둑한 상태로 벌꿀 술을 들이키는 기분이란 마음 속까지 짜릿해질 정도로 살아있는 기쁨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나와 네 명의 동료들은 영지에서 꽤나 인심 잃었을 법한 귀족 나으리의 부탁을 들어주면서 한몫 단단히 챙긴 참이었다. 상대가 제법 이름이 알려져 있는 우리들이고 보니 배 나온 귀족 나으리도 부탁한다는 말을 몇 번이고 입에 올렸다. 그것 또한 기분 좋은 일이다. 소문은 빠르기도 하지. 단골인 이곳 '굴뚝새의 노래' 태번의 주인은 우리가 귀족 나으리의 일을 멋지게 처리했다는 이야기를 벌써 주워듣고는 사슴고기 요리를 무료로 내주었다. 고기가 좀 질기긴 했지만, 그리고 돈은 당분간 원 없이 쓸 수도 있지만, 역시나 공짜란 웃음이 나오도록 기쁜 법이다. 우리들도 예전에는 보잘것없는 대우를 받던 풋내기 모험가들이었으니 늘 땍땍거리던 주인이 요리를 내줄 정도로 컸다는 것은 마음 뿌듯해지는 일이지.
  나와 꼭 같은 기분인 듯, 성직자인 "빅" 한스는 싱글거리며 얼마 남지 않은 사슴 고기 요리를 끈질기게 해치우고 있다. 이 녀석이 사원에서 얌전한 꼴로 봉사하는 모습까지 본 적 있지만,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내 눈이 본 사실이 의심스러운 녀석이다. 별명 그대로 녀석은 우리 중 누구보다도 큰 덩치를 가졌으니까. 어두운 숲길에서 이 녀석과 일 대 일로 마주친다면 상대는 곰을 만난 것이라 생각하고 뒤도 안 돌아보고 달아날 것이다. 곰처럼 힘도 좋아서 맨주먹으로 싸운다면 나조차도 한스를 이길 것이라 장담할 자신이 없다.
  테이블이 흔들린다. 한스가 고기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나이프와 뼈다귀를 양손에 든 채로 건너편에 앉은 "번개 손" 덴을 걷어찬 것이다. 아까부터 덴이 옆을 흘끔거리고 있던 것을 눈치챈 모양이다. 옆 테이블에 앉은 상인 같은 남자의 손가락에서 번쩍거리고 있는 반지가 어지간히 신경 쓰였던가 보지. 우리와 만나기 전, 덴은 도둑이었다. 아니, 만난 이후에도 한동안 녀석은 도둑이었다. 지금도 가끔 옛 버릇이 나와 남의 물건을 슬쩍 하곤 한다. 그때마다 한스는 버럭 화를 내며 자신이 공명정대한 신의 하수인임을 과시한다. 물론 쥐처럼 조그마한 덴은 한스의 기세에 눌려 번번이 슬쩍한 물건을 되돌려놓을 수밖에 없다.
  덴의 옆자리에서 조용히 키득거리고 있는 것은 노웬. 이 녀석은 작은 키는 아니지만 꽤나 마른 체격이라 덴 만큼이나 작게 느껴지곤 한다. 마법사인 노웬은 제법 멀끔한 얼굴이기도 해서 사람들의 주목을 끌곤 한다. 어딜 보아도 모험자로 보이지 않는 인상인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신은 연약하기 그지없는 몸이라는 것을 거듭해서 주장했던 터라, 우리들은 필사적으로 놈을 지켰다. 그 결과가 경력과 명성에 비해 상처 하나 없는 노웬의 얼굴이다. 그 깨끗하고 멀끔한 얼굴은 아무래도 이 태번의 꽃인 종업원 줄리를 반하게 만든 것 같다. 줄리의 아버지인 주인 아저씨가 눈치채었다면 노웬의 가냘픈 몸은 몇 점의 고기가 되어 저녁 식탁에 오르게 될 지도.
  이크, 샤렌딜이 무서운 표정을 하고 노려보고 있다. 오해라고. 내가 줄리를 본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야. 샤렌딜은 우리 일행의 유일한 여자다. 왼 볼에 길게 난 상처가 꽤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긴 하지만 어쨌건 몸매 하나는 칼잡이답지 않게 상당히 좋다. 그리고 실력도 몸매만큼이나 끝내주고. 미인이라고 하기에는 좀 부족한 얼굴이긴 하지만, 새빨간 머리칼과 날카로운 눈매는 내 눈에 충분하고도 넘칠 정도로 예쁘게 보이니 그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래. 나는 샤렌딜에게 푹 빠져있고 샤렌딜 역시 나에게 빠져있다.
  나는 이 무리의 리더이며 샤렌딜과 마찬가지로 칼잡이다. 그만하면 샤렌딜과 가까워질 이유는 충분하지 않겠어? 하지만 샤렌딜의 몸매에 관심이 있는 것은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일단 나와 그녀는 우리의 관계를 비밀로 하고는 있다. 그렇다고 해도 눈치챌 놈은 눈치채고 있겠지. 모르는 척 하고 있을 뿐. 나와 샤렌딜 외에도 다른 녀석들 모두가 우리 팀의 결속에 대해 무척이나 신경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 우리들 다섯 모험가는 한 팀이다. 이따금 한 둘씩 다른 좋은 돈벌이가 있으면 잠시 빠져나가기는 하지만, 결국 다시 동료들에게로 돌아온다. 우리들 모두는 우리 다섯만이 진짜 팀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다른 모험가들과 함께 뛰는 것은 그저 잠시의 돈벌이일 뿐. 우리들이 진짜 팀이다.
  한스를 슬쩍 슬쩍 흘겨보고 있단 덴은 복수할 기회를 잡았다. 사슴고기 요리를 모두 해치운 한스가 만족한 표정으로 술잔을 입에 가져갔을 때였다. 덴은 한스의 입에 닿은 벌꿀술잔을 한껏 밀어붙였다. 한스는 덩치에 걸맞은 힘으로 덴의 손을 털어 내었지만 덴이 노린 바는 이루어진 모양이었다. 우리가 신나게 웃는 동안 곰같은 체격의 사제는 성복 앞자락을 온통 끈적한 벌꿀 술로 적신 채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한참 기침을 해대었다.
  겨우 숨을 고른 한스가 굶주리고 상처 입은 곰보다도 무서운 표정을 하고 노려보자 덴은 짐짓 점잖은 말투로 말했다.
   "너, 이제 4급 사제 서품을 받으러 간다며? 이런 사소한 장난 정도도 용서하지 못한다면 신을 모시는 자로서 실격이야."
  정곡이었나. 한스는 주춤하더니 커다란 어깨를 움츠렸다. 하긴 저 놈, 사제치고는 너무 울컥하는 데가 있지.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지? 덴은 나와 샤렌딜을 향해 히죽이 웃더니 한쪽 눈을 감아 보였다.
  샤렌딜은 손을 뻗어 풀죽은 한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4급 사제면 이제 정식 사제가 되는 거지? 처음 만났을 때는 풋내기 8급 견습 사제였는데. 많이 컸네, 한스."
  웃음 섞인 샤렌딜의 말에 한스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그는 약간 겸연쩍은 표정을 짓더니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어, 어쨌든 나는 신께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거니까 제대로 해야겠지. 그리 높은 직위까지 올라갈 수는 없겠지만 말년에는 어딘가 작은 사원의 선임 사제 정도는 하고 싶으니까."
   "헤헷, 숲 가운데 있는 곰들의 사원..."
  나는 농담을 던지는 덴을 급히 밀어내었다. 한스가 그 큰 덩치로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충분히 오래 볼 가치가 있었으니까.
   "한스 너, 의외로 소박한 꿈을 가졌구나?"
   "소박하다고 해도... 우리들은 모두 평민 출신이고, 내가 너희와 만나서 제법 이름은 알려졌다지만 그 이상을 바랄 수는 없잖아."
  노웬이 고개를 끄덕였다. 헤? 이봐, 노웬. 그런 온화한 표정 같은 거 네 놈에게는 안 어울린다고. 마음 속의 말 따위 당연히 들리지 않을 테니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노웬은 그 느끼한 표정 그대로 입을 열었다.
   "한스의 기분 알 것 같아. 소박한 꿈이라는 것은 평온하고 행복한 것일 테니까. 나 역시 어딘가 시골의 조용한 마을에서 천천히 늙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
  우리들의 테이블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한 동안 술집의 번잡한 소음이 우리들의 대화 대신 테이블 위를 메웠다. 그리고 제일 먼저 웃음을 터뜨린 것은 한스였다. 노웬은 배반당했다는 표정으로 한스를 보고 있었다. 웃고 있는 것은 우리 일행 모두였기 때문에 노웬을 위로할 사람은 없었다. 뭐? 시골 마을에서 조용히 늙어가고 싶어? 어이 노웬. 이제껏 네가 터뜨리고 갈고 뭉개고 태워버린 몬스터들이 다 웃겠다.



  우리들 정도로 이름이 알려진 모험가들이라면 푼돈 벌이 일 정도는 하지 않는 법이다.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까. 우리보다 어린 모험가들도 일은 해야 할 테니 말이다. 어느 정도 굵직한 일거리가 주어질 때까지 느긋하게 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를 가리켜, 운이 좋아 이름은 날렸지만 사실 실력은 보잘것도 없는 녀석들이라는 소리를 술에 취해 지껄이던 중년의 모험가들 무리와 요란하게 싸운 것이 한 번, 샤렌딜과 남몰래 빠져나가 다른 태번에서 뒹군 것이 한 번, 덴의 나쁜 손버릇에 한스가 호통을 친 것이 두 번. 그렇게 며칠이 훌쩍 흘러갔다.
  도시 경비 대장으로부터 호출을 받고 달려간 나는 예상대로 일거리를 제안 받았다. 시에서 좀 떨어진 지역에 던전으로 보이는 것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무슨 귀족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킨 마법사가 살던 던전 같다나. 던전 털이라는 것은 큰 돈벌이가 되거나, 아니면 털어야 쭉정이 밖에 안 나오는 둘 중 하나다. 도박이긴 하지만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태번에서 마냥 구르고 있기에 우리들은 너무 젊었다.
  기분 좋게 '굴뚝새의 노래' 태번으로 돌아왔을 때, 다른 녀석들은 모두 나가고 노웬만이 2층의 숙소에 남아 있었다. 노웬은 투박한 통나무 테이블에 앉아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녀석은 새로운 일에 대해 신나게 떠드는 나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말을 멈췄다.
   "왜 그러냐? 어디 아프기라도 하냐?"
   "아니."
   "그럼 얼굴이 왜 그렇게 죽상이야?"
  노웬은 그 멀끔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띄우고는 고개를 저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마법사란 속을 알 수 없는 족속이라는 편견이 이 녀석을 만나고는 많이 나아졌었는데. 오늘의 노웬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뭐라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눈을 끔뻑거리고 있노라니 노웬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이 발을 빼기 딱 좋을 때가 아닐까 싶어."
   "이봐, 노웬. 이번 일이 마음에 안 들면 거절해도 되는 거니까..."
   "아니. 그건 네가 결정해. 나는 이제 모험가를 그만두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머리 속에서 유리가 깨어지는 소리가 울린 것 같았다. 아무리 보아도 노웬은 농담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한참 동안 호흡을 멈추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길게 숨을 내뿜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뭐 기분 상한 일이라도 있어?"
  노웬은 소매 안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미스트우드 마을에 할머니 댁이 있어. 어릴 적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그곳에서 자랐지. 그 집의 소유권 문제를 분명히 해달라는 연락이 왔어."
   "미스트우드? 거긴 또 어디야?"
   "먼 곳이지. 조용한 시골 마을이야."
  노웬은 계속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린애를 달래는 데나 쓰일 법한 그 표정을 보고 있자니 조금씩 화가 치밀었다.
   "조용한 시골 마을? 너, 전에 했던 그 이야기 때문인 거냐? 조용한 시골에서 은거하고 싶다느니 했던? 뭐야, 할머니 댁이라고? 이제 와서 할머니 같이 살고 싶어요 어쩌고 하려는 거야?"
   "할머니는 재작년에 돌아가셨어. 나는 그 장례식에도 가보지 못했지. 그런데도 그 집과 농장의 상속자는 나 혼자라는 거야. 팔던지 아니면 와서 살던지 하라는데..."
   "팔아버리면 되잖아! 시골 마을에 농장이라니. 모험가에 마법사인 네가?"
  몇 마디 더 쏘아줄 생각이었는데,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노웬의 시선에 하고 싶은 말이 목안에서 사그라들었다. 아무래도 마법사와 눈을 마주하고 있는 상황은 본능적인 두려움이 생기게 한다.
  낮은 어조로, 그러나 힘주어 노웬이 말했다.
   "나는 진심이야. 더 이상 위험한 일에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아졌어."
  너도 나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는데. 우리 동료들과 어울리는 것이 못 견디게 즐겁다고 생각했는데. 동료들과 함께라면 절대로 죽음 따위를 생각하지 않을 거라고, 동료들과의 결속이 깨어지는 것이 무엇보다 두려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머리 속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말들은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나는 바라보고 있는 노웬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스가 해머를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그 들어올린 팔 밑으로 몸을 내민 덴이 한스의 등을 노리고 있던 괴물의 목 아래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한스의 해머가 괴물 셋을 한번에 날려버리고 제 자리로 돌아왔을 때 덴은 이미 샤렌딜의 등을 커버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한스와 함께 진로를 뚫을 수 있는 위치로 이동해 있었다.
  이 던전은 괴물로 가득했다. 그것도 기분 나쁘게 인간처럼 두 발로 걷고 두 팔을 쓰는 형태의 괴물들이. 여기저기 기운 자국이 있고 반쯤 썩어 가는 피부로 보아 놈들은 이 곳에 살던 마법사라는 놈이 시체를 가지고 만들어낸 놈들임에 분명했다. 아니면 멀쩡한 생명체를 가져다 시체 비슷한 꼴로 만든 쪽일까.
   "하여간 마법사라는 놈들은!"
  샤렌딜이 꽉 다문 이사이로 거친 숨을 토해내고는 잠시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가 멈칫한 것을 우리들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마법사가 뭐? 전투의 소음을 뚫고 이상하리만큼 똑똑히 들려오는 소리. 돌아보면 눈을 번뜩이며 쏘아보는 노웬의 시선. 우리들은 모두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던전의 침입자를 없애기 위해 공격해오는 괴물들은 도무지 물러설 줄도, 두려워할 줄도, 피할 줄도 몰랐다. 공격뿐이었다. 놈들은 질릴 정도로 숫자가 많았다. 검을 휘두르는 팔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어쨌거나 이 안 어딘가에 있을 뭐라던가 하는 귀족 나으리의 집에서 사라졌다는 검을 찾아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우리들은 인간인지 시체인지 모를 괴물들을 꾸준히 베고 으스러뜨리고 찔러가며 조금씩 안으로 전진해 들어갔다.
  좁은 통로 안쪽으로부터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안에 넓은 공간이 있구나. 내 앞을 막은 괴물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그러나 검은 허무하게 돌 바닥을 내리쳤을 뿐이었다. 검자루를 단단히 쥐고 있던 손목까지 충격이 전해져 찌릿했다.
  무서울 정도로 피하지 않고 달려드는 괴물들의 행동이 돌변해 있었다. 놈들이 던전 안쪽을 향해 달아나고 있었다. 혹시 싶어 등뒤를 돌아보았으나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나는 저린 손목을 문지르며 혀를 찼다.
   "뭐야, 저 놈들. 이제 좀 질리던 참이긴 했다만."
  왼편에서 덴의 작은 그림자가 튀어 나왔다. 그는 큰 소리로 외치며 달려갔다.
   "예감이 나빠! 빨리 와!"
  우리는 덴을 쫓아 달렸다. 얼마 가지 않아 예상대로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유감스럽게도 마음 편히 전투를 할 수 있을 만한 곳은 아니었다. 깎아지른 벼랑이 우리 앞에 입을 벌리고 있었고 천장 역시 높았다.
  폭이 넓은 벼랑 너머에는 지금까지 온 것보다는 좀 더 넓고 손질이 된 통로가 있고, 괴물들이 그 안으로 끽끽 비웃음 같은 소리를 내며 달려들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한스가 해머로 발치를 가리켰다. 굵고 튼튼한 말뚝이 박혀있고, 그 아래로 나무와 밧줄로 만든 사다리가 벼랑 아래를 향해 축 늘어져 있었다. 제기랄. 저 따위 걸어다니는 시체 따위에게 이런 꼴을 당하다니.
   "노웬, 준비해 줘! 놈들을..."
  무심코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스스로 놀라 말을 끊었다. 노웬은 여기 없어. 놈은 평화로운 시골 마을 구석에서 농장이나 돌보고 있을 테니까.
   "...빌어먹을!"
  시선을 떨구자 이제까지의 전투로 몇 군데 이가 나가버린 검날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무언가 내 속에서 툭 끊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올리고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째서 이런 꼴이 되어버린 거야. 마법사! 마법사가 필요한 이 순간에 왜 여기에 없는 거야! 이제껏 나와 샤렌딜이 온 몸에 상처를 만들어가며 놈을 지켜준 것이 무엇 때문이었는데. 이런 적절한 때에 마법을 쓰는 것이 놈의 일 아닌가. 우리들은 녀석과 호흡을 맞추어 행동하는 것에 익숙해 있는데. 빌어먹을 노웬!



  샤렌딜의 오른쪽 어깨에는 울퉁불퉁한 상처가 나 있다. 몇 달 전의 언젠가 돌 벽에 짓눌렸을 때 생겨난 상처다. 상처는 아물었지만 흉터는 그대로 남았다. 나는 새빨간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어깨의 상처를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었다. 그 감촉이 간지러웠는지 샤렌딜은 잠꼬대를 웅얼거리며 내 손을 털어 내고는 돌아누웠다.
  뭐라던가 하던 귀족 나으리가 의뢰한 던전털이는 성공적으로 임무를 끝내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피해는 이전에 비해 엄청났다. 보수를 잔뜩 얻기는 했지만 한동안은 그 보수로 쉬며 몸을 추슬러야 할 것 같았다.
  나도 샤렌딜도 상처를 몇 개나 더 얻었다. 한스 역시 부상이 컸으나 사제 승급 서품 준비를 해야 한다며 급히 사원으로 떠났다. 남은 건 덴 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나와 샤렌딜은 배짱이 생겼다. 그래서 슬그머니 다른 태번을 찾는 것도 아니고 이곳 '굴뚝새의 노래' 숙소의 침대에서 뒹굴고 있는 것이다. 배짱이라. 어쩌면 자포자기에 가까운 감정이었을 지도 몰랐다.
  샤렌딜이 깨어나지 않도록 조용히 일어났다. 이번에 새로 얻은 허벅지의 상처가 당겨져 아팠다. 상처에 닿지 않도록 조심해서 옷을 입고 아래층으로 향했다. 시원한 벌꿀 술이라도 한잔해야 답답한 목이 풀리려나.
  아래층의 주점 구석 자리에는 덴이 앉아있었다. 작은 체구를 잔뜩 움츠린 채였다. 늘 함께 있던 한스가 없어서인지 덴은 더 작아 보였다. 그러나 녀석의 기분을 맞춰줄 여력 같은 건 나에게도 없었다.
  바에 걸터앉자 줄리가 무언가 묻고 싶다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제기랄. 이놈이고 저놈이고 하나같이. 노웬에게서 아무런 연락도 없는 건 이미 알고 있잖아. 새삼스럽게 그 놈의 부재를 주지시키려 하지 말라고. 험악한 표정을 지었음에도 줄리는 잠시 내 주위를 돌고 나서야 물러났다.
  벌꿀 술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켰지만 목은 시원해지질 않았다. 가슴 아래부터 무언가가 목까지 꽉 채우고 있는 기분이었다. 뭐야, 그저 한동안 함께 다니던 마법사 하나가 떠났을 뿐이잖아. 모험가들과 함께 다닐 마법사를 구하는 일은 쉽지는 않겠지. 애송이 마법사를 데려다가 쓸만한 놈으로 키우는 것도 큰 일이고. 이도 저도 안되면 그저 남은 우리끼리 다니는 일에 익숙해지는 수밖에.
  두 잔 째의 벌꿀 술을 입에 대었을 때, 나는 이끌리듯 뒤를 돌아보았다. 구석에 앉은 덴이 나를 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불에 덴 것처럼 눈을 돌렸다. 짚이는 것이 있어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니 덴은 옆 테이블에 앉은 모험가들을 흘끔거리는 것이었다. 녀석의 시선은 빈 의자에 올려진 가죽 주머니를 향해 있었다. 가죽 주머니의 아가리에서는 둔한 반짝임을 내는 무언가가 비죽이 튀어나와 있었다.
  덴이 하려는 행동을 제지하기 위해 발끝에 힘을 주었다가 다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귀찮아. 노웬이 멋대로 행동한 것만으로도 모자라서 너까지냐? 함께 다닌 지 벌써 4년이 가까운데 아직 나쁜 손버릇을 고치지 못하는 덴에게 나는 실망까지 느끼고 있었다. 알게 뭐람. 마음대로 하라지. 나는 덴에게서 등을 돌리고 술을 들이켰다.
  등뒤가 소란스러워지는 가 싶더니 내가 앉은 의자 다리에 무언가가 요란하게 부딪쳤다. 술잔을 내려놓고 내려다보니 의자 밑에 널브러져 있는 것은 덴이었다. 덴은 몸을 구부리고 심하게 기침을 해대었다.
  녀석이 노리던 물건의 주인일 터인 모험가들이 쓰러진 덴을 향해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아마도 덴을 날려버린 녀석인 듯한 자는 그리 큰 키는 아니지만 보기에도 단단한 체격을 한 자였다. 그의 손에는 제법 무게가 나가 보이는 황금 조각상이 들려 있었다. 보지는 못했지만 상황이야 뻔했다. 작은 물건이라고 생각하고 슬쩍 손을 내민 덴은 예상외로 조각상이 컸던 탓으로 무게를 감당 못하고 들킨 것이다.
  겨우 기침이 가라앉은 덴은 일어날 생각도 않고 도움을 요청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어떻게 해달라는 거냐? 네가 저지른 짓의 결과잖아. 한스라면 사과하고 적당히 위협하기도 해서 사태를 무마하겠지만, 나는 그런 재주 같은 건 없어.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는 동안 덴은 내 표정에 드러난 생각을 읽은 모양이었다. 그는 발끈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더니 황금 조각상을 들고 있는 자를 향해 버티고 섰다.



  문을 여는 소리에 깨었는지 샤렌딜은 긴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켜고는 일어나 앉았다. 침대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시트로 가슴만 가린 자세여서 탄탄한 어깨로부터 엉덩이까지 이어지는 등의 예쁜 곡선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그녀의 시선을 피해 통나무 의자에 앉아 내던지듯 이야기를 꺼내었다.
   "덴이 떠난대."
   "뭐?"
  샤렌딜이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되물었다. 나는 내 목소리가 아무런 감정도 싣지 않고 흘러나와 주길 바라며 벌어진 일을 설명했다.
   "...그 녀석, 무슨 생각을 했는지 겁도 없이 달려들잖아. 하지만 상대가 되어야 말이지. 그쪽 전사가 성격이 좋았는지 곤죽이 되도록 패고 나서는 술을 사는 모양이더라. 그리고 덴 녀석이 멍투성이에 퉁퉁 부운 얼굴을 하고 나에게 와서는 그쪽 무리와 함께 당분간 다니고 싶다는 거야."
  설명을 끝낸 후에도 샤렌딜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돌아보자 그녀는 매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왜 말리지 않았어?"
   "말리고 자시고가 어디 있어? 덴 녀석이 우리와 무슨 계약을 한 것도 아니고..."
   "그 이야기가 아니야. 덴이 맞게 되었을 때 왜 말리지 않았느냔 말야!"
  그녀의 목소리도 표정만큼이나 날이 선 검처럼 날카로웠다. 난 지금 충분히 피곤하다고, 샤렌딜. 나는 손을 내저었다.
   "덴이 잘못한 거야. 그 녀석 한 번 쯤은 그렇게 혼쭐이 나야 그 나쁜 버릇을 고칠 거라고. 그리고 어차피 이젠 그 녀석 얼굴을 다시 볼 일도 없을 거 아냐?"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너 정말 덴을 떠나보낼 생각인 거야?"
  샤렌딜은 화가 치미는 듯 시트를 젖히고 일어섰다. 상처투성이지만 그럼에도 굉장한 몸매. 커다란 가슴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것에 동요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나빴다. 그녀마저도 나에게 화를 내고 있다. 질렸다고, 이런 상황.
   "노웬 녀석이 갑작스레 엉뚱한 소리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지. 어차피 다들 같은 심정이었던 거야. 다들 이름도 알려져 있겠다, 받아주는 곳은 많을 테고. 어쩌면 한스도 이대로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모르지."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샤렌딜은 시트를 몸에 감고는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내 기분은 더욱 가라앉을 뿐이었다. 모든 것을 믿을 수 없고, 모든 것에 화가 치밀었다.
   "나는 우리들의 관계가 단단하다고 믿었지. 하지만 아니었잖아. 나만 그렇게 믿고 있었던 거야. 어려울 때 만나서 함께 이만큼 커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리석었지."
  샤렌딜의 손이 어깨에서 떨어졌다. 고조되는 감정을 조절하려는 듯 그녀는 숨을 크게 쉬고 있었다. 몸을 감은 시트 위로 팔짱을 낀 그녀의 가슴이 크게 위 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차분하게 생각을 해. 한스는 사제 서품을 받기 위해 사원에 간 것뿐이잖아. 절차가 끝나면 돌아온다고. 그 녀석은 포교 활동을 위해 앞으로도 계속 모험가로 지내겠다고 했으니까. 언젠가는 정착하기 위해 떠나겠지만 그건 먼 미래의 이야기잖아."
   "하지만 노웬은 이미 떠났고, 덴도 떠나잖아?"
  반박이랍시고 내뱉은 내 말은 스스로 듣기에도 맥빠질 정도로 기운이 없었다. 목소리였을까, 아니면 내용이었을까. 어느 쪽에 분노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순간에 샤렌딜은 화를 터뜨렸다.
   "바보 같은 자식! 어느 쪽도 붙잡으려고 하지 않았으면서! 덴은 말려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야. 자신의 나쁜 손버릇을 말야. 한스가 없으면 네가 했었어야 하잖아! 왜 그냥 지켜보다가 얻어맞도록 만들었어!? 함께 있으면 나는 안전하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는 리더라는 게 대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꼬박 하루가 지나도록 샤렌딜은 화가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내내 보란 듯이 나를 무시했다. 그런 그녀를 피해 태번의 아래층으로 가면 덴이 싸웠던 무리와 죽이 맞아 술잔을 기울이며 떠들어대고 있는 꼴을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결국 내가 있을 곳은 태번 2층의 숙소 방뿐이었다.
  기분이 가라앉으면 샤렌딜에게 사과를 해야지. 덴과도 다시 이야기를 해봐야 할텐데. 검과 갑옷도 대장간에 맡겨 손을 보고 기름을 먹여두어야 할 텐데. 생각 뿐. 몸은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기분이 가라앉은 때라는 것도 도저히 오지 않을 멀고도 먼 미래처럼 느껴졌다. 그 때가 되면 샤렌딜도, 덴도, 한스도 모두 떠나고 없겠지.
  그렇게 멍청히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고 있을 때였다. 통나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샤렌딜이 화해하자고 온 것일까? 아니면 덴이 지금 출발한다는 이야기를 하러? 그도 아니면 샤렌딜마저도 떠나겠다는 말을 하러 온 건가. 번져 가는 생각에 스스로 피식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복도에는 태번의 주인이 버티고 서 있었다. 보라는 듯 세워 든 굵은 손가락 두 개 사이에 편지 한 통이 끼워져 있었다.
   "편지? 나 에게요?"
  뭐야, 일 의뢰인가? 이런 때에. 고개를 끄덕이자 주인은 편지를 몸 가까이 들고 선 채로 다른 손을 내밀었다. 두툼한 손바닥에 동전 몇 개를 떨어뜨려 주자 편지가 내 얼굴 앞으로 내밀어졌다.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하자 입 끝으로 별로 기분 좋지 않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허어, 미스트우드 마을의 노웬이라? 나는 편지를 뜯지 않았다. 대신 바닥에 내던지고 분이 풀릴 때까지 짓밟아주었다. 주인이 어이없는 얼굴로 보았지만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멍청한 자식! 빌어먹을 녀석! 조용한 시골 마을에 살고 있는 늑대에게나 물려가라고!"
  나도 모르게 정신 없이 내뱉고 있는 욕설과 분노는 나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나를 중심으로 네 명의 동료가 한 무리를 이루고 있는 것. 내가 생각하던 우리들의 구조는 그러했다. 우리들 다섯은 서로 똑같았으며, 그렇게 팽팽하게 이루고 있던 구조가 우리의 팀을 구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전혀 몰랐던 것이다. 샤렌딜의 말이 모두 옳았다. 나는 노웬을, 덴을 붙잡으려고, 내 쪽에서 고개를 숙이려고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신 없이 편지를 밟고 있는 통에 사람이 다가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홱 떠밀려 문에 부딪치고 나서야 나를 밀어낸 것이 샤렌딜임을 알 수 있었다.
   "줄리에게서 들었어. 노웬에게서 편지가 왔다며?"
   "아, 응..."
  짓밟혀 구겨지고 더럽혀진 편지를 가리키자 샤렌딜은 그것을 집어들고는 나를 잠시 흘겨보았다. 편지를 뜯어본 샤렌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나에게 내밀었다.
  위험한 일이 생길 것 같다. 너희들의 도움이 필요해. 이 편지를 받는 대로 미스트우드로 와 줘. 부탁한다.
  편지의 내용은 그것이 전부였다.



  모처럼 깨끗한 사제 복으로 차려입은 한스의 모습은 우리들에게는 오히려 어색하고 조금은 우습게 느껴졌다. 언젠가 떠돌이 음유시인에게서 들은, 먼 북쪽 지방에 산다는 흰곰이 딱 지금의 한스같은 꼴이 아닐까.
  쑥스럽게도 감동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자꾸 콧등을 문지르게 되었다. 한스는 선교 사업을 위해 막 사원을 떠나온 애송이 8급 사제일 때 처음 만나 함께 여러 모험을 한 동료다. 그런 그가 이제 정식 사제가 되기 위해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을 한 채 제단 앞에 서 있다. 돈을 벌고 명성을 쌓는데 바빴던 우리들은 한스가 승급 서품을 받을 때 한 번도 같이 온 적이 없었다. 한스에게 약간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덴과 샤렌딜은 내 기분과는 약간 달랐던 모양이었다. 덴은 사원의 값비싼 제구들을 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고, 샤렌딜은 소리 죽여 쿡쿡 웃고 있었다. 이따금 사제들이 그들을 향해 얼굴을 찌푸리는 것이 눈에 뜨였다. 나는 두 동료를 가볍게 쳐서 조용히 하도록 했다. 잠시의 효력밖에는 없었지만.
  두 동료와 함께 서서 동료의 기쁜 행사를 지켜보고 있다. 사제 서품이 끝나면 도움을 바라는 또 다른 동료를 찾아간다. 이것은 약간 민망하면서도 좋은 기분이었다. 샤렌딜은 너덜너덜한 노웬의 편지를 곧장 덴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덴은 '우리 동료가 위험에 빠진 것 같아.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술살께' 라는 말로 간단히 새로운 무리를 차버리고 돌아왔다.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히 해결되어버린 것이다.
  드디어 고위 사제가 제단 앞에 버티고 섰다. 한스의 넓은 어깨가 긴장으로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다시 한눈을 파는 덴과 샤렌딜의 어깨를 잡아 한스 쪽을 보게 했다.
  수염을 길게 기른 고위 사제가 주위를 둘러보자 웅성임이 딱 그쳤다. 유감스럽게도 샤렌딜의 낮은 웃음의 꼬리가 미쳐 빠져나오지 못하고 침묵 뒤에 남았다. 고위 사제는 우리들 일행이 있는 쪽을 노려보았다. 우리 일행은 저마다 다른 곳으로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부리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하얀 사제 복을 입은 사제들만 가득한 이 곳에 가죽이며 사슬 갑옷을 걸친 우리들은 서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눈에 뜨이는 존재였을 테니까.
  더 이상의 문제를 일으키지 못하게 하기 위해 나는 서품 절차가 끝날 때까지 덴의 어깨를 단단히 쥐고 있었다. 한스는 슬그머니 내 쪽을 돌아보고는 고맙다는 듯 빙그레 웃어 보였다. 나도 마주 웃어주었다.
  신에 대한 충성과 민중에 대한 박애, 그리고 신앙의 적에 대한 분노를 맹세한다. 그렇게 한스는 4급 사제가 되었다. 이제는 동료를 돕기 위해 떠나는 일만 남아 있었다.



   "으와아! 노웬, 잘도 이런 데서 살 생각을 했구나."
  덴이 호들갑을 떨었다. 정식 사제가 된 이후로 한껏 여유로워진 한스는 덴의 머리를 꾹 누르고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뭘, 좋아 보이는데."
  신의 하수인에 가까워지면 아부 실력도 늘어나나 보다. 사실 노웬의 새 거처는 보기에도 위태로운 낡아빠진 집이었다. 저 집에 들어갔다가 지붕이라도 무너지면 곤란하지. 차라리 밖에서 이야기를 끝내는 편이 낫겠다 싶어 급히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래서 위험한 일이라는 게 뭐야? 시시한 이야기를 하는 거라면 가만 안 둬."
   "아아, 농사일을 거들어달라는 따위도 사절이야."
  샤렌딜이 덧붙였다. 그때, 발 밑의 땅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예상치 못한 일에 잠시 비틀거린 우리들은 진동이 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미스트우드는 산을 둘러싼 숲 한 쪽에 엉겨붙은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땅을 흔든 진동은 산으로부터 파문처럼 퍼져나오고 있었다.
   "지진과는 다른 것 같은데, 뭐야 이건?"
  신의 이름을 중얼거린 한스가 노웬을 향해 물었다.
   "저 산에는 드래곤이 살고 있다고 해. 본 사람은 없지만 민담도 남아있고, 이 지방의 역사 기록에도 남아있더군."
   "...드래곤!?"
  덴이 어이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노웬은 진지한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역사 기록에도, 민담에도 공통된 부분이 있었어. 드래곤이 깨어나기 직전에는 이렇게 산이 울린다고 말야. 산이 울리는 일이 시작된 통에 이 마을에서도 사람들이 피난을 생각하는 모양이야. 이미 떠난 가족도 두엇 되고."
  노웬의 설명이 끝나자, 그 말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다시 한번 산이 울리고 땅이 진동했다. 땅 울림이 가라앉자 나는 스스로 웃고 있음을 느꼈다. 웃고 있는 것은 혼자만이 아니었다. 노웬을 제외한 우리들 모두는 피식 피식 웃고 있었다.
  나는 허리에 매달린 칼자루를 가볍게 두드리고 말했다.
   "드래곤은 잡아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그 녀석은 불을 뿜는다지?"
   "뭐 상관없을 거야. 리더를 화나게 한 뒤에 드래곤과 마주서게 하면 드래곤을 얼려버릴 걸."
  대뜸 덴이 대답했다. 노려보건 말건 녀석은 노웬에게 붙어 지껄여대었다.
   "노웬이 없는 동안, 리더가 얼마나 냉담했는지 봤어야 해. 난 정말 얼어죽는 줄 알았다고."
   "농담은 집어 치워. 그보다 노웬. 그 의뢰 받아들이지. 보수는..."
   "보수는 앞으로 우리와 함께 다니는 것으로."
  내 말을 자르고 한스가 끼여들어 대신 끝을 이었다. 이봐, 한스. 그건 내가 생각한 보수보다 더 큰 조건인데 그래? 의뢰자는 곤란한 듯 턱을 쓰다듬었다.
   "나는 역시 위험한 일에 더 이상 매달리기가... 이 곳에 정착을 하고 싶은데."
  놈의 눈은 난처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상처 하나 없는 깨끗한 얼굴로. 흥, 위험한 일 좋아하네. 우리들 몸에 난 상처들을 봐라. 이 고생을 하면서 네 놈의 그 해사한 얼굴과 몸을 지켜줬으면 됐잖냐. 우리들 곁보다 더 안전한 곳이 있을 것 같아?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어 치워. 정착을 꿈꾸는 놈이 시골 마을에서까지 역사를 뒤지고 드래곤 연구나 하고 있냐?"
   "맞아. 한번 배운 도둑질은 평생 가는 거지."
  덴이 거들었다. 비유가 좀 껄끄러웠는지 한스가 몸을 움찔했지만 덴의 말에 반박하지는 않았다. 노웬은 난처해하면서 이 상황을 빠져나갈 말을 궁리하는 모양이었다.
  불쑥 샤렌딜이 한 마디 뱉었다.
   "그녀는 어쩔 거야?"
   "...그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은 것은 한스였다. 그가 호기심에 눈을 빛내거나 말거나 샤렌딜은 노웬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 '굴뚝새의 노래' 태번의 줄리. 애를 가졌다더라. 슬슬 배가 불러오고 있어서 걱정이 큰 모양이야. 아버지가 알면 자기를 죽이려고 들 거라고 울던데."
  샤렌딜의 시선을 따라 우리 모두는 노웬을 보았다. 노웬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샤렌딜은 마지막 한마디를 던져 쐐기를 박았다.
   "줄리는 죽어도 시골구석 농장 주인으로 썩으려고 는 안 할 걸. 이런 다 낡은 집에서 고생하며 사느니보다는 애와 함께 아버지에게 맞아 죽는 쪽을 택할 여자야."
  노웬의 얼굴이 이번에는 창백해졌다. 녀석이 급히 말했다.
   "그,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고. 우선 우리는 드래곤과 맞설 계획을 짜야..."
  개자식! 반반한 면상을 지켜줬더니 줄리를 건드리기까지 했었단 말이지! 좋아, 도시로 돌아간 후에 네 놈이 줄리에게 코꿰는 꼴을 똑똑히 봐주겠어.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살아남아 줄 테다.
  걱정 같은 건 없다. 우리들 다섯이 모두 모여 있으니까. 우리는 살아서 '굴뚝새의 노래' 태번으로 벌꿀 술을 마시러 돌아간다. 이번에는 주인이 요리를 서비스해주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안주는 그 자리에서 얼굴 벌겋게 물들이고 있는 노웬이 될 테니까.
mirror
댓글 2
  • No Profile
    아이 03.09.21 14:24 댓글 수정 삭제
    영상으로 만들어도 꽤 흥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다음 작품도 기대하겠습니다. ^^
  • No Profile
    생생새우깡 13.09.06 20:20 댓글

    중간 중간 양념이 잘 베어있어 지루하지 않네요


    재밌게 잘 봤습니다 마무리가 훈훈해서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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