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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훈 355 서가

2006.06.30 23:2006.30

  앙투안 앙리 조미니는 『전쟁술』(The Art of War)에서 결정적 지점에 관해 이렇게 쓰고 있었다.

  전구의 결정적 지점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우선적으로 그 중요성이 영구적이고 지방 지형지물의 소산인 지리적인 점과 선들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그 다음 페이지에는 이런 대목이 이어졌다.

  두 번째 종류의 결정적 지점은 피아 쌍방 부대의 위치에서 비롯되는 우발적인 기동점accidental point of maneuver이다.

  좋다. 그렇다 치자. 조미니가 클라우제비츠와 분명히 구분되는 부분이 바로 이런 결정적 지점이 있을 수 있다고 가정하는 데 있으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불만이 없다. 그런데 ‘우선적으로’와 ‘두 번째’라는 말 위에 어김없이 그려져 있는 동그라미는 또 뭐란 말인가. 그는 점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니 이 자식은 도대체 왜 이런 데 동그라미를 쳐 놓고, 또 이런 데는 왜 줄을 쳐 놓은 거야?’
  그는 책을 확 덮어버렸다. 그러다가 15초쯤 뒤에 다시 책을 집어 들고는 조금 전에 읽던 부분을 다시 찾아서 펼쳤다. ‘그 자식’은 아주 매너라고는 없는 인간이 틀림없었다. 도서관 책에다 볼펜으로 직직 줄을 그어 가면서 낙서를 해 놓다니. 그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 위에 갈색 볼펜으로 삐뚤삐뚤하게 그어져 있는 줄을 보면서 애써 호흡을 가다듬었다.
  물론 정말 핵심적인 부분에만 적절하게 줄을 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세상에는 존재한다. 사람들이 우등생 노트 필기를 빌리는 이유가 바로 그런 것 때문이다. 그렇게 줄을 잘 쳐 둔 책을 만나게 되면 공부가 훨씬 수월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도서관 책에 줄을 긋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멍청한 것이 현실이다.
  책의 주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그들은 곧잘 흥분한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미국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취해야 한다고 쓴 문장에 빨간 줄이 두 줄이나 그어져 있다면, 그것은 그 줄을 친 사람이 무슨 국제관계론 같은 수업에서 리포트를 쓰다가 강대국의 횡포를 나타내는 증거로 그 책을 인용했으리라는 증거가 된다. 학술적인 글에만 줄이 그어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서평 숙제로 자주 쓰이는 최인훈의 <광장> 같은 경우는 어떤 출판사 판을 봐도 이미 세 명 이상이 줄을 그어댄 흔적이 있다. 이광수의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이 당연히 요즘 시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이 당연할 텐데도 그들은 <무정>에서 이형식이 하는 행동 밑에다 빨간 줄을 안 예쁘게 직직 그어 놓고는 화살표를 여백으로 빼서 ‘가부장적 태도’라고 적어 두곤 한다.
  그들이 어떤 과목에서 어떤 숙제를 내려고 그런 짓을 했는지는 짐작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렇게 몇 군데 눈에 띄게 줄을 쳐 두고는 나중에 책장을 휘휘 넘기면서 중요한 부분이랍시고 그 부분을 베껴 냈을 것이다. 그게 불만스러운 게 아니다. 그의 불만은 사람들이 왜 남들도 봐야 하는 책을 자기 책처럼 그렇게 만들어 놓는가 하는 문제였다.
  갈색 펜의 줄긋기는 그다지 민족주의이거나 여성주의적인 편은 아니었다. 그는 약소국을 거의 아무것도 없는 초원과 다름없이 취급하고 있는 조미니의 서술을 보고도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침착하게 페이지를 넘겼던 것이다. 갈색 펜의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우선 그는 ‘첫째, 둘째, 셋째’ 같은 부분이 나오면 무조건 동그라미나 네모나 세모를 그렸다. 일단 ‘첫째’에 동그라미를 치기 시작하면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내용이었는지에 관계없이 끝까지 표시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결과 그는 정말이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사전에 저장소를 설치하지 않고 행군할 때의 고려사항’ 같은 것에도 10번까지 모두 동그라미를 치고 항목마다 각각 서너 줄씩은 밑줄을 그어 두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 내용이라는 게 대개 이런 쓸데없는 것들이었다.

  (10) 빵이나 비스킷마저 떨어졌을 경우에 굶주림을 해결하고자 하는 병사들의 욕구를 억제할 수 없으므로 사육하고 있는 가축은 도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는 그런 대목에 쳐져 있는 밑줄을 보고는 갈색 펜의 사고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를 더 화가 나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어쩐지 줄이 쳐져 있으면 별 내용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눈이 한 번 더 가게 되고, 심지어 그것들을 외우려고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도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그날 아침에도 밥을 먹고 있다가 문득 조미니가 말한 10가지 작전선(lines of operation)을 자신이 모두 외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움찔했다.
  ‘단순작전선, 이중 작전선, 내선 작전선, 외선 작전선, 구심 작전선, 이산 작전선, 종심선, 기동선, 부차적 작전선, 우발적 작선선.’
  그런 것들이 필요할 것 같은 순간이라는 것은 그의 인생에 단 한 번도 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갈색 펜의 또 다른 줄긋기 버릇은 ‘즉, 결론적으로’ 같은 말이 나오면 또 무조건 별표를 그리고 줄을 그어댄다는 것이었다. 그 부분이 정말로 글의 핵심인 경우도 있었지만 아닌 경우도 많았다. 갈색 펜은 그저 중요하다는 인상을 주는 말이 나오면 무조건 줄을 그어대는 것뿐이었다. 이런 버릇들 때문에 그는 자기 속도대로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짜증이 쌓이다보니 화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어쩔 수가 없었다. 책 귀퉁이에다 ‘왜 여기에 줄을 그어 놓냐 바보야.’ 하고 연필로 적어 보기도 했지만 갈색 펜이 그 책을 다시 보게 될 리는 만무했다. 답답한 것은 오직 그 자신이었다. 그런 꼴을 보지 않으려면 책을 다 사서 보는 수밖에 없었지만, 수입도 없다시피 한 대학원생이 그 많은 책들을 다 사서 볼 여유는 없었다. 그렇다고 책을 안 볼 수도 없었다. 어서 논문을 쓰지 않으면 대학원생이라는 것은 아주 간단하게 백수로 탈바꿈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더욱 경악할 일은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방해꾼이 한 달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유령처럼 그를 괴롭히고 있다는 데 있었다. 앙투안 앙리 조미니의 계보를 잇고 있는 리델 하트의 『전략론』을 읽어나가던 그는 책의 2부에 들어서서 ‘제1차 세계대전의 전략’ 부분을 펼치자마자 다시 한 번 깜짝 놀라고 말았다. 갈색 볼펜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제1부 기원전 5세기에서 20세기까지의 전략’ 부분에서는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었으나 ‘간접 접근 전략’이라는 말 둘레에 쳐진 굵은 갈색 네모와 함께 그가 다시 출현하자 그는 그만 짜증이 밀려오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바로 그 대목에서 출현했다는 것은 갈색 펜이 그와 비슷한 학문적 관심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학교 전체를 통틀어 다섯 명이나 볼까 말까한 책 두 권에서 똑같이 갈색 펜과 마주치자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얼마나 비슷한 주제를 가지고 도서관을 헤집고 다녔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 후 2주 동안이나 더 그를 완전히 경악시킨 사건이 있었으니, 갈색 펜은 놀랍게도 그가 다음으로 손을 댄 존 프레더릭 찰스 풀러의 『기계화전』(Armored Warfare)의 ‘공격’ 챕터에 있는 기갑 부대의 공격 대형 예시 그림에도 흔적을 남겼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가 그 다음으로 꺼내 읽은 마이클 I. 핸델이 편저한 Clausewitz and Modern Strategy 중 “Clausewitz, Fuller and Liddell Hart”라는 논문에도 또 갈색 펜이 밑줄과 낙서를 남기고 지나간 것을 보고 그는 이제 섬뜩한 기분까지 느껴야 했다.
  덕분에 그는 그 모든 책들을 치밀어 오르는 짜증 속에서 읽어 내려가야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한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관심사와 그 정도로 정확하게 일치하는 참고문헌 목록을 가지고 이미 공부를 시작한 상태라면 그는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논문의 선수를 빼앗기고 있는 셈이었다. 대단한 과학적 발견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누군가가 이미 다 써 놓은 논문이라면 다시 그 주제로 글을 쓸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는 논문 자체가 통과되지 않는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컴퓨터로 달려갔다. 그리고 학교 도서관 컴퓨터를 검색했다. ‘슐리펜 플랜, 1차 대전 기원론, 터렌스 주버, 피셔 논쟁.’ 그런 검색어들을 차례로 넣어 보았지만 아직 그런 제목으로 통과된 학위논문은 없었다. 생각해 보면 2003년에 발행된 책에서도 분명한 갈색 볼펜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으므로 상대는 그렇게 오래 전 사람이 아닌 셈이었다.
  그는 조교실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가서 혹시 과 안에 그런 주제로 논문을 준비하는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조교 일을 맡고 있는 후배들은 군 위탁생 몇 명이 비슷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그는 그 사람들의 관심사가 그의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외교학과에서 아무도 안 건들었다면, 서양사학과에서 누군가가 손을 댔을지도 모르지만 그쪽은 확인할 길이 없었다.
  거기까지가 그와 논문에 관한 이야기의 첫 단계였다. 그는 누가 더 빨리 논문을 완성해낼 수 있을지 도전해 보기로 마음먹었으나 그 결심을 계속 밀어붙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 여름에 지하철 안에서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다. 4주간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 그는 자신이 스스로는 충분한 혈액을 만들어 낼 수 없는 심각한 병에 걸렸으며 이제 살날이 그렇게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와 논문과 355 서가에 관한 이야기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그 후 두 달이나 계속된 그의 실존적인 고민을 추적하지 않을 도리가 없지만 사람들은 그런 일 따위는 전혀 기억해 주지 않았다. 다만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연락도 없이 휴학했던 그가 몇 달 만에 다시 나타나는 바람에 연구실 안에 있는 그의 창가 쪽 자리를 노리고 있는 몇 사람인가가 눈살을 찌푸렸을 뿐이었다. 그는 굳이 자신의 사정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다만 생애 마지막 순간에는 그가 평소에 가장 좋아했던 일을 하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실존적 등교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는 늘 9시도 되기 전에 일찌감치 나와서 연구실 자기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올렸다. 전에 건들던 그 주제는 아무래도 그 갈색 펜이 먼저 선수 쳤을 것 같아 불안하기도 하고 또 어쩐지 갈색 펜 때문에 자기 주제가 더럽혀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해서, 그런 논문이 벌써 나왔는지 어떤지 검색해 보기도 꺼려졌다. 그렇다면 그냥 문화 관련 주제로 잡을까 하고 망설여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앉아서 벌써 한 달째 소설책만 읽고 있었다. 논문 주제란, 죽는다고 생각을 하고 덤벼들어도 역시 쉽게 잡히지 않는 것이었다. 주제가 잡히기는커녕 그런 고민을 오래 하다보니 놀랍게도 그는 어느새 환경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는 것이다. 이런 식이었다.
  ‘아니 어느 미친놈이 4월에 온풍기를 키는 거야?’
  그는 저벅저벅 걸어가서 온풍기를 끄고는 연구실 창문을 다 열어 놓았다. 그러고 나서 자리에 돌아와 앉으면 책상 위에 얇게 한 겹 쌓여 있는 먼지가 또 그렇게 역겹게 느껴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 조교실 문을 열어젖히고, 아직 잠이 덜 깬 후배들을 닦달해서 걸레를 얻어가지고는 책상과 창틀과 공용 컴퓨터 주변을 닦고 다시 걸레를 행주만큼 깨끗하게 빨아 놓고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앉은 지 5분도 지나지 않아서 다시 일어나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오면서 그는 다시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전쟁으로 쓸까, 문화로 쓸까.
  그런 그의 고민을 알고는 어떤 선배가 3일쯤 전에 빌려준 책을 책꽂이에서 꺼내어 펼쳐 보지만 썩 내키지는 않았다. 『국가 안보의 문화』(The Culture of National Security). 기가 막힌 절충이었다. 그렇게 하는 방법도 있구나 하고 내심 감탄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책을 제압하려는 것처럼 책 표지에 있는 제목을 응시했다. 충분히 기선을 제압했다고 느껴질 때쯤 그는 책장을 넘겨서 서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규범(norm), 정체성(identity) 이런 단어들이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이었다. 구성주의의 흔적이었다. 골치 아파 보였다. 그는 목차를 다시 한 번 훑어보고 나서 다시 생각에 잠겼다. 생애 마지막 순간에 구성주의를 읽고 있을 수는 없었다. 고민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전쟁으로 쓸까, 문화로 쓸까.’
  두 달이나 계속 해 온 고민을 다시 붙들고 있는다고 답이 갑자기 나올 리는 없었다. 그저 의자가 불편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드라이버를 찾아 온 연구실을 다 헤집고 다녔다. 그러다 마침내 조교실에서 공구함을 구해 오더니 바퀴 달린 회전의자를 다 분해해 버렸다. 또 한참을 뚱땅거려서 의자를 다시 조립해 놓고 자리에 앉아 시험 삼아 끼익 끼익 소리를 내 가며 의자를 돌려대면서 그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전쟁으로 쓸까, 문화로 쓸까.
  고민만 하다가 또 오전 시간 다 가고 점심때가 되자 그는 매일 그랬듯이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논문 준비는 잘 돼 가냐고 누가 물으면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지만 그는 아직은 미쳤다는 소리를 듣기가 싫었기 때문에 꾹 참았다. 그때였다. 먹는 둥 마는 둥 식당 위생 상태나 식단에 대해서 한참을 투덜거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그의 귀에 들어온 것이다.
  “조 선생님 다음 학기 안식년이라서 학생 안 받으시지 않을까?”
  그는 멍하니 그쪽을 바라보았다. 문화 전공하시는 선생님이 학생을 안 받으시겠다니 전쟁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 기나긴 시간동안 제자리만 맴돌게 했던 고민은 그렇게 쉽게 끝나고 말았다. 그 순간 그는 어이없게도 약간의 억울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국제 문화론 분야를 얼마나 흥미 있어 했는지를 깨닫고 말았다. 그는 가슴을 조여드는 안타까움 때문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그런 말도 안 되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나라 걱정, 학계 걱정을 한참이나 늘어놓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 소리는 완전히 쓸모없는 한탄으로 들렸지만 그는 거의 실존적인 한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밥을 먹고 나서 그는 후다닥 짐을 챙겨 도서관으로 향했다.
  ‘355.02 J689pKy.’
  4개월 만에 그는 앙투안 앙리 조미니에게로 돌아와 있었다.
  ‘358.18 F958aKc.’
  존 프레데릭 찰스 풀러도 그대로였다. 모두 다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책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래. 이렇게 남아 있으면 되지 뭐.’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가 손을 대지 않는 한 군사학 서가에 꽂힌 그 많은 책들은 아마 누군가의 손에 한번 닿아보지도 못한 채 4개월을 그냥 그대로 보냈을 것이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정도만이 한두 사람의 손을 탔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오래된 친구의 손을 어루만지듯 355 서가를 오가며 눈에 익은 책들을 꺼냈다가 다시 꽂아 두곤 했다. 그러다가 전에는 못 봤던 책을 발견하고는 반가운 생각까지 드는 것이었다.
  ‘355.02 M967m.’
  윌리엄 머레이 등등이 편저한 The Making of Strategy. 1994년 책이고 마지막으로 다시 찍은 것이 1999년이라고 적힌 것으로 봐서 2000년 이후에 나온 책이기는 했지만 학교 도서관에는 몇 달 이내에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그는 목차를 펴서 책에 실린 각 논문들의 제목을 살피다가 홀저 허윅의 “Strategic uncertainties of a nation-state: Prussia-Germany 1871-1918”이라는 논문이 실린 것을 보고는 약간의 흥분까지 느꼈다. 역시 그 분야의 저명한 학자답게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제목의 글을 써 놓은 것을 보고 그는 대단히 흡족했다. 고향에 온 느낌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는 아직 색이 전혀 바래지 않은 책장을 조심스럽게 넘겨가며 242페이지를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이 대목에서 그는 경악하고 말았던 것이다.
  거기에 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moreover’! 그곳에 ‘게다가’가, ‘moreover’가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게다가’라는 단어 주위에 쳐져 있는 삐뚤삐뚤한 갈색 네모에 지난 몇 달간 잊고만 있었던 그가 있었다.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보이는 그 책에서 갈색 펜을 다시 발견한 순간 그는,
  ‘어!’
  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갈색 펜의 출현 자체는 그의 논문 구상에 직접적이고 심대한 타격이 되지는 못했다. 오히려 남들보다 몇 주 더 오래 준비한 탓에 그는 여유 있게 논문을 진행시킬 수 있는 편이었다. 그는 1차대전 발발에 관해 쓰고 있었다. “슐리펜 플랜”은 1914년 당시 독일군의 전쟁 계획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계획 때문에 독일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같은 사소한 사건으로 촉발된 위기를 결국 전 유럽을 휩쓰는 대참사로 끌고 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런데 1999년에 주버(Terence Zuber)라는 사람이 이 슐리펜 플랜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논문을 쓰기 시작하면서 7년 동안이나 논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가 손을 놓고 있었던 4개월 사이에 War in History 저널이나 다른 저널들에 다섯 편 정도의 관련 논문이 더 실려 있었다.
  논쟁이 계속되다보니 원색적으로 변하게 마련인지 ‘당신 내 글은 제대로 읽은 거냐,’ ‘당신 독일어는 제대로 읽을 줄 아냐,’ ‘이 사람, 역사가로서의 자질이 의심스럽다.’ 등등의 낯 뜨거운 말들이 점잖은 저널 여기저기에 실려 있었다. 그는 그 싸움을 추적해 가면서 한참을 낄낄거렸다. 그렇게 즐거워하고 있는 것을 보니 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품게 되었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아직 살아있을 날이 많이 남은 사람들의 험악한 논쟁이 그렇게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이 억울했지만, 동시에 그는 자신이 공부하는 것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이제 주제도 잡히고 다시 마음도 가다듬은 이상 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고 나서 약 두 시간쯤 지났을 때 그는 그를 가로막는 장벽 하나를 발견하고 말았다. 그 장벽은 원래는 장벽이 아니었다. 그는 도서관 전자저널 목록을 이리저리 검색하다가 아르덴 부홀츠가 최근에 그 논쟁에 관해 쓴 짧은 서평을 발견하고 쾌재를 불렀다. 논쟁이 격해지다보니 논자들은 아마도 ‘이것 봐라, 여기 다 적혀 있지.’ 하는 심정으로 자신들이 읽은 독일 문서들을 영어로 번역해서 내기 시작한 모양인데, 부홀츠의 서평은 바로 그런 책들에 관한 것이었다. 1차 자료 목록이 더 풍부해진 것을 발견하자 그는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 그래도 1차대전을 연구하면서 독일어라고는 사람 이름만 겨우 읽을 정도밖에 못 되었던 그로서는 1차 자료에 접근하는 문제가 큰 걸림돌이었던 것이다. 그랬으니 영어로 된 결정적인 자료들이 Alfred von Schlieffen's Military Writings 같은 매혹적인 제목을 달고 발행되는 것은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그 책의 가격이었다. 128달러. 280쪽짜리 책이 무려 13만원 돈이었던 것이다. 그는 당황스러웠다. 워낙 최근에 나온 책이라 물론 도서관에는 없었다. 다른 학교 도서관에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앞으로 10년 안에 국내에서 그 책을 보게 될 것 같은 사람이 단 3명을 넘길 가능성도 없어 보였다. 페이퍼백은 다 나가고 하드커버밖에 안 남았는지 중고책 사이트 가격이나 정품 판매 가격이나 똑같이 125달러가 최저가였다. 그는 책을 무리해서 사 버려야 할지 어떨지 망설였으나 선뜻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 밑으로 들어가는 어마어마한 병원비를 생각하면, 부모님들 눈에 거의 쓸데없는 일로밖에 안 보이는 자신의 마지막 지적 유희를 위해 떼를 써서 그 돈을 타 내기가 꺼려졌던 것이다. 그는 다만 아침 일찍 학교에 나와 주변 청소를 깨끗이 한 다음에 자리에 앉아 조용히 고민하는 게 고작이었다.
  ‘살까? 말까?’
  하지만 그 고민을 들은 지도교수님이 너무나 간단하게 문제를 해결해주는 바람에 그는 그 작은 고민 하나 남지 않은 홀가분한 상태가 될 수 있었다. 지도교수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도서관장에게 전화를 해서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책을 구입해 주기를 부탁했던 것이다.
  “한 한 달쯤 걸린대.”
  하는 지도교수님의 인자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는 병상에서 방구석으로 이어진 지나간 몇 개월 동안의 말 못할 아픔이 흔적도 없이 아물어가는 것을 느꼈다.
  도서관에 구입신청을 하면 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학생 개인 자격으로 신청해 가지고는 몇 달이 걸릴지 몰랐기 때문에 그는 지레 포기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포기는 어쩌면 그의 인생을 좀먹고 있는 장기적인 질환의 또 다른 증상일지도 몰랐다. 그는 그저 그의 앞에 놓인 운명 앞에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절망하거나 슬퍼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그는 희망에 찬 상상들을 다시 품을 수가 있게 되었다. 다른 부분들을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가 한 달 후 책이 도착하고 나면 그 내용을 검토하고 논문 계획서를 마무리하기만 하면, 그에게 남은 길지 않은 시간 동안에도 뭔가 완전하게 처리되는 일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날부터 그는 도서관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주로 355 서가 근처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서 그는 손자, 마키아벨리에서부터 히틀러, 모택동에 이르는 군사 사상가들의 계보를 읽고 또 읽었다. 머리를 제때 깎아주지 못하고 면도를 자주자주 못 해 줘서 지저분해 보이기는 했지만 표정이 진지해지고 눈빛이 예전의 강렬하고 냉소적인 색을 되찾아 가면서 그는 점점 더 행복한 상태에 가까워졌다. 스스로도 자꾸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마침내 거의 한 달이 지나서 지도교수님으로부터 문제의 책이 도서관에 들어왔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그는 이틀이나 미뤄둔 잠을 자느라 집안에 틀어박혀 있다가 갑자기 생기를 되찾으며 벌떡 일어나 학교로 달려갔던 것이다. 그는 이제 자기 주제에 대해 충분한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1차 자료를 읽어낼 독창적이면서도 치밀한 분석 틀을 거의 완성해 놓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그 책을 향해 거의 뛰다시피 걸어갔다. 책이라는 것이 그렇게 반가워 보기는 처음이었다. 걸어가면서 그는 아주 오래 전 첫사랑의 기억마저도 떠올려 보는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그가 도서관에 도착해서 데스크에 지도교수님 이름을 대고 책을 내 놓으라고 했을 때, 그는 도서관 직원이 하는 말을 듣고는 어쩐지 불안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제가 담당자는 아니고, 담당자가 잠깐 자리를 비워서 잘 못 찾아서 그런지 모르겠는데요, 여기 보관돼 있는 책 중에는 없는데요.”
  그는 몇 번이나 더 찾아봐 달라고 한 다음 아예 자기가 직접 데스크를 뒤져 보기까지 했다. 그래도 역시 책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담당자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손톱 두 개를 물어뜯었다. 그러고도 안정을 찾을 수 없었던 그는 355 서가와 유럽 역사 서가를 세 번이나 오가며 책을 뒤쳤다. 심지어 도서관 안에서 책을 읽을 수 있게 만들어 둔 책상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눈에 불을 켜고 그런 비슷한 책이 있는지를 살피기까지 했다.
  데스크 앞으로 돌아와서 손톱 두 개를 더 물어뜯고 있을 때 마침내 담당자라는 사람이 돌아와서 사무적인 투로 말했다.
  “대출됐는데요.”
  그는 그 무심한 언어의 벽 앞에서 자신의 심장만이 통곡하듯 격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그 책, 아까 교수님 조교라면서 어떤 학생이 찾아갔는데.”
  그는 지도교수님 대신 책을 찾아갈만한 사람들을 골라 전화통화를 해 봤지만 그 책을 가져간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가 연락을 받고 도서관에 가기까지 2시간 사이에 누군가가 책을 가로챈 것이었다. 도서관 소장자료 검색 결과는 분명히 “대출중”으로 나와 있었다. 게다가 벌써 한 달 대출 연장까지 되어 있어서 반납 예정일이 두 달 뒤였다. 그는 도서관 데스크로 돌아와 빌려간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고 소리를 쳐 댔다. 그는 용의자를 알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그게 누군지는 몰랐다. 그는 지난 몇 달 동안 그를 성가시게 만든 바로 그 갈색 펜의 정체가 미치도록 궁금했다.
  ‘도대체 뭐 하는 놈인데 내 인생을 끝까지 이렇게 만드는 거야!’
  그는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인생 마지막 일인데!”
  그러나 그가 그렇게 날뛰는 것을 보고도 도서관 직원은 책 대출자가 누구인지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 광경을 봤기 때문에 못 가르쳐줄 입장이 되었다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는 거의 살인이라도 저지를 것 같은 광기를 두 눈 가득 품고 있었던 것이다. 30분을 더 버티다가 마침내 경비에게 끌려 나와 길바닥에 앉아서 그는 서러운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내 인생 마지막 일인데!”
  그는 울고 있는 자신에게 누군가가 다가와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들어 그쪽을 돌아보았다. 도서관 광인 중 한 사람이었다. 물리학과 천재였는데 너무 똑똑해서 돌아버렸다는 소문으로 알려져 있는 그 도서관 광인이 쉴 새 없이 뭐라고 떠들어대는 광경을 보면서 그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렇게 한 번 막힌 말문은 좀처럼 다시 터져주지를 않았다. 그는 이틀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생각에, 또 슬픔에 잠겼다. 건강이 많이 악화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가족들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 기나긴 침묵과 절망에도 한 차례 반전이 있었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에 그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누워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학교로 가서 허겁지겁 자기 책상을 뒤졌다. 그리고는 358.18 F958oKc, 존 프레더릭 찰스 풀러의 책을 급하게 뒤적거렸다. 그리고는 뭘 발견했는지 모두가 깜짝 놀랄 만큼 큰 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그가 발견한 것은 갈색 펜으로 적혀 있는 누군가의 전화번호였다. 갈색 펜이 거기다 자기 전화번호를 썼을 리는 없겠지만 적어도 아는 사람 전화번호를 적어둔 것만은 분명했다. 도서관 책을 메모지나 다름없게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다짜고짜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대뜸 자기 쪽에서 먼저,
  “누구세요?”
  하고 물었다. 상대방은 그런 특이한 전화예절에 당황했지만, 이내 다소 친절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자기가 아는 사람 중에 그런 책들을 갖다 읽을만한 사람들을 떠올려 주었다. 같은 과 5년쯤 선배였던 그 사람은 곧 생각이 떠올랐는지 오래 걸리지도 않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 은경이라고 있는데 혹시 모르세요? 학교에서 본 적 없나?”
  그런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다만 그는 갈색 펜이 여자였다니 의외라고 생각하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그 책이 급해서 그런데 혹시 그 분 어디에 사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인도 갔는데요. 이틀 전에.”
  “네?”
  “가출하듯이 갔는데요. 한 두 달쯤 죽었는지 살았는지 연락도 안 할 거라고.”
  “그럼 책은?”
  “모르죠. 가져갔겠죠. 가기 전날 빌렸으면. 어디 기차 안에서라도 읽고 있겠죠.”
  그는 그야말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덜컥 하는 소리를 실존적으로 들은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사실 그가 그 말을 듣고 나서 어떤 심경이 되었는지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가 않았지만, 그것을 그의 입으로 직접 듣기는 어려웠다. 그것은 그가 전화를 채 끊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져서 곧 병원으로 실려 갔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 책이 없어도 논문을 진행시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조금 늦게 손에 들어올 뿐,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자료가 유실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다만 침대에 누운 채로 그 사실을 계속해서 떠올리다 눈을 감았을 뿐이었다.

  그가 죽고 나서 6개월쯤 지난 어느 날, 공익근무요원 하나가 도서관 불을 끄고 퇴근하려던 중에 355 서가 쪽에서 이상한 발소리를 들었으나 막상 가 보니 아무도 없더라는 소문이 잠깐 났었다. 그러나 355 서가는 워낙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군사전략 분야의 책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가끔 그곳을 찾는 사람들 역시 비교적 기가 센 군 위탁생들 뿐이었으므로 그 흉흉한 소문의 진위를 확인해 줄 사람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공익근무요원들이 소집 해제되고 다른 사람들로 교체되고 나자 소문은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5년이나 지나버리고 나서, 마치 오래된 예언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언이 실현되기라도 하듯 1차 세계대전의 기원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대학원생이 무슨 구세주라도 되는 것처럼 세상에 나타났다. 자그마한 체구에 단아한 아름다움을 갖춘 이 상냥한 여학생은 “슐리펜 플랜” 논쟁이라는 말을 우연히 전해들은 그날로부터 서서히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1차대전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먼저 역사적인 관점에서 1차대전을 다루었으나 서서히 이 전쟁의 정치적, 경제적인 측면으로 관심이 넘어갔다. 그래서 320번대 서가를 1주일가량 헤매었으나 그녀는 어쩐지 군사 문제를 빼고는 절대 해결될 것 같지 않은 몇 가지 문제들이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것을 느꼈다.
  어느 화창한 봄날 오후에 그녀는 마침내 355 서가 한가운데에 발을 디디고 말았다. 한 발 한 발 다가갈수록 그녀는 그곳에 널려 있는 수많은 책들의 매혹적인 제목에 정신을 잃어 갔다. 서가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 온 정신을 모아 앙투안 앙리 조미니를 읽고 있던 그녀는 순간 싸늘한 바람이 머리 위를 지나는 것을 느꼈으나, 그저 꽃샘추위에 난방이 좋지 않은 도서관에서 감기나 안 걸렸으면 하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저녁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인적이 드물어질 때까지 355 서가 한가운데를 떠나지 못했다.
  마침내 그 넓은 도서관 서고에 혼자 남게 되었을 무렵, 그녀는 마지막으로 한 권만 꺼내 본 다음 집에 갈 생각으로 서가에서 한 권의 책을 꺼내 들었다.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저벅저벅하는 발소리를 내면서 355 서가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는 그의 유령을 보고 말았던 것이다. 유령은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봐, 내 책. 내 책.”
  그녀는 지갑에 다이어리까지 다 내팽개치고, 소리를 지르며 온 힘을 다해 출구 쪽으로 내달렸다.
  “이봐 거기, 내 책 주고 가.”
  그녀는 유령이 뒤에서 따라오는 것 같은 오싹함 때문에 갑자기 다리에서 힘이 빠져 버렸다. 그래서 320 서가 근처에서 풀썩 넘어지고 말았다.
  “꺄악!”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지는 못했다. 무언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355.48 P42a. 355.48 P42a. 355.48 P42a. 피터 파레트. 디 아트 오브 워 게이밍. 네이벌 인스티튜트 프레스. 천 구백 구십 년. 355.48 P42a.”
  그녀는 자기 손에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뒤쪽을 향해 책을 집어던졌다. 그리고는 책이 어디에 부딪치거나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을 깨닫고는 그만 정신을 잃어버렸다.
  아담한 체구의 단아한 그녀가 우아하게 쓰러져 있는 광경을 뒤로 하고 유령은 355 서가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면서 중얼거렸다.
  “내 책. 내 책.”
mirror
댓글 20
  • No Profile
    yunn 06.07.01 10:56 댓글 수정 삭제
    어이쿠. 잘 읽었습니다.
    배명훈님 '대학원생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단편집 하나 묶어내시죠 ^^
  • No Profile
    배명훈 06.07.01 13:52 댓글 수정 삭제
    저는 학원물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현재 네 편 쌓여 있습니다. 기대해 주세요.
  • No Profile
    06.07.03 11:23 댓글 수정 삭제
    학원물.... 학원물 맞군요. 즐겁게 읽었어요. 도서관의 유령이라니..;
    도서관 300번대 서가에 뭐가 꽂혀있었던가 한참 생각했었어요.
  • No Profile
    배명훈 06.07.03 12:05 댓글 수정 삭제
    사회과학... 근데 분류 기호는 공통인 것 같더라구요.
    저는 주로 320번대 근처를 배회하죠. 최근에는 350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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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07.03 12:31 댓글 수정 삭제
    저도 갑자기 궁금해져서 찾아봤는데... KDC라고 한국표준십진분류표라던가... 아무튼 그런게 있어서 그에 맞춰서 책을 분류해두나보더라구요. 예전에도 그랬지만 요즘도 도서관 가면 800번대를 잘 벗어나질 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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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6.07.03 12:44 댓글 수정 삭제
    오, 그렇군요. 800번대! 작년에 한국 근대 정치 사상을 소설 작품으로 읽는 수업을 들어서 헤매고 다녔었죠. 350번대에는 귀신 나오니까 가지 마세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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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07.03 12:49 댓글 수정 삭제
    배명훈님은 350번대 서가를 지나다가 귀신을 보셨나봐요.

    근데 최근에는 350번대 서가를 주로 배회하신다면서요... 혹 귀신과 친구라도 된거 아니신지..
  • No Profile
    ida 06.07.03 23:55 댓글 수정 삭제
    저런, 知音이었을 지도 모르는데, 논문에 눈이 어두워 놓쳐버리다니! (유령이 될만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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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rowder 06.07.08 15:31 댓글 수정 삭제
    저도 800번대 서가에서 어슬렁거린답니다. 가끔은 400번대도 전공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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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머프 06.07.08 16:54 댓글 수정 삭제
    어머나. 놀라운 반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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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6.07.09 11:40 댓글 수정 삭제
    유령이 되고싶을 때가 가끔 있어요. 유령처럼 부유하고 있을 때는 더 자주 있죠. 부자처럼 부유하고 싶은데.
    음. 400번대는, 뭐였죠?
    反戰 ! 시절이 뒤숭숭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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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펜네 06.07.09 17:51 댓글 수정 삭제
    마무리가 고골리의 외투를 떠올리게 하는군요. 특히 "이봐 거기, 내 책 주고 가."라는 부분에서는 소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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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6.07.09 22:32 댓글 수정 삭제
    아, 드디어 들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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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7.03.21 13:21 댓글 수정 삭제
    오랫동안 학자가 되는 게 꿈이었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살았습니다. 학자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는 건 곧 "훌륭한" 학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과 같다는 걸 스물 세 살에 깨달았습니다. 교수가 되겠다는 게 아니었습니다. 베스트셀러를 쓰는 유명한 학자가 되겠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다가 나중에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저의 꿈은 그런 것 이전에 그냥 학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글의 주인공은 실존적인 등교를 합니다.
    저도 요즘은 거의 실존적으로 도서관에 가는 것 같습니다. 즐겁습니다. 그런데 이 길이 쉬운 길은 아니네요.
    책을 가슴 높이까지 쌓이도록 가득 빌려서 품에 안고 도서관을 나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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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04.09 13:05 댓글 수정 삭제
    뒤늦게 몰래 달린 답변이 더욱 심금을 울리네요. 그저 조용히 모니터 뒤에서 박수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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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7.04.11 21:58 댓글 수정 삭제
    몰래 달아 놓고 도망갈 생각이었는데, 보셨네요.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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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티 08.03.12 11:19 댓글 수정 삭제
    분명히 슬픈 글인데 미소가 피어나네요.
    잘 읽었습니다. 주인공의 죽음이 안타까워요.

    ...잡설입니다만 저도 도서관 책에 줄 긋는 사람을 보면 살의를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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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8.03.14 06:03 댓글 수정 삭제
    결말에 대한 반응이 다양한 글이었어요. 허전하다에서, 의자에서 굴러떨어지는 사람까지. 왜 그렇게 됐는지 아직 파악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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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효민 09.07.08 20:45 댓글 수정 삭제
    정말 집중해서 단숨에 읽었습니다. 의자에서 굴러떨어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무척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중간에 주인공이 논문 주제때문에 고민하는 모습을 보니 남얘기가 아닌것같아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 저런 어이없는 이유 때문에라도 빨리 결정되는게 더 나을듯... (잡설입니다!)
  • No Profile
    ntasinseok 12.12.06 20:46 댓글 수정 삭제


    저는 어제 타대학 도서관에서 유령한테 여기다시 오지말라고 추측되는 협박을 당했습니다.

    330서가 국제경제관련서적이 있는곳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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