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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달 지구로 돌아오다

2003.11.28 15:2611.28

  긔 타람은 무거운 금속판을 간신히 트레일러에 올려놓고 손을 흔드는 세누 수이를 보았다. 그녀는 때묻고 두꺼운 껍질로 둘러싸인 손가락을 거칠게 움직였다. 먼저 일하러 나오자고 하더니 아까도 금속판을 자기가 들겠다고 우기고. 아무래도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제--, 3000----끝난다----들-죽---싶어.>
  그녀의 수화는 정확했지만 너무 빨라서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천천히.>
  긔 타람이 손을 펴서 느리게 허공을 젓자 세누 수이는 팔을 접어 허리에 올리고 잠시 가만히 서 있더니 이번엔 과할 정도로 느리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제기랄.3000년.되기.전에.끝난다고.했던.놈들.다.죽이고.싶어.>
  긔 타람은 헬멧속에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지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없으면서 가끔 일이 힘들면 저런 식으로 표현 했다. 긔 타람은 손을 펼쳤다.
  <그럼.그만.할까?>
  세누 수이가 헬멧 속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가 짧게 손을 흔들었다.
  <가자.>
  세누 수이는 절단기를 집어들고 긔 타람에게 손짓을 했다. 긔 타람도 절단기를 들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세누 수이의 뒤를 쫓아가면서 긔 타람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수화를 배워 사용한지 6년이 지났는데도 상대가 손을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지면 알아보기 힘들었다. 하긴 상대가 나쁘기는 했다. 세누 수이는 긔 타람보다 여덟살 어렸지만 그보다 6년 앞서 이 일을 시작한 선배인 것이다.
  세누 수이는 눈 앞의 금속 건축물을 가늠하다가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금속벽에 하나의 곡선을 그어 그 끝점에 절단기를 대고 긔 타람에게 다른쪽 끝점을 가리켰다.
  <당신.거기.난.여기.>
  <응.>
  긔 타람은 절단기를 켜고 그녀가 가리킨 곳에 가져다댔다. 긔 타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세누 수이가 천천히 절단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긔 타람은 세누 수이가 그어놓았던 선을 가늠하며 절단기를 움직였다. 절단기가 움직인 궤적을 따라 날카로운 자국이 얇은 금속벽에 그어졌다. 잠시 후 두 절단기가 가까워지자 세누 수이가 자신의 절단기를 금속벽에서 떼냈다. 그리고 금속벽을 바라보다가 손가락으로 새로운 선분을 그었다. 이번에는 직선이었다. 다시 한번 긔 타람과 세누 수이는 절단기를 움직여 눈대중에 불과했던 선이 실제로 벽면에 나타나도록 만들었다. 중간이 가까워졌을 때 세누 수이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절단기를 떼냈다. 긔 타람은 그녀가 등에 달린 주머니에서 흡반 달린 손잡이를 꺼내 금속벽에 붙이기를 기다렸다가 금속벽 양쪽에 이어진 선분을 이었다. 투우우웅. 희미한 곡면을 그리고 있던 금속벽에 그려진 부채꼴의 양끝이 밖으로 살짝 튀어나오며 진동을 흘렸다. 이제 부채꼴을 이룬 곡선의 한 가운데를 절단기로 눌러주면 부채꼴은 벽에서 분리될 것이었다. 긔 타람은 발치에 절단기를 내려놓고 양 손으로 세누 수이가 붙여놓은 손잡이를 잡았다. 그가 단단히 잡은 것을 확인한 세누 수이가 부채꼴을 완성했다.
  <힘내.>
  금속벽의 무게가 한꺼번에 팔에 실려 긔 타람이 휘청하자 세누 수이가 짧게 손을 흔들었다. 긔 타람은 이를 꽉 깨물고 한발 한발 움직여 트레일러로 향했다.

  세누 수이와 긔 타람이 처음 파트너가 된 것은 긔 타람이 이레스 달로 온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긔 타람은 내내 도시의 웅장한 모습에 마음을 빼앗긴 채였다. 수면시간으로 지정된 짧은 밤동안 그는 아무도 없는 식당 창문을 통해 벌레먹은 것 같은 도시의 희뿌연 외곽과 그 위의 어둠을 즐겼다. 긔 타람은 공기청정기를 틀고 담배를 피웠다. 천천히 담배맛을 즐기고 있을 때 짧은 머리카락에 탄탄한 몸을 한 여자가 이쪽을 보고 다가왔다.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이 다가오는 것은 드문 일었다. 그녀는 긔 타람과 그 손에 들린 담배를 흘끗 보고는 옆에 앉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연기 섞인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녀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그녀가 낀 MPP리시버에서 작은 음악이 흘러나왔다.
  "세누 수이?"
  계속되는 침묵이 불편했기 때문에 긔 타람은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세누 수이는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까딱하고 한쪽 귀에서 리시버를 뽑았다.
  "긔 타람씨였죠. 분명."
  "네."
  "일은 할만하세요?"
  "뭐 그렇죠."
  사교적인 잡담이 오고갔다. 세누 수이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다시 리시버를 귀에 꽂았다.
  "여긴 지루해요. 유적 발굴, 사실은 해체지만, 어쨌든 그런 대 사업에 참여하니 어쩌니하는 사명감을 가지고 왔다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좋아요."
  갑자기 내리꽂힌 날카로운 말투에 긔 타람은 약간 놀랐다. 나흘 동안 지켜본 그녀는 꽤나 열심히 일했기에 그런 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럼 왜 지구로 안돌아 가는거죠? 무기한 계약이라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다던데…"
  세누 수이는 긔 타람을 돌아보고 천천히 손짓했다.
  <거긴.더.지루해.요.>
  지루하다는 표시 뒤에 귀찮음이 완연한 느린 동작으로 높임에 해당하는, 동그라미에서 손가락 두개를 꼿꼿이 펴 내리는 모양으로 이어지는 손짓을 하는 그녀의 표정은 내용에 어울리지 않게 생기발랄했다.
  "하핫."
  긔 타람이 웃자 세누 수이는 만족한 모양이었다.
  "최대한 빨리 수화를 배우는게 좋을거예요. 여긴 벽이 얇아서 프라이버시가 필요한 대화는 수화로 떼워야하죠."
  <알았습니다.>
  긔 타람이 서투른 수화로 답했다. 세누 수이는 미소를 지었다. 세누 수이는 그날부터 긔 타람에게 수화를 가르쳐주었다. 성격이 급한 면이 있어 세누 수이는 좋은 교사가 되지 못했지만 긔 타람은 불평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젊고 예뻤고 솔직했다.

  현재의 세누 수이는 이레스 달에 근무하는 일곱 명의 도시철거반중 가장 어렸고 근무시간은 최장이었다. 또 도시철거반을 총괄하는 반장이었고 이레스 달의 가장 훌륭하고도 유일한 가수이기도 했다. 사실 이레스 달의 사람이 아니더라도 적당히 일한 뒤 남는 시간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몇 개라도 가질 수 있었다. 이레스 달 거주민 전원의 상담원을 자처하는 힐 제드린, 압축식량을 먹을 만하게 요리하는 알보 뷔스, 일지 담당이자 작가인 데비 헤르이, 화가에 엔지니어인 카 이웨반, 스스로 명상가에 신비주의자라지만 단순히 사람을 기피하는 것 같은 일비 첼. 마지막으로 그들의 청자이자 감상자이자 대화상대자인 긔 타람.
금속판을 가득 실은 트레일러를 화물칸에 옮긴 세누 수이와 긔 타람은 조립식 거주구로 돌아와 헬멧을 벗었다.
  "오늘 무리한 거 아냐?"
  미리 준비되어 있던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던 세누 수이가 긔 타람에게 물었다. 긔 타람은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되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한 것은 자신보다 그녀 쪽이었다. 세누 수이는 물수건을 긔 타람에게 던져주고 자신의 눈가에 손가락을 갖다댔다.
  "주름살이 는 것 같아."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세누 수이는 입가를 찡그리더니 어깨를 으쓱하고는 몸을 둔하게 감싸고 있던 외피를 익숙한 솜씨로 벗어내렸다.
  세누 수이는 긔 타람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물함을 열어 옷을 갈아입었다. 긔 타람은 그녀의 몸을 훔쳐보며 느긋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빠른 손놀림으로 옷 매무새를 다 정리하고 귀에 MPP-TX201의 리시버를 꽂은 세누 수이는 사물함을 닫고 빙글 뒤돌아 아직 제대로 바지조차 꿰지 못한 긔 타람의 어정쩡한 자세를 한껏 미소띈 얼굴로 쳐다보았다.
  "역시 몸이 옛날같지 않네. 6년 전만해도 나잇살 같은 건 안보였는데 운동 소홀히 한 거 아냐?"
  "오늘따라 불만도 많네. 나이는 나만 먹었나."
  긔 타람이 툴툴거리자 세누 수이는 깔깔 웃었다. 내일 모레면 벌써 3000년 이었다. 긔 타람은 기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세누 수이는 평소와 다를 것이 없어보였다. 긔 타람은 쓴웃음을 지었다. 세누 수이는 3000년이 되든 3015년이 되든 마음대로 이레스 달에 남아 있을 수 있지만 그는 3000년이 되는 순간 지구로 돌아가야 했다. 긔 타람은 아까 세누 수이의 수화를 떠올렸다.
  <제기랄.3000년.되기.전에.끝난다고.했던.놈들.다.죽이고.싶어.>
  세누 수이의 표현은 과격했지만 긔 타람은 그것이 자신의 심정 그대로라고 생각했다.
자원회수 위원회에서는 3000년이면 우주로 빠져나간 대부분의 자원이 회수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이 믿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해주었기에 긔 타람은 2999년 12월 31일 23시 59분을 계약 만료 시기로 잡았다. 하지만 이레스 달 도시의 지구에서 온 합금과 합성수지로 이루어진 건물들은 아직도 탄탄히 자리잡고 있었다. 일하는 방식이 문제이기도 했다. 원할 때 일하고 원할 때 쉰다라는 간단한 규칙. 지구에서 과도하게 유출된 질량- 자원을 지구로 회수해 미묘하게 일그러진 인력을 되돌린다는 최소한의 사명감마저 없었다면 이나마도 불가능 했을 것이다.
  어쨌든 실제로 3000년이 다가왔기 때문에 긔 타람은 몇 달 전부터 지구로 돌아가 할 일을 결정해야 했다. 세누 수이와는 이야기 할 수 없었다. 1년 전부터 그가 지구로 돌아가는 문제에 대해서는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기피해온 터였다. 말하지 않는다고해서 긔 타람의 계약만료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이 없었다. 그것은 긔 타람의 일이지 세누 수이의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는 며칠 전에야 일할 곳을 정해 지구에 연락을 넣을 수 있었다. 과연 잘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번 지구로 돌아가면 다시 이레스 달로는 돌아올 수 없었다. 그의 나이로는 보다 지구에 가까운 다른 달이 아니면 우주에 나오기 힘들고 무엇보다 위원회에서는 그에게 더 이상 보수를 지불할 수 없다는 통고를 보내온 것이다. 긔 타람은 작게 중얼거렸다.
  "바보들."

  <바보들.>
  긔 타람과 말을 놓은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세누 수이는 그렇게 위원회를 비웃었다. 둘은 이미 같은 침대에서 뒹굴 정도로 친해져 있었기에 둘의 나이차이 쯤은 말을 놓는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가져--폐기물.구덩이에.-----인력-----돌아올--없잖아.>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세누 수이가 낄낄거렸다. 긔 타람은 한숨을 쉬고 고개를 흔들었다.
   "미안한데 천천히 해줘."
  세누 수이는 손을 내려 가슴 위에 얹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 가져다가 폐기물 구덩이에 처박는다고 인력이 원래대로 돌아올 리가 없잖아."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해봐야지."
  긔 타람이 말했다. 세누 수이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심술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그러면 왜 멀쩡하게 지구에 있는 물건들까지 사치품이네 뭐네 해서 폐기물 구덩이에 묻어버리는 건데? 이미 만들어진 물건 내다버리고 죽은 사람 물건 돈 들여서 구덩이에 묻느니 살아있는 사람이 사용하는 게 더 이득 아냐?"
  "그 물건을 사용하는데에 또 다른 자원이 들어가니까."
  세누 수이는 흐응 웃고는 긔 타람의 팔에 머리를 올렸다.
  "내가 볼 때는 말이지. 이런 무익한 짓을 하는 건 여기저기 버려놓은 쓰레기들이 이제야 더럽다는 걸 깨닫고 부끄러워하는 거 같아."
  긔 타람은 몇 백년 전에 지어진 아름다운 이레스 달의 하얀 도시를 떠올렸다.
  "더럽다기엔 아름다운 쓰레기인데."
  긔 타람이 중얼거리자 세누 수이가 물었다.
  "그래서 그 아름다운 쓰레기를 해체하고 지구를 구하겠다는 사명감으로 온 거야?"
  긔 타람은 솔직하게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이레스 달에 온 것은 사명감 같은 것과는 털끝만치도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담배. 흡연자가 꽤 있어서 좀더 버틸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사치품 목록에 끼는 바람에. 사치품이자 기호품인 것은 맞지만 말이야. 없이 며칠 살아보고 영 안되겠어서. 여기로 온다니까 폐기물 구덩이까지 다시 파헤쳐서 계약기간 만료까지 피울 분량을 맞춰주더라고. 맛도 상표도 엉망진창이지만. 어쨌든 멋지잖아? 우주 공간에서 세상에 남은 마지막 담배를 독점하고 있다는 거."
  "낭만적이네."
  세누 수이는 까르륵 웃고 몸을 굴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너는 왜 여기 왔는데?"
  세누 수이는 손을 뻗어 침대 옆에 놓여있는 MPP-TX201을 집어들었다.
  "…어렸거든. 열 일곱이 된 날 미친듯이 돈을 모아서 이걸 간신히 갖게 되었어. 최신형에 생긴 것도 제일 예뻤고 음질도 끝내주고. 사길 잘했지. 사고나서 바로 사치품 반환에 대한 성명인지 뭔지가 발표되서 공급이 멈췄으니까. 덕분에 6년이나 지난 지금도 최신형이지만 말이야. 어쨌든 난 열 일곱이었고 막 손에 들어온 MPP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 내 MPP와 MPP데이터, 건전지. 그게 다야."
  세누 수이의 눈이 가늘어지는 것이 어둠 속으로 희미하게 보였다.
  "잘도 보내줬네."
  "열 일곱이면 앞가림은 가능한 나이였고 내가 끝까지 우겼으니까. 대신 특수 케이스가 된 거지. 언제라도 이런 놀음에 싫증나면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그리고 그녀는 곧 싫증내고 돌아가는 대신 6년 동안 이레스 달에서 일했다. 세누 수이는 살짝 몸을 일으켜 책상 위에 쌓인 네모난 포장을 가리켰다. 갈색 포장은 귀퉁이를 찢어 무언가 꺼낸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런데 건전지는 서른 세개밖에 안줬어. 보증기간 1년짜리 태양열 충전식 건전지 서른 세개. 아껴쓰면 더 오래 쓸 수도 있겠지만 내가 쉰 이후로는 못살거라고 하는 거 같아서 영 기분 나쁘단 말이야."
  "쉰이면 일하긴 힘들지 않겠어?"
  "나보단 당신 걱정이나 하라구."
  세누 수이는 얼굴을 밉게 찡그렸다.
  "역시 술을 가져온 내가 더 현명해!"
  그때 옆 방에서 알보 뷔스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세누 수이가 베개를 들어 알보 뷔스의 방이 있는 오른쪽 벽을 때렸다.
  "술이나 담배나!"
  "조용히 해애!"
  그와 동시에 왼쪽에서 벽을 탕탕 때리는 소리와 일비 첼의 날카로운 항의 소리가 날아들었다.
  "너나 조용히해!"
  문 맞은 편의 데비 헤르이였다. 긔 타람은 놀라서 목을 움츠렸다. 세누 수이는 멍청한 표정의 긔 타람을 보더니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렸다.

  긔 타람이 옷을 다 입고 세누 수이와 거주구 안쪽으로 들어가는 데 문가에 서 있던 남자가 휘파람을 불었다.
  "오늘도 일했어? 내일이 2999년의 마지막 날이란 걸 잊진 않았겠지. 수이. 내일 부를 노래는 준비나 한 거야?"
  힐 제드린이 더러워진 물수건을 손에 들고 있는 긔 타람과 세누 수이를 보고 말했다.
  "말만 해. MPP 데이터에 있는 노래는 언제 신청 들어와도 잘 부를 수 있다구."
  "어련하시겠어."
  힐 제드린은 유쾌한 목소리로 연말 파티계획을 설명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모든 것이 착착 준비되어 가고 있었다. 알보 뷔스는 벌써부터 들떠서 케익과 빵 반죽을 마쳐놓았고 아끼던 술도 두병이나 내놓기로 했다. 데비 헤르이는 2000년대에의 송시를 세 편 썼고 카 이웨반은 내일 중으로 벽에 리본과 색종이, 알록달록한 무늬 그리는 일을 마칠 것이라고 했다. 자신은 이 모든 일을 총괄했으니 넘어가고 문제는 문을 걸어잠그고 있는 일비 첼인데 3000년이 되면 우주가 멸망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나름대로 새 밀레니엄이 오는 것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접시라도 나를까?"
  긔 타람이 묻자 힐 제드린이 긔 타람의 어깨를 툭툭 쳤다.
  "당신은 이레스 달에서의 2999년이 지날 동안 먹고 감상하고 즐기면 돼. 다른 할 일도 많잖아."
  "나중에 딴소리 하진 않겠지."
  "설마."
  힐 제드린이 사람좋은 미소를 지었다.
  다음 날 저녁, 들뜬 분위기가 이레스 달 도시철거반 거주구에 둥둥 떠다녔다. 긔 타람은 그런 사람들의 분위기를 망치지 않도록 조용히 짐을 꾸렸다. 지구로 가지고 돌아가봤자 버려질 것이 뻔하지만 빈 방에 놓아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옷장에 달린 서랍을 열었다. 서랍에는 갈색 포장지만 구겨진채 놓여 있었다. 6년동안 피운 담배의 잔해를 씁쓸한 눈으로 쳐다보던 그는 쓰레기통을 가지고 와 포장지 조각을 버리기 시작했다. 포장지를 아무렇게나 구겨잡는 그의 손에 갑자기 약간 딱딱한 것이 와 닿았다. 그는 포장지만 골라 쓰레기통에 버리고 서랍 안을 쳐다보았다. 한 갑이 남아있었다. 위원회에서 계산을 잘못한 것은 아니었다. 면밀한 계산과 긔 타람의 흡연 습관에 대한 조사를 기반으로 한 개피까지 정확하게 내줬던 것을, 타람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의 생활이란 것이 늘 일정할 수 없는 것이지만 긔 타람은 특별히 담배를 참거나 잊었던 기억이 없었다. 긔 타람은 뜯지 않은 담배갑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건 위원회의 착오가 아니라 자신의 6년간의 작은 변화로 인해 남은 것이었다. 그는 그 미묘한 변화의 원인을 떠올렸다. 긔 타람은 마음을 굳혔다. 밖에서 커다란 소음이 들려왔다.
  "나와! 2999년 마지막 밤이라구!"
  힐 제드린의 목소리였다. 쾅쾅 문을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일비 첼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녀는 아직도 문을 잠그고 틀어박혀 있는 모양이었다. 긔 타람은 힐 제드린이 그의 방까지 부르러 오기 전에 먼저 나가기로 마음 먹었다.

  세누 수이의 방에서는 얇은 벽을 타고 노래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긔 타람은 이런 경우 밖에 서서 노래를 듣기 즐겼지만 안타깝게도 감상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긔 타람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세누 수이의 방문을 두들겼다.
  "수이."
  노래가 멈췄다.
  "준비 다 됐나보지? 잠깐만, 곧 나가."
  세누 수이의 목소리가 문 안에서 들려왔다. 식당으로 오라고 부른 것으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열어줄래.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문이 열리고 세누 수이의 얼굴이 나타났다. 손에 들려있는 악보는 방금 전 부르고 있던 노래의 악보인 듯 했다.
  "들어와."
  세누 수이는 뒤로 한발자국 물러나 길을 터주었다. 긔 타람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새삼스럽게 낯익은 방을 돌아보았다. 그의 방과 마찬가지로 침대와 낮은 책상, 창문이 전부였지만 흐트러진 침대보와 그 위에 얹힌 MPP-TX201, 반쯤 열린 책상 서랍이 어지러웠다. 긔 타람은 창문으로 다가갔다. 이제는 지구의 숲보다 낯익은 하얗고 텅 빈 도시. 긔 타람은 창 밖으로 보이는 흰 도시를 쫓던 시선을 세누 수이에게 돌렸다.
  "나 지구로 내려가면 인숲지구의 폐기물 처리소에서 일하기로 했어."
  인숲지구의 폐기물 처리소는 이레스 달에서 지구로 보내지는 폐기물을 처리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일하면 항구나 선박정비소에서 일하는 것만큼 빨리 이레스 달의 소식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작업대 하나 분배 받아서 폐기물 분류만 하면 되니까. 이레스 달 물건이라면 분리기준도 확실하게 알고 있고."
  세누 수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어."
  그 이상의 말은 없었다. 긔 타람은 할 말을 잃었다. 세누 수이는 가느다란 한숨을 쉬었다.
  "계속해."
  세누 수이의 재촉에 긔 타람은 입을 열었다.
  "…내일이면 계약이 끝나."
  ꡐ그래서?ꡑ라는 듯 세누 수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긔 타람은 이해해달라는 듯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으나 세누 수이는 물끄러미 마주 쳐다볼 뿐이었다.
  "어이! 준비 다 됐어. 그만 쑥덕대고 나오라구, 둘다."
  갑자기 문을 쾅쾅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힐 제드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았어."
  긔 타람은 대답하고 손으로 말했다.
  <같이.가자.>
  긔 타람은 표정의 변화가 없는 세누 수이의 얼굴을 살폈다. 세누 수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같이.갈수.없어.>
  <네가.원하기만.하면.끝나는.계약이잖아.>
  세누 수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봐! 첼보다 늦게 올 생각이야? 가수가 늦으면 안된다구!"
  "간다니까! 먼저 좀 가있어!"
  힐 제드린이 투덜거리는 소리와 함께 저벅거리는 발걸음이 멀어졌다. 그가 완전히 떠난 것이 분명한데도 세누 수이는 수화를 계속했다. 그녀는 침대로 다가가 잠시 MPP-TX201을 들어올려 보였다. 그리고 활짝 웃었다.
  <난.아직도.이.사치를.포기할.생각이.없어.>
  그녀는 손을 내리고 얼굴에 걸린 웃음을 천천히 엷게 변화시켰다. 그녀가 말했다.
  <미안.>
  너무나 세누 수이다운 반응이었기에 긔 타람은 실망하는 대신 반사적으로 웃음을 지었다.
  "아니야."
  긔 타람은 그녀가 이곳에서 보낸 12년을 가늠해 보았다. 자신이 있기 전 열 일곱의 그녀가 보낸 6년. 스물 셋, 자신과 함께 보낸 6년. 21년치 건전지가 개봉되지 않고 쌓여있는 그녀의 방을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없이도 스물 아홉의 그녀가 또 다른 세 번의 6년과 한 번의 3년을 보내는 것을 생각했다. 긔 타람은 지구에서 보낼 자신의 남은 생을 생각했다. 틀림없이 그녀의 따뜻한 몸이 그리워질 것이다. 그는 미소지었다.
  "가자."
  긔 타람은 세누 수이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는 이미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그들보다 늦게 온 것은 일비 첼뿐이었다. 모두는 먹고 마시고 시계를 들여다보며 초를 세었다. 3000년 1월 1일 00시 00분 1초. 마침내 시계가 완전한 3000년을 가리키는 순간 모두는 환호했고 이레스 달의 유일한 가수는 고조된 목소리로 노래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긔 타람은 담배에 대한 모든 권리를 잃고 이레스 달의 관계자에서 외부인으로 등급이 바뀌었다. 긔 타람은 마지막 남은 담배를 짐가방 밑바닥에 아무렇게나 처박았다.
  1월 2일. 지구와의 통신이 한 차례 오가고 그를 지구로 돌려보내기 위한 배가 출발했다.

  배가 항구에 도달하자 이레스 달의 동료들은 긔 타람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했다.
  "잘가요."
  "잘가, 타람."
  세누 수이, 힐 제드린, 알보 뷔스, 데비 헤르이, 카 이웨반, 평소 말이 없는 일비 첼까지. 낯익은 얼굴들은 긔 타람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악수를 했다. 그리고 쉴 틈도 없이 준비되어 있던 보급품을 나르기 위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배에서 이레스 달 도시의 해체된 부분을 내리고 필요한 물품을 싣자마자 이레스 달로 돌아가야 했다. 세누 수이는 이쪽으로 시선을 한 번 더 던졌을 뿐, 곧 물건 품목을 체크하러 사라졌다. 아쉬웠다. 조금 더 요란한 이별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긔 타람은 고개를 저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선박정비소에 짐을 맡기고 신청을 넣어두었던 폐기물 처리소로 향했다. 항구에서 대기중이던 인숲지구 폐기물 운송차량이 이레스 달에서 온 도시 조각과 함께 그를 싣고 갔다. 좁고 곧은 도로를 쭉 따라 반시간 정도 달리니 전나무 숲 한 가운데 폐기물 처리소의 갈색 정문이 나타났다. 긔 타람은 차에서 내려 낯익은 흰색 합금과 기계부품이 한켠에 쌓이는 것을 바라보고는 책임자를 찾아 나섰다. 감독실인 간소한 방에서 남자 한 명이 책상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붉은 반점이 얼굴에 가득한 사내는 자신을 뷔에스 안이라고 소개했다.
  "그래, 꼭 이 구역에서 일하고 싶다고요. 긔 타람씨?"
  "예."
  뷔에스 안은 긔 타람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수긍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앞에는 계약을 위한 어떤 종이도, 기계도 없었다. 그는 긔 타람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더니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 말했다.
  "이레스 달에서 철거작업을 하셨다니 우주에서 오는 거대 폐기물 분리에는 이미 일가견이 있으시겠군요. 그걸 빼놓고는 가끔 죽은 사람의 물건을 정리하는 정도니까 어렵지 않을 겁니다. 우주폐기물이 아니면 몇 놈 안되는 기계를 다룰 일도 없어서 나머진 손으로 분리한다니까요. 어쨌든 덕분에 제 여가시간이 늘겠군요. 잘 지내봅시다."
  그는 책상머리에서 일어나 긔 타람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는 여벌 사물함 갯수를 확인하고 번호표가 달린 작은 열쇠를 건네주었다. 지구에서 생활하며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은 그 안에 이미 준비되어 있을 것이었다.
  "사물함 안에 필요한 것 다 있나 확인하시고 이레스 달에서 가져온 물건 말씀인데… 작은 것 몇 가지 정도는 봐드릴 수 있지겠만 그래도 어지간하면 다 버리십시오."
  긔 타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항구로 돌아가보니 이레스 달로 가는 보급품은 배에 다 실린 모양이었다. 선박정비소 사람으로 보이는 몇이 배를 점검하고 있었다. 긔 타람은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세누 수이는 물론 아는 얼굴이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혹시 이레스 달에서 온 사람들이 어디 갔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일을 빨리 끝내놓고 어디론가 우루루 가버리던데요."
  선박정비소 사람에게 물어본 긔 타람은 기운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선박정비소에 맡겨두었던 짐을 찾아 안에 든 것을 확인했다. 가방 밑바닥에는 전날 넣어둔 그대로 담배갑이 놓여있었다. 문득 담배가 고파진 그는 주머니를 더듬어 라이터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담배갑을 꺼냈다. 그 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타람!"
  소리가 들리는 쪽을 돌아보니 세누 수이가 뛰어오고 있었다. 긔 타람은 가방을 닫아 들고 그녀를 향해 뛰었다. 꽉 쥔 손에서 담배갑이 찌그러졌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모두 함께 안녕,하고 끝인줄 알았는데."
  "…그러려고 했지. 그래도 앞으로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니까."
  "다른 사람들은?"
  "몇 년 만에 지구의 멀건 음식을 맛보러 갔어."
  세누 수이는 시계를 보고는 시간이 되겠다며 긔 타람이 폐기물 처리소까지 가는 데 동행하겠다고 했다. 둘은 공용 자동차를 타고 폐기물 처리소로 향하며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맨 처음 만났던 때. 같이 일하던 때. 싸웠던 때. 소란스러웠던 3000년1월 1일의 전후까지. 폐기물 처리소에 도착하자 둘은 자동차를 세워놓고 천천히 걸어갔다. 정문이 가까워지자 세누 수이가 멈춰섰다. 긔 타람이 따라 멈춰섰다. 세누 수이의 눈은 긔 타람의 손에 들린 가방과 마지막 남은 담배갑을 훑었다.
  "담배, 어쩔거야? 지금 피워 없앨 거야?"
  긔 타람은 고개를 돌려 담배갑을 보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버릴 거야. 그러려고 가져온 거니까."
  세누 수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긔 타람은 길게 한숨을 쉬고 미소가 남은 세누 수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도 잔잔한 미소가 맺혔다. 그는 세누 수이의 귀에 꽂힌 MPP-TX201의 리시버를 바라보며 말했다.
  "언젠가는 그것도 폐기물 구덩이에 들어갈 걸. 네가 쉰이 되기 전에 지구에 정착하러 올 거라고 장담하지."
  세누 수이가 말했다.
  "아니면 내가 죽어서 일지도."
  침묵이 흘렀다. 새삼스러운 눈으로 세누 수이를 바라보던 긔 타람은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세누 수이를 껴안고 담배갑을 쥐지 않은 손으로 그녀의 짧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세누 수이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다가 천천히 긔 타람의 몸을 밀어냈다. 그녀는 시계를 보았다. 슬슬 이레스 달로 돌아가야하는 시간이었다. 긔 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마지막으로 서로를 향해 미소지었다. 세누 수이가 먼저 뒤돌았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힘있게 땅을 딛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긔 타람은 짐을 들고 새 직장이 된 폐기물 처리소로 향했다. 그는 열쇠로 자기몫의 사물함을 열어 물건을 확인하고 폐기물 구덩이로 향하는 분리수레에 가방과 구겨진 담배갑을 던져넣었다.

  그리고 몇 년 뒤, MPP-TX201은 지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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