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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대 시간이 거의 다 되어 갈 무렵 노곤하게 밀려오는 졸음에 서서히 굴복하고 있던 관제사를 화들짝 놀라게 한 경보가 울린 것은 내가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며 나를 침대에 고정시켜놓고 있던 벨크로를 떼어내고 있던 무렵이었다 . 소장님은 아침잠이 좀 많은 편이라 사소한 일로 잠을 깨울 때마다 버럭 화를 내곤 한 다는 사실을 기억해낸 관제사가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안전관리 과장님께 먼저 경보의 내 용을 전달한 것은 내가 졸린 눈을 비비며 얼굴에 찬물을 끼얹고 치약을 잔뜩 얹은 칫솔을 입에 억지로 쑤셔 넣고 있을 무렵이었다. 과장님이 내용을 세 번이나 꼼꼼히 읽어보고 중요도를 결정한 다음에 소장님을 깨울 때 나는 언젠가 집으로 돌아갈 날을 꿈꾸며 가속기 에서 열심히 운동을 하던 중이었다. 소장님이 내용을 전달받고 관제실에 모습을 나타냈을 무렵 나는 식당에서 아침으로 쌀과 닭고기와 야채를 넣어 끓인 죽에 소금을 적당히 뿌린 후, 수저로 열심히 떠먹고 있던 중이었다. 그리고 내가 관제실로 즉시 출두하라는 호출을 받은 것은 이동 벨트에 몸을 묶고 방으로 이끌려가면서 어떻게 하면 하루밖에 없는 휴일 을 알뜰하게 쓸 수 있을까 열심히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겠지만, 호출당하는 것은 필경 뭔가 좋지 않을 일 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나치는 사람들이 쳐다볼 정도로 소리나게 투덜거리며 가능한 한 늑장을 부리며 관제실까지 갔다. 그리고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소장님은 내게 한 달 만 에 겨우 얻어낸 휴일를 도로 내놓으라고 태연하게 지시했다.

“말도 안돼요. 다른 사람을 시켜도 되는 일이잖아요.” 나는, 학생 시절에 소장에게 잘 보였기 때문에, 기지 내에서 이런 투로 소장님과 대화할 수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인물 중의 하나였다. 물론 때와 장소가 중요하긴 하지만, 지금 떼를 쓰고 있는 건 내 가 아니라 소장님이었다. 신성불가침인 휴일을 반납하라니!

“다른 사람이 없는 걸. 각자 맡은 일이 있어서 함부로 다른 곳에서 빼올 수도 없는 노릇이고. 여기 이 친구처럼 졸려서 해롱대는 사람을 내보냈다간 지구 궤도에 시체 하나 더 늘어나는 꼴 밖에 안 될 텐데. 어쩌겠나.” 라면서 소장님은 눈이 반쯤 감긴 관제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요즘 자네가 여자라고 무시하는 훈련생들이 있다면 서?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본때를 보여 주라고.”

전가의 보도. 소장님이 여자 부하들이 내켜하지 않는 것을 시킬 때 조자 룡 헌 창 쓰듯이 써먹는 수법이다. 참으로 치사하고 유치한 방법이긴 하지만 효과가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결국 나도 고개를 끄덕여 버렸으니까.

“그런데 뭐를 치워야 하는 거죠? 운석인가요?” 마지못해 승낙해 버린 내 가 물었다.

“아직 파악중이네. 인공위성의 파편이라는 쪽이 좀 더 그럴 듯해 보이긴 하지만.” 소장님이 어느 새 새로 교대해 온 근무자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시간은 여유가 있지만 만약의 경우란 게 있으니까 바로 시작하도록 하지. 내 최고의 조종사를 붙여줌세.”

“소장님,” 새로 교대해 들어온 관제사가 말했다. “정체가 파악이 됐습니 다.”

“벌써? 아직 거리가 꽤 멀 텐데, 식별이 가능한가?” 소장이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물었다.

“그게....... 식별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주관입니다.”

그 한 마디에 내 기분은 더 가라앉았다. 궤도상의 우주관은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우주장례는 국가의 우주개발부서에서 특별히 관리한다. 물론, 돈이 넘쳐나는 데다가 법이라는 것에 대해 눈꼽만큼의 존경심도 가지고 있지 않은 졸부들은 가끔 아무 도 모르게 친지나 혹은 자신의 시신을 우주로 날려 보내곤 했다. 자기들 딴에는 낭만을 추구한다고 주장하겠지만, 엉성하기 짝이 없는 추력이나 궤도 계산 때문에 그런 자들의 관은 종종 지구로 돌아와 나같이 선량한 시민의 휴일을 이렇게 앗아가는 것이다. 텅 빈 우주 공간에서 홀로 시체를 끌어안고 작업을 해야 하는 기분을 그 자들이 알기나 할까.

소장님도 같은 생각이었던 것 같다. 나를 보는 표정에 이제는 미안함이 묻어나왔다. 어쩌겠어. 소장님 탓도 아닌걸. 소장님은 억지로 고개를 관제사에게 돌리며 물었다.

“인식 번호를 확인해 보게. 보나마다 등록도 안 된 관이겠지만.”

“예. 아, 인식 번호가 있습니다. 정식으로 등록된 관인 것 같습니다만. 잠시 조회해보겠습니다.”

소장님이 나를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나왔습니다. 2046년에 치러진 장례입니다. 15년 전이로군요. 한국인. 이름은......” 관제사가 머뭇거렸다.

“이름은 이재상. 맙소사.”

관제사가 마지막에 덧붙인 단어는 나와 소장님을 비롯한 관제실에 있던 사람 전부의 느낌을 반영했다고 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가 낳은 전설적인 우주 비행사. 우리나라의 우주 개발 초기부터 활동을 시작해서 거의 20년에 가까운 세월을 오로지 우주 개발에 바쳐온 우주비행사들의 영웅이자 한국 우주 개발의 산 증인이었다. 우주 비행의 여러 가지 기록들을 갈아 치우 며 항상 최전선에서 활약했던 우리의 영웅은 장기간에 걸쳐 방사선에 노출된 탓에 결국 백혈병으로 명을 달리했다. 그리고 정부는 태양계 밖 심우주로 보내 달라는 고인의 뜻에 따라 지구 궤도에서 장례식을 성대하게 거행한 후 그의 시신을 태양계 밖으로 쏘아 보냈다.

....라는 기록에 따르면 그는 벌써 지금쯤 태양계를 떠났거나 떠나려는 참이어야 옳았다. 그런데 어째서 그의 관이 다시 지구로 돌아오는 걸까. 계산상의 오차였 을까? 그런 중요한 인물의 장례를 치르는데 그렇게 허술하게 했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왜 그는 다시 돌아온 걸까? 왜 우리 기지와 충돌할 지도 모르는 위험한 궤도에 있는 걸까 ? 비이성적인 생각이 신경망을 장악하자 왠지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 선외활동복을 챙겨 입으며 내가 중얼거렸 다.

“뭐가요? 무슨 문제라도?” 소장님이 붙여준 최고의 조종사가 대꾸했다. 엄밀히 말해서 다소 한가한 조종사 중에 최고의 조종사였다. 김영민이라는 실력은 우수하 지만 그다지 재미는 없는 친구였다. 소장님은 약속은 지키지 않았느냐고 하시겠지만, 난 불안했다. 어차피 크게 위험한 일은 아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좀 더 신중을 기하는 편이 좋았으리라고 생각했다. 조종사문제가 아니다. 내 문제였다.

“기자들은 원래 이렇게 할 일이 없는 거야? 어째서 다 이쪽으로 쫓아 나 온 거지?” 내가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15년 전에 장사지낸 전설적인 우주비행사가 돌아왔는데, 어째서 이게 뉴스거리가 아니죠? 아마 전 세계 사람의 절반은 우리 쪽을 쳐다보고 있을 걸요?” 영민이 말했다.

“나머지 반은?”

“자고 있겠죠. 아마 아침에 일어나서 소식을 듣겠죠.”

“난 카메라 공포증이 있단 말이야.” 내가 헬멧을 쓰고 봉인상태를 점검 하며 말했다. 이 말은 아마 들리지 않았는 듯 영민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산소 상 태를 점검하고, 나를 인양선과 이어줄 생명줄이 튼튼한지 확인했다. 나머지 장비들을 안 전수칙에 따라 두 번씩 점검한 후 나는 신호를 보냈다. 선내로 이어져있던 문이 밀폐되는 동시에 에어락에 경고등이 들어왔다. 나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본 후 내 몸을 벽에 고정시키고 다시 한 번 신호를 보냈다. 공기가 빠져나가는 소리는 들을 수 없었지만, 잠시 후 나는 어둠 속에 놓인 관을 마주보고 있었다. 영민이 솜씨를 잘 발휘했는지 인양선은 관과 같은 속도로 평행하게 움직이고 있어, 마치 어두운 공간에 둘이 미동도 않은 채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는 둘 다 시속 100킬로미터 이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지구는 내 등 뒤편에 있었고, 눈 앞에는 오로지 막막한 공 간뿐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전설적인 우주 비행사의 관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통신을 점검하기 위해 영민에게 말을 걸었다.

“저 관 앞면은 유리로 덮여 있는 건가?”

“아마도.”

“그럼 시신이 보이겠네?”

“아마도.”

“젠장.” 나는 기지에서 통신을 듣고 있을 소장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속삭였다.

나는 관에 부착할 탄소섬유의 한쪽 끝을 들고 조심스럽게 관을 향해 도약 했다. 도중에 한 번 부스터를 쓰긴 했지만, 나는 무사히 관의 뒤쪽에 손을 댈 수 있었다. 가능하면 앞면은 천천히 보고 싶었다. 유명한 우주 비행사의 시체라고 해도 이런 우주 공 간에서 시체를 마주보는 일은 피하고 싶은 게 당연하다. 나는 섬유가 관에 부착되었는지를 확인하고 영민에게 신호를 보낼 채비를 했다. 천천히 끌어당기기만 하면 일은 끝나는 것 이다. 그러면 나는 답답한 우주복을 벗어버리고 침대에 파묻히거나 음악을 듣는다거나 하는 따위의 일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느라 난 잠시 내가 뭘 하고 있 었는지를 깜빡했던 것 같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몸을 움직였고, 내 두 눈은 정확히 유리로 덮인 관의 앞면을 향했다. 그리고 3초 후 내 비명소리가 나의 헬멧안과 인양성의 조종실 , 그리고 기지의 관제실을 가득히 메웠다.

*****

그로부터 세 시간이 지났을 무렵, 난 관제실에서 나 자신을 열심히 변호하고 있었다. 어떤 약삭빠른 기자 하나가 용케도 내 비명소리를 녹음해 방송한 모양 이었다. 언젠가 만나게 되면 콧잔등에 한 방 먹여 주리라 생각하며 난 빈 의자에 털썩 주 저앉았다. 다른 사람들도 이제 나를 두고 비웃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고,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내가 본 관 속은 텅 비어 있었다. 부스러진 꽃 조각들만이 놓여 있을 뿐 완전히 텅 비어 있었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자, 나는 썩어 문드러진 시체를 본 것 보다 더욱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당신이 내 입장이었다면 어땠을 것 같은가? 아마도 나보 다 더 나은 반응을 보이진 못했을 것이다. 내 비명소리에 이어 관이 비어 있다는 보도가 전해지자 이 사건은 즉각 우주개발 역사의 미스테리 사전 제1항목에 등재되었다.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했다. 외계인이 빼갔다는 외계인설에서부터 애초에 정부가 시신을 빼돌 렸다는 음모이론까지 그야말로 다양했다. 나 역시 상상력을 발휘하여 멋진 추리를 손에 들 고 사람들 사이에 끼어보려 했지만, 바로 다음 날부터 이어진 일정이 허락하지 않았다.

사건 이후 한 달 동안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궤도기지를 보수하거나 파편 을 수거하는 일, 훈련생들을 교육시키는 일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리 많지 않은 예산을 가지고는 궤도 기지에 여분의 인원을 배치할 수가 없었고, 따라서 대원들은 언제나 바빴다. 빡빡한 일정을 별다른 사고 없이 지켜나가는 우리들을 보며 소장님은 항상 ‘우 리 대원들이 태양계 내에서 최고야’ 라고 치켜세우지만, 그런 말에 감명을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 사이 지구에서는 경찰까지 나서서 시신의 행방을 수색하는 모양이었 다. 제일 윗줄에 놓이는 것은 아니지만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꾸준히 사건에 대한 기 사가 나고 있었다. 나도 틈나는 대로 도서관에서 기사를 찾아 읽었다. 아직 생존해 있는 미망인이 제발 남편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애원하는 내용의 인터뷰를 읽은 날, 나는 도서관 에서 그 유명한 우주비행사 이재상의 전기를 빌려왔다. 그의 이름을 들어보지 않은 우주비 행사는 다른 은하계에서 온 첩자가 분명하다는 농담이 전해지듯이, 우주비행사라면 누구나 그를 알고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따지고 보면 그의 일생에 대해 정확히 읽어본 적은 없었다. 나는 독서대에 책을 집어넣고 침대에 누운 후, 내 눈 앞에 고정시켰다. 그리 고 다섯 쪽 가량을 읽은 후 나는 곯아떨어졌다. 호기심이라 해도 결국엔 피로를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그 책은 내가 이틀간의 휴일을 받을 때까지 내 기억 밖에 있었다. 책은 항상 내 침대 옆에 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내 시야에는 절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맹세 컨대 정말이다. 정말 안 보였다. 어쨌거나 이틀간의 연휴 첫날 나는 침대에서 기어 나와 양치질을 하고, 가속기 운동을 마치고, 식당에서 닭고기와 쌀과 야채로 끓인 죽을 먹고, 생글생글 웃으며 휴가를 떠나는 소장님을 배웅한 후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제서야 책 이 내 눈에 들어왔다.

동료들이 열심히 일하는 바로 그 시간에 침대에서 꼼지락거리며 책이나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는 건 무척이나 유쾌한 일이었다. 전기에 나타난 이재상의 일생은 평범했다. 보통 사람으로서 평범했다는 게 아니라, 그런 종류의 사람으로서 평범했다는 것이다.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이 그는 한 가지에 미친 사람이었다. 그는 시간 이 가능한 한 거의 모든 임무에 자원했으며, 남들이 아직 시도하지 않은 일에 손대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또한 으레 그렇듯이 가정에는 소홀했다. 아들은 하나를 두었으나, 그다지 신경을 써 주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갑자기 소장님을 떠올 렸다. 소장님은 가족을 끔찍이 여기는 분이었다. 이번 휴가도 큰아들의 대학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떠난 것이었고, 그 외에도 집안에 대소사가 있을 경우 항상 신경을 써서 챙겼다. 물론 소장님도 우주비행사라는 자신의 일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분이었다. 단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는 법이다. 이 세상에는.

다음날 하루 종일 나는 ‘범인은 누구인가?’하는 문제에 골몰해 있었다. 외계인 운운 하는 터무니없는 소리는 믿지 않았다. 누군가가 장난으로 인식 신호와 번호를 위조하여 흘려보냈을 거라는 추측도 있었지만, 장난으로 하기엔 너무 성가신 일이었다. 내가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어느 작가가 한 말과는 달리 진실은 공상보다 훨씬 단순한 법이다. 누군가가 빼내간 것이다. 지구 근처에서는 불가능 했을 것이다. 나는 도서관에서 옛 기록을 뒤져 관의 궤도를 찾아냈다. 관은 지구를 한 바퀴 돌아 태양계 밖으로 나가기 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달과 화성을 지나쳐 갈 때, 각각의 거주민들이 묵념을 할 예정 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나는 가능성을 따져 보았다. 진실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나 는 씨익 웃었다.

나는 휴가를 신청했다. 허가가 떨어지려면 한 달은 족히 걸릴 터이지만 난 서두르지 않았다. 그 사이 소장님도 돌아오셨고, 나도 한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해 온 남자 하나에게 정중하게 거절한다는 말을 전해주기도 하고, 둔한 나머지 영 훈련을 못 쫓아오는 훈련생에게 좀 못된 말을 하기도 했다. 그 사건에 대한 기사의 양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나는 승리감 비슷한 쾌감까지 느꼈다. 물론 내 추측이 옳다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틀린다고 해도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이런 상황일 땐 당연히 주사위를 던져 보는 것이다. 범인이 누구냐고? 아마 여러분들도 짐작했을 것이다 . 아직도 감이 안 오는 독자들은 자신의 둔한 머리를 탓하시길. 이크, 이런 말투 때문에 내가 훈련생들에게 욕을 먹는 것이다.

*****

오랜만에 밟는 지구는 어색했다. 자극적인 환경이 넘쳐나고 있었고, 땅 위에서 걷는 다는 것 자체가 마치 처음으로 걸음마를 하는 아기처럼 어색했다. 며칠 동안 나는 집에 머물며 부모님들에게 딸 노릇도 하고, 이제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남동생 의 덜 익은 현실 감각을 일깨워 주기도 하고, 한 동안 못 본 친구들과 만나기도 하면서 시 간을 보냈다. 그리고 나는 슬슬 만남을 준비했다. 이재상의 아들은 평범한 회사원으로 서 울의 위성도시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집으로 찾아갈지 회사로 찾아갈지를 놓고 갈등했고, 빈손으로 갈지 술이라도 한 병 사들고 갈지를 놓고 고민했다. 한 동안 상상의 나래를 펴며 그와의 첫 대 면을 여러 가지 모습으로 그려봤다. 그리고 어느 화창한 날 아침 늦게까지 잠에서 빠져나오 지 못하는 남동생을 힘껏 걷어차 준 후, 나는 그의 회사로 향했다. 로비에서 그를 기다리 는 동안 내게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잠시 후, 로비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한 남자 - 뉴스에서 본 적이 있는 낯설지 않은 얼굴의 -를 본 나는 그를 향해 다가가서 말했다.

“당신이 시신을 빼돌렸죠?”

그는 한동안 멍하니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 표정을 본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내 추측은 맞았던 것이다. 세 상에 누가 시신을 원하겠는가? 설령 아무리 유명한 사람일 지라도. 중국의 고사에도 있듯 이 시신을 애타게 찾을 사람은 오로지 하나뿐이다. 그 사람의 가족.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할까요?” 나는 말도 못하고 서 있는 그에게 살짝 웃으며 말했다. 자리를 옮긴 그는 목을 축이고 나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사실을 털어 놓 았다. 그 때 내가 느끼기로 그는 나를 수사기관에서 나온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아버지를 뵌 기억이 별로 없어요. 다른 사람들을 통해 우리 아버 지가 유명한 우주비행사라는 사실을 전해 들었지만, 내겐 마치 모르는 사람 같았죠. 어머닌 나보다 더 심했지요. 남편이라는 사람하고 도통 얼굴을 마주하기도 힘들었으니까요. 그렇게 , 살아왔는데. 다른 사람이 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마다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살 아오셨는데, 아버지 유언장에는 시신을 먼 우주로 보내달라고 쓰셨더군요. 어머니는 거의 돌아가실 지경이었어요.”

“그래서 중간에 시신을 빼돌렸나요? 누구에게 부탁했지요? 돈이 꽤 많이 들었을 텐데요.” 내가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물었다.

“그 분 이름을 제가 밝힐 수가 없습니다. 저희가 억지로 부탁한 일이니. 그리고 그 분도 돈을 요구하시진 않았어요. 우리는 그저 장비 움직이는 데 필요한 대금만 댔을 뿐입니다. 달 근처를 지나갈 때 시신을 되찾는 일까지는 문제가 없었는데, 관을 날 려 보낼 때 계산을 잘못 한 모양입니다.” 그가 대답했고 나는 한 가지를 더 물었다.

“그럼 시신은 지금?”

“시골 어머니 집에 모셨지요.”

거기까지 듣고 나는 그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내 추측이 맞았다는 의 기양양한 기분은 사라져 버렸고, 왠지 모를 슬픔이 나를 휘감았다. 평생 동안 우주로 나 가는 것 이외의 다른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 죽은 후에라도 먼 우주로 떠나고 싶다 는 마지막 소원을 빌었는데, 예상치 못하게도 평소에 잘 돌아보지 않던 곳에서 발목이 잡 혀 버리다니. 살아 있었더라면 발버둥이라도 쳤겠지만, 이젠 그럴 수도 없었다. 지난 날 외롭게 버려졌던 아내의 마지막 바람이 그를 고향인 지구에 묶어둔 것이다.

다음 날, 시신의 행방을 찾았다는 기사가 전 세계로 발신되었다. 기사에 는 고인의 미망인과 아들이 자신들이 시신을 찾아 갔노라고 고백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처음에는 충격으로 다가왔지만, 사람들은 금방 유가족들의 심정을 이해했다.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 나도 그랬으니까. 며칠 후 나는 고인의 아들에게 전화 를 걸어 시골에 있는 어머님과 묘소를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는 내가 수사요 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는 약간 씁쓰레 하는 눈치였지만, 내 부탁을 받아들였다.

미망인이 살고 있는 집은 조그맣지만 아름다웠다. 주름이 가득한 얼굴이 지만 미소를 띤 채 나를 맞아 주었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아마도 일생 중 가장 행복한 시절 같았다. 이제 그녀는 안절부절하며 하늘을 쳐다보는 일도 없이, 정원 을 가꾸며 테라스에서 조용히 책을 읽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집안에는 고인의 사진들 이 여러 장 걸려 있었다. 확실히 가족들에게는 소홀했는지, 주로 대중 매체에서 오려낸 사 진들이 많았다. 내가 한동안 사진을 바라보고 있자, 미망인이 아무 말 없이 어디선가 몇 장의 사진을 더 꺼내 보여 주었다. 마치 손님이 오랜만에 찾아와 기쁘다는 듯이.

나는 사진들을 하나하나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어느 한 사진에서 시선을 멈췄다. 그건 장례식 사진 같았다. 국가에서 거행한 장례식이 아닌, 바로 이곳 뒤 뜰에서 열린 조그만 장례식이었다. 나는 중년의 미망인과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의 아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그 사진에 관심을 갖자 아들은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나 는 이내 눈치를 챘다. 나는 사진에 들어 있는 나머지 한 사람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분이 시신을 회수한 우주비행사인가요?”

“예. 그렇습니다만, 이름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진은 다시 돌려주심이...”

나는 대꾸도 없이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신을 회수했다던 우주비행 사의 얼굴이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내 귀에는 그의 이름을 말해줄 수 없다는 아들의 음성이 울려퍼졌다. 그건 어쨌건 상관없었다. 이름을 밝히건 밝히지 않건, 그건 상관없었다. 나 는 그 사람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맙소사.

나는 미망인이 직접 타준 차를 마시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직접 물어봐 야겠다는 생각에 입이 근질거렸지만, 일단은 참았다. 나는 아들에게 아버님을 어디에 모 셨는지 물었다.

“뒤뜰에 계십니다.” 그가 몸짓으로 안내하며 대답했다.

“뒤뜰에 매장했나요?”

“아뇨. 시신을 화장해서 뒤뜰에 묻었습니다. 그리고 일부는 어머니께서 목걸이네 넣어 항상 가지고 계시죠.”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탐스러운 사과가 열린 사과나무 한 그루가 서 있 었다. 그가 덧붙여 설명했다.

“어머니께서 심으신 겁니다. 유골을 묻은 바로 그 자리에 심으시고, 특별 히 신경 써서 가꾸고 계시죠.”

“이젠 어머님께서도 안심이시겠군요. 아버님이 다시는 못 떠나실 테니까 요.”

이 말에 그는 약간 이마를 찌푸려 보였다.

“글쎄요.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우리 모자를 이해해 주고 있기 는 하지만, 그래도 일각에서는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아직 있 어서.......”

나는 뒤뜰에 놓인 흔들의자에 앉아 사과나무를 쳐다보고 있는 노인을 바 라보았다. 주름 사이로 미소가 엿보였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사과나 무를 바라보고, 더 큰 미소를 지었다. 아들은 내 미소의 의미가 궁금한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과가 참 탐스럽게 열렸네요.”

어느 덧 휴가가 끝나가고 있었다.

*****

고인의 사후 15년이 지난 후에, 고 이재상 우주비행사의 뜻에 따라 다시 한 번 장례식이 열렸다. 이번에는 유가족의 요청으로 특별히 나와 소장님이 초대를 받았다. 식이 진행되던 중에 나는 팔꿈치로 소장님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물었다.

“소장님이 그랬죠?”

“뭘?”

“에이, 가족들한테 전부 들었어요.”

“......”

“식은땀을 흘리시네요.”

“음....어.......흠...... 자네 말이야.”

“네.”

“그거........ 딴 사람한테 말하면 안돼네.” 소장님이 쉬- 하는 동작을 해 보이며 내게 말했다. 나는 속으로 쿡쿡 웃으며, 다소 장황한 추도사를 늘어놓고 있는 고 위관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추도사가 끝난 후, 나는 다시 소장님과 이야기를 기회를 잡았다.

“왜 그러셨어요?”

“부인하고 아들이 간청하는데, 들어주지 않을 도리가 없더라구.”

“그래서 그걸 보시고, 가족들한테 잘 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드셨나 보 죠?”

“그랬지. 사실은 말야...” 소장님이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실은 뭘요?” 나도 고개를 마주 보며 물었다.

“그 분은 내가 평소에 존경하는 분이었고, 나도 사실은 그 분처럼 죽은 다음에 태양계 밖으로 보내 달라고 유언을 남기려고 했는데. 잘못하다가는 나도 도로 잡혀 와서 지구에 묻히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미리 공을 들이는 거지.” 소장님은 이렇게 말하고 시치미를 뚝 떼며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어이가 없어 한 동안 소장님의 옆모습만 쳐다보아야 했다.

“아니, 그게 가족들한테 잘 해주는 이유라구요?”

“쉿. 앞을 봐.”

나는 앞쪽을 쳐다보았다. 관이 마침 떠나려는 참이었다. 내 귓가에는 소 장님이 속삭이는 말이 들려왔다.

“자네에게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사실, 그 부탁을 들어 주면서도 고인 의 뜻을 어기는 일이라 15년 동안 마음이 편하지 않았거든. 오늘에서야 자네 제안 덕분에 15년 묵은 짐을 덜게 생겼군.”

나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관이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다시 돌아오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의 의지는 소원대로 태양계 밖으로 기나긴 여행을 떠 나는 것이다. 또한, 그의 아내가 평생 빌어 왔던 소원대로 그는 영원히 아내 곁에 머물게 될 것이다. 내가 처음에 그 생각을 입 밖에 내자, 관료들은 당황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유가족들이 내 생각에 동의하고 여론도 찬성 쪽으로 기울어지면서 결국 내 의견 대로 장례를 다시 치르기로 했다. 그의 아내는 사과를 따면서 하나하나마다 정성스럽게 입맞춤을 했다. 애틋한 감정이 가슴을 저몄다. 나 역시 우주비행사랍시고 항상 저 높은 곳에서 생활하지만, 발붙일 안식처가 있다는 건 역시나 좋은 일이다.

자, 그렇게 해서 이제 저 관은 한 전설적인 우주비행사의 뜻을 머금은 탐스러운 사과를 잔뜩 싣고 머나먼 우주를 향해 떠나는 것이다. 그리고 혹시 아는가? 언젠가 저 사과들이 알맞은 땅을 만나서 새로이 뿌리를 내리고 하늘로 줄기와 가지들을 뻗어내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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