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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제비 다리

2006.11.24 23:4711.24

최박사님. 요즘에는 그래도 장사가 꽤 잘되네요. 오늘은 사람이 평소보다는 적은 것 같은 데 그래도 이래저래 많아 보입니다. 맥주 맛 좋네. 이러니까 장사가 잘 되지. 육포 좀 줘보세요. 육포 없으면 뭐 노가리라도.

카이로 갔던 일은 차차 말씀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다른 이야기 하나 해 드리겠습니다. 바로 12월 9일날 있었던 박성원 자살 사건 이야기입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같은 곳에도 많이 뜨고 해서 분명히 잘 아실 겁니다. 사진이 꽤 멋진게 그럴듯한 게 하나 뜨는 바람에 온갖 웹사이트에 다 나돌았거든요.

왜 영화에 보면, 꼭 무슨 정신병자 살인마나 과대망상 악당 집에 가보면 벽에다가 무슨 이상한 글귀나 사진 같은거 좌악 붙여 놓는 거 있지 않습니까. 죽일 사람들 목록이나 죽인 사람에 대해 저주하는 문장 같은 거를 보기좋게 이래저래 스크랩하고 콜라주 해서 완전히 작품을 만들어 놓는 거 말입니다. "난 맛간 연쇄살인범이요" 하고 광고하는 것처럼 한 쪽 벽을 완전히 미친 이야기로 뒤덮어 놓는 거 그런 장면 아시죠?

죽은 박성원 처음 발견했을 때 딱 그랬다니까요. 무슨 약을 먹었는지 약병 같은 게 하나 놓여 있고 젊은 남자 하나가 쓰러져 죽어 있었는데, 사방 벽이 수백장의 사람 초상화로 아주 도배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초상화는 어떤 여자 얼굴이었는데 20대 초반이나 1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얼굴이 표정이나 이목구비가 조금씩 다르고 피부 색깔이 조금씩 다른 수백가지 모습으로 그림이 되어 있었습니다. 모두다 살짝 왼쪽을 쳐다보고 있는 얼굴이라는 점은 같았는데, 어느 것 하나 같은 그림 없이 전부 다 조금씩 조금씩 달랐습니다. 컴퓨터로 인쇄된 그림에는 이 사람이 그림마다 점수를 매겨 봤는지 숫자도 한쪽 구석에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박성원의 직업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연구원, 그것도 수학자였습니다. 당장에 경찰에서는 감 잡았습니다. 혼자 틀어박혀서 연구만 죽도록 하다가 변태 스토커가 된 수학자가 있는데 결국 지나치게 미친 나머지 약을 먹고 자살해버린 거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혼자서 죽어라 짝사랑했던, 그림 속의 여자를 잊지 못하고 말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이 박성원이는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왜 한 3, 4년전에 일본 게이오 대학 대학원생이 리만 가설 증명했을 때, 교육부에서 내놓은 "필즈 메달 따기 5개년 계획" 기억 나십니까? 참 나. 말이 나와서 말인데. 무슨 필즈 메달 따기 5개년 계획이 다 뭡니까. 역설적인 표현이 운치가 있다지만, "머리가 좋아지는 TV" 라든가 "달밤의 체조"가 차라리 어울리는 말이지, "필즈 메달 따기 5개년 계획"이라니. 어쨌거나, 그 "필즈 메달 따기 5개년 계획" 때 교육부에서 반짝 풀었던 "미래의 수학자 장학금" 있잖아요. 박성원이가 그거 1회 수상자였습니다. 대학 때 학점도 좋았고, 대학원 다닐 때도 연구 분야에 비하면 논문도 많이 낸 편이었습니다.

당연히 신문 사설이며 TV프로그램이며. "금주의 인기 블로거"가 올리는 글까지 다들 한 마디씩 했습니다. 너무 공부와 연구에만 몰두한 나머지 인간성을 상실한 것이 문제였다. 라느니 왜곡된 애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인문학적 감수성이 부족한 계산적인 인간의 문제라느니. 별별 이야기가 다 돌았습니다. 몇몇 수학과 학생들은 무슨 맞장구라도 되는지 그러면 멋있는 줄 알고, "어쩔 수 없죠. 수학을 하다보면 조금씩 미쳐 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라는 글을 쓸쓸하게 올리기도 했습니다.

이제 기억나십니까? 맞습니다. 그 박성원 자살 사건 맞습니다. 왜, 그때 최박사님 수학 문제집 회사 주식에 투자했다가 주가 폭락날 거 같다고 무진장 겁먹었었잖습니까. 예. 지금 벌써 며칠 지났다고 다들 잊었지만 그 때 "한 때 천재라 불리웠던 젊은 수학자의 짝사랑 자살"이러면서 엄청나게 유행했던 그거 바로 그거 맞습니다. 그때 정말 그 얼굴 그림 수백장 벽에 도배 해 놓은 이 죽은 사람 방 사진 정말 TV랑 인터넷에 많이 나왔습니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주식 걱정은 하실필요 없었습니다. 이번에 알 하킴이라는 아랍 사람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이런 말을 해 줬습니다.

"과목을 여자에 비유한다면, 영어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다. 모두가 중요하게 여기고 서로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정작 얼마나 멋진 여자인지를 가늠하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국어는 똑똑하지만 수수한 여자다. 대부분 그 가치를 알고 있지만, 자신이 쉽게 다가설 수 있다고 오만하게 여기고 있어서, 실은 형편없이 관심거리도 못되고 있다. 수학은 가장 불행한 늙고 돈 많은 여자다. 공부를 마치거나 취직을 하기 전까지는 너도나도 가장 공들여 목숨들여 달려들지만, 자신의 위치를 잡고 나면 모래처럼 털어버리고는 두 번 다시 거들떠 보지 않는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 수학과 지원율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많은 대학들이 "자연과학부"로 수학과를 여러학과 사이에 묶어 버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박성원 자살 사건은 잊혀졌습니다.

저도 잊고 있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TV와 인터넷은 이번에는 갑자기 판매가 중단되어서 구하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값이 치솟은 극초단파 맛사지 기계 이야기로 다시 세상이 시끄러워지면서 그냥 사그라들어 버렸던 겁니다. 극초단파 맛사지기는 올 여름부터, 영화 배우에 가수에, 무슨무슨 박사에, 무슨무슨 의사에, 대권주자라는 경제부총리까지 나와서 자기 건강을 지켜주는 도구라면서 바람을 불어 넣었잖습니까. 처음에는 그냥 맛사지 기계일 뿐이었는데, 이게 어쩌다가 살 빼는 데도 좋고, 고혈압에도 좋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커지면서 싸지도 않은 놈이 엄청나게 팔렸습니다.

그게 갑자기 판매 중단이 되었으니. 무슨 일본에 수출된 것을 역수입해 온다느니 하면서 난리가 났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유산균 음료, 요가, 청국장, 녹차...... 조금 좋은 것이 막과장 되려고 하면 한도 끝도 없는 겁니다.

박성원 자살 사건과 극초단파 맛사지 기계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제부터 그걸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지난 번 "메홉(MEHOB) 기업" 일 때문에 학교에 다시 갔을 때 였습니다. 거기에 가보니까, 왜 옛날에 학교 북측 기숙사 앞에 잔디밭 있던 데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박성원 추모비 라는게 서 있었습니다. 박성원 이 사람, 최박사님이랑 저랑 다 동문이었던 겁니다. 오랫만에 학교에 갔는데 그걸 보니까 관심이 다시 생겼습니다.

거기에는 그 사람 화장한 뼛가루 묻어 놓은 자리까지 있었습니다. 물론 박성원이가 대단한 사람이고, 좀 서글픈 죽음이라고 생각할만하긴했습니다만, 이런 저런 사연으로 불쌍하게 세상 뜬 사람이 어디 우리 학교에만도 한 둘이었습니까. 관을 묻은 것이 아니라, 화장해서 재만 묻은 것이라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납골묘까지 기숙사 앞에 있을 정도 였으니 이거 참 거창해 보였습니다.

짝사랑 변태 사회 부적응자인 수학자가 자살했다고 사방에서 떠들었는데 그 떠든 결과가 이렇게 돌아오다니 참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좀 차분하게 이 사람에 대해서 다시 알아 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극초단파 맛사지 기계와 이 수학자와의 연결고리 하나를 찾아 냈습니다.

지금도 인터넷 가면 어디 있을겁니다. 한 번 검색해 보십시오. 거기 두 번째 링크. 예 그거 보십시오. 이거 무진장 많이 돌던 이 자살한 사람 방 사진 입니다. 한쪽 벽면에 모자이크 처리된 여자 얼굴 그림이 엄청나게 많이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 아래쪽에. 예 그겁니다. 거기에 바로 이 사람이 쓰던 극초단파 맛사지 기계가 놓여 있습니다.

저는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이 사람은 짝사랑에 미쳐 있고, 한 여자에게 빠져 죽도록 그녀의 얼굴만을 그리고 있으면서, 왜 또 갑자기 혈액순환과 어깨결림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겁니까? 약간 이상하지 않습니까? 한국 시리즈 7차전 보러 야구장에 와서 전광판 화면 위쪽부분에 불량화소 몇 개 있는가만 몇 시간동안 세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날뛰는 야생마 등위에 올라탄 카우보이가 바지에 주름갈까봐 걱정하는 듯한 모양새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그것 보다 조금 더 이상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왜 이 사람은, 컴퓨터로 그린 그림을 인쇄해서 벽에 붙여 놓은 겁니까? 그냥 컴퓨터에 저장해두고 뷰어로 보면 될 거 아닙니까. 한 번에 여러장 보기나 슬라이드쇼를 하기에도 컴퓨터가 좋을 겁니다. 그냥 벽지처럼 장식을 하려고? 그렇게 하려면 이렇게 대충 뽑아서 덕지덕지 이상하게 벽에 죽 늘어놓아서 붙여놓지는 않았습니다. 깨끗하게 도배를 했을 겁니다. 이건 마치 누구에게 보여 주려고 이렇게 붙여 놓은 것 같지 않습니까? 마치 "나 미친 놈이다" 하는 것 처럼 누구에게 이 수십장의 얼굴 그림을 일부러 보라고 하는 것 같지 않냐 이 말입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보다보니 저도 좀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은 것이. 이 그림 속의 여자가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 여기에 모자이크 없는 유출본 사진이 있지 않습니까. 어떻습니까. 옛날 영화, "뮌헨행 야간열차"나 "레이디 해밀턴"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저는 알아보는 김에 조금만 더 알아보기로 생각하고 죽은 박성원의 추모비에 대해 학교 웹사이트를 뒤졌습니다. 국내 모 기업의 후원으로 만든 곳이라고하면서, 특별히 납골묘까지 만들었다는 뉴스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박성원의 부모는 매장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학교 안에 추모비를 만들기 위해 화장하는 방향으로 생각을 바꾸었고, 기업의 후원금과 그의 재산을 정리한 것을 합쳐 박성원의 이름으로 장학금을 만들었다는 소식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유명한 사건이긴 하지만, 별로 좋은 인상을 주는 사건은 아니었습니다. 왜 어느 기업의 누가 이 사람을 도와서 추모비와 장학금을 대어 주려 한 것입니까? 결국 저는 죽은 박성원의 부모에게 메일을 보내서 박성원에 대해 몇 가지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기에 이르렀습니다. 박성원의 부모는 그의 자살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며, 그저 똑똑하고 열심히 일하는 자기 아들이 어느날 갑자기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아직도 믿지 못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그들은 박성원이 그렇게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자 극심한 불쌍함과 함께 묘한 수치스러움을 함께 느꼈다는 이야기를 슬픈 마음 속에서도 솔직히 털어 놓았습니다. 아마도 갑자기 관심이 많아졌다가, 갑자기 잊혀진 아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제 질문에도 구체적인 답을 들려 주었습니다.

박성원 자살 사건이 그 그림으로 화제가 되었을 때, 수많은 신문들은 "애인도 친구도 없이 외로움과 싸우다 못견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천재 수학자"로 첫 문장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것이 기자들과 글쓰는 이들이 수많은 헐리우드 영화의 영향으로 머리 속에 판이 박힌 결과로 생긴 순수한 짐작이자 허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박성원은 애인이 있었고, 친구도 많았습니다. 저는 "박성원 자살 사건의 10대 수수께끼"라는 짧은 글을 써서 블로그에 올렸고, 사람들이 몰려들고 몇몇 괴기물, 추리물 애호가들 사이에 이 글이 돌게 되면서 더욱 더 이 일에 깊은 호기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는 본격적으로 박성원이 자살한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직접 돌아다니며 조사하기로 했습니다. 당연히 제가 처음으로 찾으려 했던 것은 바로 박성원의 벽을 장식하고 있던 그 어마어마한 그림들의 주인공인 아름다운 그녀였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그녀가 박성원의 애인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만나보니 아니었습니다. 박성원의 애인도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남정임이나 데비 레이놀즈와 비슷해 보이는 인상이었습니다. 그림 속의 그녀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박성원의 애인은 가을 무렵부터 부쩍 박성원이 초췌해졌으며, 무척 바쁜 듯 해 보였다는 말도 했습니다. 그래서 자살하기 전 2주일동안은 전화 통화만 몇 번 했을 뿐 만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목소리가 별로 좋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일이 그렇게 될 정도로 심각한 일이라고는 걱정을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림 속의 그녀를 찾기 위해 박성원의 자살을 조사했던 경찰과 그녀에 대한 기사를 실었던 신문사, 방송국에 연락을 취해 보았습니다. 제가 유네스코에서 일한 경력과, 정부 과학윤리자문 위원회 활동사항이며, 심지어 별 상관도 없는 국가정보원 협력 경력까지 들먹이며 자료를 요청했습니다만, 모두다 무심하게 이 부서 저 부서로 떠넘기며 거부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그림 속 그녀의 이름 석자만 알면 된다고 부탁했습니다만, 그들은 귀찮음의 해저 저 깊은 곳에서 도무지 기어 나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경찰에서 정보를 찾을 수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지식검색을 이용했고, 그곳에서 저는 의외로 - 혹은 당연하게도 - 그녀의 이름, 출신학교, 주민등록번호까지 얻을 수 있었습니다.

조사를 해서 그녀를 찾아가보니, 그녀는 부도심 쯤에 있는 한 패스트 푸드 점의 아르바이트생이었습니다. 제가 유희왕 장난감을 준다는 포스터로 장식된 "로라 스낵"의 문을 열 때, 그 두근거리는 마음을 어떻게 짧은 말로 전해드리겠습니까.

로라 스낵. 시각은 오후 3시. 새로 나온 메뉴는 아메리칸 스테이크 버거. 제가 그 패스트 푸드 가게에 들어 섰을 때. 계산대 저편에는 바로. 그 수백장의 그림속에서 박성원과 제 꿈속을 장식했던 그녀가 서 있었습니다. 그녀는 저를 보자 말했습니다.

"어서 오세요~ 로라 스낵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녀와의 첫 대화치고는 무척 분위기를 깨는 듯 했지만, 저는,

"새로 나온 아메리칸 스테이크 버거 세트로 주십시오. 햄버거에는 치즈 토핑 하나 끼워 주십시오. 여기서 먹고 갈 겁니다."

라고 그 첫대화를 마무리 지어야 했습니다.

저는 콜라를 마시며 그 "아메리칸 스테이크 버거"라는 것을 뜯어 먹다가, 제가 들고다니는 물통에서 맥주를 마셔 보았습니다. 맥주쪽이 훨씬 이 햄버거와 맛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이 패스트 푸드 가게의 아르바이트생들이 이상하게도 모두다 굉장한 미인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중에 그녀와 이야기를 하게 되면서 저는 까닭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바로 TV방송국 바로 옆에 있는 패스트 푸드 가게였던 것입니다. 이곳에는 연예인을 지망하는 많은 나이 어린 젊은이들이, 혹시나 방송국PD가 일거리 생겼다고 부르면 즉시 달려가기 위해 대기하는 곳이었습니다. 부유한 이들은 근처의 작은 아파트에서 피부관리를 하면서 PD의 전화를 기다리고, 덜 부유한 이들은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느니 한 푼이라도 벌면서 시간을 보내고자 이 패스트 푸드 가게에서 일하면서 PD의 전화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녀는 체육대회 프로그램이나 잡담 쇼의 귀염둥이 역할로 TV에 데뷔를 해서 영화배우가 되는 것을 노리고 있는 겁이 많고 말이 약간 느린 편인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녀와 한참 대화를 하면서 그녀는 박성원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박성원은 그녀를 어디서 보고 끝도 없이 그녀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겠습니까. 저는 혹시, 그녀가 TV에 출연한 모습을 박성원이 TV에서 보고 그녀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그럼, 대표작 같은거 있으십니까?"

라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녀는,

"시간으로 따지면 MBC 베스트극장에서 커피숍 종업원으로 나온게 제일 많이 나왔는데, 그건 목소리하고 여기 (그녀는 자신의 허리를 손으로 짚었습니다.) 아래로만 많이 나왔고요. 얼굴나오는 거는 많이 있는데......"

라고 하면서, 자신의 얼굴이 잠시라도 비친 TV쇼들의 이름을 읊어 주었습니다. 저는 종이가 없어서 "아메리칸 스테이크 버거" 포장지 뒤쪽에 그것들을 받아 적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저는 인터넷 다시 보기를 끝도 없이 뒤지면서 그 모든 프로그램들을 하나 둘 살펴보았습니다. 그녀는 사극에서 포악한 몽골군에게 살해당한 양민들의 시체 중 하나로 등장하기도 했고, 요즘 인기를 끄는 주말 심야 특선 "유령의 공포"라는 TV드라마에서 갑자기 주인공에게 달려드는 귀신 9명 중에 한 명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코메디 프로그램에서 방청석에 앉아 있는 아리따운 여자 관객으로도 몇 번 동원되었는데, 그 중에 한 번은 코메디 프로그램을 구경 온 이영애 옆 자리에 앉아 있어서 꽤 자주 비쳤습니다.

밤은 깊었고, 온갖 종류의 별별 TV프로그램들을 난잡하게 이어가며 보고 있자니 정신은 없었습니다.

바로 그 때, 저는 어디서부터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어, 최박사님. 저쪽 테이블에서 부르는데요? 예. 주문 받고 오십시오. 어휴. 아직도 손님이 끊이지를 않네.

아까, 하던 이야기 계속 하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오늘 맥주맛 특히 맛있네요.

박성원은 자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연합니다. 만약에 그냥 집착적이고 도착적인 변태가 자살한 것이라면 제가 이야기를 이렇게 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박성원은 심하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강박증을 갖고 있다면 그림속의 그녀보다는 자신의 일에 강박증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일에 시달려 피곤해 했고, 그러면서도 그는 불안한 비정규직 직장과 박봉에 시달려 자꾸만 애인과의 결혼을 뒤로 미루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를 불쌍하게 여겼던 그의 고향 어머니는 한달에 얼마씩 조금씩 몇년을 떼어서 모은 돈으로 그에게 좀 귀한 보약을 한 재 지어 주려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때는 극초단파 맛사지 기계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때였습니다. 극초단파 맛사지 기계는 피로회복에도 좋고, 심지어 나빠진 시력을 회복시킨다는 이야기까지 있었습니다. 박성원의 어머니는 박성원이 맨날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일을 하느라 눈을 혹사한다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고, 결국 금전 사정으로는 꽤 무리를 하면서도 아들에게 극초단파 맛사지 기계를 사주었습니다. 아들이 건강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박성원도 벌써 서른이 훌쩍 넘은 자신을 이미 늙은 부모가 그처럼 생각해 준다는 사실에 거의 뭉클한 감동을 느꼈을 겁니다. 박성원은 그래서 어머니가 TV에서 한 중년배우가 나와서 자기가 사용하는 방법을 말한것을 적어 두었다가 전해주는 대로, 하루에 여섯번, 식후 식전에 한 번씩 꼬박꼬박 극초단파 맛사지 기계를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이 불쌍한 수학자는 극초단파 맛사지 기계에 들어 있는 저온불포화 연쇄반응기에서 발암 물질이 나온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극초단파 맛사지 기계는 독약을 온몸에 처바르는 해괴한 괴물이라는 터무니 없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온불포화 연쇄반응기의 발암물질 이야기는 지난 주 "셀 바이올로지" 학술지에 실렸고, 이제는 누구나 찾아 볼 수 있는 내용이 되었습니다만, 그때까지만 해도 아는 사람들이라고는 극초단파 맛사지 기계의 제조사쪽 사람들 뿐이었습니다.

한 섵부른 형사가 이 그림으로 뒤덮힌 방에서 그의 시체를 발견하고,

"이 학교 나온 학생, 또 자살했네."

라는 말을 무심코 중얼거린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면 자살이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는 한 마디도 안 돌았을 겁니다. 아마, 죽은 박성원의 시신을 부검해서 살펴 보기만 했더라면 그의 머리에서 뇌종양 덩어리가 한 통은 나왔을 겁니다.

예, 맞습니다. 학교에 박성원의 추모비를 세워주고 장학금을 주려한 회사가 바로 극초단파 맛사지 기계의 제조사입니다. 이 회사가 막 극초단파 맛사지 기계가 정말로 위험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무렵에 박성원이 죽었고, 회사에서는 부검을 막기 위해 서둘러 박성원의 시체가 화장되도록 유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학교 안에 납골묘를 만들고, 그의 시신과 뇌종양을 태워 없애도록, 장학금 돈으로 박성원의 슬픔에 빠진 부모를 붙잡아 끌어 당긴 것입니다.

박성원은 머리가 박살 날 듯이 아파오고, 하루에도 수백번식 구토를 하며 바닥을 기면서 아파했지만 무서워서 병원에 한 번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 친구 같은 수학자는 2006년 통과된 산업기술보호법에 덜미가 잡혀 있어서 한 번 회사에서 잘리면 영원히 실업자요, 낙오자 신세가 됩니다. 항상 최고의 실력과 우수한 선망의 대상이기만 했던 그로서는 그만큼 두려웠던 것은 없었을 겁니다. 약 먹고 좀 쉬면 낫겠지, 약 먹고 좀 쉬면 낫겠지 하면서 진통제만 몇 박스씩 퍼먹으며 죽을때까지 버텼던 것입니다.

저는 대체 이 이야기를 박성원의 부모에게 들려 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들 잘 되라고 없는 돈을 모아서 약을 사줬고, 아들은 그게 고마워서 꼬박꼬박 먹을 때마다 감동하며 열심히도 약을 챙겨먹었는데, 사실은 그게 독이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아마 세계에는 조금씩 용돈을 모아서 늙은 아버지에게 선물한 정성이 너무 고마워서 이 미친 맛사지 기계를 돌려대며 몸에 암을 만들고 있는 불쌍한 사람들이 여기저기 꽤 있겠지요.

저는 내일, 이 문제가 세상에 알려져 공론화되고, 사용금지 조례가 시행되도록 점검 사업을 발주시키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제일 중요한 이야기를 빠뜨렸습니다. 도대체, 그러면 로라 스낵의 연예인 지망생 그림 수백장은 왜 벽에 붙여 놓았는지 그 이야기를 안했습니다. 저는 그녀가 코메디 프로그램 방청석에 앉아 있는 장면을 세밀히 보았습니다. 그녀가 이영애 옆자리에 앉아 있는 장면은 흐린 화면으로 오른쪽 옆얼굴이 비치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은 정말 흐렸고, 또 오른쪽 얼굴밖에 없었지만, 그림에 나오는 그 얼굴, 그 복장 정확히 그대로 였습니다.

저는 그제서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가장 기초적인 자료가 생각이 났습니다. 박성원의 직업, 하는 일말입니다. 박성원이 하는 일은 고속 푸리에 변환의 군 분석을 이용한 사진 복원 계산 기술의 개발이었습니다. 사진 복원이 박성원이 수학자로서 연구하던 일이었습니다.

박성원은 자신이 가진 함수해석학 아이디어들을 모아서 사진 복원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TV화면에서 캡쳐한 방청석 한 구석에 얼굴을 비친 한 사람의 얼굴을 테스트 삼아 계속 복원해 시험을 해 본 것입니다. 조금씩 기술을 개량해가고 선택사항을 바꿔가면서 한 장, 한 장, 여러가지 방법으로 수십번씩 사진 복원을 해 보면서 비교해 본 결과. 그는 한쪽 벽면에 가득하도록 그녀의 얼굴을 나란히 붙여 놓게 되었던 것입니다.

누가 수학에 관심이나 갖겠습니까. 처마 밑 제비의 가느다란 다리를 누가 신경이나 쓰겠습니까. 저는 유치한 미련이 남아, 아직도 지갑 한 켠에 벌써 몇년전에 이혼한 전처의 사진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고나서 생각나 꺼내어 보니, 그 사랑하던 그 옛 사람의 얼굴이, 사진이 낡고 헤져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 한 잔 마십시다. 그 때, 그렇게 사진을 보면서 저는 참 그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2006년 가양동에서
mirror
댓글 4
  • No Profile
    -_- 07.08.22 23:48 댓글 수정 삭제
    재식님의 산업기술보호법 단편연작을 보고 있자니 정부와 구케에 대한 반감이 끓어오르는군요.
  • No Profile
    밥솥 08.09.10 21:55 댓글 수정 삭제
    읽는 내내 하얀이빨이 꾸준히 더올랐는데 역시나였구뇽 .. 항상 재미있게 보고가다가 리플이 유난히도 적은 이글에 한방 달려줍니다 수고하세요 ^^
  • No Profile
    just1cool 09.03.14 18:08 댓글 수정 삭제
    그미친법때문에.. 여기저기 발목잡히는 소리만 들리는군요..또한번 울컥했습니다..
  • No Profile
    송승훈 09.11.30 20:01 댓글 수정 삭제
    곽재식 작가님 안녕하세요. 최근에 U Robot의 박시은 특급에서 깊은 감명을 받고 나서 여기까지 찾아와서 작가님의 모든 작품을 다 읽고 감사의 답글을 남깁니다.

    여기가 가장 조회수와 댓글이 뜸한 자리인 것 같아서 이곳에 답글을 답니다.

    저도 한때 영원히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SF 소설을 써보고 싶은 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생각만큼 능력과 여건이 따라주지 않더군요. 현재는 자포자기 상태로 생업에만 종사하고 있지만 언제건 죽기전에 그간 생각해왔던 소재 한편은 꼭 글로 남기고 싶습니다.

    저의 개인적 희망에 가장 근접한 필력을 갖춘 분이 곽재식님인것 같아서 몹시 부럽습니다.

    생업 등 종사하시는 일 잘 풀리셔서, 지금껏 해왔듯이 순수와 과학과 사랑의 향기가 나는 작품들을 가끔 한편식 남겨주시면 저같은 애늙은이 독자(비록 적은 숫자라 하더라도)가 오랫동안 고마운 마음으로 기억해드리겠습니다.

    모두 다 읽어보았지만 박시은 특급은 정말 대단한 걸작으로 생각됩니다. 글을 읽고 저의 청년시절이 생각나서 눈물을 흘릴 정도였습니다. (작가님이 저랑 비슷한 경험과 생각을 갖고 인생을 살아오신 분 같았습니다.)

    아무쪼록 님의 짙은 감수성이 오래도록 유지되어 우리나라 과학소설분야의 역사에 길이 남는 작가가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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