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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올빼미 눈

2006.11.24 23:4611.24

1.

나는 눈을 떴다.

오늘 오전에 김이사님이 검찰에서 증언을 하게 되어 있었고, 나는 그 발표 자료를 급히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연구소에서 밤샘 작업을 하고 냉장고 옆에 있는 소파에서 새벽에 잠이 들었다가 이제야 일어난 것이다. 머리가 살짝 아픈 듯 했고, 목에 무엇인가가 걸려 있는 듯 찌뿌둥한 느낌이 들었다. 문밖에서는 사무실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시계를 보았다. 일곱시 삼십분. 사장 바뀌고 나서 출근 시간이 여덟시가 되었으니, 일찌감치 출근하는 사람들은 미리 출근한 시각인 듯 했다.

"정말요? 진짜 너무했다."

저 높은 목소리는 아마 회계실의 지은씨일까.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흐느적 거리는 걸음걸이로 문을 향해 걸어 갔다.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 일찍 출근한 직원 몇몇이 서로 잡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나는 머리가 헝클어지고 눈이 충혈되어 있어 놀림거리가 될만 하리라 생각했다. 그들은 문을 열고 나온 나를 돌아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보았다.

그런데, 그들의 얼굴이 귀신이나 저주 받은 악마와 같아 보였다. 얼굴의 살같이 갈라지고 이상하게 눈꼬리가 올라간 눈에, 눈동자는 아무렇게나 좌우로 빙글빙글 따로 돌고 있었다. 괴퍅한 웃음을 짓는 입모양 아래에 썩어가는 듯한 시커먼 이빨이 드러나 보였다. 얼굴빛은 허옇게 곰팡이가 뒤덮힌 듯한 잿빛이었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며 어지럽기까지 했다. 머리털이 쭈뼛하고 서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비명도 뭣도 아닌 이상한 소리를 내며 자빠지듯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다시 문을 닫고 소파 앞에 주저 앉았다. 방금 내가 본 것은 뭔가. 왜 저 직원의 얼굴이 그 따위 형상으로 보였던 것인가. 가면을 쓰고 있다거나 장난을 치는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았다. 정말로 보고 있으면 정신이 이상해질만큼 무서운 형상이었다. 나는 한동안 그 무서움에 그저 허덕이며 앉아서 가쁘게 숨을 쉬고 있었다.

나는 헐떡이는 내 숨소리를 들으며, 다시 가만히 문 앞에 다가섰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것은 용기라고 볼 수는 없었다. 나는 죽도록 겁에 질려 있었다. 당장이라도 내 다리를 잡아 당겨서 지옥으로 끌고 들어갈 것 같은 존재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대체 갑자기 내가 뭘 보게 된 것인지 궁금했다. 호기심이 공포감 사이에 베어든 것이었다. 조금씩 나는 문을 열고, 문틈사이로, 다시 한 번 아침 일찍 출근한 직원들을 바라 보았다. 두 명의 직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한 명, 다른 한 명이 지나가며 인사를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평범한 대화였다. 그리고 언뜻 스치며 보이는 얼굴.

검은 눈동자가 창백한 파란 점으로 보이고 있었다. 흉칙한 얼굴. 기괴한 웃음. 괴물의 모습이었다. 모두가. 모두가 괴물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 어제 밤샘 한다 더니 정말 밤샘한거야?"

그 중 하나가 나를 알아 보았다. 목소리. 지난 번 과제를 같이 했던 조 박사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모습은 금방이라도 내 심장을 파먹을것 같은 야수였다. 회색 피부사이에 찡그린 표정이 마귀처럼 웃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것이 내게로 다가오는데, 너무나 평범하고 일상적인 목소리로,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받침 한 끝 차이지만, 밤샘 너무 많이하면 위험하지. 밥 샙은 강하지만 밤샘은 약한 것이지."

따위의 초하급 언어유희를 농담이랍시고 읊조리고 있다. 조 박사님이 분명하다. 하지만, 왜 이런 모습이란 말인가.

나는 그것이 다가 오자, 짧게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 쳤다.

"뭐야? 정말 왜그래?"

나는 뒷걸음질 처서 다시 냉장고가 있는 방에 숨으려고 했다. 하지만 뒷걸음질을 잘못쳐서 나는 벽에 부딪혔다. 걸음이 꼬이고 다리가 떨려서 나는 서있기 힘들었다. 도저히 얼굴을 처다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나는 고개를 숙여 바닥을 바라 보았다. 나는 떨면서 억지로 말했다.

"좀, 이상하네요. 약간 이상한게 보이고 그래요."
"밤새도록 화면 보고 자료 보면서 너무 눈 혹사했나보네. 잠깐이라도 눈 좀 붙이지 그러나."

뒷모습이 매력적이기로 유명한 은영씨가 나타나자 조 박사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 뭐라고 말을 붙여 보려 했다. 조 박사가 멀어지자 나는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겨우 일어서서 자리를 잡고 정신을 차리려는데, 은영씨가 고개를 돌려 내쪽을 보았다. 그녀 역시 악마, 괴물의 모습이었다. 평소라면 도저히 내심을 짐작할 수 없는 기계로 찍어낸 사각형 초콜렛 같은 웃음으로 내 정신을 흐려놓을 웃음을 보여줄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이 아침에는 아니었다. 그 무서운 형체의 웃음은 이러한 내 공포감을 비웃고, 내 영혼에 저주를 내리는 것 같았다. 잠깐 내쪽으로 덥쳐오려는 듯한 느낌마저 느껴지자,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어 허겁지겁 뛰어 나왔다.

뛰어나오는 길에 앞뒤로 지나가는 사람들도 모두 하나 같이 악령과 마수와 같은 모습이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계속 달려서 햇빛이 쏟아지고 있는 연구소 건물 바깥, 거리로 뛰쳐 나왔다.

연구소 밖에 나와 길가에 서자, 참으로 어림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모두의 얼굴이 괴물 모습이었다. 연구소로 출근하는  사람들과 밤새고 아침에 퇴근하는 사람들, 밤새고 아침에 퇴근하려 하지만 일이 끝이 없기에 잠깐 바람쐬고 다시 출근하는 사람들, 밤새고 아침에 퇴근하면 되지만 잠결에 착각해서 아침이니까 아무생각 없이 출근하는 사람들, 밤을 새지도 않았는데 잠결에 밤을 샜다고 생각하고 출근하는 길에 퇴근하는 사람들.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괴물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내리는 많은 사람들과 그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에게 지하철 무가지를 나눠주는 사람들, 지하철 무가지를 나눠주는 사람들에게 지하철 무가지를 나눠주는 지하철 무가지 신문사 직원들, 이 직원들을 태우고 온 운전 기사들. 이 운전 기사들 중에 버스 기사와 싸우는 사람들. 싸우는 두 사람을 말리려 오는 교통 경찰들. 교통 경찰을 쳐다보는 운전자들. 운전자들 옆에 앉은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 그 차안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 모두가. 전부다. 다, 나를 겁주고 비명지르게 만드는 악마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들이 세상에서 걸어다니고 나에게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만 당장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나는 연구소 출입구의 기둥 옆에 등을 기대고 주저 앉았다. 그리고 이 미친 지옥도를 가리고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나를 감쌌다.

아직도 놀란 가슴이 계속 뛰고 있었다. 왜일까. 뭐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일까. 생각해 보자. 생각해 보자. 뭐가 어떻게 된 것인가. 왜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악마가 되어 버린 것인가. 다들 멀쩡한 것 같고, 일상적으로 도시는 돌아가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쳐다보기가 힘들만큼 무서운 얼굴이었다. 나는 기둥에 등을 지고 뒤로 돌아 섰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바닥을 보았다. 이렇게 하고 있으면 아무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잠깐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 볼 시간이 있을 것이다.

처음으로 내가 생각한 것은, 가장 있을 법한 평범한 일을 이유로 삼는 것이었다. 바로 이게 꿈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어린 시절에 비슷한 꿈을 꾼 것 같기도 하다. 한 때 무척 유행했던 엘레베이터에서 "넌 내가 니 엄마로 보이니" 이야기가 바로 지금 내가 처한 상황과 비슷한 것 아닌가. 아닌가 그 이야기와는 다른가? 하여튼 그런 이야기에 무서움의 충격을 느꼈다면 충분히 꿀만한 악몽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깬다. 깬다. 깨어난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꿈 속에서는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판단하고자하면 왠만해서는 꿈임을 알아챌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꿈만 같은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은 현실이 꿈이 아닌 현실임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살갖을 스치는 바람, 자신의 몸 무게, 사소한 소음들.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꿈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세세한 현실감이 온통 나 자신을 감싸고 있다. 월드 베이스 볼 클래식 때 콜드게임 안내 자막이 뜨는 일을 목도하면서도 꿈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꿈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지금 닥친 일이 너무도 황당무계했다. 정말 꿈이였으면 좋겠다. 꿈이라서 그냥 다 사라지는 일이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미련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고전적이고도 전통적인 방법으로 다시 한 번 부질없는 검증을 했다. 팔을 꼬집었다. 아프다. 얼굴을 꼬집었다. 아프다. 꿈이 아니었다. 분명한 현실이었다.

"정말, 꿈도 아니란 말이지."

나는 약간 짜증이 나는 느낌마저 들어서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내 앞으로 지나가는 한 무리의 우리 연구소 연구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수십명의 바쁜 걸음의 사람들. 모두가 악마의 얼굴이었다. 수십개의 반들거리는 그 악귀의 눈동자를 보자, 나는 기절해 버릴것 같았다. 비명소리가 터져나오려는데 간시히 입을 틀어 막았다. 너무 무서웠다.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자. 정신을. 숨이 가빠왔다. 정신을 차리자. 정신을 차리자. 잠시 나는 숨을 고르며 계속 마음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환각. 환각일 수 있다. 나는 지난 밤을 거의 꼬박 샜다. 수면 부족은 꿈과 현실을 겹치게 해서 눈 앞에 이상한 환각이 보이게 한다. 특히나 피곤하다면, 그리고 잠이 몰아친다면 이 환각은 더 강해지기 마련이다. 수백킬로미터를 밤새 걷거나 뛰는 운동 선수, 탐험가들이나 너무 오랫동안 경계근무를 선 경비원 같은 사람들의 눈에는 환각이 보인다고 한다. 그렇다면, 잠 부족 때문에 오는 환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환각은 일시적인 것이고 지속적인 것도 아니다. 그런데, 나는 어떤가. 지금까지 본 수백, 수천명의 사람들의 얼굴이 무서운 괴물 얼굴이었다. 그 모든 얼굴이 내 지금껏 본 어떤 모습 못지 않게 무서워 보였다. 수면 부족이 원인이라는데, 나는 지금 조금도 잠이 오지 않았다. 소파에서 엎드려 잔 것이긴 하지만, 나는 그래도 새벽에 조금이나마 잤고, 그나마 지금은 겁에 질려 그 졸음이 마지막 한 싸라기까지 다 날아난 상태였다.

아니다. 그럼 뭔가?

수면 부족만이 환각의 원인은 아니다.

다른 이유도 많다.

특별히 귀여워 보이는 캐릭터 머리핀을 꽂는 취향이 있는 은숙씨가 마귀할멈처럼 보였을 정도니 뭔가 더 위험하고, 더 지독한 것일지 모른다. 메탄 페타민이나 암페타민 같은 약물은 어떤가. "PD수첩"류의 사회 고발 프로그램에서 필로폰 중독자들이 필로폰 약효가 다했을 때 느끼는 공포감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다. 뭔가 무시무시한 것이 죽이러 다가오는 듯한 오싹한 느낌과 끊임없이 귀에 들리는 환청. 생생하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떠오르는 무서운 환상.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과 비슷하지 않은가.

"아이스"라고 대마초나 아편처럼 피울 수 있는 개량판 메스 암페타민 제품이 돌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은적이 있다. 그렇다면 어쩌다가 내가 그런 성분이 섞여 있는 연구소 구석에서 새어 나온 연기를 잘못 들여마신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썩을 녀석들. 그만큼 실험실 안전 관리좀 하라 그랬더니. 바로 2층에 생리동력공학 실험실이 있으니까 뭐라도 흘러들고 새어 나올 수 있을 거다. 펜메트라진이나 펜디메트라진은 어떻고. 살빼는 약으로 싸구려 약장사들이 인터넷에서 팔아대고 있지만, 사실은 정신나간 환각효과를 주는 거지 같은 약물 아닌가. 회식 때 먹은 낙지 볶음 속에 들어가는 화학 조미료가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 폭탄주를 만들 때 위스키 잔 벽면에서 흘러나온 환경호르몬과 그 일당들 중에 비슷한 뭔가가 섞여 있었을지 누가 아는 노릇인가.

나는 다시 다리에 힘을 주고 서서 조금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서서 가만히 서 있었다.

바람이 차갑다.

조금 추운 날씨였다. 하지만 못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앉았다 일어섰다 해보았다. 밤샘 후라 피곤한 감은 있었지만, 워낙에 놀라고 흥분한 까닭에 그렇게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환각 약물은 아니었다. 환각제였다면 덜덜 떨리는 오한이 있다거나, 큰 무력감이 느껴지거나할 것이다. 더군다나 흡입식 환각제라면 분명히 무슨 조짐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효과가 급작스럽고 강할 이유도 없다. 정맥에 주사기로 찔러넣어야 이 정도 효과가 나올 거다. 그것도 한 십 몇분 간격으로 너댓방은 찔러야 한다. 약물은 아닌듯 하다.

"저기요. 길좀 물어 보려는데요."

대학원생인 듯한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땅을 보고 고개를 푹 숙인채, 생각에 잠긴 내 어깨를 건드렸다. 나는 무심코 고개를 들어 그 자를 보았다.

흉칙하게 일그러져 지독한 웃음을 킬킬거리는 얼굴로 나를 노려 보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죽어버릴 것 같았다.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정신 없이 달아났다.

한참을 뛰어서 연구소 담장 뒤편에 인적이 드문 곳즈음에 와서야 나는 간신히 무서운 기분이 조금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왜 이런거야... 뭐냐고..."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짜증을 부렸다. 짜증나고 화가나서 눈물이 찔끔 흘렀다. 누구나. 어떤 사람이든지. 그냥 보기만 하는 건데, 나는 무서워 죽을 지경이었다. 그 섬찟한 악마의 모습은 정말 끔찍했다. 흙바닥에 나는 주저 앉아 혼자서 괴로워 했다.

풀에서 튀는 조그만 진딧물 같은 벌레를 보고 나는 또다른 생각이 미쳤다. 기생충은 어떤가. 전 세계 인구의 십분의 일 정도가 이런저런 기생충을 몸속에 담고 있다. 유구충 종류는 대뇌나 중뇌쪽으로 종종 기어 들어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 기생충이 뇌를 헤집고 다니면, 사람이 웃다가 울다가 하거나, 환상을 보거나, 갑자기 정신 없이 달리고 싶다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이 엘비스 프레슬리라고 믿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나도 그런 경우를 겪은 것은 아닐까.

하지만 빌어먹을 놈의 이 연구소에서는 두 달에 한 번씩 공짜 기생충약을 주지 않는가. 직원복지 어쩌고 호들갑 생색을 내는 회장 여섯째 아들이 한 일이었다. 자기가 주식 갖고 있는 제약 회사 주가를 올리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우리 회사 돈으로 제약 회사의 약을 왕창왕창 비싼 값에 사들인 것이다. 그리고 복지 명목으로 직원들에게 나눠 주는 것이다. 놈은 주가 차익으로 지난해에 골프장 두 개를 사들였고, 나는 기생충약을 네 번 먹었다. 기생충은 아닐 것이다.

초조한 마음만 더 커져 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저렸다. 나는 좌우로 걸어다녔다.

뇌종양이나 뇌줄중 같은 뇌손상 질병은 어떤가. 뇌종양 환자가 머리속에 암이 박혀나가기 시작하면 별별 해괴한 체험을 다 겪는다. 저승을 구경한다거나, 미래를 예언한다거나, 돌아가신 어머니의 영혼과 감격적인 해후를 하며 눈물을 흘리며 대성통곡을 하게 된다거나. 다양한 환상과 악몽의 범벅속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죽어가는 사람이 겪는 기적이라든가 사후세계를 구경한다는 따위는 이런 뇌손상 때문에 본 환영 때문인 경우가 많다. 나도 그럴지 모른다. 암 말기. 불치병. 시한부 인생. 괴로운 운명이었지만, 정신 없이 영문모르는 공포감만 미치도록 느끼는 지금으로서는, 차라리 그런 쪽으로라도 뭔가 깨끗하게 설명이 되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러나 다행이라면 다행히도. 얼어죽을 다행히도. 그것도 아닌 듯 했다. 뇌손상이라면 이런 환상을 보기 전에 그보다 훨씬 더 쉽게 느낄 수 있는 다른 증상이 먼저 있어야 했다. 메스꺼움, 구토라든가 두통이라든가. 하다못해 눈꺼풀 경련이라든가 일시적인 마비 증세 같은 것이라도 좀 나타났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초조하게 수십만번씩 정신없이 잘도 왔다갔다하고 있다. 몸이 건강한 것이다. 왔다 갔다. 왔다 갔다. 건강한 몸. 아니다. 아니다.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옛날에 SF영화에서 본 것 처럼, 세상 사람들이 사실은 대부분 화성에서 온 외계인이었던 것이 이유라면. 그렇다면 말이 될 수도 있다. "화성인 지구 정복 They Live" 존 카펜터 감독, 키스 데이비드, 유니버설 영화사 1988년. 그 악마의 모습은 그들의 본 모습인데, 그들이 이상한 마법 같은 기술로 사람들의 눈을 지금껏 속여 온 것이었다. 영화속에서는 저항 조직이 나눠주는 선글라스를 쓰면 외계인들의 본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아마 우연히 그들이 뿌린 환각 가스 내지는 그들의 착시 기술이 잠깐 오작동을 일으켰고, 나에게는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나는 그래서 세상에서 인간 행세를 하며 살고 있는 외계인의 본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꼭 외계인이 아닐 수도 있었다. 정말 산 사람 행세를 하는 좀비 일 수도 있다. 크툴루 신화에 나오는 고대의 괴물일 수도 있다. 어떤가. 이게 세상의 본 모습이다. 내가 오늘 이상해진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내가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지금 보는게 진짜 모습인 것이다.

그런 것 같다. 죽도록 책을 뒤지고 쓰러질 때까지 머리를 굴려서 논문을 쓰고, 성과를 발표했는데, 결국 내 인사 고과를 맡은 인사과 주과장은 윈도 새 버전 잘 안깔릴 때 도와준 일을 근거로 나를 능력있는 직원이라고 평가하지 않는가. 주과장 자식 외계인임에 틀림 없다.

구조공학연구실의 성박사님이 제출한 정부 대전 신청사 건설 공법을 평가한 사람은 2년차 사무관 녀석이었다. 자기 결혼식 때 찾아와서 축의금좀 두둑히 달라고 농담아닌 농담을 하던 그 놈은 아메리칸 컨스트럭터 회사의 보고서가 컬러로 인쇄되어 있다는 이유로 성박사님 공법 대신 그 회사 것을 채택하지 않았던가. 밤에는 폭탄주 마셔야지, 낮에는 이 국장이랑 김 청장 사이에서 줄다리기 계략짜야지. 언제 수평축 집합이산공법과 수직축 집합이산공법의 차이가 뭔지 이해할 시간이 있었겠는가. 이런 놈이 좀비나 괴물이라면, 무척이나 해괴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조금은 이해하기 쉬워진다.

그렇지만 이 생각도 말이 되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내가 본 것은 세상 사람들 모두가 다 악마의 얼굴을 한 모습이었다. 오퍼센트, 십퍼센트 정도가 아니라 전부가 다 괴물들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나를 속일 이유가 있었을까. 조금밖에 숫자가 되지 않는다면, 인간 사회의 구조를 그대로 이용해 먹기 위해서 자신의 정체를 위장하고 우리 사이에 끼어들어야 할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가 괴물이었다. 전부가 다 괴물들이었다. 이미 인류 전체를 장악한 듯한 상황에서 오직 나를 위해서 그런 조작을 지금껏 수십년째 해 온 이유가 있을까. 인류가 멸망했는데, 인류의 삶과 생활을 관찰하기 위해서 나를 상대로 거대한 실험을 한 것일까. 그렇다면 어느날 갑자기 이렇게 나에게 모든 것을 드러낼 이유도 없지 않은가.

이런 것은 어떤가. 사실은 괴물들이 원래 인간의 모습이고, 내가 괴물인 것이다. 세상 사람 전부가 괴물이라기보다는 나 혼자 괴물이라는 것이 훨씬 더 일어나기 쉬운 일이다. 나는 괴물로서의 시각, 미적 기준, 익숙함과 편암함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평범한 인간의 모습인 세상사람들의 모습이 무섭고 해괴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아마 괴물을 보면 나는 안 무섭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어여쁜 여자 괴물을 보고 반할 수도 있겠지. 원숭이가 사람을 보고 느낄 때 느끼는 감정이나, 더블 에스 오공일에 심취되어 있다가 비비킹의 블루스를 들을 때 느끼는 이상한 느낌 말이다. 옛날에 보물섬, 만화왕국 이런 만화 잡지에서 여름 공포 특집으로 만화가들이 자주 그리던 이야기이기도 하고, 단막극 쓰는 TV 각본가들이 게으르게 써먹는 수법이기도 하다. 인터넷에 "기막힌 반전이 살아 있는 이야기"를 써 올리는 초등학생들이 자주 만드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프란츠 카프카는 또 어떤가.

그것도 아니다. 나에게 길을 묻던 대학원생. 조박사님. 지은씨. 은영씨. 모두 나를 평상시와 다름 없게 정상적으로 대했다. 내가 괴물의 모습이라면, 그들의 반응도 뭔가는 달라져야 할 것이다. 아니었다. 나는 정상적으로 비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세상이 이상한 것이다. 다른 놈들이 괴물이라면 괴물이다.

아예 내가 지금 그냥 가상 현실 같은 것을 체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 전체가 다만 기계가 제공하는 입체 영상과 입체 음향일 뿐인 것이다. 데카르트. 베이컨. 기계 오작동으로 지금 나는 이상한 현상을 겪고 있는 것이다. 흄은 어떤가. 사실은 나도 사람이 아니라. 기계일 뿐인 것이다. 컴퓨터 인공지능 프로그램일 뿐이다.

이것은 어떤가. 사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은 거대한 컴퓨터 게임이었다. 그리고 나는 컴퓨터 게임 속의 인공지능 캐릭터였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해킹 프로그램이나 새 버전의 패치파일로 업그레이드 시킨 것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달라진 것이다. 어떤가. 건담 크래프트라고 스타크래프트 유닛 대신 건담이 나오는 패치도 있었다. 갑자기 그런 패치를 당했을 때, 그 속에서 기어다니는 조그마한 총질하는 유닛들은 얼마나 당황하고 놀랐을까. 옛부터 벽의 그림을 바꾸는 울펜스타인3D 패치는 유명했다. 슬램덩크 등장인물들로 선수들이 바뀌어 버리는 NBA농구게임은 어떻고.

조금 더 현실 적인 것을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리얼리티 쇼의 등장인물로서 사람들의 구경거리인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냥 평범하게 잘 살고 있었지만, 최근 이 쇼는 시청률 하락으로 고전하게 되었다. 자극적인 볼거리를 위해서 내가 당황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로 제작진은 결정했다. 귀신이 등장하는 몰래카메라나, 여자 배우들 불러서 귀신의 집에 기어들어가는 쇼는 항상 최소한의 시청률은 나오지 않는가. 그래서 갑자기 모든 등장인물들의 분장을 교체한 것이다. 아니면 내 머리통 속에 잠자는 틈을 타서 시각과 인지 능력을 조작하는 컴퓨터 칩 같은 것을 박아 놓았을 수도 있다.

그때 갑자기. 전화. 전화에서 소리가 들렸다.

문자 메세지였다.

첫번째. 지은씨의 메세지였다. "6분 지날때까지 출근기록기에 지문 안찍으면 지각이 아니라 결근으로 처리돼요. 서두릅시다!"

두번째. 은영씨의 메세지였다. "뭐해요? 빨랑 손가락 찍어요~ 위험하다. 5분전"

결근처리되면 안된다. 지문만 찍고 다시 생각해보자. 나는 허겁지겁 다시 연구소로 들어갔다. 사람들을 처다보지 않기 위해 나는 땅만 보고 걸었다. 황급히 출근기록기에 지문을 찍었다.

지문을 찍으며 살금살금 나는 고개를 돌렸다. 모두가 칸막이로 구분된 자리에 앉아 컴퓨터 모니터에 얼굴을 박고 있다. 다들 뭘하는 걸까. 미국에서는 저 칸막이를 큐비클이라고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파티션이라고 한다. 파티션. 옛날에는 컴퓨터 하드디스크에나 쓰는 말이었는데. 기획실 사람들은 화장실에 숨어서 잠자고 오기라도 한다는데. 도대체 우리 연구실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 모니터를 죽어라 보고 있으면서 뭘하는 걸까.

모두의 뒷모습만 보인다. 다행히 내가 없어도 지금은 아무 문제도 없고 아무도 상관도 하지 않는 것 같다. 11시 30분. 검찰 증언이 있는 그 때, 혹시 파워포인트 슬라이드가 잘 안나와서 김 이사님이 검찰 사람들 앞에서 허둥대기라도 하면, 그 때 나는 도와주기 위해 나는 그 자리에 나가 있어야 한다. 그전까지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잠시 눈치를 보고 있던 나는, 그 중 누가 하나 돌아보며 그 저주받은 얼굴을 비칠까 싶어 다시 얼굴을 바닥으로 숙였다.

앨리스 증후군. 신경학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정신질환이나 기타 다른 심리적인 요소에 의해 생기는 현상으로 사람의 모습이 목이 길어 보인다거나 거인으로 보이게 되는 이상한 착시, 환시 현상이다. 앨리스 증후군을 유발하는 정신병 종류에 걸린 것이 아닐까. 텔레비전과 영화 속에는 미친 과학자들이 많이 나오고, 수학 잘하는 사람은 인정머리 없는 이상한 놈들로 비춰지지 않는가. 지구인들의 칠할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쓸데 없는 수학 같은 거 도대체 왜 배웠나 몰라. 수학 정말 싫어"를 서로 유대를 돈독히 다지는 주제로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곤 한다. 축구나 야구를 증오한다는 말을 정치인들이나 신문기자들이 그렇게 대놓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나는 그렇다면 나는. 나는.

적지않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걸 보니, 분명히 나도 미쳤을지 모른다. 아무렴. 지금 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괴물로 보이지 않는가. 나는 미쳤을 것이다. 완전히 맛이 간 것이다.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으면서도 간단한 추측이었다. 정신병원에 가보자. 지금 아무도 관심 없을 때. 오전에 잠깐 빨리 후딱 가보면 된다. 아직 시간은 있다. 검찰 증언은 오전 11시 30분. 충분히 그전에 갔다 올 수 있다.

그래도 의사지 않는가. 그 사람들 등뒤에는 정부 보조금으로 모셔놓은 한 권에 4백만원짜리 사전이 있다. 뭔가 병명을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나같은 사람이 찾아가면, 소복히 쌓여있는 대사전의 먼지를 훅훅불어 턴 다음 적당한 병명을 찾아 한 페이지 두 페이지 왔다갔다하며 뒤질 것이다. 하다 못해, 마리화나 비슷한 것이라도 처방해 주면서 조금 무서움을 덜어 줄 것만은 틀림없다.

나는 병원에 가기로 작정하고 다시 연구소를 빠져 나왔다. 그래 인정하자. 나는 미친 것이다.

그런데 잠깐. 미친 사람치고 자기가 미쳤다고 하는 사람 본 적 있나. 보통 자기가 미쳤다고 하는 사람들은 남들보다 특별하고 돋보이고자 하는 욕심때문에 자기를 특이하게 내세우고자 그런 소리를 하는 정상인들일 뿐이다. 군대 생활 무용담은 자기가 가장 현란하고, 양자역학II 까지 배운 자연과학대 학생들은 어려운 문제에 휘말려 이상한 삶을 산다고 과장해 떠들면서 멋이랍시고 자랑하려 들지 않는가. 록큰롤 가수에서부터, 정치계에 발을 들여 놓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시민운동가까지. 무엇무엇에 미쳤다는 사람치고 정말 미친 사람은 없다. 미쳤다고 하는 사람들은 좀 덜떨어진 안 미친 정상인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내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하면서 병원으로 가고 있는 나는 안 미친 것이 아닐까. 미친 사람이 미쳤다고 안한다면, 나는 미쳤다고 하니까 안 미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안 미쳤다. 그래 안 미쳤다. 잠깐만. 그러면 난 안 미쳤다고 하고 있다. 미친 사람들이 안 미쳤다고 한다면, 나는 안 미쳤다고 하고 있으니 미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러셀. 거짓말 쟁이 크레타 사람들. 면도하는 이발사들. 나는 최대한 주변 사람들을 안 보기 위해 아무 생각이나 닥치는데로 하면서 길가로 나왔다. 나는 버스 타는 곳까지 그렇게 종종 걸음으로 걸어갔다. 사람들과 부딪히기도 하고. 샌드위치 파는 학생을 덥쳐 넘어질 뻔도 하면서.

나는 버스 정류장에서 고개를 숙여 바닥을 보며 기다리고 서 있었다. 두번 다시 그 악몽 같은 얼굴들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흙먼지가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보도 블럭들. 그러고 보면 나름대로 아랍풍의 기하학적인 멋까지 갖춘 이 돌덩이들은, 연말이 되면 이유 없이 다 갈아 엎히는 가히 시지포스의 신화스러운 운명을 타고난 존재라 할만하다. 사람 얼굴을 보면 안된다. 너무 무섭다. 후다닥 갔다오자. 11시 30분까지만 돌아오면 된다. 버스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버스가 섰다.

아. 잘못 생각했다. 실수다.

버스가 오면, 몇 번 버스가 왔는지. 문이 어디고 어떻게 올라갈지. 고개를 들어 쳐다봐야 한다. 교통카드도 잘 조준해서 찍어야 한다. 자리를 잡고 서기 위해서는 그 안에 가득차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부딪기고 위치를 잡아야 한다. 봐야 한다. 사람들을. 그 무서운 괴물 얼굴을 봐야 한다.

지하철을 탈걸. 지하철은 안보고도 별로 안 어려울 것 같은데. 실수다. 약속시간을 지켜 준다는 지하철을 탔어야 했다. 그냥 이 버스 보내고 지하철 탈까. 그런데 지하철은 너무 돌아간다. 오래 걸릴 것 같은데. 네번째로 개편한 버스 전용차로 때문에 개판이 난 도로도 많다. 하지만 우리 연구소는 굉장히 이득을 본 경우였다. 시장이 우리 회사에 꽤 많은 후원금을 받고 있었다. 적어도 여기 서 있는 미친 과학자 하나가 정신 병원에 가서, "당신 얼굴이 프랑켄슈타인의 시체가 되살아나 늑대인간으로 변신하면서 얼굴에 미라 붕대 감은 것 같소"라고 말하기에는 버스가 월등히 신속하고 편리하다.

무슨 지하철 대신에 버스 따는 문제 따위로 이렇게 부들부들 떨고 있나. 나는 잡다하게 이어지는 온갖 고민과 당황스러움. 걱정과 초조함. 어이 없는 좌절감. 슬픔 같은 것이 갑자기 한 데 치밀었다. 그래도 열심히 일하면서 의미 없는 직업이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해보려고 노력하면서 여기까지 살아오지 않았는가. 그런데 갑자기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일이란 말인가. 될대로 되라지. 무서워 봤자지 죽기야 하겠나. 나는 화를 내듯 고개를 쳐들어 버스 번호를 확인했다.

버스 안에 탄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철창속에 갖힌 나찰들이 아수라, 아비, 규환의 소리를 내는 것처럼 나에게 덥쳐 왔다. 욕도 안나올 정도로 무서웠다. 망해먹을. 그래도 욕이 나오는 것은, 그랬는데도, 마침 또 버스는 내가 타려는 버스가 아니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헛고생. 헛고통이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 어떤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 화장기 없는 입술. 화장기 있는 뺨. 하늘색 상의. 하늘처럼 맑은 눈. 오랫동안 버스에 서 있었는지, 손잡이를 잡고 있는 팔을 다른 팔로 주무르는 모습. 그녀는 어디에서도 손색없이 누구나 20대 후반, 30대 초반쯤의 동아시아계 인간의 모습이라고 할 모습이었다. 그녀만은, 그녀만은. 사람으로. 나름대로 아름답고, 사람에 따라서는 매력을 느낄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볼품없게 보일 수도 있으며, 이유 없이 싫어 보일 수도 있는. 그런, 인간다운 모습으로 보였던 것이다.

나는 허둥지둥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그 버스에 올라탔다. 그녀를 놓쳐서는 안되었다. 그녀만이 내가 똑바로 쳐다 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요, 괴물들로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인간으로 느껴지는 동족이었다.


2.

나는 버스에서 자리를 잡고 그녀를 보았다. 집중해야 했다. 그래야 그녀만 눈에 보이고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녀는 평범한 한국인 여자로 보이지만, 주변에 앉아 있고 서 있는 것들은 추악하고 징그러운 괴물들이었다. 최대한 뚫어지게 그녀를 처다보면서 계속 마음 속으로 뭐라도 중얼거리면서 되뇌어야 했다. 그래야 주변의 다른 인간들에게 신경쓰지 않고 그녀만 보게 된다.

그녀는 키가 약간 큰 편이었지만, 체구가 작아서 그렇게 커 보이지는 않았다. 옷소매 사이로 드러나는 그녀의 손과 팔. 팔목이 무척 가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가 뭐하는 어떤 사람일지를 짐작하기 위해 찬찬히 옷차림과 모습을 살폈다. 요란한 옷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화장 안하고 출근하면 잔소리 하는 선배가 있는 대기업 직원 같은 모서리가 날카로운 모습도 아니었다. 엉덩이 선 위로 살짝 올라가는 외투는 흰색과 검은색의 가는 격자 무늬가 있는 것이었는데, 두께에 비해 따뜻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 뿐 딱히 그녀에 대해 짐작할만한 것은 없었다.

그녀는 사선으로 내려 뻗는 턱선이 무척 고왔고, 다물고 있는 입술에서 의지라든가, 강함이 느껴지는 듯 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그녀의 눈은 약간 피곤한 표정으로 창밖을 보고 있을 뿐인데도 그 눈동자가 미소라든가 밝은 표정을 떠올리게 하는 선한 느낌이 있었다. 나는 그녀의 귀를 세밀하게 살폈는데, 그것은 귓바퀴의 매끄러운 곡선을 보고 있는 것이 안정감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옆 얼굴에는 네 개의 작은 점이 있었고, 화장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 였다. 내가 이 점을 세는 동안 그녀는 세 번 눈을 깜빡였다.

빤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그녀는 나를 의식할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겁이 덜컥났다. 그녀가 나를 경계해서는 안된다. 나를 질 나쁜 음흉한 낙오자나 수상한 인간으로 여기게 해서는 안 되었다.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고,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 그녀는 나에게 답을 해 줄 수 있는 바로 그 사람일지 모른다. 외계인, 태고의 신, 컴퓨터 게임 관리자, 리얼리티쇼 진행자 무엇이 되었건 그녀는 나에게 적당한 설명을 해 줄 사람일 수 있다. 대체 내가 왜 오늘 아침부터 세상 모두를 악마의 얼굴로 보고 있는지 가르쳐 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그녀 역시 아무런 영문을 모른채, 다만 나에게 아름다운 인간 여자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라도. 그렇더라도 나는 그녀를 알아야 했다. 세상 그 누구의 얼굴도 쳐다보지 못하고 두려움에 기절해 버릴 것 같은 지금, 누군가 얼굴을 보고, 대화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간절하고도 절실한 일이었다. 숨막힐 듯한 이 공포감속에서, 그녀와 짧은 농담이나 몇 분 간의 잡담을 주고 받기만해도 한결 버틸만 할 것이다.

나는 그녀가 이쪽을 보는 듯 하자, 고개를 다시 바닥으로 숙였다. 먼지가 가득 끼인 버스 좌석의 이음새 부분이 보였다. 얼굴을 보지 않은 앉아 있는 아주머니의 허벅지와 손이 보였다. 어떻게 한다. 어떻게 그녀에게 말을 건다.도대체 그녀는 누구일까. 내 악몽의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일까. 모르고 있는 사람일까.

차가 흔들렸다. 옆에 서 있던 여학생하나가 내 어깨죽지 쪽으로 부딪혔다. 나를 올려다 보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나는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며 이 여학생의 목 높이 쯤에 시선을 맞춘다는 것이 실수로 더 위쪽을 보고 말았다. 이 여학생은 생각보다 키가 훨씬 작았다.

여학생의 얼굴이 내 눈에 보였다. 무서운 얼굴이었다. 피가 철철넘쳐 흐르고 있었다. 조용한 버스 속에서 엔진소리와 덜컹이는 소음 뿐이었지만, 귓가에 쇳소리같은 비명소리가 마구 울려퍼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두덩이에서 흐르는 검은 액체는 썩어가고 있는 피처럼 보였다. 나는 잠깐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곁눈질로 그녀를 보았다. 놀란 나를 눈치챘는지 잠시 확인했다. 나는 내지르는 소리가 나올것 같은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씩씩거리는 이상한 숨소리를 내게 되었다. 무서웠다. 두 손으로 버스 내리는 문쪽에 있는 기둥을 꼭 붙잡았다. 그리고 아래를 쳐다보았다. 내 발등을 보았다. 발등을 보면서 나는 덜덜 떨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옆에서 그 무서운 얼굴이 다가와 내 머리를 삶은 새우 머리 따내듯 뽑아 먹어버릴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꼭감았다. 암흑의 상상속에서 그 무서운 얼굴이 빙빙 맴돌았다. 히히거리며 웃는 소리가 귀에 울려퍼졌다. 나는 버스 기둥을 더 꼭 잡았다. 감은 두눈에서 눈물이 조금씩 번저 흐르고 있었다.

버스가 섰다. 나는 다시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세상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여기서 내린다면. 그렇다면 나는 희망을 잃게 된다. 기회를 놓치게 된다. 영영 이 저주 받은 지옥의 얼굴들과 함께 세상에서 살다가 정말 화끈하게 미쳐버려서 죽을 지도 모른다. 그 전에 나는 최소한 유일하게 이 저주에서 빗겨나가 있는 그녀와 이야기는 해 봐야 했다. 시도는 해 봐야 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다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내리지 않고 계속 서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녀를 보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다행이었다.

그녀는 세 정거장이 지나서 버스에서 내렸다. 나도 그녀를 따라 내렸다. 시간은 아직 있다. 아직은 조금 더 그녀를 따라다니다가 병원에 들렀다가 다시 연구소에 돌아가도 검찰 증언에 나갈 수 있었다. 나는 그녀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적당한 거리만큼 떨어지기로 했다. 그리고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는 그녀가 가는 방향을 따라 계속 그녀를 뒤따라 다녔다.

그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나는 그녀에 대해 여러가지 상상과 추측을 했다. 이대로 그녀를 따라가다보면, 그녀가 다른 세계의 마법적인 존재로부터 지령을 받는 비밀 통신 기지 같은 곳으로 가는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그런 특별한 일이 있는 것을 숨기기 위해 나처럼 뒤를 따라오는 사람을 경계하고 있을까. 그것은 확실하지 않지만, 보다 확실한 것은, 낯선 사람이, 그것도 좀 정신이 이상하고 대인관계가 급속히 악화된 사람이 계속 쫓아오고 있다면 매우 두려워하며 도망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들켜서는 안되었다. 들키면 그녀를 놓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안된다.

나는 우선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를 살폈다. 터널을 통과한 산 저편의 도시의 다른 구역이었다.

연구소에 취직하면서 이 도시에 살게 된지도 벌써 4년째지만, 이 지역은 한 번도 와보지 않은 곳이었다. 내가 매일 세 끼 밥을 먹고, 하루 몇 만번쯤 숨을 쉬는 그 장소를 이 도시라고 한다. 하지만, 내가 지금보는 이 지역의 광경은 좀 낯설고 알 수 없는 광경이었다. 나름대로 번화하여 빌딩들은 높고, 자동차들은 시끄러웠지만 나는 한 번도 와보지 않은 지역이었다. 나는 오늘 이렇게 이곳에 와보지 않은 다음에야, 이 도시의 이 동네에 평생 다시 한 번 더 오게될까 하는생각이 들 만큼, 묘하고 낯선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버스를 내린 곳에서 두 블럭 떨어져 있는 백화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백화점으로 들어갈 것인가? 나는 그녀에게 내가 뒤쫓아온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여유롭게 그녀를 앞질러 걷기로 했다. 내가 앞질러 나가는 모습을 그녀가 보게 된다면, 그녀는 이후에 나를 한 두번 더 발견한다 하더라도 내가 그녀를 목표로 따라오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좋은 속임수 였다. 뒤쫓아가는 내가 그녀를 앞질러 가는 것이다. 나는 잠깐 뛰어서 그녀를 제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옆을 지나가며, 나는 곁눈질로 아주 가까이서 잠시동안 그녀를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그녀의 숨소리를 듣고, 그녀의 냄새를 맡아 보려고 했다. 무엇이라도 그녀가 이상한 점이나 혹은 내 상황을 해결할만한 단서를 찾아보려 했다. 그녀의 옷에서는 섬유 유연제에 들어가 있는 향기가 났고, 그녀가 마침내 백화점에 도착하여 짧게 한숨을 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그녀를 앞질렀고, 그녀보다 먼저 백화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백화점 건물로 들어가자, 나는 왼쪽으로 돌아서 시계 매장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백화점에 들어오고 나서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라가 2층으로 향했다. 나는 이제 다시 그녀를 뒤따라 가기로 마음먹었다.

"찾으시는 물건 있으십니까, 고객님?"

잠시 바쁘게 움직이다가 나는 무심코 그렇게 말을 걸어오는 백화점 판매원과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나는 무서운 그 얼굴에 고개를 홱 옆으로 돌리고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백화점 판매원은 꽤 놀란 눈으로 이런 나를 보았을 것이다.

나는 놀랐으면서도, 그러는 사이에 그녀를 놓쳤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겁이 났다. 나는 바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그녀의 뒤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 올라왔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놓친 것일까? 나는 바쁜 걸음으로 뛰어 매장 좌우를 살폈다. 없었다. 3층. 3층까지 올라간 것일까. 나는 다시 에스컬레이터를 뛰어올라갔다. 초조한 마음에 안된다. 안된다 하는 말을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3층에도 그녀는 없었다. 당황한 마음으로 두리번 거리다가 4층으로 올라가려 하는데, 3층 매장의 옷걸이 사이로 고개를 숙여 옷 가격표를 보고 있던 그녀가 보였다. 옷에 가려서 안 보였던 것이다.

나는 고개를 숙여 바닥을 바라보며, 차분한 걸음 걸이로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나는 똑바로 앞을 볼 수 가 없었다. 아까 시계 매장에서 본 점원 때문에 워낙 놀라서 무서웠던 것이다. 또 움찔해서 이상하게 비틀거리다가, 매장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처다보기라도 한다면. 악마의 모습을 하고 있는 수백개의 괴물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며 죽여 버리려고 하는 모습을 본다면. 나는 발작이라도 할 것 같았다. 나는 사람들이나 벽에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있는 매장까지 왔을 때, 나는 잠시 또 그녀를 놓친 것 같아 당황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탈의실에서 걸어 나왔다. 옷을 사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한 번 입어 본 것이다. 나는 안도했다. 그녀는 다른 물건이나 물건값에 대해서 판매원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가 산 옷이 있는 옷걸이로 갔다. 같은 옷이 또 걸려 있었다. 나는 그녀가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 입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러면서 이 옷을 입으면 무엇이 어떻게 달라지고, 옷의 어느 부분이 그녀의 몸의 어느 부분과 닿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옷을 꺼내어 안쪽과 바깥쪽을 찬찬히 살펴 보았다. 무엇인가 내가 겪는 일과 관계된 것을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혹은 그녀에 대해서 뭔가 더 알 수 있는게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가 입었던 옷을 들고 한 참 그렇게 만지고, 들여다 보았다.

특별히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나는 옷에 대해서 잘 모르고, 더군다나 이렇게 사람 뒷조사하며 짐작하는 일을 해 본적도 없어서 아무래도 무엇인가를 추측해내기에는 무리였다.

나는 귀를 기울여 판매원과 대화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자 했다.

"카드로 결제 해 주세요."
"할부로 해드릴까요, 일시불로 해드릴까요."
"일시불로요. 아, 넣어갈 종이가방 같은 거 있으면 하나 주시겠어요?"
"아, 쇼핑백이요? 쇼핑백 사시면 5백원 추가 되시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내가 상상했던 목소리와는 좀 달랐다.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는 좀 더 초조하고, 좀 더 피곤해 하는 목소리였다. 걱정스러워 하고 있다거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 듯한 약간은 어둡고 고달픈 느낌이 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제대로 알 수는 없었다. 그것은 다만 그녀의 얼굴을 보며 생각한 것 때문에 느낀 내 마음대로 지어낸 선입견의 결과였다. 엄앵란이나 남정임의 목소리가 영화속 성우의 목소리와 다르듯, 지금 내가 그녀의 목소리에서 받는 느낌은 그냥 당연히 어긋날 기대의 결과일 뿐이었다.

백화점에서 나온 그녀는 또 다시 버스를 기다렸다. 이번에 나는 그녀의 옆 모습을 가로등 건너에서 쳐다보며 있었다. 계속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기에 그녀가 타는 버스를 따라 타기 훨씬 쉬울 것이었다. 시간이 있다. 아직까지는. 아직까지는 시간이 있다. 11시 30분까지 연구소에 돌아가면 된다. 조금 더 그녀를 따라가 보자. 적어도 연구소에 돌아가기 전까지 그녀에게 내 사정을 말하거나, 하다 못해 연락처라도 알아내서 다음번에 다시 만날 기회라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그녀의 옆얼굴을 계속해서 쳐다보면서 숨을 골랐다.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그녀의 턱선을 가만히  바라 본다. 심신이 편안해졌다. 내가 유일하게 마음 놓고 쳐다볼 수 있는 사람이 그녀 였다. 아직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야기를 주고 받고 내 문제를 길게 털어 놓을 수 있는 상대이다. 사방 어디를 본들 이 도시의 인간들이 정시나간 괴수로 보이는 판에, 이렇게 편안하게 시선을 둘 수 있는것만으로도 나는 잠시 안심이 되었다. 그러고 있자니 또 한편으로 온몸이 노곤해지는 느낌이었다. 아침에 워낙 정신 없어서 그렇지, 분명히 나는 어제 밤새 일을 했으니까.

밤새 자료 사진과 아이콘들을 축소하고 확대해서 화면에 배열하고, 어림없는 한자어로 점철된 설명어구들을 달아 놓았다. 그걸 150가지 글꼴 중에서 그럴듯한 것 하나로 골라 놓으면 김이사님이 좋아할 "발표자료"라는 것이 된다. 나는 처음 30분동안, 가장 어울리는 화살표 아이콘을 찾느라 고민하면서 대체 내가 왜 이짓을 하고 있는지 되새겨 봤다. 결론은 김이사님은 화살표 아이콘의 모양에 굉장히 민감하다는 것으로 맺어졌다. 어쨌거나 나는 어제 밤에 가장 급한일을 했고, 오늘 김이사님은 검찰에서 증언을 할 것이다.

그녀를 따라 버스에 올라탄 나는, 아까 보다는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를 지켜 보기로 했다. 나는 그녀가 들고 있는 가방이나, 그녀의 손 모양, 머리칼을 보다 세밀하게 살펴 보았다. 손은 조금 핏기가 없고 말라 있었다. 그러나 특별히 이상할 정도는 아니었다.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까.

"저는 세상 모든 사람이 괴물로 보이는데 당신만 예외입니다."

이렇게 하면, 그야말로 미친 놈 취급을 받을 것이다. 그녀는 도망갈 것이고, 내가 뒤쫓아가면 나를 신고할 것이다. 그래서는 안된다.

"저기요.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이건 또 무슨 60년대 영화에서 시나리오 작가들이 성의 없게 각본 꾸밀 때나 쓸법한 대사인가. 당장 미친 놈 취급을 받지는 않겠지만, 이 역시 성사될 가망성은 없다. 솔직한 어색함이나 적절한 핑계를 이유로 거부당할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해야 지금 내 상황을 그녀에게 말할 수 있을까.

그녀는 버스에서 다시 내렸다. 나는 그녀의 집이나 연락할 다른 근거를 찾아낼 때까지 계속 그녀의 뒤를 밟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면, 직접 그녀와 연락을 하지는 못한다하더라도 정신과의사나 신경외과 전문의에게 치료를 받을 때 어디어디에 사는 누구누구는 예외라고 매우 중요한 사실하나를 더 전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내린 곳은 병원이었다. 내가 애초에 가려고 했던 곳은 아니었지만, 그곳도 커다란 대학 병원이었다. 정신과도 있을 것이다. 잘 됐다. 마침 시간이 부족해지고 있는데, 여기에 온 김에 정신과도 들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시장통처럼 북적거리는 이 거대한 병원에서 어쩐지 위축되는 느낌을 받았다. 사람들. 의사들. 간호사들. 때문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피해서 나는 용케 그녀를 계속 따라갔다. 그녀는 암병동 쪽으로 갔다. 나는 정신과에 가기 위해 병원 로비에 있는 접수계에서 결제용지를 한 장 집어 갔다. 이 종이에 사인을 해야 나는 돈을 낼 수 있고, 그래야 이 병원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

그녀가 가는 곳은 암병동이었다. 암이라. 누가 죽어가고 있는 것일까. 그녀 자신일까. 그녀의 부모일까. 그녀의 친구인가. 나는 병원 벽과 모퉁이들을 이용해서 내 모습을 감춘 채 계속 그녀를 따라갔다. 나는 그녀와 같은 엘레베이터에 탔고, 그 좁은 공간에서 그녀와 둘이 있으면서, 그녀가 호흡하는 공기를 같이 마셨다. 가장 그녀가 가깝게 느껴진 순간이었고, 지금이라도 곧 오늘 아침 나에게 사뿐히 내려 앉은 정신 나간 저주가 풀릴 듯한 느낌이 드는 듯도 했다.

하지만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문틈 사이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나타나자. 나는 다시 한 번 주춤했다. 문틈으로 서서히 드러나는 그 악마의 얼굴들. 나는 엘레베이터 뒤쪽에 바싹 붙었다. 고개를 돌리고 눈을 꼭 감았다. 그녀를 놓칠까 싶어서 그렇게 안절부절하다가, 눈을 감고 나는 엘레베이터 밖으로 뛰어 나왔다.

그녀는 어느 병실로 막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병실의 호수를 확인하고, 복도 한 켠에 있는 의자에 앉아 그녀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시간을 오래 끌고 있었다. 심각한 일일까. 암병동인데, 뭐라도 심각한 일일 것이다. 나는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내가 오늘 아침부터 보아온 괴물의 얼굴들을 종류별로 정리해 본다거나, 가장 무서웠던 것부터 순서대로 배열하는 등등의 생각을 했다. 괴물의 모습은 그 사람의 원래 사람 모습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일까. 혹은 그 사람의 성격이나 마음과 관련된 모습이 내 눈에 보이는 것일까. 아니면 전혀 상관없이 그냥 내키는 대로 이상한 악마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일까. 그런 것을 고민해 보기도 했다.

혹은 실제 사람이 아니라, 사람 사진이나 사람 그림, 텔레비전이나 영화속의 사람을 볼 때도 괴물의 형상으로 보일것인지 어떤지 궁금하기도 했다. 텔레비전의 사람이 괴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이 이상한 현상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단서가 될만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림은 어떤가. 만약 텔레비전이나 사진속의 인간들이 모두 괴물로 보인다면 그림도 괴물의 모습으로 보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입체파나 초현실주의의 과장된 표현으로 그려진 그림도 괴물로 보일까? 만화 속의 사람도 괴물로 보일까. 동그라미 속에 점 두개와 반원이 들어간 미소짓는 사람 얼굴 기호도 괴물로 보일까. ^^ 나 ^^; 같은 이모티콘도 괴물의 얼굴로 보일 것인가. 만약에 내가 어떤 사람을 그림으로 점점 그려가고 있다면, 그림이 얼마나 완성되었을 때 그 모습이 문득 괴물로 바뀌어 보일것인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가운데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 11시 30분까지 연구소로 돌아가려면 이제 십몇분 내로 여기서 출발해야 했다. 아무래도 내 정신병원에 들르는 것은 포기해야 할지 싶었다. 시간이 점차 위험해지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지금이라도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가서 그녀에게 다짜고짜 뭐라도 말을 해야 할 것인가.

초조감 때문에 뭔가 어떻게 해 보고 싶은데 함부로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바닥만 보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일까. 그녀가 아니면 어쩌나. 그러면 또 그 무서운 얼굴을 보아야 할텐데.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라면 놓쳐서는 안된다. 나는 고개를 들어 문쪽을 보았다.

다행히 그녀가 맞았다. 하늘색 상의. 하늘처럼 맑은 눈. 그녀가 맞았다. 그녀의 얼굴은 아까보다는 훨씬 밝아 보였다. 그녀는 오른손에 누군가의 손을 쥐고 있었다. 나는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엄두는 나지 않았지만, 어린아이라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모자가 달린 상의에 모자를 쓰고 얼굴에는 마스크를 하고 있는 듯 했다. 더 자세한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시야의 중앙에 두고 있었다. 그래야 다른 위험한 얼굴들을 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 어린이와 함께 병실이 있는 복도를 나가 정산계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다시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는 정산계 앞에 있는 긴 줄에 섰다. 병원에 돈을 내려고 하나 보다. 나는 그녀 뒤에 사람이 셋 정도 설 때까지 기다려서 그녀와 약간 거리를 둔 다음, 나도 줄에 섰다.

병원이 시끄러워서 그녀와 어린이가 나누는 소곤소곤 나누는 작은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말을 할 때 마다 벌렸다 다무는 그녀의 입을, 입 모양을 살펴 보았다. 그녀의 혀가 움직이는 모습과 이가 부딪혔다 떨어지는 모습을 가만히 보았다. 몇 단어는 추측할 수 있었고, 대부분의 단어는 거의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고, 이제는 버스를 타고 연구소로 돌아가기에는 시간이 좀 부족하게 되기에 이르렀다.

줄에 선 11명의 사람들을 지나 정산계 창구에 도착한 그녀는 양식에 빼곡히 칸을 채운 내용을 들이 밀었다. 그녀는 정산계 창구에서 약간 큰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좀 더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병원 입구 본관 로비로 돌아가세요. 거기에 가면 접수계가 있으세요, 고객님. 접수계에서 결제 용지를 받아 오셔서, 거기에 내용 다 적으시구요. 그걸 다시 저희 쪽에 같이 주셔야 퇴원처리를 해드릴 수 있거든요. 고객님."
"그러니까 다시 본관 로비로 갔다가 종이 들고 다시 여기로 오라는 거죠?"
"예 맞습니다 고객님."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돈을 내려는데, 진료비 양식 중에 하나는 본관 로비에서 가져와야 하는데 그걸 몰랐던 것이다. 한 참동안 줄에서 기다리던 끝에 드디어 차례가 왔는데, 멀리 떨어져 있는 본관까지 갔다 와야 된다고 하니 좀 기운이 빠질 법도 했다. 그녀는 어떻게 하지. 하며 뒤에 줄 서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았다. "쟤는 왜 이렇게 오래걸려"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을 사람들이었다. 갑자기 그녀가 손을 잡고 있던 어린이가 말했다.

"엄마, 안아줘."
"왜? 너 걸을 수 있잖아. 아기들이나 안기는거야."
"안아줘 엄마."

그녀는 그 어린이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그녀는 더 기운이 빠지는 목소리로 피곤해 했다. 그녀는 일단 그 어린이와 시끄럽게 실랑이를 하기 싫었던지 그 어린이를 안아 들었다. 그 어린이의 어머니치고는 확실히 그녀는 젊고 어려 보였다. 그녀는 팔목이 가늘고 체구가 좀 작은편이었기 때문에, 어린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 몹시 힘겹게 보였다. 특히 그 팔은 보기만 해도 내 팔이 저릴 지경이었다.

그런 그녀의 약간 피곤해 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잠시 동안 그림의 한 장면으로 영원히 멈춰져 있는 어떤 풍경, 장면으로 느껴졌다. 약간의 감동이라면 감동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주변의 소리가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그녀 외에 다른 무엇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시간이 꽤 길게 멈춘 듯이 이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녀의 그 순간의 모습을 보고 있을 때, 참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평범하고 건강한 시민으로 오늘 아침을 보내고 있었고, 나름대로 멀쩡해 보이는 자식이 있었고, 세상을 성실히 굳건히 살아가는 충실한 태도를 갖고 있었으며, 그리고 무척 아름다웠다. 나는 나도 저렇게 정착해서 평온한 삶의 작은 고민들과 고단한 삶을 나눌 반려자와 따뜻한 가정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딱히 위대하다거나 엄청날 것은 없는 삶이었지만, 대단한 삶을 사는 사람치고 뭐하나 크게 꼬인 것이 없는 인생은 드물다고 보면, 세상 어디에서도 적당히 밝은 자신의 빛으로 주변을 밝힐 수 있는 바로 그녀와 같은 사람이 가장 부러운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 없이 밤을 새고 나서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느새 지옥에 떨어져 있는 나에게는 그런 그녀에게 강한 질투심 마저 느껴졌다.

"저기, 제 종이 쓰시겠어요? 저는 아직 시간이 좀 있어서요. 다시 갔다와도 되고요."
"예?"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결제 양식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그리고, 두세살 때 옹알이한 이후로부터 계속 잘 하던 것처럼, 평범한 한국어 억양으로 똑똑히 사람과 대화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고 대답했고, 나는 그녀를 보고 말하고 있었다.

"애 데리고 계시니까 왔다갔다 하기 힘드실 테고. 줄도 다시 서셔야하잖아요. 이걸로 쓰세요."
"예. 아? 예... 그래도 되겠어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내가 준 종이를 받았다.

"퇴원하시나봐요?"
"예. 별 이상이 없어서요."
"축하드립니다."
"예, 고맙습니다."

암병동 정산계에서 나는 딱 그만큼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 이제 시간이 없었다. 내가 해야할 일을 하러 다시 돌아갈 시간이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그녀가 종이에 기입하는 그녀의 주소와 이름, 주민등록번호를 넘겨다 보며, 외우고 또 외웠다. 잊으면 안되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계속 그 내용을 반복해서 중얼거리면서 병원을 벗어났다. 그게 그녀의 연락처였다. 그리고 택시를 붙잡아타고 연구소로 돌아왔다.


3.

연구소에 돌아와 보니, 기자들과 환경단체 관계자들, 시민단체에서 온 시위대 등등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검찰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고, 유네스코와 환경부, 산업자원부에서도 사람들이 와 있었다.

나는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를 뚫고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 께에서 바닥을 보며 서 있었다.

"어, 자네 왜 인제 왔나. 김이사님이 대강 잘 하고 계시긴 하지만, 그래도 자네가 준비한 자료니까 자내가 10분전에 와서 대기하고 있어야지."

조박사님 목소리였다. 나는 뭐라고 대꾸를 하면서도 얼굴은 보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귀를 기울여 김이사님께 질문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었다.

"신공단에서 사용하고 있는 정주형 흡착 처리 기법에 대해서 여쭙고자 합니다."

세세한 질문이 들어오자, 김이사님은 적당히 둘러대며 긍정도 부정도 아닌 말로 지나가려 하고 있었다. 확신이 없는 다음에야 괜히 이상한 소리해서 세상 시끄럽지 않게 하는 게 좋은 방법이었다. 김이사님은 신공단 정주형 흡착 처리 기법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그 외에는 달리 방법도 없었다.

나는 질문하는 사람들을 얼굴 아래에서만 주욱 훑어 보았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뒤이어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는 유네스코에서 나온 사람으로 탁자 위에 물통을 올려 놓고 있었고, 컵에는 맥주 같아 보이는 것을 따라 놓은 듯 보였다. 그는 그 맥주 같은 것을 한 모금 마시더니 말을 했다.

"신공단에 유나이티드 컨스트럭터 회사가 도입한 저온불포화 연쇄반응기에 대해서 점검하신 평가내용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제가 알기로, 저온불포화 연쇄반응기는 작동압력이 1백2십만 파스칼을 넘어가면 굉장히 유독한 발암물질을 배출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결과가 나왔습니까?"

김이사님은 지체 없이 대답하기 시작했다.

발암물질을 배출하는 공장. 어디에 하소연할 곳도 없이 이유도 모른채, 공해 때문에 암에 걸리는 사람들.

김이사님은 대답한다.

"거기에 대해서는 저희 쪽에서 좀 더 복합적이고 종합적인 검토를 통해서 추후에 의견을 덧붙일 수도 있을거라고......"

그 순간, 나는 내가 나아가서 바로 여기에 대해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많은 사람들. 이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내가 이야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득실득실 모여 있는 괴물 떼거리들 앞에서. 모두가 나를 찢어 집어 삼키려고 하는 무리들 앞에서, 어떻게 똑바로 무슨 말이든 한 마디 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검찰과 산업자원부 사람들 앞에서 똑똑히 논지를 이야기하기는 커녕,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커피 담당 인턴 직원에게 잠깐 지나가게 옆으로 비켜서달라는 말을 하기도 겁이 난다.

나는 곧 한 가지 술수를 생각해 냈다.

세상을 살면서 여러가지 선택의 순간이 있다. 사소하게 여기지만 굉장히 중요한 것도 있고, 중요하게 여기지만 사실은 별 것 아닌 것들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렇게 지나가는 선택의 순간들이 여러가지 차이를 겹겹이 만들어 나와 내가 사는 세상을 사소하게나마 바꿔 간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참여자들에게 이름표와 식권을 잘라주기 위해 입구 한 쪽 끝에 놓여 있던 커터 칼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칼을 빼어 들어 눈썹 아래쪽 뼈가 닿는 부분에 대고 빠르고 힘있게 주욱 옆으로 그었다. 날카로운 고통이 얼굴 앞쪽에서 퍼지듯이 느껴졌다. 눈꺼풀 위로 피가 줄줄 흘러 내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흐르는 피를 닦으며 이마에 대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무도 내 눈앞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부설 연구소, 수석 연구원이자 검사 과제 실무 총괄 담당자입니다. 제가 보충 설명 드리겠습니다. 저온불포화 연쇄반응기 작동압력 반응성을 패스트 푸리에 변환으로 다차원 변량 분석을 해 봤습니다. 모든 구간에서 신호가 없습니다만, 딱 2백만 줄에서 아주 날카로운, 아주 분절적인 신호가 하나 나옵니다."

얼굴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 이야기하고 있는 나를, 모든 사람들이 조금은 놀란 눈빛으로 보고 있을 것이다. 피가 눈 양쪽으로 흐르는 가운데 눈에서는 눈물이 나와서 앞은 여전히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마음놓고 계속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이 그 무엇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서서히 시야가 맑아지고 있었다. 피와 눈물에 굴절되어 흐릿하긴 했지만, 서서히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악마와 마귀의 모습들이 하나 둘 드러나 내 앞을 덥쳐오기 시작했다. 나는 숨이 가빠오는 듯한 느낌을 느꼈다. 정말 개같이 무서웠다. 환청 같은 웃음소리가 끝없이 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발톱 같은 것이 내 눈을 찌를 듯 하고, 굵은 송곳 같은 것이 심장에 박히는 듯한 느낌으로 이 사람들의 얼굴이 나를 노려 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말을 끝까지 해야 했다. 나는 그 괴물들을 끝까지 마주하면서, 내가 해야 할 말을 해야 했다. 나는 눈 앞에서 썩은 이빨의 날카로운 끝을 휘두르는 뱀눈의 악마를 똑바로 쳐다 보았다.

"따라서 말씀하신대로, 신공단의 저온불포화 연쇄반응기는 발암물질에 대해서 심각한 위험성을 갖고 있습니다. 전면적인 설계 변경이나, 대규모 폐기물질 처리 시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근 시민의 건강에 치명적인 위협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내 대답이 끝나자,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자들이 기사를 작성하며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타자소리가 경쟁하듯 울려퍼졌다.

그 날 이후, 2주일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정신병원에 가지 못하고 있다. 차분히 알아보니 정신질환이 심해지면 회사에서 퇴직하도록 되어 있었다. 2006년 통과된 산업기술보호법 때문에 연구직 종사자들은 한 번 회사에서 퇴직당하면 결코 다른 직장을 구할 수 없이 실업자로 지내야 한다는 대한민국의 법률이 시행되고 있었다. 나는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말도 안되는 어떻게 보면, 지극히 개인적인 수수께끼 덕분에 내 인생을 통째로 날릴 수는 없었으므로, 아무말도 안하고 그냥 끙끙대며 연구소에 다니고 있다. 계속 괴물들과 함께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억지로 참아가며 버티는 힘은 조금 늘었지만, 여전히 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편안하게 대화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익숙해지니 그게 그렇게 삶에 큰 지장을 주는 일은 아니었다. 꼭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고 눈을 마주하며 살아야만 세상이 살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역겨움 속에 그렇게 하루를 피곤하게 헤메다가 도저히 견디지 못할 때, 나는 그녀의 사진을 본다. 인터넷과 헌책방을 죽도록 뒤져서 구한 그녀의 고등학교 졸업사진이었다. 아직도 나는 이 모든 일들의 영문을 알 수 없지만, 그녀만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진 속에서 웃고 있다.


- 2006년 카이로 국제공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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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 No Profile
    가연 07.01.24 14:47 댓글 수정 삭제
    다섯 편 모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판소리 수궁가..."에 등장했던 인물이 계속 나오네요. 거울에 올린 글 순서대로 보자면 재식님 글 중에서 산업기술보호법의 첫 피해자였다는 점에서 이 다섯 편 연작에 모두 출연한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네요.
  • No Profile
    미로 09.04.16 21:23 댓글 수정 삭제
    왜 그렇게 되었는지 딱 결말은 나오지 않는군요.

    주인공이 일하는 연구소와 관련이 있는 건가요? 정작 주인공은 모르고.
  • No Profile
    곽재식 11.03.27 09:43 댓글 수정 삭제
    가연/ 시리즈물로 해보려고 한 번 그렇게 꾸며 봤습니다.

    미로/ 약간 김 새기는 하는데, "몰라도 그냥 묻어 놓고 버티며 사는 게 인생살이"라는 걸 좀 그려보고 싶어서 그렇게 처리 했습니다.

    다른 독자님 제보로 알게 된 일인데, 초반 출발하는 부분의 소재가 한 일본 컴퓨터 게임하고 비슷하다고 합니다. 그 게임에서 주인공에게 다른 사람들은 징그럽게보이고 여자주인공만 어떤 일인지 아름답게 보이는 게 발단 부분에 나온다고 합니다. 게임은 악마, 지구종말로 치닫는 훨씬 무거운 내용이랍니다.
  • No Profile
    아마도 11.03.28 22:25 댓글 수정 삭제
    곽재식님/ 데즈카 오사무의 불새/부활편에도 인간이 전부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데 한 로봇만 인간으로 보이게 되는 증상의 남자가 소재인 편이 있습니다. 말씀하신 게임은 그것의 오마쥬라고 알고 있습니다. (전혀 다른 만화 중에도 그 오마쥬가 있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거기서는 인간은 전부 괴물이나 로봇으로 보이는 가운데 인간이 아닌 존재 하나만 인간으로 보인다는 것이니 도입부 이외에는 비슷한 점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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