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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원경 평균의 삶

2022.03.31 22:1503.31

평균의 삶

 

갈원경

 


벚꽃이 피었다. 강변을 내려다보는 차도를 따라서 오래된 벚나무들이 줄지어 꽃을 피웠다. 흰색과 분홍색의 중간, 백매화나 사과꽃보다 붉은빛이 돌아도 겹벚꽃보다는 흰색에 가까운 같은 품종의 오래된 벚나무가, 사월 초순 아침과 저녁 날씨가 다른 계절처럼 느껴지는 날에 활짝,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도록 피었다.

“월요일에는 비가 온대.”

“꽃 보는 것도 주말까지겠네.”

수영은 말을 받으며 내 손을 조금 감싸 쥐었다. 미열이 있었다. 수영은 조금만 걷고 나면 금방 몸에 열이 돌았다. 다른 사람보다 약한 체질도 아니라는데, 누가 봐도 쉽게 지칠 것 같은 체형도 아니고 실제로 지친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삼십 분을 걸으면 삼십 분은 미열이 오른 상태로 있었다. 지난달에는 차로 20분이면 가는 거리를 1시간을 강변을 따라 걷겠다고 고집하더니 카페 앞에서 체온 측정에 막혔다. 원래 체온이 높은 사람이었다. 정상 체온이 36.5도가 아닌 사람이 많다고는 하지만 수영은 평온한 상태에서 재더라도 36.8도 이상이었다. 조금 움직이고 나면 37도는 훌쩍 넘었다. 결국 카페에서는 37.6도인 수영에게 삑삑 경고음을 울렸다. 한 시간을 걸어서도 가고 싶었던 예쁜 바닷가 가게에는 결국 못 들어가고 말았다. 수영은 어색하게 웃었고 나는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먼저 몸을 돌렸다. 체온이 항상 36.3도 이하인 나는 37.5도가 되면 현기증이 돌 지경이 되는데 수영은 자신이 그 체온이 되어도 자각조차 없다. 내게 37도는 미열이 있는 상태지만, 어느 매장도 나에게 경고음을 울리지 않는다. 체온측정기가 설치되지 않고 사람이 일일이 측정하던 때는 36도가 뜬 나를 보고 의아해하는 사람을 몇 번이나 봤다. 그때도 나는 별말을 하지 않고 나를 보는 시선을 무시했다.

“학교 근처 벚나무 보고 싶다.”

내 말에 수영의 눈이 활짝 웃었다.

 

우리는 같은 학교를 나왔다. 수영은 나보다 한 해 늦게 입학해서 나와 함께 졸업했다. 1학년을 구교사에서 지내고 2학년 때부터 새 건물로 옮겨간 것이 시작이었다. 새 건물은 친환경으로 신경 써서 지었다는데 교실도 화장실도 강당도 내게는 온통 화를 내고 있었다. 중간고사가 시작되었을 땐 얼굴부터 팔다리까지 멀쩡한 곳이 없었다. 발진이 올라오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간지럽거나 뭔가 베인 듯이 아렸다. 숨을 들이쉬다가 갑자기 사레에 걸린 듯 기침이 터져 나왔다. 유달리 한낮 기온이 예년보다 높던 날, 동향으로 지어진 교실은 너무 더웠고 아직 춘추복을 입은 사람이 더 많은 교실에 누군가가 선풍기를 틀었다. 바람이 교실에 퍼지자 기침이 터졌다. 수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침이 멎지 않아서 급하게 교실을 나와서 화장실로 뛰어갔지만, 기침은 한참이나 계속됐다. 여름이 되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에어컨을 돌리기 시작하자 기침은 시도 때도 없이 터져 나왔다. 아이들은 내 손등을, 목을, 얼굴을 보고 각자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 기말고사를 치기 전에 나는 휴학을 선택했다. 어른들은 전학을 더 권했다. 구건물에서 지낼 때는 괜찮았으니 오래된 건물을 쓰는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면 괜찮지 않겠냐고. 하지만 학교에서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 몸은 이미 예전의 몸이 아닌 것 같았다. 버스를 타도, 독서실에 가도, 학원에 가도, 아주 작은 먼지나 바람이 발작적으로 기침을 불렀다. 기침을 많이 하면 살이 빠진다는 걸 그 여름에 알았다. 내가 허약해서 그런 거라고 보약까지 지어 먹고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고열량 식단만 이어졌지만, 어른들은 만날 때마다 내가 더 여위었다고 혀를 찼다.

반년을 이모가 있는 섬에서 지냈다. 이모는 엄마의 큰언니여서 커다란 여행 가방을 가지고 이모네에 이모와 함께 도착했을 때 마을 사람들은 날 보고 이모의 손주냐고 물었다. 이모의 아들딸은 우리나라에 없어서 섬사람들은 벌써 몇 년이나 만난 적이 없는데도 어릴 때 섬에서 뛰어다니던 나이 많은 내 사촌 형제들이 지금 몇 살이 되었을지는 상상이 되는 모양이었다. 이모와 이모부는 황토로 만든 별채를 내 방으로 줬다. 창문으로 바람이 숭숭 들어와서 겨울이면 춥겠다 싶었는데 불을 한 번 때면 하루 넘게 훈기가 도는 방이라서인지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고 이른 겨울을 견딜 수 있었다. 그 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이모와 이모부가 키운 유기농 채소만 먹고 살았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훨씬 흥미롭겠지만 나는 섬에서도 꼬박꼬박 좋아하는 프랑크 소시지를, 콜라를, 허니버터칩을 먹었다. 두 분은 당신의 아이들을 키울 때처럼 나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 오래전에 집을 떠난 사촌 형제들의 만화책을 읽기도 하고 두 분이 키우는 백구와 까미를 데리고 선착장까지 산책을 나섰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그저 그렇게 몇 달을 보냈다. 가끔 집에서는 수업 쫓아가기 어렵지 않게 공부를 좀 해 두면 어떻겠냐고 문자를 보내왔지만, 아마 집에서도 그 말을 내가 따를 거라고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다. 전학을 권하는 친척 중에 딱 한 분, 이모님이 지나가듯이 우리 집에 와서 살아보지 않겠냐고 한 말에 냉큼 그러겠다고 결정하고 따라온 나여서.

이제는 정말로 괜찮아진 것 같다고 의사 선생님의 확언을 듣고 나서, 3월에 학교로 돌아왔다. 1년 반 정도를 학교에서 같이 보낸 아이들은 고3이 됐다. 마지막 반년은 멀쩡한 얼굴보다 벌겋게 발진이 올라왔거나 기침하느라 눈까지 빨개진 얼굴을 더 많이 봤을 아이들이었다. 2학년 때 아이 중에는 친하다고 말할 애들도 하나도 없었다. 1학년 때 그나마 조금 친하다고 할 아이들도 고3이 되어서 굳이 반년이나 안 보였던, 2학년에 남아버린 옛날 친구를 찾아오는 애들은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컨디션이 나빠지면 언제든 선생님에게 말해.”

유독 친절한 담임 선생님은 올해가 첫 담임인 발령 2년 차였다. 첫날부터 모든 아이에게 내가 왜 가나다순의 번호에 있지 않고 맨 끝번이 되어 있는지 설명했다. 선배라는 호칭을 들을 생각은 하지도 않았는데, 첫날부터 같은 반 친구들끼리 선배라고 부르면 불편하겠지, 라며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을 했다. 수영은 내 첫 짝이었고, 오래 지나지 않아 우리는 단짝이 됐다. 3학년 때는 옆 반이 됐다. 단짝이 바뀔 정도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2년을 단짝으로 지낼 때는 상상하지 못했다. 수영과 같은 대학을 다니고, 같은 동네에 있는 다른 회사에 다니고, 같은 동네에서 회사에 다니게 될 줄은. 원룸이 많은 동네라서 지방에서 온 사회초년생이 처음 집을 구하기 쉬운 동네라고 선배가 알려주었을 때도 수영과 같이 알아본 건 아니었다. 서로 따로 집을 구했는데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반대쪽에 있어도 같은 지하철역에서 출발해서 같은 역에서 내려 회사를 가게 된 것이다. 입사 직후에 정신없이 보내느라 서로 연락도 거의 하지 않았고 SNS에 사진 한 장 글 한 줄 올리기도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난 4월 초, 동네에 벚꽃이 만개한 걸 보고 불쑥 토요일에 집 밖으로 나와 벚나무 아래를 걷다가 수영을 다시 만났다.

“서재경!”

불쑥, 나를 막아서며 수영이 말했다. 회색 후드 티를 입은 편안한 차림이, 대학을 다닐 때 익숙하게 봐 왔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연회색으로 염색했던 머리카락만 검게 염색했을 뿐. 회사 면접을 잘 보려면 아무래도 머리카락 색을 착하게 바꿔야겠다고 말하는 걸 듣긴 했지만, 실제 모습을 보니 꼭 고등학교 때의 모습 같기도 했다.

“우리 몇 달 만이게?”

수영은 졸업식에 오지 않았다. 신입사원 연수 일정과 겹쳐서였다. 날짜까지도 정확하게 말할 수 있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걸치고 나온 티셔츠가 하필 회색 후드라서, 대학교 때 나란히 같은 가게에서 사면서 절대로 같은 날 입고 오지 말자고 약속했던 옷이라서, 그것만 계속 신경이 쓰였다. 점퍼 안에 입고 있어도 그걸 못 알아볼 수영이 아니어서. 그런데도 수영은 분명 내 회색 후드에 시선을 던졌는데도, 그저 웃었다.

“벚꽃 예쁘다.”

그래서 나도 그냥 그렇게 말했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금방 올 테니까.”

대답도 듣지 않고 수영은 어딘가로 달려가더니 양손에 커다란 컵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연한 핑크 휘핑크림에 뭔가 자잘하고 납작한 것이 올라간 돔 리드 안쪽에서 달콤한 냄새가 풍겼다.

“내가 오늘까지 써야 하는 1+1 쿠폰이 있었거든. 혼자서 두 잔을 마실까, 그냥 쿠폰 날려버릴까 했는데 이렇게 쓸 수 있게 되네. 아, 아이스 벚꽃 라테. 우유는 무지방으로 바꾼 거. 맞지?”

한정 메뉴든 아니든 나는 찬 우유는 무지방이 아니면 꼭 탈이 나서, 대학교 4년을 내내 무지방 우유로 바꿔 마셨다. 졸업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그걸 잊기에는 아직 일렀겠지만, 회사원이 된 그 몇 달 동안 너무 많은 것들이 바뀌어서, 수영이 그걸 잊지 않은 것이 조금, 반갑고 기뻤다. 고등학교 단짝 시절에 벚꽃이 날리는 하굣길을 뛰어 내려가던 때가 내게만 그리운 게 아닌 것 같은 마음과 함께.

“넌 또 시럽 추가했어?”

“시럽 추가, 샷 추가. 당연하지.”

커피를 받아들고 우리는 벚꽃길을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각자의 회사에서 얼마나 이상한 상관이 있는지의 이야기를 시작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사원증을 처음 걸고 출근할 때의 설렘이 일주일도 가지 않았다거나, 대학 다니면서 PPT는 어느 정도 만들 줄 알았는데 자료 정리하는 워크시트는 선배들 만든 함수를 따라 하는 게 고작이라는 이야기. 월급을 받게 되면 대학생 때보다는 조금 자유로워질 줄 알았는데 첫 월급부터 학자금 융자 걱정이 함께 시작됐다는 이야기. 겨우 몇 달 떨어져 있었는데도 너무 오랜만에 만난 것 같기도 했고, 바로 어제까지 함께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다시 처음 만난 곳으로 돌아올 때까지 한참을 걷고 난 뒤에야 우리는 각자가 구한 집 이야기를 했다. 일부러 그러려고 한 것도 아닌데 두 건물 다 벚꽃이 유명한 이 다리에서 멀지 않았고, 같은 지하철역으로 출퇴근을 한다는 걸 알았다. 만난 곳에서 헤어지는 게 아쉬워지기 시작할 즈음, 수영은 자기 집으로 나를 초대했다. 필로티식 5층 건물의 3층, 내 원룸과 같은 회사가 짓기라도 했는지 쌍둥이처럼 닮은 건물이었다. 그 건물에 수영이 좋아하는 새하얀 곰 모양 러그가 깔려 있었다. 나는 아직도 내 집이 낯설었고, 기숙사 방처럼 룸메가 없이 혼자서 지내는 깜깜한 방에 들려오는 길가의 차 소리에 잠을 깨곤 했는데, 참 비슷한 구조의 방에서 사는 수영은 여기서 아주 오랫동안 익숙하게 살아온 것 같았다. 아니 너무나 깔끔하게 정리된 방이, 여기서 하루도 살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원룸의 크지도 않은 방에 파티션을 쳐서 침대를 놓은 곳과 빈백 쿠션이 놓인 곳을 구분해 놓은 것이 참 수영답다고 생각했다. 나는 빈백 쿠션에 앉아서 수영이 콧노래를 부르면서 파스타를 만드는 걸 보고 있었다. 수영은 왜 나와 같은 곳에서 태어나서 서울에 왔는데도 모든 것이 저렇게 자연스러울까. 서울로 대학을 가겠다고 부모님과 담판을 지을 일은 없었던 것처럼, 처음부터 서울에서 태어나서 집에서 대학을 다니고, 그저 회사원이 되었으니 독립하겠다는 마음으로 방을 구해서 나온 사람처럼 보일까. 왜 똑같은 교복을 입고 다른 지역보다 훨씬 일찍 벚꽃이 피는 그 고장에서, 버스가 산으로 구불구불 올라가는 동네 친구 집은 학교를 오려면 아흔아홉 계단을 뛰어 내려와 눈앞에 보이지만, 멀기만 한 학교 정문을 향해 내달려야 하는 곳에 있는, 그런 곳에서 살았던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일까.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는 아이가 한 학교에 한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는 동네에서 살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고등학교 2년, 대학 4년 수영은 나를 절친이라 소개하고, 나는 그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인 기간이 새삼스러웠다.

“나 밥 먹는다고 안 그랬는데.”

“벌써 여섯 시 넘었어. 밥 먹고 가. 다 돼 가.”

나는 슬쩍 일어나 요리하는 수영의 옆에서 프라이팬을 내려다봤다. 수영의 어깨에서 따뜻한 기운이 올라왔다. 얘 또 미열이 나는구나. 벚꽃길에서 여기까지 나랑 함께 왔다고. 나는 그 자리에서 수영이 라면기에다 파스타를 옮기는 걸 보며 키득거리고, 파스타를 먹으며 한참을 더 이야기하고, 그 싱크대에 서서 설거지하고, 결국 그다음 날 아침에 내 원룸으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 우리는 종종 출근길에 마주쳤다. 2년간 서로의 원룸을 자기 방처럼 드나들었다. 첫 번째 휴가는 일정을 맞추지 못해서 각자 보냈다. 그다음 해부터는 그래도 같이 일정을 잡을 수 있었다. 학자금 융자를 갚느라 휴가에 쓸 돈이 많지는 않았지만, 방콕의 거리를 같이 걸었다. 끔찍하게도 더운 나라였지만, 휴가를 끝낸 후 회사의 에어컨 바람이 더 끔찍했다. 명절에는 같이 집에 내려갔다. 아무리 말해도 회사 사람들은 계속 고향이라 부르는 곳으로. 그 고장 사람들이 모두 바다가 보이는 곳에 사는 게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사람들은 명절에 바다 구경도 하고 좋겠다고 말을 보탰다. 해수욕장보다는 수산물 시장이 더 가까운 동네였다. 두 집 부모님들은 우리 둘이 같은 동네에 산다는 걸 알지 못했다. 나는 방콕에서 찍은 사진 중 내 독사진만 골라 부모님에게 보였다. 오래전에 세상 모든 공기가 나를 공격하는 것 같던 때라면, 내가 흘린 땀조차 바로 씻어내지 않으면 염증을 일으키던 때라면 여름에 방콕을 갈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것이므로, 부모님은 내가 아무런 문제 없이 외국 여행을 하고 왔다는 것에, 회사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에 그저 안도하고 기뻐했다.

 

2년이 끝나자 당연하다는 듯이 보증금이 뛰었다. 보증금이 적은 대신 월세가 센 집이었는데, 보증금도 세고 월세도 센 집이 됐다. 벚꽃길이 SNS에 올라오고 근처에 오래된 가게들이 갑자기 카페며 식당으로 바뀌기 시작하더니, 익숙하게 다니던 길에 이상한 이름이 붙었다. 사회초년생이 첫 집을 구하기 좋다는 말은 어느새 사라지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가보고 싶은 동네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더 이상 그 동네에 집을 구할 수 없었다.

그때 알게 된 것이, 지금 사는 곳이었다. 50년이 넘은 아파트와 빌라가 있는 언덕 아래 동네를 처음 봤을 때 느낀 건, 고등학교 동네였다. 학교 운동장에서 올려다보면 까마득한 언덕 위로 버스가 다니는 게 보였다. 장독대 사이로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이 있기도 했다. 그 높은 곳에도 버스가 다녔고, 교회와 절과 도서관이 있었다. 학교에서는 냄새도 느낄 수 없는 어시장 가까운 바다가, 꼭대기 절에서는 내려다보였다. 절 바로 아랫집에서 살던 같은 반 아이는, 지하철만 타고 시내에 갈 수 있는 동네에서 사는 게 꿈이라고 했다. 서울에도 이런 동네가 있는지 몰랐다. 버스 정류장에서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 길에는 마을 버스만 다닌다고 했다. 부모님과 비슷한 나이의 빌라를 알아보고, 나는 수영에게 연락했다. 학자금 대출이 줄어든 만큼을 다시 융자를 받았다. 회사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는 건 월급으로 갚아야 할 빚이 있을 때라더니 정말 그랬다. 큰맘 먹고 10년 전에 리모델링을 하며 방 하나를 없앴다는, 그래도 여전히 너무 작은 방 두 개가 있는 집을 구했다. 수영은 거실 가득 빛이 들어오는 것이 좋다고 웃었다. 나는 거실이 생긴 것이 좋았다. 부엌에 2구 가스렌지를 둘 수 있는 것이, 28센티 냄비를 기울이지 않고 넣을 수 있는 개수대가 있는 것이 좋았다. 살던 집을 월세로 내 놓은 주인은 리모델링에 맞춰 넣은 냉장고와 세탁기를 그대로 두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빨래 가방을 들고 빨래방으로 가지 않아도 됐다. 확장한 거실에는 베란다가 없었지만, 커튼이 없는 거실에는 빨래가 잘 말랐다. 보름이 지나자 수영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 집에 살았던 사람처럼, 처음 원룸에서 그랬던 것처럼, 집을 수영의 분위기로 물들였다. 나는 침대 하나로 꽉 차는 내 작은 침실 외의 모든 공간이 수영의 색이 되어 있는 것이 싫지 않았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네 번째 맞는 봄이었다. 수영과 같은 집에서 살게 된 두 번째 봄이었다. 회사에서는 매년 신입사원을 뽑았지만 그중 일부는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떠났다. 몇 명은 내게 말했다. 여기서 더 버텨도 길이 보이지 않아요. 나는 지금껏 길이 보인 적이 없었으므로, 그 말을 이해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어떤 회사에 가면 길이 보이게 될까. 고등학교 2학년의 늦봄 초여름의 그날, 갑자기 기침이 멎지 않고 계속해서 숨을 쉴 수 없을 것처럼 몰아닥쳤을 때부터 나는, 아무 것도 계획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는지 모른다. 먼 길을 상상할 수 없었다. 눈앞에 놓인 일을 그냥 했다.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했다. 싫지 않은 일이라면 했다. 그리고 그렇게 십여 년을 보낸 끝에 이 봄을 맞았다. 수영은 1회용 플라스틱컵 대신에 집에서 가지고 나온 텀블러에 봄 한정 라테 음료를 담아왔고, 나는 아주 오랜만에 만난 사이이기라도 한 것처럼 수영에게 이런저런 말을 건네며 걸었다. 텀블러가 비었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로 기차가 덜그럭대며 지나갔다.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 기차 안에서 봤던 한강의 풍경을 기억한다. 면접을 보러 올라온 길에, 너무나 세련되어 보이던 한강변의 사람들의 풍경과, 강변의 건물들을 기억한다. 교복을 입으면 안 된다는 말에 애써 단정한 차림으로 골라 입고 온 스웨터와 점퍼가, 코트 차림의 말쑥한 서울 아이들 사이에 튀지 않을까 걱정하던 걸 기억한다. 갑자기 재택 근무 명령이 떨어지고, 건물이 봉쇄됐다가 풀리고, 옆 자리 사람이 갑자기 한동안 자리를 비우고, 그런 시기를 지나 새봄이었다.

“학교 보러 갈까.”

내가 말했다. 수영이 나를 보았다.

“99계단 올라가서, 거기 벚꽃 보고, 학교 담쟁이가 담을 넘었는지, 장미 덩굴은 어떻게 됐는지, 등나무 정자는 아직 그대로인지, 그런 거 보러.”

“거긴 벚꽃 이제 졌을지도 몰라.”

“겹벚꽃은 아직 피어있지 않을까. 거기, 99계단 위에 산복도로 교회 앞에 겹벚꽃. 없어도 괜찮고. 꽃이 졌으면 새잎이 올라와서 또 예쁠 거야.”

“그러자.”

수영의 눈이 웃었다. 우리는 텀블러를 든 채로 그대로 지하철을 타고, 바로 출발하는 기차를 탔다. 가방 하나 없이 기차에 탄 사람은 우리뿐인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운동화를 신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지갑과 핸드폰, 핸드폰 보조배터리, 텀블러. 졸음이 오기도 전에 기차가 고향에 도착했다. 고향이 아니라 집이라고 그렇게 말했던 곳인데 이제 집은 50년이 넘은 서울의 빌라. 고향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곳이 됐다. 역에서 내려 발길이 자연스럽게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학교가 있는 역에서 내려 밖으로 나가니 십 년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 훌쩍 거스른 듯 익숙한 공기가 느껴졌다. 몇 가게가 바뀌었다. 시장통에 막걸리집이었던 곳은 삼겹살집이었던 흔적을 그대로 남겨놓고 임대 딱지가 붙어 있었다. 교문 옆에 서 있는 벚나무는 벌써 푸른 잎이 돋아 있었다. 수영의 말대로였다. 볓이 잘 들어서 유독 꽃을 빨리 피우는 나무였다. 교문 너머로 등나무 등걸이 조금 더 자란 정자가 보였다. 장미 덩굴이 옆 담벼락 위 철망을 덮었다. 신축이던 교사도 이제 그렇게 새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매일 이 정문을 지나면서 잔뜩 긴장을 하던 계절이 있었다. 내 기침이 터져나올까봐 좀처럼 선풍기도 에어컨도 틀지 못하고 참던 아이도 있었고, 그런 아이들 보기 미안해서 쉬는 시간마다 슬쩍 교실을 나오기도 했었다. 다시 돌아왔을 때는, 그렇게 긴장하고 돌아온 학교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 가끔은 기침도 나왔고, 처방받은 약을 늘 넣어 다녀야 했지만, 그건 아무 일도 아니었다. 나는 수영과 함께 학교 담벼락을 돌아 99계단 앞에 멈춰 섰다. 멀리 계단 끝 산복도로 교회 옆에 선 벚나무가 보였다. 이 길에 있는 유일한 겹벚꽃 나무. 다른 나무가 다 잎을 떨구고 나면 혼자서 외롭게, 다른 잎보다 붉은 빛을 더해서 꽃을 피우는 나무였다. 수영과 함께 99계단을 올랐다. 내려올 때는 학교에 가는 길, 올라올 때는 집에 가는 길이라서 올라가는 길도 그렇게 싫지 않다고 그 동네 아이들은 말했다. 나는 그때처럼 숨을 헉헉대며 올라가, 길 건너에 있는 산복도로 교회 앞 계단까지 뒤도 안 돌아보고 올라가, 겹벚꽃나무 흐드러진 꽃을 올려다보고, 계단에 걸터앉으며 뒤를 돌아, 먼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새파란 바다가 멀리 보였다.

복학하고 처음 체육 수업이 있던 날 오후였다. 휴학 전에는 와 본 적 없는 계단을 올라서 이 언덕에 수영과 함께 올랐었다.

<너 괜찮아? 손이 차가워.>

체육복을 갈아입고 운동장에 서서 혹시나 운동장 먼지 때문에 또 기침이 터져 나올까 긴장하던 내 손을, 수영이 잡았다. 얘는 손이 왜 이렇게 뜨거울까, 그렇게 생각했다. 그 따뜻한 손 때문이었는지 금방이라도 나올 것 같던 기침이 목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체육 수업을 마치고 나서는 수영은, 오늘은 하늘이 맑으니까 멀리까지 보일 거라며 나와 함께 99계단을 올라왔었다. 멀리 보이는 바다를 가리키면서 사실은 아주 오래 걸어가야 하는 길이지만, 거기서 풀쩍 날아오르면 금방 닿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냐고 목소리를 낮춰서 속삭였었다. 초등학생도 그런 말 안 할 거라고 했더니 수영은 웃었다.

그리고 한 해가 지나 고3의 어느 날에는, 바로 이 자리에서 수영이 말했다.

<A대랑 B대랑 C대를 쓸 거야.>

<서울 보내 주신대?>

<입학금만 내 달라고 했어. 붙을 것 같지 않은지, 그러겠다고.>

<나도 거기 쓸까.>

<그럼 좋지. 아, 너 붙고 나 떨어지면 어쩌지.>

그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했다. 이 길에서 학교를, 바다를 내려다보며. 그때는 수능도 그렇게 멀게 느껴졌는데, 어떻게 우리 둘은 똑같이 C대에 붙었다.

“조금 일찍 왔으면 좋았겠다. 이 나무가 있어서 다행이네.”

우리는 고향에 왔지만 고향의 식구들에게는 연락하지 않는다. 우리 둘의 부모님들은 우리 둘이 한 집에 있는 것을 모른다. 설날, 같은 기차를 타고 내려와 서로 다른 출구로 나와서 모르는 사람처럼 마중 나온 부모님에게 활짝 웃어 보이고, 서로 다른 차를 타고 각자의 부모님의 집으로 간 것처럼 우리는 추석에도, 또 다음 명절에도 그렇게 여기, 이제는 집이 아니고 고향인 곳에 올 것이다.

“재경아.”

수영이 내 손을 잡았다. 99계단을 올라온 수영의 몸에서는 또 미열이 났다. 내 손은 여전히 차갑다. 수영의 미열이 내 저체온과 만나, 우리는 비로소 평균의 체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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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종 동자신과의 대결 2022.12.01
서계수 종막의 사사 2022.12.01
아이 머리끈 2022.11.30
갈원경 하루의 선택 2022.11.01
박희종 마이클 잭슨이 돌아왔다 2022.11.01
서계수 그렇게 전사는 뻐꾸기를 구하고 2022.11.01
박도은 입맞춤 퍼레이드 2022.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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