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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마시지 않습니다.

 

 

갈원경

 

 

 


“커피를 안 마신다고? 어……, 왜, 건강 문제야?”

사람들은, 커피를 안 마시는 사람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처럼 말한다. 1학년 때부터 그랬다. 여러 명이 모인 자리라면 그 순간 어색한 공기가 흐른다. 건강 문제가 아니면 커피를 마시지 않을 리가 없다는 전제가 있고, 내가 무슨 건강 문제가 있는지 굉장히 중요한 화제인 것처럼 되물어오는 사람이 있다.

“아뇨, 커피를 안 좋아해서요.”

내 말에 긴장이 풀린다. 그 말에 안심한 듯 농담이 시작된다.

“커피 안 마시고 버틸 수 있다니 놀랍네.”

“커피는 음료 아니고 연료 아니야?”

나는 그냥 웃는다. 거기서 말을 보태 봐야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건강 문제라고 하면 조금 상황이 편해질까 생각해 본 적도 있다. 위가 안 좋다거나, 카페인을 먹으면 잠을 못 잔다거나 하는 이유를 실제로 대 보기도 했는데 역효과였다. 위염 없는 사람도 있어? 난 의사가 커피 끊으라고 한 뒤에 마신 커피가 1톤 넘을 걸, 이라고 했던 선배의 표정은 아직 기억한다. 나는 만나 본 적도 없는 그 의사들이 가엾게 느껴졌다. 의사 앞에서도 선배는 그렇게 말할까. 위염 정도 없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카페인을 먹으면 잠을 못 잔다고 했더니 피곤하면 다 자게 돼 있다면서 웃었고, 젊은 사람이 뭐 벌써 잠을 못 자냐고 운동을 하라고 말했다. 그래서 결국 다 치우고 가장 단순한 답을 대기로 했다.

“맛있는 커피도 있는데.”

조금 떨어져서 서 있던 서하루가 말했다. 그건 서하루가 나에게 한 첫 번째 말이었다. 먼저 주문이 끝난 서하루 손에는 벌써 진감색 텀블러가 들려 있었다. 최고기온 29도, 늦봄이라기보다는 초여름에 가까운 날, 서하루는 입을 연 적도 없는 것 같은 표정으로 홀짝, 들고 있던 텀블러의 뚜껑을 조금 열어 커피를 마셨다. 뜨거운 김이 나와서 그의 안경에 얼핏 김이 서렸다가 사라졌다. 이 날씨에 뜨거운 커피가 들어가? 나는 속으로 말을 삼키고 내 텀블러를 카운터에 내밀며 말했다.

“민트 티 주세요, 아이스로.”

민트 색 텀블러를 서하루가 얼핏 본 것 같아서 돌아보니 서하루는 고개를 돌리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교수님 세미나에는 네 명의 석사과정 학생이 있고, 두 명의 박사과정 선배가 있다. 서하루는 다른 학교 학부를 나와서 대학원을 우리 학교로 온, 우리 세미나 유일한 외부인이었다. 그 해는 몇 년 만에 대학원 추가모집이 있던 해였다. 나는 처음 원서 접수 기간에 면접을 봤었고, 서하루는 추가모집으로 들어왔다. 면접 때 왜 학부를 나온 대학이 아니라 우리 대학에 원서를 낸 건지 교수님이 물었는데, 서하루는 “접수 기간을 놓쳐서 원서를 못 냈는데 여긴 추가 모집을 해서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 대답이 꽤 평판이 갈렸던 모양이다. 교수님은 2년 차에 들어가는 선배에게 A대를 나온 애가 올해 들어오는데, 면접 때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세미나 사람들에게 모두 말해 버렸던 것이다. 서하루가 지도교수를 맡아 달라고 찾아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면접 때의 인상과는 다르게 서하루는 교수님 전공으로 논문을 쓸 계획이라는 것을 꽤 열정적으로 이야기했고, 교수님은 내키지 않는 듯이 수락했다. 알고 보니 서하루는 이미 두 명의 교수님에게 튕긴 상태였다. 모교 출신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아마 면접 때의 그 말 때문이었겠지. 서하루는 자신의 그 대답이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지 모를 것이다.

세미나 동안 그는 계속 커피를 홀짝홀짝 마셨다. 다른 사람들의 아이스 음료들이 다 비워지고 나서도 꽤 오랫동안. 내가 서하루였다면 선배들은 이 날씨에 뜨거운 걸 마시고 싶냐고 말을 걸었을 만도 하지만, 그는 학부 때부터 알고 지낸 나처럼 만만한 후배는 아니어서 다들 가끔 서하루의 화수분같은 텀블러를 힐끗 쳐다보기만 했다.

“차 좋아해?”

세미나가 끝나고 다들 자리를 뜬 뒤, 아직 자리에 앉아서 기록을 정리하던 날 보고 서하루가 두 번째 말했다. 나는 순간 영겁의 시간만큼 고민하기 시작했다. 민트 티 마시는 걸 보고 묻는 거니까 자동차 이야기는 당연히 아닐 테고, 저 ‘차 좋아하느냐’의 질문은 어떤 범위까지를 묻는건지 알 수 없는 너무나 광범위한 질문이었다. 복숭아 아이스티도 ‘차’이고 타로 버블티도 ‘차’이며 유자차와 레몬티도 ‘차’인 우리나라니까. 네가 말하는 ‘차’는 어느 범위를 말하는 거니? 차나무 잎으로 만든 잎만을 말하는 거니? 아니면 내가 민트 티를 마시는 걸 보고 말하는 걸 보니 허브티 정도는 포함하는 거니? 녹차와 홍차와 보이차를 다 차로 묶어서 말하니? 실제로 예전에 그런 질문을 한 적도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의 그 사람의 표정을 기억한다. 그 뒤로 나는 그렇게 묻지 않는다.

“싫어하진 않아.”

그래서 나는 광범위하게 대답했다. 서하루가 조금 나를 보고는 고개를 조금 젓더니 다시 물었다.

“민트 티 좋아하는 것 같은데, 다른 허브도 좋아해? 커피 안 좋아한다며, 홍차도 안 좋아해?”

순식간에 질문의 범위가 좁아졌다.

“장미 계열 말고는 다 잘 마셔. 홍차는 실론 빼고. 너도 차 좋아해?”

서하루가 조금 웃었다.

“싫어하진 않아. 나는 커피가 더 좋지만, 맛없는 커피보단 맛있는 차가 낫지.”

서하루가 덧붙였다.

“거기 에스프레소가 별로라서, 아메리카노도 맛이 없어. 그래도 드립은 나쁘지 않은 편이지만. 홍차 좋아하면 맛있는 커피는 좋아할 것 같아서 물어봤어.”

사실 첫 학기때부터 서하루와 완전히 같은 수업을 들어왔다. 지도교수님이 같아서 2년 째 같은 세미나까지 참여하고 있지만 서하루와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눠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는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사람이었고 누가 뭐라고 묻든 반드시 자신에게로 종결되는 방식으로 대화를 마무리하는 사람이었다. 그 수업 교수님 좀 이상하지 않냐, 라고 물으면 글쎄요 저는 특이한 분들 많이 만나서 그런지 그렇게 특이하게 보이진 않았어요, 라고 끝내버리는 식이었다. 그 사람 전에 사고를 많이 쳤으니까 조심해, 라고 하면 보통은 무슨 사고냐고 물을 테지만 서하루는 무슨 일이든 뭐 그때 가서 고민할게요. 라고 해 버린다. 학부를 같이 보내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적응이 어려울 법도 하지만 단지 추가모집이 있어서 대학을 바꿔 버렸다는 말을 했던 것처럼 서하루는 주변에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학부 과잠을 아직 입고 다니는 사람도 있는데도 서하루의 물건 중에는 A대 마크도, 우리 학교 마크도 붙어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학생회관에서 노트 한 권이라도 샀으면 거기 학교 마크가 붙어있을 법 한데도. 하지만 세미나 사람 전원이 서하루가 A대 출신인 것을 알고 있고, 타과 출신조차도 서하루보다는 자신이 더 내부인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상황에서 서하루가 A대 마크가 있는 물건을 쓰든 우리 대학 마크가 있는 물건을 쓰든 좋게 보이지는 않을 거였다.

“맛있는 커피는 마셔 본 적 없어. 믹스커피는 달고 텁텁하고, 아메리카노는 쓰고 텁텁하던데. 라테는 덜 쓴데 텁텁한 대신 비리고.”

커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질색할 말이라 다른 사람에게는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해 버린 건, 서하루가 차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물어 봐 줬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티백을 들고 다니면서 학교 정수기에 우려 마시면서 특이한 애 취급을 받았고 대학에 와서도 차 종류가 없는 가게에서는 병 주스를 시키거나 애꿎은 탄산 음료 시키면서 눈총을 받아 왔기 때문에, 나는 내 취향을 누구한테도 말한 적이 없다. 엄마가 여행 기념품으로 사온 차를 영어 설명을 보고 우리면서 맛을 들인 후로, 그냥 별나게 살지 말고 평범하게 살라고,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제발 튀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서 자라서, 나는 커피를 안 마시는 것 외에는 특별한 게 없는 그냥 순한 사람으로 살았다.

“좀 그렇지. 맞아.”

서하루가 말했다. 나는 놀라서 서하루를 보았다.

“고규연, 너 우유 맛이 안 맞나보네. 나도 좀 그렇거든. 오늘 이제 수업 없는데 나랑 같이 어디 안 갈래? 혹시 다른 약속 있으면 할 수 없고.”

둘이 수업이 완전히 같다는 걸 서하루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벌써 기말고사가 코앞이니 많이 들어야 10명 정도 듣는 대학원 수업에 어떤 사람이 있는지 대충은 알게 되는 시점이었다. 3학기 내내 수업이 같았다는 걸 서하루도 아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괜찮아. 어디 가려고?”

스터디 카페에 가려고 했던 참이었지만, 나는 차 이야기를 잘 받아준 게 기뻐서 스터디 카페 정기권이 지갑 안에 들어 있다는 걸 떠올리면서도 가방을 챙겼다. 서하루가 쌤소나이트 가방을 슥 등에 매면서 날 보고 웃었다.

“맛있는 커피 마실 수 있는 곳. 아, 거기 차도 맛있대.”

내가 서하루와 함께 간 건 첫 말 때문이었는지 뒷말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학교 안에도 세미나 때마다 차를 사 오는 커피점이 있고 학교 정문 후문 근처에도 커피점은 많이 있었지만 서하루는 학교 앞 버스 정류장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가서 지하철로 환승하고 다시 한참을 걸어서, 시내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은 야산 근처까지 왔다. 동네 이름은 들어봤어도 여태 별로 와 본 적이 없는 동네였다. 학부 때나 대학원 첫 해부터 지금까지 힙하다고 소문나기 시작한 동네도 아니었다. 주택가에 어린이집과 칼국수집과 중국집, 치킨칩이 드문드문 섞여있는 동네에 무슨 찻집이 있을까 싶었는데 학교를 나와서 거의 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 한 건물 앞에 섰다. 가정집을 개조한 가게였다. 새하얀 색으로 칠해진 벽에 원두 볶는 가게, 핸드드립, 홍차, 밀크티, 같은 글자들이 간판 대신 붙어 있었다. 가게 이름도 대표 메뉴도 영어 알파벳이 아니라 한글로 적혀 있는 것이 오히려 특이해 보였다. 동글동글 다듬어진, 굴림체와 비슷한 글자체도 단순하면서도 정겹게 보였다.

서하루는 쓱, 먼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가정집일 때 정원을 조금 손본 것 같은 뜰에 하얀 파라솔과 검은 테이블, 의자가 놓인 곳이 하나. 천막으로 빛을 막은 테라스에 비슷한 테이블이 또 하나. 나무 문을 밀고 들어서자 거실과 방을 모두 터서 만든 새하얀 실내에 드문드문 다른 테이블과 의자들이 보였다. 커피향이 먼저 훅, 들어오더니 그다음 순간에 잔잔한 음악이 흘러들어왔다. 가사를 알아듣기 어려운 아카펠라가 대화를 거스르지 않을 정도의 높이로 연주되고 있었다. 어렸을 때 할머니 댁이 이런 구조가 아니었을까. 엄마가 어렸을 때 살았던 집이 이런 구조였을까. 주택가의 흔한 구조의 집을 트고 큰 유리창을 단 실내에 손님은 벌써 두 팀이 들어와 있었지만 말소리가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이 공간에서 소리높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은, 묘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는 실내였다.

서하루는 테라스가 보이는 창가쪽 자리에 앉았다. 마주 앉으니 4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주인이 나와서 메뉴판을 건네주고는 돌아갔다. 메뉴판의 첫페이지는 모두 커피였다. 원두 이름이라는 건 알수 있었다. 메뉴 밑에 원두 설명이 조금 작은 글씨로 나란히 적혀 있었다. 신맛이 적고 고소한 맛이 강하다거나 과일향이 난다거나 하는 설명이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다음 페이지는 차 종류였다. 포트넘 앤 메이슨의 차가 다섯 종류, 처음 들어보는 떼오도르의 홍차가 세 종류, 마리아쥬 프레르, 다만 프레르가 네 종류씩. 이름만으로는 무슨 맛인지 모르는 차 아래에도 커피처럼 실론 베이스에 오렌지 필과 수레국화가 들어있는 감미로운 홍차라는 식으로 설명이 적혀 있어서 고르기가 그렇게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모든 차가 핫, 아이스, 밀크 세 가지 종류가 가능하다고 되어 있는 것도 좋았다. 차를 고를 수 있는 크림 티 메뉴에는 스콘과 선택한 홍차가 같이 나온다고 설명이 되어 있었다. 메뉴를 보는 순간 어쩐지 조금 뭔가 먹고 싶어지는 기분이 든다 싶더니 마침 어딘가에서부터 갓 구운 쿠키의 버터향이 실내로 퍼지고 있었다.

“사장님은 커피 파시고, 따님이 홍차 파라서, 타협해서 여기는 둘 다 하는 가게래. 아까 그분이 사장님. 아, 저기 오븐 트레이 들고 나오신 분이 따님이야.”

서하루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카운터 뒤쪽 주방에 오븐이 있는지, 사장님과 똑같은 앞치마에 머리수건을 쓴 사람이 기분좋은 얼굴로 스콘을 접시로 옮기고 있었다.

“커피 한 번 마셔볼래? 입에 안 맞으면 남겨도 돼. 내가 살게.”

“그럼 내가 스콘 살게. 맛있어 보인다. 커피랑 스콘도 어울릴 거야. 안 먹어봤지만.”

내 말에 서하루가 웃었다. 그 순간 서하루의 귀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다이아몬드는 아닐 테고, 에메랄드? 페리도트? 아니면 그냥 모조석일까. 동그란 귓불에 저 정도의 크기 귀걸이가 아무리 귓불에 붙은 디자인이라도 여태 눈에 안 들어온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귀걸이를 하는 타입으로는 안 보였는데. 하긴 이렇게 먼저 말을 걸고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커피숍에 데려올 사람으로도 보이진 않았다.

그 많은 커피 메뉴 중에서 서하루가 시킨 건 브랜드 커피 두 잔이었다. 나는 크림 티로 포트넘 엔 메이슨의 퀸 앤을 골랐다. 커피 매니아들이라고 하면 막 원산지별로 맛을 구별하고 원두를 핸드드립하는 걸 즐기는 이미지 아니었나 싶었지만, 실론을 좋아하지 않는 홍차파가 있는 것처럼 브랜드 커피를 좋아하는 커피파도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여긴 어떻게 알았어?”

“아, 엄……, 어렸을 때 근처에 살았어. 그리워져서 한 번 와 봤는데 여기가 보여서, 들어와보니까 너무 좋아서, 오게 됐지.”

“어렸을 때 근처에 살았어요? 몰랐네. 난 여기서 평생 살았는데 어디서 살았어요?”

사장님이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서하루의 얼굴이 빨개졌다.

“사장님, 개인적인 이야기 막 묻고 그러면 안 된다니까요.”

나란히 따라온 따님 쪽이 스콘과 크림, 잼과 티포트를 테이블로 내려놓으며 말했다. 방금 구운 스콘에서 고소한 냄새가 올라오고, 작은 보울에 담긴 크림과 잼까지도 맛나 보였다. 그렇게 진하지 않은 퀸 앤의 향도 진한 커피 향 아래로 천천히 공기를 채웠다. 더운 날씨인데도 따뜻한 감각이 기분 좋게 느껴지는 그런 향이었다.

“커피 먼저 마셔봐, 아, 먼저 물 한 모금 마시고.”

서하루의 표정이 너무 들떠 보여서 나는 입을 헹구듯 물을 마시고, 커피를 조금 입에 머금었다. 쓴 맛이 나겠지, 텁텁한 뒷맛이 남겠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산뜻하게 마무리됐다. 처음은 향긋했고, 다음은 고소했고, 뒷맛은 달콤했다. 단맛이라고 해도 되나 싶은 아주 잠깐의 달콤한 여운. 그가 날 보고 있다가 빙긋 웃었다. 표정을 보면 이미 알겠다는 듯이. 이렇게 진한 커피가 어떻게 쓰지도 텁텁하지도 않을까. 홍차와는 다른 깔끔한 맛. 이 커피라면 분명히 스콘과도 잘 맞을 것 같았다. 클로티드 크림을 조금 발라서 스콘을 한입 물었다. 역시, 어울렸다. 고소한 향이 스콘과 만나서 더 강해졌고, 크림의 기름기를 씻어 줬다. 마치, 홍차처럼.

“맛있다.”

“스콘 맛있지. 잼도 직접 만드시는 거라 맛있어.”

“어머, 잼 만드는 거 말 안 했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하긴, 파는 거랑 맛 전혀 다르죠.”

따님이 다가와 웃으며 접시를 내려놓았다. 동그랗게 올라오는 스콘이 조금 기울어져서 부풀어오른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건 실패작 스콘. 맛은 괜찮으니까 서비스에요. 아까 같이 드리면, 원래 크림 티에 스콘 네 개 나온다고 생각하실 것 같기도 하고, 또 실패작을 정식 접시에 드리기가 좀 그래서.”

“고맙습니다.”

서비스로 나온 스콘을 서하루 쪽으로 조금 밀어 놓았더니 서하루는 냉큼 들어서 크림을 발라 먹었다.

“차도 좀 마실래?”

“음, 맛없는 커피보단 맛있는 차를 좋아하는데, 맛있는 차보다 맛있는 커피가 더 좋긴 하거든.”

한 잔을 더 비우고 나더니 그는 슥 자리에서 일어나서 카운터까지 갔다 왔다. 좀 있다가 사장님이 다시 커피잔을 가지고 왔다. 두 잔 중에 잔 하나는 한 모금쯤 될 것 같은 작은 양만 들어 있었는데, 얼핏 다른 향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사장님이 큰 잔을 서하루 앞에, 작은 잔을 내 앞에 놓았다.

“이건 에스메렐다 게샤라고 하는 커피인데요, 이건 시음용 잔이에요. 친구분이 시음용을 조금 덜어달라고 하셔서. 산뜻한 계열이니까 한 번 맛보세요.”

“여기 블랜드 입에 맞으면 이것도 아마 입에 맞을 거야. 나는 좋아하거든.”

그가 말했다.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셔 입을 헹구고 시음잔의 커피를 입에 머금었다. 처음 커피보다 가벼웠다. 조금 강한 신맛으로 시작하나 싶더니 금방 과일향으로 바뀌었다. 고소한 맛은 더 깊고 다채롭다. 견과류 계열의 가향차를 떠올리는 고소함이 마지막까지 남았다. 그러면서도 텁텁하지 않다. 그가 브랜드 커피를 좋아하면 좋아할 거라고 말했던 것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다음에 이 가게에 오게 된다면 이 커피를 주문하고 싶어질 것 같기도 한 맛이었다.

“귀한 원두고, 좋아하는 사람도 많은데, 나는 맛있게 내리지는 못하겠더라. 여기선 마시는데 원두를 사 가지는 못하겠어.”

“커피 정말 좋아하는구나.”

“맛없는 커피는 안 좋아해.”

“그거야……, 나도 장미향 홍차는 안 좋아하는걸.”

“나는 꽃 들어간 거 다 잘 못 마시는데 마음이 넓네.”

나는 서하루의 말을 들으면서 그가 한 학기동안 말하는 걸 들은 것보다 오늘 더 많은 목소리를 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학부 때도 모든 동기들과 친하게 지내는 건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걸 같이 좋아하는 척 할 수 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아이돌의 이름을 구별할 줄 알고 새 앨범이 좋다고 보조를 맞춰 줄 줄 알고, 반 대항 체육대회에서 개인전 대표는 못 나가도 단체전에 참여할 수는 있을 정도로 살아 왔다. 지금까지 유일한 변수가 대학원이었다. 딱히 공부를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던 내가 대학원을 가고 싶다고 하자 부모님은 처음으로 놀랐다. 취업 준비를 안 한 건 아니다. 토익도 치르고 취업 스터다도 했다. 하지만 내가 어떤 회사에 취업하고 싶은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들 그런 거 모르고도 취업한다는데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원을 가겠다는 걸 부모님은 말리지도 못했다. 미리 대비한 적이 없어서 그럴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도, 대학교 때도 내 차 취향을 말한 적이 없다. 대학원 1학기가 거의 끝나가는 이 시점에 이렇게 차 이야기를 할 사람을 만날 줄은 몰랐다. 이건 무슨 인연일까. 그는 어쩌다 A대의 원서 접수를 놓치고 우리 대학에 와서, 하필 두 명의 교수님에게 튕긴 다음에 우리 교수님에게 왔을까. 제일 먼저 서하루의 면접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옮긴 교수님. 그래서 세미나 내내 서하루의 특이함을 찾아내려고 눈을 빛내는 사람들로 가득한 곳에 왔을까.

“어쩌다가 접수 시기를 놓쳤어? 대학원.”

그가 원서 접수 시기를 놓치지 않아서 A대 대학원엘 갔다면 나와는 만나지 않았을 테지만, 나보다 더 대학원에서 겉돌고 있는 서하루가 어쩐지 신경이 쓰여서, 나는 그렇게 물었다.

“4학년 때 학과 사무실 같은 데 붙여두잖아. 언제 원서 넣어야 된다고. 나도 그렇게 봤는데.”

“그냥, 뭐 정신 차려 보니까 원서 접수 기간이 지났어. 그것뿐이야.”

“그래도 후기로 가는 방법도 있고. 한 학기 늦어지더라도 A대 계속 하는 걸 권하지 않아? 집에서라든가.”

나는 다른 사람 일에 말을 보태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누가 대학원을 가든 가지 않든, 어디를 선택하든, 그 사람의 일에 내가 뭐라고 말을 하는 경우는 없다. 보통은 그랬다. 지금 내가 마신 게 커피나 차가 아니라 술이라면 취해서라고 변명이라도 하겠지만. 서하루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의식불명 상태였어. 깨어났더니 원서 접수 기간은 어제로 종료. 나, 2년 지나면 여기 못 있어서, 대학원은 마치고 싶어서, 그래서 거기 갔어. 대학원을 3학기 만에 마칠 방법은 아무래도 없더라고. 혹시 논문 통과 못해도 졸업은 못 하겠지만 수료는 될 거니까. 여기 있는 2년 동안은, 여기 이 동네도 자주 오고, 대학원도 열심히 다니고, 그러고 싶어서.”

나는 서하루와 친한 사이가 아니다. 처음 만난지는 1년이 넘었지만, 말을 나눠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겨우 차와 커피 이야기를 했다고, 내 취향 이야기를 그대로 다 받아주는 상대를 처음 만났다고, 나는 여태 잘 지켜오던 규칙을 어기고 경계를 넘었다. 유일하게 내 취향을 말한 상대에게, 거리를 지키지 못하고 불쑥, 사람마다 사정이 다른 법인데.

“괜찮아. 이거 물은 거 너 처음 아니야.”

서하루가 웃었다.

“작년부터 엄청 물었어. 일본인이라서 여기 온 거냐고 물은 사람도 있었어. A대에 반일동호회가 있다는데 그래서 대학원 안 간 거냐고. 내 이름이 일본어로 봄이라는 뜻이라고, 아니 뭐 나도 일본어 할 줄 알지만, 내 생일도 봄인 건 맞는데, 하루는 한자로 어떻게 쓰냐고 해서 한자 없다고 했더니 일본어냐고 묻더라고. 한글인데, 하루 이틀 할 때 하루인데.”

내 표정을 보고 그가 계속 말했다. 나는 대학원 동기들의 수많은 말들을 떠올렸다. 내가 있을 때도 내가 없을 때도 그렇게 서하루에게 말을 걸던 사람들이 있었다. 수업 분위기는 어때, 거기 교수님이랑 비교해서 어때, 박사까지 할 생각이야? 박사도 여기서 할 거야? 돌아갈 거야? 어떻게든 A대 이야기를 묻고 싶어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 질문들을 들으면서 매번 생각했다. 아 참 요령없는 사람이지. 면접에서 왜 그런 대답을 했을까. 대학원 홈페이지에서 교수님 약력이라도 좀 보고, 우리 교수님들이 어떤 분야 논문을 썼는지 좀 찾아보고, 그러고 대답을 했으면 될걸. A대 교수님들도 물론 훌륭하시지만 저는 여기의 모 교수님의 연구에 함께 참여하고 싶어서, 대충 그런 말을 붙였더라면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뒷말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학부에서 성적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그런 뒷말들도, 어쩌면 안 들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게 한 학기가 넘어가고 3학기 째가 되어도, 새로 대학원에 들어온 신입생들조차도 서하루가 A대 출신이라는 걸 알고 있을 정도로 계속됐다. 서하루는 장학금을 받으면 받는다고, 못 받으면 못 받는다고 입에 오르내렸다. 20대 중반씩이나 된 사람들이 그렇게 뒷말들이 많을 줄은 몰랐다.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고, 30대도 있는데.

“그러니까 괜찮아. 더 물어볼 건 없어? 우리 3학기만에 말하는 건데 더 물어볼 거 있으면 물어봐.”

“…2년 뒤면, 내년 봄이야? 어딜 가는데?”

서하루의 표정이 너무 평온해서, 나는 평소라면 하지 않을 질문을 또 더했다.

“어? 아. 그건……, 미안, 그건 못 말해주겠다.”

“으응, 미안해 괜한 거 물어봐서.”

서하루는 나를 보더니, 눈 앞에 놓인 커피를 한번에 들이키곤 씁쓸하게 웃었다.

“갑자기 불러냈는데 같이 와 줘서 고마워. 나 여기 다른 사람하고 온 거 처음이야. 혼자라도 괜찮다고 계속 생각했는데, 둘이 오니까 더 좋다. 서비스 스콘도 받고.”

 

나는 서하루와 가끔 그 커피점에 갔다. 기말고사까지는 세미나가 있는 날 저녁에 주로 갔고, 4학기 째는 논문 세미나까지 해서 일주일에 두 번 갈 때도 있었다. 서하루는 매번 브랜드 커피를, 가끔은 에메랄드 게샤를 한 잔 추가해서, 그렇게 마셨고 그때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 좋아하는 책, 좋아하는 그림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가 이야기하는 걸 듣고 있다가 가끔 말을 보탰는데, 그럼 그는 귀신같이 내 취향을 맞췄다. 그럼 다음에 이 영화를 한 번 봐 봐. 너 좋아할 것 같아. 그건 때로는 책 이야기였고 때로는 그림 이야기였다. 나는 취향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서하루는 나를 취향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가 소개한 것들은 모두다 내게 너무 잘 맞는 것들이었다. 가끔은 절대 보지 말라고 했던 걸 오기부리듯이 본 적도 있었는데 하나같이 너무 취향이 아니었다. 세상엔 이렇게 취향이 맞는 사람도 있구나.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커피점 외의 다른 가게에서는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에게 커피를 못 마신다고 말하는 대신 허브차를 좋아한다고 말하게 됐다. 마지막 학기에 우리는 무사히 논문을 통과했고, 논문 심의에 통과한 날 박사 과정의 선배는 내게 축하한다며 페퍼민트 허브티 한 통을 선물했다. 너는 커피 안 마시니까, 그렇게 말하며 선배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콜드브루 커피를, 내게는 허브티를 선물했다. 나는 이제 커피를 마시지 않는 사람, 허브티를 좋아하는 사람이 됐다.

 


그리고 갑자기, 서하루와의 연락이 끊겼다. 가끔 메신저로 말을 걸고 SNS에 댓글을 달던 서하루는 갑자기 모든 것을 그만두었다. 수업도 끝나고 논문도 통과됐으니 조금은 쉬고 싶어진 걸 거라고 생각했지만 겨울이 깊어가도록 연락이 끊기는 건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서하루가 예전에 남긴 댓글을 타고 서하루의 SNS로 들어갔다. 늘 풍경 사진이나 카페의 메뉴 같은 것들이 올라와 있던, 참 재미없던 서하루의 SNS는 전혀 다른 이미지로 바뀌어 있었다. 대학원 입학 이후의 사진이 모두 지워져있다는 걸 이내 알았다. 남아있는 가장 최근의 사진은 A대 졸업식 플랙카드와 교정이 찍힌 사진이었다. 서하루의 상태 메시지가 바뀌어 있었다.

‘기억나지 않는 걸 어쩌라고.’

문득 생각났다. 서하루는 학부 4학년 때, 의식불명으로 대학원 접수 시기를 놓쳤다고 했다. 다시 또 문제가 생긴 걸까. 아니면 2년 후에 여기를 떠난다고 했던 것처럼 어디 떠나는 걸 준비하고 있는 것 뿐일까.

[ 괜찮아? 왜 연락이 안 돼? ]

메시지를 보냈다. 깜빡거리던 표시가 사라지고 답이 올라왔다.

[ 누구세요? 고규연 씨? 절 어떻게 아시죠? ]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 친구 등록이 되어 있네요. 저랑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 ]

서하루의 글이 한 번 더 올라왔다.

[ 대학원 동기예요. 지도교수님이 같았고요. ]

설명을 달고 있는 게 이상했다.

[ B대 대학원 맞죠? 아니 내가 거기 가려고 했던 건 맞는데, 다닌 기억이 안 나거든요. 이거 학과에서 문자는 자꾸 오는데 저는 기억이 안 나고요. ]

[ 세미나실로 오실래요? 제가 아는 건 알려드릴 수 있어요. 저는 지금 출발하면 세 시까지는 갈 수 있는데요. 아니면 다른 날로 잡으셔도 돼요. ]

[ 갈게요. 세 시, 세미나실이 어디죠? ]

어이없는 대화를 마치고 나는 대충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부모님은 논문이 끝나고 박사 과정에 진학하겠다는 내 말에 반대하지 않았다. 마지막 학기에 취업 준비는 하지 않고 논문에만 열심이었으니 이번에도 취업하지 않을 거라고 짐작하고 계셨던 모양이었다. 나는 서하루가 2년 후 어디를 가야 한다는 건 그새 잊어버리고 어쩌면 서하루와 함께 박사과정을 계속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서하루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면, 대학원 2년의 시간이 그에게서 완전히 사라져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 선배, 어쩐 일이세요? 그러잖아도 메시지 보내려고 했는데. 우편물 와 있었더라고요. 요새 연구실로 우편물 오는 건 거의 스팸이라서 그런 줄 알았어요.”

교수님 조교로 일하는 후배가 나를 보고 반갑게 말을 건넸다. 대학원생에게 우편물이 오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지만, 대개는 별로 쓸 데 없는 것들 뿐이어서 조교가 목록만 알려주고 한꺼번에 폐기하기도 했다. 그런데 내 우편함에, 조금 두꺼운 봉투가 하나 들어 있었다. 서류봉투가 아니라 일반 우편봉투였는데, 들어있는 것이 두꺼웠다. 딱 홍보물이 들어 있을 법한 두께였는데 봉투에 적힌 것이 자필이라는 게 문제였다. 처음 보는 서하루의 주소, 전에도 본 적 있는 서하루의 글씨.

“서하루 선배에요? 웬일이래요. 직접 만나서 전해주면 되지. 선배 둘 친하잖아요.”

“그러게.”

나는 대충 말을 받고 편지 봉투를 뜯었다. 봉투 안에는 여권 정도의 두께에 여권보다 조금 긴 실제본 수첩이 두 권, 편지와 함께 들어 있었다. 나는 세미나실에서 ‘서하루’가 오기를 기다리며 편지를 읽었다.

「 안녕, 규연아. 원래 이런 거 남기면 안 되는데, 아무래도 내가 떠나고 나면 ‘서하루’가 널 많이 힘들게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록을 해 보기로 해. 이건 너만 읽었으면 좋겠어. ‘서하루’에게 알려줄지는, 음, 그건 네 판단에 맡길게.

나는, ‘서하루’가 의식을 잃고 있던 2년 동안에 그 몸을 빌려 살았어. 나는 5년 뒤에 태어날 사람이고, 25년 뒤에서 왔어. 내가 사는 세계는 과거로 여행이 가능하지만, 나와 관계있는 사람의 몸을 빌려서 오는 게 제일 실패 확률이 적어서, 그래서 나는 ‘서하루’가 의식을 잃은 사이에 여기로 올 수 있었던 거지. 사실 내가 여기 와서 과거를 뒤틀어버렸으니까 내가 돌아간 뒤의 세계가 어떻게 바뀌어 있을지 걱정이 되긴 하지만, 그건 각오하고 온 거니까, 규연이 너는 너무 신경쓰지 말았으면 해.

‘서하루’는 학부를 다니면서 좀 심하게 괴롭힘을 당했어.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을게. 다만 선배는 물론이고 후배들까지 괴롭힘에 참가해서, 서하루는 목숨을 끊을 결심을 했어. 그래서 의식 불명이 됐던 거고.

‘서하루’는 B대, 그러니까 우리가 함께 다녔던 거기에 다니고 싶어했어. 우리가 함께 다녔던 커피점은 학부 때부터 좋아했던 바로 아래 동네에 있었는데, 사실 한 번도 거기 들어가 보질 못했어. 학부 때 커피를 좋아한다고 했다가 커피 매니아라는 동기에게 심한 소리를 들은 적이 있거든. ‘서하루’는 자살 시도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유서에 그렇게 적었어. B대에 갔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좋아하는 가게를 겁내지 않고 들어갈 수 있을 거다. 사람들과도 새로 시작할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나는 내게 주어진 2년 동안에 그 삶을, ‘서하루’에게 주고 싶었어. 가능하면 그 커피점에 함께 갈 수 있는 친구도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3학기 때까지 그게 안 됐어. A대 출신 ‘서하루’의 새 시작점에서 내가 말을 잘못 했던 탓이지. 수습하려고 해도 쉽지 않았는데, 규연이 널 만났어.

규연아, 너는 내 커피 이야기를 제일 열심히 들어 준 사람이야. 내가 좋아하는 걸 온전히 다 들어 주고, 네 취향을 이야기해 줬어. 그래서 나는 마지막 반년을 너무나 즐겁게 보낼 수 있었어.

수첩은, 2년 동안 쓴 다이어리야. 똑같이 쓴 거 두 권이니까 한 권은 ‘서하루’에게 전해주면 좋겠어. 아마 깨어나면 ‘서하루’는 자기가 모르는 2년동안의 일 때문에 많이 힘들테니까. 딱 거기까지만 부탁할게. 만약 ‘서하루’가 도저히 상대하기 싫은 상대가 아니라면, 내 이야기를 들어줬던 것처럼 ‘서하루’의 이야기를 들어 주지 않을래?

미리 설명하지 않아서 미안해. 하지만 도저히 네 얼굴을 보곤 말할 수가 없더라. 네가 믿어줄 것 같지도 않았고. ‘서하루’를 만나서 수첩을 전해줘. 그리고 내 말이 사실이라는 걸 믿을 수 있게 되면, 부탁할게, ‘서하루’의 이야기를 들어줘.

2년 동안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내가 역사를 아주 바꿔 놓은 게 아니라면 5년 뒤에 나는 ‘서하루’를 만날 거야. 그때 네가 옆에 있으면 정말 기쁠 것 같아.

네게 잠시 머물렀던 하루.」

편지의 내용은 믿기 어려웠지만 그동안 SNS에서 모두 지워진 사진이나 메시지 반응을 생각해보면 또 조금은 그럴싸하기도 했다. 서하루가 이런 거창한 거짓말을 하려고 나와 일부러 연락을 끊고, 내가 받을지 못 받을지 모르는 사무실로 이렇게 편지를 보내고, 천연덕스럽게 내 메시지를 그렇게 받는다고? 서하루가?

그때, 세미나실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섰다. 부스스한 얼굴의 서하루였는데, 서하루가 아니었다. 안경을 끼고 있고, 귀걸이를 하지 않았다. 녹색 귀걸이. 동그란 귓불에 붙어 있던 반짝이던 녹색.

“고규연 씨 되세요?”

서하루인, 서하루가 아닌 목소리가 물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서하루 씨. …여기 앉으세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요.”

“커피라도 사 올까요?”

서하루가 물었다. 나는 웃었다.

“저는 커피를 안 마셔서요. 마실 것 필요하세요?”

고개를 저으며 서하루가 앉았다. 나는 서하루에게 수첩 두 권 중에 하나를 건네고,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5년 뒤에 그는 우리에게 올 것이다. 25년 뒤에 그는 과거로 갈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에게는 나와 서하루가 있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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