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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원경 DollTherapy

2022.02.01 00:0002.01

Dolltheraphy

 

갈원경

 


그 애를 지운이 만난 건 거의 오 년만의 일이었다. 고3때 같은 반이었고, 선택과목이 똑같이 화학이었고 같은 대학을 지망하고 있었다는 공통점 때문에 고3 시절의 40명 가까운 학급 사람들 얼굴 가운데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화영이었다. 하필이면 그 모습을 TV에서 보았다는 것이 예상 밖이라면 예상 밖이었지만.

지운과 화영은 똑같이 지망하던 대학에 떨어졌고 다른 군의 학교에 합격했다. 두 개의 학교는 전혀 달랐다. 화영이 두꺼운 안경을 쓰고 졸업식 내내 울먹이던 것을 지운은 기억했다. 다른 대학 영문과엔 가기 싫어, 라는 말로 그 해, 대학입시에서 모두 떨어진 친구들의 미움을 사버린 그 애의 실내화엔 매일 가시와 압정과 벌레가 교대로 들어 있었다. 여드름이 이마 가득히 나 있던 갈래머리의 아이. 지운은 TV에 나온 새 뉴스진행자의 얼굴이 그 화영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고 고개를 돌리다가, 진행자의 말에 다시 TV를 쳐다보았다.

“이상 진행에 고화영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마의 여드름이 없는 건 당연하다. 얼굴 윤곽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10대 때의 통통한 얼굴이 약간 갸름해졌고 눈가에 웃음이 맺힌 정도가 지운이 일주일 동안 그 뉴스를 지켜보면서 찾아낸 차이점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화영은 엄청나게 변해 있었다. 감색 수트의 정장을 차려입고 조금 당당하고 거만하게 시선을 내리깔아 뉴스를 차분히 읽어가는 그 목소리는 분명 화영의 것이었음에도.

“웬일로 뉴스를 그렇게 챙겨 보냐?”

“…그냥.”

어머니의 질문에 대충 얼버무린 지운은 도망치듯이 방으로 들어왔다. 아무리 보일러를 틀어도 서린 냉기가 사라지진 않는다. 텅 빈 벽에 예전에는 누군가의 그림이 커다랗게 걸려 있었다. 2년 전, 그림과 사진을 모두 태워버린 후에 저 벽을 채울 것을 지운은 아직 찾지 못했다.

“집 안에만 있지 말고 좀 나다녀라. 젊은 애가 꼴이 그게 뭐야?”

거실에서 어머니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운은 헐렁한 항공 점퍼를 덮어쓰고는 어머니의 시선을 피해서 밖으로 나왔다. 그 뒤로 지운의 어머니가 옷은 또 그게 뭐냐고 덧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사람은 변화하기 마련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변한 모습을 되돌릴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다지 없었다. 지운은 시내 한복판에 나와 패스트푸드점의 밖으로 난 창가에 앉았다. 2층에서 내려다보는 거리에는 사람들이 빼곡하게 밀려가고 또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올해의 유행은 파스텔 레몬. 작년 이래로 유행하는 아이템인 9부 바지에다 스니커즈, 파스텔레몬의 9부 자킷이나 가디건을 걸친 여자들은 하나같이 닮은 얼굴이었다. 백화점 슈퍼에 들렀다가 올라오는 화장품매장, 개당 10만원이 훌쩍 넘는다는 수입 브랜드의 매장 앞에 정글처럼 모여있는 여자에게서 지운은 늘 토할 것 같은 역겨움을 느끼곤 했었지만,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왜 저다지도 닮아가려 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지운이 아냐?”

경쾌한 하이톤의 음성에 지운은 뒤를 돌아보았다. 거리를 메우고 있는 사람들과 똑같은, 그러나 다른 모습을 하고 TV 속의 화영이 눈앞에서 웃고 있었다.

“얘, 나 모르겠어? 나 영이, 너랑 짝이었잖아. 같은 대학에 원서 쓰고.”

그래, 그런 이름으로 그녀를 불렀었지.

“알아. 화영이.”

머쓱한 답변에 화영은 환하게 웃으면서 지운을 잡아 일으켰다.

“나가자, 너무 오랜만이야 얘.”

그리고 지운은 일어나면서야 화영의 옆에 서 있는 남자의 존재를 인식했다. 선 지운의 키와 비슷할 정도로 작달막한 키에 좁은 어깨의 남자는 지독하게도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근처의 커피전문점에서 지운은 화영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녀가 이따금 까르르 웃으면서 꺼내는 과거의 이야기는 남의 것처럼 생경했다.

“참 신기하다. 오늘 아침에, 니가 갑자기 보고 싶었거든.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어.”

“뉴스에서 매일 보는걸, 나는.”

한참 만에 입을 연 것 치고는 궁색한 반응이었다.

“참, 요새 뭐하고 지내니, 넌?”

“그냥 있어. 백수.”

이 좋은 날에, 20대 중반의 여성이 화장기 없는 얼굴로 구겨진 항공점퍼를 입고 혼자 패스트푸드점에 앉아 있다면 그 정도는 짐작해 주어도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운은 적어도 그녀의 앞에서는 비참해져서는 안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 다음 날, 다시 화영의 얼굴이 TV에 나오는 늦은 오후에 지운은 전화를 받았다.

“무영입니다.”

감정 없는 허스키한 음성에서 지운은 어제 만난 좁은 어깨의 남자를 떠올렸다. 무영無影이라는 발음 탓이거나, 그 새까만 옷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 번 만났을 뿐인 사람의 음성을 기억낸 자신에게 지운은 애써 변명거리를 만들어냈다.

“전화번호는 어떻게 아셨어요?”

“고화영 아나운서에게 물었습니다.”

친구라는 말에는 안 어울리는 호칭인걸. 지운은 피식 웃었다.

“지금 시간 되십니까?”

“예?”

“창 밖에 있습니다.”

거실 커튼을 조금 열어보니 핸드폰을 들고 무영이 서 있는 게 보였다. 그 말을 들으면 당연히 창 밖을 내다볼 텐데도 무영은 지운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것 같은 자세로 그냥 서 있기만 했다.

“잠깐만요.”

전화를 끊고 지운은 어제의 항공점퍼를 다시 걸쳐입었다.

 

그다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던 두 사람이 결정적으로 가까워지게 된 계기를 따지자면 화영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을 길에서 마주친 화영은 예의 그 하이톤의 웃음으로 잘됐다고 말해 주었던 것이다. 무영이 지운에게 자신의 직업을 이야기한 것은, 그들이 서로 말을 놓고 나서도 한참 후의 일이었다. 지운이 무직이라는 것 때문이었는지 무영은 일에 관계된 이야기는 절대 꺼내지 않았다. 그가 새까만 옷에 걸치고 다니는 악세사리들이 모두 다 특이하다는 것, 그는 항상 가방을 들고 다니지 않는다는 것, 그의 구두는 언제나 잔뜩 먼지를 쓰고 있다는 것, 그가 항상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 그가 한글을 쓰는 데 서투르다는 것, 그런 것들에 지운의 호기심이 깊어져서 먼저 질문을 할 때까지 무영은 자신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인형 공방을 하고 있어.”

무영은 지갑에서 얄팍한 명함 한 장을 꺼내 지운에게 내밀었다. 지운은 미색 한지로 된 명함을 조심스럽게 받았다. 뒤가 언뜻 비칠 만큼 얄팍한 한지에는 [ 인형공방 'Dream' , doll master 무영] 이라는 글자 아래에 이제는 지운이 알고 있는 그의 핸드폰 번호가 찍혀 있었다. 지운은 그를 알고 나서 비로소 아직까지 017로 시작하는 개인번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었다.

“인형 공방이 뭔데?”

“주문제작으로 특정 사람을 닮은 인형을 만들어. 곁에 두고 관찰하는 것으로 정서 치료에 도움이 되지.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달테라피Dolltherapy라고 할까.”

“끔찍할 거 같은데, 나랑 똑같은 얼굴의 인형이 누군가에게 있다면.”

“본인의 것 외엔 만들지 않아. 인형은 자신의 페르소나Persona니까.”

무영은 담담한 표정으로 지운에게 말했다. 지운은 단기간에 자신이 이 사람에게 그렇게 매료된 이유를 찾아보려 했다. 왜소한 몸집에 표정 없는 얼굴의, 이 좁은 어깨의 남자에게 자신이 호감을 느끼게 된 것은 두 사람 사이에 약간의 동질감과 또 약간의 이질감이 존재한다는 뜻일테지만. 글쎄, 그게 뭘까.

“참, 내일 나오겠군. 그 인터뷰.”

“인터뷰?”

“얼마 전에 공방에 방송국 사람들이 왔었어. 밤의 초대석이라던가.”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것을 보았던 화영은 나중에 지운에게, 지운을 처음 봤던 그 날의 이야기를 했다.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묻지도 않았는데 화영은 무영에게 뭔가를 돌려줄 의논을 하느라 만났던 거라고 했었다. 돌려줄 것. 지운은 갑작스레 그것이 어쩌면 인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뭐 어차피, 비주류문화에 대한 호기심거리. 새로운 걸 찾아서 사방에 그물을 던지는 거지. 걸려든 게 잘 먹히면 다행이고. 아니라도 한 번 분량은 될 테니. 타이틀이 특이하면 사람들 시선을 끌 수는 있을 테니까.”

지운은 조금 웃었다.

“특이한 사람이긴 하지 무영씨, 사귀는 사이인데도 내 옷차림엔 관심도 없잖아. 인형 외엔 아무 것도 관심이 없는 걸까?”

“난 항상 당신을 보고 있어. 주의깊게.”

무영의 말에 지운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간섭하지 않는 것 뿐. 흔한 남자들처럼 자신을 재단하려거나 바꾸려고 하지 않고, 자신이 뭘 하든 묵묵히 지지해주는 사람.

“언젠가 내 인형들을 보게 되면 알겠지.”

무영은 지운의 아파트 현관 앞에서 아주 조금 웃었다.

“잘자, My Doll.”

“잘 자요.”

 

다음날, 자정 즈음에 TV에서 본 프로그램에서 지운은 무영을 보았다. 화면 속의 무영은 더욱 더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영의 말대로 현대가 비주류문화의 시대로 비유될 수 있다는 소개말이 있었고, 아직은 그 비주류의 유형에 들지 않았지만 조만간 그러리라고 예상되는 문화라고 하며 무영의 얼굴을 비추었다. 무영의 가슴께로 자막이 깔렸다. 인형제작소 'Dream' 의 운영자.

TV 카메라는 무영의 작업실을 비추었다. 넓은 창고 한켠의 문을 열자 몇 개의 인형이 카메라에 잡혔다. 인형의 수가 적어서 리포터는 조금 실망한 듯 했다.

“대량생산은 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인형은 하나 뿐이니까요.”

리포터의 표정을 읽은 듯이 무영이 말했다. 그러나 지운은, 자신이 상상했던 것이 얼마나 잘못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인형은, 적은 수였지만 충분히 존재감이, 위화감이 느껴지며 거기 있었다. 왜 그렇게 느껴졌는지 지운은 곧 깨달았다. 인형들은 위 아래로 늘여놓은 마네킹의, 인형의 프로포션이 아니었다. 목이 좀 더 짧고 얼굴은 조금 더 크며 하체는 조금 더 짧은, 인간의 프로포션. 그 세 개의 인형 중에 유일하게 얼굴의 윤곽이 뚜렷이 잡혀있는 인형은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지운은 그 얼굴이 왜 낯이 익는지를 잠시 생각했다. 그것은 최근 스캔들로 잠적한 영화배우 H양의 얼굴이었다.

지운은 무작정 무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정부터가 무영의 작업시간이고 그 시간에는 전화를 안 받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열 번 가까이 벨이 울리고 나서야 무영은 귀찮음이 잔뜩 묻어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TV에 나오는 인형 말야.”

대뜸 묻는 말에 무영이 전화기 피식 웃었다.

“H양이냐는 말이라면, 맞아. 한 달 전에 주문을 받았어.”

한달 전이면 막 H양의 스캔들이 터질 무렵이었다. 어떻게 무영의 인형공방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지, 지운은 묻지 못했다.

“바닥까지 내려간 사람이 달테라피를 가장 필요로 하니까.”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하고 싸늘했다. 지운은 자신도 모르게 수화기를 내려놓아버렸다. 자신의 심장소리가 귀를 채울 것 같이 크게 들렸다.

 

3년 전까지 지운이 사귀던 사람은 미대생이었다. 누구나 대학교 1학년 때는 자신의 환경 모든 것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기 마련이었지만 지운에겐 그것이 자신만의 고민인 것처럼 느껴졌다. 고등학교 3년간 계속 꿈꾸어왔던 그 대학에 갔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 같았다. 수업은 지루하거나 지운이 생각하기에 핵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교수들은 무력하거나 권위적이었다. 동아리에서는 계속 술을 마셨다. 모두가 기꺼이 취하는 그 분위기가 억지스럽고 위선적으로 느껴졌다. 술김에 보이는 사람들 모습이 소름끼치도록 역겨웠다.

수업을 빼먹고 학생회관에서 하던 미대 정기 전시회를 갔을 때 지운은 그를 만났다. 붓이나 나이프를 긁어서 그린 듯 거친, 커다란 붉은 캔버스 앞에서 지운은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그 뒤에서 그가 지운을 불렀다.

“오래 보고 계시네요. 신입생이에요?”

 

지운은 침대에 걸터앉아 비어 있는 벽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언제나 무채색의 옷만을 입었던, 언제나 원색의 그림만 그렸던 그 사람의 이름을 지운은 절대 입에 올리지 않았다. 먼저 자신이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던 유일한 사람이었고, 힘들 때면 울음을 보이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렇기때문에 그 사람이 한 달 가까이 지운을 피하고 연락을 끊었을 때조차도 지운은 그와 자신이 헤어지게 될 거라는 불안감을 억지로 밀어버리곤 했었다.

그해 겨울, 모든 것은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2년간 준비해 온 편입시험에 불합격한 것을 확인한 날 아침, 퉁퉁 부은 눈으로 지운은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처음으로 결번이라는 안내가 나왔다. 나 좀 봐, 몇 백번은 걸었을 번호를 잘못 누르다니 참 정신이 없긴 하구나. 피식 조소하며 전화를 다시 몇 번을 되풀이하고 나서, 우편함에서 그가 보낸 긴급속달편지를 개봉하고 나서, 지운은 며칠을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너는 자신의 불행의 무게에 눌려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나는 널 변화시킬 수 있다고 착각했다. 니가 변화하지 않는다면 결국 누구도 널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나선 무엇이 더 자신을 절망에 빠뜨렸는지 지운은 구별해낼 수 없었다. 다른 모든 일들이 그렇듯 시간 앞에서 원인은 희미해지고 원래의 결과는 다른 일을 낳고 반복되어 현재의 결과를 만드는 것에 불과했다. 지운은 유난히 싸늘하게 느껴지는 빈 벽을 바라보며 무영을 떠올렸다. ‘바닥까지 내려간 사람이 달테라피를 가장 필요로 하니까.’ 지운은 중얼거렸다. 지금 나는 바닥인가? 만약 지금이 바닥이 아니라면 얼마나 앞으로 더 내려갈 수 있는 걸까.

지운이 무영에게 그날 이후로 전화를 하지 않았다. 무영도 그동안 아무런 연락도 해 오지 않았다. 이따금 TV를 켰을 때 뉴스에서 화영이 나오면 지운은 몇 번인가 채널을 돌려버렸고, 그리고 얼마 후엔 그저 물끄러미 화영을 응시하게 되었다. 그렇게 일 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꽤 여러 것이 바뀌었다. 화영이 파격적으로 9시 뉴스의 앵커가 되고, 잠적했던 H양이 신인 감독의 영화에서 자신의 이미지와 전혀 다르게 밑바닥에서부터 일어나는 여성의 연기를 하면서 다시 복귀했다. 몇 개의 잡지에서 다시 보게 된 H양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백치미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그녀가 갑작스레 연기파의 여우로 주목받게 된 것에, 지운은 다른 이유를 떠올릴 수 없었다. 계속해서 지운은 무영의 마지막 전화를 떠올렸다. ‘바닥까지 내려간 사람이 달테라피를 가장 필요로 하니까.’ 그리고 오늘 저녁, 지운은 연예가의 소식을 다루는 프로그램에서 H양의 결혼식을 보았다.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마치 무영의 아트리에에서 보았던 인형처럼 보였다.

변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아.

지운은 전화기를 들었다. 1년간 소식을 끊어버린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지운은 그때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그 사람의 목소리가 마치 인형이 말하는 것처럼 싸늘해서, 자신이 이미 사랑하게 되어버린 그 사람이 사람이 아닌 것 같아서 그랬다는 것을 떠올리지 않으려. 자신이 끌렸던 세상에 대한 무관심함과 담담함과 세심한 배려만을 떠올리려 애썼다. 전화벨이 10번쯤 울리다가 저편에서 머리부터 신경을 깨어놓는 서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Dream입니다.”

“무영씨?”

“아.”

전화기 너머에서 무영의 웃음이 들린 듯 했다. 마치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처럼, 마치 어제까지 연락을 하고 지냈던 사람처럼. 아니, 지금 지운의 연락이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내일 와. 줄 게 있어.”

 

다음날 무영의 작업실에서 지운은 자신의 인형을 보았다. 등신상. 자신과 완전히 똑같은 키와, 얼굴과. 끝이 날렵하지 않고 뭉툭한, 짧은 손톱의 손. 작고 볼품없어서 절대 머리를 넘겨서 드러내지 않았던 귀까지. 인형은 짧은 단발머리에 깔끔한 진감색 정장 수트에 아이보리색 블라우스를 받쳐 있었는데 표정만이 자신과 달랐다. 무표정한 것 같지만 뭔가, 달랐다.

“내가 연락하지 않았으면 어쨌을 거야? 이 인형. 주문제작이라 다른 사람에겐 넘기지 않는다면서. 당신이 계속 갖고 있으려고 했었어?”

지운의 말에 무영은 시선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

“연락했잖아.”

능숙하게 인형의 팔다리를 굽혀서 무영은 인형을 차에 태웠다. 지운은 조수석에 앉았다.

“관절도 있구나, 인형. 앉은 자세가 자연스러운데.”

“관절부위가 구형으로 되어 있어. '구체관절인형'이라고, 동작이 자연스럽게 나와서 매니아들이 많지. 인간에 가까운 포즈가 가능하니까.”

인형에 대해서가 아니면 그가 말을 한 번에 두 문장 이상을 말하는 경우는 없었다. 자동차 백미러를 통해 비추는 인형을 보며 지운은 인형과 자신의 다른 부분을 깨달았다. 인형은 자신보다 생생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웃고 있다거나 표정이 선명한 것은 아닌데도 얼굴 전체에 생기가 도는 표정. 지운은 무영이 ‘언젠가 내 인형을 보게 되면 알겠지’라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무영이 다른 남자들과 다르게 보였던 것, 정말로 그의 인형을 보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인간보다 생생한 표정의, 인간보다 이상적으로 보이는 외모의 인형을 보고 있으면 정말로 주변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조금 평범한 인상을 요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지운은 생각했다.

 

무영은 가끔 지운의 전화를 받았다. 가끔 지운은 무영을 불러내었고 처음 지운과 만나기 시작했을 때보다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다. 화제작이라는 영화를 빠짐없이 보고, 지운이 다니는 학원에 데려다주면서 무영은 지운의 변화를 그저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지운의 얼굴에 표정이 늘어나는 것과, 지운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 지는 것을. 지운은 한밤중에 때로 전화를 걸어 유리관에 갇혀 있는 꿈을 꾸었다며 흐느끼다가 언제부터인가 그러지 않게 되었다.

“나 곧 유학갈 거야.”

1년이 다 되어가는 날 지운은 무영의 작업실에 차를 몰고 와 그렇게 말했다. 자동차 안에는 1년 전처럼 인형이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이젠 필요 없게 됐나봐.”

“덕분에. 고마워 무영씨.”

무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차에서 인형을 내렸다. 인형은 낡은 항공점퍼에 빛바랜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거, 나는 입지 않는 옷이라서 바꾸어 입혔는데, 괜찮지?”

“상관없어.”

무영은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예전에 지운보다 많은 표정을 갖고 있던 인형은 이제 지운보다 무표정해 보였다. 무영은 인형을 사람처럼 부축하고 일어났다.

“무영씨.”

무영은 정장 수트 차림의 그녀를 언제나처럼 무표정하게 쳐다보았다.

“잘있어.”

“잘 가. My doll.”

무영은 그녀의 차가 떠나는 것을 보지 않고 작업장으로 인형을 부축하고 들어섰다. 무영이 들어서자 작업실 뒤쪽, 커다란 액자가 막고 있는 벽이 스르륵 열리며 환한 방이 나타났다. 무영은 그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곳은 거대한 인형의 집처럼 자그만 방으로 나뉘어, 그 안에 한 개, 두 개씩의 인형들이 세트 되어 있었다. 무영은 하얀 레이스가 드리워진 사주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는 창백한 얼굴의 인형의 방을 지나, 방 하나 앞에 섰다. 대학교 기숙사처럼 두 개의 침대와 두 개의 책상과 두 개의 옷장이 놓인 책상 앞에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통통한 인형 하나가 앉아 있었다. 무영은 그 앞의 침대에 지운의 인형을 앉혔다.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단짝이었다고 그랬으니까.”

무영은 지운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 준 후에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인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래 기다렸지, 이제 혼자가 아니야. 다시, 둘이야.”

무영은 인형의 방을 나왔다. 전화벨이 시끄럽게 울려대고 있었다.

“무영씨, 나야, 승아.”

전화기 너머의 권태로운 음성에 무영은 피식 웃었다.

“내일 와, 줄 게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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