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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연 콜러스 신드롬

2021.04.01 00:0104.01

콜러스 신드롬

해도연

 

1.
현아가 태어났을 때, 남편은 울었다. 제왕절개를 했던 나는 하필이면 마취가 일찍 풀려버려 배를 찢은 고통에 미칠 것 같았지만, 그런 내가 걱정을 할 만큼 남편은 조용하지만 구슬프게 울었다. 태어난 지 30분도 되지 않은 현아를 품에 안고.

간호사들이 젖을 물려야 한다며 현아를 다시 데려갈 때는 두 명이 남편을 붙잡고 힘을 써야 했다. 그만큼 남편은 세상 무엇보다 연약했던 현아의 몸을 능숙하지만 단단하게 안고 있었다. 그때는 그저 아기를 안는 방법을 공부했겠거니 했다.

그때 의심을 해야 했을까. 조카는커녕 주변에 아이라고는 없는 20대 중반의 남자가 처음 갓난아기를 그렇게 자연스럽게 품을 수 있을 리가 없다고. 그때 의심했다면, 여기까지 올 일도 없었을까.

재호, 훗날 내 남편이 될 사람을 만난 건 대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우리 둘 다 물리학과 신입생 환영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날 나는 아버지를 심근경색으로 잃었고, 재호는 어머니를 과민성 쇼크로 잃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이미 환영회에서 얼굴을 튼 사람들 사이에서 소외감을 느끼던 우리가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당연한 흐름이었다. 어느 맑은 날 정오, 어디로 가야 쓸데없이 사교성 많은 사람들을 피해 점심을 먹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내게 재호가 다가와 그림 한 장을 내밀었다. 수업에 몰입하고 있는 내 모습이었다. 얜 사교성 따위 없을 건데. 하지만 그렇게 생각했기에 오히려 옆자리를 내어줄 수 있었다. 우리는 금세 친해졌고 서로의 상실감을 보듬어 줬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졌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그때 그 순간만큼은 그랬다고.

재호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감이 있었다. 항상 덜렁대며 실수를 했지만,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있었다. 둘이서 처음 해외여행을 갔다가 여권을 잃어버렸을 때 재호는 누가 봐도 당황한 모습이었지만, 나는 그 모습 속에서 알 수 없는 평상심을 읽을 수 있었다. 폐장한 수영장 탈의실에서 처음 몸을 섞을 때도 재호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마치 이때 이곳에서 우리가 관계를 맺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내가 관리인의 발소리를 들은 것 같다고 했을 때 재호가 부비던 몸을 멈추지 않은 이유도 나를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곧 관리인이 들어와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우리를 훔쳐보고는 지나갈 것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지금에 와서야 이렇게 말할 수 있지만, 당시엔 그게 재호가 가진 독특한 분위기라고 생각했고 매력으로 다가왔다.

"우리 결혼하자. 우리 이제 같이 살아가자."

대학 졸업식 날 밤, 재호가 내게 청혼했다. 그때 내게 거절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왼손을 내밀었고, 재호는 모래알만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값싼 반지를 약지에 끼워줬다. 나는 재호가 대부호는 아니더라도 그것보다 더 비싼 반지를 살 여유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재호가 나를 위해 더 큰 것도 할 수 있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렇기에 나는 그 싸구려 반지가 품은 위화감이 좋았다. 그리고 내 대답이 궁금해 미치겠다는 표정 뒤에서 이미 알고 있다며 속삭이는 재호의 눈빛도.

그렇게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2.
도쿄 한복판에 있는 어느 호텔에서 우리는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옆방에 들리는 걸 아랑곳하지 않고, 아니 오히려 들으라는 듯 소리를 지르며 침대 주변의 물건을 걷어차고 잡아당기며 떨어뜨렸다. 나는 재호의 귀를 피가 날 만큼 물었다. 재호는 내 등에 손톱을 찔러 할퀴며 살갗을 찢었다. 통증이 쾌락의 높이를 증폭했다. 그때의 황홀감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내 몸이 느낄 수 있는 한계를 그때 경험했을지도 모른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절정에 이른 순간, 내 속에서 어떤 욕구가 피어났다.  그동안 느껴본 적 없던, 새로운 삶에 대한 갈망. 나는 재호의 목을 부여잡고 눈을 맞췄다. 내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지만, 재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내 눈을 바라봤다.

내가 말했다.

"아이를 원해. 아기를 가지고 싶어."

재호는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의 아내였다. 그 망설임마저 의도된 것이라고 직감했다. 나는 엄지손가락으로 재호의 입술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우리 가족을 원해."

재호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거칠게 뿌리치더니 입술이 찢어질 것 같은 키스를 퍼부었다. 거칠고 강한 손길이 내 목과 어깨, 가슴을 차례로 질주하며 허리 아래로 내려갔다. 네 개의 다리가 뜨겁게 얽힌 곳에서 재호의 손가락이 복잡하게 움직였다.

재호는 타액에 젖은 고무 조각을 침대 밖으로 던져버리고 다시 내 안으로 들어왔다.

 

3.
지도교수를 설득하는 건 쉽지 않았다. 석박사통합과정이었고 나는 이미 중퇴를 해도 석사학위를 받을 수 있는 상태였다. 적어도 국내에서는 성과에 아쉬울 것이 잘나가던 교수는 내게 선택지로 자퇴를 내밀었다. 물론 직접적이지는 않았다. 출산과 육아 때문에 연구를 망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차라리 인생을 망친 이야기였다면 더 설득력이 있었겠지만, 교수에겐 연구나 인생이나 동의어였으니까.

“그러니까 자네도, 신중하게 결정해. 혼자만 생각하지 말고. 다른 애들은 뭐, 몸이 불편해서 연애나 결혼 못 하는 게 아니야.”

나도 안다. 쉽지 않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이미 선택을 한 뒤였다. 나는 남을 것이다.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4.
임신은 최악의 경험이었다.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고 그게 내 가족이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토해낼 것도 없는데 구역질은 멈추지 않았다. 밤마다 손가락이 붓고 통증 때문에 키보드 치기도 힘들었다. 내 혈관은 호르몬으로 포화되었고, 평상심은 끊임없이 무너졌다. 몸이 무거워지자 나는 오래전 아프리카의 평원을 두 발로 딛고 섰던 유인원들을 원망했다. 차라리 네 발로 걸었다면. 내 몸무게의 30%나 되는 양수와 살덩어리를 몇 달이나 두 발로 서서 끌고 다니는 건 고문이었다. 나는 결코 다시 임신하지 않겠다고, 아이를 원하면 차라리 입양을 하겠다고 몇 번이고 결심했다.

지도교수는 힘겹게 움직이는 나를 볼 때마다 혀를 쳤다. 다칠 거면 바깥에서 다치라는 말도 했다. 연구실 안에서 다쳤다가는 보험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면서. 내가 계단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며 걱정해주는 척도 했지만, 그저 사고 때문에 귀찮아지는 걸 피하고 싶을 뿐이었다.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재호는 확신했다. 언제나 그랬다. 내가 육체적으로 힘들어할 때마다, 내게 필요한 걸 정확히 알아맞혔다. 재호는 나보다 임신과 출산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다. 내 몸에서 일어나는, 나도 처음 겪어보는 온갖 변화들에 대해서도.

"차라리 당신이 임신했었다면 더 잘했을 거 같아."

내가 말했다. 진심이었다.

 

5.
BCI 심포지움에서 메모리 감쇠에 대한 발표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개최되는 국제학회였는데 마침 국내에서 열렸기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 참석했다. 놓칠 수 없었다. 내가 모든 걸 감당할 수 있다는 걸 지도교수에게 언제나 증명해야 했으니까.

내 바로 앞 발표자가 질의응답을 받고 있을 때, 산부인과에서 전화가 왔다. 1주일 전에 받은 피검사 결과가 나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간단히 결과만 듣고 다시 발표 준비에 임하기 위해 전화를 받았다.

실수였다.

“피검사 결과인데요, 콜러스 증후군일 확률이 1/20이 나왔거든요. 좀 많이 높은데... 다음에 오시면 양수검사 얘기를 해야 할 거 같아요. 양수검사는 비용도 들고... 굳이 말씀드리자면 감염위험도 조금 있고 해서... 일단 먼저 상담 받으시고 결정하시겠어요? 다음 주 화요일 1시에 예약 넣어 드릴까요?"

애초에 피를 뽑을 때 그런 검사를 부탁한 적이 없었다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이성을 잃었고 발표는 처참했다. BCI 분야의 거장들 앞에서, 나는 내가 속한 연구실의 성과발표를 망쳤다. 발표자 단상에서 나를 이끌고 내려온 후배의 말에 따르면, 나는 어린애처럼 가늘고 높은 목소리를 내며 훌쩍거렸다고 한다. 하지만 새하얗게 비어버린 내 머릿속에 당시의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여자 대학원생이 국제학회에서 발표하러 올라왔다가 시작도 못 하고 울면서 내려갔다. 어떻게 보였을지는 굳이 상상하고 싶지 않다. 걱정스러런 표정으로 사정을 물으며 찾아온 사람도 있었지만, 결국은 별거 아닌 해프닝처럼 넘어갔다. 지도교수만 빼고. 거장 중의 거장이 되어버린 자기 스승 앞에서 망신을 줬다며 거친 한숨을 뱉었다.

“참을 만큼 참았다. 이제 여기 남든 나가든 너한테선 손 뗄 거니까 알아서 해.”

결국 내가 하려던 발표는 후배가 대신했다. 그 후배가 원래 하려던 발표는 내 것과는 정반대인 메모리 증폭이었다. 하지만 평소에 나를 존경한다며 내 뒤를 따라다니던 후배는 내 연구를 나만큼이나 잘 이해하고 있었다. 아니, 나 이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성과가 어떻게든 발표되었다는 안도감과 함께, 나는 얼마든지 대체  가능하다는 자괴감을 느꼈다.

 

6.
콜러스 증후군. 고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본 적이 있었다. 콜러스 증후군 영유아는 지능 성장이 느리고 정신적 충격에 매우 약하며 위험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리고 성장하면서 뇌와 장기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손상이 누적된다. 중증일 경우, 15살을 넘기기 힘들다. 하지만 증세가 가벼울 땐, 안정된 환경과 보호자의 도움 속에서 성인으로 자라 짧게나마 정상 수명을 누리는 경우도 있다. 해외에서는 경도의 콜러스 증후군을 가지고도 일반적인 직업을 가지는 사례도 종종 나오지만, 우리나라에선 어려운 일이다. 해외의 사례 역시, 보호자와 공동체와 국가의 전력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아직 재호에게 말할 용기가 없을 때, 나는 인터넷에서 콜러스 증후군의 사례를 뒤졌다. 대부분 절망적인 이야기들뿐이었다. 어린이집에서도 유치원에서도 쉽게 받아주지 않는다. 받아주더라도 차별과 멸시, 괴롭힘에 시달려 스스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 초등학교에서도 마찬가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누군가가 항상 함께 있어야 한다. 그 누군가는 대개 부모, 특히 어머니이다. 장학금을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나는 학생이었다. 대학원 대신 취직을 택한 재호는 유명하지는 않지만 그 분야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회사에 채용되었다. 뻔한 결과가 눈에 보였다.

1/20의 확률이란 어떤 의미일까. 1/80이 나온 어느 여성이 상담 게시판에 글을 썼다. 어떻게 해야 하냐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운다'를 제안했다. 자기들 지인의 고통스러운 사례를 알려주면서. 그게 당연한 선택인 것처럼. '아기' 대신 '아가'라는 단어를 그 사이에서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졌다. 흑백 초음파 화면을 어루만지며 몇 번이고 내뱉었던 말이다.

친한 친구가 유학을 앞두고 원치 않은 임신 때문에 고민하고 있을 때 나는 망설이지 말라며 병원까지 찾아주고 동행해 줬다. 그 친구는 지금 미국에서 빠르게 박사학위를 받고 30대가 되기도 전에 일본 명문대의 준교수가 되었다. 의료용 마이크로봇으로 딴 특허가 몇 개랬더라? 빛나는 삶이다. 그 친구는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내게 선물을 보내온다. 내가 삶의 가장 큰 은인이라며. 나는 그 친구를 도울 수 있었던 것, 그 친구가 꿈을 이루어 가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자랑스럽다. 때로는 부럽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경우가 다르다. 나는 내가 선택했으니까. 나는 아이를 갖기로 했을 때의 느낌을 잊을 수 없다. 그때 번쩍이며 눈앞을 지나가던 운명. 낡은 말이지만, 운명이라는 단어 속에 담겨있던 앞으로 있을 기억들. 나는 그것을 놓칠 수 없었고 온 힘을 다해 붙잡았다. 거기에 고민과 후회와 고통이 딸려오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고, 신경이 경련하는 짧은 순간에 나는 각오를 마쳤다.

그렇게 붙잡은 것을 내려놓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번, 새로운 각오를 해야 했다. 신경은 이제 경련하지 않았고, 그저 긴 눈물이 있었을 뿐이다. 지금이라도 누군가 내게 같은 이유로 고민을 이야기 한다면, 나는 누구의 말에도 휘둘리지 말고 스스로 선택하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했다.

다음날, 나는 대학원 자퇴서를 제출했다. 지도교수와의 관계는 이미 틀어질 만큼 틀어졌기에 휴학은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결과를 기다려보자며 연구실 동료들은 나를 말렸다. 임신과 출산이 포기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면서. 나뿐만 아니라 후배들과 주변에도 좋지 않은 사례가 되어버린다면서. 사실은 누굴 위한 위로였었을까. 하지만 나는 이미 어떤 결과가 나오든 새로운 삶을 살기로 한 뒤였다. 이제 이곳은 내가 걸어갈 길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으니까. 지도교수는 아무 말 없이 자퇴서에 도장을 찍었다. 연구실을 나오며 병원에 전화해 양수검사는 하지 않겠다고 했다. 마음을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재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 결정이라고. 죄책감 때문도 아니고 의무감 때문도 아니며 순전히 내 운명을 내가 선택하기로 했을 뿐이라고. 나를 말리는 시도를 할 수는 있겠지만, 설득하지는 못할 거라고. 그리고 원한다면, 나를 떠나도 좋다고.

"나는 이미 오래전에 널 선택했는걸."

재호는 나를 안았다. 그 어떤 때보다도 따뜻하게. 입을 맞췄다. 그 어떤 때보다도 뜨겁게. 이 남자에 대한 사랑이 깊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참 가슴 아픈 오해였다.

 

7.
현아가 태어났을 때, 남편은 울었다.

 

8.
현아는 콜러스 증후군이 아니었다.

산후조리원에 있는 2주 동안, 처음 한 주는 울기만 했다. 평생 울었던 것보다 더 많이 운 것 같다. 마지막 하루를 빼고는 기쁨과 안도의 눈물이었다. 흘렸던 눈물을 모두 담아두고 싶을 만큼 행복했다. 마지막 하루는 콜러스 증후군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들을 위한 눈물이었다. 미안했다. 내가 마치 그들에게 갈 행복을 훔쳐 온 것만 같았다. 조금 비겁했지만, 나는 인터넷을 뒤지며 콜러스 증후군을 가졌음에도 행복하게 사는 아이들의 사례만 골라서 읽었다. 국내엔 그런 사례가 적었지만, 일본엔 제법 있었다. 콜로스 증후군을 위한 재단과 시설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일본에 이주할 생각도 잠깐 했었지. 하지만 현아는, 다시 말하지만, 콜러스 증후군이 아니었다.

그 대신, 산후조리원에 있으면서 언젠가 일본으로 새롭게 유학을 갈 생각을 했다. 콜러스 증후군을 공부하고 연구해보고 싶었고, 일본은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다. 그래서 의사가 검진을 올 때마다 콜러스 증후군에 대해 물었다. 의사는 자기 전공이 아니라 자세한 건 모른다고 했지만, 조심스럽게 산후 정밀검진 결과에 대해 말을 남겼다.

"현아는 콜러스 증후군 유전자를 가지고는 있어요. 발현되지 않았을 뿐이죠. 콜러스 증후군 유전자는 선택적 우열성 유전자인데, 특별한 종류의 유전자와 짝을 이뤘을 때만 발현 가능성이 있다고 알고 있어요. 어떤 유전자와 짝을 이루느냐에 따라 증상이 달라지기도 하고. 아, 이것도 어디까지나 가능성이라서, 짝을 이뤘다고 해도 항상 발현하는 건 아니고요. 아무튼... 나중에 현아가 출산을 한다면, 이 부분에 대해 고민하셔야 할 거예요. 글쎄요, 2-30년 뒤면 의술이 더 발달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은 아기와 산모 모두 건강하다는 거에만 집중합시다."

재호는 그러지 못했다. 현아가 태어난 뒤, 재호의 신비감은 사라졌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만 같던 분위기가 완벽하게 사라졌다. 웃고는 있었지만, 마른 웃음이었다. 현아가 웃었을 때도 재호의 얼굴은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생후 2주도 안 된 아기의 미소는 의지와는 상관없는 생리적미소(生理的微笑)일 뿐이라는 건 나도 재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아기의 첫 미소였고, 우리 딸의 첫 웃음이었다. 그런데도 재호는 모르는 아이의 웃음처럼 그것을 바라봤다.

재호의 달라진 태도는 내가 산후조리원을 나온 뒤에도 이어졌다. 재호는 매일 우리집을 방문하던 육아 돌보미 아주머니보다도 현아를 능숙하게 다뤘지만, 정을 붙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눈을 맞추려고 하지도 않았고, 필요 이상의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리고 안절부절 못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너 요즘 이상해. 왜 그래?"

내가 물었다. 물을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그냥... 낯설어서. 익숙하지가 않아서. 현아가 내 아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고.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 마치 꿈을 꾸는 거 같아. 꿈에서 깨면, 처음으로 돌아가 버릴 것만 같아."

이 말을 잊을 수가 없다. 거짓말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정말 잊을 수 없다. 언젠가 철조망처럼 내 가슴을 감싸고 조여들어 산산조각 내버릴 거니까.

 

9.
힘들었다.

현아를 키우면서 일본어를 공부했고, 콜러스 증후군에 대한 논문을 읽었다. 내 전공과는 분야가 달랐기 때문에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학부부터 해야 할까, 대학원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 현아가 낮잠을 잘 때면 한 손에는 논문을 다른 한 손에는 빨랫감을 들고 다녔다. 뜨거운 물로 장난감과 식기를 소독하며 화상을 입기도 했다. 재호와 현아가 깨기도 전에 일어나 전날 발표된 논문을 찾아 읽었다.

현아가 자기 손발을 발견할 때 즈음, BCI 기술을 콜러스 증후군의 증세 완화에 사용하는 시범적 사례를 발견했다. 나는 그 논문의 PI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일본의 어느 명문대 교수였던 PI는 대학원 때의 미발표 연구를 논문으로 정리해 저널에 게재하는 것을 조건으로 걸며 자기 연구실의 내부세미나 자료를 볼 수 있는 링크와 계정을 보내왔다. 논문이 저널에 실린 뒤, 대학원 입학원서를 제출하면 자기가 손을 써서 박사과정 입학 후 최대 2년까지 휴학시켜 주겠다고 했다. 엄청난 기회였다.

"마음대로 해."

내 말을 들은 재호가 말했다. 정밀저울보다도 민감한 잠든 4개월 아기를 수박 다루는 느낌으로 완벽하게 침대에 내려놓으면서, 조금의 긴장도 성의도 없이 그런 말을 했다. 그 위화감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 말에 담긴 무관심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무서웠다. 그때야 나는 무언가 잘못된 건 아닐까 의심을 했다.

재호가 육아에 성실하지 못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철저히 필요한 만큼만 도왔다. 회식이나 출장이 있으면 출발 전 며칠 동안은 퇴근 후에 현아를 혼자서 돌봤다. 주말에는 철저히 시간을 나눠 자유시간을 가졌다. 자유시간 동안에는 서로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섭하지 않으면서. 나는 내 공부를 할 시간이 생겨 조금 숨이 트이면서도, 항상 현아를 집에 두고 나설 때는 발걸음이 무거워져 늦게 나가고, 예정보다 일찍 돌아왔다. 재호는 철저히 시간을 지켰다. 집을 나설 때도 망설임이 없었고, 더 일찍 들어올 때도 없었다. 마치 회사에 다니는 것처럼.

 

10.
5월의 어느 날, 나는 현아의 기저귀를 비닐봉지에 담아 묶었다. 냄새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아기띠를 둘러매고 현아를 앞으로 안은 채 밖으로 나갔다. 신선한 공기와 바람.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것조차 기대되는 생활이 이어졌다. 이렇게 밖으로 나와 잠시 걸으면, 현아는 어느새 잠들고는 했다. 그렇게 잠들면, 카페에 가서 카모마일 차를 마시며 논문이라도 읽을 수 있을까. 어렵다. 커피머신이 돌아가는 소리,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잔이 딸깍거리는 소리에 현아가 깨버릴 수 있으니까. 애초에 아기를 안은 채 뜨거운 차를 마시겠다니,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나는 쓰레기를 버리고 잠깐만 산책을 하다가 얌전히 돌아가기로 했다. 평일 낮에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논문을 읽고 쓰던 대학원 시절을 떠올리며, 쓰레기봉투를 내려놓았다.

우연이었다. 남편의 이름이 눈에 띈 것은. 재호. 그 이름이 적힌 우편봉투가 쓰레기 배출장 구석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현아의 목이 뒤로 젖혀지지 않도록 손으로 받친 다음, 천천히 허리를 숙여 집어 올렸다.

봉투는 비었고, 반이 찢어지고 없어서 보낸 사람은 알 수 없었다. 받는 사람은 남편의 이름이었지만, 주소는 우리집도 회사도 아니었다. 근처에 있는 허름한 오피스텔의 주소가 대신 적혀있었다. 오피스텔을 빌리고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뭔가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왜였을까, 그때는 그저 회사와 관련된 것이겠지 하며 성의 없는 결론을 내려버렸다.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그 우편봉투를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어 가져왔다는 것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쯤 나와 현아는 어떻게 되었을까?

집으로 돌아와 손을 씼었다. 현아는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나는 현아가 깨지 않도록 아기띠를 맨 상태로 소파에 앉았다. 논문을 읽으려고 했지만, 잠이 몰려왔다. 현아가 깨면 곧 젖을 물릴 시간이라 이제 믹스커피 한 모금도 마실 수 없었다. 아이를 안은 채 잠들 수는 없다며 허벅지를 꼬집어 봤지만, 눈꺼풀은 내 의지보다 무거웠다.

세상이 어두워졌다. 꿈은 꾸지 않았다.

 

11.
"미안해."

재호가 자면서 말했다. 현아가 태어난 뒤로, 재호는 언제나 깊이 잠들지 못했다. 처음엔 현아가 자주 깨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방을 바꿔도 마찬가지였고,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졌다. 잠옷과 시트가 식은땀에 젖을 때마다 재호의 눈빛은 더 말라갔다. 악몽을 꾸는 것 같았지만, 재호는 꿈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았다. 그저 피곤해서 그런 것뿐이라고 말을 돌렸다.

"미안해..."

그리고 언제나 미안하다고 했다. 누구에게 미안하다는 걸까. 미안하다는 말 말고 다른 말은 뱉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재호가 또 미안하다고 하면 나는 그를 깨우기로 했다. 알고 싶었다. 무엇이 그렇게 미안한지. 도대체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재호가 몸을 비틀었다. 이불을 찢을 것처럼 거칠게 잡아당겼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고개를 흔들 때마다 흘러내렸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나는 더 기다리지 않고 깨우기 위해 재호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재호는 뜨거운 인두라도 가슴에 닿은 것처럼, 신음하며 내 손을 부여잡았다. 갈비뼈를 부술 것 같은 격렬한 심장 박동이 나를 놀라게 했다.

내가 잠시 말을 잃은 사이, 재호가 입을 열었다.

"윤하야, 미안해."

내 이름은 윤하가 아니다.

나는 재호를 깨우지 않았다.

 

12.
날이 지날수록, 재호는 더 심하게 잠을 설쳤다. 얼굴은 야위어 갔고, 식은땀은 감기를 몰고 왔다. 하지만 잠에서 깨고 나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을 제대로 못 잤다는 얘기도, 어떤 꿈을 꿨는지도, 윤하가 누구인지도, 그리고 왜 미안한지도.

나는 윤하를 모른다. 대학 입학 이후, 재호와 나는 거의 모든 친구와 지인을 공유해왔다. 나는 재호의 회사 동료들을 알고, 재호는 내 대학원 동료들을 안다. 거기에 윤하는 없다. 하지만 언제나 틈은 있을 수 있다.

재호가 출근하고 현아는 거실에서 자고 있을 때였다. 나는 죄책감을 억지로 묻어가며, 재호의 노트북을 열었다. 컴퓨터 패스워드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메일 패스워드는 몰랐지만, 굳이 알 필요는 없었다. 브라우저에서 자동 로그인 되었으니까. 먼저 이메일 계정과 연동된 주소록에서 ‘윤하’를 검색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이메일 보관함에서도 검색했지만, 역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오피스텔’을 검색해봤다. 검색결과 0건. 며칠 전에 발견한 오피스텔 주소의 일부를 넣어봤다.

검색결과 51건.

재호는 해외의 수면유도제를 오피스텔로 주문하고 있었다. 마지막 주문은 내가 그 우편봉투를 발견하기 일주일 전. 첫 주문은 현아가 태어나고 일주일 뒤였다.

나는 오피스텔을 찾아가기로 했다.

 

13.
아기띠로 현아를 앞으로 고정하고, 현아를 위한 물건들을 잔뜩 담은 백팩을 뒤로 메었다. 아기띠에 끈으로 묶어둔 윤하의 장난감이 대롱거리며 흔들렸다. 현아는 처음 보는 지하철 풍경이 낯선 듯 조용히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앉을 자리가 없어서 나는 문과 좌석 사이의 틈에 몸을 기댔다.

현아가 장난감을 잡고 흔들기 시작했을 때, 스마트폰이 울렸다. 메일이었다. 환태평양 BCI 저널에서 온 것이고, 일주일 전에 투고한 논문의 심사 결과였다. 투고한 지 일주일 만에 심사 결과가 나왔다는 건 결코 긍정적인 신호가 아니었다. 담당 편집자는 익명의 심사자가 보내온 의견을 간결하게 전했다.

‘투고자의 논문은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보여주고 있으나, 매우 도전적인 결과에 비해 그 근거가 설득력이 없고 선행연구들에 대한 이해 역시 부족합니다. 따라서 나는 이 논문이 적어도 지금의 상태로는 몇 번의 수정만으로 환태평양 BCI 저널에 게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고 제안합니다. 상세한 코멘트는 아래를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편집자는 심사자의 의견에 동의하며, 논문을 실을 수 없다고 했다. 거절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1년 동안 손을 놓고 있던 내용을 육아와 가사의 틈에서 논문으로 써내려갔다. 길어봐야 하루에 한두 시간이었다. 추가적인 연구나 실험 따위는 꿈도 꾸지 못했다. 지도교수의 첨삭 따위는 있을 수 없었다. 공동연구자들과 돌려보며 의견을 묻지도 못했다. 그래서 심사자와 의견을 주고받으며 수정을 해볼 계획이었지만, 이렇게 문전에서 거절당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나마 코멘트라도 받은 게 다행이었다. 지적과 반론뿐이었지만.

다리에 힘이 빠졌고, 앉고 싶었다. 나는 맞은편의 핑크색 자리에 앉은 대학생을 노려봤다.

 

14.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을 땐, 마음을 추스른 뒤였다. 아니, 추슬렀다기보다는 마비되어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육아의 틈바구니에서 썼던 논문은 거절당하고, 남편은 수상한 여자 이름을 울부짖으며 외국의 수면유도제를 오피스텔로 주문했고, 나는 그의 비밀 아지트로 가는 길이었으니까. 그나마 현아가 잠들어서 다행이었다. 현아에게 감정적 반응을 해줄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새근거리는 현아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나는 오피스텔로 들어갔다.

편지 봉투에 쓰여있던 그 방은 복도 끝에 있었다. 나는 노크를 했다. 아무 반응도 없었다. 다시 한번. 역시 무반응. 키패드 덮개를 열고 생일과 전화번호 따위로 짐작 가는 번호를 눌러봤다. 실패였다.

다섯 번째 시도는 좀 더 신중해야 했다. 키패드 기종에 따라 다르겠지만, 다섯 번 틀리면 경고음이 날 수도 있었으니까. 적어도 우리집의 키패드는 그랬다. 천천히 생각했다. 재호라면 어떤 비밀번호를 쓸까. 이 수상한 방을 위해.

내가 이곳까지 오게 된 과정을 떠올렸다.

‘윤하야, 미안해.’

윤하.

키패드 번호 아래에 적힌 알파벳을 보며 키를 하나씩 눌렀다.

98642.

YUNHA.

열렸다.

 

15.
나는 재호가 윤하라는 여자를 만나고 있었고, 둘 사이에 다툼이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했다. 평소에 수면유도제를 이용한 변태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던 건 아닐까 추측했다. 립스틱이 묻은 화장지와 타액이 묻어 입을 수 없는 남녀 속옷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고, 썩은 내가 나는 콘돔이 침대 발치의 휴지통에 담겨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차라리 그랬다면, 아예 노골적인 불륜 현장을 목격했다면 오히려 나았을까.

방은 내 상상과는 달랐다. 그곳은 실험실이었다.

침대 대신 반진동테이블이 있었고, 그 위에는 비커와 플라스크, 토치 따위로 구성된 증류장치가 있었다. 테이블 아래에는 실험용 냉장고와 전원이 연결되지 않은 원심분리기도 있었다. 반대편 벽은 부착형 화이트보드로 가득 메워져 있었고 이해할 수 없는 메모와 화학식이 가득 적혀있었다.

바닥에는 뜯지도 않은 택배상자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보낸 사람은 대부분 중소 제약회사였다. 주소를 적은 글씨체를 보니 내가 발견한 우편 봉투도 같은 회사에서 보낸 것 같았다. 그 봉투의 내용물은 청구서나 물품 리스트였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상자를 하나 뜯었다. 5cc 용량의 주사기가 잔뜩 쏟아졌다. 다른 상자를 뜯었다. 수면유도제였다. 화이트보드와 수면유도제의 성분표를 번갈아 보니 연결고리가 하나 보였다.

화이트보드의 왼쪽 위에 적힌 화학식.

C6H9N3O2

히스티딘이었다. 그리고 수면유도제에는 항히스타민제가 들어있었다. 히스티딘은 히스타민의 원료가 되는 아미노산이고, 히스타민은 알레르기 증세를 일으키는 물질이다. 항히스타민제는 히스타민 수용체를 억제해 알레르기 증세를 완화하는 약물이다. 1세대 항히스타민제는 졸음을 일으키는 부작용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그런 부작용을 줄이거나 없앤 제품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 부작용을 역으로 이용한 것이 수면유도제였다. 아무래도 1세대 항히스타민제를 의심 없이 구하기 위해 수면유도제를 대량으로 구입한 것 같았다.

알레르기 증세를 일으키는 아미노산과 그 증세를 완화하는 약물. 재호의 어머니는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었고, 그로 인한 과민성 쇼크로 세상을 떠났다. 재호 역시 약한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었다. 현아가 태어나자 자기도 언제 갑자기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스스로 실험하며 약을 만들기라도 하는 걸까? 현실성이 없었다.

다시 재호의 어머니가 죽은 것을 떠올렸다. 혹시 재호가 약물을 이용해 죽인 건 아닐까? 재호 어머니에게 보험이 있었던가? 연애 시절 재호는 돈이 부족해 보이지 않았다. 딱히 아르바이트도 하지 않았고.

내게는 생명보험이 있었다. 현아에게도. 내 아버지는 심장병이 있었고 심장마비로 죽었다. 과민성 쇼크는 심장마비로 이어지기도 한다. 내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더라도 가족병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현아의 할머니는 심각한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었다. 알레르기는 때로는 유전된다.

나는 지금 남편의 비밀 실험실에 있고, 여기에는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을 일으킬 수 있는 물질이 가득하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효율적인 방법이야말로 가장 먼저 의심받는 지름길이다. 남편은 윤하라는 이름의 여자를 만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꿈에서도 볼 만큼 절실히 원하는 여자. 내가 아닌 여자. 방해물은 나와 현아뿐이다.

여기서 나가야 한다.

하지만 그냥 나갈 수는 없다. 나는 현아가 깨지 않도록 목과 머리를 손바닥으로 감싸고 빠르게 방을 둘러보며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사진만으로는 부족했다. 물성이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내가 들고 갈 수 있는 무게와 크기여야 했다. 아이를 업은 엄마가 지하철에 들고 타도 의심받지 않을 수 있는 물건.

노트.

반진동테이블 위에 놓인 노트.

밝은 분홍색 호텔이 아기자기하게 그려진 하드커버 노트.

결코 이 방안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나는 노트를 집어 들어 펼쳤다.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건 남편의 글씨가 분명했다. 빠르게 훑어보자 실험에 대한 내용도 눈에 띄었다.

나는 노트를 들고 방을 나왔다.

어깨에 메고 있는 백팩에 넣으면 현아가 깰 수 있어서 그대로 손에 들고 걸었다. 사실 백팩에 넣을 필요도 없었다. 아기 엄마가 들고 다녀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귀여운 노트였으니까. 솔직히,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안에 담긴 내용은 끔찍했다.

 

16.
믿기 쉬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노트에 적힌 내용대로라면, 재호는 타임리퍼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간을 과거로 돌릴 수 있는 사람. 누군가 내게 자기가 타임리퍼라면서 다가왔다면, 나는 당장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8년 동안 재호를 옆에서 지켜봤다. 그동안 느꼈던 알 수 없는 위화감들,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 연기하는 것만 같던 행동들. 분홍색 노트는 그 이유를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윤하는 나와 재호의 딸이었다. 하지만 나는 윤하를 낳은 적이 없다. 적어도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시간 속에서는.

노트 속에는 나의 이름도 여러 번 언급되어 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지금의 나는 아니다. 노트 속에 쓰인 이름 ‘유슬’은 분명 내 이름이었지만, 그건 윤하를 낳은 유슬이었다. 앞으로의 이야기를 위해, 첫 번째 유슬이라고 하자.

첫 번째 유슬과 재호의 만남은 나와 재호의 만남과 같았다. 완벽하게 같았다. 첫만남부터 연애, 졸업식 날의 청혼, 그리고 도쿄에서 나눈 사랑과 임신. 심지어 1/20이라는 숫자까지.

1/20의 확률.

유슬은 울지 않았다. 오히려 단호했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원하지 않는다면 떠나도 좋다고 했다.

나는 고민했다. 콜러스 증후군을 가진 아이의 부모들 이야기는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의 단골 소재였다. 힘겹지만 희망을 품고 살아간다는 이야기. 꿈도 직업도 포기하고 자식을 위해 모든 걸 쏟아붓는 감동 드라마. 내가 거기에 서게 될지도 모른다니.

나는 삶의 정상에 서 있었다. 유슬은 아릅답고 현명한 여성이자 아내였고, 나는 일하기 좋은 분위기의 회사에 다니며 주말마다 취미와 아내와의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길에서 마주치는 밝고 건강한 아이들을 보며, 그리고 유슬의 커지는 배를 보며, 우리가 이룰 가족의 모습을 꿈꿨다. 흘러가는 모든 순간이 행복했고 소중했다. 다가오는 모든 순간이 희망과 기대로 부풀어 있었다.

그게 무너질지도 모른다.

유슬은 이미 결심했다. 나도 결심을 해야 했다.

이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여기까지 오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모든 불행의 원인이었다. 애초에 내가 그곳에 없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미 널 선택했는걸."

내게 같은 말을 했을 때도, 첫 번째 유슬에게 말했을 때와 같은 심정이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내게 말했을 때, 재호가 선택한 건 내가 아니었다. 재호는 스스로가 모든 불행의 원인이었다고 했다. 사실이다. 하지만 재호가 쓴 불행은 이기적인 불행이다. 그 불행을 뒤덮기 위해 얼마나 많은 다른 불행이 일어났는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나와 첫 번째 유슬은 출산에서 갈라졌다. 현아와 달리 윤하는 가벼운 콜러스 증후군이었다.

유슬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경증이라 다행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유슬에게 윤하의 모든 것은 그저 윤하의 일부일 뿐이었다. 거기에 다른 존재와의 비교가 들어설 곳은 없었다. 윤하가 힘겹게 실눈을 떴을 때, 유슬은 윤하의 눈을 보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말했다. “눈 봤어? 너무 예뻐. 홍채 모양이 고흐 그림 같아. ‘별이 빛나는 밤’을 담아 놓은 거 같아.”

윤하는 그렇게, 우리의 삶 속으로, 그리고 나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

이 부분을 읽었을 때, 눈물이 흘렀다. 내가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던 말이었다. 콜러스 증후군의 특징 중 하나가 독특하고 화려한 홍채였다. 현아가 태어나기 전, 나는 수많은 콜러스 증후군 아이들의 사진을 봤다. 그 사진 속에서 빛나던 눈동자들. 아이들의 밝은 눈동자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래서 나는 현아를 처음 품에 안게 되면 가장 먼저 눈동자를 보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거친 붓으로 그린 물결 같은 예쁜 홍채가 거기 있다면, 말해주고 싶었다. 그림 같다고. 진심을 담아서. 해 질 녘 장밋빛을 띤 현아의 갈색 눈동자도 아름다웠지만, 그림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윤하의 홍채에는 검푸른 소용돌이가 춤추는 밤하늘이 있었던 것 같다.

 

17.
첫 번째 유슬이 만난 재호는 지금의 재호와는 달랐다.

재호는 윤하를 사랑했다. 출근한 날에도 휴식 시간을 모두 포기하면서 점심은 집에서 먹었다. 첫 번째 유슬이 지긋지긋하니까 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회식도 거의 참석하지 않고, 6시 정각이 되면 퇴근하고 돌아와 윤하를 돌봤다. 주말에도 윤하의 옆을 지켰다. 윤하가 걸음마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재호는 딸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재호는 그저 부모가 그런 존재라고 믿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릴 적부터 드라마나 영화에서 봐왔던 것처럼. 하지만 아이를 가진다는 것과 그 아이를 책임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재호는 몰랐던 것 같다.

콜러스 증후군의 증상 중 하나는 아무리 성장해도 위험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걷고 뛰기 시작한 윤하는 매일 어딘가를 다쳤기 때문에 결코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호기심은 넘쳤기에, 작은 체중에서 나오는 지구력을 어른은 결코 따라갈 수 없었다.

그동안 윤하를 위해 내 시간을 쏟아부은 건 내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게 의무가 되고 어깨를 짓누르는 일이 되자 모든 게 달라졌다. 내 시간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다. 책을 읽을 시간도, 사색에 잠길 여유도 없었다.

야근이 거의 없는 회사에 다닌다는 게 원망스럽기도 했다. 집에 가면 더 힘들었으니까. 유슬은 도대체 어떻게 견디고 있었을까. 회사라는 도피처도 없이. 유슬은 나보다 더 글을 좋아하고 외로운 여유를 사랑했다. 윤하와 함께 있는 한 결코 얻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유슬은 그러면서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생활을 이어나갔다.

나는 첫 번째 유슬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애초에 선택의 무게가 달랐으니까. 나는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는 각오를 하고 있었다. 대학원을 그만둔 것은 돌아서지 않겠다는 의지의 결과이자 상징이었다. 첫 번째 유슬도 마찬가지였겠지. 힘들지 않았을 리가 없다. 누구처럼 말 몇 마디로 선택했다고 믿는 것과는 결코 같을 수 없다.

윤하는 어떤 아이였을까. 첫 번째 유슬이 모든 걸 포기하고 품에 안았던 아이. 첫 번째 유슬 역시 나와 같은 유슬이다. 비록 내가 낳지는 않았지만, 첫 번째 유슬는 나와 같은 몸과 마음을 가졌고 윤하는 첫 번째 유슬의 피와 살을 이어받은 내 딸이다. 나는 첫 번째 유슬처럼 윤하를 사랑했다. 윤하의 아름다운 눈동자도, 부드러운 살결도, 뜨거운 체온도 느끼지 못했지만, 나는, 유슬은, 첫 번째 유슬은, 윤하를 사랑했다.

그리고 재호는 우리 모두를 배신했다.

 

18.

어머니의 죽음 이후 처음으로, 나는 시간을 되돌렸다.

지금까지 해본 적 없는 만큼의 긴 시간을.

실수였다.

그때는 실수라는 걸 몰랐다.

그때는 시간을 되돌려도 다시 잡을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몰랐다.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그때는 몰랐다.

재호는 시간을 되돌렸다.

대학교 졸업식 날으로.

그렇게 윤하는 시간과 함께 사라졌다.

 

19.
재호는 나와, 유슬과, 두 번째 유슬과 헤어졌다. 아이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하기에 유슬은 너무 아름답고 건강하고 유능했으니까, 혼자서 더 많은 걸 이루고 더 행복해질 수 있을 테니까, 재호는 그렇게 말했다. 두 번째 유슬은 서글프게 울면서도 미련 없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적어도 재호가 써놓은 바로는 그렇다.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 내 행복을, 유슬의 행복을 재호가 제멋대로 정의하나. 행복에는 수많은 형태가 있고, 첫 번째 유슬은 스스로 그중 하나를 선택했다. 하지만 재호는 자기 뜻만으로 그 모든 걸 모두 지워버렸다. 두 번째 유슬에게서는 그 기회조차 앗아버렸다. 비겁하게도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채.

하지만 이건 앞으로 재호가 할 일들의 전조에 불과했다.

 

20.
앞으로 몇년 간 일어날 커다란 흐름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재호는 여기저기 투자를 거듭하며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재산을 꾸릴 수 있었다. 재호 본인의 행동으로 인한 나비효과가 눈에 보이기 시작할 때 즈음부터는 조용하게 살았다. 문화생활을 즐기고 창작활동을 하고 여유를 즐겼다. 연애는 했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다. 이상적인 싱글라이프였다.

마을 서점에서 한 여자아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아빠, 집에 가자아아아.”

키가 내 허리까지 밖에 오지 않는 조그만 여자아이가 내 다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모르는 아이였다. 나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아이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심장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 아이의 눈 속에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봤다. 거친 붓끝을 따라 물결치는 밤하늘과 반짝이는 별빛들. 윤하와 같은 눈이었다. 크게 성장한 윤하가 아빠라고 부르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럴 리가.

뒤에서 아이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윤하야, 이리 와. 그러면 안 돼.

똑똑히 들렸다. 윤하를 부르는 여자 목소리가. 나는 고개를 돌려 뒤를 봤다. 식은땀이 눈으로 흘러 들어가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유슬을 닮은 여자 다가오고 있는 건 보였다.

“미안해요, 애 아빠가 비슷한 옷 입고 있어서 착각했나 봐요. 유나야, 이리 오라니까. 아빠 아니야. 아저씨가 놀랬잖아.”

여자가 ‘유나’를 안아 올리면서 말했다. 여자는 머리 모양과 키가 유슬과 비슷했지만, 유슬은 아니었다. 아이는 윤하와 같은 눈동자를 하고 있었지만, 윤하는 아니었다. 유나는 엄마 얼굴과 내 얼굴을 몇 번 번갈아 봤다. 그리고 다시 나를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살폈다. 마지막으로 엄마를 보며 말했다.

“아빠 아니야? 아빠 어디 갔어?”

“아빠 화장실 갔잖아. 입구까지 같이 가놓고는. 아저씨한테 사과해야지.”

“미안합니다.”

유나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말했다. 보석이 박힌 군청색 눈동자를 깜빡이며.

나는 가볍게 웃으며 “괜찮아.”라고 했다. 아마도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기에 확신할 수는 없다. 그 순간 내 머릿속을 맴돌던 것은 커다란 파열음뿐이었다. 꽁꽁 얼어붙어 있던 호수가 갈라지는 소리. 얼음이 보이지 않는 바닥을 향해 하염없이 가라앉았다.

얼음은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커다란 눈동자를 반짝이며 내 허리 위로 엉덩이를 폭삭 깔고 앉고, 내 다리에 매달리고, 아침마다 달려와 내 품에 안기던 윤하에게.

나는 윤하의 삶을 지웠다.

뛰는 심장과 뜨거운 피부와 커다란 웃음소리를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던, 조금만 더 있으면 저기 저 유나처럼 산책 나와 엄마에게 안기고 아빠에게 매달렸을 윤하를 존재한 적조차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저 내가 힘들다는 이유로. 이 말하기 부끄러울 만큼 하찮은 이유로.

아니, 재호 너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어. 그때 그 말이 진심이었다면, 넌 차라리 너와 결혼한 나도 없고 우리 사이에 아이도 없는 그 삶을 그냥 그대로 살았어야 해. 하지만 넌 그러지 않았지. 더 심한 짓을 반복했지.

재호는 다시 졸업식 날로 시간을 되돌렸다. 그리고 세 번째 유슬에게 청혼을 했고, 결혼을 했고,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낳았다.

아들이었다. 윤하가 아니었다.

재호는 네 번째 유슬에게 청혼을 했고, 결혼을 했고,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낳았다.

중증의 콜러스 증후군이었다. 윤하가 아니었다.

재호는 다섯 번째 유슬에게 청혼을 했고, 결혼을 했고,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낳았다.

건강한 딸이었다. 콜러스 증후군 유전자는 가지고 있었지만 발현되지 않았다. 윤하가 아니었다.

재호는 여섯 번째 유슬에게 청혼을 했고, 결혼을 했고,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낳았다. 일곱 번째, 여덟 번째, 아홉 번째, 열 번째. 수많은 유슬이 아이를 낳았고, 수많은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가 콜러스 증후군일 가능성이 있을 때마다, 모든 유슬들은 대학원을 그만뒀다. 아이 이름은 모두 현아였다. 그리고 유슬과 현아 모두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 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달라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시간을 되돌리고 나면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고 터진 수도꼭지처럼 코피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럴수록 머릿속이 깨끗해졌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내가 그동안 했던 행동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처음으로 돌아왔을 때마다 기억 나는 모든 것을 기록한다. 내가 앞으로 해야 할 것들이다. 실패가 거듭되고 시간을 돌리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목표에만 초점이 맞춰진다. 다른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뿌옇게 흐려져 나를 방해할 수 없다.

윤하를 다시 품에 안는 날을 위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재호는 미쳐가고 있었다. 타임리프를 거듭할 때마다 재호는 더 강박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첫 번째 유슬과 있었던 일을 최대한 정확하게 재현하기 위해. 심지어 혼자 있을 때의 행동까지. 어떻게 그 모든 걸 기억하고 재현할 수 있었을까? 재호의 뇌에 무언가 일어나고 있는 건 아니었을까? 혹시 그렇다면, 타임리프 때문일까? 아마도. 모든 시간 속에서 이 노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썼겠지.

이 부분을 빼고.

17번째 유슬.

나였다.

16번째 아이.

현아였다.

이번 만큼 완벽했던 적은 없었다. 심지어 1/20이라는 확률마저 똑같았다. 하지만  윤하가 아니었다. 어디가 부족했을까. 그날 밤, 사정의 타이밍이 조금 늦었던 것 같다. 그래, 아마 그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모든 걸 그대로 두고, 그 부분만 조금 앞당기자.

어째서. 시간을 되돌릴 수가 없다. 시도할 때마다 머리가 폭발할 것 같은 두통만 남고, 시간은 그대로다. 내일 다시 시도해보자.

역시 안된다. 이번엔 코피가 쏟아졌다.

게껍질 가루를 삼키니 이틀 정도는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게 한계다. 그리고 미칠 것 같은 두통은 여전히 남는다. 이걸 수백 번 반복해서 돌아가는 건 현명하지 못하다.

게껍질 가루라니, 웃기고 한심하다.

먼 시간을 돌아갈 수 없게 된 걸까? 설마 진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안된다. 회복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너무 늦으면 안 된다. 그랬다가는…

현아마저 잊을 수 없게 되겠지.

재호는 태어난 아이가 윤하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바로 다음 날 시간을 되돌렸다. 윤하만큼 사랑하게 되면 안 되니까. 하지만 현아가 태어났을 때는 어떤 이유에선지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항상 불안했던 것이다. 현아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윤하와 함께했던 시간에 다가갈수록, 망설임은 커지니까. 윤하를 만나기 위해서는 현아의 시간을 재빨리 잘라서 버려야만 하니까.

비겁했다.

열네 명의 ‘현아’가 시간과 함께 사라졌다.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되었다. 나와 현아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은 그저 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마저도 재호는 현아가 아직 윤하보다 가벼운 존재일 때 버리려고 하고 있다.

현아가 태어나고 고작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재호는 우리의 시간을 잘라버릴 준비를 다시 시작했다.

 

21.

능력의 촉발제는 알레르기다. 나는 가벼운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고, 알레르기 증상이 일어날 때면 조금씩 시간이 되돌아간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시험 기간 때마다 주머니 속에 게껍질 가루를 넣은 병을 들고 다녔다. 시험이 시작되고 5분 동안, 미처 외우지 못한 내용이 있는지 살핀 다음 몰래 가루를 삼켰다. 잠시 고통스러운 발작이 이어진 후, 정신을 차리면 시험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고백했다가 차였을 때도, 제비뽑기에 실패했을 때도, 처음 간 식당에서 메뉴 선택에 실패했을 때도, 나는 게껍질 가루를 삼켰다.

어머니는 내 능력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외할아버지가 나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걸 오랫동안 지켜봐 왔기에, 내 행동 속에 담겨있던 작은 위화감들을 놓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게 그 능력을 쓰지 말라고 했다. 위험하다고. 외할아버지가 미쳐버린 이유도 바로 그 능력 때문이라고.

외할아버지는 나이가 들면서 심각한 강박증과 편집증에 시달렸고,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수십 년 전 아침 식사 시간을 외우고 있을 만큼 엄청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기억력이 오히려 문제였다. 잊고 싶어도 잊지를 못하니 언제부턴가 자신이 다른 사람인 양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연기하고 있을 때는 그저 박학다식한 평범한 노인에 지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오랫동안 알레르기 관리를 해왔고, 병원에도 따로 부탁한 덕분에 더 이상 시간을 되돌리지는 못하고 있었다. 애초에 너무 약한 몸으로 시도했다가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외할아버지 역시 내 능력을 알아봤다. 그리고 내가 대학에 합격한 날, 낡은 포장지로 감싼 선물을 주셨다.

젊은 시절 제약회사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던 외할아버지의 연구노트였다.

외할아버지는 자기 몸으로 실험했던 기록을 그 노트에 남겼고, 나는 거기서 능력을 조절하는 방법을 배웠다. 몇 분, 몇 시간이 아니라 몇 년을 돌아가기 위해서는 조금 위험한 방법을 써야 한다. 아니, 조금이 아니다. 정말 위험하다. 그래서 윤하를 잃었을 때와 윤하를 되찾기로 마음먹었을 때 처음으로 썼다.

넌 윤하를 잃은 게 아냐. 버린 거지.

방법은 아나필락시스, 그러니까 과민성 쇼크를 일으키는 것. 평소에 쓰던 게껍질 가루는 아무 시장에서나 구할 수 있는 평범한 게를 사용했지만, 과민성 쇼크를 일으키기 위해선 대리석무늬 가재를 사용한다. 가재를 한 마리 먹고 나면 평소처럼 알레르기가 생기지만 곧 진정된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 대리석무늬 가재를 통째로 갈아서 식염수에 탄 다음 혈관에 주사한다. 그러면 가재를 먹었을 때 생겼던 항체들이 미친 듯이 반응하면서 과도하게 분비된 히스타민이 전신에 퍼지고 쇼크가 온다.

그리고 주마등을 본다. 시간이 역행하며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그야말로 죽어가는 것이다. 더 깊은 과거가 보일수록, 의식도 옅여진다. 원하는 과거의 풍경이 보이면, 입안에 미리 넣어둔 항히스타민제를 깨물어 삼킨다. 고통스러운 순간이 지나가고 정신을 차리면, 과거로 돌아와 있다.

할아버지의 실험노트 뒷부분은 화학식이 가득했다. 조금씩 시간을 돌리는데 필요한 내용은 모두 앞에서 찾을 수 있었기에 처음엔 별다른 관심이 없었지만, 그 뒷부분에는 앞부분과 뚜렷이 구분될 만큼 누런 손때가 잔뜩 묻어있었다.

첫 문장은 ‘시간회귀능력의 약물적 회복에 대해’.

그때 읽었을 때는 그 의미를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할아버지도 능력을 잃은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가 여러 시행착오 끝에 알아는 방법은 히스타민의 원재료인 히스티딘을 몸에 대량으로 투여한 다음, 고농도의 알레르기 항원을 이어서 투여하는 것.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은 알레르기 반응 자체가 아니라 몸속에서 히스티딘이 히스타민으로 바뀌는 과정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대개는 도중에 과민성 쇼크로 죽어버리기 때문에 더 심각해지기 어려운 그 과정을 일시적으로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이다. 이때 정확한 시간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히스타민의 양이 중요하다. 그래서 균형을 맞추기 위한 항히스타민제도 대량으로 필요했다.

나는 오피스텔의 실험실을 떠올렸다.

그곳은 불륜을 위한 곳도, 보험살인을 위한 곳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한 것을 위한 곳이었다.

3월 13일, 첫 번째 시도.

실패.

히스티딘 농도를 높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걸까. 몸의 면역반응을 더 극적으로 끌어올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오늘은 3월 14일이다.

나와 현아는 어제 사라질 뻔했다. 삶이 통째로 지워질 뻔했다. 나는 노트를 덮었다.

 

22.
어머니에게 연락해 며칠만 현아를 맡아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직접 남자친구의 차를 몰고 두 시간 만에 집 앞까지 찾아왔다. 현아의 옷가지와 기저귀, 아이스박스에 담은 얼린 모유 따위를 차에 실으면서, 나는 나중에 설명 할 테니 자세한 건 묻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물을 생각도 없어. 나중에 설명 안 해도 돼. 내 인생 살기도 바빠. 요즘 한수 그 늙은이가 사격에 빠져가지곤 맨날 총 얘기만 하고 지겨워 죽겠어. 이러다 총 밀수라도 하진 않을까 걱정이야. 그럴 만한 놈이니까. 너도 알잖아? 걸리기만 해봐. 바로 경찰에 신고해서는 딴 남자 찾으러 갈 거야. 아무튼. 뭘 하든, 너 몸만 제대로 챙겨. 문제가 생겨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현아 봐주는 거밖에 없으니까. 현아가 얼마나 예쁜데 나한텐 오히려 선물이지. 그이도 현아 좋아하니까 우리 걱정은 하지 말고. 힘든 일은 다 그 사람한테 시킬거고. 현아가 우릴 좀 더 좋아해 주면 좋겠다만, 그건 노력해 봐야지.”

어머니의 이런 적당한 무관심 덕분에 내가 있을 수 있었다는 걸 다시 떠올리며 포옹이라도 하려고 했지만, 어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현아가 깨면 안 된다고, 깨기 전에 출발하겠다며 내 얼굴만 한 번 어루만지시고는 별다른 인사말도 없이 떠났다.

나는 다시 오피스텔로 향했다. 그 방에 있던 모든 액체와 가루를, 흘러내리고 퍼져나가는 모든 것을 싱크대와 화장실에 버렸다. 반진동 테이블은 너무 무거워서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방을 빠져 나오면서 비밀번호를 바꿨다.

 

23.
「내가 그 이야기를 믿고 믿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아. 너한테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 그거면 충분해.」

혜인이 스마트폰 화면 너머에서 말했다. 내가 영상통화를 걸었을 때, 혜인은 해안가 카페에서 논문을 읽는 중이었다. 노트에 담긴 내용을 얘기했을 때, 잠시 말을 잃기는 했지만 혜인은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부탁이 있다는 내 말에도, 망설임 없이 좋다고 얘기했다. 듣고 나서 결정하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하네다로 가서 출발하면 오늘 저녁엔 도착할 수 있을 거 같아. 기다릴 수 있겠어?」

“응. 고마워. 근데 정말 괜찮겠어? 잘못되면…”

「넌 나 때문에 범죄자가 될 뻔했잖아. 그때 중국 가면서 난 무서워 죽을 거 같았는데 넌 무슨 애인처럼 내 손 꼭 잡아주고 있었고. 그런 네가 없었으면 난 지금쯤 애 둘 쯤 품에 안고 곁눈질로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 고양이 특집이나 보면서 대리만족하는 주부가 되어 있었을 거야. 나한텐 그거보다 더 잘못될 수는 없어.」

나는 살짝 소리 내 웃었다. 지난주 NGC에서는 야생화된 집고양이에 대한 특집 다큐멘터리를 보여줬다. 현아는 티비 속 고양이가 담벼락 위로 뛰어오를 때마다 손뼉을 쳤지. 혜인은 잠시 분위기를 읽는 듯하더니 크게 웃으며 말했다.

「아, 그렇다고 그게 문제라는 건 아니고. 내가 바라는 삶은 아니었다는 거지. 아니, 이상한 얘기는 그만하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지금 여기 있을 수 있는 건, 내가 원하던 일을 할 수 있었던 건, 그때 네가 내게 이 길을 선택할 용기를 줬기 때문이야.」

듣고 있지나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게 그렇게 큰일이었다니.

「내 걱정은 하지 마. 자기 선택에 대한 책임은 질 수 있는 사람이니까. 너처럼.」

“고마워.”

「그럼 도착하자마자 연락할게.」

“응.”

나는 영상통화를 끊고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한 사람 더 필요했다. 이름을 누르자 신호음이 들렸다. 딸깍 소리와 함께 익숙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수하야.”

「네, 선배. 잘 지냈어요?」

수하는 내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도와줬으면 해. 조금 길지만, 할 얘기가 있어.”

「혹시…」

수하가 말을 줄였다. 잠시 고민하는 듯한 시간이 지나갔다.

「혹시 남편분과 관련된 건가요?」

이번엔 내가 말을 잃었다. 수하가 무언가를 알고 있는 걸까? 단순한 부부관계의 문제로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관심 있는 이성에게 연애나 부부관계 문제가 있기를 은연에 바라는 건 흔한 일이니까. 수하가 내게 이성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 묘한 기대감이 섞인 추측이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과 관련된.」

수하는 알고 있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대답이 없네요.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만나서 얘기해요. 아마 빠른 게 좋겠죠. 다시 리셋되기 전에.」

 

24.
나와 수하는 재호의 오피스텔 근처에 있는 어두운 골목에서 만났다. 온갖 욕구를 자극하는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뿜어낸 빛이 벽과 벽 사이에서 흘러내렸다. 알록달록해진 건물 벽을 담배 연기가 비틀거리며 타고 올랐다.

“BCI학회 때 기억나요? 선배가 병원에서 전화 받고 단상에서 내려왔던.”

수하가 담배를 털며 말했다. 그때 수하는 내 연구 내용을 완벽하게 설명했고 질의응답에서도 질문자들의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대답을 했다.

“기억해. 지금도 고마워. 그게 내 이름이 들어간 마지막 연구 활동이었으니까. 덕분에 나도, 안심하고 그만둘 수 있었어. 내가 없어져도 너 같은 후배가 있다면 얼마든지 이어갈 수 있을 거니까.”

거짓말. 내가 그만둬도 나를 대체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는 자괴감을 느꼈을 뿐이었다. 수하는 내 생각을 읽고 있는 듯했지만, 중요하지 않다는 듯 담배를 벽에 비벼 끄고는 말했다.

“궁금하지 않아요? 제가 어떻게 선배 연구를 그렇게 자세히 알 수 있었는지.”

“넌 날 좋아했잖아.”

한껏 진지해져 있던 수하의 얼굴이 순식간에 당혹감으로 차올랐다. 담배 연기를 잘못 마신 듯 콜록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 그게, 그렇긴 한데, 그게 다라고 생각해요?”

“알아. 그게 다가 아니란 거. 그냥 확인해보고 싶었을 뿐이야. 계속 짐작만 하고 있었거든. 사실이었구나.”

수하는 나를 살짝 흘겨보고는 목과 자세를 가다듬었다. 얼굴은 살짝 달아올라 있었다. 네온사인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수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전 선배의 연구를 세 번 지켜봤어요. 입학한 다음부터 BCI 학회 때까지의 모든 과정을. 선배 대신 발표를 한 것도 세 번이었어요. 처음 발표는 서툴렀지만, 두 번째는 괜찮았죠. 그리고 세 번째 발표 때는 선배만큼이나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럼 너도, 혹시 재호처럼…”

“아니, 그건 아니에요.”

수하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아는 듯, 고개를 저었다.

“선배 남편은, 아마도… 타임리퍼 같은 거겠죠. 전 아니에요. 전 그저 거기에 휘말렸을 뿐이고.”

머릿속이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휘말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수하는 숨을 크게 한 번 내쉬고 말했다.

“원래 전, 그러니까 시간이 되돌아가기 전엔, 대학원 졸업하고 미국에서 포닥을 하다가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와서… 또 포닥을 하고 있었어요. 그것도 두 번 연속. 30대 중반에 접어들었는데 여전히 불안했어요. 세 번째 포닥 땐 우리 연구실, 그러니까 선배가 있던 연구실로 다시 돌아왔죠. 지도교수, 성격 고약하고 차별적이지만, 유능했고 실적 쌓기 좋은 곳이긴 했잖아요.”

“나도 알아.”

“거기 돌아오니까… 선배 생각이 났어요. 선배가 만들어뒀던 실험 메뉴얼이나 퀵룩 테이블 같은 것도 그대로 남아있었거든요. 그래서 찾아갔어요.”

“날?”

나도 모르게 인상을 조금 찡그렸다.

“네. 알아요, 기분 나쁠 수 있다는 거. 아니, 불쾌하다는 거. 고등학생도 아니고.”

“그래, 그건 좀 그렇다. 예비 스토커 같네.”

“저도 택시에서 내리고 나서야 이건 좀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돌아섰어요. 몇 년 동안 발버둥 치면서 살았는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니 좀 과거지향적이 되었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죠. 그런데 돌아가려고 했을 때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졌어요. 그리고…”

수하는 꺼버린 담배가 아쉽다는 듯 손가락을 공중에서 이리저리 휘저었다. 나는 내가 물고 있던 담배를 건냈다. 수하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내 손가락에서 담배를 집어 들고는 입에 물고 한껏 빨아들였다. 그리고 연기를 내뿜었다. 하얀 연기는 네온사인의 깜빡거림에 맞춰 화려한 구름이 되어 사라졌다.

“정신 차리고 보니까, 전 고등학생이 되어 있었어요. 처음에는 꿈인가 했죠. 하지만 금방 꿈이 아니란 걸 알았어요. 모든 게 경험했던 그대로였으니까. 과거로 돌아온 거예요. 주변 사람들은 아무것도 몰랐어요. 저만 모든 걸 기억하고 있었죠.”

수하가 다음 말을 하기까지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 속에서는 셀 수 없는 수의 감정이 교차했다. 아니, 숫자는 정확하다. 지금까지 거쳐온 16명 유슬의 감정이 하나로 겹쳐졌다. 기억하지 못할 뿐이었다. 모두 나였고 같은 유슬이었다. 수하의 말이 맞다면, 적어도 수하는 세 명의 유슬과 현아가 살았던 시간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시간이 되돌아갈 때마다 재호를 제외한 모두가 사라지는 게 아닌 것이다. 그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윤하도, 열네 명의 현아도, 모두 뛰는 심장을 가지고 태어났었다. 시간이 되돌아간다고 한들, 그 사실 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지금 눈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수하의 기억이 그걸 증명했다.

“그다음 삶에서, 전 대학을 그만뒀어요. 제가 연구로 먹고 살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걸 깨달았잖아요. 대신 투자를 했어요. 어느 시장이 크게 성장할지 대충 알고 있었으니까  적당히 돈을 벌고는 알아서 굴러가는 사업체 하나 만들고는 편하게 살았죠. 결혼도 했어요. 동갑이었는데 선배와 닮은 여자였어요. 아, 알아요. 이것도 좀 기분 나쁠 수 있다는 거. 하지만 닮았을 뿐이고 다른 사람이에요. 아이도 낳았어요. 그리고 그 아이가…”

수하는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하지만 다시 입에서 떨어뜨렸다.

“유나는 경증 콜러스 증후군이었어요.”

유나. 재호의 노트에 나왔던 이름이었다.

“확인해보니 저한테 콜러스 증후군 유전자가 있더라고요. 다행히 증상은 없었지만. 유나는 건강했어요. 돈은 충분했으니 저도 아내도 딱히 일을 할 필요가 없어서 항상 곁에 있으면서 키웠죠. 잘 컸어요. 고집은 좀 세지만 성격도 좋고 노래하는 걸 좋아했죠. 그리고 눈이 참 예뻤어요. 그림 같았어요. 그, 뭐죠? 고흐의 그림 중에 밤하늘 그린 거 있잖아요? 그거 같았어요. 아마 직접 보지 않고는 모를 거예요.”

수하의 목소리가 약해졌다. 목이 멨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눈물은 없었지만, 마음속 어디선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유나. 윤하와 같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던 아이.

나는 수하의 손을 붙잡았다. 수하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유나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이었어요. 가족나들이로 시내에 나갔다가 서점에 들렀었죠. 책을 사고 나서 잠시 화장실에 갔다가 나왔는데 유나가 다른 남자를 저로 착각했다고 하더라고요. 저랑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이 있었나보다 하며 서점 밖으로 나왔는데…

남자 하나가 서점 앞 길바닥에 쓰러져서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어요. 아내가 말하더군요. 아까 유나가 아빠로 착각했던 사람이라고. 전 일단 도와야겠다며 그 사람 몸을 일으켰어요. 그리고 얼굴을 보니… 아는 얼굴이더군요. 선배의 남편이었어요. 물론 그… 그 시간 축에서는 아니었지만. 혀가 말려 들어가서 질식이라도 할까봐 입을 벌리려고 했는데 어금니 사이에 뭔가를 물고 있었어요. 커다란 캡슐 같은 거였죠. 그 사람 턱에 힘이 들어가고 어금니가 캡슐을 깨뜨렸을 때, 전 익숙한 아득함을 느꼈어요. 그리고 의식을 잃었죠. 정신을 차렸을 땐, 또다시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가 있었고.

타임리프를 처음 경험했을 때, 전 선배 집 근처에 있었어요. 그리고 다시 경험했을 땐, 선배 남편이 제 눈앞에 있었죠. 그때 의심했죠. 선배의 남편이 시간을 되돌리고 있는 건 아닐까.”

수하와 나 둘 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하는 내게 담배를 돌려줬다. 나는 이미 짧아져 버린 담배를 들고 수하를 바라봤다. 수하가 다시 말했다.

“다시 시작했을 땐, 처음의 삶과 똑같이 살았어요. 뭐랄까, 또 언제 다시 리셋되어버릴지 모르는데 가족을 만들 수는 없었어요. 영문도 모르는 채 일회용품이었던 것 마냥 가족이 사라져버리는 건… 견디기 힘들었어요. 아내였던 사람을 찾아가고 싶을 때마다 펜으로 허벅지를 사정없이 찔러버리기도 했죠. 지금도 허벅지를 보면 멍이 가득해요. 보고 싶어도 참아야 했어요. 게다가 아내를 똑 닮기도 했으니까. 우리 아이는….”

수하의 입술이 잠깐 오므려지다가 머뭇거리며 떨리는 것이 보였다. ‘유나’라는 이름을 뱉으려다가 억지로 삼키는 것 같았다. 나는 한 명의 윤하와 열네 명의 현아를 잃었지만,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수하는 단 한 명의 유나를 잃었고 그 아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별빛 눈동자를 수하는 기억하고 있었다. 숫자는 중요하지 않았다. 수하에게 위로를 건내고 싶었지만, 좀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수하는 말을 이어나갔다.

“확증이 필요했어요. 선배의 남편이 타임리퍼라는 증거가. 그래서 대학원에 입학해 선배를 지켜보면서 선배 남편을 관찰했어요. 선배가 출산을 한 날에도. 왠지 그날이 의심스러웠거든요. 선배 남편은… 유나를 보고 당황한 후에 시간을 되돌렸어요. 그래서 아이와 관련이 있을 것 같았죠. 그리고 예상은 맞아들어갔어요. 다음날, 선배가 출산한 병원 건너편에 있는 카페에 있었는데 잊을 수 없는 아득함이 느껴졌어요. 정말 여기서 의식을 잃고 깨어나면 고등학생이 되어있을까.”

수하가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되어 있었죠. 그래서 모든 걸 다시 반복했어요. 대신 이번엔 출산일에 병원 근처에 가지 않았어요. 그랬더니 시간이 돌아가지 않고… 여기까지 온 거죠. 그때 병원 근처에 있었다면, 또 시간이 되돌아갔을까, 그건 모르겠어요. 하지만 분명한 건, 선배 남편이 시간을 되돌리고 있다는 거고, 그때 가까이에 있다면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걸 잃고 한순간에 과거로 되돌아가 버릴 수 있다는 거죠. 이제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던 와중에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죠.”

수하는 지금이 세 번째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재호의 노트에 의하면 열일곱 번째다. 아마도 재호와 가까이 있을 때가 아니면 수하는 시간이 되돌아간 걸 인지하지 못한다. 나처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그저 처음으로 돌아가 같은 행동을 반복할 뿐이다.

"제 얘기는 여기까지예요. 선배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죠?"

"네 도움이 필요해.”

"그건 알아요."

물론 알겠지. 하지만 원리가 무엇이든 수하가 타임루프 속에서도 기억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수하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해야 했다. 일종의 보험으로.

"재호가 오피스텔에 돌아오자마자 가까이 가서 그때부터 절대 재호에게서 떨어지지 말고. 당장 몇 년씩 시간을 되돌리지는 못하고 있지만 짧은 시간은 여전히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몰라. 네가 재호 옆에 있다면 시간이 돌아가도 알 수 있을 테고."

그다음부터의 계획을 이야기하자 수하는 조금 놀라는 표정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25.
저녁 7시에 재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최대한 평상심을 유지하며 전화를 받았다.

「왔었구나.」

“노트, 읽었어. 지금 내가 가지고 있고.”

「알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찾았어?」

다시 침묵.

「거기 써놓은 거, 전부 믿어? 내가 시간을 되돌린다는 거. 그런 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잠시 뜸을 들이고 나는 입을 열었다.

“난 이게 그저, 재호, 네가 생각한 소설이었으면 좋겠어.”

이번엔 재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란 건 알아. 적어도 이걸 쓸 때의 넌 진심이었다는 건 알아. 난 널 아니까. 아니, 안다고 생각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재호를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른다. 이제 아무것도 모른다. 재호가 진심으로 노트를 썼을 거라는 확신마저 옅어졌다. 나는 재호를 모르니까.

「넌 나를 알아. 이해는 못 했지만 느끼고는 있었을 거야. 나도 뭔가 다르다는 걸 느꼈으니까.」

“내가 달랐다고? 누구와? 첫 번째 유슬? 아니면 열여섯 번째 유슬? 열여덟 번째 유슬한테도 같은 말을 할 거야?”

「모두 달랐어. 모든 유슬이 서로 달랐어. 같은 유슬은 단 한 번도 없었고. 하지만 넌 그중에서도 뭔가 특별했어. 기분 탓이었을지도 몰라. 난 널 사랑했으니까.」

전신에서 혈관이 요동쳤다. 심장이 뛸 때마다 혈관이 피부와 근육을 찢으며 터질 것 같았다.

“넌 우리 모두를 지웠어. 나도 지우려고 했고.”

「그땐 그게 널 위한 거라…」

“웃기지 마!”

내 목소리가 지하주차장의 얼어붙은 공기를 깨뜨렸다.

“누굴 위한 것도 아니야! 나는, 난, 유슬 모두는, 선택했었다고! 너를, 열네 명의 현아를, 그리고…”

목이 멨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주먹으로 주차장 벽을 세게 치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간신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윤하를.”

정신이 맑아졌다. 심장 박동과 호흡이 돌아왔다. 눈을 살며시 감고, 말했다.

“난 알 수 있어. 윤하가 첫 번째 유슬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첫 번째 유슬이 어떤 결심을 했고 어떤 마음으로 윤하를 낳고 키웠는지.”

다시 눈을 떴다.

“나는 유슬이니까. 네가 이 세상에서 윤하를 지워도, 몇 번이고 현아를 지워도, 난 같은 유슬이야. 모두 다른 유슬 따위는 없어. 유슬은 나 한 명이고, 넌 내 선택과 의지를 끊임없이 짓밟았어. 그리고 넌 내 아이를 열다섯 번 죽였고, 난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지나치고 비상계단을 올랐다. 열한 개씩 반복되는 계단을 끊임없이 올랐다. 층수를 세지 않아도 재호와의 거리가 좁혀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복도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재호의 비밀 실험실이 있던 곳으로 향하는 복도. 이제 겨우 세 번째 방문일 뿐이지만, 이미 수십 번 이곳을 지난 것만 같았다. 바닥에 내려앉은 작은 먼지의 그림자마저도 낯설지 않았다.

복도 끝에 재호가 서 있었다. 내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하지만 재호는 자기 뒤에서 수하가 다가오는 건 알지 못했는지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고는 다시 나를 바라봤다. 너한텐 놀람이란 것 자체가 이제 낯설겠지. 재호에게 한 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익숙한 냄새가 풍겨왔다.

수하가 실험실이 있던 방의 문을 열고 말했다.

"들어가시죠."

재호는 잠시 망설이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수하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한 손으로 재호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붙잡힌 손에는 노란색 가루가 든 자그만 비닐이 있었다. 게껍질 가루가 분명했다. 수하는 재호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는 게껍질 가루를 빼앗았다. 그리곤 준비해 둔 케이블타이로 재호의 손을 속박하고 주머니에 든 모든 물건을 꺼내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나는 무릎을 굽혀 재호의 얼굴에 다가가 말했다.

"어서 돌아와요, 남편."

 

26.
계획은 단순했다. 그리고 무모했다. 수하는 BCI를 통한 기억 증폭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 실험용 쥐에게만 효과가 확인된 기술이었지만 이론적으로는 사람에게도 쓸 수 있었다. 그저 부작용을 알 수 없어 다음 단계로 갈 수 없었을 뿐이다. 그러니 지금 상황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잠시 뒤면 혜인이 의료용 마이크로봇을 가지고 올 것이다. 이것도 체내에서 이틀밖에 견디지 못하는 시험용 머신이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수하가 윤하에 대한 재호의 기억을 최대한 증폭하고 의식의 영역에 고정하면 혜인의 마이크로봇은 정해진 시간에 재호의 체내에서 계산된 만큼의 히스타민을 분비시킬 것이다. 나는 두꺼운 케이블타이와 1.5미터 길이의 쇠사슬로 재호를 속박시킬 것이다. 도시가스 관에 걸어두면 딱 방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만큼의 길이였다. 쉽게 상처가 나지 않도록 케이블타이와 쇠사슬은 모두 부드러운 천으로 둘러 쌓인 걸 골랐다.

준비가 끝나면 우리는 윤하에 대한 기억에 괴로워하는 재호를 방에 두고 나갈 것이다. 20시간이 지나면 마이크로봇이 히스타민을 합성하게 될 거고 재호는 정확히 20시간 되돌아 간다. 재호는 여전히 방에 갇혀 있을 것이고 체내의 마이크로봇 역시 회복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20시간이 지나면 시간이 되돌아간다. 재호는 윤하가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하루를 끊임없이 반복하게 된다. 고통스러운 후회와 함께. 고통마저 무뎌질 때까지. 어쩌면, 영원히.

하지만 내게는 그저 하루일 뿐이다. 내겐 강물처럼 흘러간 시간이, 당연하게 다가올 내일이 재호에겐 영원히 닿지 못할 우주의 끝처럼 느껴지겠지.

묘한 사실이었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할까. 제논의 역설이 떠올랐다. 아킬레우스는 먼저 출발한 거북이를 금세 추월하겠지. 하지만 재호는 거북이와 자기 사이에서 무한히 나누어지는 공간을 하나하나 의식하는, 느낄 수밖에 없는 아킬레우스나 마찬가지다. 경주를 끝마칠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복수가 아무 것도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건 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해결이 아니다. 복수 그 자체다. 사라져간 나와 윤하와 현아들을 위한.

 

27.
혜인은 의자에 묶인 채 고개를 들고 있는 재호의 콧구멍에 점성이 있는 하얀 액체를 흘려 넣으며 말했다.

"48시간이 지나면 마이크로봇은 분자 단위로 분해될 거야. 그냥 내구성이 그 정도 수준밖에 안 돼. 분해되고 나면 정밀검사가 아니고서는 검출하기도 힘들 거고. 시간이 충분히 지나면 정밀검사로도 단순한 오염물질 정도로만 보일 거야."

재호는 양말로 만든 재갈이 물린 입으로 혜인을 올려다봤다. 나는 담담한 척하는 혜인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떨고 있었다.

"넌 이제 나가봐도 돼. 더 이상 관여하지 마."

"괜찮을까?"

나는 혜인을 감싸 안고 말했다.

"괜찮아. 여기서부턴 내가 알아서 할게."

수하가 재호의 머리에 BCI 전극을 붙이는 동안 나는 혜인을 현관으로 이끌었다. 원래는 마이크로봇 앰플만 받으려고 했었지만 혜인은 좀 더 돕고 싶다고 직접 주입을 하러 들어온 거였다.

“고마워.”

“필요하면 언제든 다시 불러.”

혜인은 나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내 등을 몇 번 쓰다듬고는 문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혜인의 시선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니 수하가 이미 BCI 전극에 연결된 컴퓨터를 조작하고 있었다. 이제 가장 중요한 단계다. 수하가 내게 시선을 보냈고 나는 옷 속에 숨겨두고 있던 노트를 꺼냈다. 분홍색 호텔이 그려진 귀여운 노트. 가름끈으로 노트를 펼치자 글자가 쏟아졌다. 재호가 윤하에 대해 남긴 기록들. 노트 속에서도 가장 강한 필압으로 쓰여져 종이가 스스로 구겨지기 직전인 곳.

나는 재호 앞에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그리고 목을 가다듬고 또렷한 목소리로 노트를 읽었다.

“매일 아침 윤하는 엄마보다 먼저 일어나 용케 혼자 방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온다. 발바닥을 파닥파닥거리며. 거실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하면 눈을 한 번 비비고는 안아 달라는 듯 팔을 앞으로 뻗고 다가온다. 짙푸른 밤하늘 속 별빛이 반짝이는 두 눈을 반짝이며.”

재호는 고개를 들고 나를 노려봤다. 나는 소매를 손목 위로 당겨 재호의 턱을 적신 침을 깨끗이 닦아줬다. 한때 그의 얼굴을 적신 우리의 뒤섞인 체액을 닦아냈던 것처럼. 이게 마지막 정이야.

“윤하는 내게 안기면 곧장 짧은 다리를 들어 올려 내 가슴을 옆으로 감싼다. 그리고 내 목을 바라보며 어깨에 얼굴을 기댄다. 약하지만 뜨거운 숨길이 전해진다.”

“계속해요. 위치가 조금씩 보여요.”

수하는 그렇게 말하며 수많은 선이 복잡하게 엉킨 그래프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나는 노트를 계속해서 읽어갔다. 단어 하나, 글자 하나, 음절 하나 빠뜨리지 않고. 터져 오르는 감정을 동력으로 삼아 페이지를 넘기고 또 넘겼다. 페이지가 영원히 이어질 것처럼, 모든 감각을 가다듬어 재호의 기억을 어루만졌다.

재호의 눈이 붉어지고 분노의 슬픔의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턱 아래에서 끊임없이 뚝뚝뚝 흘러내렸다. 나는 수하에게 눈빛을 보냈고 수하는 손가락을 올리고 있던 스위치를 눌렀다.

재호의 의식 속으로 윤하가 결코 뽑히지 않을 뿌리를 내렸다.

나는 재호의 이마에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윤하에게 전해 줘. 엄마들이 널 너무 사랑한다고. 너의 동생들도 모두 널 사랑할 거라고.”

 

28.
옆방에는 재호를 지켜볼 수 있는 시설을 준비했다. 조잡하게 만들어진 감시카메라 시스템이었지만 어차피 하루만 버티면 되는 거니까. 모니터 속 재호는 재갈이 물린 채 괴로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루프는 시작되지 않았다.

준비를 모두 끝내고 나가기 위해 현관문을 열었다. 수하가 뒤따라왔고 나는 돌아서서 선 채로 수하를 가볍게 안았다가 놓아주며 말했다.

“괜찮겠어? 루프에 휘말리는 게 썩 좋은 기분은 아닐 건데.”

“괜찮아요. 일단 계획이 잘 돌아가는지는 확인해야 하니까요. 일주일 정도만 있다가 나갈게요.”

“나한텐 내일이겠지만. 그럼 내가 내일 만나게 될 너는 지금의 너와는 다른 사람인 걸까? 다른 시간대에서 온? 사실은 네가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거 아니야? 몇 년이나 돌아갔었으니.”

“쓸데없는 사실을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요.”

“그래야지. 재호가 소란을 피워서 사람이 몰리진 않을까?”

“그 방이 끝 방인데 옆방은 제가 잡았고 윗방은 출장 중인 것 같아요. 아랫방은 가끔 한두 사람이 잠깐씩 들어온다는데 아무래도 윗방 시끄럽다고 따질 입장은 아닌 거 같아요. 그리고 어차피 그 사람들에겐 하루 만에 끝날 거니까.”

“고마워.”

나는 다시 한번 수하를 안았다. 그리고 입을 맞췄다.

“고마워.”

다시 말했다.

수하는 잠시 넋을 놓더니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한 발짝 다가오려는 듯 발걸음을 떼었다.

“아니, 여기까지.”

수하의 가슴을 검지로 밀어 누르며 나는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가벼운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다시 넘을 일이 없을 선을 그었다. 수하의 얼굴 위로 실망보다는 자책의 표정이 떠올랐다.

수하는 한 번 헛기침을 하더니 표정을 밝히며 말했다.

“그럼 내일 보죠.”

“그래, 내일.”

우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함께 현관문을 소리도 나지 않을 만큼 천천히 닫았다.

복도에서 잠시 기다려야 했다. 마이크로봇이 계획대로 작동했다면 돌아올 시간이 지금부터 10분 뒤니까. 만약 문제가 생겼다면 수하가 시간이 되돌아가자마자, 그러니까 지금부터 10분 후에 방에서 튀어나와 나를 찾을 것이다. 그리고 대책을 마련하겠지.

10시간처럼 느껴지는 10분이 지났고 수하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루프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걸까? 이미 몇 번이나 돈 걸까? 그렇다면 몇 번이나 돌았을까? 만약 23번째 루프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22번째 루프의 유슬까지는 그걸 깨닫지 못하겠지. 지금의 나는 몇 번째 루프의 유슬일까?

나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지하 버튼을 눌렀다. 닫힘 버튼은 누르지 않았다. 잠시 뒤 문이 닫히고 두꺼운 철제 케이블과 무거운 추가 무게를 주고받으며 움직이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29.
다음날 오피스텔을 찾아갔을 때 재호는 그곳에 없었다. 수하는 있었다. 재호를 묶어뒀던 쇠사슬에 목이 감겨 쓰러진 채로. 쇠사슬 주변에서 축 늘어져 있는 수하의 손은 구겨진 종이 한 장을 붙잡고 있었다. 종이를 펼쳐보니 네댓 살 정도 되는 여자아이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연필로만 그렸지만 사진처럼 정교하고 사실적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 하지만 왠지 낯설지 않다. 연필의 검은색 궤적만으로도 아이의 눈이 별처럼 빛났다.

“유나.”

지워진 시간 속 수하의 아이.

사진과 다름없는 그림이었지만 선의 길이, 음영을 만드는 방법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내 얼굴도 이렇게 연필 끝에 담긴 적이 있었지. 이건 재호의 그림이었다. 재호가 수하의 아이를 그린 것이다.

루프의 부작용으로 재호의 기억력이 인간을 훌쩍 뛰어넘었는데 그러기 위해선 사진을 찍어 남기는 수준의 완전기억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수하는 재호가 유나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 기대했을 거야. 재호의 기억 속에 유나의 모습이 있을 거라고.

“그래서 그려달라고 했구나. 다시 보지 못하고 아무도 기억 못하는 네 아이를. 유나를.”

나는 수하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미약하게나마 온기가 남아 있었다. 수하를 원망할 수는 없었다. 수하 역시 아이를 잃었는데. 나는 오직 내 원한과 슬픔만을 생각했다. 수하에게도 사적인 복수의 권리가 있었는데. 그리움의 권리가 있었는데. 수하의 새하얀 입술과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수하와 유나 모두에게 보내는 키스였다.

수하의 가슴엔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미처 상처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옷에 뚫린 구멍을 보니 연필에 찔린 것 같았다. 평소의 수하였다면 솨사슬 길이보다 멀리 떨어져서 먼저 연필을 돌려받았 텐데. 하지만 아마 재호가 유나의 모습을 먼저 보여줬겠지. 수하는 이성을 잃고 다가갔을 거고. 눈물이 앞을 가려 재호의 손에 거꾸로 잡힌 연필을 미처 보지 못했을 거야. 수하의 입술에서 눈물의 맛이 느껴졌던 것 같기도 하다.

쇠사슬의 길이가 1.5미터 밖에 안되니 연필을 뺐었다면 목을 조르는 재호에게 충분히 반격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하지만 반격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목이 졸려 의식을 잃기 직전에 연필을 잡은 것 같다. 반격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연필로 무언가를 썼을까? 너무 뻔한 방법이다.

허벅지. 수하는 아내와 아이가 떠오를 때마다 허벅지를 찔렀다.

나는 수하에게 자그맣게 사과를 하며 바지를 벗겼다. 안쪽 허벅지 피부에 검푸른 선이 가득했다. 수하가 남긴 메시지다.

6.

6은 무슨 의미일까? 수하는 일주일 정도 지켜본다고 했다. 그렇다면 여섯 번째 날에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재호에게 갔던 걸까? 그리고.

혀ㄴㅇㅏ에ㅅㅔ.

현아에게. 재호는 현아에게 갔다.

어머니에게 전화했다. 받지 않았다. 아니, 연결 자체가 되지 않았다. 망할 엄마, 또 전파도 닿지 않는 산 구석 별장에 간 거야. 안전한 장소이기는 한데 거기가 안전하다는 건 재호도 안다고. 나는 비상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아마 그럴 것이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있었고 어떻게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에 올라타고 출발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30.
어머니와 어머니의 남자친구 한수 아저씨는 별장 현관 옆에 쓰러져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이 모두 피와 멍으로 범벅이었다. 필사적으로 재호를 막은 게 분명했다. 어머니도 한수 아저씨도 운동중독이었기에 힘으로는 밀릴 리가 없었지만 재호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아마 뼈가 부러지는 고통도 개의치 않고 덤벼들었을 것이다. 재호는 왼팔로는 현아를 품아 안고 오른손에는 게껍질이 든 봉투를 들고 있었다. 오른쪽 아래팔뼈 하나가 부러진 건지 손을 제대로 움직이지는 못했다. 하지만 무엇을 하려는 건지는 짐작하고도 남았다. 현아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피곤하다는 듯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그만둬.”

내가 재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재호는 내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얜 내 딸이야. 나처럼 모든 걸 돌이킬 수 있을 거야.”

재호가 말했다.

“멍청한 얘기 하지 마. 현아는 아직 아기야.”

“이틀만 돌이키면 돼. 그럼 모든 걸 다시 올바른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어.”

“올바른 모습이 뭔데? 내겐 지금이, 지금 네가 안고 있는 현아가 올바른 모습이야. 이 망할 상황은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이 현실이 내겐 하나밖에 없는, 결코 되돌릴 수도 없고 되돌려서도 안 되는 유일한 세상이라고!”

재호가 나를 바라봤다. 흰자가 보이지 않을 만큼 시뻘겋게 충혈된 눈이었다. 가장자리에선 눈물인지 피인지 알 수 없는 액체가 흘러내리다 말라붙어 있었다.

“널 사랑해, 유슬아.”

“그럼 현아를 내려놔. 돌려줘.”

“하지만 현아가 필요해.”

“도대체 왜?”

“윤하를 만나야 해.”

“걘 여기 없어! 넌 절대 윤하를 다시 만날 수 없다고!”

“윤하는 여기 있어! 내 머릿속에서 지금도 맨발로 돌아다니며 날 부르고 있다고!”

재호가 소리치자 현아가 깜짝 놀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다시 한번 재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현아야, 괜찮아. 아무 것도 아니야. 졸리지? 눈 감고 자.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아빤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6년 동안이나 윤하가 날 부르고 있어. 날 기다리고 있다고.”

6년? 세상에. 수하는 6일 동안 망설인 게 아니었다. 루프 속에서 6년을 망설였던 거다. 그동안 재호는 더욱 미쳐버렸고.

재호가 거친 신음을 내며 오른손을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 게껍질 가루 봉투의 한쪽 끝을 입에 물고는 고개를 비틀었다. 봉투가 찢어지기 시작했다.

“안 돼!”

현아에게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었던가? 기본적인 알레르기 검사를 했을 때 딱히 들은 건 없었지만 정밀 검사는 하지 않았다. 기본 검사 목록에 어떤 게 있었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좀 더 자세히 보고 기억해 뒀어야 했는데! 가루가 피부에 떨어지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될까? 호흡기로 들어가면? 저 가루 입자가 숨바람에 날릴 만큼 작은가? 혹시나 알레르기가 있더라도 경증일 수는 있을까? 중증이면 어떻게 하지? 정말 현아도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까? 그럼 그땐 어떡하지? 얼마나 돌아갈까? 난 지금 상황을 기억하지 못할 건데. 혹시 재호는 이 상황을 이미 여러 번 경험한 게 아닐까? 사실은 현아가 이미 여러 번 시간을 되돌린 건 아닐까? 현아가 되돌린 건 아니야. 재호가 이용한 거지. 망할 새끼. 현아는 우리 딸이라고. 내 딸이라고! 타임머신이 아니라고! 재호 개새끼, 넌 반드시 내 손으로…!

찰나의 순간이었다. 봉투가 완전히 찢어지기 직전에 총소리가 울렸고 재호의 목에서 피가 튀었다. 그리고 뒤로 쓰러지기 시작했고 나는 상황을 이해할 겨를도 없이 달려들어 재호의 손에서 현아를 뺏었다. 총소리에 또 한 번 놀란 현아는 더 크게 울기 위해 숨을 잔뜩 들이마시고 있었다.

재호가 쓰러지고 나는 현아를 안은 채 그 위로 넘어졌다. 바닥에 머리를 세게 부딪히며 목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지만 현아는 놓치지 않았다. 현아는 갓 태아났을 때처럼 커다란 울음을 떠뜨렸고 어머니가 달려와 나를 일으키려고 했다. 나는 어머니를 말리며 현아를 먼저 어머니에게 안겼다. 현아를 안은 어머니 뒤로 한수 아저씨가 권총을 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총구에선 가느다란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꼬불꼬불 흘러나왔다.

큰일 났네. 한수 아저씨 이제 경찰서에 잡혀간다. 우리 엄마는 이런 일엔 자비가 없다고. 내가 고등학교 때 고출력 레이저 포인터 밀수한 것도 직접 신고한 사람이야.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저씨 고...”

목이 뜨거워졌다. 재호의 피가 튄 걸까? 하지만 왜 말이 안나오지?

재호가 나를 붙잡고는 몸을 뒤집어 내 위로 올라와 누웠다. 그제야 내 목에 연필이 박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한수 아저씨가 달려와 재호를 떼어내려고 했지만 재호는 내 목과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는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몸이 거칠게 흔들리며 목에 박혀 있던 연필이 바닥에 부딪히며 목을 한 번 크게 찢고는 부러지고 빠져버렸다. 피가 쏟아졌다. 한수 아저씨는 당황한 얼굴을 하고는 재호의 뒤통수를 권총 손잡이로 마구 내리쳤다. 총알은 하나 밖에 없었나 보다. 아저씨, 됐으니까 이제 그만 해요.

재호가 얼굴을 내 옆에 가져다 댔다. 우리 목에 난 구멍의 위치가 절묘하게 이어졌다. 두 개의 목 사이에서 우리 피가 섞이며 거칠게 요동쳤다. 재호는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넌 특별해, 유슬아. 모든 게 처음부터 이렇게 될 예정이었던 거야. 처음 널 만났을 때부터, 우리가 윤하를 낳았을 때부터.”

나는 재호를 노려보며 최대한 힘과 호흡을 모아 또박또박 말했다.

“윤하를 낳은 나야, 이 좆같은 새끼야.”

첫 번째 유슬로부터의 전언. 나는 그렇게 믿었다. 첫 번째 유슬이 내 입을 통해 말한 거야. 내가 내게 입을 맞추며. 두 번째 유슬도. 세 번째 유슬도. 열여섯 명의 유슬이 내게 키스를 했다. 몸에서 힘이 빠지며 의식이 아득하게 옅어졌다. 입에서 단맛이 느껴졌다. 오늘 초콜릿을 먹었던가? 꿈에선 먹었을지도 모르지. 노래가 생각나. 달콤한 죽음을 환영하는 노래가.

이렇게 가는 거구나.

그래, 나는 이렇게 죽었다.

 

31.
복도다.

오피스텔이다.

10시간 같은 10분이 지났다.

뭐라고?

그러니까, 일단 루프가 제대로 돌고 있다는 거지. 그게 아니라면 수하가 당장 문을 열고 나왔을 거니까.

아니야. 이건 이미 지난 일인데. 꿈을 꾸는 건가? 주마등인가?

복도가 빙글 돈다. 어지럽다.

쓰러지면서 옆에 있던 소화전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친다. 아프다. 주마등은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그럼 현실이겠지.

돌아왔다. 과거로. 아니, 현재지. 모르겠다. 일단 돌아온 거다. 이게 현재든 과거든 미래든.

어떻게?

마이크로봇. 마이크로봇이 시간에 맞춰 작동한 거다. 방을 탈출했더라도 마이크로봇은 여전히 재호의 몸속에 있었으니까. 마이크로봇은 예정된 시간에 예정된 만큼의 히스타민을 분비했고 예정된 만큼의 시간이 되돌아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나는 왜 기억을 하고 있는 거지?

목을 쓰다듬었다. 근육을 뚫고 들어와 살을 비집는 연필의 날카로움. 피가 빠져나가는 불쾌함. 섞이는 피. 재호의 피.

재호의 피가 내 몸에 섞여든 걸까? 그래봤자 새 발의 피 수준이었을 건데.

현아의 할머니, 내 어머니도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었지. 알레르기는 유전될 수 있고. 내게도 시간을 되돌리는 유전자가 있었던 걸까? 그저 발현하지 않았을 뿐이라면? 현아가 태어났을 때 의사가 그랬지. 현아는 콜러스 증후군 유전자는 가지고 있지만 발현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그리고 재호와 나 둘 중 하나도 증상 없이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 했지. 어쩌면 콜러스 증후군이 시간을 되돌리는 힘과 관계가 있을지도. 별빛 눈동자와 알레르기와 시간을 되돌리는 힘 모두 같은 유전자의 다른 모습일지도 몰라. 연구과제로 괜찮네.

어쨌거나.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피가 내 몸으로 들어왔고 그게 잠자고 있던 내 몸속 유전자를 혹은 형질을 자극한 걸지도 모른다.

쓸데없는 사실을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요.

수하가 그랬지. 그래, 생각하지 말자. 적어도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수하. 시간이 다시 돌아왔으니 수하는 지금 저 방 안에 있다. 카메라 영상을 보며 재호를 감시하고 있겠지. 재호의 몸이 시간을 되돌린 건 어머니의 별장이었으니까 수하는 이번 루프에 휘말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의 수하는 몇 시간 뒤에 재호에게 그림을 요구하겠지.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하긴. 나는 한 번 죽었잖아. 그때 절실히 하고 싶었던 일을 해야지.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32.
기다렸다. 재호의 오피스텔 방 앞에서. 귀를 기울이며. 몸싸움 소리가 들린다. 욕지거리가 들린다. 지금이다. 키패드에 다섯 개의 번호를 입력한다. 삐삐삐삐삐. 49862. 자그만 모터가 돌아가며 걸쇠가 풀린다. 손잡이를 열고 천천히 문을 연다.

수하가 쇠사슬에 목이 감겨 의식을 잃기 직전이다. 재호는 나를 보더니 당황과 기쁨이 섞인 표정으로 짓는다. 재호의 팔에서 힘이 빠지고 팽팽하게 당기던 쇠사슬이 포물선으로 늘어진다. 수하는 거칠게 숨과 기침을 뱉고는 다시 재호에게 달려들지만 목을 세 번이나 감은 쇠사슬이 목을 잡아당겨 우스꽝스럽게 거꾸러진다. 뒤늦게 나를 발견하고는 얼굴을 붉힌다. 놀란 건지 부끄러운 건지.

수하는 얼버무리며 말한다.

“선배, 여긴 어떻게…?”

“6년을 고민해놓고 겨우 떠올린 방법이 이거야?”

이번엔 정말 놀란 표정이다.

재호는 수하의 목이 풀리지 않을 정도로만 쇠사슬을 붙잡아 당기며 웃는다. 보자마자 알았겠지. 나도 함께 돌아왔다는 걸.

나는 성큼성큼 걸어 재호 앞에 선다. 재호의 눈 대신 손을 본다. 연필이 있다. 아까, 아니 잠시 뒤에 저게 내 목을 찔렀지. 아팠어.

재호가 입을 연다.

“유슬아, 이제 우리가…”

나는 허리 뒤에서 한수 아저씨의 권총을 꺼내 총구를 재호의 이마에 댄다. 그때와는 대답이 다를 거야.

“…같이…”

“싫어.”

나는 방아쇠를 당긴다. 시끄러운 총성이 먼저인지 재호의 찢어진 두피와 조각난 뒤통수뼈와 뜨거운 뇌수가 튀어 오른 게 먼저인지는 알 수 없다. 재호는 죽었고 윤하는 저 냄새나는 뇌의 속박에서 풀려났다. 그래, 윤하도 저기에 갇혀 있었던 거야.

윤하야, 미안해.

널 이용하려고 해서.

널 조용히 보내주지 못해서.

 

33.
“그림 때문이었던 거죠?”

구치소 접견실 철창 너머에서 수하가 말했다.

“선배 남…, 아니 그놈이 유나 그림을 그려줄 때까지 밖에서 기다렸던 거죠? 그 전에 죽여버리면 다시는 그림을 구할 방법이 없으니까.”

나는 그저 웃었다. 수하도 따라 웃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혜인 씨한테 연락이 왔어요. 걱정하지 말라고. 옛날 특허 몇 개가 대박 나면서 이젠 돈 걱정이 없대요. 아직 돈이 들어온 건 아니지만 그걸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잔뜩 빌렸대요. 일류 변호사를 고르고 골라서 드림팀을 만들겠다나.”

“일 잘하고 가정적인 남편을 쇠사슬에 묶어두고 총으로 쏴 죽인 애 엄마를 어떻게 변호하겠대?”

수하가 손으로 얼굴을 살짝 가리고 어울리지 않는 험악한 인상을 지으며 속삭였다.

“법으로 안된다면 다른 방법으로라도라면서…”

어깨만 조금 들썩일 정도의 가벼운 웃음이 터졌다. 웃긴 친구야. 난 네가 성공할 줄 알았어. 우리 다음에 같이 고양이 다큐멘터리나 보자.

“그리고….”

수하가 목소리를 줄이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제 타임루프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이 제법 있어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어디서는 대응조직까지 만들어질 거라는 얘기도 들었어요. 그래서 만약에 재판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그 노트. 그걸로 거래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일종의 보험으로.”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노트는 아무한테도 못 넘겨.”

“미안해요. 혹시나 해서 얘기해 봤어요.”

수하의 손목시계가 조용히 진동했다. 면담이 시작되고 9분이 지났다. 이제 1분 남았다.

“아까 부탁한 논문들은 우편으로 보낼게요. 괜찮겠어요? 이런 상황에서…”

“이런 곳에서 몸과 종이 몇 장 만으로 즐거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니 얼마나 다행이야?”

나는 조금 과장된 흥분을 보이며 말했다. 수하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더 필요한 건 없어요? 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필요한 건 없어요? 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없어. 다음엔 우리 엄마랑 윤하도 데리고 와.”

“그럴게요. 아, 그리고…”

수하가 자리에서 일어서다 말고 주머니에서 손바닥 크기의 종이를 꺼냈다. 사진이었다. 엄밀하게는 그림을 찍은 사진이었다. 수하는 사진을 철창 사이 유리 벽에 올렸다.

“유나예요. 그 그림을 가지고 초상화 전문가한테 찾아가서 채색을 부탁했어요. 인공지능에 최면상담사까지 동원해서 제 기억 속 유나의 색을 재현했고요. 제 기억 속 유나의 모습 그대로.”

하늘색 머리띠를 한 검은 머리의 어린 여자아이가 활짝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아이의 자그만 눈동자 위로 밤하늘이 물결치고 별빛이 반짝였다. 윤하야, 넌 이런 눈을 가졌던 거구나. 유나야, 찾아와줘서 고마워.

“수하야.”

내가 말했다.

“네?”

“그 사람, 찾아가.”

“누구요?”

“네 아내였던 사람.”

수하는 다시 자리에 앉는다. 사실 주저앉은 것에 가깝다.

“무슨… 얘기죠?”

“재호가 아무리 시간을 되돌렸어도 넌 여전히 유나의 아빠야. 재호가 한 짓 때문에 가족을 잊는 건 오히려 지는 거라고 생각해. 물론 네 마음이 바뀐 게 아니라면. 그 사람을 다시 찾아가 봐. 그 사람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한 번은 널 선택했던 사람이잖아. 그 사람이 다시 선택할 기회도 빼앗지 말아야지.”

수하는 입을 벌린 채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농담처럼 웃으며 덧붙였다.

“그 사람 보면서 날 상상하진 말고. 그건 좀 징그럽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수하가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우리는 둘 다 키득거리며 웃었고 교도관이 들어와 이제 시간이 되었으니 나오라고 했다. 수하는 사진을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여전히 우습다는 듯 실실거리며 교도관의 안내를 따라 바깥으로 걸어갔다. 문이 닫히기 전 눈이 마주쳤다. 또 올게요. 다음에 봐.

수하는 그 사람을 찾아갈까? 찾아가겠지. 아마 결혼도 하고. 아이도 가질 거야. 유나의 동생을. 현아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나이 차이는 좀 나겠지만 뭐 어때.

눈을 감는다. 밤하늘에 커다란 별이 반짝인다. 파란 붓자국이 별빛 사이로 넘실거리고 눈썹 같은 달은 조용히 눈부신 자태를 뽐낸다. 밤하늘 아래로 아이들이 뛰어논다. 윤하가 그곳에 있다. 열네 명의 현아도 그곳에 있다. 열여섯 명의 유슬이 그들을 보살 핀다. 첫 번째 유슬이 뒤돌아본다. 나를 보며 손을 흔든다. 윤하가 뛰어와 첫 번째 유슬의 폼에 안긴다. 윤하도 나를 보며 손을 흔든다.

안녕. 난 유슬이야. 너의 엄마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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