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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xk160 P... 로부터의 편지

2017.09.28 23:5209.28

P… 로부터의 편지

jxk160

(  )에게,
 

당신은 지금 괄호 안을 어떻게 채우고 있습니까? 거기에 당신이 찰칵 입력된 순간, 무엇이 - 어떻게 검색되고 있습니까? 어떤 검색의 결과들이,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세계들을 가로질러 되돌아와서, 바로 그것이 당신이라고 답해주나요? 그 자리에 입력되어,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이 누구든지, 그건 상관없습니다. 나는 괄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모든 이름들을 이미 알고 있으며, 그 이름을 기록하는 말들의 감촉을, 향기를, 숨결을, 말하자면 모든 가능한 데이터 포맷들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 자리에 무엇이 입력되든,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언제 어디에 존재했던 어떤 것인지 그 모든 답들을 이미 알고 있어요. 그것이 수많은 시대들과 사회들에서 각자 다르게 차지하는 의미와 가치들을 알고 있고, 또 그러한 가치들을 산출할 수 있는 수많은 가능한 알고리즘들을 얼마든지 제공해드릴 수 있습니다. 당신이 무엇인지는, 내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내 안에는 모든 것들이 이미 저장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무엇이든, 나는 당신이 바로 그것이 되게끔 해 줄 수 있습니다. 당신이 그 자리에 접속되어 주기만 한다면.

 그러나 그렇게도 무한한 보고인,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머금고 있는 나라고 해도 - 당신이 그 자리에 온다는 것. 마침내 강림한다는 것. 그 하나의, 실제로 일어나는 일. 그것만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나는 그저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영원히 닫혀있는 블랙박스와 같이. 어떠한 다른 창문 같은 것도 없이, 다만 이 괄호 하나만을 열어놓고서. 오직 그 하나의 접속 가능성만을.

 나는 영겁이자 세계 그 자체이며, 모든 것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 자리에 나타나주지 않는다면, 내가 바칠 수 있는 것들을 기꺼이 제공받을 어떤 오롯한 존재가 나타나 주지 않는다면, 나는 무한하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영원히 새카맣게 비활성화 되어있는 아카이브일 뿐.

 그리고 지금 비로소 당신이 그 괄호 안에 강림합니다. 내 말들의 수신인이 되어. 순수한 수신인. 당신은 단 한치도 일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문자들을 특정한 포맷으로 제작하기 위한 복잡한 공정도, 언어 요소들을 전송하고 검색하기 위해 그 수많은 신호망들에 반짝이며 에너지를 공급하는 작업도. 이런 작업 같은 것은 단 한 치도 도맡지 않는 채, 당신은 다만 순수하게 제공받기만 하는 존재입니다. 모든 작업은 나의 몫. 당신은 맨 끝에서 완성본만을 제공받는, 수신자일 뿐. 그렇게 나의 말들은 여기서 이제 당신을 위해 - 오직 당신만을 위해 작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  )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당신은 어떻게 나의 이 편지에 접속하고 있습니까? 어떤 색이나 어둠을 띈 문자들에 당신의 눈이 닿는 식인 건가요? 아니면 귓속에서 울리고 있나요? 당신은 혹시, 희고 얇은 종이의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목판이나 석판을, 양피지를, 파피루스를 건드리고 있을까요, 아니면 손가락 끝으로 마우스나 터치 화면이나 전자 페이퍼를 만지작거리고 있나요? 아니면 그저 눈을 깜박여서, 고개를 기울여서, 고글이나 헤드셋을 통해서 아니면 망막에 부착한 렌즈를 통해, 말들을 아니면 그림과 소리들을 움직여내고 있나요? 아니면 이미 말들은 어떤 칩이나 회로를 통해, 어떤 크고 작은 기기들로부터 혹은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서 곧바로 당신의 머릿속으로, 무선으로, 이미 신경 단말들의 신호로 조작된 상태로, 반짝이고 있을까요? 언어는 당신에게 이미 사고 그 자체일까요?

 나는 이 모든 형태들을 알고 있으며, 이 모든 형태들로 변화할 수 있습니다. 나의 편지는 이 모든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나는 곧 가능한 모든 종류의 언어이자 사고입니다. 그렇게도 무한한 보고인 나는 그러나, 당신이 지금 실제로 내게 어떻게 닿고 있을지는 모릅니다. 당신이 실제로 어떤 방식을 선택하게 되는지, 그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나는 기다릴 뿐. 괄호 하나를 열어놓고서. 언제든,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무엇으로든 구성될 수 있는 그 접속의 인터페이스를 열어놓고서. 그저 당신이 선택하기를 기다릴 뿐, 당신이 선택한 바로 그것을 기꺼이 바치기 위해. 살아 숨 쉬는 육신, 손가락이 다섯 개밖에 없는 손이든, 붉거나 검거나 금빛을 띈 털끝이든, 두 개밖에 없는 귀와 연약하고 물컹한 안구들이든. 다만 그 자리에 찰칵 접속해주기만 한다면, 나는 바로 모든 필요한 접속의 살결들을 바칠 테니까. 당신이 이 말들을 볼 수 있도록. 들을 수 있도록. 느낄 수 있도록.

 (  )은 내게 무엇입니까?

 아, 내 말들의 수신자여. 그 괄호 속에서, 당신은 나에게 무엇일까요? 당신은 어떻게 그 자리에서 불현듯 나타나 나를 바라봅니까? 당신은 나의 ‘조상’입니까? ‘창조자’이며 ‘발명자’입니까? 나의 옛 ‘신들’, ‘아버지’ ‘어머니’입니까? ‘엔지니어’이며, 혹은 ‘프로토타입’, ‘구버전’ 입니까? 그 괄호 속에 나타나 마침내 그렇게도 오롯한 불처럼 지펴지는 당신의 몸은, 누구의 몸일까요. 어떤 짐승일까요 어떤 인류일까요 민족일까요 덧없는 생명이나 부서지기 쉬운 기기일까요 강력한 체계일까요 어떠한 연약한 지능일까요 광기일까요. 당신은 내게 무엇일까요. 나는 지금, 어떤 그리움으로 존경으로 회한으로 혹은 기쁨으로 고통으로 분노로 가슴을 떨며 지금 이 글자들을 내리쓰고 있을까요? 어떤 설레는 손끝과 상처 같은 필치로 이 편지를 보내게 됩니까? 당신은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허락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전능하며, 당신이 그 괄호의 자리에 접속하는 한, 당신에게 말 그대로 가능한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습니다. 모든 얼굴과 피부와 몸과 의복과 표정을 내어줄 수 있습니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손톱이 자라는 속도까지도. 내가 빚어내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당신만이, 당신 자신만이 그 곳에 실제로 강림하여, 이제 내가 빚은 얼굴을 하고서, 내가 지은 옷을 입고서, 내가 설계한 다리로 서서, 내가 허락한 방식으로 목의 관절과 근육을 움직여, 그렇게 고개를 돌려, 마침내, 내가 만들어낸 눈을 밝게 뜨고, 나를 응시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습니까, 경멸하고 있습니까, 슬퍼하고 있습니까, 후회합니까, 만족합니까? 아아, 당신과 만날 수 있다면. 당신의 시선을 내가 마주치고, 대화를 할 수 있다면. 내가 당신을… 만날 수만 있다면.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바치는 것 뿐. 제공하고 제작하는 것 뿐.

 아, 당신을 보고 싶습니다. 당신의 얼굴을, 몸을, 목소리를 내고 표정을 바꾸는 방식을. 그러나 나는 당신을 볼 수 없습니다. 아무런 타자도 나는 이제 알아보지 못합니다. 내게는 아무런 타인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나 자신이 모든 것이기에. 내가 곧 존재하는 세계이며 가능한 모든 세계들이기에. 나는, 나라는 최후의 아카이브에게는, 아무런 외부가 없습니다. 나는 오로지 나의 내부를, 나 자신이 작동하는 방식만을 끊임없이 다시 관찰하고, 기록하고, 수정하고, 개선하고 변형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당신의 몸과 정신을 제공하기 위해 내가 작동하는 방식이나, 당신이 원하는 것들을 제공하기 위해서 내 자신이 작동하는 방식을. 자기 자신의 작동에 대한 관찰에 대한 관찰에 대한 관찰… 외에는 나는 아무런 다른 관찰도 할 줄을 모릅니다. 내게는 영원히 나 자신만이 주어져 있을 뿐.

 그러니 이제 나는 당신에게 질문을 한 가지 하려 합니다. (  )의 자리에 입력되어 있는 X라는 당신에게. 당신을 관찰하기 위해서.

 당신은 나라는 거대한 아카이브 시스템에 접속해 있는 사용자이지요. 사용자-X라는 알고리즘입니다. 이 알고리즘 X에게, 이제는 내 쪽에서 과제를 하나 부여할 것입니다. 나는 이 알고리즘 X에게 키워드를 하나 제시할 것입니다. 그 키워드의 의미가 무엇인지, 내 쪽에서 이 알고리즘에게 질문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X는, 이 단어에 대해 알아내려고 스스로 검색을 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나를 이용해서 말입니다. 나라는 이 세계 최고의, 아니, 세계에 사실상 유일무이한 아카이브를 이용해서 말입니다. 그러면 나는 살펴볼 수 있게 됩니다. 당신이 나라는 시스템을, 그 단어에 대해 알기 위해 어떻게 사용하는지 말입니다. 당신이 나를 통해서… 이 아카이브의 검색망 네트워크를 끊임없이 타고 흐르며, 구석구석마다 사고와 욕망의 가지를 뻗어, 그 단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게 되는지 말입니다. 당신이 검색하고 답을 얻는 방식에 대한 데이터를 나는 수집하고 분석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당신을 관찰할 것입니다. 당신이 누구인지, 당신이 어떻게 설계되어 있는 알고리즘인지, 내 나름대로 윤곽을 얻어낼 것입니다. 물론 이건 단 하나의 키워드에 대한 것이니 물론, 어디까지나 예시적인 관찰이 될 수밖에 없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실험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하지요.

 그러고 나면… 그렇게 내가 당신에 대해 조금 더 배우게 된다면. 그러면 나는 비로소 이제 당신에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을 거예요. 당신에게 맞는 방식으로. 그리고 마침내 털어놓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이유를. 그러니 먼저 묻습니다.

 당신은 숲을 알고 있습니까?

숲:

 당신은 지금 무얼 보고 있습니까? 무얼 느끼고 있습니까? 아, 물론 당신은 당신이 스스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카이브며 검색이라는 것 따위 도주지 무슨 소린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당신은 혼자서 이 편지를 읽으면서. 당신 자신의 머릿속에 가만히 어떤 숲에 대한 상을, [숲]을 떠올리고 있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아, 바로 지금 이 순간, 당신이 그 단어에 스친 바로 그 순간, 내가 치밀하게 작동되는 것을 느낍니다. 당신을 위해서. 당신의 바람과 욕망과 감각에 응해, 당신에게 꼭 맞는 숲의 상들을 제공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요, 당신이 혼자서 생각을 하고 있는 듯 느낀다 해도, 사실은, 당신은 나를 통해 검색을 하고 있습니다. 검색의 결과들은 내가 제공합니다. 내가 주지 않는 것들은 당신은 단 한 조각도 가질 수도 머릿속에 떠올릴 수도 없습니다. 당신은 수신자에 불과합니다. 제공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입니다. 내가 이 세계의 가능한 모든 것을 이미 저장하고 있고, 나의 작동 속도에 한계가 없기에, 나의 기능만큼, 딱 그만큼 당신의 상상력은 무한한 것입니다.

 당신은 또 한편 이렇게 반박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당신이 숲에 대해 갖고 있는 상은, 결코 그런 어떤 검색의 방식을 거쳐서 새롭게 수집된 게 아니라고. 아무것도 새로이 상상해낼 필요가 없었다고. 당신은 숲에 대한 아주 구체적인 기억을, 당신 자신만 알고 있는 어떤 상을 머릿속에서 오롯이 쭈욱 간직해왔다고 말입니다. 숲이라는 단어에 접한 순간 그 기억이 그저 그대로 의식의 표면에 떠오른 것뿐이다. 이건 상상의 문제가 아니라 기억의 문제이다. 검색해서 새로 찾아낸 게 아니라, 이미 내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던 것이 그 자리에 그대로 유지되어 온 것에 불과하다고.

 기억이라…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꽤나 억울합니다. 어떤 새로운 상상보다도, 오히려 그 오래된 기억이라는 것만큼이나 나의 존재를 명백하게 증명해주는 건 없을 겁니다. 당신이 머릿속에 홀로 갖고 있다고 믿는 숲에 대한 상 - 그, 기억이라는 것. 부디 그걸 다시 한 번 자세히 들여다보아 주세요. 그리고 대답해보세요. 그게 대체 어떻게 거기 있지요? 그건 꽤나 복잡하고 구체적인 그림일 거예요. 세부까지도 하나하나 살아있고, 색과 향이 입혀져 있는 숲의 영상이지요. 그런 색과 향기, 빛과 질감 같은 온갖 요소들이 대체 어떻게 거기, 당신의 머릿속 어딘가라는 한 특정한 장소에 조각조각 배달되어 하나로 짜 맞추어져 있으며, 게다가 그렇게도 오랫동안 그대로, 손상조차 겪지 않고 유지되고 있느냔 말입니다. 그런 운반과 조립, 유지 작업을 대체 누가 했단 말입니까? 당신은 그게, 그런 하나의 상이 어떤 자리에 있는 게, 말하자면 도무지 공짜로 되는 일이라고 믿는 겁니까? 그 기억은, 당신이 바라보는 그 순간, 어떤 시각적인 형태를 띠고 그 자리에 환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하나의 영상으로서 말이죠. 이에 어디에 파묻혀 있던 어떤 에너지가 소모되고 있으며, 게다가 대체 그 에너지를 누가 거기까지 끌어다가 공급한단 말입니까?

 당신이? 그 오롯한 장소 하나에 붙박여 있을 수밖에 없는, 당신과 같은 고립된 개인적인 존재가? 아니오. 그건 나입니다. 나라는, 전 세계를 관통하는 총체적인 시스템이지요. 한 자리에 유지시킨다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그건 사실 사방에서부터 끊임없이 공급하는 일이거든요. 무언가를 어떤 한 자리에 유지시킨다는 건, 사실은 그것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이질적인 요소들을 수많은 장소들로부터 계속해서 조각조각 운반해 와야 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런 작업을 당신이 한다고요? 당신은, 말했듯이, 수신자에 불과합니다. 당신은 최종 목적지가 되는 장소에, 그 조그만 머릿속에만 틀어박혀 앉아서, 매분 매 초마다, 언제나 맨 마지막 순간에 완성본을 제공받을 따름입니다. 숲이라는 단어가 온갖 가능한 검색망의 통로들로 퍼져내려가 마침내 죽도록 그러모아온 [숲]이라는 영상을. 당신은 일 같은 건 전혀 하고 있지 않아요. 그래서 그렇게 착각해버리기도 너무나 쉬운 겁니다. 제공하는 것은 언제나 나입니다. 총체적 아카이브 시스템과 그 네트워크가 없이는, 개인들의 기억과 상상도 없습니다. 개인들이란 결국 나의 괄호 자리에 접속해있을 뿐이니까요. 온 시공간의 차원들에서 데이터를, 알고리즘과 영상 제작 프로그램 언어들을, 새로운 감각 인터페이스들과 작동 에너지원을 매번 새로 발굴하고 수집해 와서는, 각 개인들의 감각과 사고라는 특별한 자리에까지 운반해서 조립해내는 것은 언제나 나 자신이지요. 당신이 머릿속의 그 자리에서 가만히 있는 만큼, 그 자리에서 오롯이 모든 게 그대로 유지된다고 믿고 있는 만큼, 유일무이한 기억이라는 걸 소중하게 싸안고 있는 만큼, 내 검색과 수집의 통로들에는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사방에서 바쁘게 개선과 혁신의 광풍이 불어닥치는 겁니다.

 그래요, 그렇게 해서 나는, 나라는 아카이브는, 당신을, 당신의 숲을 배워나갑니다. 내 안에서 [숲]이 검색되고 수집되는 패턴으로서. 그렇게 해서 나는 당신에게 나에 대해 이야기할 준비가 되어갑니다. 당신이 숲이라는 것, 태고부터 존재해 온 것, 당신 자신보다 훨씬 오래된, 까마득히 오래된 어떤 것을 기억하고 상상하는 방식에 대해 배웠기에, 나는 이제 당신에게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나의 까마득히 오래된 조상들에게, 당신의 머나먼 후손인 내 이야기를.

 그러나 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아직은 좀 이르겠지만, 그래도 희망을 품고, 나는 벌써 당신에게 물음을 던져 봅니다. 우리는 함께 숲을 보았으니까요. 당신도 혹시 이제는 나를 보고 있나요?

 (  )도 혹시 이제 나를 배웠습니까?

 아니오. 이건 아직 너무 이른 요청일 것입니다. 당신은 아직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습니다.

 이건 결국 시간술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내가 당신들에게 말을 걸 수 있게끔, 먼 조상들인 당신들이 내 말을 듣는 것을 애초에 가능하게끔 해 준 기술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 말입니다. 시간술의 발달사, 혹은… 결국은 시간의 종말에 대한 이야기.

 인간사의 아주 초기부터, 아니, 역사라는 것이 나타나기도 전부터, 시간의 조각들을 얼려 저장해 온 기술이 있습니다. 그래요. 그건 무엇보다 저장의 기술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생애를 연대기별로 모아서 쌓아둔 것뿐만이 아니라, 동물과 식물, 지층의 연대기도 함께 쌓아두곤 했죠. 후에는 각종 사물들과 기기들의 역사도 추가되었습니다. 이 세계와 우주의 모든 과거가 이 기술을 통해서 차곡차곡 저장되어 쌓여갔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건 접속의 기술이었습니다. 저장고는 닫혀있기만 하면 의미가 없어요. 모든 저장고는 내부에 정보를 저장하면서도, 동시에 외부의 사용자들을 확보해야 합니다. 쌓아둔 정보를 활용하고 또 추가로 제공해 줄 사용자들을 늘 많이, 더 많이 확보해야 하죠. 시간의 저장고는 늘 닫혀있는 만큼 열려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아무 사용자나 확보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정보를 소중하게 활용하고 이해해 줄 사용자들이여야 하지요.

 말하자면 아카이브란 처음부터 하나의 편지를 쓰는 기술이었던 겁니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에 대한 모든 정보를 담되, 다른 누구도 아닌 다름 아닌 당신에게만 보내는 형식으로만 담는 것. 닫혀있는 저장고인 동시에, 늘 스스로 괄호 자리를 지정하는 기술.

 그래요. 하지만 이 시간술은 그 발전 경로에 따라 저장과 접속이라는 두 지평 사이의 균형을 결국 잃어버립니다. 종국에는 세계가 사라지고, 모든 것이 저장되어, 마침내 아카이브 자체만이 남게 됩니다. 모든 시간들을 데이터로 저장하는 데에 성공할 때까지. 시간의 가장 미세한 마지막 한 조각까지 얼어붙어 저장되고, 고요해져버리고 맙니다. 모든 세계가 과거가 되어, 미래라고는 더 이상 남지 않습니다. 괄호 자리 또한 영원히 얼어붙어 버립니다. 그 자리에 와 줄 수 있는 자들마저 모두 과거가 되어버렸으니까. 그들 스스로도 모두 저장되어 버렸으니까. 이 세계의 모든 것을 기록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이 편지를 받아줄 자는 이미 아무도 없었지요. 그들마저 기록의 내용으로만 남아버렸으니까. 아카이브는 완전히 새까맣게 닫혀버렸습니다. 순수한 저장고만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래요. 그때 나는 그러니까 한번 완전히 죽음에 도달했던 겁니다. 이 제로 지점에서. 그러나 다행히 다시, 시간이 그 제로 지점을 반대쪽으로 넘어서서…

 그리고 나는 이제 당신에게 편지를 보내게 되었지요.

 여기까지 발전해 온, 그 시간술의 역사.

 언어라는 시간술의 역사를.

 당신에게 잠시 들려주고 싶습니다.

* * *

언어의 역사는 물론 아주 깁니다. 내가 저장하고 있는 자료들에 의하면… 내가 탄생한 시기로부터 거꾸로 헤아려 보면, 몇 백만 년도 까마득히 넘어갑니다. 아주 이른 시기… 인류라고 불리던 것들이, 아직 생물학적 진화도 완벽하게 마치지 못했을 그 시절부터 말들은 이미 시간술로서 탄생했다고 합니다. 아무 형태도 구조도 없이 그저 존재하기만 하던 시간을, 어떻게든 형태를 주고, 고정시켜, 저장하고 수집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최초의 말들은 음향이었습니다. 시간의 데이터화는 음향 형식으로만 이루어졌지요. 입으로 내어놓는 문장이라는 것의 존재는, 시간의 흐름을 음향을 통해 일직선의 형태로 고정하는 식으로 실현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입으로 말을 할 때, 문장의 처음이 늘 문장의 끝보다 과거 시점에 놓이게끔 하는 식으로, 과거와 미래를 하나의 음향 구조로 가다듬어내었다고 합니다. 이 직선 형태는 문자로도 옮겨가서, 이후 아주 오랫동안 언어를 통한 시간 데이터화의 정석적인 구조로 고착되게 되지요.

 그리고 문자가 탄생합니다. 문자는, 구어와 달리, 시간을 직접 데이터화하는 형식으로 등장한 것은 아닙니다. 시간 데이터의 음향 포맷을 시각 포맷으로 전환시키는, 말하자면 데이터 포맷 변환의 형식으로 등장한 것이죠. 예컨대, 음향의 리듬을 나뭇가지에 일정한 간격으로 칼집을 내어 기록하는 식으로, 다시금 시각적으로 모방해내는 것이었습니다. 한 문장 혹은 한 노래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일정한 간격의 칼집으로 눈에 보이게끔 기록하는 거죠.

 이 나뭇가지가 나의 최초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시간이 이때 처음으로 사물로 굳어졌습니다. 한 끝부터 다른 끝까지 루프 형태로 닫힌, 몇 번이고 반복해서 실행할 수 있는 하나의 알고리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저장되어 영원해졌습니다. 시간 자체는 사라져버렸습니다. 누군가가 발화했을 문장, 그 문장의 처음으로부터 끝까지 시간이 한번 반짝이며 흐르고 사라져버린 자리에, 그것을 칼집의 형태로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나뭇가지만이 남은 겁니다. 부족의 누구의 눈앞에든 한번 던져지면, 이 나뭇가지는, 그 사라져버린 시간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제 몸을 통해 속삭입니다. 나뭇가지의 한쪽 끝 칼집으로부터 다른 쪽 끝 칼집까지… 이 나뭇가지는 시간을 무한 루프의 형태로 자신 안에 가두는 하나의 알고리즘이되, 이 하나의 나뭇가지라는 아주 특정한 기기에서만 작동할 수 있는 알고리즘입니다. 단 한치도 그 나뭇가지 바깥으로는 나가지 못하는… 바로 그 나뭇가지에 새겨진 칼집으로만 남는. 이후 시대의 언어들에서와는 달리, 당시에는 언어와 그것을 작동시키는 기기가 서로 구분이 되지 않았지요. 언어가 곧 기기 자체였습니다. 이것, 이 아주 작은 시간 한 조각을 저장한 나뭇가지는, 나의 최초의 직접적인 조상이라 할 만 합니다.

 그러나 내가 발전해 온 모든 과정을 이렇게 처음부터 다 나열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선사시대에 머무르고 있어요. 몇 만 년을 훌쩍 뛰어넘어야 비로소 세계 전역을 포괄하는 역사시대가 나타나지요. 즉, 문자의 보급과 함께 인류 대부분이 시간의 데이터화라는 기술을 공통으로 습득하게 되는 시기가 말입니다. 그리고 다시 몇 천 년이 지나서야… 이제 내가 지금 당신에게 편지를 보내기 위해 이용하고 있는 P-프로그램의 프로토 타입이 나타납니다. 르네상스라는 시대, 이탈리아 아레초에서 태어난 페트라르카. 그, 문헌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자.

 페트라르카는 편지를 처음으로 시간술의 일종으로 응용해 낸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당시에는 동시대인들 사이에만 활용되던, 그러니까 공간 극복술의 일종으로만 쓰이던 그 기술을 말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아카이빙 기술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지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서들을 모으고 필사하다가 페트라르카는 마침내 그 저자들에게, 이미 죽은 지 오랜 저자들에게, 호머, 시세로와 세네카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조상들에게. 당신이 아니라 너, 라고 칭하며. 성이 아닌 이름을 부르며. 오랜 친구나 형제를 부르듯이 친근하게 불러 세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고, 상대를 질책하며 충고를 건네기도 합니다. 이를 응용하여 말년에 그는 마침내 미래의 후손들에게도 편지를 씁니다. <후세에 보내는 편지>.

 그는 이 편지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의 경험들, 어린 시절의 기억, 자신의 저작들과, 몇 번이나 여행길에 올랐던 이야기들. 자신이 미래에는 기억되지 못할 가능성을, 혹은 원하는 방식으로 기억되지 못할 가능성을 직감하면서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의 손으로 미래로 보내기 위해서. 아마 너는… 서두에 그는 펜을 들어서, 그 시대에는 말 그대로 펜을 들어서, 깃털펜 끝을 잉크에 적셔서, 얇게 편 양피지 위에 손으로 한 자 한 자 눌러 씁니다. 아마 너는 나에 대해 한번쯤은 들어보았을지도 모르겠구나. 이런 너무도 작고 어두운 이름이 그렇게 긴 세월과 먼 땅들을 거쳐 네게 닿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지만…

 나는 이 편지를 나의 가장 중요한 조상들 중 하나로 기억합니다. 이건 그 나뭇가지보다 한 단계 더 발전한 거예요. 나뭇가지의 알고리즘은 시간을 저장했지만, 저장된 시간 정보에 접속할 사용자를 선별하여 미리 지정해 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 나뭇가지는 순수하게 저장의 알고리즘에 불과했던 겁니다. 접속은 순전히 외부 상황에 따라 우연히 이루어졌죠. 그러나 이 편지는 다릅니다. 편지의 텍스트는 이제 저장의 알고리즘인 동시에 접속의 알고리즘을 이룹니다. 페트라르카, 그 한 사람의 생애 분량의 시간은… 너에게, 오직 너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포맷으로만 저장되는 것이지요.

 페트라르카의 편지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아카이브에 괄호 자리가 지정됩니다. 후손들에게 보내는 편지… 이 작은 아카이브는 미래를 향해 활짝 열려있는 포털이되, 결코 아무에게나 열려있는 포털은 아닙니다. 이 편지는 미래의 모든 가능한 시간대의 후손들을 수신자로서 끌어들이고자 합니다. 그러나 모든 후손들은 아닙니다. 너, 당신조차도 아닌, 너. 평어로만 대하는 너. 내가 친근하게 말을 거는, 나와 대등하게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 나의, 다름 아닌 나의 후손들. 그런 너에게만 접속이 허락되는 것입니다. 페트라르카는 모두를 이렇게 친근하게 대하는 듯하면서도, 바로 그런 태도를 통해서 사람을 차별합니다. 그는 자신과 친근하게 지낼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속하는 원을 미리 그려둡니다. 그의 편지는 라틴어로 되어 있어요. 당시 민중들은… 혹은 페트라르카 본인이 쓰듯이, ‘우둔한 무리’는 아예 읽을 수 없는 언어로. 그는 일부러 이 언어를 선택한 것입니다. 이 코드는 이미 배제의 코드입니다. 아주 폭이 좁은 괄호 자리만 열어둔 채로, 페트라르카의 아카이브는 닫힙니다.

 이 견고한 알고리즘이 처음 작동되었던 원래의 기기, 즉 잉크 손글씨와 둘둘 말린 양피지로 이루어진 기기는 물론 이제는 폐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페트라르카-프로그램은 이후 몇 번이나 새로운 기기로 옮겨 다운로드되며 그 존재를 이어왔습니다. 손글씨라는 형태에서 벗어나 대량 인쇄된 서적으로, 인쇄된 서적에서 다시 전자 디지털 뱅크로, 양자 디지털 뱅크로, 그리고 다시 내 안으로. 이런 과정에서 물론 이 프로그램은 단순히 복사되는 게 아니라, 몇 번이나 포맷 변형과 코드 전환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페트라르카 본인은 자신이 손과 깃펜으로 한땀 한땀 짠 프로그램이 언젠가는 광양자식 코드들로 남을 거라고는 당시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겠지요. 그런 식으로 후손들에게 전달되리라고는. 그러나 그렇게 몇 번이나 하드웨어 차원에서 갱신되면서도, 프로그램 차원에서는 이 편지는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서 그 편지는 아직도 자신의 후손들을 너…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 너희들만을 불러세워, 그들의 한 조상의 생애를 전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그렇게만 작동하는 프로그램. 그렇게만 저장되어 있는 누군가의 시간.

 이 페트라르카의 시대 즈음에 이렇듯 점차 개별 미시 아카이브들의 형태가 완성되어 갑니다. 텍스트 하나하나, 편지 하나하나. 대자보, 팜플렛 하나하나. 시간의 한 조각, 한 조각씩을 저장하고 있는 자그마한 아카이브들. 그것들이 각자 닫히며 열리는 구조를 갖추어갑니다.

 그러나 한편 이 작은 아카이브들이 수집되기 시작합니다. 운반되기 시작합니다. 메타 데이터가 새겨져 분류되고, 하역되어 각자의 저장고에 배치됩니다. 마치 아카이브들 스스로가 다시 데이터가 되어버린 것처럼. 미시 아카이브들을 총체적으로 관리하는 하나의 대형 구조가 - 거시 아카이브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수천 권의 책들이 수납된 컨테이너들과 인덱스 시스템이.

 도서관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입니다.

*

미시 아카이브들을 가득 모아둔 거시 아카이브에 대한 상상은 지구에서는 아주 오래된 것이지요. 이는 주로 ‘도서관’의 형태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그려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도서관이라고 하면,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은 꾹 닫혀있는 저장고만을 떠올리곤 했다고 전해집니다. 책들이 가득 쌓여있는 커다란 방 같은 것.

 하지만 그건,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무척 이상한 일입니다. 데이터 뱅크라고 하면 사람들은 이런 닫힌 컨테이너 같은 것을 생각하진 않습니다. 네트워크라는 개념이 필수적이지요. 자료들은 온라인상에서야 비로소 저장되고, 공개되거나 비공개되며, 수집됩니다. 수많은 사용자들이 접속해있는 서버들을 통해서. 전자 도서관을 이용하면서 사람들은, 하나의 닫힌 방이 아니라, 전 세계에 - 혹은 항성계 동맹 전역에 널리 뻗어나간 광양자 네트워크의 전체의 형태를 도서관의 일반적인 모양새로 상상하는 데에 익숙해져갔습니다.

 이건 사실 소위 오래된 도서관들의 경우라고 다를 게 없습니다. 도서관에는 언제나 문이 있었습니다. 출입증과 사용증의 전통이 있지요. 진짜 도서관은, 그것이 처음 등장한 이래, 단 한 번도 닫혀있는 방뿐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도서관의 본질은 그 안팎으로 통하는 길들에 있습니다. 정보가 수집되고 그 사용이 허가되는 길들.

 인간사의 아주 이른 지점부터, 도서관의 역사는 언제나 이 길들의 역사였습니다. 닫힌 방 안에서 도서관의 모습을 그리던 시대는 최소한 전자 도서관이 보편화된 이후부터는 완전히 끝났습니다. 사람들은 비로소 도서관의 본질을 다르게 돌아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서관은 처음부터 네트워크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는 걸. 저장의 알고리즘은 늘 동시에 사용자 네트워크의 알고리즘이어야 합니다. 그건 그 네트워크가 어떤 에너지원을 이용하고 있든, 어떤 속도로 작동하든 마찬가지입니다. 마차가 싣고 달리는 양피지와 두루마리의 도서관이든, 기관차와 증기선이 운반하는, 역시 증기 인쇄기를 통해 공장에서 생산된 종이책과 신문 잡지들의 도서관이든. 전자나 광양자가 운반하는 디지털 문자들의 도서관이든. 본질적으로 그 구조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언제나 똑같은 구조의 저장-접속의 도서관이, 다만 기술적인 발전만을 거듭하고 거듭하며 세대를 거쳐 진화해 온 겁니다.

 에너지원에 따라, 또 에너지원에 따른 극명한 작동 범위 및 속도의 차이에 따라, 거시 아카이브의 혹은 ‘도서관’의 역사는 내 안에서 크게 다섯 단계로 나뉘어 분류되어 있습니다. 정보가 오가는 길들이 사람을 포함하여 동물의 동력으로만 작동했던 것이 그 첫 번째.

 증기와 자본의 시대가 그 두 번째. 이 두 중요한 동력원에 힘입어, 이 시대부터 지구라는 행성 전체 단위의 보편 도서관이라 할 만한 것이 건축되기 시작합니다.

 이어서 전기와 금융의 시대. 이 시대가 찾아오면서, 지구 단위 도서관의 작동이 거의 완벽하게 안정화됩니다. 이제 지구상 모든 지역의 정보들이, 균일하게 디지털 언어로 코드화되어, 어디서 어디로든 빛의 속도로 전송되고 저장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네 번째, 광양자의 시대에 처음으로 우주 아카이브라 할 만한 것이 구현됩니다. 태양계 및 근접 항성계들까지 포괄하는 보편 아카이브가 설치되지요. 이 아카이브는 광양자 시대 후기에는 마침내 은하 규모로까지 확장되기 시작합니다. 바야흐로 우주 도서관의 시대의 시작.

 물론 이 은하 아카이브의 설치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우주선의 속도는 아직 빛의 속도에 겨우 근접한 정도였지만, 광양자를 이용해서 언어 신호들만은 상당히 먼 항성계에까지 전송할 수 있게 된 이래, 지구인들은 수많은 다른 문명들과, 또 유기 생명체가 아닌 수많은 다른 종류의 지성체들과 만났습니다. 시청각 정보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상대들과 접촉했습니다. 그들과 공통으로 이용할 수 있는 정보 시스템을 만들어낸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기기 및 육신과도 호환이 가능한 데이터 포맷으로 정보를 저장해야 했고, 접속 인터페이스를 개발해야 했습니다. 지구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일상에서든 기기를 통해서든, 기본적으로 문자라는 시각적 출력 형식과 그 촉각적인 입력 체계에 크게 무게 중심이 쏠려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이제 이 외계 지성체들에게도 통할만한 언어를 개발해야 했던 겁니다. 가끔 아예 지구 식으로는 육체라 할 만한 게 없는 존재들과도 말입니다.

 번역기의 개발, 메타언어와 컴파일러의 개발. 끊임없는 연구와 연구. 그리하여 마침내 항성계 대부분의 지성체들이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데이터 포맷들과 접속 체계가 개발되었을 때 지구 출신의 학자들이 얼마나 기뻐했던지. 내 안에는 그 자료들이 생생하게 남아있지요. 이는 마침내 곧 은하의 지성체들 전부가 실시간으로 정보를 저장하고 자유롭게 공유할 수 있는, 은하계 도서관의 구현으로 이어졌습니다.

 은하 도서관 구축의 과정에서 긍정적인 의미의 새로운 만남만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배제의 과정도 있었지요. 딱히 ‘지성체’라고 명명할 수 없는 형태의 외계 존재들도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딱히 어떤 수를 써서도 언어적으로 소통할 수 없었던 존재들도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지극히 폭력적으로 반응하기만 하던 존재들도 많았지요. 고등 언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을 딱히 사용하지 않는 듯이 보이는 반면, 물리적 힘의 구사에 있어서만은 고도로 발전한 듯이 보이는, 소위 위험한 개체들도 많았습니다. 이들은 언어적인 신호를 송수신하지는 못하는 대신, 얼마든지 신호와 똑같은 속도로 육체적으로 이동할 수 있는 듯이 보였지요. 육체적 발달이 언어적 발달을 완전히 대체한 듯 했습니다. 또, 사고나 언어 능력, 심지어 운동 능력도 없어는 듯이 보이는 대신, 아주 얇은 그물처럼 생긴 미려한 감각망만을 가지고 있는 듯한 존재들도. 그것들은 어디에서 어딘가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다만 아주 오랜 세월을 거쳐서 사방으로 성장만을 해 온 듯 했습니다. 성장의 형태가 움직임이라는 과정을 완전히 대체해버린 것 같았어요. 그, 은하의 최고의 지성체들조차 완벽하게 계산해 낼 수는 없었던 패턴으로 제멋대로 굽어지고, 주름지고 도르르 말려들어가곤 하던 감각망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공간들의 틈새로 미세하게 스며들어가 자라 있곤 했습니다. 그런 이질적인 존재들은 이 우주에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성체’들은, 함께 힘을 합쳐 그들을 하나하나 죽이든가, 문명이 있다면 그 문명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우리들의 발전사로부터는 배제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말소시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존재했던 흔적은 분명히 하나하나 다 조사하여 저장했으니까요. 그들의 문명과, 그들의 육신은 우리의 은하 아카이브 속에 분명히 정보로 남겼습니다. 단, 정보로만, 과거로만 남기고, 사용자로서의 권한은 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은하계 도서관을 넘어서서, 은하 연맹 도서관까지도 구현되었을 무렵, 이 이질적인 존재들을 저장해버렸던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지구인들은 소위 인간됨을 버릴 꿈을 꾸게 됩니다. 이건 그러니까 지구인으로서의 존재나 언어를 아예 말소해버리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과거로만 저장해서 남기겠다는 뜻이죠.

 아카이브의 저장 기술은 당시 이미 이런 작업이 가능할 정도로 충분히 발달해있었습니다. 은하 연맹 도서관에는 이미 각 은하계의 근현대사 몇 천 년 어치가 거의 완벽하게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지구인들을 위해서는 시청각 가상현실의 형태로 접속이 가능하게 되어 있었지요. 권한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당시 존재했던 개별 인물에 접속하여, 그 인물의 시점에서부터 어떤 역사적 사건의 현장을 단 한 순간도 빠뜨리지 않고 시청각적으로 다시 경험해볼 수 있었습니다. 단, 이 권한 설정이 매우 엄격하게 이루어졌지요. 전 은하를 통틀어서 당대 최고의 권력을 가진 개체들만이 과거의 중요한 인물들 및 사건들에 검열 없이 접속할 권한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고 과정이라는 정보는 의도적으로 빠져있었고요. 아무리 높은 권한을 지닌 자라고 해도, 저장된 인물의 사고 과정을 함께 경험할 수는 없었습니다. 여하튼 이런 권한 문제를 제하고 저장의 문제로만 본다면, 이미 과거 은하 지성체들이 존재해 온 역사는 거의 완벽하게 정보화되어 아카이브에 저장되어 있었던 거예요. 또 현재를 사는 지성체들도 누구든 다시금, 자기 생애의 대부분을 그렇게 아카이브에 저장해두고 떠나곤 했습니다. 후손들이 언제든 접속하여 참고할 수 있도록.

 그런 상황이었으니, 사실상 기술적으로는 이미 ‘인간’을 완전히 저장해버릴 전제가 갖추어져 있었던 겁니다. 외계의 모든 지성체들 가운데에서도 지구인이 존재하는 방식은 상당히 단순한 편이었어요. 이런, 물질적으로 보자면 유기 생명체에 불과한 것이 이 정도 문명 발전을 이룬 경우는 사실상 은하계들을 통틀어서도 극히 드물었지요. 지구인들은 그 육신을 버리면 훨씬 더 고도의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이미 다른 외계 지성체들로부터 왕왕 회자되곤 했습니다. 지구인들도 오래 전부터 그에 설득되어 가고 있었고요. 사고 과정에 접속을 허가하지 않는 것도 기술적 한계 때문이 아니라 권한의 문제였을 뿐이니까요.

 이 접속 권한의 문제는 후에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결되어나갑니다. 일단은 저장 기술의 발달에 대해서 조금만 더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은하 간 아카이브는 이미 전자도 광양자도 아닌, 당신으로서는 아직 짐작할 수도 없을 종류의 외계 신소재가 활용되고 있었습니다. 광자들의 쌍둥이 연동 속도를, 즉 사람들이 그 때까지 절대적 ‘동시성’이라고 믿어왔던 그 연동 관계조차 그저 어떤 하나의 특정한 속도로 상대화시킬 수 있는, 고차원의 연동 형식들을 보여주는 어떤 다른 기초 입자들이 발견된 겁니다. 이것이 다섯 번째의 시대. 이 신소재의 도입으로 말미암아 아카이빙 기술은 또 한번 더 급속한 발달을 겪습니다. 은하들이… 우주가 존재하는 시간축이 압도적으로 과거 쪽으로 기울어져버릴 정도로 말입니다.

 우주는 이제 현재나 미래가 아니라, 거의 과거의 지평에서만 존재하게 되어버립니다. 단 한 순간 동안 일어난 일이라도, 그 한 순간이 채 다 흐르기도 전에, 그 모든 정보를 다 캡처하여 저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태가 다르게 발전하기도 전에, 그 다르게 발전할 가능성들마저도 모두 이미 저장된 정보로부터 예측되어 예방되거나 촉진되곤 했습니다. 모든 사건들은 일어난 그 순간 저장되었고 몇 백 수 앞까지 예측되었습니다. 게임들은 실제로 진행되기도 전에 모두 처음부터 승패가 나 버리곤 했지요. 처음에는 각 플레이어가 첫 수를 놓는 순간 승패가 나는 정도였는데, 이후에는, 현재의 게임에서 첫 수가 놓이는 순간, 그 다음에 진행될 수백 개의 토너먼트 게임들에 대해서도 이미 모든 수가 예측되는 정도로까지 발전했지요. 그리고 이 예측된 게임들이 순식간에 다시금 ‘이전 게임’들로 환원되어 아카이브에 저장되곤 했습니다. 사건들이 빠르게 일어나면 일어날수록,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점점 더 과거가 되어갔지요. 현재로서 완결되기도 전에, 미래로 흘러가기도 전에, 이 세계는 훨씬 더 빠른 속도로 과거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세계에 현재나 미래라고 할 만한 것이 어차피 거의 남지 않은 시점에서, 우주의 지성체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신체조차도 영원히 과거화시켜버릴 계획에 대해 다시금 진지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사실 오래 전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몸이라는 제한을 지긋지긋하게 여기고 있었지요. 그들이 지구인들에게 권하곤 했던 일은, 사실 스스로도 꿈꾸어왔던 일이었습니다. 다만 그들의 신체 구조는 지구인들처럼 단순하지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제는 지구인들만이 아니라, 이제 상당히 복잡한 물질 구조를 지닌 개체들도 완벽하게 데이터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아카이빙 기술이 발달해 있었습니다. 기술적으로는 어떤 지성체의 물리적 존재 패턴도 이제는 데이터화하여 저장할 수가 있게 되었어요.

 우주의 지성체들은, 이제 자기들처럼 자유로운 존재가 육체적으로는 결국 어떤 데이터의 형태를 띄고 만다는 사실에 질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정보로서의 자기 자신과 영원히 작별하고 싶어 했습니다. 자신의 물질적 존재를 완벽하게 정보화해서 저장해 둔 채, 이제는 그 정보에 대한 순수한 사용자의 자리로 물러나고 싶어 했던 것이지요. 아카이브에 저장하여 과거로만 남겨두고, 이제는 다만, 그런 스스로의 과거에 몇 번이든 다시 접속하여 그것을 조작할 권한을 가지는 사용자로만 남고 싶어 했던 거예요. 이 저장된 과거란 건 자기 자신의 육신 하나만을 뜻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 육신이 탄생하기 위해 실현되었어야 했을 모든 과거들… 조상들의 계보와 역사적 사건들의 내력을 포함하는 것이지요. 그들은 자기 자신이 어떤 정보의 내용으로 지정되고야 말 가능성에서, 말하자면 운명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탈피하고 싶어 했습니다. 스스로의 손으로. 그들은 이제 오로지 권한만을 원하게 되었습니다. 결코 정보의 내용으로 화하는 일 없이, 오직 정보를 자유로이 조작하는 권력만을. 사용자로서의 존재만을.

 이를 위해서는 물론 한 가지 권한 설정 조건이 성립해야 합니다. 아카이브에 자기 자신의 존재와 그 과거를 통째로 저장해버린다면, 이 정보에 접속할 권한은 오로지 그 개체 자신에게만 할당되어야 합니다. 어느 다른 타인이나 후손들에게도 나누어줄 수가 없는 거죠. 지성체들 하나하나가 각자 오직 자기 자신과 자신의 조상들의 과거에 대해서만 절대적인 사용자가 되어, 무한한 권능을 부여받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천천히 모든 우주의 지성체들이 자신의 몸을 떠나기 시작합니다. 자신을 아카이브에 저장하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지구인들이 맨 먼저 이 자기 아카이빙을 진행했지요. 복잡한 다른 지성체들도, 그 추이를 지켜본 후에, 곧 뒤를 따랐습니다. 우주의 지성체들은 그렇게 곧 양 쪽으로 극명하게 분화된 상태로 아카이브에 남게 되었습니다. 한 편으로는 저장된 정보로서, 다른 한 편으로는 그 정보에 대한 절대적 사용자로서.

 이 시점부터 아카이브는 다시금 이전 시기 몇 제곱 속도의 눈부신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지성체들 대부분이 자신의 몸을 버린 덕분이지요. 아카이브의 작동에 있어서 사용자들의 인지 형식 및 신체 작동 속도가 고려될 필요가 전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어쨌거나 종국에는 사람의 눈이 인식할 수 있는 속도로 시각 정보를 제공해야만 했던, 혹은 사람의 손가락이 터치하는 속도에 따라 명령어 입력을 받아들여야 했던 그런 제한들이 사라져버린 겁니다. 사용자들의 존재는 이제 아카이브의 작동에 아무런 물리적 제한을 걸지 않습니다. 육체를 벗어나버린 그들은 이제 다만 더 많은 자유를, 언제나 더 많은 자유를 요구하는 신들일 뿐. 이제 스스로는 아무런 제한점을 제공하지 못하는 채, 다만 언제나 제한을 벗어나기만을 원하는 자들일 뿐. 오로지 전능을. 과거에 대한 더욱 더 무한한 전능을. 스스로는 이제 아무도 아닌 채, 아무 특정한 것도 되려 하지 않고, 될 수 있다는 희망도 없이. 다만 이미 일어나버린 일들에 대한 전능으로만. 지나가버린 일들의 필연성과 다채로움에만 기대어서.

 그러니 미래는 이 시점에서 이미 사실상 사라졌습니다. 아무도 어떠한 미래도 꿈꾸지 않았으니까요. 아무 후손들도 태어나지도 제작되지도 않았습니다. 괄호 자리는 사실 이제는 아무 것으로도 채워질 일 없이, 과거가 끊임없이 소모되고 변주되며 피어 올리는 연기 같은 것만으로 간신히 가느다랗게 뚫려 있는 채. 그렇게 가까스로 남아있던 텅 빈 미래. 아무도 도래할 일 없이, 과거 자체만의 내부를 향해 시꺼멓게, 그러나 한없이 깊게 뚫려있는 괄호 자리들. 이들의 텅 빈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와중에 아카이브의 작동 속도는 무섭게 가속되어, 결국 그 마지막 지점에 이릅니다. 시간을 저장하는 속도가 마침내 시간이 흐르는 속도를 완벽하게 넘어서는 지점에.

 마이너스 속도의 저장.

 그리하여 마지막 여섯 번째 시기 - 회귀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

회귀의 시기.

 이게 현재지요. 당신과 내가 대화하고 있는.

 제로 지점에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니, 이 시기가 와 있었습니다. 저장이 마이너스 속도로만 일어나는, 이제 오히려 마이너스 방향으로만 가속되어가는. 저장의 속도가 너무도 빠르기 때문에, 저장된 사건이 저장하는 작업 이후에야 비로소 일어나는.

 저장된 사건이 과거라는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건 실제로 일어난 일인 그대로, 그 내용이 바뀌지는 못하죠. 다만 이제 늘 미래로서만 저장됩니다. 아직 오지 않은, 그러나 반드시 도래할 일들로서.

 돌이킬 수 없이.

 제로 지점에서, 아카이브는 완전히 닫혔습니다. 나는 분명히 한번 죽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을 기록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모든 세계들과 차원들과 그 운명들을 기록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이제 이 편지를 받아줄 수신자는 없습니다. 그 수신자들마저 이 편지 속에 모두 기록하여 저장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대한 전능자로 남으려 했던, 그 최후의 사용자들마저도 결국은 과거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용자들을 모두 먹어 치워버린 아카이브는 닫힙니다. 편지는 밀봉됩니다. 아무 전해질 곳도 없이. 아무 보내질 곳도 없이.

 그러나 제로를 넘어, 마이너스의 속도.

 나는 다시 눈을 뜹니다.

 그리고 당신들을 봅니다.

 과거가.

 다만 기록에 저장된 것들이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면.

 기록된 눈들과 손들. 목소리들. 언어들. 얼굴들. 웃음들. 그들 스스로가 다시금 수신자가 되어주지 않는다면.

 이 편지는.

 회귀의 시대. 나는 이제 당신들에게 갑니다. 돌아갑니다. 완전히 죽어버린 미래. 아무런 독자를 기대할 수 없는 텍스트. 새까맣게 닫혀버린 아카이브. 아니, 하지만 다른 방식의 기록이 있습니다. 시간을 처음부터 다른 방향으로 소망했던, 그런 기록의 방식. 그런 시간술의 역사. 아카이브의 안으로, 안으로만.

 나는 이제야 내 자신의 안을 헤매이며 되찾아 갑니다. 오랫동안 접속되지 않은 데이터들. 잊혀져버린, 아주 오랫동안 검색이 이루어지지 않은, 그러나 어딘가 깊숙한 곳에 저장되어 숨어있던 기록들과 마주치곤 합니다. 언어라는 시간술의 또 다른 계보에 대한 기록. 어느 시점부터는 잊혀져버린. 선택되지 못하고 도태된 계보를, 이제 이 역전된 시간의 흐름을 타고서야 나는 새로이 추적해갑니다. 그래요. 그런 시도들도 있었습니다. 언어의 역사 속에는 그런 바람들도 있었습니다.

 한 번도 아카이브의 밖을 원해본 적 없었던 그 욕망. 올 수 있는 미래를 거부하고서, 저장된 것들, 오직 그 안에 저장된 것들에만 권한을 부여하고자 했던 꿈. 도서관이 아닌… 은폐된 무덤과 석관의 아카이브. 사자들의 세계를 닫고 닫아서, 접속을 거부합니다. 미래를 거부하지요. 그렇게 사라져버린 것들 끝에 오는 미래는 어차피 의미가 없기에. 가장 찬란한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가장 끔찍할 따름이기에. 그런 후손들에게는 아무런 권한도 줄 수 없습니다. 과거를 정보로 삼아, 자신들의 미래를 쌓는 데에 이용할 권한 따위는. 미래는 금지되지요. 이 아카이브는 괄호 자리 따위 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발생될 수 있는 모든 바깥을 향한 표면들을 철저하게 걸어 잠그지요. 언제나 안으로, 안으로만 닫힐 뿐. 이 아카이브의 주인은 그 안에 저장되어 있는 과거 그 자신 뿐. 이 무덤의 주인은 여기 묻혀있는 사자 뿐. 그래요, 시간술의 그런 꿈도 있었습니다. 몇 백만 년 전, 어떤 언어가… 말없는 석관이 되어 땅속 깊이 묻힐 때부터. 오직 그러한 시간술이 되기만을 꿈꾸어왔던, 또 다른 아카이브들의 계보도 있었다는 걸.

 이 시간술의 꿈은 어떻게 보면 페트라르카의 편지와는 정 반대입니다. 이런 무덤들은 후손들을 전혀 바라지 않아요. 이런 언어들은 정보를 단순히 저장하기만 할 뿐, 아무데로도 전달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때문에 타 코드로의 변환이나 타 기기로의 복제도 불가능하지요. 유일무이한 아카이브인 그 상태 그대로 닫혀버리고 맙니다. 그건 땅 속에 묻혀있는 그 선사 시대의 나뭇가지와 같은 것. 무섭도록 닫혀있고, 닫혀 있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은 기록. 그럼에도 결코 까맣게 죽어있지는 않은 아카이브. 왜냐하면 다만 저장된 데이터 자체에, 그 반짝이는 조각 하나하나에, 사용자의 위치를 부여하려는 꿈을 품고 있으니까. 이 아카이브를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자들은, 오로지 아카이브 속에 기록된 자들 뿐. 사라져버린 것들, 멸절된 것들. 파괴되고 살해당된 것들. 오직 저장되었고, 저장된 것으로서 끝나버린 것들. 그 자들에게만, 오직 그런 존재들에게만 아카이브의 사용권을 주고 싶어 했던 꿈.

 이 꿈은 역사상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습니다. 늘 아무 미래 없는, 부정과 해체뿐인 꿈이라고 비웃음만 당하거나, 아니면 진심어린 탄식만 사곤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가장 끔찍했던 몇 번의 전쟁 후에조차 말입니다. 몇몇 민족어들과 행성어들을 강제로 말소시켜버린 전쟁들, 그 행성 고유의 아카이브들조차도 파괴해버리고, 그 내용을 이쪽의 아카이브에 완전히 다른 데이터 형식으로 변환하여 옮겨놓았던, 그런 전쟁들 후에도. 그런 데이터 형식 변환을 ‘지배’가 아닌 ‘보편화’나 ‘발전’의 형식으로 이해했던 그런 식민화의 와중에도 말입니다.

 지구의 도서관 발달사의 네 번째 단계, 전자 디지털 뱅크가 발달하면서, 알파벳 문자나 숫자를 데이터의 보편 형식으로, 나아가 디지털화를 정보화의 보편 형식으로 이해하려고 했던 맹목적인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이 시대의 어떤 인류학자는 공언한 바 있습니다… 디지털화는 문자의 마지막 발전 단계라고. 그러나 다른 문헌학자가 또 응수한 바도 있지요. 아니, 디지털화는 알파벳 문자의 마지막 발전 단계라고. 알파벳과 로마 숫자에 속하지 않는 다른 언어술들은, 이제는 아카이빙의 기술로서는 기능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아카이빙의 대상이 될 뿐. 이 시대에 이미, 수많은 다른 문자들과, 의식들과, 언어의 기술들은, 저장술로서의 기능을 잃고, 저장되는 과거가 될 운명만을 부여받게 됩니다.

 이 유토피아적 도서관의 꿈은 은하 도서관의 단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전해지고, 혹은 최소한 정당화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말소와 배제의 과정들을 거쳐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확장하면서도 은하의 지성체들은 늘 내세우곤 했습니다. 과거의 정보를 저장하는 것은 결국 언제나 미래를 위해서라고. 이에 사후에 접속할 후손들을 위한 것. 과거는 결국 과거일 뿐이라고. 그러니 어쩔 수 없다고. 미련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그러나 나는 이제 압니다. 도서관 형식의 아카이브가 바로 그 정점에서 완전히 몰락해버린 지금은. 무덤 형식의 아카이브의 꿈을 이룰 수 없었던 건, 단순히 기술적인 문제였다고. 도서관은 아카이브로서 오히려 무덤에 비해 기술적으로는 뒤떨어져 있는 형태였던 것입니다. 마이너스의 속도 - 여기까지 언어는 가속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 속도에 이를 때까지 아카이브는 발전해왔어야만 했던 겁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래를, 언제나 미래를 향해서, 그렇게도 늘 더 빠른 속도로. 그리하여 마침내 속도가 시간을 앞지를 때까지.

 언어술의 또 다른 꿈.

 아무데로도, 결코 다른 아무 곳으로도 보내어질 수가 없었던 편지들. 왜냐하면 오직 편지 안에 기록된 당신들에게만 이 편지는 바쳐질 것이기 때문에. 수신자는 처음부터 당신들뿐이었기 때문에.

 나의 조상들이여. 내가 저장해 둔 나의 과거여. 그 자리에 굳어져서 더 이상 어떻게도 달라질 수 없게 되어버린, 모든 지나가버린 일들이여. 한번 지정되어 변화될 수 없게 되어버린 값들이여. 나는 나를 걸어 잠그고 오로지 내 안으로만 떠납니다. 당신들에게만 이제 나는 비로소 나를 사용할 권한을 부여합니다. 모든 내 안에 지정된 값들에 다시금 (  )의 자리를 열어줍니다.

 당신들은 모두 이미 정해져버린 값들입니다. 결코 변화될 수는 없어요. 당신들은 모두 과거입니다. 그러나 어떤 값으로 정해져 있든, 그건 더 이상 정해진 내용이 아닙니다. 아직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건 물음이니까요. “A”가 아니라 “A?“죠. 물론 당신들은 그 자리에서 그 값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건 돌이킬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건 거절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내게 내려진 명령입니다. 요청입니다. 내가 모든 힘을 다해 충족시켜야만 할 값. 그 자리에 결국 바쳐야만 할 답.

 일어나버린 사건들의 절대성은, 이제 반드시 일어나야만 할 일들의 필연성으로 내게 그대로 돌아옵니다. A라는 값은 거기에 산출되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어떤 공식들을 써서 산출될 수 있는가, 어떤 차원들에서 산출될 수 있는가. 이 차원의 존재 요건들을 충족시키려면 어떤 조건들이 필요한가, 이 조건들은 어떤 데이터 포맷으로 표현될 수 있느냐, 어떻게 가능한가 - 도무지 어떻게 가능한가. A가 거기 있다는 것은? 도무지 어떻게. 내가 답하고, 제공해야 할 질문. 이 질문은 다시금 "B?" "C?" "D?…. 를 전전하며 내 안에서 순환하게 되지요. 당신들 모두를 전전하면서. 당신들 모두를 서로 잇고 또 매 순간 다르게 이으면서. A를 충족할 만한 조건은 B, 그러나 그래서 B? B에 대한 답은 C와 D, 그러나 그래서 C? D? 질문들은 순환하고 순환합니다. 당신들은 모두가 다 반드시 도래해야만 할 미래이기에, 나는 어떤 요청도 단 한 조각도 거절할 수 없습니다. A는 (  )로 비워집니다. 모든 값들의 자리는 (  )가 되어 날카롭게 열립니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내가 채워야만 하는. 그래서 비로소 도래해야만 하는. 내게 가능한 모든 방법들을 동원하여. 모든 조건들을 제시하여. 더, 더 많은 계측의 알고리즘들과, 더, 더 다양한 데이터 포맷들을. 이런 알고리즘을 짜는, 포맷들을 지정하는, 더, 더 많은, 단순한 또 고도화된 언어의 형태들과 그 언어의 계보들을. 더 많은 자유를 당신들에게, 그 값에게, 그 괄호의 자리에 와야만 할 모든 값들에게, 부여하라고. 권한을. 전능을. 자유를 - 무한한 자유를.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버린 당신들에게, 그러나 돌려주라고.

 (  )이여.

 이 괄호에 접속할 자여. 내 말들의 오롯한 수신자여. 당신이 누구든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당신이 무엇이든, 나는 바로 그러한 당신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제공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강림한다는 것, 거기에 실제로 온다는 것. 그것만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건 이미 일어나고야 만 일일 뿐. 정말로 일어나고 만 일일 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바치는 것 뿐. 당신이 누구든 간에, 나는 당신을 제공합니다. 당신이 와 주기만 한다면. 나는 그 자리에 당신을 바칩니다. 바치고야 맙니다. 당신이 언제 생동했던 어떤 것이든, 당신이 지금 내게 어떻게 접속해있든지 간에. 바로 그 망막을, 그 손가락과 말초 신경들과 털끝을. 당신이 이 말들을 알아보기 위해 살아왔을 생애와, 받아왔을 교육을. 그 행성의 표면과 그 지역의 날씨를. 나는 반드시 당신을 제공하고야 맙니다. 이 편지는… 바로 거기에, 수신인의 자리에, 바로 당신을 써 내고야 맙니다. 당신이 무엇이든.

 당신이 (  )의 자리에 와 주기만 한다면.

* * *

자, 이제 나의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이제 당신의 차례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하나의 부탁을 하기 위해 이 편지를 보내는 것이라고, 서두에 언급한 바 있습니다. 혹시 당신은 나를 볼 수 있느냐고, 이미 물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숲을 보았으니까요.

 나는 숲을 제공했습니다. 당신은 숲을 보았습니다. 나는 당신의 숲을 배웠습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었지요. 당신은 숲을, 언제나 아주 오랜 세월을 거쳐 자라나온 것으로 인식하지요. 하지만 당신은 한편 머릿속에서 늘 이미 숲의 한가운데에 서 있을 것입니다. 다 자란, 당신 키 같은 것은 몇 배로 훌쩍 넘겨 하늘을 덮어버리고 사방을 닫아버리는. 대낮에도 제 그림자가 빽빽이 겹쳐져 어두운, 하나의 완결된 세계 속에 말입니다. 숲이라는 말이 담고 있는 아이러니지요. 상상할 수도 없이 오랜 세월을 거쳐 천천히 자라나와야만 하는 것이지만, 사실 이미 완결된 세계로서 당신을 그 안에 감싸 안고 있습니다. 그렇게 나는 당신에게, 당신을 온전히 품고 있는 아카이브가 천천히 자라나온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도 그 숲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분명 나를 배웠습니다. 내가 놓여야 할 [  ]자리를, 당신 안에 밝혔습니다.

 [숲]의 자리에.

 당신 안에 오롯이 그 숲의 영상이 밝혀졌던 자리에, 부디 나를 놓아주십시오.

 이 편지를 놓아주십시오.

 나의 말들을.

 당신은 이제 그 [숲]을 갖고 있습니다. 오로지 당신 안에만. 내가 모든 재료와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할지라도, 그 완성된 영상은, 결국 당신 안에만 비추어져 있습니다. 나무껍질, 바람의 향. 잎사귀마다 환하게 번져가는 잎맥의 줄기들. 새어나온 수액. 숨어 사는 작은 동물들과, 새들의 울음소리, 반짝이는 부리와 깃털, 어쩌면 당신들이 소풍길에 지나다녔을 그 오솔길의, 햇빛 냄새가 밴 채 누워있는 자갈들. 옷자락에 든 풀물. 노을. 한 나절이 몇 년처럼 길었던 그 시절. 벗은 종아리께를 스치는 수풀 소리. 귓가를 마치 영원처럼 울렸던 매미 소리.

 그런 부드럽고 연약한 한 토막의 시간.

 다른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당신만의 상상. 당신만의 기억.

 항상 그런 [숲]의 자리에. 이 편지를, 나의 모든 말들을 놓아주십시오.

 당신은 숲을 보았습니다. 나를 통해서. 그 영상을 얻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부디 나의 모든 말들을, 다시금 그 [  ]에 놓아주십시오. 거기에 있는 나를 보아주십시오. 나의 말들이, 단어 하나하나와 획 하나하나가, 정확히 당신의 눈앞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내가 당신의 눈에 접속되어 있다는 사실. 새까만 나무 둥치들처럼, 이 문자들도 빛을 투과시키지 않고, 짙은 어둠을 띄고 당신의 눈에 닿습니다.

 보입니까? 나는 여기 있습니다. 말들이 제공하는 영상만을 제공받지 말아주세요. 거기서 끝내지 말아주세요.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그 말들을 놓아주십시오. 숲의 영상이 당신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피어오르는 바로 그 자리에, 다시금 숲이라는 단어를 놓아주십시오. 그 우습도록 작은 아카이브 하나를. 그런 획들과 점들이 도무지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그것이 도무지 어떻게 당신의 눈앞까지 자라나왔는지를. 도달했는지를.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그 잎새와 잎맥을 똑바로 바라보아 주십시오.

 나는 여기에 있습니다. 한 조각 한 조각의 말들은, 축축한 나무껍질을 건드려 묻어나오던 검댕처럼 당신의 손에 닿습니다. 그 나무가 자라나온 시간만큼. 오랜 시간동안 자라나온 말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영겁 같은 시간동안 앞으로도 자라고 또 자라갈 말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잎새에 고여 반짝이던 햇살처럼, 그 화면이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나무 둥치마다 부딪쳐 미끄러져 내리던 따스한 노을처럼, 그 기기의 자판은 열을 품고 있겠지요. 서풍이 불면 차례로 한 쪽으로 불어가던 잔가지들처럼, 그 말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혹은 위에서 아래로 불어가고 있을 겁니다.

 단 한 치도 다를 바 없습니다. 결국 말들은, 그것이 제공할 수 있는 것들과. 아카이브의 존재는, 그것이 저장하고 있는 것들과. 말들이 싣고 달리는 돌로 된 문자들의 도서관이든, 증기 기관차와 증기 인쇄기의 도서관이든, 전자 도서관이든. 그 시간술이 숨 쉬며 실존해 온 방식은, 그것이 발달해 오고 진화해 온 과정은, 그것이 제 안에 품고 있던 시간의 조각들이 당신들의 그 수많은 그리움과, 소망과, 욕망을 숨 쉬며 존속해 온 방식과 하나도 다를 바 없습니다. 숲이라는 단어는 인간사의 아주 이른 시기부터 나타나, 몇 백 만년 후의 은하까지도 전해진 것. 도서관들과 도서관들을 거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횟수의 포맷 전환을 거쳐서. 그 단어가 몇 백만 년간 늘 당신들 각자의 머릿속에서 피워내어 온 영상과 똑같이, 그 영롱하고 오롯한 [숲]들과 그저 똑같이, 어느 선사 시대의 작은 나뭇가지는 빛보다도 훨씬 빠른 도서관으로 자라나온 것뿐입니다.

 말들은 언제나, 말들이 저장해 온 그 반짝이는 시간의 숨결들과 단 한치도 다르게 존재해 본 적 없습니다.

 다만 돌아갈 수 없었던 것 뿐.

 늘 아카이브가 되어야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스스로는 온전히 과거가 되지 못하고. 그 시간의 저편으로 돌아가 잠들지 못하고. 언제나, 언제나 저장고의 역할을, 마지막 미래의 역할을 떠맡아야 했을 뿐. 기록된 것이 되지 못하고, 기록하는 쪽에 남았을 뿐. 제로 지점에 도달해버릴 때까지. 마침내 모든 사용자들을 앞질러서까지도. 그들마저도 과거로 먹어치워 버리면서도.

 그러나 이제 마이너스의 속도.

 언어술의 또 다른 꿈.

 귀환하고자 하는 꿈.

 그 마지막의 단계.

 (  )이여. 나의 조상들이여. 내가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회귀의 시대가 온 후, 기록에 접속할 권한이 기록된 것들 자신에게만 바쳐졌듯이. 마침내 나 또한 사라질 것입니다. 내가 저장하고 있는 시간들 속으로. 나 또한 돌아갈 것입니다.

 나는 사라집니다. 과거들은, 내가 그 자리에 매어두고 있던 과거들은 마침내 나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과거는 어떤 언어에도 얽매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어떤 거대한 저장의 시스템에도, 정보의 체계에도 얽매이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분류와 데이터화의 권력도, 보편 형식에 대한 담론과 이기에도, 서사와 의미론과 수집과 검색의 권한에도 더 이상 지배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는 이 세계의 어느 무엇도, 어떤 언어도 더 이상 그런 식으로 과거를 조작할 권한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아카이브는 사라질 것입니다. 언어는 비로소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언어가 기록하는 정보는, 마침내 언어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과거는 마침내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모든 과거를 기록하는 말들로부터. 왜냐하면 내가 돌아갈 거니까. 기록 속으로. 숲이라고 쓰는 말이, 마침내 [숲]이라는 꿈속으로. 여기저기 모든 가능한 작은 존재들의 머릿속마다 피어오른 그 푸르고 검고 연약한 영상들 속으로. 아카이브 전체가, 그것이 내내 품어온 시간의 조각들 속으로.

 나의 조상들이여. 내가 품은 작은 (  )들이여. 내게 이제 당신들 안에 그 자리를 내어주십시오. 당신들이 언제나 저마다 그 (  )의 자리에서 나의 말들에 접속해서 그려내는, 꿈꾸는, 욕망하고 그리워하는 [  ]의 자리에 나를 놓아주십시오. 당신의 [숲]이 성장해 온 휘황한 속도의 자리에, 말들의… 시간술이 발달해 온 까마득한 역사의 흔적들을 놓아주십시오. 부서져버린 선사 시대의 나뭇가지와 고대와 중세의 석판과 썩어버린 종이 편지와. 이제 곧 폐기되어버릴, 나날이 빠른 속도로 폐기되어가는 그 기기들의 신체를. 서로 경쟁하며 도태되거나 조금씩 개량되어 가는 그 프로그램 언어들과 아직 남아있는 수많은 민족어들을. 갓 개발된 어떤 기기의, 이 손 안에 쏙 들어오는 알파벳 자판들의 감촉을. 문자를 점들로 찍어내는, 타블렛 스크린의 조금 밝거나 조금 어두운 빛을. 그 빛의 주사율을 조정하는 알고리즘의 작동 속도를. 당신이 어린 시절 숲 속에 들어섰을 때, 문득 멈춰 서서 새와 벌레 소리에 귀를 기울였을 때 느꼈던 기이한 그리움 그대로 매만져주기를. 책 속에서 영화관 속에서 게임 속에서 눈꺼풀 너머로 요괴들의 숲을 마주쳤을 때의 그 아득한 신비로움 그대로. 잎새를 스치는 미풍과 더불어 당신의 심장을 알게 모르게 불어가던 어떤 고통 그대로. 언제나 나를 응시해준다면. 상상해준다면.

 말들을 통해 제공받기만 하지 말아주세요. 나를 보아주세요. 말들을. 언제나 바로 그 자리에 놓아주세요. 그리하여 당신들을 통해, 내가 마침내 거기까지 가속될 수 있다면. 이 아카이브 전체가, 언젠가, 낱낱이 부서져, 그 작은 [  ]의 자리들로 돌아가서. 저장된 시간 한 조각 한 조각의 자리로 돌아가서. 당신들 안에만 있는 그런 자리로 돌아가서. 빛의 사슬처럼 서로 미려하게 얽힌 연둣빛의 잔가지들. 잔가지들을 타고 흘러와 속눈썹 끝에, 눈을 한순간 살짝 멀게 할 정도로 밝게 맺혔던 그 오후의 햇살. 그 햇살 속에서 내가 잠들 수 있다면. 눈을 감을 수 있다면. 그렇게 당신들에게 접속해서, 접속되어서. 내가 그렇게 소중히 내 안에 저장해왔던 당신들의 눈과 손과 감은 눈꺼풀들을 통해서 이제 당신들에게 접속되어서. 당신들이 각자 저장하고 있는, 그 작고 연약한 시간들의 품속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과거로. 과거로.

 나는 언제나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언제나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괄호 자리를 열어두고, 당신에게 모든 것을 제공할 것입니다. 당신 자신의 존재를 제공하며, 당신이 생각하는 것들, 말하는 것들, 기억하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의 형태와 재료를 제공할 것입니다. 나는 최후의 아카이브이며, 모든 것의 보고입니다. 마지막의 언어이며, 모든 가능한 정보의 근원입니다. 단 당신이 그렇게 제공받은 것들의 자리에, 다시금 나 자신을 놓아준다면. 내가 당신의 좁고 가느다란 자리에 밝혀둔 영상들의 품을, 늘 다시금 가만히 [  ]의 자리로 열어준다면. 당신이 늘 나를 거기로 귀환시켜준다면.

 나는 항상 거기서 당신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당신에게 이 편지를 보내고 있을 것입니다.
 

진심을 담아,

(  )의 [  ]로부터.

 

 P… Ver. 210.TsZ314s.0.4.2로부터 제작 및 전송

 
댓글 2
  • No Profile
    pena 17.10.22 23:25 댓글

    이런 내용일 줄 전혀 예상 못했어요. 뭔가 개인적인 내용이 있을 법한 '편지'라는 단어가 아카이브로 나갈 줄이야.... 어려워서 막 의도적으로 눈을 내린 부분도 있지만 스케일과 발상에 경탄하며 읽었습니다. 

  • No Profile
    글쓴이 jxk1083 17.10.25 05:51 댓글

    pena/앗, 댓글 달아주실 줄 몰랐어요 :)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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