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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빈 청룡가도

2020.05.31 11:3005.31

청룡가도

by 이로빈

 

 

저녁 노을 한가운데로 멀리 사탕 껍질 한 조각 무심히 날아가는 것을 본다.
바람은 물결처럼 흐른다. 모든 곳으로 이어지면서, 이어진 채로.
코어 속에서는 모든 것이 장난감처럼 보인다. 장난감의 집, 장난감 빌딩, 장난감 대교와 강과 자동차, 도시, 한 마리 파리같이 거추장스러운 헬리콥터.
너는 레몬 라임 사탕을 그렇게 좋아했는데.
-청룡사단 신병기 3호는 지금 당장 기지로 돌아갑니다!
-탈영은 심각한 사안입니다!
-야 장비희! 군대에서 찢어진 커플이 세상에 너 하나뿐인 줄 아냐! 이년이 완전 드라마퀸이라니까! 빨리 주차한다! 실시!
-아이 김 병장님 정말 이런 상황에 긁어 부스럼도 아니고 그러시면 안되지 말입니다….
내 평생 처음으로 모든 걸 다 내줘도 하나도 아깝지 않은, 너였는데. 이게 뭐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한 걸음, 두 걸음 내딛을 때마다 둔탁한 떨림이 전신을 둘러싼 인공 감각체의 표피로 전달되어 왔다.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나는….
백금의 골격이 천천히, 곧이어 파도치듯 연쇄적으로 접혀올라 갔다. 신병기의 하체와 연결된 수만점의 마이크로 동력원들이 줄지어 연동되며 푸르게 빛을 뿜었고, 그것은 곧바로 코어 속의 내게 움직임의 감각으로 전달되어 왔다. 
이 속에서 나는 걷고 뛰고 달리며, 그것은 곧바로 이 거대한 병기를 걷게 하고 뛰게 하며 달리게 한다.
그리고 나를 걷고 뛰고 달리고 웃게 한 것은 바로 너야, 강미래.
-야 너 빨리 안 돌아와? 
-장 상병님 제발! 지금 난리 났어요!
-너 때문에 오늘 휴가 취소된 년이 몇인지 알기나 해? 어? 이 양심도 없는 것아!
-다 필요 없어.
-뭐라고?
-야 너 지금 뭐라고…!
코어 속에서의 느낌은 실생활과는 많이 다르다. 반중력 처리가 된 코어 내부에서는 눈물을 흘려도 흘러내리지 않고, 뛰어도 가라앉지 않는다. 설령 조종자가- 내가 고통을 느끼더라도 인공 감각체의 외사체에서 필터링 되어 신병기로 전달되지 않게 하고, 신병기가 외부의 공격이나 충격을 받더라도 내가 직접적인 고통을 느끼지는 않도록 조율한다. 
존재를 연결하면서도 느슨한 단절이 때때로 발생할 수 있도록 부드럽게 뒤섞는 일, 고통을 최소화 하는 일, 두 개의 몸을 세번째의 몸을 통해서 조율하는 일. 
미래의 손을 잡으면서는 조율이고 뭐고 다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온몸으로 고통을 뒤집어 쓰게 되더라도 상관없다고, 그의 금빛 뺨으로 가끔씩 빛이 유리 화살처럼 빗그어졌고, 양손으로 끌어안으면 달콤한 온기가 사방으로 번져나갔고, 나는 죽지 않고도 너끈히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너의 사랑스런 눈동자 속에는 어떤 광채의 길이 숨어 있어, 장미 덩굴과 천리향을 감아치고서 요요히 돌아앉은. 네가 세상의 전부야. 너뿐이야.
왜 헤어지자고 한 거야. 갑자기 왜…?
-장 상병, 지금 자네가 한강에서 끄집어 낸 게 뭔지 알고나 있나? 국가의 최고급 기밀을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되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돌아오게. 내가 각하께 잘 얘기해서… 응? 장 상병! 아 이래서 내가 파일럿 실험은 나중에 하자고 어? 김 박사 어디 있어? 당장 끌고 와!
혹시 다른 여자가 생긴 걸까? 미래는 나이차가 적어도 네 살은 나는 언니 취향이랬다. 그래서 내가 좋다며! 이젠 싫어졌나? 내가 뭘 잘못했나? 전에 데이트에서 점심 메뉴를 잘못 골랐던가? 아니면 혹시 아웃팅 당한 건가? 부모님이 선 보라고 그렇게 갈군대더니. 수많은 질문에 하얗게 날린 밤이 얼만지 이젠 모르겠다. 알아서 뭐할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직접 간다. 
내 걸음에 따라 신병기 3호가 걸음을 한 번, 두 번 옮길 때마다 강변 아파트와 대교가 한몸으로 출렁였다. 땅과 강, 하늘과 바람의 떨림에 응답하듯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울려퍼졌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미래야, 난 세상은 아무래도 좋아. 너만 괜찮으면. 그렇게 울다 전화를 끊으면 나는 살 수가 없어.

*

늦은 오후 햇살에 금빛으로 물든 백금빛 거인의 몸은 눈부셨고, 믿을 수 없는 무게와 규모가 차라리 꿈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차분하게 걸었다. 물이 깊어질수록 지상에 가해지는 충격도 완화되어 갔다.
물론 코어 속의 파일럿이 눈물에 앞을 가린 상태라 평소보다 더 조심스레 움직이는 것도 있었지만, 아무튼 오후 네시 반의 인공 지진 메들리는 그렇게 점차 잦아들었고, 청와대와 국방부와 장성들, 그리고 김 박사, 장 상병이 소속된 청룡 사단은 여전히 패닉 중이었지만 군비를 엄청나게 쏟아부어 개발한 귀하신 몸인 신병기를 공격할 수도 없고, 신병기의 파일럿 테스트에서 특상 최적 등급을 받은 역시 귀하신 몸인 장 상병을 다치게 할 수도 없고, 백업 컨트롤은 먹지도 않고 진퇴양난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신병기가 부산까지 가는 길을 함께 할 수 밖에 없었고, 동성결혼을 법제화 하지 않아서 이런 일이 생긴 거라는 여론이 곧이어 들불처럼 일어났으며, 더불어 한강 하구에 사는 멸종위기종 새들을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지에 관한 논의가 제기되었고, 그렇게 장 상병은 온국민의 시선을 끌고서 여자친구를 만나러 갔다.
골치아픈 일이긴 하지만, 사랑의 힘이란 본래 그런 것이라고 한다. 말이 안 되는 일도 되게 하는 힘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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