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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lza2 용은 우리 마음속에

2020.02.01 00:0002.01

※ 일러두기
- 거울 고양이 단편선 『달과 아홉 냥』에 수록했던 글입니다.
- 이디스 네스빗의 ‘용 조련사들’(『숲속의 오디세이아(황금가지, 2018)』 수록)에서 착상을 얻었습니다.

용은 우리 마음속에

pilza2


우리는 모두 고양이가 본디 어떤 존재였는지 알고 있다. 그들은 그 옛날 몸에 철갑을 두르고 남산 위가 아니라 저 하늘 위에서 바람서리는 물론이요 천둥번개를 일으키며 군림하고 있었다. 모든 산짐승의 두려움과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전지전능한 용으로 살아가던 그들은 아쉽게도 세속의 행복에 물들어 지옥 불을 뿜던 입으로 우유를 핥아먹고 살다가 그만 갑옷도 마력도 과거의 영광과 권력도 모두 잃어버리고 사람들 무릎 위나 볕이 잘 드는 따뜻한 곳에 웅크리고 앉아 자기 손에 침을 묻혀 고양이 세수나 하면서 사는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으니, 가문의 몰락이요 화무십일홍이었다.

집 없는 들고양이, 주인에게 버려진 고양이들이 으레 모이는 장소가 있었다. 마침 옆에 쓰레기 버리는 곳도 있어 봉투를 뜯고 음식 찌꺼기를 주워 먹기에도 좋고 낮에는 햇볕도 잘 드는 천혜의 보금자리였다. 늘 그렇듯 고양이들은 거기서 삶에 대한 무심과 관조 속에서 청빈하게 살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군가가 차에 치었는지 못된 아이들의 팔매질을 당했는지 다리를 절룩거리며 걸어와도, 맘씨 좋고 외로운 할머니가 데려갔는지 통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아도 아무런 반응도 내색도 없었다. 그건 네 인생, 이건 내 인생. 고양이들의 마이웨이 정신은 히피들에게 질 바가 아니었다.

그러니 비가 몹시도 세차게 불고 난 다음날, 잠시 못 본 게 아쉬웠는지 따가운 햇살을 죽죽 내리쏘는 태양이 한바탕 성깔을 부리고 난 후 해질녘 고양이들이 다시 모였을 때 몇몇이 안 보이고 대신 못 보던 늙은 고양이 하나가 나타났어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는 수염이 왼쪽엔 둘이요 오른쪽엔 하나밖에 없고 몸의 털 곳곳이 빠져서 땜통이 생긴 앙상한 체구였는데, 오직 눈만 생기를 띠고 부리부리 굴리며 뭐 먹을 거 없나 싶은 안광을 사방으로 뿌리고 있었다. 마침 날씬한 밤색 암놈 하나가 참치 깡통을 찾아내 안에 남은 걸 핥고 있으려니 늙은 고양이가 다가왔다. 잠깐 주저하나 싶더니 이내 달려들어 코로 밀어내고 주둥이를 캔 안에 박았다.

“뭐예요, 영감님?”

젊은 암놈은 남이 애써 구해온 걸 뺏어먹는 법이 어딨냐고 대체 어디서 뭐하다 온 고양이냐고 한참이나 퍼부었지만 대꾸도 없던 그는 기름마저 다 핥아먹고는 번들거리는 입으로 대답했다.

“나도 그렇지만, 너도 참 힘든 삶이로구나.”

암놈은 인상을 쓰며 경계했다. 대체 이 늙은이가 무슨 꿍꿍이인지, 아마도 닳고 닳은 고양이답게 온갖 신세한탄을 늘어놓아 자기 먹을 걸 빼앗고도 되레 동정심을 불러일으켜 앞으로도 얻어먹을 당위성을 확보하려는 속셈이겠지. 옆에 있던 뚱뚱한 잿빛 수놈과 절뚝거리는 줄무늬 수놈이 무슨 소동인가 싶어서 어기적어기적 다가왔다. 늙은 고양이는 청중이 늘어간 게 반갑다는 듯 아까보다 목청을 높였다.

“너희들은 지금 현재의 삶에 만족하며 살고 있느냐?”

“글쎄올시다, 노인장. 누구라고 좋아서 노숙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만. 뭐 인간에게 길러지면 먹을 거 걱정은 안 해서 좋겠지만서도 뭐랄까, 그건 왠지 고양이 같지가 않아서, 에 또, 적성에 안 맞다고나 할까.”

수놈 하나가 뒷다리로 머리를 긁으며 시큰둥한 어조로 답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죽은 고등어 같이 늘어졌던 귀가 쫑긋 서며 노안(老眼)이 번뜩였다. 그는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쉰 목소리로 일갈했다.

“바로 그거다! 우리 고양이의 정신, 우리의 혼. 자유와 방랑을 추구하는 우리의 자유로운 야생의 영혼이 인간에게 얽매이고 사육되고 길들여지는 걸 용납할 수가 없단 말일세. 그 뿐만이 아니야, 너희들 모두 잊어버린 진실이 있어. 영광스러운 우리의 과거가 있단 말이지.”

어느덧 주위에 있던 고양이들이 모두 모였다. 남 일이야 알 바가 아니라지만 호기심이 많은 고양이들은 일장연설을 하는 늙은이의 모습에 흥미를 느낀 모양이었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더니, 지금은 다 죽어가는 꼬락서니를 하고 있는 고양이들의 무기력증과 우울함을 치료해주는 묘약이 된 모양이었다.

“모두들 깨쳐야 한다. 그리고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본디 거대하고 강인한 용이었음을.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용을 되살려야만 해! 그러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까지나 쓰레기통이나 뒤지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의 연설은 유감스럽게도 고양이들의 마음에 감동이나 흥분, 종교적 열망을 불러일으켜 주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그런 허황된 이야기에 솔깃할 정도로 진지하지 혹은 순진하지 않았던 것이리라. 다만 재미있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할머니 정도로 여겨줄 만은 했다.

그래서 고양이들은 기꺼이 그 늙은 고양이에게 ─스스로 선지자라 불러 달라길래 그리 부르고 있다─ 볕이 잘 드는 좋은 자리를 양보하고 먹을 것을 구해오면 나눠주곤 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자칭 고양이들의 정신의 스승이자 영혼의 인도자, 용으로의 부활을 일깨워줄 선지자께선 고양이들이 모이는 시간이면 용이 얼마나 크고 무시무시하게 생겼는지, 어떻게 철갑처럼 단단한 갑옷을 두르고도 하늘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는지, 입에서 뿜어 나오는 불이 얼마나 뜨거운지, 발톱을 휘두르면 얼마나 강력한지에 대해서 수염이 젖을 정도로 침을 튀기며 연설을 했다. 그리고 어서 자신이 용임을 자각하라고 설교했다. 니힐리즘과 개인주의의 화신인 고양이들에게 있어서 그의 가르침은 그저 재미있는 소일거리일 뿐이었지만, 하루이틀 지나다보면 계속 같은 얘기를 지치지도 않고 되풀이하는 열변을 듣다보면 그의 말을 정말로 믿고 따르는 이도 생겨나는 법이다.

특별히 섬기며 따라다니게 된 두 추종자가 있었다. 선지자는 그들을 수제자나 애제자라고 부르며 각별하게 대했다. 하나는 벵갈 종으로 보이는 잡종으로 갈색 줄무늬가 두드러진 놈으로 온몸에 생채기와 긁힌 자국이 있는 데다가 뒷다리를 절고 있어 사납고 거친 인상을 주었는데 걷는 모습 때문에 절룩이라고 불렸다. 다른 하나는 아메리칸 컬로 추정되는 잡종으로 덩치가 비교적 크고 살이 찐 데다가 귀부터 시작해서 온몸이 둥글둥글해서 이름도 둥글이였다.

바람이 세게 불던 날 어김없이 셋이서 한 자리에 모여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늙은 고양이는 선지자로서 제자들이 힘겹게 구해온 먹을 것을 받아먹으며 대신 지리한 설교로 밥값을 대신하곤 했다. 절룩이가 조바심을 내며 물었다.

“선지자시여, 이제 알려주실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당신의 뜻을 받잡고 있사온저, 그 용이 되는 방도를 알려주십시오.”

“몸도 마음도 바쳤구요, 나 먹을 것까지 바쳤슴다.”

둥글이가 자기 몫을 단숨에 집어삼키고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덧붙였다. 지금까지는 선지자의 호된 질책이 뒤따를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선지자도 그들의 각오가 남다름을 알고 마침내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너희들은 아직 수행이 모자라고 또 모자라다. 세속의 욕망에 물든 더렵혀진 마음가짐으로 어찌 용의 권능을 수복할 수 있으리오. 내가 이제부터 멀고도 험한 수련의 길에 들어서려 하는데, 따를 뜻이 있느냐?”

하니 두 고양이 오체투지를 하듯 몸을 던져 그 앞에 조아리며,
“세상 끝까지도 따라가겠나이다.” “따라가겠슴다.”
하였다. 그리하여 세 고양이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용이 되기 위한 수련의 길을 나섰고, 다른 고양이들은 따스한 햇빛 아래서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그 모습을 무심한 눈으로 좇았다.


우리는 용이 어쩌다 그 큰 덩치와 마력, 온몸을 감싼 강철 같은 비늘과 날개를 잃어버렸는지 안다. 그것은 이상보다 현재, 야생보다 길들임, 도전보다 안락함을 따른 결과이다. 선지자는 그것을 간파하고 우선 자신들을 온전히 거친 야생 속에 던져 몸 속 깊숙이에 도사린 사나움과 강건함을 일깨우려 했다. 하지만 도시 변두리에서 나고 자란 고양이들이 당장 뛰쳐나간다고 산 속에서 폭포수를 맞고 통나무를 쪼개는 식의 수행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우선 선지자 자신부터 삼천리금수강산 이름난 산과 사찰은 다 돌아다니며 몇 년씩 수행을 했다고 광고하는 ─수행기간을 다 합치면 자기 나이를 넘는 경우도 있다─ 중매 전문 역술인처럼 긴 수행 경력을 가진 신비롭고 비범한 인물, 아니 고양이를 자처하긴 했지만 실제로는 뒷골목을 떠도는 도둑고양이였고, 새끼만 기르고 싶어하는 주인의 취미 때문에 다 컸다는 이유만으로 버려진 채 세상에 대한 불신과 분노를 키워온 절룩이와 어미가 새끼를 너무 많이 낳았다며 늦게 태어난 죄로 나자마자 버려져 인간을 모르고 자란 둥글이 역시 이 도시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결국 그들의 수행은 하수도 안을 뛰어다니고 도심의 공원에서 한밤중에 체조를 하는 초라한 요식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달밤의 놀이터에서 정글짐 정상에 힘겹게 오른 절룩이가 회의 섞인 목소리로 아예 오를 생각도 안 하고 감독을 한다며 지켜보고 있는 선지자에게 물었다.

“우린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는 거죠?”

“음. 우리에겐 아직 뭔가 부족한 게 있다. 그게 뭔지 알겠느냐?”

“부족한 거 많슴다. 밥이 부족함다. 물도 부족함다. 언강생심 간식은 꿈도 못 꿈다.”

정글짐 중간쯤에 애처롭게 매달려 숨을 헐떡이며 둥글이가 말했다. 단순한 불평이었건만 선지자는 원하던 답을 들은 듯 표정이 밝아졌다.

“바로 그거다. 우리는 고양이의 습관을 버려야 한다.”

“그래두 우유는 맛있슴다. 빵을 적셔 먹으면 더욱 맛있슴다.”

“버려라! 안일한 인간의 먹이에게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 그건 바로 육식이다.”

“육식 좋슴다. 근데 요즘은 다들 분리수거를 잘 해서 생선 대가리 하나 구하기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님다.”

“내가 말하는 육식은 그런 하찮은 게 아니다. 자연에서, 살아 있는 것을, 날 것 그대로 사냥하여, 포식하는 것이다!”

두 제자의 얼굴에 공포와 경악이 가득 떠올랐다.

“왜 두려워하느냐? 어째서 낯설어 하는 거냐? 우리 조상들은 몇 만 년을 그렇게 살아왔다. 우리가 용이었던 시절, 세상 모든 살아 있는 걸 집어삼킬 수가 있었다. 우리라고 그러지 못하란 법이 있느냐?”

그런 선지자의 지도를 받잡아 둘은 그 날부터 사냥에 나섰다. 그렇지만 도시 어디에 초식동물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을 리도 없고, 결국 가장 많으면서도 만만한 동물이라면 둘밖에 없었다. 역 근처에서 날아갈 생각도 안 하고 어슬렁거리는 비둘기와 하수구 아래 세상의 주인인 쥐. 그러나 어수룩한 도시 고양이들에게는 그들도 만만찮은 상대였다. 비둘기들은 처음엔 기겁을 하며 도망 다녔으나 이내 떼로 몰려다니며 되레 고양이들을 겁주어 쫓아버렸고, 하수구 속에서 구정물을 뒤집어쓰며 밤새 쥐를 쫓았으나 허약한 추격자들을 조롱하듯 쥐는 날렵하고 민첩하며 영리했다.

사흘 정도 수확이 없는 헛고생을 한 후 심신이 지친 고양이들은 공원 벤치 아래에 웅크린 채 패인을 분석해봤다. 이유는 뻔한 것이었으니 그들의 지능과 육체 어느 것도 야생의 사냥꾼이 되기에는 한참이나 모자란 탓이었다.

마음이 약해진 둥글이는 괜히 사서 고생이라며 불평을 늘어놓았고 절룩이마저도 동료들과 함께 있던 보금자리에 대한 그리움을 털어놓았다. 제자들의 마음이 흔들리는 걸 더는 두고 볼 수 없는 선지자. 그는 마침내 굳은 의지를 담아 말했다.

“저 놈이 우리의 다음 사냥감이다.”

그의 말을 들은 제자들이 몸에 파묻은 머리를 살며시 들었다. 가로등만이 빛을 뿌리는 밤의 공원. 근처엔 쥐새끼 하나 없고 가로등 위에는 참새도 앉아 있지 않았다.

“선지자시여, 아무 것도 없는데요.”

“없긴 왜 없느냐, 저기 있지 않느냐.”

그가 고갯짓을 한 쪽으로 둘의 시선이 움직였다. 분명 거기에는 무언가 있었다. 하지만…… 녀석은 고양이였다. 선지자가 말한 사냥감이 고양이라니,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제자들의 생각이 그렇게 박혀 있었기 때문에 방금 둘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른바 사고의 사각(死角). 목격자는 아무도 못봤다고 말하지만 사실 현장에는 경찰관이 있었다. 그 경찰관이 범인이었지만 목격자는 당연히 수상한 사람이 아닐 거라 생각하고 경찰관을 목격한 사실을 잊어버렸다, 라는 내용의 추리소설이 있다. 그러니 고양이들이 사냥감을 찾을 때 같은 고양이를 보고 무시한 것도 무리는 아닐진저.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온몸의 털이 솟구칠 만큼 섬찟한 일이었다. 저 고양이가 사냥감이라고? 설마, 같은 고양이를 사냥한다고?

녀석은 실수로 집을 나왔다가 길을 잃은 건지, 아님 버려진지 얼마 되지 않는 건지 걸음걸이가 조심스러웠고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다. 몸집이 작고 하얀 잔털이 잔뜩 난 게 멀리서 얼핏 보면 페르시안 종 같았으나 가까이에서 보면 역시나 싸구려 잡종이었다.

“저 놈은 인간 세상에 완전히 길들여진 무능의 상징이다. 용이 되고자 하는 우리의 진정한 적이지. 녀석의 숨통을 끊고 저 살을 씹고 피를 마셔 우리의 혁명을 완수하는 거다.”

어쩐지 목표의식이 조금 엇나간 듯도 하고, 종교적 행위가 정치적이고 사상적인 운동으로 변질한 듯 했으나 흥분한, 무엇보다 굶주림에 미쳐간 고양이들에게 그걸 따질 이성은 남아 있질 않았다.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린 이들과 자신의 재산, 명예, 모든 기득권을 사수해야 하는 이들. 양극단에 처한 이들이야말로 종교의 이름을 앞세운 지극히 정치적인 의도를 가진 선동에 쉽게 빠져드는 법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그렇게 했다. 그걸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끔찍한 동족상잔? 자연계의 순리인 약육강식? 집단적 광기와 기아로 인해 촉발된 린치 혹은 테러? 불쌍하고 연약한 고양이 하나를 쓰러뜨려 잡아먹었다고 해서 그들이 인간 세상에 물든 배신자를 처단하고 혁명을 완수했다는 성취감으로 가득할까? 아프리카 평원에서 누우를 사냥한 표범의 투지와 호승심을 만끽했을까? 모를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런 금기에 대한 도전과 거역이 그들에게 특별한 종류의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는 점이다.

더구나 그들의 육체 역시 그런 변화를 감지했는지, 그 다음날부터 선지자와 절룩이는 몸에 열이 나고 뼈가 녹아버릴 듯한 고통에 시달렸다. 살해에는 가담하되 숨이 끊어진 시체를 보고 겁에 질려 결국 도망친 둥글이를 빼고 그 살과 피를 섭취한 둘은 그날부터 공원 구석 수풀 우거진 곳에 웅크리고 누워 몇날 며칠을 끙끙 앓았는데, 마침내 선지자 자신도 예상치 못했던 신묘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몸 곳곳에서 털 사이를 비집고 끈적이는 진물이 솟아나나 했더니 이틀만에 걸쭉한 액체에 뒤덮여 하나의 둥그런 알 모양이 된 것이다. 햇빛과 바람을 받으며 겉껍데기는 정말 달걀처럼 반질반질하고 딱딱해졌다. 정말로 신묘한 용의 권능이 돌아와 용으로 되살아날 날이 올런지. 둘은 흥분과 설렘 속에서 고통을 감내하며 얼른 그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알이 된 채로 아마 두 주 정도는 지난 것 같다. 학수고대해도 알껍데기가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절룩이는 화가 치밀었다. 좁아터진 공간에 온몸을 구겨 넣고 있자니 답답해 미칠 것 같고 숨도 막히는 데다가 무엇보다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참다 참다 마침내 온몸을 움직여 억지로라도 깨고 나오려고 용을 썼지만 생각만큼 쉽지가 않았다. 겉에서 보면 알이 이리저리 뒤뚱거리며 굴러가려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옆에 있던 선지자의 알과 부딪혔는데, 두 껍질이 맞붙자 서로의 숨소리, 배에서 나는 꾸르륵 소리까지도 생생하게 들렸다. 혹시나 싶어 말을 걸어보았다.

“저기, 선지자님 계슈?”

“그래. 잘 들리는구나.”

“이거 원 갑갑해 미치겠는데 그냥 깨고 나갑시다.”

“말도 안 될 소리! 세상 모든 것엔 다 때가 있는 법이니라. 부화의 시기를 기다리며 인내하는 것도 용이 되기 위한 수행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선지자님이나 실컷 인내하슈. 난 배가 고파서 나가야 겠소.”

그렇게 한참 용을 썼으나 껍질 곳곳에 삐직삐직 금가는 소리는 들리는데 깨지질 않았다. 둘은 다시 껍질을 맞대고 대화를 나눴다.

“사랑하는 수제자여, 내가 방금 생각해봤는데 우린 중요한 하나를 놓친 거 같더구나.”

“뭔지 모르겠지만 좀 빨리 말씀해주실 수 없을까요? 지금 오줌이 마려운데 여기서 싸면 그걸 고스란히 내가 먹어야 할 것 같거든요.”

“좋아. 줄탁동기란 말을 아느냐?”

“탁 뭐요?”

“애초에 알 거란 기대도 안 했다. 새끼가 알을 깨고 나오고 싶어 안에서 톡톡 두드려 알리는 것이 줄이요, 어미가 그 소리를 듣고 밖에서 마주 쪼아서 알이 깨지도록 하는 것이 탁이니라. 이 줄과 탁이 동시에 일어나야 새끼가 온전히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다 이거다.”

“그래서요?”

“아직도 이 이야기의 교훈을 모르겠느냐?”

“우리에게는 어미가 없잖습니까? 밖에서 깨줄 어미 새가 없다고요! 그럼 우린 여기서 평생 갇혀 지내야 한단 말인가요? 배가 고파서 못 버틸 것 같은데?”

“바로 그것이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알을 혼자 힘으로 깨고 나오지 못한다면 둘이서 힘을 합쳐야 한다 이 말이지.”

하지만 둘 다 알 안에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힘을 합칠 수 있단 말인가. 이 의문에 대해 둘은 우선 목소리를 통해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고 반대방향으로 조금 멀어진 후, 전속력으로 돌진하여 부딪치는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하지만 완전한 구형도 아닌 알을 밖도 아닌 안에서 원하는 방향으로 빠르게 굴린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시도는 두 번의 실패 후에 재고되었고, 다음으로는 한쪽이 높은 곳에서 굴러 떨어져 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하나와 충돌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러나 사방이 보이지 않으니 어디로 가야 높은 곳이 나오는지 알 수가 없어 기획단계에서 탈락했다.

그런 식으로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한 둘의 노력은 그야말로 눈물겨운 우여곡절과 좌충우돌 자체였다. 데미안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세계를 파괴하고 나오려는 고양이들에 대한 시를 썼을런지 모를 일이었다.

마침내 숱한 시행착오 끝에 약간 비탈진 곳에서 굴러가서 화장실 벽으로 돌진하여 부딪치면 가장 큰 충격을 줄 수 있음을 알아낸 둘은 껍질을 깨는 데 성공했다. 껍질이 산산이 깨어지고,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두 용맹하고 상서로운 짐승의 자태. 좁은 공간을 벗어나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기지개를 켜던 둘은 자신들의 몸이 이전보다 더 크고 길어졌음을 자각했다. 훨씬 커다란 아가리가 쩍 벌어졌고 등에선 있지도 않던 날개가 꿈틀거렸다.

그들은 서로를 보고 확실하게 알았다. 불붙은 눈동자!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철갑을 두른듯 햇살에 번뜩이는 비늘! 벌어진 입에서 활화산처럼 열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화염을 토할 듯 새어나오는 연기! 전설의 용, 짐승들의 왕, 전지전능한 영물 그 자체였다. 두 마리 용은 서로의 모습을 보며 감탄하고 또 감탄하였다.

“드디어, 드디어 우리는 용이 되었구나! 과거의 영광을 되찾았도다!”

선지자는 감격하여 반쯤 목이 메었다. 이대로 얼씨구절씨구 어깨춤이라도 추면 좋았으련만. 인간의, 아니 고양이의 욕심은 끝이 없던 모양이었다. 절룩이는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단단한 꼬리와 넓은 날개를 움직여보기도 하면서 연신 감탄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두 다리가 멀쩡한 게 가장 좋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근육질의 다리와 예리한 이빨을 훑어보던 그가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 있는 같은 용, 자신의 라이벌을 쏘아보며 냉소가 담긴 표정으로 말했다.

“선지자 나리. 혹시 이런 말 아시오? 유식한 댁이라면 모를 리가 없겠지.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다.”

선지자의 눈이 순간 당혹감에 젖나 싶었지만 이내 사라졌다. 무엇보다 자신의 덩치와 용으로서의 권능이 상대방에게 밀리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넘쳤던 것이다.

“물론 알고 있지. 이 배은망덕한 놈.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들여다보이는구나. 내가 호락호락 당할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어떻게 손에 넣은 육체인데!”

“누가 할 소리. 이 강대한 힘만 있으면 난 인간 세상을 박살낼 수가 있어. 반찬이 형편없다고 밥상을 뒤집던 내 옛 주인처럼 말이야! 덩치가 커서 귀엽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차에 싣고 가다가 길바닥에 내던진 그 주인 놈! 나에게 돌을 던지고 발길질을 하던 꼴보기 싫은 인간들과 다리 전다고 놀리고 무시하던 얄미운 고양이 놈들을 다 뒤집어 엎어줄 테다!”

“아서라. 용의 힘은 그런 개인적 복수를 하라고 주어진 게 아니다! 너의 이빨과 날개와 입에서 나오는 지옥불이 기껏 행패나 부리라고 있는 건 줄 아느냐?”

“다 늙어서 입만 산 주제에! 몸의 모든 생기가 주둥이에 몰린 영감탱이가 날 이길 거라 생각하느냐? 난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가장 위대한 용이야! 용은 나 하나로 족해!”

“나도 너와 똑같은 용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네놈에게 진짜 용의 권능이 뭔지 보여주마.”

말싸움이 고조되어 절정에 이르자 직접적인 충돌로 넘어갔다. 입에서 화염을 뿜고, 날개를 퍼덕이며 덤벼들어 날카로운 발톱으로 할퀴고, 뾰족한 이빨로 물어뜯으며, 채찍 같은 꼬리를 휘둘렀다. 둘의 싸움은 용호상박, 아니 용용상박이었다. 그날 아침 무렵부터 시작한 결투가 밤을 꼬박 새고 다음날 해질녘까지 쉼없이 이어졌다. 처음엔 물론 용답게 박력이 넘치고 사납고 용맹스러운 혈투였지만 점점 시간이 흐르자 지치고 아프고 배도 고프고 해서 점점 싸움은 처음의 박력이고 우아함이고 뭐고 다 잃어버리고 추레하고 처절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몸의 비늘은 다 떨어지고 꼬리가 끊어져 대롱거리고 날개가 찢어져 너덜거리며 입에서는 더 나올 불이 없어 골초마냥 연기만 뱉어내는 모습에, 서 있을 힘도 없어 누운 채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며 손톱으로 다친 데 또 찌르고 이빨로 귀 깨무는 식이 되었다.

“아, 아, 아야! 타임, 타임!” “자, 잠깐, 놔봐, 놔봐, 놔봐! 일단 놔봐, 새X야!” “다리 찌르지 말랬지, 내가! 거기 피 난다고 했잖아!” “아, 아, 하, 하, 아파, 아파, 형님, 아빠, 할아버지, 좀 놓고, 놓고 말해, 놓고, 좀, 놓고, 아파~아!”

경천동지할 우렁찬 용의 포효는 어디로 가고 지금은 짜증이 반 애처로움이 반 섞인 투정 같은 기운 빠진 외침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마침내 기진맥진이 되어 서로 때리고 깨물 힘마저 없어진 두 마리 짐승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클 대자로 뻗어 있었다.

둘의 모습은 비 맞은 강아지 꼴이 따로 없었다. 고양이가 강아지 꼴이 되었다는 게 좋은 의미일 리도 만무한 데다가, 자기들은 지금 용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들의 모습이 보기에 우스꽝스럽고 처량하며 비참하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었다.

둘은 생사를 넘나드는 혼미한 정신에 죽은 건지 기절을 한 건지 그도 아니면 잠이 든 건지도 모르는 상태로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던 무렵 잔디를 밟으며 달려오는 경쾌한 발소리가 들렸다. 안 그래도 슬슬 혼이 몸을 빠져나가려던 무렵이라 둘에게는 그 소리마저도 저승에서 자신들을 데려가려는 사자의 걸음소리처럼 들렸다.

저승사자는 둘에게 가까이 오더니 입에 물고 있던 종이꾸러미를 발치에 내려놓고 반갑게 소리쳐 잠든 둘을 깨웠다.

“선지자님! 절룩아! 제가 왔슴다! 먹을 거 갖고 왔슴다.”

“먹을 거?!”

둘은 거의 동시에 외치며 눈을 번쩍 떴다. 다 소진한 줄 알았던 최후의 기운을 끌어모아 몸을 일으켰다. 과연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둥글이는 자랑스레 종이꾸러미를 풀어놓으며 으스댔다.

“몰래 혼자 먹을 수도 있었는데 두 분 생각이 나서 챙겨 왔슴다.”

먹다 남긴 밥과 나물, 버섯을 넣은 부침개에 사과도 있었다. 가련한 두 고양이는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눈치만 보다가 둥글이가 꾸러미를 슬쩍 밀며 먹으라는 신호를 보내기가 무섭게 동시에 덤벼들었다. 아무런 말도 다른 행동도 필요 없었다. 상대에게 밀리지 않으려면 주둥이를 박고 조금이라도 더 많이 입 안에 쓸어 넣을 수밖에 없었으니.

식사를 마치고나자 비 온 뒤의 사막처럼 죽어가던 몸에 생명의 기운이 꽃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황천에 꼬리만 빼놓고 온몸을 푹 담갔다가 얼른 빠져나온 느낌이 그랬을까. 노랗게 보이던 세상도 본래의 색으로 돌아오며 생기를 되찾는 듯 했다. 이미 해는 지고 어둑해진 공원 잔디 위에서, 배가 가득 차니 마음이 편해진 두 고양이는 웅크리고 앉아 몸 곳곳에 생긴 상처를 핥고 있었는데,

“가만, 둥글아. 우리를 알아보았느냐?”

선지자가 넌지시 물었다. 절룩이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아유, 웬 걸요. 이 근방을 한참이나 찾고 다녔슴다. 그렇게 망신창이로 누워 있으니 어찌 알아보겠슴까. 누가 보면 그냥 죽은 고양이 시신이라 여기고 지나치지 않겠슴까.”

“아니, 애제자야, 내 말은 말이다. 우리 모습이…… 고양이가 아닐 텐데…….”

“두 분이 고양이가 아니면 뭠까. 나도 고양이, 여러분도 고양이. 우리 모두 고양이. 고양이로 태어난 것도 그리 나쁘지 않슴다. 오늘 이렇게 밥도 잘 얻어먹지 않았슴까.”

“둥글아, 그러고보니 어디서 이런 푸짐한 밥을 구해왔냐? 네가 먹고 남아서 챙겨올 정도면 굉장한데.”

절룩이의 물음에 둥글이는 싱긋 웃었다. 눈과 입 꼬리가 둥글게 이어져 하나의 원을 그렸다.

“히히히. 그게 말이다, 이른바 사찰 음식이란 거다. 내가 길을 잃고 한참을 헤매다 저기 저 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불당을 하나 발견했걸랑. 거기 뒤편에 보니까 절 인근에 사는 새랑 짐승들 먹인다고 스님들이 시간만 되면 음식을 가져다 놓는단다. 정말 장난 아니게 많다니까. 도시에만 사는 고양이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걸.”

“아뿔싸! 그런 게 있었다니! 과연 내 수행도 부족했구만. 절 근처로 가서 수행을 하면 숲도 있고 개울도 있고 승려들이 주는 밥도 얻어먹는 천혜의 환경이었건만…….”

선지자는 아깝다는 듯 통한을 섞어 뇌까렸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둥글이는 자신들의 모습이 용이 아니라 여전히 고양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얻은 육체요 권능인데. 선지자는 빗물이 고여 만들어진 작은 웅덩이로 달려갔다. 더러운 물이었지만 거기에 비친 상처입고 늙은 고양이의 초라한 모습은 또렷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다리를 절룩거리며 뒤따라온 절룩이도 변함이 없는, 아니 몸 곳곳에 상처가 나 더욱 비참해진 자신의 모습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실망과 절망에 빠진 비통한 표정으로 돌아와 누웠다.

그렇다면 결국, 용이 되었던 한 순간은 공복이 낳은 환각이었던가? 알이 된 것부터 시작해서 모든 게 둘이 꾼 길고 긴 꿈이었던가?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적어도 그 순간 둘은 자신들이 용임을 믿고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저기 흩어진 저 무수한 조각들은 그들 몸에서 떨어져 나온 비늘임에 틀림없다. 격한 싸움의 끝에 용의 허물을 벗어버린 그들은 세속의 욕심과 이기심 때문에 힘겹게 이룬 소망을 하룻밤의 꿈으로 날려 보냈던 것일지도.

둥글이는 슬픔에 빠진 둘의 모습을 보고 의아해 하였지만, 내일부터 함께 사찰로 가서 밥을 얻어먹자고 말했다. 그나마 둘에게 있어 그 말이 무엇보다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우리는 고양이들이 겪은 일들을 알고 있다. 그러니 볕이 잘 드는 자리에 모여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잠깐 나누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낮잠이나 즐길까 하며 웅크린 고양이들이 자신들을 향해 늠름한 발걸음으로 다가오는 세 마리 고양이를 보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젊은 암놈이 그들을 보고 아는 척을 했다. 무리에서 함께 어울리다 갑자기 사라진 이들이 아니던가. 그들의 몸은 비록 아물지 않은 상처투성이였지만 눈에는 생기가 흘러 넘쳤고 표정은 밝고 태도는 당당했다. 마치 공훈을 올리고 귀환한 역전의 용사들 같은 멋진 모습이었지만 고양이들의 열렬한 환영은 애초에 기대할 것도 없었다.

선지자가 그들을 죽 둘러보더니 목청을 가다듬고 밥을 잘 먹어서 그런지 이전보다 한결 기운찬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했다.

“고양이들아, 무기력과 나태함에 빠진 불쌍한 고양이들아. 우리의 혼은 본디 인간에게 길들여질 수 없는 숭고하고 자유로운 존재다. 우리는 깨우치고 기억해 내야 한다. 바로 여기, 이 안에 잠들어 있는 우리의 영혼! 우리의 진실한 모습을 말이다!”

그는 연설의 효과를 강조하고 청중의 감정을 고조시키기 위해 앞발로 가슴을 두드렸다. 호기심에 고개를 쳐들었던 한 마리는 도로 앞발에 얼굴을 묻었다. 다른 하나는 찢어져라 입을 벌리고 하품을 했다.

“우리의 마음속에 용이 있음을 알아라. 믿는 마음만이 있다면 우리는 누구나 용인 거다! 고양이가 아니라 위대한 용! 네 안에 용이 있음을, 너 자신이 바로 용임을 자각해라.”

그의 뒤에서 나한상처럼 말없이 지키고 서있던 제자들의 굳은 표정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며칠 동안 사찰 음식을 먹느라 그리 되었는지, 선지자의 연설은 이전보다 더 불교적인 색채를 짙게 띠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이제는 그들이 용이 되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고 굳이 용이 되기 위해 수행에 나설 필요도 없었다. 고양이가 곧 용이고 용이 곧 고양이이기 때문이었다.

햇볕은 따스하고 가끔 부는 바람이 땀을 식혀주는 청명한 날이었다. 여전히 고양이 청중들은 선지자의 연설을 심심풀이 삼아 들어주었고 몇몇은 호응하는 척 해주었다. 선지자는 제자들이 늘어나고 세력이 커진다는 생각에 흐뭇하게 여겼고 제자들은 편하게 밥을 먹고 사니 좋고 믿음만으로 스스로 용이라고 생각하니 만족스러웠다. 모두가 행복하고 모두가 즐거운, 더없이 아름다운 결말이었다. 이제 우리는 고양이가 어떤 녀석들인지 잘 안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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