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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이립 립스틱 짙게 바르고

2015.05.31 23:2905.31

제목 : 립스틱 짙게 바르고


세게 나가면 안 된다. 식어버린 커피처럼 대해야 한다. 그 커피는 말랑말랑한 카라멜 마끼야또이다. 이 녀석이 분명 단 걸 좋아하는 얘기 입맛이라는데 일주일 전에 산 에르메스 가방을 건다. 나를 말해주고 있다.


“너 이제 그만 정신 차려라. 이십 대 한참 외모로 잘 살았으면 됐잖아. 뭐 얼마나 고르고 고르는 거야?”


이 녀석을 처음 봤을 때 고양이를 안고 있었다. 마치 논일 하다 온 것처럼 바지 무릎까지 진흙을 묻히고 있었다. 너는 주인을 올려다보는 강아지처럼 눈을 빛내며 날 쳐다봤다. 

난 웃으며 널 지나쳤다. 그때 네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너는 나와 같이 별 볼 일 없는 이류 대학의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나와 대부분의 여자 동기들은 한 달에 백오십 만원을 받으며 논술 강사나 학습지 교사로 일했다. 너는 전공을 바꾸어 명문대 대학원에 진학해서 경영학 석사를 땄다. 대단하다 생각했지만 나와 상관없는 먼 이야기라 생각했다. 네가 나를 대학원 건물 지하 카페로 불러내서 지금에 이를 줄 몰랐다. 


“이제 외모로 잘 나가던 시대는 갔어. 너와 나 몇 살이야? 이제 내 년이 서른이야. 재수한 동기들은 벌써 카톡 프로필에 계란 한 판 사진 올리고 있어. 너 학교 다닐 때 만났던 그 수상한 남자들은 뭐하냐? 하나같이 자기 몸을 도화지처럼 새, 용, 잉어, 쭉쭉 그리고. 대학도 안 가고 직업은 중고차 팔이, 폰 팔이, 바텐더. 나이트 삐끼. 그때는 그런 남자들 하고 어울리려 이상한 짓하며 시간낭비해도 됐지. 지금은 아니잖아? 그때 내가 네 싸이 월드 보면서 한참이나 고민했어. 애는 뭐 하러 대학 왔는가? 그런데 최근에 네 트위터 가보니 지금도 변한 게 없더라. 넌 사업하는 사람도 아닌데 주위에 남자가 항상 뭐 파는 사람이고, 여전히 팔뚝에 잉어가 펄떡여. 왜 아직도 그래?”


팔뚝에 잉어는 몰라도 학이 그려진 남자와 사귀었다. 나는 대학생, 애인은 중졸이며 자신 이름도 영어로 쓸지 몰라서 타투 샵에 갈 때 내가 스펠링을 적어줬다. 내 이름도 같이 적어줬다. 어깨에 하얀 날개 한 쌍을 새기고 돌아왔다. 날개 안에 그 이 이름과 내 이름이 보였다.

그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전부라고 했다. 가진 게 없어도, 배운 게 없어도 미래가 안 보여도

손을 잡았다. 평탄하지 않는 그의 삶에 내가 지쳐 웅크리자 이래서 배운 년은 싫다며 나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바지 자락을 잡는 나에게 하늘 아래, 땅 다섯 평을 빌렸다고 말했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옷 하나는 잘 입잖니?” 라며 나를 달래고는 잘 되면 반드시 돌아온다고 했다. 냉정하게 악당으로 돌아서지 못하고, 미안함에 도망가는 그의 뒷모습이 비가 되었다.

멀어져 가는 학이 비를 타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날을 기다렸다. 하지만 내가 삼 개월 뒤 들은 건 그의 옷 가게 폐업 소식이었다. 

너에게는 한낱 장사치였지만, 나에게는 희곡론 시간에 배웠던 한 편의 비극이었다. 

너한테 화내지 않겠다. 호랑이는 배가 고파도 풀은 뜯지 않는다.

내가 자신의 주장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너는 어색함에 지쳐간다.

그리고 두려워한다. 이상한 것이 아니다. 공통분모 하나 없는 너와 나의 자연스러운 침묵이다. 그러나 난 웃으며 말한다.


“그랬나?”


너의 얼굴이 사르르 녹는다. 긴장이 풀린 입술은 열려 의미 없는 단어만 나열한다.


“어. 어. 음. 그랬지. 그때 좀 심했지. 너무 놀았잖아? 그치?”


말끝이 길어지며 나한테 내 잘못을 인정하라는 듯 목소리가 가늘어진다. 너는 탁자 위에 손을 올리고 몸을 앞으로 기운다. 너의 하얀 얼굴과 긴 쌍꺼풀도 턱의 각도를 따라 불쑥 튀어 오른다. 나는 눈을 반달로 만들고 입술을 옆으로 오므려 웃는다. 나의 맞장구에 너는 안도한다.

너는 몸을 뒤로 당겨 옷차림을 다듬는다. 양손을 깍지 끼고 몸을 숙인다. 나는 “고작 이런 얘기를 하러 나를 불렀니?“ 라고 묻지 않는다. 내가 아는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학교 건물의 두 배만한 진지함을 업고 수업시간에 항상 앞자리에 앉았다. 교수들이 질문을 던지면, 다들 침묵으로 응수하거나 삼켰다. 너는 피할 수 없는 전쟁에 나가는 병정처럼 몰라도 대답했다. 다들 네가 틀렸을 때 널 비웃었지만 너는 꼿꼿했다. 너의 진지함은 무거운 만큼 높이 솟아있었다. 우리는 가벼운 인간관계로 네 진지함을 따돌렸다. 

지금 너는 딱딱하게 굳은 경직된 태도를 풀고, 여유를 만지려 하지만 여전히 너무 진지하다.

마주잡은 두 손을 꼼지락 거리고, 마른 헛기침을 하며 여백을 채운다. 나는 보조개를 보이며 웃는다. 너는 내 갑작스런 웃음에 당황한다. 나는 웃음으로 네 귀여움을 칭찬한다. 커피를 리필 하러 간다.

내가 테이블에 사라지자 너의 안도가 여기까지 느껴진다. 나는 너를 응시한다. 조금도 미동하지 않고, 딴 생각하지 않고 일순간 너에게 전부 집중한다. 너의 말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나는 긴장을 끌어올려 너를 대할 준비를 한다. 커피를 리필 받고, 자리로 돌아가 앉아 웃는다. 진지함으로 낮아진 너의 상체가 용수철처럼 솟아오른다. 


“그러니까. 나는 네가 아까워. 우리는 누구나 아까워. 그런데 시간을 그런 데다 그런 사람들하고 낭비하고 있으니. 이제 우리 젊지도 않아. 좋은 청춘 다 갔어. 그런데도 너는 변하지 않고 있어.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엿 같은 새끼들하고 있으니 엿 같이 지내는 거지.”


실수다. 리필 받은 커피가 에소프레소여서 나도 모르게 말을 세게 뱉었다. 입 안의 침을 당기어 쓴 맛을 빨아들인다. 


“그래도 평생 핸드폰 약정 걱정할 필요는 없어. 엿이 질기잖아.” 


대단한 농담이 아니다. 말은 입이 아니라 분위기, 눈빛, 태도에 흘러간다. 나는 얼굴 근육을 부드럽게 만들어 미소를 너울거린다. 너의 눈이 나의 눈과 마주치고 떨어지지 않는다. 너는 웃기지도 않는 말이지만 나의 칼자루를 따라 웃는다. 그러나 너의 얼굴에 비친 것은 동정심이었다. 순간 날카로워진 나의 실수가 네가 정답을 찾아낸 증거인 것처럼 안쓰러운 미소를 짓는다. 


“널 위해 내가 계획을 한 번 짜봤어.”

“음. 그래?”


나는 대답을 길게 끌며 마시던 커피를 서둘러 내린다. 고개를 끄덕이며 눈동자를 확장시킨다. 나의 동조에 너의 팔꿈치가 탁자에 올라오고 양 손바닥이 크게 펼쳐진다. 너는 순간 입술을 앙 다물었다가 벌린다. 손바닥이 탁자에서 허공으로 솟아오른다. 


“그니까 말이야. 나야 이제야 어떻게 세상과 살지 배운 것 같아. 그런데 너는 아직도 방향을 못 잡은 것 같아. 요즘 취집이라는 말이 있잖니? 네가 계속 밤마다 떠도는 것보다 정착해야 할 때라고 봐. 너도 대학원에 와. 요즘은 공부 못해도 대학만 졸업하면 거저 올 수 있어. 여기서 남자를 고르는 거야. 다들 취직하려 목숨 거는 이때에 대학원 오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겠어?”


너의 손바닥은 허공을 가르고, 네 눈동자는 질문에 맞추어 커진다. 네 표정은 밝게 탐구한다. 여기는 카페가 아니라 강의실이 된다. 나는 작은 숨소리와 함께 웃으며 고개를 숙인다.

네 스스로 답을 말한다.


“좀 사는 집 자식들이지.”


나는 웃음으로 대답했지만, 너는 내가 모르는 줄 안다. 너의 허리가 세워지며 상체가 커진다. 


“너는 외모로 그동안 잘 지냈지. 네가 널 계속 지켜보니까. 선천적 혜택으로 잘 지내는 동안 후천적인 능력을 얻은 것 같아. 너는 남자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잘 알아. 너라면 좋은 남자 잡을 수 있지 않겠어? 대학원에 세상 물정 모르는 애들 많아. 착하고 만만한 애들이야.”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인다. 하지만 미소는 잃지 않는다. 너는 내가 네 제의를 숙고하는 줄 알지만 나는 아니다. 네가 뜻도 모르고 던진 내 과오를 참아내고 있다. 하지만 너는 더 참고 있다는 걸 드러낸다.


“너는 이상해. 학교 다닐 동안 좋은 남자 애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런 애들이 말 걸면 쳐다 도 안 봤어. 기계과 머리 이상하게 민 날티 나는 남자들하고는 그렇게 까르륵 잘 웃고는.”


네 뾰족한 표정을 보니, 그나마 네가 보통 남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너는 다시 진지해진다.


“뭐 집 안 사정이 안 좋아 학습지 교사하며 돈 벌었다고 하고, 아직도 배움에 열정이 있어서

대학원 왔다고 하면 다들 좋게 봐줘. 세상에 배우려는 사람 내치려는 잔인함은 없어. 그보다 거기 들어가면 네 트위터부터 없애야 해. 그걸 보면 이 세상 어느 남자가 널 데려가려 하겠니?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고 해도 문신한 남자들과 같이 사진 찍는 여자들은 낙인 찍혀. 내가 그런 게 아니라 세상이 그래.“


나는 네 말을 믿는다. 그리고 너를 믿는다. 나는 눈을 낮게 내리깔고 팔짱을 끼고, 팔꿈치를 긁는다. 뚜렷한 몸짓으로 너에게 희망을 불어 넣는다.


“대학원가려면 무슨 과가 좋을까?”

“그러니까 일단 부자들이 많은 과가 상경계지. 어떤 학교들은 인문으로 통합했더라. 애들 씀씀이가 다르더라. 다들 금수저야.”


너는 마치 어린 애가 나쁜 일을 공모 하는 것처럼 미소 짓는다. 너는 내 믿음에 어긋나지 않는다. 너는 분명 국문학 학사, 경영학 석사. 그리고 세상과 여자도 공부 했다. 

넌 평생 육체의 언어를 모를 것이다. 그건 외발로 세상을 사는 것이다. 그건 강의실에서 공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불이 꺼지면 이력서를 읽을 수 없다. 달아오른 손끝은 문신했다고, 졸업장 없다고 차별할 수 없다. 노래를 못 부르면, 음치 클리닉을 가야 한다. 나는 어렸을 적 놀이터에서 부른 노래를 떠올린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항상 왜 마지막에 다 지은 두꺼비 집을 부셨는지 모르지만 지금 그 쾌감이 밀려온다.

그래도 넌 가수는 될 수 없을 거다. 나는 오디션은 많이 봤다.

그래서 넌 시시하다. 그걸 확인했다.


“그래 고마워. 나도 일단 하는 일 있으니 생각해 볼 게. 난 일이 있어서 이만.”

“대체 왜 그래?!”


너는 분노했다. 여자에게 백마 탄 왕자를 만나는 신데렐라 이야기가 있다면 남자에게는 개구리 왕자 이야기가 있다. 첫 만남에서 개구리여서 무시한 여자에게 개구리는 왕자가 되어 돌아간다. 그리고 여자는 왕자에게 그 동안의 무시에 대한 용서를 빌고, 존경을 바친다. 나는 앨리스가 아니다. 그래도 네가 믿는 동화를 끝까지 듣는다. 네가 스펙의 옷을 입었다고 왕자로 온 게 아니라는 걸 스스로 아는 게 보이기 때문이다. 너는 그런 남자이지 않다. 호랑이는 굶어도 고기 먹은 척 이를 쑤신다. 일어난 자리를 다시 앉으며, 눈으로 반달을 그린다. 내 미소에 너는 저절로 오그라든다. 너는 탁자를 내려다본다. 


“너는 대단했어. 너는 모르겠지만, 난 말이야. 교수님들에게 헌정하는 졸업 문집.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어. 다들 평론, 고별사를 썼는데 너만 희곡을 썼어. 마치 문예창작과 학생처럼 말이야. 굉장했어. 너는 도저히 안 볼 래야 안 볼 수 없는 재능이 있었어. 그런데 너는 그 희곡을 끝까지 마치지 않았어. 중간까지 잘 가다가 끝마무리를 짓지 못했어. 마지막에 의도만 써놓고, 웃는 눈동자 이모티콘 만 그려놨어. 왜 그랬어? 그리고 지금도 왜 그래? 마지막은 성실한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어. 제발 이러지마. 너 계속 그렇게 살면 어떤 끝이 기다릴 것 같아?” 


내 목소리를 녹음한 테이프를 듣고 쑥스러워 웃는 것처럼 입을 가린다.

희곡?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성실에 대해서라면 사람들은 자기에게 유리한 일을 할 때 성실하다. 난 나한테 제일 성실했다.

그런데 너는 내가 스치고 간 손잡이까지 기억한다. 너 나를 좋아한다? 무서운 고속도로로 달리기 시작한다. 이러면 안 된다는 표지판을 지나친다.


“사람은 더 이상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을 때, 아이로 돌아가고 싶을 때 서른이 돼. 여자들은

이십대에 같은 또래 남자보다 월등히 잘 나가지. 하지만 삼십 대를 넘어 봐. 그냥 노처녀야.

이십대에는 소개팅 나가서 얻어먹고 연락 안 해도 어리니까 귀엽다는 소리 들었지만, 지금 그래 봐. 주선자한테 쌍욕 날아가. 여자가 삼십 대 되면, 용서받기 힘들어. 사방팔방에서 결혼 한다는 청첩장 날아오고 너는 그 보다 나은 사람 잡아 결혼해야 할 것 같은데. 그게 쉽겠어? 남자가 천원이면 여자는 오백 원이야. 보통 이런 식으로 이루어져. 네 눈보다 나은 사람 찾기 힘들어. 게다가 남자들 사이에 이런 말이 있어. 여자가 어려서 아무 것도 모를 때 어떻게든 데려 가라고.“ 


네 말 하나도 틀린 게 없다. 돌아 갈 수 없는 길은 이미 시작됐다. 하지만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건 너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다. 너는 내 행동에 감명 받는다. 그렇다고 손을 덥석 잡으라는 건 아니었다. 너는 분명 남자고, 난 분명 여자이다. 우리 사이에는 수많은 신호등이 있는데, 어기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다. 네 눈에 따스함이 차오른다. 

갑작스런 접촉에 내가 떠오른다. 우리의 첫 만남으로 되돌아간다. 너는 바지에 진흙을 묻히고 고양이를 안고 있었다. 그때 나는 웃으며 너를 지나쳤다. 네가 날 보며 지었던 그 표정을 딱 세 번 다시 봤다. 

첫 번째, 어느 집단을 가든 잘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주위가 생긴다. 그리고 주위와 주위에 못 들어가는 자들로 나뉜다. 너는 학창 시절 과의 중심이었던 남학생에게 버럭 화를 냈다.

갑작스런 너의 공격에 그 남학생과 수많은 학생들이 이유를 몰랐다. 아는 사람도 있었다. 차별이 있다는 것, 주도하는 목자와 끌려가는 양들. 하지만 모두가 당연히 여기기에 아무도 너에게 호응하지 않았다. 그때 너는 그 표정을 지었다. 


“내가 너한테 잔인하다는 건 알아. 넌 이렇게 생각할 지도 몰라. 네가 날 얼마나 안 다고.

아니야. 사람은 드러나게 돼 있어. 왜냐하면 과거는 현재에 반영되거든. 너한테 좋은 시기가 있었어. 네가 세상에서 가장 예뻤을 때 너는 걱정하지 않았지. 이제는 걱정할 때야. 미래를 봐야 해. 나는 길을 제시해 주는 거야. 나도 이런 얘기 말하기 쉽지 않아.“


운전하는 사람은 나인데 네가 왜 길을 제시하는지 무서워진다. 핸들은 한 번도 내 의지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는 걸 너는 모른다. 하지만 이 분위기에서 너는 액셀 밟기를 멈추지 않을 거다. 두 번째, 과 여학생들이 너에게 당연한 듯이 단체로 심부름을 시켰다. 너는 군말 없이 모두를 위해 응했다. 까다롭고 싸가지 없는 여학생들은 너에게 고맙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너는 그 표정을 지었다. 그때 너에게 처음으로 공감했다. 네가 느낀 걸 나는 알았다. 모두가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너였다. 


“직장에서 괜찮은 남자 찾으면 되겠다 싶지만, 사람들이 웃긴 게 있어. 한 집단 내에서 잘나가는 사람은 그 집단 밖에서 아무 것도 아니야. 집단 전체가 잘 나야 해. 뭐 네가 일하는 업종을 비하하는 게 아니야. 거기서 잘나봤자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야. 크게 봐야 해. 나는 네가 더 좋은 집단에 갈 수 있도록 추천하는 거야.”


나는 말없이 커피를 마신다. 쓴 맛이 나를 날카롭게 일깨운다. 이제야 표지판이 제대로 보인다. 이 도로가 아니다. 지금은 뜨거우니 차가워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커피 잔에 손을 대고 온도를 잰다. 


“서른 넘어 결혼 못하는 남자들이 있어. 어떤 남자들인지 알아? 차와 지를 동일시 해. 할부내서 차사서 개조하고 썬팅하고 별의별 짓을 다 하지. 그리고 할부 끝나자마자 차를 팔아버려.

그리고 또 새 차를 할부로 사서 온갖 짓을 다 해. 할부 끝나면 그 때야 말로 본전 시작 이지 않아? 내가 왜 그러냐고 물으니 당신은 그 맛을 모른데. 자기 집도 없으면서 빚내서 그 짓거리를 반복해서 살아. 그러면서 결혼은 하고 싶어서, 같은 처지의 나이 먹은 여자들에게 집적 돼. 자기한테 올 여자 없으니 쉬운 여자를 공략하는 거지. 아니면 네가 어울리는 그 문신하고, 하루만 사는 놈들 중에서 연하들이 연락하기 시작할 거야. 남자들은 거...연상에 대한 동경이 있거든. 이런 얘기하기 불편하네.“


넌 당연히 내 불편을 못 읽는다. 나는 너에게 우리가 방금 차선변경 했음을 알리지 않는다.


“네가 이십대 때 감히 널 쳐다 도 못보고 말 도 못 건 그 양아치 연하들이 들이댈 거야. 왜냐하면 여자들이 서른 되면 약해지기 시작하는 걸 잘 아니까. 아무리 강한 캐릭터를 가진 여자라도 삼십 되면 은 그냥. 뭐랄까? 그냥 그래진다? 특히 저녁때나 술 마실 때 너를 음.,,진지하지 않게 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부를 거야. 너는 그걸 다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이뻐 보이려 립스틱 짙게 바르고 나가겠지. 너는 그런 남자들을 우대하니까. 나는 왜인이 이제 알기를 포기했어.” 


옆 테이블의 여학생들이 까르륵 웃기 시작한다. 분명 자신의 얘기를 듣고 웃는 게 맞는데 왜 웃는지 너는 모른다. 그리고 여전히 그 표정을 짓는다. 네 번째다. 나는 여학생들을 조용히 노려본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숨 쉬지 않고, 아무 생각하지 않는다. 여학생들의 웃음은 흐려지다가 감겨 버린다. 커피 잔을 들고 자리를 옮긴다. 호랑이가 왜 짐승의 왕이냐 하면 언제든지 요구할 수 있기에 왕이다. 너는 여학생들이 왜 피난 가는지 모른다. 여학생들과 나를 계속 돌아본다. 내 안의 적색경보가 울린다. 


“나는 너를 도우려 왔어. 정말이야.”


세 번째. 상대는 기억도 안 나는 말실수를 넌 사과했다. 한 손에 비싼 메이커 커피를 들고, 발끝을 내려다보며 내밀었다. 말실수는 삼일 전 일이라 들었다. 상대는 까르륵 웃었다. 너는 지금처럼 그런 표정을 지었다. 커피 잔의 온도가 내려가지 않는다. 내 온기 때문이다. 달리는 방향을 확인하려 한다. 커피 한 모금 마시고 미지근하게 간다.


“걱정해줘서 고마운데, 뜬금없지만 너 혹시 만나는 여자 있니?”

“짝사랑하던 여자가 있었는데, 잘 안 됐어.”


짝사랑이라 얼마 만에 듣는 단어인지 모르겠다. 너는 고개를 숙이고, 뒷머리를 긁적인다. 네 입에서 나온 단어에 스스로 놀라 떨고 있다. 그래 아직도 너는 이런 아이다. 

네가 나를 찾고 있었다고 동기한테 전해 들었다. 그리고 넌 어떻게 알았는지 나를 찾아왔다.

그래서 우리 지금 여기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왜 나를 찾았냐고 물었다. 그냥 내가 사는 얘기 듣고 내 트위터를 보고는 나를 찾아 나섰다고 했다. 나는 내가 만날 필요가 없었는데도 나왔다. 하지만 너한테는 내가 나로 사는 한 나를 필요했다.

마지막으로 목적지를 확인사살 한다. 


“너 혹시 나를 좋아하니?”

“아니야. 그런 것 때문이 아니야. 정말이야. 나는 도와주고 싶어.”


너의 맹세에 나는 질주를 멈추고 주차한다. 한숨인지 그냥 숨인지 알 수 없게 입 밖으로 내뱉는다. 짧은 휴식시간 동안 작전을 세운다. 절대 싸우지 않는다. 최후의 협상이다. 내 결심을 끄덕인다. 너는 내 행동을 멀뚱히 쳐다본다. 마치 사람을 처음 보는 사슴 눈 같다. 그 표정 정말 위험하다.


“만약에 말이야. 내가 네 말대로 따르지 않을 경우 넌 어쩔 거야?”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물론 난 너한테 좋은 길을 권한 게 아니야. 하지만 내가 여기저기 알아봤어. 그렇게 떳떳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방법이 좋아. 너한테 최선이 되었으면 해.” 

“이게 내 최선이라는 보증이 있을까?” 

“훌륭한 배우자와 안정된 가정. 그리고 대학원을 나오면 더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어. 너에게 이런 말하기 쉽지 않아 나도 많은 밤을 고민했어.”

“그게 내 좋은 미래야?”


너는 미지의 영역으로 빨려가기 직전이다. 네 얼굴에 수많은 반박들이 스쳐간다. 그것들은 아직 언어를 찾지 못해 형체가 없다. 그 전에 나는 너에게 눈빛을 쏜다. 호랑이는 늙어서, 이가 빠져도 호랑이다. 너는 나에게서 한 치의 흔들림 없는 평정을 보고 멈춘다. 내 눈을 따라 천천히 가라앉는다. 푹신한 바닥까지 닿자 내가 웃는다. 너도 따라 웃는다. 


“나 잠깐만 화장실 갔다 올 게.”


너는 착하게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다. 

너를 보면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말이 부상 입었을 때 물을 먹이면 죽는다. 부상 입은 말이 땀을 뻘뻘 흘리자 아이가 물을 준다. 할아버지가 아이한테 말한다. 


“애야 대상을 사랑하려면 어떻게 사랑하는지 알아야 한단다. 저 말은 물 때문에 결국 죽을 거야.”


아이는 자신의 선의를 굳게 믿기에 상황을 낙관한다. 하지만 말은 결국 죽는다.


나는 화장실로 들어가 유리 앞에 선다. 이제 기억났다. 너는 그때 고양이를 진흙탕에서 구한 것이다. 너는 보편적인 선행을 베풀었다. 나는 다 봤으면서도 아무 말 없이 그냥 웃으며 지나갔다. 너에게는 평생 이해하지 못할 혼돈이 됐을 것이다. 그 때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못 받았다고, 이런 식으로 네가 옳다고 주장하러 올 어른이 너는 아니다. 

하지만 고양이는 고양이 나름대로 사는 법이 있다. 그 고양이가 진흙탕에 들어갔다면 나름 이유가 있는 거다. 너도 나도 모르는 고양이만이 아는 이유가 이 세상에 분명히 있다. 

그래도 이미 늦었지만 말하겠다. 넌 그때 좋은 일을 했어. 잘했어.

입술에 립스틱을 짙게 바른다. 

올라간 상의를 끌어내려 골반에 새겨진 호랑이를 감춘다.

이번에는 네가 혼돈에 빠지지 않게 단단히 무장했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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