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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azyjam 회전하는 밤

2015.04.30 23:2404.30

회전하는 밤

 

 

 

벨 소리가 짧게 두 번 울렸다.

나는 눈을 떴다. 어두웠다. 움직이려 하자 양 어깨가 부드러운 벽에 부딪쳤다. 좁았다.

의아함을 느끼기도 전에 눈 앞으로 부드러운 하늘색의 스크린이 열리듯 나타났다. 스크린 안에 문자열이 떠올랐다.

[ 당신은 지금 냉동 수면에서 깨어났습니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세요. ]

문자가 알려주는 대로 나는 긴 심호흡을 했다. 두어 번 길게 숨을 내쉬자 갑자기 구역질이 올라왔다. 토할 것 같았다.

내 상태를 알아채기라도 한 듯 문자열이 바뀌었다.

[ 냉동 수면에서 깨어난 직후에는 가벼운 어지러움이나 구토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

[ 기도 질식의 위험이 있으니 토하지 마시고, 의료 직원이 올 때까지 기다리세요. ]

그래서 참았다. 천천히 숨을 끊어 내쉬어 구역질을 가라앉히면서 의료 직원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 동안 스크린은 몇 가지 정보를 더 보여주었다. 나타났다가 다른 내용으로 바뀌는 문자열 중에 눈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냉동 수면 이후에는 순간적인 자아 상실 상태가 나타날 수 있지만 곧 회복되니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알고 싶은 것이었다.

깨어난 직후부터 막연한 불안감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은 확실한 자각이 되어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는 누구지? 내 이름은? 나이는? 지금 여기는 어디? 나는 어떤 사람이길래 냉동 수면 장치에서 깨어나고 있는 것일까? 눈 앞의 스크린이나 냉동 수면 장치의 갑갑함은 낯설지 않았다. 분명 나는 이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정작 이 모든 것을 알고 겪었던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

괜찮겠지. 일시적인 거라고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기분을 가라앉히려 했다. 하지만 자아 상실이라는 것을 인지한 이후부터, 누르려고 해도 불안함과 답답함이 급속도로 커져갔다.

스크린 한쪽 구석에 떠오른 시계를 확인했다. 처음 본 시간으로부터 어느새 10분이나 지나 있었다. 스크린의 문자열은 이미 같은 내용들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출력한 상태였다. 기다리고 있는 의료 직원은 오지 않는다.

무심코 손으로 주변을 더듬었다. 스크린이 떠올라 있는 면은 차갑고 묵직하며 매끈한 유리 같은 촉감이었다. 내 몸이 누워있는 면은 싸늘한 기운이 남아 있는 가죽 쿠션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가죽일 리가 없지. 이건 옅은 회색의 특수 가공 비닐 쿠션이다. 속에는 젤이 가득 차 있고.

어렴풋하게 눈 앞에 냉동 수면 장치의 모습이 그려졌다.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뚜껑 역할을 하는 유리 면이 열린 냉동 수면 장치를 들여다보고 있는 장면이었다. 분명 나는 이 것에 들어가기 전에 보았으며, 내부 구조에 대한 설명을 들은 적이 있다. 좋아. 자아 상실이 끝나고 기억이 되돌아오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오른편 구석으로 손을 뻗었다. 차가운 기운이 남아 있는 레버가 만져졌다. 레버를 당기자 철컥 소리와 함께 눈 앞의 스크린이 사라졌다.

냉동 수면 장치의 뚜껑을 밀어 열었다. 하지만 수면 장치의 바깥은 어두웠다. 막연히 기대하고 있던 밝은 실내가 아니었다. 의료 직원들이 분주히 오가고, 냉동 수면 장치에서 깨어난 사람들이 멍청한 얼굴로 앉아 있거나 아주 소량의 위액 외에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을 토악질을 하고 있는 광경이 떠올랐었는데. 아마 그것은 과거에 이 장치에서 깨어났던 때의 기억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고 그저 어두웠다.

나는 아직 뻣뻣한 몸을 움직여 냉동 수면 장치에서 기어 나왔다. 그리고 무심히 왼손을 뻗어 수면장치 옆 벽면에 있는 패널을 건드렸다. 타이머가 달린 작은 조명이 켜졌다. 머리의 기억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몸의 기억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켜진 것은 내가 누워있던 냉동수면 장치 주변의 좁은 범위를 겨우 밝히는 조도가 낮은 조명이었지만, 빛을 보니 답답한 기분이 조금 가셨다.

처음 떠오른 생각은 냉동 수면 기계가 오작동을 일으켜 나 혼자만 깨어났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빛이 닿는 한도 내의 주변을 살피면서 그 생각은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오른편의 냉동 수면 장치는 활짝 열린 채 비어 있었다. 왼쪽으로는 빛이 거의 닿지 않아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냉동 수면 장치의 외부 스크린에 붉은 에러 표시가 떠올라 있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에러 표시가 깜빡이고 있는 외부 스크린에는 누군가의 이름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렇지. 이 냉동 수면 장치는 정해진 자신의 것이 있어, 이름을 등록하게 되어 있다. 나는 방금 기어 나온 수면 장치의 외부 스크린을 살폈다.

앨리스 호건…. 이것이 내 이름? 어쩐지 어색한 느낌이 드는 이름을 몇 번 입 속으로 반복해서 중얼거리는 동안에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짧게 자른 갈색 곱슬머리에 작은 체구,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똑바로 내 쪽을 향한 여자의 얼굴. 앨리스 호건이 무언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래. 앨리스 호건. 2등 항해사. 거울을 보고 있는 내 모습이 기억으로 떠오른 것 같다.

내 이름을 알아냈다고 해도, 기억이 분명해지지 않는 것이 답답했다. 주변에 기억을 되찾는데 도움이 될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또 지금 벌어진 이상한 상황을 좀 더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수면실 문 쪽에 분명 이 방의 전체 조명을 제어하는 스위치가 있을 것이다. 나는 문이 있었다는 기분이 드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더듬거리며 내가 누워 있던 냉동 수면 장치의 발치 쪽을 돌아가려는 순간, 무언가 발에 걸렸다. 손이었다. 누군가가 쓰러져 있었다. 빛에 드러난 것은 작은 손과 팔의 일부뿐이었다. 나머지 몸은 냉동 수면 장치가 만든 그늘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손대어 확인하지 않고도 왠지 알 수 있었다. 이건 시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등을 타고 한기가 스쳤다.

처음에는 눈 앞에 시체가 있다는 게 무서웠다. 다음 순간에는 비어 있는 냉동 수면 장치들이 생각났다.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우주선에 사고가 있었던 걸까? 아니, 사람이 냉동 수면 장치 밖으로 떨어져 죽을 정도의 충격이라면 나 역시 깨어났을 것이다. 사고가 아니라면? 심장마비나 뇌출혈 같은 걸 일으켰나? 혹시 누군가가 이 사람을 죽인 거라면? 살인자가 이 방에 있는 거라면 어쩌지? 걷다가 멈춰 서서 허리를 숙인 엉거주춤한 자세로 온갖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때, 작은 조명등의 타이머가 정지하고, 빛이 사라졌다.

주변이 어둠으로 뒤덮이는 것과 동시에 나는 뛰었다. 폭이 10센티미터에도 한참 못 미칠, 가느다란 그 팔을 밟기 싫어서 제자리 넓이 뛰기를 하듯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반동으로 비틀비틀 떠밀리듯 두어 걸음 내달리자 딱딱한 것과 부딪쳤다. 벽이었다. 허둥허둥 벽을 더듬어 옆으로 달렸다. 그래, 분명 문은 이쪽 방향이었다.

기억이 불분명해서인지, 겁을 먹은 탓인지 문은 예상보다 훨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겨우 문 손잡이를 찾아내자마자 문을 열고 밖으로 몸을 날렸다. 다시 문을 닫아버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수면실 문에는 잠금 장치가 없었다. 살인자가 안에 있다고 해도 가둬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서둘러 시체가 있는 방에서 멀어지기로 했다.

복도 역시 어두웠다. 겨우 내 손가락이 양쪽 다 다섯 개씩 붙어 있다는 정도나 확인할 정도로 어두운 조명이 띄엄띄엄 켜져 있을 뿐이었다.

겨우 윤곽만 확인할 수 있을 정도지만 이 복도는 낯설지 않았다. 나는 이 복도를 지나 몇 번이나 제 5 냉동 수면실에 들어갔었던 것이다. 그런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퍼뜩 방금 나온 문을 돌아보았다. 문에 쓰여 있는 것은 제 3 냉동 수면실이었다. 제기랄. 정말 기억이 엉망이 되어버린 모양이다.

여기가 어디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나는 되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몇 걸음 지나지 않아 어스름 속에 삐뚜름하게 웅크리고 앉은 형체를 발견했다. 목이 비정상적으로 꺾여 있었다. 시체다. 이것 역시, 손을 대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시체는 시커먼 웅덩이 안에 앉아 있었다. 웅덩이는 피일 것이다. 인공 중력이 없다면 사방에 핏방울이 날아다니겠지.

나는 좁은 복도에서 할 수 있는 한 시체에서 가장 먼 거리를 유지하면서 돌아서 계속 걸었다. 몇 걸음 지나지 않아 또 하나의 사람 그림자가 검은 웅덩이 위에 엎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걸어가는 방향에도, 걸어온 방향에도 시체가 있다. 끔찍했다.

두 시체를 모두 보지 않기 위해 나는 벽을 향했다. 그리고 토했다. 냉동 수면 직전에는 빠르게 소화 흡수되는 젤 타입 식사만 하게 되어 있으니 위액 약간 밖에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도 목을 넘어오는 것은 제법 많은 양의 걸쭉한 액체였다. 토사물을 뱉어내고 나자 입 안에 비린내가 남았다. 나 지금 피를 토하고 있는 건가? 혹시 이 탐사선 내에 전염병 같은 것이 돌아서 사람들이 죽은 건가? 그리고 나 역시 같은 병에 걸렸다거나?

나는 급히 몸을 일으켜, 가장 가까이 보이는 조명등을 향해 달렸다. 그 동안 바닥에 구르고 있는 그림자를 두어 개 더 본 것 같지만, 더 이상 시체 따위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조명 아래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토사물로 젖어있는 손과 수면복 앞자락을 비춰보았다. 피가 아니었다. 손과 수면복을 적신 것은 칙칙하고 탁한 녹색 액체였다. 냉동 수면 전에 식사로 지급되는 젤은 반투명한 녹색이다. 그것이 위장 안에서 이런 탁한 녹색이 된 걸까? 토하면서 느낀 양만큼 많이 먹지는 않았었는데.

피를 토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조금 진정되었다. 냉정해지자 조명등을 향해 달려오면서 마지막으로 지나친 시체에 대한 위화감이 떠올랐다. 천천히 그 쪽을 돌아보았다. 엎드린 채 웅크려 있는 시체의 등에는 길쭉하고 단단한 무언가가 꽂혀 있었다. 시체의 얼굴은 내 쪽을 향해 있는 것 같긴 했지만, 약한 조명 밝기 때문에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다. 그의 몸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 파이프인지, 쇠지레인지도 파악하기 어려웠다.

지금까지 본 시체가 모두 몇 구였지? 이 탐사선에 탑승해 있는 사람은 총 32명이다. 지금까지 내 눈에 뜨인 것만 총 다섯 명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탐사선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확인해야 한다. 천천히 생각해보자. 이 곳은 냉동 수면실이 모여 있는 구역이다. 격벽을 지나 다음 구역으로 나가면……. 뭐가 있었지? 안 돼.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이 곳에 계속 있는대도 별 수는 없다. 나는 걷기 시작했다.

격벽에 도착해서 제어 패널을 건드리자 머리 위로 조명이 켜졌다. 갑자기 밝아진 시야에 눈이 아팠다.

강한 빛을 피해 눈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리자 또 하나의 시체가 벽에 기댄 채 쪼그려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짧게 치켜 깎은 검은 머리칼과 턱수염. 아는 얼굴이다. 친근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는 고통스러운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죽어 있다. 끈적해 보이는 액체가 검은 수염을 타고 선내 활동복 앞가슴을 적신 모습이었다. 고작 32명 밖에 되지 않는 탐사선의 크루 중 하나일 텐데 이름조차 떠올릴 수가 없다니. 돌아오지 않는 기억에 대한 짜증과, 고통스러워 보이는 동료에 대한 연민이 동시에 떠올랐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그의 시체를 보고 있노라니 이상한 점이 눈에 뜨였다. 그의 시체에는 몇 개의 둥근 구멍이 나 있었다. 총의 흔적이다. 이 사람은 살해당한 것이다.

여기서 달아나야 해. 나는 황급히 격벽의 출입문 제어 패널을 조작했다. 옆으로 몸을 숨기고, 문이 열린 후에는 건너편을 살폈다. 누군가가 있는 기색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재빠르게 문을 통과했다.

살인자가 탐사선 내에 있다면 어느 쪽에 있는 걸까? 냉동 수면 구역 쪽에 있는 거라면 좋을 텐데. 나는 방금 지나온 문을 돌아보았다. 문득, 문 너머로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누군가가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군지 확인하기도 전에 격벽의 출입문이 닫혔다.

나는 문 너머에서 했던 것처럼 다시 출입문 제어 패널에 달라붙었다. 조금 전에 본 그림자는 경계하는 느낌으로 어깨를 움츠리고 잔뜩 긴장해 있었다. 그가 살인자가 아니라면 나를 보고 말을 걸었겠지. 수상하다. 그의 발을 묶어야 한다. 격벽 출입문의 자동 제어를 해지하고 수동으로 변경한다. 문을 폐쇄하거나 잠가버릴 수는 없지만 조금은 발을 늦춰줄 것이다. 저 자가 자동 제어가 고장 나서 문이 열리지 않는다고 믿고 포기해준다면 더 좋고.

출입문 제어 패널에서 손을 떼고 돌아보니, 새로 진입한 지역은 사무 구역이었다. 무언가 기록하던 손 모양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왜 손으로 쓴 기록문을 남겨야 하는지에 대한 불만을 가졌던 것도 잠깐 떠올랐다 사라졌다. 탐사대원들도, 학자들도, 항해사들도 모두 냉동수면 중에 있지 않을 때는 매일 손으로 쓴 일지를 남기게 되어 있다. 그래, 여기라면 탐사선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록이 있을 것이다.

한 가지 기억이 떠오르자 다른 기억도 뒤따라 흘러나왔다. 탐사선의 크루들은 두 개 조로 나뉘어서 지구 시간 기준으로 4주씩 냉동 수면과 기상 활동을 교대하게 되어 있다. 내가 냉동수면에 들어가 있었다 해도 기상 활동 조의 누군가는 이 사건에 대해 기록을 남겨두었을 것이다.

가장 가까운 개인 사무실의 문에 손을 댔다. 열리지 않았다. 제길! 다음 문으로 향했다. 역시 열리지 않았다.

세 번째 문은 손잡이를 돌릴 필요도 없었다. 열려 있었다. 앨리스 호건이라는 표찰이 붙어 있는 문을 밀어 열고 안을 살폈다. 의자와 일체형인 작은 책상과 컴퓨터가 전부인 좁은 공간은 밝았다. 누군가 숨어있을 만한 공간조차 없었다. 게다가 책상 위에는 일지가 펼쳐져 있는 것이 보였다. 다행이었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무심코 고개를 돌려 복도 쪽을 보았을 때, 깜짝 놀랐다. 사무 구역의 복도 저 쪽에서 나를 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 깨끗하게 밀어버린 대머리에 깡마른 체격의 남자. 격벽의 출입문을 통과할 때 냉동 수면 구역 쪽에 서서 나를 보고 있던 그 사람이다. 당황해서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급히 고개를 들어 다시 보았지만 그 사람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문 손잡이를 움켜잡고 주저앉은 자세에서 할 수 있는 한 가장 빠른 속도로 문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다행히도 이 문은 안에서 잠글 수 있다. 허둥지둥 문을 잠그고 숨을 몰아 쉬었다.

어떻게 냉동 수면 구역의 출입문을 통과해서,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나보다 앞서 나가 있을 수 있었지? 게다가 그는 나를 보면서 섬뜩하게 웃고 있었다. 살인자일까? 그 자가 탐사선의 크루들을 무참히 죽인 살인자인 걸까?

무언가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이 사무실에는 아무 것도 없다. 컴퓨터와 조작 패널, 책상, 등받이 없는 의자는 모두 붙어 있는 일체형이다. 벽면은 갑작스러운 충격에 대비할 수 있도록 안에 젤을 채운 쿠션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안에서 독립된 개체라고는 일지와 그 위에 올려진 펜뿐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는 펜과 일지를 움켜 잡았다. 나는 일지를 읽기 시작했다.

 

 

#912번째 기록 (2 3)

안드바리 행성계 진입 14일째. 두 번째 조우하는 행성에 탐사반 투입 결정. 탐사 대원은 워든과 게인. 기온도 대기도 끔찍하다고 하니 소형 탐사정이 정상 동작하는지 시험하는 가벼운 착륙이 될 것으로 예상.

 

#913번째 기록 (127)

워든과 게인의 시험 착륙은 성공. 대기와 광물 샘플을 확보하고, 지구 시간 기준 자정 넘어서 귀환 예정. 그들의 무사 귀환을 기다리고 있다.

 

#914번째 기록 (128)

탐사반 무사 귀환. 함장은 탐사 대원 둘에게 행성의 명명권을 하사함. 탐사선에 귀환한 직후부터 워든이 극심한 어지러움을 호소. 의료팀이 걱정 중이다.

 

#915번째 기록 (129)

워든이 의료팀의 월레스를 공격함. 물어뜯었다는 이야기가 도는데 진위 여부는 모르겠다. 함장이 함구령을 내렸음. 또 다른 탐사요원 게인도 어지러움을 호소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916번째 기록 (130)

함장이 워든과 게인을 감금했다. 그 과정에서 또 한 명의 크루가 물어 뜯겼다는 소문이 돈다. 월레스가 현기증과 고열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쇼크 때문이 아닐까 싶다는데. 닥터 호옌은 미지의 바이러스가 선내에 침투한 것 같다고 겁을 주었다. 농담이라도 할 말이 있지.

 

#917번째 기록 (131)

워든이 죽었다. 지구에서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닥터 호옌은 워든의 시체를 부검하겠다고 한다. 다행히도 게인과 윌레스는 몸 상태가 꽤 나아졌다고 한다. 식당에서 같이 앉은 아일린은 탐사정이 돌아온 후 선내의 공기 세척을 몇 번이나 했었다는 이야기를 수십 수백 번 반복했다. 듣고 있노라니 미칠 것만 같았다.

 

#918번째 기록 (1 31)

전체 브리핑 시간에, 닥터 호옌이 워든의 부검 결과를 발표했다. 워든의 뇌는 해마와 전두엽이 비정상적으로 축소되어 있었다고 했다. 기억과 판단력이 엉망이 되었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망막의 무슨 세포가 파괴되어 가고 있었다고 했던가. 정상적인 색 구분이 안 될 거라고 한다. 그 외에도 여러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발표 도중에 월레스가 난입해서 선내에 미지의 바이러스인지 외계 기생충인지가 침투한 거라며 소동을 벌였다. 함장은 월레스를 감금시키기로 결정했다.

 

#919번째 기록 (1 32)

몸이 좋지 않다. 열은 없는 것 같지만 몹시 어지럽고 메스껍다.

 

#918번째 (1 )

아일린과 월레스가 죽었다. 둘 다 극심한 갈증을 호소하다가 심장 발작을 일으켰다고 한다. 어리석기는. 나는 이 현기증에 익숙하다. 사춘기 때 빈혈에 자주 시달렸었으니까. 이 현기증은 피가 모자라서 생기는 거야. 이걸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하나뿐이잖아 하지만 크루를 희생시킬 수는 없어 게인은 어차피 모두들 포기하고 있으니까괜찮을거야아무도모를거야그가감금된방의비밀번호가

 

 

일지가 끝났다. 대체 탐사선 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나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 앞에서 남자의 얼굴을 발견했다. 대머리에 안색이 나쁘고 깡마른 남자.

순간 놀라서 일지를 든 팔을 들어올렸다. 그 역시 일지를 들어 얼굴 앞을 막았다. 그도 나도 똑같이 놀란 얼굴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내가 천천히 입을 닫고 팔을 내릴 때까지, 그는 꺼져 있는 모니터의 검은 화면 안에서 나를 흉내 내고 있었다.

기억났다. 대머리에 깡마른 남자. 이 남자의 이름은 노먼 게인이었다. 모든 집기를 치운 좁은 사무실 하나에 감금당해 있었다. 다들 내가 미지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거라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저 약간의 피만 마실 수 있으면 괜찮아질 거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목이 바짝바짝 말라 더는 견딜 수 없다고 느꼈을 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앨리스 호건이 들어왔다. 가냘픈 손으로 어설프게 소방 도끼를 들고. 매끈하고 얇은 피부 안에 가득 피를 담고서. 어리석게도 내 피를 노리고.

갇혀있던 사무실에서 나오자 선체 여기저기에 핏자국이 가득 뿌려져 있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가 쇠지레로 또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를 후려치고 있었다. 게인은, 나는, 큰 소리로 웃었었다.

그랬다. 이제는 기억이 모두 돌아온 것 같다. 나는 걸었다. 터덜터덜. 몹시 목이 말랐다. 하지만 이제 마실 수 있는 것은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쓸데 없이 긴장하며 돌아다닌 통에 피곤했다. 그런데 왜 긴장하고 있었더라? 우선 좀 자야겠다. 그리고 깨어나면 새로운 마실 것들이 있을 지도 모른다. 아니라면 그건 그때 생각하기로 하자.

나는 걸었다. 격벽에 도착했다. 패널을 조작해도 격벽 출입문이 열리지 않았다. 한참 패널을 잡고 끙끙거린 끝에 문이 수동 개폐로 설정되어 있는 것을 깨달았다. 겨우 문을 열고 다시 나아갔다.

냉동수면실에 도착했다. 나는 가장 가까운 문을 열었다. 내 자리를 찾아가야 할 텐데. 그게 어디였지? 내 이름이 뭐였더라?

이리저리 휘두른 손 끝에 냉동수면 장치의 외부 조작 패널이 닿았다. 패널 스크린에 불이 들어왔다. 마이클 호옌. , 이게 내 이름인가? 확실히 이 냉동 수면 장치는 비어있다. 그렇다면 내 자리가 맞겠지.

나는 냉동 수면 장치를 조작하고 재빨리 들어가 누웠다. 이제 좀 쉴 수 있을 것이다.

눈을 감았다. 긴 벨 소리가 울리고 음성 메시지가 울리기 시작했다. 너무 피곤해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곧 잠에 빠져들었다.

[ 냉동 수면 장치의 연료 보급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연료로는 약 125분 가량의 냉동 수면만 보장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냉동 수면 장치의 연료 보급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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