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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경 사랑손님과 나

2017.01.31 19:4501.31

사랑손님과 나

– 이나경 –

1.

누님은 오늘도 길목을 막아선다. 아무리 기척을 죽이고 쥐걸음으로 나가려 해도 이내 들통이 나니 환장할 노릇이도다.

 “모연이 어데 가니?”

 하고 은근한 목소리가 들릴라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볼일이 있어 잠깐 다녀와요.”

 “그러지 말고 선생님 들어오시는 거 보고 나가라.”

 “쫌. 오늘은 폭죽놀이 한다고 분주한데.”

 그런다고 어디 사정을 봐줄 위인이던가. 도리어 소매를 더욱 팽팽히 당긴다.

 “야, 선생님 저녁상 들일 사람이 없잖니.”

 “입때껏 안 들어왔으면 먹고 오거나 거르겠다는 얘기지. 거 누님도 개의치 마요.”

 “어찌 그래?”

 “그럼 이번만 눈 딱 감고 누님이 상 들고 나가구려. 요새 세상에 내외합니까?”

 하고 쏘아붙이니 대꾸하는 대신 누님은 어깨만 새근새근 들썩인다. 더 골려주고 싶지만 그랬다간 금세 눈가가 그렁그렁해질 테지. 그런 건 사절이다.

 흥이 식었다. 나는 아무렇게나 신을 벗어 차고서 방에 들어와 드러누웠다.

 “제길, 그 선생은 수업을 마쳤으면 재까닥 올 것이지 끼니때마다 어델 그리 쏘다닌대.”

 중학생이 되어 거처를 따로 옮겼을 때만 해도 내 생활은 퍽 풍요로웠다. 아주 홀로서기를 한 것은 아니고 바로 옆집인 누님 댁 사랑방에서 잔심부름하며 지내는 조건이 붙었지만 그것만도 어디냐. 비록 누님이나 어머니나 잔소리는 매일반이고 조카딸까지 가세해 이것저것 눈치 볼 일은 많을지언정 내 단연히 행복했노라.

 그런데 금년 들어 상황이 달라졌다. 저 남준의라는 자가 내 영역을 침범한 탓이다.

 남 선생은 오랜 유학생활을 접고 이번에 우리 동리에 교사로 부임하게 되었단다. 선생을 처음 소개받았을 때에는 형님의 벗이라기에 조금쯤 우러르는 태도 같은 것이 내게 있었다. 그러나 굳이 나를 불러다 인사를 시킨 내막이 드러나매 나는 대번 그에게 앙심을 품게 됐겠지.

 “당분간 여기 사랑에서 지내게 됐으니 모연이 네가 성의껏 챙겨드려라.”

 “네… 네?”

 말인즉 내가 지내는 사랑방을 절반으로 갈라 윗방에 선생을 모시고 나더러는 아랫방에서 지내라는 것이다. 결벽이 유난한 선생께서 차마 더러운 하숙에서는 기거할 엄두가 안 난다나. 물론 나는 즉각 항의했으나 형님의 표정을 살피니 더 까불었다간 본가로 도로 내쫓길 공산이 있어 보이므로 적당한 선에서 꼬리를 말았더랬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쫓겨나 본전도 못 찾는 한이 있을지언정 주장을 끝까지 관철했어야 했다. 그때 비굴하게 타협한 결과 지금껏 부조리에 시달리고 있으니.

 펑! 펑!

 들릴 리 없는 폭죽 소리가 귓전에 어룽댄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쯤 저들끼리 시작했으려나. 오늘 저녁엔 태화도 나온다고 했는데…. 태화의 발그레한 뺨이며 콧등의 점이며 둥근 어깨를 떠올리다가 불현듯 벌떡 일어섰다.

 “뭐라도 조치를 해야지, 원.”

 나는 장지문을 열어젖히고 선생의 방으로 돌진했다. 등을 밝히니 가지런히 개켜진 침구와 정돈된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한쪽 구석에는 과자도 몇 봉지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옥희에게 주려는 것일 테지.

 내 그저 염탐질이나 할 요량으로 주인 없는 방에 들어온 건 아니고 따로 목적이 있다.

 ‘우리 모연 군이 용무가 다망해 언제까지고 붙들어 두기 딱하오니 선생님께서 끼니때가 지나도 귀가치 않으시면 밖에서 식사를 하고 오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라는 식으로 누님의 필체를 흉내 내어 쪽지를 남기면 선생의 방자한 태도도 다소 누그러지리라고 꾀를 낸 것이었다.

 하여 선생의 책상 앞에 앉을 때까지도 순조로웠으나 그만 선생의 결벽 병증을 미처 고려하지 못했으니…. 책상 위에는 쪽지 구실을 할 종이는커녕 한 점 티끌도 남아있지 않았다. 책 귀퉁이라도 찢어 조달하자니 책상 모서리에 세워진 것들이란 원래 이 방에 있던 책들뿐이다. 매형 손을 탄 물건은 내가 감히 훼손할 수 없다.

 사정이 여의찮으니 내 방에서 종이를 가져와야겠다. 이런 사태가 아니었어도 애초에 쪽지를 미리 작성해오는 편이 현명했겠지만 그때는 워낙 경황이 없어서 그런 묘책이 있는 줄도 몰랐다. 일어나려다 말고 나는-나중 생각해보니 비범한 예지력을 발휘하여-잠시 정돈을 한답시고 비뚜름히 흐트러진 책들을 바로 세웠는데 마침 책과 책의 작은 틈새에서 수상쩍은 수첩을 발견한 것이다. 검정색의 얇은 수첩이 그림자처럼 숨어 있었다. 나는 그것이 선생의 물건임을 직감했다. 옳지, 그렇잖아도 굼닐기 번거롭던 차에 잘됐군.

 보려고 본 것은 아니고 적당한 쪽을 찢고자 대강 훑다보니 불가피하게 눈에 들어온 것인데 어쨌든 그것은 일기장인 모양이었다. 첫 장에 약속 장소에서 탈 없이 형님을 만났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동리에 와서 일기를 새로이 쓰는 듯했다. 나는 수첩을 조금 더 뒤적거릴지 원래 목적에 충실할지를 고민하다가 수첩을 마저 읽기로 했다. 혹여 나를 평가한 대목이 있다면 알아둘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내 짐작에 선생은 본디 일기를 쓰던 사람이 아니었을 게다. 대저 일기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정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할진대 선생의 수첩에는 온통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고 무엇을 보고 들었다는 이야기뿐인 까닭이다. 이래서야 우리 꼬맹이가 삐뚤빼뚤 쓴 것보다 나은 점을 찾지 못하겠다. 더욱이 선생과 일절 관계없는 소문들까지 두서없이 적어놓기도 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작태인지.

 그런데 앞에서부터 순서대로 빠르게 훑던 눈이 문득 멈추었다.

 ‘일주일 뒤. 실수 없이. 정신 똑바로 차릴 것.’

 거의 유일하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대목이었다. 작성된 날짜는 9일. 오늘이 14일이니 닷새 전에 쓴 것이다. 전후 맥락에 무관하게 툭 튀어나온 구절이라 그 의미는 도통 짐작 가는 바가 없지만 어쩐지 신경이 쓰였다. 이틀 뒤잖아? 무슨 꿍꿍이야?

 밖에서 옥희의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필시 방 주인이 돌아온 것이다. 선생이 마당에서 옥희에게 바짓가랑이를 붙들려 시달리는 틈을 타 나는 수첩을 제자리에 꽂아두고 부랴부랴 방을 빠져나왔다. 잠시 후 모르는 척 저녁상을 가져다주니 선생도 나를 이상히 여기지 않았다.

 이후 이틀간 나는 선생을 보다 면밀히 관찰했다. 표면적으로 선생은 여느 때처럼 시시풍덩한 모습이었다. 아침에는 일찌감치 집을 나섰고 저녁에는 밥때가 지나 슬금슬금 돌아왔으며 밤에는 옥희를 방에 불러 이것저것 묻고 답하며 아기자기한 시간을 보냈다. 자정 무렵까지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쓰거나 하다가 소등하고 자리에 누운 듯했다. 도무지 정신을 똑바로 차린 사람의 일상이라 보기 어렵다. 그래도 나까지 해이해져선 안 될 일이다.

 뜬눈으로 사흘째 아침을 맞았을 때 비로소 나는 안도했다. 우려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선생의 뭔지 모를 계획이 무위에 그친 것이다. 어쨌든 선생도 누님도 꼬맹이도 무사태평하게 각자 자리에 있는 걸 확인했으니 홀가분하게 등교할 수 있겠다.

 그런데 교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묘하게 어수선한 게 아마 무슨 사건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얘기 들었어?”

 묻기도 전에 뒷자리의 현호 녀석이 먼저 아는 체했다.

 “어저께 석정명이 죽었대. 누가 칼로 찔렀다나봐.”

 “석정명?”

 “그 왜, 내지인 앞잡이 말이야. 대저택에 사는.”

 “어저께 몇 시에?”

 “글쎄, 귀갓길에 변을 당했다니까 저녁쯤이겠지 뭐.”

 “누… 누가 그랬대?”

 “모르지. 아직 안 잡혔을걸.”

 내 생각이 틀렸다. 선생은 실수하지 않았다. 계획을 성공시킨 것이다. 내가 예상한 것과는 다른 계획을.

2.

과연 동리가 발칵 뒤집어졌다. 석정명에게 닥친 불운에 대해서는 죽어 마땅한 자가 죽었다는 것이 중론이며 동정하는 이는 딱히 없다. 반면 사람들은 미상의 살해범에 대해 호걸입네 구국영웅입네 하며 낯간지러운 칭송들을 남발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몇몇 철없는 학급 동무들은 금번의 호기를 놓쳐선 안 된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실정이다. 명명백백 기사년 광주 시위를 염두에 둔 의견일지어다. 당시 전국적 항일운동으로 번진 대규모 시위는 우리 또래의 다툼에서 촉발되었더랬다. 즉 그날의 영광을 우리도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비약해야 그러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지 당최 모를 일이지만서도.

 이렇듯 우리들이 망령된 공상에 빠진 사이 저들은 저들대로 망상에 사로잡혔다. 일본인과 그 하수인들은 두 번째 습격이 있을 것이라 확신하는 듯하다. 평소 석정명과 교류한 고위 관료들은 경비 인력을 보강했고 순사들은 골목마다 어슬렁거리며 마구잡이로 불심검문하고 있다. 보통은 사람 하나가 죽었다고 이렇게 유난을 떨지는 않으니 꼭 석정명을 탓할 일은 아니겠다. 기실 이 소동의 중심에는 출처불명의 소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얘기 들었어?”

 이번에도 현호 녀석이 쿡 찌른다.

 “범인 말이야, 각시탈이라데.”

 “각시탈?”

 “못 들어봤어? 동섬서홀 신출귀몰하며 왜놈들을 척결하는 애국지사인데 특이하게도….”

 “탈을 썼다는 거지. 그건 알아. 한데 석정명을 죽였다니?”

 “듣기론 그래. 근래에 경성이 삼엄해져서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활동하나 보더라. 전국 순회 공연인 셈이지. 아무리 그래도 이리 외진 지방까지 올 줄이야.”

 “그래서 그 자가 어떻게 생겼대? 그러니까, 탈 말고 얼굴이 어떻게 생겼느냐는 얘기야.”

 “알 방도가 없지. 가면 뒤 진짜 얼굴은 아무도 못 봤으니.”

 “흠.”

 내가 봤다. 무표정한 가면 뒤에는 눈꼬리가 슬쩍 처지고 콧날이 오뚝하며 입술이 종잇장처럼 엷은, 생채기 하나 없이 각시처럼 희멀건 얼굴이 있다. 어느 날 돌연 나타나 호기심 많은 교사 행세를 하는 자다. 그가 석정명을 죽였다.

 일제에 협력하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다. 표독한 부일협력자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처음엔 나 역시 가슴이 쿵쾅거렸었다. 이곳에도 압제에 저항하는 자가 있다니! 그때 내가 느낀 장쾌한 기분을 모조리 부정하지는 않겠다. 다만 범인의 정체를 안 뒤로 그를 무작정 성원할 수 없게 되었을 뿐이다. 선생은 우리 식구와 너무도 가깝다. 그것이 문제다. 독립투사라는 족속은 야생의 호랑이와도 같아서 그 존재가 참으로 귀하고 아름답지만 그렇다고 바로 코앞에서 맞닥뜨리고 싶지는 않은 존재이기도 하다. 자칫하면 우리가 다칠 수도 있는 것이다.

 설혹 선생이 체포된다면 그것은 애석한 일이다. 애석한 정도로 끝나면 차라리 다행일 것이다. 그 이상의 끔찍한 일이 우리 식구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선생을 단순히 하숙인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애초에 어릴 적 친구랍시고 데려온 것이 우리 형님이기 때문이다. 형사들은 집안 어른들을 데려가 여죄를 캐물을 테고 그 과정에서 무자비한 고문이 가해질 것이다. 그것을 노쇠한 우리 어머니가 견뎌낼 수 있을까.

 남준의 선생으로 말하자면, 선생은 정말이지 자기 정체를 숨기는 데 탁월하다. 동리 사람들은 다들 선생을 좋아한다. 하기야 상시 입가에 미소를 띠고 단정한 말투로 인사를 건네며 공순하게 다가오는데 밀쳐낼 까닭이 없겠다. 개를 쓰다듬고 화단을 굽어보거나 담벼락을 매만지고 느긋이 완보하며 걸핏하면 책방을 들락거리는 선생과 유혈 참극을 동반하는 애국지사를 연관 지어 생각하는 이는 감히 없으리라. 나부터도 선생을 글이나 들여다볼 줄 알지 저리 유약해서야 어디 사내구실이나 하겠나, 하고 얕잡아보았으니 말이다.

 거사가 있은 뒤로도 선생의 생활은 태연자약이라 옥희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는 데 거리낌이 없다. 아침마다 복작대는 순사들 곁을 지나칠 때엔 내가 다 조마조마할 지경이지만 선생은 동요조차 없다.

 그렇지만 영원히 정체를 숨기는 게 가능할 리 없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에 나부터도 그 본색을 알고 있지 않은가.

3.

형님은 밤이 깊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늦게까지 형님을 기다린 것은 선생에 관해 상의하고자 함이었다. 선생이 어려서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은 위험한 인물이라고, 조속히 누님 댁에서 내보내고 관계를 청산하는 편이 이롭겠다고 말할 참이었다.

 “그래, 모연아. 옆집에 사는데도 얼굴 보기 힘드네. 어찌 지내냐? 방이 좁아져서 불편하지?”

 “그럭저럭 지낼 만합니다. 형님, 그보다 오늘은 꼭 좀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형님이 움직일 때마다 그림자가 기괴한 모양으로 일렁였고 그때마다 나는 움찔거렸다. 형님은 두툼한 손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연신 훔쳤다. 날이 부쩍 더워진 탓이다. 언뜻 보기에 별로 이상한 모습은 아니겠으나 일순 위화감이 들었다. 한낮에야 더웠지만 이 밤에 땀이라니? 뛰어오지 않고서야 저토록 땀이 솟진 않을 텐데? 이슥한 밤거리를 뛰어다닐 만한 사정이 무에 있었을까? 이를테면 들개와 맞닥뜨렸다든가, 유령을 보았다든가, 괴한에게 쫓겼다든가.

 혹은 길목마다 늘어선 순사를 피해 달아났다든가.

 “왜? 무슨 고민 있냐?”

 나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고보를 졸업하고서 형님은 친척 어른의 소개로 미래사라는 곳에 취직해 십 년여째 다니고 있다. 형님은 내게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제대로 설명한 적이 없다. 그저 적당히 엉덩이를 비비고 있으면 달마다 월급이 나오는 편한 직장이라고만 말했었다. 소위 사라리맨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안색이 왜 이래? 어디 체한 거 아니야?”

 “아뇨. 괜찮습니다. 저기… 다름이 아니라 제가 이번 달 용돈이 조금 일찍 떨어졌거든요. 송구스럽지만….”

 어쩐지 나는 형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내가 거짓말을 해서? 아니다. 나는 형님이 내게 거짓말을 할까봐, 그리고 내가 그걸 알아차릴까봐 저어되었던 것이다.

 “뭐야, 그런 용무였군.”

 형님이 옷걸이에 걸린 웃옷을 뒤져 지갑을 꺼냈다.

 “하하. 나는 엉뚱한 짐작을 하고 있었지 뭐냐.”

 “무, 무슨 짐작이요?”

 “아니, 됐다. 그러고 보면 모연이 너도 한창 돈이 필요할 때지. 내가 미리 챙겼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자주는 아니라도 가끔 이렇게 너희 형수 몰래 보너스를 주마. 이건 우리끼리 비밀로 하고, 응.”

 “비밀로….”

 처음에는 선생이 우리 모두를 속였다고 생각했었다. 경성을 떠나 한동안 은신할 작정으로 형님을 찾아와 옛 우정을 들먹였다고, 석정명을 죽이기로 마음먹은 것은 이후의 계획이라고. 하지만 더욱 이치에 맞는 것은 외려 그 반대의 경우가 아닐지. 형님이 이번 사건에 깊숙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 선생을 부르기 전부터 어쩌면 형님의 살생부에 석정명의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는 것. 형님이 전문가인 선생을 고용해 암살을 사주했다는 것.

 나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형님 댁에서 나왔다. 바로 옆집인데도 담장을 더듬어 왔을 정도로 정신을 못 차렸다. 방에 돌아와 기진맥진하고 있자니 옆방에서 여자애의 웃음소리가 아스라이 들렸다. 볼 것도 없이 우리 꼬맹이겠지. 하여간 기운찬 녀석이로다. 나는 그 근심 없는 웃음에 긴장이 풀려 이내 혼곤한 잠에 빠져 들었다.

 이후 며칠간 추이를 관망했지만 선생이나 형님의 신변에는 위협될 만한 일이 없었다. 그래, 전부 내 억측이었던 게지. 선생은 몰라도 형님까지 의심한 건 확실히 조금 지나쳤어. 안도감이 드는 동시에 어쩐지 김이 새는 기분도 들었더랬다.

4.

한편 선생은 평소 옥희를 예뻐했고 옥희도 선생을 잘 따랐다. 그런데 어제는 둘 사이에 냉랭한 기류가 흐르는 것이었다. 낮에 소풍을 간답시고 부산을 떨 때만 해도 여느 때처럼 화목했는데 나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울며 돌아온 옥희는 제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랍니까?”

 누님도 영문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네가 한번 여쭤보려무나.”

 “옥희는 아무 소리 안 해요?”

 “돌아와서는 저래 울기만 한단다. 밖에서 나부대고 떼 부리다 야단이라도 맞았으려나.”

 선생의 방에 저녁상을 들이며 옥희 일을 넌지시 물으매 선생은 얼버무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선생에게선 미안한 기색보다는 차라리 숨기기 급급한 태도가 느껴졌다. 어쨌든 선생이 옥희를 잡도리한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자기 전에 주전자에 물을 채우러 나갔다가 대청 구석에 놓아둔 신문지에 눈길이 닿았다. 이미 읽고 놓아둔 석간신문이었는데 거기 그대로 있는 걸 보니 오늘은 꼬마 녀석이 영 토라진 모양이다. 요사이 옥희는 글을 배우는 재미에 빠져 신문 여백에 삐뚤빼뚤 글씨를 따라 쓰곤 하는데 어려운 한자는 쏙 빼놓고 만만한 한글과 가나만 골라 적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다. 딴엔 제법 열의가 있어 신문뿐 아니라 글자가 있는 것이라면 종류를 따지지 않고 들척거리니 내 교과서며 잡지며 수필집은 일찌감치 섭렵했으며 한번은 내 필기 공책을….

 수첩이다!

 어째서 미리 깨닫지 못했는지. 옥희도 선생의 책상에서 작고 아담한 그 수첩을 찾아낸 게다. 또한 습관대로 마구 뒤지다 거기서 무언가 본 게다. 정녕 그랬다면 낮에 있었던 일이야 빤하다. 대뜸 자기가 본 것을 떠들어 선생을 난처하게 만들었겠지. 그래서 선생이 함부로 발설하지 말라고 겁을 주었을까? 생각이 그에 미치자 머리털이 쭈뼛 섰다.

 아침이 되어 누님은 옥희를 데리고 예배하러 갔다. 나야 불량 교인인지라 어지간한 중대사를 앞두지 않고서는 예배를 빼먹기 일쑤지만 누님은 성실히 참석한다. 특히 매형이 세상을 뜬 뒤로는 더욱 기도에 열심이다.

 모녀가 현관을 나서자마자 선생도 외출을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다. 급한 용무가 있는지 서두르는 모습이 아무래도 수상쩍었다. 이윽고 선생의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그때는 이미 나도 선생을 뒤따라 나갈 준비를 마쳤기에 날렵하게 따라붙을 수 있었다. 무슨 배짱이 솟아났는지 그의 뒤를 밟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백주대낮의 미행은 가히 진땀나는 것이었다. 주일 오전의 거리는 한산한 편이고 띄엄띄엄 솟아 있는 전신주도 몸을 숨기는 데에는 썩 도움이 되지 않을 터여서 행여나 선생이 뒤쪽 풍경을 보고자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내 존재가 눈에 띄기 십상이었다. 선생이 무언가를 골몰하느라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 내게는 행운이었도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선생이 향한 곳은 언덕 위였다. 즉 예배당이 있는 곳 말이다.

 나는 대번에 선생의 의도를 간파했다. 겁을 주어 울리고도 선생은 아직 꼬맹이를 믿지 못한다. 예배당에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조급해졌겠지. 행여 사람들 앞에서 입방정을 떨지나 않을지 감시하러 온 것이다.

 교인들 사이에 숨어서 선생을 지켜본바 과연 선생은 찬미하고 기도하는 중에도 여자석을 부지런히 훑고 있었다. 마침내 옥희를 발견한 뒤로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쪽을 응시했다. 이윽고 옥희도 선생의 시선을 알아채니 겁에 질려 누님에게 매달려 응석을 부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누님은 조그만 입술로 기도문을 읊조렸을 뿐.

5.

선생은 예배가 끝나기 전에 슬쩍 자취를 감추었다. 나도 곧 예배당에서 빠져나왔다. 식구들 눈에 띄어서 곤란해지는 것은 선생뿐만이 아닌 것이다. 예 왔던 것을 알면 매주 나오라고 성화일 테지.

 나는 집에 돌아갈까 하다가 생각을 고쳐 태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 실은 무슨 영문인지 예배 도중부터 태화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내일 학교에서 만나겠지만 딱히 하루 일찍 본다고 손해 볼 것도 없지 않나.

 공교롭게도 태화네 집은 석정명의 집 부근이어서 거기 도착할 때까지 검문을 세 번이나 당했다. 순사가 내게 눈을 번득거릴 때마다 술술 실토할까봐 어찌나 겁이 나던지.

 “에엣, 최모연 아니니?”

 태화가 나를 불렀다. 태화도 외출에서 막 돌아온 참이라 우리는 집 앞에서 만났다. 내가 점잖게 손을 들어 인사하자 태화가 여동생을 먼저 들여보내고 총총 다가왔다. 태화와 두세 살 터울인 여동생은 희귀한 구경거리라도 만난 듯 내 쪽을 할금거리다가 언니의 성화를 못 이겨 현관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와, 여긴 어쩐 일이래?”

 “그게… 잠깐 할 말이 있어 왔다.”

 “나 보러 왔나?”

 “그렇지.”

 “응. 뭔데?”

 원래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어쩌다 같은 해에 태어나고 어쩌다 같은 동리에 살게 된 동급생 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합동 포크댄스 시간에 어쩌다 짝으로 맺어져 얼굴을 익히고 이름도 알게 되었다. 무릇 댄스란 것이 정해진 법도가 있으니 손도 물론 포갰겠지. 이제는 시내에서 마주쳐도 인사 몇 마디 주고받을 만큼은 가까워졌다.

 이렇듯 지금은 포크댄스라는 명분이 우리를 매어두고 있지만 언제든 다시 아무 사이도 아니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 합동 수업이 이달 말이면 종료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내달엔 방학을 하니 새로운 학기가 시작할 즈음엔 확실히 남남이 돼 있을 것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신중하게 물었다.

 “손태화, 너 혹시 좋아하는 사람 있나?”

 “어…?”

 태화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얀 얼굴이 대번에 새빨개졌다. 내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아 목이 뜨거워지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현관 안쪽에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애, 우리 꼬맹이를 닮았군.

 “글쎄, 있다고 해야 하나 없다고 해야 하나.”

 오래 뜸을 들이던 태화가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답을 주었다. 그런데 대답이 수상하다. 있다는 겐지 없다는 겐지. 수줍어하는 모습을 보면 희롱하려는 수작은 아닐진대 어찌 이따위 고약한 짓을 하는가. 그래도 이리 말하는 걸 보면 심중에 떠오르는 이름이 있긴 한가보다.

 “있나보군.”

 “그럼 너는?”

 태화가 반문했다.

 “모연이 너는 좋아하는 사람 있나?”

 다시 안쪽에서 간들바람처럼 새어나오는 킥킥 소리. 나는 어떻게 대답할지 궁리한 끝에 고개를 들어 태화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네가 좋다.”

 그리 말해버리고 나니 어쩐지 눈뿌리가 저릿했지만 불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일말의 개운함이 느껴졌다.

 “그뿐이야. 이만 간다.”

 하고 돌아설 제 나를 붙드는 손이 있겠지.

 “나도.”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말하는 태화는 평소보다 몸집이 아담해 보여서 내 품에 쏙 들어오리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고,

 “나도 좋아해.”

 라고 하지 않았을까!

 “뭐? 그치만 너 아까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응. 나도 너 좋아한다고.”

 “그러니까 아까는 분명히….”

 “으이그!”

 여기서 여세를 몰아 교제를 신청해도 나쁘지 않았겠다. 그러나 내가 태화를 좋아하고 태화가 나를 좋아하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태도가 일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제멋대로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포크댄스 수업 일정을 묻는 것으로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이러한 내 심중을 헤아렸는지 태화도 곧 평소처럼 나를 대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애매한 거리를 유지한 채로 마주 서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영부영 헤어졌다.

 돌아오는 길에도 가로막는 순사들이 더러 있었다. 그들은 불한당을 다루듯이 나를 담벼락에 몰아세웠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까처럼 떨리지는 않았다.

 우리 식구에게 선생의 위협이 현실로 다가온 작금의 상황에 충동적으로 여자애를 보러 간 것은 다분히 도피적인 행동이었다. 나란 인간은 다분히 그런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외려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한 꼴이 됐으니, 사람 사이의 문제에 있어서는 당사자와 직접 담판을 짓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을 떠올린 것이다. 그때 나는 약간 기고만장한 상태였고 모든 상황이 내게 유리한 쪽으로 돌아가리라는 근거 없는 낙관을 하고 있었더랬다.

6.

밤까지는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나중 생각하기로 선생을 뵙는 것이 꼭 밤이어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모름지기 비밀 대화는 어두울 때 해야 한다는 편견이 있었다. 그래서 기어이 밤까지 기다렸다.

 안방에서 옥희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뒤로 한 시간을 더 참았다가 장지문 너머로 음전히 선생을 불렀다.

 “저기, 선생님. 주무십니까?”

 “어어, 아직 깨어 있네만. 모연 군이 이 시간엔 웬일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실례가 안 된다면 잠시 뵐 수 있을까요? 제가 그리로 건너가겠습니다.”

 “뭐… 그렇게 하게.”

 선생은 곧게 앉아 나를 맞았다. 조금 긴장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간의 서먹한 관계를 생각하면 긴장하지 않는 것이 되레 부자연스러울 터였다. 나는 선생과 마주 앉았다. 어색한 침묵이 방안에 팽배했다.

 선생이 당장에 나를 해코지하지는 않겠지만 살인자와 독대하는 자리에서 그의 비밀을 폭로하는 것은 상당한 각오를 요하는 일이다. 자칫 심기를 건드렸다간, 즉 내가 일제에 협력한다고 착각이라도 했다간, 어떤 후환을 입을지 모른다.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자면,”

 그렇게 운을 뗀 것을 나는 곧바로 후회했다. 얼마간 분위기를 살핀 다음에 용건을 밝혀도 좋을걸 늘 성급히 굴어서 탈이다. 물론 이렇게 상대의 허를 찌르는 것도 가끔은 수완이 좋다. 이 경우에는 나까지 허를 찔린 게 흠이지만.

 “선생님의 정체를 알고 있습니다.”

 “정체?”

 “일전에 우연히 선생님의 수첩을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엔 지금은 과거가 된 미래의 어떤 날짜가 적혀 있었지요.”

 아무리 태연을 가장해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표정이 있다. 바로 지금처럼. 선생의 미소가 딱딱하게 굳었다.

 “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솔직히 저는 그날 선생님께서 우리 누님을 데리고 야반도주를 할 거라고 짐작했습니다. 수첩에 표시된 게 그 계획의 결행일이라고요. 때문에 두 분이 그러는 걸 막아야 할지 방관해야 할지 끝없이 고민했어요. 네, 부끄럽게도 저는 선생님이 우리 누님에게 연심을 품고 있다고 착각했던 겁니다.”

 선생은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내가 계속 말했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었지요. 그날은 석정명이 죽은 날이었습니다. 그것을 선생님께서는 미리 알고 있었고요. 왜냐하면 그 자를 죽인 게 바로 선생님이기 때문입니다. 즉 선생님이 바로 각시탈이지요.”

 “각시탈? 아냐, 모연 군. 오해일세 그건….”

 “제게 해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것을 지탄하려는 게 아니니까요. 민족을 위해 분골쇄신하시는 선생님께 큰절이라도 올려야 마땅하지요. 단지 저는 선생님께서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체포되는 사태가 벌어지면 제 가족에게까지 불똥이 튀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번 일에 저희 형님도 일조한 것을 알고부터는 하루하루가 불안의 연속입니다.”

 선생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모연 군 생각이 그러하다면 그냥 입을 다물고 있으면 될 일 아닌가? 나는 각시탈인지 뭔지 하는 게 결코 아니네만 설령 그렇다 해도 내 정체가 까발려지는 게 그리 두렵다면 자네가 함구하면 되지 않느냔 말일세.”

 “그걸로는 부족합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당장만 해도 선생님께선 옥희가 감당이 안 되시잖습니까.”

 “옥희….”

 꼬맹이 이야기를 하니 선생의 경직된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다.

 “옥희는 정말이지 왈패스럽잖구…. 하지만 그게 또 귀여웁지. 더구나 옥희는 나를 잘 따르니 문제없네.”

 “그런 소소한 것들이 나중에 다 후환이 됩니다그려. 그러지 마시고, 제 딴에 궁리를 조금 해보았으니 들어보십시오. 선생님께서는 다른 동리로 피신하시는 것이 아무래도 가장 좋은 해결책일 듯싶어요. 순사들이 활개를 치는 것은 우리 동리로 한정돼 있고 선생께서 죽여 마땅한 놈들은 다른 동리에도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그러니 이곳을 벗어나시는 게 어떠하실지 한번 숙고하시길 간청합니다.”

 선생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는 이것이 부당한 처사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성가신 일에 휘말리기 싫다고 애국지사를 내치는 셈이니 그로서는 서운한 마음이 들 법도 하다. 결국 이런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걸었나 하고 회의에 시달릴지도 모른다. 그의 눈빛이 서글퍼 보였다.

 그렇다고 내 제안을 철회할 생각은 없다. 애국도 좋지만 식구들 안전이 먼저다.

 마침내 선생이 입을 열었다.

 “그래, 모연 군 뜻대로 해주지.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떠나겠네.”

 “어어, 정말입니까?”

 “사실은 그렇잖아도 떠나려고 했었어. 학교에도 이미 얘기해 두었다네.”

 “그… 그러셨군요. 그런 것도 모르고 제가 주제넘게….”

 “부디 이 일이 새어나가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건 염려 마십시오.”

 걱정거리는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갑자기 모든 일이 잘 풀릴 때는 그러나 한 번쯤 의심해 봐야 한다. 여전히 안개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지 않은지. 갑자기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격랑이 일어 모든 것을 깡그리 집어삼키지 않을지.

7.

얼마 후 나는 끔찍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집안이 온통 야단이 나 있었다. 어머니가 마당을 오락가락 거닐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고 누님은 한쪽 구석에서 실성한 양 흐느꼈다.

 “이게 다 무슨 소란이야?”

 나는 누님 곁에 옥희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옥희는? 옥희 어디 있어요?”

 “고것이 유치원 파한 지 한참이 됐는데도 돌아오지 않는다야.”

 “다른 동무들은 벌써들 집에 돌아간 모양인데 우리 옥희만 쏙 사라진 게 아무래도 걱정되는구나. 원 중간에 마땅히 샐 데도 없는데 어델 갔는고….”

 내가 물었다.

 “선생님은?”

 “선생님은 아직 안 오셨다. 야, 모연이 너는 뒷산 쪽에를 좀 돌아댕겨 볼래? 어데 잔디밭에서 까무룩 잠이라도 들었으면 다행이게.”

 누님의 말에 나는 얼른 가방만 던져두고 현관을 다시 나섰다.

 옥희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오후에 집으로 데려오는 것은 내 담당이었다. 그랬던 것이 어느 날엔가 저 혼자서도 넉넉히 다닐 수 있다고 우기고부터는, 며칠 지켜보니 또 말처럼 능히 해내기에, 나는 나대로 성가신 일을 덜게 되었다고 닁큼 손을 놔 버렸더랬다. 누님이나 어머니가 그래도 아직은 옆에서 지켜봤으면 하는 눈치인 것을 조금도 심려할 필요 없다고 일축한 게 나였다.

 하지만 적어도 선생이 옥희를 주시하는 것을 안 뒤로는 눈을 떼지 말았어야 했다. 조용히 사라져주겠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내가 순진했다. 따지고 보면 옥희나 내가 언제든 입을 경솔히 놀리면 자신의 정체가 만천하에 까발려지는 것이다. 결국 선생은 갈 때 가더라도 옥희와 나를 처리해두는 편이 이롭겠다고 판단했을 터, 그런 점을 미리 헤아렸어야 했는데.

 뒷산에 오를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 옥희는 선생과 같이 있다. 선한 미소로 꾀어 인적 드문 곳으로 데려갔겠지. 그게 한 시간 전이니 지금쯤 벌써…. 새실새실 웃는 옥희 얼굴이 떠올랐다. 해맑은 목소리도 어른거렸다. 내 탓이다. 내가 방심한 탓이다.

 나는 언덕 아래 시내 쪽으로 내달렸다. 역전에 파출소가 있다. 거기서 모조리 까발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역전까지 갈 것도 없이 순사를 발견했다. 가대기꾼 둘이 승강이질하는 것을 순사 세 명이서 뜯어말리고 있었다. 나는 구경꾼 사이를 비집으며 순사에게 나아갔다.

 “저기요, 순사 나리.”

 내가 부르자 순사 하나가 나를 힐끔 쳐다보았으나 이내 무시하고 내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하여 나는 조금 더 힘을 주어 그를 불렀다.

 “순사 나리!”

 “무어냐?”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거, 녀석.”

 그는 성가시다는 투로 말했지만 이어지는 말에도 그런 태도를 고수할 수는 없었다.

 “제가요, 석정명을 죽인 사람을 압니다.”

 비단 순사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것들이 삽시에 멈추었다. 주변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멱씨름하던 가대기꾼들마저 슬며시 손을 내려놓고 나를 쳐다보았다.

 우락부락한 순사가 험궂게 말했다.

 “자세히 말해 봐라. 허튼 소리나 지껄일 것 같으면 너도 감방에 처넣을 줄 알고.”

 나는 잠시 숨을 가눈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 집에 하숙하는 선생이 석정명을 죽였다는 것과 내가 그 사실을 알았다는 것, 역시 정체를 눈치 챈 우리 조카를 선생이 죽이려고 납치했다는 것, 다음 차례는 나라는 것을.

 그렇게 내가 아는 것들을 죄 털어놓으니 불현듯 가슴 속에서 서러운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눈을 부릅뜨고 입술을 깨물었건만 별무소용이었다. 결국 나는 저항하기를 멈추고 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구경꾼들이 한 발짝 물러서며 수군댔다.

 순사가 말했다.

 “그러니까 남준의라는 자가 보통학교 교사인데 사실은 각시탈이라는 게지? 석정명을 죽인 뒤 지금은 너희 조카딸을 납치했고?”

 “네에….”

 “알겠다. 그만 울고 우선 너희 집으로 가 보자. 단서가 될 만한 게 있을지 모르니.”

 우리 뒤로 구경꾼의 행렬이 길게 늘어졌다. 순사들은 그들을 해산시키지 않았다. 상대가 각시탈인 만큼 여차하면 그들 손을 빌려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집에 도착해서는 아주 가관이었다. 여전히 어머니는 마당을 오락가락 거닐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고 누님도 한쪽 구석에서 실성한 양 흐느꼈다.

 그리고 옥희가 누님 품에 안기어 훌쩍이고 있었다.

 “어?”

 “모연이 왔니? 옥희 찾았다.”

 내가 현관에서 망연자실 얼어붙자 누군가 나를 떠밀어 마당으로 들어섰다. 순사들도 나를 따라 우리 집에 들어왔다.

 “뉘쇼들?”

 어머니가 물었다.

 “여기 남준의라는 자가 살지요?”

 키가 큰 순사가 물었다.

 “왜요?”

 누님이 물었다.

 “저 아이가 납치되었다는 조카딸이냐?”

 키가 작은 순사가 물었다.

 “오, 옥희가 어떻게 여기에…?”

 내가 물었다.

 이렇듯 저마다 질문만 해대면 아무도 답을 듣지 못하니 누군가 솔선하여 정돈해야겠지. 나는 순사들을 대동한 연유를 간략히 설명했다. 가만히 옥희 머리를 쓰다듬던 누님이 기운 빠지는 목소리로 진력냈다.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선생님께서 옥희를 납치하다니? 옥희는 여태껏 벽장 속에 숨어있었단다.”

 “벽장엔 왜?”

 “요 망할 것이 우릴 골려주려고 그랬다잖니.”

 나는 머릿속으로 이 소동을 정리해보려 했으나 그럴수록 뒤죽박죽이 되었다. 정녕 선생은 이 사건과 무관한 것인지, 그렇다면 옥희는 왜 하필 지금 시점에 오해 사기 좋은 일을 벌였는지, 저 꼬맹이가 누구 하나 말라죽는 꼴을 볼 셈이 아니라면 대체 왜 벽장 속으로 기어들어가서 곤죽이 되도록 숨어 있었던 것인지 등등.

 그러나 당장은 예까지 와서 허탕을 치게 된 순사들을 어떻게 달래서 돌려보낼지가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나는 허위로 신고했다가 감옥에 갇힌 사람의 이름을 열 개도 넘게 댈 수 있다.

 “저어, 나리….”

 나는 개중에 인상을 덜 찌푸린 순사에게 다가가 나직이 토로했다.

 “조카 걱정에 제가 그만 섣불리 일을 키웠나본데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그가 특색 없는 어조로 말했다.

 “그래도 완전히 헛소리는 아니었지?”

 “네?”

 “석정명이 죽을 날짜를 그 선생이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 말이다. 수첩에서 봤다며.”

 분명 그런 말을 했었지.

 “제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아무렴. 그리고 아까 너는 거짓말할 겨를 따위 없었어. 그렇지?”

 그가 고개를 돌려 흡사 먹잇감을 탐색하는 살쾡이처럼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 살폈다.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전신의 혈관을 흐르는 피가 운행을 멈춘다면 그 느낌이 이와 같을까.

 “그게 말이지요, 사실은….”

 나는 무작정 내뱉어버리는 습관을 고쳐야 할 것이다. 마치 중대한 비밀을 폭로할 듯이 말을 멈추고는 이 대목에서 수습할 방도가 있을지 한참 머리를 굴려보았으나 어떤 대답도 내 안위를 보장할 수 없다는 처량한 사실을 깨달았을 따름이다.

 때마침 옥희 목소리가 들렸다.

 “아, 선생님이다.”

 그와 함께 호리호리한 그림자가 마당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선생이 돌아온 것이다.

 “아니, 됐다. 본인에게 직접 묻는 편이 빠르겠지.”

 나와 이야기하던 순사가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남준의 선생 되십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이십니까?”

 선생이 어리둥절한 듯 사람들을 둘러보며 설명을 구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나는 차마 선생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 얼른 고개를 수그렸다.

 “지난달에 있었던 살인사건에 관해 몇 가지 확인할 게 있어서요. 서까지 저희와 동행해 주시지요.”

 “살인사건이라면?”

 “석정명 씨가 피살된 걸 모르시진 않죠?”

 “아유, 우리 애가 헛소리를 좀 한 걸 갖구…. 괜한 수고들 하지 말고 그냥 돌아가시우.”

 보다 못한 어머니가 손사래를 치며 나섰다.

 이제 선생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한 모양으로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라면 이쯤에서 각시탈이 제자리에서 도약하여 화려한 공중제비로써 지붕 너머로 사라지고 그저 호탕한 웃음소리만이 울려 퍼져 잠시나마 이곳에 쾌걸이 머물렀음을 증명할 차례였다. 과연 순사들도 저들끼리 눈빛을 교환하여 장차 일어날 일에 만전을 기했다.

 선생은 그러나 금세 평정을 되찾고는 침착하게 말했다.

 “어르신, 금방 다녀올 테니 들어가서 쉬고 계십시오.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하며 어머니에게 억지웃음을 지어 보인 뒤 순순히 순사들을 따라 나서지 않았을까.

 순사들도 얼떨떨한 표정이 되어 주춤거리며 대문을 나갔다. 다시 긴 행렬이 파출소로 출발했다.

 잠잠해진 뒤에 누님과 어머니가 나를 세워놓고 잔소리를 해댔으나 나는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8.

어제와 그제는 학교를 쉬었다. 곧 권총을 찬 순사들이 집에 들이닥쳐 모두를 연행해갈 것이므로 학업이란 게 퍽 부질없어졌거니와 그 전까지는 식구들과 남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을 아는 것은 나뿐이고 식구들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를 보냈으니 결국 나는 식구들과 오붓이 보낸 시간보다 홀로 불안과 초조에 시달리며 보낸 시간이 더 많게 되었다.

 나는 낮 동안에는 신문을 읽거나 대청에 드러누워 구름의 형태가 꾸물거리며 변하는 것을 관찰했다. 그러다 대문의 돌쩌귀가 찌꺽찌꺽 마찰음을 내면 얼른 문간으로 고개를 돌리곤 했다. 식구들 외에 간혹 달걀 장수 노파나 칼갈이 사내가 기웃거리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개는 그저 바람 때문에 난 소리였다. 제복 차림의 순사들이 등장할 차례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청승 떨지 말고 학교에나 갈걸 그랬다는 생각은 이틀째인 토요일 저녁에야 비로소 들었다. 그것은 아마 현호와 태화가 각각 나를 만나러 왔기 때문일 것이다.

 고작 이틀 빠졌을 뿐인데도 현호는 모르는 소식을 잔뜩 가져왔다. 물론 익히 아는 소식도 가져왔겠지.

 “예서 지내던 선생이 잡혀갔다며?”

 “응. 그렇게 됐다.”

 “진짜 각시탈 맞데?”

 “글쎄, 아직은 조사 중이니까.”

 “그래? 범인 잡았다는 얘기가 들리는 거 보면 조사도 이제 다 끝났나보던데.”

 “그렇군.”

 달리 무얼 기대한 것도 아니었건만 왜인지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말이야.”

 현호가 말했다.

 “제보한 게 너라며?”

 “하려고 한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하여튼 그것 때문에 애들 사이에 뒷말이 조금 나오더구나.”

 “뒷말이라니?”

 이 와중에도 나는 내가 시내 한복판에서 울었다는 소문이 퍼졌을까봐 전전긍긍했다. 다행히 그런 건 아니었다.

 “그… 간단히 말하면 포상금이 오를 때까지 기다렸다 신고한 게 아닌가 하는….”

 포상? 누구는 지금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에서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속 편한 소리들이나 주고받고 있었군. 나는 귀중한 시간을 할애하여 호현에게 내가 처한 상황을 설명했다. 호현은 눈을 깜박이고 혀를 날름거리며 내가 하는 말에 집중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녀석은 더는 내게 용무가 없는지-애초에 이 때문에 찾아온 것인지-오래지 않아 돌아갔다. 보나마나 또 입이 근질거리는 게다. 아무리 그래도 바로잡아진 소식은 월요일에나 퍼질 터, 그때쯤이면 나는 이미….

 그런데 귀가 얇아서인지는 몰라도 어째 낙관적인 전망이 자꾸만 고개를 드는 것이었다. 아무리 독립투사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원만히 생활했다지만 그것은 정체를 모르던 때의 사정이니 참작할 여지가 충분하고 무엇보다 결정적인 제보를 한 공로를 무시할 수 없으니 처벌은커녕 포상을 기대해도 좋지 않은가 하는 낙관 말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선생을 데려온 게 형님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위의 희망은 없었던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과연 선생이 그런 것까지 자백할까? 자신에게 아무 도움도 안 되는데 굳이 그런 무도한 짓을 할까?

 하지만 나에 대한 원한이 깊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 약조를 배반하고 적들에게 팔아넘긴 대가를 결코 가벼이 여기면 안 될 것이다.

 이처럼 천국과 지옥의 극단을 몇 번씩 오가는 중에도 시간은 흘러 어느새 구름이 붉게 물들고 건넛산엔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 무렵에 태화가 찾아왔다.

 “포크댄스 시간에 나만 짝이 없었어.”

 라면서도 힐끔힐끔 내 기분을 살피는 걸 보면 태화도 나에 대한 소문을 들은 모양이었다.

 나로 말하자면 포크댄스 수업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지금 나에게 포크댄스란 심히 먼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다. 때문에 태화를 보면서도 전혀 그런 쪽으로는 떠올리지 못하고 다만 나를 걱정하는 마음에 만나러 왔을 줄로만 짐작한 것이다.

 “미… 미안.”

 “뭐야아.”

 태화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래도 내주엔 나올 거지?”

 “내주?”

 “내주가 우리 마지막 수업이잖아.”

 석 달 간의 연습을 마치면 마지막 시간에는 공연을 빙자한 평가가 치러진다. 평가 점수는 성적에 반영된다고 하니 마냥 즐거운 합동수업만은 아니겠다.

 하지만 내 기구한 운명이 어디로 흘러갈지, 내주에 우리가 함께 춤을 출 수 있을지 어떨지 섣불리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다. 당장만 해도 내 시선은 자꾸만 문간 쪽을 짚고 있지 않은가. 금방이라도 구둣발이 쳐들어올 것만 같다.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약간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어, 그게….”

 “왜, 못 나와?”

 “저기, 손태화.”

 “으응?”

 “어쩌면 못 나갈지도 몰라. 그러니까 태화 너는… 지금이라도 다른 짝을 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내가 등교를 거르는 것은 동시에 태화에게도 손해를 입히는 것이렷다. 그러니 폐를 끼치지 않으려면 이러는 수밖에 없다. 머리로는 알면서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어쨌든 차분히 할 말을 했다.

 “최모연….”

 태화가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쩜 그래?”

 “나, 나는….”

 “못 나올지도 모른다는 얘기는 일이 잘 풀리면 학교에 나올 수도 있다는 얘기잖아. 그렇지?”

 “그야 그렇지만….”

 “그럼 기다리라고 말해야지!”

 “아니, 그래도….”

 “그래, 이럴 게 아니라 우리끼리 포크댄스 연습이나 하자. 마당도 넓은데 잘 됐네 뭐.”

 태화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태화는 콧노래를 흥흥거리며 가곡을 불렀고 나는 반강제로 몸을 움직였다. 부엌에서 석찬을 준비하던 누님도 방에서 인형놀이를 하던 옥희도 어느새 나와서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9.

남준의 선생은 집을 나선 지 사흘째인 일요일 정오 무렵에 돌아왔다. 우리 식구는 빠짐없이 예배에 참석해 선생이 무사히 풀려나기를 기도했는데 그러는 사이에 텅 빈 집에 돌아온 것이었다.

 선생의 귀가를 가장 기뻐한 사람은 우리 꼬맹이였다. 옥희는 꺅꺅거리고 빙글빙글 춤을 추다가 맨발로 달려가 끌어안고 뺨을 부비며 자기 느끼는 바를 고스란히 표출했다. 하지만 나 또한 그에 못지않게 선생을 반기지 않았을지.

 나는 선생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혀를 물고 자결해주기를 바랐다. 밀고한 것으로도 모자라 너무 큰 기대를 하는군. 내게 양심이란 것이 남았다면 그렇게 조소했겠지.

 그런데 선생은 무슨 농간을 부렸는지 무사히 풀려난 것이다. 정말로 기도가 통한 것인가?

 “왜 이리 늦어요?”

 옥희가 선생의 볼을 꼬집으며 물었다.

 “으응, 얘기가 좀 길어졌지. 옥희는 선생님 보고 싶었누?”

 “아니!”

 하고 대답하더니 다시 까르르 자지러진다.

 “자세히 좀 말해보게. 그래, 뭐라데?”

 이번엔 어머니가 물었다.

 “어데 자그마한 꼬투리라도 잡아보려고 시시콜콜 묻길래 저야 물론 떳떳한지라 꾸밈없이 대답했습니다. 그러다 한번은 무영 군과 어려서부터 막역하다고 말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제야 태도가 확연히 공손해지더군요. 이렇게 또 무영 군 덕을 보았습니다그려.”

 형님 핑계를 댄 건 물론 거짓일 테지만 어쨌거나 어머니는 기분이 좋아 홀홀거리신다. 듣기 좋은 소리만 골라서 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혹시 파출소에서도 간교한 언술로 풀려난 게 아닐까?

 “그러고 보니 아직 식사 전이시지요?”

 뜬금없지만 내가 물었다. 삼백육십 가지 궁금한 것을 놔두고 그런 걸 우선하여 질문한 건 누님이 귀엣말로 시켰기 때문이다.

 선생이 그렇다고 하니 나는 또다시 준비된 대사를 읊어야겠지.

 “잘됐군. 누님이 국수나 넉넉히 비벼주구려. 달걀도 삶고요.”

 그렇게 우리는 한 자리에 모여앉아 식사를 했다. 선생이 부재한 동안 있었던 일들을 쉼 없이 떠벌이느라 옥희 얼굴에는 국수 가락이 덕지덕지 붙었다. 우리 식구들은 모처럼 환하게 웃었다.

 상을 물리고 선생과 내가 단둘이 남으니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선생이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런데 선생이 잠깐 머뭇거리더니 웃음기 없는 얼굴로 내게 말하는 것이었다.

 “밤에 내 방으로 건너오게. 긴히 할 말이 있네.”

 이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선생의 무사한 귀가가 의미하는 밝은 측면에 취해 어두운 면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고의였건 아니건 나는 선생을 밀고했다. 선생이 돌아왔다는 것은 이제 나는 죽은 목숨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10.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살아남았다.

 이레 전의 밤처럼 선생은 단정히 앉아 나를 맞았다. 역시 조금 상기된 표정이었다. 나는 선생 앞에 다짜고짜 무릎을 꿇었다.

 “제가 오해하는 바람에 선생님께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어떠한 처분이든 달게 받을 각오가 돼있습니다.”

 “얘기가 길어질 테니 편히 앉게.”

 “어엇, 네….”

 내가 주춤거리며 자세를 고치는 동안 선생이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출소에서 자세히 들었네. 덕분에 몹시 난처하게 됐어.”

 “거듭 송구할 뿐입니다.”

 지난 사흘 간 밤낮으로 나는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했다. 공교롭게도 예배당에서 내가 기도드린 내용이-다른 식구들과는 사뭇 달리-내 남은 수명을 쪼개어 우리 식구들에게 나눠줄 수 있다면 운운하는 것이었으므로 선생과의 약속시간이 다가올 즈음에는 내 목숨에 대해 어느 정도 체념한 상태였다. 선생이 내게 죽기를 요구한다면 군소리 보태지 않고 따르마고 스스로 다짐했더랬다. 그렇기에 이어지는 상황을 수월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 모른다.

 “모연 군은 우리 조선이 일제로부터 독립할 거라고 생각하나?”

 “네?”

 뜻밖의 질문에 나는 허둥댔지만 이내 내 생각을 말했다.

 “독립은 필연이지요.”

 “그렇담 다시 묻지. 조선이 독립된다면 모연 군은 어느 정도나 독립에 기여하리라고 보나?”

 맙소사. 선생은 나를 비난하는 것이었다. 독립운동을 돕기는커녕 자신을 일제에 팔아넘겼다는, 에둘렀지만 확실한 비난.

 “대답해보게.”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미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다. 선생은 내 대답이 흡족하지 않았는지 화제를 바꾸었다.

 “석정명을 죽인 범인이 잡혔다네.”

 선생이 계속 말했다.

 “내가 제보했지. 범인은 석도일이라는 자로 석정명의 동생이야. 목격자가 있다는데도 완강히 버티더니 결국 자백했다는군. 진범임이 확인되어서 내가 풀려난 게야.”

 “하지만….”

 “아직도 내 결백을 의심하는가?”

 “그렇담 제가 본 날짜는 그럼 다 무어야요?”

 “날짜? 그래, 수첩 얘기로군. 그게 오해의 시작이었지.”

 선생이 말했다.

 “모연 군, 내 이제부터 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를 하려 하네. 이대로 떠났다간 내 이름이 다시금 세간에 오르내릴 위험이 있어 차라리 모연 군에게 진실을 밝히는 편이 덜 위험할 거라고 판단해서야. 그러니 자네만 알고 있어야 해. 만약 이 이야기가 어디로든 새어나가면 군은 죽음을 면치 못할 걸세. 알아들었나?”

 내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말인즉 당장은 나를 살려주겠다는 것이니 거절할 이유가 없겠다.

 “비밀을 지키리라 믿네.”

 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알다시피 그날 나는 석정명이 살해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네. 그 자가 죽는 것을 지켜보는 게 내 임무였거든.”

 “임무요?”

 “흠, 앞으로 백 년쯤 지나면 세상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 짐작이 되는가? 백 층짜리 건물이 세워지고 사람의 일손을 덜어주는 기계가 만들어진다면 어떨까? 혹은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특정 시점으로 이동시키는 기술이 개발되었다면 믿지 않으려나?”

 나는 하하, 하고 실없이 웃다가 선생의 표정을 보고 그가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농담이 아니라면 정신이 이상해진 게지. 역시 끌려가서 혹독히 고문을 당했나보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겠지. 유감이네만 내가 말하는 것은 전부 사실이야. 나는 미래에서 왔다네. 정확히 언제라고 말하지 않는 것을 이해하게.”

 “이해합니다.”

 이 와중에 이해하지 못할 일이란 무에 있겠는가.

 “내가 가진 정보란 석정명이 살해된 날짜뿐이어서 그날은 온종일 그 자를 따라다니며 감시해야 했네. 몇 주일 전부터 그를 따라다니며 행동반경을 파악해 두었지. 여기저기 잘도 기웃거리더만 기껏 그래놓고 저택에서 죽을까봐 어찌나 마음을 졸였는지 몰라. 어쨌든 죽는 순간에는 놓치지 않고 제대로 보았으니 임무를 절반은 완수한 셈이네. 이제 남은 일이라고는 탈 없이 돌아가는 일뿐이지.”

 “저, 선생님. 누가 석정명을 죽였는지가 미래에서 그렇게 중요한 사안입니까?”

 “옳지, 그걸 설명해야겠군. 내가 살던 시대에서는 친일했던 자들의 재산을 다시 거두느라 한창이거든. 그 과정에 친일파 후손들과 소송도 하고 있고. 이크, 이런 식으로 알려주고 싶진 않았네. 하지만 별 수 없지. 일제가 패망하고 조선이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되는 건 기정사실이야.”

 “정말입니까? 언제요?”

 “그건 말해줄 수 없어. 정확한 시기는 말해줄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아, 알겠습니다.”

 “어쨌든 재산 환수 작업 중에 석정명이라는 인물에 대해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었어. 그 자는 오랫동안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어 있었는데 사실은 훈장을 받아야 마땅한 영웅이라는 게 후손들의 주장이었네. 친일파 후손들이 재산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어기대는 게 드문 일은 아니네만 아예 전제부터 부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어.”

 선생에 따르면 기록에 남아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석정명이 친일을 통해 각종 이권을 득하여 재산을 불렸다는 것. 동생인 석도일은 투전에 중독되어 무시로 형을 찾아가 대신 노름빚 갚아주기를 요구했다는 것. 그러다 모년 모월 모일에 형제간 다툼이 일어 석도일이 석정명을 죽였다는 것.

 그런데 석정명의 후손들은 그 사건의 내막이 알려진 내용과는 정반대라고 주장했다.

 석정명이 친일파 행세를 한 것은 독립군에 군자금을 조달할 재산을 모으기 위함이었고, 석도일이 구제불능의 파락호 행세를 한 것은 자금을 건네기 위한 방편이 노름빚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후손들은 석도일이 단지 누명을 썼을 뿐이라고 확신했다. 그가 감옥에 갇힌 지 보름 만에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 그 증거라고 했다. 그들 형제가 독립군에 가담했음을 알고 조용히 처단되었다는 것이었다.

 “석도일이 보름 후에 죽는다고요?”

 “어…. 그건 잊어주게. 말이 헛 나왔군.”

 선생은 난처한 듯 콧등을 긁었다.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하며 공방을 벌였네만 근거가 부족하기는 피차일반이어서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내가 파견된 것이라네. 그런데 석도일이 자기 형을 죽였다는 게 확인되었으니 군자금 이야기도 허위일 공산이 크지. 돌아가면 내가 작성한 보고서를 토대로 석정명의 재산은 국가에 귀속될 거야. 하지만 내 스스로 경찰에 제보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네. 이 일로 어떤 여파가 있을지 생각하면 두렵군.”

 “선생님.”

 내가 물었다.

 “시대를 거슬러 옮겨다닐 수 있다면 여기서 복잡하게 이러실 것 없이 소위 을사년의 오적이라는 자들을 미리 처단하면 될 일 아닙니까? 아예 나라를 빼앗기기 전에 손을 쓰시면 되잖아요?”

 “그랬다간 미래가 바뀌잖나.”

 “아무렴요. 좋게 바뀌겠지요.”

 “그걸 장담할 수 있나? 또 다른 역적이 등장해 나라를 팔아치우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느냔 말일세. 어쩌면 백 년이 지나도 해방되지 못할 가능성이 정녕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설마 여기서 더 나빠지기야 하겠습니까?”

 “상황은 얼마든지 끔찍해질 수 있어. 백번 양보해 자네 말대로 조선이 부국강병을 이루어 태평해진다고 하세. 혼사가 오가기도 전에 자네 아버지가 불현듯 멀리 유학을 떠난다면 어떨까? 자네가 태어날 수나 있을까? 요는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모른다는 거야.”

 선생이 계속 말했다.

 “때문에 혹시 모를 재앙을 방지하고자 규약이 제정되었어. 세계만방에는 나처럼 과거를 탐색하는 자들이 있다네. 우리끼리는 서로 유령이라고 부르지. 유령들은 단지 관찰하는 것만 허용되네. 역사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야. 원래 나타났어야 할 무명의 제보자를 대신해 살인사건의 범인을 제보한 행동이 훗날에는 말썽을 일으킬 수도 있으니. 그러니 돌아가면 나는 징계를 면키 어려울 게야.”

 “거듭 송구합니다.”

 내가 주문처럼 되뇌었다.

 “너무 마음 쓸 것 없어. 아마 몇 개월 정직을 당할 테고 심해봤자 감봉일 게야. 여기처럼 감옥에 갇혀 고초를 겪는 일은 없다네.”

 “그런가요….”

 “하지만 입단속은 철저히 해주게. 내 존재가 이목을 끄는 일이 없어야 해. 벌써 몇 번째 말하는지 모르겠군.”

 그 밤 이후 선생은 다시 평소처럼 느릿느릿 무사태평한 인간을 연기하다가 기일에 맞추어 원래의 시대로 돌아갔다. 선생은 원체 조용한 사람이었으나 그가 방을 비우고 떠난 뒤로 집안이 어쩐지 더욱 고요해졌다.

 그 뒤로 선생 소식은 들은 바 없다.

11.

나는 태화를 보았고 태화도 나를 보았다. 우리는 키가 엇비슷하므로 시선을 교환하기 위해 고개를 들거나 숙일 필요가 없다. 반 보 간격으로 마주 선 채 우리는 손을 펴고 서로의 손바닥을 맞대었다. 문득 태화가 코를 찡긋거렸는데 그것이 내게는 어떠한 신호처럼 느껴졌다. 하여 나는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도 일단은 나도 따라서 찡긋거려 보았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태화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때 음악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같은 방향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면서 가락에 맞추어 꽁지발로 제자리에서 혼자 돌거나 짝꿍과 팔을 엮고 돌았다. 그런가 하면 두 학급의 학생들이 만들어낸 원의 부속으로서 원의 크기를 늘리거나 줄이거나 하면서 분주히 돌기도 했다. 춤이라는 것이 돌기만 하는 것은 아니고 미리 정해진 바에 따라 발을 들거나 땅에 딛거나 힘차게 구르거나 우뚝 서는 역할이 있겠고 손도 마찬가지로 손뼉을 치거나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찌르거나 때때로 내 허리를 짚거나 남의 허리를 감쌌겠지.

 하여간 태화와 나는 숙지한 것들을 제때에 착착 구사했고 마침내 음악이 멎은 운동장에 흙먼지가 피어오를 즈음엔 선선한 아침인데도 제법 땀이 솟았다.

 “한 번도 안 틀렸어!”

 태화가 폴짝거릴 제 내 손을 꼭 쥐고 놔주지 않는 바람에 나도 덩달아 들썩거렸다.

 “지금까지 한 중에 으뜸으로 잘했다, 그치?”

 “그래.”

 “사실은 내 어젯밤부터 긴장이 돼서 잠도 꽤 설쳤는데 모연이 너는 담대하게 잘하더라.”

 “꼭 그런 건 아니고 나도 중간에 몇 군데 틀리긴 했다.”

 “그러니? 나는 정신이 없어서 어떻게 끝났는지도 몰라. 그래도 우리 잘했지, 응?”

 “그래.”

 태화가 다시금 폴짝거렸고 나도 또한 들썩거렸다.

 둘러보니 운동장 여기저기서 우리처럼 감격해 마지않는 학우들이 눈에 띄었다. 선생님도 다른 때 같으면 칼같이 집합시키던 분인데 합동수업 마지막 시간인 만큼 우리에게 자유 시간을 주려는 겐지 모르는 척 소도구를 정리하고 있었다.

 “저, 최모연.”

 태화가 내 곁으로 다가붙었다. 우리는 여전히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럼 이제 우리….”

 태화의 도톰한 뺨이 발그스름해진 것을 보며 나는 태화를 힘껏 끌어안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어쩐지 장난기가 발동하는 것이었다.

 “음, 앞으로 수업 때 만날 일은 없겠군. 교정에서 마주치면 또 모를까.”

 나는 먼산바라기처럼 엉뚱한 데를 향해 서서 짐짓 차가운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런 뒤에 슬쩍 곁눈질하니 태화는 퍽 당황한 듯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내가 한 마디 더 보탰다.

 “그런데 이제 곧 방학이기도 하구.”

 “에엣….”

 태화가 숫제 울상이 되었으매 골리는 건 이쯤에서 멈춰야겠지. 나는 다급히 태화의 손을 잡아끌었고 우리는 다시 정면으로 마주섰다.

 “그러니까 그 전에 손태화랑 폭죽놀이라도 해야겠다.”

 “어… 응?”

 “싫음 말구.”

 “시, 싫긴 누가 싫다구.”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자, 이제 모여라! 각급 인원들은 지금 즉시 이열 종대로 서도록!”

 때마침 선생님이 호령했고 태화와 나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어색하고 간질간질했던 합동 포크댄스 수업은 이렇듯 순조로이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정녕코 끝났다고 할 수 있을까? 여전히 현악기의 음률이 머릿속에 흐르고 짝꿍의 온기는 내 손을 감싸고 있는데, 어쩌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원의 부속으로서 우리의 춤은 오래도록 계속되는 게 아닐까? 지금도 다들 춤을 추고 있는 게 아닐까?

 그때 나는 어쩐지 형님의 얼굴을 떠올렸다.

12.

시간 순서가 약간 뒤죽박죽인데, 선생은 마지막 포크댄스 수업에 앞서 우리를 떠났다. 그가 떠난 주말에 나는 형님에게 도움을 청했다. 방을 다시 합쳐야 하는데 손이 모자란다는 명목이었으나 사실은 형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부른 것이었다. 장지문을 떼어내니 딱히 더 할 일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선생이 머물던 자리에 마주앉아 냉차를 마셨다.

 “형님께서 반대하셨다고 들었어요.”

 내가 짐짓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솔직히 저는 약간 관심이 동했지만요.”

 “그러냐?”

 형님이 말했다.

 “하지만 그게 내 진심이다. 너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권하고 싶지 않아.”

 선생이 내게 비밀을 털어놓은 밤에 미래사에 대해서도 들었더랬다.

 형님이 다니는 미래사라는 곳은 미래에서 온 자들이 현재를 사는 자들과 결탁하여 세운 회사이다. 이곳에서는 소위 중계기라는 것을 관리하는데 이게 망가지거나 분실되거나 하여간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시간을 잇는 통로가 막힌다지. 입구는 있는데 출구가 사라지는 격이란다. 이와 관련한 말썽이 과거 몇 차례 있었는데 복구하는 것이 아주 고역이었다고.

 미래사에서는 또한 유령들이 원활히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을 한다. 이번에 선생이 왔을 때 가짜 신분을 만들고 묵을 곳을 제공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유령이 실제로 방문하는 것은 이삼십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일이라 형님 말대로 평소에는 적당히 궁둥이를 비비고 있는 것만으로 다달이 월급이 나오는 편한 직장인 셈이다.

 다만 직원들은 결코 회사의 실체를 들켜서는 안 된다. 결국 미래사 직원들의 일상 업무는 엄폐라고 하겠다.

 “정체를 숨기려는 것치고는 회사 이름이 퍽 노골적이에요.”

 내가 지적하자 선생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미래사 정도면 그래도 낫지 않은가. 미륵사였던 적도 있다네. 그때는 회사가 아니라 산사였지만서도.”

 “악취미가 따로 없군요.”

 “그래서, 어떤가?”

 선생이 임무니 뭐니 하는 것들을 상세히 설명해준 것은 단순히 나를 믿어서가 아니었다. 내게 미래사에서 일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하려는 술책이 기다리고 있었다. 비밀을 털어놓은 데 따른 부담을 최소화하려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러느라 더 큰 비밀까지 지레 털어놓았으니 미래인의 지능도 알 만하다.

 선생이 말했다.

 “자랑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아주 조건이 좋다네.”

 내가 말했다.

 “어쨌든 중학교는 졸업하고 가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래, 나도 당장 와달라는 건 아닐세. 어차피 와서 할 일도 없는데, 무얼.”

 “그럼 졸업할 때까지 찬찬히 생각을 해보지요.”

 “그래…. 미리 이르건대 자네 형님은 썩 달가워하지 않더군. 그래도 중요한 것은 자네 의견이니까.”

 나는 형님이 반대한 이유가 궁금했지만 선생은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이에 형님과 직접 상의하려는 것이다.

 “모연아. 미래사에 다닌다는 것은 말이다.”

 형님이 말했다.

 “무엇보다 회사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나 자신이나 가족보다도 회사가 우선이라는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우리 스스로가 유령이 되어야 해.”

 “…유령?”

 “음, 유령에 대해서는 못 들었니?”

 “들었어요. 허면 형님께서도 직접 과거로 다니신다는 거예요?”

 형님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니다. 그보다 더 끔찍하지. 그들은 자기들 시대에서는 평범한 사람이잖냐. 우리는 이곳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세라는 얘기야. 역사의 볼모인 셈이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세. 그 말은 즉각 내 오래된 기억을 소환했나니.

 우리 매형은 인격자였다. 아내와 오붓이 보낼 시간을 쪼개어 나어린 소년의 놀이 상대가 되어준 것만 봐도 그러하다. 나 또한 무뚝뚝한 형님보다는 다정한 매형에게 매달렸음은 말할 것도 없다. 누님은 옥희가 선생을 따르는 것을 보면 나 어렸을 적이 생각났다고 한다.

 매형은 노상강도에게 습격을 당해 죽었다. 옥희가 태어나기 한 달 전의 일이다.

 강도가 달아나고 오래지 않아 거리를 순시하던 경찰관이 매형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는 출혈하는 부상자를 방치한 채로 강도를 쫓기에 급급했다. 결국 길고 긴 추격 끝에 안개 자욱한 골목 끄트머리에서 강도를 체포했으나 매형은 살아나지 못했다. 강도가 매형을 칼로 찌르고 빼앗은 것이란 고작 과일 세 알이 든 종이봉투였다지.

 청천벽력의 비보를 들은 누님이 그대로 혼절하는 바람에 혹시라도 뭐가 잘못되는 건 아닐지 다들 염려했었다. 우려와 달리 튼튼한 아이가 태어났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장사를 지내던 날 매형의 친우들은 금방이라도 경찰서를 습격할 태세였다. 찌른 것은 강도를 탓할 계제이건만 순사가 대처만 합당하게 했다면 죽음에 이르지는 않았을 거라며, 그렇게 억울하게 죽었는데도 사과는커녕 얼굴조차 들이밀지 않는다며 마구 분개했다.

 “이러지들 말게. 부탁이야.”

 형님은 그때 그들을 말리고 나섰다.

 “이, 이봐, 무영이….”

 “왜들 이러나. 이런다고 경선 군이 돌아오는 것두 아닌데.”

 “보상까지는 알 것 없지만 최소한 사과를 받을 수는 있잖겠나? 이렇게 다 모일 기회가 또 어디 있다고 한 발 빼는가? 겁이 나서 그래? 선두에 서는 게 부담이라면 자네는 뒤로 물러나 있어도 좋아.”

 “일 없네. 우리는 그저 조용히 애도하고 싶으니 괜히 일을 벌이지 말게.”

 다들 형님에게 배신이라도 당한 표정들이었다. 누이의 지아비이기 이전에 어려서부터 벗이었던 자가 쓸쓸히 방치된 채로 횡사하였는데 그토록 나약한 모습을 보일 줄 몰랐겠지. 가족인 나조차 형님의 그런 모습이 생경했으니까. 이후 형님은 비겁자 소리를 들었고 몇몇에게서는 절연을 당했다고 한다. 누님도 그 일이 서운했던 모양으로 아직까지 형님과 관계가 소원하다.

 “그날 형님은 회사를 지키려는 것이었지요? 매형 돌아가신 다음에 말이에요.”

 내 말에 형님은 내심 놀란 눈치였으나 이내 수긍했다.

 “그래. 그때 나는 차마 행동에 나서지 못했어. 미래를, 아니 고작 회사 하나를 지킨답시고 현재를 외면했지. 말하자면 나는 이곳에 속하는 인간이 아니었던 게야. 그 점을 깨닫자 점점 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더구나. 무슨 일에 직면하든 내 행동이 야기할 일들을 미리 근심하게 됐어. 어느 새 내가 유령이 되어 있었던 게야. 한데 소위 유령이란 자들을 실제로 만났더니 그는 도리어 유람객에 가깝잖겠니? 그래 되니 내 꼴이 퍽 우습더군.”

 “저녁 잡수셔요!”

 밖에서 옥희가 외쳤다.

 “식사! 식사아!”

 “그러니 모연아. 나는 네가 현재를 살았으면 한다. 그건 대단한 특권이야. 역사는 지키는 게 아니라 만들어 가는 거야. 물러서 방관하지 말고 부당한 권력에 맞서서 시위도 하고, 또래 친구와 마음껏 연애도 하고. 언젠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서 기르고. 무엇보다 모연이 너와 주변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가길 바란다. 응, 그게 좋아.”

 영차, 형님이 무릎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나도 곧 형님을 따라 일어섰다.

 우리가 방에서 나오는 동안 옥희는 석양이 진 마당에서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얼마 전에 태화와 내가 추던 춤을 흉내 내는 것이었다. 그 어설픈 동작이 몹시도 귀여워 우리 형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

댓글 3
  • No Profile
    pena 17.02.19 23:06 댓글

    요 몇 년 새 부쩍 흥미 가지고 있는 시대의 유명한 이야기들에 장르를 얹은 작품이네요. 즐겁게 읽었습니다. 연작, 장편 이런 걸로 더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 No Profile
    이나경 17.02.22 00:46 댓글

    고맙습니다! 사실은 저도 픽스업 쪽으로 모색하다가 뒤죽박죽 돼버린 상태인데요;;; 한번 잘 풀어나가 보겠습니다^^

  • No Profile
    pupil 17.08.21 15:05 댓글 수정 삭제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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