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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귀야 나한테 달라 붙지마라

– 곽재식 –

지하철을 기다리는 그 자와 또 눈이 마주쳤다. 궁금하다. 정말 궁금하다. 저 자는 도대체 왜 날마다 지하철을 타는 걸까? 지하철을 타고 어디로 가는 걸까? 뭐 하는 사람일까? 나는 이번에는 눈이 마주치면 마주치는 대로 빤히 바라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지하철이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들린다. 역 안에 서 있는 사람들 중에 주춤주춤 입구 쪽으로 조금 더 다가 서는 사람이 생긴다. 다시 흘깃 보니, 그자도 고개를 돌린다. 지하철을 탈 모양이다. 예상대로 그 자는 지하철에 탔다. 그 자는 손에 들고 있는 신문을 본다. 신문은 잘 말아 접어 몽둥이 같은 모양이었다. 펼쳐서 몇 줄 읽는 것 같다. 별로 열심히 보는 것 같지는 않다. 잠깐 읽다가 멈춘 그 자는 눈을 흘깃거리며 주위를 살펴 본다.

 나는 기억해 보려고 한다. 내가 저 자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이 언제인가.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언제부터인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확실히 2주일은 되었다. 그리고 지난 2주일 동안 저 자는 같은 시각에 지하철에 탄다. 그리고 내가 내리는 역에서 그 자는 같이 내린다. 매일 아침 그 자는 그 행동을 반복했다.

 거기까지만 보면 별로 이상할 것은 없다. 나도 마찬가지였고, 나와 같은 역에서 지하철을 탄 평균 116명의 다른 사람들도 거의 다 마찬가지였다. 나는 출근을 하기 위해 지하철에 탔다. 매일 빠짐 없이 탔고, 같은 시각이었고, 같은 곳에서 타서 같은 곳에서 내렸다. 그러니까, 그 자도 나처럼 어딘가에 매일 출근하기 위해서 지하철을 탄다면 나처럼 같은 시각에 같은 곳에서부터 같은 곳까지 매일 움직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가 출근하려는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단 행색이 달라 보였다. 출근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갖고 있을 법한 가방이라든가, 서류 봉투 같은 것이 없었다. 그는 빈손이었고, 갖고 있는 것은 한 손에 말아 쥔 신문 뿐이었다. 도대체 누가 요즘 종이 신문을 본다고? 대부분의 출근하는 직장인들은 전화기를 꺼내 그 안에서 지하철이 움직이는 동안 뭐든 만화나 뉴스 따위를 보곤 했지만 그 자는 전화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잠을 자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서서, 그냥 계속 지하철 안에 그냥 있기만 했다.

 나는 1시간이 훨씬 넘는 지하철을 타는 시간 동안 도대체 그가 뭘 하며 시간을 보내나 싶어 살펴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책이나, 서류나 전화기를 꺼내지 않았다. 두툼한 그의 초록색 외투 속에 전화기 하나 쯤은 있을 법도 했는데, 그가 전화를 꺼내는 것은 보지 못했다. 나는 그 자의 외투 주머니 속에서 뭐라도 나오면 그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거의 노려 보듯이 주머니 쪽을 쳐다 본 적이 있었다. 얼마 전까지 대단히 유행했던 캐나다산 거위털 외투였다. 그런데 그 주머니는 텅 비어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지니고 다니는 것은 교통카드와 신문이 전부로 보였다.

 물론 지하철을 타고 있는 동안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 그가 직장인이 아니라거나, 그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도 그것은 안다. 그러나 일단 그는 직장인이나 정기적으로 어딘가에 시간을 맞춰 도달해야만 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고 나는 믿었다. 그는 시간을 확인하지도 않았고, 표정에 그날 해야 할 일이나, 그날 배워야 할 것을 계획한다든가 하는 것이 나타나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그 자의 바짝 마른 하얀 얼굴은 항상 변화가 없었다. 그 얼굴은 어딘가 불편한 듯이 어두웠다. 그렇다고 뚜렷이 어떤 표정이 드러날 때도 없었다. 괴로워하는 것도 아니고, 슬퍼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뭔가에 약간 심경이 언짢은 듯한 약한 느낌만 있었다. 만약 그 얼굴이 웃기 시작한다면 무서운 얼굴로 변할 것 같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 2주일 전 무렵인 어느 날 나는 그가 매일 나타난다는 생각을 무심코 하게 되었다. 그때 잠깐 한번 그를 눈 여겨 보고 났더니, 그 다음부터는 그 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매일 그가 지하철을 기다리고 지하철을 탄다는 사실을 계속 느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자는 똑똑히 매일 눈에 뜨였다. 그는 그 전 부터도 계속 나타나서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저 그전까지는 그가 있는지도 몰랐고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 2주일 전일 뿐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까지도 반복 되고 계속 되고 있었다. 내 눈에 아침마다, 매일 아침마다, 그가 보였다. 그리고 그는 이상해 보였다. 저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인지, 왜 매일 나와 다른 사람들과 같은 지하철에 타는 지, 나는 궁금해졌다. 계속 궁금해졌다.

 “너무 쓸데 없는 거에 궁금해 하면서 아침부터 진 빼는 거 아냐? 회사 오면 항상 긴장해 있어야 하잖아.”

 내가 그 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그녀는 나에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내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들었다. 그리고 흥미 있어 했다. 하지만, 내가 그런 것에 아침마다 신경을 쓴다는 사실은 약간 불길하게 여기는 듯 보였다.

 내가 그녀에게 대답했다.

 “네 말이 맞긴 맞지. 그런데 정말 뭐하는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는 말야. 이쪽에는 다 사무실 있는 동네인데, 이쪽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은 딱 봐도 직장인들 같잖아. 그래 저기, 길 저 쪽편 사람들 지금 봐도, 뭐 다 바로 딱 그래 보이잖아.”

 나는 길 건너편 쪽 사람들을 바라 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손을 뻗어 내 눈을 덮었다.

 “야, 너 저런 여자들 좀 유심히 보지마.”

 “무슨 내가, 내가 뭘 유심히 보는데.”

 “너는 여자가 정장으로 차려 입었는데 몸매가 좋아 보이면 아주 넋이 나가서 헬렐레 하잖아. 제2면접 때 괜히 나한테 말 걸고 친해지려고 했던 것도, 그래서, 내가 그래서 그런 거지?”

 “뭐? 무슨,”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아니라고 답할 수가 없었다. 아니, 아니긴 아니다. 내가 아무나 보고 헬렐레 하는 것은 확실히 아니지만, 이 회사 면접날 그녀의 그 모습에 반했던 것은 또 분명히 사실이었다. 그래서 짧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두 질문이 섞여 있었다. 대답할 말을 못 찾는 나를 보고 그녀는 독특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흑풋픕 이런 비슷한 소리였다.

 “꼭 사무직 직장인만 직장인이 아니잖아. 여기 우주 관련 지원 기관이 몰려 있는 데기는 한데, 그래도 사무직 아닌 사람도 일은 한다고. 보일러, 수도 같은 건물 설비 봐 주는 사람도 일 하고 있고, 청소하는 사람도 있고. 매점이나 식당에서 근무하는 사람도 있고. 너무 네가 생각하는 직장인, 딱 그 느낌이 아닌거 같다고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잖아?”

 그녀는 원래 이야기로 다시 돌아 갔다.

 “그건 나도 아는데, 그걸 다 생각해 봐도, 그 사람은 그 모든 게 다 아닌 것 같아.”

 “네가 어떻게 알아? 딱 보면, ‘아 이 사람은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을 것 같다’ 딱 알아 볼 수 있어?”

 “아니 그건 아닌데. 아침에 나 서는 사람 눈빛이 일하러 가는 사람 눈빛이 아니라니까.”

 “눈빛은 무슨. 텔레비전에서 사람으로 변신하는 흰 여우 나오는 그런 거 할 때나 눈 색깔 빨갛게 변하면 나쁜 편이다… 그런 게 있는 거지. 사람 직업이나 성격을 눈빛을 보고 어떻게 알겠어.”

 “네 말이 맞기는 맞는데, 그런데 이 사람은 진짜 보면 볼 수록 눈빛부터가 이상해 보여. 내가 한번 그 사람 얼굴 사진 찍어와서 보여줄까?”

 “이상한 짓 하지마. 괜히 그러다가 그 사람이 뭐하는 짓이냐고 따지면서 시비 붙으면 어쩔래. 이제 시험직 18주차인데, 그런 걸로 시끄럽게 소동 일으켰다가 짤리면 억울해서 어떡해.”

 “그런가?”

 “그렇지이이”

 그녀는 장난스럽게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맞는 말이었다. 시각을 확인하니 어느새 휴식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내가 시각을 확인한 것을 보더니 그녀는 말 없이 손가락으로 사무실 쪽을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늦어서는 안 되었다. 혹시 지각이라도 하게 된다면 벌점이 메겨질 것이고 그러면 시험직 과정 중에 탈락자로 떨어질 지도 모른다. 그녀는 먼저 일어 섰다. 휴식 시간이 벌써 끝난 것이 아쉬운 눈치였다.

 그녀는 주변을 잠깐 둘러 보더니 나를 품에 안고 숨막히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 안으로 걸어서, 환상의 세계 저 편 언덕에서 쾌락의 구름에 떠다니는 내가 제 정신으로 돌아오기 전에 먼저 들어 갔다.

 나는 사무실 안에 도착해서야 정신이 다시 바짝 들었다. 곧 일주일에 두 번 있는 업무 진행 평가가 있었다. 수습직으로 채용한 직원이 어떻게 적응하고 있는지 회사 채용 위원회 심사위원이 평가하는 시간이었다. 자칫 나쁜 모습을 보이면 그대로 벌점을 받게 되고 그러면 시험직 과정에서 탈락해 실직하게 된다. 조심할 수 밖에 없었다.

 “전체 선발 인원 24명이 시험직으로 채용 되었고, 20주 동안 저희 회사 직원으로 같이 근무하게 됩니다. 그 중에 벌점을 가장 많이 받은 직원 4명이 탈락 되고 나머지가 정규직으로 채용될 예정입니다. 그러니, 항상 매사에 순간순간마다 본인이 얼마나 조직에 좋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인재인지 보여 주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회의실에 들어온 직원이 말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듣는 안내였지만, 그 말을 듣는 우리의 표정은 진지하고 밝고 그러면서도 긍정적이고 활력이 넘치고 창조적이고 도전을 좋아하고 대인관계가 뛰어 나고 조직에 충성하고 유연한 사고 방식을 갖추었으면서도 도덕적으로 엄격한 느낌을 표현하려고 애쓰는 것이었다.

 회사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모든 직원들이 우리에게 벌점을 줄 수 있는 권한이 있었으니, 회의실에 와서 간단한 안내의 말을 전하는 저 직원도 예외가 아니었다. 저 직원이 “어, 쟤는 왜 저렇게 눈빛이 안 좋아.”이러면서 벌점을 하나 던지면, 그 덕분에 바이바이. 서류 심사, 필기 시험, 적성 시험, 제1면접 시험, 심리 시험, 제2면접 시험의 긴긴 단계 그 첩첩산중을 헤쳐 올라온 시험직 자리, 봉우리 꼭대기 바로 아래까지 올라 왔다가 다시 저 머나먼 실업자의 골짜기로 떨어져 내려 가게 되는 것이다.

 나는 심사위원을 만날 차례를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잠시 멍하게 있자니 갑자기 심장 주위가 긴장되는 것 같았다. 떨어지면 어떡하지. 이 회사에 간신히 드디어 마지막 시험직 채용까지 왔는데 떨어지면 어떡하지. 이제 겨우 남들 앞에 뽐낼만한 좋은 직장에 들어올 기회를 얻었는데 혹시라도 떨어지면 어떡하지. 얼마나 괴로울까. 눈물도 나올까. 다시 다른 비슷한 직장에 지원할 기회가 또 있을까. 없겠지. 이제 나이도 꽤 들었는데. 여기가, 여기에 입사하는 게 막차인데. 그게 다 아니더라도 이제는 마음 졸이는 것 때문에 피곤해서라도 더 이런 시험, 이런 면접, 이런거 더 못할 거 같은데.

 아니 아니, 그런 생각을 자꾸 하다 보니 심사위원을 만나면 너무 심하게 긴장하고 떨 것 같았다. 심사위원이 안 좋은 눈빛을 볼 지 모른다. 그러면 끝장이다. 벌점이다. 시험직을 끝으로 잘릴 것이다. 월급 받는 생활도 안녕, 그럴싸한 좋은 직장인의 미래도 안녕. 나는 잠깐 고개를 들어 아무것도 없는 허연 사무실 천장을 올려다 본 후, 다른 생각을 하기로 했다. 아무거나 다른 생각. 뭐든지 다른 생각. 아무 생각도 안 해도 좋고.

 그러자니, 다시 매일 같이 지하철에서 보던 그 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뭐하는 사람일까. 왜 매번 같은 시각, 같은 때에 지하철을 탈까. 분명히 직장인은 아니다. 확실하다.

 “생각해 봤는데, 경비원이나 뭐 그런 사람도 아니야.”

 그날 퇴근길에 그녀와 함께 다시 그 자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면, 나는 다음과 같은 말로 증명해 보겠다고 생각했다.

 “경비원이라고 하면, 분명히 아침 아주 이른 시각이나 밤 아주 늦은 시각까지 건물에 머무를 거란 말이야. 그러면 거기에 필요한 들고 갈 물건 같은 게 분명히 뭐든 조금이라도 있을 거라고. 추운 날씨를 버틸 장갑이라든가, 심심할 때 볼 만화책이라든가. 야참으로 먹을 도시락이라든가 뭐라도. 그런데 이 사람은 소지품이 신문이랑 버스 카드 말고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다고.”

 그러면 그녀는 이렇게 반론할 지도 모른다.

 “다 그냥 회사 사물함 같은 데 두고 다니나 보지.”

 그러면 나는 이렇게 반론할 것이다.

 “아니야. 평범하게 목적이 있어서 어딘가를 정기적으로 오가는 사람이면 뭐가 되었든 준비물을 들고 다닐 거라고. 뭐, 어떤 이유로 하루 이틀은 빈 손으로 왔다갔다할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열흘씩, 몇 주일씩 빈 손으로 다닐 만한 일은 잘 없지. 뭐 따지고 들자면야 세상에 그런 일이 아주 없지야 않겠지. 그렇지만 그런 일일 수록 특이한 일일 거라고. 아니면 저 사람이 아주 특이한 사람이던가.”

 “그래 그 사람이 아주 특이하다고 쳐. 예를 들어서 절대 소지품을 들고 다니면 안 되는 이상한 특수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라고 치자.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네가 뭘 그렇게 신경을 쓰는 건데.”

 “이상하잖아. 그리고 되게 불길하다니까.”

 “이제 2주일 남았는데 말년에 몸조심해야 되는 거 아냐? 이상한데 관심 쓰지 말지. 엉뚱한데 괜히 엮이지 마.”

 “그래서 더 그래. 그 사람이랑 매일 마주친다는 자체가 자꾸 엉뚱하고 불길한 데 엮이는 거 같아서 그런다니까.”

 “그러면 지하철 타지말고 버스 타든지.”

 “그러다가 차 막혀서 지각하면? 그러면 끝이 잖아. 그렇다고 지금보다 더 일찍 출근하라고 하면 나 진짜 쓰러질 것 같은데.”

 그 정도 상상했을 때, 심사위원이 나를 찾는다는 말이 들렸다. 나는 심사위원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들어 갔다. 떨리고 불안한 마음은 줄었지만 다른 쪽으로 엉뚱한 것에 사로 잡힌 기분이 되었다. 심사를 앞두고 쓸데 없이 건드려서는 안 될 사악한 것에 붙들렸나 싶었다.

 심사위원이 말했다.

 “긴장 푸시고. 편안하게 말씀하시면 되고요.”

 눈치를 보니 그 첫마디부터가 함정이었다. 18주간 시험직으로 일하면서 별로 배운 것은 없지만, 이 회사 아저씨들의 기분과 속마음을 엿보는 눈치만은 비약적으로 발달했다. “시험직”으로 사람을 채용해 시험하며 측정하려는 것이 어쩌면 그런 능력을 얼마나 잘 갖추는 사람인가 하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편안하게 말하라는 말과 달리, 저 심사위원은 적당히 긴장을 하고 적당히 불안해 보이는 사람을 원한다. 너무 편안해 보이면 건방지다고 생각할 것이다. 자신이 “무서운 심사위원”으로 비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자기가 약해 보이고 무시 당했다는 기분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심각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살짝은 겁먹은 표정을 보여 주어야 한다. 저 심사위원이 나를 심사하고 있는 우월한 느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만큼만은 겁먹은 척을 해야 한다.

 “쉽게 그냥 말씀해 보시죠. 저희 회사 스루파미로가 이제 어떤 곳이다, 하는 것은 확실히 감 잡으셨죠.”

 “’확실히’까지는 아니지만 그 전하고 비교해서는 비할 바 없을만큼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전에는 저희 스루파미로에 대해 아주 아는 게 없으셨다는 뜻인가요? 하하”

 듣기 싫은 웃음이었다. 그렇지만 나도 살짝 미소를 띄어 주며 답했다.

 “하하, 아닙니다. 어떤 곳이라는 방향성은 제가 알고 있던 것, 또 제가 예상했던 것과 아주 잘 맞았습니다. 그렇지만 세세한 내용에 대해서 이해하게 된 게 그만큼 깊어졌다는 겁니다.”

 “그러면 저희 스루파미로가 십 몇 주 그 정도만 일해 보면 이제 그냥 무슨 일 하는 지 다 알 수 있는 그런 뻔한 곳이다, 그런 건가요?”

 사실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당황한 듯이 손까지 저으며 아니라고 말해야 했다.

 “아니오. 제가 이제 신입 직원으로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니까, 제가 느끼기에는 스루파미로의 일 하나하나가 그 만큼 크게 느껴지고 무겁게 느껴져서 그렇게 깊고 크고 많은 것을 알게 되는 것으로 다가 왔다는 말씀입니다.”

 심사위원은 “그래요” 하더니 슬쩍 또 웃었다. 버릇 같아 보이는 웃음이었다.

 “일단 다 아시는 거겠지만, 그래도. 이것부터 시작하죠.”

 심사위원은 질문을 시작했다.

 “스루파미로가 무슨 뜻이죠?”

 “S.R.U.P.A.M.I.R.O의 약자로, Space Research United Planning Account Management Inspection Review Observer의 머릿 글자를 딴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주 연구 통합 계획 예산 관리 재단 감사 공사 점검국 옵저버를 줄인 말입니다.”

 “좋은 말씀이시고. 그래서 우리 스루파미로가 무슨 일을 하는 겁니까? 회사 홈페이지에 있는대로 그대로 그냥 외워서 말씀하지 마시고 본인이 직접 느낀 대로, 잘 모르는 친구한테 설명해 준다고 하면 어떻게 할지, 그렇게 말씀해 보세요.”

 다행히 한 번은 나올 이야기인 것 같아서 준비하고 있던 질문이었다. 나는 지나치게 시간을 끌지 않도록 빠른 속도로 말했다. 그렇게 말하니 그만큼 생각도 빠릿빠릿하고 능숙하게 단련된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우주 연구 일은, 최근에 아시아 지역에 갑자기 불어 닥친 우주 개발 분위기 때문에 갑자기 요즘 아주 많아졌습니다. 그러니 정부에서 여러 가지 우주 개발 연구 지원 사업이 몰아 닥친 것 때문에, 일거리도 몇 년 사이에 확 많아졌습니다. 여기까지가 스루파미로에서 SR 까지의 뜻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렇죠.”

 “우주 연구 통합 계획은 정부의 여러 부서, 여러 기관이 워낙 혼란스럽게 여러 가지 우주 개발 연구를 한다고 나서니까 혼란스럽기도 하고 예산이 중복으로 쓰이기도 하고, 이미 쓸데 없는 짓으로 밝혀진 데에 헛돈 쓰는 일도 생기고 하니까, 그걸 다 한 군데에서 통합해서 관리하기 위해서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기획재정부에서 정부와 공공기관의 모든 우주 연구를 통합해서 계획하려는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그게 스루파미로에서 SRUP까지 입니다.”

 “예. 그 다음은요?”

 “우주 연구 통합 계획 예산 관리 재단은 그 통합 계획에서 너무 큰 권한을 행사한다는 지적이 있어서 나온 겁니다. 기획재정부 공무원과 그 산하기관 연구원들이 워낙 큰 우주 연구 개획을 다 지휘하다 보니까 권한도 너무 크고 예산도 너무 많이 만지고, 그러니까. 그 쪽 사람들이 너무 월급을 많이 받는다, 경비를 많이 쓴다는 지적도 있고, 부패도 생기고, 실수 하면 큰 일 나고, 그러니까, 이걸 개혁하기 위해서 대통령 직속으로 재단을 하나 만든 겁니다. 그게 우주 연구 통합 계획에 대한 예산 관리 재단 입니다. 여기까지가 스루파미로에서 SRUPAM 입니다.”

 “다른 말로 뭐라고 하지요?”

 “그쪽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스루팜이라고 많이 하죠. 저희 스루파미로하고 같이 일하는 때가 많으니까요.”

 “잘 아시네요.”

 심사위원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이었다. 계속해서 나는 설명했다.

 “우주 연구 통합 계획 예산 관리 재단 감사 공사는 대통령 직속 조직이 우주 연구를 통합 관리하는 데를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국회에서 만든 공사입니다. 우주 연구가 요즘 가장 사람들이 주목하는 거고 인기도 많은 건데, 무슨 좋은 소식 나올 때 마다 그게 대통령이 잘해서 그런 것처럼 보이면, 반대 정당들은 그게 싫으니까요. 자기들도 그런 일에 어느 정도 끼고 싶었던 거죠. 그게 아니라도, 너무 큰 예산을 다루니까 국회에서 개입해야 마땅하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그래서, 대통령 직속인 우주 연구 통합 계획 예산 관리 재단이 하는 일에 대해 국회에서 감독하는 조직이 생긴 게, 우주 연구 통합 계획 예산 관리 재단 감사 공사입니다. 여기까지가 스루파미로에서 SRUPAMI까지 입니다.”

 “제 생각하고는 약간 다르지만, 뭐 저희 조직 내에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은 계시니까.”

 나는 내가 심사위원의 정치 성향을 잘못 짐작했나 싶어 걱정 되었다. 그렇지만 더듬거릴 여유는 없었다.

 “우주 연구 통합 계획 예산 관리 재단 감사 공사 점검국은 바로 그 국회의 감사 공사가 너무 정치인들 개개인의 선전 목적, 정당간의 정파 싸움으로만 쓰이고 있다는 비판이 커서 생긴 곳입니다. 그래서 점검국은 감사 공사의 활동이 공정한 지 감시하기 위해 중립적인 민간인 전문가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단체 입니다. 민간인 단체이지만 법적으로 지위가 보장된 공공기관 성격을 갖고 있기도 하고요. 이게 바로 스루파미로에서 SRUPAMIR까지 입니다.”

 “이제 하나 남았네요. 그래서, 그러면 우리 스루파미로는 뭐지요?”

 “우리 스루파미로, 그러니까 우주 연구 통합 계획 예산 관리 재단 감사 공사 점검국 옵저버는 바로 그 민간 기관의 활동인 점검국이 정당하게 옳은 방향으로 잘 운영 되고 있는 지 감시하고 관리하는 조직입니다. 점검국은 민간 단체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이권이나 개개인의 성향이나 이런 것 때문에 사적인 이익에 휘둘릴 가능성이 있으니까, 순수 공공기관인 저희 옵저버가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 그 활동을 검토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스루파미로입니다.”

 심사위원은 고개를 숙여 내 인적 사항을 보았다.

 나는 이어서 말했다.

 “정리하면, 우주 연구를 기재부에서 관리하는 조직이 우주 연구 통합 계획이고, 그 기재부 조직을 대통령 직속으로 관리하는 조직이 우주 연구 통합 계획 예산 관리 재단이고, 그 대통령 직속 조직을 국회에서 관리하는 조직이 우주 연구 통합 계획 예산 관리 재단 감사 공사이고, 그 국회 조직을 민간 독립 단체가 관리하는 조직이 우주 연구 통합 계획 예산 관리 재단 감사 공사 점검국이고, 그 민간 독립 단체를 관리하는 독립 공공 조직이 우주 연구 통합 계획 예산 관리 재단 감시 공사 점검국 옵저버, S.R.U.P.A.M.I.R.O, 바로 우리 스루파미로인 겁니다.”

 말을 마치고 눈치를 보니 심사위원이 답에 충분히 만족하지 않은 것 같았다. 심사위원은 마지막 대목을 싫어하는 듯 보였다. 그래서 나는 말을 덧붙이기로 했다.

 “물론 쉽게 설명하느라 그런 것이고, 실제로는 저희는 직접 우주 연구 통합 계획 예산 관리 재단 감사 공사 점검국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점검국과 함께 공동으로 같이 우주 연구 통합 계획 예산 관리 재단 감사 공사를 관리하는 형태로 운영된다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그렇지만, 저희가 조금 더 주도적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있으니까, 제 친구에게 설명한다면 일단 이해하기 편하라고 이렇게 설명하겠습니다.”

 그는 이제 매우 만족하는 듯 보였다. 나는 이제야 심사위원의 성향을 알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몇 마디 더 달아 붙여서 그를 더 좋아하게 만들기로 했다.

 “그 밖에, 기관 합동 ‘원스톱’ 즉시 지원 기관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게 몇 개 더 있습니다. 정부 우주 지원 센터, 공공 우주 지원 센터, 대한 우주 지원 센터, 한국 우주 지원 센터, 네 곳의 기관이 있는 건데, 그 쪽에서 업무를 복잡하게 만들지는 않는 지, 감시하는 것도 우리 일입니다.”

 심사위원은 내 답변을 듣고 뭔가를 기록했다. 벌점은 아닌 것 같아 보였다. 안심이었다.

 그는 그리고 내 눈빛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이윽고 다시 질문했다.

 “자, 그러면 외부에서 우리 스루파미로에 대해 지적하는 가장 큰 문제는 뭐라고 느꼈습니까?”

 역시 생각해 본 적이 있는 문제였다. 나는 그렇지만 고민하는 듯이 2, 3초 정도는 생각하는 흉내를 내었다. 그리고 답했다.

 “관리 조직이 여섯 겹으로 겹쳐져 있으니까, 실제로 우주 연구를 하는 연구원 1명 당 거기에 딸린 연구 사업 감시 인력, 관리 인력, 행정 인력이 23.4명이나 된다고 해서 너무 비효율적이라는 지적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 일자리고, 요즘 같을 때에 함부로 그 사람들을 다 해고하고 조직을 개편할 수도 없으니까 당장 어떻게 할 수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그동안 너무 방만하게 덩치만 키웠다고도 언론에서는 자주 지적하고요. 그런데도 조직이 너무 크니까, 서로서로 간에 보고, 감사, 관리가 너무 많아져서, 그렇게 사람이 많은데 업무는 업무대로 또 더 엄청나게 많아졌다고도 비판합니다.”

 “그래서 지금 본인은 거기에 대한 해결책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왈왈왈왈왈왈”

 실제로 내가 심사위원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으로 개 짖는 소리를 흉내 냈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한 대답은 사실 이렇게 표현해도 그다지 놓치는 것이 없을 만한 개소리였다. 적당히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이 조직 사람들 사이에 도는 말을 그럭저럭 심사위원이 듣기 좋을 만하게 꾸며서 대답해 준 것 뿐이었다. 핵심도 없고 별 뾰족한 수도 없는 무의미한 말이었다.

 답이 없는 문제였다. “당장 이런 조직은 없애 버리고 당신도 나도 일을 때려치우는 수 밖에 없소.”하고 대답할 수야 없지 않나. 이 직장에 겨우 시험직까지 올라 왔는데 그럴 수야 없다. 이곳 스루파미로는 우주 연구 계열 공공기관이니까 명함도 그럴싸하고, 공공기관 직원으로서 정년도 보장 되며, 그런 중에서도 연봉도 나쁘지는 않은 아주 좋은 직장이었다.

 물론 언급했던 대로 이곳 스루파미로에도 일은 많았다. 꽈배기처럼 관계가 꼬여 있는 각종 우주 연구와 관련된 온갖 기관의 감사와 관리 지적에 시달리다 보면 허구헌날 철야에 비상대기에 시달려야 하는 무서운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래도 이만하면 꿈 같은 직장이었다. 이걸 포기하고 다시 실업자가 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정규직 직원이란 18주일 전까지 그저 실업자인 뿐인 나와 비교한다면 처지가 달라지고, 신분이 달라지고, 인생이 달라지고, 영혼의 색깔마저 달라진다고 할만한 자리였다. 나는 정말 여기에 붙어 있고 싶었다.

 퇴근길에서 그녀와 나는 아까 상상했던 것과 거의 같이 지하철의 그 자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오늘 심사에 대한 이야기도 했는데, 나는 벌점은 피한 것 같다고 내 감상을 말해 주었다. 나는 약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는데,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녀의 심사 결과는 나보다도 훨씬 더 좋은 것 같았다.

 “너는 이제 아예 탈락에서는 확 벗어난 것 같은데?”

 “24명 중에 4명 탈락하는 건데 거기서 벗어나는 게 뭐 그렇게 대단한가.”

 “그래도 그 탈락하는 4명 심정은 어떻겠어. 그 탈락하는 4명은 진짜 가문에 원한 진 누가 한 천 년 동안 저주해서 그렇게 됐나 싶을 걸.”

 “그렇긴하지. 그래서 더 방심하면 안 된다니까. 무슨 큰 일에 한 번 휘말려서 한 방에 벌점 파바박 맞으면 아무리 심사 잘 봐도 그 걸로 그냥 끝이지 뭐. 그러니까, 너도 괜히 길가다 이상한 시비 같은데 안 휘말리게 조심하라고.”

 그 말을 듣고 보니 나는 지하철의 그 자가 더 불길하게 느껴졌다. 그 대화를 하면서도 그녀는 이미 편안한 자신에 차 있었고, 나는 불안한 걱정에 차 있었다.

 “야, 너 겁먹었어? 아, 귀엽네. 이리와, 이리와. 겁먹지마.”

 그녀는 다시 장난치는 말투로 길가던 나를 확 잡아 끌어 당기더니 껴안아 주었다. 그녀는 내가 윽 소리를 낼 정도로 강하게 나를 안았는데, 몸이 졸리도록 아프게 품에 묻혀 있는 동안에는 잠깐 모든 생각이 사라졌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그 자는 어김 없이 또 지하철 역에 그대로 나타났다.

 같은 자리에 나타난 그는 걸어 다니며 주변을 살폈고, 여느 때와 똑같이 지하철에 탔다. 이번에도 신문 뭉치 이외에는 아무 짐도 없었고, 초록색 외투 차림이었고, 똑같이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를 쳐다 보자, 그는 내 얼굴을 아주 짧게 훑어 보고 시선을 피했다. 그렇지만 내 얼굴을 훑어 보는 그 기분 나쁜 느낌은 충분히 시선을 타고 날아와 내 얼굴에 쏟아졌다. 주변을 보는 그의 표정은 이상했다. 어두웠다.

 지하철을 타고 갈 때, 그 자는 역시 같은 지하철을 타고 나와 같이 갔다. 나는 그녀의 충고를 생각하며 그 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휘말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가 있는 쪽을 보지도 않았고, 일부러 지하철 그 많은 사람들을 비집고 한 칸 다음으로 걸어 이동하여 그와는 다른 칸으로 가기 했다. 그리고 나서 전화기를 꺼내 어제 있었던 자극적인 사건 사고 뉴스를 읽으며 최대한 그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다 중간에 연락이 한번 왔다.

 “아싸. 나 우선 채용 대상자로 걸렸음!”

 그녀의 메시지였다. 그녀는 무벌점, 고득점자가 되어 20주를 다 채우기 전에 이미 채용이 결정 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이제 사다리 위로 올라 갔다. 구름 저 위, 천상의 왕국까지 뻗어 있는 그 안전한 공공기관 일자리로 올라 가는 사다리를 모두 기어 올라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었다.

 “너 보다는 내가 2주일 더 선배겠네.”

 내가 축하한다고 하자 그녀는 그렇게 농담했다. 나도 시험직에서 탈락할 일은 없을테니 안심하라는 격려를 담아서 하는 말이었다.

 그렇겠지. 24명 중에 4명 떨어 뜨리는 거니까. 1/6 확률만 피하면 되니까. 아니지. 이제 우선 채용대상자 4명이 뽑혔으니까 16명 중에 4명 떨어 뜨리는 것이 되었다. 그러니까 떨어질 확률은 1/4. 그래도 최종 채용될 확률이 사분의 삼이라는 뜻이니까. 사분의 삼. 사분의 삼. 사분의 삼.

 그 흔한 기약분수를 머릿속으로 읊조리고 있는데, 그때부터 다시 슬슬 지하철 옆 칸의 그 자에 대해 신경을 쓰게 되었다. 지하철 칸과 칸 사이의 작은 유리창 너머로 옆 칸에 서 있는 그 자가 보였다. 그 자는 그대로 계속 지하철을 타고 있었다. 오늘도 내가 내리는 역까지 꼬박 한 시간 삼십분을 지하철을 타고 그 자도 가고 있는 것이다. 그 자는 내가 내리기 전에 내릴 것 같지도 않았고, 내가 내린 다음 내릴 것 같지도 않았다. 도대체, 뭐하는 사람일까? 왜 저러는 걸까?

 예상대로 그 자는 내가 내리는 지하철 역에서 다른 500명의 사람들과 함께 같이 내렸다. 나는 시각을 확인했다. 아직 출근까지는 넉넉하게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시 축하의 메시지를 보냈다. 몇 십초의 시간이 더 흘렀다. 그래도 시간은 많이 남는다. 오늘은 나도 뭐라도 상황을 바꾸는 날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자가 뭐하는 사람인지 확인하기로 했다.

 대충이라도 알아 보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견디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그 자가 이 지하철 역에 내려서 어디로 가는지, 뭐하러 가는지 보고 싶었다. 나는 그를 멀찍이 뒤따라 가면서 살펴 볼 것이다. 그 정도면 무슨 나쁜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가 어느 건물로 들어 가는 지, 혹은 누구를 만나는 지, 어떤 사람들과 합류하는 지 볼 것이다. 그렇게만 해도 대강 그가 무슨 용무로 매일 지하철을 타고 가는 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만, 거기까지만 해도 후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그 자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그를 뒤따라 갔다. 많은 사람이 움직이는 비좁은 지하철 역이었기 때문에 그가 움직이는 속도도 느렸다. 처음에는 따라 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와 그 사이에 수십명의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지만 나는 그 사람들 틈 사이에서 그를 분명히 알아 볼 수 있었다. 그의 모습은 너무나 익숙했다. 날카로운 얼굴과 초록색 옷은 온몸이 불타오르고 있는 마귀의 빛처럼 선명히 내 눈에 보였다.

 그런데 한 층을 더 올라와서 주변에 한결 넉넉한 공간이 생기자 그 자의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 걷는 속도는 그리고 거기서 점점 더 높아졌다. 마침내 거의 뛰는 것처럼 그는 빠르게 움직였다. 놓칠 것 같았다. 이래서는 분명히 놓친다. 만약 계단 모퉁이를 돌아 올라간 순간 그 자가 지하철 출입구 어느 것 하나를 골라 나가 버린다면, 나는 어느 출구로 나갔는지 못 찾을 수도 있다. 그러면 안 된다. 그 자가 어디로 가는지, 도대체 뭐하러 매일 내가 오는 여기까지 오는지 오늘은 알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내일부터 안심하고 싶었다.

 나는 뛰기 시작했다. 거리가 벌어져 있었던 데다가 그 자의 발걸음은 빨랐다. 나는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놓치기 싫어서 나는 힘을 다해 뛰었다. 온힘을 다해서 악을 쓰며 으아아아악 소리라도 지를만큼 힘을 다해 뛰어서 나는 그를 좇았다. 그 자가 어느 기관이 입주해 있는 건물에 들어 가는 지, 어떤 가게가 있는 빌딩에 들어 가는 지, 거기까지만이라도 봐야 했다. 우주 탐사 회계 관리국 건물로 들어 가는지, 우주 연구 종합 총무처 건물로 들어 가는지, 그게 아니면 우주 과학 행정팀 식당으로 들어 가는 지, 그 건물 보일러실 출입구로 들어 가는지, 매점 창고로 들어 가는 지, 그 정도만이라도 확인하면 후련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는 내가 상상한 어느 건물로도 가지 않았다. 그는 아예 지하철역 출입구로 가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지하철역 반대편으로 뛰어 내려 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다시 돌아 가는 지하철에 올라타 버렸다.

 그는 다시 지하철을 타고 출발지로 돌아가 버리는 것 같았다. 그는 지하철을 또 타는 것이다. 그는 어딘가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는 것이 아니었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그저 지하철을 타는 것 뿐이었다. 아침마다 규칙적으로 꼬박꼬박 이 붐비는 지하철을 타고 나와서 이 먼 곳 우주 연구 지구까지 온다. 그리고나면 다시 돌아간다. 그것 뿐이었다. 왜? 왜 이런 짓을 하는 건가?

 “미칠 것 같아. 걔는 이 쪽 지역에 일자리나 용무가 있는 것도 아닌 거 같아.”

 나는 그녀에게 내 허탈한 관찰을 설명한 메시지를 써서 보냈다. 그리고 대답이 오기를 기다리며 직장 건물로 걸어 갔다.

 나는 이제 그녀가 뭐라고 조언해 줄 지 궁금해졌다. 전화기로 돌아 오는 그녀의 메시지가 무엇일 지 상상하며 나는 기다렸다. “니 말대로 이 쪽에 직장이 있는 사람은 아니네. 그러면 하여간 많이 특이한 사람이라는 것까지는 확인 됐으니까, 말년에 이상한 것 조심한다는 의미로 이제는 정말 신경 딱 끊으라고.” 그런 답이 올 것 같다고 생각했다.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재미난 이야기를 좋아하는 그녀의 성격 상 먼저 더 이야기를 끌어 나갈 것 같기도 했다. 예를 들면, “그러면 그 사람은 그냥 시간 때우고 싶어서 지하철에 있는 거 아닐까. 지하철 안은 따뜻하니까. 왜 그런 거 있잖아 실업자인데 집에는 실업자가 아닌 척 하려고 괜히 출근한 척 하는 사람처럼.” 이라든가, “성격이 특이해서 지하철 타고 1시간 30분쯤 걸려서 다른 역까지 가는 것을 무슨 산책이라고 생각하나 보지. 취향 특이한 사람들 많잖아. 열차나 지하철 운행 체계 자체에 아주 관심이 많고 호감을 갖고 있는 성향일 수도 있고” 그렇게 추측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녀의 회신 메시지는 내가 사무실에 도착하도록 도착하지 않았다. 오전 시간이 다 지나고 점심 때가 거의 다 지날 때까지도 그녀는 응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짧게 대답이 왔다. 내가 상상한 내용과는 그 어느 것과도 비슷하지 않았다.

 “미안. 입사 첫날이라서 무슨 잡다한 일이 많아서 회신할 겨를이 없었어.”

 그러고 보니 그럴만 했다. 이제 오늘부터 그녀는 다른 자리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을 터였다.

 나는 회신했다.

 “신입사원님, 첫 출근을 축하드립니다! 첫날부터 너무 무리하지는 마시고.”

 그러고 보니, 나라고 해도 딴 데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시험직에게는 시험직에게 주어지는 일들이 있었다.

 그런 일들이란, 일이 회사에 미치는 결과는 무의미했지만, 그 일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은 한 없이 큰 것들이었다. 다시 벌점을 피할 궁리를 하고, 점수를 딸 작전을 세우며, 걷는 걸음 하나 하나, 매번 쉬는 호흡 하나 하나까지 회사에 가장 적합한 인재상에 어울려 보이도록 모든 노력을 다 하고 있는 다른 시험직 직원들과 함께 움직여야 했다.

 저녁이 되자 그녀는 신입사원 환영파티에 참석해야 한다고 했다. 그랬기에, 나는 내 주변의 다른 시험직들과 함께 먼저 퇴근했다.

 시험직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라 다들 그 생각 뿐이었다.

 “이게 완전 실수 안 하기 게임이잖아요. 여기까지 오신 분들은 다들 일은 잘 하시니까. 누가 혹시 아차 해서 실수 하느냐 안 하느냐 그걸로 떨어지느냐 마느냐가 결정 될 거고. 그래서 저는 부정 탈 일은 아무 것도 안 하려고 몸조심하는 거, 그게 일이에요.”

 “저는 지난 주부터 식단도 안 바꾸고 있어요. 혹시라도 몸에 탈이라도 나서 조퇴나 결근이나 하면 끝장이잖아요. 저는 음식 먹는 시간하고 먹는 반찬 종류도 매일 똑같이 정확하게 맞추고 있어요. 혹시나 해서. 혹시나. 부정 탈까봐.”

 그 말들을 들으며 걷고 있는데, 내 머릿속에는 다시 그 자가 떠올랐다. 어떻게든 그 자와 더 이상 가까워지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또 들었다.

 다음날 지하철역에서 그 자를 발견했을 때, 나는 그로부터 충분한 거리로 떨어져 섰다. 하지만 이번에는 애써 그 자를 잊으려고 들거나 무시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를 의식하며 조심하기로 했다. 항상 그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거다. 그가 혹시라도 갑자기 무슨 이상한 일을 저지르지 않을 지, 어느 순간 돌변하여 주변을 습격할 기세는 없는 지 나는 차분히 살펴 보기로 했다.

 역시 그는 지하철이 운행하는 지루한 시간 동안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 손에 말아 쥔 신문을 펴 볼 때가 있어도 , 제대로 읽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그냥 가만히 서 있었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 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관심을 갖고 자세히 보니 그는 그렇게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흘깃흘깃 다른 승객들을 쳐다 보았다. 형형하지만 이상하게 싫은 그 눈동자가 부지런히 좌우로 움직였다. 그는 지하철의 많은 사람들 사이에 서서 그는 그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잠깐잠깐씩 빠르게 돌아 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과 눈이 마주치거나, 누군가 그를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생기면 신문을 펼쳐 보는 것처럼 하며 눈을 피했다. 가끔 어떤 사람을 보고 나서는 몇 발자국 자리를 옮겨 설 때도 있긴 했다. 하지만 어떤 무서운 사람이나 경찰을 피해서 옮겨 서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 식으로 그는 아침마다, 사람이 가득한 지하철을 1시간 30분 가량 타고 간다. 며칠을 지켜 보아도 그 이상의 행동은 없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왜 그러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는 분명히 사람들을 살피는 것 같았다. 그것은 분명하다. 그냥 대충 훑어 보는 것인지, 잘 따지며 관찰하는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그 자는 사람을 보는 것에 관심은 있었다. 매번 지하철 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릴 때 그런 습성은 더 잘 나타난다. 그는 역에서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지하철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는 역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걸어 간다. 걸어 가면서, 흘깃흘깃, 서서 기다리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본다. 마치, 오늘은 어떤 사람들과 지하철 같은 칸에 타는 것이 좋은 지 결정하기 위해, 같이 지하철을 탈 승객을 고르는 것 같아 보였다.

 온갖 상상을 하다 보니, 나는 그가 폭탄을 터뜨릴 기회를 엿보고 있는 테러리스트는 아닐까 싶었다.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장소와 시간을 물색하고 있는 것이다. 단추를 누르면 펑하고 터지는 폭탄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무슨 세균이나 독가스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마침내 그가 독가스 폭탄을 터뜨리고 콜록거리며 모두가 허겁지겁 대피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나는 그의 범행이 다음 주이기를 바랬다. 이번 주라면 안 된다. 시험직일 때에 독가스를 마셔서 지각하거나 병원 간다고 결근한다면 분명히 점수를 못 딸 것이다. 불의의 사고에 의한 결근이니 벌점이야 잘 하면 안 받을 수 있겠지만 그 사실을 입증하려고 여기저기 이 말 저 말 하는 동안 삐끗하면 “위기 관리 능력이 떨어진다”거나 “보고 태도가 불량하다”는 평을 들을 지 모른다. 그게 아니라도 결근을 하면 그 만큼 남들이 따는 점수를 딸 기회는 놓치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음주라면, 다음주에 만약 독가스가 터진다면 그 때는 정규직으로 채용된 후일 것이다. 그러면 휴가도 낼 수 있고, 회사의 병원비 지원도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괜찮다. 별 걱정 없다.

 독가스 생각을 했더니 그게 아니라 다른 범죄일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하철을 매일 아침마다 꼬박꼬박 타는 이유. 뭐가 있겠는가? 지하철을 타고 있는 장점이 뭐겠는가? 그것은 많은 사람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 많은 사람의 얼굴 중에서 범죄의 희생자를 물색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지하철에서 예전부터 이뤄지던 소매치기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얼굴 표정이나 행색으로부터 어떤 사기에 잘 걸려들만한 사람을 찾고 있을 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대머리인 사람에게는 가짜 발모제를 팔 수 있고, 피부가 거친 사람에게는 가짜 화장품을 팔 수 있다. 수험 서적을 읽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면 그 사람에게 인터넷 강의 수강권 사기라든가 하는 것을 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 스스로가 본격적인 범죄의 핵심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 사람은 범죄의 희생자를 골라내는 역할만 하고, 나중에 낮에 아지트로 돌아 가 이런저런 사냥감을 발견했다고 범죄단의 두목에게 보고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럴 만도 했다. 그의 얼굴이 불길하고 표정이 싫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말솜씨가 좋고 재치 있어 보인다거나 달리기가 빠르고 완력이 있어 보이는 모습은 아니어서 어떤 범죄에 익숙할 만한 신체를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 그의 역할은 희생자 포착이고, 실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따로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그가 희생자를 포착해서, 그와 비슷한 여러 희생자 탐색꾼들이 포착한 여러 희생자들을 종합하는 관리자에게 알려 주면 그 관리자가 모든 내용을 다 모아서 일을 실행하는 범죄꾼에게 전해 줄 것이다. 혹은 그가 희생자를 포착해서 관리자에게 알려 주면, 그 관리자는 그 중에 가장 좋은 목표물을 고르는 분석자에게 전달해 주고, 그 분석자가 고른 희생양을 범죄꾼에게 전달해 줄 것이다. 또는 그가 희생자를 포착해서 관리자에게 알려 주고, 관리자가 분석자에게 전달해 주면, 여러 범죄꾼들 각자의 특징에 가장 잘 맞는 사람을 골라 일을 배정해 주는 선택자가 있고, 그 선택자가 자기가 고른 범죄꾼에게 알려 줄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가 희생자를 포착해서 관리자에게 알려 주고, 관리자가 분석자에게 알려 주고, 분석자가 선택자에게 알려 주면, 그 선택자가 범죄의 수입과 위험을 관리하는 금전 담당에게 일을 넘기면, 그 금전 담당이 어떻게 돈을 나눌 지를 정한 뒤에 거기에 동의하는 범죄꾼에게 일을 넘겨줄 것이다. 아니면, 뭐 그 비슷하지만, 좀 다른 식으로.

 그 생각을 하면서 그 자를 관찰하고 있다 보니, 혹시 그 자가 새로운 또다른 우주 연구 기관의 직원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이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사람의 다수는 우주 연구와 관련된 공공기관의 직원들이다. 그렇다면 확률적으로도 그게 맞을 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 기관은 실제로 도움이 안 되면서 사람만 많은 지나치게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다는 비난에 시달리고 있다. 어제도 비슷한 기사가 나왔다. 우주 연구에 방만한 조직이 문제라는 지적은 이틀에 한 번 꼴로 TV에도 나온다. 다들 취업이 안 되고 직장이 불안한 세상이니, 해고될 걱정이 없는 공공 연구 기관인 우주 연구 기관 직원들을 사람들은 다들 싫어 한다. 그러니 욕을 대신해 주는 TV프로그램은 인기도 많다.

 이럴 때, 당국에서는 어떻게 하겠는가? 뻔하다. 이번에는 방만한 조직을 효율적으로 만드는 역할을 하는 새로운 조직을 하나 더 만들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새로운 단어를 넣어서 좀 새로운 조직인 느낌 정도야 주겠지. 예를 들면 기관 이름에 “콘트롤 타워” 이런 말을 쓸 것이다. 우주 연구 통합 계획 예산 관리 재단 감시 공사 점검국 옵저버 효율화 콘트롤 타워. S.R.U.P.A.M.I.R.O.E.C.T, 스루파미로엑트라고 이름을 붙이면 되겠지. 그런 게 이미 생기고 있는 지 누가 아는가? 그 자는 바로 이 스루파미로엑트, 혹은 뭔가 더욱 거지 같은 이름의 새로 생긴 기관의 직원인 것이다. 그 직원의 역할은 다른 우주 연구 기관의 직원들을 관찰하는 것이다. 혹시 뭔가 비효율적인 것은 없는 지, 출근하는 모습, 회사 바깥의 모습부터 관찰하면서, 다른 기관의 직원들을 지적하고 감시하고 괴롭히는 역할을 하는 인간일 수도 있지 않을까?

 처음 그 자를 발견했을 때만 해도 나는 그렇게 괴상하고 불길한 사람이 우리와 같은 우주 연구 기관들의 직원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지난 몇 주일 동안 시험직으로 일하면서 나는 생각이 바뀌었다. 지금은 저렇게 불길한 사람이야 말로 분명히 우주 연구 기관의 직원 중 한 명으로 어울리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단정한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 입고 출근하는 스루파미로의 직원들과 그 자의 옷차림은 분명히 다르다. 그렇지만 기관에 따라서는 또 적당히 눈치를 보며 남들과 최대한 비슷해 보이는 청바지와 줄무늬 셔츠만 입고 다녀야 한다고 믿고 다니는 곳들도 있다. 그런 곳의 인간들은 또 그 나름대로 다들 그렇게 비슷비슷한 옷차림이다. 그 자는 계속 초록색 거위털 외투만 입고 나타나고 있었다. 칙칙한 색깔 거위털을 다들 입는 것이 마땅하다고 서로 눈치를 주고 있는 기관도 있을 것이다. 그게 증거가 아닐까?

 매일 아침 그를 볼 때 마다 나는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다 따져 보았다. 하다 못해 그가 무슨 바이러스를 갖고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도 많이 감염시키기 위해 사람 많은 지하철을 탄다는 생각까지도 해 보았다. 실제로 지난 달에 민간인 우주 비행 사업으로 우주에 갔다 온 한 변호사가 자기가 시리우스에 딸린 외계 행성에 날아 온 우주 바이러스에 감염 되었다고 주장한 일도 있었다. 그 변호사는 결국 제 정신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지만, 이 사람은 또 모르지 않는가?

 하기야, 그냥 워낙 특이 한 사람이라서 그냥, 별 이유 없이, 그 자가 그러고 싶어서 아무 이유 없이 아침마다 지하철을 탄다고 하면 그냥 해결되는 문제이기는 했다. 그녀가 매일 저녁 오늘도 너무 바빠서 연락할 시간이 없었다면서 메시지에 “건강은 조심하라고” 답을 해 줄 때 즈음이 되면, 나는 쓸데 없는데 신경쓰지 말자, 그 자 따위 내 삶에 아무것도 중요한 것도 아니다 싶었다. 그러나 바로 그리고나서도 그 다음날 아침 지하철 역에서 그 자와 마주치면 생각이 바뀌었다. 그 자는 확실히 흉한 징조로 보였다. 생각 이전에 감성의 문제였다. 그 자는 뭔지 모를 나쁜 것의 상징처럼 보였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은 흘렀고, 나는 시험직 탈락자가 발표 되는 일요일을 맞았다.

 원래는 그녀를 만나자고 청했었는데, 그녀는 첫 근무를 하는 동안 너무 심하게 일을 해서인지 몸살이 났다며 집에서 쉬겠다고 했다. 나는 푹 쉬고 얼른 나으라고 한 뒤에, 내가 약이나 보양식이라도 사다 줄까라고 물었다. 그녀는 거절했고, 그러자 나는 쉴 때는 역시 그냥 꼼짝도 안 하고 침대에 푹 파묻혀 있는게 장땡이라고 맞장구 쳐 주었다.

 그러고 보면 하루 종일 발표를 기다리며 초조할텐데 그녀를 만나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닐 성 싶었다. 몇 번이나 전화기를 들여다 봤는 지 모르겠다. 초조해 하는 것은 당연하다. 드디어 내가 지옥으로 가는 4분의 1에 속하는 지 아닌지가 결정되는 순간이니까.

 그 짜릿한 순간은 오후 2시 13분이었다. 나는 방바닥에 드러누워 멍하니 벽지의 무늬를 보고 있었다. 벽지에 좌우로 무늬가 44개 반복 된다는 것을 헤아렸을 때, 나는 다시 탈락자 명단을 조회해 보았다. 그리고 그때 탈락자가 발표 되어 있었다.

 나는 탈락자 명단에 없었다.

 처음에는 겁나서 대충 훑어 보았고, 두번째는 기뻐하며 찬찬히 살펴 보았고, 그리고 그 후로, 세 번째에서 백 번째까지는 신나게 차근차근 반복해서 살펴 보았는데, 역시 나는 꾸준히 명단에 없었다. 방 바닥에 누운 나는 좌우로 뒹굴며 기쁨을 표출 했다. 서 있었다면 방방 뛴다든가 하는 동작으로 부드럽게 이어졌을 텐데, 누워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동작은 뒹구는 동작 밖에 없었다.

 나중에 들어 보니, 겨울철 사무실 난방 온도를 기준 보다 2.2도 잘못 맞춰 놓은 것 때문에 결정적인 벌점을 먹고 떨어진 사람이 한 명이었고, 엘리베이터를 타지 말고 계단을 이용해야 하는 구간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벌점을 먹은 사람이 한 명이었고, 이면지 활용을 할 때에는 종이 못 쓰는 면에 빨간 글씨로 “이면지”라고 쓰고 이면지를 활용 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파란 글씨로 쓴 것 때문에 벌점을 먹은 사람이 한 명이었다. 그 외에, 신비롭고도 경이롭게도 자진해서 이런 직장은 다니지 않겠다고 그만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하나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마침내 이 기나긴 여정의 그 모든 관문을 돌파하고 드디어 스루파미로의 정규직이 되고야 말았다. 몇 주일 전만 해도 나는 만약 합격해도 너무 좋아하는 티 내지 말고 주위에 알리며 방정 떨지도 말아야지 하고 상상하기도 했는데, 막상 정말 합격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부모형제자매와 그녀를 비롯해서 내가 잘 된 일을 말해도 원한을 갖지 않을 만한 사람들에게는 모두 신이 나서 내가 드디어 합격했다고 떠들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감격해서 목소리에 눈물이 섞여들 정도였다. 태어나서, 부모님께서 온 힘을 다해 기르시고, 몇 십 년간의 학교 생활과 갖은 교육을 받고 잡다한 학원을 다니며 여러 인턴과 시간제 임시 일자리에서 일을 하여 내가 지금껏 인생을 산 그 모든 것이, 바로 이 목적, 스루파미로에 합격한다는 이 순간의 목적을 위해서였던 것만 같았다.

 다음날 아침, 이제는 시험직이 아니라 정규직이 된 나라는 새로운 인간이 출근 길에 나섰고, 그리고 어김 없이 그 자를 만났다.

 여전히 불안하고 불길했지만 이제는 최소한 무섭지는 않았다. 나는 그 자가 내 쪽을 쳐다 볼 때마다 피하지 않고 똑바로 쳐다 봤다. 두리번 거리는 그는 그때마다 점점 더 기분 나빠하는 듯 했다.

 그리고 내가 내리는 지하철 역에서, 나는 그 자를 불러 세웠다.

 “저, 죄송한데요. 계속 지하철 역에서 제 쪽을 보시던데. 무슨 일 있으세요? 뭐하시는 분이신가요?”

(이후의 결말은 오는 2월 4일 덧글로 공개 됩니다.)

댓글 5
  • No Profile
    미로냥 17.02.01 16:09 댓글

    아니! 결말 너무 ㅋㅋㅋㅋ 신박하세요! ㅋㅋㅋㅋ 깜짝 놀랐습니다.ㅋㅋㅋ

  • 미로냥님께
    No Profile
    곽재식 17.02.03 12:46 댓글

    쓰고 나니 너무 유혹이 강해서 한번 저질러 봤습니다. 곧 결말 공개해 드리겠습니다.

  • No Profile
    이지훈 17.02.03 01:17 댓글

    안녕하세요 작가님. 꾸준히 읽기는 했는데 덧글 다는 건 오랜만이네요.

    재식 님 글의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는 건 최악의 레이싱 이후로 항상 있는 일이지만 오늘은 정말이지 각별하네요. 좋은 대학 나와서 (그냥 왠지 취직하기 싫은데?)라는 심정일 뿐이지만 대학원 가서 석사 까지 하고 누구난 알 법한 번듯한 대기업 연구직으로 취직한 것 까지는 좋은데, 9시, 10시, 11시에 퇴근하면서 극소수의 자본가를 위해 너무 많은 사람의 인생이 희생되고 있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고 새벽에 받는 라인에서의 문자로 잠을 깨는 일을 몇 번 반복하자 여기 더 있다간 자살로 인생을 마감할 뿐이란 깨달음을 얻은지 거의 1년이 다 되어가네요.

    딱히 들인 고생에 비례해서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맨날 천날 야근하고 주말에도 불려나가고 하는데 라인 생산직들은 우리는 가입도 불허되는 노조에 소속되어 무슨 사고가 터지든 하루 8시간만 일하면 바람같이 퇴근하는 걸 보면서, 아, 이건 벌이다. 학창시절 그깟 알량한 수학문제 남들보다 조금 더 잘 푼다고 세상에서 지가 제일 잘났다고, 그런 되도 안한 교만한 생각을 했던 천벌을 지금 이런 식으로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날 퇴직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렇게 멋지게 박차고 나온 것은 좋은데 공기업 입사라는 것이 그렇게 생각만큼 알량하지 않고,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이 입사했을 때와 달리 NCS인지 뭔지 하는 것이 생겨 고등학교 시절 만큼 공부를 해야 하는데다가, 팔자에도 없이 한국사나 영어 까지 붙들고 있는 걸 보고 있으면. 그 와중에 입사전형을 살펴보면 합격 후 바로 오늘 이 글의 본문에도 쓰인 것과 같이 몇 달 간의 수습기간을 거쳐 90점 이상의 인원만 정규직 채용 뭐 이런 내용을 읽고 있으면 그냥 가슴이 답답해지는데 일단 그 이전에 합격이나 하자 싶고

    그런 와중에 뉴스에서 인공지능이 현재 일자리의 90%를 다 쓰레기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뭐 이런 소식을 듣고 있으면 그냥 한 5년 일하다 자살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회사에 붙어있어야 했던 게 아닌가 싶고 뭐 그렇습니다. 한 5년쯤 다니면 그런 회사도 마법같이 적응되고 그럴지 누가 아는 일이겠습니까? 당장 제 동기들도 온갖 욕을 하면서도 다 멀쩡히 다니는데 말입니다. 이게 다 최순실 때문일까요?

  • 이지훈님께
    No Profile
    곽재식 17.02.03 12:47 댓글

    으으으 절절한 덧글 대단히 감사합니다. 덧글을 여러 차례 반복해 정독하게 됩니다. 저 역시 말씀하신 것과 아주 같지는 않지만 비슷하게 항상 하고 있는 고민이고, 그러다 보니 이런 류의 소설을 자주 쓰게 되나 봅니다. 이 소설의 결말 (별로 도움은 안 되실 결말이라 좀 죄송스럽네요.) 및 앞으로의 소설로 같은 고민 계속 나누어 보겠습니다!

  • No Profile
    곽재식 17.02.03 19:44 댓글

    (이제 결말을 공개합니다. 아래와 같습니다.)

     

     

    나는 그토록 참았던 질문을 그의 얼굴에다 대고 그대로  주었다답을 듣지 않았지만  질문을 하는  만으로도 이미 답답한심사의 75% 후련해진 느낌이었다.

     

     뭐야이게 뭐야?”

     

    의외로 놀랐는지 대뜸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길을 가는 나를 불러 세웠다는 것이 매우 짜증났다는 태도였다그리고 그는 다시반대편 지하철을 타려고 뛰어 갔다나는 그를 따라 가며 다시 말했다.

     

    저는 이쪽에 직장이 있어서 매일 지하철 타는 사람인데요매일 지하철 타셔서 자꾸 주변 사람들을 쳐다 보시더라고요그래서궁금해서요도대체 뭐하시는 분이세요?”

     

    그는 다시 나를 쳐다 보고 소리를 질렀다뭐가 그렇게 아침부터 짜증스럽고 화가 나는  그는 조금도 참지 않고 내키는 대로 고함쳤다그리고 그는 그대로 가려고 했다나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요뭐하시는 분인지 그것만 그냥 짧게 말씀 해주세요.”

     

    그러자 그는  얼굴에 들고 있던 신문뭉치를 집어 던졌다.

     

    그리하여 그때부터는 나도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고그를  강하게 붙잡자 그는 나를 밀쳤고그리고 우리는 엉겨 붙어 같이 자빠졌고이제 꼴사납게 지하철역 돌바닥을 뒹굴며 주먹질과 발질질로 싸우기 시작했다.

     

    그날 나는 결국 해답을 알아 냈다 자는 갑작스럽게 많이 늘어난 우주 연구  기관의 직원들 때문에 지하철에 너무 사람이 많다는 불만을 취재하는 신문사의 기자였다 차례 기사 원고를 써서 올렸지만 정도로는 요즘 인터넷 환경에 적합하지 않다는평가를 받으며 선배 기자에게 계속 쌍욕을 먹어 재삼 다시 취재를 하고 있던 형편이었고  스트레스를 견디기 어려웠다고 했다.

     

    그런데그는 다음날 “우주 연구원 직원들이 잘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있으니까 해이해져서 업무도 대충하고 도덕적으로도 부패해 가고 있다 요지의 전혀 다른 기사를  보냈다.

     

    기사가 이렇게 많이 뜨면 그건 정말 어쩔 수가 없네요다른  가서도 건승하시고요.”

     

    회사에서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파면 처리가 완료될 때까지 내가 출근한 날은  8일이었다.

     

    - 2017역삼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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