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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이립 폴라리스의 기사

2016.11.30 19:5711.30

폴라리스의 기사

– 유이립 –

폴라리스.
지금은 멸망한 북방의 나라
사악한 제국에 짓밟힌 작은 소국
그곳은 1년 내내 살 눈이 꽃피고, 얼음에 웃음이 맺혀있다.
춥지만 가슴은 서늘하지 않은 고향
제국의 기습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얼음꽃 기사가 고향으로 귀환한다.
폴라리스의 공주가 달아준 얼음 꽃을 가슴에 매달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정미현이 출근했다. 파티션으로 업무공간이 깔끔하게 나뉜 사무실은 효율적이었다.

 밝은 형광등 아래 훤하게 드러난 사무실 질서는 흡사 고대 로마의 잘 정리된 도시를 떠올리게 했다. 직책이 높을수록 사무실 안쪽, 낮을수록 출입구 쪽으로 흘렀다. 사무원 개인 파티션 벽마다 하얀 종이가 붙어 있었다. 정미현은 책상에 핸드백을 내려놓고, 안내문을 뜯어 읽었다.

 - 테러방지법에 의거하여, 사원 전부의 개인 정보와 기록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겠습니다. G방송국 뉴스를 통해 상황을 참조하여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시길 사원 모두에게 요청 드립니다. -

 정미현은 안내문의 통보에 놀라 일시적으로 의식이 문자에서 멀어졌다. 감각을 예민하게 날 세우고 처음부터 다시 훑어봤다.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개인정보를 조회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사생활을 내보이라는 소리였다. 컴퓨터를 켜자 부팅소리를 내며 전원을 빛냈다.

 컴퓨터 냉각 팬 소리가 윙윙대며 속도를 높였다. 바탕화면이 떠올랐다. 일시적으로 높아진 팬 회전 소리가 낮아지기도 전에 메일이 왔다는 알람 소리가 성급하게 울렸다.

 - 정미현 사원님에게 사원 전체 수신 메일이 왔습니다. 열람해주세요. -

 메일 링크 주소는 G방송국 뉴스영상으로 연결됐다.

 오늘 새벽에 국회 의사당에 테러 사건이 일어났다.

 비행 드론에 대형 LPG가스통을 매달고 국회 의사당 입구로 돌진시켜서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아나운서는 정미현이 따라가지도 못할 정도로 속사포처럼 빠르게 상황을 중계했다.

 “범인은 B대기업 5차 하청 비정규직 직원으로 상속세 폐지와 불법 인력파견에 항의하기 위해 테러를 저질렀습니다. 경찰은 B대기업이 로비 중인 대기업 인력파견 확대법안을 사전에 알고 있는 점을 미루어 B대기업 내에 공범 혹은 동조자가 있을 거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테러방지법에 의거하여 B대기업 종사자들을 모두 조사하기로 방침을 정했습니다.”

 정미현은 자신이 5차 하청 업체 노동자와 얼마나 가까운 관련자일까 계산했다. 뉴스 하단에 테러범의 사진을 떠올랐다. 한 번도 본 적 없었고, 만날 가능성도 없었고, 하는 일도 달랐다. 같은 대기업에 묶인 노동자이지만 분명 아무 관계없었다.

 뉴스영상이 끝나자마자 팝업이 떠올랐다.

- 사원 개인정보 조회와 기록 조회 -

1. 가입한 사이트 및 포탈. 혹은 통신사.
2. 인터넷 클라우드 및 저장 공간.(내용 확인 열람을 위하여 저장된 데이터 관련/제작 회사에 협조 요청 예정)
3. sns 기록 및 sns지인.
4. 보건 기록 및 사회 인프라 공공시설 사용 기록.
 테러범과 무관하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원들이 개인정보 공개에 동의해야 합니다. 건전한 사회, 안전한 내일을 위하여 모두 협조해 주셔야 합니다.
 사내에 파견된 테러부 공무원이 오늘부터 조회를 집행할 예정입니다.

 “이건 검열이야.”

 정미현 옆에서 뒤늦게 출근한 직원이 중얼댔다.

 동료 직원도 역시 안내문을 보고 자리에 않을 정신이 없어 보였다.

 직원들이 사무실 보안 유리문을 열고 한두 명씩 출근했다.

 그 중 일부는 재택근무로 전환하여 한동안 출근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뉴스 봤어? 이제부터 재택근무자들은 스마트 폰으로 집에서 업무하는 모습을 중계하래.”

 “왜요?”

 “테러범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라는데. 말이 돼?”

 정미현 주위로 불만과 원성이 개구리 울음소리처럼 끊이지 않고 반복됐다.

 정미현은 테러에 관해 숨길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드러내고 싶은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좋지도 않았다. 이런 걸 결정하는 사람은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나를 숨길 자유도 있었다.


모니터에 떠오른 화면이 빛이 되어 책상 위로 내리 앉았다.

 정미현은 업무시간에 몰래 sns에 접속하여 세간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테러방지법에 의한 B대기업 사원 검열 소식에 세상이 떠들썩했다.

 검열 순서는 무작위지만, 파악하기 어려운 데이터를 가질수록 순번이 뒤로 밀려 놨다.

 이게 좋은 건 아니었다. 순번이 뒤로 밀려놨다는 건 시간적 여유가 많아서 테러부 파견 공무원들이 더욱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사전에 개인정보 기록과 클라우드 저장 데이터를 지울 수도 있을까? 라 생각했지만 모든 인터넷 서비스 업체는 국가에 삭제기록을 제출해야 했다.

 꼭 지금처럼 테러 직후가 아니라 평시에도 누가 무슨 데이터를 지웠는지 보고했다.

 만약에 테러부가 활동을 개시한 후 조사 대상자 중 누군가가 데이터를 삭제하거나 수정하면영장 없이 긴급 체포 된다고 들었다. 소유자 본인이라 할지라도.

 정미현이 의자에서 몸을 살짝 일으켜, 파티션 경계너머를 살폈다.

 사람들은 기계적인 업무에 정신이 팔려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얼굴에 맺힌 짜증이 검열 때문인지 업무 때문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이들은 검열이 괜찮다는 건가? 걸릴 게 없다는 건가?

 왠지 혼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같아서 주눅이 들었다.

 정미현은 테러 공범도 동조자도 아니었다. 그냥 개인 취향인 데이터였다. 게임 데이터였다.

 그러나 게임이어서 더 두려웠다. 테러부 공무원이나 회사 관리자들 중에 상급자들은 거의 남자였다. 남자들이 게임을 더 잘 파냈다.

 남자들이 볼까봐 두려운 게임이었다.

 6시간 뒤 정미현은 업무시간 중에 sns를 통해 테러방지법에 반대하는 릴레이 시위단체를 찾아냈다. 현재 1800일째 시위하고 있는 현장으로 찾아오면 상담부스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라는 안내가 있었다. 정미현은 갑자기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거래처가 떠올랐다.

 관리자에게 사내 메신저를 보냈다.

 - 정미현 사원입니다. 거래처 방문을 통해 합의된 사항을 재확인하고 싶습니다. 2시간 정도 걸릴 외근입니다. 내일이나 내일 모레 외근을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

 - 테러부 조회 때문에 업무가 잠정적으로 한산해질 거야. 그냥 지금 갔다 오게. -

 정미현은 당장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런 격한 움직임이 파티션을 넘어 옆자리 책상까지 흔들었다.


테러방지법 폐지 릴레이 시위장은 대학가 부근 연극로였다.

 인근 공원에 천막을 설치하고, 입간판 세웠다. 플랜카드가 걸려있는 두 나무가 마치 입구처럼 보였다. 천막 앞 부스에 서 있던 사람들이 ‘테러방지법에 쫓기는 잠재적 테러범들의 모임’이라는 조끼를 입고 있었다. 정미현이 상담을 문의하자 천막 안으로 인도했다.

 천막 바닥에는 비닐 돗자리가 깔려 있었다. 돗자리 곳곳에 흠집이 나서 속삭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 이불이 제대로 접히지 않고 몰려 있었는데 퀘퀘한 냄새가 났다.

 천막 중심 기둥에 전구 대신 손전등이 교수형 사형수처럼 매달려 있었다.

 제대로 된 책상 대신 바닥에 라면 박스가 놓여 있었다. 바닥에 털썩 앉은 정미현 맞은편에 한 남자가 다가와서 명함을 건넸다. 명함에는 ‘인권을 짓밟는 테러방지법에 반항하는 저항군.’ 이라 소개돼 있었다.

 “전 변호사는 아니지만 테러방지법과 개인 사생활 보호에 대해 많이 연구했습니다.”

 볼이 홀쭉할 정도로 말랐고,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는데 새치가 보였다. 안경 뒤로 보이는 눈빛이 날카롭지만 공격적이지는 않았다. 얌전한 학구적인 얼굴이 아닌 물질세계보다 정신적 세계를 더 우선시하는 이상주의자처럼 느껴졌다.

 “…저는….”

 “신분을 밝히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정미현은 에둘러 간접적으로 설명했지만 상담사는 한 눈에 상황을 파악했다.

 “B기업 테러방지법 개인 사생활 침해군요.”

 “…예.”

 “대기업 같은 경우는 입사할 때 노동 계약서에 기업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산업 스파이 조항에 테러방지법까지 포함됐기 때문에 까다롭습니다.”

 “하지만 동의하지 않으면 입사할 수 없어요.”

 “기업 측에서는 자발적이라 주장합니다. 하지만 강제성이 분명히 있기에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소송을 거셔야 합니다. 재직 중에 소송을 거시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무슨 소리인지 아시겠습니까?”

 “…소송비용이 어느 정도 하나요?”

 상담사는 정미현의 분위기가 매우 극단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걸 인식했다.

 “개인 사생활 침해는 모두가 싫어합니다. 그래도 뭐 때문인지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브레인토피아 크래프트라는 게임을 아시나요?”

 “예. VR머신으로 하는 RPG 게임 맞죠?”

 “정확히 말하면 VR머신용 RPG 게임을 만드는 제작 툴이예요. 제가 클라우드에 게임 제작 데이터를 저장하고 있어요.”

 “…게임 기획자입니까?”

 “아니요.”

 “그럼 제작 중인 게임을 상업화 하시려고?”

 “아니요.”

 상담사는 정미현의 눈빛이 변했다는 걸 느꼈다.

 눈빛이 긍정인지 부정인지 읽기 힘든 참 기묘한 여자였다.

 “…제가 알기로는 브레인토피아 크래프트 제작사 치킨헤드는 외국 기업이라 국내 테러방지법과 거리가 있는 입장입니다. 테러방지법을 통해 데이터를 풀려고 하면 제작사에 요청해야 하는데 외국 기업들 거의 대부분은 개인의 자유를 내세워 응하지 않고 있습니다.”

 “음. 다행이네요.”

 말은 괜찮다고 하지만 상담사는 정미현의 눈빛을 계속 읽기 힘들었다.

 얼굴 표정도 뚜렷하지 않아 감정이 없어 보였다. 외형은 평범한 직장인인데 느껴지는 기운은 매우 강했다. 복잡해보여서 어떤 사람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게임 데이터는 테러방지법 조회 집중 대상이 아닙니다. 아마 잘 보지 않을 겁니다.”

 “게임 데이터도 사생활이예요.”

 “그래도 게임 데이터 때문에 소송을 불사한다는 건…. 더구나 상업화 하지 않잖아요? 테러부 공무원들도 게임 데이터는 대충 훑어보기만 해요. 개인 정보는 어떤가요? 그쪽이 소송에서 풀어나가기가 쉽습니다. 테러부는 국민의 개인 정보를 마음대로 이용하거든요.”

 “저한테는 게임 데이터도 소중한 개인정보예요.”

 정미현은 대충 훑어본다는 말이 걸렸다.

 일단 본다는 자체가 마음에 안 들었다. 사회적 가치가 큰가? 작은가? 가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원하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이유 아닌가? 누구도 게임 데이터를 볼 수 없어야 했다. 이에 대해 더 설명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그 문제는 여기서 논의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리고 누구하고도 논의하기 힘든 문제였다.

 “국내에도 VR머신 게임 제작 툴이 있어요. 그동안 테러부가 요청한 국내 제작사들은 게임 데이터를 풀어줬나요?”

 “예.”

 “플레이 할 수 있게?”

 “…문화 담당 부서가 살펴본다고 알고 있습니다. 직접 플레이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궁금한데 어떤 게임인지 말해 줄 수 있나요?”

 상담사는 당황했다. 정미현은 더는 입을 열지 않고 쏘아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무표정한 게 정미현 입장에서는 그냥 지그시 쳐다보는 것 같아 보였다. 상담사는 정미현이 뭐라고 말해야 감정을 담아 쏘아보는 건지, 그냥 응시하는 건지 구별할 수 있는데 정미현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이 천막 안을 마비시켰다. 상담사가 정미현의 시선에 불편해서 헛기침했다. 정미현의 강렬한 집중에 시간도 굴복하여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정미현이 뚱하게 입을 열었다.

 “이런 세상에서 살기 싫어서 만든 게임이예요.”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테러부 개인 정보 조회가 시작됐다.

 정미현은 기업 건물 1층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옆 테이블에 남자 사원들이 우르르 몰려와 자리에 앉았다.

 한동안 의자 끄는 소리와 식판 내리는 쇳소리가 자그맣게 소란을 피웠다.

 “자네 들었어?”

 “마케팅부 김 대리 말이야. 취미가 뮤지컬 감상이라는데 정작 뮤지컬은 세 번 보고 명품 백은 일곱 개나 샀대.”

 “뮤지컬도 비싸요. 세 번 봤으면 아마 명품 백 1개라 계산해도 될 걸요?”

 “시집갈 때 그거 팔아서 재테크하려고 하나?”

 “에이 그럴 리가?”

 정미현은 옆 테이블에 놓인 식판을 쳐다봤다.

 금속 식판 표면에 남자들의 이름표가 반사됐다. 글자로 이름과 부서는 알아볼 수 없지만 각 부서마다 마크가 있었다. 총무부였다.

 기업 센터에 속한 총무부서는 테러부 파견 공무원 사무실 옆이었다.

 정미현은 스마트 폰을 작동시켜 사내 공고를 다시 읽었다. 테러부 공무원과 사내 테러부 협력 위원회의 활동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처음에 보고 그냥 지나쳤지만, 위원회원 중에 여자 간부는 한 명도 없었다.

 있었다하더라도 막을 수 있을까? 사람들이 저렇게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데.

 정미현이 야채 무침을 우드득 씹었다. 남자들이 돌아봤다. 정미현은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8시 뉴스를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몇 년간 해외 게임소프트와 프로그램 제작자들과 테러부 사이에서 개인정보 공개에 대한 대립이 있었습니다. 테러부는 국회 의사당 테러를 내세워 협력하지 않을 시 해외 게임소프트의 국내 시장 진출을 제한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해외 게임소프트 회사 일부가 테러부의 요청을 수락했습니다. 수락한 업체로는 브레인토피아 크래프트로 유명한 치킨헤드 사와…”


테러부가 테러 공모자를 잡겠다며 조사에 착수한 지 4일째 되던 날.

 한 여성이 B대기업 옥상에서 몸을 던져 자살했다. 1층 구석 사무실에 간이 분향소가 차려졌다. 사원들은 간부들이 사원들이 병원 분향소를 찾아가면 노동 효율이 떨어지기에 이런 비인간적인 조치를 했다고 분개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회사 앞에 조성된 공원 흡연실에서 다른 얘기를 꺼냈다.

 “…이혼했었구나. 난 몰랐어.”

 “나도 처녀인 줄 알았어요.”

 “임신했다가 유산해서 이혼했대.”

 “아~ 애를 가져서 그렇게 가슴이 컸구나.”

 남자들은 흡연실을 나와서도 이야기를 끊지 않고 무방비하게 떠들어댔다.

 정미현은 캔커피를 쥐고 공원으로 나갔다. 나무를 올려다보니 나뭇가지들이 이리저리 뻗혀서 그물이 돼 있었다. 햇빛은 나뭇가지 그물에 감겨 한 점의 빛으로 좁아졌다.

 정미현은 한줄기 빛이 들어오는 틈새로 하늘을 쳐다봤다.

 지상의 죽음과는 무관하게 탐스런 구름이 태평하게 바람에 떠밀리고 있었다.

 저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살고 싶었다.

 “오후 2시 뉴스를 시작하겠습니다. 테러부와 협력을 합의한 해외 게임 제작사 치킨헤드는 게임 데이터를 임의로 열람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테러부에 오늘 인계했습니다. 수많은 게임 팬들의 항의에도…”

 정미현이 설정한 태그어 ‘치킨헤드‘를 감지한 스마트 폰이 뉴스방송을 감지하고는 제멋대로 떠들기 시작했다.


퇴근한 정미현은 집에 들어가자마자 스마트폰이 메일 수신을 알리는 걸 들었다.

 폰과 연동된 피씨가 자동으로 부팅되더니 메일 관리 사이트로 넘어갔다.

 메일 내용은 단순했다. 축하하는 안내였다.

 - 정미현 사원님이 오셔서 환영합니다! -

 사내 맞선 알선 프로그램 가입 글이었다.

 회사는 전에 우수 직원에 대한 통계를 낸 적이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훌륭한 우수 직원들은 대학 성적 우수자이며, 키가 크고, 종교가 있으며 술, 담배를 하지 않는다고 대대적인 홍보를 했다.

 그리고 우수 직원들은 전부 안정된 가정을 꾸렸다. 안정된 가정을 가져야만 우수 직원이 될 수 있다. 홍보가 내세우는 조건 중 하나가 사내 맞선 프로그램의 강력한 근거가 됐다.

 기업 생산효율을 늘리기 위해 결혼을 권유하는 건 산업화시대에도 있었던 일이었다.

 문제는 법으로 전통적인 모노가미, 일남일녀제가 아닌 다른 방식을 혼인생활로 인정했는데도 기업은 산업화시대의 시야를 고집했다.

 안정된 가정의 의미는 정미현이 속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말이었다.

 “여보세요. 예. 저 정미현 사원입니다. 퇴근 후에 전화 드려서 죄송합니다. 제게 메일이 왔는데요.”

 정미현이 입을 열기도 전에 관리자가 속사포처럼 말했다.

 지금 테러부 파견 공무원에게서 코칭이 왔는데 사회에 불만이 많은 테러범들은 주로 미혼이거나 결혼을 못한 루저들이라고. 결혼을 하면 일단 안정됐다고 보기에 용의선상에서 제외된다고. 미혼이어도 일단 결혼 프로그램에 올라가 있으면 혼인할 의사가 인정되어 쉽게 처리된다고.

 “…예, 그렇네요. 그런데 이 프로그램에 꼭 참여해야 하는 걸까요?”

 회사 업무 때문에 전부는 아니지만 많이 참가할수록 진급 가산점을 얻는다고 설명했다.

 관리자는 진심으로 걱정했다. 정미현씨 자리 지나가다보면 여자 아이돌 사진을 너무 많이 보고 있다. 여자가 왜 보이 그룹을 보지 않고 걸그룹을 보냐?

 사람들도 정미현씨의 뚱하고 냉랭한 태도 때문에 오해한다.

 “어떤 오해요?”

 여기서 관리자가 말한 사람들은 남자를 의미했다.

 관리자는 아니다라는 전제를 가지고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동성연애자냐고? 말이 끝나자마자 아니지? 라고 물었다.

 정미현은 성적 소비를 위해 보는 게 아니라 아름다워서 동경하기에 감상할 수도 있다는 개념을 설명하려다가 멈추었다.

 정미현은 베란다 창밖을 내다봤다. 맞은 편 고층 빌딩에 가린 달빛이 희미했다.

 정미현의 의식은 통화를 벗어났다. 저 달이 오늘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라고 한다면 기꺼이 받아 들이겠다 라고 생각했다.

 “예.”

 관리자는 누가 뽑은 직원인데 이상한 사람이겠냐고 껄껄 웃어넘겼다.

 관리자는 정미현의 예를 부정으로 이해했다.

 사실 정미현이 사내에서 위치가 위험했다고 살짝 알려주며 호의를 베풀었다.

 정미현이 최저 임금제 상승과 생휴 관리제도 반대 시위에 나서서 많은 감점이 붙었다고 언질 해주었다. 관리자는 진심으로 걱정해주었다. 가뜩이나 감정이 많이 붙었는데 동성연애자이면 정말 위험하다고.

 “뭐가 위험해요?”

 그런 사람들은 직장생활을 충실히 하지 않는다. 아니 할 수 없다. 그들이 있으면 집단이 불편해서 혼란스러워 진다. 기업 입장에서는 예측이 안 되는 통제 불능 장애물이다.

 다시 한번 물었다. 동성연애자예요? 아니잖아요? 그쵸?

 정미현은 창밖의 어둠을 쳐다봤다. 어둠은 시선을 자연스레 밤하늘로 향하게 했다.

 저 멀리 작은 별들이 하늘에 수놓아져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세상을 창조하는 사람은 세상을 파괴할 권리도 있지 않나?

 정미현의 피씨에서 태그어 ‘치킨헤드’를 찾아내고는 자동으로 뉴스를 띄웠다.

 어떤 내용인지 오후에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있었다.

 “예.”

 관리자는 이번에도 아니라는 걸 당연히 알고 있었다 라고 대답한 후 껄껄 웃었다.

 정미현은 벌써 자신이 죽어서 관속에서 웃음소리를 듣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관속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흙의 기운과 삭막한 나무 벽에 발라진 니스 냄새가 느껴졌다.

 “저 내일 멘스 시작해요. 휴가 쓰려 해요.”

 관리자는 당황했다. 정미현은 왜 당황하는지 알았다.

 생리휴가 관리제도 폐지 후 한 프로그램이 개발됐다. 그 프로그램 이름은 루마니아였다.

 생리의 붉은 피에서 연상된 흡혈귀를 대놓고 쓸 수 없기에 순화했다.

 프로그램은 여성 직원들의 건강상태를 토대로 생리 주기를 감시했다.

 프로그램 존재는 비밀이었지만 모르는 직원이 없었다.

 그러나 정미현의 예상과 달리 관리자는 루마니아의 감시와 정미현의 주장이 일치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루마니아의 지속적인 압박에 여사원들은 굴복했다.

 B대기업은 경쟁과 진급평가가 치열한 곳이어서 여사원들이 거의 생리 휴가를 쓰지 못했다.

 그런데 정미현은 너무도 당당하게 요구했다.

 “산부인과 가서 의사에게 진료 내역서 떼 올게요.”

 루마니아를 만든 남자들은 생리가 마치 하나의 욕구처럼 특정 조건에서 작동했다가 해소되는 걸로 이해했다. 기분이나 몸 상태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유동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사원들은 산부인과에 일일이 들려 증명서를 제출해야 했다.

 그래도 환자의 편리에 맞게 생리증명을 협조해주는 산부인과가 생겼다는 건 남자들은 몰랐다. 정미현은 괜찮았다. 그 전부터 여사원들 사이에 내려오는 비기를 사용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관리자는 야밤에 여자와 생리를 논한다는 게 스스로 부끄러워 전화를 빨리 끊기 위해 허락했다.

 정미현은 피씨를 조작해 태그어 ‘치킨헤드’를 삭제했다.

 그들의 타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세상은 맞서 싸우기에 너무나 강력했다.

 분명 권리가 보호받을 법이 있었고, 이해받을 수 있는 세간의 인식이 있었다. 하지만 이 세상은 지금도 앞으로도 자본이 정하는 기준이 가장 우선이었다.

 보호받으리라는 생각은 버리고 스스로 지켜내야 했다. 앞으로 살아갈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고 있으니 추한 세상은 파괴하여 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현실에서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싸우지도 않고 굴복할 수 없었다.

 폴라리스를 지켜야 했다. 그곳이 정미현이 살고 싶은 세상이었다.


정미현의 신상정보가 관리자의 모니터에 떠 있었다.

 세밀하게 분류된 메뉴가 빽빽하게 인사관리 시스템의 상단을 꽉 채우고 있었다.

 정미현은 현재 열등사원 블랙리스트에 올라와 있었다. 그 전의 시위참여 경력도 문제였지만 태도가 반항적이었다. 모든 미혼 여사원들을 맞선 알선 프로그램에 올렸는데 전화한 건 정미현 뿐이었다.

 모두가 군말 없이 받아들이는데 혼자 이의를 제기하다니. 말은 공손한척 문의했지만 분명 따지는 태도였다. 본인도 사정을 이해하고는 받아들인 걸로 보이지만 왠지 모르게 삐딱했다. 왜 하필 이 난리 때 생리 휴가를 요청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괘씸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상이 맞아서 안도했다.

 역시 정미현 사원만 반응할 줄 알았다.

 테러부는 기업이 쌓아놓은 인사 정보를 파악하여 기업에 불충성스러운 직원들을 산출해 알려줬다. 테러부는 테러만 감시하는 부서가 아니었다. 기업과 상생하는 효율도 중요시 했다. 정미현의 정보를 관심 등급으로 바꿨다. 이는 인사 시스템을 열람할 수 있는 테러부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다음날 정미현은 회사로 가지 않고, 경기도에 있는 한 공단을 찾아갔다.

 공단 내부의 공장과 공장 사이에 폐자재를 버리는 쓰레기 수거장이 있었다.

 널따란 공터에 수많은 철근들이 무너진 성채처럼 쌓여 있었다. 옆 공장을 가릴 정도로 쌓인 폐자재 사이에서 역한 쇠 냄새와 비릿한 기름 냄새가 한 번에 코끝으로 밀려왔다.

 정미현은 게임 폴라리스 설정을 위해 스마트 폰으로 촬영했다.

 “늦었잖아.”

 정미현의 등 뒤에서 껄렁이는 말과 함께 누군가 갑자기 나타났다.

 정미현은 놀라지 않고 뒤돌아 말했다.

 “당신이 해커 나이트인가요?”

 “그럼 사람들을 위기에서 구해줄 정의로운 기사님이지.”

 나이트는 가죽 자켓을 입고 허리에는 사슬을 감고 있었다. 자물쇠를 목걸이처럼 걸고 있었다. 머리 모양은 레고 인형처럼 이마 선에 딱 맞추어 잘린 게 촌스럽고 바보처럼 보였다.

 남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저질 스타일을 쫓아가는 이 바보가 요즘 제일 잘 나가는 해커였다. 나이트는 정미현을 놀라게 하려고 뒤에서 등장했는데 흔들리지 않는 태도를 보고 조금 놀라는 듯 보였다.

 “의뢰가 있어요.”

 “왜 이렇게 늦었어?”

 나이트가 반말 투로 가볍게 말을 내뱉으며 손가락으로 철근 동산을 가리켰다.

 어느덧 날이 저물어 붉은 석양이 철근 동산을 시뻘겋게 달구고 있었다.

 “오늘 새벽에 보낸 메일로 내 사정을 대충 알거라 생각해요. 이에 대해 나는 내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의뢰를 하려고 해요.”

 “이러쿵 저러쿵해도 어차피 불법이잖아.”

 정미현은 무표정했다. 나이트는 상대에게 감정을 끌어내어 마이 페이스로 끌고 가려고 했는데 정미현에게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당신은 불법으로 먹고사는 사람이고, 나는 잠시 불법이 필요해요. 그러니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죠. 테러부가 움직였을 때 조사 대상자가 어떤 데이터든 삭제하면….”

 “즉시 영장 없이 체포되지. 데이터를 지우거나 수정해도 어떻게든 복구돼서 심의 위원회로 넘어가. 샅샅이 파헤쳐지지.”

 “…듣던 대로군요, 그 다음은 어떻게 되나요?”

 “데이터를 까본 심의 위원회가 재판으로 넘길 것인가 말 것인가 판단한 후 재판으로 넘겨지면 끝장이지만 풀어주면 벌금이지.”

 “벌금?”

 “테러방지법은 만능이니까. 조사를 저해한 것만으로도 중죄야. 벌금액수가 장난이 아니야.”

 정미현은 피씨와 클라우드를 연동시켜 폴라리스 데이터가 자동으로 클라우드에 저장되게 했다. 폴라리스는 피씨 작업분과 클라우드 저장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테러 조사가 정미현을 통과시키면 피씨 작업분은 안전하지만, 만약에 통과하지 못할 경우 개인 피씨 작업분도 조사 대상에 올라갔다. 하지만 클라우드 저장분은 테러와 무관했다. 단순히 보이기 싫어 감출 뿐인데, 감추려는 행동자체가 테러법 위반이었다. 무죄지만 유죄를 저지르기 위해 불법을 찾아 이곳으로 왔다.

 “내 데이터를 해킹해서 이동식 저장 장치에 담아주고, 나머지는 지워주세요.”

 “…사정은 알겠는데 고작 게임을 위해서 스스로 테러범이 되려는 거야?”

 “세상이 그렇게 몰아가는데 거슬러 살 수 없죠.”

 “피할 방법이 하나 있어. 활동 중인 테러부 공무원에게 자진신고 하여 데이터를 보여주고 수정이나 삭제 허락을 받는 거야.”

 “…그냥 불법을 선택할래요.”

 “거절하겠어. 테러부가 초창기와 달리 만만하지가 않아. 조사가 시작된 후 해킹하면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와. 너무 위험해.”

 “해킹 기록 자체를 지우면?”

 “…그럴 수도 있지. 난 매우 유능한 사나이니까. 그런데 고작 게임과 푼돈에 위험을 감수 할 수 없어.”

 “그럴만한 실력을 보이려면 액수가 얼마죠?”

 나이트가 액수를 말했다. 엄청난 금액이었지만 정미현은 진실이 아니라는 걸 꿰뚫어 봤다.

 조금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정미현을 흔들기 위한 장난이었다. 나이트는 정미현이 동요하지 않는 걸 보고 실패한 걸 눈치 챘다. 부끄러운지 화난 기색을 드러냈다.

 “돈을 줄 수 없다면 나랑은 관계없어! 이만 돌아가!”

 “아니 나한테는 관계있어요. 테러법을 집행하는 남자들이 싫고, 당신도 내 도움을 거절하고 있어요.”

 “…어.”

 나이트는 정미현 목소리에 담긴 억눌린 감정을 읽었다. 뭔가 예감이 들었다. 새삼 정미현이 다시 보였다.

 “그렇다고 내가 당신을 남자로 만들어 줄 수 없어.”

 “남자가 되고 싶지 않아요.”

 “당신 여자 좋아하지?”

 “…난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사랑을 하고 싶어요. 남자, 여자가 아니라 중요한 건 사랑이예요.”

 정미현이 정색하며 열을 올리자 나이트는 억센 기운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분위기를 돌리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날 어떻게 찾았어?”

 “사이버 와이즈.”

 제도권 내의 테크리트를 따라 체계적으로 축적된 지식이 아닌 인터넷에 간략하게 떠도는 얇고 넓은 조각 지식이었다.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본 걸 명확히 출처를 기억할 수 없을 때 사이버 와이즈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인터넷을 뒤져 정보가 있는 지를 확인했다. 문제는 있는 지만 확인하고 맞는 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사이버 와이즈는 빠르고 가볍게 정보를 확산시키지만 신용에는 문제가 있었다.

 “나 그 전부터 궁금했는데 여자들은 말이야. 아이돌이나 영화배우, 게임이나 만화에 나오는 캐릭터 같은 것들 엄청 좋아하더라고. 심지어 현실보다 말이야. 왜 그런 거야?”

 모든 여자가 다 그렇다고 단정 짓는 말투였다. 정미현은 절대 도발에 흔들리지 않았다.

 “사람마다 다른 거지 여자가 다 그렇다는 건 아니죠.”

 “그럼 당신은 지금 뭐하는 거야? 그깟 게임 데이터 때문에 테러법에 맞서고 있어.”

 “나 자신이 깃발을 휘날릴 만큼 순결하지 않으나 더렵혀지지 않은 세상을 갖고 싶어서요.”

 나이트는 입을 다물었다. 정미현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이 행동 역시 정미현에게서 동요를 끌어내기 위한 장난이었다.

 “당신 그럴 세상에서 살 자격이 있어?”

 “있어요.”

 나이트는 정미현의 확고한 자신감에 기분이 나빠졌다. 흡사 자신이 쓴 오답 옆에 정미현의 정답이 쓰이는 것 같았다. 한 치도 의심하지 않고 힘 있는 태도로 분명하게.

 “내가 한번 시험해 봐야 할 것 같은데….”

 정미현은 예전부터 이런 부조리를 겪어왔다. 모든 남자들은 여자를 시험할 자격이 있다고 믿는 불합리함이었다.

 “…해킹해서 지워줄 건가요?”

 “아니.”

 석양이 완전히 사라지고, 어둠이 툭 떨어졌다. 폐기장은 아무런 조명이 없기에 나이트와 정미현의 얼굴은 서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컴컴해졌다.

 “당신이 어떻게 테러부한테 살아남을지 궁금하군.”

 “이미 악의가 넘치는 이 세상에서 오래오래 살아왔어요.”


“오후 9시 뉴스를 시작하겠습니다. 최근 테러부 조사가 시작된 B대기업에서 한 여사원이 투신하여 자살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혼과 유산한 과거가 밝혀져서 수치심을 못 이기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걸로 보입니다. 이에 테러부 조사가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의견과 테러와의 전쟁이 최우선해야 한다는 의견이 국회에서 한참 대립하고 있습니다.”


정미현은 야근 중이었다. 천장에 달린 형광등이 창밖에서 밀려오는 어둠을 막아섰다.

 하지만 정미현의 자리는 사방이 파티션으로 막혀 있었기에 그늘에 잠겨 있었다.

 형광등은 밝지만 파티션 미로에 갇힌 사무원들은 각자의 그늘에 꼼짝없이 못 박혀 있었다.

 야근을 하지만 추가수당은 지급되지 않았다.

 회사는 ‘8시간 근무? 8시간의 능력! 8시간의 약속과 책임!’ 이라는 개떡 같은 내부 계약서를 내놓아 반강제적으로 서명하게 했다. 관리자들은 계약서와는 달리 8시간 이상 초과할 업무를 할당시켰다. 간부들은 8시간 일할 거리를 주었는데 제 시간에 못해서 야근 한다는 건 개인 능력 부족이기에 회사가 임금을 지급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능력부족으로 생긴 야근을 감당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열심히 일하는 건 아니었다. 제도는 업무에 관계없이 부조리가 되어 모두 야근하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굴복하게 만들었다.

 정미현은 마치 참호에 숨은 보병처럼 눈만 살짝 내놓아 주위를 살피고 숨기를 반복했다.

 브레인토피아 크래프트 커뮤니티에서 폴라리스를 설정할 디지털 이미지를 검색하고 있었다.

 사원들은 부조리한 제도 아래서 각자의 일탈을 못 본 척했다. 집단은 모르는 척 하는데 개인들은 겁에 질려 자신을 감시했다.

 폴라리스는 중심지 대륙 북부에 있으며 첨탑처럼 뾰족한 성을 가진 공국이었다.

 사악한 제국의 기습에 국경이 무너지고 성은 함락됐다. 제국의 함정에 빠졌던 기사단은 전멸했지만 그 중 한 명이 살아남아 고국으로 귀환해야 했다.

 서리가 낀 죽은 기사단원들의 얼굴을 보며 맹세했다. 반드시 포로로 잡힌 폴라리스의 공주를 구하고, 평화와 자유를 되찾기로.

 제국이라는 최종 보스를 무찌르고 강하다는 걸 증명하는 게 아니었다.

 그 동안 수많은 게임 서사들처럼 용사가 수많은 모험을 거쳐 최종 보스를 무찌르고 보상으로 공주를 얻는 가치관이 아니었다.

 그건 남자들의 발상이었다. 나쁜 세상에서 살기 싫고, 좋은 세상으로 향하는 게 중요했다.

 공주는 구조를 기다리는 보상이 아니라 중요한 클라이맥스로 여성성의 상징이었다.

 - 정미현 사원님. 테러부 파견 공무원이 협조를 요청합니다. 즉시 7층으로 가주세요. -

 커뮤니티 게시판 글 위로 메신저 메시지가 떠올랐다. 정미현은 확인을 누르기 전에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직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어제 저항 조직에 가입했는데 이렇게 빨리 부를 줄 몰랐다.


어제 정미현은 해커 나이트 외에 다른 방법을 찾고 있었다. 지금과 같은 강제 야근 시간에 검색을 하다가 사내 메신저 B채널로 연락을 받았다. 사원들은 관리자들을 피해 비밀을 나누는 채널을 공유하고 있었다.

 - 정미현 사원님. 현재 테러부 조사에 반대하는 저항 노조 창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관심 있으시면 연락주세요. -

 - 예. -

 정미현은 화장실 가는 척하며 그들과 접선했다. 계단 층계참에는 세 명의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셋 다 아직 관리자가 아닌 일반 사원들로 딱히 특징 있는 얼굴이 아니라 평범한 모범생 인상이었다.

 “저희는 테러 범죄자들이 아닙니다. 설사 동조자가 있다하더라도 이런 식의 내사는 절대 이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동의하시나요?”

 “예.”

 “우리는 회사가 내세우는 노동 규율을 엄수하여 성실히 일하고 있습니다. 이런 처우는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우리는 테러부 저항 노조를 만들어 팟캐스트 방송을 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모두 몇 명인가요?”

 한 남자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프린트 된 종이를 내밀었다. 누가 대기업 사원 아니랄까봐 부서, 직책, 이름이 세분화 되어 정리 잘 된 리스트를 만들었다. 이름표에 총부부 마크가 박혀 있었다.

 “총 600명입니다. 우리랑 같은 건물을 사용하는 그룹 센터 직원 400명에 계열사 직원 200명입니다. 갈수록 늘어나고 있습니다.”

 “정말인가요?”

 “투신자살한 사원에 대해 아시지요? 우리 모두 고인의 죽음이 부당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건 명백한 살인입니다.”

 노란 백열등 계단 조명에 허공에 떠오른 먼지들이 금싸라기처럼 반짝거렸다.

 정미현은 웃었다.

 남자들은 정미현의 웃음에 안도하면서도 약간은 떳떳하지 못했다.

 이들이 정미현을 찾아온 이유는 관리자가 정미현을 테러부에게 신상을 넘긴 걸 몰래 알아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 문제가 많으니 분명 협력할 거다.


테러부 파견 공무원의 호출 메시지의 확인이 꾸욱 눌러졌다. 정미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나갔다. 모두가 파티션 위로 시선을 한 번 보냈을 뿐 왜냐고 묻지 않았다. 누군가 일탈하면 나중에 자신도 일탈할 근거로 삼기위해 침묵했다.

 사무실은 환해도 절약을 위해 복도조명은 야간모드로 전환해 있었다. 벽에 붙은 LED조명이 던전의 횃불처럼 타올랐다.

 ‘8시간의 책임과 완수!’, ‘8시간의 집중과 즐거운 퇴근!’ 사내구호가 LED조명으로 새겨져 있었다. 붉은 조명이 사용된 사내구호는 간부들이 전하려는 의도와는 다르게 핏빛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이글거리는 LED가 간부들의 진정한 의도일지도 몰랐다.

 저항 노조원들이 미리 테러부 호출에 대해 가르쳐줬다. 어떻게든 알아내서 노조원들을 각개격파할 거라고.

 정미현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에 도착하여, 파견 공무원 사무실을 찾았다.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사무실 안이 한 눈에 들어왔다. 파티션으로 좁게 설정된 사무용 책상 외에 커다란 응접용 탁자가 있었다. 탁자 옆에 치과 의자와 비슷하게 생긴 의자가 살짝 뒤로 젖혀져 있었다.

 “어서 오세요. 정미현 사원님이세요?”

 한 남자가 정미현에게 다가왔다. 그동안 상상했던 파견 공무원은 예리하거나 위압적 일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정반대의 인상이었다. 생전 싸움 한번 해본 적 없을 것 같이 약한 체격에 어깨가 좁아 정미현이 약간 넓을 정도였다.

 “이리 앉으세요.”

 정미현은 치과 의자에 앉았다. 남자는 굉장히 조심스럽게 정미현을 대했다.

 손목을 의자의 손잡이와 일치시키라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성함과 직책이 어떻게 되시나요?”

 “저는 테러부 파견 조사원이라고 합니다. 이름은…”

 남자는 흥얼대는 듯한 부정확한 발음으로 말을 흘렸다. 일부러 감추는 게 아니라 원래 그런 성격처럼 보였다. 마치 정미현이 자신을 때릴 것처럼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다.

 “왜 저를 부르셨나요?”

 “정미현 사원님과 나눌 얘기가 있어서 호출했습니다. 녹음 및 촬영 기록해도 괜찮을까요?”

 “그럼 저도 녹음하겠습니다.”

 조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미현은 스마트 폰의 녹음 기능을 작동시켰다.

 조사원은 그동안 안절부절 했다. 정미현이 자세를 바로 잡고서야 불안을 멈추었다.

 “자 그럼 조사 들어가겠습니다.”

 정미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낮게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나더니 의자 뒤에서 전갈 꼬리처럼 뭔가가 반회전하여 정미현 눈앞에 내려앉았다.

 “이게 뭐죠?”

 “대화 기록 촬영장비입니다.”

 전갈 꼬리 같은 케이블 끝에 네모난 은색 디스플레이가 달려 있었다. 은색 화면에 반사된 정미현의 얼굴 위로 물결이 지나갔다.

 “첫 번째 질문. 파란 색이 좋습니까? 분홍색이 좋습니까?”

 “…파란색이요.”

 “두 번째 질문. 엄마가 좋나요? 아빠가 좋나요?”

 조사원은 정미현과 눈 마주치기가 겁이 나는지 수첩을 펼치고 뭔가를 적고 있었다.

 “이게 무슨… 엄빠요.”

 “예. 감사합니다.”

 “농담인데요?”

 “상관없습니다. 잘하시고 계십니다. 계속 편안하게 대답해주세요. 코끼리와 하마 중에서…”

 “코끼리.”

 “나무에 열매가 있습니다. 어떤 열매인가요?”

 “바나나.”

 조사원은 고지식한 태도로 정미현의 대답을 일일이 받아 적었다. 정미현은 갑자기 남자가 불쌍하면서도 귀엽게 느껴졌다. 하지만 긴장을 풀지 않았다. 언제 노조에 대해 질문할지 날카롭게 긴장을 유지했다.

 “자 그러면… 누가 당신에게 입을 맞추려 합니다. 남자일까요? 여자일까요?”

 “뭐라고요?”

 “누가 당신에게 입을 맞추려 합니다. 남자일까요? 여자일까요?”

 “이런 질문을 하는 의도가 뭐예요?”

 조사원은 개의치 않고 좁은 어깨를 더욱 좁히고 뭔가를 바쁘게 적었다.

 계속 물결치는 은색 디스플레이에는 정미현의 얼굴이 희미하게 떠오를 뿐 촬영하는 걸로 보이지 않았다. 정미현은 집에 있는 VR머신을 떠올렸다. 트라우마나 정신과 치료기구였던 오브젝트라는 기계가 발전하여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오락도구가 됐다. 오락도구에서 머물지 않고 다양한 용도로 뻗어나갔는데….

 “이 의자의 정체는 뭐죠?”

 “당신은 침대에 누워 있습니다. 옆에 같이 있는 여자는 긴 머리입니까? 아니면 짧은 머리입니까?”

 “이건…”

 사생활 침해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러면 인정하는 게 됐다. 저번에 죽을 각오로 커밍아웃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각오는 지금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와 지금은 달랐다.

 그때는 정미현의 방안에서 달을 보고 있었기에 혼자가 아니었다. 지금은 이런 괴물 같은 의자에 앉아서 고문당하고 있었다. 스스로 준비하고 보호할 어떠한 방법도 없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당신은 여자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닥쳐요!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당장 밝혀요!”

 은색 디스플레이가 정미현의 얼굴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화면에 붉은 글씨로 엑스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정미현은 붉은 엑스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제야 손잡이에 금속단자 센서가 감겨있는 걸 봤다. 내내 그 위에 팔목을 얹고 있었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조사원은 움츠러들다 못해 바닥으로 꺼지려했다. 아주 많이 이런 반응을 봤다는 듯이 그래서 당장에 어떤 일이 벌어질 걸 아는 것처럼 벌벌 떨었다.

 “거짓말 탐지기입니다.”

 “이건 심각한 인권침해예요.”

 “…아닙니다. 이건 회사에서 얼마나 정직한 가 조사하는 테스트입니다.”

 정미현은 할 말을 잃었다. 턱에 힘을 주자 꽉 무는 힘이 정신을 굳세게 만들었다.

 “그걸 왜 테러부가 하지요?”

 “거짓말하지 않고 정직하면 테러에 동조할 확률이 낮거든요. 테러부와 연관이 있습니다. 이번이 처음도 아닙니다.”

 “나쁜 자식.”

 정미현은 당장에 문을 열어젖히고 사무실을 나갔다. 복도에 있는 찬바람이 사무실 안으로 쏟아졌다.


정미현은 베란다에 나와 있었다. 오늘밤에는 달이 떠있지 않았지만 옆 건물의 야경이 보석함처럼 반짝였다. 가로등이 비추는 둥근 조명 안으로 택배배송용 저고도 드론이 불쑥 통과했다. 시원한 밤공기는 밀도가 낮아 폐를 상쾌하게 꿰뚫었다. 스마트 폰으로 관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미현 사원입니다. 늦은 밤에 죄송합니다. 저 오늘 테러부한테 조사를 받았습니다. 심각한 인권침해가 있었습니다.”

 관리자는 화들짝 놀란 목소리로 정말이냐고 되물어봤다. 심각한 인권침해를 묻는 게 아니었다. 정미현 관리자인 자신에게도 해가 될지도 모른 테러부 조사가 어떤 내용인지 알고 싶어 했다.

 “…저에게 성적인 질문을 하며 수치심을 줬습니다. 이는 제가 노조에 가입했기에 보복했다고 생각합니다.”

 관리자는 더 깜짝 놀라며 노조가입이 정말이냐고 물어봤다.

 “그렇지 않으면 왜 저를 호출했을까요?”

 관리자는 왜인지 알고 있었다. 정미현이 호출 받아 특별 조사를 받은 건 관리자가 관심등급으로 넘겼기에 테러부가 기업을 위해 행동한 거였다. 관리자와 테러부는 노조의 존재를 아직 몰랐다. 정미현에게 노조의 목적과 규모에 대해 캐물었다.

 “…우리 회사 사원들은 테러법의 부당함에 대해 분노하고 있어요. 우리는 범죄자가 아니예요. 내일 모레부터 우리의 존재를 알게 될 겁니다.”

 정미현은 팟캐스트 방송을 떠올렸다. 관리자는 정미현이 노조 중심에 있다고 착각했다.

 회유하기 위해 온갖 말들을 쏟아냈다. 이는 정미현을 관리하는 입장에서 책임을 피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생각해보세요. 통계와 수치는 정말 그런 현상 때문에 생겨난 게 아니라 통계와 수치가 존재하기에 어떤 현상만 특정 지을 수도 있어요. 테러부는 분명 지금 악용되고 있습니다. 일생 범죄와 연관 없던 사람들의 개인정보와 사생활이 들추어지고 있어요. 왜 아직도 테러부를 옹호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관리자는 목소리 내려 깔고 아직 정미현 사원이 어려서 뭘 모른다고 타일렀다.

 사회인으로의 책임감과 직장생활, 어쩔 수 없이 떠맡을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 구구하게 늘어놨다. 국가와 사회가 장기불황으로 경직되어 인간성이 메마른 건 자신도 안다. 테러법이 너무 엄해서 초기와 달리 변질됐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이에 응하지 않으면 회사라는 집단과 함께 갈 수 없고, 사회에서 낙오된다고 설명했다. 최근 다큐 방송에 나온 대학 대체 학점 은행제 교육기관 취업사관학교 편을 찾아보라고 권유했다.

 정미현은 관리자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잘 알았다. 공포였다. 공포를 조장하여 겁을 주고 설득하며 합리화했다. 테러부는 공포를 막기 위해 만들어 졌지만 지금은 공포를 만들고 있었다. 원래부터 이런 사람이었나? 아니면 이런 세상에서 살기에 변했나? 관리자가 물었다.

 정미현씨가 이런 상황에 처한 건 스스로 자초했기 때문이다. 왜 애초에 상관과 고용주인 회사에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나? 이 싸움 끝에 무엇을 얻겠다고?

 정미현은 귀에 댄 스마트 폰을 떼어 손바닥 위에 놓고 내려다봤다. 관리자는 정미현이 약해졌다고 판단하고 길다란 설교를 늘어놓고 있었다. 스피커에서 삐져나온 설교는 정미현에게 닿지 못하고 밤바람에 밀려 회오리처럼 제자리를 맴돌았다.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왜 이런 싸움을 하는 건가?

 브레인토피아 크래프트로 만드는 게임 폴라리스가 이럴만한 가치가 있나?

 실재하지도 않는 머릿속 상상과 0과 1로 구현된 가상현실을 위해 왜 실제 삶을 위험에 빠뜨리지?

 가상현실은 손에 쥘 수 없기에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설령 이상한 디지털 월드를 가지고 있더라도 이게 실제의 나를 증명하는 건 아닌데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나?

 만약에 최후에 승리하더라도 가상현실 폴라리스로 가서 진짜로 살 수도 없지 않은가?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는 지상은 야간 조명과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해보였지만 베란다까지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정미현은 땅이 쩍쩍 갈라진 사막의 산 정상에 홀로 서 있는 것 마냥 고독했다.

 회오리처럼 맴돌던 설교에서 말 한 마디가 비수처럼 날아올랐다.

 말 잘 듣는 사람이 되면 승진도 잘 하고 시집도 잘 간다. 좋게, 좋게 가자. 실리를 위해 타협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다.

 정미현은 처음에 이 싸움을 왜 시작했는지 떠올렸다.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 가치이고 아닌지는 제가 판단합니다. 전 제 마음을 따라가겠습니다.”

 이래서 여자들은… 관리자가 직책이 만들어준 가면을 벗어던졌다. 화난 음성이 폭발했다.

 자신이 정미현 때문에 그동안 얼마나 많이 희생하고 인내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은 일을 풀기 시작했다. 정미현은 스피커를 엄지손가락으로 꾹 눌러 소리를 죽였다.


정미현과 팟 캐스트 방송을 할 사원들이 점심시간에 회사 근처 카페로 향했다.

 원칙적으로는 사내 방송실은 사원들을 위한 시설이지만 이런 해적 방송에 허가가 나올 리가 없었다. 카페에는 미리 얘기해 두었기 때문에 다른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둥그렇고 앙증맞은 테이블을 지나 구석으로 향했다. 구석에 벽을 등지고 있는 소파 앞에 대인용 탁자가 기다랗게 늘어져 있었다.

 정미현과 함께하는 사원들은 전에 합류를 권유했던 남자들이었다. 스마트 폰을 카메라처럼 거치시키고 화면이 잘 나오는 지 확인했다.

 사원들이 어렵게 정미현에게 함께 방송하자고 권했을 때 정미현은 선뜻 받아들였다.

 이미 예전에 시위에 참여한 경력이 회사에 찍혀 있어서 더 잃을 것도 없었고, 이 일을 빌미로 해고하면 법적인 조치를 밟을 계획이었다.

 “자 갑니다. 5, 4, 3, 2, 1… 시작.”

 정미현은 미리 준비한 대본을 손에 쥐고 카메라를 응시했다. 스마트 폰을 관리하는 사원을 제외한 나머지 사원들이 정미현 옆에 앉았다. 방송을 한다니 묘한 흥분에 가슴이 설레었다.

 “안녕하십니까? B기업 사원 여러분. 저희는 테러부 인권 침해 저항 노조원입니다.”

 일제히 스마트 폰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총무부 마크를 달았던 사원이 미리 준비한 대본을 읽어나갔다.

 “최근에 테러부 인권 침해 조사가 시작된 후로 한 사원이 자살했습니다. 사원의 사생활과 상처가 소문이 퍼져 수치심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했을까요?”

 다른 사원이 옆에서 이어 받았다.

 “저희 사원들은 노동법과 기업이 정한 노동규율을 엄수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기업의 효율을 저해하지 않고 이익을 가져다주고 있다는 뜻입니다.”

 스마트 폰 뒤에 서 있던 사원이 카페 벽에 걸린 전자 보드판에 반응을 적었다.

 ‘시청율이 올라가고 있음. 현재 150.’ 까만 전자 잉크가 보드판 위에 선명했다가 소멸했다.

 정미현이 다음을 읽었다.

 “테러부는 테러를 막기 위해 창설된 국가기관이지만, 공포를 막기보다 공포를 조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테러의 범위는 한없이 넓어져, 누구에게나 테러범이라 딱지 붙을 수 있는 만능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사원들은 테러와 무관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조사는 인권을 침해하고 개인의 자유를 억누르고 있습니다.”

 다음 반응이 꺼멓게 올라왔다. ‘옳은 말이다. 검열을 중지해라!’

 대본을 읽던 모두의 얼굴이 살며시 불그스름해졌다. 순서는 다시 처음 사원에게로 돌아왔다.

 “이에 저희는 노조를 결성하여, 테러부 파견 공무원에게 저희의 뜻을 알리기로 결의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오늘 방송에서 보여줄 근거를 보시고… 엉?”

 전자 잉크가 보드판을 빠르게 휘갈겼다. ‘정미현 사원은 그간 회사의 효율에 반대되는 시위에 참가하지 않았습니까?’, ‘채팅창 폭주중’ 총무부 사원은 누구인지는 몰라도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알았다. 이런 이력을 알 수 있는 건 간부와 간부와 친밀하게 지내는 총무부 사원들 밖에 없었다. 총무부 사원은 헛기침을 하며 시간을 벌다가 결심을 내리고 정미현에게로 몸을 돌렸다. 정미현은 미리 알고 있다는 듯 태연하다 못해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등지고 있는 카페 조명이 후광처럼 어깨를 물들였다.

 “정미현 사원은 지금 채팅장에 나오는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최저임금제 상승과 생리휴가 관리제도 반대 시위에 나섰습니다. 이는 소속된 회사를 넘어서 사회 차원에서 소외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함이지 직장을 위태롭게 만드는 행위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예. 맞습니다.”

 총무부 직원은 이견이 있지만 여기서 끊으려고 했다. 하지만 다른 사원은 아니었다.

 “여자들. 쉬고 싶으면 주말에 붙여서 생리휴가 쓰잖아요?”

 “저희 회사에서 그게 가능합니까?”

 정미현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빠르게 말했다. 총무부 사원이 끼어들었다.

 “아 김형. 왜 그래. 우리 회사는 그런 거 꿈도 못 꿔. 내가 잘 알잖아.”

 “아니. 루마니아가 꽉 잡기 전에는 아니었어.”

 “그럼 인간의 생리적인 반응을 통제하는 루마니아를 옹호하면서, 테러방지법에는 반대하겠다는 게 말이 되나요?”

 김형과 총무부 사원은 우뚝 굳어졌다. 허를 찔려서가 아니었다. 정미현이 기를 올리고 있었다. 표정은 변화 없었지만 분명 억세고 질긴 게 싸울 태도였다.

 “예. 예. 정미현 사원 말이 옳습니다. 저희가 실수했습니다. 불미스런 논쟁을 벌여서 사원 모두에게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정미현은 고개를 까닥여 사과를 받았다. 그때 보드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정미현 사원은 동성연애자인가요?’ 글씨는 논쟁 때 써졌는지 지금은 소멸하는 윤곽만 남아 있었다. 남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정미현에게 집중됐다. 김형이 삐죽이려는 입술을 억지로 누르며 말했다.

 “빨리 대답하시죠.”

 “왜 이 질문이 노조 방송에 적당한 지, 대답할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미현은 표정이 없어 보였지만 입가가 올라간 게 비웃고 있었다.

 합당한 대답이고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느꼈다. 그런데 김형은 뭔가를 감지했다.

 정미현이 이성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지나치게 경직됐다 라는 걸.

 “정미현 사원은 사내 맞선 프로그램에 대해 아시죠?”

 “예. 저도 가입했습니다. 이만하면 대답이 됐나요?”

 “직접 말씀해주시죠. 동성연애자가 아니라고.”

 “왜 제가 그러한 걸 꼭 집어 말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아직 스스로에게 거짓말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이 남자는 아까 일로 화가 나서 억지 부리는 게 당연했다.

 “사내 맞선을 주선하는 이유가 안정된 가정을 위해서입니다. 가정이 있으면 안정감을 얻어 업무에 집중하기가…”

 “안정된 가정이라는 가치는 사람마다 상대적입니다.”

 김형은 격분해서 검지손가락을 천장을 찌를 듯이 세웠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내세우는 기준이 있어요. 남자는 여자와, 여자는 남자와 결혼한다. 정미현 사원도 남자와 결혼할 겁니까?”

 “회사가 내세우는 안정된 가정에 그렇게 구체적으로 조건이 명시돼 있나요?”

 “아니 그럼. 동성연애자가 안정된 가정을 가질 수 있습니까? 안정된 가정이 있어야 우수 사원이 될 수 있습니다. 회사에 이익을 가져다줘야 지금 우리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겁니다.”

 정미현은 오늘을 운명의 날이라고 생각했다. 관리자와 테러부 파견 공무원들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저항운동이 시작되는 기점이라고 밤새 흥분했다. 그런데 자신에게 운명의 날이 될 줄은 몰랐다. 보드판에 숫자가 그려졌다. ‘시청율 700 돌파. 계속 늘어나고 있음.’

 “분명히 밝혀주시지요.”

 “동성연애자도 안정된 가정을 가질 수 있으니 법으로도 그 지위를 인정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동성연애자인가요?”

 정미현은 김형을 봤다. 시야는 부채꼴로 퍼져 김형과 정미현 사이에 앉아있는 총무부 사원도 들어왔다. 그 눈이 모든 걸 알고 있는 눈이었다. 정미현이 관심 사원이 되어 테러부로 인계됐기에 저항 노조 참여를 받아들일 거다. 정미현은 시위에 참여했고, 회사에 낙인찍혀도 개의치 않는 배짱이 있어 방송에 협력할 거다. 어제 정미현의 정보가 갱신됐는데 거짓말 탐지기 테스트에서… 총무부에 있는 사람은 모든 정보를 엿들을 수 있었다.

 다 알고 있다는 눈에 정미현이 가득 차 있었다. 눈동자에 떠오른 정미현이 흔들리는 게 걱정하고 동정하고 있었다. 총무부 사원은 자신이 아는 비밀을 감당할 배짱이 없었다.

 “아니죠? 정미현 사원 아니라고 말해주세요. 사람들은 의혹이 있으면 우릴 돕지 않을 거예요.”

 정미현은 총무부 사원의 애원에 한쪽 어깨를 삐딱하게 늘어뜨렸다. 머리를 기울여 허공을 비스듬히 쳐다봤다. 나른해진 모습이 방송이 아니라 지하상가 안드로이드에 걸린 드레스를 품평하는 듯 했다.

 “예. 저는 동성연애자가 아닙니다.”

 총무부 사원은 대본을 세워 올려 얼굴을 가리고, 어깨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김형은 끈질겼다.

 “…요즘 결혼 못하는 미혼남녀들이 얼마나 많은데. 동성애는 사치잖아요. 그렇죠?”

 나 자신을 부인했다. 정미현은 그 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일을 이해하고 있었다. 높은 하늘을 나는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는 공수부대원의 각오과 퇴사하기 전에 직장상사에게 욕을 퍼붓는 해고자의 심정에 대해서… 자살적인 행동이 품고 있는 해방감이었다. 이제는 어떻게 흘러가든 상관없었다.

 “여자들은 BL물이나 야오이 좋아하잖아요. 방송에서도 그러던데 여자들은 그런 걸로 성욕을 해소한다고. 여자들끼리 사귀는 거 다 한때 유행이잖아요. 그런 유행에 휩쓸린 적 없으세요?”

 “예. 없어요.”

 총무부 사원은 장전된 총의 매끈한 방아쇠를 느끼고 있었다. 불안하면서도 누르고 싶은 격한 충동에 휩싸였다. 거짓말을 헤집고 싶은 잔인함과 노조를 이끄는 책임이 양팔저울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정미현 사원은 분명 그런 가벼운 여자가 아닐 거예요. 그렇죠?”

 “예.”

 총무부 사원 눈에 비친 정미현은 총무부 사원의 양심의 가책을 알려고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보드판에 ‘동성연애자들은 까탈스러워서 집단생활에 맞지 않는다.’, ‘그들이 있으면 다른 사원들이 불안하다. 집단을 위협한다.’ 라는 반응이 있었다.

 정미현 한 글자, 한 글자씩 천천히 읽었다. 무엇이 사람들을 이렇게 믿게 만들었을까?

 원래 이런 사람들이었나? 우리가 과연 자유와 권리에 대해 투쟁할 자격이 있나?

 이런 세상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보드판에 채팅을 받아 적던 사원이 ‘조회 수 1000 돌파. 다른 걸 물어봐서 분위기를 돌려.’ 라고 썼다. 총무부 사원이 입을 열었다.

 “애인 있으세요?”

 “아뇨.”

 “그럼 쉬는 날에 뭐하세요?”

 “브레인토피아 크래프트로 VR머신용 RPG게임을 만들어요.”

 “아. 정말요? 게임 좋아하세요?”

 이 세상에 게임이 퍼진 지 몇 십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여자는 게임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나.

 “예. 게임 정말 좋아합니다."

 모든 남자들의 입이 일제히 딱 벌어졌다.

 “우와~”

 기립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정미현 사원은 동성연애자인가요?’ 문장이 채팅창에 떠있었다.

 스마트 폰으로 채팅을 올린 테러부 파견 공무원 과장이 눈동자를 올렸다. 벽면을 꽉 채운 커다란 디스플레이 화면에 팟캐스트 방송이 진행되고 있었다. 어두운 방안에 디스플레이 화면이 조명이 되어 서 있는 두 사람의 윤곽을 비추었다.

 한 명은 정미현의 관리자였고, 다른 한 명은 거짓말 탐지기로 시험한 조사원이었다.

 관리자가 테러부에 넘긴 관심 사원의 신상을 조사원이 읽고 직관력을 발휘했다. 임의로 만든 테스트 질문에 의해서 관심 사원의 문제가 낱낱이 파헤쳐졌다. 그런데 노조 결성이라는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개인이라면 심증만으로도 무너뜨릴 수 있지만 집단이 되면 확실한 물증이 필요했다. 과장은 손가락으로 화면의 ‘정미현 사원은 동성연애자인가요?’ 문장을 겨냥했다.

 “정말이지?”

 조사원을 쳐다봤다. 절반은 컴컴한 그늘에 절반은 디스플레이 조명 옆에 서 있던 조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방안에 들어오자마자 확신했습니다.”

 “어떻게?”

 “사람들. 특히 남자들은 동성연애에 무감하고, 공격적으로 반응해 관찰을 잘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위에 동성연애자, 특히 여성 동성연애자를 한 번이라도 겪은 남자들은 보통 여성과 다른 걸 느끼게 됩니다. 그 중 하나가 걸음걸이입니다.”

 “걸어봐.”

 조사원은 매우 진지한 태도로 방안을 왔다갔다 했다. 관리자는 조사원의 고지식하게 집중한 모습에 웃음이 차올랐다. 하지만 절대 웃지 않았다. 조사원은 웃겨도 과장은 절대 웃긴 사람이 아니었다.

 “잘 모르겠는데?”

 “제가 남자여서 그럴 겁니다. 하지만 실제로 보시게 된다면 금방 그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대다수 많은 남자들이 여성 동성연애자를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모르고 지나갑니다. 하지만 겪어보고 지내다보면 불특정 다수 여성들 사이에서도 집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지는 않죠.”

 “왜?”

 “예를 들자면 여성들은 그날 생리 냄새를 완벽하게 지웠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남자들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지 않습니까?”

 관리자와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얼굴에 디스플레이에서 뿜어내는 팟캐스트의 화면이 환영처럼 씌워졌다.

 “어떤 여성들은 남자들이 모르는 척 한다는 걸 평생 모르고 삽니다. 그것처럼 여성 동성연애자를 구분할 수 있어도 대개 모르는 척 해줍니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그런 걸 대놓고 묻다가는 쇠고랑차지 않겠습니까?”

 과장이 관리자를 향해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도 동의합니다. 정미현 사원은 남자사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간에.”

 “사교성이 좋지 않다고 동성연애자다?”

 “어 그게… 여자 아이돌 사진을 너무 자주 봅니다.”

 “우리 딸애도 걸그룹 팬입니다.”

 조사원이 헛기침을 했다. 모아이 석상처럼 두터운 과장의 목이 무겁게 돌아갔다.

 “여성 동성연애자들은 대개 남자에게 적대적입니다.”

 “정미현 사원 조사 순번이 앞인가 뒤인가?”

 “한참 뒤입니다.”

 “클라우드에 복잡한 데이터를 가지고 있나?”

 “여성이어서 그렇습니다.”

 “뭐?!”

 조사원은 저자세로 쩔쩔매며 말했다.

 “매뉴얼에 의하면 여성은 테러범일 가능성이 낮습니다. 게다가 이번 테러는 비행 드론을 이용했는데 여성들은 기계에 약합니다.”

 정미현이 취미가 게임이라고 밝히자 남자들이 박수를 치는 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비행 드론이 택배를 배송하고, 안드로이드에 입힌 옷을 고르는 시대인데 아직도 여자가 기계에 약하다? 그럼 여자들은 어떻게 택배 받고, 옷을 선택하지? VR머신은 나도 혼자서 세팅하기 벅차. 그런데 브레인토피아 인가 뭔가로 게임도 만들어. 왜 이렇게 편견에 휩싸여 있지?”

 “매뉴얼에 의하면 여성들은 독립적으로 테러를 진행할 수 없습니다. 여성들은 역사적으로 남자의 원조나 지시에 따라 테러를 수행하거나 테러 집단이 조직됐습니다. 만약 정미현이 테러와 연관 있다면 주도자가 아니라 테러 협력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저거 보이나?”

 과장이 정미현과 두 남자 사원을 가리켰다. 잘 풀려나가고 있는 경기를 보는 것처럼 흐뭇하게 칭찬했다.

 “정미현 사원. 저 여자는 늑대이자 보스야. 다른 놈들은 개야. 이렇게 직접 눈으로 보면서도 여자, 남자 가릴 건가? 이 방송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정미현이가 대장이라고 생각할 거야. 내일 아니 오늘 오후면 저 여자는 영웅이 될 거야. 난 정미현이 나라를 훔칠 쿠데타 군대를 이끄는 장군이라 해도 믿겠어.”

 “정미현 사원은 알리바이가 확실합니다.”

 과장이 갑자기 끼어든 관리자를 응시했다. 관리자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마도… 확실할 겁니다.”

 “테러법은 테러리스트를 잡기위해서가 아니라 테러법 집행을 방해하는 비협력자들에서도 스스로를 보호해야 합니다.”

 과장이 손가락을 튕기고, 화면을 향해 박수쳤다.

 “자네 여자의 걸음걸이로 동성연애자인지. 아닌지 맞출 수 있다는 거 확신하나? 편견이 아니라고 할 수 있나?”

 “그게…”

 “사원들이 저항 노조의 영웅이 동성연애자라는 걸 알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군. 영웅이 무너지면 조직은 저절로 무너져. 저 노조는 테러부 조사가 끝난 뒤에 다른 이념을 담은 조직으로 변할 수 있어. 사원들은 이미 금단의 열매를 먹었어. 절대 저절로 사라지지 않아. 테러부를 후원하는 기업들을 위해서라도 우린 절대 실수하지 말아야 해. 정말 저 여자가 여자를 좋아한다면 개인 기록과 온라인상에 흔적이 있을 거야. 반드시 찾아내야 해. 알겠나?”

 “예. 그럴 겁니다. 찾아 낼 겁니다.”

 “저 얼굴 보이나. 아프리카 밀림에서 살아남은 사자들은 끝내 무리를 다스리는 왕이 되지. 그 얼굴에는 온갖 흉터로 가득해. 찢어진 눈가가 길게 늘어져 검붉은 살이 밖으로 나왔고, 콧잔등은 몇 번이나 휘갈겨져 문드러졌지. 볼과 귀는 너덜너덜 형체만 달려 있어. 저 여자의 얼굴은 매끈해. 표정 한 점 없어.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아. 도저히 속내를 읽을 수 없고 감정이 아예 없는 것 같아. 이런 힘든 세상에서 한두 번 싸움을 겪은 게 아니야. 싸울 때마다 표정을 지운거야. 온갖 싸움을 다 겪은 여자야!”

 조사원은 과장에게 주눅 들어 원래 등이 굽은 사람처럼 오그라들었다. 과장은 조사원이 한심한 정도가 아니라 하등한 인간이라고 등급 지었다. 정미현 같이 강한 전사가 고작 이런 소인배에게 무너지다니 세상은 정말 불공평했다. 여자가 사회 어디든 진출할 수 있는 이 시대에… 게임한다고 환호하는 저 바보들이나 혼자서 큰 일 할 수 없다는 믿는 이 바보들이나.

 아직도 여자를 하급으로 정의한 매뉴얼과 상관들도 역시 바보였다.

 기술이 발전하여 남녀 격차를 해소했고, 교육도 성역할에 대해 진보적으로 변했다고들 했다. 하지만 아직도 세상을 떠도는 편견과 무지와 오해는 왜일까? 대체 언제쯤 사라질까?

 과장은 화면에 잡힌 정미현을 향해 손가락을 내밀어 정미현의 목을 그었다.

 “너라면 대답을 알겠지.”


사내 식당의 형광등은 쨍쨍하여 식당에 그늘 한 점도 없었다. 기둥이나 구석 같은 사각지형에 생길만도 한데 인위적인 조명배치로 그늘을 철저하게 차단했다. 사람 키만큼 커다란 식당 창문에서는 노란 햇빛이 창문을 물들이고 있었다. 식당 내부 벽은 강렬한 형광등에 새하얗게 칠해져 있었다. 옆으로 나란히 배치된 창문들은 자연적인 햇빛에 노랗게 물들여져 마치 경계선 같았다. 정미현은 식판을 들고 창가로 향했다. 식사를 하던 남사원들은 정미현이 지나가자 ‘꼬끼오’ 울음소리를 냈다. 브레인토피아 크래프트 제작사 치킨헤드의 오프닝 소리를 흉내었다. 놀리는 의도가 아니었다. 남사원들은 정미현이 자신들의 문화라고 생각하는 게임에 적극적인 걸 보고 자신들의 대변인으로 인정했다.

 정미현은 남자들의 지지를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받아들였다. 남자들은 수줍어서 무표정을 가장했다고 생각했지만 정미현은 긴장 없는 허술한 태도로 수저질을 시작했다.

 수저질 쇳소리 사이로 스마트 폰 알람소리가 울렸다.

 - 정미현 사원님. 테러부 파견 공무원이 협조를 요청합니다. 즉시 7층으로 가주세요. -

 지금은 노동법으로 명시된 휴식시간인데. 정미현은 수저로 밥과 모든 반찬을 한데 뒤섞었다. 뒤섞인 음식물이 동산처럼 부풀어 올라 전사자를 가매장한 무덤 같았다. 마치 검을 꽂는 것처럼 수저를 힘주어 무덤에 박았다.


복도에 붙은 LED 조명은 낮에는 작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글대는 색은 남아서 선명한 글자로 유지됐다. ‘사원들을 위해서 집단을 어지럽히는 사상과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자유는 받아들일 수 없다!’ 어느새 새로운 문장이 추가되어 있었다. 죽은 LED 빛이 흡사 던전에서 모험자를 기다리는 함정 몬스터의 매복 같았다. 정미현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으로 올라갔다.

 정미현은 저번에 왔던 사무실안 응접용 탁자에서 과장과 마주 앉았다. 과장은 스포츠형 짧은 머리에 눈이 가늘었다. 갈색으로 태운 피부의 목은 매우 굵어, 통나무가 연상됐다.

 역시 파견 공무원 추정되는 처음 보는 여자가 사전에 정미현에게 과장의 직책을 알려줬다.

 과장이 파리 쫓는 시늉처럼 손짓하자 여자는 목례를 하고 종종걸음으로 사무실을 나갔다.

 정미현은 아무 표정 짓지 않았다. 과장 역시 정미현의 표정을 반사하는 거울처럼 어떠한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저번에 이곳에 와서 거짓말 테스트를 빙자한 인권침해를 받았습니다. 사과와 재발방지를 약속 받고 싶습니다.”

 “그건 테러법이 실행되는 전국 어디에서나 집행되는 정당한 조사였소.”

 “정당한 조사가 사람의 사생활을 음해하려 하는 겁니까?”

 “사생활을 묻는 게 아니었소. 우리가 묻는 건 정미현 사원이 정직하냐? 아니냐? 였지.”

 “그런 질문에 누구도 정직하기 힘들 겁니다.”

 “거부하는 태도가 매우 공격적이었다고 들었소. 진짜 정직한 사람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소. 우리는 태도와 마음가짐을 보려 했던 거 였소. 질문은 중요하지 않소.”

 “왜 제가 조사 대상이었습니까? 제가 그럴만한 표적이었는지 정당한 설명이 있습니까?”

 “정미현 사원은 테러법이 실행된다는 통보를 받은 후 관리자에게 외근을 요청했소. 그러나 외근을 성실히 수행하지 않고, 복귀하는 길에 테러법 집행을 반대하는 불순분자들과 접촉했소. 인정하시오?”

 “…어떻게 알았습니까?”

 “우리는 일단 티비에 나온 테러법과 접촉했을 가능성을 찾기위해 전 사원들의 교통카드 사용내역을 우선적으로 조사했소. 이동 경로에 의하면 당신은 테러법 실행 처음부터 회사에 거짓말했소.”

 “저는 회사 블랙리스트에 올라와 있습니다. 제가 특별 감시대상이어서 부당한 조사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테러법에 대해 불만이 있으면 이렇게 행동하지. 통신사를 바꾸거나, 메신저 서비스를 탈퇴하지. 아니면 개인 블로그를 비공개로 전환하거나. 이 모든 게 부질없는 생각이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만큼 중요하지 않아 조사할 가치가 없소. 하지만 개인이 스스로를 검열하고, 조심하는데, 우리로서는 테러법이 마음만 먹으면 그 딴 거 다 쓸어버리고 여러분에게 수갑 채울 수 있다고 말할 필요가 없지. 아니 테러법까지 갈 필요도 없소. 기존에 있던 법체계안에서도 충분히 다 수갑 채울 수 있소. 테러법은 과정을 빠르게 만들었을 뿐이오.”

 “그건 공포입니다. 당신들은 공포로 통제하고 있습니다…”

 “목표를 위해 과정을 축소할 권위이지. 당신도 역시 부질없는 착각을 하고 있소. 당신은 중요한 사람이 아니요.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당신은 부적절한 시기에 때마침 의심받는 행동을 했소. 충분히 조사할 사유가 되오.”

 과장의 양손은 스핑크스의 앞발처럼 탁자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크고 투박한 손. 오른쪽 검지 손가락 위에 눌린 자국이 깊게 패여 있었다.

 “전 테러범이나 공범이 아닙니다.”

 “알고 있소. 테러관계자였다면 우린 다른 곳에서 만났을 것이오. 당신은 테러법 집행을 저해하는 행동을 했소. 거짓말과 불순분자 접선. 테러법에 반대하는 불법 노조 결성.”

 “돌아오는 길에 시위장을 방문했지만, 협력업체에서 업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거짓말이 아닙니다. 근무태만입니다. 이는 국가가 아니라 회사가 질책해야 합니다. 노조 결성은 다수의 합의를 토대로 이루어진 의사표현입니다. 테러방지법 반대 시위장이 계속 존재하는 건 국가가 헌법으로 보장한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노조의 결성은 정당합니다. 그동안 들었던 소문이 있습니다. 테러법은 기업들의 이익에 맞추어 사원을 감시하고 조사한다고 들었습니다. 내게 죄가 있다면 만능이 되어버린 테러법의 권위에 도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업과의 연계라는 소문은 절대 인정하지 않겠소. 이건 테러방지법을 방해하는 당신의 혐의를 확인하기 위한 심문이오. 우린 당신의 성정체성에 대해 관심 없소.”

 마지막 말은 떠보기 위한 공격이었다. 정미현은 눈 한번 까딱하지 않고, 공격을 흘려보냈다. 이 세상에 ‘성정체성…’ 운운한 말이 아예 없는 것처럼 당당했다.

 “더 말할 혐의 있습니까?”

 “당신의 모든 온라인 기록과 클라우드를 뒤지면 나올지도 모르겠지.”

 “제가 테러범이 아닌 건 알고 있다면서 조사를 진행하는 건 혐의를 조작하겠다는 뜻입니까?”

 “아니. 도대체 무엇이 있기에 그토록 숨기려 할까?”

 두 번째 공격이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정신이 먼 곳으로 떠나 지금 현재를 내려다봤다. 심장박동이 느리게 뛰었다. 정미현의 육체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갈색으로 그을린 과장의 얼굴은 팽팽하여 광대뼈 윤곽이 두드러졌다.

 “숨길 게 없다면 모든 정보를 조사해도 된다고 스스로 동의하시오.”

 “드러내지 않을 자유가 있습니다.”

 “당신이 사이버 와이즈를 참고하여 나이트라는 해커와 접촉한 사실을 알고 있소. 그는 현재 우리에게 구금되어 있소. 우린 다 알고 있소. 죄가 없다면 자유를 포기하시오.”

 정미현이 출두하기 24시간 전에 ‘나이트’를 검색한 기록을 포함한 모든 온라인 정보와 기록이 클라우드 데이터와 함께 인계되어 열람됐다. 테러부 공무원들은 정미현의 게임을 플레이 한 지 18시간이 넘었다.


공무원들은 유리벽면이 복도로 나 있는 좁은 시청각실에서 게임을 관전하고 있었다.

 치킨헤드사가 넘긴 열람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샅샅이 훑고 있었다.

 “야. 여자 캐릭터들 가슴 봐봐. 저게 젖소지? 사람이야?”

 “주인이 여자 좋아하는 여자래. 그래서 이렇게 만들었나?”

 정미현을 거짓말 테스트한 조사원이 복도에서 유리벽면으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현란한 마법효과와 비키니 아머를 입은 여자 캐릭터가 유리벽면에 반사됐다. 조사원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이건 그냥 게임이었다. 남자들이 좋아하는 게임. 여자를 좋아하는 여자는 흔히 남자와 보는 눈이 같을 거라 생각하지만 실은 아니었다. 이 게임에는 진짜 여성적인 게 없었다.


정미현은 천장을 한번 쳐다봤다. 천장의 하얀 텍스타일이 오와 열을 맞추어 천장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는 과장을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웃는 게 어색한지 입술 움직임이 인위적이었다.

 “나는 숨겨서 사회에 해를 끼치거나 법에 저촉될 행동을 하지 않으니 자발적으로 조사에 응해서, 스스로를 검열하고 조심하는 선택을 하지 않겠습니다. 표현하고 생각하고, 드러내지 않을 자유를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계속 자유를 행사하겠습니다.”

 과장은 무표정하게 턱을 끄덕이며 정미현의 말을 한 음절씩 꼭꼭 삼키듯 받았다.

 “그 게임은 대체 누굴 위해 만들었소?”

 “…뭐라구요?”

 “당신 개인정보와 온라인 기록 중에서 용량이 엄청난 게임 데이터 외에 특이한 건 아무 것도 없었소. 이미 다 열어봤소.”

 “…내 혐의는 무고한데 어째서 열람했나요?!”

 “열람한 24시간 전에는 중요 용의자였으니 정당한 법 조치였소. 그런데 아무것도 없더군. 게임도… 그냥 게임이었소. 매우 시시했소.”

 정미현이 그토록 지키려던 게임 폴라리스가 세상에 드러났지만 뭔가 이상했다. 수없이 상상했던 최악의 상황이 아니었다. 고통을 지나치게 높이 잡아서 예민하게 반응한 걸까?

 과장의 행동이 자신이 설정한 임계점과 멀리 있다고 본능으로 느꼈다.

 “…그렇죠. 그냥 게임입니다.”

 “정의 사회를 구현한다고 주장하는 나이트라는 해커가 있소. 사이버 와이즈는 빠르고 편리하지만 정확하지 않소. 나이트는 사실 익명 다수의 집단이오. 그들이 최근에 클라우드 서비스 회사를 공격하여 마음대로 휘젓고 갔소. 우리는 나이트라고 주장하는 놈들을 모조리 잡아 조사하다가 당신과의 접점을 발견했지. 무언가 숨기고 있다고 추측하고 열람했소.”

 드디어 과장의 얼굴에 표정이 드러났다. 이마를 탁자와 수평이 되도록 숙이고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나이트가 없었어도 열람했겠지요.”

 “그건 부정하지 않겠소.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더군. 그냥 게임이었소. 구금된 애송이 바보 녀석은 우리가 찾던 나이트가 아니었소. 해커를 사칭한 아마추어였지. 벌써 풀어줬소.”

 “…예. 그냥 게임입니다.”

 정미현의 정신은 폴라리스에 매달려 경직돼 있었다. ‘예. 그냥 게임입니다.’ 말 외에는 생각이 돌지 않았다. 과장에게 집중했지만 어떤 이질감도 읽어내지 못했다. 정말 남자들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일이었나? 내가 여자라서 과민한 걸까?

 “나이트들은 테러법 폐지 논의를 무산시킨 의원들의 개인 데이터를 해킹했소. 모든 인력은 놈들을 쫓는데 투입하기로 결정됐소. 이번 건도 그냥 흐지부지 될 거요. 내일부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회사는 제자리로 돌아갈 거요.”

 정미현은 온 신경이 폴라리스에 몰려있었다. 남자가 코드를 못 읽어서 이해하지 못하는 반응을 보일 수도 있었다. 말로 딱 집어 말할 수 없지만 분위기가 그게 아니었다. 과장은 못 읽는 게 아니라 한 번도 못 본 것처럼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물어볼 게 있소. 내 딸이 축구를 좋아하오. 하지만 남자들이 껴주지 않아서 여자 축구부에 들어갔는데… 여자 축구는 사회적으로 관심이 적어서 성취감을 얻지 못한다고 하오. 뭐라 말해줘야 할지 고민이오.”

 “그걸 왜 저한테 묻지요?”

 “당신이라면 알거라 확신했소.”

 과장 혼자 대립을 끝내는 이상한 분위기지만, 정미현은 폴라리스에게서 집중을 끊어내고, 속으로 할 말을 정리했다.

 “…교육이 변하고 기술이 발전해도, 온전히 나로 존재할 수 없이 감시하는 세상에서는 나를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럼 내가 아니라 경직된 세상을 따라가게 됩니다.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뭐는 저렇게. 이거는 이렇게 하라고. 우리가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좋은 세상에서는 내가 누구인지 선택할 수 다양성이 있습니다. 스스로가 만족한다면 자신의 마음을 따라가라 전해주세요.”

 “고맙소.”

 과장이 정미현에게 진심으로 웃어 보였다. 자애로운 표정이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다웠다.

 정미현은 무표정으로 웃음을 받다가 과장의 손가락에 눌린 자국이 다시 보게 됐다.

 “그래도 이 일을 계속 하실 건가요?”

 “이건 전쟁이요. 세상은 그 시절마다 수행하는 전쟁이 있었소. 받아들일 뿐이오.”

 정미현은 ‘전쟁‘이라는 어감을 듣자마자 이제야 눌린 자국이 뭔지 알았다. 눌린 자국은 브레인토피아 커뮤니티에서 창작소재로 올라오는 배틀아머 슈트의 방아쇠 센서 흔적이었다. 과장은 군인이었다. 테러법을 수행하는 공무원들은 바로 군인들이었다. 정미현은 너무 오싹하여 저도 모르게 손톱으로 손등을 긁었다. 과장은 정미현의 반응을 읽지 못하고 쿨한 태도로 악수를 청했다. 정미현은 손에서 느껴지는 악력에 떨었지만 과장은 눈치 채지 못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여자가 다시 들어와 방문을 열고 과장의 퇴장을 기다렸다. 정미현이 이제와 여자를 다시 보니 숏컷 스타일로 짧게 커트된 머리모양이 영락없는 군인이었다. 과장은 방문으로 걸어가다가 뒤돌았다.

 “그런데 그 게임은 대체 누굴 위해 만든 거요?”

 “저 자신을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과장은 말없이 정미현을 응시했다. 정미현은 마음이 바뀐 게 아닐까 경계했는데 과장의 눈빛은 매우 복잡했다. 과장이 방황을 끝내고 피식 웃었다.

 “그 게임은 남자들이 하는 게임이라더군. 난 여자를 좋아하는 여자는 속이 다 남자와 같은 줄 알았는데 우리 조사원이 그게 아니라더군. 여자로 남으면서 여자를 좋아하는 케이스가 훨씬 많다고 했소. 남자의 성욕이 개입된 눈으로 보려하면 안된다고. 조사원이 말하길. 만약 그 게임을 당신 자신이 하려 만들었다면 당신은 속이 백프로 남성 호르몬으로 꽉 차있다고 했소. 수염이 나도 이상할 게 없다면서. 남자들의 기호가 가득 차 있는 게임이라고 했소”

 “…편견이예요.”

 “하긴 그 이는 당신을 편견으로 대했지. 나는 이해 못하지만, 이런 게임을 할수록 당신은 동성연애자가 아니라 그냥 보통 여자라고 했소. 남자들의 가치관 아래서 자란… 순종적인 여자라고. 조사원은 거짓말 테스트 결과가 오류일지도 모른다고 인정했소.”

 “…편견을 교정했으면 하네요.”

 “당신 절대 순종적인 여자로 보이지 않고, 그런 사람이 아닌데… 시시한 게임을 만들다니. 참 알 수 없는 사람이군. 당신 많이 이상한 여자 같소.”

 폴라리스는 그런 게임이 아니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과장은 퇴장했다. 방문이 닫혔다. 정미현은 홀로 있게 되자 충격에 온전히 맡겨졌다. ‘당신 많이 이상한 여자 같소.’ 기어이 임계점이 오고야 말았다. 정미현의 입에 거품이 일더니 의자채로 뒤로 쓰러졌다. 기절했다.


정미현은 뒤늦게 사원들에게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됐다. 관리자는 정미현이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꺾였을 리라 지레짐작하고는 멋대로 휴가를 주었다. 그 안에는 정미현이 해고당할거나 자진 퇴사할 거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관리자의 기대와는 달리 그 다음날 테러부는 철수했다. 정미현은 관리자보다 더 상급 간부에 의해 정상 사원으로 분류됐다.

 “이에 테러부와 경찰 합동조사 위원회는 테러집단 나이트가 해외로 서버를 빼돌렸을 가능성에 인터폴에 수사협조를 요청했습니다.”

 정미현은 스마트 폰 뉴스를 꺼버렸다. 기절한 뒤 32시간 뒤에 병실에서 깨어났다. 스마트 폰에 쌓인 메시지를 보며 전후 사정을 파악한 후 손목에 박힌 링겔 바늘을 뺐다. 링겔 호스를 타고, 투명한 약물이 쪼르르 흘러내렸다. 정미현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약물은 다 흘러내려 병실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었다.


정미현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VR머신을 설치해둔 방으로 들어갔다. 소형 냉장고 두 대만한 넓이의 머신이 방안을 독차지 하고 있었다. 케이블을 풀어헤쳐 피씨와 연결한 후 입구를 열었다. 내부 항온 폼이 바싹 말라 있었다. 온도와 압력조절장치를 작동시키고, 러닝머신 같은 바닥레일을 닦았다. 피씨에서 클라우드 데이터와 피씨 데이터가 연동됐다는 신호음이 울렸다. 정미현은 고글과 장갑, 신발을 신고 머신 안으로 들어갔다. 움직임을 감지하고 입구가 저절로 닫혔다. 항온 폼의 분홍색이 터치식 디스플레이의 화면에 의해 사방으로 퍼져 야한 붉은 빛으로 바뀌었다. 치이익. 내부압력조절 되는 소리와 함께 디스플레이에 ‘폴라리스’라 떠올랐다. 터치하자 고글에도 같은 영상이 떠올랐다. 장갑과 신발의 압력장치가 살짝 부풀어 올라 묵직해졌다. 고개를 돌리자 고글 위치를 쫓아 디스플레이가 벽면을 타고 유연한 무 관절 동물처럼 위아래, 좌우로 자연스럽게 미끄러졌다. 게임이 시작됐다.

 정미현은 첫 시작부터 뭔가 바뀌었음을 알았다. 캐릭터 커스터마이징 기능이 추가되어 있었다. 과도하게 가슴을 많이 키울 수 있고, 허리는 비정상적으로 얇았다. 정미현은 최대한 자신과 비슷하게 설정했다. 처음 시작한 장소는 폐자재를 버리는 쓰레기 수거장이었다. 판타지 세계관의 드넓은 들판에 수거장이 덜렁 얹혀 있었다. 정미현은 나이트의 시험이라는 걸 직감했다. 과장은 애송이라고 했지만 그는 진짜 나이트가 분명했다. 클라우드 전체를 휘저을 때 데이터도 수정한 게 분명했다. 그 때문에 동성연애자 코드가 숨겨졌지만,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은 어디까지 변했을까? 정미현은 파이프를 무기로 집어 들었다. 장갑이 묵직해지고 둔해졌다.

 6시간 동안 플레이 한 뒤 정미현은 잠시 나와서 간단한 야참을 먹었다. 공주를 구하러 간다는 메인 설정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은 변했다. 본래 마을 밖 몬스터들의 생태계 먹이사슬 관계가 유지되지 않을 경우에만 마을로 내려와 인간들을 공격한다는 균형 감각이 있었다. 그러나 나이트가 넣은 이상한 퀘스트 시스템 때문에 죄도 없는 불쌍한 몬스터들을 도륙해야 했다.

 13시간 뒤 정미현은 고글을 벗고, 화장실로 가서 토했다. 오랫동안 버추어 리얼리티 속에 있다 보니 심한 멀미증세가 일어났다. 항온 폼에 땀 냄새가 배었다. 게임 속에서 모든 상호작용은 전투로 요약됐다. 어떤 문제든 전부 다 전투로 해결할 수 있었다. 이 게임에는 딜레마가 있었다. 한 시라도 빨리 공주를 만나러 가려면 묻지도 않고 파이프를 휘둘러야 했다. 그러나 손에 피 묻은 파이프를 들고 공주를 만나러가서 무슨 말을 하지?

 20시간 후에 정미현은 죽이는 걸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정서적 교류와 상호작용보다 복잡하게 꼬여있는 스킬 포인트가 생존에 더 중요했다. 얼마나 말하고 무슨 말을 듣는 것보다 비싸고 강한 무기가 최고였다. 파이프는 마법검으로 바뀌었다. 방어력이 높은 비키니 아머가 갖고 싶었다. 노출 있는 패션을 문제 삼지 않고 수치를 우선했다. 다 이게 공주에게 빨리가기 위함이야. 정미현은 합리화하며 기사단원 증표인 얼음꽃을 비키니 아머에 옮겨 달았다.

 32시간 뒤, 폴라리스 궁성에 도착했다. 궁성 앞은 무수한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굳은 피 위로 하얀 눈이 끼어 있었다. 설정 상 과거 모두 정미현의 동료들이었다. 정미현은 무감각한 얼굴로 바람이 밀어내는 서리를 맞받으며 성 안으로 들어갔다. 성안에 들어가자마자 국왕의 방과 신하들의 방을 뒤져 좋은 아이템들을 닥치는 대로 약탈했다.

 공주는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다. 지하 감옥에는 날카로운 끝이 허공으로 내뻗는 절벽이 있었다. 절벽에서 먼 허공에 공주가 갇혀있는 마법의 방이 떠있었다. 정미현은 감옥을 지키던 제국군을 죽였다. 절벽에 도달하자 VR머신의 온도 팬이 갑자기 불안정하게 회전속도를 높였다.

 -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해야 건널 수 있는 다리입니다. -

 정미현은 코웃음을 쳤다. 껄렁한 바보 나이트가 감히 할 코멘트는 아니었다. 절벽 위로 반투명한 돌다리가 그려졌다. 반짝이는 게 마치 환영 같았다. 정미현이 조심스럽게 걸어 마법의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중간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에 걸려 멈춰 섰다.

 - 공주는 당신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

 정미현은 마법검을 휘둘러 벽을 부수려했다. 투명 벽이 있던 허공을 황망하게 지나쳤다.

 부셨나? 생각하고 지나가려 했지만 아니었다. 몸은 통과할 수 없었다.

 - 당신은 공주를 존중하지 않고 있습니다. -

 정미현은 투명 벽을 어깨로 여러번 부딪혔다. 부딪힐 때마다 HP가 깎여나갔다. 100에서 90으로 90에서 80으로 80에서 50… 40… 30… 20. 팟캐스트 방송에서 자신을 세 번 부인했다. 그동안 너무 당연하게 여겼다. 아니 오히려 잘 참아내고 멋지게 속여 넘겼다고 생각했다. 너무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데 왜? 무엇을 위해? 정미현은 마법검을 놓쳤다. 허공 아래에 용암이 들끓고 있었다. 용암이 빨간 점으로 보일 정도로 깊은 지하로 검이 빨려 들어갔다. 억압자들을 주구로 모시고 핍박하던 관리자. 권리를 위해 싸운다면서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팟캐스트 멤버들. 딸을 사랑하면서도 전쟁을 수행하는 과장. 모두가 원래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다.

 - 공주는 당신을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

 정미현이 그간 폴라리스를 살고 싶은 이상향으로 만들어왔다. 그런데 오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파이프를 들어 무기를 챙겼다. 그리고 평소 정서와는 반대로 비키니 아머를 착용하고 있었다.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건 남자의 게임이었다. 세상이 보편적이라 여기는 기준이었다. 용사가 마왕을 쓰러뜨리고 보상으로 당연히 공주를 선물 받는… 이런 가치관으로 공주를 대하지 않으려 했다. 다른 세상을, 더 아름다운 세상을 공주에게 주고 싶었다. 정미현은 VR머신 내에서 옷자락을 매만졌다. 게임 상에서는 비키니 아머의 라텍스 재료가 느껴졌다. 이제야 부끄러움을 느꼈다. 싫다는 여자를 왜 이렇게 강압적으로 대할까? 부끄러움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인식했다.

 “수많은 낮과 밤에 당신을 생각하며 달려 왔습니다. 내 님이여. 나의 맹세여. 내가 사랑하는 세상의 주인이여. 당신을 뵙지 못하고 얼굴을 감추는 내 부끄러움을, 불충을 용서하소서.”

 정미현은 비키니 아머를 벗어던지고 알몸이 됐다. 얼음꽃을 떼어내 투명 벽 아래에 놓았다. 남자의 방식이 아니었다. 여자의 방식도 아니었다.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사람의 도리였다. 이런 의식이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었다. 정미현이 되돌아가는 절벽 끝에 수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금속 갑옷에 피가 말라붙어 있고, 하얀 서리가 축축한 물이 되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갑옷 가슴에 얼음꽃이 꽂혀 있는 게 죽은 폴라리스 기사단이었다. 그런데 정미현이 설정한 얼굴이 아니었다. 남녀 뒤섞인 게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누군가 앞으로 나섰다. 껄렁대던 바보 나이트였다. 손으로 정미현의 뒤를 가리켰다. 마법의 방에서 공주가 나와 반짝이는 돌다리를 밟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알몸의 정미현과 눈꽃 무늬가 새겨진 하얀 드레스를 입은 공주가 서로를 향해 속도를 높였다. 메시지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담긴 리스트가 떠올랐다.

 - 당신이 이겼습니다. 자격이 있다는 걸 증명했습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 우리를 데려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

 갑자기 나타난 기사단들은 해커 나이트들이었다. 해커들이 본인들의 얼굴을 게임 상에 넣었다. 달려가는 정미현의 머리 위로 얼음꽃잎이 첫눈처럼 사뿐히 내려앉았다. 제국이 아무리 막강하다 할지라도 절대 우리를 꺾지 못할 거야. 새로운 폴라리스 기사단원들이 왔어.

 공주의 하얀 드레스가 바람에 펄럭였다. 정미현은 눈앞에 펼쳐지는 실크 물결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두 여자는 가장 행복한 시간에 시간을 멈출 기세로 서로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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