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차마 봄이 아니거니와(春來不似春)



1. 요요작작(夭夭灼灼)



「모월 모일. 사람들이 떠들기를. 화경선생이 조 아무개에게 종이 아흔 아홉 장을 얻었다고 했다」


나루터 지나 어디 매골마을에 화경선생(華景先生)이라는 도사가 살았다. 더러는 천추산(千秋山)에 학과 함께 깃들었다 더러는 만춘강(晩春江) 일만 겹 물결에 실린 편주(片舟)에서 홀로 노랫소리 청아하거늘 그 신묘함 덕분에 제법 이름이 회자되었다. 신출귀몰하기가 백중 무렵 맨 하늘에 벽력치듯 하니 어떤 식자는 재미있어 하고 어떤 식자는 비천하다 여겨 감히 사귀려 들지 않았으나, 무릇 도사란 세간의 명예를 티끌처럼 아는 법인지라 그는 내내 표표하였다.


어느 밤, 이따금 화경선생을 모셔 붓이며 먹이며 선물해 주던 장사치가 한량 하나를 안내해 선생 앞에 나섰다. 한량은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가문의 자제였으며 옥을 깎아 만든 듯한 미남이었다. 선생은 술잔을 기울이다 한량을 맞아 물었다.


“보아하니 세상에 부족한 것 없을 분인데 어찌 저를 찾소이까?”
“선생께 간곡한 청이 있어 뵙고자 하였습니다.”
“들어나 봅시다.”


한량은 성이 조(曹)씨였다. 그는 일생 발 밑을 호령하며 살아온 사람다운 여유로 편안하게 기대 앉아, 선생과 나란히 잔을 기울였다.


“소생이 여인을 하나 만나 서로 좋아 지냈기로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이 극락 같았습니다.”
“그러하시온데?”
“그 여인이 글쎄 참 요요작작(夭夭灼灼) 복숭아꽃 같고 해당화 같고 아주 잘생겼는데 노래까지 그만이라 선녀인가 여우인가 하였습니다. 소생이 학우들과 내길 걸었을 정도였지요.”
“학우들이라. 하, 그거 참 풍류 대단하십니다. 하여서?”
“하여서.”
“요요작작한 미인과 그린 듯이 복을 누리시느니 무어 부족하시어서?”
“글쎄, 더하고 뺄 것이 없이 좋았습니다. 요요작작한 미인이라 쭉 잠자리에 든 듯이 그리할 줄 알았습니다. 사는 게 말입니다. 시를 짓고 읊는 순간이 계속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사온데, 잠을 자고 일어나고 그 사이에 꽃도 피고 지고…… 그리하여서.”
“꽃도 피고 지고. 꽃이란 본디 필 때가 있으면 질 때가 있습니다.”


조생이 입맛을 다셨다.


“그렇습니다. 꽃이란 게 매양 곱지가 않습니다. 붉다가도 검고 검다가도 희지요. 제가 좋아 지낸 그 요요작작한 여인도 봄 가듯이 그만 불귀의 객이 되고 마니, 몹시 참담합니다.”


온갖 기름진 음식에 향기로운 술이 가득한 상이 새로 나왔다. 화경 선생은 학과 난과 은자(隱者)를 그린 병풍 앞에 유쾌한 듯 기대 앉았다. 조생은 화경을 보고는 내심으로 도사라더니 저와 어울리는 무리들과 다르지 않은 그 범상한 자태에 실망하여, 미리 마련해 놓은 그 잘 차린 술상을 벌써부터 후회하던 차였다.


“하여, 선비께서 무얼 바라시오?”
“어찌 좀 하여 주십사.”
“죽어버린 여인을 뭘 어찌한단 말입니까? 하마 무덤에 묻힌 여인네를 도로 끄집어 내 올까요?”
“그, 그러실 수 있습니까?”


조생은 무릎 걸음으로 다가 앉았다. 화경은 잔에 술을 넘치도록 따랐다.


“아니 될 거야 무어 있겠습니까만, 선비께서 과연 흡족하실지.”
“흡족하고 말고요! 그러나 이승과 저승의 법도가 다른데 그게 그리 쉬운 일이겠습니까? 소생이 듣기로는 세간에 도사들이란 대개가 허랑방탕하여, 모래알로 복숭아를 흉내 내고 술잔의 한 모금 술로 아홉 바다를 빗대니 무얼 얻어도 그저 한 바탕 꿈이라 합디다. 화경 선생께서는 그런 무리와는 다르시다며 윤생원이 하도 칭찬을 해 댔으니 소생도 그에 덜컥…….”
“사람 사는 것이 무엇인들 한 바탕 꿈 아니겠습니까? 그저 좀 더 긴 꿈인가, 불어 꺼지는 촛불 같은 꿈인가, 그러한 차이 아닌가 합니다.”
“말장난을 마시고 툭 터 놓고 말씀해 주십시오. 선생, 정말 죽은 여인을 다시 살려 주시는 겁니까?”
“후회하실 거외다.”
“천부당 만부당한 말씀입니다.”


조생은 허리춤에서 주머니를 끌러 상 위에 얹었다. 척 보기에도 묵직한 것이 자랑스러웠던 듯, 조생은 화경이 어서 제 주머니의 무게며 내용물을 재 보길 바랐다. 그러나 그의 기대에 찬 시선에도 불구하고 화경은 잔을 비울 뿐 영 움직일 기색이 없었다. 조생은 다시 한 번 주머니를 화경 쪽으로 밀어 놓았다.


“화경 선생, 해 주시는 겁니다?”
“도사에겐 금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드리리까?”
“목숨.”
“목숨? 이보시오, 화경 선생! 그런 당치 않은 말씀을!”
“선비님 목숨이 아니어도 됩니다. 다만 목숨이면 족하지요. 돌아가서 오는 그믐날 밤에 그 아씨의 무덤가로 대신 묻힐 목숨 하나를 가져 오십시오.”
“어찌 소생에게 살생을 권하십니까?”
“죽지 않습니다. 다만 묻힐 뿐입니다. 저를 믿으십시오.”


말을 마친 화경은 허리춤에서 부채를 꺼내 쥐고 한 번 펼치더니 다시 접히기도 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조생은 두리번거리다가 은근한 불빛 너머 병풍으로 눈을 돌렸다. 화경은 웃으며 학을 타고는 병풍 속을 가로질러 먼 청산으로 돌아가는 참이었다.


‘진짜 도사로구나!’


겨우 믿음이 선 조생은 벌떡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 죽지 않는다 했다. 그 말이 조생의 마음에 얹힌 꺼림직한 기분을 조금 걷어 주었다.


‘돌아가는 길에 처음 마주치는 사람을 데려가는 거다.’


그는 잔뜩 마신 술에 발이 꼬여가며 종을 부려 등불을 들게 하고는 호사스럽게 귀가하였다. 과연 고래등같이 기와를 얹어 왕손도 부럽지 않을 만큼 그럴싸한 저택으로 돌아갔을 때는 이미 새벽녘이라 동쪽 하늘이 수선스러울 즈음이었다. 눈 밝은 아랫것들은 벌써부터 물을 뜬다 마당을 쓴다 아침상을 차릴 채비를 한다 난리였는데 일이 하필 잘못 되려고 그랬는지 무슨 나쁜 운수가 꼬였는지, 조생은 막내 동생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그의 잘난 부친이 젊은 첩에서 본 세 살 된 계집아이였다.
조생은 눈이 까만 어린애와 시선이 얽히자 그만 일생 마신 술이 한꺼번에 깨는 듯 해, 자리에 풀썩 주저 앉았다.


“도련님, 왜 그러세요?”


어린 계집애를 얼른 안아 올린 것은 보모 노릇을 맡은 하녀였다. 헝클어진 머리 아래 세 살배기와 비슷한 검은 눈이 두려운 빛을 띠고 조생을 향했다. 조생은 열 서너 살 겨우 되었음직한 하녀를 올려다 보며 물었다.


“너 이름이 뭐더냐?”
“네? 쇤네 말씀이십니까요? 쇤네는 사…….”
“아니다, 되었다. 내 알아 뭣 하겠느냐.”
“네에…….”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어깨를 한껏 웅크린 하녀 앞에서 조생은 몸을 일으키곤 가만 돌아섰다. 하녀는 허리를 깊이 숙였다. 조생은 짐짓 두어 발짝 떼었다가 냉큼 몸을 돌려 하녀에게 은근히 노리개 하나를 쥐어 주고, 씩 웃었다.


“너 언제 잠깐 나를 보자꾸나.”
“네, 네에? 쇤네…… 를요?”
“그래. 아무에게도 말 하면 아니 된다. 알았느냐? 너 혼자 몰래 나와야 하는 게야.”
“네…… 네에.”


조생은 제 방으로 들어가 늘어지게 잤다. 그는 확인해 보지 않고도 하녀가 새빨갛게 귓전을 물들이곤 하루 온종일 노리개를 만지작대느라 정신이 빠져 있을 것을 훤히 알았다.
일은 쉬웠다.
사실 하늘 같은 도련님이고 보면 수 많은 비복 중에 누굴 골라도 매 한가지, 익은 감을 베어 무는 것만큼 쉽기만 한 일이었을 터였다. 조생은 역시 제가 괜한 고민을 했구나 싶어 팔베개를 베고 빈둥거렸다. 천장에 아물거리는 요요작작한 그 여인을 다시 볼 날도 머지 않았다. 시간은 살처럼 흐르고 그믐은 닥쳤다.
조생은 하녀를 불러 무덤으로 향했다.
하녀는 으슥한 숲길을 걷는 것에 겁을 집어먹고 눈물까지 글썽거렸지만 조생이 재촉하자 발길을 옮기는 수밖에 없었다.


“늦으셨군요. 날이 밝기 전에 해치워야 합니다.”
“해치우다니요?”
“원, 모르는 척 마십시오.”


화경선생은 흰옷을 입은 세 아이와 검은 옷을 입은 네 아이를 대동하고 무덤가에 서 있었다. 아이들은 말간 것이 밤톨처럼 고운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산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조생은 슬슬 두려워져 뒤로 물러났다. 하녀가 벌벌 떨면서도 조생 곁에 바짝 붙어 섰다.


“도련님, 이 무슨 일입니까? 왜 이런 곳에 데리고 오셨어요?”
“상전이 하는 일에 참견하지 말고 가만 있거라.”
“그렇지만…….”


화경선생이 부채를 활짝 펼치고 무덤 위로 올라섰다.


“하실 게요, 아니 하실 게요? 선비님. 좌우간에 결정을 내리셔야지요.”
“하, 할 거요! 하고 말고!”
“목숨 하나를 건지려면 다른 목숨 하나를 저울에 올려 드려야 저쪽 분들도 깜박 속지 않겠습니까? 자, 어서.”


선생이 부채를 아래로 향했다. 조생은 어느 틈엔가 활짝 열린 지면을 발견하고 소스라쳤다. 무덤 앞이 네모 반듯하니 문 모양으로 뚫려 안이 들여다 보였다. 불그스름한 빛이 새어 나오는 그 안쪽이 몹시 궁금했지만 조생은 두려움이 앞서 감히 들여다 볼 수가 없었다.


“어서.”


선생이 재촉했다. 조생은 하녀의 등을 떠다 밀었다. 하녀는 비명을 지르며 조생에게 엉겨 붙었지만 조생은 그녀의 얼굴을 외면했다.


“죽는 게 아니다, 죽는 게 아니야. 잠깐 자리를 바꾸는 것이야. 아무렴!”
“도련님!”


붉은 빛이 하녀를 삼켰다. 허연 연기가 물씬 뿜어져 나오고 그 사이에서 아른아른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너울거렸다. 선생은 연기 속의 여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옥월!”


여자는 하얀 무명옷 차림으로 걸어 나와 조생 앞에 섰다. 파랗게 질린 얼굴에 퀭한 두 눈이 조생을 똑바로 쳐다 보았다.


“정랑, 내가 왔어요. 저 세상은 춥고 어두워 정랑이 그리웠답니다.”


찬 흙 아래에서 부르는 듯한 목소리였다. 조생은 썩은 내가 풍기는 여자의 몸을 차마 안지 못했다.


“요요작작 도화도 한시절이요 삼월난풍에 설중매도 그만 지거늘 폐월수화 아리따운 홍안은 어떠할까요? 흙과 재 사이에서 꺼내도 흔들어 털어내면 새것 같겠습니까?”


화경선생은 키득키득 웃으며 일곱 동자를 데리고 훌쩍 사라졌다. 조생은 정랑, 정랑, 생전과 똑 같이 간드러진 어조로 말을 붙이는 여자를 도저히 마주할 수가 없었다. 썩어 찢어진 윗입술 아래 치아가 너덜거렸다.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렸다. 정랑, 정랑, 검은 혀가 검은 뱀 같았다. 한 번 웃으면 백가지 애교가 넘치던 얼굴이 백가지 악몽과도 같았다.


그는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았다.
죽을 수도 없었다.
저승에서 돌아온 여자는 누구의 눈에도 띄면 안 되었건만 새벽부터 다음 새벽까지 내내 그의 이름을 외쳐 부르며 나타났고 눈을 뜬 채로 잠을 잤다. 썩은 냄새가 도성 안에 진동했다. 수구문으로 실려가는 시체들 틈에 사는 듯 고통스러웠다. 조생은 땀을 뻘뻘 흘리며 잠이 들었다가 붉은 빛 저편으로 꺼져가던 하녀의 목소리가 떠올라 깨어 앉곤 했다.


[상제 앞에 호소하여 네 놈을 말대가리 소대가리 옥졸들 앞에 던져주고야 말겠다.]


하녀는 원망이 덕지덕지 붙은 눈으로 그를 말끄러미 바라보다가 악담을 던지고는 사라졌다. 조생은 괴로워 비쩍 말라 붙었다.
그러니 조생이 돈다발을 싸 짊어지고 다시 상단의 행수 윤씨를 찾아가 선생을 불러 달라고 읍소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윤씨는 곤란한 소리를 늘어 놓다가 돈꿰미가 보자기 너머로 불룩해질 무렵엔 사근사근 웃으며 무슨 수를 써 보겠노라 호언하게 되었다. 학을 타고 봉래산으로 갔다 하면 봉래까지라도 다녀오겠다는 것이다. 조생은 기다렸고 윤씨는 보름이 되지 않아 전달을 주었다. 조생은 꽁지에 불이 붙은 양 선생 앞으로 달려가 고꾸라졌다.


“소생을 좀 살려 주십시오!”


선생은 내내 모르는 척 왼고개를 쳤다.


“한 번 꺼낸 걸 어찌 또 바꿔 달라십니까?”
“죽은 계집과는 다시 못 삽니다. 떨어진 꽃은 주워 가지에 돌린다고 피는 것이 아님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요요작작 도화꽃 같은 여인이라시더니.”
“비바람에 떨어졌으니 어찌 그게 꽃이겠습니까?”
“저승의 저울은 정밀하니 당신의 그 인생을 계속 대신 살 사람을 하나 꺼내 놓고 당신이 영 다른 사람 인생을 사는 방법도 있습니다.”
“소생이 다른 누가 된단 말씀이십니까?”
“가진 걸 놓기 어려우시다면야 선비님 인생을 그림으로 그려 씻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비단 일백 필에 꿀 일백 동이를 마련해 주십시오. 질 좋은 소홍주로 일백 동이는 필요합니다.”


꿀로 비단에 그림을 그려 술로 씻어내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란 말에 조생은 재산을 허물어 팔고는 널리 물건을 구했다. 어지간한 세도가라도 쉽게 손에 넣을 만한 양이 아니었던 지라 조생은 노발대발하는 아버지를 달래느라 이마를 땅에 댄 채 거진 반 기어 다녀야 했다.


화경선생은 조생이 천신만고 끝에 마련해 온 비단에 꿀을 바르고는 술단지 속으로 한 장 한 장 흘려보냈다. 마지막 술단지 앞에서 화경 선생은 그를 불렀다.


“이 안을 보십시오.”


조생은 반쯤 죽은 사람 몰골로 비처비척 걸어와 선생이 가리킨 방향을 내려다 보았다. 둥그런 술단지 안에 가득 담긴 좋은 술 속으로 하얀 비단이 너울너울 녹아 사라졌다. 술 속에서 황금빛 꿀이 흐릿한 글자로 변했다.


“자, 고개를 드시지요.”


조생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침이었다.
그는 혼자였고, 화경선생은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자취도 없었다. 그는 말라붙은 입술을 떨며 화경선생을 외쳐 불렀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훤하게 동은 텄고 아무렇게나 우거진 풀밭에 드러누운 하녀 계집애는 곤히 잠들었고, 그리고 조생은 술단지를 끌어 안은 채 무덤에 기대어 앉아 있을 뿐이었다. 허둥지둥 일어서던 조생은 무덤 아래에서 비죽 튀어나온 무엇인가에 걸려 호되게 넘어졌다. 단지는 깨지고 술은 흘러 무덤 주위를 적셨다.
시뻘건 흙 틈에서 튀어나온 인간의 팔은 그의 눈에 한 번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을 내려와 다시는 도사에 관한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2 백아(白兒)



「모월 모일. 사람들은 화경선생이 용의 갈기로 된 붓을 아홉 자루 얻었다고 떠들었다.」


모월 모일, 만호(萬戶) 벼슬을 살던 이가 관직을 물리고 낙향하던 길에 풍문을 전해 듣고 도사 화경 선생을 찾아 왔다. 그때 소선국은 왕이 덕을 잃고 백관이 방만하니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만백성들이 두루 어려웠는데, 두 자루 칼을 잘 흔들 뿐 적을 치는 재주는 하나도 없는 자들을 줄줄이 끌어다 높은 자리에 앉히니 제대로 서임하였던 이들이 오히려 자리를 뺏기는 판이었다.
지방을 떠돌며 허울뿐인 만호 벼슬이나마 살던 이, 그러니까 주경수(朱景樹)라는 이름의 그 불운한 사내는 소싯적 임지에서 잠깐 어울리던 한량들에게 도사 화경에 대해 주워 듣고는 내친 김에 선생을 찾아 왔다고 했다. 그때 선생은 마침 소선국 청경호(淸鏡湖) 인근에 초막을 하나 지어 놓고 노닐던 참이었는데 오래 교유하던 벗들도 모를 곳을 생면부지 사내가 단박에 찾아 든 것이니 이 또한 인연이라면 인연이라고 하겠다.


“공직에 계신 나리께서 어찌 도사 나부랭이를 다 찾아 오십니까?”


선생은 주경수가 술도 고기도 없이 빈손으로 찾아와 어디까지나 저는 벼슬아치입네 하는 꼴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평소 같으면 불러 시중을 들게 했을 동자도 꺼내지 않았다. 결이 반드르르한 것이 제 녹으로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꿔본 비단으로 지은 보료며 붉은 칠을 한 서안 따위를 못마땅하게 둘러보던 주경수는 반사적으로 답했다.


“비위(備位)는 다름이 아니라…….”
“이미 체임되셨으니 비위라고 이를 것도 없지 않은가요?”
“뭣이!”


허리에 찬 낡은 검으로 손을 가져간 주경수가 범 같은 눈을 부릅떴다. 화경 선생은 어이쿠, 소리를 내며 장난스럽게 얼굴을 가리고는 그의 곁을 얼른 가리켰다.


“제가 아니라 나리 곁의 그 아이입니다.”


주경수가 곁을 돌아보니 꽃 한 송이를 입에 문 아리따운 계집애가 방글방글 앉아 그의 허리띠를 잡아 당기고 있지 않은가. 주경수는 놀랐다. 식솔을 데리고 부임할 형편이 못 되어 홀로 이리저리 떠돈 지도 여러 해. 아직 마흔이 못 된 그는 열 서넛 된 예쁜 계집애를 보니 정신이 산란해 어쩔 줄 몰랐다.


“이름은 백아(白兒)랍니다.”


계집애는 경수와 눈이 마주치니 배시시 웃었다. 경수는 제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왜 도사를 찾아 왔는지도 모조리 잊고 계집애의 눈 속을 정신 없이 들여다 보았다. 계집애는 천하일색으로 아직 어린데도 그 자태가 숨어 핀 겨울 동백 같기도 하고 치자꽃 같기도 하고 지저귀는 난새 같기도 했다. 경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나리. 그 아이가 마음에 드신다면 데려가셔도 좋습니다.”
“차, 참말이오? 제가 이런 아이를 참말 데려가도 된단 말씀이시오?”
“되고 말고요. 마침 백아도 나리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니.”


화경은 싱글벙글 웃더니 허리춤에서 호리병 하나를 꺼내 경수에게 주었다.


“청경호 물을 한 호리병 떠 두었습니다. 차후에라도 백아와 헤어지고 싶으시거든 다시 돌아와 이 호리병을 청경호에 던지시면 됩니다.”
“헤어지긴 왜 헤어진단 말이오? 이렇게나 고운 아이를.”
“정이란 닳고 마음은 흩어지게 마련입니다. 해는 뜨면 지고 기껍던 것은 이내 언짢아 지지요. 오늘 승등(陞等)하였다가도 내일이면 한 개의 남은 복숭아를 핑계 삼아 멀리 내쫓는 것이 인간의 정(情)이거니와, 한갓 어린 계집애를 향한 마음이야 가을 이슬이며 두견의 울음보다 하잘것없을 밖에요.”
“그럴 일 추호도 없소이다. 나는 충(忠)에 살고 성(誠)에 죽는 선비요. 연군(戀君)을 아는 몸인데 어찌 작은 정(情)을 꺼뜨리겠소? 글쎄, 만호 벼슬을 얻어낼 적에도 내가 첫등이었단 말이외다. 백아는 이제 내 오른쪽 팔이고 왼쪽 넓적다리요. 이 아이를 떼어내는 건 제 고기를 저미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게요.”
“그리 말씀해 주시니 이 얼마나 마음 든든한지. 백아야, 너는 운이 좋구나. 좋은 분을 만났으니 너 앞으로 복을 누리며 잘 살아라.”


백아는 호리병을 받아 든 경수의 어깨에 냉큼 기댔다. 옅은 숨소리에 섞여 어린 봄 버들개지 같은 간지러운 향기가 훅 풍겼다. 기름을 발라 양쪽으로 빗어 백옥 비녀와 황금 꽃들로 장식해 늘어뜨린 긴 머리카락이 동그스름한 백아의 어깨를 지나쳐 경수의 무릎을 한 번 툭 건드리고는 방 바닥으로 흐트러졌다.


“명심하십시오, 나리. 백아와 헤어지실 때는 꼭 청경호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돌아와서 그 호리병을 던지시는 겁니다. 약속하십시오.”
“내 결코 이 아이와 헤어지지 않을 것이오.”


주경수는 희희낙락하며 백아와 함께 돌아갔다. 청경호의 물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을 만큼 멀어진 후에야 그는 비로소 자신이 벼슬을 떼이고 낙향하는 길이라는 것과, 앞으로 먹고 살 길이 막막해 도사를 찾았던 것임을 기억해 냈다. 그는 허둥지둥 다시 도사를 만나려 했으나 도사란 으레 변덕스럽게 마련인지라 초막으로 가는 길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나리, 나리, 그리 슬퍼하지 마세요. 백아가 곁에 있답니다.”


경수는 저를 올려다 보며 구슬 같은 눈 가득 온갖 아름다운 감정을 담아내는 백아를 껴안았다. 계집애는 자그만 몸을 파르르 떨면서도 경수의 품을 파고 들었다. 토라진 듯 고개를 돌리는 뺨은 붉었고 그의 입술을 빨아들일 듯이 핥는 혀는 더 붉었다. 그는 백아의 상아 같은 이를 하나하나 헤아리듯 더듬고 긴 목과 그 아래 붙은 늘씬한 등줄기를 쓰다듬었다. 그는 백아의 다 자라지 않은 가슴에 수염을 문지르며 차디찬 흙에 요를 대신해 깔린 백아의 비단 옷가지를 움켜쥐었다.


“백아야 백아야 내 정녕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한탄하자 백아는 더욱 힘주어 그를 끌어안았다.


“나리. 나리께서 백아를 사랑하시면 백아는 어찌하여도 좋아요.”


흙투성이가 된 비단옷과 헤어진 가죽신으로도 백아는 아름다웠다. 주경수는 백아를 데리고 꿈을 꾸듯 주선국을 가로질러 이내 제 고향땅에 당도했다. 여러 해 전 그가 초직(初職)을 받아 나갈 적에 핏덩이였던 아이는 벌써 아홉 살을 목전에 두고 있었고 그의 수수하지만 머리채가 삼단 같던 아내는 반나마 백발이 된 채 쇠죽을 쑤고 있었다. 아내는 죽을 쑤다가 신이 벗겨지는 것도 모르고 달려 나와 지아비를 반겼다가 이내 낯이 어두워졌다.


“여보. 그 아이는 어느 댁 아인가요?”
“내 시동이외다. 도사에게 받아 고된 행로를 동반하였을 뿐이니 자네는 과히 심려치 마오.”
“어찌 심려를 아니 합니까? 글쎄, 아직 젖내가 채 가시지도 않은 어린 기생을 끼고 돌아오시다니.”
“어허 기생이라니. 월궁 항아 같은 아이라니까.”
“아이구, 항아라니! 항아님은 월궁으로 돌아나 가시지 이런 촌구석엔 어인 일로 납신단 말입니까? 이 년 가슴 터져 죽으라고 이러십니까?”


경수와 그의 아내 모용씨는 근 십 년 만에 만나자 마자 서로 토라지고 말았다. 경수는 초췌한 몰골의 처가 마음에 거슬려 백아를 안고 보란 듯이 사랑채에 들었다. 모용씨는 아들을 껴안고 마당에서 곡을 해댔다. 그녀는 쇠죽을 쑤는 것도 세끼 밥을 지어 시부모에게 올리는 것도 밭을 갈고 이웃집 일을 돌봐 주는 것도 죄다 그만두고는 안방에 드러누웠다. 경수의 늙은 부모가 달려와 그의 손과 발을 잡고는 ‘네 처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읍소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백아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양 천진한 표정으로 누가 울건 누가 화를 내건 그저 방실방실 처음 그대로 웃고 있었다.


“백아야 백아야 내 어찌하면 좋을까?”
“나리. 나리께서 백아를 사랑하시면 백아는 어찌하여도 좋아요.”


백아의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가만히 경수를 올려다 보다 배시시 웃었다. 고른 치아가 석류알처럼 드러났다. 경수는 그녀의 저고리 동정을 잡아당겼다. 풀린 고름 안쪽의 뽀얀 가슴은 분명 처음부터 한껏 부풀어 있었다.


“백아야 백아야 저 늙은 계집이 나를 괄시하니 내 몹시 괴롭구나.”
“나리. 나리께서 백아를 사랑하시니 백아가 어찌하여도 좋으신가요?”


그는 고개를 들었다.
백아는 그의 입술을 깨물듯이 덮고는 뱀 같은 혀를 움직여 목소리를 흘려 보냈다.


“나리께서 백아를 사랑하시니 백아는 나리의 아이를 낳아 드릴 거예요.”


모용씨가 죽었다.
오래 몸져누운 며느리를 위해 시모가 흰죽을 쑤어 가져다 주었는데 죽 한 사발을 비우고는 찬 물을 마셨다가 급체로 죽어 버렸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이 갑작스런 횡액에 장례 준비를 하는 사이 백아는 아이를 가졌다. 사십구재를 지나기도 전에 백아의 배는 보름날 달덩이마냥 부풀어 올랐다.
모용씨의 몸이 찬 흙 아래 묻힐 때 백아는 사랑채 문을 활짝 열어 놓고는 반대 방향으로 앉아 있다가 제 둥글고 커다란 배를 쓰다듬으며 배시시 웃었다.
아득히 멀리 첨병산이 푸르스름한 안개를 두르고 섰고 그 너머 하늘이 유난히 붉었다.


“나리, 나리, 저것은 무엇인가요?”


그녀는 탄성을 지르며 돌아 보았지만 경수는 죽은 부인의 상여를 따라간 터라 자리에 없었다. 백아는 방싯, 저 혼자 웃고는 제 배를 주먹으로 한 대 쳤다.
열 달을 채워 백아는 주먹만한 석류를 하나 낳았다. 그녀는 태연히 경수를 불러 제가 낳은 석류를 토란 잎으로 감싸 북쪽 산에 묻어 달라고 했다. 경수는 그렇게 했고 매파 할멈의 입을 막기 위해 전답을 팔아 돈을 쥐여 주었다. 그리고 그의 노부모가 나란히 세상을 떠났다. 그때마다 백아는 배가 불렀다가 꼬박꼬박 붉은 것을 낳았다. 어떤 붉은 것에는 까마귀 깃털이 달려 있었고 다른 것에는 토끼털이 드문드문 붙어 있었다.


“앞으로 일곱을 더 낳을 거예요. 나리를 위해서예요.”


백아는 천진난만한 얼굴 가득 미소 지었다.
경수는 비로소 그녀가 두려워졌다. 달라붙듯 혀를 감아 삼키는 그녀의 입 놀림도, 점점 살이 올라 만질 적마다 감겨오는 허벅다리며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은 동그스름한 젖가슴도 오히려 지나친 아름다움 탓에 요염하였고 또한 요염함이 지나쳐 무서웠다.
그는 어린 계집애의 가슴 사이에서 헐떡거리다 숨이 끊어지듯이 잠들었다.
백아는 그의 희끄무레한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나리. 나리께서 백아를 사랑하시면 백아는 어찌하여도 좋아요.”


그는 백아의 침을 먹고 백아의 머리카락을 입으며 가난하게 살았다. 하나뿐인 아들이 다 자라 청년이 되도록 백아의 배가 부르고 백아의 핏덩이가 여덟 방위의 흙에 묻히는데도 그녀의 살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두려워할수록 사랑했고 사랑할수록 야위었다.


그와 모용씨의 아들 신욱(信旭)이 약관이 되어 과시를 보겠다 고하고 아버지를 떠났을 때 경수는 오랜만에 세상과 만난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는 아버지를 향한 분노와 혐오를 감추지 못하는 신욱의 그 젊고 싱싱한 얼굴을 마주대하자 겨우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기억해 낸 듯이 얼굴을 붉혔다. 벌건 얼굴의 초라한 아버지를 등지고 신욱은 서울로 떠났고 계절은 가는 줄도 모르는 데 새로 왔다. 들이닥친 풍요로운 가을이 들판을 한 번 물들였다가 주먹만한 함박눈과 함께 지워지고 동녘부터 녹기 시작한 시냇물 아래에서 물고기들도 알을 까는 봄이 되자, 경수는 백아의 배꼽에 침을 흘리다가도 가끔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


“백아야 백아야 내 정녕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나리. 나리께서 백아를 사랑하시면 백아는 어찌하여도 좋아요.”
“백아야. 내 아들이 금의환향하여도 나 같은 못난 아비는 앞에 나설 자격조차 없구나. 부끄럽다, 참으로 부끄러워.”
“나리께서 왜 부끄러우신가요?”
“네 살에 묻혀 시름을 잊고 네 웃음에 녹아 나를 잊었으니 그렇다.”
“잊는 것이 어찌하여 나쁜가요? 그대에게는 기억해야 할 어떤 좋은 것도 없는데요.”


그는 고개를 들었다.
백아는 처음 청경호 기슭의 초가에서 만났을 때와 똑 같은 얼굴로 웃었다. 어린 계집애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노회한, 교태 서린 웃음이었다. 경수는 백아의 매끄러운 뺨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요사스러운 아름다움 앞에 제 주름진 손가락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가를 깨닫고 그가 잃어버린 세월을 한꺼번에 돌이켜 떠올리려는 찰나, 곡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죽었다. 그렇지, 백아. 죽어 버렸지?”


신욱이 죽었다.
신욱이 죽어 버린 것이다. 신욱마저!
경수는 커다란 범처럼 포효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좁고 퀴퀴한 방 밖으로 퍼져나갈 힘조차 없는 신음소리를 냈을 뿐이었다. 백아는 도로 제 품으로 거꾸러지는 못난 늙은이를 꼭 껴안았다. 거미처럼. 뱀처럼. 뻘처럼 그를 끌어안아 어떤 대단한 것도 없는 세계 속으로 내려 앉았다. 경수는 울었다. 눈물이 줄줄 주름을 메우고 흘러 백아의 수밀도 같은 젖가슴을 적셨다.


“나리. 백아가 나리의 아이를 낳아 드릴게요.”
“요망한 것!”


그는 백아의 목을 움켜 쥐었다. 백아는 그의 손 아래에서 괴로운 듯 낯을 찡그리더니 파랗게 질려갔다. 핏기가 가신 흰 이마가 눈부시게 빛났다. 상끗, 백아는 웃으며 쥐어짜내듯 몇 마디 늘어놓는 것 같다가 저편 허공을 가리켰다.


신욱이 죽었다!
신욱마저 죽어버린 거다!
경수는 제 쇠해버린 청춘을 목 조르듯 백아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힘을 주었다. 백아는 축 늘어졌다. 방바닥에 팽개치듯 떨어진 그녀의 팔이 나무 막대기처럼 툭, 움직여 방 구석을 가리켰다. 경수는 넋을 놓고 주저 앉았다가 한참 만에 백아의 보라색 손가락이 향한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호리병이 거기 있었다.
경수는 그 날까지 거의 화경 선생도, 그의 당부도 잊었다가 겨우 제 옛 일을 떠올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호리병을 꺼내 쥐었다. 안쪽에서 백아의 목소리처럼 가느다랗고 싱그러운 물소리가 들렸다. 그는 맨발로 뛰쳐나갔다. 바깥은 완연한 가을, 다 헤진 옷을 걸친 경수의 살갗들이 찬 바람에 할퀴었다. 그는 봉두난발로 달렸다. 어린 시절 뛰어 놀던 바닷가로. 활 없이 공으로 시위를 당기며 수평선 저편의 어딘가로 가상의 화살을 날려 보내던 지학(志學) 무렵의 그 자신이 어제 일 같았다. 그의 발치를 적신 물결이 물러가며 하얀 거품이 일었다. 경수는 숨을 허덕였다. 호리병을 높이 들고는 한 번 망설이지도 않고, 그는 바다를 향해 집어 던졌다.
그것이 제 허비해 버린 지난 생애거나 잃지 않을 수도 있었을 그의 몫이라서, 집어 던지는 즉시 모든 것이 본래대로 돌아가기나 할 것처럼 힘껏.


바다는 호리병을 몇 번 새김질하더니 기어코 집어 삼켰다. 호리병이 물살에 깨어진 듯 새카만 물이 푸른 바다에 섞여 들었다. 먹빛 물은 금세 흐려지는 것 같더니 이윽고 기다란 문자로 변해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경수는 자리에 주저 앉았다. 궁둥이를 적시면서 밀려온 파도가 그의 등판을 후려치며 돌아갔다.


“자유다!”
“자유다!”
“드디어 자유다!”
“자유다!”
“오, 오, 자유다!”
“오, 오, 오!”
“자유!”
“자유!”


여덟 방위에서 여덟 마리의 용이 빛에 휩싸인 채 하늘을 미친 듯이 질주했다. 그것들은 침을 뱉듯 새빨간 핏덩이를 마구 떨어뜨렸다. 온 세상이 터진 양수에 잠긴 것처럼 피와 기름으로 범벅이 되었고 생선 비린내가 진동했다. 경수는 제가 바라보고 선 남쪽 바다에서 검은 먹물로 된 아홉 개의 문자들이 열을 지어 용으로 변하는 광경을 멀거니 지켜 보았다. 용은 바닷물에 몸을 씻고는 새하얀 나신으로 변하더니 뱀처럼 껍질을 훌떡 벗었다. 그리고 백아의 목소리로 까르르 웃으며,


“자유다!”


벽력같이 외쳤다. 이윽고 하얀 용은 다른 여덟 마리의 용들과 어우러져 여러 바퀴 재주를 넘으면서, 도로 남쪽 바다 깊은 곳으로 대가리를 박고 차례차례 잠겨 버렸다. 용들이 그렇게 사라지자 새빨갛던 하늘은 새파랗게 벗개고 가을 태양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온 세상에 진동하던 비린내도 단숨에 가셨다. 핏덩이들은 녹아 흙과 물과 바위 사이로 사라졌다.


그 날 이후 경수가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아들 주신욱은 위병 일을 맡았다가 길거리에서 시비가 붙어 죽게 된 것을, 어느 도사가 ‘빚이 있다’며 대신 구명해 주었다고 하는데 이 또한 기록된 바가 아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대륜국 동쪽 끝에 어느 날 아홉 마리 용이 태어났는데 성미가 고약하고 재주 자랑을 즐겨, 백성들이 자주 상했다. 하여 대륜국 황제가 친히 나서 제압하고 청경호에 가두었으나 그 중 가장 작고 아름다운 아홉 번째 용만은 검은 먹물을 채운 호리병에 가두어 세속 공기를 쏘이게 해 주었다. 늙은 제관이 나서서 ‘백룡 탓에 거사를 망치리라’ 하였으니, 뒷날 과연 백룡이 다른 형제들을 모두 풀어주고 남쪽 바다를 차지한 후에야 황제가 후회했다고 한다.


소선국에서는 이것이 남쪽 바다에 아홉 용이 살게 된 연유라고 믿는다.



3. 춘화(春畵)



「세간에서 이르기를, 도사 화경 선생이 신유림의 신령을 모셔 여우 구슬을 얻었다 하였다.
대저 사람이 여우 구슬을 입에 물면 불멸을 얻는다 하고 삼키면 삼라만상의 이치를 깨달아, 하늘에 오른다 하기로 사람들이 칼과 도끼를 들고 선생을 찾았다.
오색 끈을 매단 당산나무가 불탄 자리에 푸른 싹이 돋았을 뿐 선생은 간 곳이 없어 모두들 그가 채색 구름을 타고 신선이 되었다고 떠들었다. 」


코흘리개 계집애는 제 이름을 몰랐다. 어미는 대처에서도 제법 소문난 논다니였는데 세월 앞에 장사 없는 지라 홍안 여위고 젖가슴도 시들자 벌이가 대번에 나빠졌다. 그예 제가 낳았던 계집애를 화전하는 노총각 손에 떠넘기고 떠나 버렸다. 물끄러미 자는 자신을 내려다 보며 “고마운 줄 알어. 이년처럼 살지 말라고 이러는 것이니.” 하고 중얼거리던 어미가, 계집애의 기억에 남았다.


기집.


노총각은 계집애를 마냥 기집, 그렇게 불렀다. 그는 사십 줄에 들어선 사내였는데 계집애를 어린 노루처럼 예뻐했다. 어린 노루가 폭설에 떠밀려 초막 근처에 나타났을 때처럼 그는 그녀를 눈 부신 듯 쳐다보고 덫을 놓아선 늘씬한 다리를 뚝 분질렀다. 계집애는 다섯 살이 되기 전에 이것아 기집아 하고 부르며 제 앙가슴을 꾹 누르는 사내 아래에서 몇 번이나 피를 흘렸다.
그녀가 행위의 이름을 깨닫기 전에 사내는 삼을 몇 뿌리 캤고 그것을 팔러 내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이를 헤아릴 줄도 모르고 계절이 가는 것도 잘 분간하지 못하는 채 계집애는 홀로 지내다 아둑시니라는 도적 눈에 띄었다. 봄이었다. 도적은 비열하고 셈이 빠른 자였으므로 계집애는 산채로 끌려가는 대신 작은 년이가 되어 어느 계곡 초입의 여관에 들어 앉았다. 계집애는 어눌한 말투로 술을 팔고 밥을 지었고, 아둑시니는 열 닷새에 한 번 와서 계집애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착하고 이쁘다, 우리 작은 년이.”


그는 툭 튀어나온 앞니를 내놓고 씨익 웃었다. 그녀는 광을 열어 열 닷새 동안 모은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술병 주둥이를 문 채 계집애의 앞가슴을 풀어헤쳤다.


“어디다 묻었니.”


그가 헐떡이며 물으면,


“시킨대루 쪼개서 채마밭에 묻구 아궁이에도 넣구 국밥도 말았시요.”


그녀도 같이 숨을 가쁘게 몰아 쉬었다. 자고 일어나면 품에 잇자국을 내 놓은 자리에 등갑 빗 같은 것이 놓여있곤 했다. 그녀는 그게 얼마나 좋은 물건인 줄도 몰라 품에 그냥 품고 있다가 보부상 손님에게 핀잔을 들은 다음에야 머리에 비스듬히 꽂아 보았다.


머리 한 쪽이 이상스럽게도 무거워서 절로 자세가 삐딱해졌다.


그녀의 배가 슬슬 부풀어 오를 즈음, 아둑시니의 발길이 뚝 끊겼다. 열 닷새는 마흔 여남은 날이 되고 곧 백서른 며칠이 되었다. 그녀는 스물 이상을 헤아리지 못했으므로 이내 날짜를 잊었다. 사방이 폭설로 뒤덮여 탁발승의 발길도 순례객도 사라진 섣달 무렵, 칼을 찬 사내가 찾아 들었다. 남산만한 배로 씩씩대며 냉골에 누워있던 여자는 때에 전 이불과 아랫목을 양보하고는 젖은 나뭇가지로 불을 피웠다.


사내는 담비털을 덧댄 답호를 풀어놓고 찡그린 얼굴로 방을 차지했다. 그녀는 멀건 죽 한 사발을 개다리소반에 받쳐 내 놓았다. 그는 입맛이 딱 떨어지는지 휘어진 숟가락을 손끝으로 집었다가 도로 팽개쳤다.


“이것 뿐인가.”
“글쎄 낸들 어쩌우. 들고 나는 사람이 있을 적에는 그래도 고깃국이 올랐지만서두……. 사람 구경을 못한지 한참이라니까. 남았더라도 죄 썩었시요. 딱한 양반이 때를 잘못 골랐지.”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기색이라 사내는 계집애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퉁퉁하고 넙데데한 뺨이 얼고 터지고를 반복해 시뻘갰다. 그가 보기에 그녀는 엉키다 못해 칡넝쿨 꼴이 된 머리하며 낡은 적삼까지 차마 봐줄 게 아니었건만 묘하게도 눈이 크고 천진해서 사람을 끄는 듯싶었다. 사내는 그녀의 부른 배에 슬그머니 손을 얹었다.
그녀는 몸을 피하지 않았다.


새벽녘에 사내는 칼 다루는 이들 습성대로 쉽게 눈을 떴고, 머리맡에 둔 칼자루를 번개같이 채어 쥐었다. 옹송그리고 숨어들어 그의 목을 노렸던 칼이 구들장을 한 번 찔렀다. 사내는 벽에 붙어서서 그녀를 노려 보았다.


“여우냐?”


여자는 의아하다는 듯 그 천진난만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방금 그를 죽이려고 칼을 휘두른 주제에 정녕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녀는 물었다.


“그짝이 지금 아니 죽으믄 다음 사람두 고깃국은 못 먹는디, 고것이 그래두 괜찮우?”


사내는 소름이 끼쳐 몸을 떨었다.
그제야 자신이 여행객을 잡아 인육을 팔고, 재물은 훔치는 종류의 숙소에 들었음을 알았다. 그는 여자를 묶고, 공범이 없단 걸 확인하고 나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바깥에선 휭휭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겨울 바람이 지나고 골짝마다 눈이 한 무더기씩 쏟아져 쌓였다. 사내는 환한 빛 아래에서 발자국을 어지럽게 남기며 여관 주위를 뒤졌다. 광에는 여자가 대충 쌓아 놓은 온갖 재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아궁이며 마당 한켠에서 타다 남은 머리카락과 뼈가 나왔다. 여자는 사내가 하는 양을 한가로이 지켜보며 멀뚱멀뚱 앉아 있다가, 그가 아주 오래된 여자 뼈를 섬돌 바로 아래에서 찾아내자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여자의 해골에 알량하게 걸려있던 등갑 빗을 보고 떠오르는 바 있었던지,


“그게 아마도 큰 년이겠시요.”


하고 히쭉 웃었다.
사내는 여자의 둥글고 얼어터진 얼굴을 진정 여우라도 보듯 내려다 보았다.


“사람이 죽었어.”
“죽었시요. 그거이 뭐 어떻다는 말이야요? 토끼도 꿩도 죽지요.”
“인간도 아닌 계집이로군. 짐승이로다.”


사내는 여자의 어깨를 세게 잡아 밀어 넘어뜨렸다. 여자는 시야를 스치며 반 바퀴 돌아 누운 산등성이를 바라보았다. 토끼도 꿩도 죽이지 않았는데 사람을 죽였다. 인간이 아니다. 어째서? 여자는 생각했다. 범은 사람을 잡아 먹는다. 여우도 사람의 간을 씹는다고 들었다. 인간이 아니다. 그렇구나, 짐승.
사람을 먹는 것은 짐승이구나.
여자는 눈을 감았다.
그는 여자를 관에 넘기는 대신 데리고 내려가 대처로 나갔다. 여자는 몰랐으나, 그곳은 소선국의 수도 응천이었다. 여자는 높다란 성벽 아래를 지날 때면 그게 당장이라도 무너져 저를 덮치기나 할 것처럼 몸을 웅크린 채 벌벌 떨었고, 비단 옷에 노리개를 늘어뜨린 여자들이 곁을 지날 때면 입을 헤 벌린 채 한눈을 팔았다. 딸각거리는 말발굽소리나 수레바퀴가 아니라 여자들의 호박 노리개에서 한 순간 반짝이는 햇빛 조각이 그녀의 내면에 말라붙은 어떤 인상을 되 끌어내는 것 같았다. 그녀는 거칠게 팔을 잡아당기는 사내에게 끌려 팔각지붕을 인 어느 저택으로 향했다.


인공으로 만든 연못에 팔뚝만한 잉어가 노닐고 여러 개의 가산이 봉래를 본따, 곧 주먹만 한 신선들이 구름을 끌고 하강할 것 같은 정원이 펼쳐졌다. 여자는 굼실굼실 벽을 타고 앉은 기와로 된 용과 고상한 창들 너머로 이쪽을 훔쳐보다 길게 늘어진 분홍 치맛자락을 끌고 부리나케 도망치는 여자들의 분냄새에 넋을 놓았다.


사내는 여자가 알 수 없는 여러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며, 커다란 방에서 그녀를 다른 사내에게 넘겼다. 여자는 비단 보료에 근엄하게 앉은 그 나이 든 사내가 이 광대한 저택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여자는 우울한 얼굴에 죽음의 냄새가 풍겨오는 노인을 똑바로 쳐다 보았다.


“강호에서 이름 높은 자네가 이런 수에 손을 빌려줄 줄은 몰랐네 그려.”


저택의 주인이 말했다. 사내는 고개를 깊이 조아렸다.


“그토록 복수가 중하다는 뜻이렸다. 백천.”
“아니옵니다. 대인. 이 계집은 어차피 죄가 중해 지옥에 떨어질 물건, 최후에나마 선한 일에 발을 들이는 편이 구원이 되리라 여겼사옵니다.”
“죽고 죽이는 데 구원이 어디 있겠나.”


대인.
여자는 대인, 이라고 다시 입 안으로 되뇌며 노인을 눈에 새겼다. 그녀는 언제나 제 뜻과 관계 없이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 앉았기에 그 모든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 초막에서 저 초막으로, 다시 이번에는 드높은 성벽이 첩첩이 놓인 너머의 어느 저택으로. 노인의 등 뒤에 놓인 병풍이 그녀의 눈에 들었다. 저택에서 시작해 길게 뻗어 나가, 여러 첩을 지나자 어느덧 깎아지른 절벽과 안개에 휩싸인 고요한 나루터에 도착하는 그림이었다. 나루터 너머는 백지 같았다. 여자는 텅 빈 그 공간이 강을 뜻하는 것이라고는 알지 못해, 허공을 저어 나가는 일엽편주가 광막한 하늘을 나는 줄로만 여겼다.


아마도 어떤 인간은 하늘을 날줄 아는 것이리라.


“여인을 두고 가게. 자네는 이 일을 모르는 것으로 해 둠세.”


대화가 끝나자 여자를 데리고 왔던 사내는 한 마디 말도 없이 물러갔다. 여자는 혼자 남았다. 노인은 여자의 부푼 배와 땟국물에 전 저고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돌아갈 곳은 있느냐?”
“없시요.”
“가엾구나.”


그것이 다였다. 노인은 여자를 언년이라고 이름 붙이고는 하녀들 방으로 보냈다. 여자는 물을 긷고 불을 피우고 밥을 지었다. 고깃국에는 이미 다 저며진 고기와 잘린 뼈만 넣으면 되었다. 여자는 때로 고기의 감촉과 무게를 가늠해 보곤 했다. 어느 날은 돼지였고 어느 날은 소였으며, 때로 양과 염소도 들어왔다. 하지만 여자는 어느 날엔가 도마 위에 삶아 낸 고기를 놓고 칼로 잘라내다 말고, 그것이 꼭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젖빛 비계 위로 칼을 올린 채 여자는 혼자 씩 웃었다.
여자는 저택의 행랑채 어딘가에서 아이를 낳았다. 겨울이 다 끝나기 전이었다. 여기저기 남은 잔설 위로 겨울 비가 봄을 재촉하듯 쏟아지던 날, 여자는 동이 트는 것 대신 아이의 발가락이 제 몸을 빠져나가는 감각을 먼저 느꼈다.
가물거리는 눈으로 바라본 갓난애는 작고 검붉었다. 여자는 도마 위에 몇 번이나 올려 보았던, 수많은 인간의 고깃덩이들과 자신이 낳아 놓은 아이 사이에서 어떤 차이점도 찾아낼 수 없었다. 사람들이 수선을 떨며 아이를 씻기고 얼러 여자의 품에 안겨 주었다. 여자는 낡았지만 정성 들여 빨아낸 이불 아래아이와 누워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계집애야.
엄마하고 나하고 똑 같은 계집애야.


[자네를 닮았어.]


같이 일하는 여자들이 떠들며 사랑스러운 듯 아기를 바라보던 모습이며 목소리가 머릿속을 왱왱 울렸다. 나를 닮았어. 여자는 품 안의 아기의 무게를 새삼 재 보았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던 젖빛 비계. 칼을 가져다 대면 잠시 완고하게 그 끝에 머물렀다 어느 틈엔가 부드럽게 벌어져, 결을 따라 잘려나가던 근육의 감촉. 여자는 수없이 찌르고 잘랐던 육신들에서 물컹 솟던 피를 떠올렸다. 혹은 질감을. 쇠로 된 칼날을 따라 빗줄기처럼 미끄러지던 수많은 사람의 피의 질감이 이번에는 그녀의 뺨을 타고 흘렀다.
여자는 제 귓바퀴로 굴러드는 물기를 무심하게 닦아냈다.


이튿날 아침 몸을 푼 여자를 거들어 주려고 방에 들어섰던 건넛방 물어미가 이불 아래에서 차갑게 식어 버린 갓난애를 발견했다.
이불 무게를 버티지 못한 모양이라고, 참으로 가엾다고, 여자들은 앞다퉈 ‘언년이’를 위로해 주었다. 언년은 벌개진 눈으로 멍하니 누워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가만히 있었다. 처음 죽은 애를 발견한 물어미가 그녀의 손을 잡고 제 아이를 잃은 양 한 바탕 울어주었을 때도 그녀는 혼자 떠올렸다.


[가엾구나.]


돌아갈 곳이 없다는 사실이 가엾은 것일까.
아니면 아이의 작은 코와 입을 손쉽게 이불로 눌러 죽여 버렸다는 사실이 가엾은 것일까.


여자는 알 수 없었다.
여자는 소반 위에 놓인 고깃국물을 떠 목으로 넘기며 그 안에 떠도는 기름기가 죽어 늘어진 붉고 작은 그 몸뚱어리라고 상상했다. 차가운 흙 아래 무명천으로 둘둘 말려 묻힐 어린 생명이 아쉬운지 아까운지 여자는 몰랐다. 그저 입 안에서 고기의 군내가 천천히 부풀어오르고 골방 가득 죽은 동물들이 그림자 없이 들어차는 환상을, 그녀는 보았다.
여자는 지그시 자신을 쳐다보는 여러 쌍의 눈동자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이 제 몫인지 판단하지 못했다.


백일이 지나, 노인이 여자를 불렀다.
여자는 먼저 방에 들었던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 뒤쪽에 앉아 넙죽 절을 올렸다. 서툰 동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인은 먼저 들었던 이에게 여자를 가리켜 보였다.


“선생, 저것이 그 물건일세.”
“귀한 일을 자청하셨습니다. 차마 이름을 밝히지 못하는 분들을 대신하여 이 산해가 감사를 올립니다.”


여자는 왜 자신이 감사를 받아야 하는지 알 수 없어 돌아 앉은 그 사람을 쳐다 보았다. 고개를 들어 올린 사람은 젊었고 눈이 기름했다. 답호를 입었던 사내도, 아둑시니도, 이 사람도 젊었다. 여자는 저도 모르게 제 배를 꾹 눌렀다. 산해라는 이름의 남자가 검은 눈으로 여자의 하는 양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부인께 청하고 싶은 일이 있어 무례를 무릅썼사옵니다.”


청은 공손하였으나 여자는 그것이 일종의 명령이라는 것을 알았다. 답호를 입은 사내는 그 일을 위해 그녀를 노인에게 넘겼을 터였다. 여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아둑시니가 가슴팍에 던져주고 갔던 등갑빗이 떠올랐다. 왜 이러한 때 그것을 떠올리는지 여자는 몰랐다. 모르는 것은 빨리 잊혔고 이내 떠올린 적도 없는 것처럼 그녀의 의식 아래로 가라앉았다.


산해는 여자에게 사람을 죽여 달라고 청했다.
비단 옷을 입고 사람인 척 하는 짐승을.


짐승. 여자는 사람과 짐승이 얼마나 다른지, 과연 어느 한 쪽이 더 사악한지 알기 어려웠으나 잠자코 산해의 말을 들었다. 답호를 입은 사내도 여자를 인간도 아니라고 불렀다. 여자는 그의 말에 따르자면 짐승이었다. 사람인 척 하는 짐승. 여자는 고개를 조아렸다. 산해는 낮게 으르렁거리며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오늘날에 이르렀음을 호소하고, 살의 없이 오래 상대를 지켜볼 인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 길로 여자는 산해의 몸종이 되어 그와 길을 떠났다.
노인의 저택만큼이나 거창한 곳에 이르러 여자는 귀빈 대접을 받는 산해와 함께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여자였다. 팽팽하게 올려 묶은 머리카락은 반쯤 희었고 눈가에는 주름이 깊었다.


“경설 마님, 기체후 일향만강하시옵니까. 불초 소제(小弟)가 아둔하여 오랫동안 문안을 못 여쭈었사오니 부디 용서 하십시오.”


산해는 여자 앞에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여자는 따라서 절을 했다. 경설이라고 불린 주인은 웃을 줄 모르는 사람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고개를 한 번 까딱거렸다. 문이 열리고 잘 차려 입은 여자들이 우르르 들어와 앉았다. 여러 송이 핀 모란꽃 같은 여자들 사이에 명자나무 꽃 같은 자그마한 여자가 홀로 고개를 빳빳하게 들어 올렸다. 여자, 언년은 그녀와 눈을 맞췄다.
명자나무 꽃은 방그레 웃었다.


“얘, 넌 어디서 왔니?”


나중에 명자나무 꽃은 언년이 자신과 한 방을 쓰게 되었다고 알려주며 무릎을 바짝 붙이고 앉아 물었다. 언년은 고개를 반쯤 흔들었다가 산해가 일러 주었던 것이 떠올라 겨우 다른 말을 했다. 거짓을 고하지는 않았다. 제가 노총각과 살던 산을, 아둑시니가 찾아오던 초막을, 나중에는 노인 밑에서 잡다한 일을 하던 저택을, 그 속한 지명을 말했기에. 언년은 거창하고 낯선 지명들이 아주 이상하게 여겨졌다. 펄펄 쏟아지던 눈이나 길을 잃은 노루를, 혹은 사내들 벗은 가슴에 눌려 버둥거리던 나날을 그 지명들은 조금도 떠올리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사월이라고 하는데, 너는 언년이라지? 언년이가 얼마나 많은지 너 아니?”
“모르지.”
“사투리 쓸까 그래? 말이 왜 그리 짧아. 맘 푹 놔라, 얘. 사월이두 여기 열 둘은 될걸.”


사월은 까르르 웃었다. 다 익은 석류가 툭 터지는 것 같았다. 언년은 열 둘은 된다는 사월이들 틈에서 과연 그녀는 무엇일까 재 보았다. 언년에게 사월은 그저 명자나무 꽃이었다. 그 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수다스러운 그녀와 묻어 지내는 동안 언년은 경설 마님 곁을 맴돌았다. 산해는 다른 명이 있을 때까 경설의 곁을 잘 지켜 달라고 했다. 살의 없이. 대단한 총기를 발휘하지 않고. 눈에 띄지 않는 몸종 계집으로 지내 달라고. 언년은 경설의 손 씻을 물처럼 무던하게 살았다. 황금 대야에서 출렁거리다가 빈 마당으로 휙 내던져져 단박에 식어갈 그런 물처럼 거기에 있으면 족했다.


때로 잠결에 눈을 뜨면 산짐승이 멀거니 자신을 내려다 보는 환상이 보였다.
말 없고 순한 그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언년은 제 텅 빈 손이 묵직하게 차오르는 것 같았고 사내가 젖가슴을 움켜쥐었을 때처럼 온몸이 바르르 떨렸다.


언년은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다.
이따금 한 마디 떠오르는 것이 있어 입뿌리까지 뿌듯하다가도 그녀는 그것이 과연 제 몫인가 알지 못해 또 삼키곤 했다. 이불에서 명자나무 꽃 냄새가 났다. 곁에 누운 사월을 돌아 보면 눈에 익은 어둠 너머로 달게 잠든 앳된 얼굴이 이상하리만큼 눈 부셨다. 언년은 이불을 끌어당겨 가만히 사월의 얼굴을 가렸다. 이불 위로 어둠이 가물거렸다. 그것은 얄팍하고 질척한, 피로 된 막 같은 그림자였다. 언년은 그 그림자가 누구의 것인지 고민하며 다시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아침 나절에 눈을 뜨면 이불은 고스란히 거기에 있었고, 사월은 이불 아래에서 꼭 다시 태어나는 사람처럼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언년은 이불이 걷히고 사월이 첫 숨을 내쉴 적마다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갓난애의 울음소리가 그녀의 귀 깊숙한 곳에서만 맴돌다가 훌쩍 사라졌다.


계절이 열 번 바뀔 때까지 산해는 아무 연락도 해 오지 않았다.
언년은 저택에서 보고 들은 것이 모두 꿈 같았다. 밤에 슬쩍 끌어다 덮은 이불 아래 잠꼬대를 하는 사월이 그녀가 아는 전부이고, 아침에 싸늘하게 식었던 조그마한 몸뚱어리는 눈꺼풀 안쪽에 새겨진 전생의 기억일 지도 몰랐다.
그녀는 이내 부엌에 서게 되었고 뼈에 붙은 고기를 칼로 저미며 그 결을 가볍게 주물렀다.
그것이 사람 고기처럼 여겨지는 일은 없었다.
더운 국물에서 쓸데없이 군내가 나는 일도 없었다.


어느 아침 언년은 목이 그대로 붙은 채 털이 뽑혀 온 닭의 배를 죽 갈랐다. 뱃속을 대충 긁어내자 검붉은 속에 섞여 손가락 마디 하나만한 바늘이 튀어 나왔다. 언년은 바늘을 물에 헹궈 옷고름에 찔러 두었다. 방으로 돌아오자 사월이 전해 받았다며 언년에게 한 마디를 전했다.
산해였다.
언년은 사월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하는 돼지고기 이야기가 산해의 언질인 것을 알았다.


“글쎄, 밥상에 오른 고기가 상했단다. 주인 마님한테 알리면 야단 맞는다면서 언년이한테 바로 얘기하라더라. 너 그 선비님 방에 상 들여 갔니?”
“그랬나 보다.”
“어이구, 뭘 그리 바빠. 사람 손이 몇인데 부엌일 보느라 바쁜 너한테 상까지 맡긴대?”
“노는 손 따로 있다니. 비는 대로 들이면 그만이지. 얘기는 됐고 이거 사월이 너 가져라.”


언년은 닭의 뱃속에서 나온 바늘을 사월에게 주었다. 사월은 생뚱맞은 선물을 보고 의아한지 계속 말을 붙여 왔다. 언년은 뚱하게 앉아 바느질거리를 끌어 당겼다.


“안 그래도 바늘 부러진 걸 어찌 알았대? 언년이 용해, 참 용해.”


빈 방으로 들이친 햇살이 문살 무늬를 찍어 놓았다. 언년은 좁은 방에 붙어 앉은 사월의 둥그스름한 어깨와 복숭아빛 뺨 위로 비스듬하게 걸린 그림자의 외곽선을 눈으로 훑었다. 이불 아래 들리던 고른 호흡소리도, 시선을 다시 천장으로 향하면 어김없이 쑥 면상을 들이밀던 짐승들의 환상도, 이렇게 낮 동안 마주 앉으면 죄 거짓말 같았다.
자시(子時)를 지났을 무렵 언년은 조용히 일어나 방을 빠져나갔다. 방문턱을 넘을 때 사월이 떨어뜨려 놓은 쌈지가 채여 굴러갔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달빛이 푸르스름하게 들어차면서 밀려난 그림자들이 저편 벽 아래 오글오글 고여 있었다. 얇고, 질척하고, 끈적한, 고기의 힘줄 부분 같은, 어둠이었다. 언년은 그 안에서 이미 숨이 멎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들을 본 것 같았다.
거기 갓난애는 없었다.
언년은 호흡을 고치고 밖으로 나갔다. 신에 발을 꿸 때 바늘을 밟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른쪽 발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언년은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며 걸어 안방으로 갔다. 무섭도록 고요한 마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달이 깨벗은 나무들을, 을씨년스러운 가을 바람 소리에 파묻힌 장독과 물동이들을, 한 켠에 세워 놓은 도리깨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경설의 방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언년은 아둑시니의 초막에서 여행자들의 몸을 칼로 찌를 때를 떠올렸다.


[여인의 몸으로 어찌 장정을 죽였습니까?]


산해가 물었을 때, 언년은 술과 밥에 약을 타는 법을 설명했다. 약은 만들기 어렵지 않았고 언년은 그것을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고도 말했다. 산해는 언년에게 약을 가져오는 건 자신이 할 일이라고 답했다. 언년은 준비된 칼로 경설의 숨을 뺏기만 하면 된다고.


[죽여서, 자르우? 아니문 어디에 묻을까? 국을 끓여 대접하리까? 또 아니문......]
[부인. 죽이기만 하면 됩니다. 숨을 뺏기만 하면 가엾은 그 몸에 다른 무도한 짓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언년은 장지문을 옆으로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엾은 그 몸.
머릿속이 쟁쟁 울렸다.


경설은 노란 비단 이불을 덮고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천장을 향해 누운 얼굴은 반듯했고 호흡은 편안해서 언년은 사월을 떠올렸다. 눈을 뜨면, 경설의 눈에는 천장이 고스란히 보일 터였다. 짐승의 눈알도, 엉겨 붙어 들끓는 그림자도 없는 천장이란 어떤 모습일지 언년은 처음으로 궁금하게 여겼다.
손을 뻗어 금침 아래를 더듬자 칼자루가 잡혔다. 언년은 조용히 칼을 들어 경설의 목을 찔렀다. 경악한 듯 올려다 보는 커다란 눈에 시선을 맞추고, 언년은 이미 숨이 멈춘 자신의 그 많은 짐승들처럼 표정 없이 거기에 머물렀다.
경설은 버둥거리다 피를 쏟고 죽었다.
언년은 경설이 할퀸 제 목을 어루만졌다. 피가 묻은 채, 흐트러진 머리타래로 언년은 비틀비틀 걸었다. 아둑시니의 초막에서 무수한 살인을 저지르던 때와는 달리 굉장한 피로감이 그녀를 덮쳤다. 장지문을 열고 쭉 뻗은 복도로 발을 올리자 노인의 저택에서 본 병풍 그림의 산길이 눈 앞에 펼쳐졌다. 환상이었다. 검은 한 줄로 이어져 구불구불 나아가던 산길은 그 저택의 담장에 앉은 용처럼 보였으나, 그 끝은 다만 텅 빈 공백이었다.
날아갈 듯 위엄 있게 앉은 장대한 저택과 창칼처럼 자란 나무들로부터 주저앉은 이불같이 쪼그라들어 종내 딱 한 줄로 수렴하는 검은 선들.
그리고 백지.
언년은 따끔거리는 오른발로 점을 찍듯 바닥을 디뎠다.
마당은 하얀 달빛으로 가득하고 여름 계곡 물길 아래 모래들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언년은 거룻배 같은 자신의 그림자에 올라 섰다.
나아갔다.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녀는 먼 기억 속의 물음을 되풀이했다.
돌아갈 곳은 있느냐?
스스로 묻고,


“없시요.”


하고 전과 마찬가지로 답했다. 그러자 이상하리만큼 평온한 시선 속으로 어디서 튀어 나왔는지 수많은 장정들이 나타나 그녀의 몸을 휘어잡고 다그치고 묶었다. 언년은 아픈 오른 발부터 무너졌다. 주저앉자 사람의 다리들이 그녀를 감쌌다.


“왜 죽였느냐?”
“누가 시켜 이런 짓을 했느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관청 담장으로, 마루로, 심문장으로, 짚이 깔린 옥으로, 그녀의 몸뚱이는 옮겨 다녔고 언년은 풀각시처럼 힘 없이 걸었다.


다시 어느 밤, 언년은 눈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창이 없고 천장도 없는 옥에서 모로 누워 있던 언년은 어둠이 걷히고 긴 그림자가 옥사 안을 가로질러 저에게 오는 것을 보았다. 제일 먼저 비단 신이. 다음에는 대님을 맨 발이. 마지막에는 갓 양태 그림자로 반쯤 가린 젊은 얼굴이.
언년은 그 강퍅해 보이는 입술이 열리는 것을 기다렸다.
한창 싱싱할 그 육체에서 채 털어내지 못한 눈송이가 떨어졌다.
언년은 자신의 배를, 저도 모르게 양 팔로 감쌌다.


“죽어 마땅한 죄인에게 묻노니.”


노총각과, 아둑시니와, 답호를 입은 사내와, 산해와, 또한 다르지 않은 목소리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젊은 남자. 언년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남자들. 언년은 등을 돌리고 누웠다.


“그 죄 씻을 길 없으나 만약 가엾은 자를 대신해 죽기를 자처한다면 죽은 후에나마 이름을 남겨 줄 터이니 어떠하냐?”


언년은 퉁명스럽게 답했다.


“어려운 말은 모르우.”


그러자 남자는 가만히 한숨을 쉬더니 몸을 낮추어, 옥창살을 손으로 잡고 고쳐 물었다.


“다른 이를 대신해 죽을 수 있겠는지 묻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가엾은 노릇일 터이나, 혹 네게 그럴 뜻이 있다면…….”


언년은 몸을 굴려 일어났다. 시선이 마주쳤다. 언년은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보았다.


“어차피 죽을 것이니, 가 주지요.”


남자는 깊이 고개를 숙여 ‘고맙다’ 고 중얼거리고 이내 가 버렸다.
몇 번의 아침이 소리 없이 찾아 들었다 다시 소리 없이 떠났다. 언년은 죽은 듯이 누워 있다가 붙들려 가 마차에 실려 먼 길을 갔다. 세 밤을 자고 깨어 다시 일곱 밤을 지나 도착한 곳은 그녀에게 몹시 낯선 산속이었다. 그녀가 살던 어떤 산과도 다른, 이채로운 초록빛에 그녀는 놀랐다. 녹나무도 느릅나무도 소나무와 덩굴 칡도 같은가 싶으면서도 색이 달랐다.


“여기가 어디요?”


묻자, 항성 어느어느 산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누박산인지 수박산인지 몰랐다. 여자는 울창한 수풀 가운데 난 좁은 길을 따라 걸었다. 앞서 걷던 형리가 멈추어 선 곳에는 커다란 서낭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서낭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오색 천들이 산 바람에 너울거리는 것이 꼭 비단치마를 걸친 여인 같았다.


“자네는 여기 산신에게 제물로 온 게야.”
“산신이 뉘신데 그러오?”
“범이지. 덩치가 산만하고 허연 범인데 처녀를 하나 바치랬다네. 생떼 같은 처녀를 바칠 수 없으니 이왕 죽을 목숨, 자네에게 차례가 갔겠지.”
“이왕 죽을 내게 그걸 왜 알려 주시는 거요?”
“죽을 때 죽더라도 뉘 때문에 어찌 죽는 지는 알고 가야 덜 가엾지 않겠나. 자네도 사람 새낀데.”


인간도 아닌 계집이로다.
그 목소리가 절로 떠올랐다.
가엾구나.
그 목소리도.
여러 개의 목소리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수런거리며 뒤엉켰다. 여자는 고개를 기우뚱거렸다. 등갑 빗이 아직도 한 쪽 머리에 꽂혀 있기나 한 것처럼. 형리는 곰곰 생각에 잠긴 여자를 제단에 데려다 앉히고 물러났다. 젊은 무당은 쪽빛 홑치마에 철쭉색 철릭을 걸치고 노랗고 빨간 허리띠를 동여맸다. 양 손에 방울이며 칼을 쥐고 달려 나와 오방색을 물들인 명주천을 질질 끌며 연신 방울을 울렸다. 활짝 핀 종이꽃들이 제단 위에서 파르르르 떨었다. 하늘이 단숨에 어두워지더니 돌풍이 몰려왔다.


신령님!
부르짖으며 왈칵 엎어지는 무당의 얼굴이 창백했다. 언년은 제 앞으로 굴러오는 두루마리를 보았다. 좋은 종이에 구구절절 무얼 꾸며 쓰고 끄트머리 어드메에 언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언년은 글을 몰랐다. 꾸물거리는 글자들이 죄다 알 수 없는 어떤 음모를 꾸미는 사람들 같다가도 그림 병풍에 늘어선 나무들의 우듬지처럼 보이기도 했다.
거기 적힌 제 이름은 언년이 아닐 수도 있었다.
여자는 땅이 우는 소리에 몸을 웅크렸다. 촛대가 쓰러지고 제수가 쏟아졌다. 두루마리에 불이 옮겨 붙어 한 순간 번쩍 타올랐다. 순식간에 몰려든 구름이 시커매지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땅은 계속 울었다. 사람들은 우왕좌왕 흩어지며 날뛰었다. 무당은 주먹을 꽉 쥔 채 엎어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제물을 속여 신이 노하신 게야.


누군가 두려움에 떨며 중얼거렸다. 여자는 눈을 꼭 감았다. 무언가가 그녀의 숙인 어깨를 사뿐 즈려 밟고 훌쩍 날아오른 것 같았다. 그 기묘한 무게감. 여자는 저도 모르게, 난다, 하고 뇌었다. 날아오른다. 사람이 거룻배를 타고 고요한 저 순백색 하늘로 날아오른 것이다. 여자는 눈을 떴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꺾여 늘어진 창과 깃발, 허리가 토막 난 서낭나무 앞에 그녀는 혼자였다. 꺾인 서낭나무 가지가 정수리 바로 위까지 기울어져, 오색천이 그녀의 등을 덮고 있었다.


여자는 일어나 아무 방향으로나 걸었다.
산길을 따라 물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한참을 걷자, 둥그렇게 난 공터가 나타났다. 얼굴도 지워져 버린 장승 앞에 웬 어린아이가 우두커니 앉아 발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너 누군데 여기 있니?”


말을 붙이자 아이는 비로소 고개를 들어 여자를 바라 보았다. 어느새 비는 그치고 푸르스름한 안개가 자욱하였다. 안개에 파묻힌 채 아이의 새카만 눈동자가 한참이나 붙박여 있을 뿐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여자는 재차 물었다.


“집으루 안 가니? 느 엄마는?”
“몰라.”
“모른다니 뭘 모른단 말이야?”
“집이 어딘지 기억이 안 나. 엄마는…… 엄마는 여기 없어.”
“그럼 어쩌려고. 산 속에 어린애 혼자 어정거리면 못 써. 범이 와서 물어간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걸.”


여자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꼭 그렇게 말하기로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불쑥 내뱉었다.


“어디든 돌아갈 곳이 있을 거야.”


말하고 보니 꼭 그럴 것 같았다. 아이는 주저앉은 채 무릎을 꼭 감쌌다. 여자는 내친 김에 아이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반쯤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엉덩이를 툭툭 털어 주고 입성을 보니 매초롬한 감색 배자에 새하얀 풍차바지, 앙증맞은 가죽신까지 꽤 좋은 집 아이 같았다. 여자는 아이의 손을 어루만졌다. 조그맣고 포동포동하게 살이 올라 부드러웠다. 하도 여려서, 여자가 몇 번 주물거리면 혹시 손 안에서 익은 비계처럼 폭 뭉그러질까 싶어 얼른 손을 놓았을 정도였다.


“돌아갈 곳 없으면 어찌 해?”
“없긴 왜 없누? 무어 어디 하나 빈 곳이 있겠지. 느 하나 돌아갈 곳 없을라 보냐?”


있던 건 그저 어디론가 꼭 가는 법이다.
잘린 버드나무 밑둥도, 홰를 치는 닭이 떨어뜨린 깃털도, 다 모지라져 여타한 바윗덩어리들과 다르지도 않아 보이는 돌부처도. 어딘가에서 와서, 무엇이었다가 다시 무엇으로 돌아가게 마련인 것이다. 여자는 곱디 고운 아이의 손을 잡고 다시 걸었다. 사람도 짐승도 혹은 설움조차도 어딘가에서 온다. 무엇인가가 된다. 되었던 것은 돌아오고 걷기 시작한 것은 멈추지 않던가.


‘내게 갈 곳이 없어도 이 아이에겐 있겠지.’


여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이의 부모가 애타게 찾고 있으리라고. 아이를 품에 돌려 주면 세상을 다시 얻은 듯 기뻐하리라고. 낡은 이불 아래 바드작거리다가 숨이 꺼져버렸던 제 갓난애의 무게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러자 걸을 적마다 오른발이 쿡쿡 쑤셨다.


“어디로 가?”


걷고 또 걸어도 길은 보이지 않았다. 짐승들이나 다니는 골짝으로 이끌리며 아이는 태평하게 방글방글 웃었다. 놀잇길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여자는 아이의 채근에 손을 고쳐 잡았다. 손아귀가 땀으로 가득했다. 해는 떨어진 지 오래, 한치 앞도 어둠이었다. 발끝의 감각에 의지해 여자는 수풀을 헤치고 걸었다.


“어디로든 가야지.”
“어디로 돌아가는데?”
“어디로든. 어디 너 하나 기댈 곳 없겠니. 여우도 저 자던 골로 돌아가고 다람쥐도 나무등걸에 기어오르는데. 달도 서쪽으로 가고 북극성도 해가 뜨면 자러 가는데.”


멀리서 불빛이 깜박거렸다.
여자는 겨우 맥이 탁 풀려, 아이를 부둥켜 안았다. 살았다. 그런 심정이었다. 여기저기 긁히는 것도 모르고 넘어지고 꺾여 가며 불빛을 향해 나아갔다. 어둠인가 싶으면 허방이고 허방인가 싶으면 수풀이었다. 나무껍질에 손톱 끝이 부러졌을 때, 시야가 순식간에 넓어졌다.


초막이었다.
낯익은, 지독하게 낯익어서 소름이 끼치는 초막이었다. 여자는 눈을 비볐다. 항성의 아무아무 산이라고 했다. 항성에는 태어나 한 번 가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왜.


기집.


여자는 주저앉았다.


작은 년아, 사람은 어디다 묻었느냐?


여자는 숨을 헐떡거렸다.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쥐면서 다른 손으로 아이의 어깨를 끌어 안았다. 보면 안 돼. 중얼거림은 흐느낌으로 변했다. 가, 어서 가.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너는 돌아가야지. 돌아가야지.”


어둠 속에서 언제나 말끄러미 이쪽을 바라보던 수많은 눈들이 일제히 시퍼런 빛을 발하며 그림자를 드리웠다. 품 안의 아이가 여자를 껴안았다.


“앞을 봐.”


고개를 들고, 여자는 눈을 한 번 깜박였다.
껍질이 떨어지듯 눈 앞이 선명해졌다. 여전히 거기에 똑 같이 버티고 선 초막. 흙을 바른 벽과 있는 둥 마는 둥 둘러친 사립문을 차례로 바라본 후 여자는 기듯이 한 손을 뻗었다.


낯선 집이었다.
여자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완전히 다른 집일 뿐이었다.


“손님,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청사초롱을 든 여인이 너울을 드리운 채 여자 앞으로 걸어 나왔다.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품 안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간 아이가 별안간 노호성을 내질렀다.


“네 이놈 화경아! 아직도 이런 잔재주나 부리느냐?”


고함과 함께 아이의 몸이 신장(神將)처럼 거대해졌다. 여자는 놀란 나머지 벌렁 뒤집어져 나뒹굴었다. 청사초롱을 든 여인이 호, 호, 호,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와 함께 쪼그라들어 몽당빗자루로 변해 툭 떨어져 내렸다.


“화경아! 썩 나오지 못할까? 도사가 하늘을 능멸하려 한 죄, 범을 흉내 내 천리를 달리고 만리를 휘저어 사람을 상하게 한 그 못된 죄를 네가 알터다.”


아이였던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환한 빛과 구름에 휩싸여 우렁차게 외치는 아이의 곁에서 떡하니 입을 벌렸다. 소리 없이 사위에 청사초롱이 늘어서고 부리는 이도 없이 저희들끼리 두둥실 떠올랐다. 온 천하가 대보름날 같이 밝은데 사람 하나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그것이 사람임을 알았다.


“누이를 구하고자 한 것이 그리도 사악한 짓입니까? 누이를 해치려고 한 자들은 무구하고, 범을 흉내 낸 이 불초 제자만 비도(非道)하단 말씀이십니까?”


여자는 고개를 들었다. 허옇게 센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안광이 비색으로 번쩍거리는 그 남자가 이상하리만큼 앳되어 보였다. 등불이 비쳐 지면은 울금빛과 황금빛으로 얼룩덜룩하고 화경의 그림자가 아홉 방향으로 갈라져 휘청거렸다. 여자는 그가 걸친 창의자락에서 풍기는 향 냄새를 맡았다. 손을 뻗어 옷자락을 어루만지면 그 너머에서 숨이 꺼져가는 감촉이 느껴질 것만 같았다.


“어리석은 놈! 네 누이를 대신해 죽으러 온 이 여인을 보아라. 그래도 네 놈이 죄를 모르겠느냐? 세속에서 모든 바람은 기어이 별을 스치고야 마는 것을. 아무 것도, 설령 바람 한 줄기라고 해도 홀로 몸을 솟구쳐 청정한 하늘 저편에 닿을 수는 없음을. 화경이여, 네가 선술을 익힌 자로서 정녕 모른단 말이더냐?”
“다른 이를 상하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누이의 목숨을 구하고자 하였을 뿐. 이 발원으로 하여 망가지느니 제 생애 정도일 줄 믿었나이다.”
“고쳐 살고 다시 살기를 하마 누백 해거늘, 화경아. 화경아. 너는 어찌 아직도 그 인연 한 조각 놓지 못하느냐?”


화경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질끈 눈을 감았다가 비장하게 숨을 뱉으며 시선을 돌렸을 때, 주저앉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숨을 삼켰다. 어지럽게 춤추던 그림자들이 수백 개로 수천 개로 나유타의 군상으로 변해 천지 사방의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가 전 생애를 거쳐 다시 돌아오는 양 하였다. 한 점으로 모인 어둠이 남자의 눈 속에서 터져 나갔다. 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믐날 천리 밖 심연에서 홀로 잠들 달님 같은, 기이한 불꽃이 여자에게 보였다.


그가 말했다.


“스승이여, 하면 바꿀 수 없는 내일을 왜 보게 하셨습니까? 서글픈 죽음을 어찌 알게 하셨단 말입니까? 스승이여, 대인이여, 제자는 정녕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이 모든 힘이 다 무엇입니까?”


소맷자락을 떨치자 청사초롱이 일제히 빛을 잃고 그의 소매 속으로 사라졌다.
초막도 사립도, 첩첩한 산등성이도 여명을 기다리는 지평선까지 모두 한 줄로 잦아들며 소매 속으로 소매 속으로 기어 들어왔다.


여자는 병풍 그림을 떠올렸다.
풍요로운 대저택과 아흔 아홉 겹 산줄기로부터 기화요초 우거진 오솔길을 지나 한 줄로, 한 점으로, 끊어질 듯 이어지던 먹선을.
물결치는 꼭 한 줄의 선은 지붕이고 대지이고 난간이면서도 물결이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끌어당겨 갓난애의 얼굴을 덮었던 낡은 이불.
그것이었다.


“항아리 속 수면에 뜬 달이 어찌 네 달이랴? 네 소맷자락이 부른 질풍에 잠시 지면에 적강하거니 내가 북신(北辰)이 아니더냐? 이지러진 수면은 이내 잦아들고 한 점 꽃이 열흘 붉지는 못하는 것을.”


북신이셨구나.
여자는 겨우 생각했다. 길 잃은 아이는 헤매던 별님이셨나 보다. 포동포동한 손의 감촉도 온기도 신령에게 속한 것이었구나.
그녀는 북신이 하늘로 걸어 돌아가는 양을 멀거니 바라 보았다. 화경은 스승을 향하지 않았다. 등을 돌린 채 그는 소매를 늘어뜨리고 서 있었다. 삼라한 만상을 품고도 소매는 텅 비었고 산은 그대로 산이어서, 여자는 쓸쓸하게 여겼다.


덧없구나.


그 말을 여자는 몰랐다.


부질없어라, 이 무상함이여.


그 역시 여자의 말이 아니었다.


“가엾구나.”


제 목소리에 놀라 여자는 고개를 들었고 남자는 걸음을 옮겼다. 화경은 홀로 남은 여자에게 와 물었다.


“그대는 뉘십니까.”
“나는 이름이 없시요.”
“이름이 어찌 없습니까?”
“부르는 대로 답하니 이름이 없시요.”
“빈도(貧道)는 화경이라 합니다.”
“그야…… 나두 들어 알아요. 도사 나리시겠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여자는 사립 밖으로 걸어가려 했다. 화경은 여자를 붙들지 않고 조용히 그 앞서 갈 자리에 먼저 가 섰다. 소리도 없이 사람만 거기 원래 있었던 양 하여 여자는 놀랐다.


“어디로 가시렵니까?”
“그걸 내 어찌 알겠시요?”
“그러면 어디로 가고 싶으십니까?”


말문이 막혔다.
화경은 고쳐 물었다.


“무엇을 하고 싶으십니까?”


누가 붙들어 맨 것처럼 발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오른발이 쓰라리더니 부들부들 떨리다 푹, 꺾였다. 여자는 고꾸라지듯 앉아 제 오른발에서 번져가는 핏빛을 내려다 보았다. 마음이 고요했다.


“무슨 비원이 남아 예까지 오셨습니까?”
“모르겠시요.”


가엾구나.
누구의 것도 아니어서 누구의 귀에도 들릴 그 목소리에 여자는 기대었다. 허공을 붙들고 허공에 발을 디뎌, 몸을 일으키니 화경은 어둠 가운데 달빛으로 길을 내 초막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여자는 걸었고 좁디 좁은 방 안으로 손을 뻗자,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한 평생처럼 긴 잠에서 깨어나 여자는 아무런 그림자도 지나지 않는 천장 아래 누워 있었다. 가슴팍까지 곱게 덮인 이불에서 제 땀 냄새가 났다. 멀리 새 우는 소리, 마당을 쓸며 오가는 하인들 소리, 속닥거리는 대화소리가 멀어졌다가 또 가까워지곤 했다. 그리고 제 숨 소리. 곁에서 나는 어리고 가냘픈 목숨 소리. 살아있는 것은 모두 소리를 내기에 여자는 와락 두려워졌더랬다.
그 날.
팔에 안긴 무게가 목침 하나만도 못할 듯이 가벼운데, 소선국 전체가 제 몸에 와 앉은 것처럼 버거워서 눈물이 흘렀던 날.
여자는 조심스럽게 팔을 움직였다. 고개를 돌려 차마 바라볼 수조차 없는 제 갓난아이가 거기에 있을 터였고, 곧 그녀는 이불을 끌어당겨 뜨지도 못한 눈을 영영 감길 것이었다.


[왜 내일을 알게 하셨습니까?]


구하지 못할 목숨이 가엾었다.
죄를 자처하는 제 어리석음이 무엇보다도 비천하였다.


“……가엾구나.”


여자는 꾸물꾸물 이불을 제 눈 위로 끌어올려 두 손으로 움켜쥐고, 오랫동안 숨 죽여 울었다. 칼날 아래 동강나던 육신들이 생생하게 몸부림치고, 양 손바닥에 뜨겁게 잡혔다가 기어이 꺾여버린 몸이 튀어 오르고, 그리고 일평생 그녀의 두 눈을 들여다 보러 올 것이거니 어째서 사람은 그 남루한 내일들을 알면서도 산단 말인가.


해가 중천에 뜬 후에야 일어나 바깥으로 나온 여자에게 화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이름을 묻는 일도 없었고 이름을 새로 지어주지도 않았다. 여자는 화경의 가로 다문 입매에 천천히 번져가는 기이한 미소에서, 그의 누이가 죽었으리라 짐작했다. 하늘 빛을 바꾸고 땅을 가르는 재주에도 처자 하나를 살게 하지는 못한 것이다.


“밥을 지어 올릴까?”


그녀가 묻자, 화경은 가만히 눈을 맞춰오다가 고개를 한 번 끄덕거렸다. 여자는 자기 집인 것처럼 들고 나며 솥을 씻고 보리며 수수, 기장을 퍼다가 밥을 지었다. 짚과 삭정이를 가져다 연기가 풀풀 나는 아궁이를 들쑤시고 있자니 화경이 다가와 청사초롱 막대를 뚝 분질러 내놓고 갔다. 낯선 집인 탓인지 밥은 설 익었다. 여자는 다음을 기약하며 그것을 찌그러진 그릇에 담아 냈다. 두 사람은 좁은 방 안에 이마가 닿을 듯 붙어 앉아 말 없이 밥을 먹고 물을 나눠 마셨다.


“빈도는 누이를 찾으러 떠나려 합니다. 그대는 어디로 가시렵니까?”


화경이 물었다.
여자는 빈 벽을 가리켰다. 아흔 아홉 장 흰 종이를 겹겹이 발라 놓은 벽이었다.


“병풍 그림을 본 적이 있시요. 그 길 끝에 훨훨 나는 거룻배를 보았는데, 도사 나리가 괜찮다 하신다면 내가 그리로 갈까 싶소.”
“돌아오시렵니까?”
“그야 낸들 어찌 압니까?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지. 도사 나리도 가고 싶어 가시니 나는 남고 싶어 남을라요.”
“계십시오. 거기에. 계시면 모시지요.”


화경은 여자가 가리키는 방향을 함께 가리켰다.
흰 벽.
아흔 아홉 장 종이를 발라 세운 벽에, 용의 갈기로 된 아홉 자루 붓으로 그는 그림을 그렸다. 여자는 응천의 대저택에서 봤던 병풍 그림이 일시에 펼쳐지는 장관을 지켜보았다. 뻗어나가는 교목들, 뿌리를 깊게 내린 단애들. 산의 근심 깊은 주름들이 뒤엉키고 휘청거리고 기어이 내려앉아, 검은 선 하나로 눌러 붙었다.


그리고 이윽고 공백.
강기슭에서 붓은 멈추고 무구한 피안(彼岸)이 남았다.


“가엾은 양반.”


미련이 없으면 거짓인지라 그녀는 뒤를 돌아 남을 사람을 바라보고는 천천히 그림 속으로 발을 디뎠다.
나아갔다.
차마 봄 아니거니와 꽃 피고 새 우는 세간을 등지고, 간신히 숨을 쉬던 갓난애의 그 무게로 피를 뚝뚝 떨어뜨리며 여자는 걸었다. 한 발, 또 한 발. 천진한 빛이 그녀를 감쌌다. 칼날이 내려앉는 속도로. 뜨끈한 내장을 끄집어낼 때의 온도로. 부를 수 없는 이름을 속삭이며 여자의 몸이 광막한 하늘 속으로 침전하자, 한 점 붉은 꽃이 그림 위에 툭 찍혔다.


가엾구나.


화경 선생은 배례하고 일어나 한참 동안 그림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 해가 지자 그림을 떼어내 둘둘 말아 소매에 감추고는 세 갑자를 살아온 초막을 버렸다.



+++



훗날 사람들이 신유림의 여우 신령을 화경 선생이 해친 탓에 청경호가 말라 붙었다고 떠들었다. 항성 어느 주가(酒家)에서는 그가 족자를 하나 펼치자 백리 밖에서도 향기로운 술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 또한 여우 구슬이 부린 재주라는 것이다. 명망 높은 호 선생의 몇 대 손이라는 거부가 상금을 내걸자 청경호 인근 백성들이 모두 일어나 창칼을 들고 화경 선생의 초막을 찾았는데, 사람 살던 흔적은 없고 명자나무 꽃만 만발하더라고 했다.


그러나 대륜국에서는 어느 젊은 도사가 어린 계집애들을 꾀어 내는데, 그가 부르는 낯선 이름에 응답할라치면 그만 족자 속으로 혼이 달아나 단박에 껍질만 남는다고도 했다. 소선국 사람이 도사 이름이 무엇이고 부르는 그 낯선 이름은 대관절 무어더냐고 하면, 청중 가운데 있는 줄도 몰랐던 자가 대신 답하기를.


“봄(春)”


이라 하였다.
차마 어디에도 봄 아니었거니와 바람 불어 꽃 지면 사무쳐 그립더라고.



(終)

mirror
댓글 1
  • No Profile
    약사 15.03.08 01:01 댓글

    재밌네요. 고어체 참 좋습니다. 옛스럽게 진행하다가 문득 문득 현대적으로 끊어주는 것도 좋고요.

    세번째 이야기는 이해하기가 어려워 다시 읽어봐야 이해가 될 것 같은데 다시 읽어보고 싶을 정도로 흡인력이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세계관은 (본 적은 없지만 풍문으로만 들은)십이국기네 세계관이 떠오르네요. 동화적인 느낌이 좋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Prev 1 ... 7 8 9 10 11 12 13 14 15 16 ... 47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