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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azyjam 푸른 남작의 신부

2014.11.30 23:1311.30


푸른 남작의 신부


 


 


 


자정을 조금 넘겨 신부의 마차가 저택에 도착했다. 검은 옷의 시종들은 이전에 그랬듯이 신부의 도착을 알리고는 서둘러 떠났다.


어둑한 그랜드 홀에 남겨진 자그마한 체구의 신부는 허리까지 드리워진 긴 베일에 폭 씌워져 있었다. 꽃도 음악도 손님도 없는 한밤의 혼례처럼 음울한 검은 베일이었다.


위베르 남작이 조용히 지켜보는 동안, 작고 하얀 손이 나와 베일을 걷어 올리기 시작했다. 베일이 바닥에 떨어지자 긴장으로 굳어진 작고 하얀 얼굴과 어둠만큼이나 새카만 곱슬머리가 드러났다. 아름다운 소녀였다. 이전의 신부들이 그랬듯이.


신부는 조용히 어두운 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랜드 홀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낡고 초라했으며, 시선 줄만한 것 하나 없는 장소를 모두 둘러본 소녀의 시선이 남작에게로 향했다.


남작은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이전의 신부들은 왼쪽 뺨에 긴 검상을 가진 험상궂은 인상의 남작과 눈이 마주친 순간 울부짖거나 주저앉아 떨곤 했었다. 이 신부는 달랐다. 그녀의 눈에는 공포도 원망도 증오도 전혀 깃들어있지 않았다.


이윽고 신부의 작고 핏기가 옅은 입술이 열렸다.


“당신이…… 위베르 남작님이신가요?”


남작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어린 신부의 말에는 남쪽 지방의 억양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남쪽 지방의 상인 몇몇이 왕실에 선을 대기 위해 몇 년 전부터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아마 이 소녀도 은밀한 선물 중 하나였을 것이다.


“침실은 위층으로 올라가 오른쪽이오. 아침에 하인들이 저택으로 오면 당신이 도착한 것을 알려두겠소.”


신부는 입을 열었다가 나오는 말을 꾹 눌러 담았다. 싫은 듯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것을 보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만했다. 남작은 그녀가 묻고 싶어하는 것을 대답해주었다.


“같은 침실을 쓰는 것은 아니오. 당신은 이 저택에서 내 아내로 지내게 되겠지만 원하는 만큼의 역할만 하면 되오. 아내로서의 역할 전부를 강요할 생각은 없소.”


“……고맙습니다.”


신부의 대답에는 뚜렷하게 안도한 기색이 배어 있었다. 위베르 남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남작은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향해 손짓을 했다. 떨어뜨린 베일을 주워 들고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신부가 멈춰 서서 돌아보았다.


“하인들이 아침에 올 거라고 하셨지요? 그러면 제 잠자리 시중은 누가 들어주나요?”


“일찍 잠자리에 들 생각이 아니라면 스스로 해야 하오. 이 저택에서는 해가 저문 후에 하인들이 머물지 않소. 저택과 떨어져있는 별채에서 자도록 했소.”


신부의 얼굴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남작은 이 소녀에게 확실히 말해두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소. 이제 이전의 생활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 말이오. 분명 그간에는 꽤나 풍요로운 생활을 했겠지만…….”


“알고 있어요.”


마치 도끼로 내리치는 것처럼 남작의 말을 끊으며 대답이 날아왔다. 신부는 똑바로 남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려움도 망설임도 일절 섞여 있지 않은 단호한 눈빛이었다. 가슴 앞으로 모은 두 개의 작은 주먹이 단단히 쥐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분은 저를 사랑하고 있어요. 제가 알지 못하는 복잡한 사정으로 이리 떠나 보내게 되지만 저를, 저만을 사랑하고 있다고 하셨어요. 앞으로도 계속 저만을 사랑하실 거라고…….”


그렇겠지. 그럴 것이다. 미움 받는 것을 싫어하는 분이니까. 위베르 남작은 귀찮은 듯이 계단을 향해 손짓을 했다. 신부는 계단을 달려 올라가버렸다. 침실 문이 요란하게 닫히며 낡은 저택을 흔들었다.



 


 


 

선왕께서는 냉정하지만 공명정대한 분이었다. 선왕께서 옥좌에 앉아 계시던 때에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때의 위베르 남작은 아직 남작이 아니었고, 세상물정에 어두운 시골뜨기 귀족 청년이었다. 변변한 영지조차 남아있지 않고 몰락의 길을 가고 있을 뿐인 가문을 자신이 되살릴 수 있을 거라는 꿈에 부푼 철부지.


독립을 꾀하는 남쪽 지방을 진압할 토벌군이 조직될 때, 위베르 가문의 이 외아들은 한줌도 안 되는 사병들을 이끌고 참전했다. 그러나 그는 변변한 활약도 하지 못한 채 낙마로 인한 불명예스러운 부상을 입고 말았다. 평생 절게 될 다리를 끌고 돌아온 남작가의 저택에는 더 이상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남작이 되었고, 모든 희망을 묻어버린 채 영지와 작위의 회수 명령이 언제 내려올까 두려워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남작이라는 칭호와 궁색하고 가난한 영지는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래서, 새로 왕위에 오른 젊은 국왕폐하로부터 영지와 작위를 지킬 수 있는 희망이 전해졌을 때 그는 망설일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시간이 흘러버리고 말았다.


처음 저택에 도착한 날, 불꽃이 튀길 듯 강렬한 눈빛을 보였던 신부는 이후로 얌전한 나날을 보냈다. 이전의 신부들처럼 신경질적인 울음을 터뜨리거나 식사를 거르는 것으로 불만을 표출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하인들에게는 필요한 것을 요구하는 일 외에는 말을 건네지 않았다. 하인들에게 터무니없는 분노를 터뜨리는 법도 없고, 하녀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지도 않았다. 설령 그녀가 쓸데없는 말을 꺼낸다 해도 하인들은 귀를 막고 듣지 못한 척 하겠지만.


신부는 할 수 있는 한 곱게 단장하고 창 밖을 내다보는 것으로 하루를 보내었다.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는 그녀의 모습에 위베르 남작은 자신의 젊었던 시절이 겹쳐 보이곤 했다.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어린 신부. 절대 오지 않을 사람, 그녀를 이미 잊어가고 있을 사람을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는 소녀.


신부는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의 침실에서 보냈지만, 해질 무렵 하녀들이 신부의 잠자리를 준비하는 시간이 되면 정원을 거닐곤 했다. 신부와 위베르 남작이 마주치고 대화를 나누는 것은 하루에 그 시간이 유일했다.


신부는 처음 저택에 도착해서 얼굴이 마주쳤던 날부터 남작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스스럼없이 남작에게 말을 건네곤 했다. 정원이 이렇게 넓은데 왜 관리를 하지 않나요? 남작님의 영지는 넓은가요? 노을이 고운걸 보니 내일은 맑을 것 같아요. 처음에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는 것만으로 반응하던 남작은 어느새 그녀의 시답잖은 이야기에 조금씩 대답을 해주게 되었다.


대화가 길어지면서 남작은 조금씩 신부의 얼굴을 똑바로 보게 되어갔다. 그래서 그녀가 정말 묻고 싶은 것을 꺼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신부가 저택에 도착한지 한 달이 조금 못되었던 어느 날이었다. 밤에는 비가 내릴 것 같았다.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한 때부터 낙마로 다친 다리가 욱신거리고 있었다. 고통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웠다. 아마도 그 고통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작은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묻고 말았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을 하시오. 당신은 내 눈치를 살피는 사람은 아니지 않소?”


신부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구름 가득한 저녁 하늘 아래서도 새파랗게 빛나는 눈동자가 동그랗게 드러났다.


신부는 잠시 주저하다가 빙긋 웃었다. 남작이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그럼 물을게요. 그 얼굴에 난 상처는 어떻게 생긴 건가요?”


“…상처?”


그 분은 언제 오실까요 하면서 먼 하늘을 향해 슬픈 눈을 돌릴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신부는 실례되는 질문을 해버렸다는 미안함과 정말 궁금한 것을 묻고 있다는 순진함이 섞여 있는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건 반란 전쟁에서 얻은 상처요.”


“남쪽 지방에서 반란이 있었을 때 말인가요?”


“그렇소.”


“그러면 남작님은 사람을 죽여본 적도 있으신 건가요?”


“……그렇소.”


남작은 손을 들어 얼굴에 남은 지 이십 년이 가까운 상처를 가리듯 얼굴을 문질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신부가 다시 물었다.


“그 상처를 가리려고 수염을 기르시는 건가요?”


남작은 당황했다. 사실이었지만 이제껏 누구도 그에게 그 점을 지적한 이는 없었다.


뭐라 반응할 새도 없이 신부는 소리 내어 웃었다.


“하나도 안 가려져요, 그 수염으로는. 그보다는 수염을 좀 다듬으시는 쪽이 좋을 것 같아요.”


웃음 소리를 흩뿌리며 몇 걸음 걸어나간 신부는 허리를 굽혀 작은 꽃송이를 꺾었다. 손질되지 않아 잡초가 무성한 정원에 피어난 제비꽃이었다. 신부는 꽃송이를 소중히 손 안에 안고는 인사도 없이 저택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만히 그 가냘픈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중에 잠시 잊었던 다리의 통증이 욱신 되살아났다.


 


 


 


세상에는 잘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위베르 남작에게는 루이즈라는 여자가 그랬다. 통통한 뺨과 아이 같은 발그레한 볼을 하고서 해맑게 웃을 수 있는 여성이었지만 본능적인 거부감이 느껴졌다. 자신과 함께 어두운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사이여서 그런지도 몰랐다. 아마도 남작의 거북함은 얼굴로 드러났을 테고, 눈치가 빠른 그녀 역시 남작의 감정을 모르고 있을 리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루이즈가 갑작스레 저택에 찾아왔다는 전갈을 받았을 때, 남작은 불편한 기분이 먼저 들었다. 햇빛이 좋은 오후였음에도 나쁜 예감처럼 한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인사조차 생략하고 내뱉은 루이즈의 첫마디에는 분노가 생겨났다.


“그 아이의 모습을 살짝 보았어요. 제법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 것 같더군요.”


남작에 대한 질책이 섞여 있는 말투였다. 아니, 어쩌면 질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남작의 반응 같은 것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투로 루이즈는 말을 이었다.


“그 아이가 이 곳에 온지 한 달이 조금 넘었던가요? 즐거운 허니문이었겠군요.”


“무슨 일로 오셨소? 한 달하고 보름밖에 지나지 않았소. 당신이 찾아오기에는 너무 이른 것 같은데.”


“이르건 늦건 제가 당신을 찾는 이유는 하나뿐이지요. 그 분께서 지금의 아이에게 빨리도 싫증을 내셨답니다. 그래서 생각보다 일찍, 남작님께 새 신부가 생기게 되었다는 이야기지요.”


날씨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평온한 루이즈의 말이었다. 하지만 듣고 있는 남작은 심장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래도 너무…… 빠르지 않소?”


“어머나, 남작님. 그렇게 당황하시다니. 놀랍네요. 그 아이가 꽤 마음에 드셨나 보군요? 이전까지 이런 일은 없었는데. 하긴 이제 열 여섯이던가요? 한창 아름다울 때지요.”


루이즈는 소리 내어 웃었다. 앳된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웃음과 목소리만큼은 확실히 중년 여성의 것이었다.


남작이 대답을 머뭇거리는 동안 루이즈는 즐거운 듯이 말을 이었다.


“그렇지. 그 아이는 잠자리 재주가 뛰어나다고 하더군요. 소질도 있고 빨리 배웠다고 들었습니다. 남작님께서도 그 아이의 재주에 푹 빠지신 모양이네요.”


“불쾌한 소리는 그만두시오. 나는 아직…….”


남작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루이즈는 남작이 채 하지 못하고 다물어버린 말까지 모두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어머나, 아직 안지 않으신 건가요? 그 분께서는 남작님의 도움에 작은 선물이 되어줄 거라고 생각하고 계시는데.”


갑작스럽게 터진 웃음소리는 시작될 때처럼 갑작스럽게 멈추었다.


웃음이 완전히 지워지고 어른의 표정을 띄운 루이즈의 앳된 얼굴은 기괴했다.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제 와서 무슨 변덕이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잘 생각하시라고 충고하고 싶군요. 남작님. 익히 잘 알고 계시겠지만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오직 그 분만이 때를 정하시지요.”


루이즈는 다음의 일정을 통보한 후 곧바로 떠나버렸다. 새로운 아이를 간택하고 가르쳐야 할 그녀는 몹시 바쁠 터였다.


손님이 떠난 후에도 남작은 접견실의 의자에 굳어진 것처럼 앉아 있었다. 하인이 들어와 불을 밝히고 저녁 식사 시간을 알리고 나가는 것조차도 깨닫지 못했다.


국왕 폐하는 어린 소녀를 좋아했다. 처음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남부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러 떠났던 전장에서였다.


반란 세력의 성 하나를 포위한 지루한 대치 상태에서 젊은 왕자는 잦은 밤놀이를 즐겼다. 그가 동행으로 선택한 것이 같은 나이였던 위베르 남작이었다. 그는 왕자 전하를 통해 열 두어 살 남짓한 어린 소녀들만 파는 가게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러한 가게가 존재한다는 것도, 젖가슴조차 부풀지 않은 어린 여자 아이들에게 정욕을 느낀다는 것도 그에게는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왕자 전하이자 앞으로 국왕 폐하가 될 분께 이상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뚜쟁이와 시비가 붙은 왕자 전하를 말리려다 말에서 밀려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을 때, 남작은 절망감까지 느꼈었다. 더 이상은 왕자 전하를 가까이 모실 수 없다는 절망. 고향으로 돌아와 낡고 초라한 저택을 바라보았을 때의 절망과,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셨으며 자신이 남작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절망과, 왕자 전하께서 새로이 국왕의 자리에 앉았으나 자신은 그 곁에 있지 못하다는 절망이 그 위에 쌓아 올려졌다.


절망이 그의 얼굴을 굳게 만들었고, 남쪽 지방에서 있었던 몇 번의 충돌에서 얻은 왼쪽 뺨의 검상이 그의 인상을 험악하게 만들었다. 상처를 조금이라도 가리기 위해 기른 수염은 핼쑥하게 패인 볼과 함께 더욱 그의 얼굴을 어둡고 차갑게 만들었다. 이대로 낡은 저택과 함께 무너져내려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나날이었다.


그러던 중 연락도 없이 국왕 폐하의 서신을 들고 찾아온 앳된 얼굴의 여인이, 굳어있던 그의 세계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국왕 폐하의 은밀한 취미를 도울 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폐하께서 싫증 낸 소녀들을 신부로 맞이하여 신분을 세탁하고, 이전의 행적을 지우는 일이었다. 충성스러운 내 전우여. 폐하의 서신에 적혀 있는 그 글귀 하나가 위베르 남작에게는 희망이고, 빛이 되었다. 그 분께서 나를 기억하신다! 이후로는 몇 년에 한 번씩 신부를 맞이하는 것으로 영지와 작위를 지켜나가는 삶이었다.


이번에는 유래 없이 빠르게 새 신부가 도착하는 것뿐이다. 언제나와 똑같은 일일 뿐이다. 위베르 남작은 수십 번, 수백 번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그럼에도 눈을 감을 때마다 눈 속에서 어른거리는 모습을 지울 수가 없었다. 모두가 꺼려하고 시선을 피하는 자신을 향해 유일하게 웃어주었던 소녀의 모습을.


 


 



 

쏙독새가 울었다. 위베르 남작은 침실의 열린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달이 하늘 가장 높은 곳으로 떠올라 있었다.


문득, 멀리 떨어진 별채 쪽에서 빛이 깜빡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숨을 죽이고 한참을 지켜보았지만 별채는 완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작은 불빛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걱정할 일은 아닐 것이었다. 하인들은 남작을 두려워했고, 철저히 그의 명을 지켰다. 해가 진 이후에는 저택으로 오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는 자는 없었다. 이 공포를 만들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운이 좋았다.


저택으로 보내졌던 첫 번째 신부에게 홀려버렸던 하인이 있었다. 한밤중에 밀회를 위해 저택으로 기어들어온 젊은 하인을 붙잡아, 도둑으로 누명을 씌워 영지의 모든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양손을 자르고 목을 매달았다. 이후로 이 작은 영지와 저택에서 그의 명을 어기는 자는 없었다.


남작은 촛대를 들고 걸음을 옮겼다. 신부의 침실 앞에서 그는 잠시 멈추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도 결심은 바뀌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노크 없이 신부의 침실 문을 열었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덧문이 활짝 열린 창문가에 잠옷 차림의 그녀가 기대어 서 있었다. 문 소리에 놀라 돌아보는 얼굴은 겁에 질려 있었다.


“……남작님?”


“내 이야기를 들으시오. 당신은 이 곳을 떠나야 하오.”


하지만 신부는 겁에 질린 모습으로 어깨를 움츠릴 뿐이었다. 남작에게서 멀어지고 싶지만 창을 등지고 있는 상태로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저에게 원하는 만큼의 역할만을 약속하셨잖아요!”


“당신이 원치 않는 일을 할 생각은 없소. 나는 당신을 구하고 싶은 것뿐이오. 그러니 제발…….”


신부에게는 남작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신부는 창턱으로 기어올랐다.


“다가오면 뛰어내리겠어요!”


남작은 다가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름을 부르며 신부를 진정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을 한 번도 물은 적이 없다는 것이 떠올랐다. 마음을 줄 필요 없다고, 마음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었으니까.


문득, 무슨 소리가 들렸다. 오래되어 경첩이 기울어진 문을 열 때 나는 나무의 삐걱거림. 그리고 오래 전 전장에서 질리게 들어왔던 금속이 부딪치는 울림. 등줄기로 싸늘한 한기가 스쳐갔다.


남작은 침실 문 밖으로 잠시 고개를 돌렸고, 다급한 마음이 되어 신부를 돌아보았다. 신부의 모습은 그 곳에 없었다. 창문 밖으로 흰 옷 자락이 순간의 펄럭임을 남기고 사라져갔을 뿐이었다.



 


 


 

고작 한 달 하고 보름 만에, 잠겨 있던 저택 지하실의 문이 열리고 횃대와 화로에도 불이 피워졌다. 지하실 안에는 저택의 주인이 무릎 꿇려져 있었다. 갑옷과 검으로 무장한 병사 둘이 남작의 양 옆을 지키고 있었다.


루이즈는 불쾌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며 향낭에 코를 묻었다..


“여기는 정말 기분 나쁘군요. 냄새도 고약하고. 싹 걷어내고 청소라도 할 수 있으면 참 좋겠는데.”


그녀는 이전에도 같은 말을 했었다. 그 이전에도, 그리고 이전에도. 몇 년에 한번씩, ‘파혼’이 있을 때마다 그녀는 입회를 했었고 지하실의 악취에 불평을 했었다.


“제가 늦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남작님. 그 분께서 빠른 전언을 보내신 덕에 여관에 도착하자마자 준비를 할 수 있었답니다.”


루이즈는 무릎 꿇은 남작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생긋 웃었다.


“여기서 무슨… 짓을 할 생각이오?”


“어머, 무슨 말씀이신가요? 이 장소의 의미를 몰라서 물으시는 것도 아닐 텐데. 언제나처럼 ‘파혼’을 하셔야지요.”


루이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또 다른 두 병사가 신부를 끌고 들어왔다. 신부의 흰 잠옷에는 몇 군데 핏자국이 배어 있었다.


신부는 비틀거리면서도 자신의 다리로 걷고 있었다. 2층의 침실 창 아래로 멋대로 자라있는 관목과 잡초들이 그녀를 받아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다행한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루이즈는 병사 하나에게 다가가 그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고 검날의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아직 달아오르지 않은 화로에 검을 찔러 넣었다.


남작은 신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병사 두 명에 의해 어깨를 붙잡힌 어린 신부는 오래된 피가 말라붙어 있는 바닥에 주저앉혀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새파랗게 질린 그 작은 얼굴을 바라보다가, 남작은 마지막 희망을 담아 루이즈에게 물었다.


“만일 내가… 저 신부와 정말 결혼을 하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남작님은 이전의 모든 신부들과도 신과 국왕폐하의 허락 하에 정식 결혼을 하셨답니다.”


돌아오는 루이즈의 대답은 싸늘했다. 루이즈는 남작을 외면하고 신부에게 다가가 물었다. 끔찍할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였다.


“자아, 대답해보렴. 너는 글을 읽고 쓸 줄 아니?”


신부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하지만 차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신부는 겨우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러면 너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을 수 있겠구나. 하나는 혀를 잘리고 수녀원에서 살게 되는 거란다. 다른 하나는 이곳에서 죽는 거지. 지금까지 혀를 잘리는 쪽을 선택한 아이는 없었지만 말이야.”


“…어째서, 어째서…….”


신부가 겨우 목소리를 내었다. 겨우 짜낸 쉰 목소리였다.


“그야 그 분께서 더 이상 네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이지.”


“그럴,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요! 그 분은 저를 사랑하신다고…….!”


신부의 목소리는 절규가 되었다. 루이즈는 그 절규에 지지 않는 경쾌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 분께 사랑 같은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란다. 필요한가 아닌가가 중요하지. 나 역시 너처럼 한때는 그 분께 사랑 받았던 사람이었어. 나는 그 분께 필요한 존재가 되어 남을 수 있었지. 어머나, 내가 그럴 수 있었다고 해서 헛된 희망을 품어서는 안돼. 이미 내가 있으니까 또 하나는 필요 없단다.”


루이즈는 화로에 담긴 검을 돌아보고는 남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아, 남작님. 그러면 남작님도 폐하께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지요. 시간을 많이 지체했으니 서두르지요. 저 아이는 스스로 결정하지 못할 것 같으니 남작님께서 직접 파혼의 방법을 정하셔야 하겠네요.”


위베르 남작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신부는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검은 곱슬머리가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정신을 잃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순간, 신부의 작은 어깨가 움찔 움직였다. 갑작스럽게 신부가 몸을 일으키고 화로에 꽂힌 검을 뽑았다.


신부가 어설프게 휘두른 검은 루이즈에게 닿지도 못했다. 병사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남작도 움직였다. 하지만 그때, 이십 년 가까이 그를 괴롭혀왔던 다리의 통증이 되살아났다. 남작은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고개를 들었을 때 본 것은 신부의 몸을 꿰뚫고 나온 검이었다.


남작은 비명을 질렀다. 신부가 떨어뜨린 검을 향해 팔을 뻗었다. 하지만 병사들의 검이 그와 쓰러진 신부 사이를 가로막았다. 루이즈가 날카롭게 외쳤다.


“멈춰! 그를 죽여선 안돼!”


남작의 목에 닿아있던 여러 자루의 검이 조금 후퇴했다.


신부의 검을 피해 비틀거렸던 루이즈는 어느새 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었다.목소리도 평정한 상태였다.


  “위베르 남작은 그대로 포박해서 수도로 이송한다. 수도에서 소문의 인물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이번에는 남작이 더듬거리며 어째서, 하고 물었다. 조금 전 신부가 그랬듯이.


“아, 제가 잊고 말씀 드리지 않았던가요? 폐하께서 급히 보내신 전언 말이에요. 흉흉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다고 하시더군요. 어느 귀족 분께서 여섯 번이나 결혼을 했지만 그때마다 아내가 실종되거나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말이에요. 하필이면 주교께서 그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시고, 폐하께 조사를 청하셨다고 합니다.”


루이즈는 남작을 향해 천진한 소녀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신부에게 했던 것처럼 다정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러니 폐하께 필요한 존재가 되어 주세요. 마지막까지. 그분께서 지켜지기 바랬던 비밀을 가지고 가주세요.”



 


 


 

그로부터 보름 후, 비공개 재판이 열렸다. 그리고 남작에게는 일곱 아내를 살해한 죄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주민들에게 내보이기에는 너무나도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처형은 한밤중에 은밀히 치러졌다.


한밤의 처형이라는 기괴한 일은 사형집행인조차 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만취한 사형집행인은 세 번째에서야 겨우 제대로 도끼를 내리칠 수 있었다. 땅에 떨어져 구르는 남작의 얼굴과 수염에 달빛이 푸르게 내려앉았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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