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양원영 레프리제: 인생

2014.10.31 23:5010.31


레프리제:인생

1.

이틀 뒤면 세영의 결혼식이었다.
세영의 남편이 될 인수는 대학 동아리에서 만난 선배로 사회복지사였다. 온화하고 성실한 성격으로 세영과는 캠퍼스 커플로 시작해 8년간 사귀었다. 사귄 지 5년째 되던 날, 정말로 미래를 함께하기를 고려하던 중 세영은 자신의 복잡한 가족사에 대해 털어놓았다. 어렸을 때 양친을 잃고, 아버지의 모습을 딴 보육 안드로이드의 손에서 자랐으며 지금도 아버지처럼 여기며 살고 있다고. 그러니 자신과 미래를 함께하고 싶다면 그 점을 인정하고 받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인수는 한동안 깊게 고민하더니 신중하게 대답했다. “당면해보지 못한 상황이라 혼란스럽지만, 큰 문제는 아닐 거야. 함께 고민하고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다.“ 세영은 사람만큼이나 성실한 대답에 이 사람과 미래를 함께하고 싶다고 확신을 얻었다.
인수는 생각 이상으로 세영의 안드로이드 부친, 호석에 대해 잘 받아들였으며 이는 인수의 부모 역시 다르지 않았다. 시부모가 될 두 사람은 '사람도 이렇게 훌륭하게 자식을 키우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아느냐?'라며 호석에게 깍듯이 대했다.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서 오는 이질감에 대해 낯설어하는 면은 분명히 있었지만, 호석의 역할과 세영이 호석을 부친으로 여기는 마음에 대해서 만큼은 충분히 존중해 주었다.
안드로이드였고 사회적으로 세영의 책임이었기 때문에 결혼 이후에도 호석은 세영과 인수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됐다. 두 사람은 조금 무리해서 신혼집으로는 맞지 않는 큰 집에 세를 얻었다. 미안해하는 세영에게 인수는 '이렇게 맘 불편하지 않은 처가살이를 하는 사람은 아마 나뿐일 거야.'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또 육아 전문인 장인어른 덕에 아이들 돌보는 걱정은 없겠다고 악의없이 웃었다.
그 모든 과정을 거친 뒤 결혼식 날짜를 잡았다. 세영은 인수에게 부탁해 이틀 전에는 친구들과, 하루 전에는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인수 역시 친구들과 총각파티며 가족과 시간을 보내겠노라며 당일 식장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세영은 미주와 미희를 불렀다. 세 사람은 백화점에서 쇼핑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찜질방에서 한참 뒹굴다 예약해 둔 바닷가 펜션으로 갔다. 아주 어릴 때부터 함께 해 온 친구들은 마치 몸의 일부인 양 사랑스럽고 애틋했다.
밤이 깊어져 치킨을 안주 삼아 술이 오갔다. 맥락 없는 수다도 바닥을 보이고, 스며드는 파도소리와 떨어지는 달빛 아래 고요한 적막이 감돌았다. 맥주 한 캔을 다 비우고서야 미주가 한탄을 뱉어 적막을 부쉈다.

“정말 우리 세영이가 시집을 가는구나.”

미희가 낄낄거렸다.

“꼭 제가 엄마라도 된 거처럼 말하네.”
“내가 세영이랑 25년 친군데 당연하잖아. 13년 밖에 안 된 넌 내 맘 모를걸.”
“와, 치사하게 시간 들먹이냐. 시간으로 따지면 얘 신랑이 제일 나빠. 고작 8년 사귀어놓고.”
“진짜. 신랑이 진짜 나쁜 놈이네.”

두 친구의 칭얼거림에 세영은 웃기만 했다. 미희는 치킨 다리뼈를 쪽쪽 빨다가 맘 속 깊이 있던 말을 끄집어냈다.

“그만한 인물 찾기 어렵지. 지금이니까 하는 말인데, 사람이 좋아도 너무 좋으니까 난 오히려 의심 들더라. 이 사람이 나중에는 아저씨 트집 잡아서 괴롭히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세영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오빠나 시부모님 모두 다 좋은 분이라서, 지금도 너무 과분한 사람들이 아닌가 싶어. 이렇게 잘 풀리기만 해서 나중에 더 큰 시련으로 돌아오는 게 아닌가 두렵기도 하고. 오빠랑 시부모님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어렵게 생각하긴. 그런 일 생기면 어차피 둘 중 하나잖아. 이혼하던가, 아저씨를 버리던가. 자식이라도 생긴 마당이면 다음에 문제가 덜 되는 쪽으로 선택하면 되고.”

미주가 던진 냉소적인 말에 세영과 미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곧 미희는 화가 나서 소리치려 했고, 세영이 그런 미희를 저지해 말을 가로챘다.

“미주야. 난 결코 아빠를 버리지 않아.”
“……”
“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

미주는 고개를 돌리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세영과 미희는 미주의 복잡한 상황을 이해했다.

미주는 안드로이드였다. 세영과 정 반대로 자식이 없는 부부의 자식 안드로이드로 투입되어 줄곧 인간처럼, 인간으로 믿으며 살아왔다. 그러다 몇 년 전, 자신이 안드로이드라는 사실을 자각한 일이 생긴 뒤로 많이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세영과 미희는 미주의 괴로움을 해결해 줄 수 없었다. 그저 잘 이겨내기를 바랄 뿐이었다. 
다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미희는 다 마신 맥주 캔을 바닥에 데굴데굴 굴리다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영에게 사과했다.

“내가 이상한 말을 했어. 미안해. 좀 싱숭생숭해서 그래.”
“아니야. 걱정해준 거잖아. 이해 못 할 일도 아니고. 그보다도 요새 무슨 일 있어? 네가 싱숭생숭할 때도 있고.”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으면 별일은 없어. 그냥 좀 생각이 많아.”
“어떤 생각이길래.”

갈등 끝에 미희는 말을 고르고 골라 천천히 이야기했다.

“세영이 넌 아저씨를 정말로 아빠처럼 여기고 있고, 미주 어머니도 미주를 정말로 딸처럼 여기고 있잖아? 얼마나 되는진 몰라도 안드로이드를 정말로 특별한 대상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을 거로 생각해. 안드로이드랑 결혼한 사람도 생겼고, 음지에서 돌아다니는 연인 프로그램 패치도 상황의 대변일 거야.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내 고민은 하찮기 짝이 없어. 이게 그러니까 말하자면……”
“저 기집애 말 빙빙 돌리네. 서론은 됐고 요점만 말해.”

미주의 싫증에 미희가 구시렁거렸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태평한척 결론을 말했다.

“나 우리 집 제이를 좋아해. 걔랑 섹스하고 싶은데 해도 될까 고민 중이야.”

팔을 괴고 있던 미주는 미끄러져 머리를 바닥에 찧었고 세영은 마시던 맥주를 코로 뿜었다. 친구들의 과격한 반응이 우스워 미희가 피식 피식 웃었다.

“농담 아냐. 헛소리도 아니고. 누가 뭐라든 평범하게 연인처럼, 부부처럼 살고 싶어. 걔가 평생 내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정욕도 생기고. 제이 걔도 날 사랑한다고 생각해.”
“희망사항이지?”

세영이 켈룩거리며 당혹을 수습하는 동안 미주가 차갑게 되물었다. 미희가 태평하게 대꾸했다.

“그럴걸. 이기적이라고 생각해? 내가 제이의 주인이니까. 제이는 내 말을 거역하지 못하니까? 어쩌라고. 이미 좋아하는 마음이 생겼고 사랑하게 됐어. 뭐가 문제야? 사람과 안드로이드가 어떻게 사랑하느냐고 묻느냐면, 사람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사랑을 하고 안드로이드는 안드로이드가 할 수 있는 사랑을 하면 되잖아. 뭐가 되건 합이 맞아떨어지면 돼. 소유의 안드로이드에게 주인은 언제나 유일한 사람인데, 이제 내가 걔를 유일한 존재로 받아들인다는 게 뭐가 나빠.”
“너 정말 대책 없구나.”
“이제 알았어? 세영이가 아저씨를 사랑하는 마음이랑, 아줌마가 널 사랑하는 마음이랑 다를 바 없다고 보는데. 난 여기에 정욕이 가미됐을 뿐이고. 아무튼, 제이랑 자면 자궁경부암 예방주사 맞을 때 성 경험이 있다고 대답해야 하는지 아닌지 뭐 그런 부분에서 고민이 생겨.”

두 친구는 황망하게 미희를 바라보았다. 학창 시절부터 정신세계가 남다른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남다를 줄 몰랐다. 두 사람의 시선이 거북했는지 미희가 볼멘 목소리를 냈다.

“나도 많이 방황했어. 그저 많은 부분에서 거부감이 없었을 뿐이야. 나한테는 너희가 있었으니까.”
“은근슬쩍 책임 전가하긴. 무슨 심경으로 가정부 안드로이드 이름을 바꿨나 했더니.”
“좋아하는 사람 이름으로 엄마는 좀 아니니까. 그게 무슨 패륜이야.”

세영이 간신히 혼란을 수습하고 물었다.

“언제부터 특별한 감정이 생겼어?”
“정확히는 모르겠어. 언제부턴가 의식이 되던데. 최근 들어서야 진지하게 생각했어.”
“괜찮아?”
“안 괜찮을 일은 또 뭐야. 어떻게든 되겠지. 나빠 봤자 안드로이드 오타쿠가 자기 안드로이드랑 쿵작거린다는 수군거림 밖에 더 있겠어? 남들이 어떻게 보든지 신경 쓰며 살 필요 없잖아.”

미희는 모른 척 새 맥주 캔을 까서 마셨다. “미친년.” 미주는 매섭지 않은 욕지기를 뱉으며 숨넘어갈 듯 웃다가 팔에 고개를 파묻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세영이 당혹해서 미주의 등을 다독였다.

“미주야, 왜 그래? 울지마.”
“내버려둬. 별 만감이 다 들어서겠지.”
“그래! 이 나쁜 년들아! 평범하게 살아도 되는데 왜 굳이 힘든 길을 자꾸 가려고 그래?”
“평범하게 산다니? 힘든 건 또 뭐고. 내 행복은 내가 결정하고 세영이의 행복은 세영이가 결정할 텐데 넌 뭐에 대해서 그렇게 억울하고 화나? 네가 친구여서 이 모든 일이 이렇게 됐다면, 난 너한테 오히려 감사하고 싶어. 세영이도 마찬가질 걸.”

세영이 별다른 반론이 없자 미주는 두 친구를 양팔로 끌어안고 흐느꼈다. 한참을 다독이던 세영도 울었고, 울보라고 둘을 놀리던 미희도 종국에는 함께 울었다.

세 사람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잠들었고, 아침에 일어나 팅팅 부어오른 서로의 얼굴을 보고 한참 웃었다. 조식으로 라면을 끓여 먹은 뒤,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여느 때보다 맑은 아침 바닷가를 산책했다. 


2.

미주가 집으로 돌아오자 모친 희정이 거실에 앉아 콩나물을 다듬고 있었다. 부친과 동생 현주가 사고로 세상을 뜬 뒤부터 기르기 시작한 강아지 삼돌이가 꼬리를 흔들며 미주를 반겼다. 희정은 버라이어티 쇼 프로그램이 나오는 TV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로만 맞아주었다.

“이제 오니? 점심은?”
“아침 늦게 먹었어. 세영이랑 미희가 안부 전해달래.”
“내일 볼 건데 뭘.”
“저녁 콩나물국이야?”
“아귀찜 해보려고. 콩나물 많이 넣어서 만들면 맛있겠지?”
“엄마 요리 못 하면서 그런 고난도 요리를 하겠단 말이야? 날 모르모트로 쓸 생각이야?”
“얼른 손이나 씻고 와!”

미주가 새실거리며 가방을 내려놓고 손을 씻고 왔다. 옆자리서 함께 콩나물 대가리와 뿌리를 떼며 희정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희정은 가족을 잃고 나서 부쩍 많이 늙었다. 흰머리도 갑자기 생겼고, 갱년기 우울증이 겹쳐 정신과 치료도 병행했다. 강아지를 기르기 시작한 일도 우울증 치료의 일환이었다. 몸과 마음 모두 힘든 나날 속에서도 희정은 미주에 대한 걱정과 관심을 놓지 않았다. 미주가 시스템 케어를 위해 연구소를 오가면 잠 한숨 못 자고 기다리곤 했다. 
버라이어티 쇼에 나오는 연예인들이 소란을 피우자 희정은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낮게 웃었다. 미주는 잔주름의 결 수를 세다 고개를 돌렸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엄마.”
“응?”
“부탁이 있어.”
“뭔데?”

희정이 TV의 음량을 줄이고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미주가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밤 친구들의 품에서 결정한, 방황의 종언이었다.

“김 박사님한테 이야기해줘. 엄마가 죽은 뒤에도 나 살게 해달라고.”

희정의 진한 시선이 느껴졌다. 미주는 애써 모른 척 했다. 마른 침을 삼키고 이어 말했다.

“어려운 일이 될 거란 거 알아. 그래도 살아보고 싶어. 그렇게 명령을 기입해 주었으면 좋겠어. 결혼도 해보고 싶고, 자식도 키우고 싶어. 둘 다 안 되더라도, 보통 사람들의 수명만큼은 살아보고 싶어. 그러고 싶어. 그게 내 선택이고 내 결론이야. 안 될까?”

희정의 서늘하고 콩나물 냄새 밴 손이 볼에 닿았다. 미주가 고개를 들자, 희정이 따듯하게 웃고 있었다. 그 눈에는 물기가 가득 차 곧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았다.

“왜 안 되겠어. 우리 딸이 그러고 싶다는데.”
“엄마.”
“미주야. 오래오래 살아.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행복하게 살아야 해. 알았지?”

미주가 희정에 품에 안겼다. 희정은 살아 있고, 또 살아 있지 않은 안드로이드 딸을 꼭 끌어안고 등을 다독였다.

“모를 일이야. 분명히 널 사랑하고, 네가 인간이 아니어도 사랑할 사람이 나타날 거야.”
“응. 나 그 가능성을 이제 믿을래.”

마음 편히 웃음이 나왔다. 안드로이드이고, 안드로이드의 체계로 살며, 어떻게 발버둥쳐도 결코 인간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전부 편해졌다. 미주는 앞으로 살아갈 나날이 너무 슬프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많은 행복으로 돌아오지 않더라도, 하다못해 슬픔만큼은 많지 않기를.

미주가 물었다. 이제부터 무엇이 달라지느냐고. 희정이 대답했다. 이제야 너의 인생이 시작된다고.


3.

미희는 집으로 돌아와 제이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제이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거실 소파에 앉아 때를 기다렸다. 충분히 생각하고 돌아왔지만, 본인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꺼내려니 가슴이 쿵쾅거렸다. 하다못해 이렇게 되기 전에 평범한 연애라도 좀 해볼 걸 하고 후회도 들었다.

‘글 써서 팔아먹는단 년이 연애도 한 번 안 해보고 연애하는 이야기는 잘도 써댔구나.’

후회해도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았다. 명명백백 자신의 탓인데도 억울했다.

“어쩐 일로 얌전하군요. 표정이 왜 그리 우거지상입니까? 세영 님의 결혼이 그렇게나 충격이었습니까.”

일을 마친 제이가 앞치마를 벗어 내려놓고 바닥에 앉았다. 미희는 대답하지 않고 제이를 곧게 바라보았다. 자신의 얼굴이 지나치게 빨갛지 않기를 바랐다.

“왜 그렇게 뚫어지라 쳐다보십니까?”
“할 말이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너는 안드로이드지만 보통의 안드로이드는 아니야. 뭔가 비정상지.”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원인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면 지금부터 할 말에 대해서도, 판에 박힌 소리가 아니라 네게서 뭔가 대답을 기대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해. 내가 원하는 답이 안 나오면 별수 없겠지만. 별수 없어도 어쩔 수 없지만.”
“무슨 말을 하려고 그래요? 당신답지 않군요.”

미희는 언제나처럼 대수롭지 않게, 그런 척 말했다. 목소리가 들뜨고 말이 빨라졌다.

“나, 너 좋아해.”
“예?”
“사랑한다고.”
“아뇨, 그게 무슨 말……”
“그러니까 나랑 자자.”
“여보세요, 주인님.”
“너 섹스하는 기능 있던가?”
“탑재는 안 돼 있지만 못할 건 없죠. 아니, 잠시만. 말 좀 하자, 망할 주인아!”
“다행이다. 러브 패치라도 구해서 깔아야 하나 엄청 고민했는데.”

도무지 대꾸할 틈을 주지 않자 제이가 손으로 미희의 입을 틀어막았다. 미희는 눈만 깜박거리며 제이의 표정을 살폈다. 무표정했지만 필사적으로 뭔가를 생각하려는 당혹이 읽혔다.

“그런 말을 결론부터 막 내던지지 마십시오. 절 놀릴 생각은 더더욱 하지 말고요.”

미희가 버둥거리자 그제야 손을 놨다. 미희는 볼을 부풀리고 투덜거렸다. 요점을 다 쏟아내고 나니 여유가 생겼다.

“말 돌리지 말라고 할 땐 언제고. 놀릴 생각 아니야. 정말로 그래. 딱히 뭐가 달라질 일은 아니잖아. 너와 나는 어차피 한 지붕 아래서 계속 살 거고, 내가 너를 좋아하고 사랑하니까 관계성 하나가 더 추가될 뿐이고.”
“지나치게 간단히 생각하시는군요.”
“안 그러면 너무 복잡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고려해야 할 문제가 너무 많다고. 난 내 맘을 가장 소중히 여길래. 그래서, 답은?”

제이는 말이 없었다. 미희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제이는 몇 번을 입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도무지 안 되겠다 판단하고 무기력한 말을 했다.

“말 못합니다.”
“네가 안드로이드라서?”
“이제 제 생각을 읽습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쉽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어. 차차 해나가면 돼. 아직 살날도 많은데.”

미희가 싱글거리며 웃었다. 원하는 답은 아니었지만 희망을 품기엔 충분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아무래도 너는 어떤 변명 기제가 필요해 보여. 그걸 내가 줄게. 언젠가는 너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말하고 행동할 때가 오겠지. 그때까지는 이렇게 하자.”
“어떻게 말입니까?”
“명령을 내릴게.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해.”

안드로이드의 무표정한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제이는 불만에 찬 듯했지만, 순순히 말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좋아. 이제 나랑 내 방에 들어가서 섹스하자. 문제없지?”
“많습니다. 일단 불법입니다.”
“난 불법 패치 안 했어. 유능한 안드로이드 씨, 네가 가능하다고 했어.”
“책임 전가 하지 마세요. 장차 받을 비난이며 사회적인 문제는 어떻게 감당할 생각이고……”
“그딴 게 대수겠어? 됐고. 할 거야, 안 할 거야?”

제이는 퍽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 미희를 번쩍 들어 안았다. 미희는 작게 비명을 지르고 제이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앞으로 너랑 어떻게 살아갈지 기대돼.”
“전 하나도 안 됩니다.”

제이가 미희를 방 침대에 내려놓았다. 미희는 그대로 제이를 끌어 그의 입술에 입 맞추었다.

“넌 안 해도 돼. 어차피 종신 근무니까 포기하고 받아들여. 그렇게 살다가 내가 죽으면 같이 죽어. 알았지?”
“바이센테니얼 맨의 결말 같겠군요. 나쁘지 않아요.”
“이젠 혼자 내버려 두고 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미희는 어둠 속에서 제이가 웃는 얼굴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4.

세영은 아버지 호석과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호석이 안드로이드라는 사실은 굳이 외부에 밝히지 않기로 했다. 식은 세영의 사정을 아는 정말로 가까운 사람들만 초대하여 단출하게 치르기로 하였으므로 별문제는 없을 터였다. 세영은 어떤 비난이나 수군거림도 감수하며 살 수 있었지만, 호석이 업신여김받는 모습을 더 보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 아빠.”
“뭘 미안하냐.”
“그냥.”
“실없긴.”

세영은 호석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마지막 상견례 날이 생각났다. 결혼식에 대한 모든 사항을 정하고 돌아갈 때쯤, 호석이 갑작스레 인수의 부모에게 말했다.

“세영이는 정말 잘 자라주었습니다. 두 분이 만약 이 아이에게 부족함을 느끼신다면, 그건 딸아이 탓이 아니라 제가 인간이 아니어 부족한 탓입니다. 부디 두 분이 불쌍하고 어여쁘게 여기셔서 제가 주지 못한 많은 부분을 채워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면서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했다. 인수와 부모는 무척 당황했고, 세영은 그 자리에서 호석의 팔을 붙들고 울었다. 떠올리자 다시 또 눈물이 났다.

“아빠.”
“왜.”
“손주는 딸이 좋아, 아들이 좋아?”
“안 가리고 둘만 낳아 잘 기르면 돼. 하나는 외롭다.”
“난 안 외로웠는데. 하나래도 별로 안 외로울걸. 맞벌이해도 아빠가 있을 거잖아.”
“다 늙은 영감더러 갓난쟁이를 또 키우라고? 너무하네.”

싫어하는 구석 하나 없는 투정이었다. 세영이 숨죽여 웃다 말했다.

“신혼여행 다녀와서 좀 안정되면 우리 우주여행 가자. 오빠 버리고 아빠랑 나랑 둘이서만. 달 구경 코스는 요즘 많이 비싸지도 않아.”
“아서라. 그 돈으로 저축이나 해라.”
“쓸 때 못 쓰면 돈 아무리 많아 봤자 뭐 해.”
“돈은 많이 있어서 하는 소리냐?”
“말이 그렇단 거지. 이제 효도 좀 하게 해 줘.”
“건강하게 잘 살면 그게 효도야.”

한 마디도 져주는 법이 없다고 세영이 툴툴거렸다. 두 사람은 TV 다큐멘터리 채널에서 나오는 우주 이야기를 시청했다. 같은 방송이 몇 번이나 재방송 되어도 호석이 채널을 돌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달, 별, 은하.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끝없는 세계. 세영은 하늘 너머의 세상을 헤아리다 잠깐 졸았다. 정신을 차릴 무렵엔 다큐멘터리의 스텝 롤이 흐르고 있었다.

“세영아.”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호석은 개의치 않고, 언제나처럼 조금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다.”

무엇이 고마우냐고 묻지 않았다. 세영이 호석에게 언제나 미안하고 고마운 것처럼 호석 역시 마찬가지이라 생각했다. 그저 많은 것이. 쌓인 시간의 흐름 속에 많은 것이.
부녀는 어색하게 저녁 인사를 하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결혼식 전야에, 영화나 소설이나 드라마처럼 애틋하고 다정한 일은 없었지만, 세영은 행복한 기분으로 잠을 청했다.


5.

결혼식은 한때 드라마 촬영장으로 지어진 한 어촌 마을의 교회 세트장에서 치러졌다. 정말로 소규모 인원만 수용 가능한 작은 기도당에 양가 부모와 가까운 친척, 친구 몇 명이 자리했다. 앉을 자리도 부족해 대체로 몸을 가까이 부대끼고 몇몇은 섰다.
주례는 인수의 부모가 초빙한 주례 전문 교수가 맡았다. 지인에게 이래저래 사정을 설명하고 부탁하기보다, 돈만 주면 나쁜 소리 하나 하지 않고 할 일을 다 해 줄 사람이 뒤끝 없고 좋다는 이유였다. 판단은 옳아, 교수는 온갖 사람과 상황의 결혼식에 서 본 프로답게 민감한 사항은 하나도 건들지 않고 재치 넘치는 주례사를 했다.
반지를 교환하고, 입맞춤하고, 퇴장하여 교회 건물 밖에서 사진을 찍으면 끝이었다. 세영은 부케를 두 친구 중 누구한테 던질지 끝내 결정하지 못했다. 미희가 슬쩍 뒤로 빠져서 거절의 의사를 보이자 미주에게 넘겨주었다.

“6개월 기한이었지? 그동안 결혼 못하면 나 평생 노처녀야?”
“못하면 안 하면 되잖아. 양보해 줘도 뭐라 그래.”

미주와 미희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고 세영이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사진 찍겠습니다! 다들 마리아상 앞에 모여요!”

사진기사가 소리쳐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여기저기 흩어져 담소를 나누던 사람들이 하나 둘 와서 자리를 잡았다. 신랑 신부인 세영과 인수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붙어 섰다. 사진기사의 지시대로 키와 옷 색상에 따라 사람들의 위치가 세밀하게 조정됐다.
미희가 주위를 슬쩍 곁눈질해 돌아보았다. 열 명 남짓의 인간, 섞인 안드로이드 셋. 세영 옆의 안드로이드 아빠 호석, 그 옆에 미주 엄마 희정, 또 그 옆에 희정의 안드로이드 딸 미주. 그들 뒤쪽에 자신과 연인 제이.

“자, 찍습니다. 모두 웃으세요!”

미희는 평소 잘 쓰지 않는 얼굴 근육을 최대한 움직여 밝게 웃었다. 제이도 엷게 웃는 표정을 지었다. 정면으로 향하는 다른 사람들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미희는 분명히 모두가 행복하게 웃고 있으리라 믿었다.
긴 시간과 시간 속의 아픔을 넘어 이 자리에 서서, 인생 한 기점에, 더할 나위 없는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으리라고.


20141008

안드로이드 연작, 마지막 이야기
mirror
댓글 0
Prev 1 ... 7 8 9 10 11 12 13 14 15 16 ... 47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