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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성동 손 여사의 한숨

– 해망재 –

손 여사는 늘어지게 한숨을 쉬었다. 한숨 한 번 쉴 때마다 숨끝이 저 방구석에 가서 박힐 만큼 긴 한숨이었다. 박 보살은 혀를 끌끌 차며 부채질을 했다.

 “아침부터 복 달아나게 뭐하는 짓이야.”

 손 여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애초에 아침밥상 치우자마자 들이닥치는 것이, 얼굴을 아니 보더라도 마음에 심화가 끓어 넘치는 게 뻔하긴 했지만, 와서 이렇게 돌부처마냥 한 마디도 말은 않고 한숨만 쉬고 있는 것을 보니 보살 아니라 보살 할마씨라도 절로 답답해질 노릇이다. 박 보살은 멀겋게 탄 맥심 커피 한 잔을 손 여사의 코앞에 내려놓고는 중얼거렸다. 나무 관세음보살.

 “거, 뭐라도 말 좀 해 봐요.”

 “기주가 아무 말도 안 하는데 무슨 말을 해.”

 “보살네 신령님이 뭐라 안 해요?”

 “…….”

 “아니면 내 얼굴에, 뭐 없어요?”

 “그러니까 뭐?”

 “자식 복 말입니다, 자식 복.”

 또 그 이야기다. 그놈의 자식 복.

 박 보살은 낯을 있는대로 찌푸리며 알알이 탁구공만한 시뻘건 플라스틱 염주를 몸뻬 바지 위로 내려놓고 굴렸다. 그러고보니 요새는 젊은 애들도 이 몸뻬를 다 입기는 입데. 냉장고 바지니 뭐니 하면서. 그런 걸 보면 말이라는 건 참, 만들어 붙이기 나름이다 싶다. 그 자식 복이라는 말만 해도 그렇다. 예전 같으면, 그리고 지금도 노인네들이 찾아오면 으레 묻는 것은 며느리가 자식을 몇이나 생산할지, 애를 낳기는 낳는 것인지, 효성스런 아들이 태어날 것인지, 한마디로 수부귀다남자하는 것이었겠으나, 둘만 낳아 잘 키우고 하나 낳아 알뜰살뜰을 외치던 시대를 지나고 나니 그놈의 자식 복이라는 말은 우리 애가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이, 서울대 가고 성공해서 부모 호강시켜 주겠느냐는 말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러고 보니, 예나 지금이나 그 질문에 하나 겹치는 게 있기는 있네. 자식새끼가 무탈하게 잘 자라서 부모 호강 시켜 주겠느냐고. 박 보살은 손 여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관세음보살을 염했다. 그러고 보니, 손 여사는 자식 복이 아주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요새 추세로 보면 자식 복이 넘쳐난다고 해야 옳을 사람이었다.

 아들이야 집에서 고시생을 빙자한 백수 건달로 비실거린다고는 해도, 요새 세상에 집에 백수 하나 없는 집이 어디 있겠으며. 그 못난 아들 하나 보고 자식 복을 논하기에는 손 여사의 딸이 잘나기가 과하게 잘난 것이었다. 손 여사의 딸은, 마치 저 대학 뒷산 정기를 그 한 몸에 끌어다 담은 듯, 박 보살이 알기로 이 효성동에서 그런 인물이 나온 적이 없었을 법한 여걸이었다.

 손 여사의 딸은 서울대를 나와서, 지금은 아주 잘 나가는 변호사였다. 아주 유명한 변호사 선생님. 아침방송 텔레비전에도 종종 나와서 법률 상담도 하고, 여성잡지에 인터뷰도 거하게 실린, 소위 스타였다. 미인에 똑똑하고, 남편은 유명 병원 의사 선생님이고, 떡두꺼비같은 아들을 척하니 안고 찍인 인터뷰 사진만 보면, 대체 저 손 여사에게서 어떻게 저런 잘난 딸이 나왔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꽃칠 분칠 해놓고 찍은 사진이라도 보이는 게 없지는 않지. 가끔 아침 방송에서 그 손 여사 딸을 볼 때마다, 박 보살은 예전에 손 여사가 들고 왔던 그 딸의 사주를 떠올리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자수성가할 팔자였지…….”

 “거, 어떻게 매번 그렇게만 말을 하우.”

 손 여사가 짜증스레 중얼거리다 식어빠진 맥심 커피를 들이켰다.

 “내가 그 년을 어떻게 키웠는데.”

 “어떻게 키우긴. 부모 잘못 만나서 고생고생 어렵게 크는 거 내가 뻔히 봤는데.”

 “남의 속 자꾸 뒤집어 놓을 거요? 나 가요.”

 “가든지 말든지.”

 “아, 보살!”

 박 보살은 반쯤 돌아앉았다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여편네가 나이가 들어서는 짜증만 늘어갖고. 갱년기 증상이라고 하지. 여자들이 달거리 끊어질 때 쯤 되면 괜히 아무나 멱살잡이 드잡이 할 것 같이 신경이 곤두서는 것이. 박 보살도 그런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녀는 끌끌 혀를 차며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탁 쳤다.

 “임자는 여기 올 게 아니라 병원에 가야 해, 병원.”

 “몸도 멀쩡한데 무슨 병원을 가라고 그러우.”

 “산부인과.”

 “어메, 이 나이에 무슨 부인과야 부인과는.”

 “가서, 여성 호르몬, 그거 좀 잡숴 봐. 나도 임자처럼 맨날 싸움닭같이 굴다가, 그 약 먹고 나니 다시 마음 속이 보살이 되네. 나무아미타불.”

 “보살이 어디서 약을 팔아.”

 아니나 다를까, 손 여사는 역정을 냈다.

 “그렇게 화만 내서야 될 일도 안 되지. 고객님들 앞에서 그 성깔 다 부려봐라. 무슨 욕을 먹나.”

 “욕을 먹으면 낫지. 클레임이 바가지로 들어오니 문제 아니우.”

 “그러니까 병원에 가라니까 그러네.”

 “거 웃기지 말고, 자식 복 이야기나 좀 해 봐요.”

 “자식 복이라…….”

 박 보살은 손 여사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오랜 단골이었다. 아니, 당골네야 원래 단골집들에 두루두루 어미 노릇까지 하는 법이라지만, 뭘 짚어주려고 해도, 가끔은 속속들이 모르는 게 없으니 오히려 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도 있는 법이다.

 손 여사는 보험설계사였다. 지금이야 팀장이라고 번듯하게 사무실로 출퇴근도 하고 차도 몰고 다니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잘 나갔던 것은 아니었다. IMF때, 남편이 실직을 하고 마트에서 일하다가 어떻게 아는 사람 소개로 겨우 보험설계 일을 하게 되기는 했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 시절, 있던 보험도 깨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던 판에 보험영업, 카드영업 하는 사람들은 또 어디 한둘이었어야지. 그래도 손 여사는 악착같이 일했다. 혼자 손으로 온 가족을 먹여 살렸다.

 “기주, 기억은 나나? 그 IMF때 말이야.”

 “아이고, 내가 치매에 걸려도 그때 일은 못 잊지. 근데 왜요?”

 “그때 기주가, 딸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했었어. 아들 이야기보다 더 했었지.”

 “그거야…… 그 년이 그렇게 말이라곤 한 점 안 듣고 속을 썩이니까.”

 “말을 안 듣는다 안 듣는다 해도, 얌전하게 말 잘 들은 아들보다 훨씬 잘 컸구만.”

 “아주 내 속을 뒤집으시오. 내가 그래서 지금도 천불이 나는데.”

 “뭐, 어미나 딸이나 똑같지. 기주도 친정어머이가 큰오라버니만 챙긴다고 홧김에 대주랑 결혼해 나왔다고 하지 않았어?”

 “똑같긴 뭐가 똑같다고 그래요.”

 손 여사가 독 품은 뱀처럼 쌕쌕거렸다.

 “우리 친정 오빠야 천하의 잡놈이고.”

 “기주네 딸, 현옥이 보기에야 현창이도 뭐…….”

 “아니, 내 아들이 어디가 어때서?”

 “거, 기주는 내 말 들으러 왔다면서 한 마디도 안 들을 거면 가 보든가. 아니, 병원에 가래도 안 가고, 뭐가 문제인지 말을 해줄라고 해도 들어먹질 않을 거면 여긴 왜 왔는데?”

 “박 보살 하는 말이 고약하니 그렇지요. 거, 우리 친정 오빠야 친정 어무이 등쳐먹을 궁리로 평생을 산 인간인데. 그런데도 우리 어무이는, 밤낮없이 친정에, 그 잘난 오라비가 사업한다고 말아먹은 거 메꿔주느라 통장에서 샛바람소리나 나는 딸년들은 사람 취급도 안 하고 말이야.”

 “그래, 그래. 잘 아네.”

 “내가 그걸 설령 치매가 난다고 잊겠어요…… 근데 생각할수록 고약하네. 박 보살, 그 쓰레기같은 작자를 어딜 우리 현창이한테 갖다 대고 그래요.”

 “나이 서른 셋에 백수 건달이면 기주 등쳐먹는 거야 마찬가지지.”

 손 여사는 입을 떡 벌리다가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딱 하고 내리쳤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보살집에 와서 보살에게 호통을 치고 가는 아낙이 어디 흔해야 말이지. 그것도 오늘 처음 신수 보러 온 사람도 아니고, 십수 년을 다닌 단골 같으면.

 손 여사는 그냥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왜, 내 말이 틀렸어?”

 박 보살은 빙긋 웃었다. 손 여사가 다시 눈을 흡뜨며 대꾸했다.

 “그래도 이젠 나가서 돈도 버는데다…… 백수면 백수지 백수 건달은 아니지!”

 “그래, 뭐. 백수. 그런데 무슨 일을 하는데.”

 “편의점.”

 “편의점?”

 박 보살은 기가 찼다. 손 여사는 십 년동안 공부한다고 그 난리를 치던 아들을 두고 한없이 애틋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가 보면 그 아들이 마침내 고시에 합격해서 ‘어머니, 고생 끝났어요’하고 머리에 어사화라도 꽂고 나타난 줄 알겠다. 그 나이 먹어 이제야 겨우 제 손으로 돈 벌 궁리라도 했으니 다행이긴 하지만, 겨우 그것 갖고 이렇게 감동을 하다니. 이러니 그 아들이 제 어미 등쳐먹는 짓을 포기를 못하지, 포기를.

 “아니, 박 보살도 아시겠지만 그 공부가 돈이 꽤나 들었잖아요.”

 “얼마나 들었는데?”

 “일단 신림동 고시촌에 4천짜리 원룸 얻어 줬었고.”

 “4천?”

 “그렇대도요.”

 “거기 꼭대기엔 쪽방부터 시작해서…….”

 “아니, 우리 귀한 아들 몸 상하게.”

 “하루종일 학원에서 공부하는 애, 교통 편리한 데다 고시원이나 얻어주지 무슨 원룸은 원룸이야. 그래서.”

 “근데 그걸, 전세금을 애가 좀 꺼내 썼더라고요. 공부하는 데 필요하다는데 어쩌겠어요.”

 “그리고?”

 “그리고 학원비가 솔찮이 들었고.”

 “또?”

 “생활비랑, 반찬이랑…… 올때마다 오백원짜리 동전을 이만큼 싸줬지 뭐예요. 동전 빨래방에서 빨래하라고.”

 “고시원도 아니고 원룸이면 방에 세탁기를 놓아주지, 동전은 왜?”

 “세탁기야 있었죠.”

 “그런데?”

 “우리 애가 빨래를 못 해서.”

 우주선이 날아다니고 세 살만 먹어도 스마트폰을 만지는 시대에 서른이 넘은 남자가 세탁기 시작버튼을 못 눌러서 빨래를 못 한다는 뜻인지, 박 보살은 아무래도 다음 번에 내과에 가면 혈압약을 좀 더 세게 지어와야겠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내가 한달에 두 번 반찬 싸들고 갈 때마다 그 세탁기 유용하게 잘 썼지 뭐예요.”

 “기주가 돌렸겠지.”

 “그래요, 애가 공부한다는데.”

 “반찬은 왜 싸들고 가? 거기 학원가 앞에 고시식당들 얼마나 많은데. 식권 끊어놓고 먹으면 그만이지.”

 “애가 엄마 반찬이 좋다잖아요. 고시식당들 음식 별로라고.”

 “가리는 것도 많다. 그리고 하루종일 학원에서 공부할 거, 잠만 잘 것 같으면 고시원을 얻어주지 무슨 4천짜리 원룸이야. 그리고?”

 “그리고 그 다음에는 노량진에 월세를 얻어 주었는데…….”

 “노량진은 왜?”

 “고시는 신림동이고, 공무원 시험은 노량진이죠.”

 “그래, 그 와중에 주제파악이라도 했으니 옳으네.”

 “아니, 주제파악이라니. 박 보살은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우리 현창이는 그저, 엄마가 너무 오랫동안 고생한다고, 빨리 합격해서 엄마한테 효도한다고 그렇게 한 건데…….”

 손 여사는 눈물을 찍어냈다. 그 와중에 떨어진 눈물이 진짜라서, 박 보살은 기가 찼다.

 “에미가 못나서, 저 하고 싶다는 공부 원없이 시켜주지도 못하고…….”

 “허이구.”

 “그런데 그 현옥이 그 년은, 누나라는 게 제 동생이 이렇게 고생하고 엄마 생각하는데…….”

 “보태줄 만 해야 보태주지. 싹수가 노란 걸 무슨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도 아니고.”

 “박 보살!”

 “듣고 보니 내 실수했네, 그려.”

 박 보살은 냉장고에서 선물로 들어온 화과자며 양갱을 꺼내며 중얼거렸다. 차도 끓였다. 손 여사가 좋아하는 예쁜 찻잔에다 커피는 블랙으로 탔다. 아무래도 이건 맥심 커피로 될 일은 아닐 성 싶었다.

 “기주가 자식 복이 없긴 없지.”

 “그렇지요?”

 “현창이 하는 짓만 봐도, 웬만한…….”

 “아니, 현창이는 효자고.”

 이게 무슨, 요새 젊은 애들 말로 인지부조화야 뭐야. 박 보살은 혀를 찼다. 이걸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해. 아무래도 이 여편네는, 인터넷이라는 걸 좀 해야다 싶었다. 그래서 판이니 미즈넷이니 하는 걸 좀 들여다 봐야 말이지. 이대로 뒀다간, 저 백수 아들 귀한 줄만 알고, 혹시라도 시집 와 주는 처자가 있으면 그 앞에서 아들 가진 유세나 하는 뽄대 없는 시어머니 되기 딱 좋게 생겼다.

 “내가 자식복이라곤 없는 건, 현옥이 그 년 때문이요. 내가 무슨 현창이 공부하는 걸 다 대 달랬어.”

 “은근 바라기는 했네, 뭐.”

 “아니, 아예 안 바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이 자식 된 도리라는 게 있지요. 도리가.”

 “기주 딸이, 자식 도리를 안 한다고?”

 “연락도 안 해요.”

 손 여사가 양갱을, 포크로 끝부분부터 잘라 먹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 보니, 밖에 나가서 일을 하고 어쩌고를 해도, 저 옛날옛날 소년소녀 세계명작 같은 걸 읽고 배운 것처럼 고상하게 예쁜 척 하는 버릇은 나이 들어서도 변하질 않았다. 젊어서는 중산층들이 나오는 트렌디 드라마를 퍽이나 동경했었지. 아들 현창이가 출세해서 자길 그런 번듯한 목동 아파트 사모님으로 만들어 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랬던 시절도 있었다. 쫄딱 망해서, 보험 영업한다고 나서기 전 까지만 해도.

 “요샌 전화를 걸면 받지도 않아요. 차단이라도 걸었나봐.”

 “저런.”

 그럴 만도 하지, 하고 생각하며 박 보살은 양갱을 집어먹었다.

 “아니, 내가 지를 어떻게 키웠는데.”

 “어떻게 키우긴, 알아서 컸지.”

 “아, 보살!”

 “말이야 바른 말이지. 기주가 어디 우리 집에 하루이틀 다녔어?”

 “난 그, 보살이 우리 현옥이 두고 하는 말만 들으면 복장이 뒤집혀요. 지가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혼자서 컸으며.”

 “이 풍진 세상에 낳아놓아서 고등학교 졸업할 때 까지 밥 주고 학교 보내는 건 부모의 의무니까 그걸로 어디 가서 적공했다 떠벌일 생각 하지도 말고.”

 “대학 보냈잖아. 우리 어머이는 날 대학에 보내지도 않았어요. 공부 더 하고 싶다고 하니까 미친년이라고 빗자루로 후드려팼지.”

 “그래서?”

 “그래서는 뭘, 내가 할 만큼은 했다는 거지.”

 “남들 다들 대학 가는 이 시절에, 대학 보냈다고 유세하는 거여? 기주, 내가 그랬지? 기주 딸은 자수성가할 팔자라고. 부모 못 만나서 고생고생 어렵게 커서 자수성가하겠지만, 커서 대성할 팔자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어. 몇 번을.”

 “그 어려운 IMF때 기집애를 대학까지 보냈는데, 박 보살은 사람이 한다는 말이…….”

 손 여사는 그 예쁜 화과자며 커피잔을 앞에 놓고, 가슴을 쳤다. 억울해서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태도였다.

 “남편이라고 하나 있는 건 바람돌이처럼 이 회사 저 회사 떠돌아 다니기나 하고. IMF 때 회사에 그 충성을 바치던 이들도 추풍낙엽처럼 쓸려가는데, 충성심이라고는 없이 그렇게 저 좋은 대로 옮겨 나다니는 작자를 누가 예쁘다고 거둬 줘요. 잘리는 게 당연하지. 온 식구 거렁뱅이 만들어서 길바닥에 나 앉기 직전까지 만들어 놓고…… 못 먹는 술 마시고 못 웃는 웃음 웃어 가며 죽을 동 살 동 보험 영업 해서 다시 다 찾고 살려 오늘에 왔는데.”

 하긴, 손 여사 팔자가 드세긴 드셌지.

 다들 어려웠던 시절이라고 해도, IMF 그때 손 여사는 정말 막다른 데 놓여 있었다. 그 예쁘고 좋은 것만 좋아하던 여편네가, 귀한 아들이 밥을 굶고 있다며 와서 눈물만 줄줄 흘리는데. 사정 들어보니 이대로 내버려뒀다간 온 가족 데리고 인천 앞바다에 뛰어들든가, 연탄불 피워 놓고 다 같이 자살이라도 할 것 같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보험 일을 하게 알아봐 줬다. 박 보살이라고 넉넉한 건 아니었지만, 네 식구 굶지는 말라고 한두 번 쌀말이라도 들여놓아 주었다. 수치스러워 했지만, 애새끼들이 굶고 있고, 네 식구가 자살이라도 할 것 같은 상황인데. 억척스런 여편네들 같으면 막말로 나가서 몸이라도 팔았을 것이다. 그럴 사람은 아니니, 보험 일 알아봐 주고 단골들 알음알음 연결해 줘서 밥이라도 굶지 않게 도와 준 게 그 무렵의 일.

 지금은 그때의 수줍음을 다 벗고, 그 좋은 실적으로 승진도 쭉쭉 하고, 자기 사무실도 갖고 있지만, 그래도 종종 그때의 그늘이 얼굴이 드러나긴 하였다.

 하지만 딱한 것은 딱한 것이고 할 말은 해야지.

 역사 왜곡이라는 게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어떻게 내버려 둘 수 있단 말인가. 박 보살은 아직 뜨거운 커피를 벌컥 들이키고, 손 여사의 눈을 노려보았다.

 “기주.”

 “아, 내 말 아직 안 끝났어요.”

 “아니, 기주…….”

 “그렇게 죽을 동 살 동, 빚이며 뭐며 겨우겨우 다 갚아서 치워 놓았더니. 남편이라는 작자는 그 와중에 자기가 기술이 있어서 어디든 번듯하게 직장 잡아서 일할 수 있어서 얼마나 좋더냐고 헛소리나 하고 있고. 큰 딸은 살림 밑천이라더니, 딸년이라고 하나 있는 게 제 엄마를 무슨 원수 보듯이 하고, 전화라도 하면 또 돈이라도 달라는 거냐고 그러고.”

 “아니, 얼마나 돈을 달라고 했으면 애가 그렇게 말을 해.”

 “맨날 그런 것도 아니고…… 그리고 가족이 어려울 땐 좀 돕고 살고 그래야지! 안 그래요?”

 “그래서 망했으면서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예요.”

 “IMF 때 말이야.”

 박 보살은 남은 커피를 바닥까지 털어 마시며 중얼거렸다.

 “그때 어디, 대주가 회사에서 짤려서 그 사달이 났나. 아니, 기주가 나름 집도 있고 알뜰살뜰 저축도 해 놓았는데, 대주가 회사 일 한 1년 안 한다고 집안이 그 거덜이 났겠느냐고.”

 “그래도 그 어려운 시기에, 회사에 떡 버티고라도 있었으면.”

 “남들 다들 잘리고는 회사 못 돌아가는데, 대주야 대주 말대로 그 고무 배합하는 기술이 있으니까 금방 또 취직 했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공돌이라고 남편 무시한 거야 기주였지. 대주야 능력 좋은 사람이었지. 왜, 지금 정년 넘었는데도 여전히 공장 같은 데서 부르는 거 보면 모르겠어.”

 “박 보살은 어떻게 내 편은 하나도 안 드는 거예요.”

 “사람이, 뻔히 아는 이야기를 갖고 자꾸만 왜곡을 하니까 그러지. 그때 왜 집안에 빨간 딱지가 붙었는지, 기억 안 나? 기주 말대로, 그 잘난 가족이 어려울 때 서로 돕다가 그 사달이 났었으면서.”

 문제는 손 여사의 오라비였다.

 손 여사의 친정은 위로 큰오빠가 하나, 그리고 딸이 연달아 셋이 있었는데, 이 큰오빠라는 작자가 손 여사의 말마따나, 잡놈이었다.

 “기주네 친정어머니가, 오빠 돈 좀 빌려주라고 한 게 잘못되었던 건 생각 안 나냐고.”

 얌전히 회사라도 다니면서 경력을 좀 쌓을 것이지, 능력도 안 되는 게 젊어서부터 사업은 한다고 부모 재산 다 거덜내어 놓고, 결혼해 살고 있는 여동생들에게까지 손을 벌렸다. 그놈의 사장님 소리 들으면서 배에 힘 주고 다니는 게 좋아서, 온 식구를 다 거덜내고, 끝까지 돈 안 빌려줬다는 막내여동생은 그렇게 몹쓸 년 취급을 하다가, 몇 년 전에는 마지막으로 거덜을 내고 소식이 끊어졌다고 들었다. 여튼 손 여사가, 그래도 맏딸이라고, 여자는 친정이 번듯해야 남편에게도 할 말이 있는 거라고, 그러니까 오빠 한 번만 도와주라고 사정사정을 하는 친정어머니의 말을 듣고 오라비 빚 보증을 서 줬던 게 그 무렵의 일이었다.

 “그거야…….”

 “기주네 딸, 그거 보고 자랐어. 자기 외할머니가 외삼촌 좀 살려달라고 자기 엄마한테 매달려서, 자기 집 쫄딱 망하게 한 거 다 보고 컸다고. 그때 기주네 딸이 몇 살이냐. 고등학생, 대학생, 그 무렵이지 않았어? 볼 거 다 보고 알 거 다 알지. 빌려달래서 빌려줬더니, 어디 이자라도 제대로 냈어?”

 물론 그 불한당같은 오빠놈이 그랬을 리 없다.

 넉 달만 쓰고 돌려 준다던 원금은 고사하고 이자조차 제때 안 주어서, 손 여사는 남편 몰래 적금을 깨어 이자를 내다가 그마저도 밀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IMF가 터졌다. 은행들은 대출들을 회수하기 시작했고, 손 여사는 집을 잃게 되어서야 남편에게 사실을 말했다.

 친정은 그 돈을 갚아 줄 능력이 없었다. 친정 집도, 이미 은행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와중에 친정 어머니는 내 배를 째라며 뻔뻔하게 나오다가, 손 여사네가 맏딸이니 여기 와서 같이 살아야겠다는 말까지 했다.

 조금이라도 자기 편을 들어줬더라면, 같이 그놈의 잡놈이 온 집안을 망하게 한다고 욕이라도 해 주었다면 마음이 풀렸겠지만, 한두 번인가 보았지만 그 어머니는 말라비틀어진 찌그러기라도 아들이 최고지, 딸 편을 들자고 아들 욕을 할 그럴 사람도 아니긴 했다. 그 아들이 온 집구석을 다 말아먹고, 사위들까지 패가망신을 시키고, 둘째딸네는 급기야 그놈의 빚 때문에 이혼을 하도록도 오직 아들, 아들이었으니까.

 “그 와중에도 친정어머니가 오빠 편만 든다고 나한테 와서 울던 거 기억도 안 나?”

 “그래요, 진짜. 그 얼마나 내가…….”

 “그런데 그게 왜 다 남편 탓이야. 어이구, 그때 일을 생각하면 남편을 업고 다녀도 시원치 않겠구만. 집안 거덜나기 직전에 남편에게 말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야. 오라비가 이자도 안 줄 때 바로 말을 했어야지.”

 “아무리 그래도 남편이 남의 편인데 어떻게 그래요…….”

 “무슨 친정은 기주네 편이었던 것처럼 그런다. 그리고, 그때 기주 딸이 대학이나 어디 순탄하게 다녔을까. 다 자기가 벌어서 다녔어. 전부 다. 그 대학 안 보낸다고, 딸년 공장이나 보내서 어떻게든 이 빚을 갚아야겠다고 기주가 그랬던 거 생각도 안 나?”

 “말은 그렇게 해도…… 어떻게든 대학은 보냈고…….”

 “대학을 기주가 보냈나? 지가 장학금 받아서 갔지.”

 “그거야…… 내가 이래봬도 학교 다닐 때는 반에서 1등만 했어요. 우리 오라비도, 뭐 사업 머리는 없어도 공부 머리는 제법 있었고…… 날 닮아서 그렇지, 나도 기회만 있었으면…….”

 “거, 실없는 소리 그만 하고.”

 “그리고 그렇게 엄마가 고생하는 걸 봤으면, 딸이라고 하나 있는 게…….”

 “외할머니가 외삼촌 좀 도와주라고 자기 엄마 아버지 거덜 낸 꼴을 보고 자란 기주네 딸이, 자기 친정 어머니가 남동생 도와주라고 돈 달라는 소리를 하면 무슨 생각이 들겠어? 얼씨구나, 좋다고 돈부터 갖다 바치겠어?”

 “…….”

 “어쩌면 저렇게 자기 딸을 몰라, 그래.”

 “그래서, 어쩌면 좋겠어요.”

 손 여사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힘들게 키워 놨더니, 딸년이라고 있는 게 제 엄마를 무슨 원수 보듯이나 하고.”

 “대체 뭘 얼마나 달라고 한 거야?”

 “그냥, 애 노량진 학원비 대주는 게 좀 힘들어서. 학원비 좀 내 달라고 했는데…….”

 “그것만도 한달 4, 50은 들지 않아?”

 “아니, 그렇게 잘나가는 변호사 선생님이면서, 그만한 돈이 없어서…….”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으라지.”

 “뭐라고요?”

 “고시고 공무원이고, 2, 3년 해 봐서 안 되면 안 되는 거야.”

 “커트라인에서 5, 6점밖에 차이 안 진다고요.”

 “5, 6점?”

 “그렇다니까요.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내가 지금 8년째 같은 말 하고 있는데, 기주네 아들은 가망이 없어.”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아니, 그냥 그 시험 그만두고, 어디 오퍼상 같은 데라도 들어가서 착실하게 일이라도 배우는 게 좋겠어. 여차하면 내가 아는, 저기 박 사장이 영어 할 줄 아는 애 하나 구하던데. 영어는 할 줄 알지?”

 “회사에 들어가도 번듯한 데를 들어가야지. 오퍼상이 뭐예요, 세상에.”

 “아니, 기주도 신문 보잖아? 고시 낭인이라고 못 들어봤어?”

 “우리 애는 그런 말종들하고 달라요.”

 “다르긴 뭐가 달라. 그리고 고시 낭인들이 뭐 커트라인에서 한 2, 30점씩 차이지는데도 계속 시험 보는 것 같아? 그런 애들은 1, 2년 해 보고 바로 포기해.”

 박 보살은 붉은 플라스틱 왕염주알을 들이대며 손짓발짓을 했다.

 “이것 봐, 시험 보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요만큼만 이 바늘구멍을 뚫는다고. 그럼 이 바늘구멍 바로 앞에 사람이 이만큼이 있는 거야. 뒤쪽은 텅 비었고. 공무원 시험이 무슨 국민학교 일제고사인 줄 알아? 5점짜리 한 문제만 더 맞히면 되는 거야? 그런 거 아니잖아.”

 “그냥 운이 나빠서 그래요.”

 “운이 나쁜 건 한 문제 차이로 떨어지는 애들이고, 그런 애들은 공부 더 하면 붙어. 세상에, 1년 공부했는데 커트라인에서 2, 3점 이상 차이가 지면 못 붙는다고 봐야지. 그건 신령님이 와서 도와줘도 못 붙어.”

 “무슨 말을 그렇게 독하게만 해요. 사람이 힘들어서 오는 거지, 내가 박 보살한테 혼나려고 여기 오는가…….”

 “그만 힘들라고 하는 말을 왜 귓구멍으로 못 알아들어!”

 박 보살이 언성을 높였다.

 “그리고, 나이 서른이 넘어서 편의점에서 알바 하는 게 그렇게 불쌍하고 애틋하고 기특하면,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온갖 알바 다 해서 집에 보태던 기주 딸은 안 애틋해? 안 기특해?”

 “기특해요, 기특했지요!”

 “집에 돈이나 벌어다 줘야 기특했겠지. 장학금 받아서 학교 다니면서도 밤마다 아르바이트 하고, 장학금 못 받은 학기에는 휴학하고 하루종일 돈이나 벌면서 그 좋은 시절 다 보냈는데, 그래도 그렇게 노력해서 성공했으면 좀 기특하게 생각을 해야지, 원망만 하는데 신령님이 기주가 뭐가 예쁘다고 봐 주시겠어!”

 “내 말 좀 들어 봐요. 걔는, 전에 보니까 어디 기부같은 것도 많이 하고 어려운 사람도 돕는다는데, 전에 여성잡지 보니까 걔가, 세상에 심장병 걸린 애들 돕는다고 천 만원이나 기부도 했다는데.”

 “좋은 일 했네, 그랴. 나무 관세음보살.”

 “아, 좋은 일은 무슨!”

 “그렇게 고생해서 컸는데도 남도 돕고 산다니 얼마나 좋아. 그런데다 인권 변호사라며.”

 “인권 변호사고 뭐고, 그런 건 내가 알 바가 아니고요…… 아니, 관세음보살은 무슨 관세음 보살. 생판 모르는 사람한테도 그렇게 돈을 쓰는 애가 세상에, 자기 동생을 못 도와줘요, 그래! 난 그 애가 그렇게 부모형제도 모르는 게……!”

 박 보살은 밥상을 홱 뒤엎고 싶었지만, 이걸 뒤엎어봤자 쏟아진 커피를 키우는 건 자신이라는 것을 겨우 상기하며 마음을 꾹 눌렀다.

 손 여사는 입이 댓 발은 나온 채로 앉아 있었다. 밥상을 치우고, 쌀을 집어 상에 놓았다. 촛불은 신이 내리셨다고 활활 일렁거리고, 박 보살의 손끝은 쌀을 헤아렸다. 그녀의 목소리에 신이 실려 울렸다.

 “……신령님이 뭐라고 하시는지 말해줄까?”

 “뭐라고 하시는데요.”

 “박찬호…… 이게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여.”

 “뭐라고요?”

 “박찬호가 원흉이라신다, 박찬호가. 야구선수 박찬호.”

 “그 사람은 또 왜요?”

 손 여사가 눈을 희번득거렸다.

 “그 년이 무슨 박찬호한테 돈을 싸갖다 주느라 우리 아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거예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아, 잠깐만 기다려 봐.”

 박 보살은 염주를 굴렸다. 신령님은, 박찬호라는 뜬금없는 말만 던지고 소식이 없었다.

 박찬호, 박찬호. 야구선수 박찬호.

 한참만에야, 소식이 왔다.

 “박찬호는 박찬호인데…… 그때 박찬호가 선전하던 거 있잖아.”

 “선전?”

 “컴퓨터.”

 “컴퓨터? 그때 하나 사주긴 했는데.”

 손 여사가 중얼거렸다. 박 보살이 눈을 부라렸다.

 “컴퓨터를 사 줘? 언제?”

 “그거야…… 우리 현창이 중학교 3학년 때.”

 “IMF 터졌을 때 열둘이었으니…… 2000년?”

 “그렇네요.”

 “현옥이가 현창이보다 여섯 살이 많으니…… 그때 졸업 앞두고 휴학한다고 그러던 때 아니야?”

 손 여사는 입을 다물었다. 박 보살이 언성을 높였다.

 “이눔의 여편네가 정신이 있어, 없어?!”

 “아니, 또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요!”

 “학교 다니는 딸은, 집안 빚 갚는다고 알바를 세 개씩 하다가 장학금 놓쳤다고 울면서 휴학을 하고 그러던 시절에, 아들은 컴퓨터를 사줘?”

 “공부에 필요하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그걸로 현창이가 공부를 하디? 어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박 보살은 상을 손바닥으로 쳤다. 쌀알들이 튀어올랐다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때 대학생 등록금이 얼마야. 200만원 좀 넘지 않았어? 그때 컴퓨터가 얼마였어?”

 “예?”

 “300만원이야, 300만원.”

 “말 지어내지 마시고.”

 “지어내긴 뭘 지어내! 내가 그때 신당 홈페이지인가 뭔가 만들라면 컴퓨터가 필요하대서 하나 샀었는데!”

 “그래서 홈페이지는 만들었어요?”

 “시끄럽고, 이 여편네가 말이야. 딸은 그 돈이 없어서 울면서 휴학을 했는데, 아들 컴퓨터 사줄 돈은 있었다고?”

 “내가 무슨 돈이 있어요…… 카드로 긁었지.”

 “잘 하는 짓이다!”

 손 여사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다가 항변하듯 목을 빼며 말했다.

 “아니, 내가 그걸 현창이 혼자 쓰라고 사준 것도 아닌데, 현옥이 그 독한 년이 컴퓨터를 보더니 화를 내다가, 자기 복학시켜 달라고 어거지를 부리는 거예요. 학기 중이라서 그때는 등록금을 싸다가 줘도 복학을 못 할 판인데! 그런데다 그때부터, 알바해서 번 돈 집에는 한 푼도 안 갖다줬어요. 내가 진짜, 컴퓨터 할부까지 해서 그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러니까, 카드 긁어서 현창이 컴퓨터 사주고, 그거 현옥이가 알바해서 벌어 온 걸로 메꾸려고 한 거네?”

 “아니, 말을 어떻게 그렇게 해요…… 그리고 내가, 내가 그때 설마 현창이만 쓰라고 그 비싼 걸 사줬겠어요? 현옥이도 학교에 낼 레포트 도서관에서 컴퓨터로 쓴다고 맨날 그랬고…….”

 “그래서 그걸 현창이가 게임을 했어, 현옥이가 숙제를 했어?”

 “그러니까, 현옥이가 현창이 컴퓨터에 손도 안 대더라니까.”

 그 후의 이야기는, 박 보살도 아는 이야기였다.

 손 여사네 딸은 악착같이 벌어 복학을 했다. 요새같으면 한 학기 내내 일을 해도 그 돈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겠지만, 그때만 해도 어떻게든 벌 수는 있는 돈이었으니까.

 그 무렵에 손 여사네 친정어머니가 쓰러지셨다. 병원비가 필요했다. 돈이 없어서, 딸에게 휴학을 하고 등록금을 돌려받아 오라고 했다. 소용없었다. 손 여사는 카드를 긁어 병원비를 막았지만, 친정어머니는 돌아가셨다. 동생들도 딱히 사정이 나은 게 아니었을 테니, 그 병원비도 고스란히 손 여사의 빚으로 남았다고 들었다.

 그래도 그때만 해도, 손 여사네 똑똑한 딸이 그렇게까지 제 어머니와 사이가 틀어졌던 건 아니었다. 예정보다 1, 2년 늦게 졸업하게 되었지만, 악착같이 공부해서 졸업 전에 사법고시에도 붙었고, 연수원에 들어가서 월급을 받게 되면서부터는 집에 생활비도 보냈다. 살림도 피었다. 손 여사는, 그 귀한 아들만은 험한 알바 한 번 안 시키고도 대학을 보낼 수 있었다.

 그랬으면 고마운 줄을 알아야지.

 “현창이 대학 다닐 때 수월했던 거야, 현옥이가 집에 돈을 보내서 그랬지.”

 박 보살이 혀를 찼다.

 “근데 그때 기주가 뭐라고 했어. 누나가 학비를 대줬다고 하면 아들이 기가 꺾인다고 그러지 않았어?”

 “그거야…….”

 “기 좀 꺾이면 어때서. 그런 걸로 기가 꺾일 것 같으면 이 험한 세상 사회생활은 어떻게 하라고. 형이 학비를 대준다고 남동생들이 죄 다 기가 꺾였으면.”

 “내 딸이지만 그 년이 너무 잘나긴 했어요.”

 손 여사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렸다.

 “아들보다 나은 딸이라…… 요즘 사람들이야 딸도 아들 못지 않다고 그러지만, 우리 때만 해도 좀 아니잖아요.”

 “뭐가 아니야. 아들보다 한참 나은 딸인데.”

 “아무리 잘 되어도 딸은 시집 가면 남의 집 사람이고…….”

 “남의 집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으면, 돈 달라는 소리를 하지 말았어야지.”

 “그래도 장차 제사라도 지내줄 건 아들인데…… 아들 잘 되길 바라는 거야 당연하지 않아요. 난 걔가 영란이, 그때 여자친구라고 사귀던 애 있잖아요. 걔가 고무신 꺾어 신고 나서, 자기도 사법고시를 봐서 번듯한 판검사가 되어설랑, 영란이 고 여우같은 년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하길래 참 잘 생각했다 그랬어요. 누나처럼 잘 되겠다는데. 누나는 변호사 하고, 현창이는 검사 같은 거 하면 또 얼마나 폼이 나겠어요. 근데 현옥이는, 제 동생 도와준다면서 정말 책값이나 보내주고 그랬으니…….”

 “현옥이는 노량진이며 신림동 학원 안 다니고도 합격을 했어.”

 “잘난 저나 그렇지…… 못난 제 동생도 그럴 줄 알고.”

 “다행이네. 딸이 잘나고 아들 못난 거 인정이라도 하니.”

 “현옥이에 비해 그렇다는 거지…… 우리 현창이도 밖에 나가면 훤칠하고 잘 생겨서 아직도 1등 신랑감인데 왜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하고 생각하며 박 보살은 염주를 굴렸다.

 “그래서, 진짜 묻고 싶은 게 뭔데?”

 신세타령만 하려고 여기 온 것은 아닐 테니. 진짜 하고픈 말은 따로 있을 것이다 싶었다. 아니나다를까, 손 여사는 뜸을 들였다. 박 보살은 쌀알을 쳤다. 쌀알 몇 알이 튀어올랐다.

 이상한 게 지폈다.

 어린 아이가 하나 보였다.

 여기서 웬 어린 애야. 현창이 놈이 어디 가서 사고라도 친 거야, 뭐야. 박 보살은 인상을 썼다.

 “똑바로 말해.”

 “예?”

 “현창이 그게, 설마 취직도 못한 백수가 어디 여자애랑 살림이라도 차린 거 아냐?”

 “살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손 여사가 한참 머뭇거리다가, 몸을 배배 꼬며 겨우 입을 열었다.

 “현옥이가…… 돈 좀 안 해주겠지요?”

 “또 무슨 돈?”

 “보살 말대로 그게, 여자친구랑 사이에 애가 덜컥 생겨서.”

 “공부한다면서 무슨 여자친구…….”

 “편의점 알바 하면서, 거기 여자애랑 어떻게 눈이 맞았나봐요.”

 “여자애?”

 “스물 둘이라던데.”

 “애를 떼겠다고?”

 “아뇨, 그건 아니고…… 결혼이라도 시키면 좀 안정이 되지 않나 싶어서.”

 박 보살은 뒷목을 잡았다.

 신을 모시는 입장에서, 애를 지우라 말아라 말을 할 수는 없다. 아직 태어나지 않았어도 산 목숨인데. 하지만 여자애의 팔자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남자라는 놈은 고시 낭인인 백수 건달이고, 게다가 시어미 자리는 그 잘난 딸을 두고도 아들 아들 소리가 입에 붙인 사람인데. 그 스물 두 살난 어린 여자애가 무슨 고생을 하려고 그렇게 되었나. 아니, 손 여사네 아들이 못난 놈이지. 나이 먹은 놈이 그거 콘돔 몇백원이나 한다고 그걸 안 써서 이런 사고를 다 쳐 놓았나 생각하니 그저 한숨만 나왔다.

 그때 손 여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눈에 차진 않지만 그래도 애가 생겼으니…… 어떻게 살림이라도 차려야 할 것 같은데.”

 “그런데?”

 “우리 현창이가, 결혼을 할 거라면 아파트가 좋다고 그러는데…… 친구들 보기에도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아파트?!”

 “근데, 내가 곧 은퇴하다 보니 이게 얼마 없잖아요. 그런데다 남편은, 하나뿐인 아들이 결혼한다는데 그 정도도 해줄 생각이 없고…….”

 “뭐가 예쁘다고 아파트를 해 줘? 아니, 잠깐. 기주 그래서 기주 딸, 현옥이 찾고 그러는 거야?”

 “그럴 게 아니면 그 얌체같은 년을 뭐 하러 찾아요. 제가 부모한테 한 게 뭐가 있다고.”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없던 성인병들이 손을 잡고 달려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손 여사는 뻔뻔하게, 여전히 제 아들 걱정만 하고 있었다.

 “현옥이가 남편도 번듯하고 자기 직업도 번듯한 게 보증 좀 서 주면 우리 현창이 아파트 전세 정도는 얻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자식을 잘못 키웠지. 살림 밑천이라는 게 전화도 안 받고 끊어버리고 그러네요. 어젠 사무실로 걸었는데도 그 사무장인가 하는 여자애가 변호사님 없다고 그러는데. 아무래도 사무실에 직접 찾아가봐야 할 지…….”

 박보살은 혀를 찼다. 그녀는 뱃속에서 끓어오르는 분을 끌어모아, 호통을 쳤다.

 “그보다 잘 키울 수가 없지!”

 “예?”

 “기주가 자식 복이 많아서, 현옥이 그 아이가 지가 알아서 똑 소리나게 잘 컸다고. 아니. 대체 그 이상 뭘 바라는데?”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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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na 17.01.17 16:51 댓글

    해망재님 글이 점점 독해지는 것 같아요... 소재가 되는 현실들이 그러는 모양으로.... 아, 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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