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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흰 여우 이야기




옥인걸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젊어 보이는 중년 여자였다. 그녀는 자리에 앉으면서 하얀 털로 되어 있는 목도리를 풀었다. 목도리는 여우털로 만든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도 빛깔이 흰 색이었다.


"발표 내용이 재미있었죠?"


그녀가 옥인걸에게 물었다. 옥인걸은 허허 하고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사실 옥인걸은,


"전자기 기계 관절 세미나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는 회의가 재미있어 봤자죠."


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웃으며 말을 거는 그녀에게 그렇게 빈정거리지는 않았다.


옥인걸은 그녀를 관찰해 보았다. 기계관절 만드는 회사의 영업사원과 연구원들이 대다수인 이 학회 사람들에 비해 그녀는 달라 보였다. 그녀에게는 로봇 팔 관절을 하나라도 더 팔아 먹기 위해 자기 다리 관절이 나가도록 도시를 싸돌아 다니는 이 바닥 영업사원들의 비루한 표정이 없었다. 그렇다고 옥인걸이 자기 회사 연구원들의 얼굴에서 흔히 발견하던, 24시간 언제나 졸려서 힘들어하는, 심지어 잠들어 있을 때에도 졸려 하는 얼굴이 되는, 그런 기색이 그녀의 얼굴에서 보이지도 않았다. 그녀의 나이를 알지 못했지만 옥인걸은 그녀가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옥인걸은 그녀가 젊어 보이는 까닭이 그녀가 마음 고생을 하지 않고 걱정 없이 살아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옥인걸은 편견이 심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정말 그녀가 돈 걱정도, 어려운 일에 대한 걱정도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했다. 그렇지만 옥인걸은 자신의 편견을 함부로 입밖으로 내지 않을 정도의 지각도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런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옥인걸은 자신이 그녀의 얼굴을 몇 초 쳐다 보았다는 생각을 깨닫고 빨리 눈을 돌렸다. 무심코 눈이 창밖에 보이는 풍경으로 갔다. 창밖에는 수원성이 보였다. 그러자 그녀도 고개를 돌렸다. 그녀와 옥인걸은 그 몇 백년전에 건축한 돌벽과 요새의 구조물을 같이 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공심돈이라고 아세요?"

"공심돈이요? 저기 수원성에서 군데군데 벽돌로 높이 쌓아 놓은 탑 같이 생긴 걸 공심돈이라고 부르지 않나요?"


옥인걸이 대답하자 그녀는 눈웃음을 웃었다. 그녀는 아니라고 하면서 대답했다.


"공심돈은 그게 아니라 '공무원 심리로 돈벌기'라는 뜻이에요."


옥인걸은 웃었다. 옥인걸이 좋아하는 형식의 농담이었다. 그 이후로 옥인걸은 그녀와 좀 더 대화를 활발히 나누게 되었고, 옥인걸은 그녀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었다.


그녀는 "로봇 관절 베어링 안전성 평가 연구소"라는 작디 작은 연구소의 소장이었다. 그렇지만 그에 대해 들으면 들을수록 그곳은 환상적인 곳이었다. 사람이 작업하기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고층 빌딩의 높은 곳에서 작업하는 로봇이 널리 퍼지면서 사고가 몇 차례 발생한 일이 있었다. 로봇팔로 빌딩에 달라 붙어 작업하는 로봇들이 낡게 되면 관절 베어링 이상으로 제대로 벽을 붙잡지를 못했서 높은 곳에서 추락해 버렸던 것이다. 40미터, 80미터 높이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무쇠 덩어리 로봇은 작은 수류탄을 던지는 것처럼 그 아래의 길을 가던 사람들을 습격했다. 대로변을 달리던 자동차 네비게이션 영상에 추락하는 로봇이 찍혔고, 그 무서운 폭발은 생생히 텔레비전과 인터넷 동영상으로 퍼져 나갔다.


무슨 일이건 빨리 해결하는 것이 자신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던 대통령은 당장 그 문제를 해결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다 보니, 급하게 로봇 관절의 베어링 안전성을 과학적으로 평가해 검증 받아야 한다는 법이 생겼다. 그러나 그러한 목적으로 로봇 관절의 베어링 안전성을 평가하는 방법은 사실 마땅한 것이 과학적으로 연구된 것이 없었다. 그러니 구색이라도 맞추기 위해 11년전에 일본의 한 기계 공장의 노동 조합에서 작업 노동자 보호 목적으로 만든 잡다한 규정집을 가져 와서 그 규정으로 안정성을 평가하게 되었다. 오늘 옥인걸과 이야기를 나누던 그녀는 바로 그 규정을 이해하고 있다는 자격증을 갖고 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그녀가 하는 일은 최저임금을 받는 남자 대학생 아르바이트생이 볼베어링에 넣은 축을 한 바퀴 돌리고 여자 대학생 아르바이트생이 그게 10초에 몇 바퀴나 돌아가는 지 헤아리는 것을 지켜 보는 일이었다. 기준으로 되어 있는 횟수 보다 많이 돌아가면 합격, 적게 돌아가면 불합격이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녀는 하루에 딱 여덟번만 시험을 했다. 그 까닭은, 그녀의 합격 판정을 기다리는 로봇 회사들이 애타는 마음으로 그녀의 빽빽한 스케줄에 끼어들기 위해 경쟁하게 만들고 싶어서 였다. 그래야만 그녀의 일을 고귀한 것으로 짐작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오전에 네 번 오후에 네 번 대학생 둘이 빙빙 알루미늄 축을 돌리는 것을 보고, 하루에 수수료로 천이백만원씩을 벌고 있었다.


"제도가 갑자기 생기거나 바뀔 때 혼란스러운 일이 많거든요. 그때 뭔가 공무원 심리에 잘 맞추는 일을 하면 쉽게 돈 버는 길들이 많이 있더라고요."


그녀는 옥인걸과 좀 더 친밀해진 뒤에 그렇게 말을 했다.


옥인걸은 그 날 뒤로 그녀를 다시는 만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그때 그녀의 모습은 옥인걸의 기억속에 똑똑히 남았다. 옥인걸은 그녀의 바뀌어 가던 얼굴 표정과 그 표정에 맞춰 말하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옥인걸은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고, 그녀가 하고 있던 그 흰색으로된 여우 목도리 같은 것을 하나 사려고 생각했다. 그녀의 모습이 근사해 보였기 때문에 옥인걸은 자기 아내에게도 그것을 하나 선물하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몇 군데 가게에서 물어 봤지만 그와 같은 것은 없었다. 비슷한 것은 있었지만 어딘가 빛깔이 다른 것 같았다. 요즘에는 진짜 여우털이 아니라 인조 제품을 더 많이 쓴다고 했는데, 인조 제품은 그녀가 두른 목도리와 색이 비슷하긴 했는데, 막상 점원에게 한 번 둘러 보라고 하면 그 감촉이나 무게가 달라 보였다.


다른 것 같은데, 다른 것 같은데, 몇 번 망설이다가 그래도 그나마 가장 비슷한 것을 사서 옥인걸은 집으로 돌아 왔다. 옥인걸은 웃는 얼굴로, 처에게 선물을 사왔다고 말했다. 그런데 처의 얼굴은 우는 모습이었다.


"우리 큰일 났어. 이거 봐."


아내는 옥인걸에게 우편으로 온 통지서 하나를 내밀었다. 결혼할 때 청접장도, 사람 죽을 때 부고도, 스마트폰 메시지로 주고 받는 시절에 고색창연한 "요금별납"이 인쇄된 편지 봉투에 담겨 온 그 종이 쪽지는 그러한 구식의 자태부터가 위협적이었다. 첫 문장을 읽어 보자 내용이 예사롭지 않았다. 옥인걸은 들고 온 흰색 여우 목도리를 집어 던지고 두 손으로 통지서를 들고 읽기 시작했다.


내용은, 많은 빚으로 옥인걸이 알거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옥인걸의 집값이 갑자기 어마어마하게 비싸졌다가 요즘에 갑자기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외곽지역의 작은 도시에 사는 옥인걸이 처음 이사올 때만해도 이 집은 오히려 싼 곳이었다. 옥인걸은 그때 유행하던대로 싼 이자로 주택 자금을 빌려주지만 집값이 오르면 이자율도 오르는 조건으로 빚을 내서 집을 샀다. 그런데 집 주변에 외국 영화 회사가 들어 오고, 또 뒤이어 무슨 웹브라우저 회사도 하나 들어오면서 갑자기 이 지역 땅값이 우스꽝스럽게 치솟기 시작했다. 빌린 빚의 이자도 같이 높아졌다. 그렇지만 그때만해도 약간은 두려웠지만 바쁠 때는 잊을 수 있는 수준의 걱정이었다. 이자가 좀 더 많아졌다고해도 집값이 충분히 비싸졌으니까, 여차하면 집을 팔아버리면 빚을 다 갚고도 돈이 남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집값 오르는 것이 우스꽝스럽다 못해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정신병자가 웃어제끼는 것 처럼 미친듯이 더 오르게 되자, 문제는 심각해졌다. 이자는 점점 더 쌓여 갔고, 집값과 이자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러던 중 집근처의 그 거대한 영화사가 도산해 버렸다. 그 영화사는 동물이 사람으로 변신하고 어쩌고 하는 황당한 영화를 찍고 있었는데, 영화가 아주 쫄딱 망해버렸던 것이다. 영화사 빌딩은 떠도는 들개나 들고양이의 집으로 전락했고, 그 빌딩의 가치도 추락했다. 인근의 아파트들과 옥인걸 가족의 집값도 마찬가지로 떨어져 갔다.


옥인걸의 아내가 망한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바로 그 다음 단계였다. 이제 집값은 예전보다 훨씬 낮아졌는데, 그동안 쌓인 이자는 여전히 무겁기만 했다. 집을 팔고 그 이자와 빚을 다 갚아버리고나면, 남는 잔고는 사만 몇 천원인가 그랬다. 옥인걸의 가족이 재산을 다 털어먹은 채로 모두 PC방에 가서 오손도손 게임을 하며 허탈함을 달래 보려고 한다면 이틀이면 써 없앨 수 있는 돈이었다.


옥인걸의 아내는 망연자실해서 훌쩍거리고 있었다. 집을 다 날리고나면 애들데리고 친정에 가 있을까, 친정에 남는 방은 있을까, 친정 거실에서 세 식구가 살고 옥인걸은 어디 고시원에라도 들어가야 하나 주절주절 병든사람 헛소리 하듯이 흐느끼는 소리로 대책아닌 대책을 늘어 놓고 있었다. 옥인걸의 아내는 바닥에 주저 앉았고, 그 불쌍한 우는 여자의 모습을 보면서 옥인걸은 자신도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옥인걸의 아내가 무심코 바닥에 떨어져 있던 흰 목도리를 어깨에 둘렀다. 절망감 때문에 몸의 체온이 내려가서 갑자기 오한이 내려갔기 때문에 아무것이나 덮을 것을 찾은 것이었다. 옥인걸은 흰 여우 목도리를 두른 아내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저녁에 본 그녀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가 그 자리에서 갑자기 환영으로 나타나 옥인걸의 귀에 뭐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신비로운 꾀를 알려주는 것 같았다.


깨달음을 얻은 옥인걸은 자신있게 아내에게 말했다.


"울지마. 그쳐. 너무 걱정마. 그때  그 대출상품 때문에 이자로 집날리게 된 게 우리 뿐만 그런게 아니잖아. 대한민국에 그런 사람 엄청 많아. 정부에서 분명히 대책을 만들어 줄거라고."


아내는 울음을 억지로 그치면서도 화를 냈다.


"정부에서 대책은 무슨 대책. 요즘 정부 얼마나 비정한지 몰라. 거기 로봇 전지 회사 해고 노동자들도 구제 해 준다 어쩐다 하다가 다 그냥 방치하고 잊어서, 그 사람들 다 아직도 시위만 계속하고 있지. 로봇 나오는 바람에 망한 옷 만드는 공장 사람들 지원해 준다 어쩐다 하던 것도 그냥 대충 지원해 주는 시늉만하고 말아서 그 사람들도 다 그냥 거지 됐잖아. 요즘 날마다 다 뉴스가 그런데, 어떻게 걱정을 안해."


아내는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점점 더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옥인걸의 목소리는 이미 자신감을 회복한 상태였다.


"공무원 심리로 돈을 버는 거거든. 공무원들은 자기들은 직장에서 잘릴 걱정이 없잖아. 그래서 무슨 노동 문제니 해고 노동자 문제니 이런 거는 아무리 옆에서 말해 줘도 그렇게 피부로 강하게 못느낀다고.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이 그냥 적당히 상상해서 하는 대책이니 규정이니 주워 듣고 자기들이 대충 상상해 보기에 그게 그럴듯해 보이면 그냥 그대로 하고 ‘대책 줬지? 이제 됐지?’ 그러고 잊고 말아요. 그래서 공무원들이 만드는 노동 문제 대책은 현실감이 없게 느껴지는 거야. 중소기업 지원하고 어쩐다 하는 것도 마찬가지야. 공무원들이 장사하고 사업하고 뭐 이런 걸 하는 사람들인가. 그게 어떤 건지 감을 못잡거든. 그러니까 그냥 자기 한테 이해 가기 쉽게 옆에서 누가 뭐라고 떠드는 사람 있으면 그 사람 이야기 듣고 대충 그대로 하고 만다고."


아내는 옥인걸의 말을 듣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희망을 찾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옥인걸은 아내에게 그 희망을 내가 찾아 주마라는 표정을 지었다. 옥인걸이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주택은 달라. 공무원들도 집 사서 살거든. 특히 실제로 정책 만드는데 활약하는 중진급 공무원들이 우리처럼 소도시에 아파트 한 채 빚내서 사서 사는 사람들이 엄청 많아요. 그래서 얘네들이 집값 문제, 주택 문제는 바로 자기 문제로 피부에 팍팍 와닿게 느낀다고. 집값 문제가 잘풀리게 규정을 만드는게 당장 자기들이 살고 죽는 문제거든. 이번 대출이 딱 그렇잖아. 그러니까 공무원들, 중진급 공무원들 자기들한테 바로 와닿는 이런 문제는 절대 불리하게 가는 일이 없어."


아내는 옥인걸의 자신감이 너무 강하게 느껴져서 조금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도 느꼈다. 그렇지만 며칠간 안심하기에는 충분했다. 아내는 다시 일어나 옥인걸에게 안겼다. 옥인걸은 아내를 안으며 그 목도리를 쓰다듬었다.


아내가 안심하던 며칠이 지나기 전에 과연 정부의 대책은 발표 되었다. 옥인걸이 아내에게 내말이 맞지 않았냐곡 이천번쯤 자랑할만한 결과였다. 집값에 따라 이자율이 높아지는 상품은 불법 대출로 규정 되었고, 그 몇 마디의 십몇초 간의 뉴스 발표로, 옥인걸이 십오년은 족히 일해서 갚아야할만한 그 거액의 이자가 단숨에 사라졌다. 옥인걸은 묘하게도 마치 십오년간의 자기 인생의 모든 노력과 고심이 그 움직이는 공무원의 입술과 혓바닥의 움직임으로 녹아 허공으로 사라지는 듯한 마법적인 심정마저 느껴졌다.


그리고 그 덕택에 옥인걸은 단숨에 부유해졌다.


옥인걸 동네의 영화 회사는 망했지만 웹브라우저 회사는 건재해서 집값이 내려가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옥인걸의 빚은 깃털처럼 가벼워져 있었다. 옥인걸이 집을 처분한다면 이번에 손에 쥘 수 있는 현금은 옥인걸이 인생을 두 세 번 다시 살면서 월급으로 벌어도 벌 수 없는 액수였다. 근로소득세 측면으로 한정된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미 옥인걸은 인생의 목적을 완성한 후였다. 심지어 윤회를 한다고 할 때 다음 생, 그 다음 생의 목적까지 완성한 후였다.


며칠 후, 옥인걸의 회사에서 회식 자리가 있었다.


옥인걸은 회식 자리에서 실장이 걸쭉하게 모피 입는 여자들을 욕하는 것을 들었다.


"동물이라면 귀엽다고 혀짧은 소리로 귀여워, 귀여워 이러는 애들이 동물 가죽 벗긴 건 왜 두르고 다녀. 진짜 그런 여자들 이상하지."


술 취하면 쓸데 없는 소리를 잘 하기로 악명 높았던 실장은 그 말을 시작으로 별별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 놓았고, 그러자 주위에서 술을 억지로 먹여 취해 있던 유과장이 거기에 반발하기 시작했다. 회사 여직원들의 제2두령 쯤 되는 위치였던 유과장은 그날따라 실장과 말을 많이 주고 받았고, 그 분위기는 격화 되어 나중에 실장은 별 거지 같은 말들을 떠들기에 이르러, 그날의 회식자리를 거진 무법천지처럼 만들어 버렸다.


그 비참한 광경을 보면서 옥인걸은 회사 다니는 게 참 힘든 일이라는 생각을 새삼하게 되었다. 옥인걸이 저주 받은 것 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회식 자리에서 도중에 귀신 같이 잘 빠져 나가기로 명망 높았던 젊은 직원 하나가 옥인걸에게 손짓을 했다. 옥인걸은 그 직원을 따라 도망치려고 했는데, 소리 지르는 실장에 놀라서 잠깐 시선을 놓쳤다. 그러자 그 직원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그 직원이 입고 있던 하얀 블라우스 그 뒷모습이 식당 저편에 어른 거리는 것이 보였다. 짙은 색의 양복을 입은 다른 사람들 사이에 있어서 눈에 뜨여 찾을 수 있었다.


옥인걸은 그곳을 탈출한 이후, 다시는 그런 자리로 끌려가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넉넉한 재산은 그의 부모가 어린 시절 자신감을 길러준다며 가르쳤던 태권도장 수업 3년치 보다 훨씬 더 많은 자신감을 갖게 했다. 옥인걸은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다. 옥인걸의 아내는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이었지만, 이미 그만 둔 옥인걸에게 더 불평을 하지는 않았다.


옥인걸은 한 달을 집에서 놀았다. 집에서 쉬기만해도 옥인걸은 생계에는 문제가 없었다. 또한 미래의 생계 역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옥인걸이 갖고 있는 자신감의 근원이었다. 그렇지만 한달 동안 집안에서 쉬고, 가족끼리 온천을 다녀 오거나 남태평양의 섬으로 여행을 다녀 오는 일을 몇 번 하고 나니, 그냥 가만히 집에만 있는 것이 민망해지기 시작했다. 혼자서 세상 온갖 일을 떠들어대는 텔레비전 앞에 하루 종일 옥인걸은 앉아 있었다. 옥인걸이 하는 일이라고 해 봐야 어린 막내와 장난을 하며 놀아 주는 일 정도였다.


옥인걸은 막내가 여우 모양의 봉제 인형을 갖고 노는 것을 보았을 때, 아내의 시선을 느꼈다. 아내는 한편으로는 남편을 한심하게 여기고, 한편으로는 남편을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옥인걸은 무엇이든 다시 일거리를 찾겠다고 결심했다.


옥인걸은 딱 반나절 동안 컴퓨터 화면과 텔레비전 채널을 살펴 보며, 새롭게 할 수 있는 일거리를 찾았다. 커피 가게, 맥주 가게를 해보는 게 좋다는 소식에서부터, 일본에서 유행한다는 장난감이나 미국에서 유행한다는 전자제품을 파는 가게를 차려 보라는 소식까지 알 수 있었다. 달콤한 기회로 퇴직자들을 유혹해서 행인들에게 많이 팔아서 돈을 벌게 해 준다고 했지만, 정말로 무엇인가가 팔리는 때는 그 창업 업자들이 퇴직자 초보 점주들을 향해 파는 순간 뿐인 것 같았다. 심지어 들여다 보면 볼 수록, 돈을 벌 수 있는 달콤한 기회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함정과 덫처럼 보일 뿐이었다. 다만 “과감하게 도전하는 자에게만 기회가 있다” “두려워하지말고 도전하고 포기하지 말고 노력하면 반드시 보상은 돌아온다” 따위의 말로 눈을 가리고 귀를 먹게하여 함정을 숨기려는 정도인 것 같았다.


옥인걸은 여기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했다. 옥인걸은 당장 그날 저녁부터 다른 방향을 찾기로 시작했다. 옥인걸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전국 지방자치 단체의 시장, 군수들을 하나하나 찾았다. 옥인걸은 며칠간 내내 그 일을 계속했다. 옥인걸의 막내가 여우 울음 소리를 흉내내고, 그것을 두고 빨리 자지 않고 야밤에 무슨 소리를 내냐고 아내가 타박하는 동안에도 옥인걸은 자신이 하던 조사에 집중했다.


옥인걸은 다음날, 아내에게 몇몇 시장, 군수들의 얼굴을 보여 주면서 물었다.


“이 양반들 중에 누가 제일 멍청해 보여?”

“뭐?”

“전국 지방 자치 단체장들 중에 제일 멍청한 사람이 누구인 거 같냐고.”


옥인걸은 시장과 군수들 중에서 가장 아둔한 사람을 찾아 내려고 하고 있었다. 그것을 위해 그는 아내의 안목에도 도움을 받고자 했다. 아내가 도대체 왜 그런 걸 궁금해 하냐고 묻자, 아내에게 옥인걸은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멍청한 사람들일 수록 이상한 돈 안되는 엄청 인기 없는 사업을 많이 벌일 거란 말이야. 그런데 이게 또 공무원들이 하는 일이다 보니까, ‘사업을 잘못해서 망했다’ 이렇게 하루 아침에 또 바로 접지를 못해. 다음 선거도 생각하고 해야 하니까. 그러니까 마지막 순간까지는 어떻게든지 세금 퍼붓고, 시에서 군에서 돈 끌어다 줘서 어떻게든지 안망하고 성공하고 있는 사업인 것처럼 꾸밀거거든. 그런 사업을 해야돼. 그런 사업을 우리가 할 수만 있으면 사업이 잘되든 안되든 하여간 걔네들이 자기네들 정책 대로 사업해서 성공하고 있는 걸로 보여 주기는 해야 되니까, 무조건 우리는 성공한 티가 나도록 돈을 집어 줄거라고.”


아내는 옥인걸의 말을 깊게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내는 몇몇 시장과 군수들의 사례를 보고 옥인걸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아내는 지방 자치 단체장들의 얼굴과 그 사람들이 한 말들을 보고 “이 사람은 정말 심하게 멍청한 것 같다”는 사람들을 몇 뽑았다.


그 중에는 인근에서 사과 초콜렛, 포도 초콜렛, 도라지 초콜렛, 무조건 하여간 특산물을 넣은 초콜렛을 만들어서 판면 “참신한 아이디어 제품”이라고 해 주는 것을 보고 자기 지방 자치 단체의 특산물을 넣어서 돼지고기 초콜렛을 만드는 사업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너도나도 하천 주변에 자전거 도로를 만들고 조경용 돌을 깔아서 공원을 만드는 것을 보고 자전거 도로를 만들었는데 자전거 타는 사람이 아무도 없자 시청 직원들에게 강제로 자전거를 타고 그 길로 출근하라고 하는 바람에 트럭에 자전거를 싣고 일부러 적당한 물가까지 빙 둘러 간 뒤에 다시 자전거로 갈아 타고 직원들이 출퇴근을 하게 만든 곳도 있었다.


아내가 가장 충격을 받은 곳은 논에서 메뚜기를 잡는 것을 축제로 홍보한다고 설치던 곳이었다. 메뚜기를 일부러 길러서 논에다가 풀어 놓고 부모와 같이 놀러 온 아이들에게 잡게 하는 곳이었는데, 메뚜기를 기르는 사업자들에게 주는 돈과, 서울의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데려오기 위해 들이는 버스비와 홍보비가 막대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망한 사업이었다. 그렇지만, 그 군수는 “세계 유일의 곤충 사냥 축제로 대성황을 이루고 있다”고 하면서 하여간 성공하고 있다고 계속 그 축제를 계속했다. 그 덕에 메뚜기 사육하는 업자들은 더 튼튼하고 잘 자라는 메뚜기를 계속 더 만들어 냈고, 나중에는 그 특별히 건강한 메뚜기들이 대발생하여 주변으로 퍼지며 인근 논을 새까맣게 덮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메뚜기떼 병충해가 휩쓰는 일이 생겼고, 결국 일대 벼농사가 대흉작이 되고, 쌀값이 오르고, 음식점들이 문을 닫고, 급식업체들이 도산하고, 도시락을 사려고 애들이 가게 마다 줄을 서는 등등의 일들이 아직도 끊임 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옥인걸은 그보다도 더욱더 멍청해 보이는 최악의 지방 자치 단체장을 찾아 냈다. 옥인걸은 며칠 동안 그 지역의 공공 사업들을 살펴 보았고, 몇 번씩 그곳을 오가며, 차근차근 자신이 무엇을 할 지 조사해 보았다.


조사의 결론이 확신으로 굳어선 날 저녁이었다. 옥인걸은 한참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아내에게 말했다.


"우리 귀농할까?"

"뭐? 뭐라고?"


그러나 옥인걸의 말에, 그녀의 아내는 다시 그 단어를 또 발음하면 지옥에서 다시 만나자는 표정을 지었다.


"나 농사 아무것도 몰라. 그리고 애들도 있는데 갑자기 시골로 어떻게 이사를 가."

"여기 근처에 이십분만 가도 농사 지을 데 많잖아. 멀리 안가도 되는데."

"자기 농사 아무것도 모르잖아. 무슨 갑자기 귀농이야. 어머님, 아버님도 다 서울 사시는데."


아내는 옥인걸의 생각에 찬성하지 않았다. 하기야 옥인걸이 회사를 그만두고 더 이상 돈을 벌어 들이기 보다는 번 돈을 쓰는 쪽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뒤로, 아내는 옥인걸의 생각 대부분을 찬성하고 있지 않았다.


결국 옥인걸은 혼자서 일하기로 했다. 서울에서 북쪽으로 한 두시간 거리 쯤에 있는 시골 마을이 바로 옥인걸이 선택한 바로 그 지역이었다. 옥인걸은 그곳에서 농토를 사들였고, 잠깐씩 혼자 머물 수 있는 가건물을 지었다. 옥인걸은 아내와 자식이 있는 집에서 농장으로 매일 오가며 일을 했다. 가끔 하루나 이틀 정도 농장에 있는 가건물에서 자고 와야할 때도 있었다.


옥인걸이 자리 잡은 그 지역은 유전자 변형 가축화 사업이라는 공공 개발 사업을 하던 곳이었다.


동물 유전자를 조작해 슈퍼 뭐, 슈퍼 어쩌고 하는 동물을 만든다고 떠들던 학자가 한참 인기가 있을 때 그 학자와 함께 벌인 사업이었다. 사실 그 지역의 지방자치단체장은 무슨 사업을 하는 지도 잘 몰랐지만 어쨌거나 그 유명해 보이는 학자와 자주 같이 사진에 실려 뉴스에 보도될 수 있으니, 그것이 즐거워서 사업에 세금을 갖다 부어 준 것이었다.


유전자 변형 가축화 사업은 가축으로 만들기 어려운 동물의 유전자를 조작해서 가축으로 기르기 쉽게 바꾸는 사업이었다. 예를 들어서 좁은 곳에 가두어 기르기 어려운 야생 동물의 유전자를 조작해서 좁은 철창 안에서 오히려 안락함을 느끼도록 성향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원래 깊은 산속을 수백 킬로미터씩 달리면서 살던 동물이라고 해도, 좁은 우리 안에 우글우글하게 가두어 놓고도 기를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동물의 태어날 때부터 가진 습성 자체를 유전자 변형으로 바꾸기 때문에, 그 동물들은 좁은 우리에 갇혀 지내는 것을 즐거워하게 된다.


그 학자는,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자연스러운 원천적인 동물 복지다.”


라고 주장했다. 처음에는 거기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어차피 동물을 인간 좋으라고 붙잡아 기르는 순간, 동물에게는 좋을 리가 없는데, 아예 인간에게 붙잡혀 있으면 행복해 하는 동물을 만들어 내면 인간도 행복하고 동물도 행복하지 않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몇 년만에 유전자 변형 가축화 사업은 망했다.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도 아니었고 자금이 부족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학자의 기술은 훌륭했다. 정치인과 공무원들이 끌어올 수 있는 자금에도 아무런 양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회적인 변화나 경제 상황이 바뀐 것도 망한 이유는 아니었다. 사업이 망한 것은 그 학자가 바람을 피우는 바람에 외도 스캔들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학자는 파렴치해 보이게 되었고, 곧 인기가 없어졌다. 학자의 인기가 없어지고 나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모든 것은 갑자기 무의미한 일처럼 보이게 되었다.


한번 망하는 길로 들어서자, 갑자기


“유전자를 변형해서 자유로운 아생동물을 갇혀 있을 때 행복하게 느끼도록 조작한다니. 사실 이거 정말 역겹고 비인간적인 짓 아니야. 나 처음부터 정말 기분 나쁜 일이라고 생각했어.”


라고 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많이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업 상황은 점점 더 악화 되었고, 유전자 변형 가축화 사업을 받아서 하던 축산 농가들도 다들 동물 기르는 것을 포기하려고 했다.


사업 중에서 그나마 가장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이 여우 농장 사업이었다. 모피로 쓰는 여우 가죽과 털을 얻기 위해 여우를 기르는 것이다. 철사로 만든 철창을 기둥 위에 올려 놓은 것이 여우 한 마리를 집어 넣는 공간이었다. 앞뒤로 한 발자국 반씩만 움직일 수 있는 좁은 철창은 가격이 3만 3천원 밖에 안했고, 거기에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그 철창에 갇혀 있으면서도 조금도 괴로운 줄을 모르는 새끼 여우는 무료로 나눠 준 것이었다.


그렇지만 진짜 동물 모피를 잔인하다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 났던데다가, 인조 모피의 질과 멋은 나날이 더 좋아졌다. 그러니 시험 삼아 한 두 마리씩 기르는 국산 사육 여우를 굳이 모피 얻겠다고 사가는 사람도 없었다. 아예 여우를 잡아 가죽을 벗기는 도축 업자도 없었다. 그러니 여우 가죽을 벗긴다고 여우를 여우 도살장이 있는 중국으로 보내야 할 판이었는데, 그러면 여우를 배에 태워서 서해를 건내 주는 값이 가죽 값으로 버는 돈보다 더 비쌌다. 그런 와중에 학자가 몰락하자, 다들 여우 키우는 것을 포기하고, 여우를 안락사시킬 방법이나 찾는 판이었다.


옥인걸은 그 상황에서 다들 안하겠다고, 죽여 없애겠다고, 버리려는 유전자 조작 여우를 전국에서 사들였다. 처음부터 철창에 갇혀 있는 것을 행복하게 여겨서 기운 없이 늘어져 있다가 주인이 사료를 갖다 들이밀면 그저 꾸역꾸역 먹기만 하는 게 삶의 전부인 생물이었다. 옥인걸은 그와 같이 무의미한 생명체가 겉보기에는 그와 같이 아름다운 빛깔의 털을 갖고 있다는 것을 신기하게 여기기도 하였다.


옥인걸은 스무 개 정도의 철창과 그 철창에 들어 있는 여우들을 사 모았다. 옥인걸의 농장에는 여우가 들어 있는 철창들이 줄을 맞추어 늘어서 있었다. 여우들은 벌집 속에 틀어 박혀 있는 벌들이나 수산시장에 얼어 있는 채로 쌓여 있는 죽은 물고기들처럼, 착착 쌓여 있었고 찬바람이 불 때마다 꿈틀거렸다. 옥인걸은 그 광경을 자랑스럽게 지켜보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섭다는 생각도 했다. 그렇지만 과연 옥인걸의 생각이 들어 맞아, 공무원들이 옥인걸의 농장에 찾아 오자 옥인걸은 그저 기쁘기만 했다. 정말 돈을 벌 수 있겠구나 싶어서 기쁘기도 했고, 이번에도 짐작이 들어 맞았다는 것 때문에 더 기뻤다.


당국에서는 무슨 수로든 “유전자 변형 가축화 사업이 성공 했다”는 결론을 내려서 보여 주고 싶어 했다. 옥인걸도, 당국의 직원들도 사실은 이미 사업은 망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옥인걸에 앞서서 사업에 손을 댔던 사람도, 감사 기관 쪽도, 다른 모든 세상 사람들도, 심지어는 아마도 저 가축들이 되다만 여우들까지도 이 사업은 망한 사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이 사업에는 벌써 너무 많은 돈이 들어가 있었다. “그거 다 우리가 멍청해서 날린 겁니다”라고 실토한 뒤에 다들 그 죄를 덮어 쓸 수는 없다고들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게 아니라면, 하여간 어쨌거나 성공한 점이 있다는 척 해야 했다. “그래도 이러저러한 면에서 보면 사업이 성공적인 부분이 있을 수도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판단된다는 결론이 가능성이 있다” 정도의 딱 집어 던지고 싶은 보고서를 꾸며야 하는 것이었다.


당국에서 분주하게 사람들이 찾아 와 옥인걸을 만나고 나서, 옥인걸은 이제 돈을 얼마나 더 벌 수 있을 지 상상해 보았다. 당국에서는 옥인걸에게 여우를 기를 자금을 지원해 주고, 여우를 다 기르고 나면, 한 마리에 돈을 얼마씩 쳐 줄지도 이야기하고 갔다. 그러니까 여우를 기르는 것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돈은 주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하여간 버텼다고 또 돈을 준다는 것이었다. 옥인걸은 해가 지는 저녁 찬바람 부는 흰 눈이 덜 녹은 들판에 서서, 눈앞에 있는 철창 20개와 그 안에 있는 짐승 20마리의 감긴 눈 20쌍을 쳐다 보았다. 바람이 불 때 마다 여우 울음 소리와 철창이 흔들리며 찰캉대는 소리가 들렸다.


옥인걸은 뿌듯했다. 그는 기록 대장을 가져와 한 장 한 장 넘겨 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동시에 철창 주변을 걸어 다니며 자기가 사 모은 여우들을 돌아 보았다. 한 두 마리 병든 여우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건강했다. 정상적으로 기르는 것이었다면 세 마리 정도는 지금쯤 도살해야 하는 나이의 여우였다. 하지만 돈을 주는 한은 하염 없이 그냥 계속 여우들을 철창 안에 넣어 두는 것이 옥인걸의 수법이었다. 그에게는 그렇게 그냥 두는 것이 정상적인 것이었다. 옥인걸이 장부의 숫자와 철창 속의 여우를 보고, 한 마리 한 마리 확인을 할 때마다 사료를 주었다.


그런데 철창 마지막에 장부에 없는 여우가 한 마리 있었다. 그 여우는 온통 하얀 색이었다. 그 흰 여우는 옥인걸이 사들였다는 기록에 나와 있지 않았다. 아직 어린 여우인 것을 보면, 새로 태어난 새끼인데 제대로 여우를 관리하지 않던 지난번 주인이 대충 끼워 팔았던 것일 수도 있었다. 옥인걸은 흰 여우를 좀 더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 여우를 다룰 때 쓰는 막대로 여우를 건드려 보았다.


그런데 막대를 철창 안으로 집어 넣자, 그 흰 여우는 철창이 흔들린 틈을 타서 재빨리 철창 바깥으로 헤집고 나왔다. 원래 여우를 넣어둘 철창으로 정확히 완성해 놓은 곳이 아닌 빈 철창이었기 때문에, 잠금 장치나 철망이 헐거운 부분이 있었는데, 그걸 막대가 건드려 철창이 벌어졌던 것이다. 흰 여우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옥인걸은 로봇 부품 장사를 하며 평생 도시에서 살던 사람이었으므로, 철창 밖으로 나온 흰 여우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옥인걸은 막대를 휘두르며 뒷걸음질쳐 피했다. 흰 여우도 재빨리 달려 옥인걸로부터 멀어졌다. 그런데 흰 여우는 그대로 도망치지 않았다. 흰 여우는 계속 빙빙 돌며 철창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옥인걸은 철창 안에서 오히려 안락해 하는 것이 유전자 변형 가축이라더니, 이 흰 여우도 그 습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주변을 돌던 흰 여우는 잠긴 다른 철창 속으로 몇 번 다시 들어 가려고도 했다. 그렇지만 성공할 수 없었다. 흰 여우는 그러자 결국 옥인걸이 머무는 가건물 속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옥인걸은 혹시나 여우에게 공격 당할까봐 살금살금 가건물로 다가 갔다. 십 몇 분이 지나서야 옥인걸은 가건물 안쪽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흰 여우는 가건물에서 가장 따뜻한 전기 담요 위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 앞에는 옥인걸의 아내가 농장으로 가는 옥인걸에게 준 따뜻한 커피가 있었다. 커피 위에는 달콤한 생크림이 올려져 있었는데, 흰 여우는 따뜻하게 웅크린 채로 그것을 핥아 먹고 있었다.


옥인걸은 소리를 지르며 가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막대를 휘둘렀다. 흰 여우는 놀라서 다시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균형 잡는 것이 절묘해서였는지, 여우는 커피 컵을 발로 딛고 뛰어 나갔는데도 한 방울도 흘린 커피가 없었다. 옥인걸은 여우가 들어 오지 못하도록 방비를 한 뒤에, 다시 철창이 있는 곳으로 가서 빈 철창 하나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흰 여우는 철창 안에 오히려 들어 가고 싶어 하니까, 이렇게 철창을 열어 두면 언젠가는 제발로 들어갈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옥인걸이 철창 주변을 걸어 다닐 때, 수십 마리의 갇힌 여우들은 옥인걸을 일제히 바라 보았다.


옥인걸은 그날 밤을 가건물에서 보냈다. 잠이 오지 않아 옥인걸은 흰 여우에 대해서 찾아 보았다. 색소 돌연변이로 태어나는 동물인 것 같았다. 유전자 변형 동물에서는 좀 더 자주 생긴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다. 아마 여우들 사이에서 우연히 태어난 새끼가 그 사이에서 자라난 것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던 중에 옥인걸은 흰 여우에 대한 옛 이야기를 찾아 보게 되기도 했다. 서기 659년에는 백제 왕궁에 흰 여우가 들어 오더니, 정승이 앉는 책상에 흰 여우가 앉았다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18세기의 “한죽당섭필”이라는 책에는 밤마다 몰래 사람 술을 핥아 먹던 흰 여우를 붙잡아 협박 했더니, 흰 여우가 책을 한 권 숨겨 놓은 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 책을 보고 거기에 나와 있는 도술을 익힌 사람이 바로 전우치라는 이야기가 있기도 했다. 옥인걸은 모르기는 해도, 자신도 여우 덕택으로 한 밑천 돈을 벌 수 있게 되었으니, 흰 여우가 재주를 부리기는 부린다는 생각도 했다.


다음날 옥인걸이 일어나 보니, 과연 흰 여우는 철창 안으로 돌아 와 있었다.


옥인걸은 철창 문을 걸어 잠가서 다른 20마리의 여우들과 같이 흰 여우도 가두었다. 흰 여우는 옥인걸은 빤히 바라 보았는데, 옥인걸을 노려 보는 것 같기도 했고, 뭐라고 말을 하려는 것 같기도 했다. 옥인걸은 이상해서 흰 여우를 가만 쳐다 보다가, 그 여우가 철창 구석에 둥우리 같은 것을 만드느라 나뭇가지며 지푸라기 잡다한 쓰레기들을 모아 놓은 것을 보았다. 옥인걸은 막대기로 찔러 그것들을 흩어 놓았다. 다른 철창에는 그런 둥우리 같은 것들은 없었다.


살펴 보니, 여우가 어디에서 집어 왔는지, 그 둥우리처럼 깔고 있었던 것 중에는 시내에 있는 클럽이며 유흥업소 전단지들이 찢어진 것들도 있었다. 옥인걸은 전단지에 나와 있는 여자의 모습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서, 괜히 그 쓰레기를 오래 들여다 보았다.


그날 오후에 옥인걸은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그렇지만 재선을 위해 선거운동을 해야 하는 지방 자치 단체장이 여우 농장에 온다는 연락이 왔다. 옥인걸은 여우 철창 옆에서 하루를 보내야 했다. 옥인걸은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 가게 되었다.


옥인걸은 시내에 머물면서 간단히 저녁이나 먹고 가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저녁을 먹기 위해서 거리를 걷다가 그는 쿵쿵 둥둥 하는 음악 소리를 들었고, 붉고 푸른 빛의 간판들을 보았다.


작은 도시의 시내였지만 그날 따라 젊은 사람들이 모인 편이어서 거리는 소란스러웠고, 불 밝힌 가게들 마다 술잔 부딛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옥인걸은 아침에 보았던 전단지 생각이 났다. 옥인걸은 간단히 목만 축이고 가겠다는 생각으로 “호프면 호프? 클럽이면 클럽?” 이라고 과도하게 물음표를 많이 써 놓은 포스터로 선전하고 있는 성격이 애매한 음악 크게 틀어 놓은 가게로 걸어 내려 갔다.


옥인걸은 그곳에서 확실히 간단히 목을 축이는 데는 성공했다. 그리고 나서도 그는 한동안 그 가게를 떠나지 않았다. 옥인걸은 자신이 얼마나 나이가 들었는지, 아름다운 모습으로 움직이는 나이 어린 사람들을 보는 자신의 표정이 얼마나 궁핍해 보이는 지, 그런 고민도 잊은 채 주변을 구경했다. 처음에는 주눅이 들어 있었지만, 쾌활한 목소리로 그에게 술을 권하는 바텐더에게 세 잔 째 술을 사 마시고 나면서, 그런 것도 사라져 버렸다.


옥인걸은 주위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춤을 췄고, 반쯤은 비웃고 반쯤은 진심으로 웃으며 옥인걸에게 손뼉을 쳐 주는 아이들 사이에서 재롱을 부리듯이 같이 놀기도 했다.


“여기 사람 아니시죠?”


흰 옷을 입은 젊은 여자 한 명이 옥인걸에게 말을 걸었다. 옥인걸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런 외딴 곳으로 또다른 도전을 찾아 온 사나이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옥인걸은 스스로 멋진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싶었다. 그 순간 만큼은 옥인걸은 자기에게 말을 건 사람이 여자라는 것 보다는, 젊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고 누구에게 말하고 싶기도 했다. 그 모든 것들이 다 멍청하게 귀에 울리고 있는 음악 소리만큼 무의미했지만.


그녀는 옥인걸에게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었고, 옥인걸은 “농장주”라고 자신이 적혀 있는 명함을 내밀었다. 그녀는 즐거운 농담으로 대답했다. 옥인걸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제대로 알아 듣지 못했지만, 농담을 하고 웃는 그녀에게 알아 들은 척하며 웃었다. 옥인걸은 그녀와 함께 있는 동안 그녀의 웃는 소리와 생동감 있는 몸짓을 한참 구경했고, 사실 그녀는 생각만큼 젊지는 않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지금 옥인걸의 가건물로 함께 가 보자는 이야기를 했을 때, 옥인걸이 흥분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차로 먼저 떠났고, 옥인걸이 뒤를 따라 자신의 차를 운전해서 다시 여우 농장으로 돌아 갔다. 쭉  뻗은 도로는 운전하기는 쉬웠다. 그렇지만 머릿 속에서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있고, 지금이 몇 시쯤이고 결국 언제가 되면 어디에 가야 하는 지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잊기를 반복했다.


옥인걸이 농장에 도착했을 때, 옥인걸은 헤드라이트에 비친 번쩍거리는 짐승들의 안광을 보고 갑자기 섬뜩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아직 속도가 줄지 않은 옥인걸의 차 옆으로 빠르게 어떤 하얀 것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 하얀 것은 차 앞쪽을 지쳐 문쪽으로 튀어 가는 듯 했는데, 어떻게 보면 바로 그 흰 여우 같기도 했다. 그런데 그 여우가 뒷 발을 딛고 튀어 오르듯이 움직이면서 두 발로 선 모습처럼 되는 바람에 그런 흰 빛이 보였나 싶었다.


그런데 지나가는 그 흰 빛에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정면을 보자, 바로 눈 앞에 하얀 옷을 입은 사람 같은 것이 뛰어 나오고 있었다. 옥인걸은 그것이 바로 자기가 따라 가고 있던 그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운전하다가 한눈을 판 옥인걸이 그녀를 차로 치려는 것 같았다. 옥인걸은 급하게 차를 세우며 핸들을 꺽었다. 눈길에 차가 휘청거렸다. 차는 옆으로 넘어진 채로 미끄러져 그대로 앞으로 나갔다. 옥인걸의 눈앞에 눈길 바닥과 빙글거리며 돌아 가는 땅과 상하좌우에서 튀어 나오는 구부러진 자동차 철판들이 보였다.


옥인걸의 차는 그대로 여우들을 가두어 놓은 철창의 옆면을 부수고 지나갔다. 그리고 연결된 철창들이 같이 옆으로 넘어지면서 철창의 아래 판이 뜯겨져 나왔다. 여우들은 겁을 먹고 소리를 내며 나뒹굴었다. 그때 여우 한 마리가 멀리서 소리를 냈다. 옥인걸은 통증과 공포로 정신이 가물거렸다. 정확히 볼 수는 없었다. 처음 소리를 냈던 여우는 호루라기 소리 같기도 하고 새 울음 소리 같기도 하고 사람 우는 소리 같기도 한 이상한 울음을 계속 울었다. 그 소리에 다른 여우들이 일어 서서 날뛰기 시작했다.


소방대와 견인차들이 와서 뒤집힌 차에서 옥인걸을 꺼냈을 때, 이미 우리에 남아 있던 여우들은 한 마리도 없었다. 병원으로 실려 가면서, 옥인걸이 물었다.


“ 저 보다 앞서서 갔던 여자가 한 명 있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런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애초에 가게를 나왔을 때 옥인걸을 실컷 놀려 먹은 그녀는 그대로 다른 곳으로 가버린 것 같았다.


옥인걸은 병실에 입원해 있으면서 자신의 사고를 전하는 뉴스를 보았다. 전국에 흩어져 있던 거의 모든 사육 여우들을 한 곳에 모여 있게 했는데, 이번 사고로 그 많은 여우들이 모두 다 탈출 했다고 전했다. 그리고 그 여우들을 잡기 위해서 사냥꾼들이 모두 이 북쪽 도시로 몰려 와서 겨울 산을 뒤지고 다니면서 20마리의 여우 떼를 찾아 다닌다는 소식도 들었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하기 힘든 여우 사냥을 한다는 생각에 전국의 사냥꾼들이 몰려 들었고, 총과 사냥개를 서로에게 자랑하는 그 사냥꾼들 때문에 20마리의 여우들이 20개의 여우 가죽으로 변하는 데는 며칠이 걸리지 않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로부터 다만 며칠이 지났을 때, 로봇 관절 베어링 안전 관리 법안을 만드는 데 앞장섰던 국회의원이 이곳을 찾아 와서, 선거를 준비하던 지방자치단체장을 지원 유세 하는 행사를 했다. 두 사람은 북쪽 경계에 있는 군 부대를 방문했다. 그런데 그 때문에 병사들의 신경이 엉뚱한 곳으로 쏠린 틈을 타서, 여우들은 보름달이 뜬 밤 다시 한 번 철망을 넘었다. 20 마리의 여우들은 마치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것처럼, 휴전선 철책을 넘어 단숨에 비무장지대로 모두 도망쳤다. 감시 카메라에 잡힌 영상에는 전국 각지 태생이었던 그 여우들이 쌓인 흰 눈의 무게 때문에 허술해진 철책의 한 지점을 찾아 비무장지대로 뛰어 드는 그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흰 눈에 비치는 달빛과 밟을 때마다 사각거리며 눈가루를 날리는 여우의 털이 또렷하게 보였다.


옥인걸은 그 여우떼들의 맨 앞에 흰 여우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사고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아직 부러진 뼈와 늘어난 힘줄 들 때문에 온 몸에서 고통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웃었다. 마침내 이 모든 것들이 어떠한 큰 계시의 일부분임을 깨달았다는 생각에 옥인걸의 웃음은 끊임 없이 이어졌다.


수십만의 인간들이 벼르고 있지만 결코 다가 올 수 없는 거대한 철망 너머로 도망친, 그 여우들은 오늘도 여유롭게 아늑함을 즐기고 있다.


- 2014년, 역삼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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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 No Profile
    신나라 15.02.01 09:43 댓글
    '마녀의 피'처럼, 오랜만에 '도무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그리된 이야기'인 것 같아서 반갑습니다.

    다른 얘기지만, 오클랜드의 "돈세탁업자"도 소위 '통 속의 뇌'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 신나라님께
    No Profile
    곽재식 15.02.01 22:43 댓글

    "마녀의 피"를 기억하시는군요. "마녀의 피"는 도입부와 중간 정도를 잘 생각했는데 결말이 마땅한 게 없어서 적당히 잘라 맞춘 것이어서 아쉬움을 갖고 있는 소설이었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결말은 처음부터 생각했던 것인데 좋은 도입부와 전개가 마땅한 것이 없어서 언제고 쓰자고 생각해 뒀던 것을 꺼내와서 써본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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