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crazyjam 코끼리와 나

2014.12.31 23:0212.31

코끼리와 나

 

 

 

도시와 도시 사이, 아무 것도 없이 철로만 놓여있는 곳에서는 그다지 볼 것이 없다. 이따금 들개 떼가 나타나 기차와 나란히 달리기도 하지만 금방 뒤쳐져 시야에서 사라지고 만다.

길게 하품을 한 찰나에 기차가 크게 흔들려 그만 혀를 깨물 뻔 했다. 옆에 앉은 메메 할멈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옛날에는 이렇지 않았지. 모든 것이 매끄럽고 부드러웠어. 쇳덩어리 기차마저도.”

메메 할멈의 무릎 위에 있던 책이 떨어져있었다. 책을 할멈의 무릎으로 되돌려놓기 전에 잠깐 훑어보았지만, 그림도 없고 아주 작은 글자들만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글을 읽지 못하는 나에게는 의미가 없는 책이었다.

책이 무릎 위로 돌아오자 할멈은 주름지고 앙상한 손으로 책장을 쓰다듬었다. 어차피 눈이 멀어 읽지도 못하면서 왜 그렇게 책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할멈이 투덜거리는 소리는 작아졌지만 이제 푸념으로 바뀌어 있었다.

“재앙이었지. 모든 나라와 세력들은 서로를 죽이고 괴롭히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어. 좀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또 전쟁을 일으키고, 또 일으켰지. 신이 이 세상을 지긋지긋하게 여겨서 운석을 내던지지 않았다면 아직도 싸우고 있을지도 몰라…….”

메메 할멈의 넋두리는 한참 더 이어질 예정이었다. 몇 번이나 들은 이야기에 질려버린 나는 할멈의 앙상한 다리를 타고 넘어 기차 통로로 나갔다.

“곧 도착할 것 같으니까 동물들이 잘 있는지 보고 올게.”

할멈은 중얼거리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앞을 볼 수 없는 허연 두 눈이 나를 향했다.

“이번에 도착하는 도시는 어디냐?”

“제8.”

그래……. 내 기억이 맞는다면 너와 네 누이가 우리 서커스에 합류한 곳이구나.”

“응.”

할멈은 최근의 일은 깜빡깜빡 잊어버리면서도 지나간 일에 대한 기억력은 아주 뛰어나다. 100살도 넘은 할멈치고는 아주 훌륭하지. 너 같은 멍청이보다 백배는 더 쓸모 있다. 이따금 할멈의 기억력에 도움을 받을 때마다 단장은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내가 멍청한 것은 사실이다. 나는 줄을 타지 못하고 남을 웃기지도 못하고 마술 같은 건 엄두도 못 내는데다 6년 전의 일은 무엇 하나 기억하지 못하니까. 하지만 동물들은 잘 돌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이곳, ‘닥터 허스트의 잊혀진 환상의 서커스에서 하는 일이다.

휘청거리면서 두 개의 객차, 하나의 화물차를 지나 겨우 동물 칸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좁은 통로에 들어서자마자 코끼리가 창살 너머로 긴 코를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코끼리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은 누나가 머리를 쓰다듬는 것과는 아주 달랐다. 누나는 슬픈 표정을 하고서 쓰다듬지만, 코끼리는 순수하게 나를 반기면서 애정을 담아 쓰다듬는다.

나는 코끼리가 좋았다. 서커스단의 그 어떤 사람보다, 어떤 동물보다 좋았다. 사실은 누나보다 코끼리가 더 좋았다. 내가 코끼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코끼리가 하는 말을 모두 알아듣는 것은 우리 서커스단에서 단장과 나 뿐이다.

- 도착은 아직 멀었어?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가면 제8시에 도착해.”

- 8시인가. 그 곳에서 너와 처음 만났지.”

“메메 할멈도 그 이야기를 했어. 매년 제8시에 올 때마다 그 이야기를 해.”

나는 사료를 한줌 코끼리에게 내주고 다른 동물들을 살폈다. 곰은 늘어져서 자고 있었고, 서커스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말은 기차 여행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토라져있었다. 물개는 멀미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물개의 자세를 편하게 고쳐주었다.

객차로 돌아가면 도착할 때까지 할멈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이다. 옛날 이야기든, 전쟁 이야기든. 어느 쪽이든 질리도록 들은 이야기다. 나는 기차가 도착할 때까지 코끼리와 잡담을 나누기로 했다. 사료 통 뚜껑 위에 걸터앉아 마주 보자 코끼리의 작은 눈이 기쁘게 반짝였다.

- 어느새 6년이나 지났구나. 처음 봤을 때의 너는 아주 작았는데.

“코끼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

주름진 피부와 긴 코, 나를 바라보면서 웃는 작고 검은 눈은 내 기억 속에 등장하는 첫 번째 얼굴이다.

6년 전에 나는 일곱 살이었고, 누나와 함께 제8시에 도착했다. 누나는 나보다 여덟 살이 많았지만 어린 나를 데리고 산맥을 넘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8시의 주민들은 전쟁이 이어지고 있던 산맥 너머에서 온 우리들을 피했다. 고열로 정신을 잃은 나를 업고 있는 누나를 받아준 것은 서커스 천막뿐이었다. 며칠만 머물다 떠나라는 단장에게 누나는 춤을 출 수 있다면서 서커스와 함께 가겠다고 버텼다. 서커스의 단원들은 나와 누나를 받아주긴 했지만 같은 곳에서 머무는 것은 꺼림칙해했다. 그래서 나와 누나는 동물들의 천막에서 머물러야 했다. 이건 모두 들은 이야기다.

내 첫 기억은 화려한 배색이지만 얼룩이 있는 천막 지붕이다. 그 다음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코끼리의 얼굴. 겨우 열이 내린 나는 동물 천막에서 깨어났고, 그 이전의 기억은 하나도 떠올릴 수 없었다.

천막 구석 자리에서 앓는 동안 내내 나를 지켜준 것도, 이후에 나를 돌보아준 것도, 내가 처음 대화를 나눈 것도 코끼리다. 그리고 나와 누나를 서커스단에 받아들이도록 단장인 닥터 허스트를 설득해준 것도 코끼리였다. 언젠가 단장은 그 이야기를 해주며 혀를 찼다. 코끼리 녀석도 늙어서 그런지 어린애에게는 무르단 말이야. 단장은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그 이후로 6년이 지났다. 누나는 줄을 타는 곡예사가 되었고, 아무런 재주도 없는 나는 동물을 돌보는 일을 하면서 지내고 있다. 닥터 허스트의 잊혀진 환상의 서커스에서.

 

 

 

서커스는 봄이 오면 제1시에서 첫 공연을 한다. 그리고 여덟 도시를 차례로 지나오면서 순회공연을 한다. 가을에 도착하는 제8시는 그 해의 마지막 공연을 하는 곳이다. 8시의 가을 축제와 함께 열리는 서커스 공연을 마치고 나면 제1시의 교외에 있는 숙소로 돌아가 긴 겨울 동안을 훈련과 휴가로 보내게 된다.

한 해의 마지막 공연을 앞둔 상황이라 다들 지쳐 있었지만, 앞으로의 휴가를 생각해서 그런지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이 평소보다 빠르게 끝났다. 8시의 가을 축제까지 이틀이나 남았는데도 공연이 열릴 대천막의 무대와 객석, 무대 장치들은 모두 완성되었다. 또한 공연자들이 머물 숙소와 동물들을 위한 천막, 서커스장 주변을 둘러쌀 조립식 울타리까지도. 남은 것은 카드 점을 보는 메메 할멈이나 종이 마술을 하는 보린 아저씨 같은 사람이 장사를 할 작은 천막 몇 개 정도뿐이었다.

동물들에게 사료를 주고, 몸을 닦아주고 있을 때였다. 동물 천막에 문 대신 늘어뜨려놓은 천이 젖혀지고 서커스단의 단장인 닥터 허스트가 들어왔다. 단장의 뒤를 따르는 남자는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4년 전에 물개를, 작년에는 말을 데려온 남자였다. 단장은 그를 사냥꾼이라고 불렀었다.

단장은 천막 안을 둘러보더니 언제나 들고 다니는 짧은 지팡이로 가장 구석진 자리를 가리켰다.

“저기가 좋겠군. 꼬마야, 저 자리를 정리해라.”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더러운 천으로 휘감은 길쭉한 상자를 들쳐 멘 두 남자가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서둘러 단장이 가리킨 구석 자리에 있는 잡동사니들을 치웠다. 남자들은 상자를 그 자리에 내려놓고는 나가버렸다.

“이건 뭐에요, 단장님?”

내가 묻는 것과 동시에 천으로 덮인 상자 안에서 긴 울음 소리가 흘러 나왔다. 슬픔보다는 분노에 찬 울음 소리였다.

단장은 지팡이 끝으로 천을 들어올려 걷었다. 길쭉한 상자로 보였던 것은 조잡하게 만든 우리였다. 지붕이 낮은 우리 안에는 처음 보는 동물이 납작 웅크리고 있었다. 동물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화를 내며 이를 드러내 보였다. 예쁜 줄무늬 털과 무척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진 동물이었다.

단장은 낯선 동물이 들어있는 우리를 지팡이로 툭툭 내리치고는, 지팡이를 들어 나를 가리켰다.

“이건 호랑이다. 이제 네가 돌보아야 할 동물이야. 이 짐승에게 자신의 처지를 알려주고 고분고분해질 때까지 돌봐주도록 해라.”

- 아니야! 나는 동물 같은 게 아니라고!

단장의 말에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호랑이라는 동물이 먼저 외쳤다. 나는 깜짝 놀랐지만 단장과 사냥꾼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단장은 사냥꾼에게 돌아섰다.

“가급적이면 제1시에 돌아간 다음에 받았으면 했지만 그건 곤란한가?”

“최근에 그 성가신 놈들이 제8시에 나타났다고 하더군요. 저는 혼자니까 귀찮아질 수도 있거든요. 빨리 손을 털고 이동하려고요. 단장님도 조심하십쇼.”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사례금은 내 숙소에서 줄 테니 나가지.”

단장은 사냥꾼을 데리고 천막을 나갔다.

나는 코끼리를 바라보고, 다시 호랑이라는 동물을 보았다. 동물들이 뭘 원하는지 정도는 금방 알 수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명확하게 말을 알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코끼리 외에는 호랑이가 처음이었다.

내가 지켜보는 동안 호랑이는 낮고 좁은 우리 안에 웅크린 채로 창살을 흔들기도 하고 벽에 머리를 들이받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이따금 나를 향해 이를 드러내면서 으르렁거렸다. 이제 보니 앞발에 달린 발톱도 무시무시해 보였다. 하지만 호랑이는 확실히 굶주려 있었다. 갈비뼈가 다 드러나 보일 정도로 마른 옆구리와 움푹 패여 들어간 배를 보면 확실했다.

나는 사료와 물을 가져왔지만 호랑이 우리에 손을 넣을 엄두는 나지 않았다. 나는 호랑이가 창살 틈으로 앞발을 뻗으면 겨우 닿을 자리에 사료 그릇과 물을 내려놓고 물러났다. 호랑이는 움직임을 멈추고 사료 그릇을 보았지만 경계하듯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호랑이야, 배고프지? 어서 먹어. 모자라면 더 줄 테니까.”

최대한 다정하게 말을 걸어보았지만 호랑이는 다시 이를 드러내며 화를 내더니 앞발을 뻗어 사료 그릇을 뒤엎어버렸다. 호랑이는 섬뜩한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다시 우리 벽을 들이받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겁을 먹은 말이 발을 구르기 시작하고, 언제나 느긋한 곰도 잠에서 깨어나서는 낑낑거리기 시작했다.

겁을 먹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물러나서 코끼리 우리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코끼리가 코를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고 보니 동물들을 임시 천막에서 지금의 천막으로 옮기느라 아침을 굶었던 것이 생각났다.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아침 식사로 받은 빵을 꺼냈다. 그때 코끼리의 코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주름진 긴 코가 가리키는 곳은 호랑이 우리였다. 호랑이는 내 손에 들린 빵을 정신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호랑이가 입을 열었다.

- , 꼬마. 그 빵 이리 가져와.

“…왜? 이건 내 아침밥이야.”

- 먹을 걸 주려면 그런걸 내놔야 할 거 아냐!

“동물에게 사람이 먹는 음식을 주면 안돼.”

- 동물 동물 하지 마! 난 사람이야!

호랑이는 다시 으르렁거렸지만 아까보다는 소리가 작았다. 그 동안에도 호랑이의 시선은 빵에 고정되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입가에는 침이 뚝뚝 흐를 것만 같았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일어났다. 그리고 호랑이 우리 앞에 빵을 던져주었다. 호랑이는 허겁지겁 앞발을 뻗어 빵을 움켜잡고는 입에 쑤셔 넣었다.

“천천히 먹어. 그렇게 급히 먹으면 안 돼.”

내 말을 들은 것인지 목이 막혀서인지 모르겠지만 호랑이는 먹는 속도를 조금 늦추었다. 호랑이는 빵을 씹으면서 투덜거렸다. 씨발, 주려면 곱게 주지 땅바닥에 던져 주는 건 또 뭐야. 누굴 개새끼로 아나. 빵 부스러기와 함께 한두 마디씩 튀어 나온 말은 그렇게 들렸다.

동물에게 사람 먹는 음식을 준 걸 들키면 혼날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호랑이와 친해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코끼리도 내 생각과 같을까 하고 돌아보았다. 코끼리의 주름진 얼굴에 떠오른 것은 곤란해하는 표정 같았다. 코끼리는 내 시선을 눈치채자 고개를 돌려버렸다.

 

 

 

8시의 가을축제가 시작되면서 닥터 허스트의 잊혀진 환상의 서커스도 막을 올렸다. 첫 공연을 앞두고 나는 정신 없이 바빴다. 동물들을 깨끗이 씻어주고 꾸며주어야 했다. 코끼리에게 목장식을 달아주는 것을 끝으로 겨우 준비가 끝나자 단원들은 공연이 열릴 대천막 뒤의 대기실로 동물들을 데려갔다.

사료통 뚜껑 위에 앉아 겨우 숨을 돌리다 보니 오늘은 호랑이가 온종일 조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도착한 날부터 이틀이 지나는 동안 호랑이는 사료에 절대 손대지 않았다. 나는 호랑이를 굶기지 않기 위해 내 식사를 나누어주어야 했다. 그래도 호랑이는 나를 밥을 주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된 것 같았다. 이제 내가 우리에 다가가도 으르렁거리거나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앞발을 뻗어 위협하는 일은 없어졌다.

나는 호랑이 우리를 덮어둔 천을 걷어 안을 살폈다. 호랑이는 우리 뒤쪽 벽에 몸을 찰싹 붙인 채 웅크리고 있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 언제까지 여기에 가둬둘 생각이야? 살이 잔뜩 찔 때까지?

“답답하지? 하지만 제1시로 돌아갈 때까지는 거기 있어야 할거야.”

- 1시라는 곳에 그공장이라는 게 있는 건가?

“공장?”

- 뭘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우리 같은 사람들은 붙잡히면 사료 공장이라는 데로 끌려가서 다진 고기가 된다고 하던데!

잠시 생각을 했지만 호랑이가 하는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멍청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호랑이는 겁을 먹고 있는 것 같았고, 무언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네가 하는 말이 무슨 얘기인지 잘 모르겠어. 그런데 너는 공장으로 가게 되지는 않을 거야. 우리는 서커스단이야. 이번 공연을 마치면 제1시의 서커스단 숙소로 돌아갈 거야. 아마 사일러스 영감이 겨울 동안 너한테 여러 가지 재주를 가르치겠지.”

공장으로 가게 되지 않을 거라는 말에 호랑이는 조금 안심한 것 같았지만, 이어지는 내 설명에는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 서커스가 뭐야?

“서커스는 아주 멋진 거야! 사람들에게 신기한 마술을 보여주거나 높은 데에 매달아놓은 줄 위에서 곡예를 보여주는 거야. 그리고 동물들이 공을 굴리거나 재주를 넘기도 하고, 광대 아저씨들이 웃기는 춤을 추는 거야. 그러면 사람들이 많이 웃고 즐거워해.”

- 뭐야 그게. 사람들을 웃기라고 나를 잡아왔다는 거야?

서커스의 즐거움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지만 호랑이는 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도 했다는 것처럼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몇 마디 더 말을 걸어보았지만 호랑이는 아주 잠깐 고개를 들어 나를 향해 이를 드러내고 위협하고는 앞발 사이에 머리를 묻어버렸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나는 동물 천막을 나왔다. 공연이 시작된 대천막에서는 환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메메 할멈의 카드 점 천막이나 수정 구슬로 사람의 비밀을 읽는 메이렌 아줌마의 천막, 종이 마술의 보린 아저씨 천막 앞에도 줄이 늘어서 있었다. 사람들의 즐거운 웃음 소리를 듣고 있으니 어쩐지 속이 상했다. 호랑이는 서커스가 뭔지도 모르면서 왜 화를 내는 걸까. 사람들이 이렇게나 웃고 즐거워하는데.

나는 대천막으로 향했다. 매년 겨울 동안 연습하는 것을 질리게 보고, 8년간 서커스를 따라다니면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았지만 역시 서커스는 멋지다. 모두가 화려한 옷을 입고 눈부시게 웃으면서 가진 재주를 보인다. 사람들은 그 재주에 감탄하고 놀라고 웃는다. 좋은 일이다.

대천막 안은 가득 찬 관객들의 열기로 후끈했다. 좌석은 물론이고, 통로에도 바닥에 앉아 구경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는 대천막 입구 안쪽에 붙어 서서 무대를 보았다.

무대에서는 광대 3인조가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고 있었다. 사람들은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웃어댔다. 지난 겨울 연습기간 동안에 새로 구상한 춤은 대성공이었다. 광대들이 서로를 밀치고 넘어지면서 무대에서 퇴장할 때까지 지켜보는 동안 점점 기분이 들떴다. 호랑이도 언젠가 알게 될 거다. 겨울 동안 조련사 영감에게 받는 훈련은 힘들겠지만 분명 공연에 참여하게 되면 이게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거다.

광대들의 춤 다음은 코끼리의 곡예 순서다. 호랑이를 혼자 두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코끼리의 무대까지만 보고 돌아가기로 했다. 내가 달아준 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코끼리가 미녀와 함께 나타나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코끼리는 긴 코를 들어 사람들의 환호에 답례를 했다.

코끼리가 곡예의 첫 순서로 알록달록한 공을 코로 잡아 머리 위로 들어올렸을 때였다. 통로에 앉아있던 남자 하나가 벌떡 일어났다. 시야가 가려진 사람들이 그에게 야유를 보냈지만 남자는 그대로 서서 버티었다.

남자는 양 손을 입가에 대고는 무대를 향해 외쳤다.

“사람을 동물로 위장하는 짓은 집어치워라! 그들에게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보장하라! HR연대는 이런 인권 모독에 반대한다!”

남자의 외침에 여기저기서 몇 명의 사람들이 일어나더니 마찬가지로 무대를 향해 비슷한 말을 외치기 시작했다. 코끼리는 공을 들어올린 채 굳어버렸고, 대천막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관객들은 일어서서 외치는 사람들을 향해 야유를 하고 비난을 시작했다. 덩치가 큰 남자 하나가 일어나더니 처음 일어서서 외친 남자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외치던 남자가 쓰러지는 게 보였다. 이제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나고 외침소리와 비명소리가 뒤섞였다. 공연장을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에게 떠밀려 나는 대천막 입구 바깥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대천막 안에서의 소동은 꽤 길게 이어졌지만 서커스단 사람들에게는 큰 피해가 없다고 했다. 광대 하나가 호기심에 무대 쪽으로 나왔다가 넘어져 몇 군데 멍이 생긴 것뿐이라고 했다. 관객들은 서커스를 중단시킨 사람을 두들겨 패는 것으로 만족했고, 무슨 연대인가 하는 사람들은 그대로 도망친 모양이었다.

나로서는 무엇보다 코끼리가 무사히 동물 천막의 우리 안으로 돌아온 것이 가장 기뻤다. 나는 코끼리에게 달아주었던 두 개의 상아와 큼직한 귀 장식을 떼어주고 꼭 끌어안았다. 코끼리는 급하게 몸을 피하느라 허리가 아파지긴 했지만 다친 곳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겨우 마음이 가라앉아 다른 동물들도 살필 수 있었다. 털옷을 덧대어 입고 있던 곰과 혼자서 움직이지 못하는 물개는 긁힌 상처 하나 없이 무사했다. 소심한 말은 겁을 먹고 날뛰다가 꼬리 장식을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예상치 못한 소동으로 제8시에서의 첫 공연은 엉망이 되었다. 누나는 동물 천막에 들러 단장이 이 앞으로의 공연에 대한 논의를 위해 제8시의 시장을 만나러 갔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번 제8시의 공연은 취소될 지도 몰라.”

“응……”

“서커스의 사람들과 동물들은 무사하지만 무대장치나 천막 같은 집기들이 망가졌으니까 어쩔 수 없지. 도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탓이니까 단장님이 시장에게서 부서진 집기 값이라도 받아오면 좋겠어.”

누나는 한숨을 쉬었다. 올해의 공연은 이제까지 일곱 도시를 지나오는 동안 대단히 호평이었다. 8시에서 공연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서운했다. 누나도, 다른 서커스 단원들도 그럴 것이다.

“누나. 그 무슨 연대라던가 하던 사람들이 한 이야기는 뭐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누나는 대답하지 않고 코끼리를, 그리고 곰과 물개와 말을 하나씩 돌아보았다. 누나는 무언가 말하려는 것처럼 입을 벌렸다가 곧 다물고 조금도 즐거워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지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그보다 너 오늘은 동물 천막에서 자야겠다. 오늘 밤은 동물들을 지키는 것이 좋을 거라고 단장님이 말했어.”

다른 단원들이 밤 사이에 천막 주변을 돌며 순찰을 할 거라는 이야기를 남기고 누나는 동물 천막을 나갔다.

혼자 남은 나는 코끼리 우리에 기대어 앉았다. 코끼리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지만 기운이 나지 않았다.

- 신경 쓰지 마.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응…….”

일년 치 공연을 모두 마친 날 밤처럼 몹시 피곤했다. 올해 마지막 공연을 고작 하루, 그나마 도중에 중단된 상태로 마쳤을 뿐인데.

천막 구석의 우리 안에서 호랑이가 못마땅한 듯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동물들에게 사료를 주고 호랑이에게도 저녁밥이 될 무언가를 가져다 주어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했지만 어쩐지 일어날 수가 없었다.

 

 

 

커다란 대천막의 높은 곳에 쳐진 외줄 위로 누나가 걷고 있었다. 누나는 양 팔을 벌려 균형을 잡고 살짝 무릎을 굽히더니 뒤로 재주를 넘었다. 나는 숨을 멈추었다. 출렁거린 줄 위로 사뿐히 내려선 누나가 객석을 향해 손을 흔들며 웃었다. 객석에는 나 혼자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박수를 쳤다. 누나는 박수에 만족했는지 숨을 고르고 다시 한번 재주를 넘었다. 나도 다시 숨을 멈추었다. 하지만 줄이 사라져버렸다. 누나가 떨어진다! 일어서려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무대 위로 떨어진 사람은 누나가 아니라 광대였다. 뚱뚱해 보이도록 부풀린 옷을 입은 광대는 우스꽝스럽게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이건 꿈이구나 하고 깨달았다. 나는 눈을 떴다. 사람들의 발소리는 여전히 들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한 쌍의 남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남자 쪽은 얼굴이 멍으로 얼룩지고 퉁퉁 부어있었다. 멍든 얼굴의 남자가 말했다.

소리 지를 생각은 마라, 꼬마. 우리는 나쁜 일을 하려는 것이 아니니까.”

머리를 흔들어 잠을 털어내고 나자 상황이 파악되었다. 코끼리 우리에 기댄 채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내 앞에 서 있는 멍든 얼굴의 남자는 무대를 향해 소리를 질러 공연을 중단시킨 사람이었다. 동물 천막 입구 쪽에서는 덩치 큰 남자가 단검 묘기를 하는 솔다렌 아저씨를 묶고 있었다. 솔다렌 아저씨는 머리에서 피를 흘리면서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솔다렌 아저씨를 꽁꽁 묶고 재갈을 물린 남자는 천막 입구에 가장 가까운 말 우리로 다가갔다.

“마렉! 자물쇠가 걸려 있어!”

말 우리를 살피던 남자가 말했다. 아마도 이름이 마렉인 듯한 멍든 얼굴의 남자가 그쪽을 돌아보고는 다시 나를 향했다.

“꼬마야. 우리 열쇠는 어디에 있니?”

마렉의 말투는 조용했다. 서커스에 쳐들어와서 솔다렌 아저씨를 다치게 하고 동물들에게 나쁜 짓을 하려는 사람으로는 느껴지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젓고 코끼리 우리에 바싹 등을 붙였다. 마렉은 손을 내밀어 내 양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똑바로 내 눈을 보며 더욱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말했잖니. 우리는 나쁜 일을 하려는 게 아니야. 옳은 일을 하려는 거지.”

어깨에 올려진 마렉의 손에 갑자기 힘이 들어가나 싶더니 나는 바닥에 구르고 있었다. 당황해서 멍해 있는 틈에, 달려온 여자가 내 등에 올라타고 허리춤에 매달아놓은 열쇠꾸러미를 잡아채었다.

여자가 던진 열쇠꾸러미를 받은 두 남자가 말 우리의 자물쇠를 열었다. 곰 우리도, 물개 우리의 자물쇠도 열렸다.

“하지 마! 우리 동물들에게 손대지 마!”

나는 버둥거려보았지만 내 등을 누르고 있는 여자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 소리를 지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열쇠꾸러미를 가진 남자들이 코끼리의 우리를 여는 것이 보였다. 이 이상한 사람들이 코끼리를 다치게 할까 봐 너무 무서웠다.

코끼리는 천천히 우리에서 나오더니 코를 뻗어 내 등에 올라탄 여자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여자는 움찔하더니 내 등에서 비켜 일어났다.

나는 일어나서 코끼리에게 매달렸다. 코끼리가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침착해서 겨우 울지 않을 수 있었다. 둘러보니 다른 동물들은 하나도 우리에서 나오지 않았다. 말도 곰도 물개도 모두 겁을 먹은 채 우리 구석에 몸을 붙이고 있었다.

마렉은 천막 중앙으로 가서 동물들을 돌아보고는 양 팔을 벌렸다. 서커스를 시작하기 전에 단장이 관객들을 향해 하는 것처럼. 그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HR연대의 사람들입니다. 유전자 전쟁의 피해자인 당신들 같은 사람들을 해방하고 인간과 같은 권리를 획득하게 하려는 뜻에서 모인 사람들입니다. 이 서커스가 당신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게 둘 수는 없었습니다. 당신들은 이제 자유입니다!”

동물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천막 구석에서는 긴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자유라고! 그럼 어서 날 풀어줘, 이 바보들아!

열쇠 꾸러미를 가진 덩치 큰 남자가 천막 구석으로 걸어갔다. 남자가 호랑이 우리를 덮어두었던 천을 슬쩍 걷어 올렸다. 호랑이는 앞발로 우리 창살을 움켜쥐고 흔들어댔다. 남자가 호랑이 우리의 자물쇠를 잡았다. 그 때, 천막 입구의 천이 크게 움직였다.

  “그 놈은 맹수니까 조심하는 게 좋을 걸세.”

단장이 천막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마렉과 여자, 덩치 큰 남자는 모두 움직임을 멈추고 천막 입구로 시선을 돌렸다. 단장은 혼자였지만 침착했다. 단장은 묶여있는 솔다렌 아저씨와 코끼리, 코끼리에게 매달려 있는 나와 열려있는 우리들을 천천히 돌아보고는 입을 열었다.

“내 서커스에 와서 사람들을 공격하고 동물을 탈취하려 하다니. 이건 8도시 평화연맹 전체에 대한 심각한 범죄일세. 젊은이들.”

“우리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것뿐이다. 이 끔찍한 서커스의 동물로 이용되고 있는 전쟁 피해자들에게 자유를 보장해라!”

마렉은 단장을 향해 한걸음 나서며 열띤 어조로 말했다. 단장도 마렉을 향해 한 걸음 나섰다.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짐승에서 동물로 선택한 것이지. HR연대는 유전자 전쟁으로 인해 엉망으로 뒤섞인 생물과 그 자손들에 대해 인간과 동일한 인권 부여를 요구하고 있다고 들었네. 그런데 자네들은 인간과 동물을 어떻게 구분하고 있나? 머리와 네 개의 수족만 가지고 있으면 되나?”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사고능력과 의지를……!”

단장은 마렉을 향해 한 손을 펼쳤다. 단장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가 펴 보였다.

“자네들도 제대로 교육을 받았으면 알겠지만, 8도시 평화연맹은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조건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지. 첫째, 한 손에 다섯 개의 손가락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 하나는 다른 네 개의 손가락과 마주보고 있을 것. 둘째, 이족 보행으로 일상 생활이 가능할 것, 셋째, 20헤르츠~2만 헤르츠 사이인 일반 가청 범위 내에서의 소리를 성대를 통해 내어 의사소통이 가능할 것. 그 외에도 피부가 보이지 않을 정도의 긴 체모가 신체의 몇 십 퍼센트 이하여야 한다거나 하는 것들이 잔뜩 있지만 기본이 되는 세 가지만 생각해보도록 하지. 우리가 데리고 있는 동물들은 바로 그 기본적인 세 조항에도 인간의 조건을 달성하지 못한 녀석들일세.”

“그건 평화연맹이 인간으로 인정한 자들만을 위해 만든 규정이다! 기본적인 유전자 풀이 인간이라면 자유 의지를 가지고 인간으로서 사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지켜주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그런가? 자네들이 자유를 선물하려는 저 동물들은 자유 의지로서 떠나고 싶지 않은 것 같은데? 저들의 의지를 지켜줄 생각은 없나?”

“유전자 전쟁의 피해자 후손들을 매와 먹이로 굴종시킨 탓이겠지! 이들은 자유를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일 뿐이다.”

“자유를 경험한 동물이라!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해 짐승이 된 자들이라면 개라고 불리면서 도시 밖으로 내쫓길 뿐이지. 도시 밖에서 우글거리는 개들의 생활이 어떤지는 알고 있나? 추위에 떨고 굶주리고 상처 입은 채 죽거나, 사냥꾼에게 붙잡혀 사료 공장으로 보내지는 게 전부이지. 그것이 자네가 달콤하게 외치는 자유인가?”

단장과 마렉이 하는 이야기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이제껏 한 번도 들어본 적 없고 의미도 모르는 단어들로 이루어진 대화였다.

나는 동물들을 보았다. 동물들은 여전히 우리 안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고 코끼리는 코로 내 어깨를 감싼 채 버티고 있었다. 코끼리의 코가 움직여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소에 자주 하던 것처럼 부드럽게.

- 걱정하지 마라. 나는 절대로 떠나지 않을 거야.

단장의 시선이 잠깐 코끼리에게로 향했다. 단장은 마렉을 향해 씩 웃었다.

“지금 저 코끼리가 말을 했지. 어떤가? 알아 들을 수 있었나? 나와 저 꼬마는 일반인보다 가청 영역이 넓어서 코끼리와 의사소통이 가능하지. 하지만 자네들에게는 들리지 않거나, 들린다 해도 의미 없는 소음에 지나지 않을 거야.”

마렉도 코끼리를 돌아보았다. 마렉은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다. 단장은 말을 이었다.

“심지어 코끼리는 자네들이 말하는 그 자유의지로 이렇게 말했네. 나는 절대로 떠나지 않을 거라고. 그것이 저 동물의 의지란 말일세.”

- 하지만 나는 떠나겠어!

분노를 가득 담은 그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랐다. 어느 새 호랑이가 우리에서 빠져 나와 있었다.

곰 우리 옆 그늘에 숨은 호랑이가 몸을 납작 엎드린 채 천막 입구 앞을 막아선 단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허둥지둥 코끼리의 코를 뿌리치고 뛰어나갔다.

호랑이는 막 바닥을 박차고 뛰어오르고 있었다. 나와 마주친 호랑이의 눈에 당황한 빛이 스쳤던 것 같다. 그리고 내 시야는 주름진 회색의 벽으로 가로막혔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예인들과 함께 앉는 누나가 오늘은 메메 할멈을 밀어내고 내 옆에 앉았다. 누나가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아직도 많이 슬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머리 속이 멍했다.

8시의 공연은 첫 공연을 망친 채로 그대로 종료되었다. 그날 밤에 코끼리는 죽었고, 호랑이는 도망쳐버렸다. HR연대라는 사람들은 붙잡혀서 제1시로 보내졌다고 했다. 동물 천막 주변을 순찰하다가 공격을 받았던 솔다렌 아저씨는 HR연대의 그 세 사람에게 오염되지 않은 완전한 인간 유전자 보유자의 표식이 있었다고 했다. 솔다렌 아저씨는 그 세 사람이 아무리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어도 그 표식을 가졌기 때문에 처벌은 가벼울 거라고 했다.

통로를 사이에 둔 건너편 좌석에서 앙상하게 마른 손이 누나를 붙잡았다. 건너편 좌석으로 쫓겨난 메메 할멈이 누나와 무언가 이야기를 하는 것 같더니 책 하나를 건네주었다. 누나는 망설이는 것처럼 머뭇거리다가 책을 받아 들어 내 무릎 위에 올려주었다.

“메메 할멈이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책이래. 너에게 준다고 하셨어.”

“난 글자를 못 읽는걸.”

그렇게 대답했지만 나는 양 손으로 책을 꼭 잡았다. 빛을 받으면 반짝이는 두꺼운 표지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얇은 책이었다. 때가 타고 여기 저기 긁히거나 패인 흔적이 있는데다 퀴퀴한 냄새도 났지만 예전에는 반짝이는 예쁜 책이었을 것이다. 표지의 그림은 어른 하나와 아이 하나가 손을 잡고 웃으면서 여러 동물들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 동물들 중에 낯익은 모습의 회색 동물이 있었다. 그림 위쪽으로 제목이 쓰여져 있었다.

“누나. 이건 어떻게 읽어? 뭐라고 쓰여 있어?”

“동물원에 가요 라고 써 있어.”

동물원이 뭘까 하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물어보기로 했다.

책 안에는 여러 동물의 그림이 나와 있었다. 내가 아는 코끼리와 비슷한 회색 동물도 그려져 있었다. 그림 속의 회색 동물은 내가 아는 코끼리보다 무척 크고, 다리나 몸통도 무척 두꺼웠다. 커다란 회색 동물은 공연용 장식을 모두 붙여 꾸민 코끼리와 비슷해 보였다.

코끼리는 내 친구였다. 나이가 많았던 코끼리는 나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마렉이 말했던 것처럼 서커스를 떠나고 싶어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코끼리는 떠나지 않았다. 코끼리는 마지막까지 나와 함께 있어주었다. 나는 코끼리의 친구였으니까.

코끼리와 닮은 회색의 커다란 동물 그림을 보다가 나는 울었다. 누나는 불쌍한 것, 하고 중얼거리며 내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누나가 쓰다듬는 것은 코끼리가 쓰다듬는 것과는 무척 달랐다. 그래서 눈물이 더 많이 흘러나왔다.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게 되었을 때는 기차가 도시 밖으로 나온 후였다. 아무 것도 없는 황야를 달리는 기차 창 밖으로는 시선 줄 곳이 별로 없다. 문득 저 멀리로 들개 무리가 달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얼핏 들개 무리 속에서 예쁜 노란 줄무늬를 본 듯 했지만 금방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end]

mirror
댓글 1
Prev 1 ... 5 6 7 8 9 10 11 12 13 14 ... 47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