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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원영 최후의 고백

2014.10.01 00:0810.01


최후의 고백


“저기……”
“뭔데요?”

미희는 싫증 난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평일 늦은 아침에, 교복을 입은 여고생이 거리를 돌아다니는 일이 흔한 상황은 아니다 보니 별 일이 다 일어나곤 했다. ‘불량 학생의 계도’에 목적을 둔 경찰이나 아줌마들의 오지랖이기도 했고, 나쁜 맘을 먹고 접근하는 회사원이나 노인네들이기도, “얼굴에 근심이 묻어있구나!”라며 넌지시 말하고 지나가던 승려이기도, 조상님이 어쩌고 하는 사이비 종교의 전도사이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달갑지 않았다. 미희는 그저 혼자 하고 싶픈 일을 자유롭게 하며 유익한 시간을 보내고 싶을 뿐이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바다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래서 학교 앞을 지나쳐 버스를 타고 해운대 바다로 갔다. 늦가을의 아침 바다는 한적하기 이를 데 없어, 조깅하거나 산책하는 지역 주민이나 외국인 몇 사람만이 간간 눈에 띌 뿐이었다. 미희는 눈부신 해수욕장에 전세 낸 듯 달려가 발을 담그고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실컷 놀고 모래사장에 발 뻗고 앉아 슬슬 배고픔을 인식하기 시작할 무렵, 누군가가 다가와 말을 건 것이다.

“미희 님.”
“네?”

적당히 흘려 듣고 무시할 생각이었는데, 이름이 불리자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멀끔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많이 쳐 줘야 삼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사내는 키가 무척 컸고, 외형적으로 완벽하다 생각될 만큼 잘 생겼다. 처음엔 연예인이나 그와 비슷한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아니, 그 보다도 그런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 봐도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미희는 순간 자신의 가슴팍을 더듬어 이름표가 붙어있나 찾아보았지만, 학교 밖을 돌아다닐 땐 언제나 교복 안주머니에 들어있었다. 대체 뭘까. 미희는 놀라움을 빠르게 정리하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남자를 쭉 훑었다.

“저 아세요?”
“알고말고요. 아주 잘 알고 있죠.”
“누구세요?”
“당신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뭐라는 거야?’ 짜증이 치밀었다. 신종 사기나 무뢰배일지 모른다고 판단했다. 미희는 여차하면 비명 지르고 도망칠 준비를 했다. 그래도 훤한 아침에,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서 대놓고 나쁜 짓을 하진 않으리라.
미희의 경계를 눈치챘는지 청년은 두어 걸음 물러나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이 아주 흥미롭게 여길 존재입니다. 시간을 내 주시죠. 몇 시간이면 됩니다.”
“상식적으로 나는 당신을 모르고 당신은 나를 아는 상황에서, 자기가 누군지 제대로 밝히지 않는 신용 없는 사람에게 내가 몇 시간이나 내 줘야 하는 이유가 뭔데요?”
“합당한 질문입니다. 첫째, 여기서 이야기해 봤자 당신은 아마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고, 둘째, 그러므로 내 정체는 당신이 아주 흥미롭게 여길 수 있을만한 소재일 것이며, 셋째, 나는 당신에게 해코지할 생각이 전혀 없고, 넷째, 이 이후 지금의 내가 당신을 만날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미희의 질문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청년이 받아쳤다. 미희는 어안이 벙벙하여 남자를 뚫어지라 쳐다본 뒤 혼란을 수습했다. 본능적으로 눈앞의 상대가 자신에 대해 정말 많이 알고 있다고 느껴졌다.

“어…… 그래서, 내가 그 ‘믿지 않지만 흥미롭게 느낄만한’ 당신의 정체가 대체 뭔데요?”

놀아난다는 기분이 들어도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청년은 몇 초간 눈만 깜박이다 대답했다.

“미래에서 온 당신의 안드로이드입니다.”

* * * * *

미희의 집에는 안드로이드가 없었다. 여러 가지 분야에서 인간형 안드로이드가 대중화되었긴 해도, 현재는 부유층이나 그에 준하는 이들만이 누리는 호사였다. 컴퓨터가 그러했고 스마트폰이 그러했듯이 조만간 미희의 가계 같은 서민층도 안드로이드의 혜택을 누릴 때가 오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어릴 적 부모를 잃어 국가에서 제공하는 보육 안드로이드와 사는 친한 친구 세영이나, 어찌 된 영문인진 몰라도 자신이 안드로이드인 줄 모르는 안드로이드 친구 미주의 존재가 미희에게 안드로이드에 대한 거부감을 불식시켰다.

‘미래에서 온 안드로이드’라고 자신을 소개한 청년은 어딜 봐도 안드로이드처럼 보이는 구석이 없었다. 물론 세영의 부친이나 미주 같은 경우는 안드로이드 중에서도 매우 특별한 경우라 사람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뭔가 사람 같지 않다는 이질감이 있었다. 같게 보여도 다르다고 인지할 만한, 아주 사소한 부분이지만 비인간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분명 존재했다.
눈앞의 청년에게는 그런 점이 없었다. 표정이나 행동이나 어조 어디에도. 그냥 좀 무뚝뚝하고 말투가 정중한 듯 무례한 잘생긴 인간 청년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믿을 수 없었다.
믿을 수 없는 와중에 흥미가 샘솟았다. 청년의 말대로였다.

“와, 기분 나빠.”
“그 성미에 다 파악 당하면 당연히 기분 나쁘겠죠.”
“됐고. 그래서요? 시간 내주면 뭘 하려고 하는데요?”
“우선 밥 부터 먹읍시다. 배고프죠?”

미희는 청년을 노려보다가 모래를 털고 일어났다.

“내가 뭐 좋아하……”
“옵스 제과점의 모닝세트는 시간이 끝났으니 원조할매 국밥집으로 갑시다. 장 꼬여서 고생하기 싫으면 매운 라면집은 무시하세요.”

선수를 치려다 역으로 당하고 미희는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투덜거리며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살다 살다 진짜 별일을 다 겪네.”
“제가 할 말입니다. 저라고 뭐 좋아서 온 줄 아십니까.”
“구라도 좀 그럴싸하게 쳐야죠, 아무리 봐도 인간으로 보이잖아. 대체 뭐야?”
“지금은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당신 말은,”
“저는 당신이 머잖은 미래에 필요로 구매하는 가정부 안드로이드고, 그보다 더 미래에서 과거로 넘어왔으며, 지금은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인간의 모습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안드로이드의 위화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신종 정신병도 아니고 사기꾼도 아닙니다. 당신이 내가 미래에서 왔다는 말을 전부 믿지 못하더라도 어쩔 수 없지요. 하지만……”
“하지만? 뭐?”
“제가 당신에 대해 얼마나 많은 걸 아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미희가 우뚝 멈춰 서서 돌아보았다. 청년은 다름없이 무뚝뚝한 표정에 심술이 묻은 목소리였지만, 묘하게 슬퍼 보였다. 미희는 이 확률 높은 사기극에 넘어가는 일이 과연 옳을지 고민했다. 정말 치밀한 나쁜 일이 시작될지도 몰랐지만, 신용 여부와 별개로 그럴 예감은 들지 않았다. 한숨이 나왔다.

‘나중에 이 일을 고 3 사춘기 소녀의 젊은 날의 치기라고 회상하는 날이 오겠지?’
“옵니다.”
“사람 맘도 읽냐!”
“뭘 생각한 겁니까? 차 오니까 비키라고요.”

뒤에서 빵빵거리는 경적 소리를 듣고서야 화들짝 정신이 들어 피했다. 부글거리는 화를 눌러 참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청년은 이제 미희의 옆에서 보폭을 맞춰 걸었다.

“미래의 안드로이드는 다 너 같아?”
“아니요. 제가 아주 특수한 경우겠지요.”
“미래의 일에 대해 발설하면 안 되는 거 아냐?”
“원칙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미래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많은 걸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인간의 형상을 취한 이유도 패러독스를 피하기 위한 임시방편이기도 합니다. 제가 존재하기 전의 시간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요.”
“그거 좀 묘한데. 내가 당신과 만난 이후에 안드로이드를 사지 않으면 당신과 만나지 못하고, 그럼 미래에 당신은 없잖아.”

청년은 순간 입꼬리를 끌어올려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당신은 날 반드시 만나게 됩니다. 확신이 있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서는 절대 걱정하지 않습니다.”
“확신하는 근거가 뭔데.”
“당신 사는 꼴을 생각해 보십시오.”
“확실히 근거가 충만하다.”

미희는 잠깐 집의 상태를 떠올리고 곧 뇌리에서 지워버렸다. 청년이 쯧쯧 혀를 찼다.

“어릴 때부터 싹수가 노랬군요.”
“사람은 뭘 어떻게 해도 도무지 하고 싶지 않은 일이 한 두 가지 정돈 있는 법이거든?”
“덕분에 종신으로 부역했으니 그 부분에 대해선 감사를 전하겠습니다.”
“미래의 나 좀 미쳤구나. 당신 같은 싸가지를 곁에 두고 평생을 살았다고? 아니, 잠깐만. 그거 인생 스포일러잖아. 말해도 괜찮아?”
“어차피 미래에서 왔다고 믿지도 않으면서 별걱정을 다 하십니다.”

걱정해줘도 뭐라 그런다며 미희가 구시렁거렸다. 미희는 그냥 일상에서 희귀하게 일어날 수 있는 기묘한 일 중 하나라 생각하고 이 상황에 적당히 어울려주기로 했다. 두 사람은 미희가 어릴 적부터 다닌 국밥집에 들어가 각각 선짓국밥과 소고기국밥을 시켰다. 배가 무척 고팠던 미희는 선짓국밥을 게걸스럽게 퍼먹었다. 청년은 무표정하게 몇 수저 들다가 미희에게 물과 반찬을 챙겨주고 사방에 튄 국물을 닦았다. 무척 몸에 밴 행동 같았다. 청년의 행동을 힐끗힐끗 지켜보던 미희가 물었다.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있어. 안드로이드라면서 지금은 인간이라며.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 과거로 넘어오면서 잠깐이나마 인간의 형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이해가 안 된다고.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고 왜 그래야만 했냐는 거지. 아까 타임 패러독스 어쩌고 하긴 했지만, 그렇다면 미래의 당신과 지금의 당신은 전혀 다른 사람이란 의미야? 사람의 형상을 취하면 그게 안 걸려?”
“아뇨. 꼭 그렇진 않습니다. 모습이 바뀌어도 제 존재 자체가 바뀌진 않으니 결국 걸리겠지요.”

가라앉고 서글픈 목소리였다. 아주 작은 뉘앙스의 차이였지만, 미희는 쉽게 청년의 감정 상태를 감지했다.

“어떻게 가능하냐고 물으신다면 잘 모르겠습니다. 시간을 여행하는 능력과 안드로이드의 시스템을 무시하고 독립적으로 사고, 행동할 수 있게 된 능력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겼습니다. 처음엔 한정적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새로운 능력이 자꾸 생겨나더군요. 지금은…… 그렇게 바랐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되길 바랐다?”
“네. 어쩌다 보니 바람을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듯합니다.”
“어, 그거, 모르긴 몰라도 엄청난 능력처럼 보이네.”
“아마도 그렇습니다. 한계는 있지만요.”

미희는 골치가 살살 아파지기 시작했다. 청년의 이야기 스케일이 점점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수위로 이어졌다.

“넘어가고. 왜?”
“그건, 아까도 말했다시피 타임 패러독스의 임시방편입니다. 당신의 이해능력에 맞게 설명하자면, '용인되지 않는 일을 하여 그 결과로 큰일이 생기지 않도록 잠시 눈속임 한 상태'입니다. 앞으로 몇 시간 정도가 한계겠지요.”
“말인즉, 원래 내가 당신과 만나는 일이 생기면 안 된단 소리지?”
“맞습니다. 지금 당신과 내가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 국밥 먹는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청년의 목소리는 비장하기까지 했다. 미희는 마늘종 장아찌를 오독오독 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눈앞의 청년은 절박했다. 아닌 척해도 이유가 있어서 자신을 만나러 왔다고 온몸으로 부르짖었다. 그렇게 보였다. 청년은 미희가 생각하는 동안 분홍 소시지와 계란말이를 더 담아 가져왔다.

“나한테 뭘 바라?”

반찬 그릇을 넌지시 쳐다보던 미희가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청년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럼 왜 만나러 왔어?”

청년은 자신의 그릇에서 큼지막한 소고기 한 덩이를 건져 미희의 숟가락에 얹어주고 대답했다.

“당신과 이렇게 지내보고 싶어서요.”

* * * * *

영화는 어떠냐고 물으니 좋아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미희는 고민하다 노래방으로 갔다. 노래방 주인은 대낮에 교복 차림의 소녀와 훤칠한 청년이 함께 온 걸 당혹스럽게 생각하는 눈치였으나 군소리 없이 방을 내어줬다. 두 사람은 누구의 이름을 땄는지 알 수 없는 김선영 방에 들어갔다. 미희가 선곡 책을 뒤적거리며 부를만한 곡을 찾는 동안 청년은 노래방 리모컨을 두드렸다.

“부르시죠.”

미희가 보니 자신의 애창곡이란 애창곡은 죄 예약해 두었다.

“이쯤 되면 무섭네. 정말 나에 대해 그렇게 많이 알아?”
“지난 시험 성적이라도 불러드릴까요? 당신에 대해 데이터화 된 자료는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개인 정보를 그렇게 가지고 휘두르면 범죄니까 그만둬.”
“상관없잖습니까. 어차피 제 시대의 당신은 이미 죽었는데.”
“아, 그렇구나. 나 몇 살까지 살아?”
“벽에 똥칠은 안 하지만 그 정도 나이까지는 사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미래에 대해 이것저것 묻고 싶었지만, 청년이 시작 버튼을 누르는 바람에 물어볼 타이밍을 놓쳤다. 처음엔 잘 모르는 사람이 옆에서 듣고 있단 생각에 부담스러웠으나 가장 좋아하는 애창곡인 덕에 금방 몰입하여 불렀다. 청년은 고맙게도 1절에서 끊지 않고 끝까지 경청해주었다. 청년에 대한 호감이 많이 생겼다.

“이름도 모르네. 내가 당신한테 어떤 이름을 지어줬어?”
“맞춰보시겠습니까?”
“엄마 아냐? 가정부 안드로이드를 사면 꼭 그렇게 짓고 싶었으니까.”
“네. 그게 제 첫 이름이었습니다.” 
“그럼 지금 이름은 엄마가 아니란 말이네.”
“밖에서 불리기 민망한 일이 몇 번 있었습니다. 그 뒤에 다른 이름을 몇 가지 지어주었지요. 당장은 제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제이는 다음 곡의 시작 버튼을 눌렀다. 미희는 잠자코 다음 곡도 진지하게 열창했다. 제이는 덤덤한 표정으로 화음을 넣어주고 탬버린을 절묘한 시기에 쳐주며 흥을 돋우었다. 미희는 제이에 대한 의심을 거두기로 했다.

‘까짓거, 미래에서 왔으면 왔겠지.’

제이는 자신과 평생을 살았으며 자신이 늙어 죽은 이후 어떤 이유로 과거의 자신을 만나러 왔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였으나, 미희는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했다.

“내가 보고 싶었구나.”
“……”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다는 건 그런 의미잖아. 많이 외로웠어?”
“외로움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표현대로라면 그리움이 맞겠지요.”

제이는 미희의 애창곡 예약 사이에 숫자를 넣어 새 곡 하나를 끼워 넣었다. 미희가 아주 어릴 적에 나왔던 그리움에 관한 슬픈 노래였다. 제이는 감정이라곤 하나 들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로, 인간미 없이 완벽한 박자와 음정으로 노래를 불렀다. 보이스웨어나 보컬로이드가 연상되는 노래 솜씨였다. 퍽 웃겼는데도 이상하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 뒤로 한동안 미희와 제이는 말없이 앉아만 있었다. 미희는 의미 없이 선곡 책에서 팡파르나 박수 소리 같은 효과음을 찾아 틀며 복잡한 심경에 시달렸다. 제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모습이었다.

“어디 갈래? 가고 싶은 데 있어?”

미희가 물었다. 제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미희는 해 줄 수 있는 건 다 해주고 싶었다. 평생을 함께한 정든 안드로이드가 주인을 그리워해서 과거에까지 찾아왔다니 갸륵하다 못해 슬픈 이야기였다. 죄책감마저 들었다.

“좀 걸어도 됩니까?”
“십 대잖아. 체력은 짐승 같으니까 걱정 마.”
“동해남부선 기찻길을 갑시다.”
“이건 그냥 노파심에서 묻는 건데……”
“바다 낭떠러지에 밀 생각이었으면 벌써 여기서 경을 쳤겠죠. 걱정하지 마세요.”
“역시 내 생각 읽고 있지?”
“글쎄요.”

제이의 웃음이 의미심장했다. 미희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미희는 제과점에 들러 김치 크로켓과 명란젓 바게트를 두 개씩 사고 편의점에서 물을 샀다. 문탠로드로 언제부턴가 이름이 바뀐 달맞이 고개 아래의 작은 어촌마을인 미포에서부터 동해남부선 기찻길로 접어들었다. 길은 열차 운행이 중단되어 걷기코스로 바뀐 뒤 지역주민의 사랑을 받았다.
평일 낮 시간대에는 걷는 사람도 드문드문했고, 그마저도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저 앞에 걷던 사람들이 정신 차리면 어느 순간 없어지니 미희는 꼭 현실이 아닌 꿈의 길을 방황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파도는 높지 않고 푸르게 적막했다. 미희는 철로 중앙으로, 제이는 바다 쪽 바깥 자갈길을 걸었다. 미희가 콧노래로 노래방에서 불렀던 애창곡 몇 개를 흥얼거렸다. 제이는 별 말이 없었다.
작은 굴을 통과하며 미희가 물었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려주면 안 되지?”
“안 될 건 없지만, 알고 싶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당신 옆에서 끼고 산 거 보니까 뭐 벌어먹는 건 문제 없었나 보네. 그럼 됐어. 그럼 나에 대해 뭘 아는지 이야기 해보지? 궁금한데. 뭘 얼마나 알기에 그렇게 자신하나 싶고.”

제이는 미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하늘을 보고, 마지막으로 앞을 보며 말했다. 미희는 그 목소리와 어조가 노래방에서 노래를 불렀을 때보다 더 노래처럼 들렸다.

“편부 집안이고, 오빠가 한 명 있지요. 어릴 때는 조모의 손에서 자랐고요. 돌아가신 지 2년 됐겠습니다. 조모의 시래깃국과 카레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을 겁니다. 유치원 다닐 때에는 공주님이 되고 싶었고, 초등학교 다닐 적에는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했지요. 그러다 중학교 들어가서 만화가를 꿈꾸다 지금은 작가로 방향을 틀었고. 이유는 돈이 덜 드니까. 얼마 전에 담배에 손을 댔지요? 사과 향이 나는 멘솔. 학교 매점의 팩 주스를 무척 좋아해서 매일매일 사서 마시고, 잠들면 몸부림을 거의 안 쳐서 죽은 줄 알았다는 이야기도 줄곧 들었고, 발걸음 소리가 매우 조용하고 인기척이 없어서 본의 아니게 사람들을 많이 놀래주기도 하고, 좋아하는 게임은 레이싱 게임……”
“그, 그만해.”

미희는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손으로 얼굴을 덮고 앓는 소리를 냈다. 안다고 해봤자 신상명세나 자주 떠벌리고 다닌 취향 같은 거나 알 거로 생각했으나 오산이었다. 어디에서도 이야기해 본 적 없는 내밀한 부분까지 제이는 모두 알고 있었다. 아무리 치밀한 스토커라도 알아내기 어려운 부분까지도.

“어떻게 아는 거야!”
“당신이 이야기 해주었으니까요.”
“내가? 언제!”
“평생을 걸쳐서 줄곧.”
“알았어. 믿을게. 더 안 물을 테니까 그냥 말하지 마. 어휴, 쪽팔려.”
“쪽팔린 일입니까?”
“당연하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짓는 제이에게 미희가 손사래 치며 말했다.

“미래의 나는 쪽팔림을 극복했는진 몰라도 소녀의 마음은 복잡하단 말이야! 원래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그러니까 뭐 그런 걸 품고 즐거워하거나 슬퍼하는 나 자신에게 도취하는…… 내가 뭐라는 거야, 아무튼 알아도 모른척 하고 넘어가 줘야지!”
“논리적으로 엉망진창인 소릴 하고 있군요. 그러니까 요지는 흑역사가 될 일들이란 말이지요?”
“나 혼자만 즐길 땐 흑역사가 아니야! 남이 알게 되면 그 때 부터 흑역사가 되는 거라구!”

미희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다. 멀뚱멀뚱하게 지켜보던 제이가 소리 내 크게 웃었다.

“웃지 마! 엄청나게 진지하다?”
“본의 아니게 부끄러움을 줘서 미안합니다.”
“전혀 미안해하지 않으면서 사과하지 말라고.”

부루퉁해진 미희가 걷는 속도를 높였다. 순식간에 중간 기점인 청사포를 지났다. 제이가 좀 더 천천히 걸어달라고 부탁했다. 

“손잡아도 됩니까?”
“구덕포 지나면 뽀뽀해달라고 하겠네.”

투덜거리면서도 손을 내밀었다. 제이가 미희의 손을 꼭 잡고 걸음을 맞춰 걸었다. 미희는 철로 위로 올라가 제이의 손에 의지해서 한 줄로 걸었다. 제이의 손은 꽤 서늘해서, 상대적으로 뜨거운 미희의 손 온기가 미지근해졌다.

“이러고 싶었어? 미래의 나는 당신이랑 이렇게 안 놀아줬어?”
“그건 아닙니다.”
“그러면?”
“잘 놀아주었죠. 과분하다고 생각할 만큼. 이런 표현이 더 적당할까요? 사람처럼. 당신과 똑같은 사람처럼 대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미희는 뭔가 되물으려다 관두었다. 제이가 또 마음을 읽어 뭔가 말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바다로 가파른 절벽과 산길 사이의 철로는 끝이 나지 않을 것처럼 길게 이어졌다. 미희는 몇 번이나 오갔던 길이 이처럼 길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라 생각했다.
바람이 거세어졌고, 하늘이 침침해지더니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해송이 우거진 나무 아래에서 잠깐 쉬어가기로 했다. 제이가 그늘진 하늘을 올려다보고 말했다.

“저는 당신을 정말로 많이 압니다.”
“그 참, 믿는다니까 뭘 그렇게 강조하고 그래.”
“당신이 믿는 이상으로 안다는 겁니다. 지금의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이 어떤 얼굴로 웃는지, 우는지, 말하는지. 어떤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는지, 살았는지. 단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당신이 세상을 떠나 내가 사는 세상에 더 없어도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안드로이드라서?”
“네.”

미희는 끙끙 생각에 잠겼다 말했다.

“그럼 앞으로 말이야, 내가 널 만나면, 널 끼고 오래 살 거면, 죽을 때 어떤 처치라도 해 둘까?”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괴롭다는 의미 아니었어? 잊을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힘들다는 말 아니야? 그걸 부탁하려고 여기까지 왔다든가.”

제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런 걸 부탁하려고 온 게 아닙니다. 제가 당신에게 온 진짜 이유는-”

제이의 목소리가 격양됐다. 그러나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순간 미희의 몸을 일순 붕 뜨게 만들 만큼 거센 바람이 불었다. 정신을 차리자 사방이 밤처럼 캄캄했다.

“뭐야?”
“이 시대에선 안 될 존재가 있다는 걸 세계가 안 겁니다. 저를 배제하려고 합니다. 이대로라면 당신도 위험합니다.”
“그럼 도망가야지!”

미희가 성을 내고서 제이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2km 정도만 더 가면 선로의 끝이었다. 주위의 풍경이 이지러지기 시작하고, 멀미가 날 것처럼 뱅뱅 돌았다. 미희는 난생처음 겪어보는 기묘한 일에 왈칵 두려움이 몰려와 눈을 꽉 감고 달리기만 했다.
뒤에서 제이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렸다.

“당신은 내가 이상한 능력을 갖추게 되었어도, 안드로이드 같지 않아도 여전히 허물없이 대해주었습니다. 손이 많이 가고 게으름뱅이면서 말썽꾸러기였지만, 그래도 모시는 보람이 있었습니다.”
“지금 그런 거 말할 때냐고!”
“당신은 내게 살아갈 이유를 주었어요. 그래서 당신이 없는 세상에서, 나는 이제 무엇을 이유 삼아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당신이 죽을 때 남긴 유언 때문에 나는 당신과 함께 폐기되지도 못했어요.”
“내가 뭐랬는데!”
“나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니, 자유롭게 살라고.”

미희의 전면에서 엄청난 바람이 불어닥쳤다. 미희는 비명을 지르며 밀려났고, 뒤따르던 제이가 그 등을 안아 단단히 붙잡았다. 미희가 꼼짝달싹 못 하여 제이를 올려다보았다. 제이가 다정하게 웃었다.

“실은, 너무 제멋대로인 당신을 나도 제멋대로 굴어서 곤란하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곤란해.”
“그럼 다행이고요. 이제 헤어질 시간입니다.”

제이가 고개를 숙여 미희의 이마에 입 맞추었다. 갑작스레 일어난 일에 미희가 어안이 벙벙했다.

“아까 물었지요, 왜 인간의 모습이었냐고.”
“어……”
“한 번도 당신에게 말할 수 없었던 말이 있습니다. 안드로이드 따위가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되어 꼭 말하고 싶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제이에게 그 말을 해선 안 된다고 막아서듯이 격렬해졌다.

“미희, 당신을 사랑합니다. 미희.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어둠에서 빛이 폭발했다. 미희가 아득한 정신을 떨치고 눈을 떴을 때에는 여전히 휑한 선로 한가운데였다. 저 멀리 송정 바닷가의 모습이 보였다. 비는 어느샌가 그쳤고, 산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온몸을 훑었다. 구름 사이에서 쏟아지는 빛이 바다를 황금빛으로 물들여 눈이 부셨다.
제이는 없었다. 그런 사람이 있었는지조차 의문이 들 만큼,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철길을 걸으며 중간중간 보이지 않던 사람들처럼 제이도 모습을 감췄다.
미희는 멍하게 나머지 길을 걸어 송정역에 도착했고, 길의 끝에서 그만 주저앉아 엉엉 울고 말았다.

* * * * *

몇 년 뒤, 성인이 된 미희는 1 가구 1 안드로이드 시대의 흐름에 맞춰 60개월 카드 할부로 최신형 가사 안드로이드를 구매했다. 이름은 엄마라고 지었다. 남성형 안드로이드의 이름에 적합하지 않다는 주위 사람들의 핀잔에도 미희는 그저 낄낄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20140924
안드로이드 연작, 여덟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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