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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야, 이기영!

2014.05.31 23:0805.31

야, 이기영!

 

 


1

 

대학병원과 종합병원 여러 군데를 찾아다녔다. 번번이 병의 원인을 찾지 못했다. 진료비만 날렸다.
그날도 진료비만 날린 채 전철을 탔다. 그리고 몇 정거장을 갔을까, 전철이 지상으로 나왔다. 물론 전철이 지상으로 올라온 게 특별할 건 없다. 특별한 건 하필 그때 내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던 것이고, 하필 그 타이밍에 그 병원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운명이란 이런 거다. 정말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재수가 없을 수 있을까. 신나게 달리고 있는 전철 안에서 ‘또 진료비만 날리고 말았네’ 하며 낙담하다 고개를 딱 드는 순간, 그 순간 눈앞에서 병원 간판이 휙 지나갔다. 시간으로 따지자면 0.5초도 안 걸렸을 거다. 달리는 전철 안에서 나와 그 병원이 마주칠 수 있었던 시간이.
그 0.5초도 안 되는 시간. 그러니까 0.5초만 늦게 고개를 들었더라면 지나쳐버렸을 것이다. 나는 그 병원을 못 봤을 것이다. 전철에서 내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말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단 말인가. 운명이란 이런 거다.
눈앞에서 병원 간판이 휙 지나가는 순간, 나는 이미 의자에서 일어나 출입문 앞에 섰다.
무언가에 홀린 상태였다.
이름 있는 대학병원, 종합병원은 거의 다 돌아다녔다. 보험 적용도 안 되는 MRI도 여러 번 찍었다. 위 내시경과 대장 내시경은 이제 피 검사 받는 수준이다. 눈 끔뻑끔뻑 뜨면서 별 거부감 없이 검사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검사 결과가 나왔을 때 의사는 번번이 고개를 저었다. 원인을 못 찾겠다고 했다. 며칠 입원하면서 좀 더 자세히 검사해 보자는 말만 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의사가 나한테 한 말은 매번 들어왔던 거였다. 차라리 입원을 해서 좀 더 자세히 검사해 보자는 말. 나는 일단 생각해 보겠다고 한 뒤 그곳을 나왔다. 머릿속으로는 다음엔 또 어느 병원을 가야 하나, 그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미리 병원을 정하고 나서 찾아갔다. 물론 찾아가는 도중에 다른 병원이 눈에 띈 적도 있었다. 하지만 0.5초 차이로 그 병원을 보고 못 보고 그런 차원은 아니었다. 그래서 오히려 쉽게 지나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병원은 달랐다. 확률적으로 본다면 못 보고 지나쳐야 맞는 건데, 그게 정상인데, 그런데 보고 말았다. 그리고 몸이 자동으로 움직인 것이었다.
나는 이미 전철 출입문 앞에 서 있었고, 문이 열리자 전철에서 빠져나왔고, 역을 벗어나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에는 마치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듯 신호등이 보행자 신호로 바뀌었다. 만일 신호등이 때맞춰 바뀌지 않았더라도 나는 무작정 횡단보도를 건넜을지 모른다. 그러다 자동차 경적 소리에 놀라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처했을 테지만. 아니면 차에 치였거나.
분명 차에 치이는 건 불행한 일이다. 하지만 그때 만일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내가 정말로 자동차에 치였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달라졌을까. 아니,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는 똑같았을 것이다. 이미 정해진 것, 그게 운명이니까.
병원 앞에서 약간 머뭇거리기는 했다. 자동으로 병원까지 들어갈 줄 알았는데, 병원을 하도 여러 군데 다니다보니 이 역시 습관이라는 게 자동으로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일단 병원 외관을 훑어보았다. 그동안 다니던 종합병원이나 대학병원보다는 확실히 작았다. 크기는 이미 예상을 했던 거라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병원 관리가 잘 안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병원 출입구가 문제였다. 주차 관리 부스의 유리창이 죄다 깨져 있었다. 누가 일부러 깨뜨린 모양이었다. 그럼 부스 자체를 철거하고 새로 만들던가 해야 할 텐데, 흉물스럽게 왜 저렇게 방치해 놓는지 이해가 안 갔다. 차량 진입 차단봉은 두 동강이 난 채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저것도 왜 철거를 안 했을까. 주차장을 겸하고 있는 병원 마당에는 쓰레기들이 나뒹굴었고, 주차된 차도 두세 대뿐이었다. 멀리 보이는 벤치 중에는 다리가 부러진 것도 있었다. 그 옆 휴지통에는 쓰레기가 넘쳐났다. 딱 봐도 장사 안 되는 병원이거나 곧 문을 닫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 왜 하필 이런 병원이 눈에 들어왔을까.”
그렇게 한번 중얼거린 뒤 다리 부러진 벤치를 지나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이젠 어느 병원엘 가든 망설이지는 않는다. 곧장 안내데스크로 가서 찾아온 목적을 말하고, 직원이 알려준 대로 접수처에서 접수부터 한다. 그러고 나서 내과 진료실이나 신경외과 진료실 등을 찾아간다. 경우에 따라서는 가정의학과 진료실을 찾아가기도 한다.
병원이 한산해서 그런지 접수처에서도 번호표를 뽑지 않고 바로 접수를 했다. 그리고 접수처 직원이 알려준 대로 내과 제1진료실로 가서 간호사에게 접수증을 건넸다. 물론 이곳에서도 따로 대기하는 시간은 없었다. 접수증을 건네자마자 바로 간호사가 들어오라고 했다.
담당 의사는 의자에 거의 눕다시피 앉아서 휴대폰으로 열심히 누군가와 통화중이었다. 내가 들어왔는데도 통화를 중단하지 않았다. 대기 시간이 없어서 편했는데, 진료실 안에 들어와서 담당 의사의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래, 그러니까 빨리 다른 병원 알아봐야지. 너도 좀 알아봐 줘. 연봉이야 뭐 지금 받는 수준 정도면 되고. 급할 땐 좀 돕고 살자, 인마. 아 참, 그런데 그 제주도 땅은 어떻게 됐냐? 괜찮은 땅 나왔다고 며칠 전에 제주도 내려가 본다고 하지 않았나?”
통화는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화제가 다른 쪽으로 넘어갔다. 나는 할 일 없이 진료실 내부만 둘러보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삭막한 분위기였다. 책장에 책이 한 권도 없었고, 책상 위에도 간단한 진료 도구랑 전화기뿐이었고, 하얀 벽은 그냥 하얗기만 했다. 그림을 걸어놓는다든지 인체 해부도를 걸어놓는다든지 하다못해 달력을 걸어놓는다든지, 다른 병원 진료실 같았으면 그랬을 텐데, 이곳은 벽에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진료실이 아니라 병실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일까, 잘 하면 입원할 수도 있겠는데, 저 의사가 병을 고쳐줄 수도 있겠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꽉 막혔던 명치 부위가 순식간에 뻥 뚫렸다. 행복했다. 행복하다, 행복하다, 속으로 계속 그렇게 중얼거렸다.
“네! 아, 네, 병원을 여러 군데 다녔는데 원인을 못 찾았어요.”
담당 의사가 어느새 전화를 끊고 내게 병에 대해 묻고 있었다. 나는 행복감에 빠져 있느라 처음에 담당 의사의 말을 듣지 못했다.
“음, 그렇다면 받아볼 만한 검사는 다 받아보셨을 텐데, 그래도 어쨌든 오셨으니까 검사 한번 더 받아보시겠어요?”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진료 상담은 그게 다였다. 여러 병원을 다니면서 의사들한테 병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었을 테니 자기는 생략하겠다는 듯한 태도, 심지어 어떤 검사들을 받게 될 거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다른 큰 병원에서도 병의 원인을 찾지 못했는데 이 병원에서 무언가 기대한다는 건 무리다. 왔으니 그냥 검사나 받고 가라. 담당 의사의 행동은 내게 그런 의미로 다가왔다. 그래서 더 신뢰감이 생겼다. 이곳에서도 병의 원인을 찾지 못하면 더 이상 진료는 받지 말자. 병원 순례는 그만 두자. 그런 각오까지 하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저 담당 의사가 내게 그렇게 말해 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덕분에 마음이 편했다. 이제 이곳이 마지막이구나, 하는 생각. 더 이상 병원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편했다.
곧이어 간호사가 들어왔고, 나는 간호사를 따라 3층으로 올라갔다.
흉부 엑스레이를 찍고 심전도 검사를 받고, 내일 위장과 대장 내시경 검사를 받기로 한 뒤 병원을 나왔다.

흉물스런 주차 관리 부스를 지나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그렇다고 스팸 신고도 안 되어 있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어이쿠, 통화음 네 번 만에 전화를 받으시네요. 보통은 일고여덟 번 만에 받으시던데, 하하. 저 역시 모르는 데서 전화가 오면 한 일곱 번까지는 일부러 기다립니다. 빨리는 안 받아요. 그러면 왠지 한가해 보이잖아요. 그리고 여덟 번째 울릴 때 받습니다. 물론 목소리도 쫘악 깔지요. 귀찮다는 듯이 말입니다. 그럼 상대방이 좀 긴장을 하거든요. 조심스럽게 전화 건 용건을 말합니다. 기 싸움에서 이미 제가 이긴 겁니다. 상대방도 쓸데없는 얘기는 못 하게 됩니다. 용건만 간단히, 호칭은 당연히 선생님이죠. 지가 날 언제 봤다고, 나더러 선생님 선생님 하는지, 참. …….]
뚝.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나는 여덟 번째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목소리를 쫘악 깔았다. 귀찮다는 듯이.
[어이쿠,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쓸데없는 얘기를 했습니다. 저, 혹시 이기영 선생님이십니까?]
얘가 날 언제 봤다고 선생님은, 참.
“네, 제가 이기영인데요. 무슨 일이시죠?”
[네, 이번에 공모전 응모하셨잖아요. 소설 부문 쪽으로요. 거기에 선생님 작품이 당당히 뽑히셨습니다. 우수작으로요. 축하드립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하하, 여전히 목소리를 쫘악, 하하. 시상식은 열흘 뒤에 있을 겁니다. 시간하고 장소는 제가 문자로 보내드리겠습니다. 확인하신 후에 참석 가능 여부는 내일까지 알려주시면 됩니다. 뭐, 모레까지 알려주셔도 상관없고요, 하하.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네, 감사합니다. 문자 보내주시면 확인 후에 참석 가능 여부 알려드리겠습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그럼 바쁘신 것 같으니까 이만 끊겠습니다. 아 참, 선생님 작품 아주 멋졌습니다. 굿! 굿! 파이팅입니다!]
뚝. 나는 전화를 끊었다. 조금 있으면 문자가 오겠지. 특별한 일 없으면 참석하자. 뭐, 당연히 특별한 일은 없겠지만.
그리고 곧바로 문자가 왔고, 나는 참석하겠다고 알려주었다.
역시 이 병원 덕분인가. 병원을 벗어나기 직전에 좋은 소식을 들었다. 어쩌면 병원으로부터도, 그러니까 담당 의사한테서도 기쁜 소식을 들을지 모른다.
그래서 만일 병이 낫는다면, 그러면 내 인생은 달라지겠지.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될 수 있을 테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될 수 있을 테고,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 될 수 있겠지. 병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데, 이제 나는 뭐든 할 수가 있겠지. 뭐든 할 수가 있고, 무엇이든 될 수가 있겠지.
전철 안에서도, 집에서도, 그리고 다음 날 병원에 가는 동안에도 나는 그런 희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의사가 한 말은 내 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여기 흉부 엑스레이 촬영한 필름 보니까, 폐 아래쪽에 뭔가 이상한 게 보여요. 새끼손톱만 한 뭔가가 있네요. 필요하다면 조직 검사를 해볼 수도 있겠는데요, 제 생각에는 가슴 통증의 원인은 이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그러니까 본인이 원한다면 제거 수술을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러려면 가슴을 절개해야 하니까, 수술 마치고도 한 열흘 이상은 입원을 해야 하고요. …….”
의사가 하는 말이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 의사는 왜 입만 뻥긋거리는 거지,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병의 원인을 찾았다. 수술을 해서 손톱만 한 걸 제거하기만 하면 된다. 의사는 계속 뭐라고 중얼중얼거리고 있다. 하지만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병의 원인을 찾았고, 수술만 하면 된다. 열흘이 아니라 열 달을 입원해 있어도 상관없다. 가슴을 절개하든 뭘 하든 병만 고치면 된다. 문제될 건 아무것도 없다.
“수술 받을게요. 내일이라도 당장 받을 수 있어요. 지금 바로 입원해도 상관없고요.”
“음, 그러실래요? 그럼 입원 수속에 필요한 것들은 간호사가 알려드릴 겁니다. 수술 일정은 추후에 잡기로 하죠.”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진심을 다해서 의사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리고 간호사를 따라 입원 수속을 밟았다.
병실은 6층에 있었다. 6인실. 하지만 환자는 나 혼자였다. 그래서 1인실이나 다름없었다.
“오늘은 그냥 푹 주무시고요, 수술 관련해서는 내일 의사 선생님이 오셔서 말씀해 주실 거예요. 뭐 필요한 거 있으시면 복도 중앙으로 오셔서 저희 간호사들 찾으시면 돼요. 아니면 침대 머리 위에 있는 벨 누르셔도 되고요.”
간호사는 표정이 무뚝뚝했다. 웃으면 참 예쁠 텐데. 나한테 뭔가 할 말이 더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한숨을 한번 푹 쉬고는 병실을 나갔다.
그때 말을 해주지. 한숨을 쉬는 대신 용기를 내서 말을 해주지. 수술 받지 말라고. 수술 받을 필요 없다고. 몸속에 있는 그 종양은 가만 놔둬도 자연히 없어지는 거라고. 내 병과는 아무 상관없는 거라고. 이 병원 곧 문 닫을 텐데, 문 닫기 전에 저 의사가 보너스 챙기려고 수술하는 거라고. 그리고, 그리고 저 의사가 수술해서 못 깨어난 사람 몇 명 있다고. 영원히 못 깨어난 사람 몇 명 있다고. 그냥 나가지 말고 말을 해주지.
너 때문이야.
내가 죽은 건.
그래도 원망하지는 않아. 그만큼 나는 사는 게 힘들었으니까. 늘 아파서 힘들었으니까. 그러면서도 죽을 용기는 없었거든. 오히려 잘 됐어. 이제는 안 아파.

 

내가 깨어난 곳은 병원이 아니라 내 방이었다. 갑자기 몸이 중력을 무시하고 붕 떠올라서 깜짝 놀랐다. 물론 죽은 자에게 육체라는 게 있을 리 없지만, 그래도 내 눈에는 내 몸이 보였다. 내가 상상해낸 몸이겠지만.
아, 아쉽네. 시상식은 어떻게 된 거지. 이미 끝난 건가. 아직 날짜가 안 지났어도 어차피 난 참석 못 하고. 시상식 하나는 좀 아쉬운데.
아쉬운 게 있다고는 해도, 어쨌든 그 의사 참 대단해. 결국은 내가 안 아프게 만들어줬어. 발상의 대전환인가. 아픈데 원인을 찾지 못해서 이 병원 저 병원 헤매고 다녔잖아. 그러다 운명처럼 그 병원에 가게 됐고. 그 의사를 만났고.
아마 그 의사는 알고 있었을 거야. 여러 가지 검사 받아봐야 병의 원인은 찾지 못하겠지. 전국에 있는 병원을 다 돌아다녀도 마찬가지였을 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돌아다니고 또 돌아다니겠지. 그래서 수술을 권했던 걸 거야. 수술을 통해서 종양을 제거했으니까, 이제 내 병은 치료가 됐다, 라고 말해주려고.
아, 의도는 좋았는데, 잘 좀 하지. 결과가 영 안 좋았네. 사람을 죽였어. 뭐, 덕분에 아픈 건 사라졌지만.
어쨌든 당신은 내 병을 고쳤어. 대단해. 아니지, 당신은 나를 죽였어. 대단해. 뭐, 나한테는 그게 그거야.
아프지만 않으면 되는 거였으니까.
이기영은 자신의 방을 한번 둘러보았다. 침대도 없고 책상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빈 방. 어쩌면 이제 이 방은 자신의 방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구나. 나가야겠어.
왈칵.
너무 갑작스럽게 눈물이 쏟아졌다. 슬퍼서 눈물을 흘린 게 아니라, 눈물이 흘러서 슬펐다.
이기영은 방에서 나가려다 말고 주저앉았다.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어금니를 있는 힘껏 깨물어도 멈추지를 않았다. 그리고 기어이 소리를 내서 울었다.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제 사람들은 이기영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울음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래서 이기영은 더 크게, 더 크게 소리를 내서 울었다. 1분, 2분, 3분, 4분, 5분, ……. 이기영은 오랫동안 소리를 내서 울었다. 울면 울수록 슬픔이 더 커져서,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그때 누군가 방 문을 열었다. 눈이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붉게 충혈 된 눈으로 방을 두리번거렸다.
어머니!
나는 달려가서 와락 껴안았다.
하지만 내 팔은 허공을 갈랐다. 어머니를 만질 수 없었다.
어머니는 내 몸을 통과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분명히 무슨 소리가 들렸어. 우는 소리. 기영이가 우는 소리. 우리 기영이가 우는 소리가 들렸어.”
네, 맞아요. 제가 울고 있었어요. 아주 큰 소리로 울고 있었어요. 아무도 들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요. 그래서 더 크게 울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더 크게 울고 있어요. 어머니 귀에 들리도록 더 크게 울고 있어요. 들리세요?
어머니는 방금까지 내가 주저앉아서 울고 있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손으로 방바닥을 문지르면서 눈물을 흘렸다. 내 눈물이 고여 있는 곳에 어머니의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들려. 이 자리에 주저앉아서 울었구나. 그리고, 아직도 울고 있구나. 이 방 어딘가에서 울고 있구나. 슬프니? 기영아, 많이 슬퍼?”
네, 슬퍼요. 어쩜 이렇게 슬플 수가 있을까요?
“우리들이 슬퍼하니까 그래. 기영이 너를 알던 모든 사람들이 슬퍼하니까 그래. 그 슬픔들이 네 안에 다 모여들어서 그래. 그러니까 기영이 네가 슬퍼하는 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슬픔이 전해져서 그런 거야. 그렇게 생각해 줘. 그러면 덜 괴로울 거야. 기영아, 외롭니? 넌 살아 있을 때도 언제나 외로워 보였어. 그게 늘 가슴 아팠는데, 지금은 더 많이 외롭니? 춥지는 않아? 배는? 배는 안 고파? 어떡하니. 어떡하면 좋아. 엄마가 돼가지고 모르는 게 너무 많아. 기영이 네가 외로운지, 추운지, 배고픈지 어떤지, 아는 게 하나도 없어. 아니, 안다고 해도 해줄 수가 없는 거니? 이제는 엄마가 기영이 너한테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거니? ……기영아, 옆에 있니? 아직 이 방에 있는 거야? 미안해. 널 슬프게 해서 미안하고, 외롭게 해서 미안하고, 춥고 배고프게 해서 미안해.”
나는 방을 나왔다. 몇 년간 이 집에서 혼자 살았다. 부모님이 반대했는데도 멋대로 고집을 부려 독립을 했다. 그러고는 부모님이 들를 때마다 짜증을 부렸다. 바쁘다는 핑계로 부모님한테 얼굴을 자주 비추지도 않았다.
미안해할 사람은 어머니가 아니라 나다. 어머니는 평생 슬퍼할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버렸다.
슬픔이 북받쳤다. 그대로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어머니가 들을 수 있게 미친 듯이 울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울면, 어머니는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을 들으면, 내 울음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어디로 가면 좋을지 생각이 났다. 살아 있었을 때 우연히 며칠간 머문 적이 있던 곳. 그리고 떠나겠다고 했을 때 언제든 다시 오라고 했던 곳. 오고 싶을 때 오고 가고 싶을 때 가라고 했던 곳. 송아지만 한 흰색 개 한 마리가 항상 앞장서서 산책길을 안내해 주던 곳.
적어도 그곳에 가면 슬퍼서 울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 집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왔다.
눈앞에 암자가 보였다. 따로 등산로를 만들어놓지 않아서 신자들 아니면 찾는 이도 거의 없는 산 속 작은 절이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집 현관문은 보이지 않았다. 현관을 나서자마자 암자라니, 죽으면 순간 이동도 가능한 모양이었다. 살아 있었을 때 그렇게 바라던 능력이었건만.
대문은 열려 있었다. 절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천둥 같은 소리. 그래서 이름도 천둥이다.
송아지만 한 흰색 개가 꼬리를 힘차게 흔들며 산 위에서 뛰어내려 오고 있었다. 혼자 산에서 놀던 모양이었다. 꼬리를 어찌나 힘차게 흔들던지, 멀리서 보면 마치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것 같기도 했다. 저러다 하늘로 올라가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천둥이는 내 앞에 멈춰 서서 여전히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힘차게 흔들었다. 컹컹 짖다가 숨이 찬지 헥헥거리다가 다시 컹컹 짖었다. 누가 봐도 반가워서 환장한 모습이었다.
기뻤다. 나는 그런 천둥이의 모습을 보면서, 이곳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지냈어? 목소리가 더 우렁차졌네. 산 아래 마을사람들 귀에까지 다 들리겠다. 천둥아, 스님 안에 계셔?”
“컹컹컹!”
“미안. 죽어서도 역시 천둥이 네 말은 못 알아듣나 보다. 들어가 보자, 스님 계신가 안 계신가.”
절에 들어서면 바로 왼쪽 건물이 하숙생들 묵는 곳이다. 방이 두 개뿐이라 하숙생도 한꺼번에 두 명 이상은 묵을 수 없다. 그리고 마당 안으로 들어가면 왼쪽이 식당, 정면이 대웅전, 그 옆이 지장전, 그 옆이 약사전, 그 옆이 요사채다. 절이 작아서 마당 한가운데 서서 빙 둘러보면 절 구경은 끝난다. 스님은 요사채에 머문다.
스님이 요사채 툇마루에 앉아 있었다.
“오늘 누가 올 거 같더니만, 기영이 너였구나. 난 또 반가운 손님이 오나보다 했지. 천둥이 놈만 신났네.”
“스님은 저 안 반가우세요?”
“죽은 놈 보는 게 뭐가 반가워. 무섭기만 하지. 그러니까 나한테 가까이 올 생각 하지 마.”
“쳇, 가까이 안 가요.”
“응, 그래, 그래야지. 참, 그리고 기영아, 이틀 뒤에 누가 또 올 거야.”
“누가요?”
“응, 나도 몰라.”
“아니, 누가 온다면서, 누군지도 모르세요?”
“인석아, 모를 수도 있지, 그런 걸 가지고 그렇게 따지듯이 묻냐!”
“죄송해요. 제가 깜빡했어요. 스님하고는 원래 대화가 매끄럽게 연결이 안 되는데. 그런데 누가 오면 제가 뭘 해야 하나요? 같이 산책이라도 다녀야 하나. 그건 저보다 천둥이가 더 잘 할 텐데.”
“뭘 하긴 뭘 해. 그냥 그렇다는 거지. 내가 ‘아’ 하면 ‘어’ 하고 이해하려 하지 마. 그냥 ‘아’ 하면 ‘아’로 끝내.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냐. 그러니까 대화가 연결이 안 되는 거야, 인석아.”
“네, 알겠습니다.”
스님의 주특기다. 말하기 껄끄러운 건 빼고 말한다. 그래서 내가 물으면 괜히 역정을 낸다.
그나저나 이틀이라, 겨우 이틀인가. 너무 짧은데.
옆에서 천둥이가 낑낑거리고 있다. 슬퍼하는 것이다. 동시에 나를 위로하는 것이고. 이럴 때 보면 평범한 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 전생에 정체가 뭐였을까. 전에 스님한테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인석아.” “그럼 천둥이하고는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시내 나갔다가 웬 강아지가 나를 졸졸 따라오기에 그냥 데려왔지.” “그럼 주인 있는 강아지였을지도 모르잖아요. 아니면 어미가 있었을 수도 있고요.” “그럴 수도 있었겠지.” “그럴 수도 있었겠지가 아니죠. 그런 강아지를 함부로 데려오시면 어떡해요!” “그런데 인석이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럼 자꾸 따라오는데 어떡해, 인석아. 가라고 해도 안 가고 계속 따라오는데. 그렇다고 내가 가던 길 멈추고 가만히 서 있을 수는 없는 거 아니냐. 그래서 그냥 나는 계속 내 갈 길을 갔고, 천둥이는 그런 나를 계속 따라왔고. 그렇게 된 거야.” “그럼 스님이 데려온 게 아니죠. 천둥이가 따라온 거죠. 애초에 말씀을 그렇게 하셨어야죠.” “길게 말하기 귀찮아서 그랬지, 인석아.”
천둥이는 절에서 살 운명이었던 걸까. 전생에 스님이었나. 볼 때마다 여러 가지 궁금증을 갖게 만드는 녀석이다.
“기영아, 천둥이랑 같이 가서 산책이나 해라. 난 들어가서 공부 좀 해야겠다. 아침부터 너 기다리느라 오늘은 통 공부를 못 했어.”
“네. 그러고 보니까 스님 낮잠 주무실 시간이네요.”
“헛, 귀신같은 놈. 아니지, 진짜 귀신이지. 아무튼 난 들어간다.”
그러면서 스님이 일어섰다. 그 순간 빙그르르 하고 세상이 뒤집혔다. 마치 물구나무서서 바라보는 세상처럼.
어, 어, 이상하다. 어느 한 쪽이 뒤집혔다. 내가 뒤집힌 건가. 아니면 세상이 뒤집힌 건가.
천둥이가 옆에서 컹컹 짖어댔다. 짖는 소리가 굉장히 컸다. 갑자기 목청이 트이기라도 한 걸까.
고개를 돌려서 천둥이를 내려다보려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발아래 있어야 할 천둥이가 내 얼굴 근처에 있었다. 뒤집힌 채로. 하지만 네 발은 땅을 디딘 채로.
어떻게 된 거지. 스님도 그렇고 천둥이도 그렇고, 분명 거꾸론데, 발이 땅에 붙어 있네.
나는 내 발 밑을 내려다보았다.
이상한 건 없었다. 나 역시 땅을 밟고 서 있었다.
나도 땅을 밟고 서 있고, 스님과 천둥이도 땅을 밟고 서 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모습은 거꾸로다.
“스님, 뭔가가 좀 이상해요.”
“그래, 그렇구나.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아직은 때가 아닌데, 기영이 네가 이곳에 미련이 없어서 그런가, 너무 일찍 나뉘어졌구나. 네가 사는 곳과 내가 사는 곳이 말이야. 곧 다시 예전처럼 되돌아올 거다. 걱정하지 마라. 아직은 때가 아니니까.”
그리고 스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빙그르르 하고 세상이 뒤집혔다. 내가 사는 세상이.
미련이 없지는 않을 텐데, 막상 생각하려니 떠오르지가 않는다. 떠오르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슴은 먹먹하다. 어떤 것들에 미련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이곳에 무언가 미련이 있다. 뭘까. 아니, 그 전에 왜 스님은 내가 미련이 없을 거라고 했을까.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나는 대학교 다닐 때부터 아팠다. 그래서 휴학과 복학을 밥 먹듯이 했다. 덕분에 친한 친구도 없었다. 삭막한 대학 생활이었다. 졸업한 게 기적이었다. 쓸데없는 기적. 이렇게 일찍 죽을 줄 알았더라면, 굳이 졸업할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그래도 대학 졸업장 덕분에 원하던 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다. 물론 일주일 만에 그만뒀지만. 아, 그러고 보면 고작 일주일 동안 회사에 다니려고 대학 졸업장을 땄던 건가. 죽고 나서 돌이켜 보니 참 미련한 짓을 했다. 아프다는 이유로 회사 생활을 학교 다닐 때처럼 할 수는 없는 건데. 일주일이 7년처럼 길었다. 결국 말없이 회사에 안 나갔다. 회사에서도 내게 연락하지 않았고.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줄곧 병원만 찾아다녔다. 스님과 천둥이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에서 나는 그렇게 살았다. 미련이 없을 수가 없다. 게다가 어처구니없이 죽었다. 의사가 나를 죽였다. 미련, 미련이 남는다.
안 아픈 채로 다시 한번 살고 싶다.

 


2

 

기영이가 죽었다. 병원에서 수술을 받다가 죽었다.
기영이는 대학교 친구다. 1학년 오리엔테이션 때 친해졌다. 음주가무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서, 오리엔테이션 내내 우리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아마 그 자리에 기영이가 없었으면, 다들 처음 본 사이라 분위기가 상당히 어색했을 것이다. 그래서 기영이는 더 기를 쓰고 음주가무를 권했다.
“어이, 이름이 뭐야?”
술이 취했는지 기영이가 내 앞에 빈 술잔을 내밀며 그렇게 물었다.
“대원이야, 이대원.”
“아, 이대원. 꼭 이태원 같네. 이름 외우기 쉽다. 난 기영이야, 이기영. 반가워. 자, 술 한잔 받고.”
술이 취했는지 기영이는 내 앞에 앉아서 몇 번이나 내게 술을 권했다. 그러다 친해졌다. 함께 음주가무를 즐겼다. 재능도 없으면서 나는 기영이를 따라 막춤을 추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기영이는 늘 에너지가 넘쳤다. 강의실에서건 술자리에서건 분위기가 조금이라도 가라앉으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실력을 뽐냈다. 춤, 노래, 음담패설 등 가리지 않고 선을 보였다. 그러면 금세 분위기가 달아오른다. 그런 탁월한 재능을 가진 친구였다. 그래서 우리는 기영이만 곁에 있으면 편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교수님 기분이 어떻든, 술자리 분위기가 어떻든 신경 쓸 필요가 없었으니까. 기영이가 다 알아서 해줬으니까. 정말 바보 같은 녀석이었다. 알아서 빙글빙글 돌며 춤추고 노래하던 녀석, 우리는 그저 박수만 쳐주면 그만이었다. 병신 같은 새끼. 저 병신 같은 새끼. 우리는 뒤에서 기영이를 그렇게 흉봤다. 병신 같은 새끼라고. 대신 박수는 열심히 쳐주었다. 그런 기영이가 1학년 2학기가 되자 변했다. 박수를 쳐줘도 춤을 추지 않았다.
교수님 기분이 어떻든 신경 쓰지 않았다. 술자리에는 참석하지도 않았다. 우리와 어울리려 하지도 않았다. 학생식당 같은 곳에서 우리와 마주쳐도 아는 체하지 않았다. 그냥 지나쳐서 혼자 밥을 먹었다. 박수만 쳐주면 춤추고 노래 부르던 병신 같은 새끼가 말이다. 게다가 툭하면 약을 먹었다.
“기영아, 너 어디 아파? 그 약은 뭐야?”
“별 거 아니야. 요즘 그냥 소화가 좀 안 돼서”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불안한 듯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러고는 왼손 엄지손톱을 깨물며 자리를 피했다.
수업 시간은 늘 지루했고, 술자리도 흥겹지 않았다. 같이 술자리에 참석하자고 하면 기영이는 늘 같은 말만 했다.
“미안, 갈 데가 있어서.”
“어디? 내일 가면 안 돼?”
“안 돼. 병원 가야 하거든. 예약해 둔 상태라 안 가면 안 돼.”
“무슨 병원을 그렇게 자주 가?”
“아프니까. 계속 아프니까.”
“어디가 아픈데? 여전히 소화가 잘 안 되는 거야?”
“응.”
그런 게 어딨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소화가 잘 안 될 수 있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왠지 그렇게 하면 내가 바보 같아 보일까 봐 참았다.
그런 기영이가, 수시로 약을 먹고 자주 병원에 다니던 기영이가 1학년 2학기를 마치고 휴학을 했다. 소문에 의하면 몸이 안 좋아서 요양도 할 겸 작은 암자에 들어갔다고 했다. 어쩌면 자퇴하고 스님이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 즈음부터 기영이는 그런 이미지를 갖게 됐다. 더 이상 박수만 쳐주면 열심히 춤추던 병신 같은 새끼가 아니었다. 무언가 감추고 있는 듯한, 불치병에라도 걸린 듯한,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버린 듯한, 유명한 예술가들의 전철을 밟아 요절이라도 할 듯한, 속세를 등질 듯한, 그럴 것 같은 녀석으로 바뀌어 있었다.
복학을 해서도 기영이는 나와 어울리지도 않았고, 우리와 어울리지도 않았다. 늘 혼자 다녔다. 강의실 아니면 식당 아니면 도서관. 수업 시간에는 말이 없었고, 손에는 항상 어려운 책이 들려 있었고, 쉬는 시간마다 약을 먹었다.
그리고 다음 학기에 또 휴학을 했다. 머리가 어떻게 돼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소문이 돌았다. “기영이 걔 미쳤다 그러던데.” “왜?” “그건 모르지.”
복학을 하고 또 휴학을 하고. 그래서 기영이와는 더 이상 같은 수업을 듣지 못했다. 아주 가끔 도서관이나 학생식당에서 마주치는 정도였다. 물론 그때마다 기영이는 내게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눈이 마주쳐도 그냥 지나쳤다. 마치 나를 못 알아보는 사람처럼. 그렇다고 해서 내가 먼저 아는 체를 할 수도 없었다. 뭐랄까, 그냥 기영이는 나와는 다른 세계에서 사는 사람 같았다. 다른 걸 보고, 다른 걸 듣고, 다른 걸 생각하고. 기영이는 그럴 것 같았다.
나는 기영이에게 열등감을 느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직장을 다니면서도 우리들은 가끔 만났다. 만나서 밥을 먹고 술을 마셨다.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불렀고, 자리를 옮겨 또 술을 마셨다.
“기영이랑 연락해 본 사람 있어?” “기영이 걔 요즘 뭐 하고 지낸데?”
술 마실 때면 우리들은 항상 누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기영이의 안부를 물었다. 다들 묻기만 할 뿐이었다. 대답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다들 술이 취하면, 한 명 두 명 일어나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다른 테이블에서 시끄럽다고 항의해도 못 들은 척했다. 주인이 와서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해도 못 들은 척했다. 그러다 매번 쫓겨났다.
이상했다. 기영이가 춤추고 노래 부를 때는 단 한 번도 쫓겨난 적이 없었는데. 오히려 다른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까지 신이 나서 박수를 쳤는데. 주인은 술도 몇 병 공짜로 주고, 다음에 또 오라며 술값까지 깎아줬는데.
우리는 매번 쫓겨났다.
“기영이랑 연락해본 사람 있어?” “기영이 걔 요즘 뭐하고 지낸데?”
바보 같은 새끼. 죽었다.
그런 기영이가 죽었다.
기영아! 기영아! 이기영! 야, 이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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