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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피의 자물쇠

2013.12.31 22:5112.31

피의 자물쇠

 


녹색 안개가 걷히고 흰 모래가 드러난다.

흰 모래 한가운데 황금 잎사귀가 달린 높은 나무가 솟아 있다.

 

소년은 나무 아래로 다가간다나무 아래 남자가 앉아 있다.

남자의 얼굴은 창백하다마른 몸집에 키가 그다지 크지 않다남자의 눈은 핏발이 선 듯 불그스레하다.

... 핏발이 선 것이 아니다남자의 눈동자는 붉다.

그 붉은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남자가 먼저 고개를 돌린다.

넌 여기 있으면 안 된다.

남자가 말한다낮은 목소리인데도 주위가 우르릉울린다.

돌아가라.

그러나 소년은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다.

남자가 소리 없이 몸을 일으킨다남자가 움직이자 머리 위에서 무거운 황금 잎사귀가 한 번 떨리더니 스르륵 아래로 처진다남자는 몸을 돌려 걷기 시작한다.

소년은 따라간다어째서 따라가는지 소년도 알지 못한다그러나 남자를 따라가야 한다.

 

*

아이는 꿈을 꾸는 것 같다언제나 잠들어 있다.

병원 생활이 길어질 것이라는 예상은 물론 했다회복하려면 충분히 쉬어야 할 테니 잠도 많이 자야 할 것이다다만 아이가 가끔 팔을 움직이거나 고개를 저으며 음하고 알 수 없는 소리를 낼 때마다 나는 불안해졌다아이가 중환자실에 있었을 때온몸에 붕대를 감고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로 어하고 의미 없는 신음소리를 흘리며 오른팔을 휘두르던 모습이 떠올라서 새삼 다시 가슴이 찢어졌다.

깨우려고 손을 댔을 때 아이의 피부는 차가웠다나는 겁에 질렸다그러나 아이가 눈을 뜨고 평온하게 나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곧 마음을 놓았다.

그 때 알았어야 했다.

 

남자는 소리 없이 찾아왔다.

나는 잠이 깨었다바로 한 순간 전까지 잠들어 있었는데다음 순간 일어나 있었다그리고 나는 이유를 모르는 채 현관으로 나갔다.

내 앞에 남자가 서 있었다어둠 속에서도 푸르스름할 정도로 흰 얼굴과 붉은 눈동자가 또렷하게 보였다.

아이를 데리러 온 것일까내가 입을 열기 전에 남자가 먼저 물었다.

누구야?

속삭이는 목소리였지만 현관 전체가 진동했다차가운 기운이 주변의 공기를 순식간에 얼렸다.

누가 아이를 다치게 했지?

내가 대답하기 전에 뒤에서 딸의 목소리가 답했다.

몰라요.”

딸은 방문을 한 뼘 정도만 열고 눈만 빠끔히 내민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범인 아직 못 잡았어요.”

남자는 붉은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사라졌다.

 

남자가 사라진 자리에도 냉기는 한동안 그대로 남아 있었다.

딸이 방문 사이로 고개를 조금 더 내밀고 물었다.

아빠야?”

딸에게 대답할 거짓말은 미처 준비해놓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소년은 남자를 따라서 흰 모래 위를 말없이 걸었다.

푸른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떠 있었다하나는 황금 같은 노란색이었고 다른 하나는 불타는 빨간색이었다금빛 태양은 움직이지 않고 제 자리에 떠 있었다붉은 태양은 가끔 불꽃을 뿜으며 흔들리곤 했다.

사실은 양쪽 다 태양이 아니라는 것을 소년은 알고 있었다황금 태양은 거대한 자물쇠였다붉은 태양은 불을 뿜는 말이었다아직은 때가 되지 않아서 하늘을 가로질러 달려가지 않을 뿐이었다.

앞서 가는 남자는 두 개의 태양 아래 걸어가는데도 그림자가 없었다흰 모래 위에 발자국조차 남기지 않았다.

소년은 주위를 둘러보고 자신도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쩐지 오싹해져서 소년은 더 빨리 속도를 내어 남자를 따라갔다.

남자는 무심하게 움직이다가도 가끔 뒤를 돌아보며 소년을 기다려 주었다.

 

*

남자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아직 어린 꼬마였다나는 집 앞 공중전화 부스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는 금방” 오겠다고 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와서 대문을 열어주겠다고 했다나는 거의 매일같이 어둑어둑해진 저녁 하늘 아래 공중전화 부스 안의 전화기에 매달려 울다가 지쳐서 웅크리고 있곤 했다.

남자는 소리 없이 다가와서 내 앞에 섰다그 때의 나는 작았기 때문에 남자가 거대한 탑처럼 커 보였다.

나는 깜짝 놀라서 일어섰다남자가 공중전화를 쓰려는 줄 알고 부스에서 나와서 옆으로 비켜섰다.

남자는 전화에 관심이 없었다같은 자리에 그대로 서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꼬마야.

남자가 나를 불렀다.

엄마 어디 계시니?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남자의 창백한 얼굴과 붉은 눈이 무서웠기 때문이기도 했고엄마가 어디에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 엄마는 금방” 집에 온다고 했다그 뒤로 세 번 더 전화했지만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대문 앞으로 사람들이 지나갔다엄마와 비슷해 보이는 아줌마가 지나갈 때마다 나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그러나 낯선 아줌마는 무관심하게 대문 앞을 지나쳐 사라져 버리곤 했다.

엄마인 줄 알고 다가갔는데 엄마가 아닐 때도 많았다그럴 때 어른들의 의아해하는 눈길 앞에서 나는 부끄러웠다.

남자가 뭔가 또 물어보려고 했다입을 열자 냉기가 훅 끼쳤다.

그 때 대문 앞에 엄마가 나타났다가방을 뒤져 열쇠를 찾기 시작했다.

엄마!”

나는 큰 소리로 부르며 일어나서 달려갔다남자에게서 도망쳤다.

 

어째서 나를 데려가려 했는지나는 나중에 남자에게 물었다어째서 아이들을 데려가는지왜 부모나 어른들을 그대로 내버려두는지 물었다.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이들을 데려가는 게 아냐아이들이 나를 따라오는 거야.

남자가 설명했다.

고문 같은 삶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아이들이 남자를 따라가면남자는 차가운 손가락으로 아이들의 멍들고 찢어지고 부러진 상처를 어루만져 식혀 주었다그리고 아이들을 업고 녹색 안개와 검은 물을 건너 먼 곳으로아무도 아이들을 건드릴 수 없는 곳다시는 아무도 아이들을 괴롭힐 수 없는 곳으로 데려다 주었다.

 

남자는 아이를 데리러 온 것일까나는 미처 묻지 못했고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 잘못이 아닌데도 남자는 아이를 데리러 온 것일까내게서 아이를 빼앗아가려고 온 것일까.

사실은 내 잘못이다나도 알고 있다.

아이가 다치는 것은 어른의 책임이다어른이 일부러 아이를 다치게 했다면 그것은 세상 모든 어른들의 책임이다.

내가 모르는 아이가 다쳤다 해도어른의 손에 아이가 상처를 입었다면 나도 어른이기 때문에 책임이 있다하물며 내 아이가 다쳤다면 그것은 다른 누구보다도 부모인 나의 책임이다.

그러나 남자도 아이의 부모이다어째서 나에게만 책임을 지우고 아이를 빼앗아가려 하는 것인가

… 아무도 아이를 빼앗아가지 않는다남자가 아이를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남자를 따라가는 것이다.

아이가 나를 떠나기로 결정했다면 막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잠든 채 좀처럼 깨지 않는 아이의 손을 잡고 울었다.

 

**

머리 위의 푸른 하늘에 커다란 검은 새가 날고 있었다새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마치 비명 소리와도 같아서소년은 깜짝 놀라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지평선 저쪽에서 붉은 말이 하늘을 가로질러 달려오기 시작했다.

남자가 소년을 끌어당겼다소년은 끌려가서 그대로 남자에게 안겼다.

남자의 품은 차가웠지만 춥지는 않았다붉은 말이 달려가면서 눈에서 타오르는 불덩어리를 떨어뜨리고 털가죽에서 불꽃을 흩날렸다사방이 온통 불의 구름에 휩싸였다그 열기 안에서 남자의 품은 시원하고 기분 좋게 느껴졌다.

남자는 붉은 말이 지나간 뒤에도 한동안 소년을 품에 안고 있었다.

소년이 꼼지락거리자 남자는 소년을 놓아주었다다시 흰 모래 위를 걷기 전에 남자가 소년에게 물었다.

행복하니?

소년은 잠시 궁리하다가 대답했다.

엄마랑 누나가 보고 싶어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붉은 눈으로 소년을 쳐다보았다소년이 물었다.

아빠는 왜 우리랑 같이 살지 않아요?

남자는 대답 대신 소년에게 손을 내밀었다소년이 그 손을 잡았다.

남자와 소년은 흰 모래 위를 걷기 시작했다.

 

소년은 학교에 대해 이야기했다친구들에 대해 이야기했다누나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고에 대해서 소년은 많은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이렇게 세게 맞은… 세게 부딪친 것 같았고…. 이렇게 쾅… 굉장히 세게…. 아프지는 않았는데…. 그 다음은 기억이 안 나요.

소년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남자는 발걸음을 멈추었다소년도 따라서 멈추었다남자가 들여다보는 곳을 보았다.

발 밑의 흰 모래가 봉긋하게 솟아올랐다그 안에서 도마뱀이 고개를 내밀었다밝은 자줏빛 도마뱀이 흰 모래 밖으로 기어 나왔다.

남자가 도마뱀을 붙잡았다입 안에 손을 넣었다도마뱀의 자줏빛 입 안에서 약간 노란빛이 도는 하얀 물건을 꺼냈다긴 뼈였다.

남자는 도마뱀의 입 안에서 꺼낸 뼈를 힘주어 부러뜨렸다뼈가 부러지며 안에서 푸른 액체가 흘러나왔다남자는 푸른 액체를 흰 모래 위에 부었다.

흰 모래 위에 푸른 웅덩이가 생겼다푸른 웅덩이의 거울 같은 표면 위로 남자가 두 개로 갈라진 뼛조각을 흔들었다푸른 웅덩이에 잔물결이 생기며 여러 가지 영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년이 자전거를 끌고 횡단보도에 와서 섰다신호가 녹색으로 바뀌었다소년이 자전거를 끌고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은색 세단이 달려와서 소년을 치었다차에 치인 소년이 공중에 붕 떴다가 땅에 떨어졌다은색 차는 소년이 놓친 자전거를 피해서 오른쪽으로 급커브를 돌아 사라져 버렸다.

여기까지 보고 나서 남자는 흰 모래 위의 푸른 액체를 다시 뼛조각 안으로 쓸어 담았다뼛조각 두 개가 갈라진 곳을 갖다 대자 하나로 이어졌다남자는 흰 모래에 긴 뼈를 꽂았다밝은 자주색 도마뱀이 그 뼈 위에 앉았다긴 뼈는 흰 모래 안으로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복수는 저주다.

밝은 자주색 도마뱀이 남자에게 말했다.

처벌은 순리에 맡기고 너는 너의 본분을 다해라.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밝은 자주색 도마뱀은 한숨을 쉬고는 긴 뼈와 함께 하얀 모래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소년이 뭐라고 묻기 전에 남자는 다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복수는 저주라는 게 무슨 뜻이에요?

소년이 남자의 뒤를 서둘러 따라가며 물었다.

아빠는 왜 우리와 같은 세상에서 살지 않아요?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무표정한 붉은 눈이 무서워서 소년은 흠칫 몸을 움츠렸다.

남자가 소년에게 손을 내밀었다소년은 아까처럼 남자의 손을 잡았다.

남자는 속도를 늦추어 좀 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나도 전부 다 기억하지는 못한다.

남자가 천천히 걸으며 천천히 말했다.

아버지에게 맞았고자주 많이 맞았다

남자는 어느 추운 날많이 맞은 뒤에 속옷만 입은 채 쫓겨나서 담벼락 아래 웅크리고 앉아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지금의 자신처럼 창백한 피부에 눈물 젖은 붉은 눈의 무표정한 여자가 다가와 뜨거운 손을 내밀었던 일을 이야기했다어린 꼬마였던 남자는 너무 추워서 그 손을 잡았고,우는 여자는 어린 꼬마를 업고 흐르는 녹색 안개와 검은 물을 지나 푸른 하늘에 황금 태양이 빛나는 곳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남자는 불쑥 물었다.

행복하니?

소년은 조금 어리둥절해서 대답하지 못했다남자가 다시 물었다.

이런 세상에서 태어나 살게 해서나를 원망하니?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다른 집처럼우리도 엄마랑 아빠랑 다 같이 살았으면 좋겠어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차가운 손으로 힘주어 소년의 손을 꼭 잡았다.

 

*

잠깐 꿈에서 깨어난 드문 순간에아이는 이런 일들을 이야기했다딸이 걱정했다.

"너 깨어나기 전에 잡혀 있던 데 아냐내가 열쇠로 열어서 너 빼내 왔으니까 다시는 안 돌아가도 될 줄 알았는데…."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거기는 가짜고아빠랑 있는 데가 진짜야."

그리고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누나 기억 안 나거기 있잖아우리 아주 어렸을 때 살았던 거기."

아이가 그곳을 기억할 줄은 몰랐다.

 

남자와 함께 아이를 낳아 키우면 안전할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그곳에서 아이들을 키우면 안전할 거라고 나는 믿었다.

그러나 그곳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장소가 아니었고아이들은 인간의 아이들이었다최소한 나에게서 물려받은 부분은 그랬다.

아이들을 그곳에서 계속 지내게 해서는 안 된다고 먼저 말한 것은 남자였다.

여기서 계속 지내면 나 같은 존재가 될 거야.

남자가 말했다.

아이들은 인간으로 살아야 돼인간으로 자라나서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게 해 줘야 돼.

그것이 옳은 일인지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무엇보다도 인간의 세상으로 돌아갔을 때 내가 아이들을 해치지 않고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도와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인간의 유년기에 대하여 내가 아는 것은 오로지 분노와 두려움과 절망이었다아이들에게만은 절대로 그런 것을 물려줄 수 없었다그러나 무엇을 주지 말아야 하는지는 뼛속 깊이 잘 알았지만 무엇을 주어야 할지는 잘 알 수 없었다내가 받은 적이 없는 것을 어떻게 줄 수 있을지 언제나 불안했다.

미안해.

나와 아이들을 두고 떠나면서 남자가 말했다.

남자는 녹색 안개와 검은 물 건너에 속한 존재였다그 창백한 피부와 붉은 눈은 살아 있는 아이들 곁에 오래 둘 수 없었다아이들을 데리고 혼자 남아서나는 두려웠지만 남자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설명하지 않았는데도 어쩐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이 모든 일들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

흰 모래 위로 갈색 풀이 자라났다드문드문 자라나던 풀은 점점 더 무성해져 마침내 눈길 닿는 곳까지 모든 땅을 꽉 채웠다.

그리고 하늘에서 풀밭 위로 뭔가 떨어지기 시작했다소년은 처음에 비가 오는 줄 알았다그러나 빗방울이 아니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꽃송이였다큰 꽃도 있고 작은 꽃도 있었으며 색깔도 분홍색노란색하늘색 등 색색으로 모두 달랐다꽃송이는 움츠린 채로 떨어져서 갈색 풀잎에 닿으면 미끄러져 들어가서 자리를 잡은 뒤에 활짝 피어났다.

소년은 감탄하며 이런 광경을 보고 있었다소년이 밝은 분홍색의 커다란 꽃을 만지려 했을 때 남자가 말했다.

건드리면 안 된다.

그리고 남자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꽃송이 안에서 검고 찐득찐득한 액체가 흘러나왔다검은 액체가 흘러 떨어져 땅에서 한 줄기로 모였다공기 중에 석유 냄새가 진동했다.

수많은 꽃송이에서 흘러나온 기름 방울은 점점 더 넓게 모여서 강물처럼 흘렀다갈색 초원 위로 흐르는 검은 기름의 강을 따라 남자는 소년과 함께 걸었다.

그리고 검은 기름의 강이 휘어지며 남자와 소년의 앞을 가로막았다강 너머는 은빛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다안개가 너무 짙어서 건너편에 무엇이 있는지 볼 수 없었다.

검은 기름의 강 속에서 거대한 붉은 사슴벌레가 기어 나왔다.

복수는 저주다.

불타는 듯 새빨간 사슴벌레는 뿔처럼 솟아난 턱을 움직이며 남자에게 말했다.

처벌을 순리에 맡기고 본분을 다하겠느냐아니면 아이를 위해서 너의 존재를 던지겠느냐?

도와주지 않겠다면 비켜라.

남자가 대답했다.

도와주겠다면 그를 잡을 수 있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라.

사슴벌레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검은 기름의 강 위로 다리처럼 등을 대었다.

남자가 그 위로 건너가려고 사슴벌레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을 때 소년이 불렀다.

아빠.

남자는 멈추었다돌아보았다.

우린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남자는 대답 대신 한 손으로 소년에게도 사슴벌레 위로 올라오라고 신호했다.

소년이 다시 물었다.

복수는 저주라는 게 무슨 말이에요날 위해서 존재를 던진다는 건 또 무슨 뜻이에요?

남자는 소년에게 손을 내밀었다소년은 망설이다가 그 손을 잡았다.

남자는 소년을 가볍게 사슴벌레의 등 위로 끌어올렸다.

너를 다치게 한 그 놈을 잡고 나면나는 인간의 세상으로 가서 너와 가족들과 함께 살 것이다.

남자가 말했다.

그 놈을 잡아 복수하면 나는 더 이상 이곳에 속하지 않게 될 것이다존재를 던진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사슴벌레의 미끌미끌한 등 위를 천천히 조심스럽게 건너가며 남자가 말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네가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집으로 돌려보내 주마.

소년은 잠시 망설였다.

정말 우리랑 같이 살 수 있는 거예요?

남자는 소년의 손을 꼭 잡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소년이 다시 물었다.

그 사람은나를 차로 치었던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데요?

대가를 치르게 되겠지.

남자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 사람 그냥 내버려두고 나랑 같이 집으로 가면 안 돼요?

소년이 물었다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소년은 한숨을 쉬었다그리고 남자의 손을 잡고 붉은 사슴벌레의 등을 건너 은빛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소년과 남자가 검은 강을 다 건너자 사슴벌레는 턱을 부딪쳐 커다랗게 딱딱 소리를 냈다깜짝 놀란 소년이 뒤돌아 보았을 때 사슴벌레는 이미 검은 기름의 강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은빛 안개 속에서 남자의 차가운 손을 잡고 걸으며 소년은 어쩐지 다시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

잠든 아이 곁에 앉아서 나는 병실의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아이가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는 순간을 기다리며차가운 손이 빨리 다시 따뜻해지기를 기다리며 이해도 집중도 하지 않은 채 소리를 꺼버린 움직이는 화면을 그저 바라보곤 했다그런데도 어떤 이야기들은 마음에 남아 지워지지 않았다.

갈비뼈가 16개 부러지고 허벅다리 뼈가 반 동강이 난 어린 소녀는 학교에서 언제나 밝고 착한 아이였다고 했다.

아이는 밝고 착한 것이 아니라 공포에 질려 있었을 것이다아이들은 천사가 아니다소리를 지르고 뛰어다니고 뒹굴고 장난을 치다 물건을 깨뜨리고 심술을 부리고 짜증을 내고 떼를 쓰고 울고 보채는 것이 보통의 아이다말썽을 전혀 부리지 않고 언제나 밝게 웃고 고분고분하고 착한 아이는 언제나 끊임없이 말썽만 부리는 아이와 마찬가지로혹은 그보다 더어딘가 잘못된 것이다.

수상한 정황에서 숨진 다른 소녀에 대해 친언니는 자신이 죽였다고 말하며 동생을 때려죽인 계모를 감쌌다고 했다아이는 계모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공포에 질린 것이다자신도 똑같이 맞아 죽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아이에게 언성 한 번 높여보지 않은 부모는 세상에 없다홧김에 등짝이나 엉덩이 한 번 후려쳐보지 않은 부모도 드물 것이다그러나 보통의 부모혹은 부모 역할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서 멈춘다.

자신보다 약한 상대를 완전히 짓밟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부류의 인간이 존재한다아이가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자기 발 앞에 엎드려 벌벌 기면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을 감상하고 즐기며 자부심을 느끼는 인간이 있는 것이다.

그런 인간은 교미하고 번식할 자격이 없으며 하물며 타인의 자식을 데려다 고문할 자격은 더더욱 없다애초에 팔다리를 달고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갈 자격조차 없다.

화면을 보면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어른 여성이 아닌아이의 엄마가 아닌 어린 소녀로 되돌아갔다.

어린 아이가 얼마나 깊은 공포와 절망을 느낄 수 있는지그리고 얼마나 커다란 분노를 품을 수 있는지 나는 정확히 기억한다.

언젠가 그 공포와 절망과 분노가 수백 배수천 배로 되돌아와 저들을 덮치기를 나는 기원한다.

 

**

안개가 걷혔을 때 소년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흰 모래와 그 위로 우뚝 솟은 키 큰 나무였다나무의 짙은 녹갈색 가지에는 무거워 보이는 황금 잎사귀가 달려 있다.

- 여긴 아까….

소년이 입을 열었다그 때 하늘에서 비명 같은 새 울음 소리가 들렸다.

꺄아아아아아….

거대한 검은 새는 공간을 모두 찢을 듯한 소리로 외치며 소년과 남자의 앞을 휩쓸고 지나갔다.

새가 지나간 자리에 조그만 애벌레 같은 것이 떨어져 있었다하얗고 조그만 덩어리가 그보다 더 흰 모래 위에서 꿈틀거렸다.

남자는 두 손가락으로 애벌레 같은 것을 집어 들었다나무를 향해 던졌다.

굵은 녹갈색 나뭇가지가 상상할 수 없이 재빠르게 움직였다황금 잎사귀가 마치 손바닥처럼 펼쳐져 애벌레를 잡았다잎사귀는 붙잡은 것을 도르르 말아서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올랐다.

남자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이젠 어떡해요?

소년이 물었다.

기다리자.

남자가 말했다.

뭘요?

소년이 다시 물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처음으로 소년을 보며 웃었다.

 

기다리는 동안 남자는 커다란 나무 밑의 흰 모래 위에 앉아서 소년에게 복수에 대해 이야기했다.

처음 아버지에게 맞았을 때는 무서웠다아버지가 나를 죽일 거라고 생각했고그래서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매질이 되풀이되면서 분노가 쌓였다.

남자는 언젠가 어른이 되면 아버지를 죽이리라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 분노를 잊었다면 나도 다른 모든 아이들처럼 강을 건너 안개 너머의 편안한 곳으로 사라졌을 것이다그러나 나는 멀리 떠나온 뒤에도 마지막까지 그 분노를 놓을 수가 없었다.

왜요?

소년이 물었다남자가 말했다.

마음 속에 분노와 두려움 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다른 게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분노를 잊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아빠의 아빠잖아요.

소년이 말했다.

멀리 떠났잖아요오래 전 일이잖아요...

남자는 소년을 바라보고 조금 웃었다.

지금도 그렇게 화났어요?

소년이 물었다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소년이 자신이 품은 것과 같은 분노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남자는 안도했다용서란 좋은 것이지만 세상에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일도 있으며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도 존재한다는 것을 남자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네가 이 모든 것을 목격하지 않고 빨리 너의 세상으로 돌아가기를 빌었다.

남자가 말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겁내지 말고마음에 담아두지 마라이 모든 게 꿈이라고 생각해라.

그리고 남자는 일어섰다소년도 따라서 일어섰다.

남자가 휘파람을 불었다공기가 찢어질 듯한 날카로운 소리에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거대한 검은 새가 어디선가 날아와서 남자 앞에 내려앉았다.

복수는 저주다.

남자가 입을 열기 전에 검은 새가 말했다.

처벌을 순리에 맡기고 너의 본분을 다해라마지막 경고다.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할 수 없지.

그리고 검은 새는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소년은 새가 날아간 곳을 따라 위를 올려다 보았다새는 위쪽 높은 나뭇가지 위로 날아갔다황금 잎사귀가 애벌레 같은 것을 받아 움켜쥐고 도르르 말려 올라갔던 곳 부근에 은빛 열매가 매달려 있었다갈가마귀는 그 열매를 따서 부리에 물고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지평선에서 드드드드…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과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저 멀리서부터 불꽃이 휘날리며 공기가 뜨거워졌다.

이리 와.

남자가 소년을 끌어당겼다소년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하고 얼른 남자의 품에 안겼다남자는 소년을 품 안에 꽉 껴안으며 손바닥으로 소년의 눈을 가렸다.

거대한 나무 위로 불타는 붉은 말이 지나갔다갈기와 털에서 불꽃을 휘날리고 눈에서 불덩어리를 떨어뜨렸고말이 지나간 자리는 화염과 열기로 뒤덮였다.

붉은 말이 지나갈 때 거대한 갈가마귀가 마주 날아가며 부리에 물고 있던 은색 열매를 던졌다붉은 말은 은빛 열매를 받아서 이빨 사이에 꽉 물었다.

그리고 붉은 말은 하늘을 가로질러 달렸다하늘 위 저 멀리 푸른 바다 위에 떠 있는 황금 자물쇠에 도달했을 때 붉은 말은 이빨에 물고 있던 은빛 열매를 황금 자물쇠 구멍 안으로 던져 넣었다.

남자는 외치기 시작했다.

동쪽에서 갈가마귀가 황금 열쇠와 황금 자물쇠를 가져온다자물쇠를 잠가 피투성이 상처를뜨거운 피를 잠근다.

거대한 황금 자물쇠의 고리가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자물쇠를 잠가 그것으로 물과 강과 푸른 바다를열쇠와 샘의 원천을 잠근다자물쇠를 잠가 그것으로 피투성이 상처를뜨거운 피를 잠근다.

남자가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황금 자물쇠의 고리가 반 바퀴 돌아 자물쇠 구멍 위에서 멈추었다.

자물쇠를 잠가 그것으로 물과 강과 푸른 바다를열쇠와 샘의 원천을 잠근다.

자물쇠 고리가 천천히 잠금 구멍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드드드득끼기기기긱하는 굉음과 함께 자물쇠 안에서 약하게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남자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품에 꽉 안은 소년의 눈과 귀를 손바닥으로 가리고 계속해서 외쳤다.

더럽고 사악한 뱀이여인간과 동물을 괴롭히는 교활하고 잔인한 독사여흩어져라떠나가라.

황금 자물쇠의 고리가 구멍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굉음은 줄어들었으나 비명 소리가 커졌다.

더럽고 사악한 뱀이여인간과 동물을 괴롭히는 교활하고 잔인한 독사여흩어져라떠나가라.

자물쇠 고리가 완전히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자물쇠가 철컥소리를 내며 잠겼다.

그와 함께 아래쪽의 열쇠 구멍에서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남자는 품에 안고 있던 소년을 놓았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피가 흰 모래를 휩쓸었다소년은 비명을 질렀다양 팔을 뻗었으나 남자는 붙잡아주지 않았다.

곧 다시 만날 거다.

남자가 외쳤다.

금방 갈 테니까 돌아가서 기다려라.

그러나 소년은 뜨거운 피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여 아무 것도 듣지 못했다.

 

*

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겁에 질려 몸을 일으켰다.

아이가 똑바로 일어나 앉은 것은 사고 이후 처음이었다.

 

간호사가 달려왔고 이어서 의사가 불려왔다한 바탕 소동이 지나간 뒤에 일어나 앉아도 아이에게 별 무리가 없으며 갑작스러운 회복이 이상 신호는 아니라는 것을 나는 몇 번이나 확인했다.

아이가 진정된 뒤에그리고 나와 딸과 의사와 간호사도 모두 진정된 뒤에나는 잠시 딸에게 간호를 맡기고 집에 돌아왔다아이가 부탁한 물건들과 내가 병원에서 지내면서 필요한 옷가지 등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남자는 거실에 앉아 있었다나를 보고 남자는 시선을 피하며 천천히 일어섰다내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남자는 텔레비전을 가리켰다.

뉴스에서 사고 소식이 나오고 있었다은색 차가 시멘트 벽을 들이받아 마치 종잇장처럼 납작하게 구겨져 있었다음주단속을 피해 과속으로 달리던 운전자는 현장에서 즉사했다고 기자가 말했다.

운전자의 나이가 40대인 것을 보고 나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저 사람은 결혼했을까아이가 있을까.

아이가 있다면어째서 내 아이를 치고 그대로 달아났을까.

나는 남자를 쳐다보았다남자의 피부는 여전히 창백했지만나를 쳐다보는 눈동자는 붉은 색이 아니라 어두운 갈색이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내가 물었다.

남자는 입을 열었다가 잠시 망설였다인간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았다.

여기 있을게내가 아이들에게 필요하지 않게 될 때까지.”

남자는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리고 서둘러 덧붙였다.

당신이 받아준다면….”

그 뒤에는요?”

내가 물었다.

그 뒤?”

남자가 되물었다내가 설명했다.

아이들이 다 자라서 집을 떠나면우리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되면… 그 때는 어떻게 할 거예요?”

남자는 나를 쳐다보았다내가 마주 쳐다보자 눈을 내리깔았다.

그 뒤에는 이곳을 떠나서… 다른 일을 하게 될 거야.

남자가 바닥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대답했다.

아이를 다치게 하고 죽게 하는 어른들을 데려갈 거야지옥불이 타는 곳으로.”

남자가 시선을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지옥불이라고 말했을 때 남자의 검은 눈동자가 잠시 붉게 빛났다.

나도… 그 지옥불을 영원히 몸 속에 간직하고 함께 타오르게 될 거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완전히 이해했다더 이상 아무런 설명도 필요하지 않았다.

남자가 조금 머뭇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남자의 손을 잡았다.

원하든 원치 않든 마음 속에 지옥불을 품었기 때문에 이제껏 살아남았다그러니 어쩌면 그와 내가 가장 편안할 수 있는 곳은 바로 그 불이 타는 곳일지도 모른다.

 

남자와 나는 어떻게든 아이들 앞에 나설 용기가 생겨나기를 기다리며 거실 바닥에 함께 앉아 있었다.

아이들에게 남자의 존재를 새삼스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그러나 남자가 어떻게 해서 갑자기 나타나 우리와 함께 살게 되었는지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남자의 존재가 앞으로 매일의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알 수 없었다.

아이들에게 내가 어떤 어린 시절을 마련해 주었는지 생각하면 나는 언제나 두려웠다앞으로 몇 년 남지 않은 그 어린 시절을 얼마나 보호해줄 수 있을지 남자도 나도 장담할 수 없었다남자도 나도가정이라는 보금자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얼마나 쉽고 빠르게 지옥으로 변할 수 있는지 너무나 잘 이해했다그래서 남자도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같이 가요.”

마침내 내가 말했다.

같이 가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조심스럽게 내 손을 쥐었다남자의 손은 따뜻했다.

아이들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한나와 남자는 함께 아이들 곁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더 이상 부모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면남자가 떠나는 날 나도 함께 떠날 것이다.

가족이라 해서 서로 필요하지 않은데도짐이 되는데도 언제까지나 함께 있을 필요는 없다다만 아이들에게 나와 함께 살았던 시간이 행복했던 시절로 남기를 바란다그리고 남자와 함께 살아갈 기간이 또한 좋은 시절로 남으려면 남자와 내가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아무 것도 약속할 수 없는 세상에서그 하나의 결심만이 조그만 위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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