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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훈 머나먼 퇴근

2007.11.30 23:1511.30

1.


그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침 창문이 지구 쪽을 향하고 있었다. 거대한 지구가 고요하게 펼쳐져 있었다.
회사는 온통 그 일로 술렁이고 있었다. 계약이 만료되는 계약직 직원 절반이 재계약에서 탈락될 것이라는 통보.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순간 그는 남의 일인 듯 피식 웃고 말았다.
“여기서 나가면 도대체 어디로 가라는 거지?”
그는 저 멀리에 둥둥 떠 있는 지구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은경 씨가 옆에서 그 이야기를 들었는지 이렇게 대답했다.
“계약 만료 이틀 뒤에 중국 스페이스 셔틀 두 대가 지나가는데요, 그쪽이랑 임대계약을 하고 있대요.”
“아!”
그는 대답 대신 탄성을 내질렀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집에 가는 거군요.”
은경 씨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참이나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무슨 소리예요? 규성 씨는 재계약 될 거예요. 잘 나가는 디자이너면서.”
“네. 그런가요?”
“당연하죠.”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침을 꼴딱 삼켰다.

2.


은경 씨는 종종 디자인실에 들러 그와 담소를 나누곤 했다. 때로는 그의 방을 찾기도 했다. 격리된 공간이라 모두가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으므로 회사 내에 이상한 소문이 돌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런 식으로 친분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 은경 씨가 특별한 사람인 것은 분명했다. 그를 발탁해서 외기권 공장으로 오게 만든 사람도 은경 씨였고, 완전히 낯선 무중력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누구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지켜봐 준 것도 바로 은경 씨였기 때문이다.
그날도 은경 씨가 먼저 그의 방문을 두드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 노조에서 파업한대요.”
“네. 결국 파업하는군요.”
그는 은경 씨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제 자기는 어떻게 하면 되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회사 측 방침이 계약직 전원 계약해지 방침이 아니라서 처신하기가 오히려 까다로웠다.
“정규직 노조원들끼리만 하는 거니까 비노조원들은 각자 알아서 하라는데요, 적당히 눈치 봐서 다른 계약직 직원들 하는 대로 하세요.”
“딴 사람들이 어쩌고 있는지 모르는데.”
“일단 작업 구역에 가 있는 분위기예요. 그러니까 챙겨서 늦지 않게 출근해 계세요.”
“네.”
“그 다음은 눈치껏 하세요. 저는 못 나와 보게 될지도 몰라요.”
“네.”
그는 허공에 쫙 펼쳐져 있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보았다. 중력이 없는 우주 정거장 안에서 긴 머리를 고정시키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은 품위를 손상시키는 행위라는 이유로 회사 측에서 금지시킨 일이었다. 그러니까 머리를 싸매는 것이 아니라 풀어헤치는 것이 투쟁중이라는 표시인 셈이다. 그는 마음대로 흐트러져 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품위가 손상되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대신 싸워주기까지 하는 여자.
“투쟁!”
그가 인사 대신 그렇게 말하자 은경 씨도 웃으며 대답했다.
“투쟁!”
그는 작지만 다부진 그녀의 주먹을 보면서 미안한 마음에 얼굴이 붉어졌다. 저렇게까지 애써 주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데 그는, 사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3.


그에게 아이에프사(社) 디자인실은 더 바랄 게 없는 직장이었다. 꼭 외기권 공장이 아니라도, 서울 공장만 해도 그랬다. 복지 혜택이나 임금 수준도 계약직 치고는 꽤 괜찮은 편이었지만 무엇보다 일 자체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초소형 비행체(MAV, Micro Air Vehicle)를 디자인하는 일은 세상 어떤 기계를 디자인하는 일보다도 더 폼 나는 일이었다. 그 손톱만한 기체들이 날아가는 모습을 실제로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은 고단할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그는 행복했다. 그는 아이에프사 디자인 랩에 자신을 추천해 준 지도교수를 평생의 은인으로 섬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부모님이 그를 쓸모 있는 인간으로 생각해 주는 것이 좋았고, 회사 로고가 조그맣게 붙어 있는 가방을 들고 자랑스럽게 길을 걷는 것도 좋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퇴근 후에 먹는 삼겹살과 소주였다.
남들은 두 주에 한 번쯤 회식 때에나 삼겹살을 먹었지만 그는 그 사이에 세 번을 더 먹었다. 그는 노릇노릇하게 충분히 익은 삼겹살이 좋았다. 그것은 힘겹게 살아온 그 동안의 삶에 대한 보상 같은 것이었다. 지글지글 기름이 배어 나오는 소리.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깊숙하게 묻어나는 고기 굽는 냄새. 영혼부터 채우려 드는 맑디맑은 술.
물론 삼겹살에 심취해 있는 사이 그의 몸은 점점 비대해져만 갔다. 70kg쯤 되던 몸이 어느새 80kg으로 불어났을 무렵, 그는 한 주에 서너 번씩 삼겹살을 굽고 있었다. 급기야 몸무게가 85kg을 넘어갈 무렵부터는 혼자서도 고기를 구워먹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마침내 89kg에 이르렀을 때, 그는 문득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정기 건강검진 결과표를 보고 나서는 완전히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체지방 과다에 콜레스테롤 과다, 그리고 간 이상.
‘내가 이렇게 탐욕스러웠던가!’
그는 문득 회사에서 자기 위치가 얼마나 불안정한지를 깨달았다. 그 불안정한 직장 말고는 이루어놓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거울 속에는 이제 두 번 다시 날렵해지지 않을 것 같은 그의 거대한 육신가 말없이 서 있었다. 스트레스는 다시 술과 고기를 불러 들여서 그는 곧 90kg을 돌파했다.
바로 그 무렵에, 전략기획실에 근무하던 김은경 씨가 그를 찾아왔다.
“이규성 씨 맞나요?”
“네?”
“사진이랑은 많이 다른데요.”
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그의 얼굴과 인사기록 카드를 유심히 대조했다. 그녀와의 첫 만남이었다.

4.


시험비행 조종사 오 팀장이 디자인실 쪽으로 서서히 날아와 그에게 물었다.
“규성 씨. 혹시 이것도 여기에서 디자인한 거야?”
그러면서 오 팀장은 등판에 붙어 있는 벨크로를 가리켰다. 무중력 상태에서 조종사가 둥둥 떠다니지 않도록 조종석 등받이에 몸을 고정시키기 위한 도구였다.
“아니요. 그건 밑에서 만들어 보낸 건데요.”
“그래? 역시 의상 디자인은 이쪽에서 안 하는구나. 근데 밑에서는 이걸 왜 이렇게 촌스럽게 만든 거야? 조종사는 폼이 생명인데. 이놈의 회사는 조종사가 제일 웃겨요. 자고 있는데 등짝에 스웨터를 붙여 놓고 도망가는 놈이 있질 않나. 어떻게 된 놈의 회사가, 유치해서 원.”
그는 그런 오 팀장의 말에 웃음으로 맞장구를 쳐 주었다.
“조종실은 파업 안 해요?”
그가 묻자 오 팀장은 놀란 듯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우리? 우리 계약직이야. 몰랐어?”
그는 깜짝 놀랐다. 공장 내에서 제일 중요한 두 사람이 계약직이라니. 회사에서 우주 정거장에 공장을 둔 이유는 무중력 상태에서 비행할 수 있는 초소형 비행체를 개발하기 위해서일뿐만 아니라, 그 새로운 마브의 비행 개념 자체를 개발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공기는 있지만 중력이 없는 상태에서라면 마브들도 공중에 머무르기 위해 지상에서처럼 열심히 날개를 파닥거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계약직이셨어요?”
“응. 물론, 5년 장기 계약이지만.”
그는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규직으로 20년은 해야 벌 수 있는 돈을 5년 동안 번다는 뜻이었다. 오 팀장이 말을 이었다.
“웃기지? 어차피 5년이나 대기권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 팔다리에 피가 잘 안 가서.”
“그러게요.”
“그냥, 다른 회사에 가지나 말라는 거야. 돈은 충분히 줄 거니까 한 2년 일하고 놀러나 다니라는 거지.”
“네. 부럽네요.”
“밑에서 회복하고 나서 다시 올라와도 되지만, 그 짓 자꾸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오 팀장은 그렇게 말하면서 갑자기 킥킥대기 시작했다. 디자인실 사람들이 영문을 몰라 궁금해 하는 순간, 공장장과 그 측근들이 디자인실 옆 복도를 지나쳐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하나같이 팔다리가 짧고 가는데다 몸통과 머리통만 비대한 체형의 사람들이, 지상의 귀신들이 그러는 것처럼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서 스르르 미끄러져 가는 것처럼 보였다. 어차피 위아래가 구분되지 않는 무중력 공간이라 한쪽 벽에 발을 대고 서 있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데도 공장장은 그런 권위적인 자세로 서 있기를 좋아했다. 심지어 통로를 지날 때도 그렇게 서서 무빙워크 위를 지나가는 것처럼 스르르 떠 다녔다. 그 모습을 보더니 오 팀장이 말했다.
“그 짓 자주하면 저렇게 돼.”
킥킥거리는 소리가 디자인실 여기저기에서 새어 나왔다.
“혈액 공급이 잘 안 돼서 팔다리가 가늘어지고 근육이 없어지는 건 알겠는데, 사지가 짧아지는 건 왜 그런가 몰라. 후천적으로 되는 일은 아닐 텐데 말이야. 게다가 목은 또 왜 짧아지는 걸까? 피도 잘 통할 텐데. 하여튼 여기 군인들은, 특이해.”
오상현 팀장이 나가고 나자 다시 무거운 침묵이 디자인실 계약직 직원들의 막막한 가슴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지나간 목 짧은 사람들이 바로 ‘사측’이었다. 아무리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해도 그들은 마냥 우스꽝스러운 존재만은 아니었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구는 보이지 않았다. 노사 협상도 쉽게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답답했다.

5.


“그래서 노조 지부장이 결국 삭발을 결심했거든요.”
“머리 짧게 자른 사람도 많잖아요. 어차피.”
“그렇죠. 바로 그거예요. 그래서 지부장은 일부러 머리를 기르고 있었대요. 언젠가 삭발하려고. 자기도 옛날에는 짧은 머리 하고 다니는 거 좋아했대요. 가끔 우주복 입으면 헬멧 쓸 때 긴 머리가 너무 더워서. 이게, 진짜 귀찮거든요. 손질하고 다니기도 귀찮고. 회사 규정이 그렇잖아요. 안 흔들리게 딱 고정시켜야 되고.”
은경 씨는 아무렇게나 둥둥 떠 있는 자기 머리카락 한 묶음을 매만지며 재잘거렸다.
“아무튼 지부장은 눈물을 흘리면서 삭발을 했다구요. 진짠지 연긴지 알 수 없지만. 눈물방울 하나가 눈앞에 둥둥 떠올랐는데, 사측에서는 당연히 꿈쩍도 안 하고 버티고 있었어요. 근데 지부장이 머리를 싹둑 자르는 순간 시설과장이 몸을 파르르 떠는 게 보이는 거예요. 머리카락이 그냥 허공에 둥둥 떠 있었으니까요. 저게 저렇게 둥둥 떠다니다가 어디 잘못 들어가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인 거였겠죠.”
그는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그녀의 입술과 그 두 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90kg을 막 넘은 그에게 찾아와, “이규성 씨, 오래 살아야 돼요.” 하고 말해 주었던 사람. 당신 디자인은 혼이 살아 있어서 아무도 흉내 낼 수 없으니까, 반드시 오래 살아남아서 뭔가 근사한 결과물을 내야 한다고 말해 준 사람. “저 위에 무중력 마브 공장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관심 있어요?” 하고 물을 때에도 저렇게 혼자서 쉴 새 없이 재잘거렸던 것이 떠올랐다. 은경 씨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만큼 한 뭉텅이를 싹둑 잘라 가지고, 후 하고 부니까 머리카락이 온 사방으로 흩어지잖아요. 그걸 보고 시설과장이 자꾸 움찔움찔하잖아요. 그러니까 공장장이 못마땅한지 시설과장 쪽을 보고 인상을 한번 써 주고는 우리한테 이러는 거예요. ‘거기 자네들, 좀 내려와서 앉지 그래.’ 어지간히 신경이 쓰였나 봐요. 공장장은 맨날, 지상에서 생활하는 것처럼 흉내 내는 거 좋아하잖아요. 회의실 바닥에 찍찍이 붙여 가지고 걸어 다니는 흉내 내게 만드는 거, 얼마나 웃겨요. 무슨 애들 삑삑이 운동화도 아닌데 걸을 때마다 찍찍 소리 나고. 근데 우리는 죄다 둥둥 떠 있었거든요. 내가 보기에는 공장장 패거리들이 천장에 거꾸로 나란히 매달려 있는 게 꼭 목 짧은 황금박쥐떼 같아서 우스워 죽겠는데, 자꾸만 그쪽이 아래쪽이라고, 내려와서 앉으라고 그러고, ‘우리는 자네들 불법파업 진압할 권리가 있어. 무기도 있고.’ 이러는데, 경화랑 둘이서 웃겨 죽는 줄 알았어요. ‘그래도 경화야, 너는 파업 끝나면 맨날 공장장 볼 건데 너무 웃지 마’ 그랬더니 얘가 웃음을 뚝 그쳐요. 근데 한 5분쯤 있다가, 공장장이 자기 딴에는 골치 아프다는 티를 내려고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매고 있다가 다시 손을 내려 놨는데, 근데 그러는 와중에 머리카락이 위로 들렸다가 원상복구가 안 된 거예요. 그거 알죠? 공장장 가운데 머리숱이 없어서 오른쪽 옆머리를 이렇게 길러서 왼쪽으로 휙 넘기고 다니는 거. 근데 그 뚜껑이 휙 열려 가지고 다시 안 닫히는 거 있죠. 그거 보고 경화가 웃음이 터져서, 둘이서 얼굴이 벌게져 있다가 지부장한테 쫓겨났어요. 자기는 심각하게 삭발하는데 뒤에서 떠들고 뭔 짓이냐고 화를 버럭 내더라구요.”
그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수다를 들으면서 그는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번져 갔다. 그 모습을 보고 은경 씨가 말했다.
“왜요? 왜요? 무슨 생각 했어요?”
“아니요. 아무것도.”
은경 씨는 한 발쯤 뒤로 물러났다. 원래는 한 발만 물러나고 싶었는데 몸이 계속 뒤로 밀려나더니 결국 벽에 가서 툭 하고 부딪치고 말았다. 그녀는 또다시 깔깔대면서 입모양만으로,
“왜 그래요?”
하고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고개만 살짝 흔들었다. 90kg이던 그에게 “고기는 이제 끊으세요. 술도.” 하고 말하던 그 입술. 그 말을 듣고 그는 고기를 끊었다. 술도 끊었다. 그리고 다시 70kg 날렵한 몸매가 되어 우주 정거장에 세워진 새 공장 디자인실로 옮겨왔다. 그에게는 은경 씨야말로 평생의 은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공장장 무리처럼, 중력이 그리웠다. 솔직히 회의실 바닥에 깔려 있는 찍찍이도 전혀 나쁘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사실 그는 모든 것이 한 방향으로 부착되어 있는 공장장 방을 보고는 아늑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는 어쩐지 자신을 그곳까지 끌어올려 준 은경 씨를 배반하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안 좋았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열심히 일해야지.’
하지만 공장장이 재계약을 해 주지 않는다면, 굳이 삭발까지 해 가며 싸워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는 그게 미안했다.

6.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 생산 라인 전체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서 밀린 일거리도 없었다. 그렇다고 창의적인 작업에 몰입할 분위기도 아니었다. 통로를 타고 먼 곳에서부터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하고 시작되는 민요였다. 그는 그 처량한 노래를 나지막이 흥얼거리면서 창밖에 떠 있는 지구를 바라보았다. 부모님이, 친구들이, 동네 만화방이 떠올랐다. 중력가속도를 가진 대지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일들, 동네를 산책하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번지점프를 하거나, 바닥에 누워 뒹구는 일 같은 것들도 차례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는 어느새 삼겹살 익어가는 소리를 떠올리며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잘하면 무중력 공간에서 삼겹살을 굽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정거장 내 에너지 효율 문제 때문에 냉장고를 사용하는 데는 제약이 있지만 고기를 공급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노조에서 강력하게 투쟁을 전개해 나간다면 돼지고기 한 근 정도는 정기 셔틀에 실어서 올려 보내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조리 방법이었다.
그는 무중력 공간 전문 마브 디자이너답게 무중력 공간에서의 삼겹살 조리법에 대한 사고 실험을 이어갔다. 문제는 불판에 고기를 어떻게 고정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우선 떠오른 생각은 중력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내는 방안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지로 작동하는 전기 프라이팬이 필요했다. 물론 제작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 프라이팬에 고기를 얹어 놓고 가열하는 동시에 프라이팬을 고기 방향으로 움직이면 고기가 프라이팬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을 텐데.”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동료 하나가 말했다.
“아니지. 고기 방향으로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계속 가속해야 되겠지. 고기랑 프라이팬이 최소한 똑같은 속도로 움직여야 둘이 밀착되니까 아주 조금씩이라도 가속을 해 줘야 돼.”
그가 옆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 그렇게 복잡한 거야? 그럼 고기가 다 익을 때쯤에는 속도가 얼마나 되는 거지?”
“글쎄. 그보다는 우리 공장 안에 그걸 그렇게 멀리 들고 갈 공간이 없다는 게 문제겠지. 그냥 포크로 누르면서 굽는 게 낫겠다.”
“아!”
그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간단한 방법이었지만 다음 문제가 남아 있었다. 기름이 튀는 게 문제였다. 그는 프라이팬 두 개를 사용해서 뚜껑 달린 새 조리 기구를 만드는 방법을 생각해 보다가, 거기에 아예 고기를 고정시키는 핀도 장착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예 허공에 고기를 띄워 놓고 불꽃으로 직접 가열하는 방법도 따져 보았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만 감안하면 충분히 해볼 만한 시도였다. 사실 탑승 전에 개인별 식단을 정할 때 삼겹살을 주문하기만 했으면 회사 측에서 어떻게든 고안해 냈을 법한 방법들이었다. 물론 은경 씨가 반대했겠지만.
한동안 조용하더니 통로 저쪽에서 다시 한 번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네 박자로 된 민요들이었다. 행진하면서 부르던 노래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행진도 중력가속도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어서, 어쩌면 저런 노래는 공장장이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 많은 목소리의 다발 속에서 은경 씨의 목소리를 골라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7.


파업은 생각보다 훨씬 더 길어졌다. 노사 양측을 각각 지원하기 위한 우주왕복선들이 공장을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전국마브노조 쪽 임대 셔틀이 올라올 무렵에는 디자인실이 지구 반대편을 보고 있어서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하지만 회사 쪽 셔틀이 올라오는 모습은, 마침 디자인실 창문을 통해서도 잘 보였다. 그것은 끝없는 심연을 박차고 수면을 향해 튀어 올라오는 고래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디자인실 계약직 직원 다섯 명 모두가 창문에 다닥닥 머리를 맞대고 발끝을 무의식적으로 꼼지락대는 모양이 차라리 더 어류 같아 보였다.
두 대의 스페이스 셔틀은 모두 정거장과 도킹하는 데 실패했다. 노사 양측이 서로 상대방 셔틀이 진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는 와중에 몸싸움이 벌어지면서 장난 같던 파업이 험악한 분위기로 바뀐 모양이었다. 그는 그 소식도 다른 이야기들처럼 은경 씨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규성 씨. 큰일 났어요! 사람들이 결국 피를 보고 있어요. 양쪽에서 한 열 명이 붙었는데요, 막 피나고 장난 아니에요.”
“진짜에요?”
“네. 이렇게까지 격해질 줄은 몰랐는데. 솔직히 노조도 겁먹은 것 같아요. 진짜로 아파 가면서 싸우고 싶었던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럼 위험하잖아요. 조심하세요.”
“에이, 저한테 뭐 어떻게 하겠어요? 아저씨들이 알아서 막겠죠. 근데 싸우는 거 보면 되게 웃겨요. 사람들이 어디서 본 건 많아 가지고 마음은 액션배운데 발이 땅에 안 닿아 있으니까 막 허우적거리면서 싸워요. 이렇게 툭 밀치면 자기도 똑같이 뒤로 밀리는 거잖아요. 그래서 결국 어떻게 싸우는지 알아요? 막 물어요.”
비록 은경 씨는 낄낄대면서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웃기는 상황만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 정도까지 갔다면 꽤 위험한 상황인 것 같았다. 단순히 물리적인 힘만으로 상대하자면 사측이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그래서 사측이 공장장실을 비롯한 ‘핵심 구역’을 집중적으로 방어하기로 전략을 바꾸는 사이 경찰 공격 위성 한 기가 공장 쪽으로 접근해 왔는데, 공격 위성은 우주정거장 자체를 날려버릴 수는 있을지언정 섬세하게 공권력 개입을 감행할 수는 없었으므로 실제로는 노조 쪽에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결국 우리 쪽에 유리하게 가지 않을까요? 일이 커지면 회사 쪽에서 좋을 게 별로 없어요. 마브(MAV, 초소형 비행체)라는 거, 무중력 공간에서 쓸 수 있는 마브를 만든다는 게 사실 좀 그렇잖아요. 뭐에다 쓰려고 만들겠어요? 우주정거장에 침투시키려고 만드는 건데, 그 사실을 언론에서 떠들어대면 골치 아프죠. 나랏돈으로 돌아가는 회사니까 선거에도 영향이 있을 거고.”
은경 씨가 말했다. 파업이 길어져서인지 은경 씨도 조금은 지쳐 보였다.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은경 씨가 이렇게 말했다.
“묶는 게 편하기는 한데 그러면 어쩐지 말 잘 듣는 여자 같고 그래서 다섯 가닥으로 나눠서 묶었는데요, 사람들이 문어 같대요. 나 문어 같아요? 문어 같아요?”
문어 같았다.
은경 씨가 나가고 나자 방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어차피 밤낮 구분은 없었지만, 출근 전부터 뭔가 떠들썩한 게 기분이 뒤숭숭했다. 그는 넥타이를 핀으로 고정시킨 다음 스프레이로 머리카락을 고정시키기 위해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낯선 사람 같았다. 배도 안 나왔고, 턱도 딱 하나밖에 없었다. 물론 살이 찌기 전에는 늘 그런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어딘가가 낯설었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자신을 보고 있노라면 그는 어쩐지 잠수부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두 발로 걸어 다니고 싶었다. 공장장이 들으면 좋아할 소리였지만 공장장 좋으라고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디자인실에 출근해서 한참을 빈둥거리고 있다가 문득 은경 씨의 문어 머리가 떠올라서 혼자 키득거리고 있는데 먼 곳에서부터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통로 쪽에서 오상현 팀장이 불쑥 나타나더니 대뜸 이렇게 소리쳤다.
“규성 씨. 당신 애인 다쳤어!”
그러자 모두가 일제히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8.


‘피?’
붉은 방울 하나가 허공에 떠 있었다. 은경 씨는 현장에 없었다. 그가 나타나자 회사 쪽 사람들이 매서운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조용하지만 격한 분위기였다. 한창 달아오른 상태에서 갑자기 생긴 휴전 상태인 모양이었다.
“어떻게 됐어요?”
그가 묻자 노조 사람들이 의무실 쪽으로 가 보라고 말해 주었다. 그가 알기로는, 담당 의사가 몇 주 전에 갑자기 지상으로 내려가 버린 뒤로 공장에는 제대로 된 의사가 하나도 없었다. 다시 통로 쪽으로 날아가는데 뒤에서 노조 지부장이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휴전하시죠. 병원으로 옮겨야죠.”
“회사 셔틀로 옮기지.”
“노조 셔틀로 옮기죠.”
그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등 뒤에서 살기를 느낀 모양이었다.
의무실로 가는 통로 중간 중간에 붉은 방울들이 떠 있었다. 좀 작은 방울들은 벌써 그 모양 그대로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다. 그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붉은 방울은 의무실 안에도 몇 개가 떠 있었다. 사람들이 무슨 성녀나 되는 것처럼 그녀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녀는 무슨 예언이나 되는 것처럼 말했다.
“미쳤어요? 그럼 회사 셔틀을 도킹시키겠다는 거예요? 절대 안 돼요. 누구 좋은 일 시키려고 그래요? 노조 셔틀 아니면 안 간다 그래요. 어떻게 나오나 한 번 해 봐요. 우리가 불리한 게 아니잖아요.”
목소리가 평소와는 달랐다. 힘이 없어 보였다. 노조 사람 하나가 그녀에게 말했다.
“노조 셔틀은 의료 장비가 좀 그래요.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회사 셔틀로 옮기세요.”
“아니 무슨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총알이 박힌 것도 아니잖아요. 우리는 여기서 져도 성과급이나 반납하면 그만이지만, 저 밑으로 내려가서 영영 다시는 못 올라올 사람들도 있어요.”
“피 많이 흘렸어요.”
“그럼 병원 셔틀 불러와요.”
“늦어요. 그럼.”
그는 그녀의 다리에 감긴 시뻘건 붕대를 보는 순간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많이 다쳤어요?”
그가 물었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몰려갔다.

9.


오발 사고라는 결론이 났다. 양측이 동의한 내용이었다. 공포탄처럼 쏜다는 게 잘못 격발됐다고 했다. 하지만 노조 사람들은 회사 측에서 총을 꺼내 들었다는 것 자체에 격분한 듯했다. 사측에서는 격분한 노조원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무기를 꺼내들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원래 군인이니까.
분위기가 잔뜩 험악해져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왜 우주정거장까지 무기를 들고 갈 생각을 하게 됐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격리된 곳이니까. 중력이 없는 곳이니까. 목이 짧으면 좋겠지. 짧은 목에 커다란 머리가 달려서 권위적으로 보일 수 있으면 더 좋겠지. 권위가 권력이 되면 더 좋고. 그러면 덜 불안하니까.  
그는 불안했다. 많이 다친 것 같은데, 은경 씨는 회사 셔틀로 옮겨 타려고 하지 않았다. 괜찮은데. 나는 괜찮은데. 몇 달 일하면서 돈도 꽤 모았고, 꽤 괜찮은 경력도 쌓은 셈이고, 저 밑에 내려가게 돼도 별로 싫지 않은데.
은경 씨의 손을 붙들고 그가 속삭였다.
“저는 있잖아요. 나중에 언젠가 우주 공간에 인공적으로라도 지구 중력을 만들고 살아야 된다는 사람들이랑, 그냥 무중력 상태로 살아가는 게 더 좋다는 사람들이 두 갈래로 갈라져서 싸우게 되면, 저는 아마 지구 중력 없이는 못 산다고 생각했던 첫 세대쯤 될 거예요. 그러니까 저 때문에 그렇게 버티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은경 씨가 바람소리처럼 속삭였다.
“하지만 규성 씨처럼 재능 있는 사람이 그렇게 묻혀서 살면 안 돼요.”
“재능 있다고 말해 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알아봐 줘서 고마워요. 근데 사실 잘 모르겠어요. 진짜로 재능이 있는지. 은경 씨, 지금 회사 셔틀로 안 옮겨가면 큰일 나요. 응급처치 안 하고 그 상태로 병원 정거장까지 날아가면 큰일 난대요. 그러니까 제발 가요.”
“싫어요. 기자들이 오면 우리가 이겨요.”
“은경 씨.”
“싫어요.”
은경 씨는 그렇게 말하면서 스르르 잠이 들었다. 약 때문이었다. 그는 은경 씨를 두 팔로 직접 안아 들고 이미 회사 셔틀이 연결되어 있는 격납고 쪽으로 날아갔다. 은경 씨는 전혀 무겁지 않았다. 원래 그곳에는 무게를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질량은 무게가 아니다. 다만 관성의 크기일 뿐이다. 원래 멈춰있던 것이 계속 그대로 멈춰 있으려고 부리는 고집의 크기. 한 번 움직여버린 마음이 계속 그렇게 움직이려고 애를 쓰는 이유. 잠들어 있는 은경 씨를 보면서 그는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아! 사람들이 비웃겠다. 문어 머리는 풀어 놓을걸.’
은경 씨를 회사 셔틀에 넘겨주고 나서 그는 재빨리 디자인실로 날아갔다. 그는 무기가 있는 곳을 알고 있었다. 물론 원래 무기로 만들어 진 물건은 아니었지만, 디자인실에는 언제든 무기로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레이저 절단기가 있었다. 그의 눈가에 싸늘한 분노가 어려 있었다. 그는 그 분노가 누구를 향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현장을 보지 않았으므로, 오발 사고라는 말도 믿을 수가 없었다.
“오발 맞아. 조준하고 쏜 거 아니야. 정 실장도 깜짝 놀라서 총 놓쳐버리는 거 내가 봤어.”
오 팀장이 말했다.
“정 실장이에요? 정 실장 지금 어디 있어요?”
“어디 있으면 어쩌려고?”
그는 무기를 떼어 들고 공장장실 쪽으로 날아갔다. 오 팀장이 뒤에서 따라붙었지만 그를 말리지는 못했다. 사고 현장이 가까워오자 그는 레이저 절단기 스위치를 손으로 더듬어 위치를 확인했다. 그는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을 향해 힘껏 뛰어 들어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노조 지부장이 공장장과 악수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미 현장을 향해 박차고 날아가고 있던 몸은 멈추지를 못했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는 레이저 절단기를 주머니에 슥 집어넣었다. 사람들이 갑자기 날아든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서는, 갑자기, 또 극적으로 협상이 타결되고 있었다.
공장장과 눈이 마주쳤다.
‘어쩌라고?’

10.


지상으로 내려왔다. 무중력 상태에서 오랜 시간 머문 부작용으로 근력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재활 훈련을 하면서 집에서 놀고 있는데 다행히 아이에프사 서울 공장으로 출근하라는 연락이 왔다. 곧 그는 나비처럼 생긴 새 마브 기체의 날개를 디자인하는 일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같이 지상으로 내려온 사람들 대다수는 일자리를 돌려받지 못했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그와 연락을 끊어버렸다. 그가 다시 직장을 얻게 된 게 문제였다.
“이성규 씨 원래 집에 가고 싶어 했잖아. 자기 혼자 살자고 자기 여자 팔아넘긴 거야.”
위에 있는 사람들과도 연락이 끊겼다. 은경 씨도 그가 은경 씨를 회사 셔틀에 넘겨주고 인사도 없이 훌쩍 떠나버린 것이 화가 났는지, 몇 달이 다 되도록 연락이 없었다. 그는 은경 씨의 건강 상태가 궁금했으나, 별 탈 없이 회복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는 직접 연락할 생각을 접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책상 위에 잔뜩 벌려 놓은 나비 사진들을 들여다보았다. 퇴근할 때가 다 됐는데 어쩐지 집으로 가는 길이 고단하게 느껴졌다. 근력이 많이 약해진데다 골 밀도도 낮아지는 바람에, 그토록 그리워하던 지구 중력이 막상 겪어 보니 버겁기까지 했다.
‘운동하러 가야겠다.’
가을인데도 날씨가 잔뜩 흐렸다. 아래로 내려온 지 반 년이 다 됐는데도 그는 오히려 몸무게가 줄어 있었다. 그는 자기가 한 일이 배신인지 아닌지 판단이 안 섰다. 자기 때문에 협상이 그런 식으로 타결되고 말았으니 배신은 배신이었지만, 결코 의도한 배신은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그냥 끝장을 볼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잠자코 있는 사이 자기만 희생양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그는 지상으로 돌아오고 나서 아직 단 한 번도 삼겹살을 입에 대지 못했다. 죄책감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확인을 받을 때까지는 어쩔 수가 없었다. 스스로 벌을 주자는 게 아니라 일종의 유예 같은 것이었다. 아무튼 지상으로 돌아와서 고기를 원 없이 굽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그는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주정거장 안에 맺혀 있던 붉은 방울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래도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반년이 다 되도록 연락 한 번 없는 그녀를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조금 늦게 회사를 나서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디자인실로 돌아가서 우산을 챙겨들고 다시 나오는데 가을비 치고는 꽤 거센 빗발이 바닥을 때렸다. 그의 귀에는 그 소리가 불판에 고기 굽는 소리 같았다. 지글지글 기름 튀는 소리. 비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환청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금단 증상 같은 환청이었다. 치이이이익 하고 빗방울들이 대지를 두드리는 소리가 먼 데서부터 들려왔다. 그는 그 소리가 육즙이 불판에 닿는 소리 같았다.
‘젠장. 하필 지금 이렇게 비가 올 게 뭐람. 좀 일찍 오던가, 나중에 오던가.’
비가 내리는 양은 너무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고 적당했다. 너무 세지도 않고 너무 약하지도 않은 숯불처럼 딱 적당했다.
“젠장. 젠장.”
그는 빠른 걸음으로 회사 정문 쪽을 향해 걸으면서 내내 그렇게 투덜거렸다. 억울했다. 귀에 꽂은 이어폰 볼륨을 높였지만, 빗소리는 귀를 거치지 않고 바로 영혼을 향해 파고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선명했다.
‘에잇, 젠장. 왜 다 내가 뒤집어쓰는 건데? 그 상황에서 그럼 나더러 어쩌라고.’
그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배가 고팠다. 회식 때마다 상추만 뜯어먹고 앉아 있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온 세상이 거대한 불판 지글거리는 소리를 내는 때가 더 견디기가 어려웠다. 길가에서 노릇노릇 익어가던 낙엽 하나가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가까스로 탁 뒤집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탄식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뒤집어야지. 그래.”
버스 정류장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큰길에서 차들이 빗길 위에서 내는 소리가 마치 젓가락으로 불판 위의 고기를 꾹 누를 때 육즙이 내 지르는 비명소리 같았다.
“이런 젠장. 나보고 어쩌라고.”

11.


횡단보도 앞에 서서 고개를 드는데, 맞은편에 은경 씨가 서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슨 일로 왔을까. 나를 보러 온 걸까? 나를 원망하려는 걸까?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신호가 바뀌자 한쪽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은경 씨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잘 있었어요?”
그가 미처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그녀가 달려와 그의 품에 안겼다. 그 바람에 그는 그만 우산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내팽개쳐진 우산이 횡단보도 위에서 노릇노릇 익어가기 시작했다. 허약해진 그의 몸에 그녀의 무게가 온전하게 느껴졌다. 밀도가 낮아진 그의 골격이 두 사람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길바닥에 철퍼덕 쓰러지고 말았다.
“잘렸어요, 나. 결국 내 쪽에서 먼저 사표를 쓰기는 했지만, 아무튼 잘린 거예요. 그러니까 책임져요.”
“네?”
“삼겹살을 먹이든 풀을 먹이든 나 먹여 살리라구요.”
길 건너던 사람들이, 비 내리는 길바닥에서 노릇노릇 익어가는 두 사람을 보면서 히죽거리는 것 같았다. 그는 그 말이 은경 씨의 머릿속을 반년이나 둥둥 떠다니다 어렵게 어렵게 나온 말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생략된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도 알 것 같았다. 그때서야 그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그녀를 꼭 안아줄 수 있었다.
퇴근길에 그들은 삼겹살과 갈매기살 7인분을 해치웠다.
mirror
댓글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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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ama 07.12.01 11:55 댓글 수정 삭제
    삼겹살!!! 맛있게 봤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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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자 07.12.01 20:42 댓글 수정 삭제
    민요라니..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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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7.12.02 21:38 댓글 수정 삭제
    네. 맛있게 보세요.
    민요도... 얼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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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자 07.12.03 22:14 댓글 수정 삭제
    근데 왜케 미묘씁쓸?한 여운이 남는지, 상황상황이 참..
    마냥 맛있게 뒤집히진 않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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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7.12.04 16:27 댓글 수정 삭제
    수상한 시절이다보니. 뭐, 그러네요. 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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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kholic 07.12.04 22:05 댓글 수정 삭제
    마음의 포옹이 느껴지는군요.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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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7.12.05 17:48 댓글 수정 삭제
    오랜만에 나타나셨군요. 그 일은 잘 마무리하셨는지. 학기 끝나면 곧 글 들고 나타나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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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 07.12.09 09:11 댓글 수정 삭제
    즐겁게 읽었습니다. 그렇지만 거울의 다른 모 작가께서 쓰셨다고 하면 더 어울릴 것 같아요. 결말에서 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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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7.12.09 19:46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그런데 모 작가는 누구신지. 표절의혹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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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a 07.12.11 22:10 댓글 수정 삭제
    모 작가가 누구지? 하는 2인과
    우주에서 삼겹살 굽는 법을 심각하게 고민한 1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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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a 08.02.09 03:38 댓글 수정 삭제
    삼겹살 말인데요. 납작하고 뚜껑이 있는 후라이팬을 쓰면 되지 않을까요. (아직도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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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8.02.09 10:47 댓글 수정 삭제
    네. 아마 될 것 같아요. 육즙을 효과적으로 보존할 수 있는 이상적인 여건일지도... 아직도 생각하고 계셨다니... 긴 여운을 주는 글이었나보네요. 이상한 방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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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티 08.03.24 16:15 댓글 수정 삭제
    삼겹살 맛있어요. 아무튼 애정 만세.
    잘 읽었습니다.
    판타스틱에 실렸던 배명훈 작가님 단편과 연계된 내용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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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s 10.01.06 21:26 댓글 수정 삭제
    그렇군요.. 왠지 지금 삼겹살이랑 소주마실 수 있는 저의 근로 환경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주시네요^^ 재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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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ndashy 10.07.18 00:17 댓글 수정 삭제
    우주선에서 삼겹살 굽는 것은 열량문제 때문에 힘듭니다. 그 삼겹살을 굽기위해 사용한 열량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우주선 내부는 외부와의 기온차를 없애기 위해서(더운 경우 수백도, 추운 경우 켈빈온도 4도 근처 까지) 내열재를 사용하고 있을 텐데.
    그리고 삼겹살을 굽고 나서 발생하는 냄새는? 무중력 공간에서는 확산현상이 쉽게 일어나지 않지요...

    결과적으로 우주에서 삼겹살을 먹고 싶다면 냉동상태로 보관되어 있던 이미 조리된 삼겹살을 전기를 사용하는 가열기구에(이 가열기구는 방 밖에 있어야 겠지요) 녹여서 먹는 것을 제외하고서는 힘들 겁니다.

    굳이 말씀드리자면 앞으로 우주 요리 기술이 발전하게 되면 근본적으로 "삼겹살은 철판 위에서 구워야 한다"라는 명제 자체가 존속하지 않게 되리라고 봅니다. 철판에서 구울 필요가 없어지면 삼겹살을 우주에서 먹지 못할 이유는 없게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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