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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 어둠 속을 나아가는 고통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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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U.J. 진, 황문경 옮김, 카나페, 1993년 12월


필자는 2000년대 초반, 환상소설 혹은 사변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이른바 고급스러운 장르소설을 하나로 뭉뚱그리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다. 겉으로는 非리얼리즘 소설, 反문단소설의 집합을 표방했지만 사실 속을 들여다보면 고딕소설, 외국 판타지소설, 과학소설, 일부 공포소설에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환상소설(마술적 사실주의라 불리는 작품군)까지 다 아우르는 지나치게 폭이 넓은 집합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톨킨과 러브크래프트와 보르헤스라는, 서로 연관을 찾기 힘든 작가들을 하나의 문예사조로 합치려는 셈이었다. 교집합이 거의 없는 복수의 집합이니 그저 작가와 작품의 목록 나열에 그칠 뿐이었다.

결국 문단에 대한 인정투쟁 혹은 ‘좋은 것은 다 내 편’이라는 이기주의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고 이내 포기하긴 했으나, 1990년대 말 PC통신에서 출발하여 종이책으로 판타지소설이 쏟아져 나오던 시절부터 통신망과 인터넷을 거치며 장르소설의 부흥에 따라 역사를 되짚어보고 좋은 작품을 모아보려는 시도는 여럿 존재했다. 장르소설을 다룬 무크지가 나오거나 거의 처음으로 메이저 문예지에서 장르소설 특집을 다룬 것도 2000년대 초중반의 일이다.

이 무렵 웹진 워터가이드나 SF Readers 위키 등에서 속칭 추천 판타지 또는 SF 목록이 몇몇 존재했다. 그중 판타지 소설 사이트 라다가스트의 자유게시판에 ID 촌놈뽕개가 작성한 추천 리스트에 본작이 포함되었다. 더 유명한 벌거지 리스트(PC통신 시절부터 SF,판타지 팬덤에서 활동한 ID 벌거지가 작성한 환상소설 리스트), 복거일 리스트(『복거일의 세계환상소설사전』에 언급된 작품 목록) 등에도 포함되지 않을 정도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유는 출판사가 문을 닫았는지 출간 직후 절판되어 서점에는 제대로 유통되지 않았고 헌책방에 가끔 보이다 자취를 감춰버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본작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처음 언급했던, 거의 찾기 힘든 교집합에 속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장르 판타지와 포스트모더니즘 환상소설이 결합하는 위치에 바로 이 소설이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이야기인지, 초반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한 청년이 어두운 복도를 헤매고 있다. 판타지 장르에서 던전이라고 부르는 지하공간을 나아가던 청년은 어느 복도 끝에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간다. 감옥으로 보이는 방 안에는 백발이 성성하고 비쩍 마른 노인이 죽을 날만 기다리듯 누워 있었다. 청년이 가진 물과 음식을 나눠주고 보살피자 노인은 일어나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기운을 되찾는다. 왜 던전에 오게 되었냐는 노인의 물음에 대답하면서 이야기는 청년의 과거로 돌아간다.

청년은 휴화산 밑에 있는 도시에서 나고 자랐다. 화산암에 둘러싸여 외부와 단절된 이 도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사가 다스리고 있는데, 그는 새해가 되면 앞으로 일 년 동안 도시에서 일어날 수많은 일을 예언하고 이를 공표한다. 주민들 사이에서 마법사의 예언은 자연의 법칙처럼 늘 당연히 옳다고 여겨지고 있는데, 왜냐하면 모든 주민이 그의 예언에 따라 살아가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누군가 예언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면 예언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그가 예언을 잘못 해석하고 대처한 것이기 때문에 큰 벌을 받았다. 바로 누구도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지하감옥으로 보내지는 형벌이다.

마법사는 『동굴의 여왕』의 아샤처럼 종교적인 숭배와 정치적인 권력을 동시에 행사하는 신권일치의 제왕이며, 주민들은 『해리슨 버저론』의 평등한 시민처럼 마법사가 재배법을 가르쳐준 마법의 연초를 피우며 멍한 행복함을 느끼는 대신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다.

이렇듯 예언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기에 주민들은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배우처럼 행동한다. 청년의 동생은 마법사가 예언한 미래를 실현시키기 위해 예언된 날짜에 아버지를 살해한다. 그래야 유산을 독차지할 수 있다는 예언 덕분에 망설임은 없었다. 아버지를 잃고 유산마저 다 빼앗긴 청년은 복수하고 싶었지만 마법사가 그런 일을 예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결국 동생을 해치지 못한다.

청년은 마법사의 궁전을 찾아가 내년 예언에 자신의 복수가 포함되어 있는지를 물어보려 하지만 만나지 못하고 쫓겨난다. 이에 불만을 품은 청년은 검으로 동생을 찔러 죽이게 되고, 예언에 없는 살인이 발생하자 붙잡혀 마법사 앞으로 끌려오게 된다. 사람들은 당혹스러워하며 청년을 비난했고 그 역시 책임을 통감하며 순순히 지하감옥에 들어간다.

청년의 사연을 들은 노인은 사실을 알려주겠다며 이렇게 말한다. 자신은 마법사를 잘 알고 있으며, 그의 예언은 아무런 마법도 담기지 않은 단순한 거짓말에 불과하다고. 마법사가 키워서 보급한 마법의 연초를 습관처럼 피운 도시 주민들은 지능과 상상력이 감퇴되어 그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직업이 뭐냐는 노인의 질문에 청년은 도시의 작물을 멀리 해안 도시로 가져가 물고기나 생필품과 바꾸는 교역을 하고 있다고 대답하고, 이에 노인은 청년이 도시 바깥으로 자주 나가 연초를 덜 피웠기에 마법사의 세뇌가 약해져 예언을 거부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해가 뜨고 지듯 예언을 당연하게 여겼던 청년은 충격을 받았고, 정교하고 확실하게 정해진 줄 알았던 미래가 사실은 불확실한 혼돈임을 깨달아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청년은 출구가 있다는 노인의 말에 따라 함께 지하미궁을 탐색한다.


이후 소설은 청년과 노인이 어둡고 복잡한 던전을 헤매며 나누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본작은 인물과 배경 같은 전통적인 요소조차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다루고 있다. 등장인물은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고 청년, 노인, 마법사, 아버지, 동생 등으로만 지칭된다. 외모 역시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으며 특히 마법사는 가면과 로브로 온몸을 감싸고 있어 인종, 성별, 나이 등의 요소를 전혀 알 수 없다.

배경 역시 중세 판타지 장르의 클리셰를 따르는 세계임을 짐작할 수 있을 뿐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정보는 나오지 않는다. 애초에 등장무대는 어둡고 긴 복도로 이루어진 던전이 전부고 도시는 주인공의 회상 속에서 추상적인 설명으로만 등장할 뿐이다.

소설의 세 요소 중에서 사건 또한 대화로만 표현할 뿐이고 겉으로 드러난 사건은 노인과 청년이 던전을 헤맨다는 것밖에 없다. 나머지는 모두 둘의 대화뿐이다. 상세한 설명 없이 무작정 던전을 헤매는 부분은 제목도 흡사한 단편 「던전」(단편집 『윈드 드리머』 수록)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나마 본작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제목으로 쓰일 정도로 비중이 큰 던전밖에 없는 듯한데, 이 던전은 RPG게임이나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미로 같은 지하구조물을 가리키는 의미 그대로 쓰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게이머나 독자가 기대되는 면모를 보여주지 않는다. 몬스터의 등장과 전투, 숨겨진 보물, 출구의 발견 같은 요소 말이다.

대신 소설 속 던전은 그저 출구 없는 답답한 고통의 연속일 뿐이다. 미노타우로스의 궁전처럼 목적지로 향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시련도 아니고 『아투안의 무덤』처럼 지상으로의 회귀를 위해 성장통처럼 겪는 통과의례도 아니다. 그저 절망과 불안의 나락이요 숙명처럼 돌리는 쳇바퀴다.

주인공과 노인은 마치 나무의 주위를 맴돌면서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눈에 찍힌 자신의 발자국을 낯선 타인의 것으로 여기는 곰돌이 푸와 피글렛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나마 가장 흥미롭고 인상 깊은 부분은 주인공이 허기와 갈증에 시달리다 처음에는 보기만 해도 기겁했던 벌레를 잡아먹고 갈증이 심해지자 바닥에 고인 썩은 물을 핥아 먹는 장면이다. 주인공은 노인과 자유의지와 운명에 대한 고상하고 철학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벌레를 씹고 더러운 물을 마신다. 그 모습은 어쩐지 오늘날, 철학이나 문학 같은 ‘돈 안 되는’ 학문에 매진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한 웃음이 나온다.

그래서 판타지 소설로 보았을 때는 무척이나 지루한 소설이다. 살인과 복수 같은 강렬한 사건과 갈등이 벌어지는 초반부의 회상을 제외하면 거의 두 사람이 걷다가 대화를 나누고, 다시 걷다가 대화를 나누는 식으로 이어진다. 가끔 몬스터가 튀어나오지만 호쾌한 전투를 기대하면 실망할 뿐이다. 둘은 숨거나 도망치는 데 급급하고 싸움이래 봐야 둘이서 힘을 모아 커다란 박쥐 한 마리를 간신히 물리치는 식으로 힘겹게 목숨을 부지한다.

처음부터 작가의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장르소설의 전통적인 요소, 즉 독특한 인물이 독특한 장소에서 욕망이나 목적으로 인해 행동을 하고 그로 인해 갈등과 위기를 겪은 후 해결에 이른다는 구조를 부차적인 문제로 미루어버리고 그 자리를 주제의식과 사변으로 채우려는 것이다.


여러 부분에서 소설보다는 희곡에 더 걸맞은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둡고 좁은 복도, 가도 가도 같은 곳을 되풀이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미로야말로 연극무대와 같이 한정된 장소에서도 표현하기 좋은 배경설정일 것이고, 긴 대화도 배우의 적절한 연기가 뒷받침된다면 좀 더 긴장을 고조시키고 관객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테니까.

이를 감안하면 소설의 한계를 감추기는커녕 스스로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본작이 중요해진다는 아이러니가 생긴다. 왜냐하면 본작의 테마는 곧 소설 자체에 대한 안티테제와도 같기 때문이다. 소설이란 이미 일어난 사건을 기술한 기록이기 때문에 소설 속 등장인물의 입장에서 보면 미래가 정해진 예언서와 같다. 본작의 등장인물은 바로 그런 예언을 비판하며 소설의 등장인물이기를 거부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소설이라고 직접 언급하지는 않아도 독자는 메타픽션으로 읽게 된다. 이런 테마는 결말을 통해 더욱 강조된다.

어두운 복도 끝에 감옥이 있었다. 반쯤 열린 쇠창살 문 안으로 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에 대해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아니라는 사실 뿐이었다.
─ 소설의 처음이자 마지막의 동일한 세 문장.

마지막에 이르면 주인공은 어느 긴 복도 끝에 있는 감옥을 발견한다. 그 안에는 어떤 사람이 처음에 만난 노인처럼 누워있다. 그리고 소설은 거기에서 끝난다. 이전에 만났던 노인일지도 모르고 도시를 지배하던 마법사일지도 모르고 단순히 전혀 다른 인물일지도 모르지만 아무런 단서가 주어지지 않는다.

결말에 이르기 이전, 역시 합당한 설명 없이 노인이 사라지고 주인공은 이에 대해 의문도 품지 않은 채 마치 처음부터 혼자였던 것처럼 행동하기에 독자는 자연히 이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다. 주인공이 도달한 곳은 이 소설이 시작된 지점, 노인과 처음 만났던 순간으로 되돌아갔다고. 소설의 마지막과 처음 세 문장이 동일한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해석하면 이 소설은 끝나는 동시에 시작되는, 영원히 순환하는 구조로 해석할 수 있다. 예언자가 정해놓은 미래를 따라 살듯이 주인공은 정해진 텍스트 안에 갇힌 채 영원히 소설에 쓰인 미래를 반복하여 살아야 하는 운명인 것이다.

반복과 순환이라는 모티브는 굳이 시시포스나 우로보로스를 들먹이지 않아도 좋을 만큼 수많은 신화와 전설에서 되풀이되었다. 운명과 불확실성을 다루는 본작의 테마에는 잘 맞는 결말일지 몰라도 독자는 실망과 허탈함을 느낄 우려가 크다. 길고 복잡한 미로를 헤맨 결과가 고작 출발지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라니. 보르헤스는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을 보여주었지만, 이 소설에서의 길은 오직 하나요 그 끝은 처음과 이어진다. 불교의 윤회라기보다 우로보로스의 폐쇄적 순환에 가까운 이 구조는 미래에 대한 희망의 부재를 말하는 운명론적인, 패배주의적인 상징인 듯하다.

결말에 대해서는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굳이 주인공이 ‘저 노인은 내가 아니다’라고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역설적으로 독자에게는 이런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노인은 바로 주인공의 미래 모습이 아닐까, 그가 언젠가는 저 노인이 되지 않을까, 라는. 실제로 작중에서 주인공은 끝없는 복도를 걸으며 자신도 노인처럼 될지도 모른다고 몇 번이나 푸념하고 우려한다. 만약 이 처음과 끝이 같은 소설처럼 영원히 그의 삶이 반복된다면 언젠가는 늙어서 지쳐 쓰러질 테고, 새로운 주인공이 찾아와 노인이 된 그와 대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본작은 보르헤스로부터 영향받은 미로의식과 형이상학적 주제에 포스트모더니즘의 불확실성과 혼돈을 테마로 하되 겉으로는 장르 판타지를 표방하면서 연극적인 구조를 띠고 있는 독특한 판타지 소설이다. 독자는 소설이 안내하는 길고 어두운 통로를 걸으며 고뇌하게 될 것이다. 미래는 정해져 있는가? 있다면 이를 바꿀 수 있을까? 미래는 의지와 선택으로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그런 생각조차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일까?

처음과 끝이 같아 영원히 순환하는 소설 속 구조에 갇힌 채로 등장인물과 독자는 함께 고뇌에 빠지게 된다. 이런 미래의 불확실성, 숙명론과 자유의지, 신에 대한 불신 같은 관념적인 대화가 이루어지는 장소는 대화의 주제와 마찬가지로 출구를 알 수 없는 어두운 던전 속이다. 새로운 인물이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사건을 겪는다는 환상소설의 밝은 위상과 대조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본작은 한 마디로 환상소설의 어둠을 탐색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환상성은 신비한 세계를 헤쳐나가는 외연적 확장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깊고 음침한 통로를 나아가며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 눈치채지 못한 분을 위한 뒤늦은 일러두기
이 글은 허구의 소설에 대한 비평을 쓴 소설입니다.


(2004.01.24. / 2019.02.05. 개작)

댓글 4
  • 너울 19.03.01 01:32 댓글

    헉... 너무 좋아하는 스타일의 글이라 정신없이 읽었습니다. 거울에서 본 많은 글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 너울님께
    글쓴이 pilza2 19.03.01 02:06 댓글

    제가 늘 쓰는 리뷰의 스타일인데요^^; 마음에 드셨다니 기쁩니다.

  • pilza2님께
    너울 19.03.01 12:19 댓글

    그, 없는 소설에 대한 비평이란 스타일이 너무 좋았어요. 내용 자체가 보르헤스랑 크게 닿아 있고요.

  • No Profile
    쁘로프박사 19.03.01 09:10 댓글

    읽기 전에 첫 문단만 보고 책에 대해 검색하러 갔다가 나오는 자료가 없는 걸 보고 너무 옛날 책이라 누락되었나? 이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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